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한겨레
사진으로 보는 영국의 20세기 ⑤ 여왕 여제
여왕 여제에서 철의 여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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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하인은 압둘 카림이라는 비서관으로, 그는 여왕의 인생에서 1883년에 죽은 하일랜드 출신의 존 브라운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했다. 여왕은 권위적인 남자들에게 복종하기를 좋아해서 카림은 제멋대로 여왕을 조정하고 윽박지르곤 했는데, 이는 궁중 관리들과 여왕의 자제들이 보기에 대단히 혐오스러운 짓이었다.
수상인 로드 솔즈버리의 논평은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것이었다. “여왕은 감정에 호소하는 흥분을 즐기는데, 그것은 그녀가 즐길 수 있는 유일한 흥분이다.”
여왕은 젊어서 과부가 되어, 프랑스 작가 모파상이 인상적으로 묘사했던 여자들을 대표하게 되었다. “광적으로 원칙에 집착하는 여인들, …… 잉글랜드가 끝없이 양산해 내는 부류들, …… 유럽의 호텔 식당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보기 불쾌한 노처녀들, …… 어디를 가나 그들만의 특이한 유행, 케케묵은 처녀관, 소름 끼치게 만드는 옷 등을 자랑하는가 하면, 마치 밤 동안 관 속에 묻혀 있었던 것처럼 야릇한 고무 냄새를 풍기기까지 한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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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자들을 향해 연설하고 있는 키어 하디는 노동당 설립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유아학교 어린이들의 건강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학교 의료 서비스가 시작되었고, 빈민가 주민들에게 상쾌한 공기를 제공하기 위해 공원들도 건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을 수행하기 위해 소득세를 6퍼센트까지 인상함으로써 부자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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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부터는 한동안 공직에서 물러나 저술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이 1940년 이후 시작될 ‘운명의 걸음’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1954년에 이렇게 말했다. “전 세계에 퍼져 사는 영국 국민과 영국 인종은 사자의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사자의 포효를 이끌어내라는 임무가 내게 맡겨진 것은 행운이었다.” 약간의 포효와 약간의 행운.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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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들은 노동입법에 대한 그의 입장 선회에도 1972년 파업을 일으켰다. 비상사태가 선포되었고, 공장들은 1주일에 사흘만 가동되었으며, 트라팔가 스퀘어의 런던 우체국 본점을 찾은 손님들은 전기가 단절된 관계로 등불 아래서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또 일반 가정은 방 하나에만 난방을 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노동조합은 계속해서 히스에게 굴욕을 안겼고 결국 1974년에 그를 퇴진시켰다. 누가 이 나라를 통치하는지 불분명한 상황이었다. 노동조합인지 정부인지.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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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여성 수상, 세 번의 선거를 연달아 승리로 이끈 최초의 수상 등 이미 여러 분야에서 최초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던 그녀는 20세기의 평화기 수상 가운데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기도 했다.
스스로 “돌아갈 줄 모른다.”고 했을 정도로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갔으며, 개인적·정치적 용기 또한 대단했다. 그녀는 IRA의 영원한 암살 목표이기도 했다. 그녀의 강직한 성격은 머지않아 승리에 대한 도취감으로 바뀌어 보수당 내 많은 동료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고, 결국에는 위기 감각까지 무디게 만들었다.
또 그녀는 유럽에 대해 계속해서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으며, 대중의 곤궁을 초래하면서까지 비도덕적으로 사적 풍요를 장려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국가 소유의 기업과 공영주택을 매각하고, 노동조합을 개혁하고, 현실적인 복지 개념을 확립한 위대한 업적들은 그녀의 몰락 이후까지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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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블레어는 선거에서 압승했다. 보수당은 물러났고, 그들이 입은 상처는 아물기는커녕 점점 더 악화될 운명이었다. 블레어는 학급의 규모와 병원에서의 대기 시간을 줄이겠다고 다짐하면서 기존의 노동당원들을 안심시켰지만 그것은 말뿐이었다.
가장 중요한 주제는 역시 노동당이 예전처럼 지출 위주의 정책을 펴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소득세는 인상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유권자들을 안심시켰고, 안정된 경제를 물려받은 블레어는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긴 정치적 안정을 누리면서 지칠 줄 모르고 승리의 길을 걸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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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사랑하는 민주주의 국가 = 양차 대전, 제국의 종말, 버려진 옛 관습과 계서제 등 20세기의 드라마들은 실로 다양하고 강렬했다. 그럼에도 여왕과 그녀의 강아지가 그려진 초상화를 응시하고 있는 버밍엄의 이 여인들을 보면, 20세기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이 나라의 모습이 본질적으로 20세기 초와 비슷한 듯하다. 여전히 민주주의적인, 특히 개를 사랑하는 민주주의 국가이니 말이다. <북폴리오> 제공
사진으로 보는 영국의 20세기 ⑥ 예술가의 초상
트위기 = 요정처럼 큰 눈으로 유명했던 트위기는 60년대를 대표하는 얼굴 가운데 한 명이었다. 겉으로는 연약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모델로 출발하여 연예계에 진출했다.
» 트위기. 사진/버트 글린. <북폴리오> 제공
그녀의 매니저 저스틴 드 빌너브 역시 진정한 60년대식 인물이었다.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나 장터 권투선수와 포르노 영화 판매원 등으로 일했고, “언젠가 1년에 11곳의 미용실에서 일한 적도 있죠.” 그는 또 빈민가 사기꾼 피터 래크먼이 경영하는 소호의 스트립 클럽에서 기도를 보기도 했다. 그 후 골동품 가판대를 운영하다가 “너무나도 조그맣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이 사랑스럽고 작은 소녀”를 만났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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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에 루돌프 빙의 후원으로 에든버러에서 최초의 국제 예술 페스티벌이 개최되었다. 본격적인 텔레비전 시대의 도래에 앞서 영화는 마지막 호황을 누렸고 매년 15억 장의 티켓이 팔렸다.
올리비에의 「햄릿」은 영국 영화 최초로 오스카 최고작품상을 수상했다. 발레 드라마인 「빨간 구두」는 두 개의 상을 더 거머쥐었다. 알렉 기네스가 주연한 세 편의 전통적인 ‘일링 코미디’, 즉 「핌리코로 가는 여권」, 「위스키 참 많네!」, 「친절한 마음과 작은 왕관」도 이 당시에 제작되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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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여왕은 이들 전설적인 4인조Fab Four에게 MBE 훈장(영국의 5개 훈장 품계 중 가장 낮은 것. 기사 작위는 아니다-옮긴이)을 수여했다. 비틀스 마니아들은 뮌헨은 물론 미국에도 많았다. 레넌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예수보다 더 유명해요. 둘 중 어느 게 더 중요한지 잘 모르겠어요, 로큰롤인지 기독교인지.”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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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링스톤스 = “스톤스를 볼 때까지 기다려!” 뉴욕의 사교계 명사 ‘베이비’ 제인 홀저가 1964년에 한 말이다. “그들은 섹스 그 자체에요. 신이 내린 축복이고…… 다들 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지배하죠…… 마치 완전한 혁명 같아요.”
롤링스톤스가 그들의 앨범 「거지의 연회Beggar’s Banquet」를 판촉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영국 청년들은 1960년대 미국의 대중문화 독식에 위협적인 도전장을 내민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정숙과 복종이라는 번데기 안에 그토록 오랫동안 갇혀 있던 한 국민이 말썽꾸러기 나비로 변신한 데 대한 전 세계의 궁금증이 그들의 성공에 더욱 큰 역할을 했다.
1967년에 믹 재거가 이탈리아에서 합법적으로 구입한 각성제 암페타민을 소지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을 때 〈타임스〉의 편집인은 이 사건이 캔터버리 대주교가 “로마에서 비행기 멀미약”을 구입한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고 논평했다. 이러한 비유는 그의 도덕적 해이와 더불어 놀라울 정도로 단순한 사고방식을 드러내는 것이었는데, 당시 영국인들 전체가 바로 이런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스톤스의 멤버 브라이언 존스는 2년 후 약물 남용으로 사망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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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적 기준을 혐오했는데, 리튼 스트레이치와 E. M. 포스터가 동성애자였다는 점으로 볼 때 그 혐오의 정도를 더욱 잘 짐작할 수 있다. 스트레이치가 에디 색빌웨스트,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있는 모습이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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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이자 극작가이며 작곡가였던 노엘 카워드는 1927년 웨스트엔드에서 네 작품을 동시에 공연하기도 했다. 그가 「오늘밤 8시 30분」에서 거트루드 로렌스와 함께 공연 중이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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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다비셔에 있는 그들의 저택 레니쇼 홀에서 열린 가족파티 중에 촬영한 것이다. 비턴의 회상에 따르면, 조지아의 축 늘어진 듯한 우아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던 그녀의 개 보조이 피오는 “저택에 몰래 데려온 것으로, 오즈버트의 눈에 띄지 않도록 마구간에 가둬놓아야 했다.” <북폴리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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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의 방황」 같은 스코틀랜드 노래들을 불렀던 해리 로더는 글라즈고와 런던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많은 인기를 누렸다. 1907년 이후에는 매년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자치령들로 순회공연을 다녔다.
어느 웨이터의 일곱 자녀 가운데 한 명으로 태어난 메리 로이드라는 여자는 위트 있는 거친 농담과 「오, 미스터 포터」, 「내가 사랑하는 소년이 갤러리에 앉아 있네」 등의 노래를 불러 유명해졌는데, 1922년에 세상을 뜨기 며칠 전까지도 미국과 남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등은 물론 국내 각지를 돌아다니며 만원의 관중 앞에서 공연했다. 전통적인 극장의 분위기는 점점 더 점잖아졌다. <북폴리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