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프레시안

프랑스 혁명과 세계사 ⑧
프랑스 혁명기의 문화

계몽사상과 프랑스혁명
 
  프랑스 혁명은 보통 계몽사상을 구현한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실제로 국민의회는 1791년 7월에 볼테르의 무덤을 프랑스의 위인들을 모신 묘지인 판테옹으로 옮기며 성대한 의식을 치렀다. 1794년 10월에는 루소의 유골도 역시 이곳에 봉안되었다.
 
  이런 행동은 혁명가들이 계몽사상가들을 그 선구자로 생각한다는 공식적인 의사 표명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로베스삐에르 같은 혁명가들은 계몽사상이 혁명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위기상황과 혁명의 세기로 접근하고 있다'고 말한 루소가 그런 생각을 만들었을 수 있다.
 
  당시에 이미 음모설을 펴는 사람도 있었다. 반혁명 세력에 속했던 아베 바뤼렐이라는 사람은 혁명은 볼테르, 루소, 디드로 같은 혁명사상가들과 프리메이슨 조직이 18세기 중반부터 음모를 꾸민 결과라고 주장했다.
 
  계몽사상이 혁명의 지적 배경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혁명가들은 계몽사상가들이 만든 가치와 개념,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통해 당시 프랑스 사회가 당면하고 있던 문제점들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었다. 법의 지배 대 자의적 지배, 자유 대 전제, 정의 대 특권 같은 대립적인 개념들이 그것이다.
 
  맑스주의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계몽사상이 혁명 이전과 혁명 과정에서 정치적인 힘으로 작용했다고 주장한다. 계몽사상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본다. 그래서 르페브르는 '18세기 저술가들의 생각이 부르주아에게 파고들어서 그들에게 역사적 사명에 대한 완전한 사명을 주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또 혁명적인 정신이 사회 경제적 운동에서 기원하기는 했지만 (계몽사상의)
이상주의 없이 진정한 혁명정신은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계몽사상가들은 과연 혁명가들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이들은 실제의 정치적 경험이 없는 공론가들이었다. 루소가 공화국을 칭송했으나 그가 머리에 그리고 있는 것은 스파르타나 초기의 로마 같은 작은 도시국가였다. 18세기 중반의 유럽과는 별 직접적 관계가 없었다. 루이 15세는 볼테르를 1745년에 왕실 역사가로 임명했으나 비실제적인 그를 대신으로 임명할 생각은 결코 없었다.
 
  또 이들은 정치적으로도 일관성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볼테르와 디드로는 국내에서는 여러 가지 비판의 목소리도 냈으나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과 러시아의 캐더린 여제에게 는 아부했다. 그들의 후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들 군주의 억압적인 국내정책이나 호전적인 외교정책에 대해서 일체 침묵했다.
 
  어떤 계몽사상가도 구체제의 악에 과감하게 도전하지는 않았다. 또 정치적 반대를 조직하지도 무기를 들라고 호소한 적도 없다. 그들은 기껏해야 개혁가들이었고 현상에 어느 정도 만족하는 사람들이었지 결코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러면 혁명을 가능하게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것은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확대되며 혼란기에 등장한 수많은 대중저술가들, 새로운 정치 엘리트들이었다. 무명의 신부였던 아베 시에스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지만 이들의 생각이 혁명에게 명확한 목표를 제시했다. 그리하여 혁명은 통제 불능한 상태에서 급진화하게 되었다.
 
  이들은 계몽사상의 지적, 이데올로기적 유산 가운데에서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만을 취사선택했다. 그리하여 계몽사상의 가치들은 변질되었다. 코스모폴리타니즘이 민족주의로, 평화주의가 군사주의로, 관용이 광신주의로, 자유가 테러로 바뀌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계몽사상이 필연적으로 혁명을 가져와야 할 필연성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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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혁명을 주제로 한 영화 '라 마르세이유' 포스터

  재생과 '덕의 공화국' 건설
 
  혁명기에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의 하나가 재생(再生)이다. 이는 삼부회 시기부터 많은 팜플렛, 벽보, 까이에에 넘쳐 나던 단어이다. '삼부회에 의해 재생된 프랑스
왕정의 영원한 생명' 같은 제목의 팜플렛에서 그 표현을 볼 수 있다. 심지어 루이 16세도 '삼부회는 왕국의 재생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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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을 상징하는 여러 혁명 포스터의 하나. 왼쪽에 있는 것이 나중에 파시즘 운동의 상징물이 된 파스케스(fasces : 로마시대의 단결을 의미하는 의장물)이고, 오른쪽 돌기둥 가장 위에 있는 단어가 재생(régénération)이다.

  단순하게 '재생'을 말하는 경우도 있으나 시간이 가며 그것은 행정의 재생, 공공질서의 재생, 국가의 재생, 프랑스의 재생 같은 표현으로 확대되었다. 혁명 세력이 프랑스 사회의 어떤 근본적 변화를 모색한 것을 알 수 있다.
 
  재생을 위해서는 먼저 사람이 바뀌어야 했다. 그래서 혁명가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과제의 하나가 신인간(l'homme nouveau)의 창조였다. 이는 새로운 아담을 세속화되고 합리화된 에덴동산에 다시 받아들이는 문제였다. 따라서 교육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를 위해 1793년 12월에 국가가 통제하는 의무적인 초등교육안이 국민공회에서 통과되었다. 교과과정에서는 기독교의 영향을 가능한 한 배제하고 시민적, 공화적
덕성을 가르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안으로 재정도 부족하고 교사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실현은 불가능했다.
 
  결과적으로 교육도 대중적이라기보다는 엘리트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혁명정부의 교육정책이 가져온 당장의 폐해는 더 컸다. 카톨릭 교회의 교육기관들이 폐지됨으로써 1799년에 중등학교 재학생수는 1789년의 1/5로 줄었기 때문이다.
 
  초기부터 그런 경향이 있었으나 특히 공포정치 시기의 프로그램은 정치, 사회적인 것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공화국화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도덕적인 혁명적 유토피아를 만드는 꿈을 새로운 혁명적 문화를 만드는 노력 속에 구체화한 것이다. 그래서 일상생활의 모든 면을 정치화하고 공화주의적 예술을 조장하고 시민적 축제를 개최하고 탈기독교 운동을 벌였다.
 
  사람들은 기독교적인 이름을 로마시대의 영웅이나 당시 혁명가의 이름으로 바꾸도록 권장되었다. 거리 이름들도 새롭게 고쳐졌다. 1793년 8월에는 미터법을 도입하여 혼란스런 척관법 체계를 통일했다. 사회의 합리화 계획의 일부인 이것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고 많은 나라로 확산되었다.
 
  1793년 10월에 국민공회는 인류사의 새 시대를 연다는 의미에서 기존의 책력을 혁명력으로 바꿨다. 공화국을 선언한 1792년 9월 22일이 그 원년 제 1일이 되었다. 이것은 12년 동안이나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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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력

  혁명가들은 선전전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혁명을 찬양하고 그 적을 공격하기 위해 노래, 포스터, 팜플렛, 신문, 책, 삽화, 미술, 조각 등 온갖 수단을 동원했고 심지어 놀음하는 카드에까지 혁명 구호와 상징을 그려 넣었다. 가장 유명한 상징물은 '자유의 여신'으로 알려진 마리안느이다. 이 여인상은 모든 동전이나 법률의 표지, 편지지, 봉인 등의 문양으로, 또 축제를 장식하는 조각상으로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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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의 여신 마리안느 상

  수백 개의 연극이 새로 만들어졌고 옛날 음악도 고쳐졌고 혁명정부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예술가들을 경쟁시켰다. 이 정교한 문화적 운동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혁명축제이다. 이 축제는 1789년에 혁명을 기념하여 시골이나 도시 사람들이 자유의 나무를 심은 데서 비롯했다.
 
  정부는 1790년 7월 14일에 '바스티유의 날' 1주년을 기념하여 연맹축제를 거행했다. 이는 동시다발적으로 전국에서 개최되었고 여기에서 지방관리와 국민방위군은 새 정부를 지키겠다는 충성서약을 해야 했다.
 
  문화와 그것을 통해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려는 혁명기의 노력은 일부 살아남은 것도 있으나 테르미도르의 반동과 함께 대부분 자취 없이 사라졌다. 너무 이상주의적이고 급진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종교문제가 특히 그렇다.
 
  탈기독교화와 그 실패
 
  교회에 대한 비판은 계몽사상에서 일반적이나 그것은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혁명기에 오면 이것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공격만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를 다른 것으로 대치하려는 시도까지 나타났기 때문이다.
 
  1789년 8월의 봉건제 폐지로 십일조 수취가 금지되었다. 그 해 11월에는 전국의 교회 토지가 몰수되었다. 성직자들에게는 국가에서 봉급이 지불되었고 성직자의 선출에도 선거제가 도입되었다. 1790년 7월에는 성직자들에게 성직자시민헌장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했다. 그해 11월에는 모든 성직자가 헌법에 대한 충성서약을 하도록 강제했다.
 
  뒤의 두 가지 요구는 본격적으로 반혁명의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되었다. 많은 성직자들이 그런 서약을 거부하고 투옥되거나 외국으로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혁명이 끝날 때까지 수천 명의 성직자가 처형당했고 3만 이상이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 농민들은 전통적인 종교생활을 부인하는 이런 정책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1793년 말부터 탈기독교화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혁명적 인간을 만드는 마지막 단계로 생각되었다. 11월에 일부 극단주의적 혁명가들이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을 이성을 숭배하는 새로운 '이성의 전당'으로 바꾸고 오페라 여배우를 자유의 여신으로 분장시켜 대규모 축제행사를 벌였다.
 
  로베스삐에르와 국민공회 지도자들을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고 얼마 안 가 이를 금지시켰다. 그것이 가져올 종교적 갈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로베스삐에르는 다른 대안을 찾아냈다. 무신론 대신 이신론적 종교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신론이 무신론 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1794년 6월에 '최고존재'를 숭배하는 새로운 종교가 그의 주도하에 탄생했다.
 
  두 종교 모두 별 지지자를 얻지 못했다. 그리하여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럼에도 이 탈기독교화 운동은 카톨릭 대중과 공화주의자들 사이에 깊은 심연을 만들어냈고 그것은 19세기 내내 지속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진정한 급진주의는 정신생활에 대한 도전에서 나오나 그 실패는 정치, 사회적 영역에서보다 더 분명하다. 결국 나폴레옹은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교황과의 협정을 통해 카톨릭을 다시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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