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프레시안 2008-04-02 오전 9:40:06


<32> 계몽사상의 재조명 ⑤ 차별의 원리로서의 계몽사상

 

코스모폴리타니즘인가? 차별의 원리인가?
 
  계몽사상은 인간성의 동질성을 내세운다. 인간 존재는 그 인간성 때문에 모두가 갖고 있는 자산인 이성을 사용할 수 있고 따라서 점차 불합리한 미신이나 나쁜 관습을 내버리고 인간사를 보편적인 자연적 질서와 조화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역사의 진보는 인간 각 집단들의 문화에 점점 더 조화를 가져와 세계는 사회나 문화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진정한 코스모폴리타니즘적 전체를 이룬다. 인류는 전쟁이라는 정복단계에서 상업과 상호교류의 단계로 나아가 국가 사이의 분쟁도 이성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전쟁이 없는 진정한 평화가 이 세계에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계몽사상은 코스모폴리타니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주장된다. 서양 역사가들이 계속 강조해온 이야기이다. 그러면 계몽사상은 진정으로 코스모폴리타니즘적 성격을 갖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유럽 내부에서나 외부에서나 마찬가지이다.
 
  계몽사상가들은 인간이 갖는 자연적 권리의 개념을 점점 더 특권이 아니라 인간성의 소유에 근거 지었다. 인간이 권리를 갖는 것은 그가 귀족의 지위와 법적 특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인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성에 기초한 이 보편적인 권리의 개념을 실제로 적용하기는 어려웠다. 그것은 모든 소외 집단들, 여성, 노예, 하인, 가난한 사람, 못 배운 사람도 인간적 권리를 갖고 있고 나아가 정치적 권리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은 누구에게나 동등한 참정권이 주어져야 한다는 이야기이나 대부분의 계몽사상가들은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유럽 내부에서도 그렇지만 비유럽인에 대해서는 더 심하다. 그것은 비유럽인들도 앞으로 이성과 합리성을 발전시킬 가능성은 갖고 있으나 아직은 그런 상태에 있지 않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서유럽인들은 심지어 폴란드, 러시아 등 동유럽인들마저도 야만적이라며 멸시하고 차별했다.
 
  계몽사상 시기의 아시아 사람들에 대한 태도, 특히 중국인에 대한 태도는 찬양과 멸시가 뒤섞인 것이었다. 한때는 중국문화를 열렬히 동경하는 중국열풍이 분 적도 있다. 그러나 18세기 말부터는 낮추어보는 경향이 강해지고 19세기에 들어서면 그들도 점차 야만인으로 고착된다. 그러니 다른 지역의 비유럽인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아프리카인이 유럽인과 동등한 인간적 권리를 갖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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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2년, 아편무역을 목적으로한 중국과의 수교를 위해 건륭제를 찾아간 영국의 매카트니 특사. 매카트니는 귀국 후에 남긴 기록에서 당시의 중국이 강대하기는 하나 영국에 비해 사회적으로 뒤떨어졌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계몽사상의 원리는 서유럽인에게는 제한된 수준에서 보편적 원리이고 코스모폴리타니즘적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겠으나 비유럽세계에 관한 한 그것은 보편적 원리가 아니라 오히려 차별의 원리가 된다.
 
  사실 계몽사상은 유럽인들이, 합리적인 유럽문화와 이성을 가진 유럽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하고 비유럽인과 그 문화에 대한 우월성을 주장하는 데 큰 공헌을 한 사상체계이다. 그래서 그 후 서양인들이 보편성으로서의 유럽문화가 야만상태에 있는 비유럽문화에 대해 갖는 지배권을 자연스레 믿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계몽사상은 근대세계에서 유럽인이 비유럽인을 차별하고 배제하도록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코스모폴리타니즘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이다.
 
  계몽사상과 식민주의
 
  18세기는 유럽국가들 사이에서 식민지 확보를 위해 치열한 경쟁이 전개된 시기이다. 사실 이 시기의 거의 모든 전쟁은 식민지 전쟁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만큼 식민지는 유럽인들의 생활에 본질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 계몽사상가들은 식민주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들은 일반적으로 스페인 사람들의 아메리카 경영을 비판했다. 그것이 잔학성, 야만성, 광신성,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페인 인들의 착취나 억압을 비판했으나 한 편에서는 자신들의 식민주의는 옹호해야 하는 이중적 위치에 있었다. 유럽의 번영이 그것에 얼마나 많이 의존하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식민주의를 옹호하거나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적극적으로 반대한 사람은 별로 없다. 반대한 사람들도 대체로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착취라는 비도덕적 행위 대신 발전시킨 논리가 바로 '상업'행위이다. 사실 상업의 중시는 18세기의 일반적인 풍조였다. 볼테르도 '잉글랜드인들을 부유하게 만든 상업은 그들을 자유롭게 만들었고, 자유가 반대로 상업을 팽창시켰다. 이것이 영국 민족을 위대하게 만들었다'고 영국의 상업 발전을 찬양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들은 상업의 유용성을 주장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상업을 도덕적 가치로까지 격상시켰다. 상업이 본국과 식민지 양쪽에 모두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으며 식민지에서도 상업을 통해 계몽, 이성을 구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상업활동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혜택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가. 유럽의 식민국가들은, 식민지의 직접적 착취는 논외로 한다 하더라도, 자기나라의 식민지가 다른 나라나 다른 나라의 식민지와 교역하는 것을 막았고 식민지의 상공업에 여러 가지 제약을 가했다. 본국의 상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본국과 식민지와의 교역관계는 불공정 무역이자 착취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뿐이 아니다. 18세기까지 식민지 무역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것이 노예무역이었다. 18세기 후반은 노예무역이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1780년대에는 매년 60만에서 100만의 아프리카인이 아메리카로 팔려나갔다. 그 잘난 영국이나 프랑스나 다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상업의 찬양은 한 편에서 노예무역의 비도덕적인 성격을 가리는 자기기만적 행위이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1787년에 노예무역폐지협회가, 프랑스에서는 1788년에 <흑인 친구의 회>가 설립되어 노예무역의 폐지를 주장했으나 그 활동은 미미했으며 대중은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계몽사상가 가운데 일부 양심적인 사람들은 식민지 무역의 도덕적 기초가 의심스럽다는 점을 지적했다. 특히 루소 같은 사람이 그렇다. 그는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식민주의는 그것이 서양 사회를 지탱하는 방식에서 인간사회 전체에 불평등을 지속시키는 기제가 되었고 계몽의 실현을 막는 영구적인 장애물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소수자의 것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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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자크 루소 (Jean-Jacques Rousseau, 1712 -1778)

  계몽사상과 인종주의
 
  계몽사상은 인종주의와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이 시기가 인종주의가 본격적으로 이론화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몽사상가들은 대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인종주의자이기도 했다. 이성의 힘과 합리성을 믿으면서도 한 편에서는 인종주의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는 흄이나 볼테르, 달랑베르, 칸트, 헤겔 같은 사람의 경우 마찬가지이다. 미국을 독립시킨 토마스 제퍼슨을 비롯한 건국의 아버지들도 계몽사상에서 받아들인 고상한 이상들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인종주의자들이었다. 따라서 인종주의와 계몽사상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인종주의는 계몽사상의 본질의 하나라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이들이 쓴 글들 가운데 많은 것이 유럽인의 인종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유럽인들이 문화적, 인종적 우월감을 느끼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의 글에서 '이성'과 '문명'은 백인이나 유럽인과 동의어로 사용되었고, 비이성과 야만은 비백인이자 비유럽인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예만 들자. 데이비드 흄은 <민족성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민족 사이에 성격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여러 도덕적, 물리적 결정 요인 때문이지만, 주로 도덕적 요인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도덕적 요인은 관습, 정부, 경제적 조건, 외교관계 같은 것들이며 물리적인 요인은 기후와 공기이다.
 
  이렇게 그는 사회적인 요인이 민족성의 차이를 가져오는 것으로 믿었으나 인종적 차이는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타고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백인만이 예술과 과학에서 주목할 만하고 정교한 것을 만들었고 백인 가운데 가장 낮은 지위에 있는 고대 게르만 인, 타타르 인이라도 말할 만한 것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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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비드 흄 (David Hume, 1711-1776)

  칸트는 인간의 자유와 도덕적 자율성을 매우 강조한 사람이지만 퀘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철학뿐 아니라 인류학과 지리학도 함께 가르쳤다. 그 당시에 이들 학문은 전형적인 인종주의 학문들로서 그는 그 영향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생전에 출판한 <실용적 입장에서의 인류학>이나 사후에 출판된 <자연지리학> 같은 책에 인종과 인종주의와 관련된 내용이 가득 실려 있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후대의 철학자들은 계몽사상가들의 이런 글들은 '저널리스틱'한 글이라든가, 진지한 철학적 관심과는 관계없는 글로 간주하여 소홀하게 취급했다. 이렇게 해서는 계몽사상가들의 모습을 바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계몽사상과 유럽중심주의
 
  계몽사상이 서양을 근대 사회로 나아가도록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인간사회를 합리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했고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래서 종교적 관용, 자연법과 자연권 개념의 발전, 정치적 자유의 확대 등은 서양 근대문화의 중요한 유산이 되었고 그것은 비유럽세계에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따라서 계몽사상을 일면적으로 비판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그것이 갖고 있는 한계도 매우 분명하고 크다. 특히 그것이 비유럽인들에 대해 보이는 차별적 태도는 비유럽인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보편적인 원리인 것처럼 주장하나 실제로는 비유럽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의 논리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랑하는 유럽의 문명과 진보는 비유럽 세계의 정복과 식민지배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또 계몽사상가들이 강조하는 인간의 자연권이 비유럽인들에게도 적용되었다면 식민주의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서양 역사가들이 계몽사상을 계속 높이 평가해 온 것은 그것이 서양의 정신적, 문화적 우월성을 주장하려는 큰 기획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르네상스 - 과학혁명 - 계몽사상으로 이어지는 고리의 하나로 만들려는 것이다.
 
  그리고 서양인들의 이런 태도는 최근의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본질적으로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2001년에 <급진적 계몽사상>이라는 책을 낸 조나단 이스라엘이 좋은 예이다.
 
  '계몽사상과 그 결과는 유럽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만약 계몽사상이 유럽사에서 세속화와 합리화를 위한 가장 극적인 단계라면 그것은 서양문명의 역사만이 아니라 보다 넓은 역사, 즉 전 세계 역사에도 마찬가지로 그렇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그것은 인간의 역사의 가장 중요한 전환이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몇 년 된 이야기이지만 한 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대학교수들에게 거의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외국학자가 독일철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였다. 그런데 그는 계몽사상의 합리성을 매우 중시하며 계몽사상을 옹호하는 사람이다. '계몽사상에는 자유, 정의, 객관성 같은 아직도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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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 )

  하버마스가 독일사회의 우경화에 대한 반발로서 합리성을 강조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에게는 폭력적인 나치 독재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응답한 한국 지식인들이 하버마스가 강조하는 계몽사상의 합리성이 담고 있는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를 좋아하는 이유가 한국지식인들의 특징 중의 하나인 보편주의, 특히 서양 보편주의에 대한 지나친 사랑의 결과라면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어떤 역사적 사실의 이해도 바른 역사적 문맥에서 보지 않으면 공허할 수밖에 없다. 계몽사상의 합리성이 실제로 역사 속에서 비유럽인들에게 거대한 폭력과 야만성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을 잘 기억할 필요가 있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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