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프레시안 2007-11-29 오전 12:34:18

 

<12> 부르크하르트와 르네상스 ③ 르네상스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

 

4. 인간의 존엄성과 르네상스 미술의 근대성
 
  인간의 존엄성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 시대에 인간의 존엄성이 강조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문주의를 인간중심적인 철학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을 찬미하는 태도는 르네상스의 새로운 발견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이미 예술의 창조자로서의 인간을 찬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정신을 육체적 세계와, 순수한 형태의 초월적 세계의 중간에 놓았다. 이런 생각은 나중의 신플라톤주의자나 많은 중세 사상가들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헬레니즘적 시대의 초기 스토아 학파도 우주를 신과 인간의 공동체로 보았으며 이런 생각은 로마 시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다른 피조물에 대해 인간이 우월하다는 생각은 구약성서의 창세기 등 여러 곳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초기 기독교 사상에서도 분명히 말하지는 않으나 역시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중세 기독교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받아들여진 것은 인간이 신의 이미지를 본 따서 만들어졌으며 또 구원될 수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이지 자연적 존재로서 인간이 가치를 가졌다고 믿었기 때문은 아니다.
 
  르네상스 시기에 와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주장은 지속적으로 보다 체계적으로 나타난다. 페트라르카(F. Petrarca)나 브루니(L. Bruni), 알베르티(L. Alberti), 마네티(G. Manetti) 같은 많은 사람들이 인간과 그 존엄성에 대한 관심을 표시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체로 인간이 현세에서 이룬 뛰어난 업적들을 그 존엄성의 증거로 내세웠다. 철학적 깊이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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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니 (Leonardo Bruni, 1370~1444)

  반면 피치노(M. Ficino), 피코(G. Pico)의 두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우주에 대한 철학적 체계 속에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피치노는 15세기에 플라톤의 모든 책들을 번역한 피렌체 사람이다. 그는 플라톤의 생각을 받아들여 이 우주의 가장 높은 곳에는 순수한 정신적인 존재인 신이 위치해 있고, 그 밑에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정신적인 것으로부터 물질적인 것까지 차례로 배열되어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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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치노 (Marsilio Ficino, 1433~1499)

  인간은 정신과 육체를 다 갖고 있으므로 이 계층 질서에서 정신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를 연결하는 접점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두 세계 모두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노력 여하에 따라 어느 쪽에도 다다를 수가 있다. 그래서 그는 이 질서 안에서의 인간의 이런 중심성과 보편성이 바로 인간 존엄성의 주된 근거가 된다고 믿었다.
 
  피코는 1496년의 <인간 존엄성에 대한 연설>이라는 글에서 피치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신이 완전한 우주를 만들기 위해 모든 정신적, 물질적 존재를 창조했으나 인간은 맨 마지막에 창조되었으므로 인간은 이미 완성된 질서 안에 어떤 정해진 자리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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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코 델라 미란돌라 (Giovanni Pico della Mirandola, 1463~1494)

  따라서 인간은 다른 어떤 피조물의 성질도 가질 수 있는 자유를 가졌으므로 그가 무엇을 발전시키느냐에 따라 식물, 동물, 천체, 천사, 나아가 신과도 일체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정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도, 본능을 추구하여 짐승 같은 존재가 되는 것도 마음먹기에 따른다는 것이다.
 
  피코의 이 주장은 신이 인간에게 무제한한 자유를 준 것으로, 따라서 신의 은총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기독교적 원리를 부정하는 예로 자주 인용된다. 부르크하르트도 이 점에서 피코를 매우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피코는 결코 기독교적 원리를 부정한 적은 없다.
 
  이들은 다른 르네상스인들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이 우주에는 초월적 힘이 존재하고 천상계와 지상계의 존재 사이에는 신비한 감응관계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점성술이나 다른 비학(秘學)을 믿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현대인들과 같이 인간을 그야말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또 피치노나 피코의 영향력은 별로 크지 않았다. 피치노의 영향은 그가 속한 좁은 집단에만 한한 것이었다. 피코의 글은 다른 사람들이 보았는지 조차 의심스러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러니 서양철학사에서 논리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만 보아 이들을 크게 부각시키는 것은 이런 역사적인 현실을 도외시하는 것이다.
 
  르네상스 미술과 진보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문화적 성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미술인 것은 틀림없다. 이 시기에 수많은 화가, 조각가, 건축가가 등장하여 풍요한 결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에서는 미술을 다루지 않았으나 다른 많은 글에서 르네상스 미술을 다루고 있으므로 그의 견해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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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가 열전』을 쓴 조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1511~1574)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미술이 뛰어나다는 주장을 처음 한 것은 16세기에 <미술가 열전>을 쓴 바사리이다. 이 책은 르네상스 시대 많은 미술가들의 전기인데 이 책에서 그는 미술에 있어서의 3단계 진보론을 주장했다. 그는 이전의 미술인 비잔틴 미술과 중세 고딕 미술을 비잔틴 양식, 게르만 양식이라는 말로 경멸했다. 또 르네상스 미술에서도 16세기에 비해 14, 15세기 미술은 낮추어 보았다. 미술사를 진보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뒤의 사람들이 바사리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서양미술사에서도 진보라는 관점이 정착되었다. 이는 19세기에 들어와 더욱 강화되었는데 부르크하르트도 기본적으로 그런 관점을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이 진보는 르네상스 미술이 '과학적'이라고 보는 주장과 결부되어 있는데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원근법이 발전되었고 그것이 기하학적 원리를 채용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명암법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곰브리치 등 많은 현대 서양 미술사가들은 원근법에 기초한 사실주의와, 세속주의 · 개인주의가 르네상스 미술을 중세와 단절시키고 근대의 문을 열었다고 생각한다. 즉 르네상스 미술의 근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원근법이 사용되고 명암법이 널리 사용되어 3차원적인 묘사가 어느 정도 가능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에 대한 세세한 묘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근대적인 자연적 사실주의가 발전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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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근법을 처음으로 사용해서 그린 마사치오(Masaccio)의 삼위일체 (Trinity, 1428).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 원근법은 완벽하게 사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상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다고 근대적이라는 할 수는 없다. 자연 사물에 대한 세세한 묘사는 어느 시대에도 존재했고 그것이 미술을 더 완전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 르네상스인들은 상상력을 사용하는 종교화나 역사화에 비해 대상을 직접 모사하는데 의존하는 정물화, 풍경화, 초상화는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사실적으로 그렸다고 근대적이라는 주장은 근대인의 편견일 수도 있다.
 
  르네상스 미술가나 미술 이론가들이 그림을 그릴 때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오르나토(ornato)와 릴리에보(rilievo)라는 두 가지 요소이다. 오르나토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아름답게 꾸며 그리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미술가들은 이를 계속 강조했다.
 
  릴리에보는 그림의 주된 대상을 부조와 같이 도드라지게,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효과를 말한다. 선 원근법이나 대기 원근법, 명암법은 릴리에보를 나타내기 위한 수단들이다. 앞에 있는 대상을 크고 뚜렷하게, 뒤에 멀리 있는 대상을 작고 흐릿하게 그림으로써 앞에 있는 대상을 부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빛이나 색깔의 명암도 대상을 뚜렷하게 표현하는데 동원된다.
 
  그러니까 원근법이나 명암법은 그것이 주된 표현수단인 것이 아니라 오르나토와 릴리에보를 나타내는 보조수단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르네상스 시대에 불완전하게 사용되었다. 17세기 화가들이 공간 자체에 관심을 가졌던 것과는 태도가 다르다.
 
  세속주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세속적 주제를 가진 그림은 1420년대에는 전체 그림의 약 5%정도였으나 1520년대에 가면 20% 정도로 증가할 뿐이다. 따라서 후기에 가서 세속주의가 보다 강해지는 것은 사실이나 그 비율은 그렇게 높은 것이 아니다.
 
  개인주의도 마찬가지이다. 미술사가들은 르네상스의 예술작품이 중세와 달리 개인적 스타일에 따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또 그림에 화가가 서명하기 시작했으므로 그것을 개인의 예술 작품으로 보려고 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중세 그림들에도 개인적 스타일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 르네상스 시대 미술가들의 그림은 거의 권력자나 부자들의 주문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지 개인의 예술작품으로 그린 것이 아니다. 게다가 중국 회화에서는 이미 당(唐)나라나 육조(六朝)시대부터 이미 낙관이 일부 사용되었고, 14세기인 원(元)대에 와서 일반화되었다. 따라서 이런 것을 갖고 르네상스 미술의 근대성, 개인주의적인 특성을 너무 강조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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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찬(倪瓚, 1301~1374)의 우산림학도(虞山林壑圖)의 일부. 원말 사대가의 한사람인 예찬은 제관(題款)이나 화찬(畵讚)을 쓴 다음 자신의 인장을 찍었는데 그 후 낙관이 일반화 되었다.

  5) 르네상스의 새로운 인식
 
  르네상스 문화의 절충성

 
  르네상스 문화는 전체적으로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미술 부분의 업적은 뛰어나다. 회화, 조각, 건축에서 모두 대단한 성과를 이루었다. 새 양식, 새 기술, 새 장르가 등장했다. 그러나 그리스, 로마적인 것을 모방하려는 경향도 강하게 나타났다.
 
  이탈리아어 문학의 경우는 단테나 페트라르카 이후 시(詩)없는 한 세기가 왔고 그 후 폴리치아노, 아리오스토 등이 등장한다. 이탈리아 산문도 14, 16세기는 뛰어나나 15세기는 비어 있다. 여기에서도 로마의 테렌스, 플라우투스, 세네카, 베르길리우스가 모범이 되었다.
 
  사상의 영역에는 브루노, 피치노, 마키아벨리 같은 유명한 인물들과 인문주의라는 주된 운동이 있다. 그러나 인문주의의 등장이 중세 스콜라 철학을 밀어낸 것은 아니다.
 
  또 당대인들은 자신들이 고대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고대와 중세 양쪽 전통에서 불완전하게 빌려왔다. 새로운 진보적 변화가 있었다 해도 그것은 반동적 요소와도 결합했다. 그런 의미에서 르네상스 문화는 절충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것으로 근대적인 문화라고 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부르크하르트가 주장하는 여러 근대적 변화들은 모두 몇 세기 후의 일들이다. 개인의 발견이나 신분제의 해체는 모두 18세기 말 이후 19세기의 일이다. 자연과학의 근대적인 발전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인문주의는 중요하나 그것이 새로운 형태로 서양 근대문화 속에 녹아드는 것도 19세기 이후이다. 근대국가도 18세기에 절대주의 국가들이 만들어지며 본격화한다. 세속문화의 발전도 18세기 계몽사상 시대 이후의 일이다.
 
  이렇게 근세의 명백한 특징들이 17, 18세기 이후에야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이런 변화들을 몇 세기나 앞당겨 르네상스의 시대적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정당화되기 힘들다.
 
  게다가 르네상스 문화는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도 아니다. 13세기 후반부터 비잔틴 제국에서 나타난 사실주의적인 그림 양식이나 고대 그리스 문학, 철학, 과학에 대한 집약적 연구가 큰 영향을 주었다. 이것이 이미 14세기 후반부터 비잔틴 학자들의 초빙을 통해, 또 비잔틴 제국이 망한 1476년 이후에는 많은 망명 학자들에 의해 전달되는 것이다.
 
  따라서 르네상스 문화의 독창성을 너무 강조하는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
 
  르네상스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
 
  사실 부르크하르트의 여러 주장들은 그가 처음 생각해낸 것도 아니다. 계몽사상 이후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종합하여 하나의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주장으로 묶어 낸 것이다. 말하자면 그가 완성시킨 르네상스의 모습은 18, 19세기의 세속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유럽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역사적 신화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는 이렇게 서양 학자들의 이데올로기적 태도에 의해 오랫동안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아 왔다. 또 그 과정에서 역사가 끊임없이 일직선적으로 발전한다고 믿는, 18세기 이후 서양인들이 만들어낸 진보사관과 굳게 결합하였다. 그리하여 르네상스가 서양 역사의 발전에서 뺄 수 없는, 본질적으로 중요한 한 단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았듯이 부르크하르트를 포함해 서양인들의 이런 주장은 이제 더 이상 그대로 받아들여지기가 어렵다. 그런 주장들의 많은 부분이 사실의 검증을 이겨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사이 서양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전체 서양 전통 안에서 르네상스의 위치에 대한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역사적 가정들이 고쳐질 때가 되었으며 점점 많은 역사가들이 이를 의식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더 극단적인 역사가들은 아예 르네상스의 존재 가치까지도 부정한다.
 
  더욱이 다른 문화권과의 비교작업은 부르크하르트적 해석의 타당성을 더욱 의심하게 한다. 서양인들은 세속주의나 인간중심주의를 르네상스 이후 서양문화의 산물로 이야기하나 실제로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은 일찍부터 세속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우주관, 인간관을 발전시킨 곳이다.
 
  종교적인 요소가 크지 않으며 이는 서양의 기독교 사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다. 서양인들의 전통적인 견해를 받아들인 우리는 무심코 오늘날 동아시아의 세속주의나 인간중심주의마저도 서양의 산물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근본적으로 다시 검토해 보아야 할 일이다.
 
  이렇게 '서양 근대문명의 흥기'라는 큰 논의 틀의 일부로 연구되어온 르네상스 연구는 이제 심각한 저항에 직면해 있다. 따라서 시대를 규정하는 이름만으로는 당분간 르네상스를 받아들인다 해도 부르크하르트가 강조하는 '근대성'이나 '진보'라는 관점에서 르네상스를 규정하는 일은 더 이상 받아들이기 어렵다. 르네상스에 대한 전적으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출처 - 프레시안 2007-11-27 오전 12:12:03


<11> 부르크하르트와 르네상스 ② 부르크하르트가 보는 르네상스와 그 문제점


3) 부르크하르트가 보는 르네상스와 그 문제점
 
  예술품으로서의 이탈리아 도시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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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지도

  14-16세기의 이탈리아 반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북부 지역은 많은 도시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중부는 로마교황이 다스리는 교황령이며, 남부는 나폴리 왕국의 영토였다.
 
  북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14세기에는 약 30개 정도의 도시국가들이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이 도시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 제노바 같은 것들로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 거의 맞먹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지중해 무역과 모직물 산업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등 봉건국가의 왕들은 권력을 영주들과 나누어 갖고 있었으므로 큰 영토에도 불구하고 그에 걸맞는 군사력을 동원할 수 없었다.
 
  부르크하르트는 이 시기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유럽 최초의 근대국가라고 주장한다. 그 통치자들이 중세법이나 관습, 기독교 교리에 의지하지 않고 냉정한 정치적 타산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15세기에 들어와 이탈리아의 정세가 혼란스러워지며 수많은 전제군주들이 몰락하고 용병대장들이 권력을 찬탈하는 일도 왕왕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주들이 더욱 긴장하고 신중하며 계산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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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한 용병대장 가운데 한사람인 체자레 보르지아(Cesare Borgia, 1475? – 1507)

  부르크하르트는 이런 근대국가를 만드는 일에 가장 앞선 도시가 베네치아와 피렌체이며 특히 피렌체가 세계 최초의 근대국가라고 믿었다. 그곳에서 새로운 정치적 원리와 이론들이 생겨나고 그것들이 실험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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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 (Niccoló Machiavelli, 1469~1527)

  이에는 날카로운 현실정치를 주장한 마키아벨리 같은 인물이 중요하다. 그가 자신의 <군주론>에서 군주들에게 사자와 같은 용맹함과 여우의 교활함을 주문하며 정치에서 도덕적인 고려를 제거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가 르네상스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을 최초의 근대국가로 규정하고 그것을 예술품으로까지 치켜올렸으나 근대국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단지 도덕에서 벗어나 냉정하고 계산적으로 정치를 했으니 근대국가라는 것인데 그런 식의 막연한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수십 개의 도시국가들이 서로 경쟁했으므로 권모술수나 계산이 더 따를 수밖에는 없었으나 정치를 하는 데 종교적, 도덕적 명분들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었다. 또 중세시대에 유럽 다른 지역의 왕이나 봉건 영주들이 반드시 종교나 도덕적 가르침에 따라 행동한 것도 아니다. 종교적, 도덕적인 명분과 정치적 실용주의는 어디에나 섞여 있었다. 따라서 이탈리아를 특별한 경우로 볼 수는 없다.
 
  또 근대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제도 면에서 중앙집권화, 행정의 합리화 등이 따라야 한다. 이념적으로도 국가주권의 개념이 분명하게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당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근대국가라고 하기는 어렵다.
 
  근대적 개인의 탄생
 
  부르크하르트는 또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적 조건이 근대적 개인주의가 나타날 완전한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근대성을 중세의 지적, 문화적 후진성과 대비시키고 있다.
 
  그는 중세 사람들은 신앙심, 어린아이 같은 선입견, 망상에 싸여 있었고 자신을 오직 종족, 민족, 정파, 가족 등 집단 속의 존재로만 생각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 이러한 한계가 가장 먼저 사라지고 사람들이 개인으로서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탈리아에서는 13세기 말부터 인간의 개성이 넘쳐나기 시작하며 개인주의를 향한 길이 열리게 되는데 그것은 이탈리아가 중세의 억압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이런 개인이 강력하고 다방면의 재능을 가진 본성과 어울려 최고의 개성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부르크하르트가 말하는 '만능인(l'uomo universal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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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곡>을 쓴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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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최후의 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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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성 마리아 노벨라 성당 (1456)

 
단테 같은 시인, 알베르티 같은 건축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화가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이렇게 개인주의 위에 서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은 코스모폴리탄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을 가졌고 개인의 업적에 따라 명성을 얻으려고 하는 근대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부르크하르트는 '개인'이나 '개인주의'에 대해 분명히 정의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주장하는 개인성의 개념이 반드시 스스로가 개인이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인간의 개인성은 완전성, 명예의 달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기의식이나 자기반성 없이 개인성이 나타나기는 어렵다. 실제로 당시 이탈리아 사회에서 사람들이 스스로를 개인으로서 의식했다는 증거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당시 사람들은 계속 집단 속에서 정체성을 느꼈다. 또 부르크하르트가 일찌감치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길드나 가문, 교회 등은 14, 15세기에도 계속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르네상스 시대에 '근대적 자아'가 나타났다는 주장은 사실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게다가 이름을 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자아의식과는 별 관계가 없다. 이름을 내거나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 하는 태도는 어느 시대 인간들에게서나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가 개인성을 말하며 그 주된 증거로 내세우는 것은 그들의 천재적인 능력에 의해 크게 유명해진 위의 몇몇 예술가들의 예이다.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개인성을 일반화하고 있는 것이다.
 
  부르크하르트도 자신의 주장에 근거가 별로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분명해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한 발을 빼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근거도 부족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슨 심보에서일까.
 
  고대의 부활과 인문주의
 
  우리는 보통 르네상스에 있어 고전고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고대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르네상스 문화가 새롭게 꽃 필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부르크하르트가 반드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고대의 부활과 고전세계의 재발견이 르네상스의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며 그리스 · 로마 문화는 이탈리아인들의 천재성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르네상스는 단편적인 모방이나 편집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르네상스인의 창조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도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사실 르네상스 문화에서는 그리스 · 로마 시대의 고전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인문주의가 핵심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문법, 수사학, 시, 역사, 도덕철학의 5개 주제를 가르치고 연구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당시에 이런 주제를 연구하고 가르친 이탈리아의 학자, 시인, 성직자, 법률가, 관리, 공증인 들을 인문주의자(humanist)로 불렀다. 르네상스 시대의 거의 모든 주요 인물들은 이런 인문주의자들이거나 그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동안 인문주의는 상당히 잘못 이해되어 왔다. 그것을 신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을 강조하고 종교가 아니라 세속성을 강조하는 '철학'으로 보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인문주의는 결코 세속적인 경향을 가진 것은 아니다.
  14세기 시인인 페트라르카를 포함해 지도적인 인문주의자들은 거의 모두 종교적인 가치에 의해 행동했다. 또 르네상스 시대에 인문주의는 실용적인 교과목이었다. 결코 철학으로 생각되지도 않았고 심각한 학문적인 주제로도 생각되지 않았다.
 
  이 시기에 인문주의가 등장하고 호응을 받은 것은 당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체제가 로마 공화정과 비슷한 면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지배계급의 자식이나 형제들을 위한 교육에 그리스나 로마의 많은 저술들이 쓸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대의 문헌들이 다시 각광을 받아 수집, 번역되고 연구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고대 문물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대학에서 가르친 것은 주로 중세 기독교 철학인 스콜라 철학이다. 그리고 그런 경향은 17세기까지도 유지되었다. 인문주의가 중세 철학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부르크하르트나 그 제자들처럼 인문주의를 철학으로 보고 철학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의 산물이다. 인문주의는 당시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관이나 사회적 이상을 제공하지는 못했다.
 
  자연의 과학적 인식
 
  부르크하르트는 또한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인들이 세계와 인간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역시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깃들어 있는 타고난 재능 덕이었다. 제노바 사람들은 이미 1291년에 대서양의 카나리아 군도를 발견했고 또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으려는 시도를 했다.
 
  그렇게 된 것은 그들이 고대 문헌을 잘 알기 전에도 이 세상의 사물을 객관적인 눈으로 보고 다룰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부르크하르트는 고대의 지리학자들이 길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들이 그렇게 빨리 완전성에 도달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했다.
 
  이것은 지리학뿐 아니라 자연과학 전체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제 책과 전통의 억압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자연의 탐구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당시의 세계관에서 벗어난 이런 사이비 과학들에 대해 대체로 관용으로 대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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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트라르카 (Francesco Petrarca, 1304~1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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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카치오 (Giovanni Boccaccio, 1313~1375)

  또 그는 이탈리아인들이 자연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낀 첫 번째 근대인들이라고 믿었다. '신곡'을 쓴 단테가 첫 인물이고 서정시인인 페트라르카, '데카메론'을 쓴 보카치오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발견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기에 개인과 인간 본성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고대 문헌의 영향을 통해 새롭게 정의되고 채색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르크하르트는 과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인물이었으므로 이러한 그의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은 중세시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물활론적(物活論的)으로 바라보았다. 살아 있는 생물체로 본 것이다. 근대인처럼 기계론적으로 본 것이 아니다. 이는 다빈치나 단테, 알베르티 모두 마찬가지이다.
 
  또 이들은 자연도 중립적으로 보지 않고 가치 판단을 집어넣어 생각했으며, 따뜻한 것이 추운 것보다 좋고 나무가 돌보다 좋으며 변화하지 않는 것이 변화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르네상스 말기에 들어서서 수학적 방법에 의해 자연현상의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자연현상 안에 숨어 있는 수학적 구조를 밝히려는 의도가 아니라 간결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인문주의적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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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 (Nicolaus Copernicus, 1473~1543)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도 17세기 이후의 수학적 정신이 아니라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전통 속에 있으며 당시 유행하던 점성술을 믿은 인물이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받아들이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 체계가 천체의 움직임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믿어 아리스타르쿠스의 태양중심설을 받아들이려 했으나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다만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가 후대의 천문학자들에 의해 너무 복잡하게 변형된 것을 단순화, 순수화하려 한 것뿐이다.
 
  그가 1543년에 쓴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라는 책이 당시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여진 것은 이렇게 그의 우주론이 중세적 우주론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천동설이나 그의 지동설이나 결함이 많아 천체의 움직임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가 교회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태도는 17세기에 실험과 관찰을 보다 중시한 갈릴레이나, 자연세계를 수학적 원리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본격적으로 한 데카르트와 뉴턴에 오면 달라진다. 이렇게 르네상스 과학은 17세기의 과학과 직접 연결되지는 않는다.
 
  계급의 해체와 종교적 요소의 쇠퇴
 
  부르크하르트는 신분의 해체가 분명히 그 시대의 일반적인 특징이라 믿었는데 그것은 특히 12세기 이후 귀족과 시민이 도시의 성벽 안에서 함께 살며 그렇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주교직이나 수도원장직, 수녀원장직들이 본질적으로 출신에 따라 주어지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또 그는 최고 수준의 사교생활에서는 신분의 구분이 모두 무시되었고 교육수준과 교양이 중요했다고 말한다. 어느 신분이나 가문에서 출생했느냐 하는 것은 그가 상속재산을 받아 노닥거릴 여유를 갖는 것 외에는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또 여성은 남성과 대등한 지위에 있었고 교육을 받은 상층계급의 여성은 남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개성을 발전시켰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이 시기 이탈리아의 사회적 지위가 신분과 가문이라기보다 교육과 능력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 근대적인 평등한 사회였다는 것이다. 그가 신분 대신 계급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그런 이유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주장도 사실과는 맞지 않다. 당시의 이탈리아가 이웃 국가들보다 발전된 경제를 가졌고 더 복잡한 사회였던 것은 사실이나 아직도 신분제도에 크게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도 여전했다. 여성은 가부장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이것은 부르크하르트가 주장하는 여성 인문주의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군주나 귀족 가문의 교육받은 일부 여성들도 결혼을 하면 그것으로 글 쓰는 생활을 접어야 했다. 그러니 여성이 남성과 같이 개성을 발전시킬 수 있었고 남녀가 평등했다는 말은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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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는 피렌체 여인들의 모습. 르네상스기, 1610년에 한 프랑스 여행가는 피렌체 여인들이 창문을 통해서만 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고 그들의 폐쇄된 삶을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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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렌체시를 흐르는 아르노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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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렌체시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브루넬레스키(F.Brunelleschi)가 1436년에 그 거대한 돔을 완성했다.

 
이런 면을 아는 데는 개인의 일기나 세금장부, 여러 기관들의 사료가 풍부하게 남아있는 피렌체가 도움이 된다. 그런데 실제 연구에 의하면 르네상스 시기의 피렌체는 별로 진보적인 변화를 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경제의 발전이나 자선 단체 같은 데에서 약간의 근대적인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옛날 모습이 대체로 유지되었다. 대가족제는 일반적이었고, 귀족들과 평민의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피호관계라는 독특한 사회제도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또 피렌체인의 가치관이 더 세속화된 것도 아니고 더 합리화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15세기 피렌체 시를 근대화나 진보라는 단순한 논리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와서 이탈리아에서 종교적 요소가 약화되고 세속성이 강화되었다고 주장한다. 르네상스인들이 고대를 알게 된 이후 신성한 기독교적 이상을 위대한 역사를 숭배하는 것으로 대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교회가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사람들을 비 신앙과 절망의 품으로 내몰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이 점성술, 마법 같은 미신적인 행위에서 구원을 얻으려 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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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네상스기 사람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즉시 점성술을 통해 그의 운명을 점쳤다. 목판화, 1587

  앞에서도 보았듯이 인문주의자들이 고대의 비기독교적 문화에 접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비종교적인 인물들은 아니었다. 일반인들의 태도도 마찬가지이다. 종교개혁 이전 이탈리아의 교회가 많이 부패하고 타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부르크하르트가 주장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상태에 있었다. 그의 이런 반종교적 태도는 자신이 무신론자였던 것과 함께 19세기 후반 유럽의 일반적인 탈 기독교적 풍조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이상으로 부르크하르트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문화>에서 주장하는 여러 내용들이 많은 문제점들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의 책에서 다루지는 않았으나 르네상스의 근대성을 뒷받침하는 다른 두 주제가 있다. 인간의 존엄성 문제와 르네상스 미술에 관한 것이다. 그것들을 살펴보자.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7-11-22 오전 1:08:13


<10> 부르크하르트와 르네상스 ① 르네상스, 무엇이 문제인가?

1) 르네상스, 무엇이 문제인가
 
  근대의 시작으로서의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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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의 <비너스의 탄생>은 르네상스기 미술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이 그림과 같은 르네상스 미술에서 보이는 세련된 아름다움은 르네상스 문화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하다.

  오늘날 르네상스는 매우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한국에서도 그렇다. 호텔이나 술집 이름에도 붙어 있을 정도이다. 그것은 르네상스라는 단어가 세련된 것, 아름다움, 근대적인 것 등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르네상스(Renaissance)는 프랑스어로 재생, 부흥이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이탈리아어의 같은 의미를 갖는 리네시타(Rinescita)에서 온 것으로 19세기 중반부터 하나의 시대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서양사에서 르네상스란 보통 14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그리스 · 로마의 고전고대 문화에 기초해 새로운 근대문화가 발전한 시기를 가리킨다. 유럽에서는 5세기에 로마제국이 몰락하고 나서 오랜 문화적 암흑시대가 있었는데 14세기에 이탈리아에서 고대문화가 되살아남으로써 근대를 향한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양인들은 르네상스를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역사의 전환점으로 받아들인다. 또 18세기의 계몽사상과 함께 유럽의 정신문화 발전에서 하나의 결정적인 단계로 생각한다. 그러니 서양 사람들이 르네상스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이 매우 독특한 사람들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가 그들이 방금 빠져 나왔다고 믿은 중세의 '암흑시대'와는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에는 자신들이 발전시키고 있던 위대한 웅변이나 시, 조각, 회화들이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를 중세와는 완전히 구분되는 새로운 시대로 규정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스위스 역사가인 야콥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 1818-1897)이다. 그가 1860년에 낸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라는 책에서 르네상스를 중세와는 완전히 구분되는 새로운 시대로, 또 근대의 출발점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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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콥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 1818-1897)와 그가 쓴『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 1860

  그의 이런 규정은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며 르네상스는 그 후 하나의 시대 개념으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날 보통 '르네상스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주로 부르크하르트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인들은 르네상스를 어떻게 받아들이나?
 
  그러면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를 어떻게 보았을까? 그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인들이 새로운 근대국가를 만들었고, 인문주의라는 학문을 통해 고대의 세속적인 가치를 다시 받아들임으로써 기독교의 억압을 분쇄했고, 신분제를 해체함으로써 인간중심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었으며 근대 자연과학의 기초를 다졌을 뿐 아니라 새로운 근대적 예술 양식도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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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이징하 (Johan Huizinga, 1872~1945)와 그가 쓴『중세의 가을』, 1919

  이런 주장이 비판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20세기 초의 호이징하라는 유명한 네덜란드 역사가를 비롯하여 오늘날의 많은 중세사가들은 르네상스를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에 반대한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중세적 특징들이 많이 나타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르네상스를 부르크하르트가 처음 주장한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전문 역사가 사이에는 옹호하는 사람보다는 비판하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럼에도 그가 만든 틀의 큰 테두리는 상당부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매혹되지 않으면 르네상스가 아니다'라는 말이나 '유럽은 그들(인문주의자)이 부르짖은 인간성의 능력과 지성에 대한 신뢰를 결코 잃은 적이 없다. 그리고 그것은 서양의 삶과 사상에 있어 가장 큰 영감으로 남아 있다'는 최근 서양학자들의 말은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 것은 부르크하르트의 주장이 기본적으로 서양 사람들의 자부심을 만족시켜줄 소지를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14세기부터 유럽에는 근대 문화적 요소가 나타났고 그 결과 유럽은 세계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빨리 근대로 진입할 수 있었다고 믿고 싶어 하는 것이다.
 
  르네상스가 바로 근대세계에서의 서양문화의 우위를 정당화시켜 주는 것이다. 그의 주장의 큰 생명력은 이렇게 그의 주장 속에 담겨 있는 유럽중심주의적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르네상스는 아직 부르크하르트의 주장을 대체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르네상스는 대체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찬양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
 
  2) 부르크하르트의 인물과 역사를 보는 태도
 
  보수적인 역사가 부르크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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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젤(Basel)시

  부르크하르트는 1818년에 스위스의 바젤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청년기에 독일의 베를린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역사학자로서의 길을 시작했다.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와 바젤 대학의 역사학 교수가 되었고 80세라는 긴 수명을 누렸다.
 
  그를 저명한 역사가로 만들어준 책이 40대 초에 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이다. 이 책은 쉽고 재미있으며 하나의 시대로서의 르네상스의 특징을 그 나름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르네상스를 공부하는 사람은 반드시 읽어야 하는 기본서적에 속한다.
 
  그는 어떻게 보면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다. 평생을 독신으로 검소하게 살았으며 정치를 믿지 않았고 돈에 무심했다. 또 작지만 코스모폴리탄적인 분위기가 가득 차 있었던 바젤을 매우 사랑했다. 그 도시가 유럽 문명의 진정한 요소들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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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크하르트가 교수로 재직했던 바젤 대학

  르네상스에 대한 부르크하르트의 태도는 그의 타고난 정신적인 기질이나 역사를 연구하는 방식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는 성격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상당히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당시 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던 국가 사이의 군사적 경쟁이나 민주주의를 좋아하지 않았다. 또 산업화에 따른 물질적 진보를 매우 싫어했다. 그것이 그가 역사에서 높이 평가하는 문화적 가치들을 파괴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예술이나 문화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가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에 강한 애착을 보인 것도, 또 문화사를 연구의 주된 주제로 삼은 것도 이런 관심 때문일 것이다. 반면 경제와 관련된 사항들은 별로 다루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역사연구에서 하나의 결함이다. 경제와의 관계를 빼고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또 그가 역사를 연구하는 방식도 일반 역사가들과는 좀 다르다. 역사연구를 좀 더 창조적인 작업으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직관적인 역사쓰기
 
  그는 베를린 대학에서 헤겔의 제자들로부터 헤겔철학을 배우고 랑케로부터는 직접 역사학을 배웠다. 그러나 당시 독일 지식인 사회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던 이들의 학문으로부터 별 자극을 받지 않았다. 학문적인 성향이 그들과 달랐던 탓이다.
 
  그는 우선 헤겔식의 '역사철학'을 거부했다. 헤겔은 역사란 '자유의 정신'이 스스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역사를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거부한 것이다. 역사의 주인공이 사람이 아니고 철학적 개념이니 그럴만하다.
 
  또 객관적 역사 쓰기를 목표로 하는 랑케의 실증주의적 연구 방법도 거부했다. 랑케의 목표는 과거의 일어났던 사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역사적 사건들의 원인과 경과, 결과를 사료를 뒤져 꼼꼼하게 따지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면 객관적인 역사쓰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역사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역사를 오히려 예술에 가까운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자신이 다루는 시대의 정신을 생생하게 상상 속에서 불러내는 것이 역사가가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는 일반적인 역사가들이 하듯이, 역사책에 사료의 출처를 밝히기 위해 주(註)를 꼼꼼히 붙이는 지루한 일 따위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해 봤자 과거의 역사를 제대로 구성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어떤 사물을 보고 순간적으로 얻는 느낌인 직관이 역사를 이해하는데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렇게 역사를 쓰는 방식에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의 창조적이고 독특한 시각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료에 근거해서 엄격하고 쓰지 않으므로 역사가의 주관적인 관점이 많이 나타나게 된다. 잘못하면 역사의 모습을 크게 왜곡시킬 가능성도 있다.
 
  그의 주장이 독창적이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키지만 학문적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은 이 이유 때문이다. 이런 아마츄어리즘은 당대에도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러니 오늘날 그의 연구가 심각한 비판대 위에 서 있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면 르네상스에 대한 그의 주장과 문제점들을 간략히 살펴보자.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7-11-20 오전 6:26:57


<9> 유럽 중세도시는 자유로웠나? ③  유럽의 도시는 특수하다고?


4. 다른 대륙의 도시들
 
  이슬람권의 도시들
 
  서양학자들은 이슬람권의 도시들을 전통적으로 매우 경시해 왔다. 이들 지역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유목민들로 도시적인 성격을 갖고 있지 않으며, 유목민들은 표류하는 종족들로 생산은 하지 않고 소비만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슬람 도시들에는 경제활동이 있다 해도 생산적인 것이 아니라 기생적인 것이라고 본다. 주변의 농촌을 뜯어 먹고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 별로 믿을 만한 것이 아니다.
 
  상업 활동에 큰 가치를 두지 않은 기독교 사회와 달리 이슬람 사회는 처음부터 상업의 존재를 인정했고 상인에게 높은 도덕적 가치를 부여했다. 그것은 그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상인 출신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슬람교가 상업 활동에 제약이 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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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호메트(Muhammad, 570~632)

  이미 10세기에 후옴미아드 왕조의 수도로서 이베리아 반도에 있었던 코르도바의 인구는 50만 이상으로 추산되며 이는 유럽에서는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최대의 도시였다.
 
  또 14세기 전반에는 이집트의 카이로가 크게 번성했다. 이 도시도 중국의 항주(杭州)와 함께 세계 최대의 도시로 그 인구도 약 50만에 달했다. 이집트에는 이 외에 알렉산드리아 등 여러 개의 대도시가 나일강을 따라 발전했다.
 
  카이로의 발전은 경제적 발전과 함께 세계무역로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 때문이었다.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 이집트가 유럽과 인도, 중국을 잇는 동방무역을 독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카이로와 인근 지역에는 상업, 국제무역 외에 수공업도 매우 발전했다. 면직이나 린넨 같은 직조업이 발달하여 대량으로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그밖에 설탕산업이나 야금업, 무기제조, 유리, 도자기, 가죽제품 등 많은 산업이 발전했다.
 
  또 당시 이집트를 지배하던 맘룩정권은 각종 산업을 일으키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경제에 약간의 통제를 가한 것은 사실이나 이집트인의 경제활동에 제약을 가할 정도는 아니었다.
 
  또 이슬람권에서는 계약, 동업, 중개제도, 장부의 기장, 신용제도 같은 상관습이 잘 발달했고 그 중 많은 것이 유럽으로 들어갔다. 따라서 이슬람 지역을 반자본주의적으로, 이슬람도시를 정치적, 종교적 도시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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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이슬람 상인들의 모습

  중국의 도시들
 
  서양 사람들은 중국도시의 경제적 성격을 부정하고 그 정치적, 행정적 성격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슬람 도시들의 경우보다 더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중국도시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9-10세기에 인구가 증가하며 남부 해안 지역에 급격한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이는 산업발전과 무역의 증가 때문이다. 특히 13세기인 남송 시대에는 농업 생산성, 산업기술, 상업이 크게 발달하여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기술적으로 발전한 나라가 되었다.
 
  이에 따라 도시도 발전했다. 당시 양자강 하류의 항주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을 뿐 아니라 가장 발전한 도시였다. 전국으로부터 상인들이 몰려들었을 뿐 아니라 외국으로부터도 많은 무역업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는 이븐 바투타의 기록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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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하라 사막을 건너는 이븐 바투타.

  송대에도 상공업이 발전했으나 더 중요한 변화가 나타난 것은 명나라 때로 생각된다. 이 시기에 곡물이나 면, 견 같은 상업 작물의 교역이 활성화되며 전국적 시장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시들도 상품 생산과 분배의 거점으로서 주변 지역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대에도 경제성장은 지속되었고 따라서 인구증가, 도시화도 계속된 것으로 생각된다. 17세기 남경의 인구는 100만, 북경도 60만을 넘은 것으로 추산된다. 명, 청대에는 행정과 전연 관계없는 상업, 산업도시도 많다. 경덕진(景德鎭) 같은 도시는 유럽에 자기를 수출한 세계적으로 이름 높은 산업도시이다. 또 양자강 하류지역과 태호(太湖) 지역에는 면직물, 견직물을 주로 생산하는 수십 개의 산업도시들이 있었다.
 
  특히 최근에 이루어진 양자강 하류의 큰 도시인 한구(漢口)에 대한 연구를 보면 베버와 같은 식으로 중국 도시를 보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해진다. 이 도시는 행정과는 거의 관계가 없으며 전적으로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발전시킨 상업도시로 크게 번성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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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부분의 도시가 한구(漢口)이고, 시계 방향으로 호광총독의 관청이 있 던 행정도시 무창(武昌), 작은 도시가 한양(漢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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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세기 초에 건설된 북경(北京)시의 모습

  일본, 인도, 아프리카의 도시들
 
  일본의 도시도 경제발전에 따라 16세기 이래 크게 성장했다. 그리하여 1825년에 이르면 인구 1만 이상의 도시가 82개에 이르고 도시인구는 모두 367만 명으로 추산 된다. 이런 도시화율은 18세기의 서유럽과 별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다. 19세기에 오사카와 교토의 인구는 40만-50만이고 지금의 도쿄인 에도(江戶)의 인구는 근 100만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도시화도 경제발전과 함께 나타나는 현상으로 그 도시들 가운데 많은 것이 봉건영주가 자리 잡은 성곽도시이기는 하나 그것을 반드시 행정도시로 보기는 어렵다. 경제적 성격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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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80년경, 일본의 나가사키(長崎)시. 나가사키시는 일본이 서양문물을 받아 들이 는 창구역할을 한 도시이다.

  인도도 인도양 지역의 중심 국가로 일찍부터 경제가 발전하며 도시도 발달했다. 17세기에 아그라, 델리, 라홀 같은 무굴제국의 주요도시들의 인구는 50만명에 육박했고 인구 20만명을 넘는 무역항들도 많았다.
 
  아프리카의 경우도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아프리카가 원래 미개하여 지금 보이는 아프리카의 도시들은 아마도 유럽 사람들이 식민지를 만들며 건설되었을 것 같이 생각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서양의 중세에 해당하는 시기에 이미 많은 도시들이 자생적으로 발달해 있었다. 1200년경에 인구 2만 이상의 도시가 31개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그것이 1400년에는 35개로 늘었고 1600년에 30개로 약간 줄었다가 1800년이 되면 21개로 크게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1200-1400년 시기의 이런 도시 숫자는 아프리카가 도시화라는 점에서 유럽에 크게 뒤떨어지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1600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판도 안에 있던 인구 2만 이상의 도시는 16개에 불과했다. 따라서 유럽인들이 진출하며 아프리카인의 자생적인 정치, 경제할동이 위축되고 그리하여 도시도 크게 줄어든 것으로 생각된다.
 
  5. 유럽의 중세 도시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
 
  빈약한 유럽 도시들

 
  지금까지 유럽의 중세도시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 또 다른 지역의 도시들이 어땠는지 간략히 살펴보았다. 유럽 도시들의 특징은 우선 그 규모가 작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도시들만이 10만 정도의 인구를 갖고 있었고 알프스 북쪽에서는 파리만이 10만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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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리용

  그러면 이렇게 규모가 작은 유럽 도시들이 근대에 들어와 어떻게 급격하게 성장했는지 런던을 예로 들어보자. 런던은 17세기에 들어와 유럽 최대의 도시로 발전한다. 그러나 중세시기에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임에도 인구가 4만 정도였다. 조선 초의 14세기 말 한양이 10만 이상이었으니까 그보다 훨씬 작은 도시이다.
 
  1563년에도 9만 3천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 시기의 본격적인 해외 진출에 힘입어 급성장하기 시작한다. 1580년에 12만 3천, 1593-95년 사이에 15만 2천, 1632년에는 31만7천명으로 급격히 늘어나고 1700년에는 70만으로 유럽 최대의 도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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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I세 (Elizabeth I, 1533 ~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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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세기 말 헨리 7세 시대의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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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의 무적함대

  잉글랜드가 1588년에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대서양의 패권을 장악했고, 아메리카로 진출하여 큰 경제적 이익을 얻었으므로 런던시의 급성장은 잉글랜드인의 해외진출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7세기에 대서양 무역이 활성화되며 노예무역 등을 통해 잉글랜드 경제가 크게 성장했기 때문이다.
 
  런던시가 대표적이지만 많은 유럽도시들의 규모가 점점 커지며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17세기에 들어와서이다. 따라서 오늘날과 직접 연결되는 유럽 도시의 역사는 17세기에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그 이전 유럽도시들의 모습은 별로 인상적이 아니다. 아시아의 도시들과 비교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다. 도시의 규모도 작고 인구도 훨씬 적다.
 
  이렇게 도시가 빈약했다는 것은 중세시기에 유럽에서 상공업이 발전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규모도 작고 숫자도 많지 않은 유럽도시들이 봉건체제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그래서 규모로 이야기하기 어려우니까 도시의 자유니 뭐니 하며 성격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이다.
 
  유럽도시의 특수성은 잘못된 주장
 
  그러나 이탈리아를 제외한 유럽의 도시들이 봉건적 체제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많은 도시가 왕이나 영주로부터 특허장을 얻어 약간의 자율성을 얻었지만 오랜 역사 속에 수백 개의 특허장을 확보한 도시라 해도 그것이 도시의 완전한 자율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전에는 특허장을 도시민이 왕이나 영주와 싸워 얻은 결과로 보았으나 오늘날에는 그렇게 보지 않는 학자들도 많다. 그것이 영주들의 이해관계와 어긋나는 것이 아니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영주들이 강요한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특허장과 도시의 자유와는 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중세도시들은 왕이나 영주들의 소유권, 법적 관할권에 의해 복잡하게 분할되어 있었다. 그러니 도시가 누리는 자율이라는 것이 그 가운데 남겨 있는 작은 틈새에 불과한 것이었고 그것도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다. 15세기 이후에는 유럽에서 왕권이 강해지며 도시의 행정권, 사법권이 점차 왕의 관리들에게 넘어간다. 따라서 그나마의 자율성마저 잃게 된다.
 
  근대 유럽의 정치적 자유는 프랑스혁명을 비롯한 18세기 말 이후의 산물이다. 또 유럽도시가 국가로부터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 받는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이런 것들을 중세도시의 전통과 직접 연결시킬 수는 없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아시아 도시의 성격은 유럽중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정치적 성격이 그렇게 강한 것도 아니고 아시아 경제가 18세기까지도 유럽보다 훨씬 발전했으며 활력 있었다는 주장도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유럽도시의 경제적 성격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유럽도시와 아시아 도시 사이에 질적인 차이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것은 아프리카 도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너무 지나치게 유럽 도시의 특수성을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7-11-15 오전 12:46:46


<8> 유럽 중세도시는 자유로웠나? ② 유럽 중세도시의 실상


3. 유럽의 중세도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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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유럽의 도시들

  도시의 형성과 규모
 
  중세시대에 유럽에서 도시가 가장 발달한 지역은 이탈리아 북부 지방과 함께 지금의 프랑스 북부 해안지역과 벨기에가 포함되는 플랑드르 지역이다. 이 지역이 중세 시대에 유럽에서 상공업이 가장 발전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지역에서는 도시들이 별로 발달하지 못했다.
 
  당시 이탈리아 북부는 특이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신성로마제국의 판도 안에 들어 있었으나 황제가 독일 지역에 거주했으므로 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지역의 도시들은 거의 독립적인 존재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것은 한 편에서 이탈리아 중부의 교황령에 자리 잡고 있던 로마교황이 황제를 견제하기 위해 도시들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11세기에 100여개였던 도시들은 14세기가 되면 점차 병합되어 30여개로 줄며 주변의 넓은 농촌지역까지 포함하는 상당히 큰 규모의 도시국가들로 발전했다. 그리하여 알프스 이북지역에서는 봉건영주들에 의한 봉건체제가 유지된 반면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귀족이 그 중심이 되는 도시국가 체제가 만들어졌다. 도시들이 거의 독립국가나 마찬가지의 성격을 갖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당시 피렌체나 베네치아, 밀라노, 제노바 같은 도시들은 주변 농촌 지역을 빼고도 인구가 10만 명 수준으로 당시 유럽에서는 가장 큰 도시들이다. 그 외에도 수만 명의 인구를 가진 도시들이 많다. 따라서 이탈리아의 도시는 다른 지역의 도시와는 크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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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시대의 베네치아 모습

  플랑드르 지방의 헨트의 인구수는 13세기 중반에 8만, 브뤼헤는 4만 정도로 비교적 큰 편이다. 이 지역에서는 중세시기에 모직물 산업이 발전했고 또, 상업도시로서도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역도 다른 곳에 비하면 특이한 예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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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시대 브뤼헤의 지도

  알프스 이북에 있는 그 외의 다른 도시들의 규모는 비교적 작다. 프랑스의 경우, 가장 큰 도시인 파리가 14세기에 10만 정도였다. 그 외에 큰 도시로는 1300년에 몽펠리에의 인구가 4만, 리용이 3만, 나르본, 툴루즈, 스트라스부르, 오를레앙이 각각 2만 5천 정도로 추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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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50년경의 파리 시가지 모습

  영국의 도시는 1377년의 기록에 의하면 가장 큰 런던의 인구가 4만5천-5만 명 수준이었다. 그 외에 인구 8천-1.5만 명이 4개, 5천-8천 명이 8개, 2천-5천 명이 27개이고 5백 명-2천 명 정도의 도시가 500개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도시는 인구 1천5백 명 이하의 작은 도시들이다. 특히 이렇게 작은 도시들은 시장이 열리는 시골 마을들로서 도시라고 하기도 어려운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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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둠즈데이북(Domesday Book) : 1086년에 만들어진 둠즈데이북은 오늘날의 국세조사대장으로 잉글랜드 중세사연구의 기본 사료로 당시의 도시모습을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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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영국의 시장이 열리던 시골 마을의 유적

  독일에서 가장 큰 도시는 쾰른, 프라하였으나 이들 도시의 인구도 14세기에 4만 정도에 불과했다. 15세기 초에 인구 2만 5천 이상이 되는 도시는 네 개밖에 되지 않았다. 평균 인구가 4백 명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것을 보면 중세 시대에 유럽 도시들의 규모가 매우 작은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수십만에 이르는 많은 인구를 가진 아시아 지역의 대도시들과는 크게 비교된다.
 
  도시의 구조와 상업적 성격
 
  그러면 이 도시들은 서양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상업적인 것인가. 상공업이 특히 발전한 북이탈리아와 플랑드르 도시들의 경우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역에서는 모직물 산업이 발전했고 그 외에 상업이나 금융업 등이 발전했다. 그러나 다른 지역들은 별로 그렇지 않다.
 
  행정도시, 주교도시, 군사도시로서 발전한 곳도 많으며 상업이나 수공업이 발전한 곳도 도시내부와 주변 지역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큰 의미는 없다.
 
  예외가 있다면 북프랑스 상파뉴 지방의 정기시(定期市) 도시들이다. 트루아, 프로뱅, 바르-쉬르-오브, 라니의 네 도시인데 이 도시들은 11세기부터 시작하여 12-3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이 도시들에서는 매년 두 달씩 돌아가며 한, 두 차례 정기시장이 열렸고 여기에는 프랑스, 이탈리아 상인뿐 아니라 잉글랜드, 스칸디나비아, 이베리아 반도의 상인들까지 모여들어 국제적인 중개무역 도시로 발전했다.
 
  그러나 도시의 규모는 가장 큰 트루아의 인구가 1만5천 정도로 크지 않다. 상파뉴 정기시들은 13세기말에 가면 쇠퇴하는데 그것은 상파뉴 백작이 다스리던 이 지역이 프랑스국왕의 왕령지에 병합되며 독립성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도시의 운명이 경제가 아니라 정치정세에 의해 결정된 셈이다.
 
  도시 내의 상업이나 수공업은 길드 제도의 의해 묶여 있었다. 런던 시의 경우를 보면 금세공인, 재봉사, 비단상인, 포목상, 생선장수, 모피상, 소금상인, 잡화상인, 채소상인, 가구업 등 70개의 길드가 있었다. 작은 도시의 경우에는 길드가 없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여하튼 길드는 도시 내에서 어느 업종의 독과점을 위한 기구였다. 따라서 작업시간이나 작업의 종류, 상품의 질 등이 세세하게 규정되었다. 길드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물건을 만들지도 팔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본주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따라서 중세도시를 자본주의와 관련시켜 말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다. 자본주의는 18세기에 길드 제도가 점차 해체되며 발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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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세공인, Petrus Christus, 1449,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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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상점

  법적 관할권과 도시의 자유
 
  또 도시에 따라 다르기는 하나 도시민들은 주변 영주들의 지배를 받는 경우도 많았다. 농노와 같지는 않으나 영주들에게 여러 가지 부담을 져야 했던 것이다. 왕이나 영주들에 대한 예속은 법적 관할권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법적 관할권은 법을 통해 도시민을 직접 지배할 수 있고 또 재산의 몰수나 벌금, 수수료를 통해 많은 수입을 얻게 해주는 수단이었으므로 왕이나 주요 봉건영주들 사이에서 치열한 다툼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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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노위치(Norwich) 지도

  그러나 한 도시가 한 사람의 왕이나 봉건영주에 의해 다스려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도시 안에 여러 봉건적 관할권들이 겹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의 노위치(Norwich)시는 그 좋은 예이다. 이 도시는 1377년의 기록에 의하면 잉글랜드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고 여섯 번째의 부자 도시였다.
 
  도시 한 가운데 서 있는 성은 형식적으로는 왕의 소유물이었으나 실제로는 베네딕트수도원의 소유로 도시 안에서 가장 큰 관할권을 갖고 있었고 캐로우 수도원, 웬스링 수도원, 성 베네딕트 히름 수도원도 상당한 관할권을 갖고 있었다.
 
  노위치 대성당과 캐로우 수도원은 정기시장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통행세와 점포세를 통해 상당한 수입이 들어왔다. 또 도시 안에 있는 두 시장에 대한 권리는 다른 작은 수도원들이 갖고 있었다. 그 외 여러 세속영주들도 여러 관할권을 나누어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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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허장을 받는 중세 플랑드르 한 도시의 시민들

  도시민들은 1158년에 왕으로부터 시민권 특허장을 받았고 1194년에는 도시 내에서 왕을 대리하여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 받았다. 그러면서 조금씩 자율적인 행정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주교, 수도원장 등의 교회영주나 세속영주와 끊임없이 갈등을 벌였다. 왕은 교회와 도시민과의 다툼에서는 도시민의 편을 든 것이 아니라 교회의 편을 들었다. 따라서 도시의 자율성은 매우 좁은 한계 안에 있었고 그것도 끊임없이 위협을 받는 상태에 있었다.
 
  프랑스의 리용 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체 도시의 영주는 대주교였으나 도시의 관할권은 대주교좌 성당 참사회와 나누어 가졌다. 14세기 초에 도시 안팎에는 다른 수도원 아홉 개와 여러 개의 기독교법 학교들이 있었다. 그 밖에 성당기사단, 병원기사단 외에 5개의 탁발승 교단, 또 여러 개의 작은 교단들이 있었다. 이 기구들이 모두 나름의 법적인 관할권을 갖고 있었고 지대, 벌금, 시장으로부터 얻는 이익, 주조권, 십일조를 받는 권리 등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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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리용 (Lyons) 시의 모습

  시민들의 저항이 커지며 대주교는 제한된 것이나 도시민들에게 특허장을 수여했다. 이에 의해 도시민들은 어느 정도의 자율적인 행정을 보장받았다. 그래도 재판권은 제외되었다. 14, 15세기에 오면 대주교의 힘이 약화되어 15세기 중반에는 다른 대부분의 프랑스 도시들과 같이 왕의 관할 아래에 들어가고 그 행정은 관리들에게 인수되었다.
 
  중세의 전 시기를 통해 리용의 도시민들은 부유했고 또 교회가 지배하는 행정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전체 도시를 지배한 적은 없다. 리용에서는 노위치보다 봉건적-교회적 성격이 훨씬 강했고 이는 왕에게 병합한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이렇게 하나의 도시가 여러 영주권에 의해 분할되는 것은 다른 도시들도 마찬가지이다.
 
  도시민의 자격과 계급적 구분
 
  서양 학자들 가운데에는 지금도 중세도시들이 매우 자유로운 곳이었던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어떤 외부 사람이 도시로 들어온 지 1년 1일이 지나면 자유롭게 되었다고 말한다. 시민권을 얻어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만든다'(Stadtluft macht frei)는 것은 그래서 하는 소리이다.
 
  아마 그런 때가 있었을 수는 있다. 14세기에 흑사병으로 많은 인구가 죽었을 때는 어디에서나 노동력이 필요했으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특수한 예이지 일반적인 예라고 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도시생활은 엄격하게 통제되었으며 결코 자유로운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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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엑시터(Exeter)시의 모습

  우선 아무나 도시에 들어오면 시민권을 얻어 자유롭게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잉글랜드의 엑시터(Exeter)시에는 중세말의 자료가 남아 있는데 14세기 말의 인구는 약 3천 명 정도이다. 그런데 이 도시에서 시민권을 가진 자유인은 1377년의 경우 전체 가장(家長)의 19%로서 전체 인구의 3%에 불과했다. 가장의 1/5 정도만이 자유로운 신분을 가졌던 셈이다.
 
  이것은 다른 도시도 거의 마찬가지이다. 14세기 초 런던의 자유인은 4만 인구 가운데 2천명에 불과했다. 5% 정도인 것이다. 피렌체 시의 경우 1494년에 인구 9만 명 가운데 자유인은 3%가 조금 넘는 정도인 3천명에 불과했다.
 
  베네치아도 2천-2천5백 명 정도만이 시민권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중세도시에서 시민권을 갖는 자유인은 일반적으로 인구의 고작 2-3%에 불과했다. 그러니 도시를 자유로운 공동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특권이 지배하는 사회였고 소수의 귀족적인 지배층이 다스리는 사회였다.
  또 자유인들은 대개 그 신분을 자식들에게 대물림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새로 시민권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도시에 들어와 상당히 오랜 기간을 경과해야 했다. 그것이 몇 대를 지날 수도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상당한 규모의 재산을 모아야 했고 도시 내 유력자들의 후원을 얻어야 했다. 아무나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제멋대로 도시로 들어 온 사람은 처벌을 받고 추방당했다. 그러니 농노라도 도시로 도망쳐 오면 자유를 얻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또 도시민은 여러 계급으로 구분되어 차별 대우를 받았다. 계급에 따라 사는 지역도 달랐다. 도시민이기는 하나 시민권이 없는 경우에는 성안에 살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또 계급에 따라 입는 옷, 심지어 착용하는 장신구까지 세세히 규정되어 있었다. 근대초인 1621년에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시는 도시민을 다섯 계급으로 나누는 법을 만들어 일상생활을 엄격하게 규제했다. 도시는 결코 평등한 곳이 아니었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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