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프레시안


<2> 헤겔에서 홉스봄까지 - 유럽중심주의 역사학은 누가 만들었나


유럽중심주의 역사학의 성립
 
  유럽중심주의적 생각은 역사학뿐 아니라 대부분의 근대 유럽 학문에서 나타난다. 이들 학문이 18세기나, 또 유럽의 우월이 확실해진 19세기에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강력한 모습을 갖고, 또 체계적으로 나타나는 분야가 역사학이다. 유럽 사람들이 유럽문명의 창조성과 독특성을 주로 역사학을 통해 보여 주려했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관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앞에서 말했지만 18세기부터 유럽에서 발전한 진보와 문명이라는 개념이다. 진보는 인간의 지적이거나 물질적인 능력이 커지며 인간의 역사는 무한히 발전하여 세상은 사람이 살기 좋은 곳으로 된다고 믿는 것이다. 이는 17, 18세기에 유럽이 이룬 커다란 정신적, 물질적인 성장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문명은 진보의 결과로서 당시 유럽인이 이룬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생각하는 수준의 문화를 말한다. 그러니까 진보와 문명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셈이다. 이리하여 서양인에 의해 19세기에 널리 받아들여진 역사관이 진보사관이다.
 
  결과적으로 진보를 대표하는 유럽의 역사는 유럽 지역의 역사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를 중심에서 이끌어가는 보편사의 지위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비유럽 세계의 역사는 유럽인에 의해 발견되거나 정복됨으로써만 역사의 주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유럽에서 진보사관이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세계의 역학 관계 변화이다. 17, 18세기만 해도 인도나 중국은 강력한 힘을 갖는 아시아의 대제국으로 유럽 국가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이후 아시아 국가들이 쇠퇴한 반면 유럽 국가들의 힘이 산업혁명으로 급격히 커지며 상황이 달라졌다. 인도는 1757년의 플라시 전투로 벵골 지방을 빼앗기며 점차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했고 중국도 1840년의 아편전쟁으로 무장해제를 당하고 유럽 국가들의 반식민지 상태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유럽인들이 아시아의 대제국들에 대해 갖고 있던 존경심이나 동경은 모두 사라졌다. 대신 아시아에 대한 경멸적인 고정관념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유럽이 우월한 이유
 
  따라서 19세기 이후의 서양 역사학에서는 유럽이 이룩한 성과를 설명하고 비유럽 지역에서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를 밝히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종교, 인종주의, 환경, 문화 등 여러 가지 설명 방식이 동원되었다.
 
  유럽인들은 그들만이 진정한 신인 여호와 신을 믿고 있고 그 신이 유럽인들의 역사를 진보로 이끈다고 생각했다. 기독교적 원리가 다른 종교에 비해 우월하며 더 윤리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19세기 초에 특히 널리 믿어진 주장이나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다.
 
  인종주의적인 설명은 인종에 따라 사람의 능력에는 우열이 있다는 관점에서 역사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는 18세기 후반에 인종주의가 이론화하며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백인종은 황인종이나 흑인종에 비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우월한 자질을 유전적으로 갖고 있고 따라서 더 우월한 문화를 건설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런 식의 주장을 공공연하게 할 수 없는 분위기이지만 그래도 서양의 많은 역사학자들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자연환경과 결부하는 설명 방식은 역사가 매우 오랜 것이다. 그리스의 자연을 찬양한 헤로도토스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을 근대의 유럽인들이 빌려온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유럽의 토질이 특히 비옥하다든가, 기후가 따뜻해 농사짓기에 좋다든가 비가 계속 적당히 내린다든가 자연재해가 적고 질병도 적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한다.
 
  문화적 설명방식은 유럽인의 문화적 창조능력을 특히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럽인들이 오랜 옛날부터 독특하게 진보적이고 창조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는 것이다. 사유재산제나 자본주의, 자유로운 도시의 발전,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 개인주의, 민주주의는 모두 그 창조성의 산물로 생각된다.
 
  이런 주장들은 많은 경우 사실과 맞지 않기도 하지만 역사의 설명방식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종교나 인종과 결부시키는 설명은 오늘날 거의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유럽의 자연환경이 특별히 좋다는 주장은 사실과 맞지 않는 내용이다. 또 유럽인의 문화적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는 주장도 독단적인 주장으로 증명되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런 주장들은 유럽인들이 만들어낸 매우 잘못된 편견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3) 유럽중심주의 역사학은 누가 만들었나
 
  헤겔과 '자유'로서의 역사
 
  그러면 먼저 유럽중심적인 역사가 서양 역사가들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간단히 살펴보자. 19세기 사람으로서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 독일의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헤겔과 사회주의 이념의 창시자인 칼 맑스, 역시 독일의 사회학자이자인 막스 베버이다. 베버는 20세기 초까지 활동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프리드리히 헤겔

  프리드리히 헤겔 (F..Hegel, 1770 - 1831)은 독일의 유명한 관념론 철학자이지만 <역사철학>이라는 책을 써서 19세기 사람들이 역사를 보는 눈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이다. 그는 그 책에서 역사의 진보가 어떻게 근대 유럽에 와서 그 가장 꼭대기에 도달했는가를 보여주려 했다.
 
  그의 역사관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자유이다. 그에게 자유란 사람이 생각하는 힘인 이성을 통해 자연이 주는 한계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세계사란 자유라는 이념이 스스로를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자유가 고대 세계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확대되어 왔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그는 인간이 세계사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유라는 정신적인 작용이 스스로를 그렇게 발전시켜 나간다고 믿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잘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래서 그를 관념철학자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역사의 발전 단계를 셋으로 나누었다. 오리엔트 세계, 그리스 · 로마 세계, 게르만적 세계가 그것이다. 오리엔트 세계가 가장 낮은 단계에 있고 그리스 · 로마세계가 그것을 넘어선 다음 단계이고 게르만 세계가 그것을 넘어선 가장 높은 단계라는 것이다. 그는 그 가운데 오리엔트 세계, 즉 동양 세계는 고대나 현대나 별 차이 없는 상태에 있다고 믿었다. 즉 그 문화가 정체되어 있다고 믿은 것이다.
 
  따라서 이성과 자유를 스스로 실현시켜 나아가는 세계사는 자연히 유럽을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세계사의 전체적인 흐름인 '보편사'의 운동은 아시아에서 시작되었으나 서쪽으로 움직여 마침내 유럽이 그 절대적인 종착점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칼 맑스와 아시아적 생산양식론
 
  칼 맑스(K.Marx : 1818-1883)는 사회주의 사상을 만들어냄으로써 19세기 후반 이후 세계사의 움직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상은 최근에 러시아나 동유럽에서 사회주의 체제들이 무너질 때까지도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는 사회주의자로서 억압받는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해 평생 학문적, 실천적인 노력을 쏟았고 그래서 그의 사상에서 인류애적인 요소는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의 사상에서 비유럽이 차지하는 역할은 그런 것과는 전연 관계가 없다. 그가 자신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자본주의인데 자본주의는 유럽에서만 발전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류의 역사 발전을 사회에서 생산이 이루어지게 하는 방식인 생산양식에 따라 원시공동체 사회, 고대노예제 사회, 중세봉건제 사회, 근대 자본주의 사회, 미래의 사회주의 사회로 구분했고 한 생산양식에서 다른 생산양식으로 넘어가는 것은 그 생산양식 내부의 모순에 의해서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사회는 봉건 사회라는, 유럽에서 나타난 생산양식 자체 내의 모순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칼 맑스

  반면 아시아의 생산양식은 고대노예제 생산양식의 변종인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다. 아시아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이 고대적인 생산양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정체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봉건적 생산양식을 경험하지 못한 아시아는 자본주의로 발전할 가능성을 아예 갖고 있지 않은 셈이다.
 
  맑스는 이렇게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유럽의 경험에 의존하여 역사의 발전 단계를 구성하고 그것을 비유럽지역에도 적용했다. 그러니 유럽의 경험과 다른 아시아 등 다른 지역은 보편적인 역사과정에서 벗어난 것으로 평가 절하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그의 정신적 스승인 헤겔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막스 베버와 합리성
 
  사회학자이자 역사학자인 막스 베버( 1864 - 1920)는 약 한 세기 전에 활동한 사람이지만 지금까지도 대단한 명성을 누리고 있다. 그것은 그가 출중한 능력을 갖고 많은 훌륭한 학문적 업적을 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이유도 있다. 그가 대표적인 유럽중심주의적 이론가의 한 사람으로서 서양인들에게 큰 우월감과 자부심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막스 베버

  사실 그가 평생토록 한 학문적 작업은 왜 유럽에서는 진보와 근대화가 가능했고 비유럽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종교, 봉건제, 도시, 관료제, 법제도, 국가형태, 자본주의 등 온갖 주제를 통해 증명하려 했다.
 
  이때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개념이 합리성이다. 유럽에는 합리성이 있어 그것이 가능했고 비유럽에는 그것이 없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즉 유럽의 합리성과 비유럽의 비합리성, 전통성을 대비시켜 비유럽 세계의 후진성을 증명하려 하는 것이다.
 
  그는 유럽은 이런 합리적 경향을 고대 그리스로부터 발전시켜 왔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것은 유럽인들이 그렇게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발전만 하더라도 그는 그것을 합리적이라고 믿은 프로테스탄트(신교파)윤리와 결합시켰다.
 
  즉 열심히 일하고 낭비하지 않고 돈을 모으려는 프로테스탄트들의 합리적인 태도에 의해 자본 축적이 가능했고 그것을 이익이 남는 건전하고 윤리적인 사업에 투자함으로써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이런 합리성에 의해 그는 서양에서만 보편적인 의미와 가치를 갖는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고 서양에서만 과학이 발전했으며 체계적인 신학은 오직 기독교에서만 발전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반면 비유럽세계에서는 이런 합리적인 태도가 불가능했다. 아시아 사람들만 하더라도 그들은 고대로부터 초월적인 종교나 미신에 빠져서 스스로의 자신을 의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자신과 외부 세계를 나누어 구분하는 자의식(自意識)이 없으니 세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고 따라서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시아는 서양에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의 주장이 온통 유럽문명에 대한 찬양으로 뒤덮여 있으나 그런 주장들이 정당한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주장들의 많은 부분이 비유럽세계에 대한 잘못된 정보, 무지, 편견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역사가들
 
  이런 태도는 20세기 후반의 역사가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 가운데 몇 사람의 예를 들어보자. 페르낭 브로델은 프랑스에서 사회경제사를 주로 연구하는 '아날학파'라고 하는 유명한 역사학파의 대표적인 역사가이다. 그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서양 역사가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로 유명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페르낭 브로델

  그러나 비유럽 세계에 대한 그의 생각은 19세기 사람들의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는 아시아 문화가 너무나 고대적이고 어디에서나 꼭 같다고 말함으로써 헤겔적인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또 중세도시가 자유로웠다는 베버의 주장, 르네상스를 근대적인 시기로 보는 부르크하르트의 주장 등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근대적인 유럽과 전근대적인 아시아를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다. 아시아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조르즈 르페브르는 프랑스 혁명에 관한 기존 해석의 대표적인 역사가이다. 맑스주의자인 그는 프랑스 혁명을 계급투쟁으로 보아 부르주아 계급이 귀족계급을 타도하고 부르주아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보았다.
 
  부르주아 혁명으로 왕의 전제가 무너지고 민주적인 질서가 수립될 수 있게 되었고 봉건적인 신분제도가 파괴되며 모든 사람들이 법 앞에서 평등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또 중상주의적 제약에서 벗어나 자본주의를 자유롭게 발전시킬 수 있었고 합리적인 근대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혁명의 이념인 자유, 평등, 우애가 전 세계를 일주했다고 자신만만하게 선언한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이 근대사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전형적인 유럽중심주의 해석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에릭 홉스봄 (Eric Hobsbawm, 1917 ~ ), 20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맑스주의 역사가

  영국의 대표적인 역사가의 한 사람인 에릭 홉스봄은 최근 민족주의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다. 민족주의의 주류적 해석이라고 할 '근대주의적 해석'의 주도 인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는 민족이 근대 자본주의의 산물이고 민족이 민족주의를 만든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가 민족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민족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적 정체성은 대수로운 것이 아니며 쉽게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많은 민족주의는 반동적인 지배계급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전시킨 것이므로 관제민족주의의 성격이 강하고 따라서 억압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제 지구화 시대에 들어섰으므로 민족과 민족주의는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민족이 전근대 역사 속에서 발전해온 과정을 경시한다. 또 민족주의가 내부적 요인이 아니라 국가 사이의 경쟁이라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 발전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더 나아가 민족주의가 선진국의 억압에 저항하는 힘으로서 제3세계인들에게 아직도 큰 도덕적인 힘이라는 사실을 무시한다. 전형적인 유럽중심주의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만이 아니다. 그 정도는 다르지만 서양 역사가들의 거의 대부분이 알게 모르게 유럽중심적인 역사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양 사람들이 쓴 역사책에서 이런 점들을 주의하지 않으면 문제가 많이 생긴다. 그들의 잘못된 주장에 세뇌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양 역사가들이 어떤 주장을 할 때 그 주장이 어떤 전제 위에 서 있는지, 그들의 주장 가운데 혹시 유럽중심주의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지나 않은지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있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7-10-23 오전 12:48:30

 

<1> 유럽중심주의 역사관의 해악 - 역사는 객관적으로 쓰여지지 않는다



연재를 시작하며
 
  오늘날 우리가 보고 배우는 서양사나 세계사는 유럽중심적 시각에 의해 크게 왜곡되어 있다. 유럽 내지 북미지역을 포함하는 서양 세계를 세계의 중심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양은 탁월한 문명을 발전시킨 우월한 지역으로, 비서양 세계는 야만적이고 정체된 지역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서양의 우월이라는 것은 19세기, 정확히는 1840년의 아편전쟁 이후의 일이고 그 전까지의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양인들은 근대에 있어서의 유럽의 우월을 고대까지 소급시키려는 잘못된 태도를 갖고 있다. 서양은 그리스시대부터 어디에도 비견할 수 없는 뛰어난 문명을 이루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세계사라는 것이 왜곡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서양사 나아가 세계사의 이렇게 잘못된 점을 바로 잡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래야 우리가 세계에 대해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고 서양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가 오늘날 미국에 대해 정신적으로 예속되어 있는 것도 모두 이런 상황의 결과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강철구 교수의 '한국인의 정신을 깨우는 세계사 다시 읽기'는 그런 점에서 우리의 학문적 자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다. 그는 약 10년간 서양사와 세계사를 우리 눈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매달리고 있으며 이 연재물은 그 성과의 일부이다. 이와 관련된 강 교수의 책으로는 <역사와 이데올로기 1, 용의 숲, 2004>가 있다.
 
  이 시리즈는 매주 2회(화, 목요일) 게재된다. <편집자>
 
 
필자 약력
 
  1979-1988: 청주사범대학(현 서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1989-현재 : 이화여대 인문대 사학전공 교수
  민족주의 연구회 회장 역임
  계간 <민족현실> 발행인 역임
  현 민족미래연구소 이사장
 
 
1. 세계사를 어떻게 바로 볼 수 있을까
 
  1) 역사는 객관적으로 쓰여지지 않는다
 
  '역사'의 쓸모 있음
 
  역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끊임없이 역사와 접하기 때문이다. 역사책은 말할 것도 없지만 TV나 영화에서의 사극이나 역사 다큐멘터리, 나아가 어른이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옛날이야기까지도 모두 역사의 일부이다.
 
  역사소설도 마찬가지이다. 다빈치 코드 같은 베스트셀러 소설책도 추리소설의 기법으로 씌었지만 예수의 성배 전설을 현실로 끌고 온 일종의 역사소설이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에 매우 친숙하다.
 
  그러다보니 어떤 사람들은 전문 역사가는 아니지만 큰 열정을 가지고 역사 연구에 평생을 바치기도 한다. 단군이나 고구려 등 우리 고대사를 공부하고 책을 펴내는 적지 않은 수의 아마추어 역사학자들이 그런 예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역사를 제대로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일반인 수준에서는 역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한 역사 '읽기'나 '공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학'을 이야기하려면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그럼에도 지적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E. H.카의 널리 알려진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기도 하고 그 책에 나오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든가 하는 이야기를 되뇌며 자신의 역사 지식을 과시하기도 한다. 역사가 그만큼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역사는 중요하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온 오랜 경험을 기록한 것으로 인간과 그 사회를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사람들이 행동하는 방식은 수천 년 전의 옛날이나 지금이나 거의 차이가 없으므로 옛날 사람들의 행적을 살펴 오늘날의 교훈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1세기에 사마천의 <사기>, 서양에서는 기원전 5세기에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나온 후 수많은 역사책들이 세대를 이어가며 정치가나 군인들, 학자와 지식인들, 또 공부하는 학생들의 필독서가 된 것은 그 이유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중국 한대의 대표적인 역사가로 <사기>를 쓴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년? - 기원전 86년?)

  역사의 이런 유용성은 특히 역사학이 갖고 있는 구체적인 성격에서 비롯된다. 역사적 사실은 항상 언제, 어디서라는 구체적인 상황과 연결된다. 이렇게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의 구체적인 인간의 행위를 다루기 때문에 그 지식이 다른 학문의 경우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현실적인 유용성을 갖는 것이다.
 
  근대 역사학과 객관성
 
  이렇게 역사가 유용한 지식이기는 하나 그것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그대로 전달해 준다는 전제 위에서이다. 정확한 사실 위에 서 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허구에 바탕을 둔 소설이나 진배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역사의 진실성 문제가 나온다. 역사는 어떻게 진실성을 갖게 될까?
 
  서양 사람들도 18세기까지는 역사를 단순히 실용적인 학문으로 생각했으므로 과거에 일어난 일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책에는 사실과 역사가의 상상이 뒤섞여 있었다.
 
  이런 사정이 바뀌는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서양학문들은 19세기에 들어와서 자연과학의 영향을 받아 점차 객관성을 중시하게 되는데 역사학도 그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역사학에서 그 일을 처음 시도한 사람은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는 칭송을 받는 독일사람 레오폴트 랑케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랑케 (Ranke, Leopold von), (1795~1886), 근대 역사학을 처음 시작한 19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역사가

  그는 역사를 쓸 때 역사가의 상상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고 엄격한 기준에 의해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정확하게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역사 연구란 '그것이 원래 어떠했던가'를 밝히는 일이라고 말한 것이 그 뜻이다.
 
  이를 위해서는 역사를 쓰기 위한 재료인 사료를 잘 다루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옛날 문서나 책, 비석, 고고학적 유물 등 사료들을 아무렇게나 이용해서는 안 되고 쓸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엄격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료 가운데에는 쓸모없는 것도 많고 또 의도적으로 날조된 것들도 섞여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랑케의 이런 태도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가 당시의 사람들로 하여금 처음으로 역사적 사실 그 자체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많은 역사가들이 랑케를 본받으며 19세기 말에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역사학이 근대적인 객관적 학문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20세기에 들어와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역사학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학문이라는 사실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자연과학과 같이 역사학도 보편적인 과학적 원리에 따른 학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역사 쓰기와 객관성의 한계
 
  그러면 객관적인 역사 쓰기는 정말 가능할까? 엄격하게 말해서 그것은 불가능하다. 불행히도 인간이 한 모든 일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단지 그 일부만이 요행히 살아남을 뿐이다. 이는 개인들이 일기를 써 놓지 않는 한 시간이 지나면 자기가 한 일들을 거의 잊어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남아 있는 사료 가운데에는 일부러 남긴 것들이 있다. 어떤 왕을 기리기 위해 그의 치적을 비석에 새겨두는 경우가 그것이다. 반면 무덤 속에서 발견되는 여러 부장품들과 같이 후세에 남기려고 한 것은 아니나 우연히 남은 것도 있다. 또 옛날 책이나 문서들도 좋은 사료가 된다. 역사가는 남아 있는 이 사료들을 가지고 과거에 일어났다고 생각되는 일을 다시 엮어 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삼국사기, 삼국사기는 역사책으로 쓰인 것이나 오늘날에는 훌륭한 사료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역사가의 사관(史觀)이다. 사관이란 말 그대로 역사를 보는 눈이다. 사관은 처음 사료를 골라내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그것을 해석하여 역사를 재구성하는 전체 과정에 간여한다.
  사료가 너무 많으면 그것을 다 이용할 수 없으니까 그 가운데 필요한 것만을 골라내야 한다. 이때 무엇을 골라낼까를 결정하는 데 사관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 그 사료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데도 영향을 준다. 심한 경우에는 같은 사료를 놓고도 사관의 차이에 따라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사관이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개인의 기호나 욕망, 편견, 또 그가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 등 여러 가지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 지방색이나 민족의식 같이 그가 속해 있는 집단의 영향도 받는다. 현재라는 시점이 주는 영향도 크다. 누구나 현재에 서서 과거를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가가 이런 한계들을 넘어서서 엄격하게 객관적인 역사를 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역사를 쓰려고 해도 자신의 편견이나 세계관, 이념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객관적'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일 뿐이다.
 
  유럽중심주의 역사관의 해악
 
  이것은 랑케의 경우를 보아도 확실히 알 수 있다. 랑케는 역사를 객관적으로 쓰기 위해 자기 자신을 '없애버리고 싶다'고까지 이야기할 정도로 이를 중시했다. 그래서 그와 그의 제자들이 독일 역사학을 객관적인 학문으로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럼에도 그가 기초를 놓은 독일 역사학은 매우 이데올로기성이 강한 역사학으로 19세기 이후 독일의 발전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이 독일의 특수성을 강조하고 프러시아의 권위주의적 국가를 받듦으로써 독일인이 배타적인 성격을 갖게 하고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이는 객관성이라는 것이 역사를 쓰는 방법상의 문제일 뿐이고 그것이 역사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서술되는 것을 막아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독일 역사학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사실 서양의 역사학은 19세기 이래 크고 작은 수많은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아 왔다. 자유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인종주의, 식민주의 등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폭 넓은 영향을 미친 것은 유럽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이데올로기인 유럽중심주의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트라이치케 (Treitschke. Heinrich von )의 초상. 트라이치케는 랑케의 계승자로서 19세기 독일 대표적인 민족주의 역사학자이다.

  그것이 다른 이데올로기들을 그 밑에 집어넣든가 함께 결합하며 서양사 나아가 세계사의 해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근대 서양인들이 유럽이 우월하다고 하는 관점에서 외부 세계를 보려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서양 사람들이 쓴 많은 서양사나 세계사 책들은 대부분 노골적이든 아니든 유럽중심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다.
  이는 비서양인들 입장에서 보자면 심각한 문제이다. 서양만을 중시하며 비서양 세계의 발전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거나 또 서양세계에게 예속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비서양 역사가들이 서양 역사가들이 쓴 이런 유럽중심주의적 서양사나 세계사를 객관적인 학문으로 생각하여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서양 역사학을 선진 학문으로 생각하는 탓이다.
 
  이것은 한국에서도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많은 경우 서양 역사가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 들일뿐 아니라 서양 사람들의 유럽중심주의적인 관점을 서양인들보다 더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웃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 결과는 말할 필요도 없다. 유럽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세계의 중심이고, 모든 합리적이고 진보적이고 과학적인 것은 유럽과 미국의 산물이다. 반면 아시아나 아프리카는 고대로부터 문화가 정체되어 온 후진적인 지역으로 근대성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근대에 들어와 서양국가들이 비서양 지역을 식민 지배한 것이나 오늘날의 불평등한 세계질서는 힘의 우열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서 정당화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인식이 객관적인 역사연구의 결과라면 문제 삼을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서양사나 세계사의 실제 사실과 상당 부분 맞지 않는다. 또 그것은 상당 부분 유럽중심주의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그러니 그것을 그대로 받아 들여서야 되겠는가? 먼저 유럽중심주의 이데올로기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부터 잠깐 살펴보자.
 
  2) 유럽중심주의와 그 역사학
 
  '유럽'은 근대의 산물
 
  요사이 유럽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학생 때 배낭여행을 갔다 온 사람도 많고 관광여행을 다녀오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가보지는 않았다 해도 매스 미디어를 통해 자주 접하니 친숙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럽 하면 그 이미지가 대체로 머리에 떠오른다.
 
  유럽은 지리적으로 보면 서쪽 끝의 섬나라인 영국이나 이베리아 반도에서부터, 동쪽으로는 폴란드와 우랄 산맥까지의 러시아를 포함하고, 남동쪽으로는 발칸 반도의 여러 나라들까지 포함하는 상당히 넓은 대륙이다. 그래서 아시아나 아프리카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지리적 단위로 생각된다.
 
  그러나 유럽은 지리적으로만이 아니라 혈통이나 문화적으로도 크게 하나의 단위로 생각된다. 유럽 사람들이 백인이며, 또 생활양식, 언어, 문화, 종교 등 문화적 면에서 공통된 요소들을 많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유럽연합이 만들어졌으니 이제 경제적, 정치적으로도 하나의 단위로 생각될만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현대의 유럽

  그러나 우리가 그리는 이런 모습의 '유럽'은 고대에는 있지도 않았다. 그것이 최근 몇 세기 사이, 즉 근대에 들어와서야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이 지명으로 처음 사용된 것은 기원전 7세기부터이나 그리스 시대에 유럽은 그리스 반도 전체이거나 그 일부를 의미했다. 오늘날의 유럽과는 상관이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고대 로마의 판도

  로마시대에도 오늘날 유럽의 경계선은 별 의미가 없었다. 로마의 영토가 라인 강 서쪽과 도나우 강 남쪽의 유럽 지역뿐 아니라, 오늘날에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속하는 북아프리카 해안지역, 이집트, 팔레스타인, 터키 지역까지도 포함했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에 유럽은 기독교가 믿어지는 지역을 의미했다. 이런 생각은 7세기에 이슬람교가 모하메드에 의해 창시되고 그 후 두 세력권이 경쟁하는 가운데 이슬람 세력권에 대치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11세기 이후 성지인 예루살렘을 이슬람 세력에게서 빼앗으려 한 십자군 전쟁 때에 강화되었다.
 
  그러나 같은 기독교권에 속하지만 그리스 정교를 믿는 발칸 반도나 러시아 같은 지역은 카톨릭 지역과는 다른 곳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유럽이라는 말은 15세기까지도 잘 사용되지 않았다.
 
  유럽이 오늘날과 비슷한 지리적 단위로 생각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이후이다. 16세기의 종교개혁과, 그 뒤를 이은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치열한 종교전쟁으로 하나의 통일된 기독교세계라는 생각이 깨지고 대신 세속적인 가치들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18세기의 계몽사상은 그럼 점에서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계몽사상가들이 세계를 문화의 발전 단계에 따라 구분하고 유럽을 그 최고인 '문명' 단계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다른 지역은 지역마다의 차이는 있으나 '야만'적인 단계에 있었다.
 
  그래서 이제 유럽이 합리성, 근대성, 자유, 진보를 상징하는 문화적 단위로 생각된 반면 비유럽은 비합리성, 야만성, 부자유, 정체(停滯)를 상징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프랑스 혁명이나 산업혁명에 의해 증명된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유럽'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내용은 절대적으로 근대의 산물이다. 특히 18세기 이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중심주의는 무엇인가
 
  그러면 유럽중심주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런 유럽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태도이다. 다른 말로 하면 유럽 문명이 모든 비유럽 문명에 비해 독특하고 우월하다는 생각이나 가치관, 나아가서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뜻한다.
  유럽이라는 생각이 근대에 만들어졌으니 유럽중심주의도 당연히 근대의 산물이다. 유럽문명이 우월하다는 18세기 사람들의 생각이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발전, 그 결과인 비유럽세계의 지배로 현실적으로도 증명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럽문명이 인류의 진보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며 인류사 전체가 근대 유럽문명이라는 최고점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인 것처럼 생각하는 유럽중심주의적 태도가 자연히 만들어졌다.
 
  그러니 비유럽의 다른 모든 문명들은 근대 유럽문명을 향해 나아가는 세계사의 통일된 과정에서 각자 부분적인 역할만을 하는 것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세계사에서 차지하는 비유럽 문명들의 비중도 크게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유럽중심주의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유럽예외주의이고 하나는 오리엔탈리즘이다. 유럽예외주의는 말 그대로 유럽문명이 특수하고 예외적이라는 주장이다. 유럽 외에 어디에서도 이렇게 합리적이고 진보적이고 근대적인 문명이 발전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유럽은 비유럽 세계와는 다른 길을 선택한 세계사의 예외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의 많은 역사가들이 유럽예외주의라는 말을 사용하며 유럽이 성취한 것을 '유럽의 기적'이니 뭐니 하며 치켜세운다. 중세도시, 산업화, 자본주의의 발전, 민주주의 등등 유럽이 이룩한 것은 모두 '기적' 같은 성과라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사이드 (Said, Edward W,)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1978)>이라는 책을 통해 오리엔탈리즘의 논의를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켰다.

  이와 달리 오리엔탈리즘은 대체로 18세기 이후 유럽 사람들이 아시아 세계를 본 독특한 관점을 말한다. 16세기부터 시작되나 특히 식민주의가 본격화된 18세기 이후에, 선교사 · 관리 · 학자 · 상인 · 여행자 등 많은 유럽인들의 생각이나 글이 그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시아 세계에 대해 공정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모습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문제를 안고 있다. 현지인들에게서 박해받은 선교사, 식민지를 다스려야 하고 그 행위를 정당화해야 하는 식민지 관리나 어용학자들이 아시아를 공정하고 객관적인 눈으로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시아 문명들이 갖고 있는 고유한 가치나 독자성, 창조성은 대체로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인정하면 아시아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유럽과 비교하여 비합리적이고 낡은, 전통적인 성격만 강조되었다.
 
  결과적으로 유럽은 진보와 문명을 보여주는 반면 아시아는 덜 성숙하고 미개하여 스스로는 발전이 불가능한 곳으로 그려졌다. 그러니 세계사가 당연히 인류의 진보를 대표한다고 믿는 유럽 중심의 것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한국인의 정신을 깨우는 세계사 다시보기
 
  제1-(1)강 우리 눈으로 세계사 보기 ☞ 동영상강의 바로가기
  제1-(2)강 우리 눈으로 세계사 보기 ☞ 동영상강의 바로가기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한겨레

 

사진으로 보는 영국의 20세기 ⑤ 여왕 여제

여왕 여제에서 철의 여인까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윈저의 프로그모어 하우스에 설치된 정원 텐트에서 상자에 담긴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 여왕. 사진/힐 앤 손더스. <북폴리오> 제공
영국 여왕 = 윈저의 프로그모어 하우스에 설치된 정원 텐트에서 상자에 담긴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 여왕. 여왕은 1876년에 인도의 여제로 선포되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 ‘왕관의 보석’을 단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지만, 1887년부터는 인도식 유행을 왕실에 도입하여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인도 출신 하인들을 곁에 두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하인은 압둘 카림이라는 비서관으로, 그는 여왕의 인생에서 1883년에 죽은 하일랜드 출신의 존 브라운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했다. 여왕은 권위적인 남자들에게 복종하기를 좋아해서 카림은 제멋대로 여왕을 조정하고 윽박지르곤 했는데, 이는 궁중 관리들과 여왕의 자제들이 보기에 대단히 혐오스러운 짓이었다.

수상인 로드 솔즈버리의 논평은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것이었다. “여왕은 감정에 호소하는 흥분을 즐기는데, 그것은 그녀가 즐길 수 있는 유일한 흥분이다.”

여왕은 젊어서 과부가 되어, 프랑스 작가 모파상이 인상적으로 묘사했던 여자들을 대표하게 되었다. “광적으로 원칙에 집착하는 여인들, …… 잉글랜드가 끝없이 양산해 내는 부류들, …… 유럽의 호텔 식당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보기 불쾌한 노처녀들, …… 어디를 가나 그들만의 특이한 유행, 케케묵은 처녀관, 소름 끼치게 만드는 옷 등을 자랑하는가 하면, 마치 밤 동안 관 속에 묻혀 있었던 것처럼 야릇한 고무 냄새를 풍기기까지 한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미래의 에드워드 7세인 황태자는 경마, 도박, 항해, 사교계 행사, 그리고 몇몇 정부들과의 밀애 등 여러 가지를 즐겼다. 1897년에 데븐셔에서 열린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 기념 가장무도회에서 몰타 구호기사단의 수장 복장을 하고 있다. 사진/라파예트.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지지자들을 향해 연설하고 있는 키어 하디. <북폴리오> 제공
키어 하디 = 1906년부터 시작된 위대한 자유당의 개혁은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다. 같은 해에 윈스턴 처칠이 보수당을 떠나 자유당에 입당했고 노동당 의원들이 최초로 의회에 진출했다.

지지자들을 향해 연설하고 있는 키어 하디는 노동당 설립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유아학교 어린이들의 건강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학교 의료 서비스가 시작되었고, 빈민가 주민들에게 상쾌한 공기를 제공하기 위해 공원들도 건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을 수행하기 위해 소득세를 6퍼센트까지 인상함으로써 부자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윈스턴 처칠이 그의 시골 저택에서 벽돌을 쌓고 있다. <북폴리오> 제공
윈스턴 처칠 = 윈스턴 처칠이 그의 시골 저택에서 벽돌을 쌓으며 전후 복구사업에 일조하고 있다. 학창시절 열등생이었던 그는 옴두르만에서 데르비시들과 싸웠고, 보어인들에게서 탈출하는 데도 성공했다. 나아가 내무성 장관을 역임했고, 갈리폴리 전투의 패배에 대한 희생양으로 해군 참모총장도 역임했으며, 재무상까지 역임했다.


1929년부터는 한동안 공직에서 물러나 저술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이 1940년 이후 시작될 ‘운명의 걸음’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1954년에 이렇게 말했다. “전 세계에 퍼져 사는 영국 국민과 영국 인종은 사자의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사자의 포효를 이끌어내라는 임무가 내게 맡겨진 것은 행운이었다.” 약간의 포효와 약간의 행운.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로드 홈 수상(왼쪽). 사진/버트 글린. <북폴리오> 제공
로드 홈 수상 = 귀족들은 쇠퇴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로드 홈은 맥밀런이 프로퓨모 스캔들로 사임한 후 수상이 되었다. 그는 수상이 되기 위해 귀족 작위를 포기했다. 교활한 술책가이자 노동당 지도자였던 해럴드 윌슨은 로드 홈을 “아주 우아한 시대착오 …… 무려 14대 백작이라니”라고 비꼬았다. 이에 홈은 “14대째 평민 신세인 윌슨 씨”라고 대꾸했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보수당 수상 에드워드 히스. 사진/장 고미. <북폴리오> 제공
에드워드 히스 = 새로 선출된 보수당 수상 에드워드 히스의 웃음은 얼마 가지 않아 사라졌다. 개혁을 위한 그의 모든 시도는 노동조합의 무자비할 정도로 적대적인 태도에 직면했다.

광부들은 노동입법에 대한 그의 입장 선회에도 1972년 파업을 일으켰다. 비상사태가 선포되었고, 공장들은 1주일에 사흘만 가동되었으며, 트라팔가 스퀘어의 런던 우체국 본점을 찾은 손님들은 전기가 단절된 관계로 등불 아래서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또 일반 가정은 방 하나에만 난방을 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노동조합은 계속해서 히스에게 굴욕을 안겼고 결국 1974년에 그를 퇴진시켰다. 누가 이 나라를 통치하는지 불분명한 상황이었다. 노동조합인지 정부인지.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1983년 블랙풀에서 개최된 보수당 전당대회에서 마거릿 대처가 정치자금 모금을 총괄하고 있다. <북폴리오> 제공
마가릿 대처 = 두 번째 선거 승리 후 1983년 블랙풀에서 개최된 보수당 전당대회에서 마거릿 대처가 정치자금 모금을 총괄하고 있다. 그녀는 이미 보수당 내 온건파 세력인 웨츠를 내각에서 몰아냈고, 정치적 합의와 타협이라는 전통을 무시했으며, 나중에 유럽의 많은 지역과 그 너머에까지 하나의 모범을 제시하게 될 급진적인 사유화 정책을 구상 중이었다.

최초의 여성 수상, 세 번의 선거를 연달아 승리로 이끈 최초의 수상 등 이미 여러 분야에서 최초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던 그녀는 20세기의 평화기 수상 가운데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기도 했다.

스스로 “돌아갈 줄 모른다.”고 했을 정도로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갔으며, 개인적·정치적 용기 또한 대단했다. 그녀는 IRA의 영원한 암살 목표이기도 했다. 그녀의 강직한 성격은 머지않아 승리에 대한 도취감으로 바뀌어 보수당 내 많은 동료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고, 결국에는 위기 감각까지 무디게 만들었다.

또 그녀는 유럽에 대해 계속해서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으며, 대중의 곤궁을 초래하면서까지 비도덕적으로 사적 풍요를 장려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국가 소유의 기업과 공영주택을 매각하고, 노동조합을 개혁하고, 현실적인 복지 개념을 확립한 위대한 업적들은 그녀의 몰락 이후까지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토니 블레어. 사진/션 스미스. <북폴리오> 제공
토니 블레어 = 한 미국인이 ‘신노동당New Labour’과 ‘신영국New Britain’이라는 토니 블레어의 1997년 선거 구호를 두고 마치 “코네티컷의 작은 마을들” 이름 같다고 촌평한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럼에도 블레어는 선거에서 압승했다. 보수당은 물러났고, 그들이 입은 상처는 아물기는커녕 점점 더 악화될 운명이었다. 블레어는 학급의 규모와 병원에서의 대기 시간을 줄이겠다고 다짐하면서 기존의 노동당원들을 안심시켰지만 그것은 말뿐이었다.

가장 중요한 주제는 역시 노동당이 예전처럼 지출 위주의 정책을 펴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소득세는 인상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유권자들을 안심시켰고, 안정된 경제를 물려받은 블레어는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긴 정치적 안정을 누리면서 지칠 줄 모르고 승리의 길을 걸었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여왕과 그녀의 강아지가 그려진 초상화를 응시하고 있는 버밍엄의 여인들. 사진/엘리엇 얼윗. <북폴리오> 제공

개를 사랑하는 민주주의 국가 = 양차 대전, 제국의 종말, 버려진 옛 관습과 계서제 등 20세기의 드라마들은 실로 다양하고 강렬했다. 그럼에도 여왕과 그녀의 강아지가 그려진 초상화를 응시하고 있는 버밍엄의 이 여인들을 보면, 20세기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이 나라의 모습이 본질적으로 20세기 초와 비슷한 듯하다. 여전히 민주주의적인, 특히 개를 사랑하는 민주주의 국가이니 말이다. <북폴리오> 제공

 

사진으로 보는 영국의 20세기 ⑥ 예술가의 초상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트위기. 사진/버트 글린. <북폴리오> 제공
트위기 = 요정처럼 큰 눈으로 유명했던 트위기는 60년대를 대표하는 얼굴 가운데 한 명이었다. 겉으로는 연약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모델로 출발하여 연예계에 진출했다.

그녀의 매니저 저스틴 드 빌너브 역시 진정한 60년대식 인물이었다.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나 장터 권투선수와 포르노 영화 판매원 등으로 일했고, “언젠가 1년에 11곳의 미용실에서 일한 적도 있죠.” 그는 또 빈민가 사기꾼 피터 래크먼이 경영하는 소호의 스트립 클럽에서 기도를 보기도 했다. 그 후 골동품 가판대를 운영하다가 “너무나도 조그맣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이 사랑스럽고 작은 소녀”를 만났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로렌스 올리비에 경과 그의 아내 비비언 리. 사진/그레이엄 헤일스. <북폴리오> 제공
로렌스 올리비에와 비비언 리 = 1947년에 기사 작위를 받은 로렌스 올리비에 경과 그의 부인 비비언 리는 스튜어트 그레인저, 허더즈필드 출신의 제임스 메이슨, 그리고 브리스틀 출신의 캐리 그란트와 함께 국제적인 스타덤에 올랐다.

1947년에 루돌프 빙의 후원으로 에든버러에서 최초의 국제 예술 페스티벌이 개최되었다. 본격적인 텔레비전 시대의 도래에 앞서 영화는 마지막 호황을 누렸고 매년 15억 장의 티켓이 팔렸다.

올리비에의 「햄릿」은 영국 영화 최초로 오스카 최고작품상을 수상했다. 발레 드라마인 「빨간 구두」는 두 개의 상을 더 거머쥐었다. 알렉 기네스가 주연한 세 편의 전통적인 ‘일링 코미디’, 즉 「핌리코로 가는 여권」, 「위스키 참 많네!」, 「친절한 마음과 작은 왕관」도 이 당시에 제작되었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비틀스의 멤버 메카트니. 사진/데이비드 헌. <북폴리오> 제공
비틀스 = 1963년 초만 해도 비틀스는 고향 리버풀의 캐번이라는 클럽에서 연주하던 잘 알려지지 않은 팝 그룹이었다. 그로부터 18개월 이내에 그들의 인기는 가장 나이 많은 세대까지도 기차에 탄 매카트니를 알아볼 정도로 치솟았다.

이듬해 여왕은 이들 전설적인 4인조Fab Four에게 MBE 훈장(영국의 5개 훈장 품계 중 가장 낮은 것. 기사 작위는 아니다-옮긴이)을 수여했다. 비틀스 마니아들은 뮌헨은 물론 미국에도 많았다. 레넌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예수보다 더 유명해요. 둘 중 어느 게 더 중요한지 잘 모르겠어요, 로큰롤인지 기독교인지.”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롤링스톤스가 그들의 앨범 ‘거지의 연회‘를 판촉하는 모습이다. 사진/마이클 조지프. <북폴리오> 제공

롤링스톤스 = “스톤스를 볼 때까지 기다려!” 뉴욕의 사교계 명사 ‘베이비’ 제인 홀저가 1964년에 한 말이다. “그들은 섹스 그 자체에요. 신이 내린 축복이고…… 다들 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지배하죠…… 마치 완전한 혁명 같아요.”


롤링스톤스가 그들의 앨범 「거지의 연회Beggar’s Banquet」를 판촉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영국 청년들은 1960년대 미국의 대중문화 독식에 위협적인 도전장을 내민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정숙과 복종이라는 번데기 안에 그토록 오랫동안 갇혀 있던 한 국민이 말썽꾸러기 나비로 변신한 데 대한 전 세계의 궁금증이 그들의 성공에 더욱 큰 역할을 했다.

1967년에 믹 재거가 이탈리아에서 합법적으로 구입한 각성제 암페타민을 소지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을 때 〈타임스〉의 편집인은 이 사건이 캔터버리 대주교가 “로마에서 비행기 멀미약”을 구입한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고 논평했다. 이러한 비유는 그의 도덕적 해이와 더불어 놀라울 정도로 단순한 사고방식을 드러내는 것이었는데, 당시 영국인들 전체가 바로 이런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스톤스의 멤버 브라이언 존스는 2년 후 약물 남용으로 사망했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등반가 조지 리 맬러리(왼쪽). <북폴리오> 제공
조지 리 맬러리 = 영국의 등반가 조지 리 맬러리는 왜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려 하냐는 어느 미국인의 질문에 “거기에 있으니까.”라고 대답했다. 1924년에 그는 영국 등반대의 다른 두 멤버와 함께 에베레스트 산으로 가던 도중, 개천 하나를 건넌 다음 셀프타이머를 이용하여 반라의 상태로 스스로를 촬영했다(사진에서 왼쪽). 리튼 스트레이치가 1900년대에 그를 사모한 적이 있었다. “황홀한 핑크빛이 도는 그의 몸에 녹아들어 죽어도 여한이 없으리.”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예술 행위 = 극작가이자 비평가, 채식주의자, 에세이 작가, 팸플릿 작가이며 공산주의자였던 조지 버너드 쇼가 해변에서 수염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스트레이치가 에디 색빌웨스트,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있는 모습. 사진/레이디 오털린 모렐. 북폴리오 제공
버지니아 울프 = 블룸즈버리 그룹은 태비스톡 스퀘어에 있는 레너드 울프와 버지니아 울프의 집 지하실에서 호가스 프레스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 모임은 레너드 울프가 실론에서 공무원으로 일할 당시 캘커타 스위프를 통해 번 돈으로 운영되었다.

이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적 기준을 혐오했는데, 리튼 스트레이치와 E. M. 포스터가 동성애자였다는 점으로 볼 때 그 혐오의 정도를 더욱 잘 짐작할 수 있다. 스트레이치가 에디 색빌웨스트,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있는 모습이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노엘 카워드(오른쪽)가 거트루드 로렌스와 공연하고 있다. 사진/사샤. <북폴리오> 제공
노엘 카워드와 거트루드 로렌스 = 영국 예능인들은 전 세계를 무대로 활약했다. 오랜 전통, 각 지역 레퍼토리 극단들이 제공하는 배우 훈련,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극작가들, 그리고 영어 그 자체는 훌륭한 배우들을 만들어내기에 매우 훌륭한 조건이 되었다.

배우이자 극작가이며 작곡가였던 노엘 카워드는 1927년 웨스트엔드에서 네 작품을 동시에 공연하기도 했다. 그가 「오늘밤 8시 30분」에서 거트루드 로렌스와 함께 공연 중이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조지아 시트웰. 사진/세실 비턴. <북폴리오> 제공
조지아 시트웰 = 세실 비턴은 1930년에 조지아 시트웰을 촬영했는데, 〈보그〉는 당시 그녀를 잉글랜드에서 “가장 예쁘고 젊은 유부녀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했다. 그녀의 남편은 오즈버트 시트웰과 이디스 시트웰의 동생인 서셰버럴 시트웰이었고, 이 세 사람은 전간기 “모든 예술 분야의 아방가르드 대가들”이었다.

이 사진은 다비셔에 있는 그들의 저택 레니쇼 홀에서 열린 가족파티 중에 촬영한 것이다. 비턴의 회상에 따르면, 조지아의 축 늘어진 듯한 우아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던 그녀의 개 보조이 피오는 “저택에 몰래 데려온 것으로, 오즈버트의 눈에 띄지 않도록 마구간에 가둬놓아야 했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가수 로티 콜린스. <북폴리오> 제공
뮤직홀과 극장 = 뮤직홀과 극장은 항상 만원이었다. 교태를 부리면서 무릎을 굽혀 인사하는 이 여자는 로티 콜린스라는 가수로, 그녀의 노래 「타 라 라 붐 데 에이!」는 에드워드 시대의 진취적 기상을 대변했다.

「해질녘의 방황」 같은 스코틀랜드 노래들을 불렀던 해리 로더는 글라즈고와 런던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많은 인기를 누렸다. 1907년 이후에는 매년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자치령들로 순회공연을 다녔다.

어느 웨이터의 일곱 자녀 가운데 한 명으로 태어난 메리 로이드라는 여자는 위트 있는 거친 농담과 「오, 미스터 포터」, 「내가 사랑하는 소년이 갤러리에 앉아 있네」 등의 노래를 불러 유명해졌는데, 1922년에 세상을 뜨기 며칠 전까지도 미국과 남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등은 물론 국내 각지를 돌아다니며 만원의 관중 앞에서 공연했다. 전통적인 극장의 분위기는 점점 더 점잖아졌다. <북폴리오> 제공

출처 - 한겨레

사진으로 보는 영국의 20세기 ③ 노동자들의 삶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빨래 널고 있는 여인. 사진 험프리 스펜더
빨래 널고 있는 여인 어느 북부 남자가 빨래를 널고 있는 여인을 보고서 이렇게 말했다. “웬만하면 저 아낙네가 손수 빨래를 다 했을 것이고, 저 옷들은 다른 사람들 것이겠죠. 빨래 한 바구니 해주는 데 반 크라운씩 받는 조건으로 빨았거나, 아니면 옷을 빌려와서 공짜로 빨았을 거예요. 저 옷들을 전당 잡히면 다음주 금요일까지 쓸 돈이 생기니까요.”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에드워드 시대의 하인들
에드워드 시대 하인들 에드워드 시대에는 200만 명 이상의 가내 하인들이 있었다. 급료는 형편없어서, 동이 트기도 전에 아침식사용 은제 식기를 준비해야만 했던 사진 속의 하녀(왼쪽) 같은 경우 1년에 12파운드가 고작이었고, 정원사의 경우에는 그보다 조금 더 받았다(오른쪽). 그러나 적어도 먹고 자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었고, 화목한 가정은 곧 좋은 일자리를 의미했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소녀들의 민첩한 손놀림은 랭커셔의 대규모 면직 산업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이 지역의 눅눅한 공장들이 뽑아내고 엮어낸 면직물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임금은 고작 주당 몇 실링에 불과했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부두 노동자의 자녀들이 런던 이스트엔드에서 자선단체들이 나눠주는 구호품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 폴 마틴
부두 노동자의 자녀들 이들의 아버지들은 시간당 6펜스의 최저임금을 의미하는 이른바 ‘부두 노동자들의 태너’를 위한 파업에 참가 중이었다. 시위자들은 생선 대가리를 들고 트라팔가 스퀘어에서 퍼레이드를 했는데, 그들이 얼마나 형편없는 음식을 먹고 살아야 하는 처지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결국 목표는 달성되었지만 부두 노동자 같은 일용직 노동자들의 생활은 여전히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기에 급급한 실정이었고, 아이들은 가로등에 매달려 빙글빙글 돌면서 노는 식의 오락거리를 스스로 만들어내야 했다. 미끄럼틀과 그네가 갖춰진, 세금으로 운영되는 놀이터는 먼 훗날의 이야기였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1911년경 빈민가 아이들이 상당히 저렴하지만 그들의 형편으로는 꿈도 꾸지 못할 진열품들을 바라보고 있다.
빈민가 아이들 맨발인 것으로 보아 집에서 가족과 함께 사는 아이들이었을 것이다. 버림받거나 고아원으로 보내진 아이들의 경우에는 자선단체에서 최소한 1인당 매주 6실링 정도의 비용을 들여 음식을 먹여주고 옷을 입혀주고 신발을 신겨주는 등 적절히 보살펴주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슬픔에 차고 기운이 쇠하고 일에 치인 엄마들” 대부분은 그 비용의 절반 수준을 감당하기도 어려웠다. 요크 지역 가정의 4분의 1가량이 빈민수용소보다도 못한 생활환경에 처해 있었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휫비에 있는 에스크 강에서 일꾼들이 최초의 전기 케이블을 설치하고 있다. 사진 프랭크 메도 서트클리프
케이블 설치하는 일꾼들 꼿꼿하고 위압적인 자세로 서 있는 감독관 앞에서 일꾼들이 허리를 굽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이때 벌써 ‘주인과 종 사이에 영원히 지속되는 봉건관계’가 손실을 초래하고 있음 (이와 달리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상사와 훨씬 더 평등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을 깨달았다. 파업으로 인해 매년 엄청나게 많은 작업시간이 낭비되었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선박 제조공이 장차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게 될 타이태닉 호의 오른쪽 프로펠러축을 장착하고 있다. 이들은 비교적 임금수준이 높았지만 작업환경은 매우 위험했다. 배가 점차 커지면서 리벳공들은 바람이 휘몰아치는 30미터 높이의 허술한 작업대에서 일해야만 했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켄트의 틸먼스톤 탄광에서 일하는 이 광부들은 서 있는 것만 해도 행운이었다. 비좁고 허름한 수많은 갱도에서 열기와 먼지에 휩싸인 채 희미한 어둠속에서 무릎으로 기어 다니며 일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사진 사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노동조합과 고용주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격렬한 산업분쟁이 확산되었다. 1914년 7월에 석탄 운반 노동자들이 파업하는 동안 런던의 세인트팬크라스에 서 있던 한 아마추어 광부의 모습이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1919년 9월, 철도 파업 참가자들이 철도 정상운행에 협조하는 자원봉사자들과 마찰을 빚고 있는 장면.
파업 마찰 파업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벽에 붙은 포스터가 묻고 있다. 트로츠키가 이끄는 적군과 백군이 맞붙었던 러시아 내전에 영국은 백군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러시아로부터 공산주의의 불꽃이 옮겨 붙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윈스턴 처칠의 표현대로 “볼셰비키를 싹부터 잘라버리려는” 이러한 시도는 별 소용이 없었다. 독일 역시 매우 불안정했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배상금과 영토 이양에 대한 요구로 인해 매우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데일리 뉴스〉는 “독일은 완전히 발가벗겨진 상태에서 주머니를 다 털어 놓으라는 협박을 받고 있다.”고 논평했다. 유럽은 이미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러나 ‘붉은 클라이드사이드’와 국내의 혁명 가능성에 대한 공포는 기우였다. 영국은 천성에 맞게 안정적인 사회를 유지했다.


잡지 <존 불〉에 매력적인 광고가 하나 실렸는데, 그것은 사기였다. 이 잡지의 편집인이자 소유주인 하원의원 호레이쇼 보톰리는 사실 이 시대의 위대한 허풍선이였다. 그는 당첨자 없는 복권과 상환금 없는 채권으로 독자들을 속였다. 또 다른 사기꾼인 로버트 맥스웰의 선임자 격이었던 그는 결국 1922년에 사기 혐의로 유죄선고를 받았다. <북폴리오> 제공

 

사진으로 보는 영국의 20세기 ④ 전쟁 수행 역할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포탄 공장의 소녀들
포탄 공장의 소녀들 = 포탄 장탄 공장에서 일하는 소녀들은 ‘카나리아’라고 불렸는데 화학물질이 그들의 얼굴과 손을 노랗게 물들였기 때문이었다. 여성들은 선반을 조작하고 선박에 리벳을 박고 비행기의 프로펠러를 돌렸으며, 트럭 엔진을 정밀 조사했다. 물론 농사도 지었고 여성 보충 부대에서 유니폼을 입고 일하기도 했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우리에게 일할 권리를 달라.” 전쟁 시작과 함께 여권 운동자들이 했던 말이다. 여성은 전쟁 수행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코번트리에서 한 소녀가 380밀리미터 대포를 청소하기 위해 포구에 들어가 있다. 사진/호레이스 니콜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독일군의 런던 대공습 뒤 우유 배달부가 잔해를 헤치며 배달하는 모습.
우유 배달부 = “독일군 폭격기가 런던을 재차 공습하여 더 많은 양의 폭탄을 투하했다.” 1940년 10월 10일, 이 사진의 원래 설명문에는 이런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오늘 아침 우유배달부가 잔해를 헤치며 배달하는 모습이다.”

나치의 런던 대공습은 874년 전에 프랑스의 노르만족에게 침략당한 이래 영국 본토가 처음으로 전쟁 피해를 입는 순간이었다. 집중 폭격의 최초 며칠간 약 6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리라는 예측이 쏟아졌고, 국민들의 사기는 폭격에 무너진 건물들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집을 잃은 사람들은 평화를 애원하며 울부짖을 것이고, 도시 전체가 아수라장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만약 실제로 그 지경까지 이르렀더라면 유럽 전체가 나치 독재정의 희생자가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상황이 그렇게까지 악화되지는 않았다. 이 사진은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를 표현하고 있다. 히틀러는 최악의 행위를 저질렀을지 모르지만, 평범한 남녀 노동자들은 결코 항복하거나 공포에 휩싸이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이 우유배달부처럼 그들은 ‘평상시 생활’을 유지할 것이었다. 러시아인들도 똑같은 결론에 이르렀지만 그들이 감당해야 할 희생은 훨씬 더 컸다.

그리고 독일인들 역시 결국 패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똑같은 행동을 취했다. 영국인들의 행동이 의미심장한 것은 그들이 가장 먼저 그러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라기보다(물론 그들의 행동이 뒤에 발생한 일들에 큰 영향을 끼치기는 했지만) 강제수용소가 있었던 독일이나 굴라크가 있었던 러시아와 달리 국민들이 자유롭게 내린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이 처칠의 말대로 “예전에 몇 번 시도되었던 다른 모든 정부 형태들을 제외하고는 가장 형편없는 정부 형태”인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주변의 처참한 광경에도 전혀 겁먹지 않은 책벌레가 런던 공습 이후 홀랜드 하우스의 잔해 속에서 책을 찾고 있다. 이곳은 일치스터 백작의 저택으로 1607년에 건설되었으며, 19세기 전반기에 위그들의 사회활동 중심지이기도 했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독일 공군의 공습을 피해 크라이스트 처치 지하실의 석관 속에서 자는 주민. 사진/빌 브랜트
석관 속의 주민 = 약삭빠른 주민 한 명이 독일 공군의 공습을 피해 크라이스트처치―런던 빈민가 스피탈필즈에 위치한 18세기 건축가 니콜라스 호크스모어의 대작―지하실의 단단한 석관 속에서 자고 있다. 등화관제는 아주 효과적으로 실시되어 야간 보행자들이 차에 치이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이를 막기 위해 도로 가장자리에 흰색 선을 그었다.




침입자들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도로표지와 버스의 목적지 안내판을 제거했지만, 이로 인해 국민들도 피해를 입었다. 길을 묻는 영국인들은 종종 스파이라는 오인을 받았다. 바이올렛 오츠는 에식스에 있는 그녀의 저택 게스팅소프 홀에서 〈타임스〉에 편지를 써서 “길을 묻는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우리 시민들에게 정확한 지침을 좀 내려주실 수는 없을까요?”라고 투덜댔다. “우리 정원사와 그의 아들 역시 그런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 우리 집은 경찰서에서 5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어서 그런 사람들이 사악한 의도를 진척시키기 전에 경찰에 신고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대부분의 영국인에게 플랑드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먼 곳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꽤 가까워서, 런던의 빅토리아 역에서 배웅을 받으며 전선으로 떠나는 이 남자는 마치 브라이턴으로 소풍을 떠나는 듯한 모습이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로햄턴 군인병원의 절단 환자들
절단 환자들 = 시그프리드 서순은 로햄턴 군인병원의 절단 환자들 같은 사람들을 위해 시 한 편을 썼다.

그게 문제가 되나요? …… 다리를 잃은 것이? ……

사람들이 늘 친절하게 대해 주고,

다른 사람들이 머핀과 달걀을 허겁지겁 먹기 위해

언제 사냥을 마치고 돌아올지에 대해

관심을 보일 필요도 없는데 말이죠.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구걸하는 제대 군인들
구걸하는 군인들 = 한때 ‘영웅에 걸맞은 땅’을 약속받았던 제대 군인들의 궁핍은 특히 눈물겨웠다. 런던에서 거리공연을 하며 동전을 구걸하고 있는 제대 군인들의 모습이다. 트럼펫 연주자는 “심한 천식과 기관지염과 폐기종에 걸려 일할 능력이 없습니다.”라는 내용의 푯말을 목에 걸고 있다.

그러나 적이었던 독일 제대 군인들과 달리 이들은 정치깡패로 돌변하지 않았다. 고난의 시대는 비록 퇴직을 낳았지만, 가두 폭력이나 극단주의의 출현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행랑객들. 사진/이디스 튜더 하트
일광욕 즐기는 행락객들 = 일요일에 해변으로 차를 몰고 가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행랑객들의 모습이다. 이는 당시 최신식 여가선용이었다. 1939년경에는 영국의 대부분 지방이 호황을 누렸다.

소비 증가와 자동차 산업의 성장은 미국 다음으로 세계 최고였다. 도시 외곽 지역들은 영화관과 출퇴근용 전철의 등장에 힘입어 황금기를 맞이했다. 유급휴가가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자동차를 싼 값에 구입할 수 있었으며, 노동시장 역시 활발하게 돌아가서 공장들은 많은 일자리를 제공했다.

제국은 1918년까지 축소되기는커녕 더욱 팽창했고, 대륙에서 극단적 사조인 파시즘이나 공산주의가 발전했던 반면 영국의 정치는 연립내각을 통해 타협의 길을 모색했다. 영국인들은 전쟁으로 인해 유럽의 그 어느 나라 국민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을 잃을 운명이었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제8대 랜즈다운 후작의 어릴 적 모습
제8대 랜즈다운 후작 = 로드 ‘찰리’ 머서 네언은 1914년 10월에 프랑스에서 죽었다. “폐하, 폐하께서 찰리의 무덤 사진과 관련하여 저희에게 베풀어주신 크나큰 친절에 보답하고자, 저는 그의 두 살 난 어린 아들의 사진을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찰리의 아버지이며 전직 외무장관이자 인도 총독이었던 랜즈다운 경이 1915년 초에 메리 왕비에게 쓴 글이다.

“국왕 폐하가 대부인 조지는 사랑스런 어린 소년이며, 그 아이가 우리에게 맡겨졌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사진 속에 흐르는 측은한 분위기가 전쟁 선전용으로 이용되지 않았던 것은 랜즈다운 경이 징고이즘에 대해 회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사진을 보우드 파크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가져왔는데, 그 집은 곧 병원으로 개조되었다. 또한 그는 전시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보복 없는 평화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 소년은 나중에 제8대 랜즈다운 후작이 되었다. <북폴리오> 제공

출처 - 한겨레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난 1월, <인터넷한겨레> 독자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은 <중국의 세기>에 이어 영국인들의 독특한 삶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20세기 포토다큐 세계사 2-영국의 세기> (지은이 브라이언 모이나한)를 연재한다.

머나먼 외국에서 수백만의 생명을 책임졌던 젊은 외교관들,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그 패션을 모방하곤 하는 에드워드 시대의 우아한 사람들, 디킨스의 소설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빈민가의 귀화인들, 우풍당당했지만 온갖 스캔들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왕족들, 조지 오웰 등 천재 문학가들... 전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대영제국 100년의 모습을 생생한 사진으로 전한다. 이번에도 출판사 ‘북폴리오’의 도움을 받았다.

영국의 세기는 모두 6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순서는
1. 식민지의 아버지 2. 왕실스캔들 3. 노동자들의 삶 4. 전쟁수행역할 5. 여왕여제 6. 예술가의 초상등이다.

 

사진으로 보는 영국의 20세기 ① 식민지의 아버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비협조적인 버마인들이 쳇바퀴에서 벌을 받는 모습이다. <북폴리오> 제공
제국주의자 프레더릭 설루스가 지적했듯이, 반란을 다루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결국 ‘체벌’이었다. 비협조적인 피지배인들에 맞서 토벌군이 수백 차례 파견되었다. 영국 군인들은 그들을 ‘어중이떠중이’라고 불렀다. <북폴리오> 제공

지난 1월, <인터넷한겨레> 독자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은 <중국의 세기>에 이어 영국인들의 독특한 삶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20세기 포토다큐 세계사 2-영국의 세기> (지은이 브라이언 모이나한)를 연재한다.

머나먼 외국에서 수백만의 생명을 책임졌던 젊은 외교관들,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그 패션을 모방하곤 하는 에드워드 시대의 우아한 사람들, 디킨스의 소설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빈민가의 귀화인들, 우풍당당했지만 온갖 스캔들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왕족들, 조지 오웰 등 천재 문학가들... 전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대영제국 100년의 모습을 생생한 사진으로 전한다. 이번에도 출판사 ‘북폴리오’의 도움을 받았다.

영국의 세기는 모두 6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순서는

1. 식민지의 아버지 2. 왕실스캔들 3. 노동자들의 삶 4. 전쟁수행역할 5. 여왕여제 6. 예술가의 초상 등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체포된 버마군들이 나무 구조물에 묶여 있다. <북폴리오> 제공
버마는 영국의 지배에 순순히 굴복하지 않았다. 식민화 과정은 1824년에 시작되었지만, 1885년에 상부 버마가 함락될 때까지 완수되지 못했다. 이 나라는 1937년의 자치 법령에 의해 직할 식민지가 될 때까지 인도의 한 지역으로 편입되어 통치되었다. 여기서 사진사는 엄청난 도덕적 딜레마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제국은 영국의 패권을 의미했다. 제국은 또한 자유를 대표한다고 자임했다. 장기적으로 볼 때 두 가지를 모두 성취할 수는 없었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1900년 인도 체낙사바 사원에서 야영 중인 한 여행객. <북폴리오> 제공
넘쳐나는 자신감과 남의 집을 자기 것인 양 다루는 뻔뻔함이 사진에 잘 나타나 있다. 1900년에 이 여행객이 야영한 곳은 인도의 체낙사바 사원이다. 이 위대한 아대륙과 3억의 인구가 겨우 5,000명밖에 되지 않는 영국의 인도 관할 공무원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영국군 역시 인도 군대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숫자였다. 인도 육군은 영국 장교들이 지휘했지만 50년 전에도 그랬듯이 항상 반란을 일으킬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산술적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영국인 개개인들은 항상 우월함을 과시해야만 했다. 물론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권위’와 노골적인 오만함은 때때로 구분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브리티시 라지’라고 불렸던 영국의 인도 통치는 페어플레이로 명성을 날렸는데, 이는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었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인도 총독이었던 커즌과 거부의 상속녀이자 미국 출신인 그의 부인이 1902년 4월 하이데라바드 근처에서 포획물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북폴리오> 제공
뛰어난 사격솜씨를 지녔던 그는 호랑이 사냥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 녀석이 다가오면 심장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소. 그 녀석 발밑에서 잎사귀가 바스락대는 소리만 들릴 뿐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 해 가을 그는 베트와 강에서 낚시를 하면서 자신이 다비셔 출신임을 새삼 느끼고 있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헨리 경(가운데)이 대형동물 사냥에서 잡은 희생물들 앞에서 수행원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북폴리오> 제공
서인도 제도 식민지의 젊은 행정관이자 허리케인 보험의 창시자이기도 했던 헨리 경은 관개 시스템과 실험적 플랜테이션도 만들어냈다. 그는 바베이도스, 그레나다, 골드코스트(현재의 가나), 그리고 도미니카 등의 발령지를 돌아다녔다. 우간다를 떠난 후 그는 북부 나이지리아 총독으로 승진했지만, 런던으로부터의 명령을 거스르고 선교사들의 카노 행을 허락함으로써 경력을 망쳐버렸다. 이 일로 리워드 제도의 총독으로 좌천되었으며, 마지막 직책은 1924년의 모리셔스 총독이었다. 많은 회고록, 소설, 마법 연구서 등을 저술했으며,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식민 제도에 관한 연구로 특히 유명하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믿지 못할 영국인. 1910년에 인도에서는 아편이 조심스럽게 측량·등록되는 등 엄격한 생산통제가 시행되었다. <북폴리오> 제공
영국 선교사들은 사람들에게 믿음과 평안을 전파하러 중국에 갔지만, 그곳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영국이 통제하는 아편무역으로 인해 유린당한 마약 중독자들이었다. 1910년에 인도에서는 아편이 조심스럽게 측량·등록되는 등 엄격한 생산통제가 시행되었다. 아편전쟁 때와 같은 무자비한 해군력의 행사가 1842년의 홍콩 점령에서도 되풀이되었는데, 이는 중국 시장을 영국의 아편업자들에게 개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편거래는 이후 영국령 인도에서의 세입 가운데 7분의 1을 차지하게 되었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1899년 3월 17일 홍콩의 스탈렛 만에 ‘새 영토’를 나타내는 최초의 경계표지가 세워지는 모습. <북폴리오> 제공
중국 본토의 ‘새 영토’는 홍콩 섬의 방어를 위해 임차되었는데, 홍콩은 이미 1842년에 영국에 영구적으로 할양되었다. ‘새 영토’ 임차의 종료와 함께 1997년 7월 1일에 중국 내 식민지 전체가 반환되었다. 식민지배 하에서 번영을 구가했던 홍콩의 중국인들은 이 무렵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인도의 마지막 총통 로드 마운트배튼의 부인 레이디 에드위나 마운트배튼이 델리에 모인 7,000명의 하객 앞에서 영국령 인도 및 그녀의 친구이자 인도의 새 수상인 네루 선생에게 작별을 고하고 있다. <북폴리오> 제공

인도는 영국이 제국 가운데 가장 먼저 철수한 곳이자 가장 끔찍한 유혈 사태가 벌어진 곳이기도 했다. 인도는 1947년에 독립하면서 결국 인도와 이슬람 파키스탄으로 분할되었다. 인도의 새 수상 네루는 잉글랜드의 해로학교에 다녔는데, 1906년에 그곳에서 이탈리아의 애국자 가리발디의 전기를 읽었다. 이제 그 독서가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사진으로 보는 영국의 20세기 ② 왕실 스캔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미래의 에드워드 7세인 웨일즈 공의 정부였던 릴리 랭트리. 사진/라파예트. <북폴리오> 제공
미래의 에드워드 7세인 웨일즈 공은 1870년에 한 이혼 소송의 증인으로 거명되면서 스캔들을 일으켰고, 1891년에는 카드게임 사기와 관련된 소송에 증인으로 출석한 적도 있었다. 물론 그의 어머니가 이를 달가워할 리 없었다. 그의 정부인 릴리 랭트리는 ‘저지의 릴리’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저지의 주임사제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배우가 되었고 당시 매우 뛰어난 미인이었지만, 사진을 잘 받는 스타일은 아니었던 듯하다.

당시 언론은 전반적으로 지금보다 훨씬 더 신중한 편이었지만, 한 스포츠 신문이 한 줄짜리 만평을 통해 이 스캔들을 기사화한 적이 있었다. “황태자와 릴리 랭트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로부터 약 1주일 후 이 신문은 이렇게 덧붙였다. “담요 한 장조차도.” 그녀의 애인이 마침내 왕위에 올랐을 때, 그녀는 이미 재혼하여 릴리 드 바스라는 이름의 부인이 되어 있었고 유명한 경주마를 소유하고 있었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다이애나가 황태자와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세인트폴 성당 계단 앞에 도착하고 있다. <북폴리오> 제공
다이애나 비는 이혼 직후 “파란만장한 결혼생활”이었다고 소회했다. 이 왕실 로맨스는 전 세계적인 동화가 되었다. 12억의 텔레비전 시청자들이 머지않아 깨질 이 로열 커플의 혼인서약을 지켜보았다.

찰스 왕자는 유부녀 커밀라 파커 볼스와의 오랜 연분 관계를 다시 시작했다. 그는 파커 볼스의 첫아이의 대부였다. 예의가 좀더 중요했던 시대에는 이런 상황에서도 왕실의 중매결혼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레이디 다이’는 결코 묵묵히 인내하는 대륙형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위그 계열 귀족 가문의 혈기 왕성한 후손이었다. 1980년 무렵 스캔들을 캐내는 일은 피를 보는 스포츠처럼 과열되어 있었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파편적인 전화도청 내용, 훔쳐낸 사진들, 그리고 텔레비전 인터뷰를 통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곧 ‘전하Royal Highness’라는 칭호를 박탈당했다. 이러한 기습 공격에 그녀는 자신이 ‘하트의 여왕Queen of Hearts’이라고 맞받아쳤는데, 그녀의 대조상이자 군인이었던 말버러 공작이 그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아마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지 않았을까.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마거릿 공주. <북폴리오> 제공
마거릿 공주는 아버지의 공중 경호대원이자 전투기 조종사였던 피터 타운젠드와 사랑에 빠졌다. 1974년 왕실의 남아프리카 순방 때 촬영된 이 사진에서 그는 차 앞쪽에 타고 있다(왼쪽/사진 이언 로이드). 당시 열일곱 살이던 그녀는 언니 엘리자베스와 함께 왕과 왕비 앞쪽에 앉아 있다.

타운젠드는 1955년에 이혼했지만, 공주는 “기독교에서 결혼은 영구불변의 것이라는 교회의 가르침을 거스를 수 없어” 두 사람의 로맨스가 끝났다고 발표했다. 타운젠드가 참석한 마지막 주말 야유회를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오는 그녀의 눈빛은 슬픔으로 가득했다(오른쪽/사진 데릭 버윈).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즉위식. 사진/레그 스펠러. <북폴리오> 제공
할머니 옆에서 턱을 괴고 있는 찰스 왕자는 이제 새로운 왕위 계승자가 되었지만, 즉위식의 위풍당당함에 별로 관심이 없는 표정이다. 두 번째 줄에는 그의 친할머니이자 필립 공의 어머니인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주가 그곳의 화려한 분위기와 잘 맞지 않는 그녀 특유의 종교적인 복장을 하고서 근엄한 모습으로 서 있다. 즉위식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첫 번째 대형행사였는데, 윈저 왕조는 나중에 이 대중매체와 아주 깊은 인연을 맺게 될 운명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한 왕실 근위대원과 귀족 부인이 1911년 조지 5세의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옆에 지나가던 그들보다 덜 고귀한 신분의 백성들이 쳐다보고 있다. <북폴리오> 제공
그는 마셜 백작이 하객들의 자리 안내를 위해 선발한 50명의 ‘황금 부관’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근위대 장교의 생활은 매우 유쾌한 것이어서 대령의 경우 1년에 6개월, 소령의 경우에는 5개월간이나 휴가를 즐길 수 있었다. 물론 군인 급여만 가지고는 도저히 충당할 수 없는 품위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사적 수입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그 밖에도 귀찮은 일이 몇 가지 있었다. 무엇보다도 우선 전쟁에 나가 싸워야 했고, 근위병 연대의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주의해야 하는 사항들도 여럿 있었다. 버지니아 담배를 피운다든가, 왈츠를 출 때 뒷걸음질친다든가, 공공장소에서 우편물을 나른다든가, 애스컷 동쪽 지역에서 갈색 신발을 신는다든가 하는 행동은 금물이었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왕국 전체의 작위귀족들이 1953년의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사원 옆에 위치한 상원으로 모여들고 있다. 사진/해리 토드.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새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기념 초상화를 그리는 세실 비턴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세실 비턴.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즉위식 복장을 하고서 아이들과 포즈를 취한 말버러 공작부인. 사진/라파예트. <북폴리오> 제공
국내의 금고가 바닥나면 언제든 미국의 부자 상속녀를 수입하여 다시 채울 수 있었는데, 말버러 공작부인이 그런 경우다. 그녀가 약간 뻣뻣해 보이는 것은 보석으로 치장된 꽉 조이는 목걸이 때문이거나, 아니면 이런 영국식 예의가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원래 이름은 콘수엘로 밴더빌트였으며, 미국에서 증기선과 철도를 통해 돈을 벌었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요크 공작인 동생 조지(왼쪽)와 웨일즈 공인 에드워드가 보즈 라이언 가문의 저택인 글래미스 성을 방문 중인 모습. <북폴리오> 제공
조지 5세가 서거하자 둘 가운데 형이 즉위하여 에드워드 8세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월리스 심슨과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이혼녀였다. 왕은 결코 그녀와 헤어질 마음이 없었고, 영국 국교회는 절대 그녀를 왕비로 인정할 수 없었다.

남부 웨일즈의 아이들은 뛰어다니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길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래요.

심슨 부인 참 예쁘죠?

벌써 두 번이나 결혼했는데

이젠 에드워드의 방문을 두드리네요.

퇴위 후 에드워드와 월리스는 프랑스로 영원한 망명길에 올랐다. 수줍음 많고 말도 더듬던 요크 공작은 마지못해 즉위하여 조지 6세가 되었다.

그의 용기는 형이 나치와 파시스트에 대해 괴팍한 태도를 취했던 것과 대조를 이루었고, 국민들은 둘 가운데 더 훌륭한 사람이 왕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북폴리오> 제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왕실 가족의 기념사진. <북폴리오> 제공
빅토리아 여왕은 ‘유럽의 할머니’로서 많은 군주들의 조상이었지만, 그녀의 후손들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게 되었다. 끝이 뾰족한 윙 칼라 셔츠를 입고 있는 독일의 빌헬름 2세 역시 빅토리아의 여러 손자 가운데 한 명으로, 여기서는 또 다른 손자인 잉글랜드의 조지 5세로부터 영접을 받고 있다. 메리 왕비가 그들 사이에 서 있다. 항해복 차림의 왕자와 공주들 중에는 미래의 에드워드 8세와 그 동생인 조지 6세가 보인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