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프레시안 2008-08-29 오전 8:41:37

식민주의와 그 역사적 유산 ⑤
고유문화의 해체와 식민지 문화의 형성

야만인의 교화와 문화적 동화
 
  식민주의가 보여주는 가장 뚜렷한 특징 중의 하나는 문화적인 면에서 나타난다. 식민주의자들이 식민지인의 고유문화를 파괴하고 서양문화에 동화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민지 시대에는 서양문화의 광범한 이식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문화적 침략을 주도한 것은 식민지 정부들이다. 이들 정부는 그 강도는 다르지만 토착문화에 개입했다. 스페인 인들은 이미 16세기부터 유럽화 정책을 시작했다. 물론 그것이 식민지 이전의 사고방식이나 생활양식을 완전히 붕괴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조각조각 해체시키거나 기존의 문화적 가치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데는 성공했다.
 
  이렇게 된 것은 서양 사람들이 식민화를 단순히 식민지인의 지배나 착취만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사명과 관련시켰기 때문이다.
 
  16세기 이래 스페인이나 영국의 식민이론가들은 식민화를 이교도들을 구원할 신성한 계획이라는 관점에서 보았다. 종교적인 면에서 이는 물론 기독교로의 개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복음을 통해 원주민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속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야만인들의 교화'를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유럽 문화가 우월하다는 전제 위에서 식민지인들에 대한 문화적 동화전략은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이를 가장 강력하게 추구한 것이 프랑스이다. 프랑스인들은 유럽 문화 가운데에서도 특히 프랑스 문화가 우월하고 보편적이라고 생각했으므로 프랑스 식민지 어디에서도 강력한 동화 전략을 추구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또 이는 부르주아 이론가들의 경우만이 아니다. 전 세계 노동자의 해방을 추구하는 맑시스트들도 기본적으로 같다. 그들도 '낮은' 사회조직의 단계로부터 '보다 높은' 단계로의 일직선적인 진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므로 어느 지역의 문화나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는 문화적 상대주의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어와 교육의 식민화
 
  문화적인 면에서 가장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언어이다. 서양인들이 식민지인들에게 자국의 언어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제 3세계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용하는 공용어는 식민주의자들이 강요한 유럽 언어들이다. 인도 같은 아시아의 큰 나라나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서 이는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독립 후에도 자신의 말을 공용어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식민주의의 유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경우 제멋대로 그어진 식민지 경계선 안에 여러 종족들이 거주하고 있으므로 독립 후에도 일부 종족의 언어로는 국가전체의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서양언어가 장기간 사용되는 경우 그것 자체가 하나의 기득권을 만들므로 거기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인도가 1947년 독립 후 힌디어를 국어로 하기로 하고서도 그것을 아직 실현시키지 못하는 것은 다른 지방언어들의 견제도 있지만 200년 이상에 걸쳐 영어가 쌓아 놓은 기득권 때문이다.
 
  언어는 단순히 의사전달의 수단만이 아니라 생각의 수단이기도 하다. 사람은 말을 갖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양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자신의 언어가 아니라 서양 언어로 생각하는 방식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서양의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게 되면 그것을 통해 자연스럽게 서양문화를 받아들이고 그에 동화되며 서양적인 가치관을 갖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식민지인들은 학교에서 주로 서양의 언어와 문화, 학문을 배우게 된다. 셰익스스피어와 프랑스혁명, 사회적 진화론 같은 것들을 통해 자연히 서양문화의 우월성을 배우고 그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교과서도 모국의 것을 그대로 가르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와 베트남에서 현지 어린이들이 '우리의
조상인 갈리아인'에 대해 배우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일제 치하의 조선 어린이들이 단군 대신 일본의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을 우리의 조상으로 배운 것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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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영국령 가이아나의 초등학교 식민지 교육. 식민국가의 언어와 교육과정을 가지고 식민지 교육이 이루어지므로 그렇게 자라난 아이들이 식민국가의 문화에 동화되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식민지인들이 이에 저항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사교육이나 신문, 잡지 같은 대중매체들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민족적 정체성을 심어주려 노력했다. 그러는 가운데 민족적 신화가 만들어지고 역사가 미화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식민지 현실에서 공교육을 통한 식민교육의 막강한 힘을 이겨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기독교 선교와 토착 종교의 억압
 
  기독교 선교는 식민주의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 아메리카의 스페인 제국은 교황의 권위를 내세우며 시작되었으므로 식민사업은 교회와 국가의 공동 사업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단기간만 제외하고 16, 17세기 동안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에서 국가와 교회는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갖고 식민활동을 벌였다.
 
  이는 스페인 사람들만은 아니었다. 신교파를 믿은 영국인들도 마찬가지로 선교를 식민지의 중요한 사업으로 생각했다. 1609년에 영국 왕이 북아메리카에 버지니아 회사를 설립하도록 수여한 특허장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 목적 가운데 '아직까지 어둠 속에서, 진정한 지식과 신의 숭배를 모르는 비참함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많은 기독교 선교사들이 식민주의자들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으로 파고 들어간 것은 그 때문이다. 그들은 물론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기독교를 전파하려는 강한 사명감과 열정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 선교는 원주민의 입장에서는 긍정적으로 보기가 어렵다.
 
  기독교가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그 땅에 본래 있던 종교들을 부인하고 원주민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고 하는 독선적인 태도 때문이다. 기독교는, 예를 들어, 선민과 이교도, 선과 악, 구제되는 사람과 저주받은 사람 등 이분법적인 개념에 익숙한 종교이므로 어떤 면에서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에 특히 적합한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또 기독교 선교사들은 세속인들과 마찬가지로 유럽인들의 문화적 우월감을 함께 갖고 있었다. 기독교와 문명은 같은 뜻이고 기독교적인 가르침은 반드시 식민지의 생활을 개선시킬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선교사들이,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간에, 식민지배 체제를 정당화한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식민지 팽창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식민지배 체제를 기본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선교활동과 억압적인 식민정책 사이에는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그래서 선교사들을 '서양 제국주의의 사냥개'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식민주의의 문화적 침략은 식민지인들의 전통적인 가치체계를 뒤흔들어 놓고 파괴했을 뿐 아니라 유럽문화에 종속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일부 서양학자들은 이런 행위가 식민지를 근대적인 세계로 나아가도록 도와준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직도 문화제국주의라는 서양적 야만주의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인들의 정체성 상실과 자기소외
 
  식민지배로 인해 고유문화가 침탈됨에 따라 이는 자연히 식민지인들의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기존의 가치체계를 무너뜨리고 혼란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식민지들은 식민지인이면서도 유럽인이나 일본인처럼 말하고 생각하는 가운데 정신적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사실 식민주의가 식민지에 끼친 가장 부정적인 영향 가운데 하나가 이런 정신적, 심리적 측면이다.
 
  식민지배가 오래 계속되며 식민지 사람들에게는 그들에게 특유한 심리상태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구조화된다. 그것은 먼저 교육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지나 서서히 대중들에게도 전파되며 식민지 전체에 걸쳐 하나의 기본적인 심리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그 심리상태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이다. 즉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것은 식민 통치 아래에서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펼 수 없다는 기본적인 무력감과 좌절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의 자기부정을 가져온다.
 
  결과적으로 식민지인들은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의 인간적인 존엄성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심리상태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죽음이나 형벌을 의미하게 된다. 그것은 식민체제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식민지인들의 심리상태의 또 하나 중요한 요소는 깊은 열등감이다. 식민지인들은 식민통치자들로부터 장기간 멸시, 박해를 받으며 깊은 열등감을 갖게 되고 그것이 심리적으로 내면화된다. 그들은 식민자들을 우월한 인간으로, 자신들을 열등한 인간으로 구분 짓고 그 심리적인 틀 안에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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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츠 파농(1925-1861). 정신과 의사로 알제리 독립투쟁에 참여한 파농은 알제리인의 정신병을 식민주의 하의 병적 상태와 연결시켰다. 그리고 이에서 벗어나기 위한 폭력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이에는 위에서 말한 식민주의자들의 문화적인 공격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식민주의자들이 식민지의 모든 전통적인 문화적 요소들을 부정하고 그것을 낡은 것, 미개한 것, 문화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몰아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식민주의자들의 힘에 의해 증명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식민지인들은 자신의 문화에 대한 모든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식민지배자의 문화에 굴종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다. 이리하여 식민지인들은 자연스럽게 거꾸로 된 가치체계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많은 인도 사람들은 인도인들은 천성적으로 허약하다는 영국 사람들의 주장을 부인하기 위해 스포츠나 남성적으로 보이는 행위에 지나친 열정을 쏟았다. 또 알제리의 처녀들은 알제리 청년들과 결혼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백인인 프랑스 청년과 결혼하여 서양식의 아름다운 주택에서 살려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꿈을 꾸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식민지 사람들의 기본적인 심리 속에는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는 생각, 무언가 충족되지 않고 있다는 깊은 감정이 숨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병적 정신상태는 오랜 치유과정이 없이는 극복되기 어렵다.

출처 - 프레시안 2008-08-27 오전 9:26:47

식민주의와 그 역사적 유산 ④
식민사회와 '정치적 협력자'의 문제

식민사회의 사회적 구성
 
  식민세력이 들어오며 식민지의 전통적인 사회 구조도 무너지게 되었다. 새로 유럽인들이 지배계급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새로이 복잡한 사회구조가 만들어졌다. 이것은 중남미의 경우 특히 더 그렇다.
 
  유럽인, 원주민, 아프리카에서 들어온 흑인 노예들이 뒤섞이며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아주 복잡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지역에 들어온 스페인 사람들이 원주민 여자들과 섞여 살며 혼혈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후손인 메스티조를 우대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래서 피부 색깔에 따라 맨 위에 있는 순수 혈통의 백인으로부터 여러 형태로 피가 뒤섞인 혼혈인, 그리고 인디오로 불린 원주민, 아프리카인의 복잡한 사회적 계층 질서가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백인이고 어머니가 흑인인 경우에는 그 자식이 물라토, 아버지가 백인이고 어머니가 인디오인 경우에는 메스티조, 아버지가 백인이고 어머니가 메스티조일 경우에는 크레올레 등으로 각각 달리 불렸다. 그 계층이 무려 23개나 되며 그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달랐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인종에 따른 이런 사회적 구분은 식민시대에는 물론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순수 백인 혈통을 잇는 사람들이 아직도 지배계급으로서 사회의 최상층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2001년에 페루 대통령으로 인디오 출신인 똘레도가 뽑힌 것은 큰 변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식민주의로 인해 사회가 새롭게 구성되지는 않았다. 대신 식민당국의 지배 아래 두 개로 나뉜 별도의 사회들이 만들어졌다. 하나는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사회이고 다른 하나는 식민통치자들의 소수파 사회였다.
 
  아프리카 식민지의 경우 백인들은 혼혈을 꺼려했다. 열등한 흑인들과 피를 섞으면 백인이 가지고 있는 인종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잃게 된다고 믿었고 또 자신들을 아프리카 사회와는 완전히 단절된 지배자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혼혈인들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적었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차별을 받았다. 이런 흑백분리가 가장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얼마 전까지도 유지되었던 남아프리카연방의 흑백분리정책이다. 울타리를 쳐서 거주지역까지도 분리시켰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여성들에 대한 성적인 착취는 일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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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의 거리 풍경 (1906년). 골드러쉬로 많은 인종의 사람들이 이 도시로 몰려 들었다. 그림에서 보듯이 유럽인은 왼쪽의 포장된 길을 사용하고 아프리카인들은 흙길을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아시아의 전통적 사회구조는 매우 강인했고 또 높은 문화수준을 갖고 있었으므로 유럽인들이 그 사회를 깨뜨리고 새로운 사회구조를 만들 수는 없었다. 처음에 일부 지역에서 혼혈정책이 취해지지 않은 것은 아니나 얼마가지는 못했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와 마찬가지로 식민자들의 사회와 식민지인의 사회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두 사회를 연결하는 집단이 존재한다. 선교사나, 통역자, 중개인, 또는 식민세력에 대한 '정치적 협력자'들이다. 우리로 치면 친일파와 같은 사람들이다.
 
  '협력 이론'과 그 반동성
 
  이 중간집단 가운데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적 협력자'들이다. 이들은 식민세력에 협력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이익을 얻거나 아니면 그들이 이미 누려오던 기득권을 보호받은 집단을 말한다. 반면 식민세력은 이들을 이용하여 적은 비용으로 식민지를 통치할 수 있다.
 
  '협력(collaboration)'이라는 개념을 식민주의 연구에 본격적으로 도입한 사람은 존 갤러거와 로날드 로빈슨이다. 이들은 1950년대부터 협력이라는 개념을 식민주의의 전체 과정을 설명하는 데 사용했다.
 
  그래서 1880년대에 신제국주의가 등장한 것은 그때까지 유지되던 식민지인들의 협력체제가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신제국주의는 그것을 무력에 의해 다시 복구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또 2차 대전 후에 식민주의가 끝나게 된 것은 더 이상 협력체제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식민세력이 협력자들을 완전히 잃은 결과라는 것이다.
  그들의 '협력이론'이 식민지인들의 협력에 초점을 맞춘 점에서 식민지 통치를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식민통치가 언제 어디서나 일방적인 억압이나 강제에 의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이론이 일부 지역 식민지의 통치방식이나 식민주의가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도록 자극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이론을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그 이론이 잘 적용될 수 있는 나라는 인도 외에 별로 없기 때문이다. 영국의 인도 식민지화는 무굴 제국이 망한 후 20여 개로 분열된 인도의 정치세력들과의 동맹이나 제휴, 협력에 의존했다.
 
  따라서 식민지로 만든 뒤에도 인도인 토후들에게 어느 정도 권력을 나누어 준 간접통치 방식을 취했다. 그러나 다른 식민지역에서의 정치적 협력은 자발적이라기보다 대개 억압의 산물이다.
 
  신제국주의나 2차 대전 이후 식민지해체 국면에서 주로 작용한 힘도 협력이 아니라 식민국가들과 식민지 사이의 힘의 관계이다. 협력이 있느냐 없느냐, 또 있다면 그것이 어느 정도냐 하는 것이 대체로 둘 사이의 힘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협력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은 식민국가들이 힘의 관계에서 식민지인에게 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사람은 그 인과관계를 거꾸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이론의 문제점은 다른 곳에도 있다. 식민지배가 식민지인의 협력에 의해서만 가능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식민주의의 책임이 식민국가들보다 식민지인에게 있는 것처럼 전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민통치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협력이 아니라 강제력에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장은 식민주의를 옹호하는 얄팍한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
 
  또 다른 문제점은 19, 20세기에 서양을 본받아 근대화하려던 모든 비서양 세계 사람들을 협력집단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서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제를 복구한 사무라이들까지도 협력 집단에 집어넣고 있다. 협력이라는 개념을 지나치게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명치유신을 단행한 사무라이들의 근본적인 목적은 자국을 근대화함으로써 서양의 제국주의에 대항하려는 것이었지 서양 국가들과의 협력이 아니었다. 물론 그 가운데 일부 협력이 나타날 수는 있으나 그것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이렇게 이 이론은 비양심적이기도 하지만 이론으로서 정밀하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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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8년의 메이지 유신을 준비한 사이고 다카모리, 사카모토 료마를 포함한 일본의 급진적 사무라이들. 이들은 일본을 천황제로 바꾸어 근대 국가로 만들면서 서양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였지만 그렇다고 이들을 서양국가의 정치적 협력자로 볼 수는 없다.

  그런데 이런 엉터리 이론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소비되는 방식을 보면 참 기가 차지도 않다. 최근에 일부 반동적인 학자들이 친일파를 옹호하며 그들을 근대화론자로 찬미하고 있는데 그 이론적 바탕이 바로 이 협력이론이기 때문이다.
 
  이미 반세기가 지난 낡은 이론이고 타당성이 거의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최신 이론인 양 포장해 내 놓는 학자들의 뻔뻔스러움은 이야기할 가치조차 없다. 어떤 식으로든 이해관계가 걸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명색이 한 나라의 집권 여당이라는 정당이 그런 천박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근대화'니 '선진화'니 하고 떠들어 대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근대화만 되면 친일도, 독재도, '무조건 친미'도 좋다는 말인가. 그렇게 해서 어떻게 나라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겠는가.
출처 - 프레시안 2008-08-22 오전 9:23:29

식민주의와 그 역사적 유산 ③
식민지의 경제적 착취

경제적 주권의 박탈과 경제의 기형화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처음 건설한 스페인 왕실이 계속 관심을 가졌던 것이 귀금속의 착취였던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식민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처음부터 경제적 착취이다. 정착식민지의 경우 식민자들은 원주민들로부터 토지를 아예 강탈했으니까 이야기할 것조차 없다.
 
  착취식민지는 이와는 달리 사람에 대한 착취와 물질적인 착취가 함께 목적이므로 경제적 착취는 바로 식민지의 존재 이유가 된다. 그러나 당장의 직접적인 착취만이 피해를 준 것은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것은 그것이 장기적으로 식민지의 경제구조를 왜곡시키고 기형화함으로써 경제적 자립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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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콩고식민지에 대한 벨기에 레오폴트 2세의 가혹한 착취를 상징하는 그림(1906). 콩고는 레오폴트 2세의 개인식민지로서 그 착취는 악명이 높았다.

  식민지 경제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식민지인들이 조세나 무역, 화폐 제도 등에서 주권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식민지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킬 수 없게 되고 자신들의 복리를 위한 경제정책을 취할 수 없게 된다.
 
  또 식민지의 경제관계는 주로 식민 모국과 맺어지게 마련이므로 서양국가들이나 일본 경제에 하위 파트너로 밀접하게 통합된다. 그래서 과거에 다른 나라나 주변 지역들과 맺고 있던 전통적인 경제적 관계들은 깨어진다. 그러니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역도 주로 모국과 이루어질 뿐 아니라 무역제도도 모국에게 유리하게 시행된다. 그리하여 모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수입품에 대해서는 무방비 상태가 되는 반면 높은 관세 장벽 때문에 모국으로의 수출은 불가능하게 된다.
  그 결과 싼 가격으로 밀려들어오는 공산품 때문에 식민지에서 발전하던 수공업이나 산업들은 붕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식민지가 모국의 공산품 시장으로 전락하며 스스로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식민주의자들이 식민지에 철도나 도로, 통신시설, 학교, 농지개간이나 수로 정비 사업 등 사회기반 시설들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특히 철도의 건설은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식민지로부터 원자재를 반출하고 식민지를 모국경제에 보다 밀접하게 통합하기 위한 수단이었지 진정으로 식민지인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인들이 조선에 들어와 가장 먼저 한 일인 경부철도의 건설이 러일전쟁을 위한 군사적 목적 때문이었던 것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이런 자금은 식민지에 대한 가혹한 세금 수탈로 확보된 것이다. 결코 식민당국의 시혜가 아니다.
 
  시기에 따라 식민지의 경제정책이나 제도들이 여러 형태로 변화하기는 했지만 어떤 것이건 식민지 사람들의 경제적 이익이나 자립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식민주의자들이 가져다 준 일부 혜택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요사이에 우리나라에는 일본의 비양심적인 학자들을 따라 '식민지 근대화론'을 내세우며 일제시기에 일본인들이 산업화의 기반을 만들어주었다는 등의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하는 정신 나간 학자들이 있다. 식민지시기에 한국 자본주의의 기틀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식민지 경제가 기본적으로 식민모국을 위해 봉사한다는 초보적인 사실조차 부인하는 이야기이다. 또 우리가 독립한 상태에 있었다면 그 정도도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인데 참으로 자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없는 너절한 주장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강제노동과 토지의 약탈
 
  많은 지역에서 식민주의자들은 식민지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 드물게 노예제도를 채용한 곳도 있기는 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강제노동이 행해졌다.
 
  16세기에 중남미 지역에서 노동력을 필요로 했던 스페인인 지주들은 원주민들을 엔코미엔다라는 제도에 의해 자신들에게 예속시켰다. 스페인 왕이 수여한 권리에 따라 주변 마을 사람들에게 정해진 만큼의 노동을 해 주도록 강요하는 강제노동 제도였다.
 
  아프리카 지역에서도 대가를 지불하건 안 하건 강제노동은 일반적인 노동착취 형태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아프리카 사람들이 대거 동원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아시아 지역에서도 같다. 네덜란드 사람들도 자바 지역에서 커피를 생산하며 중남미에서 비슷한 형태의 강제노동 제도를 이용했다. 일본도 2차대전 때 수많은 조선인들을 군대나 공장에 징용함으로써 노동력을 착취했다.
 
  강제노동보다 더 문제가 심각한 것은 토지의 약탈이었다. 북미지역에서와 같은 '뉴잉글랜드' 형태의 정착식민지에서는 원주민들이 살던 땅에서 모조리 쫓겨났다. 그들은 싸우다 죽던가 아니면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로 쫓겨났다. 한국인들이 이를 '인디언 보호지역'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 알고 하는 소리이다.
 
  다른 지역에서도 기름진 땅들은 거의 정착 식민자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멕시코나 알제리, 로데시아, 남아프리카, 조선 어디에서도 일어난 일이다. 식민지인들은 자신이 농사짓던 땅들을 빼앗기고 소작인, 품팔이 농사꾼이 되거나 다른 곳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일제시기에 전라도의 넓은 평야가 거의 일본인 지주의 손에 넘어간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식민자들은 수출을 목적으로 하는 대규모 농장인 플랜테이션들을 만들어 식민지 농민들의 생활을 전체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사탕수수, 커피, 차, 바나나, 면화, 고무 등 수출용 환금 작물들을 생산하는 농장들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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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 시대 북로데시아의 담배플랜테이션을 선전하는 포스터. 백인들은 플랜테이션이 원주민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강변했다.

  그리하여 일부 식민지의 경우에는 수출작물을 생산하느라고 자신들이 먹을 식량을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모자라는 식량을 높은 가격에 수입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이는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또 이런 경제구조는 그 사회의 성격도 결정지었다.
 
  수출작물의 생산을 통해 큰 돈을 벌고 식민세력의 비호를 받는 백인이나 소수의 원주민 지주세력은 그 사회의 특권적 지배계급이 된 반면 대다수의 농민들은 땅을 잃고 빈민으로 전락하며 엄청난 빈부 차이가 생긴 것이다. 오늘날 중남미 국가들이나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이런 큰 빈부 격차는 바로 식민지 경제의 유산이다.
 
  식민지의 탈산업화
 
  이런 점에서 제 3세계 학자들은 식민 착취가 식민지인들에게 경제적 궁핍을 가져다 준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식민국가의 경제에 기형적으로 예속됨으로써 자생적인 발전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그것을 통해 유럽국가들은 산업화를 이룰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 여기에서 비롯된 경제적 예속성이 독립 이후에도 제 3세계가 선진국과의 교역에서 부등가 교환을 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산업이 발전하지 못한 제 3세계는 값싼 열대작물들과 가격 변동이 매우 심한 광산물이나 팔고, 대신 자동차나 정밀기계 같이 부가가치가 높은 공산품들을 사들여야 하니 계속 부를 유출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식민지배가 식민지 산업의 싹을 잘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유럽중심주의적인 서양학자들은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착취를 부정하는 것은 물론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 해도 이들 지역에서 경제가 발전했을 가능성을 부정한다. 그래서 일부 조건이 좋은 국가들의 경우는 예외이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기술적, 정치적, 경제적 여러 조건들을 갖추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나라들이 그런 조건들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이들은 산업화를 식민주의의 결과로 보지 않고 식민주의를 산업화의 결과로 주장하기도 한다. 산업화로 인해 커진 힘이 비유럽의 식민화를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D.필드하우스가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영국과 인도와의 관계만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면직산업 성장에 있어 벵골 식민지가 한 기여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중요한 식민국가들의 경우에는 대동소이하다. 19세기 말의 후발 식민국가들을 제외하면 이들 나라의 식민주의는 다 산업화보다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게다가 보호관세 없이 식민모국의 공산품 시장이 된 상황에서 식민지들이 스스로 산업을 발전시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18세기까지 이익이 많이 나는 면직물 산업에서 세계에 군림했던 인도가 영국의 식민통치를 겪으며 완전히 탈산업화된 것을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또 서양학자들 가운데에는 착취를 인정하기는 하나 유럽국가들이 많은 것을 얻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P.베록이 그런 사람이다. 그는 식민주의는 산업화로 인해 생긴 힘의 격차 때문이라고 믿으나 그래도 착취를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서양이 식민주의로부터 많은 것을 얻지 않았다고 해서 제3세계가 많은 것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탈산업화를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착취를 통해 유럽이 잘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으니까 이런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사실은 '제3세계에게도 좋은(굿) 뉴스'라고 말한다. 유럽이 식민지를 착취하지 않고도 잘 살게 되었으니까 식민지가 없는 제3세계도 앞으로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식민주의적 착취로 깊은 나락 속에 빠져 있는 제3세계의 암담한 현실을 모르고 하는 엉터리 소리이다.
 
  유럽중심주의적 서양학자들이 얼마나 비도덕적이고 제멋대로의 주장을 하는지 이를 통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부문별하게 받아들여 '굿 뉴스'를 연발하는 국내학자들도 있으니 참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출처 - 프레시안 2008-08-20 오전 11:16:09

식민주의와 그 역사적 유산 ②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와 식민지배 체제

식민주의 이데올로기
 
  16세기 초에 중남미 지역을 정복한 스페인 사람들은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정복의 권리'에서 찾았다. 자기네들이 정복한 땅이니까 그것을 점령하고 다스리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아메리카의 땅과 주민들을 지배하고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일은 도덕적으로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17세기에 북아메리카에 자리 잡기 시작한 영국, 프랑스 사람들은 원주민들의 땅을 불법적으로 빼앗은 것이 아니라 '빈 땅'에 원주민들의 동의와 협조를 받아 정착했다고 주장했다. 자신들의 행위를 스페인 사람들과 차별화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그 자신들에게는 중요했을지 몰라도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들이 곧 울타리치기와 농업을 통해 확보했다고 하는 사유재산권을 '자연법'으로 내세우며 원주민들의 땅을 침범했기 때문이다. 자연법을 내세운 이런 주장은 자신들의 행위를 도덕적인 양 가장하고 있는 점에서 정복의 권리 주장보다 더 악랄한 태도라고 하겠다.
 
  1870년대 이후의 제국주의 시대에 오면 많은 나라들이 식민지 확보를 위해 경쟁을 했으므로 식민지에 대한 요구는 더 노골적으로 나타나고 또 대중화한다. 그래서 유럽 각국의 제국주의자들은 시장의 확보, 원료의 조달지, 자본의 투자처, 과잉인구의 유출지로 식민지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식민지가 있어야 강대국으로서의 위신이 올라간다고도 생각했다.
 
  이러한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데 매우 유용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던 것이 사회적 다윈주의이다. 적자생존을 인간사회에까지 확장함으로써 힘 있는 국가가 힘없는 국가를 지배하는 것을 자연적 질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의 대중화에 앞장 선 것은 독일의 식민협회, 독일과 영국의 해군협회 같은 수많은 제국주의적 정치, 사회단체들이다. 많게는 수백만의 회원을 가진 이들 단체는 식민지 확보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옹호하고 제국주의적 가치를 확산시키며 정부의 식민정책에 압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1908년에 영국에서 창립된 보이 스카웃 같은 소년운동조차 소년들에게 제국주의적 가치를 주입시키려고 애썼다.
 
  19세기 말에 와서 세계경제가 점차 보호무역주의로 돌아가게 되자 이제 제국은 자국경제를 지키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이런 생각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1895-1903년까지 영국의 식민장관을 지낸
조셉 체임벌린이다.
 
  그는 당시의 추세대로 가면 곧 자유무역의 시대가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게 되면 이제 주된 강국들은 제국으로부터 원료를 가져오고, 모국은 공산품을 제공할 뿐 아니라 이민을 내보내는 자족적인 경제블록을 형성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그는 영국이 산업능력이나 군사적 능력에서 점차 국제경쟁에서 패배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국내의 사회문제도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제국의 형성은 이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열쇠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영국과 영국의 백인 정착식민지들을 결합하는 제국적 경제통합을 꿈꿨다. 그러나 식민지인들의 불신 때문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런 생각은 뒤의 경제공황 시기에 상당한 정도로 현실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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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셉 체임벌린

  식민화와 유럽인의 도덕적 책임
 
  그렇다고 유럽인들이 식민 지배를 도덕적인 일로 미화하는데 소홀했던 것은 아니다. 미화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행위가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런 생각의 바탕에는 자신들이 비유럽인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며 우월하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그들이 보기에 비유럽인들은 기독교를 믿지 않으므로 이 세계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비유럽 사람들의 기술 수준은 매우 낮으므로 자연을 잘 지배할 수도 없다. 인종적인 면에서 볼 때 도 비유럽인들은 백인종인 유럽 인들에 비해 열등할 수밖에 없다. 또 열대 지역 사람들은 더운 기후 때문에 천성적으로 게으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식민지인들은 게으르고, 잔인하고, 놀기만 좋아하고, 순진하고, 결단력이 없고, 겉과 속이 다르며, 보다 복잡한 추상적인 생각을 할 수 없고, 이성이 아니라 충동에 따라 행동하는 한심한 존재로 이해되었다. 그러니 이렇게 아직 성숙하지 못한 식민지인들이 유럽인의 보호를 받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19, 20세기에 오면 유럽 사람들은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도덕적인 사명 속에서도 찾았다. 높은 문명 수준을 갖고 있는 유럽의 백인종들이 이들을 가르치고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면에서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치능력이 없고 아시아 사람들은 전제의 폭압 속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이들을 해방시키고 정치적인 훈련을 시킬 필요가 있었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이들에게 제대로 노동을 하는 습관이나, 절약이나 저축 등 여러 가지 경제관념을 넣어 줄 필요가 있었다. 또 문화적 면에서, 식민지 사람들은 나쁜 관습이나 미신, 비도덕적 행위들에서 스스로는 벗어날 수 없으므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식민통치는 유럽 사람들의 선물이자 문명을 나누어주는 은혜로운 행위로, 또 인류애의 발로로 찬양되었다.
 
  기독교 선교는 이런 맥락에서 정당화될 수 있었다. 식민지인들에게 미신이나 낮은 수준의 종교 대신 고등종교인 기독교를 믿게 함으로써 그 도덕성을 높여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서양문명의 혜택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교육이나 의료사업을 병행했으므로 이런 주장이 어느 정도 먹혀들어갈 소지도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 선교사업은 약간의 문화적 혜택을 가져다 준 것은 사실이라 해도 식민지의 토착 문화를 파괴함으로써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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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간다의 알프레드 터커 주교와 영국 교회선교회 소속 첫 여성 선교사들(1896년)

  F.D. 러가드는 나이지리아 총독을 지내기도 한 영국의 식민지 관리인데 두 가지의 도덕적 사명을 주장했다. 하나는 유럽문명의 복음을 식민지에 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방치되어 있는 식민지의 자원들을 세계경제를 위해 이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러가디즘이라고 해서 20세기 초에 유럽 각국에서 널리 받아들여진 주장이다.
 
  키플링이라는 영국 시인이 '백인의 짐'을 지자고 호소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백인의 가장 훌륭한 아들들을 보내 식민지인을 돕게 하자는 것이다. 식민지인들이 져 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은 짐을 지겠다고 엉뚱하게 나서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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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년생인 러드야드 키플링은 인도 식민지 태생으로 많은 시와 글들을 통해 이미 19세기 말에는 식민주의, 군사주의를 옹호하는 영국의 가장 유명한 문필가가 되었다. '백인의 짐'은 식민주의자들의 도덕성을 주장하는 가장 유명한 시 가운데 하나이다.

  가혹한 식민지배 체제
 
  그러나 실제의 식민지배는 인류애에 가득 찬 이런 갸륵한 주장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식민지배 체제란 식민주의자들이 식민지인들의 정치적 주권을 빼앗고 자유를 박탈함으로써 식민지인들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게 만드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식민국가의 성격이나 식민지가 위치해 있는 지역에 따라 식민체제의 성격은 조금씩 달랐다. 그러나 식민지인을 억압하고 식민지 착취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어디에서도 식민지인들은 정치, 외교, 군사적 자주권을 빼앗기게 된다. 또 식민지는 식민국가들의 요구와 이익에 봉사하는 방향으로 다시 짜여진다. 그러므로 식민지인들은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부인당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식민지배 체제는 식민지인들에게는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것이고 악일 수밖에 없다.
 
  아프리카의 경우를 보면 정치적인 면에서 식민주의가 갖고 있는 이런 부정적인 성격들을 잘 알 수 있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식민지의 많은 경계선을 자기들끼리의 타협에 의해 제멋대로 만들었다. 오늘날 아프리카 국가들의 국경선에 직선으로 된 것이 많은 것이 그 결과이다.
 
  이 경계선들은 종족이나 문화, 지리, 또 생태학적인 문제를 도외시한 것임에도 독립 이후 그대로 새 국가들의 국경선이 되었다. 그래서 한 종족이 여러 나라로 분산된 경우나 한 국가 안에 여러 종족들이 같이 사는 경우가 매우 많다.
 
  또 나라 사이에 자연자원이나 경제적인 능력 면에서 너무나 큰 차이가 존재한다. 어떤 나라는 너무 크고 어떤 나라는 너무 작으며 어떤 나라는 풍부한 지하자원을 갖고 있는 반면 어떤 나라는 사막밖에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강물을 이용하는 문제, 바다로의 출구 등 많은 문제를 두고 수많은 국제적 분쟁이 생겨나고 있다. 이 대부분이 잘못된 식민지배의 유산 때문이다.
 
  게다가 식민당국자들은 식민통치를 쉽게 하기 위해 분할통치 정책을 취했다. 일부 종족에게 특권을 주어 다른 종족과 대립하게 함으로써 여러 종족들이 함께 단합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종족 사이의 분열은 독립 후에도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서 고질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아시아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종족간의 분쟁이 가끔씩 종족학살 같은 극단적인 형태로 치닫기도 한다.
 
  서양인들은 이런 종족학살을 제3세계인의 미개성 탓으로 돌리고 자신들은 문명인인 듯이 자랑하나 이는 매우 잘못된 태도이다. 그 원인을 만들어 준 것이 서양인들이기 때문이다. 또 종족이나 민족 사이에 이해관계가 충돌하면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어느 곳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유럽도 예외가 아니다. 2차대전은 유럽인들의 영토확장욕의 산물이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또 유대인, 집시 등 많은 소수종족들이 학살을 당했다. 아프리카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또 식민국가들은 관료제도와 군사제도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현지인들을 흡수하여 만든 이 제도들은 식민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지 식민지의 근대화나 식민지인들의 복리를 위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이런 제도는 식민지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동족을 억압하던 이들 식민지 관리나 군인들이 만든 전통은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에 그대로 살아남음으로써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나라를 만드는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국가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걸핏하면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출처 - 프레시안 2008-08-15 오전 8:00:39

식민주의와 그 역사적 유산 ①
식민주의, 왜 지금까지도 문제인가

식민주의의 의미
 
  15세기 말은 세계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다. 이 시기에 유럽인들이 아시아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했을 뿐 아니라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도 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의 500년은 유럽인들의 힘이 전 세계로 팽창해 나간 시대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아메리카를 정복하여 식민지화 했으나 점차 힘이 커지며 나중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에도 식민지들을 건설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세기에 이르러 몇몇 유럽 국가들은 본국의 수십 배 크기의 광대한 식민제국을 건설하며 강대국이 되었다.
 
  식민주의는 간단히 말하면 이렇게 해외에 식민지들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한 이념이나 실천을 말한다. 즉 군대와 관리들을 파견하여 식민통치 체제를 만들고, 본국인을 옮겨 살게 하거나 토착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하여 식민지가 본국에게 쓸모 있게 만들려는 이념이나 실천이다.
 
  콜럼버스로부터 시작된 유럽의 식민주의는 1520, 30년대에 스페인인이 중남미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궤도에 올라갔다. 포르투갈인은 아시아 무역에 참여하며 곳곳에 무역거점들을 만들었으나 이는 식민지라고 하기는 어렵다. 유럽인들이 아시아의 대제국들에 범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7세기에는 영국인이나 프랑스인이 북아메리카 지역의 식민화를 시작했다.
 
  그러나 식민주의가 본격화한 것은 1757년에 영국인이 인도의 벵골 지역을 시작으로 인도 전체를 식민화하면서부터이다. 1780년대에 유럽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이에 큰 힘을 실어 주었다. 산업화로 인해 가능해진 강력한 군사력이 세계의 힘의 균형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19세기에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의 식민지화는 가속되었다. 특히 1880년대부터 시작되는 신제국주의 시대에는 아프리카의 거의 전 지역이 유럽국가들에게 경쟁적으로 분할되며 비서양지역의 95% 가량이 유럽국가들이나 미국, 일본의 식민지나 반식민지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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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는 1880년대에 시작된 아프리카 쟁탈전으로 20년 사이에 53개의 유럽식민지로 완전히 분할되었다. 20세기 초의 아프리카 지도

  식민주의는 2차대전 후에야 끝나게 되었다. 식민지인들의 끈질긴 저항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한 유럽 식민국가들의 약화, 냉전체제로 바뀌는 국제정치의 흐름이 더 이상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영국은 시대의 흐름을 알아차리고 이에 순순히 따랐다.
 
  그러나 프랑스나 네덜란드, 벨기에 같은 나라는 끝까지 식민지를 내놓지 않으려고 했으므로 장기간의 가혹한 식민지 해방전쟁이 뒤이었다. 그럼에도 식민지 해방이라는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결국 1960년대에 이르러 세계의 거의 모든 식민지가 해방되기에 이르렀다.
 
  식민주의의 유산
 
  독립을 얻은 식민지인들은 해방이 되기만 하면 모든 문제들이 한꺼번에 다 해결될 것으로 믿었다. 정치적 무질서나 억압, 경제적 빈곤, 사회적 불평등, 문화적 예속 같은 모든 문제들을 다 식민통치의 결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들의 기대는 빗나갔다. 해방 이후 반세기가 지났지만 과거의 식민지들인 대부분의 제 3세계 국가들은 아직도 과거와 비슷한 상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거의 식민국가들인 선진국에게 정치,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독립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식민통치라는 과거의 직접지배가 이제 보다 교묘한 간접지배로 모습을 바꾸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가까운 장래에 이런 상태에서 벗어날 가능성도 별로 없어 보인다. 사실 지난 수 십 년 사이에 제3세계 후진국들과 선진국들 사이에, 즉 남·북 사이의 경제적 격차는 더 커졌다.
 
  제3세계 국가들은 빈곤과 기아, 자연재해로부터 계속 고통을 받고 있고 그것이 완화될 조짐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한국 같이 식민지에서 시작해 거의 선진국에 근접한 경우는 희유한 예이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식민주의는 겉으로는 사라졌으나 아직도 제 3세계인들에게는 무거운 짐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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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아로 죽음 직전에 몰려 있는 아프리카 소말리아의 어린이(1995). 오늘날 선진국과 후진국의 경제적 격차를 상징하는 남북문제의 주된 근원은 식민주의에 있다.

  그러면 제3세계국가들이 이렇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제3세계 학자들은 모든 문제의 근원을 식민주의에게 돌린다. 식민주의가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의 자생적인 정치적, 경제적 발전을 가로막았고 사회적 불평등을 조장했을 뿐 아니라 문화적 창조성도 억눌렀다는 것이다.
 
  반면 많은 서양학자들은 그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식민지배에는 부정적인 영향도 있고 긍정적인 영향도 있으나 긍정적인 점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식민지를 근대화하고 문명의 혜택을 가져다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서양학자들 가운데 양심적인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유럽중심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온갖 엉터리 이론이나 주장을 내세우며 식민주의를 옹호하고 정당화한다.
 
  사실 식민주의 문제는 제3세계 학자들과 서양학자들 사이에 원천적으로 첨예한 의견대립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주제이다. 물론 제3세계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을 무조건 식민착취에 돌리는 것도 옳지는 않다. 그러나 서양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식민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그럼에도 일부 국내학자들 가운데에는 이런 잘못된 서양이론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식민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요사이 일부 학자가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이나 '협력이론'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일제 시대에 근대화가 이루어졌고 친일파는 근대화를 추구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근대화만 이루어지면 주권은 아무 관계도 없다는 식의 이야기이니 참으로 한심한 이야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태도에는 현실정치적 이해관계도 관련되어 있겠으나 한 편으로는 서양이나 일본학문을 선진학문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 일제의 식민시대를 경험했고 아직도 그 유산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국 같은 나라에서 이렇게 무비판적인 수준을 넘어서서 식민주의에 영합하는 태도는 참으로 몰지각한 일이다.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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