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프레시안 2008-08-01 오후 12:03:26

산업혁명과 비유럽세계의 탈산업화 ⑤
면직산업과 원료ㆍ시장ㆍ통상로 보호의 문제


원료 조달과 시장의 확보
 
  처음부터 면직산업의 발전에서 중요한 애로의 하나는 원료 조달의 문제였다. 원면이 영국에서는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면직산업이 처음 네덜란드 이민자들에 의해 시작된 16세기 말에는 주로 레반트 지역에서 수입했다.
  그러나 그 양은 제한되어 있었다. 그래서 18세기에 들어와서는 영국령 카리브 지역이나 브라질 등 여러 곳으로 수입처가 확대되었다. 인도산 원면을 수입하면 가장 좋으나 부가가치 가 훨씬 높은 면직물 수출에도 바쁜 인도가 원면을 수출할 리는 만무했다. 그러므로 원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면직산업은 큰 한계를 안고 있었던 셈이다.
 
  돌파구가 열린 것은 1757년의 플라시 전투이다. 이 전투의 승리를 통해 동인도회사가 인도 내 원면의 주된 생산지 가운데 하나인 벵골지방을 장악한 것이다. 식민체제를 수립한 동인도회사는 벵골인에게서 받아들인 세금으로 다량의 원면을 사서 영국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원면이 싼 가격에 대량으로, 안정적으로 반입되며 랭카셔를 중심으로 면직산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760년대부터 나타나는 기계의 개량이나 그 뒤 증기기관 같은 동력의 발전은 모두 그 결과이다.
 
  산업의 급성장으로 인도산 원면만으로도 부족하자 1790년대에는 이집트에서 원면을 생산하여 들여왔다. 또 19세기에 들어가서는 미국 남부지역에 영국자본의 투입으로 흑인 노예를 이용하는 대규모의 면화 플랜테이션들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830년이 되면 랭카셔 원면 수요량의 3/4을 미국이 공급할 수 있었다.
 
  이렇게 미국의 생산량이 늘며 미국은 1820년부터 인도를 제치고 세계 최대의 면화 생산국이 되었고, 그 자리를 1971년까지 유지했다. 이런 점에서 영국 면직산업의 기초는 식민주의와 노예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식민지인과 흑인 노예들의 착취 없이는 결코 발전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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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남부의 면화플랜테이션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들. 19세기 중반.

  원료 조달에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이 시장의 확보였다. 그리고 영국 면직산업이 주로 해외시장에 의존하여 성장했으므로 이 해외시장을 어떻게 지키느냐가 매우 중요했다.
 
  초기에 수출 면직품의 30-60%는 서아프리카로 갔고 이 시장에서 영국산과 인도산은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런데 미국 독립전쟁 시기에 해군이 이 지역에 별로 신경을 쓸 수 없게 되자 수출이 급감했다. 전쟁이 끝나자 다시 급속히 회복되었는데 이는 해외시장 확보에서 국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영국은 19세기 전반까지는 대서양 시장을 중심으로 면직산업을 발전시켰으나 19세기 후반에는 인도 시장이 중요하게 되었다. 철도망 건설을 통해 인도 내수 시장으로 침투해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원료 조달과 시장 확보라는 면에서 안정성을 갖게 되자 18세기말과 19세기 초 사이에 랭카셔의 경제는 전례 없는 변화를 겪었다. 면직산업이 대규모의 기계화된 산업이 되며 영국 면직물의 수출고는 1784-6년의 년 80만 파운드에서, 1814-6년에는 년 1,870만 파운드로 뛰었고, 1854-6년에는 년 3,490만 파운드까지 늘어났다. 그리고 이 급성장하는 산업의 원료와 시장 확보를 위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영국의 제국과 해군력이었다.
 
  제국과 해군력의 역할
 
  어떤 산업이 국내시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경쟁력과 함께, 해외시장에 어떻게 접근하느냐 하는 것에 의존한다. 해외시장을 여는 하나의 결정적 요소는 제국의 힘이다. 강력한 제국의 산업들은 경쟁력이 있건 없건 도움을 받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친 면직산업의 급격한 성장은 영국의 식민제국과 해군력의 우월이 가져다 준 우호적인 교역환경에 크게 의존한 것이었다. 랭카셔의 수출 전망은 제국 내의 대규모 시장의 존재 여부, 그리고 그 안전성 여부에 달려 있었다. 랭카셔가 1차 대전 이후에 경쟁력을 잃게 된 것은 영국의 제국 및 해군력의 퇴조와 같이 일어난 일이다.
 
  영국 해군은 이미 17세기 중반에 블루 워터(blue water) 전략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는 국가의 중상주의 정책에 대응하는 해군 전략이다. 이것은 잉글랜드의 안전이 유럽 외부에서의 공격적인 전쟁 행위에 의해 강화될 수 있다는 믿음 위에 서 있었다.
 
  또 통상력과 해군력을 상호보완적으로 인식했다. 국제무역과 투자가 대 해군을 유지할 수 있는 비용을 충당할 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실제로 활발한 해외무역은 조선산업의 기반을 튼튼하게 만들었고 대규모의 상선대는 전시에 수병으로 전환할 선원들을 훈련시켰다. 반대로 해군력은 잉글랜드의 무역과 해외자산을 보호했다.
 
  해군력이 초창기의 면직산업을 도우려는 특별한 노력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원면이나 수출 면직물을 실은 선박이 통행하는 해로를 보호하는 것은 해군의 정상적인 의무였다. 또 랭카셔가 수출 시장으로 처음 진출하는 것을 용이하게 해 줌으로써 다른 나라의 면직물과 경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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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 캘커타의 영국 전용항구의 상선대. 영국 화물선이 하역작업을 하고 있다.

  해군이 면직산업 발전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해 준 것은 1753-63년의 7년 전쟁에서 프랑스에게 승리한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 함대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함으로써 영국이 인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영국이 패배했다면 인도나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내놓도록 요구 당했을 것이므로 면직산업에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나폴레옹과의 전쟁도 마찬가지이다. 넬슨 제독이 해상권을 장악한 덕분에 랭카셔의 수출은 1793-1815년 사이에도 급속하게 증가했다. 반대 상황이었다면 면직산업의 미래도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게 식민제국과 해군력이 원료 공급지와 시장을 하나로 묶는 것을 도와줌으로써만 영국 면직산업은 유지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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