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프레시안 2008-08-20 오전 11:16:09

식민주의와 그 역사적 유산 ②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와 식민지배 체제

식민주의 이데올로기
 
  16세기 초에 중남미 지역을 정복한 스페인 사람들은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정복의 권리'에서 찾았다. 자기네들이 정복한 땅이니까 그것을 점령하고 다스리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아메리카의 땅과 주민들을 지배하고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일은 도덕적으로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17세기에 북아메리카에 자리 잡기 시작한 영국, 프랑스 사람들은 원주민들의 땅을 불법적으로 빼앗은 것이 아니라 '빈 땅'에 원주민들의 동의와 협조를 받아 정착했다고 주장했다. 자신들의 행위를 스페인 사람들과 차별화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그 자신들에게는 중요했을지 몰라도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들이 곧 울타리치기와 농업을 통해 확보했다고 하는 사유재산권을 '자연법'으로 내세우며 원주민들의 땅을 침범했기 때문이다. 자연법을 내세운 이런 주장은 자신들의 행위를 도덕적인 양 가장하고 있는 점에서 정복의 권리 주장보다 더 악랄한 태도라고 하겠다.
 
  1870년대 이후의 제국주의 시대에 오면 많은 나라들이 식민지 확보를 위해 경쟁을 했으므로 식민지에 대한 요구는 더 노골적으로 나타나고 또 대중화한다. 그래서 유럽 각국의 제국주의자들은 시장의 확보, 원료의 조달지, 자본의 투자처, 과잉인구의 유출지로 식민지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식민지가 있어야 강대국으로서의 위신이 올라간다고도 생각했다.
 
  이러한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데 매우 유용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던 것이 사회적 다윈주의이다. 적자생존을 인간사회에까지 확장함으로써 힘 있는 국가가 힘없는 국가를 지배하는 것을 자연적 질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의 대중화에 앞장 선 것은 독일의 식민협회, 독일과 영국의 해군협회 같은 수많은 제국주의적 정치, 사회단체들이다. 많게는 수백만의 회원을 가진 이들 단체는 식민지 확보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옹호하고 제국주의적 가치를 확산시키며 정부의 식민정책에 압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1908년에 영국에서 창립된 보이 스카웃 같은 소년운동조차 소년들에게 제국주의적 가치를 주입시키려고 애썼다.
 
  19세기 말에 와서 세계경제가 점차 보호무역주의로 돌아가게 되자 이제 제국은 자국경제를 지키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이런 생각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1895-1903년까지 영국의 식민장관을 지낸
조셉 체임벌린이다.
 
  그는 당시의 추세대로 가면 곧 자유무역의 시대가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게 되면 이제 주된 강국들은 제국으로부터 원료를 가져오고, 모국은 공산품을 제공할 뿐 아니라 이민을 내보내는 자족적인 경제블록을 형성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그는 영국이 산업능력이나 군사적 능력에서 점차 국제경쟁에서 패배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국내의 사회문제도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제국의 형성은 이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열쇠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영국과 영국의 백인 정착식민지들을 결합하는 제국적 경제통합을 꿈꿨다. 그러나 식민지인들의 불신 때문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런 생각은 뒤의 경제공황 시기에 상당한 정도로 현실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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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셉 체임벌린

  식민화와 유럽인의 도덕적 책임
 
  그렇다고 유럽인들이 식민 지배를 도덕적인 일로 미화하는데 소홀했던 것은 아니다. 미화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행위가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런 생각의 바탕에는 자신들이 비유럽인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며 우월하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그들이 보기에 비유럽인들은 기독교를 믿지 않으므로 이 세계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비유럽 사람들의 기술 수준은 매우 낮으므로 자연을 잘 지배할 수도 없다. 인종적인 면에서 볼 때 도 비유럽인들은 백인종인 유럽 인들에 비해 열등할 수밖에 없다. 또 열대 지역 사람들은 더운 기후 때문에 천성적으로 게으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식민지인들은 게으르고, 잔인하고, 놀기만 좋아하고, 순진하고, 결단력이 없고, 겉과 속이 다르며, 보다 복잡한 추상적인 생각을 할 수 없고, 이성이 아니라 충동에 따라 행동하는 한심한 존재로 이해되었다. 그러니 이렇게 아직 성숙하지 못한 식민지인들이 유럽인의 보호를 받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19, 20세기에 오면 유럽 사람들은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도덕적인 사명 속에서도 찾았다. 높은 문명 수준을 갖고 있는 유럽의 백인종들이 이들을 가르치고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면에서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치능력이 없고 아시아 사람들은 전제의 폭압 속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이들을 해방시키고 정치적인 훈련을 시킬 필요가 있었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이들에게 제대로 노동을 하는 습관이나, 절약이나 저축 등 여러 가지 경제관념을 넣어 줄 필요가 있었다. 또 문화적 면에서, 식민지 사람들은 나쁜 관습이나 미신, 비도덕적 행위들에서 스스로는 벗어날 수 없으므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식민통치는 유럽 사람들의 선물이자 문명을 나누어주는 은혜로운 행위로, 또 인류애의 발로로 찬양되었다.
 
  기독교 선교는 이런 맥락에서 정당화될 수 있었다. 식민지인들에게 미신이나 낮은 수준의 종교 대신 고등종교인 기독교를 믿게 함으로써 그 도덕성을 높여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서양문명의 혜택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교육이나 의료사업을 병행했으므로 이런 주장이 어느 정도 먹혀들어갈 소지도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 선교사업은 약간의 문화적 혜택을 가져다 준 것은 사실이라 해도 식민지의 토착 문화를 파괴함으로써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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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간다의 알프레드 터커 주교와 영국 교회선교회 소속 첫 여성 선교사들(1896년)

  F.D. 러가드는 나이지리아 총독을 지내기도 한 영국의 식민지 관리인데 두 가지의 도덕적 사명을 주장했다. 하나는 유럽문명의 복음을 식민지에 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방치되어 있는 식민지의 자원들을 세계경제를 위해 이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러가디즘이라고 해서 20세기 초에 유럽 각국에서 널리 받아들여진 주장이다.
 
  키플링이라는 영국 시인이 '백인의 짐'을 지자고 호소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백인의 가장 훌륭한 아들들을 보내 식민지인을 돕게 하자는 것이다. 식민지인들이 져 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은 짐을 지겠다고 엉뚱하게 나서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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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년생인 러드야드 키플링은 인도 식민지 태생으로 많은 시와 글들을 통해 이미 19세기 말에는 식민주의, 군사주의를 옹호하는 영국의 가장 유명한 문필가가 되었다. '백인의 짐'은 식민주의자들의 도덕성을 주장하는 가장 유명한 시 가운데 하나이다.

  가혹한 식민지배 체제
 
  그러나 실제의 식민지배는 인류애에 가득 찬 이런 갸륵한 주장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식민지배 체제란 식민주의자들이 식민지인들의 정치적 주권을 빼앗고 자유를 박탈함으로써 식민지인들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게 만드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식민국가의 성격이나 식민지가 위치해 있는 지역에 따라 식민체제의 성격은 조금씩 달랐다. 그러나 식민지인을 억압하고 식민지 착취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어디에서도 식민지인들은 정치, 외교, 군사적 자주권을 빼앗기게 된다. 또 식민지는 식민국가들의 요구와 이익에 봉사하는 방향으로 다시 짜여진다. 그러므로 식민지인들은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부인당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식민지배 체제는 식민지인들에게는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것이고 악일 수밖에 없다.
 
  아프리카의 경우를 보면 정치적인 면에서 식민주의가 갖고 있는 이런 부정적인 성격들을 잘 알 수 있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식민지의 많은 경계선을 자기들끼리의 타협에 의해 제멋대로 만들었다. 오늘날 아프리카 국가들의 국경선에 직선으로 된 것이 많은 것이 그 결과이다.
 
  이 경계선들은 종족이나 문화, 지리, 또 생태학적인 문제를 도외시한 것임에도 독립 이후 그대로 새 국가들의 국경선이 되었다. 그래서 한 종족이 여러 나라로 분산된 경우나 한 국가 안에 여러 종족들이 같이 사는 경우가 매우 많다.
 
  또 나라 사이에 자연자원이나 경제적인 능력 면에서 너무나 큰 차이가 존재한다. 어떤 나라는 너무 크고 어떤 나라는 너무 작으며 어떤 나라는 풍부한 지하자원을 갖고 있는 반면 어떤 나라는 사막밖에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강물을 이용하는 문제, 바다로의 출구 등 많은 문제를 두고 수많은 국제적 분쟁이 생겨나고 있다. 이 대부분이 잘못된 식민지배의 유산 때문이다.
 
  게다가 식민당국자들은 식민통치를 쉽게 하기 위해 분할통치 정책을 취했다. 일부 종족에게 특권을 주어 다른 종족과 대립하게 함으로써 여러 종족들이 함께 단합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종족 사이의 분열은 독립 후에도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서 고질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아시아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종족간의 분쟁이 가끔씩 종족학살 같은 극단적인 형태로 치닫기도 한다.
 
  서양인들은 이런 종족학살을 제3세계인의 미개성 탓으로 돌리고 자신들은 문명인인 듯이 자랑하나 이는 매우 잘못된 태도이다. 그 원인을 만들어 준 것이 서양인들이기 때문이다. 또 종족이나 민족 사이에 이해관계가 충돌하면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어느 곳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유럽도 예외가 아니다. 2차대전은 유럽인들의 영토확장욕의 산물이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또 유대인, 집시 등 많은 소수종족들이 학살을 당했다. 아프리카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또 식민국가들은 관료제도와 군사제도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현지인들을 흡수하여 만든 이 제도들은 식민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지 식민지의 근대화나 식민지인들의 복리를 위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이런 제도는 식민지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동족을 억압하던 이들 식민지 관리나 군인들이 만든 전통은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에 그대로 살아남음으로써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나라를 만드는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국가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걸핏하면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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