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프레시안 2008-04-23 오전 10:37:40


근대 유럽 과학의 발전 ④ 점성술, 연금술, 마법적 전통


점성술, 연금술, 마법적 전통
 
  전통적으로 과학사가들은 과학과 비과학을 엄밀히 구분해 왔다. 그리고 16, 17세기의 과학혁명을 과학이 비과학을 극복한 과정으로 그리고 있다. 이때 그들이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것은 16, 17세기의 과학자들이 근대성을 가져오는 데 기여했고 그들의 생각이 우리들의 것과 같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들의 생각은 현대인과 매우 다르다. 또 자신들이 당시에 하고 있던 일의 의미를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현대인들과 같이 이해할 수도 없었다. 또 지금은 일반적인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믿기를 거부했다.
 
  형이상학적, 종교적인 사고를 했다. 점성술, 연금술, 마법, 천구의 음악, 신의 섭리, 구원의 역사를 진지하게 받아 들였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뚜렷한 과학과 비과학의 구분은 그들에게 별 의미가 없었다. 양자가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점성술은 결코 가벼운 연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대부터 진지한 탐구의 대상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점성술에 대해 쓴 유명한 <테트라비블로스>라는 책에는 천문학(astronomy)과 점성술(astrology)의 성격이 잘 구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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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연금술사의 모습
 

  천문학은 천체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관찰, 기록, 예측하는 것이다. 반면 점성술은 천문학적 측면의 지식을, 지상의 일을 예측하는 덜 정확하고 세속적인 일에 적용하는 것이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천체에 대한 관심이나 학문으로서 합리적 기초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둘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16, 17세기 사람들도 이런 생각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별들의 움직임이 지상의 현상에 큰 영향을 준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시리우스별이 해와 함께 뜨면 나일강에 홍수가 진다는 식으로 천체의 움직임으로 중요한 기상현상을 예측할 수 있었다. 전쟁, 지진, 곡물수확 같은 것이 모두 예측의 대상이었다. 개인의 길흉화복도 마찬가지이다. 의학 같은 학문도 점성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건강과 질병을 천체현상과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관찰된 자료에 기초해 있을 뿐 아니라 수학적 계산을 통해 천상과 지상의 변화를 설명했으므로 많은 과학자들이 그 일반적인 원리를 받아들였다. 실제로 그것은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가 나올 때까지는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받아들여지는 보편적인 법칙으로서는 유일한 것'이었다. 따라서 교육과정의 중요한 부분이었고 로마, 볼로냐, 살라망카 등 일부 대학에는 점성술학 교수가 있었다.
 
  중세시대에 아라비아에서 들어온 연금술은 16, 17세기뿐 아니라 18세기에도 널리 행해졌다. 그것은 모든 물질에는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성질과 함께 감추어진 비밀의 성질이 있고 이 감추어진 성질을 변환시킴으로써 한 물질을 다른 물질로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 다양한 실험 방법이 적용되었다.
 
  연금술은 이 시기에 여러 나라 군주들의 지원도 받았다. 구리 같은 비금속을 금 같은 귀금속으로 바꿀 수 있게 되면 국가재정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금술사들은 주로 영약(Elixir)으로 불리는 '마법의 돌'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생명을 연장하고 질병을 치료하고 영혼을 정화하는 등 많은 목적에 사용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6-18세기에는 마법도 지적인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르네상스 시대에 고대의 문헌들이 다시 발굴되며 비의적인 학문들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것의 많은 부분은 고대의 신플라톤주의 문헌들에 기인하는 것이고 그 안에는 신비적인 헤르메스주의에 대한 글들(고대 이집트의 헤르메스 트리스메기투스가 쓴 것으로 알려진 헤르메스 전집 등)도 포함된다.
 
  마법에는 두 형태가 있다. 하나는 보다 영적이고 악마적인 성격을 추구하는 흑마법이다. 하나는 사물의 자연적이지만 비의적인 성질에서 마법의 효과를 찾아내려는 자연마법(natural magic)이다. 근대 초 마법적 전통의 주류는 자연마법이다.
 
  자연마법가들은 사물들 사이에 나타나는 기호나 상응관계의 신비한 힘에 주목했다. 따라서 자연 속에서 나타나는 이런 현상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다. 호두는 인간의 뇌와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인간의 신체적 질병을 진단하는 데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숫자가 갖고 있는 신비한 힘을 믿는 숫자학은 수학적 마법의 일종이다. 연금술의 영향을 받은 의학 이론에도 자연마법적인 측면이 많이 나타난다. 놀라운 효과를 가지는 기계적 고안도 사물이 갖는 비밀스런 자연적 힘을 이용하는 것으로 보였으므로 마법가의 영역이었다. 렌즈나 거울, 또 망원경이나 현미경이나 처음에는 다 마법적인 현상으로 생각되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자연마법을 통해 반드시 초자연적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고 믿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신만이 초자연적 현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자연마법은 근대 과학의 실용적이며 경험주의적 전통을 만들어 내는데 상당 부분 기여했다. 광물, 식물, 동물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기록하도록 많은 자극을 주었기 때문이다.
 
  케플러, 뉴턴과 비학
 
  그러면 케플러와 뉴턴의 경우를 통해 이 시기 과학과 비학의 관계를 한 번 살펴보자. 케플러가 점성술사였다는 것은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천문학자로서의 사명으로 생각했다.
  1601년에 프라하에서 발간한 <점성술에 대한 보다 확실한 기초에 대하여>라는 점성술 책에서 그는 '매년의 예측을 하는 것은 수학자의 의무'이며 '1602년을 예측하는 것은 대중의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철학자로서의 의무' 때문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는 점성술을 신성하고 추상적이고 정확한 과학인 천문학과 마찬가지 활동이기는 하나, 그것의 세속적이고 유용하며 덜 정확한 측면이라고 생각했다. 점성술은 지상의 일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데 어느 정도 한계를 갖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최신의 천문학 지식을 이용하고 위도에 따른 일조량까지 계산에 넣어가며 기후, 작황 등 가장 나은 미래 예측을 하려고 애썼다. 정치적, 군사적 사건이나 유명한 인물들의 운명 예측 등 황당한 면이 있기는 하나 매우 진지하게 이에 접근했으며 점성술을 믿었다. 현대의 천문학자들이 하듯이 점성술의 과학을 부인한 적은 결코 없다.
 
  그는 근대 수학적 천문학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나 숫자학의 마법적 전통 속에 깊이 빠져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6이라는 숫자에 집착했는데 그것은 태양계에 행성이 6개 밖에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우주의 구조를 6개의 천구에 각각 내접하는 5개의 정다면체(정다면체는 4면체, 6면체, 8면체, 12면체, 20면체의 다섯 개 밖에 없다)로 상상했으므로 행성이 그것보다 더 많아질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우주의 조화라는 피타고라스적, 신플라톤주의적 마법 전통 속에서 신이 창조한 우주에는 기하학적인 원형(原型)에 따라 6개의 행성만이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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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플러의 우주모형
 

  그는 행성의 타원 궤도를 생각해낼 때에도 비슷하게 접근했다. 이때는 윌리엄 길버트의 자기학(磁氣學)에 큰 영향을 받았는데 길버트는 자기에 대해 물활론적, 마법적 접근을 한 인물이다.
 
  길버트의 많은 실험들은 자석의 자발적인 운동을 증명함으로써 자석이 영혼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그는 지구도 살아있는 실체로 자석과 같은 방식으로 움직인다고 믿었다. 지구는 스스로 움직이는 존재이므로 최고의 마법적 대상으로 생각한 것이다.
 
  케플러는 길버트의 자기를 받아 들여 <새 천문학(1609)>에서 태양을 도는 행성의 운동이 자기력 비슷한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길버트는 케플러가 자신이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당연히 길버트의 마법적 전통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왜 신이 원 대신 타원을 행성궤도로 이용하느냐 하는 것도 우주의 조화에 대한 신플라톤주의적 입장에서 설명했다. 같은 속도로 원운동을 하면 단조롭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변화하는 속도로 규칙적으로 타원을 회전함으로써 천상의 음악을 위한 보다 폭넓은 음부(音符)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뉴턴에게서도 우주를 수학적 질서의 원리에 따라 구성된 것으로 보는 피타고라스적 태도는 비슷하게 나타난다. 그는 7이라는 숫자를 신비화하여 일곱 줄로 된 수금(竪琴)을 지닌 아폴론 신과, 빛의 일곱 가지 스펙트럼, 그리고 음악에서 한 옥타브의 일곱 음계를 상응시켰다. 다 우주의 조화를 가져오기 위한 도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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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턴의 반사 망원경
 

  그는 아리우스적 신(카톨릭의 삼위일체가 아니라 성부가 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기독교의 형태)을 믿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따라서 우주에 대한 그의 생각에서도 신의 역할은 본질적인 것이었다.
 
  그는 유체로 가득 찬 데카르트적인 우주를 거부했는데 그것은 그것이 신의 활동을 불가능하게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는 정신적인 힘에 의해 지배되는 텅 빈 공간을 주장했다. 이때 정신적인 힘이란 신, 천사, 예수를 포함했다.
 
  그는 또한 수십 년 동안 연금술에 몰두한 연금술사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그 일은 19세기 말에 최초로 그의 전기를 쓴 D.브뤼스터라는 사람이 유고를 검토하며 밝혀졌다. 발표되지 않은 유고는 대부분이 신학과 연금술에 대한 내용이었다.
 
  브뤼스터는 이에 대해 '나는 그렇게 강력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고, 기하학의 추상과 물질세계의 연구에 고귀하게 몸을 바친 사람이 어떻게 가장 경멸스러운 연금술적 시를 쓰는 중세의 필사자 같이 등을 구부리고 앉아, 바보나 건달들이 해 놓은 작업의 주석자 노릇이나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그 당혹감을 표현하고 있다.
 
  그럼에도 과학사가들은 뉴턴과 연금술을 관련시키기를 거부했다. 그것이 위대한 과학자로서의 뉴턴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근 20-30년 사이에 와서야 유고 연구가 본격화하며 연금술이 물질의 본성에 대한 그의 생각을 만드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음이 점차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연금술에서 자연세계에 대한 지식만을 추구한 것은 아니다. 초자연세계에 대한 지식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물질의 활성이 없는 소우주에서 소립자가 조직되고 활성화되도록 작용하는 신성(神性)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었다.
 
  만약 그가 이 신성의 활동을 자연 속에서 드러낼 수 있다면, 그리하여 소우주를 작동시키고 지배하는 구세주를 드러낼 수 있다면 분명하게 신성의 존재와 그 섭리를 증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뉴턴에게 있어 세계를 창조하고 그것을 다스리는 신의 대리자로서의 구세주는, 연금술의 '마법의 돌'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중력의 개념이 연금술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을 펴는 학자들도 있다. 그것은 연금술로부터 물질 입자 사이에서 작용하는 인력과 반발력이라는 비의적 힘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행성을 잡아끄는 태양의 힘에 대한 케플러의 이론을 1679년에 로버트 훅에게서 전해들은 뉴턴이 소우주에서의 인력을 대우주의 텅 빈 공간에서 작용하는 힘으로 확대했다고 주장한다.
 
  중력의 개념이 단순히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착상한 것이 아니라 그가 봉직하던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교회당에서의 깊은 사색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케플러와 뉴턴이 우리가 생각하는 근대 과학자하고는 좀 거리가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8-04-16 오전 9:21:32


근대 유럽 과학의 발전 ③ 16-18세기의 유럽 과학의 모습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
 
  근대 과학이 처음 시작되어 가장 뚜렷한 성과를 보인 분야는 천문학이며 천문학의 발전은 수학과 역학의 발전을 동반했다. 이 학문들이 서로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극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흙, 물, 공기, 불의 4원소설을 주장했다. 지상의 모든 물체는 이 원소들의 결합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믿었다. 또 이 원소들은 물체가 분해되면 각자의 원래 자리를 찾아 가려는 본성을 갖고 있다. 무거운 흙은 밑으로 갈아 앉고 가벼운 공기는 위로 올라가려는 성질을 갖고 있다. 따라서 지상은 가변의 영역이 된다는 것이다.
 
  지구는 공 모양으로 우주의 중심에 정지해 있으며 행성들과 태양은 지구를 중심으로 원운동을 하는 투명한 천구(天球)들에 붙어 있고 그 너머에는 항성들이 자리 잡고 있는 천구가 또 따로 있다. 달을 넘어선 우주는 천상의 영역으로 다른 원소와 결합하지 않는 순수한 원소인 에테르로 만들어져 있다. 따라서 천상의 영역은 어떤 변화도 없는 불변의 영역이 된다.
 
  중세까지 유럽을 지배했던 천문학 체계는 2세기 사람인 프톨레마이오스(90-168)의 지구중심설이다. 고대부터 지구중심설과 태양중심설은 계속 대립해 왔으나 그가 새로운 이론적 장치를 통해 종래의 지구중심설이 갖고 있던 약점을 보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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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우주. 가운데에 지구가 있고 그 밖으로 달, 태양,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천구가 차례대로 있고, 가장 밖에 있는 것이 항성들의 천구이다.
 

  고대 천문학자들이 설명하는 데 가장 어려움을 겪은 것은 행성의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지구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행성들이 일정한 거리에서 원운동을 해야 하는데 어떤 때는 지구를 향해 전진하다가도 일정 시기가 되면 다시 뒤로 후퇴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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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의 후퇴운동을 보여주는 그림. 가운데 있는 별자리가 궁수자리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편심 이론을 통해 행성 원운동의 중심을 지구가 아니라 지구와 좀 떨어진 편심(eccentric)에 두었고, 대원(deferent: 이는 편심을 중심으로 하는 행성의 원 궤도를 말한다), 소원(epiccycle: 행성은 대원을 중심점의 축으로 하여 다시 작은 원을 그리며 돈다. 즉 늘어진 스프링 모양을 하며 돈다. 그 작은 원을 말한다), 등각속도점(equant point: 그곳에서 관찰하면 행성들이 일정한 원운동을 하는 듯이 보이게 된다는 공간 속의 가상적인 점)등 기하학적 모형을 이용하여 행성의 복잡한 움직임을 설명하려 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과 잘 어울렸다. 또 실제의 관측 결과와도 상대적으로 더 부합하는 것처럼 보였고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교리와도 잘 맞았다. 그래서 중세사회의 공식적인 이론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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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가 지구이고, C는 편심, 편심을 중심으로 하는 원이 대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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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원을 원 운동의 중심으로 삼아 도는 원이 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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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성은 대원을 중심점으로 소원을 그리며 시계반대방향으로 전진하므로 전체적으로는 풀어진 용수철 모습으로 궤도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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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각속도점을 나타내는 그림. E=지구, C=편심,Q=등각속도점(C에서 E와 같은 거리만큼 반대편에 있는 지점). 프톨레미는 등각속도점에서 측정하면 행성이 대원을 같은 시간에 같은 각도만큼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같은 90 ˚ 인 A→F로 움직이는 속도는 F→B로 움직이는 속도보다 빠르게 된다. 이는 행성의 불규칙운동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이나 이치에 맞지 않는다.

  코페르니쿠스에서 갈릴레이까지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체계도 행성들의 움직임을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었으므로 후대의 천문학자들이 계속 손을 보아 중세 말에 오면 매우 복잡해졌다. 이탈리아에 유학한 폴란드인인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이에 불만을 느끼고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다른 체계를 꾸미기 시작했다. 오랜 노력 끝에 그가 1543년에 출판한 책이 바로 <천구들의 회전에 관하여>이다.
 
  그러나 새 이론은 지구와 태양의 자리를 바꾸었고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 아직 불명확하던 행성들의 순서를 수성, 금성, 지구의 순서로 확정지은 것 외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수학을 그대로 채용한 것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기하학적 장치 가운데서 등각속도점을 제외하고 편심과 대원, 소원은 그대로 유지했다. 또 모든 천체가 원운동을 한다는 플라톤 이래의 원리에 집착했고 우주가 겹겹이 붙어 있는 투명한 천구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의 이론도 프톨레마이오스의 것보다 별로 나아보이지 않았다. 편심을 그대로 두었다는 점에서 엄밀하게 태양중심설도 아니었다. 게다가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당시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넘어서기도 어려웠으므로 16세기에 그의 주장을 믿는 사람은 전 유럽에서 열 사람도 채 안 되었다. 그의 체계는 매우 보수적인 것으로 결코 혁명적인 것이 아니다.
 
  그 뒤를 이은 사람이 티코 브라헤(1546-1601)이다. 덴마크의 귀족인 그는 스스로 천문대를 지어 수십 년 동안 끈질기게 천문현상을 관찰하여 정밀한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거부했는데 그것은 항성 시차(視差)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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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코 브라헤의 천문대 내부 모습
 

  지구가 움직인다면 지구의 위치변화에 따라 항성을 보는 각도가 달라져야 하는데 당시로서는 그것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정밀한 망원경이 만들어지며 1838년에야 가능하게 된 일이다. 그의 우주모델은 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태양은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형태이다. 지구중심설과 태양중심설을 타협시킨 것이다.
 
  브라헤로부터 넘겨받은 관찰기록을 바탕으로 끈질긴 노력 끝에 행성의 운동을 수학적 원리로 규명한 인물이 요하네스 케플러(1571-1630)이다. 케플러는 독일의 튀빙겐 대학에서 신학을 연구하다 천문학에 관심을 가진 인물로 행성 운동의 3법칙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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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하네스 케플러
 

  그는 행성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형이며 그 공전 속도가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수학적인 공식으로 만들어냄으로써 행성운동의 비밀을 풀었다.
 
  그가 쓴 <새로운 천문학>은 태양을 이론의 여지없이 우주의 중심에 놓고 행성 운동을 새롭게 설명했다는 점에서 천문학의 진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그의 책을 읽은 천문학자는 극소수였을 뿐 아니라 대부분 그 이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갈릴레이와 뉴턴
 
  지동설의 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이다. 이탈리아 파두아 대학의 수학교수였던 그는 1609년에 스스로 망원경을 만들어 천체의 움직임을 끈질기게 관찰했다.
 
  달의 분화구를 보며 달이 완전한 구체가 아니라 지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 밤하늘에서 당시까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던 수많은 별들을 발견했다. 목성을 돌고 있는 네 개의 위성들도 발견했는데 이는 천체 운동의 중심이 지구나 태양만이 아님을 시사해 주었다. 또 태양에서 나타나는 흑점의 변화를 보고 태양이 완전무구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태양 중심을 주장했으나 케플러의 타원 궤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열정적으로 옹호했고 사람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프톨레마이오스체계를 버리도록 설파했다. 그가 교회의 종교재판에 걸린 것은 그의 주장이 실제 관찰의 뒷받침으로 강한 설득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갈릴레이는 역학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움직이는 물체의 관성을 주장함으로써 코페르니크스주의에 대한 최대의 반론을 제거했다. 그 전까지 사람들은 지구가 움직인다면 지상의 모든 물체는 날아가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중에 던진 물건도 던진 곳보다 더 서쪽에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구가 동쪽 방향으로 돌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물체들이 관성에 따라 움직인다면 지구가 움직인다고 하여도 물체들은 뒤로 쳐지지 않을 수 있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뒤엎는 효과를 가져왔다. 지구중심설은 갈릴레이와 함께 본격화했다고 할 수 있다.
 
  아이작 뉴턴(1642-1727)은 근대 천문학에 새로운 이정표를 만든 사람이다. 그는 미적분학을 통하여 수학에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고 역학, 광학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업적은 1687년에 출판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이다.
 
  이 책에서 그는 관성법칙, 힘의 작용 · 반작용법칙을 주장했다. 또 우주 공간이 유체인 에테르로 채워져 있다는 데카르트의 주장을 거부하고 그것을 텅 빈 공간으로 가정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중력 법칙의 발견이다.
  그는 달과 지구 사이의 대략적인 거리를 알고 있었고 달의 공전 주기도 알고 있었다. 이를 토대로 달에 미치는 지구의 힘을 계산할 수 있었다. 또 갈릴레이의 낙하법칙을 이용하여 지표면에서 물체를 낙하시키는 힘도 계산할 수 있었다.
 
  이렇게 계산을 통해 나온 두 힘의 크기는 같았다. 이 힘을 그는 중력이라고 불렀고 그것을 수학적 공식으로 나타냈다. 즉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의 크기는 두 물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두 물체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중력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자 이제 행성이 거기에 붙어서 돈다고 가정한 천구는 불필요하게 되었다. 천구 없이도 먼 우주 공간에서 위치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뉴턴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 전통적으로 주장해 온 지상과 천상의 분리를 넘어 우주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었다. 즉 우주 전체가 하나의 동일한 수학적 원리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이다. 우주를 하나의 기계와도 같이 생각하는 기계론적 우주관은 그 결과인 셈이다.
 
  코페르니쿠스에서 시작된 천문학의 발전은 이렇게 뉴턴에 와서 확실히 근대적인 단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브라헤의 정밀한 관측이나 케플러의 수학적 계산, 갈릴레이의 실험, 뉴턴의 수학 등을 통해 근대적인 학문으로 성립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점성술, 연금술 등 비과학적으로 보이는 비학들은 이런 과학적 태도와 어떤 관계에 있을까.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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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유럽 과학의 발전 ② 과학혁명의 개념과 그에 대한 비판


버터필드와 과학혁명
 
  과학혁명이라는 말은 요즘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하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부터이고 그것을 일반화시키는 데 성공한 사람은 영국 역사학자 허버트 버터필드이다. 그가 1949년에 낸 <근대과학의 기원: 1300-1800>이라는 책이 대중들의 큰 호응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사가가 아니라 일반 역사학자로 <휘그역사학> 같은 유명한 책도 저술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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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버트 버터필드 (Herbert Butterfield, 1900-1979)

  그는 '과학혁명'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데 좀 길기는 하나 그의 글을 인용해보자.
 
  '그러한 혁명이 중세뿐 아니라 고대 세계의 과학의 권위를 뒤집어 놓았기 때문에 --- 기독교가 일어난 이래의 모든 것의 빛을 잃게 하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단막극 정도로, 즉 중세 기독교의 체제 내부에서 서로 자리바꿈한 정도의 사건으로 격하시키고 말았다. 과학혁명이 물질계의 전모 및 인간생활 자체의 구도를 바꾸어 놓는 한편 정신과학의 탐구에 있어서까지 인간의 사고 습성을 변화시킨 이래, 그것이 근대세계 및 근대정신의 진정한 기원으로서 너무나 큰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므로 관습적인 유럽사의 구분이 시대착오적이거나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문명사에서 있어서의 이 새로운 장이 진정으로 시작된 것은 1660년'이며 '그리스도교의 대두 이래 역사에 있어서 이와 비교될 만한 가치가 있는 다른 이정표는 아무것도 없다'고 이야기할 정도이다. 과학혁명을 인류사의 최고의 사건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 사건에 '혁명'이라는 정치적 비유를 사용할 때 근본적인 문제가 생긴다. 정치에서 말하는 혁명이 '갑작스럽고 급격하고 완전한 변화'를 의미하며, 그리하여 과거와의 단절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갖고 있다면 그런 '과학혁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버터필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6, 17세기에 중점을 두기는 하지만 그 시간대를 1300-1800년의 500년으로 늘였다. 그러나 500년이란 긴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도저히 혁명이라고 말할 수 없다.
 
  버터필드 이전에 과학혁명 개념을 주장한 사람들도, 코페르니쿠스의 책이 나온 1543년에서 뉴턴의 책이 나온 1687년까지의 144년을 이 기간 대에 포함시키나 144년이라 해도 이미 짧은 기간 안에 일어난 급격한 변화라는 의미는 상실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화학 같은 분야는 천문학이나 물리학보다 훨씬 늦게 18세기말에나 발전했으니 이를 포함하여 혁명이라고 하기는 더 어렵다.
 
  쿤의 패러다임 변화
 
  1962년에 <과학혁명의 구조>를 써서 큰 인기를 모은 토마스 쿤(T.Kuhn)의 견해도 별 다를 것이 없다. 사실 쿤은 과학혁명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자기 나름으로 설득력 있게 제시하여 20세기 후반에 과학사 붐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며 과학사 지식을 일반화하는 데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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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쿤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1962)

  그래서 쿤이 처음 사용한 '패러다임'이라는 말은 요즘 과학자뿐 아니라 일반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일반화되었다. 패러다임이 과학뿐 아니라 사회과학, 예술사, 신학 등 일반 학문세계에서 '생각의 틀' 정도로 흔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의 영향이다.
 
  실제로 그 개념은 매우 복잡하고 넓어서 어느 과학 분야에서 기본이 되는 이론과 법칙들 뿐 아니라 그 내용을 이루는 과학지식, 그것에 사용된 개념들을 포함한다. 이외에도 과학자 사회가 공유하는 과학의 방법, 가치, 믿음, 습관까지도 포함한다.(김영식: 과학, 역사 그리고 과학사, pp.177-8)
 
  그러나 자자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가 학자로서 특별히 참신성이나 독창성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알렉상드르 코이레와 버터필드 같은 사람들로부터 배운, 과학에서의 발전이 점진적이 아니고 급격하고 단절적으로 나타나는 변화라는 관점을 보다 포괄적으로 또 체계적으로 제시했을 뿐이다.
 
  그는 과학에서 진정으로 창조적인 개념이나 이론을 성장시키는 것은 '혁명'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래도 그것들은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보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지배하는 것은 기존에 받아 들여져 온 과학인 '정상(正常)과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과학자들로부터 고립된 일부의 천재들이 반기를 들게 되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전문가들이 그 뒤를 따르면서 혁명적인 뒤집힘(顚覆)에 의해 정상과학의 패러다임이 해체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확립된다. 이 과정이 바로 과학혁명이라는 것이다. 17세기의 과학혁명은 쿤에 의하면 전형적인 패러다임 혁명이다.
 
  이런 과학혁명의 개념은 홀(A. Hall), 웨스트폴(R.Westfall) 등 여러 사람들에 의해 계속 주장되며 아직까지도 이 시기 과학발전에 대한 주된 해석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웨스트폴 같은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의 결별이야 말로 과학사에서의 불연속성을 보여주는 주된 사건으로 이로 인해 발전한 신과학은 전통적인 자연철학과는 질적으로 달라졌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도전
 
  그러나 이런 전통적인 주장은 최근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인 돕스 (B.J.T. Dobbs)는 혁명이 갑작스럽고 과격하고 완전한 변화라면 과학혁명은 이런 특징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서서히 이루어졌거니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의 결별도 완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케플러는 피타고라스주의에 몰두해 있었고 점성술사였다. 따라서 그가 수학적인 원리를 추구하기는 했으나 근대적인 천문학자로 보기는 어렵다. 또 가장 늦은 시기의 인물인 아이작 뉴턴(1642-1727)도 결코 근대 과학자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한 인물은 아니다. 그가 18세기까지 살았으나 그에게 있어 주된 관심사는 그가 명성을 얻은 물리학이나 수학이 아니라 신학(神學)과 연금술이었다.
 
  이에 대해 웨스트폴은 뉴턴이 오늘날 기억되는 것은 물리학, 광학, 수학 때문이지 신학이나 연금술 때문은 아니라고 반론을 편다. 웨스트폴의 주장은, 그들에게 중요한 점이 있다면 그들이 당시 어떻게 생각했느냐가 아니고 그것이 가져온 후대의 발전이라는 측면이다. 그것이 근대적인 과학을 발전시키는 데 공헌을 한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의 업적 가운데 지금까지 살아남아 오늘날의 과학적 사고방식을 만든 측면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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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1687)

  그러나 후대 과학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만을 강조하여 평가한다면 그 이외의 것은 경시되거나 무시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런 태도가 17세기 과학자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는 태도가 아님은 물론이다.
 
  그들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갖고 있던 생각의 전제와 가정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 그들의 업적 전체를 놓고 그것이 어떤 성격을 가진 것인지 밝힐 필요가 있다. 17세기 과학을 근대적인 과학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런 검증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제이콥(M.Jacob) 같은 사람은 돕스의 의견을 받아들여 보다 종합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과학혁명은 17세기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18세기의 자연철학자(이 당시만 해도 과학이라는 말은 사용되지 않았고 과학자들은 자신을 자연철학자로 불렀다. 과학(science)이라는 말은 19세기부터 사용된 것이다)들이 뉴턴의 업적 가운데에서 신학과 연금술을 버리고 물리학과 수학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웨스트폴의 주장보다 더 설득력이 있음은 물론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보면 17세기의 과학발전을 하나의 통합되고 완결된 역사적 사건으로서 '과학혁명'으로 부르는 것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6-18세기 유럽 과학발전의 실상을 통해 이 문제에 접근해 보자.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8-04-04 오전 9:30:49

 

<33> 근대 유럽 과학의 발전 ① 17세기 유럽과학의 발전과 유럽중심주의

 

천재들의 세기와 '과학혁명'
 
  17세기를 서양사에서는 보통 '천재들의 세기'라고 부른다. 수많은 천재들이 등장하여 이 시기 서양의 학문적 수준을 한 단계 높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에는 특히 자연과학자들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16세기의 코페르니쿠스에서부터 시작하여 17세기에는 브라헤, 케플러, 갈릴레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하비, 보일, 뉴턴 등 수많은 과학자들이 등장하고 이들에 의해 천문학, 수학, 물리학, 해부학, 생리학 등이 급격하게 발전한 것이다. 또 18세기에는 라부아지에, 프리스틀리 같은 사람에 의해 화학이 뒤늦게 이에 동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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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페르니쿠스 (Nicolaus Copericus, 1473-1543)

  특히 뉴턴은 이 모든 성과를 하나로 종합하여 유럽의 자연과학을 새로운 단계로 진전시켰다. 중세를 지배했던, 지상과 천상의 원리가 다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적인 이론을 무너뜨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세계와 우주가 하나의 수학적인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기계와 같은 것으로 믿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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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턴 (Isaac Newton, 1643(1642)~1727)
 

  그 당시에는 인간이 만든 가장 복잡한 기계가 시계였으므로 사람들은 이 우주를 거대한 시계와 같은 구조를 가진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유럽인들은 이제 세상 만물이 어떤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기계론적 세계관'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이렇게 17세기에 기초를 다진 서양 근대과학은 18세기에는 계몽사상이라는 합리적인 사상의 기초를 마련했고 19세기에 들어오면 산업혁명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서양 근대과학은 유럽 물질문명 발전에 큰 기여를 했을 뿐 아니라 유럽의 세계 지배를 달성하게 하는 데도 근본적인 요인이 되었다. 17세기의 과학 발전이 서양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이다.
 
  이런 이야기는 17세기 과학발전을 '과학혁명'으로 규정하여 높이 평가하고 근대에 있어 서양의 우월을 자연과 세계에 대한 과학적, 합리적인 인식의 결과로 보는 서양 학자들의 일반적인 주장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특히 '과학혁명'은 짧은 시간 안에 유럽 자연과학에 일대 변화를 야기했다고 생각하므로 지난 반세기 동안 과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근대 유럽과학의 발전에 대한 이런 설명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유럽중심적인 것으로 상당한 문제를 갖고 있다.
 
  '과학혁명'과 유럽중심주의
 
  서양 근대문명의 발전과 과학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많은 서양학자들이 지적해 왔다. 사실 이 둘을 연결시키는 것은 근대에 있어 서양의 우월을 합리화하는데 매우 편리하다. 서양은 과학혁명이 있어서 발전했고 동양에는 그런 것이 없어서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기 쉽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과학혁명이 서양의 우월을 가져오는 데 본질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넘어서서 서양과학이 중세시대에도 다른 곳에 비해 우월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중세의 기술과 사회변화>를 쓴 린 화이트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그는 16세기에 유럽이 앞선 것은 9세기에 이미 유럽의 농업기술이 세계의 다른 지역을 앞섰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또 유럽은 8세기에는 군사기술로, 11세기에는 공업기술로 다른 지역을 모두 앞섰다는 것이다.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있었던 1950년대식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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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린 화이트, <중세의 기술과 사회변화>, 1962
 

  그래서 많은 서양학자들은 동양에서는 수학이 발달하지 못했으므로 논리적인 사고가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과학이 발전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서양에서는 '그리스의 지적 사고의 유산이, 무엇보다 논리학과 논쟁을 통한 합리적인 대화와 의사결정이 그 후의 서양의 지적 발전의 길을 마련했다'고 주장한다. 이미 그리스 시기부터 달랐다는 것이다.
 
  물론 일부 사람들은 인도나 중국, 이슬람 문명에서 과학이 상당히 발전했다는 사실과 일부 지역에서는 13, 14세기까지 서양을 능가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슬람 과학이 14세기까지 유럽과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과학사를 폭 넓게 연구하여 중국과학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데 크게 기여한
조셉 니덤 같은 사람은 중세 시대는 물론 15세기까지 중국 과학이 우월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1644년까지는 중국과 유럽 과학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차이는 그 후에 생겼다는 것이다.
 
  이들은 아시아 과학이 근대과학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서양에서만 그렇게 된 것을 사회경제적, 문화적, 제도적인 여러 차이의 결과로 본다. 즉 서양에서만 근대과학이 발전한 것은 서양사회의 여러 특징들과 법, 종교, 철학, 신학 등 서양의 여러 문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서양에서의 중세대학의 발전, 자유로운 연구 분위기의 존재,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결여 등 온갖 주장을 다 편다.
로버트 머튼 같은 사람은 그 원인을 프로테스탄티즘과 관련시킨다. 청교도들은 그들의 세계관 안에서 과학과 지식활동에 대한 어떤 유의미성을 찾아야 했다는 것이다. 이는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발전을 연결시키는 베버의 테제를 과학에 적용한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 유럽과학이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손쉬운 주장들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이슬람과학이나 중국과학 등 비유럽과학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으며 근대 유럽인의 독창성을 과장하여 유럽과학 발전의 실상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 근대의 어떤 중요한 역사적 사실에건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이려 하는 것은 20세기 후반 서양 역사학자들의 특유한 태도이나 이런 주장들 가운데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도 많다. 17세기 '과학혁명'을 통해 근대과학과 관련한 이 문제에 한번 접근해 보자.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8-04-02 오전 9:40:06


<32> 계몽사상의 재조명 ⑤ 차별의 원리로서의 계몽사상

 

코스모폴리타니즘인가? 차별의 원리인가?
 
  계몽사상은 인간성의 동질성을 내세운다. 인간 존재는 그 인간성 때문에 모두가 갖고 있는 자산인 이성을 사용할 수 있고 따라서 점차 불합리한 미신이나 나쁜 관습을 내버리고 인간사를 보편적인 자연적 질서와 조화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역사의 진보는 인간 각 집단들의 문화에 점점 더 조화를 가져와 세계는 사회나 문화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진정한 코스모폴리타니즘적 전체를 이룬다. 인류는 전쟁이라는 정복단계에서 상업과 상호교류의 단계로 나아가 국가 사이의 분쟁도 이성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전쟁이 없는 진정한 평화가 이 세계에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계몽사상은 코스모폴리타니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주장된다. 서양 역사가들이 계속 강조해온 이야기이다. 그러면 계몽사상은 진정으로 코스모폴리타니즘적 성격을 갖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유럽 내부에서나 외부에서나 마찬가지이다.
 
  계몽사상가들은 인간이 갖는 자연적 권리의 개념을 점점 더 특권이 아니라 인간성의 소유에 근거 지었다. 인간이 권리를 갖는 것은 그가 귀족의 지위와 법적 특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인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성에 기초한 이 보편적인 권리의 개념을 실제로 적용하기는 어려웠다. 그것은 모든 소외 집단들, 여성, 노예, 하인, 가난한 사람, 못 배운 사람도 인간적 권리를 갖고 있고 나아가 정치적 권리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은 누구에게나 동등한 참정권이 주어져야 한다는 이야기이나 대부분의 계몽사상가들은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유럽 내부에서도 그렇지만 비유럽인에 대해서는 더 심하다. 그것은 비유럽인들도 앞으로 이성과 합리성을 발전시킬 가능성은 갖고 있으나 아직은 그런 상태에 있지 않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서유럽인들은 심지어 폴란드, 러시아 등 동유럽인들마저도 야만적이라며 멸시하고 차별했다.
 
  계몽사상 시기의 아시아 사람들에 대한 태도, 특히 중국인에 대한 태도는 찬양과 멸시가 뒤섞인 것이었다. 한때는 중국문화를 열렬히 동경하는 중국열풍이 분 적도 있다. 그러나 18세기 말부터는 낮추어보는 경향이 강해지고 19세기에 들어서면 그들도 점차 야만인으로 고착된다. 그러니 다른 지역의 비유럽인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아프리카인이 유럽인과 동등한 인간적 권리를 갖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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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2년, 아편무역을 목적으로한 중국과의 수교를 위해 건륭제를 찾아간 영국의 매카트니 특사. 매카트니는 귀국 후에 남긴 기록에서 당시의 중국이 강대하기는 하나 영국에 비해 사회적으로 뒤떨어졌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계몽사상의 원리는 서유럽인에게는 제한된 수준에서 보편적 원리이고 코스모폴리타니즘적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겠으나 비유럽세계에 관한 한 그것은 보편적 원리가 아니라 오히려 차별의 원리가 된다.
 
  사실 계몽사상은 유럽인들이, 합리적인 유럽문화와 이성을 가진 유럽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하고 비유럽인과 그 문화에 대한 우월성을 주장하는 데 큰 공헌을 한 사상체계이다. 그래서 그 후 서양인들이 보편성으로서의 유럽문화가 야만상태에 있는 비유럽문화에 대해 갖는 지배권을 자연스레 믿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계몽사상은 근대세계에서 유럽인이 비유럽인을 차별하고 배제하도록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코스모폴리타니즘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이다.
 
  계몽사상과 식민주의
 
  18세기는 유럽국가들 사이에서 식민지 확보를 위해 치열한 경쟁이 전개된 시기이다. 사실 이 시기의 거의 모든 전쟁은 식민지 전쟁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만큼 식민지는 유럽인들의 생활에 본질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 계몽사상가들은 식민주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들은 일반적으로 스페인 사람들의 아메리카 경영을 비판했다. 그것이 잔학성, 야만성, 광신성,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페인 인들의 착취나 억압을 비판했으나 한 편에서는 자신들의 식민주의는 옹호해야 하는 이중적 위치에 있었다. 유럽의 번영이 그것에 얼마나 많이 의존하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식민주의를 옹호하거나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적극적으로 반대한 사람은 별로 없다. 반대한 사람들도 대체로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착취라는 비도덕적 행위 대신 발전시킨 논리가 바로 '상업'행위이다. 사실 상업의 중시는 18세기의 일반적인 풍조였다. 볼테르도 '잉글랜드인들을 부유하게 만든 상업은 그들을 자유롭게 만들었고, 자유가 반대로 상업을 팽창시켰다. 이것이 영국 민족을 위대하게 만들었다'고 영국의 상업 발전을 찬양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들은 상업의 유용성을 주장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상업을 도덕적 가치로까지 격상시켰다. 상업이 본국과 식민지 양쪽에 모두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으며 식민지에서도 상업을 통해 계몽, 이성을 구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상업활동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혜택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가. 유럽의 식민국가들은, 식민지의 직접적 착취는 논외로 한다 하더라도, 자기나라의 식민지가 다른 나라나 다른 나라의 식민지와 교역하는 것을 막았고 식민지의 상공업에 여러 가지 제약을 가했다. 본국의 상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본국과 식민지와의 교역관계는 불공정 무역이자 착취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뿐이 아니다. 18세기까지 식민지 무역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것이 노예무역이었다. 18세기 후반은 노예무역이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1780년대에는 매년 60만에서 100만의 아프리카인이 아메리카로 팔려나갔다. 그 잘난 영국이나 프랑스나 다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상업의 찬양은 한 편에서 노예무역의 비도덕적인 성격을 가리는 자기기만적 행위이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1787년에 노예무역폐지협회가, 프랑스에서는 1788년에 <흑인 친구의 회>가 설립되어 노예무역의 폐지를 주장했으나 그 활동은 미미했으며 대중은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계몽사상가 가운데 일부 양심적인 사람들은 식민지 무역의 도덕적 기초가 의심스럽다는 점을 지적했다. 특히 루소 같은 사람이 그렇다. 그는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식민주의는 그것이 서양 사회를 지탱하는 방식에서 인간사회 전체에 불평등을 지속시키는 기제가 되었고 계몽의 실현을 막는 영구적인 장애물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소수자의 것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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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자크 루소 (Jean-Jacques Rousseau, 1712 -1778)

  계몽사상과 인종주의
 
  계몽사상은 인종주의와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이 시기가 인종주의가 본격적으로 이론화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몽사상가들은 대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인종주의자이기도 했다. 이성의 힘과 합리성을 믿으면서도 한 편에서는 인종주의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는 흄이나 볼테르, 달랑베르, 칸트, 헤겔 같은 사람의 경우 마찬가지이다. 미국을 독립시킨 토마스 제퍼슨을 비롯한 건국의 아버지들도 계몽사상에서 받아들인 고상한 이상들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인종주의자들이었다. 따라서 인종주의와 계몽사상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인종주의는 계몽사상의 본질의 하나라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이들이 쓴 글들 가운데 많은 것이 유럽인의 인종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유럽인들이 문화적, 인종적 우월감을 느끼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의 글에서 '이성'과 '문명'은 백인이나 유럽인과 동의어로 사용되었고, 비이성과 야만은 비백인이자 비유럽인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예만 들자. 데이비드 흄은 <민족성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민족 사이에 성격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여러 도덕적, 물리적 결정 요인 때문이지만, 주로 도덕적 요인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도덕적 요인은 관습, 정부, 경제적 조건, 외교관계 같은 것들이며 물리적인 요인은 기후와 공기이다.
 
  이렇게 그는 사회적인 요인이 민족성의 차이를 가져오는 것으로 믿었으나 인종적 차이는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타고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백인만이 예술과 과학에서 주목할 만하고 정교한 것을 만들었고 백인 가운데 가장 낮은 지위에 있는 고대 게르만 인, 타타르 인이라도 말할 만한 것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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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비드 흄 (David Hume, 1711-1776)

  칸트는 인간의 자유와 도덕적 자율성을 매우 강조한 사람이지만 퀘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철학뿐 아니라 인류학과 지리학도 함께 가르쳤다. 그 당시에 이들 학문은 전형적인 인종주의 학문들로서 그는 그 영향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생전에 출판한 <실용적 입장에서의 인류학>이나 사후에 출판된 <자연지리학> 같은 책에 인종과 인종주의와 관련된 내용이 가득 실려 있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후대의 철학자들은 계몽사상가들의 이런 글들은 '저널리스틱'한 글이라든가, 진지한 철학적 관심과는 관계없는 글로 간주하여 소홀하게 취급했다. 이렇게 해서는 계몽사상가들의 모습을 바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계몽사상과 유럽중심주의
 
  계몽사상이 서양을 근대 사회로 나아가도록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인간사회를 합리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했고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래서 종교적 관용, 자연법과 자연권 개념의 발전, 정치적 자유의 확대 등은 서양 근대문화의 중요한 유산이 되었고 그것은 비유럽세계에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따라서 계몽사상을 일면적으로 비판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그것이 갖고 있는 한계도 매우 분명하고 크다. 특히 그것이 비유럽인들에 대해 보이는 차별적 태도는 비유럽인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보편적인 원리인 것처럼 주장하나 실제로는 비유럽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의 논리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랑하는 유럽의 문명과 진보는 비유럽 세계의 정복과 식민지배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또 계몽사상가들이 강조하는 인간의 자연권이 비유럽인들에게도 적용되었다면 식민주의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서양 역사가들이 계몽사상을 계속 높이 평가해 온 것은 그것이 서양의 정신적, 문화적 우월성을 주장하려는 큰 기획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르네상스 - 과학혁명 - 계몽사상으로 이어지는 고리의 하나로 만들려는 것이다.
 
  그리고 서양인들의 이런 태도는 최근의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본질적으로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2001년에 <급진적 계몽사상>이라는 책을 낸 조나단 이스라엘이 좋은 예이다.
 
  '계몽사상과 그 결과는 유럽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만약 계몽사상이 유럽사에서 세속화와 합리화를 위한 가장 극적인 단계라면 그것은 서양문명의 역사만이 아니라 보다 넓은 역사, 즉 전 세계 역사에도 마찬가지로 그렇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그것은 인간의 역사의 가장 중요한 전환이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몇 년 된 이야기이지만 한 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대학교수들에게 거의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외국학자가 독일철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였다. 그런데 그는 계몽사상의 합리성을 매우 중시하며 계몽사상을 옹호하는 사람이다. '계몽사상에는 자유, 정의, 객관성 같은 아직도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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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 )

  하버마스가 독일사회의 우경화에 대한 반발로서 합리성을 강조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에게는 폭력적인 나치 독재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응답한 한국 지식인들이 하버마스가 강조하는 계몽사상의 합리성이 담고 있는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를 좋아하는 이유가 한국지식인들의 특징 중의 하나인 보편주의, 특히 서양 보편주의에 대한 지나친 사랑의 결과라면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어떤 역사적 사실의 이해도 바른 역사적 문맥에서 보지 않으면 공허할 수밖에 없다. 계몽사상의 합리성이 실제로 역사 속에서 비유럽인들에게 거대한 폭력과 야만성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을 잘 기억할 필요가 있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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