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프레시안 2007-11-13 오전 12:17:06


4. 자유로운 유럽 중세도시의 신화
 
  1. 유럽 중세도시에 대한 신화
 
  아름다운 유럽의 도시들
 
  한국 사람들이 유럽에 가서 가장 깊은 인상을 받는 것 가운데 하나가 아름다운 도시의 모습들일 것이다. 세월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붉은 기와지붕의 오랜 건물들, 좁은 골목길, 대로변의 웅장한 석조 공공건물, 거대한 고딕 성당, 기념물들이 즐비한 드넓은 광장과 노천 까페, 기하학적인 모양의 아름다운 정원들, 게다가 여유 있어 보이는 유럽인들의 생활 속에 스며들어 있는 음악과 춤, 이런 것들을 연상하면 한번 지나쳐 온 유럽 도시를 돌이켜 보노라면 입가에 살포시 미소가 감돌 수밖에 없다.
 
  이런 유럽의 도시들을 온통 콘크리트 범벅에다가 아름답지도, 또 역사와 문화의 향기를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우리의 도시들과 비교하면 저도 모르게 탄식과 함께 한숨이 나오는 것이다. 한국 같은 나라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부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한 번 유럽도시들을 구경하고 그 숨결을 느끼고 온 사람들은 유럽의 많은 도시들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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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의 도시

  그러나 유럽도시의 매력은 이런 외면적인 모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도시가 그 나름의 독특한 정신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인데, 그것이 외면적인 것보다 아마 더 중요할 지도 모른다.
 
  자유와 자본주의의 고향
 
  우선 도시는 유럽인의 자유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믿어진다.
 
  이미 중세 시대에 유럽의 도시민들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왕이나 봉건영주와 싸워 자유를 확보했다. 그래서 도시는 자유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또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때에는 그 전통을 이은 파리 시민들이 절대왕정에 대항해 혁명을 일으켰고 민주주의를 확립했다. 그러니까 유럽 도시들은 이런 역사 발전의 생생한 현장인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유럽의 중세도시는 자본주의의 고향이기도 하다. 도시는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이 모여들어 상공업이 번성함으로써 봉건제가 지배하는 주변의 농촌 지역과 전연 다른 곳이 되었다. 그래서 자본주의적 태도를 발전시킬 수 있었고 그것이 주위의 농촌으로 퍼져 나가며 근대 초에 와서 봉건체제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를 확립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러니까 유럽의 도시들은 인류의 문화적 자산 가운데에서도 보석과 같은 존재로 소중하게 간직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반면 중동이나 다른 아시아 지역의 도시들은 이와 전연 다르게 생각된다. 우중충하고 독특한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거리들, 그 위에 사는 거칠고 야만적인 사람들, 자유라고는 냄새도 맡아 보지 못한 억압과 착취의 고장, 종교적 광신과 문맹이 지배하는 낯선 땅이다. 이 정도가 되면 이런 도시들을 거니는 것조차 역겹게 느껴질 것이다.
 
  말하자면 유럽의 도시들은 비유럽의 이런 도시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도시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유럽문명의 기초로서 오늘날의 우월한 서양문명을 만드는 바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나 인권, 시민적 자유와 같은 서양의 정치적, 시민적 가치가 도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정신적인 면은 사실 서양인들이 계속 주장하는 것이고 또 우리가 계속 그렇게 배워 온 것들이다. 이런 이야기는 과연 어느 정도나 사실과 부합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실일까. 신화일까.
 
  2. 중세도시는 자유로웠는가?
 
  11세기부터 발전한 중세도시

 
  그러면 서양 사람들이 그렇게 자랑하는 중세도시는 언제부터 나타나는가? 로마는 '도시의 국가'라고 부를 정도로 로마시대에는 도시가 발전했었다. 그러나 5세기에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며 점차 그 활력을 잃게 된다.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며 경제가 위축됐기 때문이다.
 
  7세기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난 이슬람 세력은 유럽 경제에 더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이슬람 세력이 동부 지중해와 아프리카 북부 해안뿐 아니라 이베리아 반도까지 지배하며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던 유럽의 경제활동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9세기에는 많은 도시들이 이름만 남기고 사라지거나 살아남는다 해도 그 규모가 크게 작아진다.
 
  유럽에서 도시가 다시 발전하게 된 것은 11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오랜 정체 끝에 11세기에 와서 인구가 늘고 농업이 발전하기 때문이다. 이에 상업도 다시 활기를 띠며 도시도 성장하게 된다. 이 시기에 이슬람 세력이 약화되며 지중해 무역이 되살아난 것도 유럽 안에서 장거리 교역이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축소되었던 과거의 도시들이 다시 확대되고, 왕이나 영주들이 사는 성의 부근, 또는 중요한 교역 중심지에 도시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각종 상인들이 모여들고 여기에 신발, 옷가지, 그릇, 가구 등 각종 생활용품이나 무기 등을 만드는 수공업자들, 또 양조업자, 제빵공 등 다른 많은 직업의 사람들이 합쳐지며 도시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도시가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많았으나 한 편에서는 왕이나 영주들에 의해 새로 건설된 도시들도 많다. 그것은 도시로부터 각종 세금이나 점포세, 거래세 등 여러 가지 수입을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도시들은 어떻게 자유를 얻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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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프랑스의 한 상점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가져 온다'
 
  일반적인 설명에 의하면 이렇게 만들어진 많은 도시들에서는 도시민들이 힘을 합쳐 왕이나 봉건영주와 싸우거나, 또는 돈을 주고 자유를 얻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시민의 숫자가 늘어나고 이들의 힘이 커지며 왕이나 영주들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각 도시는 나름의 행정기구를 갖고 재판소도 운영하며 자치를 하게 된다.
 
  도시에서는 보통 12인으로 구성되는 위원회가 도시 안의 여러 업무에 대해 최종 결정을 하고 그들이 대표로 선출하는 시장이 최고의 책임을 진다. 또 살인 같은 중범죄는 다룰 수 없으나 사기나 절도 같은 사소한 범죄들은 도시 재판소에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도시가 이렇게 자율성을 가지므로 그것은 주변의 농촌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곳이 된다.
 
  농촌 지역에는 봉건적 예속과 착취가 있지만 도시에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촌에서 도망쳐 온 농노라 할지라도 도시로 들어와 일정기간이 지나면 시민으로서 자유로운 신분이 될 수 있었다.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만든다'는 독일 속담은 이런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중세도시에서 발전한 시민들의 자유가 근대에 들어와 유럽에서 민주주의와 정치적 자유가 발전하는 기틀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그럴듯해 보이나 사실은 상당 부분 잘못된 것이다. 중세도시를 그럴듯하게 미화하려 한 근대 서양학자들이 이데올로기적으로 해석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실을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이런 식의 해석을 했을까.
 
  앙리 피렌느의 <중세도시>
 
  유럽의 중세도시를 '도시의 자유' 라는 면에서 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부터이다. 프랑스 학자들이 프랑스 혁명의 기원을 중세도시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1789년에 파리 시민들이 도시 자치체인 코뮌을 만들어 루이 16세의 왕정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려고 한 시도를 바로 중세도시의 전통과 연결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학문적으로 잘 뒷받침한 것은 20세기 초에 널리 활동한 벨기에의 중세사학자 앙리 피렌느이다. 그가 1925년에 쓴 <중세도시>라는 책은 그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는 중세도시의 상업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상업적이고 자유로운 도시와, 농업적이고 봉건적인 틀에 묶여 부자유스런 주변의 농촌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중세 시대에 도시와 농촌의 성격이 확연히 달랐다는 것이다. 이는 중세도시가 진보적이고 해방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말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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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리 피렌느 (Henri Pirenne, 1862~1935, 벨기에의 역사학자)

  피렌느는 도시의 발전에서 중요한 사실은 '부르주아지'라고 불리는 도시민들이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르주아지(Bourgeoise)란 불어로서 말 그대로 도시(불어의 bourg, 독일어의 burg, 영어의 borough: 이것의 어원은 군사적 요새이다)에 사는 사람들을 의미하나 피렌느가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이들이 신분적으로 농민들과는 달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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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세기말의 도시민들(부르주아지), 파리국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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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의 농노들

  중세 시대의 유럽 농민들 가운데에는 자유농이나, 노예, 품팔이꾼도 있으나 일반적인 형태는 영주가 다스리는 장원에서 사는 농노들이다. 농노는 땅의 소유권을 가질 수는 없으나 다른 농노들과 공평하게 분배받은 땅에서 농사를 짓고 그것을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이를 소유가 아닌 '보유(保有)'라 한다. 따라서 최소한의 생활은 보장 받을 수 있었다.
 
  그 대신 영주에게 묶여 살았다. 영주가 직접 관할하는 직영지에서 일주일에 사나흘, 심지어는 엿새를 꼬박 일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영주의 허락 없이는 장원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 갈 수도 없었다. 영주에게는 농사 지을 노동력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농노의 딸이 다른 장원으로 시집가는 경우 영주에게 허락 받아야 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영주는 이들에 대해 이렇게 몸을 구속했을 뿐 아니라(이것을 인신적(人身的) 지배라고 한다) 재판권이나 경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 여러 가지 세금도 내야 했고 성을 쌓는 등 필요할 때에는 노동력도 제공해야 했다. 따라서 농노들은 신분이 높은 귀족인 영주에게 예속되어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피렌느는 농노들의 이런 상황에 비추어 영주에게 묶여 있지 않은 도시민들은 행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여러 봉건적 관할권에서 벗어나게 해줄 자신만의 도시법과 재판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집이나 토지를 소유할 수도 있고 그것을 마음대로 매매하고 또 자손에게 상속시킬 수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도시는 봉건적 질서에 얽매인 주변의 농촌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도시란 왕이나 영주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 상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자율적인 공동체인 셈이다.
 
  막스 베버의 <도시>
 
  피렌느의 이런 생각을 받아 들여 그것을 더 정교한 이론으로 꾸민 인물이 막스 베버이다. 그도 피렌느와 마찬가지로 도시는 정치나 행정적인 기능만을 가져서는 안 되고 상업적인 성격이 주된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가 유럽 중세도시의 특징으로 들고 있는 것은 다섯 가지이다. 우선 도시에는 성벽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주변의 농촌과 분리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시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상업적인 성격이 생기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는 도시만의 법과 그것을 가지고 재판을 할 도시 재판소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왕이나 영주의 법적 관할권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는 도시의 행정을 담당할 조직이 있어야 한다. 도시의 자율성을 위해서이다. 마지막으로는 도시 대표를 선출할 때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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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벽에 둘러싸인 중세 남프랑스 한 도시의 모습

  그러니까 베버는 상업적인 성격을 가져야 하고 자치를 함으로써 자율성을 가져야 도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베버도 중국을 포함하는 동양의 도시들이 유럽의 도시보다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양의 도시들은 유럽에서 볼 수 있는 이런 도시의 중요한 요소들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진짜가 아닌 '가짜' 도시라고 생각했다.
 
  중국의 거대 도시들은 경제발전에 따른 자연적 결과가 아니라, 행정이나 군사적 필요에 의해 왕이나 지배계급의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도시의 자율성이 허용될 수 없었으므로 크기는 하되 도시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20세기 후반의 서양 역사가들에게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래서 프랑스의 페르낭 브로델은 1995년에 쓴 <문명의 역사>라는 책에서 '13-14세기에 지어진 서양 도시의 석조성벽은 독립과 자유를 향한 의식적 노력의 외적인 상징'이며 '도시는 결코 꺼지지 않는 엔진이었다. 그것이 유럽의 첫 진보를 이끌었고 자유로 보상을 받았다'고 말한다.
 
  1990년대에조차 이런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은 피렌느와 베버가 만든 중세도시에 대한 신화가 아직도 잘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유럽 중세도시들의 실제 모습은 어땠을까. 한 번 살펴보자.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7-11-08 오전 8:56:39

<6> 그리스문명에 대한 환상 ③ 그리스문화의 이상화


4. 그리스 문화의 이상화
 
  아름답고 건전한 그리스 문화
 
  이렇게 그리스를 좋아하게 되었으니 유럽인들이 그 문화를 이상화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 문화에서 추하고 비참한 것, 어두운 것, 잔인함 등의 나쁜 요소들은 가능한 대로 감추려고 노력했다. 대신 용감함, 지혜, 정의, 도덕성 같은 좋은 요소들은 크게 부각시켰다.
 
  그리스는 민주주의의 원천으로, 법의 지배가 이루어진 곳으로, 인간중심적이고 합리적인 문명을 만든 곳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반면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면, 노예제나 성적인 문란함 같은 부정적인 요소들은 가능한 한 축소시켰다. 서양 사람들이 19세기 이후에 쓴 많은 그리스 역사책들은 이런 편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또 그리스 문화는 대체로 아름다움이라는 관점에서 관찰되었다. 그러므로 아프로디테나 많은 여신의 나신상들은 단지 옷을 벗은 여인의 아름다운 조각상만으로 받아들여졌고 파르테논 신전 같은 건축물들도 구조, 기둥모양, 비례 같은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건축적인 요소만이 부각되었다.
 
  그리하여 '푸른 지중해와 그것을 배경으로 서 있는 흰색의 아름다운 대리석 신전'으로 상징되는 그리스의 아름답고 순수한 이미지는 19세기 이후 많은 문필가나 미술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생산 되었다. 특히 화가나 조각가들은 그리스 신화를 모티브로 하는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 그리스를 이상화하는 데 중요한 몫을 했다.
 
  시각적인 효과는 글보다 더 강력하고 직접적이다. 그래서 이들이 그리스의 서사시나 신화를 배경으로 근대에 그린 아름다운 그림들이나 조각들을 감상하노라면 그 순수하고 깨끗한 세계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그리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물론 상상하는 것만도 불경하게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현상은 그리스 문화의 해석의 모든 면에서 나타난다. 그리스 문화의 몇 가지 면에서 이 점을 간단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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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신화를 배경으로 한 19세기 초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1748~1825년)의 그림 (좌)텔레마쿠스와 유카리스의 이별,1818년 (우)비너스와 미의 여신들에 의해 무장해제된 마르스,1824년

  민주주의의 근원인 아테네 민주주의
 
  서양 사람들은 보통 근대 민주주의의 근원을 아테네 민주주의로 놓는다. 이는 클레이스테네스(Cleisthenes)가 중심이 된 아테네인들이 기원전 507년에 참주를 몰아내고 귀족정체 대신 민주정체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부족제도를 고쳐서 귀족들의 영향력을 줄이고 500인회의(뷸레)가 민의를 대변하는 기관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참주가 될 만한 사람들은 투표를 통해 도시 밖으로 추방할 수 있었다.
 
  5세기 후반의 페리클레스(Perikles)는 그것을 더 발전시켜 민회가 국정의 중심이 되도록 했다. 그래서 도시의 중요한 사안들이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민회에서 결정되었고 당시 행정을 책임진 10명의 스트라테고스(장군)들은 정치를 잘못하는 경우 민회에 의해 쫓겨나거나 사형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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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5세기 말의 아테네 지도자 페리클레스(Perikles, 기원전 495~429)

  아테네가 그리스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이 되어 풍부한 재정을 갖게 된 다음에는 민회나 재판에 참여하거나, 심지어 연극 구경을 하는 시민들에게도 수당을 지불했다.
 
  이리하여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가 교대로'라는 원리에 따라 추첨으로 뽑힌 사람들은 보통 1년 임기로 대부분의 관직에 취임할 수 있었다. 모든 시민이 함께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근대 서양인들이 아테네를 민주주의의 발상지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아테네 민주주의의 실상은 이와는 달랐다. 우선 그 폭이 매우 좁았다. 거주외국인, 노예, 여성을 빼고 전체 인구 45만 명 정도 가운데 시민인 약 4만 명의 성인 남자들만이 이에 참여할 자격이 있었다. 또 많은 사람이 생업에 종사해야 했으므로 민회에는 최대 6천 명 정도만이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민회는 드물게 열리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이 참여하므로 자세한 논의를 할 수도 없었다. 의사결정도 투표수로 하지 않고 대충 손을 들어 했으므로 목소리 큰 편이 유리했다.
 
  클레이스테네스 시대에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한 기관이었던 500인회의는 민회에서 토의될 안건을 미리 준비하는 곳으로 그 구성원은 각 마을 단위인 데모스에서 인구에 비례하여 추첨으로 뽑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를 보면 500인회의 참석자가 반드시 추첨에 의해 선출된 것 같지는 않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해에 500인회의에 뽑히려고 서로 싸웠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뇌물이나 다른 영향력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민회나 500인회의가 반드시 민주주의를 보증하는 기관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치는 민중이 아니라 계속 부유한 귀족 출신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파당을 이루어 권력을 장악하고 또 유지하려고 애썼다. 이런 모습은 민주주의가 가장 발전했던 시기에도 마찬가지이다.
 
  기원전 5세기 말 이후의 아테네 정치는 선동가들에 의해 매우 어지러워졌다. 기원전 4세기 사람들인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민주정을 별로 호의적으로 보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민주정을 통해 하층민들의 권리가 과거보다 더 신장되고 보호받았다고 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도 어느 한계 안에서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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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 (Platon, 기원전 428/427~348/347)

  이런 의미에서 아테네의 민주정은 시민들의 의사가 민주적인 방식으로 결정되고 관철되는 그런 이상적인 정치의 형태가 아니다. 게다가 아테네 민주정은 그리스에서도 예외적인 일이었다. 다른 도시들은 왕정이나 참주정을 채택했다.
 
  그러면 아테네 민주주의와 근대의 민주주의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이름만 같을 뿐 사실상 아무런 관계도 없다. 서양에서 근대에 점차 발전한 민주주의는 17세기 이후 영국의 귀족들이 왕과 권력다툼을 벌이는 가운데 나타난 것으로 그리스로부터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또 근대의 서양인들은 로마의 공화정을 중시했을 뿐 아테네의 민주정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아테네 민주주의를 찬양하고 그것을 유럽의 근대 민주주의와 연결시키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에 들어와서이다. 그러니 근대 민주주의의 기원을 아테네에서 찾는 것이 얼마나 허황한 일인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노예제도
 
  고대 그리스는 기본적으로 노예제 사회였다. 그러므로 사람을 자유인과 노예로 구분하는 것은 그리스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일로서 노예제는 그리스인의 생각이나 이데올로기의 많은 부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아테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서양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아테네의 노예제에 대해 거북한 태도를 보여 왔다. 그것이 그들이 그리는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와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언급을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간략하게, 또 좋게 말하고 넘어갔다. 노예가 시민이나 마찬가지 대접을 받았고, 가게의 점원이나 경영자가 될 수도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노예제에 대한 사료가 남아 있는 곳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키오스 정도이고 그 가운데 사료가 가장 많은 아테네의 경우도 그 전체 모습을 알기에는 태부족이다. 많은 부분을 추정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대개 전쟁에서 붙잡혀 온 사람들로 노예를 잡을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왔다. 기원전 468년의 유리메돈 강 전투에서 아테네가 승리한 후에는 한꺼번에 약 2만 명의 노예가 붙잡혀왔다. 이들은 그리스 주인들에게 팔렸다.
  이들의 숫자는 가장 많았던 시기에 약 1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기원전 5~4세기에는 노예 소유가 일반화되어 보통 가정은 2~3인의 노예를 소유했던 것 같다. 가내 노예들은 농사일이나 집안의 궂은일을 했으나 수공업 작업장에는 수십 명, 또 광산 같은 곳에서는 수백 명씩 일한 곳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그들이 자유로웠고 시민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는 주장은 어느 사료에 '자유인이 노예나 외국인 해방노예를 때릴 수 있도록 법이 허용했다고 해도 그는 자주 시민을 노예로 오인하고 때릴 수 있다. 왜냐하면 옷이나 일반적인 외양에서 일반인들은 노예나 외국인과 꼭 같아 보이기 때문'이라는 짧은 구절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을 확대해석 한 것이다.
 
  그러나 물건 같이 사고 팔리는 존재인 노예가 시민과 같은 대접을 받았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는 '살아있는 도구'로서 주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법정은 노예에게 고문을 가해서 얻은 증거를 합법적으로 받아 들였다.
 
  또 라우레이움 은광산 같은 곳에서는 노예가 대규모로 부려졌다. 그 지하 100미터의 갱도에서 발견된 족쇄나 유골, 여러 생활 흔적으로 보면 이들의 참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인간적인 대접을 받기는커녕 채찍을 맞으며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것 같다. 물론 특별한 경우에 신분적으로 해방된 해방노예가 있기는 했으나 일반적으로 노예가 다른 도시에서보다 특별히 나은 대접을 받았던 것 같지는 않다. 아테네 사회의 이런 어두운 측면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것은 문제이다.
 
  그리스 미술
 
  그리스 미술은 근대 서양인에 의해 미화되고 왜곡된 대표적인 예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리스 미술은 보통 그 인간중심주의, 자연주의로 평가를 받는다. 이집트에서와 같이 동물을 형상화한 신상 조각들이 별로 나타나지 않고 또 사실적인 표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기원전 5세기 이후의 고전기 조각에서 그렇다. 그래서 고전기 조각은 일반적으로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자율적인 미술을 발전시켰다든가 오리엔트 문화를 특징짓는 종교적 억압에서 해방된 것으로 이해된다.
 
  '서양미술사'로 유명한 곰브리치(E. H. Gombrich)가 이런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사람의 하나이다. 그는 '아테네인들이 자기가 눈으로 관찰한 것을 그대로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하며 미술사 전체를 통해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혁명이 결실을 맺었다'고까지 주장한다. 이렇게 서양학자들이 그리스 미술의 자연주의를 강조하고 그것을 종교와 분리시키는 것은 그리스 문화를 세속적, 합리적인 것으로 보려는 일반적인 태도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전기 조각 역시 종교적 신상 조각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런 해석은 오해를 가져온다. 실제로 그리스의 조각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종교적인 조각들이다.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 미술을 탈종교화하는 이런 태도는 오늘날 서양의 많은 박물관에서 그대로 표현된다. 신상이 그것이 만들어지고 이용되던 사회적, 문화적 환경과는 완전히 차단된 채 다른 배경 속에 진열됨으로써 단지 아름다운 미술품으로만 감상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그것들은 20세기 로댕의 조각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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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있었던 파르테논신전(Parthenon)의 아테나 여신상은 현존하지 않고 이것은 작은 모작품이다.

  또 그리스 조각이 반드시 인간중심적인 것은 아니다. 동물숭배의 흔적도 나타난다. 파르테논 신전에 있었다고 하는 기원전 5세기 말의 아테나 여신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아 온 그리스 신상들과는 모양이 많이 다르다. 그 머리에는 스핑크스가 묘사되어 있고 큰 뱀이 몸을 휘감고 있다. 방패에도 여러 마리의 뱀이 그려져 있다. 이는 뱀을 숭배한 고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집트의 신상과 상통하는 점이 많다.
 
  에페소스(Ephesus)의 아르테미스(Artemis)상은 사람 모습을 하고 있으나 매우 기괴하다. 가슴 부분에 젖으로 보이는 수십 개의 돌기가 달려 있다. 그것이 보통의 인간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으나 당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아무 문제도 안 되었다. 이 신상은 오랫동안 소아시아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을 받아온 예배의 대상물이었다. 또 이집트 조각에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된 것들이 남아 있으므로 자연주의를 그리스 미술에만 한정시킬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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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페소스(Ephesus)의 아르테미스(Artemis)상

  그리스 문명이 인간중심적이고 합리적이라는 것은 서양 근대인이 만들어낸 편견에 불과하다. 그리스 문명도 기본적으로 종교가 지배한 문명으로 다른 어느 곳의 고대 문명과도 별 차이가 없다.
 
  5. 그리스 문명을 제대로 알아야 할 이유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그리스 문명은 서양인들에 의해 매우 과장되고 이상화되었다. 또 인종주의에 의해서도 색칠되어 있다. 따라서 그리스사를 이렇게 왜곡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헬레니즘 이데올로기에 대해 잘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이 그리스뿐 아니라 고대 오리엔트 문명, 나아가 근대로 이어지는 서양사 전체의 모습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바탕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리스를 바로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은 서양인들에 의해 그 역사적인 진실이 왜곡되어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더 큰 문제는 서양인들이 그리스를 지렛대로 하여 세계를 보는 방식을 만들어낸 것과 관련이 있다. 그리스의 전통을 잇는 유럽과 그렇지 못한 비유럽을 둘로 나누어 세계사를 보는 인식의 틀을 만들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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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0년, 영불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고 원명원을 파괴했을 때의 그림으로 영국의 만화잡지 '펀치(Punch)'지에 실렸다. 이 그림에서 중국은 흉측한 용으로, 영불인은 그리스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 점에서 근대 헬레니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그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유럽지역은 항상 문명된 지역으로, 비유럽지역은 야만스런 곳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또 자연히 유럽문명, 나아가 서양문명 전체를 우월하게 보고 비서양 세계를 비하하는 태도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세계사 인식으로 반드시 고칠 필요가 있다.
 
  몇 년 전 한국사회에서는 그리스 신화 열풍이 지나갔다. 어린이들마저 그리스 신 이름을 줄줄 외우는 것이 신기한 일도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그리스적인 요소로 채운다는 것은 별로 좋은 일이 아니다. 그리스 신화도 헬레니즘의 본질적인 한 요소로서 그리스를 미화하고 잘못 이해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를 멋모르고 동경하고 칭송하는 데에는 큰 함정이 숨어 있다. 헬레니즘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성격에 비추어 그런 행동은 비서양인인 우리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서양인 따라하기'가 그것을 넘어서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나아간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니겠는가.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5> 그리스문명에 대한 환상 ② 빙켈만이 이룬 대전환


3. 근대 유럽과 그리스 문명
 
  그리스 문화와 단절되었던 근대 이전의 유럽
 
  그러면 근대로 들어오기 전 유럽과 그리스 문화와의 관계는 어땠을까. 한마디로 직접적으로 긴밀한 관계는 없었다. 유럽인들이 18세기까지도 자신들을 로마인의 후예로, 또 로마 문화의 계승자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 사람들이 그리스 문화를 상당부분 받아 들였으므로 나중의 유럽인들이 로마 문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리스 문화를 받아 들였다고는 할 수 있다.
 
  로마 사람들은 그리스 12주신(主神)의 신격을 받아 들여 자신들의 신으로 삼았다. 아프로디테가 비너스로, 제우스가 유피테르 등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또 그리스의 서사시, 역사, 미술, 과학 같은 것으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는 헬레니즘적 시대(Hellenistic Age : 이는 보통 '헬레니즘 시대'로 번역해 사용하나 정확히는 '헬레니즘적 시대'로 불러야 한다. 서양 학자들이 이 시기를 고전 그리스 시대보다 열등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뿐 아니라 로마 시대에도 그리스인들이 문화적으로 큰 활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세기 이후에는 그 관계도 점차 약화되었다. 로마가 정치적, 사회적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로마가 3세기 말에 동 · 서로마로 나뉘고, 서로마가 476년에 게르만 족에게 멸망함으로써 그 관계도 완전히 끊어졌다.
  반면 그리스를 포함하고 있는 동로마제국은 살아남았으나 6세기 이후에는 로마적인 성격을 잃고 언어나 문화에서 점차 그리스화했다. 그래서 이를 비잔틴 제국이라 부른다. 또 이 지역에서는 11세기 중반이후에 그리스 정교를 믿었으므로 서유럽과는 더 멀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성상(聖像)숭배 문제로 기독교 세계가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로 분리된 것이다.
 
  1453년에 오스만 터키가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킴으로써 결정적인 변화가 왔다. 이제 그리스 지역이 이슬람 문화권에 속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그리스와 유럽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졌다.
 
  따라서 로마 말기부터 중세 때까지 근 천 년 동안 유럽인들은 그리스 문화와 거의 단절되어 있었다. 유럽인들이 그리스 문화를 다시 접하게 된 것은 12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유럽의 중세사회가 점차 안정되며 아라비아어 판의 고대 그리스 서적들이 다시 라틴어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이다. 13세기 후반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책들이 번역될 정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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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le, 기원전 384~322,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제자)

  그런데 이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받아들이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 Albertus Magnus, 1193? ~ 1280 ) 나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1224~1274)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비난 받을까봐 몹시 두려워했다. 그 때만 해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슬람권의 철학자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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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Albertus Magnus, 1193?~1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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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1224~1274)

  사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8세기의 압바스 왕조 때부터 많은 그리스 책들이 아라비아어 번역되고 그리스 학문을 열심히 연구하고 발전시켜 왔다. 그 중심이 현재 미국의 점령 하에 있는 이라크의 바그다드이다. 이때만 해도 그리스 문화의 전통은 유럽이 아니라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 문화권에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유럽인이 그리스 문화와 보다 접근하게 된 것은 14세기 말부터 15세기에 들어와서이다. 비잔틴 학자들이 14세기 말부터 이탈리아에 와서 그리스 말이나 학문을 가르쳤고 1476년에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많은 비잔틴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망명을 함으로써 이제 고전 그리스 문화를 보다 깊이 있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18세기 말까지도 유럽 사람들은 자기네 문화가 로마적이고 기독교적이라고 생각했지 그리스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리스 문명과 직접 연결되지도 않았지만 유일신을 믿는 유럽인들로서는 다신교가 중심인 그리스 문화와 가까워지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빙켈만이 이룬 대전환
 
  이런 태도가 바뀌는 것은 18세기 후반에 들어와서이다. 이 시기에 어렵사리 그리스에 들어간 여행자들이 낸 책들이 출판되며 점차 그리스 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그러나 유럽 사람들이 그리스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요한 빙켈만(J. J. Winckelmann)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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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 빙켈만 (1717-1768, 독일의 미술사가)

  그는 원래 독일 출신이나 로마의 바티칸 도서관에서 일했다. 그 가운데 유물 창고에 수장되어 있던 수많은 그리스 조각품들을 보고 큰 관심과 함께 매력을 느꼈다. 그것은 대개 로마 시대에 그리스 것을 본따 만든 모작품들로 르네상스 시대이래 교황청에서 수집한 것이다. 그것을 양식에 따라 구분하고 연대별로 정리하여 1764년에 출판한 것이 그의 유명한 <고대미술사>이다.
 
  이 책에서 그는 그리스 조각의 아름다움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가 헬레니즘적 시대의 조각인 라오콘에 대한 인상을 '고귀한 단순성과 조용한 숭고함'으로 묘사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그리스 조각의 특징을 간결하고 명쾌하게 보여주는 표현으로 널리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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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오콘(Laocoon)상

  그가 '아폴로 벨베데레'라는 조각상을 찬미하는 말은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엘리시움의 행복한 들판을 지배하는 것 같은 영원한 봄이, 그의 몸을 젊음의 매력으로 뒤덮고 그의 자랑스러운 팔, 다리에서 부드럽게 빛난다. … 핏줄이 없는 것 같은 이 몸은 신경이 아니라 천상의 영혼에 의해 움직인다. … 이 예술의 기적 앞에서 나는 모든 우주를 잊어버리고 그 존엄에 어울리게 영혼이 고양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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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폴로 벨베데레 (Apollo Belvedere)상

  더 이상 보탤 말이 없을 정도로 아폴로 상을 높이 찬양하고 있다. 또 그는 이런 위대한 작품들을 만들어낸 그리스 시대도 매우 높게 평가했다. 여기에서부터 근대 유럽문명이 발전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에게 고대 그리스는 '유럽의 소년기'였다. 거기에서 나중에 성숙한 유럽이 성장한다고 믿은 것이다.
 
  그리스 조각과 문화, 그 시대에 대한 빙켈만의 이런 높은 평가는 당시 유럽의 지식인들과 교양 계층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의 책을 읽고 그리스와 그 문화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빙켈만의 주장이 이렇게 받아들여진 것은 당시 유럽 지식인 사회가 기독교에서 벗어나 세속적인 것을 지향하던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 유럽문명을 합리적이고 세속적인 것으로 만들려 했던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유럽 지식인들이, 빙켈만에 의해 종교적 색채가 벗겨진 그리스 미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는 1768년에 여행 중에 강도에게 살해를 당해 명성을 오래 누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후의 유럽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 문화 매니아들을 양산하며 그리스에 대한 유럽 사람들의 생각을 전면적으로 바꾸는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19세기의 그리스 문화 본격 수용
 
  유럽 사람들이 그리스 문화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19세기 초에 들어와서이다. 독일에서 오스트리아와 함께 가장 큰 나라였던 프러시아가 그 출발점이다. 당시 프러시아는 1806년의 예나 전쟁에서 나폴레옹에게 패배하여 프랑스의 통제와 간섭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크게 떨어진 국민들의 사기를 다시 북돋기 위해서 프러시아는 대대적인 개혁을 필요로 했다. 그리하여 농노를 해방하고 군사제도를 개혁하고 베를린 대학을 새로 창설하는 등 개혁 작업을 벌였다.
 
  그러나 개혁에는 정신적인 요소도 필요했다. 그들을 구원할 새로운 정신적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크리스티안 볼프 (Christian Wolff) 같은 철학자나 당시의 문교장관인 빌헬름 폰 훔볼트 (Wilhelm von Humboldt)가 그리스 고전을 프러시아의 중등학교인 김나지움의 교육과정에 집어넣은 것은 그 때문이다. 고전 공부를 통해 그리스 사람들을 위대하게 만든 자기 절제나 이상주의 같은 덕성을 가르침으로써 젊은이들의 마음을 고결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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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티안 볼프 (1679~1754, 독일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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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헬름 폰 훔볼트 (1767~1835)
 

  프러시아에서 시작된 고전 교육은 독일 전체로, 나중에는 유럽 다른 나라나 미국으로도 퍼졌다. 그리하여 그리스 고전이 서양 사람들의 교양 교육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제 서양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그리스 신화나 서사시, 희곡을 듣고 배우며 그것을 자신의 문화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스 문화를 서양 문화의 뿌리로 느끼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에 대한 관심이 커짐에 따라 유럽 여러 나라들은 19세기 초부터 다투어 그리스 유물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많은 조각 작품이나 유물들을 도굴하거나 헐값에 사들여 유럽으로 들여왔다. 그리고 그것을 새로 지은 대규모 박물관들에 전시했다.
 
  오늘날 유럽의 큰 박물관들 거의 대부분이 수많은 그리스 유물들을 수장하고 있는 것은 그 까닭이다. 그리스 문화유산을 자기네 것으로 여긴 것이다. 심지어 신전건물이나 성문을 통째로 뜯어와 박물관 안에 전시하는 곳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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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베를린의 페르가뭄 박물관 (Pergamum museum). 페르가뭄의 신전 제단과 바빌론 성문을 통째로 뜯어와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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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신전 양식으로 지은 영국박물관 (British Museum) 전경. 그런데 왜 한국인들은 '영국박물관'을 '대영박물관'이라고 부를까? 이상하지 않은가?

  또 1820년대에 그리스인들이 터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독립전쟁을 벌였을 때는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의 도움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에는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 (G. G. Byron)을 비롯하여 많은 유럽 사람들이 자원해서 참전했다.
 
  이렇게 유럽 국가들이나 사람들이 그 전에는 별 관심도 없던 그리스의 독립전쟁을 도와주고 목숨까지 내던진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자신들을 이제 고대 그리스의 계승자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 착각도 보통 착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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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런 (1788~1824)

  그래서 19세기 이후 그리스는 이제 서양의 역사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서양 문명의 근원으로서 철학, 문학, 역사, 의학, 과학, 미술 등 모든 문화가 그리스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7-11-01 오전 11:50:57

<4> 그리스문명에 대한 환상 ① <블랙 아테나>와 문화전쟁


2. 고대 그리스 문명에 대한 환상
 
  1) 고대 그리스 문명의 찬미
 
  고전 문명으로서의 그리스 문명
 
  고대 그리스라고 하면 사람들의 머리에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아마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이나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밀로스의 아프로디테 상 같은 것일 것이다. 사진이나 글로도 많이 소개되었고 그것들을 서양적인 아름다움의 극치로 배워왔기 때문이다.
 
  물론 파르테논 신전이나 아프로디테 상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파르테논 신전은 규모가 아주 크지는 않으나 단순함과 경건함을 갖고 있고 전체적인 균형이 잘 잡혀 있는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아프로디테 상은 아름다운 여인의 전형을 보여 주는듯한 뛰어난 조각이다. 단아하고 고귀하며 육감적이나 천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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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5세기 말,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위에 세워진 파르테논(Parthenon)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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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로스 섬에서 발견된 아프로디테(Aphrodite) 상. 보통 밀로의 비너스상이라고 불린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리스 문명은 많은 유적, 유물 외에도 신화나 문학, 정치, 철학, 과학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고 그것을 후대에 물려주었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그리스 문명을 로마 문명과 합쳐 고전 문명이라고 부른다. 고전적(classic)이란 문학작품에서 최상의 수준에 이른 것을 가리키는 말이니 이는 높은 수준의 그리스 문명이 서양 문명의 기본적인 틀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그리스의 찬란한 문화적 업적을 찬양하기에 바쁘다. 민주주의, 자유, 법의 지배 같이 서양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치들은 물론이고 미술, 문학, 신화 등 모든 것을 그리스에서 끌어 온다. 서양 근대 문명의 온갖 요소들을 고대 그리스와 연결시킨다. 심지어는 BC 4세기의 아테네에서 자본주의가 처음 발전했다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이다.
 
  이것은 서양 사람만이 아니다. 한국의 교과서들도 그런 점에서 별로 다르지 않다. 서양 사람들이 하는 대로 아테네 민주주의가 찬양되고, 그리스 문화의 모든 측면들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그리스 문명이 정말로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의 우리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지는 별로 진지하게 따져보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를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받아 들여도 되는 것일까. 서양 사람들의 주장을 과연 그대로 믿어도 되는 것일까.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서양 역사에서 그리스의 위치
 
  서양 역사에서 그리스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것이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물론 서양 사람들이 보다 오랜 역사를 지닌 오리엔트 문명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 영향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이다. 서양 문명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리스 문명이라고 믿는다.
 
  이렇게 그들이 그리스 문명을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 문명이 매우 독창적이며 인간중심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리엔트의 과학이 실용적인 기술에 그친 반면 그리스인들은 추상적인 원리를 추구했고 그리하여 인류의 과학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 미술에서도 사실주의적 태도가 나타났고 문학이나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뛰어난 성취를 보였다,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정치제도도 고안해 냈다, 이런 점들에서 매우 독창적이라는 것이다.
 
  또 오리엔트 문명이 종교에 매몰되어 있는 반면 그리스 문명은 신마저도 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을 정도로 인간중심적인 문명이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의 모든 문제에 대해 보다 합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고 그것이 다른 문명과의 차이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 문명은 서양 근대인들이 좋아하는 세속성과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중세 시대에 잊혀졌던 그리스 문명은 르네상스 시대에 재발견되었고 그리하여 서양 근대문명의 본질적 부분을 이루게 되었다. 그 뒤에 나타난 과학혁명, 계몽사상, 근대 민주주의 등은 모두 그것에 의존한 바가 크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사실 큰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리스 문명은 결코 독자적으로, 그리고 독창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리엔트 문명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 또 유럽이 그리스 문명의 독점적인 후계자도 아니다. 오히려 중세 이슬람 문명이나 비잔틴 문명이 그 직접적 후예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그리스적 전통이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근대 서양으로 이어진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서양인들은 이런 잘못된 주장을 계속하는 것일까. 그것은 근대 서양인들이 스스로를 위대한 그리스 문명의 계승자로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까지 올라가는 찬란한 역사를 통해 19세기 이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자신들의 존재를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고대 그리스는 근대 서양인들에 의해 작위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많은 면이 과장되고 미화되고 있으며 이데올로기적으로 왜곡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헬레니즘(Hellenism)이라는 이데올로기이다. 그러면 헬레니즘이 무엇인지 한 번 살펴보자.
 
  2. 헬레니즘 이데올로기란 무엇일까
 
  문화적 이데올로기인 헬레니즘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을 헬레네스(Hellenes)로 불렀다. 자신의 종족을 헬렌의 후손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헬레니즘이란 이 그리스인들을 하나로 묶는 의식을 의미한다. 그리스인과 그 문화의 독특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다른 종족이나 그 문화와 구분하려는 태도이다. 말하자면 그리스 종족중심주의, 그리스 문화주의를 의미한다.
 
  이런 생각은 그 전에도 존재하기는 했으나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기원전 5세기 후반 이후이다. 페르시아 전쟁에서의 승리와 그 후 그리스 세계의 전반적인 문화 발전이 그리스인들에게 강한 종족적, 문화적 우월감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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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시아 전쟁 후에 나타나는 도기 그림들에서는 대개 그리스인은 용감하게, 페르시아인은 겁먹고 위축된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리스인들은 자신을 둘러싼 주변 종족들을 '바르바로이'(Barbaroi)라고 불렀는데 이는 원래 그리스 말을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 단어가 단순히 그리스말을 못하는 사람을 넘어 야만인이라는 경멸적인 뜻으로 사용된 것이 바로 이 시기부터이다. 그래서 헬레니즘은 점차 그리스 문화를 최고로 생각하는 문화적 이데올로기로 변화한다.
 
  기원전 4세기의 아테네 웅변가인 이소크라테스가 그런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는 '우리의 도시는 지성과 웅변의 영역에서 모든 다른 (나라)사람들을 넘어섰고 그리스인이라는 말을 출생이 아니라 문화에 귀착시키게 만들었다. 우리는 그리스인이라는 이름을 (종족적)기원이 아니라 우리의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 부여한다'고 말하고 있다. 종족이나 출신이 문제가 아니고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리스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단한 문화적 자부심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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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4세기에 페르시아에 대항해서 그리스 세계의 단합을 주창했던 이소크라테스 (Isocrates, 기원전 436~338

  이런 생각은 나중에 알렉산더 대왕이 오리엔트를 정복하고 그 지역을 그리스화하는 과정에서 절정에 달한다. 그는 정복지의 수십 개소에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도시를 세웠다. 물론 대표적인 곳은 지금도 이집트에 남아있는 알렉산드리아 시이다. 그리고 그 도시들에 그리스인을 이주시키고 그리스 말과 함께 문화를 이식시키려고 시도했다. 물론 그런 문화 이식은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그리스인이 중심이 되는 상층계급의 문화로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리스 문화를 오리엔트 전역의 보편적 문화로 만들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강한 헬레니즘의 산물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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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더 상

  근대의 헬레니즘
 
  이렇게 헬레니즘은 원래 그리스인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헬레니즘은 그것보다 훨씬 폭이 넓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헬레네스 대 바르바로이로 구분한 그리스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18세기 이후의 유럽 사람들이 유럽 대 비유럽, 나아가 서양 대 비서양이라는 더 큰 틀로 확대했기 때문이다.
 
  세계를 그리스 문명의 전통을 계승했다고 생각하는 서양과 그렇지 않은 비서양세계로 나누어 차별화하기 위해서였다. 서양인들이 근대 유럽 문명을 그리스에서 시작되어 수천 년을 내려온 찬란한 문명으로 미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 문화는 고대 세계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합리적이고 세속적인 문화로 과장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태도는 그리스 문명을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은 독자적인 것으로 보려는 서양 역사가들의 태도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리스 세계와 오리엔트 세계를 명확히 나누어 그 사이에 마치 아무런 문화적 교섭도 없었던 것처럼 주장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백인이 중심이 되는 유럽 문명의 우월성과 순수성을 지키려는 것이다. 이런 일을 주로 담당한 학문이 고전학(古典學: Classics)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의 그리스 세계는 오늘날의 그리스 본토에 해당하는 곳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인들은 그 외에 지금의 터키 해안에서 에게해의 무수한 섬들,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 해안 지역과 시실리 섬에 흩어져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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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그리스 세계.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본토뿐 아니라 지금의 터키 서해안 지역과 에게해의 많은 섬들, 시실리섬, 이탈리아 남부지역, 그 외에 지중해 연안 각 지역, 흑해연안에 흩어져 살았다

  또 그리스와 오리엔트 세계는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으므로 문화적으로도 오랫동안 깊은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고전 그리스 시대의 많은 유명한 학자들이 그리스 동쪽의 섬들과 터키 해안 지역까지를 포함하는 이오니아 지방 출신인 것으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집트인, 페르시아인들의 이야기는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연극이나 철학책들에서도 자주 등장할 정도로 일상적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밀접한 문화적 관계에 있는 두 지역을 전연 다른 문화권으로 나누어 그 사이에 마치 아무 관계도 없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블랙 아테나>와 문화전쟁
 
  이와 관련해 1987년에 재미있는 책이 하나 나왔다. 마틴 버널(Martin Bernal)이 쓴 <블랙 아테나(Black Athena)>가 그것이다. 제목부터가 좀 묘한 느낌을 준다. 아테나 여신은 아테네시의 수호신이므로 백인의 용모를 가진 것으로 생각될 법 한데 마치 흑인인 것처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래는 아테나 여신이 이집트 북부의 사이스(Sais)라는 도시에서 숭배하던 네이트(Neith)신으로 그 신격이 옮겨온 것이라고 하니 아주 엉뚱한 이야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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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틴 버널 (Martin Bernal, 1937~ )의 블랙아테나(Black Athena)는 헬레니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아주 중요한 책이다. 현재 4권중 3권까지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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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집트의 사이스(Sais)시에서 믿어지던 네이트(Neith)신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은 고대 그리스 문명이 독자적으로 발전했다고 하는 서양학자들의 전통적인 주장을 반박한다. 그리스가 기원전 3,000년 이후 한때는 이집트의 식민지가 되기도 하는 등 여러 차례 침략을 받았고 그러면서 언어와 제도 등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또 페니키아인들로부터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언어만 해도 그리스 어휘의 1/3정도가 페니키아계, 1/5~1/4 정도가 이집트에서 온 것이며 그리스 신의 이름은 거의 이집트에서 온 것이고 여러 제도 등 문물도 거의 이집트에서 온 것이라는 것이다. 그 전에도 그리스사에서 기원전 8세기를 동방화 시대라고 하여 이집트 문화의 영향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는 있었으나 그것을 더 먼 고대까지 그리고 그 영향의 폭도 크게 확대시킨 것이다.
 
  이런 주장은 그리스 문명의 자생적인 발전을 주장하는 기존 학설에 도전하는 것이지만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근대 헬레니즘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오리엔트의 영향을 인정했고 그런 사실이 18세기까지도 받아들여져 왔는데 19세기의 유럽인들이 그것을 부인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세기는 인종주의가 한창 세력을 떨칠 때이므로 그 세계관에 맞추어 그리스 문명이 열등한 햄계나 셈계 인종에 속하는 이집트나 페니키아인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처럼 꾸몄다는 것이다. 그리스 문명을 아리아족의 순수한 토착 백인문명으로 포장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 책은 이렇게 그리스 문명의 성격과 관련해 매우 민감한 문제를 건드리고 있으므로 논란이 클 수밖에 없었다. 환영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리스 문명의 순수성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버널에 대한 인신공격은 물론이고 이것을 '문화전쟁'으로까지 확대 해석하여 거칠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이 책이 아주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버널의 주장들이 고고학적 증거보다 신화나 언어학에 많이 의존하고 있으므로 신뢰성이 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구가 더 진행될 필요는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다. 그리스를 연구한 19세기 서양학자들의 인종주의적 편견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리스 문화를 과대평가하고 고대 동부 지중해 지역의 역사에서 그리스사가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하도록 만든 배경에 인종주의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태도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나아가 이 책은 사람들이 고대 동부 지중해 지역에서의 폭넓은 문화교류에 눈을 돌리게 하는 데도 기여했다. 반드시 이집트에서 그리스로의 일방적인 영향이 아니라 하더라도 인접한 지역 사이에서의 문화적 교류를 부인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헬레니즘 이데올로기의 독성에 대한 해독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강철구 교수의 강의 동영상은 www.blog.daum.net/kangch07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7-10-30 오전 1:11:52

<3>  유럽중심적 역사의 해체를 위하여


4) 과장하거나 감추거나 왜곡시킨 세계사
 
  서양사 체계는 어떻게 짜여졌나
 
  이렇게 서양사는 기본적으로 근대에서의 유럽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형태로 짜여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근대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고대로까지 확장된다. 서양 사람들이 근대에 이룬 자신들의 우월성을 고대로까지 확대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럽은 고대부터 다른 대륙과는 무엇인가 달랐고 우월한 문화를 갖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것이 중세, 근대를 지나 현대까지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서양 고대사에서 중요한 것은 물론 그리스 · 로마 문명이다. 그리스는 인간중심적이고 합리적인 문명으로 인류사를 새로운 단계로 올려놓았다고 생각한다. 철학이나 문학, 예술, 정치 등 모든 면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루었고 그것이 근대 서양문명의 정신적 기초를 만들었다.
 
  로마는 대제국을 이루고 번영하는 경제와 높은 문화수준을 이루었다. 로마는 사유재산권을 확립함으로써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고 로마법을 통해 서양에 법의 지배를 가져오는 데에도 큰 기여를 했다. 로마의 공화정도 근대 유럽의 민주정치 발전에 공헌을 했다. 기독교의 수용도 그 후 유럽 문화의 발전과 관련해 중요한 요소이다.
 
  중세에서는 자유로운 도시의 성립이 중요하다. 그것이 근대 유럽에 정치적 자유를 가져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을 성장시킴으로써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데에도 중요한 기여를 했다.
 
  중세에는 기독교가 중요하나 근대에 들어와서는 세속적 합리성이 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먼저 14-16세기의 르네상스는, 중세의 기독교 문화에서 벗어나 세속적인 고대 문명을 재발견함으로써 근대 유럽문명의 모태를 만든 사건으로 높이 평가된다. 그것이 근대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16세기의 종교개혁도 중요하다. 그것이 개인성의 감각을 가져다주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신교파의 하나인 칼뱅파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발전시킴으로써 자본주의의 정신적 기초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의 발전은 유럽인들의 창의성, 합리적인 태도, 근검절약에 의한 자본축적과 관련하여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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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개혁을 시작한 독일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 1546)

  17세기의 과학혁명은 근대 과학을 발전시킨 혁명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과학의 발전과 그에 다른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근대에 와서 유럽이 다른 세계보다 우월해지는데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계몽사상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유럽인들을 무지와 몽매, 종교의 광신에서 벗어나게 하여 세속적이고 합리적이며 자유로운 세계관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럽사회를 더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형태로 조직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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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그림의 하나로 알려진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 1831년작. 캔버스에 유채 260 ×325cm. 루브르 미술관 소장, 그러나 이 그림은 프랑스의 1830년 혁명을 그린 것이나 보통 프랑스 대혁명을 그린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

 
프랑스 혁명은 유럽의 정치와 사회, 경제, 문화 모든 것을 근대적인 형태로 재조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다. 말하자면 프랑스 혁명은 근대사로 넘어가는 분수령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산업혁명은 기계와 동력을 결합시킴으로써 인간의 물질적 생산력을 크게 확대했고 현대의 물질문명을 이루는 기본적인 바탕을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이 모든 사건들은 전적으로 유럽인의 창의성과 노력의 산물이며 이것들에 의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찬란한 서양문명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사실의 과장, 은폐, 왜곡
 
  위에서 말한 사건들은 서양 역사가들에게 유럽중심적 서양사나 세계사를 쓰기 위해 반드시 고려해야만 하는 전략적인 거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설명들이 반드시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이 과장, 은폐, 왜곡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경우들을 하나씩 들어 보자.
 
  프랑스 혁명은 그 역사적 의미가 과장된 좋은 예의 하나이다. 전통적인 서양역사가들이 프랑스 혁명의 의미를 크게 부풀려 근대 세계사의 정점에 놓으나 그것은 실제의 역사 현실과는 잘 맞지 않는다.
 
  혁명은 공화정을 수립했으나 민주주의적은 아니었고 초기부터 공포정치의 독재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혁명이 봉건적 지배계급을 일소한 것도 아니다. 프랑스의 토지귀족 계급은 나폴레옹 시대인 1806년 이후 다시 힘을 되찾았고 19세기 내내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혁명과 자본주의의 발전은 별 관계가 없다. 혁명이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근대적 요소들도 장기적인 과정의 일부이다.
 
  또 프랑스는 전 세계에 자유와 평등을 가져오기는커녕 1960년대까지도 저질의 식민주의를 통해 알제리, 베트남 등 식민지인의 자유를 빼앗았고 그들을 노예화했다. 프랑스혁명의 세계사적 의의를 자랑하려면 이런 부끄러운 사실들도 정당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은폐되고 있는 대표적인 예가 인종주의이다. 사람을 우월한 인종과 열등한 인종으로 구분하여 사람 사이의 지배와 예속을 합리화하는 이념인 인종주의는 그야말로 서양 사람들의 창조적인 발명품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비유럽세계의 식민지인을 죽이거나 노예화하고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인종주의는 독일의 유대인 학살의 밑바탕에도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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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인의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 : 그 바탕에는 인종주의가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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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치 독일의 참혹한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 (Holocaust))도 인종주의의 기초해 있다.

  이렇게 인종주의가 도덕적으로 용납되기 어려운 이념인 것을 잘 알므로 그들은 그것을 철저히 은폐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전문적인 책 외에는 잘 다루지 않는다. 서양인이 쓴 개설서에서는 뺀 경우가 많고 집어넣는 경우에도 비중을 상당히 축소시키고 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서양 사람들의 생각에서 차지하는 인종주의의 큰 비중을 생각한다면 이는 매우 잘못된 일이다.
 
  식민주의 문제는 왜곡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유럽중심주의적 역사가들이 식민지의 억압이나 착취 같은 명백한 부정의까지도 가능한 한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식민 지배가 식민지에 피해를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는 식으로 접근한다.
 
  발전된 근대문화와 과학기술을 이식해 주었다는 것이다. 서양인들이 식민지배를 하지 않았다면 과거의 식민지역인 제3세계는 지금보다도 더 못한 상태에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 식민지배는 서양 식민자들만의 책임이 아니라 식민지인의 협력에 의해서만 가능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식민지배의 책임을 식민지인과 나누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이 문제들에만 국한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서양사의 거의 모든 주제들에 이런 요소들이 숨어 있다. 따라서 이런 문제들이 없나 서양사의 서술들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불균형한 세계사
 
  유럽사를 미화한다는 것은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비유럽을 낮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 문명을 치켜세움에 따라 그 상대방인 오리엔트 문명은 저평가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리스 문명은 자유롭고 개방적인 문명으로, 다른 쪽은 전제적, 노예적 문명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 후 전체 역사에 걸쳐 유럽과 비유럽을 구분하는 경계선이 된다. 유럽은 고대에서부터 자유로웠다는 것이다.
 
  또 그리스를 잇는 헬레니즘적 문명의 의미와 비중은 축소된다. 알렉산더에 의해 그리스 문명이 오리엔트문명과 결합함으로써 고전 그리스 문명의 퇴화단계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헬레니즘적 문명은 고전기에 못지않은 문화수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에 의해 계몽된 2류 문명으로 부당하게 격화된다.
 
  중세 시대에 들어오면 유럽만이 부각되고 비잔틴 제국이나 이슬람 문명권의 비중은 축소된다. 실제로 중세시대에 이들 지역의 문화수준이 유럽보다 훨씬 높았는데도 그렇다. 그리하여 고대 그리스 문명의 전통을 물려받은 비잔틴, 이슬람, 유럽 문명 가운데 그리스와의 연결고리가 가장 약한 유럽이 그 권리를 독점적으로 주장하게 된다. 오늘날 근대 유럽문명을 그리스 문명과 직접 연결시키는 일반적인 태도는 이런 역사왜곡의 직접적 결과이다.
 
  15세기 말 이래 유럽인들이 정복한 아메리카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던 곳같이 취급된다. 그리하여 유럽인의 발견과 정복에 의해서만 세계사 속에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도 마찬가지이다. 아프리카는 문명이 없는 야만적인 곳으로 '검은 대륙'으로 규정된다.
 
  아시아라고 다를 것도 없다. 아시아는 오리엔탈리즘에서 규정하고 있는 대로 야만적이고 무지몽매하고 법과 윤리, 창조성도 없는 정체된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쓴 세계사라는 것이 얼마나 뒤틀리고 불균형한 것이 될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런 서양사 지식은 서양 사람의 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비서양 세계의 역사인식에까지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 세계사의 인식체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서양 역사학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양사 나아가 세계사의 많은 부분이 이렇게 서양학자들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
 
  5) 서양 역사학을 신주단지 모시듯 해서야
 
  유럽중심적 역사의 해체를 위하여
 
  1990년대에 들어와 유럽중심적으로 씌어진 세계사를 해체하고 세계사의 바른 모습을 회복시키려는 노력이 점차 본격화하며 다양한 연구 성과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잘못 알려지거나 의도적으로 왜곡된 아시아의 모습을 고치는 일도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아프리카나 라틴 아메리카로도 확대되고 있다.
 
  이런 작업은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 중심의 세계사를 다중심주의로 대치하는 작업이다. 다른 말로 하면 유럽을 세계사의 중심 지위에서 밀어내어 다른 지역과 역사적 비중에서 비슷한 지역사로 낮추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이전에는 유럽이 세계사의 중심이 아니었으므로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이런 작업은 세계사를 바르게 쓰기 위해서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유럽중심주의적 서양사나 세계사가 엉터리로 적당 적당히 꾸며낸 그런 역사서술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난 200년에 걸쳐 서양 역사가들이 사실들과, 그것을 설명하는 수많은 이론들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쌓아 올린 것이다. 그러니 간단하게 허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해체를 위해서는 유럽중심주의적 세계사의 한 가운데를 흐르는 기본적인 생각의 틀이나 이론들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에 맞추어 온갖 역사적 사실들을 재해석하고 또 그것을 전체적으로 체계화해야 한다. 그러니 그 작업이 쉬울 리가 만무하다.
 
  더구나 그 대안이 되어야 할 비서양세계의 학문 체계와 전통은 식민지 시대를 지나며 거의 무너져 버렸다. 우리 조선시대의 유교를 중심으로 한 학문전통이 흔적만 남은 채 거의 사라져 버린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는 비서양세계 다른 나라의 경우도 비슷하다.
 
  사실 지금 시작되고 있는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도 대체로 제3세계 출신이기는 하나 서양학자들이 주도하고 있고, 서양 학문체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비서양 세계가 아직 지적인 독립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런 지적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는 일은 장기간에 걸쳐 큰 노력이 필요한 어려운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서양 학자들의 권위에 감연히 맞서야
 
  그렇다고 이런 일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쉬운 일부터 차근차근 해나가면 된다. 우선 서양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는, 식민주의 문제 같은 것이 대표적이지만, 이해관계에서 차이가 나는 부분이 많다. 따라서 뚜렷하게 관점이 달라질 수 있는 이런 곳에서부터라도 서양학자들의 기존 해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우리의 관점을 세울 필요가 있다. 그 위에서 다른 작업들이 차츰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또 당장은 서양 사람들이 해 놓은 자기반성의 수준이라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 아직 우리의 수준이 그 정도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책인 경우는 좀 나으나 개설서 같은 일반적인 서양사 책 가운데에는 이미 서양에서도 수십 년 전에 페기 처분된 이론들이 실려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물론 이는 그 동안 우리 연구자들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과도 관계가 있으나 학문에서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제의식이 비교적 적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서양사에만 한한 것은 아니다. 우리 학계 전체가 대체로 이론이나 이데올로기 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다. 또 서양학자들의 주장을 옳은 것으로 생각하는 한 그럴 필요 자체도 없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자주적인 학문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르페브르나 브로델, 홉스봄 등은 서양에서 대표적인 역사가로 평가 받는 사람들이다. 또 그들이 수준 높은 일급 학자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의 주장이 반드시 보편타당성을 갖는 것도, 옳은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의 인식이나 판단은 다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의 주장이나 이론에 지레 겁을 막고 주눅이 들 것이 아니라 감연히 맞서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물론 그러려면 보다 열심히 공부함으로써 그들의 지적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어려운 일이기는 하나 노력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 자신의 학문적 전통을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서양학문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시대는 이제 영원한 과거로 사라져야 한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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