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프레시안 2008-07-16 오후 5:18:52

산업혁명과 비유럽세계의 탈산업화 ②
영국 산업혁명의 요인들 (1)

외부적, 내부적 요인
 
  산업혁명이 이렇게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므로 사람들이 그 원인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특히 그것이 가장 먼저 시작된 영국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한 원인에 대해 온갖 주장들이 제기된다.
 
  섬나라라서 외침을 받지 않은 영국의 지리적 이점, 석탄이나 철 등 풍부한 부존자원, 기술적 창조성이나 교육 같은 사회제도, 또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민주적인 정치질서, 풍부한 노동력과 자본 조달의 용이성, 해외무역 등 수없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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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0년경 영국의 산업지도. 검은 회색 부분이 노천탄광 지역으로 공업지역이 대체로 이 부분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석탄이 지표에서 얕게 묻혀 있다는 것이 산업혁명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철광산과 탄광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도 중요했다.

  물론 이런 여러 요소들이 조금씩은 다 관련이 있겠으나 문제는 결정적인 요소이다. 이 문제에서는 내부적인 요인과 외부적인 요인에 어떤 비중을 두느냐가 가장 중요한 논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과거의 학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영국의 아놀드 토인비이다. 그는 <역사의 연구>라는 책을 써서 대중적으로 매우 유명한 역사가인 아놀드 토인비의 삼촌으로 1884년부터 '산업혁명강의'를 시작했다. 그도 19세기 말에는 영국에서 꽤 유명한 경제사학자였다.
 
  그는 산업혁명의 내, 외부적 요인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지는 않았으나 외부적인 요인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듯이 보인다. 농업혁명을 이야기하고는 있으나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그것이 과연 산업혁명이 기초가 되었을지는 의심스럽다.
 
  반면 해외무역의 급증에는 큰 관심을 보인다. 그 가운데서도 1760년에 수출의 1/3을 차지한 식민지 무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 1770년에 맨체스터에서 생산한 공산품의 3/4이 아메리카로 갔다고 말하는 데에서도 새로운 산업이 해외시장을 기반으로 성장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거의 같은 시기의
윌리엄 커닝햄도 산업혁명의 주된 원인은 해외무역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산업발전에 있어 발명과 기술 혁신의 중요성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해외시장의 성장과, 자본을 원활하게 공급한 금융의 발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20세기에 들어온 이후 산업혁명에 관한 최초의 권위 있는 연구자인 뽈 망뚜도 해외무역을 중심에 놓았다. 그는 산업과 무역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며 무역이 없었으면 산업의 주된 변화도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의 미국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경향은 1940년대까지 유지되었다. 18세기말에 아담 스미스도 무역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해외부문의 중요성은 18세기부터 영국인이 계속 인식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 해방과 내부적 요인의 강조
 
  그런데 1950년대에 들어와 사정이 달라졌다. 외부적인 요인보다 내부적인 요인이 더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50년대 이후 식민지 해방운동이 본격화되며 제3세계로부터 비난의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이다. 제3세계의 학자들이 유럽의 부는 유럽인들이 특별히 뛰어나서가 아니라 식민지를 착취한 결과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사실 경제발전을 일찍 이룬 유럽의 중요한 국가들이 거의 식민지들을 갖고 있었으니 그 개연성을 아주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제 서양 역사가들은 산업혁명이 식민지 착취의 결과가 아니라 유럽 내부적인 여러 요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국내요인에 의한 자본의 축적, 낮은 이자율, 농업생산성의 증가, 인구의 급증, 산업발전에 유리한 사회경제적ㆍ정치적 구조 변화, 교육과 과학지식의 발전, 기술혁신, 풍부한 지하자원 등의 온갖 요인들을 열거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국내 수요의 증가이다. 국내의 경제발전이 수요를 팽창시키지 않았다면 산업혁명으로 인해 급격히 늘어나는 공급을 해소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국도 산업혁명 이전에는 기본적으로 농업국가였으므로 농업부문의 변화에 중점이 두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1680-1750년 사이 잉글랜드에서의 농업생산성 증대가 논의의 초점이 되었다. 농업이 발전하고 생산성이 높아지며 국내 시장을 팽창시킴으로써 산업화의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들은 농업사를 진보의 관점에서 보았다. 영국 농업은 근대에 들어와 지속적으로 성장했고 그것이 산업화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기초를 놓은 사람은 1912년에 <16세기의 농업문제>라는 유명한 책을 쓴 R.H.토니이나 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하여 토지의 보다 집약적인 이용, 농업생산성의 지속적인 증가, 이에 따른 농산물가의 하락, 실질임금의 증가가 대중적인 수요를 확대했고 특히 중산층 소득의 일반적인 증가가 소비재 수요를 확대시켰다고 주장되었다.
 
  농업의 중요성을 가장 대중적으로 설파한 사람들은 필리스 딘과 W.A.콜이다. 이들은 1962년의 <영국경제성장 1688-1959>에서 이런 논의를 일반화했다. 해외무역도 18세기에 국내시장보다 더 빠르게 성장하기는 했으나 국내 수요가 결정적이라고 주장하며 논리를 더 정교하게 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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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커먼의 증기기관(1717). 광산에서 물을 퍼내는데 사용한 이 증기기관은 중요한 기술혁신을 보여주나 에너지 효율은 1%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석탄이 많은 탄광지역에서만 사용되었다.

  과학과 기술의 자율적인 발전도 내적 요인에 초점을 맞춘 설명에서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한다. 데이비드 랜디스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로 이들은 기술적 혁신이 산업혁명을 만든 모든 기회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즉 잉글랜드의 산업혁명은 18세기 말의 우연적인 기술발전의 산물로 나타난다. 기술발전으로 생산비용이 절감되며 해외시장을 하나하나 장악하게 되었고 이것은 마침내 영국이 세계의 공장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해외 수출의 확대는 기술혁신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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