출처 - 프레시안 2008-07-16 오후 5:18:52

산업혁명과 비유럽세계의 탈산업화 ②
영국 산업혁명의 요인들 (1)

외부적, 내부적 요인
 
  산업혁명이 이렇게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므로 사람들이 그 원인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특히 그것이 가장 먼저 시작된 영국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한 원인에 대해 온갖 주장들이 제기된다.
 
  섬나라라서 외침을 받지 않은 영국의 지리적 이점, 석탄이나 철 등 풍부한 부존자원, 기술적 창조성이나 교육 같은 사회제도, 또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민주적인 정치질서, 풍부한 노동력과 자본 조달의 용이성, 해외무역 등 수없이 많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1850년경 영국의 산업지도. 검은 회색 부분이 노천탄광 지역으로 공업지역이 대체로 이 부분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석탄이 지표에서 얕게 묻혀 있다는 것이 산업혁명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철광산과 탄광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도 중요했다.

  물론 이런 여러 요소들이 조금씩은 다 관련이 있겠으나 문제는 결정적인 요소이다. 이 문제에서는 내부적인 요인과 외부적인 요인에 어떤 비중을 두느냐가 가장 중요한 논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과거의 학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영국의 아놀드 토인비이다. 그는 <역사의 연구>라는 책을 써서 대중적으로 매우 유명한 역사가인 아놀드 토인비의 삼촌으로 1884년부터 '산업혁명강의'를 시작했다. 그도 19세기 말에는 영국에서 꽤 유명한 경제사학자였다.
 
  그는 산업혁명의 내, 외부적 요인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지는 않았으나 외부적인 요인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듯이 보인다. 농업혁명을 이야기하고는 있으나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그것이 과연 산업혁명이 기초가 되었을지는 의심스럽다.
 
  반면 해외무역의 급증에는 큰 관심을 보인다. 그 가운데서도 1760년에 수출의 1/3을 차지한 식민지 무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 1770년에 맨체스터에서 생산한 공산품의 3/4이 아메리카로 갔다고 말하는 데에서도 새로운 산업이 해외시장을 기반으로 성장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거의 같은 시기의
윌리엄 커닝햄도 산업혁명의 주된 원인은 해외무역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산업발전에 있어 발명과 기술 혁신의 중요성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해외시장의 성장과, 자본을 원활하게 공급한 금융의 발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20세기에 들어온 이후 산업혁명에 관한 최초의 권위 있는 연구자인 뽈 망뚜도 해외무역을 중심에 놓았다. 그는 산업과 무역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며 무역이 없었으면 산업의 주된 변화도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의 미국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경향은 1940년대까지 유지되었다. 18세기말에 아담 스미스도 무역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해외부문의 중요성은 18세기부터 영국인이 계속 인식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 해방과 내부적 요인의 강조
 
  그런데 1950년대에 들어와 사정이 달라졌다. 외부적인 요인보다 내부적인 요인이 더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50년대 이후 식민지 해방운동이 본격화되며 제3세계로부터 비난의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이다. 제3세계의 학자들이 유럽의 부는 유럽인들이 특별히 뛰어나서가 아니라 식민지를 착취한 결과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사실 경제발전을 일찍 이룬 유럽의 중요한 국가들이 거의 식민지들을 갖고 있었으니 그 개연성을 아주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제 서양 역사가들은 산업혁명이 식민지 착취의 결과가 아니라 유럽 내부적인 여러 요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국내요인에 의한 자본의 축적, 낮은 이자율, 농업생산성의 증가, 인구의 급증, 산업발전에 유리한 사회경제적ㆍ정치적 구조 변화, 교육과 과학지식의 발전, 기술혁신, 풍부한 지하자원 등의 온갖 요인들을 열거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국내 수요의 증가이다. 국내의 경제발전이 수요를 팽창시키지 않았다면 산업혁명으로 인해 급격히 늘어나는 공급을 해소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국도 산업혁명 이전에는 기본적으로 농업국가였으므로 농업부문의 변화에 중점이 두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1680-1750년 사이 잉글랜드에서의 농업생산성 증대가 논의의 초점이 되었다. 농업이 발전하고 생산성이 높아지며 국내 시장을 팽창시킴으로써 산업화의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들은 농업사를 진보의 관점에서 보았다. 영국 농업은 근대에 들어와 지속적으로 성장했고 그것이 산업화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기초를 놓은 사람은 1912년에 <16세기의 농업문제>라는 유명한 책을 쓴 R.H.토니이나 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하여 토지의 보다 집약적인 이용, 농업생산성의 지속적인 증가, 이에 따른 농산물가의 하락, 실질임금의 증가가 대중적인 수요를 확대했고 특히 중산층 소득의 일반적인 증가가 소비재 수요를 확대시켰다고 주장되었다.
 
  농업의 중요성을 가장 대중적으로 설파한 사람들은 필리스 딘과 W.A.콜이다. 이들은 1962년의 <영국경제성장 1688-1959>에서 이런 논의를 일반화했다. 해외무역도 18세기에 국내시장보다 더 빠르게 성장하기는 했으나 국내 수요가 결정적이라고 주장하며 논리를 더 정교하게 다듬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뉴커먼의 증기기관(1717). 광산에서 물을 퍼내는데 사용한 이 증기기관은 중요한 기술혁신을 보여주나 에너지 효율은 1%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석탄이 많은 탄광지역에서만 사용되었다.

  과학과 기술의 자율적인 발전도 내적 요인에 초점을 맞춘 설명에서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한다. 데이비드 랜디스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로 이들은 기술적 혁신이 산업혁명을 만든 모든 기회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즉 잉글랜드의 산업혁명은 18세기 말의 우연적인 기술발전의 산물로 나타난다. 기술발전으로 생산비용이 절감되며 해외시장을 하나하나 장악하게 되었고 이것은 마침내 영국이 세계의 공장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해외 수출의 확대는 기술혁신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가 된다.

출처 - 프레시안

산업혁명과 비유럽세계의 탈산업화 ① 
산업혁명이란 무엇인가


산업혁명이란
 
  산업혁명은 보통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 영국에서 처음 시작된 급격한 산업생산력의 증대를 의미한다. 증기기관이라는 새로운 동력과 기계가 결합하며 그 전에는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온 것이다.
 
  18세기까지도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양은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사람이나 가축의 힘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그것은 식량이나 사료를 제대로 조달하지 못하면 유지될 수 없었다. 무한정한 확대는 불가능했다.
 
  풍력이나 수력도 이용할 수는 있었으나 그것은 장소의 제한을 받았다. 풍력은 바람이 많이 부는 지역에서나 가능했고 수력은 수량도 많고 개울물의 낙차가 커야 이용할 수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수력을 이용하는 물레방아 (18세기 프랑스)

  또 연료로 사용하는 나무도 쉽게 고갈되었으므로 함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유럽의 많은 대장간들은 근대 이전에 일년 중 몇 개월밖에 가동을 못했는데 그것은 쇠를 녹이려고 해도 숯을 생산할 나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업활동에 원천적인 제약이 가해졌다.
 
  그런 점에서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는 증기기관의 발전과 새로운 기계의 결합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석탄만 있으면 필요한 곳 어디서든지 동력을 만들어내어 공장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초기의 공장들은 오늘날 같지 않아서 여러 대의 기계들이 굴대와 벨트를 통해 증기기관과 복잡하게 연결되어 돌아가는 소음과 먼지가 가득한 곳이었지만 새로운 형태의 공장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18세기 말 면직공장의 모습. 여러 대의 방직기들이 증기기관과 연결된 굴대(천정에 붙어 있는)와 벨트로 연결되어 구동된다.

  1851년에 영국 런던의 하이드파크에서는 만국박람회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철골로 뼈대를 만들고 유리로 지붕을 씌워 오늘날의 대형 온실과 같은 모양을 한 전시실들에는 처음으로 산업혁명을 완수한 영국이 그 동안 발명한 대규모의 기계들을 포함하여 온갖 공산품들이 자랑스럽게 전시되었다.
 
  영국인들은 이것을 구경하기 위해 막 개통된 철도를 이용하여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동안에 영국이 이룩한 성과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많은 외국인들도 이를 구경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의 크리스탈 팰리스.

  1780년대에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1830년대에는 인접한 벨기에와 프랑스로 퍼지고, 1850년대에는 독일, 1860년대에는 남북전쟁을 끝낸 미국으로도 확산되었다. 일본과 러시아는 뒤늦게 1890년대에 이에 합세하며 점차 전 세계가 그 물결에 휩싸이게 되었다.
 
  산업혁명에 의해 가능해진 거대한 생산력은 국가들의 힘까지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유럽의 변두리에 있는 조그만 섬나라인 영국은 이제 산업혁명을 통해 세계 최강대국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러시아 같은 전통적인 유럽 강대국도 자기혁신을 하지 못하면 낙후하게 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1860년대에 농노해방을 비롯한 대대적인 정치, 사회개혁에 나섰다. 반면 제대로 산업화의 길로 들어서지 못한 인도, 중국, 튀르크 같은 아시아의 대국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산업혁명은 세계사적으로 큰 변화를 만들어냈고 이것이 서양이 중심이 되는 오늘날의 세계를 만든 근본적인 힘이다. 19세기 말에 등장한 제국주의는 바로 그 현격한 힘의 차이를 국제정치에 투사한 결과물인 것이다.
 
  산업혁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
 
  산업혁명이 서양 중심의 세계를 만들어 냈으니 서양인들이 이에 대해 갖는 시각은 우호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것이 인류의 물질적 생산능력을 크게 확장함으로써 현대 자본주의 문명의 기초를 만들었다고 믿는다.
 
  좌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비판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 맑스는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공장제도가 가져오는 노동착취 등 비인간화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그것이 생산력을 크게 확대하여 인간의 삶을 풍요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대체로 이런 태도를
  따르고 있다.
 
  서양학자들은 산업혁명의 원인을 위대한 발명가들, 앞선 과학기술, 선행 운동으로서의 농업혁명, 축적된 자본 등에서 찾는다. 그들은 또 산업혁명을 통한 이 시기의 자본주의적 경제발전과 그에 따른 유럽의 흥기를 서유럽의 효율적인 경제조직, 제도적 변화, 재산권의 발전, 자본주의에 우호적인 독특한 정신문화 속에서도 찾는다.
 
  산업혁명을 위해서는 물질적인 조건 만이 아니라 정신적, 문화적 조건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업혁명은 유럽에서만 발전할 수 있었고 그 원인도 유럽 내부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고 믿는다.
 
  '지난 2세기 동안 기술적 변화와 산업발전을 위한 문화적 조건은 서유럽에만 있었다'라는 주장이나 '산업혁명은 기본적으로 사회-문화적 현상으로 단순히 기술혁명은 아니다. 그것은 산업화한 최초의 나라들이 영국과 문화적, 사회적으로 매우 닮은 나라라는 것을 보면 확실하다'라는 말은 이런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도 여기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는다. 가장 대표적인 서양사 개설책의 하나를 보면 그것을 프랑스혁명과 함께 유럽 근대사회 확립의 가장 중요한 계기로 보고 있고 그것이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과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유럽에서 일어난 이러한 생산력의 비약적인 증대가 인류의 삶에 긍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또 산업혁명의 원인으로는 18세기에 서유럽은 지구상의 어느 지역보다 부유했고, 초기 형태이지만 자본주의가 발전했으며, 상공업자와 금융업자 등 기업가 계층이 전례 없는 사회적, 정치적 활력을 갖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며, 르네상스 이래 싹튼 사물에 대한 합리적 태도와 사회 및 자연환경에 대한 무한한 통제 및 지배 욕구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또 17세기 후반 이후 영국에서의 농업혁명도 중요하다. 그러니까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은 위에서 말한 온갖 좋은 조건이 다 갖추어져 자연스럽게 가능했던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에는 오류도 포함되어 있으나 문제는 부분적인 오류가 아니라 이런 주장의 배후에 있는 잘못된 인식체계이다. 그런 주장이 유럽에는 여러 좋은 조건들이 있어서 산업혁명이 가능했고 비유럽지역에는 그런 것이 결여되어 있어 불가능했다는 이분법적, 결정론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인식은 당연히 유럽을 우러러 보고 비유럽세계를 폄하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산업혁명이 그런 시각으로는 절대로 잘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럽인의 과학적 사고, 기계의 발명, 경제조직이나 제도의 변화, 농업혁명 등 유럽 내부적인 요인만으로 결코 설명할 수 없다.
 
  여기에서 빠진 것은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한 정치·군사적인 요인들, 원료 조달의 문제, 물건을 내다 팔 시장 같은 것의 문제이다. 이런 것들이 오히려 더 본질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당연히 비유럽세계와의 관련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산업혁명은 영국과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해도 눈을 세계사적인 차원으로 돌리지 않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의 약탈과 노동착취, 그리고 비유럽세계의 탈산업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산업혁명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면직산업이 기초를 마련하고 성장해 가는 과정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먼저 영국 산업혁명의 요인에 대한 논쟁부터 간단히 살펴보자.

출처 - 프레시안

프랑스 혁명과 세계사 ⑩ 
세계사 속의 프랑스 혁명

맑스주의적 해석의 한계
 
  프랑스 혁명이 세계사적 사건이 된 것은 맑스주의적 해석 때문이다. 봉건적 생산양식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이 프랑스혁명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이 근대사를 여는 시발점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오늘날 맑스주의 해석의 많은 문제점은 사실 맑스 자신에게 귀착된다. 맑스 자신이 프랑스 혁명을 제대로 연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귀조 같은 19세기 초 프랑스 역사가로부터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개념을 빌려 왔는데 그 생각의 근원은 사실 시이에스와 바르나브 같은 혁명가들이다.
 
  그러므로 맑스가 부르주아 혁명에 대해 여기저기에서 단편적으로 말한 것을 마치 불변의 진리처럼 받아들이는 데서 근본적인 문제점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봉건제, 자본주의 같은 중요한 개념에서 다 마찬가지이다.
 
  맑스주의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부르주아지의 개념에 대한 의견차이는 크다. P.빌라르 같은 사람은 부르주아지를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프롤레타리아의 노동력을 사용하고 그 잉여가치를 수취하는 사람들로 본다. 가장 맑스주의 이론에 충실한 주장으로 소불도 대체로 이에 동조한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를 이렇게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자본가와 비슷하게 규정하면 혁명을 부르주아혁명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르페브르는 이에 귀족과 도시의 임금 노동자를 제외하고, 자본가는 물론 중산층, 소시민층까지 포함시킨다. 심지어 농촌 부르주아지라는 개념까지도 사용한다. E.라부르스나 R.로뱅의 개념도 차이는 있으나 크게는 비슷하다. 그러나 이렇게 부르주아지를 폭 넓게 규정할 때 이들 사이에 공동의 이해관계나 동질적인 계급의식이 있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또 앞에서 보았듯이 맑스주의 역사가들은 18세기 말의 봉건제를 크게 과장했다. 그래야 그것을 타파한 부르주아 혁명이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일부는 그렇지 않으나 대부분의 맑스주의 역사가들은 혁명기에 산업 자본주의가 매우 미성숙한 단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맑스주의 도식에서 자본주의가 차지하는 위치 때문에 그 개념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래서 R.로뱅은 그 관계를 '전국적인 규모의 시장형성과 자유계약의 성립에 대한 경제적, 법적, 정치적 장애물들을 제거함으로써 장기적으로 볼 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일반화를 가능하게 했다'고 설정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영국에서는 산업자본주의가 이미 상당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니 프랑스에서 이렇게 제도적 장애물을 일부 제거한 것을 갖고 혁명이 자본주의를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요사이 새로이 맑스주의적 해석을 복권하려는 시도를 하여 신맑스주의자로 불리는 조지 콤니넬 같은 사람의 견해는 매우 유연하다. 그는 1789년 이전에 근대적 자본주의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존재하지도 않는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착취가 있을 수도 없었고, 농민에 대한 봉건적 착취도 없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봉건제는 속류 맑스주의 역사가들이 만든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 구체제하에서의 계급투쟁은 국가로부터 얻어 낼 수 있는 전리품을 둘러싼 부르주아와 귀족 사이의 투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의 주장에서 맑스주의적 수사를 제거하면 앞에서 말한 루카스의 주장과 별로 다를 바 없다.
 
  이렇게 전통적인 맑스주의적 해석이 많은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도외시한 교조적 해석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맑스주의적 해석이 거의 다 무너진 상황에서 그것이 강조해왔던 프랑스혁명의 세계사적 위치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것
 
  그러면 프랑스 혁명의 성취는 무엇이고 그 한계는 무엇일까? 프랑스 혁명은 정치적인 면에서 가장 큰 성과를 이뤘다. 헌법과 대의제도, 공화주의를 실현시킴으로써 이제 더 이상 왕이 제멋대로 하는 전제정치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19세기의 유럽이 헌법과 의회를 요구하는 자유주의시대가 된 이유이다.
 
  프랑스의 정치 문화도 일대 변화를 겪었다. 수많은 대중들이 직접 정치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투표를 하고 정치조직에 가담하고 정치적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해 싸웠다. 언론의 자유와 공공여론은 나폴레옹의 독재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질식하지는 않았다. 그 결과 프랑스에서 혁명은 전통이 되었고 혁명기에 만들어진 공화파와 보수파 사이의 간극은 19세기 내내 정치적 불안정을 가져오는 주된 요인이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자본주의를 확립하거나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물론이지만 오히려 그것을 지연시켰다. 정치적 혼란이 경제적 후퇴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농촌에서는 영주제의 해체를 통해 많은 농민들의 법적 신분이 변화했고 일부 운 좋은 사람들은 토지를 얻게 되었으나 농민들 대부분의 생활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들의 생활양식이나 사고방식이 변화하지는 않았다.
 
  사회적 차원에서도 급진성을 찾기는 힘들다. 귀족제ㆍ영주제의 폐지, 관직매매 금지, 법 앞의 평등, 능력에 따른 관직 임명의 확립이 표면적으로는 지배 엘리트의 변화를 가져왔을 것 같이 생각되나 혁명의 소란이 가라앉고 나자 별 변화가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혁명기를 살아남았고 나폴레옹 시대에 다시 힘을 되찾았다. 이들은 나폴레옹 시대에 발전한 관료제를 통해 일부 부르주아 계급과 결합하여 새로운 지배 엘리트인 명사층을 형성했다.
 
  물론 19세기의 프랑스가 과거보다 더 개방적이고 유동적인 사회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부와 교육, 가족관계, 지역에서의 영향력, 정치적 힘으로 얽혀진 이들이 19세기 내내 프랑스를 지배했다.
 
  문화적으로도 일부 변화는 있었으나 본질적인 변화는 없다. 카톨릭교회는 다시 프랑스인 다수의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구체제에서와 같이 더 이상 부나 특권, 존경을 누릴 수는 없게 되었고 다른 소수종파들을 인정해야 했고 교육이나 호적 사무 같은 세속적인 업무에서는 손을 떼야 했다.
 
  행정개혁과 중앙집권화는 혁명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고 그것이 궤도에 오르는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그럼에도 혁명기와 나폴레옹기를 통해 보다 합리적이고 집권적인 근대국가를 만드는 데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황제가 된 나폴레옹(1804)

  프랑스어의 통일도 구체제시기에 시작되었으나 혁명기에 본격화했다. 혁명기에 법의 통일작업이 이루어졌고 그것은 나폴레옹 법전 속에서 구체화했다. 화폐도 하나로 통일되었고 미터법은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그 후 다른 많은 나라로 확산되었다. 이런 것들은 근대적인 문화를 만드는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나폴레옹 법전(1804)

  여기에서 하나 더 언급해야 할 것은 혁명이 후대에 미친 영향만이 아니라 당시대인에게 미친 고통이다. 1792-1815년 사이의 폭동과 전쟁으로 약 2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혁명가들은 인권선언을 발포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 반혁명 혐의자를 제멋대로 체포하고 구금하기 시작했다. 공포정치 시기에는 약 3만 명이 공개 처형되었고 1794년에 공화국이 수감한 죄수의 숫자는 40만 명 이상에 달했다.
 
  흉년, 정치적 혼란, 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 아시냐 지폐의 가치는 1789년에서 1796년 사이에 1/3,000로 하락했다. 가난한 대중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물가와 임금의 통제로 식량과 생필품이 시장에서 동이 나자 국민공회는 농촌에서 강제로 식량을 공출하여 농민들의 불만을 샀다.
 
  게다가 많은 농민들이 강제적인 징병에 반대했으므로 이는 자연스럽게 서부 방데 지방에서의 반란을 비롯한 각지에서의 반혁명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최근의 지방사 연구에 의존하여 혁명기의 가장 대중적인 운동이 있었다면 그것은 호전적인 도시의 상큘로트 운동이 아니라 반혁명운동이라고까지 주장한다. 모든 프랑스인들이 열렬히 혁명을 지지하고 이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프랑스 혁명의 보편성
 
  프랑스혁명이 세계사적 보편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서양학자들의 일반적인 이야기이다. 이미 1856년에 알렉시스 토크빌이 '프랑스혁명은 --- 모든 특정 국민을 뛰어 넘어 온갖 국가의 사람들이 그 시민이 될 수 있는, 그러한 공통의 지적 조국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데서 그 전형적인 표현을 볼 수 있다.
 
  르페브르나 소불도 그 보편성을 주장하는 데에서 거의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래서 1688년의 영국혁명에서 얻어진 영국인의 자유는 영국인만의 것으로 보편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미국혁명(미국 독립)은 자연법에 의존하여 아메리카인의 권리만이 아니라 인간의 권리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나 유색인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명백한 한계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반면 프랑스혁명은 자연법에 호소함으로써 보편성을 갖고 있고 백인만 해방한 것이 아니라 노예제를 폐지했고 종교적 관용뿐 아니라 양심의 자유를 인정했고 신교도와 유대인들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앞의 두 혁명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또 하나 두 혁명과 크게 다른 점은 그것이 평등의 혁명이라는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권리의 평등을 주장한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에서 자유와 평등은 분리될 수 없었는데 평등이 없으면 자유는 소수의 특권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인들도 대체로 이런 견해를 가르치고 배운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의 보편성을 보통 프랑스혁명의 구호인 자유, 평등, 우애(박애)와 관련해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에 큰 오해가 존재한다.
 
  자유라는 개념은 큰 문제가 없다. 자유는 18세기에 어떤 목적을 추구하는데 방해받지 않는 것,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소극적인 자유이다. 그래서 혁명기에 그것이 인간이 양도할 수 없는 자연권, 양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런 개념들은 보편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평등은 아마 많이 오해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보통 사용하는 개념으로서의 경제적인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권리의 평등, 즉 형식적인 법적인 평등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따라서 혁명기에 가난한 사람에 대한 배려는 별로 없다. 또 이런 법적 평등은 선거에서의 재산자격 조항에 의해 크게 제약되었다. 그래서 자유와 평등의 결합은 르페브르의 주장과 달리 19세기에 들어와서도 자유주의라는 형태로, 재산 있는 소수의 특권으로 머물렀다. 이것은 보편적인 개념은 아니다.
 
  박애는 '우애'의 엉뚱한 오역이다. 우애는 '형제애'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인데 휴머니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분열과 사회적 분해를 막음으로써 결속을 강화하려는 혁명가들의 의도가 잘 담겨 있는 구호이다. 이는 공포정치시기에 가장 많이 사용된 말로 극단주의적 냄새를 풍기기 때문에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계사적 보편성의 주장을 위해 더 중요한 것은 프랑스 내 소수종족이나 종파, 또 비유럽인에 대한 태도일 것이다. 혁명가들은 정복지의 병합 과정에서 주민투표를 통해 그 지역이 프랑스공화국에 합쳐지는 방식을 취했다. 인민주권설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르페브르는 인민의 동의에 의한 국가라는 의미에서 '보편공화국의 이념은 혁명의 고귀한 유산'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정복지에서의 주민투표가 주민들의 자유의사를 반영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국내투표에서도 그랬지만 거의 공개되다시피하는 투표에서 감히 반대할 사람이 있겠는가.
 
  노예제의 폐지나 유대인 해방이 어떤 한계를 갖고 있는지는 앞에서 언급했다. 더 큰 문제는 식민주의이다. 혁명가들은 식민주의를 용인하는 태도를 취했는데 그것은 프랑스혁명의 보편주의를 가장 크게 위협하는 요소이다. 그럼에도 르페브르나 소불은 이를 애써 무시하고 있다.
 
  오늘날도 프랑스인들은 프랑스의 세계사적 보편성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자부심을 보인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프랑스혁명이다. 프랑스혁명이 프랑스인의 정체성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영국 다음으로 식민지를 많이 갖고 있던 식민국가이다. 그런데도 식민주의적 악행은 쏙 빼놓고 프랑스혁명만 내세워(그것도 문제가 많지만) 보편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균형 잡힌 사고라고 하기는 어렵다.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주는 대신 그 종교공동체를 파괴하려 한 혁명기의 태도는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다. 몇 년 전 히잡사건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아랍계 여고생들이 머릿수건인 히잡을 쓰고 등교하는 것을 정교분리를 내세워 법으로 막은 것이다. 그렇다고 프랑스 여학생들이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등교하는 것을 금지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다. 분명한 종교탄압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히잡 금지에 항의하는 시위

  작년에는 흑인계 청년들이 파리를 비롯한 대도시에서 폭동을 일으켜 도시들을 화염에 물들게 했다. 가난과 차별에 저항하는 몸부림인 것이다. 이것은 모두 인종주의와 식민주의가 가져온 불행한 결과들이다.
 
  우리사회에서는 유별나게 프랑스에 대해 관대한 태도가 발견된다. 그래서 프랑스인이 말하는 똘레랑스라는 말이 마치 대단한 가치를 갖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프랑스혁명을 신조로 하는 사람들도 있는 듯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흑인청년들의 폭동

  프랑스혁명의 맑스주의적 해석은 프랑스의 문화적 민족주의와 맑시즘의 기묘한 결합이다. 잘못된 교육은 사람들의 정신을 썩게 만든다.

출처 - 프레시안

프랑스 혁명과 세계사 ⑨
프랑스혁명과 식민주의, 노예제, 유대인 해방

카리브 식민지와 노예제, 노예무역
 
  식민주의와 노예제 문제는 프랑스혁명의 보편성을 검증할 수 있는 좋은 대상이다. 그것이 내세우는 자유와 평등이 과연 비프랑스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원리인지 알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혁명의 중요한 연구자들은 이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 마티에즈나 소불은 노예제 폐지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을 정도이다. 이는 이 문제들이 자기들 논리의 취약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18세기에 식민지는 프랑스 경제에 사활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이는 특히 카리브 해의 식민지들이 그렇다. 생 도밍그, 마르티니크, 과달루페가 중심이 되는 이 식민지들은 1780년대까지 유럽이 소비하는 설탕과 커피의 1/2을 생산했고 그 3/4은 프랑스에 들어왔다가 재수출되며 프랑스 해외무역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18세기 프랑스의 해외무역이 영국보다도 빨리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카리브해의 식민지들 : 붉은 색은 산 도밍고, 남색은 과달루페, 초록색은 마르티니크 식민지

  프랑스 경제의 가장 활력 있고 선진적인 이 식민지 상업 부문에 종사한 사람은 1백만 이상이었고 여기에 생계를 의탁하고 있는 사람이 프랑스 전체 인구의 약 1/8이 될 정도였다. 그러니 식민지 문제가 많은 프랑스인들의 관심사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카리브 식민지 가운데서도 '왕관의 보석'으로 불린 생 도밍그가 가장 중요했다. 인구와 산출량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다. 생 도밍그에서는 커피,
인디고, 면화, 사탕수수를 재배했는데 그 중 사탕수수가 가장 중요했다. 전체 플랜테이션의 절반 이상이 그 농장이었다.
 
  또 생 도밍그 플랜테이션의 년 이익률은 8-12%로 영국 식민지들의 4%보다 훨씬 높았다. 그것은 더 많은 투자가 이루어져 가공기술, 관개, 생산성에서 더 높은 수준에 있었기 때문이다.
 
  카리브 지역 플랜테이션은 노예제에 의해 유지되었다. 생 도밍그의 인구는 1750년의 16만6천 명에서 1789년에는 56만 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그 가운데 50만 명이 흑인 노예였고 백인이 3만2천 명, 해방된 유색인이 2만8천 명이었다. 해방 유색인 가운데에는 농장주도 많았다.
 
  이렇게 흑인 노예가 많았던 것은 사탕수수라는 작물의 특성 때문이다. 사탕수수는 키우는 데 1-2년 걸리나 수확하고 나면 48시간 안에 분쇄하고 그 액을 짜내서 끓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상품 가치가 사라진다. 그래서 수확기에 노예들을 매우 혹사시켰다.
 
  그 결과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이는 과로와 영양부족, 질병 때문인데 카리브 지역에 도착한 아프리카인 노예는 8년 안에 그 절반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카리브 식민지의 발전은 노예 노동력의 원활한 공급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프랑스 노예상인들은 17세기 말에는 매년 1천 명에서 2천 명 정도를 카리브 지역에 공급했으나 1780년대에는 그 숫자가 최고조에 달해 매년 평균 3만7천명으로 늘어났다. 1820년까지 대서양을 건넌 아프리카 노예의 1/4이 프랑스령 카리브로 향했다. 프랑스는 18세기에 영국과 함께 가장 중요한 노예무역국가였다.
 
  혁명과 카리브 식민지의 투쟁
 
  카리브 지역에 혁명의 소식이 전해진 것은 1789년 9월 말이다. 그러면서 분위기가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당시에 식민지와 관련해 제기된 문제는 식민지 자치문제, 해방유색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문제, 노예해방 문제였다.
  그러나 이 문제들은 모두 매우 민감한 것으로 식민지와 노예제, 노예무역이 프랑스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하면 함부로 다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국민의회는 가능하면 문제를 회피하는 전략을 취했다. 식민지위원회를 따로 만들어 문제를 연구하도록 조치를 취한 것은 시간도 지연시키고 국민의회가 직접 관련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식민지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백인 식민자들은 진작에 식민지 관리들을 쫓아낸 후 자치의회를 만들 계획을 추진했다. 해방 유색인들은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다. 고통에 시달리는 흑인 노예들은 즉각적인 노예제 폐지를 요구했다.
 
  1790년 3월에 식민지위원회 위원장인 앙트완느-삐에르 바르나브는 백인 농장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새 헌법을 식민지에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과 노예제에 반대하는 폭동을 선동하는 자를 엄격히 단속하겠다고 선언했다. '식민지 체제가 억압적이기는 하나 그것이 수백 만 프랑스인에게 생계를 주므로' 식민지를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현실의 개선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이자 결국 1791년 8월 22일에 생 도밍그에서 대규모 노예반란이 터졌다. 여기에는 몇 주 내에 십만 명의 노예가 참여하여 수많은 플랜테이션들을 불 지르고 황폐화시켰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백인 농장주들은 이웃섬인 영국령 자메이카 행정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1755년의 생 도밍그 시

  그러자 금방 개원한 입법의회는 1792년 3월에 해방 유색인에 대해 시민권과 정치적 권리를 허용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것을 통해 해방유색인의 마음을 돌려 노예반란을 진정시키고 또 한 편에서 식민지 백인들이 영국의 도움으로 프랑스에서 분리해 나가는 것을 막으려 한 것이다.
 
  입법의회는 6천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백인들은 끝까지 해방 유색인을 동료 시민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1793년 1월에 영국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자 이웃한 마르티니크 섬의 백인들은 영국에게 주권을 양도함으로써 영국군이 1794년 3월에는 마르티니크와 과달루페 섬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카리브 지역의 프랑스군이 영국군에 비해 극히 열세였으므로 생 도밍그의 행정관은 본국 허락 없이 1793년 8월에 흑인 노예의 해방을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노예들의 도움을 얻어 위기를 벗어나려 한 것이다. 이 조치의 효력으로 유능하고 노예들의 지지를 받는 흑인 장군인 투생 루베르튀르를 프랑스 편에 끌어들일 수 있었고 그래서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투생 루베르튀르

  이에 국민공회는 1794년 2월에 식민지 노예제 폐지를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다시 군대를 파견하여 카리브 지역 다른 섬들의 노예도 해방시키도록 했다. 영국이 1795년에 병력 3만 명을 파견하여 생 도밍그를 점령하려 했으나 투생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그 후 투생은 생 도밍그의 행정관이 되어 본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군사독재를 실시했다.
 
  1802년에 나폴레옹은 카리브 섬들을 다시 통제하고 노예제와 노예무역을 복구하려고 군대를 파견했으나 1804년 11월에 패퇴하고 말았다. 뒤에 남은 많은 백인들은 학살을 당했다. 그 결과 생 도밍그는 아이티라는 이름을 가진 독립국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카리브 식민지와 관련해 혁명가들은 식민지 해방이나 노예제, 노예무역의 폐지에 전혀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 노예해방은 카리브 식민지들이 영국의 손에 넘어갈까봐 취한 궁여지책에 불과한 것이다.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운 것은 흑인 노예들이었지 혁명가들은 아니었다.
 
  그러니 프랑스 혁명의 세계사적 보편성을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구에 찬 것인지 이것을 통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는 프랑스 국내의 유대인 해방에 대한 혁명가들의 태도에서도 비슷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혁명과 유대인 해방
 
  1791년 9월 27일에 제헌의회는 알사스-로렌의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주기로 의결했다. 이것은 유대인에게 법적 평등을 보장해준다는 것을 의미했다. 혁명가들은 당연히 이를 혁명의 보편성을 보여준 쾌거로 환영했다. 많은 유대인들도 이것이 수 세기에 걸친 굴욕과 법적 차별, 주류사회로부터의 배제를 끝내 주리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했다.
 
  그래서 겉으로만 보면 이것은 인간 해방이라는 점에서 시대사적인 의미를 갖는 전환점으로 기록될 수 있었다. 사실 당시 프랑스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수는 많지 않았다. 보르도 주위에 3,500명 정도, 알사스-로렌에 3만 명, 파리에 500명 정도였다. 그럼에도 제헌의회가 다른 많은 중요한 사안에도 불구하고 이 사안을 경시하지 않은 것은 이것이 혁명의 보편성과 관련해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잘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방적인 해방이 아니라 큰 희생을 요구하는 거래였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시민권을 부여받기 위해 유대인 공동체의 자율성을 허용하는 특권을 포기해야 했고 민사적인 일에 대해 유대교 성직자인 랍비가 가지고 있던 관할권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유대인이 프랑스인이 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 자격으로서였다.
 
  혁명가들이 유대인들에게 이런 요구를 한 것은 그들의 종교적 공동체를 제거함으로써 프랑스 문화로의 동화를 촉진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일부 유대인들이 개인적으로 프랑스 사회에 편입되는 대신 유대인의 종교공동체는 공식적으로 부인되었다.
 
  유대인의 해방은 유대인 사회에 큰 파급효과를 가져다 줄 것 같이 보였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유대인 대부분의 직업구조나 주거형태, 종교생활의 형태가 19세기 후반까지도 그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또 랍비의 권위는 공동체의 자율성이 포기됨으로써 많이 줄어들기는 했으나 19세기 상당 부분 동안 종교적, 시민적 일과 관련해 권위를 유지했다. 그뿐 아니라 프랑스 사회 내의 반유대주의적 감정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결국 공화국은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명분으로 유대인에게 형식적인 법적 평등을 주는 대신 그들의 공동체를 부인함으로써 그 종교생활을 파괴하려 한 것이다. 동화를 하지 않는 한 그들이 진정한 프랑스의 국민이 될 수는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 공동체의 본질이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부인한다는 것은 유대인에게 자기 부정을 요구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혁명기의 유대인 해방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혁명이 자랑하는 보편주의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프랑스 혁명과 세계사 ⑧
프랑스 혁명기의 문화

계몽사상과 프랑스혁명
 
  프랑스 혁명은 보통 계몽사상을 구현한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실제로 국민의회는 1791년 7월에 볼테르의 무덤을 프랑스의 위인들을 모신 묘지인 판테옹으로 옮기며 성대한 의식을 치렀다. 1794년 10월에는 루소의 유골도 역시 이곳에 봉안되었다.
 
  이런 행동은 혁명가들이 계몽사상가들을 그 선구자로 생각한다는 공식적인 의사 표명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로베스삐에르 같은 혁명가들은 계몽사상이 혁명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위기상황과 혁명의 세기로 접근하고 있다'고 말한 루소가 그런 생각을 만들었을 수 있다.
 
  당시에 이미 음모설을 펴는 사람도 있었다. 반혁명 세력에 속했던 아베 바뤼렐이라는 사람은 혁명은 볼테르, 루소, 디드로 같은 혁명사상가들과 프리메이슨 조직이 18세기 중반부터 음모를 꾸민 결과라고 주장했다.
 
  계몽사상이 혁명의 지적 배경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혁명가들은 계몽사상가들이 만든 가치와 개념,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통해 당시 프랑스 사회가 당면하고 있던 문제점들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었다. 법의 지배 대 자의적 지배, 자유 대 전제, 정의 대 특권 같은 대립적인 개념들이 그것이다.
 
  맑스주의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계몽사상이 혁명 이전과 혁명 과정에서 정치적인 힘으로 작용했다고 주장한다. 계몽사상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본다. 그래서 르페브르는 '18세기 저술가들의 생각이 부르주아에게 파고들어서 그들에게 역사적 사명에 대한 완전한 사명을 주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또 혁명적인 정신이 사회 경제적 운동에서 기원하기는 했지만 (계몽사상의)
이상주의 없이 진정한 혁명정신은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계몽사상가들은 과연 혁명가들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이들은 실제의 정치적 경험이 없는 공론가들이었다. 루소가 공화국을 칭송했으나 그가 머리에 그리고 있는 것은 스파르타나 초기의 로마 같은 작은 도시국가였다. 18세기 중반의 유럽과는 별 직접적 관계가 없었다. 루이 15세는 볼테르를 1745년에 왕실 역사가로 임명했으나 비실제적인 그를 대신으로 임명할 생각은 결코 없었다.
 
  또 이들은 정치적으로도 일관성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볼테르와 디드로는 국내에서는 여러 가지 비판의 목소리도 냈으나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과 러시아의 캐더린 여제에게 는 아부했다. 그들의 후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들 군주의 억압적인 국내정책이나 호전적인 외교정책에 대해서 일체 침묵했다.
 
  어떤 계몽사상가도 구체제의 악에 과감하게 도전하지는 않았다. 또 정치적 반대를 조직하지도 무기를 들라고 호소한 적도 없다. 그들은 기껏해야 개혁가들이었고 현상에 어느 정도 만족하는 사람들이었지 결코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러면 혁명을 가능하게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것은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확대되며 혼란기에 등장한 수많은 대중저술가들, 새로운 정치 엘리트들이었다. 무명의 신부였던 아베 시에스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지만 이들의 생각이 혁명에게 명확한 목표를 제시했다. 그리하여 혁명은 통제 불능한 상태에서 급진화하게 되었다.
 
  이들은 계몽사상의 지적, 이데올로기적 유산 가운데에서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만을 취사선택했다. 그리하여 계몽사상의 가치들은 변질되었다. 코스모폴리타니즘이 민족주의로, 평화주의가 군사주의로, 관용이 광신주의로, 자유가 테러로 바뀌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계몽사상이 필연적으로 혁명을 가져와야 할 필연성은 없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프랑스 혁명을 주제로 한 영화 '라 마르세이유' 포스터

  재생과 '덕의 공화국' 건설
 
  혁명기에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의 하나가 재생(再生)이다. 이는 삼부회 시기부터 많은 팜플렛, 벽보, 까이에에 넘쳐 나던 단어이다. '삼부회에 의해 재생된 프랑스
왕정의 영원한 생명' 같은 제목의 팜플렛에서 그 표현을 볼 수 있다. 심지어 루이 16세도 '삼부회는 왕국의 재생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혁명을 상징하는 여러 혁명 포스터의 하나. 왼쪽에 있는 것이 나중에 파시즘 운동의 상징물이 된 파스케스(fasces : 로마시대의 단결을 의미하는 의장물)이고, 오른쪽 돌기둥 가장 위에 있는 단어가 재생(régénération)이다.

  단순하게 '재생'을 말하는 경우도 있으나 시간이 가며 그것은 행정의 재생, 공공질서의 재생, 국가의 재생, 프랑스의 재생 같은 표현으로 확대되었다. 혁명 세력이 프랑스 사회의 어떤 근본적 변화를 모색한 것을 알 수 있다.
 
  재생을 위해서는 먼저 사람이 바뀌어야 했다. 그래서 혁명가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과제의 하나가 신인간(l'homme nouveau)의 창조였다. 이는 새로운 아담을 세속화되고 합리화된 에덴동산에 다시 받아들이는 문제였다. 따라서 교육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를 위해 1793년 12월에 국가가 통제하는 의무적인 초등교육안이 국민공회에서 통과되었다. 교과과정에서는 기독교의 영향을 가능한 한 배제하고 시민적, 공화적
덕성을 가르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안으로 재정도 부족하고 교사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실현은 불가능했다.
 
  결과적으로 교육도 대중적이라기보다는 엘리트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혁명정부의 교육정책이 가져온 당장의 폐해는 더 컸다. 카톨릭 교회의 교육기관들이 폐지됨으로써 1799년에 중등학교 재학생수는 1789년의 1/5로 줄었기 때문이다.
 
  초기부터 그런 경향이 있었으나 특히 공포정치 시기의 프로그램은 정치, 사회적인 것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공화국화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도덕적인 혁명적 유토피아를 만드는 꿈을 새로운 혁명적 문화를 만드는 노력 속에 구체화한 것이다. 그래서 일상생활의 모든 면을 정치화하고 공화주의적 예술을 조장하고 시민적 축제를 개최하고 탈기독교 운동을 벌였다.
 
  사람들은 기독교적인 이름을 로마시대의 영웅이나 당시 혁명가의 이름으로 바꾸도록 권장되었다. 거리 이름들도 새롭게 고쳐졌다. 1793년 8월에는 미터법을 도입하여 혼란스런 척관법 체계를 통일했다. 사회의 합리화 계획의 일부인 이것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고 많은 나라로 확산되었다.
 
  1793년 10월에 국민공회는 인류사의 새 시대를 연다는 의미에서 기존의 책력을 혁명력으로 바꿨다. 공화국을 선언한 1792년 9월 22일이 그 원년 제 1일이 되었다. 이것은 12년 동안이나 유지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혁명력

  혁명가들은 선전전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혁명을 찬양하고 그 적을 공격하기 위해 노래, 포스터, 팜플렛, 신문, 책, 삽화, 미술, 조각 등 온갖 수단을 동원했고 심지어 놀음하는 카드에까지 혁명 구호와 상징을 그려 넣었다. 가장 유명한 상징물은 '자유의 여신'으로 알려진 마리안느이다. 이 여인상은 모든 동전이나 법률의 표지, 편지지, 봉인 등의 문양으로, 또 축제를 장식하는 조각상으로 이용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자유의 여신 마리안느 상

  수백 개의 연극이 새로 만들어졌고 옛날 음악도 고쳐졌고 혁명정부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예술가들을 경쟁시켰다. 이 정교한 문화적 운동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혁명축제이다. 이 축제는 1789년에 혁명을 기념하여 시골이나 도시 사람들이 자유의 나무를 심은 데서 비롯했다.
 
  정부는 1790년 7월 14일에 '바스티유의 날' 1주년을 기념하여 연맹축제를 거행했다. 이는 동시다발적으로 전국에서 개최되었고 여기에서 지방관리와 국민방위군은 새 정부를 지키겠다는 충성서약을 해야 했다.
 
  문화와 그것을 통해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려는 혁명기의 노력은 일부 살아남은 것도 있으나 테르미도르의 반동과 함께 대부분 자취 없이 사라졌다. 너무 이상주의적이고 급진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종교문제가 특히 그렇다.
 
  탈기독교화와 그 실패
 
  교회에 대한 비판은 계몽사상에서 일반적이나 그것은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혁명기에 오면 이것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공격만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를 다른 것으로 대치하려는 시도까지 나타났기 때문이다.
 
  1789년 8월의 봉건제 폐지로 십일조 수취가 금지되었다. 그 해 11월에는 전국의 교회 토지가 몰수되었다. 성직자들에게는 국가에서 봉급이 지불되었고 성직자의 선출에도 선거제가 도입되었다. 1790년 7월에는 성직자들에게 성직자시민헌장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했다. 그해 11월에는 모든 성직자가 헌법에 대한 충성서약을 하도록 강제했다.
 
  뒤의 두 가지 요구는 본격적으로 반혁명의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되었다. 많은 성직자들이 그런 서약을 거부하고 투옥되거나 외국으로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혁명이 끝날 때까지 수천 명의 성직자가 처형당했고 3만 이상이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 농민들은 전통적인 종교생활을 부인하는 이런 정책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1793년 말부터 탈기독교화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혁명적 인간을 만드는 마지막 단계로 생각되었다. 11월에 일부 극단주의적 혁명가들이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을 이성을 숭배하는 새로운 '이성의 전당'으로 바꾸고 오페라 여배우를 자유의 여신으로 분장시켜 대규모 축제행사를 벌였다.
 
  로베스삐에르와 국민공회 지도자들을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고 얼마 안 가 이를 금지시켰다. 그것이 가져올 종교적 갈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로베스삐에르는 다른 대안을 찾아냈다. 무신론 대신 이신론적 종교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신론이 무신론 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1794년 6월에 '최고존재'를 숭배하는 새로운 종교가 그의 주도하에 탄생했다.
 
  두 종교 모두 별 지지자를 얻지 못했다. 그리하여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럼에도 이 탈기독교화 운동은 카톨릭 대중과 공화주의자들 사이에 깊은 심연을 만들어냈고 그것은 19세기 내내 지속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진정한 급진주의는 정신생활에 대한 도전에서 나오나 그 실패는 정치, 사회적 영역에서보다 더 분명하다. 결국 나폴레옹은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교황과의 협정을 통해 카톨릭을 다시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