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프레시안 2007-12-13 오전 1:25:35


 

4) 아메리카가 유럽에 가져다 준 것들
 
  새로운 농작물들의 도입
 
  유럽은 아메리카로부터 많은 것을 들여왔다. 콜럼버스는 첫 귀환길에 앵무새와 아메리카인을 대동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뒤에도 사람들은 아메리카의 신기한 동, 식물들을 많이 갖고 들어왔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옥수수, 감자, 고구마, 고추, 토마토, 담배 같은 새로운 농작물들이다. 카사바는 아프리카에 옮겨졌다.
 
  특히 옥수수나 감자는 유럽에서 얼마 안 가 주식의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미 18세기 전반이면 옥수수는 이탈리아의 가장 중요한 작물이 될 정도였고 프랑스에서도 많이 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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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에 그려진 옥수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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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79년에 그린 신세계 작물인 토마토

  감자는 18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감자는 처음에는 유럽인들이 다가서기가 어려운 작물이었다. 땅속의 뿌리 식물은 기독교적 전통에서는 악마와 관련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조량이 부족한 지역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에 그 후 기후가 좋지 않은 유럽의 가장 중요한 식량자원의 하나가 되었다. 사실 18세기 이후 유럽의 인구 급증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이들 새로운 작물인 것으로 보인다.
 
  또 지중해 지역에서 일부 재배되던 사탕수수가 서인도제도로 이식되어 대량 재배되며 유럽인의 식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는 유럽에서 17세기 이후 커피나 홍차 같은 음료 문화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다. 담배도 16세기부터 유럽인들의 기호품으로 굳게 자리 잡았다.
 
  유럽경제의 발전과 중심 이동
 
  아메리카의 정복은 유럽에게 경제적으로 큰 혜택을 가져다주었다. 식민지인의 착취와 함께 귀금속의 대량 유입, 대서양 무역의 발전이 유럽의 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그래서 16세기부터 유럽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귀금속의 유입은 그때까지 만성적인 화폐 부족에 시달리던 유럽경제에 큰 자극을 주었다. 물론 긍정적인 영향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갑자기 금, 은의 양이 증가하며 통화량이 늘어나자 높은 수준의 인플레이션이 나타난 것이다. 그럼에도 화폐량의 증가는 유럽의 경제 규모를 확대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 아메리카에서 들어 온 귀금속은 아시아와의 무역에서 결제 수단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유럽인들이 아시아에 수출할 상품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동방물산을 사오는 대가를 주로 은으로 지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유럽의 만성적인 무역역조를 해결해 주었다.
 
  이렇게 식민지 착취나 아시아 무역을 통해 축적된 돈은 다시 설탕정제업, 노예무역, 조선업, 대서양 어업 등에 투자되며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 점차 이루어졌다. 이리하여 16세기 말부터 유럽에서는 뚜렷한 경제적 변화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전반적으로 생활수준이 올라가고 도시도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16세기부터 대서양에 면해 있는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의 경제가 보다 활성화함에 따라 유럽의 중심도 바뀌었다. 지중해 연안은 고대 이래 항상 유럽의 중심이었으나 이런 상황이 처음으로 뒤바뀌게 되었다.
 
  1504년에 한 베네치아 상인이 후추를 사기 위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갔으나 한 포대도 살 수 없었다. 그것은 무역로가 이미 바뀌었기 때문이다. 또 새 항로로 들어오는 후추는 값도 절반이나 쌌다. 그러니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나 그와 연결된 독일지역이 경제적으로 낙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8세기 이후 서유럽국가들이 유럽의 중심이 된 것은 그 결과이다.
 
  크게 확대된 유럽인의 시야
 
  유럽인들은 아메리카를 통해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인식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1492년에만 해도 교육받은 유럽인들은 모든 지식의 근원을 기독교의 성경, 그리스 · 로마의 고전들, 당시의 권위 있는 몇몇 책들에 의존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믿어지던 성경이나 고전 등 옛 이론이나 지식들은 더 이상 아메리카에 적용할 수 없었다. 아메리카에서 목격한 것들은 그런 지식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6세기 중반의 호세 드 아코스타라는 스페인 사람의 이야기가 당시의 상황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서인도 제도 지역을 지나가며 나에게 일어난 일을 쓰겠다. 열대에 대해 시인이나 철학자들이 쓴 것을 읽고 나는 적도에 도달하면 뜨거운 열기를 견디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러나 사실은 달랐다. 내가 적도를 넘을 때는 …… 너무 추워서 햇볕에 몸을 덥혀야 했다. 그러니 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상학(氣象學)과 그의 철학에 대해 웃지 않고 어떻게 하겠는가'
 
  그는 여행에서 목격한 것이 고대의 위대한 철학자의 생각과 모순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자 고전이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내버려지는 것은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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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에 유럽인들이 관찰한 아메리카 들소(Buffalo)의 모습

  또 많은 동식물들은 유럽에서는 전혀 보지도 듣지도 못하던 것이었다. 따라서 이런 것들은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해 오던 동, 식물의 분류를 전혀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그뿐이 아니라 인간 자체도 문제였다. 그들이 아메리카에서 만나게 된 원주민을 어떻게 이해하고 다루어야 할지 혼란을 느꼈던 것이다. 그들이 진정한 사람인지, 신의 이미지대로 만들어졌는지, 이성을 가졌는지가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17세기 초가 되면 지식은 도서관의 경계선을 넘어섰다. 지식이 세계 그 자체와 같이 크고 다양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 그것은 망원경을 이용한 천문학자의 기록, 항해자들의 보고서, 의사들의 해부학 보고서 등 다방면으로 확대되었다. 교수들도 더 이상 책에만 의존할 수 없었으므로 대학에 식물원, 해부실, 천문대 등을 마련하여 경험적 관찰을 중시하게 되었다. 학자들이 일종의 박물학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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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해기록을 문헌과 비교하여 검토하고 있는 17세기 학자의 모습 (Theodor Galle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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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의 해부학 극장 (1625)

  이 점에서 아메리카는 유럽인들의 지식틀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유럽에서 비교적 객관성을 띤 근대학문이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빨리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이 점에서 유럽인은 큰 은혜를 입었다. 아메리카가 유럽인들의 스승이 된 셈이다.
 
  5) 1492년은 세계사의 전환점
 
  1492년은 매우 중요한 해이다. 이로 인해 아메리카에 대한 유럽인의 정복이 시작되었다. 한 아스텍 사람이 이것을 파치쿠티(대재난)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그런 표현으로는 모자란다. 그것은 인류사에서 아마도 가장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근 1억에 가까운 아메리카인들이 유럽인이 가져온 전염병으로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학살, 노예화, 강제노동 그리고 억압과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를 인류 최대의 홀로코스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수 세기 동안 수천만 명의 아프리카 인이 끌려와 혹독한 노예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그 결과 서양이 오늘날과 같은 번영과 부를 누리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서양인들이 오늘날 누리는 부와 호사의 상당부분은 아메리카, 또 아프리카 사람들의 희생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이렇게 아메리카인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는 점에서 1492년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1492년은 다른 면에서도 중요성을 갖고 있다. 이 해가 유럽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시작점으로서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1492년 이전의 유럽은 부나 힘, 과학, 기술, 문화적 영향력에서 아시아를 능가하지 못했다. 오히려 상당히 뒤쳐져 있었다. 또 이때까지만 해도 유럽이 반드시 우월하거나 지배적이어야 할 필연성도 없었다.
 
  그러나 1492년 이후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유럽 문명이 아메리카를 매개로 국제적이고 지구적인 우월성을 확보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유럽의 8배나 되는 광대한 토지,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수천만의 노동력, 풍부한 자원을 기반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흥기로 말미암아 19세기에 현실화했다. 세계의 지배를 달성한 것이다. 이 점에서 1492년은 세계사적 전환점이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비록 좋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는 했지만.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7-12-11 오전 3:30:04


<15> 유럽의 해외팽창 ③ 유럽은 어떻게 아메리카를 착취했나?

3) 유럽인들에 의해 아시아와 아메리카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나
 
  유럽인, 아시아의 역내 무역에 참여
 
  15세기 말 당시 유럽인들은 아시아 상황에 대해서 거의 몰랐다. 몽골제국이 망하고 또 오스만 튀르크가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며 동 · 서의 교통이 전보다 불편해진 것이 주된 이유이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마르코 폴로가 살았던 13세기보다 아시아에 대해 더 무지했다. 콜럼버스가 항해를 할 때 가지고 떠난 중국황제에 대한 신임장은 몽골족의 칸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명나라가 생긴 것이나 인도에 무굴 제국이 성립한 것도 몰랐다.
 
  당시 아시아에는 명이나 무굴제국, 페르시아라는 대제국들이 건재하고 있어서 유럽인들은 이에 범접할 수 없었다. 유럽에는 이에 비견할 만한 나라조차 없었다. 또 경제적인 면에서도 유럽은 아시아에 훨씬 뒤떨어져 있었다.
  바스코 다가마는 캘리컷에 도착하여 가지고 간 유럽 상품들을 팔려고 했으나 아무 것도 팔 것이 없었다. 인도의 상점들에 가득 차 있는 상품들과는 질에서 비교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그곳에서 스페인어를 하는 튜니지아인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이미 인도에서는 국제적인 상업망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유럽인들이 그제야 이에 뒤늦게 참여하게 된 것이다.
 
  물론 바스코 다가마가 인도에서 싣고 돌아온 동방물산은 큰 이익을 냈다. 세 척 가운데 한 척 밖에 돌아오지 못했지만 무려 60배의 이익을 냈다고 한다. 중간에서 이익을 붙이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후 지중해 대신 아프리카를 도는 항로가 점차 동방무역에서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인도로 가는 항로가 워낙 멀고 위험이 많아 그 후에도 생각만큼 많은 무역선이 취항하지는 못했다.
 
  이와 함께 포르투갈 상인들이나 나중의 네덜란드, 영국 상인들은 인도양 안의 중개무역에도 종사했다. 당시 인도양의 물동량이 매우 많았으므로 그 편이 유럽과의 무역보다 더 유리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요소요소에 그 지역 왕이나 권력자의 허락을 얻어 무역거점을 만들었다. 아덴이나 말라카해협, 쟈카르타, 마카오 같은 곳들이 그곳이다. 아메리카에서와 같이 식민지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식민주의자의 전형 콜럼버스
 
  그러면 콜럼버스는 서인도제도에서 어떤 일을 했을까? 그는 말년에 자신을 기독교적 사명을 가진 인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서인도제도에 저지른 일들은 영웅다움이나 도덕성, 창조성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오직 이익만을 탐하는 투기가, 모험가, 착취자의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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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

  그는 항해를 위해 스페인 왕실의 후원을 얻었으나 그것은 말 그대로의 후원은 아니고 일종의 동업계약이다. 항해에 드는 전체 비용의 1/8을 그가 대기로 하고 나머지를 스페인 왕실에서 대기로 했다. 항해를 통해 얻는 수익의 1/8은 역시 콜럼버스의 차지였다. 또 새로이 얻는 영토에 대해서 그는 종신총독 직과 그 직위를 자식에게 세습시킬 권리를 보장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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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의 페르디난도와 이사벨라 공동왕에게 항해계획을 설명하는 콜럼버스

  그러므로 그가 서인도제도에 도착해서 한 가장 중요한 일은 동방물산 같이 이익이 될 만한 산물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 섬을 돌아 다녀 보아도 어디에도 후추 같은 돈이 될 만한 것들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어느 섬에서 사금이 나는 것을 발견하자 그는 두 번째 원정부터는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섬사람들에게 사금을 바치도록 강요했다.
 
  또 이들 원주민들을 노예화하여 강제노동을 시켰다. 1495년에는 550명의 원주민을 노예로 팔기 위해 스페인으로 데리고 귀환했다. 그 가운데 살아남아 스페인에서 노예생활을 한 사람은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또 사탕수수를 쿠바 섬에 이식함으로써 노예노동에 의존하는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의 기초를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착취적인 식민주의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나중에 아메리카에 들어간 유럽인들은 모두 그의 모범을 충실히 따랐다. 이렇게 보면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원주민, 나아가 비유럽인에게는 영웅도 위대한 인물도 아니다. 아메리카에 재난을 가져온 사악한 인간일 뿐이다.
 
  아메리카의 정복과 식민화
 
  코르테스와 피사로의 뒤를 이어 콩퀴스타도르라고 불린 수많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중남미 지역에서 정복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투기적인 모험가들로 그 가운데에는 귀족 뿐 아니라 평민, 흑인 노예 출신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군대를 모아 각지의 원주민 부족들을 정복함으로써 스페인의 식민지를 점차 확대했다. 이런 활동은 오지에서는 19세기까지도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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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정복자(conquistador)의 모습

  중남미의 거의 모든 지역을 스페인이 차지했으나 브라질만은 예외로 포르투갈에 속했다. 이는 로마 교황이 중재한 1494년의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해 두 나라의 세력권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의 모습이 제대로 밝혀지기도 전인 이때 벌써 두 나라가 세력권을 나누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거의 대부분의 중남미 지역에는 스페인 식민자들을 지배자로 하는 새로운 사회체제가 만들어졌다. 사실 원주민들의 기존 사회, 정치체제가 거의 무너지다시피 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아메리카의 정복사업은 국가와 교회의 공동사업으로 생각되었으므로 원주민들의 기독교화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원주민들의 신전을 무너뜨리고 많은 카톨릭 교회가 건설되었으며 토착민들을 강제 개종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반항하는 경우 학살 등 온갖 강압수단을 동원했다.
 
  초기의 식민자들 사이에는 여자의 수가 매우 모자랐으므로 스페인 정부는 원주민과의 혼혈을 적극 권장했다. 그래서 중남미 특유의 혼혈인인 메스티조 계급이 생겨났다. 메스티조는 스페인 정부로부터 원주민보다 우대를 받았다.
 
  나중에는 노예로서 아프리카 인이 많이 수입되며 이들과도 여러 형태의 혼혈도 이루어졌으므로 중남미 사회는 인종적으로 매우 복잡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 물론 백인이 가장 위의 서열에서 군림하게 되었다.
 
  스페인인 정복자들이나 그 후손, 또 새로 스페인에서 들어온 유력한 식민자들은 왕의 허락을 얻어 광대한 토지를 차지하여 대농장인 플랜테이션들을 건설했다. 그리고 원주민에 대한 강제노동을 이용하여 목축을 하거나 사탕수수, 담배 등을 경작했다.
 
  16세기 중반에는 큰 매장량을 가진 은광산들을 개발했다. 여기에도 대량의 노동력이 필요했으므로 많은 원주민 남자들이 징발되어 노예와 같은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그 결과 16, 17세기 내내 스페인의 세비야 항으로는 엄청난 양의 금, 은이 아메리카로부터 쏟아져 들어오게 된다.
 
  아메리카의 이런 엄청난 착취가 스페인을 16, 17세기에 유럽 최대의 부국으로 만든 바탕이다. 영국인과 프랑스인들은 중남미 지역에서도 활동했으나 북아메리카에 대한 침탈은 17세기 이후에야 본격화 했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7-12-11 오전 3:30:04


<15> 유럽의 해외팽창 ③ 유럽은 어떻게 아메리카를 착취했나?

3) 유럽인들에 의해 아시아와 아메리카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나
 
  유럽인, 아시아의 역내 무역에 참여
 
  15세기 말 당시 유럽인들은 아시아 상황에 대해서 거의 몰랐다. 몽골제국이 망하고 또 오스만 튀르크가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며 동 · 서의 교통이 전보다 불편해진 것이 주된 이유이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마르코 폴로가 살았던 13세기보다 아시아에 대해 더 무지했다. 콜럼버스가 항해를 할 때 가지고 떠난 중국황제에 대한 신임장은 몽골족의 칸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명나라가 생긴 것이나 인도에 무굴 제국이 성립한 것도 몰랐다.
 
  당시 아시아에는 명이나 무굴제국, 페르시아라는 대제국들이 건재하고 있어서 유럽인들은 이에 범접할 수 없었다. 유럽에는 이에 비견할 만한 나라조차 없었다. 또 경제적인 면에서도 유럽은 아시아에 훨씬 뒤떨어져 있었다.
  바스코 다가마는 캘리컷에 도착하여 가지고 간 유럽 상품들을 팔려고 했으나 아무 것도 팔 것이 없었다. 인도의 상점들에 가득 차 있는 상품들과는 질에서 비교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그곳에서 스페인어를 하는 튜니지아인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이미 인도에서는 국제적인 상업망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유럽인들이 그제야 이에 뒤늦게 참여하게 된 것이다.
 
  물론 바스코 다가마가 인도에서 싣고 돌아온 동방물산은 큰 이익을 냈다. 세 척 가운데 한 척 밖에 돌아오지 못했지만 무려 60배의 이익을 냈다고 한다. 중간에서 이익을 붙이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후 지중해 대신 아프리카를 도는 항로가 점차 동방무역에서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인도로 가는 항로가 워낙 멀고 위험이 많아 그 후에도 생각만큼 많은 무역선이 취항하지는 못했다.
 
  이와 함께 포르투갈 상인들이나 나중의 네덜란드, 영국 상인들은 인도양 안의 중개무역에도 종사했다. 당시 인도양의 물동량이 매우 많았으므로 그 편이 유럽과의 무역보다 더 유리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요소요소에 그 지역 왕이나 권력자의 허락을 얻어 무역거점을 만들었다. 아덴이나 말라카해협, 쟈카르타, 마카오 같은 곳들이 그곳이다. 아메리카에서와 같이 식민지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식민주의자의 전형 콜럼버스
 
  그러면 콜럼버스는 서인도제도에서 어떤 일을 했을까? 그는 말년에 자신을 기독교적 사명을 가진 인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서인도제도에 저지른 일들은 영웅다움이나 도덕성, 창조성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오직 이익만을 탐하는 투기가, 모험가, 착취자의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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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

  그는 항해를 위해 스페인 왕실의 후원을 얻었으나 그것은 말 그대로의 후원은 아니고 일종의 동업계약이다. 항해에 드는 전체 비용의 1/8을 그가 대기로 하고 나머지를 스페인 왕실에서 대기로 했다. 항해를 통해 얻는 수익의 1/8은 역시 콜럼버스의 차지였다. 또 새로이 얻는 영토에 대해서 그는 종신총독 직과 그 직위를 자식에게 세습시킬 권리를 보장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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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의 페르디난도와 이사벨라 공동왕에게 항해계획을 설명하는 콜럼버스

  그러므로 그가 서인도제도에 도착해서 한 가장 중요한 일은 동방물산 같이 이익이 될 만한 산물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 섬을 돌아 다녀 보아도 어디에도 후추 같은 돈이 될 만한 것들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어느 섬에서 사금이 나는 것을 발견하자 그는 두 번째 원정부터는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섬사람들에게 사금을 바치도록 강요했다.
 
  또 이들 원주민들을 노예화하여 강제노동을 시켰다. 1495년에는 550명의 원주민을 노예로 팔기 위해 스페인으로 데리고 귀환했다. 그 가운데 살아남아 스페인에서 노예생활을 한 사람은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또 사탕수수를 쿠바 섬에 이식함으로써 노예노동에 의존하는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의 기초를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착취적인 식민주의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나중에 아메리카에 들어간 유럽인들은 모두 그의 모범을 충실히 따랐다. 이렇게 보면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원주민, 나아가 비유럽인에게는 영웅도 위대한 인물도 아니다. 아메리카에 재난을 가져온 사악한 인간일 뿐이다.
 
  아메리카의 정복과 식민화
 
  코르테스와 피사로의 뒤를 이어 콩퀴스타도르라고 불린 수많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중남미 지역에서 정복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투기적인 모험가들로 그 가운데에는 귀족 뿐 아니라 평민, 흑인 노예 출신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군대를 모아 각지의 원주민 부족들을 정복함으로써 스페인의 식민지를 점차 확대했다. 이런 활동은 오지에서는 19세기까지도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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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정복자(conquistador)의 모습

  중남미의 거의 모든 지역을 스페인이 차지했으나 브라질만은 예외로 포르투갈에 속했다. 이는 로마 교황이 중재한 1494년의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해 두 나라의 세력권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의 모습이 제대로 밝혀지기도 전인 이때 벌써 두 나라가 세력권을 나누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거의 대부분의 중남미 지역에는 스페인 식민자들을 지배자로 하는 새로운 사회체제가 만들어졌다. 사실 원주민들의 기존 사회, 정치체제가 거의 무너지다시피 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아메리카의 정복사업은 국가와 교회의 공동사업으로 생각되었으므로 원주민들의 기독교화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원주민들의 신전을 무너뜨리고 많은 카톨릭 교회가 건설되었으며 토착민들을 강제 개종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반항하는 경우 학살 등 온갖 강압수단을 동원했다.
 
  초기의 식민자들 사이에는 여자의 수가 매우 모자랐으므로 스페인 정부는 원주민과의 혼혈을 적극 권장했다. 그래서 중남미 특유의 혼혈인인 메스티조 계급이 생겨났다. 메스티조는 스페인 정부로부터 원주민보다 우대를 받았다.
 
  나중에는 노예로서 아프리카 인이 많이 수입되며 이들과도 여러 형태의 혼혈도 이루어졌으므로 중남미 사회는 인종적으로 매우 복잡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 물론 백인이 가장 위의 서열에서 군림하게 되었다.
 
  스페인인 정복자들이나 그 후손, 또 새로 스페인에서 들어온 유력한 식민자들은 왕의 허락을 얻어 광대한 토지를 차지하여 대농장인 플랜테이션들을 건설했다. 그리고 원주민에 대한 강제노동을 이용하여 목축을 하거나 사탕수수, 담배 등을 경작했다.
 
  16세기 중반에는 큰 매장량을 가진 은광산들을 개발했다. 여기에도 대량의 노동력이 필요했으므로 많은 원주민 남자들이 징발되어 노예와 같은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그 결과 16, 17세기 내내 스페인의 세비야 항으로는 엄청난 양의 금, 은이 아메리카로부터 쏟아져 들어오게 된다.
 
  아메리카의 이런 엄청난 착취가 스페인을 16, 17세기에 유럽 최대의 부국으로 만든 바탕이다. 영국인과 프랑스인들은 중남미 지역에서도 활동했으나 북아메리카에 대한 침탈은 17세기 이후에야 본격화 했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7-12-06 오전 1:57:06


<14> 유럽의 해외팽창 ② 유럽은 어떻게 아메리카를 정복했나?


3) 15세기 말 유럽인의 해외진출은 무엇 때문에 가능했나
 
  창조적인 인물로서의 콜럼버스 신화
 
  콜럼버스가 탁월한 항해자라는 사실은 그 당대의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구할 수 있던 모든 지식과 정보를 수집하고, 자신의 오랜 항해경험에 바탕을 두어 면밀하게 항해계획을 세웠고 그것을 집요하게 실천으로 옮겼다. 결코 평범한 인물은 아니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콜럼버스를 상식을 넘어선 매우 창조적인 인물로, 또 비전과 영감을 지닌 철학적인 풍모의 인물로까지 그려왔다. '콜럼버스의 달걀'에 대한 일화가 그 한 예이다. 모든 사람이 그대로는 세우지 못한 달걀을 그가 한쪽 모서리를 깨뜨려서 테이블 위에 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신화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지구구체설과 관련된 것이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는데 그만이 지구가 둥글다고 믿었고 그래서 목숨을 걸고 대서양 횡단에 나섰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신념의 인간이자 그야말로 위대한 모험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날조된 이야기에 불과하다. 1828년에 워싱턴 어빙이라는 사람이 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생애와 항해>라는 콜럼버스의 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빙은 이 책에서 콜럼버스가 항해에 나서기 이전인 1486년에, 스페인 살라망카 대학에서 콜럼버스와 학자들, 성직자들 사이에 지구가 둥근지 평평한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던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른 이들이 모두 고대의 책들을 인용하며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한 데 비해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그 후 100년 이상 역사가들에 의해 여러 형태로 계속 되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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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인들은 지구가 평평해서 먼 바다로 나아가면 절벽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픽션이다. 당시의 교육 받은 유럽인들은 모두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당시의 스페인 어부들은 이미 대서양 한 복판까지 고기를 잡으러 다녔었다. 그러니 배가 먼 바다로 나아가면 절벽에서 떨어져 우주 깊은 곳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비상식적인 이야기이다.
 
  또 살라망카 회합에서 실제로 논의된 것은 대서양의 넓이에 관한 것이다. 이때 콜럼버스는 카나리아 제도에서 중국의 항주까지의 거리를 약 5,600km로 주장했다. 이는 당시 널리 받아들여진 견해인 토스카넬리의 8,000km보다 훨씬 짧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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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스카넬리 (Paolo Toscanelli dal Pozzo, 1397~1482)가 그린 세계지도
 
  피렌체의 의사이자 지리학자인 토스카넬리는 이미 1474년에 로마의 포루투갈 대사에게 서쪽 방향으로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는일을 후원하도록 포루투갈 왕에게 요청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토스카넬리는 이 편지의 사본을 콜롬버스에게도 보냈다.새로운 인도항로의 발견이라는 콜럼버스의 원래 생각이 이 편지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알수 없으나, 그는 아시아가 포루투갈에서 충분히 항해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토스카넬리의 견해로부터 많은 고무를 받았다.

 
 

  이런 사실은 이미 1940년대에 자세히 밝혀진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엉터리 신화를 믿고 있는 것은 콜럼버스의 창조성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이 허구에 의해 가려지고 있다.
 
  유럽의 배나 항해기술이 특별히 우월했나?
 
  15세기 말에 유럽인들이 아시아나 아메리카에 도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많은 서양 역사가들은 유럽 문화와 유럽인들의 우월성을 들고 있다. 이 시기에 항해술, 천문관측술, 조선술, 제도술(製圖術) 등의 여러 기술들이 발전했고 나침반, 태양의 고도를 재서 위도를 알게 해주는 사분의(四分儀) 등의 항해 기구들이 사용된 것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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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중세시대의 사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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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한나라 때의 나침반

  물론 이런 주장의 일부는 맞는 말이다. 15세기에 와서 유럽의 조선술이나 제도술, 항해술 같은 것이 많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침반이나 사분의, 또 화포의 사용도 일반화되었다. 그런 것들이 발전하지 못 했다면 장거리의 대양항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장도 많다. 우선 15세기 후반 유럽의 조선술이 전보다 많이 나아져 캬라벨이라는 원양 항해가 가능한 배들이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유럽의 배는 아직 규모도 작고 설비도 시원치 않았다. 15세기 말의 상황에서 유럽의 선박 건조술이나 항해술이 다른 지역과 비교해 특별히 뛰어난 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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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의 캬라벨 선

  사실 조선술이나 항해 기구, 항해술의 많은 부분은 비유럽지역으로부터 들어 온 것이다. 캬라벨 선의 앞, 뒤에 설치하여 배의 방향을 쉽게 바꾸게 하는 삼각돛은 이슬람 배를 모방한 것이며 나침반은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것이다.
 
  또 선박의 규모도 매우 작다. 콜럼버스가 기함으로 사용한 산타 마리아 호는 배수량이 기껏 80톤 정도의 작은 배로 선원 30-40명 정도 만을 태울 수 있었다. 다른 배들은 더 작아서 세 척의 배에 다 합쳐 104명의 선원이 탑승했을 뿐이다. 물론 나중에 더 커지기는 하나 그래도 당시 중국의 배와는 규모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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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럼버스는 산타마리아, 니나, 핀타 세 척의 작은 배를 이끌고 아시아를 찾아 나섰다.

  중국의 명나라 초기인 1405년과 1433년 사이에 환관인 정화가 이끄는 대함대가 7차례나 인도양으로 항해를 했다. 수백척으로 구성된 이 함대는 가장 멀리는 아프리카의 케냐 해안까지 도달했는데 그 가운데 정화가 탄 기함인 보선(寶船)은 길이가 약 120m이고 폭이 약 50m에 달했다. 이는 돛대가 9개에 배수량이 약 3천 톤으로 추산되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하게 큰 배였다. 유럽인들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크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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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화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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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화함대의 기함인 보선(寶船)과 산타마리아호의 비교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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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화의 항해로

  또 장거리 항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화 함대의 대원정은 말할 것도 없지만 아프리카 남단을 도는 항로는 바스코 다가마 이전에도 이슬람 상인들이 잘 알고 있는 길이었다. 방향만 다를 뿐이었다.
 
  또 헤로도토스의 <역사>에는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명을 받은 일단의 페니키아인들이 아라비아 만에서 출발하여 리비아(아프리카)의 남단을 돌아서 3년째 되는 해에 지금의 지브롤터 해협인 '헤라클레스의 기둥'을 지나 이집트로 귀환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미 수천 년 전에 고대인들이 아프리카 해안을 일주한 것이다. 그러니 15세기 말 유럽인들의 항해를 특별히 뛰어난 기술이나 문화능력의 산물로 볼 수는 없다.
 
  유럽인은 어떻게 아메리카에 도달했나
 
  그러면 아시아 국가들, 특히 태평양에 면해 있는 중국은 유럽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는데 왜 아메리카에 갈 수 없었을까. 그것은 중국의 해양정책이나 지리적인 이유와 관련이 있다.
 
  명나라는 건국 초기인 1421년에 도읍을 양자강 하구에 있는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겼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수도는 북쪽에 있었을 뿐 아니라 수도를 북으로 옮겨 아직도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몽골족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해금(海禁)정책을 취했다. 함부로 바다로 나아가는 것을 억제하려 한 것이다. 그것은 나라가 넓어 중앙집권을 중시한 중앙정부가 아마도 해안 지역에 강력한 상업 중심지가 생기는 것을 막으려고 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이후 중국은 해외무역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 1415년에는 남경에서 북경을 잇는 대운하가 다시 개통 되었다. 위험한 해로 대신 남북 간을 잇는 보다 안전한 수로가 확보된 것이다. 그러므로 해로의 효용성은 그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태평양은 너무나 큰 바다로서 쉽게 건널 수가 없었다. 풍향이나 조류가 복잡하고 중간에 쉴 수 있는 곳도 남태평양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작은 섬들뿐이다. 이 섬들을 중간 기착지로 이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반면 유럽인들은 아메리카로 나아가는 데 매우 유리한 입지적 조건을 갖고 있었다. 북아프리카 해안의 카나리아 제도에서 서인도 제도까지의 거리는 중국에서 멕시코의 아카풀코까지거리의 1/3에 불과하다. 또 대서양의 바람은 풍향이 비교적 일정하고 안정적이다.
 
  적도와 그 부근의 저위도 지역에는 무역풍이라는 동풍이 불고, 고위도에서는 편서풍이라는 바람이 연중 서쪽으로부터 불어온다. 이는 대서양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어부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바람이었다. 따라서 항해자들은 스페인에서 카나리아나 아조레스 군도 부근까지 내려간 다음에 무역풍을 타고 서인도까지 갔다가 편서풍을 타고 돌아 올 수 있었다.
 
  이 바람의 흐름을 더 멀리까지 확대하고 중간에 아메리카가 없다고 생각하면 아시아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해도 별 무리가 아니다. 콜럼버스가 이용한 것도 바로 이 바람이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에 먼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지리적 이점 때문이다. 콜럼버스의 '발견'은 이런 우연적인 요소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이다.
 
  아메리카는 왜 고작 수백 명씩의 스페인 군대에게 정복되었나
 
  당시의 아메리카에는 멕시코 지역에 아스텍 제국이 있었고 남미의 페루 지역에는 잉카제국이 있었다. 모두 상당히 많은 인구를 갖고 수준 높은 문화를 가진 대국가들이었다. 그 외에 중남미나 북미 지역에도 수많은 원주민 부족국가들이 산재해 있었다.
 
  그런데 이 대제국들은 스페인 군대의 공격을 받고 순식간에 멸망했다. 1521년에 에르난도 코르테스가 이끄는 고작 500명 정도의 군대가 아스텍 제국을 멸망시켰다. 그로부터 11년 후인 1532년에는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180명의 군대가 역시 잉카 제국을 붕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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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르테스의 초상 (Hernándo Cortés, 1485~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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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즈텍 왕 몬테주마를 만나는 코르테스

  그러면 인구 수천만을 가진 아메리카의 대제국들이 왜 고작 수백 명씩의 스페인 군에 의해 그렇게 쉽게 정복될 수 있었는가. 유럽의 무기가 발달했기 때문일까.
 
  당시 스페인군은 말이나 대포, 총을 갖고 들어가서 원주민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실제 전쟁에서 화포는 별로 유용하지 못했다. 습한 열대지역이라 화약이 눅눅해져 사용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보다 유용했던 것은 칼이나 창 같은 철제 무기이다. 원주민들은 흑요석 날을 박은 나무칼이나 곤봉, 끝에 구리 날을 박은 도끼 등을 무기로 사용했으므로 스페인인이 상대적으로 유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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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인들이 칼과 창으로 아스텍인들을 공격하는 모습 (Codex Du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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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요석날을 박은 나무칼로 무장한 아스텍 전사들

  그러나 스페인인들이 승리한 근본적 원인은 그들이 함께 갖고 들어온 천연두, 홍역, 티푸스 등 유럽의 병원균에 있다. 이에 대해 아무 면역력도 갖고 있지 않은 원주민들은 무력이 아니라 병균에 의해 정복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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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연두를 앓고 있는 원주민들

  코르테스의 군대가 멕시코 해안에 상륙하며 전염병이 각 지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전염병이 퍼지는 속도는 군대가 진군하는 속도보다 빨랐으므로 스페인 군대는 병을 뒤따라 진격한 셈이 되었다. 따라서 극심한 혼란 속에 빠진 멕시카(아스텍) 제국은 공격에 대해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없었다. 스페인군이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의 성벽을 넘었을 때 그들은 이미 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시체나,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피해가며 진군해야 할 정도였다.
 
  또 스페인군이 들어가자 다른 원주민 종족들의 반란군이 이에 가세했다. 이 원주민 종족들과의 동맹은 수도를 포위할 때 20만 명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20만 명의 대병력은 당시 유럽에서는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숫자였다. 이런 동맹세력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코르테스가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아스텍 제국이 이웃 종족들을 무력으로 복속시켜서 반감이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피사로가 잉카제국을 공격하러 갔을 때는 잉카제국도 이미 전염병으로 거덜이 난 뒤였다. 당시 인구 3천5백만 가운데 아마 2/3가 이미 죽은 것 같다. 그러니 사회, 정치체제가 거의 붕괴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왕까지 병으로 죽자 후계다툼이 일어났고 따라서 적을 막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중남미의 토착문명은 1550년경이면 모두 붕괴하고 만다.
 
  1492년의 아메리카 인구는 적게는 5천만에서 많게는 2억 정도까지도 본다. 그러나 1억 정도로 보는 사람이 많다. 이는 당시 유럽의 인구와 맞먹는 것이다. 그 가운데 3/4이 16세기 한 세기 동안에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또 17세기 중반이면 90%까지 줄어든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니 유럽인이 아메리카로 들어간 것이 아메리카인에게 얼마나 큰 참화를 가져다 준 것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7-12-04 오전 4:47:45


<13> 유럽의 해외팽창 ① 아메리카의 발견?


아메리카의 정복과 유럽의 해외팽창
 
  1) 아메리카와 아시아 항로의 개척
 
  동방무역과 인도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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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럼버스의 상륙

  15세기말은 서양인에게 매우 뜻 깊은 역사의 전환점이다. 이 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인도로 가려다가 우연히 아메리카로 가는 항로를, 바스코 다 가마는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유럽인들은 유럽을 벗어나 넓은 외부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렇게 두 사람이 모두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아 나선 것은 물론 아시아의 특산품 때문이다. 중국의 비단이나 자기, 인도의 면직물, 또 인도나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나는 후추, 정향, 육두구 등의 여러 향신료, 보석 등 유럽에서 비싼 값에 팔리는 동방물산을 직접 수입함으로써 큰 이익을 내기 위해서였다.
 
  1453년에 오스만 튀르크가 비잔틴제국을 무너뜨리고 중동 지역 전체와 동부 지중해를 장악함으로써 동방무역이 전보다 어려워졌다. 이 뿐 아니라 지중해에서 동방무역을 독점했던 것은 베네치아나 제노바 같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로서 다른 나라들은 여기에 끼어 들 수 없었다.
 
  이 당시에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 귀퉁이에 있는 포르투갈은 작지만 매우 독특한 나라였다. 이미 중세 말부터 제노바와 어울려 지중해 무역에 종사했을 뿐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다 파는 일에도 종사한 해양 국가로서 동방무역이 가져다주는 이익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으려 했고 1450년 대에는 엔리케 왕자의 주도하에 아프리카 중부의 카메룬 지역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프리카가 그들의 생각보다는 너무 큰 대륙이었고 당시에는 항해기술도 아직 부족했으므로 이 작업은 일시 중단되었다. 콜럼버스나 바스코 다 가마의 새로운 항로 개척은 포르투갈의 이런 해양 전통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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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르투갈 리스본(Lisbon)항구에 세워진 발견의 탑(Parao dos Descobrimentos). 앞에서 이끄는 사람이 항해왕자 엔리케

  아시아와 아메리카 항로의 개척
 
  다 가마는 포르투갈 사람이지만, 콜럼버스도 제노바 출신으로 일찍부터 포르투갈에서 활동했다. 포르투갈 귀족의 딸과 결혼했고 스페인 왕실의 후원을 얻기 전에는 포르투갈 왕실로부터 후원을 얻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다.
 
  스페인도 1492년에는 이베리아 반도의 남쪽 끝에 있는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 그라나다 왕국을 정복하여 이른바 '재정복사업'을 끝냈다. 그래서 사기가 충천해 있던 스페인 왕실은 콜럼버스의 모험적인 계획을 통해 해외진출을 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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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92년 그라나다 왕국의 함락
 

  그리하여 1487년에 바톨로뮤 디아즈가 아프리카 남쪽 끝인 희망봉에, 뒤를 이어 다 가마가 1498년에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캘리컷에 도달할 수 있었다. 또 콜럼버스는 1492년에 대서양을 서쪽으로 횡단하여 아메리카 땅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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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톨로뮤 디아즈와 그의 항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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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스코 다가마와 그의 항해로
 

  아시아와 아메리카로 가는 새로운 항로의 개척은 그 후 유럽 및 세계 역사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유럽의 경제적 번영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아메리카의 식민지화로 식민주의 시대의 문을 열었다. 길게 보면 18세기 후반 이후 확립되는 아시아나 아프리카에 대한 유럽의 지배권은 모두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아메리카와 인도 항로 가운데 서양 사람들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아메리카 항로의 발견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아메리카의 '발견'이라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면 아메리카의 '발견'은 왜 중요할까?
 
  2) 아메리카의 '발견' - '만남' - '정복'
 
  아메리카 '발견'은 창세기 이후 가장 중요한 일
 
  1992년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한 500주년이 된 해이다. 미국인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기념했다. 인디언들을 비롯한 반대 세력의 시위가 예상 되었으나 큰 일 없이 그대로 지나갔다. 반면 서기 2,000년의 브라질 '발견' 500 주년은 브라질 내 반대 여론 때문에 기념행사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그럼에도 미국에서의 1992년 행사는 100년 전인 1892년의 행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규모가 작은 것이다. 콜럼버스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가 과거보다 훨씬 커졌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도대체 왜 일어난 것일까. 왜 콜럼버스라는 인물의 업적을 다 같이 찬양하고 그의 아메리카 '발견'을 기념하지 않을까. 그가 한 일이 위대한 업적이 아니라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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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럼버스의 날'에 반대하는 포스터들
 

  사실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것은 콜럼버스 당시부터 유럽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그때까지 그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다고 믿었으므로 그렇게 생각했을 법도 하다. 그래서 자신들이 발견한 새로운 땅을 '신세계'라고 불렀다.
 
  또 유럽인들은 이 발견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것이 말할 수 없이 큰 혜택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멕시코 지역에 있던 아스텍 제국을 멸망시킨 정복자 에르난도 코르테스의 비서인 프란시스코 고마라라는 사람이 이런 생각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아메리카의 '발견'은 창세기 이후 일어난 가장 좋은 두 가지 일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하나가 예수의 탄생이라면 다른 하나는 '아메리카의 발견'이다.
 
  아베 레이날이라는 프랑스인은 1770년에 '신세계의 발견과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간 것만큼 인류에게 관심거리는 없다'고 말했다. 유명한 영국의 경제학자로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도 '아메리카의 발견은, 또 동인도로 가는 길을 발견한 것은 인류사에 기록된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18세기까지는 '발견'이 유럽인이 이룬 가장 중요한 업적이었다.
 
  이런 태도는 20세기에 와서도 기본적으로는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발견'은 지금까지도 많은 서양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발견'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미국의 경우 특히 그렇다. 그것은 미국 사람들이 자신의 역사를 쓸 때 그 단어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역사와 아메리카 '발견'의 의미
 
  17세기 초부터 북아메리카의 동해안에 정착하기 시작한 잉글랜드 식민자들은 콜럼버스의 '발견'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18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특별히 콜럼버스를 칭송하지는 않았다. 이런 태도는 1770년대의 독립전쟁 이후 갑자기 바뀐다. 새로 건국한 미국이라는 나라가 나름의 독특한 역사적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유럽이라는 구대륙의 낡은 전통이나 악습에서 벗어나 '신세계'에 새롭고 민주적인 공화국을 창설했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땅에 유럽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나라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땅 아메리카를 '발견'한 콜럼버스의 의미가 크게 중요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발견'이 갖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아메리카 땅의 소유권과 관련된 것이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주인 없는 땅'을 발견했고 그래서 그것을 먼저 선점한 유럽인에게 소유권이 있다고 주장해 왔다. 이렇게 주장해야 원주민들의 땅을 강탈한 것이 아니라 정당한 수단에 의해 취득한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아메리카가 반드시 '발견'되어야 했던 이유이다.
 
  이렇게 '발견'은 콜럼버스의 업적과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그 후 아메리카 역사의 해석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래서 특히 미국의 경우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은 미국사를 미화하는 여러 역사적 신화 가운데 하나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발견인가, 만남인가, 정복인가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발견'이 적합하지 않은 용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그것은 '발견'이라는 말이 아메리카에 이미 살고 있던 원주민들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이 침입하기 전인 15세기 말 당시 아메리카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런 땅덩어리를 '발견'했다고 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인도에 도착한 바스코 다 가마에 대해 유럽인들은 그가 인도를 발견했다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다.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갖고 있던 인도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아메리카를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메리카인의 존재와 그 문화를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래서 최근에는 '발견' 대신 '만남'(encounter)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도 있다. 유럽인과 아메리카인이 '만났다'는 것이다. 이런 표현은 '발견'보다는 낫지만 적절치 않은 것은 마찬가지이다. '만난다'는 것은 중립적인 표현이다. 우리가 모르던 사람을 만났다가 별 일 없이 헤어질 때는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다. 또 그 만남이 좋은 것이었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유럽인과 아메리카인의 만남은 그렇게 오가다가 우연히 만나고 그것으로 끝난 사건이 아니다. 이 사건으로 한 세기 반 동안에 아메리카 인구의 약 90%가 줄어들었다. 또 요행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유럽국가들의 식민지인이 되어 강제노동과 노예생활에 시달려야 했다.
 
  그 결과 아메리카의 전통적인 사회들은 거의 완전히 무너졌고 그 파괴적 영향은 50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도 이 사건을 '만남'으로 정의하는 것은 그것에서 도덕적 판단을 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서양 사람들이 요즈음 '발견'에서 조금 나아가 '만남'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 자체도 자신들의 죄과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는 뻔뻔스런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 이에는 더 적절한 표현이 있다.
 
  그것은 스페인인들이 멕시코나 페루에서 저지른 일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그들은 아스텍 제국과 잉카 제국을 비롯해 중남미에서 수많은 토착 정치체들을 정복하고 파괴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명백히 침략과 정복과 학살이지 발견이나 만남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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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스텍 제국의 신전 의식 (상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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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정복 전야의 아스텍 제국 (살구색 지역이 예속국가, 벽돌색은 동맹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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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복 직전의 잉카제국

  그러니 식민주의로부터 피해를 받은 비서양지역 사람들이 서양 사람들의 표현을 그대로 받아 들여 '발견'이나 '만남'으로 사용하는 것이 적절치 않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분명히 침략이나 정복 행위로서 다른 어떤 말로도 대치할 수 없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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