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프레시안 2008-03-28 오전 8:15:11


<31> 계몽사상의 재조명 ④ 문명과 진보의 이데올로기


문명과 야만
 
  우리는 오늘날 '문명'이라는 단어에 별 주의를 하지 않고 보통명사로 사용한다. 그러나 이것은 유럽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고 만들어진 단어이다. 근대 유럽인들이 자신의 문화를 다른 지역의 문화와 구분되는 독특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양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우월감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문명'이라는 말에 대한 그런 애착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 사람들이 요즈음에도 즐겨 쓰는 '프랑스 문명'이라는 말은 거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도 지난번 이라크를 침공할 때에 '문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취지의 말을 했는데 이것도 같은 맥락이다. 서양 '문명'이 이라크의 '야만'을 벌주겠다는 이야기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미국의 이라크 침공. 부시가 사용하는 어법에서의 문명과 야만의 2분법은 서양 사람들에게서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갖는 것이다.

  문명과 야만의 구분법은 유럽인의 해외팽창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들은 아메리카나 다른 지역에서 많은 다른 종족들을 만났는데 그 가운데에는 문자를 사용하지 않고 정부나 계급구조를 갖고 있지 않으며,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들의 문화수준이 매우 떨어져 보였으므로 그들을 야만인으로 부른 것이다.
 
  문명은 이들과 자신을 구분하기 위해 프랑스인들이 1560년대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개념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특정한 정치형태를 갖고 있고, 예술이나 문학에서 어느 수준에 이르고, 상대적으로 우월하게 보이는 관습이나 도덕을 갖고 있는 상태를 의미했다.
 
  그것은 16세기 이후에 씌어진 많은 대중적인 여행기들의 영향도 받았다. 이 책들 가운데에는 비유럽 지역 사람들의 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풍습들을 과장적으로 그린 것들도 많기 때문이다.
 
  계몽사상가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유럽문화가 매우 높은 수준에 도달했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믿었으므로 이런 구분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유럽이 최고의 문명 단계에 있고 다른 지역의 사회들은 그 수준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다 야만적인 상태에 있었다. 물론 그 기준은 각 문화에서 이성의 힘이 얼마나 작용하는가의 문제였다.
 
  이때 야만인의 무지는 날 때부터 그런 것이 아니라 환경의 탓이었다. 먹고 살기 위해 힘든 노동을 할 필요가 없는 너무 풍족한 자연환경이 사람을 게으르게 하고 감각적인 쾌락만을 추구하게 하여 정신의 성장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 나쁜 기후나 아시아에서와 같이 전제적인 정부도 마찬가지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이렇게 문명과 야만의 차이는 전적으로 환경의 탓으로 인간성의 질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사람의 본성은 언제 어디서나 다 똑같으므로 계몽되고 교화되기만 하면 문명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문명과 야만을 보편적 인간성의 관점에서 보고 있기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리상의 이야기이다. 실제로 그 원리가 현실화할 때에는 매우 달랐다.
 
  역사의 진보
 
  계몽시대에는 역사관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물론 대부분의 계몽사상가들은 역사를 도덕교육이나, 정치에서의 교훈을 위한 지침 정도로 생각했으므로 과거 자체에 큰 가치를 두지는 않았다.
 
  또 역사는 주로 우연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볼테르 같은 사람의 태도가 대표적이다. 그는 역사적인 사건들은 우연적인 것이므로 그 원인을 설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미래를 예측할 수도 없다고 믿었다.
 
  그들은 역사가 반드시 아름답다거나 바람직한 것으로 믿지도 않았다. 역사 속에서 전쟁이나 기근, 전염병, 화재 같은 참화나 범죄, 불운을 발견하는 것은 너무나 손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어떤 일정한 변화의 모습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계절의 변화와 같은 순환이었다. 한 왕조가 탄생, 성장, 멸망하고 뒤를 이어 다른 왕조가 같은 길을 밟는 것은 그런 순환의 과정을 잘 보여주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1666년의 런던 대화재. 런던시의 5분의 4를 태워버린 런던 대화재 같은 사 건은 당시대인에게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이끌리는 역사의 불가측성을 잘 보여주 었다.

  18세기 말에 와서 이런 태도가 달라졌다. 유럽사회에서 갑자기 기술이 발전하고 물질적으로 풍요해지며 인간의 삶이 이전 시기보다 훨씬 나아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역사가 진보한다는 생각이 나타났다. 영국의 애덤 퍼거슨, 프랑스의 튀르고나 콩도르세 같은 사람들이 그 선구자이다.
 
  퍼거슨과 튀르고는 인류가 사냥과 채취사회에서, 목축, 농업, 상업사회로 단계적으로 발전한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유럽은 그런 면에서 최고의 단계에 도달한 상업사회였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야 예술과 과학이 발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아직 어떤 법칙에 따른 발전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콩도르세에 오면 달라진다. 그는 <인간 정신 진보의 역사적 스케치를 위한 초안>이라는 글에서 인간 정신은 감각에서 오는 정보를 무한히 받아들일 수 있으므로 지식을 무한하게 축적할 수 있다. 따라서 지식에 관한 한 인간은 진보하며 개인과 함께 사회도 진보한다고 믿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콩도르세(Marquis de Condorcet, 1743~1794) 초상

  그는 역사를 움직이는 자연법칙을 믿었고 그것은 자연계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엄격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제 역사는 설명되고 예측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진보의 관념이 보다 확실해지고 그것이 진보사관이라는 하나의 역사관으로 자리 잡은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산업화에 따라 물질적인 진보가 뚜렷하게 눈에 보이고 이제 인간사회는 과거와는 너무나 다른 곳으로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럽 사회의 이러한 진보는 비유럽사회가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다는 생각을 강화시켰다. 19세기에 들어와 아시아 정체성론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이유이다.
 
  보편사로서의 유럽사
 
  18세기의 유럽인들에게는 문명과 진보를 보여주는 유일한 곳이 유럽이었으므로 유럽이 세계사의 중심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유럽의 역사는 유럽만의 역사가 아니라 인류 보편의 역사가 될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레 비유럽지역의 역사는 주변화, 파편화되었다. 이런 생각을 가장 강력하게 대변한 것이 헤겔이다.
 
  이렇게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한 진보의 운동이라는 생각은 모든 문화적 단위가 그 나름의 문화적 동력에 의해 움직인다는 생각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다른 지역과 사회의 문화적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편사에 대한 이런 주장은 비유럽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억압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역사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헤겔은 '세계정신의 발전을 이끌어가는 그런 민족이 갖고 있는 절대적인 권리에 비해 다른 민족의 정신은 아무 권리도 갖지 못한다'고 말함으로써 이런 생각이 갖고 있는 제국주의적 측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계몽사상의 보편주의에 대한 비판은 당대에 이미 나타났다. 독일 철학자 헤르더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문명'에 대한 반대말은 '야만'이 아니라 '다른 문화'라고 생각했다. 어떤 문화도 다 고유의 독자적인 가치를 갖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헤르더 (Johann Gottfried von Herder, 1744~1803) 초상

  그는 '우리의 철학을 특징짓는 일반화의 열기가 다른 사람들이나 나라, 시민이나 그 사람들의 자유에 대한 침해를 은폐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보편적인 가치로서의 계몽사상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원주민들의 '진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유럽 문화를 강제하며 식민주의를 정당화한다는 점에서도 계몽사상을 강력하게 거부했다.
 
  또 인간성이 역사, 지리, 기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도 반대했다. 모든 사람들의 집단은 살아있는 문화적 공동체로서 그들의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는 계몽사상이 다른 문화에 대해 보이는 억압성에 대해 정당한 경고이다. 그럼에도 그의 비판은 대다수의 계몽사상가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8-03-26 오전 7:32:34


<30> 계몽사상의 재조명 ③  계몽사상과 합리성


17세기 유럽인이 맞은 정신적 위기
 
  계몽사상이 강조하는 이성과 합리성은 16세기 이래 유럽이 경험한 커다란 지적 변화의 산물이다. 1519년에 마르틴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은 기독교 세계를 크게 분열시켰다. 그 결과 근 천 년 이상 카톨릭 교회가 누려오던 절대적인 지적 권위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또 16세기 이후 아메리카나 아시아와의 접촉을 통해 유럽인의 시야는 크게 확대되었다. 성경이나 고전을 통해 알았던 세계는 이에 비하면 매우 협소한 것이었다. 17세기에 들어와서는 과학의 발전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통해서 본 우주는 지금까지 생각해온 것과는 전연 다른 별들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달 너머에 있는 우주는 변화하지 않는다는 전통적인 생각을 깨뜨린 것이다.
 
  그래서 유럽의 지식인들은 지금까지 절대적으로 믿어 왔던 모든 전통적 지식의 확실성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이제 모든 지식이 의심의 대상이 된 것이다. 르네 데카르트 같은 17세기 프랑스 철학자가 기존의 모든 지식을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재검토하려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수학의 공리와 같은 가장 확실해 보이는 원리 위에 지식을 세우려고 한 것이다. 당시의 많은 사상가들이나 철학자들이 수학을 연구하고 그것을 매우 중시한 것은 이렇게 수학이 가장 이성적이고 확실한 학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1596~1650)

  새로운 사조의 발전에 있어 데카르트주의의 역할은 중요하다. 데카르트가 거의 무신론적이며 기계론적인 철학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것을 1640년대 말부터 널리 확산시켰다. 1650년대부터는 갈릴레오의 노력에 의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체계가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
 
  1687년에 뉴턴이 발표한 만유인력설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본격적으로 거부하는 것이었다. 변화하는 지상계와, 에테르라는 물질로 만들어져 변화하지 않는 천상계의 둘로 나뉘어졌던 우주가 이제 중력의 법칙이라는 수학적 원리에 의해 하나의 세계로 통합된 것이다. 우주를 하나의 큰 기계로 보는 생각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1700년경이면 지식인들 사이에서, 데카르트가 차지했던 자리는 뉴턴에게 넘어갔다.
 
  기계론적 철학이나 세계관이 점차 확산되며 유럽은 17세기 중반부터 전례 없는 지적 혼란에 빠진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믿는 전통적인 스콜라적 학문체계와 새로운 학문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럽인들에게 하나의 큰 정신적 위기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이 17세기말에 계몽사상이 나타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래서 이 시기를 서양사의 가장 결정적인 지적 변화의 시기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18세기 계몽사상의 발전
 
  계몽사상의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나라는 영국이다. 여기에서는 제임스 2세가 다시 친카톨릭 정책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으려고 자유주의적 프로테스탄트들이 주도한 1688년의 명예혁명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제임스 2세 (James II, 1633~1701)

  이 혁명을 통해 영국은 절대왕정을 끝냈다. 다음 해의 권리장전을 통해 새로 즉위한 왕이 의회의 우위를 인정함으로써 그 사회적 기반은 좁지만 대의제 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또 인신보호령(habeas corpus)을 통해 개인의 신체적 자유와 상당한 정도의 종교적 관용도 허용받았다. 표현과 출판의 자유도 확보했다. 1695년에 책을 출판하기 전의 사전검열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혁명에 이론적으로 크게 기여한 인물이 존 로크이다. 그는 사회계약설을 통해 국가의 주권이 인민에게 있으며 통치자가 위임된 것 이상의 권한을 행사하는 경우 인민에게 저항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시민정부2론>은 교육 및 인식론에 대한 다른 글들과 함께 18세기에 북아메리카 식민지와 프랑스에서 널리 읽혔고 계몽사상의 성경이 되었다. 그의 사상은 나중에 나온 루소의 사회계약설과 함께 미국독립과 네덜란드 혁명, 프랑스 혁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럽 대륙의 지식인들은 이제 자기네 나라들이 영국에 비해 얼마나 뒤떨어진 나라이고 불합리한 나라인가를 잘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18세기의 계몽사상은 친영국적 풍조와 긴밀하게 결합해 있다. 영국이 그들에게 근대적이며 과학과 상업이 발전하고 이미 대의정부를 가진 선진국가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영국을 소개하는 데 가장 열심이었던 사람이 볼테르이다. 정부를 풍자했다가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된 경험도 있는 볼테르는 1720년대 말에 영국을 방문하고 쓴 <영국인에 관한 편지>에서 '모든 예술이 존중받고 보답을 받는 나라로 …… 누구나 굴욕적인 두려움 때문에 제지받지 않고 자유롭고 고귀하게 생각할 수 있는 곳'이라고 영국을 찬양하고 있다. 그는 뉴턴의 이론을 쉬운 말로 소개하는 데도 큰 힘을 기울였다.
 
  그가 다방면으로 개혁을 이야기하기는 했으나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종교적인 문제였다. 그는 절대왕정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교황의 전횡이나 대중들이 가져올 사회적 불안정보다는 나은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1750년경이 되면 파리가 계몽사상의 수도가 되었다. 디드로나 루소 같은 많은 능력 있는 사람들이 볼테르의 뒤를 따르며 그것이 살롱이나 프리메이슨 조직, 각종 학회를 통해 대중적인 지지기반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프랑스 절대왕정의 독선, 교회의 부패와 비리, 그리고 사회 안의 불합리성을 비판하며 프랑스 사회의 개혁을 외쳤다. 여기에는 금서 출판에 매달린 많은 출판업자들도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은 독일이나 이탈리아 등 주변국가의 지식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계몽'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전유럽적인 현상으로 만들었다.
 
  계몽사상은 디드로가 주도해서 만든 백과사전 안에 집대성되었다. 18세기 프랑스에서 계몽사상가라고 하면 이 책에 기고한 사람을 의미할 정도로 거의 모든 계몽사상가들이 이 작업에 참여했다.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돌바흐, 튀르고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디드로 (Denis Diderot, 1713~1784)

  1751년에 첫 권이 출간되고 그 후 29년에 걸쳐 36권이 출판되었는데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최신의, 가장 합리적이고 계몽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총 2만5천질이 팔려 사업적으로도 성공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새로운 지식에 목말라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교회는 이 책을 '사탄의 성경'으로 몰아붙이며 금서로 만들려고 애썼으나 결국 실패했다.
 
  계몽사상은 18세기 마지막 4분기에 들어서면 보다 급진적이 된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공화국'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가 된다. 이에는 미국이라는 최초의 공화국이 출범한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1780년대 말에 프랑스혁명이 발발할 때쯤이면 볼테르 같은 사람의 주장은 이미 너무나 온건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근대 자연법과 자연권
 
  계몽사상가들의 가장 큰 업적의 하나가 자연법과 자연권을 발전시킨 것이다. 17세기에 그로티우스에 의해 근대적인 성격을 갖게 된 자연법은 계몽사상 시대에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인간의 공동적 삶을 위한 편의성이나 사회성에 기초를 두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인간사회를 지배하는 원리를 만들어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자연세계가 어떤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생각도 여기에 영향을 미쳤다.
 
  18세기 사람들은 국가 사이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자연법으로서의 국제법을 만드는 데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것이 승자와 패자에게 공통의 해결책을 제시해 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정치권력의 새로운 정당화를 위해 동원된 자연법이 사회계약설이다. 국민의 의사라는 합리적 기반 위에서 국가권력을 설명하려 한 것이다. 물론 토마스 홉스 같은 사람은 그것으로 절대왕정을 옹호했지만 로크나 루소는 왕의 절대주의를 부인하는 논리로 사용했다.
 
  상업의 자유도 자연법에 속했다. 그것이 다른 지역 사이에 유무상통하게 함으로써 거래 당사자들 서로에게 도움이 되게 만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럽인들은 타국을 자기 마음대로 여행하거나 교역을 할 자유가 있다고 믿었다.
 
  사유재산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사회를 만드는 목적의 하나는 그들이 확보한 것, 또 확보할 수 있는 이익을 자신에게 확인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타인이 자신의 소유를 방해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사유재산이 신성하다는 생각은 여기에서 출발했다.
 
  조세도 사회의 자연적인 일부로서 지배자에게 바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호이익과 자기보존을 위한 것이다. 세금이라는 형태로 자신의 것의 일부를 포기하는 데 동의하는 것은 전체 사회의 보존과 유지를 위해서이지 그 이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적 가치도 자연법에 속했다. 아름다움은 재산의 소유가 공리성을 만드는 것과 똑 같이 주체의 존재론적 가치를 결정짓는 자산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고전 경제학에서 균형과 공리성이 중요한 것과 같이 여기에서는 비례, 균형, 세련이 중요했다. 이외에도 많은 자연법들이 만들어졌다.
 
  자연법의 발전과 함께 자연권 사상도 발전했다. 기존의 권력이나 종교, 관습에 대한 비판 과정에서 자연히 개인에게는 신으로부터 부여받고 누구에게도 침해 받아서는 안 되는 본래적인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는 처음 종교의 자유에서 비롯된다.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치열한 싸움이 신앙의 자유를 매우 중요한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양심의 자유, 출판의 자유, 인신(人身)의 자유라는 생각도 차츰 성장했다. 독립한 미국의 권리장전에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라는 자연권이 들어간 것이나 프랑스 혁명 시기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이에서 비롯한 것이다.
 
  자연법과 보편성
 
  근대 자연법과 자연권의 발전은 서양 근대사회의 기초로서 매우 중요하다. 보다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8세기 후반에는 유럽 전체에 걸쳐 국가, 사회를 합리적으로 개혁하려는 수많은 제안과 시도들이 나타났다. 행정, 관세, 의회, 유대인의 조건 개선, 교회와 학교의 개혁, 축산 방법의 개량 등 갖가지 주제가 포함된다.
 
  또 가장 혹독한 것으로 생각된 재판과정에서의 고문이나, 증인도 없이 할 수 있는 종교재판의 문제점을 개혁하려는 시도도 나타났다. 그 결과 프리드리히 2세는 1740년에 고문을 금지시켰으며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도 18세기 말에는 이를 뒤따랐다. 마녀사냥은 영국에서는 1712년에, 프랑스에서는 1718년에, 독일에서는 1749년에, 그리고 스위스에서는 1782년에 금지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중세 말 마녀 사냥. 이단자로 판결이 되면 마녀로 몰려 화형이 된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며 이는 특히 비서양 세계에 대해 그렇다. 몇 가지만 살펴보자. 사유재산권은 자본주의가 형성되던 근대초의 재산계급의 이익을 잘 대변한 것이다. 따라서 유산계급에게는 유리하나 무산계급의 권리는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이 비서양세계에 적용될 때이다. 로크나 후대의 자연권론자들은 유럽인의 사유재산권은 신성시했으나 비유럽 사람들의 재산권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아메리카의 경우에 그 논리는 거꾸로 원주민들의 재산권을 박탈하는 데 이용되었다.
 
  자연법으로서의 상업의 자유는 유럽인들의 통상확대에는 도움이 되는 논리였지만 비유럽인에게는 제국주의적인 논리 이외의 것이 아니었다. 제멋대로 다른 나라에 가서 문호개방과 통상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말을 듣지 않는 경우에는 무력을 사용했다.
 
  인간의 몸의 미학적 가치도 18세기 말이면 인종주의의 영향을 받아 인종적, 사회적 위계 속에서 개인의 위치를 결정짓는 기준이 되었다. 그리하여 백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흰 피부, 두개골의 모양, 인체의 비례가 사람들의 미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서의 자연법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18세기의 자연법은 모든 인류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8-03-21 오전 7:40:25

 

<29> 계몽사상의 재조명 ② 계몽시대는 세속화된 시대였나

 

신정론과 이신론
 
  일반적으로 계몽사상은 유럽인들이 종교에서 벗어나 세속적인 사고를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주장된다. 기독교의 종교적 독단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킴으로써 보다 자유롭고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사실 많은 지도적인 계몽사상가들이 -특히 영국과 프랑스에서- 기독교 신학의 불합리성과 교회의 부패를 통박하고 비판했다. 따라서 그런 글들만을 읽으며 그런 인상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실제로 유럽인들은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종교 문제로 심각한 고뇌를 겪었다. 각 나라에서 카톨릭과 신교 사이에 치열한 다툼이 벌어졌고 대량학살 사건들도 일어났다. 또 17세기에 들어와서는 30년 전쟁 같은 국제적인 전쟁으로 번지기도 했다. 이런 피비린내 나는 싸움과 공포 속에서 그들은 과연 신이란 무엇인지 기독교는 무엇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1755년에는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났다. 도시가 거의 파괴되고 수만명의 사망자가 났다. 사람들은 이 비극적 사건과 관련해 악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만약 신이 이런 악을 예비하였다면 그 신은 어떤 신인가 하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리스본 대지진 (1755년)으로 도시인구 23만명 중 6~1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그들은 악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것을 이성적인 종교나 은혜로운 신의 가능성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숙고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신정론(神正論)과 관련된 논의이다. 이렇게 17, 18세기의 일부 지식인들이 신의 존재와 권능에 대해 회의를 느낀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그들을 기독교에서 벗어나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종교의 세속화를 주장하는 또 다른 논거는 이신론(理信論: deism)의 존재이다. 이신론은 초월적이며 계시적인 신을 거부한다. 신을 이 우주의 창조주로 인정은 하되 그 후의 운행에는 관계를 하지 않는 존재로 본다. 마치 시계를 만들어냈으나 그 후 시계의 작동에는 관계 하지 않는 시계공의 역할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신론자들은 예수의 부활 같은 것을 믿지 않았고 또 카톨릭에서 이야기하는 기적 같은 많은 초자연적 현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무신론 내지 범신론과 가까웠으므로 기독교인들이 기존 교회의 권위를 무너뜨릴지도 모를 이신론에 대해 많은 두려움을 품었을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이미 16세기부터 그런 두려움이 나타난다. 1654년에는 프랑스의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장 필로라는 사람이, 카톨릭 개혁가인 얀센 등 7명이 프랑스의 카톨릭을 파괴하고 그것을 이신론으로 대치하기 위해 1621년에 비밀모임을 가졌다고 주장한 일도 있다. 이신론자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얀센 (Cornelius Jansenius, 1585~1638), 벨기에 루뱅 대학 교수. 얀센주의를 만들었다.

  17세기 말의 프랑스 위그노인 삐에르 벨은 그의 시대가 '자유사상가들과 이신론자로 가득 차있다'고 말하고 있다. 영국에서도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국교회 목사들이 이신론 운동의 존재를 점점 확신한 것 같고 이탈리아 등 다른 유럽 지역에서도 이에 대한 두려움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신론자들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정말 그렇게 두려움을 느낄 만 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것이 하나의 커다란 세력이나 운동으로 성장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또 일관된 이론체계를 발전시킨 것도 아니다. 사람들마다 견해가 조금씩 다르다.
 
  이신론자로 널리 알려진 사람들은 영국의 존 톨랜드, 마튜 틴달, 앤토니 콜린스와 프랑스의 볼테르, 몽테스키외, 디드로 같은 사람들이다. 이 외에 사료에서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을 몽땅 합쳐 보아야 20명이 채 안된다. 무신론자는 더 적어서 7명 정도이다. 그러니 이 적은 숫자의 사람들이 기독교를 파괴하는 운동을 일으켰다는 것은 별로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이신론의 존재를 터무니없이 과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돌바흐(Baron d'Holbach, 1723~1789), 유럽에서 최초로 스스로를 무신론자로 일컫은 사람 중의 한 명이다.

  현대 서양역사가들도 이신론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그래서 이신론자들의 수가 매우 많았던 것처럼 주장한다. 이렇게 이신론이 중요하게 취급된 것은 이신론이 근대성의 지표라고 할 세속성을 강화시켰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사료에 기초하지 않은 근거 없는 주장에 불과하다.
 
  종교적 관용
 
  계몽사상가들은 종교적 관용을 부르짖었고 그래서 서양에서 종교의 자유를 가져오는 데 크게 공헌한 것으로 주장된다. 1762년에 '관용론'을 써서 상당한 영향을 미친 볼테르 같은 사람이 특히 부각되는 이유이다.
 
  볼테르가 그 글을 쓴 것은 칼라 사건 때문이다. 1761년에 프랑스 남부 툴루스의 위그노파인 칼라라는 포목상인의 집에서 맏아들이 목을 매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아마 자살을 한 것 같으나 당시에는 아들이 카톨릭으로 개종하려 하자 아버지가 그것을 막기 위해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때는 위그노가 탄압을 받을 때이므로 칼라는 무죄를 주장했으나 법정은 확실한 증거도 없이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그는 사지가 찢긴 다음 시체까지 불태워지는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볼테르는 이 사건을 가족 사이의 유대까지 파괴할 정도로 심각한 카톨릭의 종교적 아집의 결과로 보았다. 그래서 여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관용론'을 쓴 것이다. 정부는 그 팜플렛을 배포하는 사람들을 탄압했으나 결국 1787년에 관용칙령을 통해 위그노파에게 일부 시민적 권리를 허용했다. 그래서 볼테르가 신앙의 자유, 나아가 양심의 자유를 가져온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 관용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한편에서 종교개혁과 그에 따른 참혹한 종교전쟁에 대한 반성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정치, 사회적 여러 문제들과 얽혀 있다.
 
  잉글랜드에서는 명예혁명 후인 1689년에 이미 상당한 정도로 종교적 관용을 허용했다. 프러시아에서도 프리드리히 2세가 즉위한 1740년에 상당한 정도의 종교적 관용을 허용했다. 특히 프러시아 같이 종교적 분열이 심한 나라에서는 국가통합을 위해 반드시 종교적 관용이 필요했다. 왕과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국가에 충성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2세 (Friedrich Wilhelm II, 1744~1797)

  또 경제발전을 위해 다른 나라에서 추방된 신교도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려고 종교적 관용을 허용한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종교적 관용의 실천은 단순한 계몽사상가들의 업적이 아니다. 군주들의 정치, 사회적인 판단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게다가 볼테르는 다른 기독교 종파에 대해서는 관용을 주장했으나 유대교에 대해서는 전연 다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계몽사상기의 가장 열렬한 반유대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관용의 사도'라는 그의 명성에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계몽시대의 종교성
 
  그러면 18세기 사람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 살았을까.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대로 종교를 떠나서 완전히 세속적인 삶을 살았을까. 계몽사상 시기를 이성 대 종교의 대립으로 보는 생각은 계몽사상이 반교회주의의 기초 위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이성에 대한 호소를 폭 넓게 함으로써 신앙의 수준이 떨어지고 경건성도 약화되었다고 보는 데서 비롯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오늘날 잘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이 시기에는 일부 세속화 경향과 함께 그 반대 경향도 함께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선 대부분의 계몽사상가들이 기독교를 신봉했으며 종교를 부정하지 않았다. 일부 무신론자나 이신론자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또 세속화를 이야기하려면 정부나 사회의 기준이 세속화 되어야 하나 별로 그렇지 않았다. 신앙의 수준도 과거보다 별로 낮아졌다고 보기 어렵다.
 
  실제로 18세기에 한 편에서 새로운 종교적 열정이 불붙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발전한 카톨릭의 분파인 얀센주의, 독일에서 발전한 경건주의, 잉글랜드에서 발전한 메소디즘(감리교파)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모두 새롭게 초월적 신앙을 강조하는 종파들이다. 특히 독일의 경건주의는 17세기의 30년 전쟁이 가져다 준 참화를 신의 벌로 생각하고 이를 회개하려는 가운데 발전한 것이다.
 
  또 일반 민중들의 대부분은 아직도 상당 부분 무지몽매함과 미신에 묶여 살았다. 18세기 초까지도 마녀사냥이 행해지는 곳이 있었고 교회에서도 공공연하게 악마추방을 위해 엑조시즘(악마추방 시술)을 행했다. 이 시대의 유럽 사회는 결코 사람들이 종교성이나 미신을 떠나 이성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생각한 시기가 아니었다.
 
  그러니 얼마 안 되는 계몽사상가들이 마치 세속화에 큰 역할을 하여 일거에 세상이 바뀐 것처럼 생각해서 안 될 것은 당연하다. 물론 18세기에 세속화를 위한 모든 주된 논의가 나타난 것은 사실이나 세속화는 그 후 오랜 시간이 걸린 느린 과정이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8-03-19 오전 8:16:08


<28> 계몽사상의 재조명 ① 계몽사상이란 무엇인가

 

  계몽사상은 이성의 빛을 의미한다
 
  계몽사상은 18세기 유럽에서, 특히 프랑스가 중심이 되어 발전한 것으로 서양 근대사상의 기초를 마련했다. 계몽사상가들로는 계몽사상가의 왕으로 불린 볼테르를 비롯해 몽테스키외, 루소, 흄, 디드로, 달랑베르, 칸트 등 많은 사람을 들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계몽사상의 왕으로 불리운 프랑스의 볼테르(Voltair, 1694~1778)

  이들은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고 학교에서 매일 가르치는 서양의 유명한 근대 사상가들이다. 그러니 계몽사상이 서양의 사상사적 발전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또 우리 한국인들의 사고과정에서도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계몽사상을 영어로는 Enlightenment, 독일어로는 Aufklärung, 불어로는 Lumières라고 쓴다. 이는 문자 그대로 '밝게 만듬'이나 '빛'을 의미하는 낱말들이다. 즉 깨게 하는 것, 눈을 뜨게 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 사람들이 이런 표현을 쓴 것은 인간의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힘인 '이성의 빛'이 무지몽매함과 미신, 종교적 광신, 불합리한 관습이나 전통 같은 어두움으로부터 사람들을 깨어나게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빛이 지식과 인간의 지혜를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의 말을 빌리자면 계몽이라는 빛은 '편견이나 다른 사람의 지도에 의한 왜곡 없이 자신의 이성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만든 미성숙으로부터 해방'되게 만드는 것이었다.
 
  계몽사상가들을 불어로는 philosophes라고 쓰므로 철학자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는 전문적인 철학자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많은 문필가, 교사, 교수, 저널리스트, 예술가 등이 이에 포함된다. 그러니까 계몽사상이란 철학보다는 훨씬 폭이 넓은 대중적인 사상체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대학이 아니라 교양 있는 부르주아지나 귀족, 지식인들이 모여든 살롱들을 중심으로 발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계몽사상의 특징은 보통 세속성과 합리성으로 말해진다. 18세기 유럽인들이 인간세계를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세속적인 눈으로 바라보았고 그런 가운데 합리성을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17세기부터 유럽에서 천문학이나 수학 등 자연과학이 발전하며 사람들이 우주와 자연세계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곳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특히 뉴턴의 종합으로 천상계와 지상계가 하나의 수학적 원리에 의해 지배받는 것으로 생각됨으로써 이제 인간사회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그런 만치 또 합리적인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계몽사상은 서양이 합리적인 근대문화를 발전시키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고 미국의 독립이나 프랑스 혁명에도 큰 영향을 미친 사상운동으로 받아들여진다. 계몽사상이 르네상스와 함께 서양 근대문화의 발전에서 막중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계몽사상의 해석
 
  계몽사상을 이렇게 세속성과 합리성으로 보는 태도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생각만큼 오래 되지는 않았다. 1932년에 독일 철학자인 에른스트 카시러가 <계몽의 철학>이라는 책을 통해 새로운 해석의 틀을 만든 것이 시초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 1874~1945)와 그의 저서 <계몽의 철학>

  유대인 출신으로 1918년에 함부르크 대학 교수가 된 그는 당시대의 탁월한 철학자로 10권짜리 칸트 전집을 편집한 인물이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헌신적인 민주주의자로서 독일민주당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1919년에 독일에서는 처음으로 수립된 민주주의 국가인 바이마르 공화국을 열렬히 옹호했다.
 
  그가 이 책을 쓴 것은 당시 독일에서 급격히 힘을 키우고 있던 히틀러의 나치즘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치즘의 비합리주의와 폭력성을 계몽사상이 갖고 있다고 믿은 합리주의에 의해 극복하려 한 것이다. 그는 1933년에 나치당이 집권하자 영국으로, 나중에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학문 활동을 계속했다.
 
  그의 책은 독일보다는 미국에서 더 환영을 받았다. 1951년에 영역되어 미국 독자들의 큰 호응을 받았고 그 후 계몽사상 연구에서 가장 기본적인 책으로 자리를 잡았다. 오늘날까지도 계속 팔리고 연구되는 드문 책이다. 그것은 그의 책이 계몽사상을 다른 어떤 책보다도 더 진지하게 학문연구의 대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계몽사상 시대를 라이프니츠(1646-1716)와 칸트(1724-1804)에 의해 경계가 지어지는 시기로 정의했다. 그러니까 그들이 활동한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전체에 이르는 시기이다.
 
  카시러에 의하면 계몽사상이란 인간행위가 신념이나 미신, 계시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합리성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는 열망을 대변한다. 즉 관습이나 자의적인 권위의 제약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인간 이성의 힘을 믿는 사상체계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종교나 전통이 아니라 과학에 의해 점차 유효해진 세계관에 의해 지지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연구는 제자인 피터 게이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게이도 역시 어릴 때 독일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유대인이다. 나중에 대학교수가 되기는 했으나 그 전에는 오랫동안 책을 편집하는 일을 하며 <바이마르 문화> 같은 대중적인 책들을 써서 유명해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피터 게이(Peter Gay, 1923~ )

  게이는 1967년과 1969년에 <계몽사상>이라는 두 권짜리 책을 출간했는데 그 두 책의 부제인 '근대 이교주의의 흥기'와 '자유의 과학'은 이 책이 어떤 방향에서 씌어졌는가를 잘 암시해준다. 계몽사상을 세속화와 함께, 합리성의 발전에 따른 인간 자유의 확대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두 사람은 계몽사상의 본질을 종교에 대한 적대감과, 이성을 비판적으로 사용하여 인간과 그 사회를 변화시킴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자유'와 '진보'로 규정했다. 그리하여 이것이 그 후 계몽사상이 일반적으로 해석되는 틀이 되었다. 지금도 대체로는 그렇다.
 
  그렇다고 계몽사상이 서양에서 아예 비판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낭만주의자들은 그것이 지나치게 합리성을 중시하고 추상적인 생각에 의존함으로써 천박하며 인간행위에서 역사성이나 종교성을 경시한다고 비판했다.
 
  2차대전 후에는 독일 철학자들인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홀로코스트를 계몽사상의 탓으로 돌리며 강하게 비판했다. 인류가 현대에 들어와 이런 야만적 행위에 빠진 이유는 이성과 합리성의 강조가 기술문명을 발전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으나 그와 함께 해야 할 윤리성을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윤리와 분리된, 도구로서만 사용되는 이성은 국가가 행사하는 폭력적 힘의 지배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1903~1969)(우)와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1895~1973)(좌)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철학자 미셀 푸코도 비슷한 주장을 펴고 있다. 그도 계몽사상이 합리적인 기준을 지나치게 내세움으로써 그것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을 배제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기준에 의해 사람들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날카롭게 구분함으로써 유럽사회에 억압성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계몽사상은 최근에 들어와 전반적인 재검토를 받으며 과거와 같이 단순하며, 지나치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는 없게 되었다. 특히 계몽사상에 내재해 있는 유럽중심주의적 태도는 큰 문제이다.
 
  18세기에 비유럽에 대한 우월한 존재로서의 근대 유럽인들의 자의식과 정체성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계몽사상의 바른 이해는 근대 서양인들의, 보편성을 강조하기는 하나 차별적일 수밖에 없는 사고체계에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열쇠가 된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2008-01-29 오전 10:20:31

<27> 인종주의와 서양문명 ④  인종주의의 극단화와 유대인 학살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인종주의적 사고를 전파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체임벌린(H.S.Chamberlain)이다. 그는 영국 출신이나 독일로 귀화한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로 나중에 오페라 극작가로 강한 인종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던 리햐르트 바그너의 사위가 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체임벌린은 인종의 순수성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가치이므로 인종적인 혼혈을 피하고 우월한 인간의 전형을 만들어내는 것은 인류문명을 위해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피가 섞여지면 그 창조성이 파괴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최고의 인종인 아리아족이 갖고 있는 피의 순수성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지켜져야 했다. 그럼으로써 그 군인다운 정신과 창조적인 힘이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右)체임벌린 (H.S.Chamberlain, 1836~1914) (左)리하르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년~1883년)

  순수 혈통에 대한 체임벌린의 이런 맹목적 집착은 매우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서 국가나 민족내의 다른 인종, 또 비정상적인 사람들에 대한 폭력행위를 공공연히 부추기는 것이었다. 같은 민족 안에서라도 정신적, 유전적 질환이 있는 사람들의 인위적 제거를 주장하는 우생학(eugenics)은 이런 배경에서 발전한 것이다. 이렇게 인종주의가 점점 극단화하며 그 사악성도 점차 노골화한다.
 
  그리하여 1차 대전이 일어난 1914년 이전에 인종주의적 선동은 이미 유럽의 각 나라에서 광범한 대중운동으로 발전했었다. 인종이라는 생각이 그 당시 사람들 생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낸 많은 사람들이 그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히틀러가 갖고 있는 강한 인종주의적 태도는 그 시대적 분위기의 산물이다. 결코 그가 동떨어진 사람은 아니다.
 
  근대적 반유대주의의 등장
 
  인종주의가 한창 위세를 부리던 1870 - 80년대는 유럽에서 근대적 반유대주의가 발전한 시기이기도 하다. 19세기 중반에 유럽 각국은 자유주의가 발전하며 자기 나라 안에 사는 유대인들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하고 그 사회 안에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이 유럽사회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곧 사업이나 자유직업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이를 두려워하고 시기함으로써 새로이 반유대주의가 불붙은 것이다.
 
  이는 1881년 러시아의 짜르 알렉상드르 2세의 암살 사건과 관련해 박해를 받은 러시아 지역의 유대인이 대거 서쪽으로 이주한 것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러시아 서부와 폴란드의 농촌 지역에 살던 많은 무식한 유대인들이 서, 중부 유럽의 도시들에 넘쳐나며 유럽인들의 반감을 불러 온 것이다. 이렇게 1880년대부터 발전한 반유대주의를 근대적 반유대주의라고 부른다.
 
  이리하여 유대인들은 셈 인종으로 분류되며 인종주의적인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유대교를 믿는다는 의미에서의 종교적인 성격, 또 다른 문화와 관습을 가졌다는 의미에서의 문화적 인종주의의 성격을 넘어선 것이다. 기독교로 개종했거나 유대교를 버리고 완전히 세속화된 사람들까지도 피를 따져 박해 대상에 포함했기 때문이다. 즉 생물학적인 인종주의의 성격을 갖고 있다.
 
  결과적으로 1890년대까지는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가 동, 중부 유럽뿐 아니라 서유럽과 아메리카에서도 중요한 문화적, 정치적 힘으로 발전했다. 많은 반유대주의적 정당, 결사, 선전기구가 생기며 반유대주의가 제도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1920, 30년대의 대대적인 확산을 통해 결국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예비하게 된다.
 
  나치 정권의 유대인 학살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1889~1945)

  히틀러가 이끈 민족사회주의 운동의 반유대주의도 특히 질이 나쁘기는 하지만 이런 배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전쟁 전과 전간기(1919-1939)의 반유대주의는 유럽 전체의 일반적인 현상이었지, 독일만의 특별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히틀러의 정치 전략에 있어 반유대주의가 사소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세계관의 핵심요소였다. 히틀러는 세계사를 '적자생존'의 원칙에 의해 지배되는 인종들 사이의 끝없는 생물학적 투쟁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그 투쟁에서 아리아족의 유럽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 유럽의 주된 적은 국제적인 유대인 집단이었다. 국제적 금융자본주의와 국제적 사회주의가, 유럽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나아가 뒤집어엎으려는 유대인들의 두 핵심 무기라는 것이다.
 
  유대인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미국의 자본주의와 유대인들이 조종한다고 믿은 볼세비즘을 아리아 인종의 주된 위협으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나중에 독일민족의 생활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소련을 침공하고 동유럽에서 유대인의 대량학살을 감행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학살이 계획된 것 같지는 않다. 1933년에 나치당(NSDAP)이 집권하고 나서 1935년 이후 독일의 유대인 정책이 과격해지기는 했으나 전쟁 전까지는 그들을 독일인과 격리시키고 박해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그러나 1939년의 폴란드 침공과 그에 따른 2차 대전의 발발은 유대인의 존재를 독일의 민족적(또는 인종적) 생존에 위협이 되는 것으로 믿게 만들었다.
 
  1941년에 독일군이 유대주의-볼세비즘 음모의 본거지로 생각된 소련으로 쳐들어가면서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폴란드 동부, 루마니아 북부, 소련 서부의 유대인 거주지역이 독일의 점령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쟁 가운데에서 유대인에 대한 격리정책은 급격하게 절멸정책으로 바뀌었고 결국 전 유럽에 걸쳐 대규모 유대인 학살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저질러진 홀로코스트는 중세 이래의 종교적ㆍ문화적 인종주의, 생물학적 인종주의, 반유대주의, 민족주의의 여러 성격들이 혼합된 결과이다. 그리하여 고유의 종교와 문화를 고집하는 전통적인 유대인은 말할 것도 없지만 기독교로 개종하고 유럽문화에 동화되어 유럽인과 구별할 수 없는 유대인마저도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혈통이 유대인과 비유대인을 나누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대인 학살이 아시아적 야만?
 
  독일의 유대인 학살은 규모도 규모지만 그 비인간적인 방법과 잔인성에서 전대미문의 것이다. 특히 사람의 신체를 원료로 여러 물품을 만든 데 이르면 인간의 행위라고 하기도 어렵다. 더구나 그것이 철학과 음악의 나라라고 인문주의적 교양을 뽐내던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고 보면 입을 다물기 어렵다.
 
  그래서 독일인들은 2차대전 이후 수십 년 동안 세계의 비판 앞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다. 독일이 일본과 달리 그래도 자신들의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는 척이라도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것도 80년대에 들어오면 조금씩 달라진다. 독일 사회의 우경화와 함께 과거의 죄과를 정당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둘러싼 80년대의 소위 '역사가논쟁' 가운데에서 우익역사가들은 홀로코스트를 독일의 특수한 사례라기보다 현대문명의 병리현상이라고 강변한다. 그것은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가 저지른 사건을 포함하여 20세기의 수많은 학살사건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우익역사가는 홀로코스트를 '아시아적 야만'이라고까지 불렀다. 그런 일은 야만적인 아시아 사회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유럽 문명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고 유럽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은 참으로 우연적이라는 것이다. 저지르기는 자기네가 저지르고 책임을 아시아에 떠넘기니 참 어린아이 같은 정신 상태라고 하겠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비난과 공격은 아직도 미국을 중심으로 계속되고 있는데 그것은 미국에서 유대인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큰 영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언론매체나 영화를 이용하므로 홀로코스트 산업이라는 비아냥도 듣는 이런 지속적인 '홀로코스트 때리기'에는 순수하지 않은 정치적 의도도 숨어 있다. 유대인을 역사의 피해자로 계속 선전함으로써 동정 여론을 불러일으켜 팔레스타인인을 지속적으로 학살하는 이스라엘의 만행을 국제적으로 옹호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역사만을 보아도 이렇게 잔인한 학살을 당한 것이 유대인만이 아니다. 제국주의 시대에 프랑스가 알제리 등 다른 식민지에서, 독일이 나미비아 등지에서, 벨기에가 콩고 등지에서 저지른 학살은 그 기본적인 성격에 있어서 유대인 학살과 똑 같은 것이다. 다 인종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대인 이야기만 하는 것이 공평하지 않음은 말할 것도 없다.
 
  소결 : 인종주의는 서양문명의 본질
 
  그러면 인종주의와 서양문명과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 것이 좋을까? 아리스토텔레스를 포함해 그리스인들이 후대의 인종주의에 직접 책임을 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어느 정도 그 빌미를 만든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후대의 인종주의자들이 그들을 두고두고 우려먹었기 때문이다.
 
  중세의 기독교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중세 유럽인들이 이교도에게 가한 종교적 박해와 차별은 생물학적 인종주의와도 연결되며 그것이 특히 반유대주의와 관련하여 현대에 와서는 홀로코스트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근대의 생물학적 인종주의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대량학살을 정당화하고 아프리카인의 노예화와 식민지배를 옹호하며 유럽과 미국을 세계의 지배자로 만들었지만 비 백인들에게 장기간에 걸쳐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비참함을 안겨 주었다.
 
  이런 점에서 인종주의는 서양문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고 근대 서양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본질적인 부분의 하나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서양인들이 인간은 모두 똑같다는 의미에서 보편성을 내세우며 자유와 평등, 인권, 평화와 같은 고상한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은 참으로 위선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말들과 인종주의는 전혀 어울릴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는 그렇다 치고 인종주의가 앞으로도 짧은 시일 안에 사라질 것 같지 않다는 것이 현재로서는 더 문제이다. 사라지기는커녕 90년대 이후 서양 각국에서 우경화 현상이 강화되며 인종주의도 더 힘을 얻고 있다. 그래서 비백인에 대한 차별이나 폭행, 살해사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오늘날 정보통신과 매스 미디어의 발전으로 세계가 가까워지고 있기는 하나 그 속도만큼 다른 인종, 다른 대륙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서양인들의 편견과 멸시가 빨리 사라지고 있지는 않다. 사실 지구상의 힘의 우열이 서양인들에게 우세하게 전개되는 한 그들이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인종주의의 극복은 아직도 매우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