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프레시안 2008-07-23 오후 12:03:44

산업혁명과 비유럽세계의 탈산업화 ③ 영국 산업혁명의 요인들 (2)

대서양 경제와 식민제국, 군사력의 중요성
 
  그러나 내부적 요인들을 강조하는 해석들은 1980년대에 오면 저항에 부딪치기 시작한다. 그것들이 역사적 실제와 잘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특히 핵심이라고 할 농업혁명은 문제거리이다. 연구를 하면 할수록 실체가 불분명해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토니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1500-1650년 사이에 농업혁명이 일어났다고 주장해 왔다. 그리고 그것을 농업자본주의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본다. 소농을 희생으로 한 상업적 대농의 성장, 그에 따른 토지 사용의 효율성 증가, 인클로저를 통한 목양지의 증가가 그 결과이다.
 
  인구가 증가하고 농산물가가 상승하자 토지가도 상승했고 그에 따라 경작지도 확대되고 토지이용의 효율성도 높아졌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많은 생계형의 소농들이 상업적인 영농을 하는 젠트리나 요맨 층의 대농들에게 토지를 잃었다는 것이다.
 
  많은 맑시스트들이 이 견해를 따른다. 그래서 저명한 맑스주의 경제사가인 로버트 브렌너도 1976년에 '잉글랜드에서의 주된 경향은 보다 큰 단위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을 차지농에게 주어 임금 노동의 도움으로 경작하게 하기 위해 보유지를 확고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생산조직의 변화에 동반한 것은 농업생산성의 주된 증가로 이는 진정으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들은 대농의 성장은 물론이나 농업생산성의 증가를 가져온 영농방식의 개선을 높이 평가한다. 교대농법(여러 해의 간격을 두고 경작과 목초재배를 교대시키는 것), 새로운 작물의 도입, 클로버 같은 질소 식물의 도입, 습지의 배수, 목초지에 물을 대는 새로운 기술 같은 것들이다.
 
  대농의 성장은 사실이나 이 시기 동안의 그 폭은 작다. 16세기에 인클로즈된 면적은 잉글랜드 전체의 2%에 불과했다. 17세기에 와서 20% 이상으로 증가하나 대부분은 1650년 이후의 일이다. 또 1520-1650년 사이에 농촌인구는 255만에서 392만 명으로 증가했는데 증가분의 모두가 토지 없는 농업노동자가 아니었다. 소농도 크게 증가했고 따라서 농민들의 토지 보유규모는 더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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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에 인클로우즈된 농토. 그 이전의 고랑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새로운 작물들은 1650년 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기에는 너무 늦게 도입되었다. 당근은 16세기 말, 순무는 빠른 곳이 1646-56년, 캐비지는 1660년 이후에야 도입되었고 감자는 17세기 후반에야 밭에 심기 시작했다.
 
  또 클로버 같은 질소 식물들은 토양 내 질소분을 증가시킴으로써 이론적으로는 농업생산성을 크게 향상시킬 것 같으나 실제로 농민들은 이를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교대농법도 가축의 분뇨를 통해 지력을 향상시키기는 하나 실제로 인구가 조밀한 지역에서는 곡물생산이 더 급했으므로 이 방법을 잘 사용하지 않았다.
 
  이렇게 전통적인 주장이 문제가 많자 농업혁명이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로버트 알렌 같은 사람은 농업혁명이 1740년 이전과 19세기 전반에 두 차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농업혁명의 실체가 혼란스러운 것은 직접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믿을 만한 사료도 부족하고, 있어도 지역에 따른 편차가 너무 커서 생산성 증대를 확실하게 일반적인 추세로 말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인구 증가, 소득증가, 도시화 같은 결과로부터 거꾸로 추론을 하니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이다.
 
  영국의 인구는 1500년의 250만에서 1700년에 650만으로, 또 1851년에 2,100만으로 크게 증가했다. 국내농업이 인구의 4/5를 먹여 살렸으므로 농업이 먹이는 인구는 1700-1851년 사이에만 220%가 증가한 셈이다.
 
  식량소비가 대체로 일정하다고 해도 식량 생산은 틀림없이 증가했을 것이나 1800년 이후는 실질임금이 상승했으므로 소비도 더 증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농업에 종사하는 성인남자의 수는 90만에서 110만 명으로 증가했을 뿐이다. 따라서 1인당 생산고는 그 사이에 약 180% 정도 증가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렇다고 해도 19세기 초 영국 농민의 1인당 생산성은 프랑스 농민보다 1/3 정도 높았고 러시아보다는 두 배 정도였다. 그러니 생산성이 올라간 것은 사실이겠으나 모든 유럽국가들이 다소간은 다 그러므로 그것을 농업혁명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잘 알 수 없다.
 
  또 이런 주장은 기껏해야 영국농업이 영국민들을 먹여 살렸다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농업에서 축적된 자본이 산업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 19세기 중반에 철도망이 완성되기까지 농촌은 공산품 시장으로서도 큰 역할을 못했다. 그러니 산업혁명의 선행조건으로서의 농업혁명에 대한 주장이 큰 신뢰성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대서양 경제의 중요성
 
  이렇게 내부적 요인들이 한계를 갖고 있으므로 다시 외부적 요인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1980년대에 시작된 이른바 '대서양 경제'의 재해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대서양 경제란 대서양을 사이에 둔 양쪽 해안 지역을 무역을 통해 맺어진 하나의 단일한 상호의존적인 경제지역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북아메리카 식민지와 카리브 식민지뿐 아니라 비영국령 카리브 식민지와 브라질 등의 남아메리카를 포함하는 아메리카 지역과 아프리카 지역, 그리고 영국과의 경제적 상호의존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다시 무역이, 특히 수출이 한 지도적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새로운 견해에 의하면 수출은 투자와 독립적이 아니고 국내 소비도 수출과 독립적이 아니다. 또 농업생산성 증대에 따르는 공산품 수요의 증가는 수출에 비하면 매우 낮은 비율이다.
 
  실제로 대서양 무역은 영국 산업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직물이나 농기구, 염료, 총기·화약류, 각종 금속제품, 담배, 술 같은 많은 공산품들이 아프리카와 북미식민지, 또는 중남미 지역으로 수출되었다.
 
  이것은 당시의 첨단산업이었던 면직산업이나 금속산업도 마찬가지이다. 면직산업은 기본적으로 수출산업으로 그것이 처음 탄생한 1760년대부터 아프리카와 카리브지역으로 수출되었다. 그 수출액은 1760년에는 전체 생산량의 50%에 달했다.
 
  철강 등 금속산업에서도 국내에서 소비된 것은 저급품인 반면 기술이 필요한 고부가가치 상품들은 대체로 수출되었다. 그러니까 많은 이익을 가져오는 기술의 발전은 주로 수출에 의존한 것이다. 이는 철도가 발전하기 이전에 국내수요가 소규모적이고 제한되었던 데 비해 대서양 지역의 주문단위가 훨씬 컸으므로 영국의 제조업자들이 국내시장보다 해외시장에 더 주력했기 때문이다.
 
  1776년의 식민지 무역을 통한 이익은 전체 식민지 무역고 950만 파운드의 28%인 264만 파운드였다. 노예무역 하나만의 이익이 영국의 모든 상업, 산업 투자액의 40%에 달할 정도였다. 그러니 대서양 무역이라는 것이 산업혁명을 위한 본원적 축적에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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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던의 서인도 부두

  식민제국과 군사력
 
  이 대서양 경제를 가능하게 한 것이 영국의 식민제국과 군사력이다. 식민제국은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을 통해 산업혁명의 기초를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다. 여러 통상법이나 항해법들을 통해 영국이 다른 어떤 유렵국가들보다 더 철저하게 그 팽창하는 제국으로부터 이익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특허회사들을 통해 해외무역을 고무했고 무역 흑자를 내기 위해 또 국내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경제에 철저한 통제를 가했다. 17, 18세기에 행해진 수입 면직물에 대한 철저한 규제는 바로 국내의 모직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1651년 이후 여러 번 제정된 항해법은 네델란드로부터 영국 해운업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법에 의하면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에서 들어오는 상품들은 반드시 영국 국적선에 실려야 했다.
 
  1689년에서 1846년까지 유지된 곡물법은 곡물수입을 줄임으로써 화폐의 유출을 줄이고 국내 농업을 진흥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또 외국곡물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목적도 갖고 있었다. 이것이 전시에는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또 국가는 식민지를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1689년에서 1815년 사이에 8번의 전쟁을 치렀는데 전체 127년 가운데 65년 동안 전시상태에 있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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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중반의 영국 해군 함대

  이런 식민제국의 건설을 통해 영국은 식민지나 다른 지역으로부터 핵심 산업들의 원료를 안정적으로 조달하고
 
  시장을 유지할 수 있었고 북미지역에서와 같이 경쟁이 되는 식민지 산업을 파괴할 수 있었다. 식민지 산업은 철저하게 본국을 위해 봉사하도록 개편되었다.
 
  영국을 외침에서 지키고 해상에서의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해군력이 매우 중요했으므로 많을 때는 국가예산의 거의 70-80%가 이에 투입되었다. 이렇게 건설된 세계 최강의 해군함대는 전략적인 위치에 포진하여 무역과 식민지를 지켰고 적의 식민지나 해안을 위협했다.
 
  막대한 군사비 소요를 충당하기 위해 정부는 17세기에 국민소득의 2-4%를 세금으로 걷어 들였는데 이는 전시에는 6%까지 올라갔다. 프랑스와의 긴장이 고조된 1689년에서 1815년까지 사이에는 12%까지 뛰어 올랐다. 다른 나라들도 이를 뒤따르기는 했으나 영국만큼 많은 세금을 거두는 나라는 없었다.
 
  세금으로 모자라는 경우에는 국채를 발행했는데 이것이 1694년에 잉글랜드은행을 창설한 주된 이유이다. 이는 주로 전시에 발행되었는데 1814년에 나폴레옹 전쟁이 끝났을 때는 국채의 이자 지급액이 국가 세입의 56%를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
 
  그러니까 식민지를 확보하여 착취하고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영국의 식민제국이 수 세기 동안 쏟은 정력이라는 것은 말도 못할 만큼 큰 것이다. 산업화는 그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산업혁명이 기업가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기술의 발전 같은 것은 이에 비하면 사실 부수적인 요인에 불과하다. 면직산업의 예를 통해 구체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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