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프레시안 2008-08-13 오후 12:00:50

산업혁명과 비유럽세계의 탈산업화 ⑦
산업혁명과 비유럽세계의 식민화

지금까지 산업혁명이 어떤 행태로 전개되었는지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석탄과 철, 증기기관 같은 것의 단순한 결합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부문인 면직산업의 경우 그것은 식민지 착취와 노예노동, 그리고 제국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 매우 복잡한 사건이다.
 
  그러나 다른 산업도 큰 차이는 없다. 철강산업도 18세기의 유럽은 기술이나 생산성면에서 특별히 나은 상태에 있지 않았다. 1790년에 영국인들이 실험한 바에 의하면 일본 산
강철이, 스웨덴 산과 마찬가지로 영국 산보다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이 시기에 인도 제철업의 단위 생산비용은 영국보다 싸고, 생산시간도 덜 걸리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같은 양을 생산하는 데 영국에서는 4시간이 걸리나 인도에서는 2시간 반이면 생산이 가능했다.
 
  철강산업도 철도건설이 본격화하여 안정된 내수기반이 마련되는 1830년대 이전까지는 주로 해외시장에 의존하여 발전했다. 따라서 식민지와 해외시장을 어떻게 확보하고 유지하느냐가 가장 중요했다. 이 점에서는 면직산업과 본질적으로 같은 성격을 가졌다.
 
  그 결과는 우리가 다 아는 것이다. 영국과 인도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한 편에서 영국을 부유하고 강하게 만들었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인도경제를 파멸시키고 인도를 의존적인 경제를 가진 빈곤한 식민지로 전락시켰다. 이는 산업혁명이 영국과 인도 사이의 제로섬 게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쪽의 이득은 다른 쪽의 손실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산업혁명은 결코 프로테스탄티즘에 의한 도덕적인 자본 축적, 위대한 발명가들, 앞선 과학, 모험적인 기업가들, 이로 인해 탄생한 거대한 생산력, 이런 것들에 의해 미화될 수 있는 평화스럽고 단순한 경제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비유럽 지역 사람들의 땀과 고통, 살육 위에 서 있는 정치적, 사회적 사건이다. 그러니 비유럽인들이 그것을 서양 사람들 마냥 찬양할 수는 없고 또 찬양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산업혁명이 풀어 놓은 거대한 생산력은 19세기 중반 이후에 오면 이제 국제질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산업화를 먼저 달성한 몇몇 나라들이 국제정치를 좌우하게 되었다.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패한 이후 강제로 개항을 당하며 점차 유럽국가들의 반식민지로 전락했다. 유럽의 전통적인 강대국의 하나였던 러시아도 1850년대의 크림 전쟁에서 산업국가인 영국, 프랑스에게 패한 후 큰 충격을 받고 개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땅의 크기나 인구의 다과가 문제가 아니라 인구는 적더라도 기계와 동력을 이용해서 만들어내는 거대한 생산력이 이미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산업혁명을 먼저 경험한 국가들과 그렇지 않은 나라들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이 그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런 대국들은 그만두더라도 비유럽 지역의 대부분의 중, 소국가들이 어떤 운명에 빠지게 될 것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거의 모든 나라가 1880년대 이후의 제국주의 시대에 몇몇 서양 국가들과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또한 탈산업화 되었다. 오늘날 제 3세계 빈곤의 많은 부분은 여기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업혁명과 식민주의의 깊은 연관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005년도에 중국의 GDP는 영국, 프랑스를 제치고 세계 4위로 올라섰다. 20년 정도면 아마 세계 1, 2위 자리를 넘볼지도 모른다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인도도 최근 급격한 성장세를 타고 있다. 한국도 10위권에 근접했고 20년 정도 지나면 10위권 안에 안착할 가능성도 있다.
 
  산업혁명이 흐트러 놓은 세계질서가 200년 만에 제자리를 찾아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산업혁명이 세계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고 비유럽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안겨 주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출처 - 프레시안 2008-08-08 오전 11:55:32

산업혁명과 비유럽세계의 탈산업화 ⑥
비유럽세계의 탈산업화

인도의 탈산업화
 
  유럽의 산업화는 비유럽의 탈산업화를 동반했다. 그 가장 현저한 예가 세계에서 가장 큰 식민지였던 인도이다. 서양학자들은 그 동안 식민지화 이전의 인도 경제를 매우 경시해왔으나 최근에 연구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인도는 18세기까지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경제를 가진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무굴제국이 붕괴했으나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경제는 한 동안 계속 발전했다. 그래서 인도는 1750년에 세계 산업 생산의 근 24.5%를 차지하던 나라이다. 중국의 32.8%에 이어 세계 2위였다( P.Bairoch의 1982년 추계).
 
  또 인도는 국제적으로도 면직물, 견직물의 주된 수출국으로서 큰 무역흑자를 보았다. 반면에 수입품은 커피, 차, 설탕, 술, 향료 같은 기호품과 보석 같은 것에 제한되었다. 금속제품은 가끔 대포를 수입한 것 외에는 거의 수입하지 않았다.
 
  또 18세기까지 인도인들은 비교적 잘 살았다. 요사이의 실증적인 비교연구에 의하면 인도 남부 지역 농업노동자나 직조업 노동자들의 임금은 잉글랜드 농업 노동자나 직조업 노동자들의 임금을 오히려 상회한다.
  예를 들어 동인도회사가 1795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마드라스 근교의 쌀 생산지역에서 인도 사회의 최하층인 불가촉천민 농업노동자의 임금은 쌀로 쳐서 주당 30파운드에 해당했다. 이는 현물급여나 부조 등 다른 많은 수입을 뺀 금액이다.
 
  이에 비해
아서 영이라는 학자가 1760년대에 조사한 것을 보면 잉글랜드 북부나 동부의 임금은 위의 잡수입을 포함해 주당 곡물로 쳐서 30-35파운드에 해당했다. 인도의 임금은 최저선으로 박하게 계산한 것이므로 실제 차이는 더 크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는 인도인들이 옛날부터 매우 빈곤하게 살았다는 서양인들의 전통적인 견해를 깨뜨리는 것이다. (Parthasarathi의 1998년 연구)
 
  이렇던 나라가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며 급격한 경제쇠퇴 과정을 밟게 된다. 그리하여 인도는 19세기 초반에 공산품 수입국으로 전락하게 되고 1860년의 산업생산은 세계 전체의 8.6%로, 1900년이면 1.7%로 떨어지며 거의 산업기반이 붕괴하다시피 된다. 그 결과 인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 최빈국에 속해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항구로 실려 나가는 인도산 원면

  이는 물론 인도를 최대한 착취하려 한 영국 식민주의 정책의 결과이다. 인도산 공산품이 영국에 들어오려면 매우 높은 관세를 물어야 했다. 1812년에 캘리코는 72%, 다른 상품은 100-600% 정도의 고율 관세를 지불해야 했다. 반면 영국산은 인도에서 관세 면제이거나 최대 2.5%를 물면 되었다. 그러니 인도 산업이 온전하게 남아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영국 산업혁명의 성공은 상당부분 이에 의존한 것이다.
 
  인도 면직산업의 붕괴
 
  서양학자들은 인도 면직산업의 붕괴가 공장에서 생산한 품질이 좋고 싼 영국 면직물의 경쟁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공장제에 대한 환상에서 나온 것이다.
 
  실제로 초기의 공장들은 수공업에 비해 그렇게 능률적인 작업장은 아니었다. 아크라이트가 1771년에 처음으로 수직기 공장을 건설했으나 편사는 쉬워도 직조는 기계화가 곤란하여 1800년 이후에야 상업적 이용이 가능했다. 그럼에도 기계를 이용한 직조보다 손으로 하는 직조 비용이 더 쌌으므로 1830년대까지도 수공업자의 고용이 증가했다. 기계화된 방직의 승리가 분명해진 것은 1830년대 말이다.
 
  증기기관의 채용도 단순한 것이 아니다. 증기기관이 공장에 채용된 것은 1786년이나 초기의 증기기관이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볼튼과 와트의 증기기관 공장에서 만든 496개 증기엔진 가운데 몇 개만이 15-16 마력 정도를 낼 수 있었다. 당시의 금속 기술로는 고압력에 견디는 부품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1835년이 되어서야 면직산업 기계의 3/4가 증기에 의해 가동되었다. 또 노동자 2교대제로 하루 종일 기계를 돌림으로써 엄청난 생산 효율성을 가져왔다. 그러니 이는 훨씬 뒤의 일인 셈이다.
 
  그럼에도 제국의 우월한 힘에 의존한 영국의 면직산업은 18세기 후반부터 해외에서 점차 인도 면직물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무방비 상태의 인도로 영국 면직물들이 밀려들어오며 이미 1820년대부터 인도 면직물 산업의 쇠퇴가 시작된다.
 
  특히 가장 먼저 식민화된 벵골 지방의 면직물산업은 1830년까지는 거의 완전히 붕괴했다. 그러나 이런 쇠퇴가 경제논리 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동인도회사는 면직물에 대한 독점 구매자로서 터무니없는 가격과 조건에 그것을 사들여서 폭리를 취했다. 또 수공업자들을 별 다른 이유 없이 채찍질하고 투옥했으며 심지어 직조기를 부수거나 직조공의 손가락을 잘라 버리는 만행까지도 저질렀다. 인도 면직물 산업을 짓밟기 위해서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직조공의 손가락을 자르는 만행을 저지르는 식민지 관리

  영국 면직물의 인도 침투가 본격화하는 것은 19세기 중반부터이다. 그전에는 인도 내부의 교통이 아직 불편했을 뿐 아니라 영국산이 인도인의 기호에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도의 전국적 개통과 인도 시장에 침투하려는 영국인의 적극적인 노력이 그 장애를 없앴다.
 
  인도에서 철도는 1853년에 처음 개설되었으나 1870년까지 7,200킬로가 부설되었고 1936년의 전체 철도망은 6만9천 킬로미터로 세계 4위일 정도로 급성장했다. 이 철도망을 타고 영국 상품들이 지방까지도 침투해 들어갈 수 있었다.
 
  또 영국 인도부는 인도 시장을 뚫고 들어가기 위해 1866년에 인도 면직물을 세세히 조사한 18권짜리의 견본책을 만들어 업계에 배포했다. 여기에는 총 700종의 인도 면직물 견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영국 면직업자들은 영국산의 경쟁력을 크게 높일 수 있었다. 1860년대 이후 쏟아져 들어온 영국 면직물은 인도산을 모방했으나 색깔이 인도산 보다 더 밝았고 조성도 더 치밀했으며 가격은 30%가 더 쌌다. 따라서 인도인의 인기를 끌어 곧 시장의 큰 부분을 장악할 수 있었다. 20세기 초에 수입직물이 인도 소비시장의 60%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러니 인도 면직산업이 몰락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마하트마 간디가 스스로 물레를 돌려 실을 만드는 모습. 영국산 면직물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는 면직산업 만에 한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산업들이 다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한때 번영하던 인도경제는 원자재를 빼앗기고 반대로 기계로 생산한 완제품을 사서 쓰는 한심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오늘날의 제3세계 국가들이 과거 식민지 시대에 대부분 똑 같이 경험했던 일이다.
출처 - 프레시안 2008-08-01 오후 12:03:26

산업혁명과 비유럽세계의 탈산업화 ⑤
면직산업과 원료ㆍ시장ㆍ통상로 보호의 문제


원료 조달과 시장의 확보
 
  처음부터 면직산업의 발전에서 중요한 애로의 하나는 원료 조달의 문제였다. 원면이 영국에서는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면직산업이 처음 네덜란드 이민자들에 의해 시작된 16세기 말에는 주로 레반트 지역에서 수입했다.
  그러나 그 양은 제한되어 있었다. 그래서 18세기에 들어와서는 영국령 카리브 지역이나 브라질 등 여러 곳으로 수입처가 확대되었다. 인도산 원면을 수입하면 가장 좋으나 부가가치 가 훨씬 높은 면직물 수출에도 바쁜 인도가 원면을 수출할 리는 만무했다. 그러므로 원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면직산업은 큰 한계를 안고 있었던 셈이다.
 
  돌파구가 열린 것은 1757년의 플라시 전투이다. 이 전투의 승리를 통해 동인도회사가 인도 내 원면의 주된 생산지 가운데 하나인 벵골지방을 장악한 것이다. 식민체제를 수립한 동인도회사는 벵골인에게서 받아들인 세금으로 다량의 원면을 사서 영국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원면이 싼 가격에 대량으로, 안정적으로 반입되며 랭카셔를 중심으로 면직산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760년대부터 나타나는 기계의 개량이나 그 뒤 증기기관 같은 동력의 발전은 모두 그 결과이다.
 
  산업의 급성장으로 인도산 원면만으로도 부족하자 1790년대에는 이집트에서 원면을 생산하여 들여왔다. 또 19세기에 들어가서는 미국 남부지역에 영국자본의 투입으로 흑인 노예를 이용하는 대규모의 면화 플랜테이션들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830년이 되면 랭카셔 원면 수요량의 3/4을 미국이 공급할 수 있었다.
 
  이렇게 미국의 생산량이 늘며 미국은 1820년부터 인도를 제치고 세계 최대의 면화 생산국이 되었고, 그 자리를 1971년까지 유지했다. 이런 점에서 영국 면직산업의 기초는 식민주의와 노예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식민지인과 흑인 노예들의 착취 없이는 결코 발전할 수 없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미국 남부의 면화플랜테이션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들. 19세기 중반.

  원료 조달에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이 시장의 확보였다. 그리고 영국 면직산업이 주로 해외시장에 의존하여 성장했으므로 이 해외시장을 어떻게 지키느냐가 매우 중요했다.
 
  초기에 수출 면직품의 30-60%는 서아프리카로 갔고 이 시장에서 영국산과 인도산은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런데 미국 독립전쟁 시기에 해군이 이 지역에 별로 신경을 쓸 수 없게 되자 수출이 급감했다. 전쟁이 끝나자 다시 급속히 회복되었는데 이는 해외시장 확보에서 국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영국은 19세기 전반까지는 대서양 시장을 중심으로 면직산업을 발전시켰으나 19세기 후반에는 인도 시장이 중요하게 되었다. 철도망 건설을 통해 인도 내수 시장으로 침투해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원료 조달과 시장 확보라는 면에서 안정성을 갖게 되자 18세기말과 19세기 초 사이에 랭카셔의 경제는 전례 없는 변화를 겪었다. 면직산업이 대규모의 기계화된 산업이 되며 영국 면직물의 수출고는 1784-6년의 년 80만 파운드에서, 1814-6년에는 년 1,870만 파운드로 뛰었고, 1854-6년에는 년 3,490만 파운드까지 늘어났다. 그리고 이 급성장하는 산업의 원료와 시장 확보를 위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영국의 제국과 해군력이었다.
 
  제국과 해군력의 역할
 
  어떤 산업이 국내시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경쟁력과 함께, 해외시장에 어떻게 접근하느냐 하는 것에 의존한다. 해외시장을 여는 하나의 결정적 요소는 제국의 힘이다. 강력한 제국의 산업들은 경쟁력이 있건 없건 도움을 받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친 면직산업의 급격한 성장은 영국의 식민제국과 해군력의 우월이 가져다 준 우호적인 교역환경에 크게 의존한 것이었다. 랭카셔의 수출 전망은 제국 내의 대규모 시장의 존재 여부, 그리고 그 안전성 여부에 달려 있었다. 랭카셔가 1차 대전 이후에 경쟁력을 잃게 된 것은 영국의 제국 및 해군력의 퇴조와 같이 일어난 일이다.
 
  영국 해군은 이미 17세기 중반에 블루 워터(blue water) 전략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는 국가의 중상주의 정책에 대응하는 해군 전략이다. 이것은 잉글랜드의 안전이 유럽 외부에서의 공격적인 전쟁 행위에 의해 강화될 수 있다는 믿음 위에 서 있었다.
 
  또 통상력과 해군력을 상호보완적으로 인식했다. 국제무역과 투자가 대 해군을 유지할 수 있는 비용을 충당할 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실제로 활발한 해외무역은 조선산업의 기반을 튼튼하게 만들었고 대규모의 상선대는 전시에 수병으로 전환할 선원들을 훈련시켰다. 반대로 해군력은 잉글랜드의 무역과 해외자산을 보호했다.
 
  해군력이 초창기의 면직산업을 도우려는 특별한 노력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원면이나 수출 면직물을 실은 선박이 통행하는 해로를 보호하는 것은 해군의 정상적인 의무였다. 또 랭카셔가 수출 시장으로 처음 진출하는 것을 용이하게 해 줌으로써 다른 나라의 면직물과 경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인도 캘커타의 영국 전용항구의 상선대. 영국 화물선이 하역작업을 하고 있다.

  해군이 면직산업 발전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해 준 것은 1753-63년의 7년 전쟁에서 프랑스에게 승리한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 함대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함으로써 영국이 인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영국이 패배했다면 인도나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내놓도록 요구 당했을 것이므로 면직산업에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나폴레옹과의 전쟁도 마찬가지이다. 넬슨 제독이 해상권을 장악한 덕분에 랭카셔의 수출은 1793-1815년 사이에도 급속하게 증가했다. 반대 상황이었다면 면직산업의 미래도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게 식민제국과 해군력이 원료 공급지와 시장을 하나로 묶는 것을 도와줌으로써만 영국 면직산업은 유지될 수 있었다.
출처 - 프레시안 2008-07-30 오전 11:50:27

산업혁명과 비유럽세계의 탈산업화 ④ 영국 면직산업의 성장과 국가의 역할 

  산업혁명은 시작되고 나서도 한 세기 이상 몇 개의 선도적 부분에 제한되어 있었다. 면직산업, 철강산업, 철도와 운하를 포함한 운송산업이 그것이다. 그러나 면직산업은 1780-1860년 사이에 총 생산액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부문이었다.
 
  또 가장 먼저 기계화되고 공장화된 선진적인 산업이었다. 그러므로 영국 면직산업이 어떤 방식으로 그 기초를 마련했고 세계시장을 지배하게 되었는가를 아는 것은 영국 산업혁명의 성격 이해에 필수적이다.
 
  면직산업의 이런 운명은 면직물이 갖고 있는 특성 때문이다. 그것이 당시의 다른 어떤 직물보다 우월한 면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면사는 모사보다 더 강하고 모, 아마, 실크 같은 다른 실보다 가공하기에 편리하므로 나중의 기계제 생산에도 적합했다. 또 면직물은 다른 직물보다 표백이나 염색이 잘 되었고 오래 갔다. 게다가 가볍고 세탁하기도 편했으니 어떤 직물보다 잠재적으로 큰 시장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면직물은 원래 인도의 주종 수출품으로 일찍부터 유럽에서의 수요가 많았다. 영국인들은 17세기 이전부터 인도에서 면직물을 수입하여 본국에서 사용하는 이외에 다른 유럽지역과 나아가 아프리카, 아메리카로도 수출했다. 이는 매우 수지 맞는 사업이었다.
 
  그럼에도 17세기 중반까지는 수입되는 주종품목인 캘리코(20수짜리 면사로 짠 거친 면직물)의 양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17세기 말에 가서야 전체 수입 직물의 1/4을 차지할 정도가 되었다. 1700년에 영국의 직물 총생산액은 850만 파운드였고 수출량은 450만 파운드(주로 모직물), 수입량은 150만 파운드(4/3은 아마포)정도였다.
 
  당시에 면직물을 독점적으로 수입한 것은 영국 동인도회사였는데 수입량이 너무 많아지자 정부는 이에 제한을 가했다. 전통적인 모직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모직과의 혼방제품만 수입하도록 규제하기도 했고 또 1680년부터는 국내에서 혼방 제품 이외에 순면제품 사용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수입 면직물에 대한 규제는 이렇게 1770년대까지 여러 형태로 유지되었는데 그것은 중상주의 원리에 따른 것이었다. 국가의 전략 목표나 정치적 안정, 조세 수입 등을 다각도로 고려한 결과이다.
 
  그럼에도 면직물이 이익이 많이 남는 상품임이 분명했으므로 영국 상인들은 여러 제약에도 불구하고 17세기에 들어와 수입 원면을 이용하여 국내에서의 면직물 생산을 늘리기 시작했다. 대체로 전대제도를 통해 농촌 마을에서 생산했는데 이는 도시에는 길드의 규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면직산업이 1760년대 이후 급성장하게 된 것은 인도의 벵골지역 식민지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인도로부터 원면이 쉽게 조달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기계의 개량이나 공장제도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면직산업의 공장화에 가장 기여한 인물은 리차드 아크라이트이다. 그가 1771년에 자신이 개량한 직기들을 물레방아와 결합한 공장을 더비셔의 크롬포드에 설립한 것이다. 이는 최초의 근대적 면직공장이다. 1773년부터는 인도 직물을 본뜬 최초의 순면 캘리코를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아크라이트 직기(1771)

  정부는 국내 면직산업이 가져올 희망찬 미래를 금방 알아보았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꿔 그 발전을 위한 모든 조치를 다했다. 1774년에 원면 수입에 대한 관세 면제 혜택을 베풀었다.
 
  같은 해에 영국 내에서 생산한 면직물은 혼방이 아니더라도 의복뿐 아니라 커튼이나 식탁보 등의 집안 살림살이용이나 가구에 사용하는 것을 허용해 주었다. 이는 국내의 면직물 수요를 증가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다른 한 편에서는 인도 면직물은 재수출을 조건으로 런던에서만 수입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잉글랜드 면직업자들을 인도로부터의 경쟁에서 지켜주기 위해서였다. 정부가 철저하게 자국 면직산업을 보호육성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그리하여 영국은 1784년부터 유럽 최대의 면직물 생산국이 될 수 있었고 1787년부터는 세계최대의 무역국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영국의 산업혁명이 유럽 다른 나라의 산업혁명과 달리 사기업가들이 주도한 것이라는 주장은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사기업가들이 주도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국가의 철저한 비호 하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 프레시안 2008-07-23 오후 12:03:44

산업혁명과 비유럽세계의 탈산업화 ③ 영국 산업혁명의 요인들 (2)

대서양 경제와 식민제국, 군사력의 중요성
 
  그러나 내부적 요인들을 강조하는 해석들은 1980년대에 오면 저항에 부딪치기 시작한다. 그것들이 역사적 실제와 잘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특히 핵심이라고 할 농업혁명은 문제거리이다. 연구를 하면 할수록 실체가 불분명해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토니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1500-1650년 사이에 농업혁명이 일어났다고 주장해 왔다. 그리고 그것을 농업자본주의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본다. 소농을 희생으로 한 상업적 대농의 성장, 그에 따른 토지 사용의 효율성 증가, 인클로저를 통한 목양지의 증가가 그 결과이다.
 
  인구가 증가하고 농산물가가 상승하자 토지가도 상승했고 그에 따라 경작지도 확대되고 토지이용의 효율성도 높아졌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많은 생계형의 소농들이 상업적인 영농을 하는 젠트리나 요맨 층의 대농들에게 토지를 잃었다는 것이다.
 
  많은 맑시스트들이 이 견해를 따른다. 그래서 저명한 맑스주의 경제사가인 로버트 브렌너도 1976년에 '잉글랜드에서의 주된 경향은 보다 큰 단위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을 차지농에게 주어 임금 노동의 도움으로 경작하게 하기 위해 보유지를 확고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생산조직의 변화에 동반한 것은 농업생산성의 주된 증가로 이는 진정으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들은 대농의 성장은 물론이나 농업생산성의 증가를 가져온 영농방식의 개선을 높이 평가한다. 교대농법(여러 해의 간격을 두고 경작과 목초재배를 교대시키는 것), 새로운 작물의 도입, 클로버 같은 질소 식물의 도입, 습지의 배수, 목초지에 물을 대는 새로운 기술 같은 것들이다.
 
  대농의 성장은 사실이나 이 시기 동안의 그 폭은 작다. 16세기에 인클로즈된 면적은 잉글랜드 전체의 2%에 불과했다. 17세기에 와서 20% 이상으로 증가하나 대부분은 1650년 이후의 일이다. 또 1520-1650년 사이에 농촌인구는 255만에서 392만 명으로 증가했는데 증가분의 모두가 토지 없는 농업노동자가 아니었다. 소농도 크게 증가했고 따라서 농민들의 토지 보유규모는 더 줄어들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18세기에 인클로우즈된 농토. 그 이전의 고랑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새로운 작물들은 1650년 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기에는 너무 늦게 도입되었다. 당근은 16세기 말, 순무는 빠른 곳이 1646-56년, 캐비지는 1660년 이후에야 도입되었고 감자는 17세기 후반에야 밭에 심기 시작했다.
 
  또 클로버 같은 질소 식물들은 토양 내 질소분을 증가시킴으로써 이론적으로는 농업생산성을 크게 향상시킬 것 같으나 실제로 농민들은 이를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교대농법도 가축의 분뇨를 통해 지력을 향상시키기는 하나 실제로 인구가 조밀한 지역에서는 곡물생산이 더 급했으므로 이 방법을 잘 사용하지 않았다.
 
  이렇게 전통적인 주장이 문제가 많자 농업혁명이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로버트 알렌 같은 사람은 농업혁명이 1740년 이전과 19세기 전반에 두 차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농업혁명의 실체가 혼란스러운 것은 직접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믿을 만한 사료도 부족하고, 있어도 지역에 따른 편차가 너무 커서 생산성 증대를 확실하게 일반적인 추세로 말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인구 증가, 소득증가, 도시화 같은 결과로부터 거꾸로 추론을 하니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이다.
 
  영국의 인구는 1500년의 250만에서 1700년에 650만으로, 또 1851년에 2,100만으로 크게 증가했다. 국내농업이 인구의 4/5를 먹여 살렸으므로 농업이 먹이는 인구는 1700-1851년 사이에만 220%가 증가한 셈이다.
 
  식량소비가 대체로 일정하다고 해도 식량 생산은 틀림없이 증가했을 것이나 1800년 이후는 실질임금이 상승했으므로 소비도 더 증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농업에 종사하는 성인남자의 수는 90만에서 110만 명으로 증가했을 뿐이다. 따라서 1인당 생산고는 그 사이에 약 180% 정도 증가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렇다고 해도 19세기 초 영국 농민의 1인당 생산성은 프랑스 농민보다 1/3 정도 높았고 러시아보다는 두 배 정도였다. 그러니 생산성이 올라간 것은 사실이겠으나 모든 유럽국가들이 다소간은 다 그러므로 그것을 농업혁명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잘 알 수 없다.
 
  또 이런 주장은 기껏해야 영국농업이 영국민들을 먹여 살렸다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농업에서 축적된 자본이 산업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 19세기 중반에 철도망이 완성되기까지 농촌은 공산품 시장으로서도 큰 역할을 못했다. 그러니 산업혁명의 선행조건으로서의 농업혁명에 대한 주장이 큰 신뢰성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대서양 경제의 중요성
 
  이렇게 내부적 요인들이 한계를 갖고 있으므로 다시 외부적 요인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1980년대에 시작된 이른바 '대서양 경제'의 재해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대서양 경제란 대서양을 사이에 둔 양쪽 해안 지역을 무역을 통해 맺어진 하나의 단일한 상호의존적인 경제지역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북아메리카 식민지와 카리브 식민지뿐 아니라 비영국령 카리브 식민지와 브라질 등의 남아메리카를 포함하는 아메리카 지역과 아프리카 지역, 그리고 영국과의 경제적 상호의존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다시 무역이, 특히 수출이 한 지도적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새로운 견해에 의하면 수출은 투자와 독립적이 아니고 국내 소비도 수출과 독립적이 아니다. 또 농업생산성 증대에 따르는 공산품 수요의 증가는 수출에 비하면 매우 낮은 비율이다.
 
  실제로 대서양 무역은 영국 산업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직물이나 농기구, 염료, 총기·화약류, 각종 금속제품, 담배, 술 같은 많은 공산품들이 아프리카와 북미식민지, 또는 중남미 지역으로 수출되었다.
 
  이것은 당시의 첨단산업이었던 면직산업이나 금속산업도 마찬가지이다. 면직산업은 기본적으로 수출산업으로 그것이 처음 탄생한 1760년대부터 아프리카와 카리브지역으로 수출되었다. 그 수출액은 1760년에는 전체 생산량의 50%에 달했다.
 
  철강 등 금속산업에서도 국내에서 소비된 것은 저급품인 반면 기술이 필요한 고부가가치 상품들은 대체로 수출되었다. 그러니까 많은 이익을 가져오는 기술의 발전은 주로 수출에 의존한 것이다. 이는 철도가 발전하기 이전에 국내수요가 소규모적이고 제한되었던 데 비해 대서양 지역의 주문단위가 훨씬 컸으므로 영국의 제조업자들이 국내시장보다 해외시장에 더 주력했기 때문이다.
 
  1776년의 식민지 무역을 통한 이익은 전체 식민지 무역고 950만 파운드의 28%인 264만 파운드였다. 노예무역 하나만의 이익이 영국의 모든 상업, 산업 투자액의 40%에 달할 정도였다. 그러니 대서양 무역이라는 것이 산업혁명을 위한 본원적 축적에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런던의 서인도 부두

  식민제국과 군사력
 
  이 대서양 경제를 가능하게 한 것이 영국의 식민제국과 군사력이다. 식민제국은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을 통해 산업혁명의 기초를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다. 여러 통상법이나 항해법들을 통해 영국이 다른 어떤 유렵국가들보다 더 철저하게 그 팽창하는 제국으로부터 이익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특허회사들을 통해 해외무역을 고무했고 무역 흑자를 내기 위해 또 국내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경제에 철저한 통제를 가했다. 17, 18세기에 행해진 수입 면직물에 대한 철저한 규제는 바로 국내의 모직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1651년 이후 여러 번 제정된 항해법은 네델란드로부터 영국 해운업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법에 의하면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에서 들어오는 상품들은 반드시 영국 국적선에 실려야 했다.
 
  1689년에서 1846년까지 유지된 곡물법은 곡물수입을 줄임으로써 화폐의 유출을 줄이고 국내 농업을 진흥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또 외국곡물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목적도 갖고 있었다. 이것이 전시에는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또 국가는 식민지를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1689년에서 1815년 사이에 8번의 전쟁을 치렀는데 전체 127년 가운데 65년 동안 전시상태에 있었을 정도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19세기 중반의 영국 해군 함대

  이런 식민제국의 건설을 통해 영국은 식민지나 다른 지역으로부터 핵심 산업들의 원료를 안정적으로 조달하고
 
  시장을 유지할 수 있었고 북미지역에서와 같이 경쟁이 되는 식민지 산업을 파괴할 수 있었다. 식민지 산업은 철저하게 본국을 위해 봉사하도록 개편되었다.
 
  영국을 외침에서 지키고 해상에서의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해군력이 매우 중요했으므로 많을 때는 국가예산의 거의 70-80%가 이에 투입되었다. 이렇게 건설된 세계 최강의 해군함대는 전략적인 위치에 포진하여 무역과 식민지를 지켰고 적의 식민지나 해안을 위협했다.
 
  막대한 군사비 소요를 충당하기 위해 정부는 17세기에 국민소득의 2-4%를 세금으로 걷어 들였는데 이는 전시에는 6%까지 올라갔다. 프랑스와의 긴장이 고조된 1689년에서 1815년까지 사이에는 12%까지 뛰어 올랐다. 다른 나라들도 이를 뒤따르기는 했으나 영국만큼 많은 세금을 거두는 나라는 없었다.
 
  세금으로 모자라는 경우에는 국채를 발행했는데 이것이 1694년에 잉글랜드은행을 창설한 주된 이유이다. 이는 주로 전시에 발행되었는데 1814년에 나폴레옹 전쟁이 끝났을 때는 국채의 이자 지급액이 국가 세입의 56%를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
 
  그러니까 식민지를 확보하여 착취하고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영국의 식민제국이 수 세기 동안 쏟은 정력이라는 것은 말도 못할 만큼 큰 것이다. 산업화는 그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산업혁명이 기업가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기술의 발전 같은 것은 이에 비하면 사실 부수적인 요인에 불과하다. 면직산업의 예를 통해 구체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보자.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