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한겨레

사진으로 보는 영국의 20세기 ③ 노동자들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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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래 널고 있는 여인. 사진 험프리 스펜더
빨래 널고 있는 여인 어느 북부 남자가 빨래를 널고 있는 여인을 보고서 이렇게 말했다. “웬만하면 저 아낙네가 손수 빨래를 다 했을 것이고, 저 옷들은 다른 사람들 것이겠죠. 빨래 한 바구니 해주는 데 반 크라운씩 받는 조건으로 빨았거나, 아니면 옷을 빌려와서 공짜로 빨았을 거예요. 저 옷들을 전당 잡히면 다음주 금요일까지 쓸 돈이 생기니까요.”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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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워드 시대의 하인들
에드워드 시대 하인들 에드워드 시대에는 200만 명 이상의 가내 하인들이 있었다. 급료는 형편없어서, 동이 트기도 전에 아침식사용 은제 식기를 준비해야만 했던 사진 속의 하녀(왼쪽) 같은 경우 1년에 12파운드가 고작이었고, 정원사의 경우에는 그보다 조금 더 받았다(오른쪽). 그러나 적어도 먹고 자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었고, 화목한 가정은 곧 좋은 일자리를 의미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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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녀들의 민첩한 손놀림은 랭커셔의 대규모 면직 산업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이 지역의 눅눅한 공장들이 뽑아내고 엮어낸 면직물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임금은 고작 주당 몇 실링에 불과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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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두 노동자의 자녀들이 런던 이스트엔드에서 자선단체들이 나눠주는 구호품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 폴 마틴
부두 노동자의 자녀들 이들의 아버지들은 시간당 6펜스의 최저임금을 의미하는 이른바 ‘부두 노동자들의 태너’를 위한 파업에 참가 중이었다. 시위자들은 생선 대가리를 들고 트라팔가 스퀘어에서 퍼레이드를 했는데, 그들이 얼마나 형편없는 음식을 먹고 살아야 하는 처지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결국 목표는 달성되었지만 부두 노동자 같은 일용직 노동자들의 생활은 여전히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기에 급급한 실정이었고, 아이들은 가로등에 매달려 빙글빙글 돌면서 노는 식의 오락거리를 스스로 만들어내야 했다. 미끄럼틀과 그네가 갖춰진, 세금으로 운영되는 놀이터는 먼 훗날의 이야기였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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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1년경 빈민가 아이들이 상당히 저렴하지만 그들의 형편으로는 꿈도 꾸지 못할 진열품들을 바라보고 있다.
빈민가 아이들 맨발인 것으로 보아 집에서 가족과 함께 사는 아이들이었을 것이다. 버림받거나 고아원으로 보내진 아이들의 경우에는 자선단체에서 최소한 1인당 매주 6실링 정도의 비용을 들여 음식을 먹여주고 옷을 입혀주고 신발을 신겨주는 등 적절히 보살펴주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슬픔에 차고 기운이 쇠하고 일에 치인 엄마들” 대부분은 그 비용의 절반 수준을 감당하기도 어려웠다. 요크 지역 가정의 4분의 1가량이 빈민수용소보다도 못한 생활환경에 처해 있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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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휫비에 있는 에스크 강에서 일꾼들이 최초의 전기 케이블을 설치하고 있다. 사진 프랭크 메도 서트클리프
케이블 설치하는 일꾼들 꼿꼿하고 위압적인 자세로 서 있는 감독관 앞에서 일꾼들이 허리를 굽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이때 벌써 ‘주인과 종 사이에 영원히 지속되는 봉건관계’가 손실을 초래하고 있음 (이와 달리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상사와 훨씬 더 평등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을 깨달았다. 파업으로 인해 매년 엄청나게 많은 작업시간이 낭비되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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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박 제조공이 장차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게 될 타이태닉 호의 오른쪽 프로펠러축을 장착하고 있다. 이들은 비교적 임금수준이 높았지만 작업환경은 매우 위험했다. 배가 점차 커지면서 리벳공들은 바람이 휘몰아치는 30미터 높이의 허술한 작업대에서 일해야만 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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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켄트의 틸먼스톤 탄광에서 일하는 이 광부들은 서 있는 것만 해도 행운이었다. 비좁고 허름한 수많은 갱도에서 열기와 먼지에 휩싸인 채 희미한 어둠속에서 무릎으로 기어 다니며 일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사진 사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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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조합과 고용주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격렬한 산업분쟁이 확산되었다. 1914년 7월에 석탄 운반 노동자들이 파업하는 동안 런던의 세인트팬크라스에 서 있던 한 아마추어 광부의 모습이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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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9월, 철도 파업 참가자들이 철도 정상운행에 협조하는 자원봉사자들과 마찰을 빚고 있는 장면.
파업 마찰 파업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벽에 붙은 포스터가 묻고 있다. 트로츠키가 이끄는 적군과 백군이 맞붙었던 러시아 내전에 영국은 백군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러시아로부터 공산주의의 불꽃이 옮겨 붙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윈스턴 처칠의 표현대로 “볼셰비키를 싹부터 잘라버리려는” 이러한 시도는 별 소용이 없었다. 독일 역시 매우 불안정했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배상금과 영토 이양에 대한 요구로 인해 매우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데일리 뉴스〉는 “독일은 완전히 발가벗겨진 상태에서 주머니를 다 털어 놓으라는 협박을 받고 있다.”고 논평했다. 유럽은 이미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러나 ‘붉은 클라이드사이드’와 국내의 혁명 가능성에 대한 공포는 기우였다. 영국은 천성에 맞게 안정적인 사회를 유지했다.


잡지 <존 불〉에 매력적인 광고가 하나 실렸는데, 그것은 사기였다. 이 잡지의 편집인이자 소유주인 하원의원 호레이쇼 보톰리는 사실 이 시대의 위대한 허풍선이였다. 그는 당첨자 없는 복권과 상환금 없는 채권으로 독자들을 속였다. 또 다른 사기꾼인 로버트 맥스웰의 선임자 격이었던 그는 결국 1922년에 사기 혐의로 유죄선고를 받았다. <북폴리오> 제공

 

사진으로 보는 영국의 20세기 ④ 전쟁 수행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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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탄 공장의 소녀들
포탄 공장의 소녀들 = 포탄 장탄 공장에서 일하는 소녀들은 ‘카나리아’라고 불렸는데 화학물질이 그들의 얼굴과 손을 노랗게 물들였기 때문이었다. 여성들은 선반을 조작하고 선박에 리벳을 박고 비행기의 프로펠러를 돌렸으며, 트럭 엔진을 정밀 조사했다. 물론 농사도 지었고 여성 보충 부대에서 유니폼을 입고 일하기도 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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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일할 권리를 달라.” 전쟁 시작과 함께 여권 운동자들이 했던 말이다. 여성은 전쟁 수행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코번트리에서 한 소녀가 380밀리미터 대포를 청소하기 위해 포구에 들어가 있다. 사진/호레이스 니콜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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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군의 런던 대공습 뒤 우유 배달부가 잔해를 헤치며 배달하는 모습.
우유 배달부 = “독일군 폭격기가 런던을 재차 공습하여 더 많은 양의 폭탄을 투하했다.” 1940년 10월 10일, 이 사진의 원래 설명문에는 이런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오늘 아침 우유배달부가 잔해를 헤치며 배달하는 모습이다.”

나치의 런던 대공습은 874년 전에 프랑스의 노르만족에게 침략당한 이래 영국 본토가 처음으로 전쟁 피해를 입는 순간이었다. 집중 폭격의 최초 며칠간 약 6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리라는 예측이 쏟아졌고, 국민들의 사기는 폭격에 무너진 건물들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집을 잃은 사람들은 평화를 애원하며 울부짖을 것이고, 도시 전체가 아수라장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만약 실제로 그 지경까지 이르렀더라면 유럽 전체가 나치 독재정의 희생자가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상황이 그렇게까지 악화되지는 않았다. 이 사진은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를 표현하고 있다. 히틀러는 최악의 행위를 저질렀을지 모르지만, 평범한 남녀 노동자들은 결코 항복하거나 공포에 휩싸이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이 우유배달부처럼 그들은 ‘평상시 생활’을 유지할 것이었다. 러시아인들도 똑같은 결론에 이르렀지만 그들이 감당해야 할 희생은 훨씬 더 컸다.

그리고 독일인들 역시 결국 패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똑같은 행동을 취했다. 영국인들의 행동이 의미심장한 것은 그들이 가장 먼저 그러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라기보다(물론 그들의 행동이 뒤에 발생한 일들에 큰 영향을 끼치기는 했지만) 강제수용소가 있었던 독일이나 굴라크가 있었던 러시아와 달리 국민들이 자유롭게 내린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이 처칠의 말대로 “예전에 몇 번 시도되었던 다른 모든 정부 형태들을 제외하고는 가장 형편없는 정부 형태”인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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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의 처참한 광경에도 전혀 겁먹지 않은 책벌레가 런던 공습 이후 홀랜드 하우스의 잔해 속에서 책을 찾고 있다. 이곳은 일치스터 백작의 저택으로 1607년에 건설되었으며, 19세기 전반기에 위그들의 사회활동 중심지이기도 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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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공군의 공습을 피해 크라이스트 처치 지하실의 석관 속에서 자는 주민. 사진/빌 브랜트
석관 속의 주민 = 약삭빠른 주민 한 명이 독일 공군의 공습을 피해 크라이스트처치―런던 빈민가 스피탈필즈에 위치한 18세기 건축가 니콜라스 호크스모어의 대작―지하실의 단단한 석관 속에서 자고 있다. 등화관제는 아주 효과적으로 실시되어 야간 보행자들이 차에 치이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이를 막기 위해 도로 가장자리에 흰색 선을 그었다.




침입자들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도로표지와 버스의 목적지 안내판을 제거했지만, 이로 인해 국민들도 피해를 입었다. 길을 묻는 영국인들은 종종 스파이라는 오인을 받았다. 바이올렛 오츠는 에식스에 있는 그녀의 저택 게스팅소프 홀에서 〈타임스〉에 편지를 써서 “길을 묻는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우리 시민들에게 정확한 지침을 좀 내려주실 수는 없을까요?”라고 투덜댔다. “우리 정원사와 그의 아들 역시 그런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 우리 집은 경찰서에서 5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어서 그런 사람들이 사악한 의도를 진척시키기 전에 경찰에 신고하기란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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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영국인에게 플랑드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먼 곳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꽤 가까워서, 런던의 빅토리아 역에서 배웅을 받으며 전선으로 떠나는 이 남자는 마치 브라이턴으로 소풍을 떠나는 듯한 모습이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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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햄턴 군인병원의 절단 환자들
절단 환자들 = 시그프리드 서순은 로햄턴 군인병원의 절단 환자들 같은 사람들을 위해 시 한 편을 썼다.

그게 문제가 되나요? …… 다리를 잃은 것이? ……

사람들이 늘 친절하게 대해 주고,

다른 사람들이 머핀과 달걀을 허겁지겁 먹기 위해

언제 사냥을 마치고 돌아올지에 대해

관심을 보일 필요도 없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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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걸하는 제대 군인들
구걸하는 군인들 = 한때 ‘영웅에 걸맞은 땅’을 약속받았던 제대 군인들의 궁핍은 특히 눈물겨웠다. 런던에서 거리공연을 하며 동전을 구걸하고 있는 제대 군인들의 모습이다. 트럼펫 연주자는 “심한 천식과 기관지염과 폐기종에 걸려 일할 능력이 없습니다.”라는 내용의 푯말을 목에 걸고 있다.

그러나 적이었던 독일 제대 군인들과 달리 이들은 정치깡패로 돌변하지 않았다. 고난의 시대는 비록 퇴직을 낳았지만, 가두 폭력이나 극단주의의 출현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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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행랑객들. 사진/이디스 튜더 하트
일광욕 즐기는 행락객들 = 일요일에 해변으로 차를 몰고 가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행랑객들의 모습이다. 이는 당시 최신식 여가선용이었다. 1939년경에는 영국의 대부분 지방이 호황을 누렸다.

소비 증가와 자동차 산업의 성장은 미국 다음으로 세계 최고였다. 도시 외곽 지역들은 영화관과 출퇴근용 전철의 등장에 힘입어 황금기를 맞이했다. 유급휴가가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자동차를 싼 값에 구입할 수 있었으며, 노동시장 역시 활발하게 돌아가서 공장들은 많은 일자리를 제공했다.

제국은 1918년까지 축소되기는커녕 더욱 팽창했고, 대륙에서 극단적 사조인 파시즘이나 공산주의가 발전했던 반면 영국의 정치는 연립내각을 통해 타협의 길을 모색했다. 영국인들은 전쟁으로 인해 유럽의 그 어느 나라 국민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을 잃을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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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대 랜즈다운 후작의 어릴 적 모습
제8대 랜즈다운 후작 = 로드 ‘찰리’ 머서 네언은 1914년 10월에 프랑스에서 죽었다. “폐하, 폐하께서 찰리의 무덤 사진과 관련하여 저희에게 베풀어주신 크나큰 친절에 보답하고자, 저는 그의 두 살 난 어린 아들의 사진을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찰리의 아버지이며 전직 외무장관이자 인도 총독이었던 랜즈다운 경이 1915년 초에 메리 왕비에게 쓴 글이다.

“국왕 폐하가 대부인 조지는 사랑스런 어린 소년이며, 그 아이가 우리에게 맡겨졌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사진 속에 흐르는 측은한 분위기가 전쟁 선전용으로 이용되지 않았던 것은 랜즈다운 경이 징고이즘에 대해 회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사진을 보우드 파크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가져왔는데, 그 집은 곧 병원으로 개조되었다. 또한 그는 전시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보복 없는 평화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 소년은 나중에 제8대 랜즈다운 후작이 되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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