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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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인터넷한겨레> 독자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은 <중국의 세기>에 이어 영국인들의 독특한 삶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20세기 포토다큐 세계사 2-영국의 세기> (지은이 브라이언 모이나한)를 연재한다.

머나먼 외국에서 수백만의 생명을 책임졌던 젊은 외교관들,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그 패션을 모방하곤 하는 에드워드 시대의 우아한 사람들, 디킨스의 소설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빈민가의 귀화인들, 우풍당당했지만 온갖 스캔들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왕족들, 조지 오웰 등 천재 문학가들... 전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대영제국 100년의 모습을 생생한 사진으로 전한다. 이번에도 출판사 ‘북폴리오’의 도움을 받았다.

영국의 세기는 모두 6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순서는
1. 식민지의 아버지 2. 왕실스캔들 3. 노동자들의 삶 4. 전쟁수행역할 5. 여왕여제 6. 예술가의 초상등이다.

 

사진으로 보는 영국의 20세기 ① 식민지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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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협조적인 버마인들이 쳇바퀴에서 벌을 받는 모습이다. <북폴리오> 제공
제국주의자 프레더릭 설루스가 지적했듯이, 반란을 다루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결국 ‘체벌’이었다. 비협조적인 피지배인들에 맞서 토벌군이 수백 차례 파견되었다. 영국 군인들은 그들을 ‘어중이떠중이’라고 불렀다. <북폴리오> 제공

지난 1월, <인터넷한겨레> 독자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은 <중국의 세기>에 이어 영국인들의 독특한 삶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20세기 포토다큐 세계사 2-영국의 세기> (지은이 브라이언 모이나한)를 연재한다.

머나먼 외국에서 수백만의 생명을 책임졌던 젊은 외교관들,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그 패션을 모방하곤 하는 에드워드 시대의 우아한 사람들, 디킨스의 소설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빈민가의 귀화인들, 우풍당당했지만 온갖 스캔들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왕족들, 조지 오웰 등 천재 문학가들... 전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대영제국 100년의 모습을 생생한 사진으로 전한다. 이번에도 출판사 ‘북폴리오’의 도움을 받았다.

영국의 세기는 모두 6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순서는

1. 식민지의 아버지 2. 왕실스캔들 3. 노동자들의 삶 4. 전쟁수행역할 5. 여왕여제 6. 예술가의 초상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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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포된 버마군들이 나무 구조물에 묶여 있다. <북폴리오> 제공
버마는 영국의 지배에 순순히 굴복하지 않았다. 식민화 과정은 1824년에 시작되었지만, 1885년에 상부 버마가 함락될 때까지 완수되지 못했다. 이 나라는 1937년의 자치 법령에 의해 직할 식민지가 될 때까지 인도의 한 지역으로 편입되어 통치되었다. 여기서 사진사는 엄청난 도덕적 딜레마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제국은 영국의 패권을 의미했다. 제국은 또한 자유를 대표한다고 자임했다. 장기적으로 볼 때 두 가지를 모두 성취할 수는 없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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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년 인도 체낙사바 사원에서 야영 중인 한 여행객. <북폴리오> 제공
넘쳐나는 자신감과 남의 집을 자기 것인 양 다루는 뻔뻔함이 사진에 잘 나타나 있다. 1900년에 이 여행객이 야영한 곳은 인도의 체낙사바 사원이다. 이 위대한 아대륙과 3억의 인구가 겨우 5,000명밖에 되지 않는 영국의 인도 관할 공무원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영국군 역시 인도 군대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숫자였다. 인도 육군은 영국 장교들이 지휘했지만 50년 전에도 그랬듯이 항상 반란을 일으킬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산술적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영국인 개개인들은 항상 우월함을 과시해야만 했다. 물론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권위’와 노골적인 오만함은 때때로 구분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브리티시 라지’라고 불렸던 영국의 인도 통치는 페어플레이로 명성을 날렸는데, 이는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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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 총독이었던 커즌과 거부의 상속녀이자 미국 출신인 그의 부인이 1902년 4월 하이데라바드 근처에서 포획물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북폴리오> 제공
뛰어난 사격솜씨를 지녔던 그는 호랑이 사냥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 녀석이 다가오면 심장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소. 그 녀석 발밑에서 잎사귀가 바스락대는 소리만 들릴 뿐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 해 가을 그는 베트와 강에서 낚시를 하면서 자신이 다비셔 출신임을 새삼 느끼고 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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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경(가운데)이 대형동물 사냥에서 잡은 희생물들 앞에서 수행원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북폴리오> 제공
서인도 제도 식민지의 젊은 행정관이자 허리케인 보험의 창시자이기도 했던 헨리 경은 관개 시스템과 실험적 플랜테이션도 만들어냈다. 그는 바베이도스, 그레나다, 골드코스트(현재의 가나), 그리고 도미니카 등의 발령지를 돌아다녔다. 우간다를 떠난 후 그는 북부 나이지리아 총독으로 승진했지만, 런던으로부터의 명령을 거스르고 선교사들의 카노 행을 허락함으로써 경력을 망쳐버렸다. 이 일로 리워드 제도의 총독으로 좌천되었으며, 마지막 직책은 1924년의 모리셔스 총독이었다. 많은 회고록, 소설, 마법 연구서 등을 저술했으며,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식민 제도에 관한 연구로 특히 유명하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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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지 못할 영국인. 1910년에 인도에서는 아편이 조심스럽게 측량·등록되는 등 엄격한 생산통제가 시행되었다. <북폴리오> 제공
영국 선교사들은 사람들에게 믿음과 평안을 전파하러 중국에 갔지만, 그곳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영국이 통제하는 아편무역으로 인해 유린당한 마약 중독자들이었다. 1910년에 인도에서는 아편이 조심스럽게 측량·등록되는 등 엄격한 생산통제가 시행되었다. 아편전쟁 때와 같은 무자비한 해군력의 행사가 1842년의 홍콩 점령에서도 되풀이되었는데, 이는 중국 시장을 영국의 아편업자들에게 개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편거래는 이후 영국령 인도에서의 세입 가운데 7분의 1을 차지하게 되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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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9년 3월 17일 홍콩의 스탈렛 만에 ‘새 영토’를 나타내는 최초의 경계표지가 세워지는 모습. <북폴리오> 제공
중국 본토의 ‘새 영토’는 홍콩 섬의 방어를 위해 임차되었는데, 홍콩은 이미 1842년에 영국에 영구적으로 할양되었다. ‘새 영토’ 임차의 종료와 함께 1997년 7월 1일에 중국 내 식민지 전체가 반환되었다. 식민지배 하에서 번영을 구가했던 홍콩의 중국인들은 이 무렵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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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의 마지막 총통 로드 마운트배튼의 부인 레이디 에드위나 마운트배튼이 델리에 모인 7,000명의 하객 앞에서 영국령 인도 및 그녀의 친구이자 인도의 새 수상인 네루 선생에게 작별을 고하고 있다. <북폴리오> 제공

인도는 영국이 제국 가운데 가장 먼저 철수한 곳이자 가장 끔찍한 유혈 사태가 벌어진 곳이기도 했다. 인도는 1947년에 독립하면서 결국 인도와 이슬람 파키스탄으로 분할되었다. 인도의 새 수상 네루는 잉글랜드의 해로학교에 다녔는데, 1906년에 그곳에서 이탈리아의 애국자 가리발디의 전기를 읽었다. 이제 그 독서가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사진으로 보는 영국의 20세기 ② 왕실 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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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의 에드워드 7세인 웨일즈 공의 정부였던 릴리 랭트리. 사진/라파예트. <북폴리오> 제공
미래의 에드워드 7세인 웨일즈 공은 1870년에 한 이혼 소송의 증인으로 거명되면서 스캔들을 일으켰고, 1891년에는 카드게임 사기와 관련된 소송에 증인으로 출석한 적도 있었다. 물론 그의 어머니가 이를 달가워할 리 없었다. 그의 정부인 릴리 랭트리는 ‘저지의 릴리’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저지의 주임사제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배우가 되었고 당시 매우 뛰어난 미인이었지만, 사진을 잘 받는 스타일은 아니었던 듯하다.

당시 언론은 전반적으로 지금보다 훨씬 더 신중한 편이었지만, 한 스포츠 신문이 한 줄짜리 만평을 통해 이 스캔들을 기사화한 적이 있었다. “황태자와 릴리 랭트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로부터 약 1주일 후 이 신문은 이렇게 덧붙였다. “담요 한 장조차도.” 그녀의 애인이 마침내 왕위에 올랐을 때, 그녀는 이미 재혼하여 릴리 드 바스라는 이름의 부인이 되어 있었고 유명한 경주마를 소유하고 있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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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애나가 황태자와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세인트폴 성당 계단 앞에 도착하고 있다. <북폴리오> 제공
다이애나 비는 이혼 직후 “파란만장한 결혼생활”이었다고 소회했다. 이 왕실 로맨스는 전 세계적인 동화가 되었다. 12억의 텔레비전 시청자들이 머지않아 깨질 이 로열 커플의 혼인서약을 지켜보았다.

찰스 왕자는 유부녀 커밀라 파커 볼스와의 오랜 연분 관계를 다시 시작했다. 그는 파커 볼스의 첫아이의 대부였다. 예의가 좀더 중요했던 시대에는 이런 상황에서도 왕실의 중매결혼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레이디 다이’는 결코 묵묵히 인내하는 대륙형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위그 계열 귀족 가문의 혈기 왕성한 후손이었다. 1980년 무렵 스캔들을 캐내는 일은 피를 보는 스포츠처럼 과열되어 있었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파편적인 전화도청 내용, 훔쳐낸 사진들, 그리고 텔레비전 인터뷰를 통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곧 ‘전하Royal Highness’라는 칭호를 박탈당했다. 이러한 기습 공격에 그녀는 자신이 ‘하트의 여왕Queen of Hearts’이라고 맞받아쳤는데, 그녀의 대조상이자 군인이었던 말버러 공작이 그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아마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지 않았을까.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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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거릿 공주. <북폴리오> 제공
마거릿 공주는 아버지의 공중 경호대원이자 전투기 조종사였던 피터 타운젠드와 사랑에 빠졌다. 1974년 왕실의 남아프리카 순방 때 촬영된 이 사진에서 그는 차 앞쪽에 타고 있다(왼쪽/사진 이언 로이드). 당시 열일곱 살이던 그녀는 언니 엘리자베스와 함께 왕과 왕비 앞쪽에 앉아 있다.

타운젠드는 1955년에 이혼했지만, 공주는 “기독교에서 결혼은 영구불변의 것이라는 교회의 가르침을 거스를 수 없어” 두 사람의 로맨스가 끝났다고 발표했다. 타운젠드가 참석한 마지막 주말 야유회를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오는 그녀의 눈빛은 슬픔으로 가득했다(오른쪽/사진 데릭 버윈).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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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위식. 사진/레그 스펠러. <북폴리오> 제공
할머니 옆에서 턱을 괴고 있는 찰스 왕자는 이제 새로운 왕위 계승자가 되었지만, 즉위식의 위풍당당함에 별로 관심이 없는 표정이다. 두 번째 줄에는 그의 친할머니이자 필립 공의 어머니인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주가 그곳의 화려한 분위기와 잘 맞지 않는 그녀 특유의 종교적인 복장을 하고서 근엄한 모습으로 서 있다. 즉위식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첫 번째 대형행사였는데, 윈저 왕조는 나중에 이 대중매체와 아주 깊은 인연을 맺게 될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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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왕실 근위대원과 귀족 부인이 1911년 조지 5세의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옆에 지나가던 그들보다 덜 고귀한 신분의 백성들이 쳐다보고 있다. <북폴리오> 제공
그는 마셜 백작이 하객들의 자리 안내를 위해 선발한 50명의 ‘황금 부관’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근위대 장교의 생활은 매우 유쾌한 것이어서 대령의 경우 1년에 6개월, 소령의 경우에는 5개월간이나 휴가를 즐길 수 있었다. 물론 군인 급여만 가지고는 도저히 충당할 수 없는 품위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사적 수입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그 밖에도 귀찮은 일이 몇 가지 있었다. 무엇보다도 우선 전쟁에 나가 싸워야 했고, 근위병 연대의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주의해야 하는 사항들도 여럿 있었다. 버지니아 담배를 피운다든가, 왈츠를 출 때 뒷걸음질친다든가, 공공장소에서 우편물을 나른다든가, 애스컷 동쪽 지역에서 갈색 신발을 신는다든가 하는 행동은 금물이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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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국 전체의 작위귀족들이 1953년의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사원 옆에 위치한 상원으로 모여들고 있다. 사진/해리 토드.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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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기념 초상화를 그리는 세실 비턴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세실 비턴.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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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위식 복장을 하고서 아이들과 포즈를 취한 말버러 공작부인. 사진/라파예트. <북폴리오> 제공
국내의 금고가 바닥나면 언제든 미국의 부자 상속녀를 수입하여 다시 채울 수 있었는데, 말버러 공작부인이 그런 경우다. 그녀가 약간 뻣뻣해 보이는 것은 보석으로 치장된 꽉 조이는 목걸이 때문이거나, 아니면 이런 영국식 예의가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원래 이름은 콘수엘로 밴더빌트였으며, 미국에서 증기선과 철도를 통해 돈을 벌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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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크 공작인 동생 조지(왼쪽)와 웨일즈 공인 에드워드가 보즈 라이언 가문의 저택인 글래미스 성을 방문 중인 모습. <북폴리오> 제공
조지 5세가 서거하자 둘 가운데 형이 즉위하여 에드워드 8세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월리스 심슨과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이혼녀였다. 왕은 결코 그녀와 헤어질 마음이 없었고, 영국 국교회는 절대 그녀를 왕비로 인정할 수 없었다.

남부 웨일즈의 아이들은 뛰어다니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길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래요.

심슨 부인 참 예쁘죠?

벌써 두 번이나 결혼했는데

이젠 에드워드의 방문을 두드리네요.

퇴위 후 에드워드와 월리스는 프랑스로 영원한 망명길에 올랐다. 수줍음 많고 말도 더듬던 요크 공작은 마지못해 즉위하여 조지 6세가 되었다.

그의 용기는 형이 나치와 파시스트에 대해 괴팍한 태도를 취했던 것과 대조를 이루었고, 국민들은 둘 가운데 더 훌륭한 사람이 왕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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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실 가족의 기념사진. <북폴리오> 제공
빅토리아 여왕은 ‘유럽의 할머니’로서 많은 군주들의 조상이었지만, 그녀의 후손들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게 되었다. 끝이 뾰족한 윙 칼라 셔츠를 입고 있는 독일의 빌헬름 2세 역시 빅토리아의 여러 손자 가운데 한 명으로, 여기서는 또 다른 손자인 잉글랜드의 조지 5세로부터 영접을 받고 있다. 메리 왕비가 그들 사이에 서 있다. 항해복 차림의 왕자와 공주들 중에는 미래의 에드워드 8세와 그 동생인 조지 6세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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