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프레시안

프랑스 혁명과 세계사 ⑨
프랑스혁명과 식민주의, 노예제, 유대인 해방

카리브 식민지와 노예제, 노예무역
 
  식민주의와 노예제 문제는 프랑스혁명의 보편성을 검증할 수 있는 좋은 대상이다. 그것이 내세우는 자유와 평등이 과연 비프랑스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원리인지 알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혁명의 중요한 연구자들은 이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 마티에즈나 소불은 노예제 폐지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을 정도이다. 이는 이 문제들이 자기들 논리의 취약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18세기에 식민지는 프랑스 경제에 사활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이는 특히 카리브 해의 식민지들이 그렇다. 생 도밍그, 마르티니크, 과달루페가 중심이 되는 이 식민지들은 1780년대까지 유럽이 소비하는 설탕과 커피의 1/2을 생산했고 그 3/4은 프랑스에 들어왔다가 재수출되며 프랑스 해외무역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18세기 프랑스의 해외무역이 영국보다도 빨리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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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리브해의 식민지들 : 붉은 색은 산 도밍고, 남색은 과달루페, 초록색은 마르티니크 식민지

  프랑스 경제의 가장 활력 있고 선진적인 이 식민지 상업 부문에 종사한 사람은 1백만 이상이었고 여기에 생계를 의탁하고 있는 사람이 프랑스 전체 인구의 약 1/8이 될 정도였다. 그러니 식민지 문제가 많은 프랑스인들의 관심사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카리브 식민지 가운데서도 '왕관의 보석'으로 불린 생 도밍그가 가장 중요했다. 인구와 산출량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다. 생 도밍그에서는 커피,
인디고, 면화, 사탕수수를 재배했는데 그 중 사탕수수가 가장 중요했다. 전체 플랜테이션의 절반 이상이 그 농장이었다.
 
  또 생 도밍그 플랜테이션의 년 이익률은 8-12%로 영국 식민지들의 4%보다 훨씬 높았다. 그것은 더 많은 투자가 이루어져 가공기술, 관개, 생산성에서 더 높은 수준에 있었기 때문이다.
 
  카리브 지역 플랜테이션은 노예제에 의해 유지되었다. 생 도밍그의 인구는 1750년의 16만6천 명에서 1789년에는 56만 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그 가운데 50만 명이 흑인 노예였고 백인이 3만2천 명, 해방된 유색인이 2만8천 명이었다. 해방 유색인 가운데에는 농장주도 많았다.
 
  이렇게 흑인 노예가 많았던 것은 사탕수수라는 작물의 특성 때문이다. 사탕수수는 키우는 데 1-2년 걸리나 수확하고 나면 48시간 안에 분쇄하고 그 액을 짜내서 끓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상품 가치가 사라진다. 그래서 수확기에 노예들을 매우 혹사시켰다.
 
  그 결과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이는 과로와 영양부족, 질병 때문인데 카리브 지역에 도착한 아프리카인 노예는 8년 안에 그 절반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카리브 식민지의 발전은 노예 노동력의 원활한 공급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프랑스 노예상인들은 17세기 말에는 매년 1천 명에서 2천 명 정도를 카리브 지역에 공급했으나 1780년대에는 그 숫자가 최고조에 달해 매년 평균 3만7천명으로 늘어났다. 1820년까지 대서양을 건넌 아프리카 노예의 1/4이 프랑스령 카리브로 향했다. 프랑스는 18세기에 영국과 함께 가장 중요한 노예무역국가였다.
 
  혁명과 카리브 식민지의 투쟁
 
  카리브 지역에 혁명의 소식이 전해진 것은 1789년 9월 말이다. 그러면서 분위기가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당시에 식민지와 관련해 제기된 문제는 식민지 자치문제, 해방유색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문제, 노예해방 문제였다.
  그러나 이 문제들은 모두 매우 민감한 것으로 식민지와 노예제, 노예무역이 프랑스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하면 함부로 다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국민의회는 가능하면 문제를 회피하는 전략을 취했다. 식민지위원회를 따로 만들어 문제를 연구하도록 조치를 취한 것은 시간도 지연시키고 국민의회가 직접 관련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식민지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백인 식민자들은 진작에 식민지 관리들을 쫓아낸 후 자치의회를 만들 계획을 추진했다. 해방 유색인들은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다. 고통에 시달리는 흑인 노예들은 즉각적인 노예제 폐지를 요구했다.
 
  1790년 3월에 식민지위원회 위원장인 앙트완느-삐에르 바르나브는 백인 농장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새 헌법을 식민지에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과 노예제에 반대하는 폭동을 선동하는 자를 엄격히 단속하겠다고 선언했다. '식민지 체제가 억압적이기는 하나 그것이 수백 만 프랑스인에게 생계를 주므로' 식민지를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현실의 개선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이자 결국 1791년 8월 22일에 생 도밍그에서 대규모 노예반란이 터졌다. 여기에는 몇 주 내에 십만 명의 노예가 참여하여 수많은 플랜테이션들을 불 지르고 황폐화시켰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백인 농장주들은 이웃섬인 영국령 자메이카 행정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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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55년의 생 도밍그 시

  그러자 금방 개원한 입법의회는 1792년 3월에 해방 유색인에 대해 시민권과 정치적 권리를 허용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것을 통해 해방유색인의 마음을 돌려 노예반란을 진정시키고 또 한 편에서 식민지 백인들이 영국의 도움으로 프랑스에서 분리해 나가는 것을 막으려 한 것이다.
 
  입법의회는 6천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백인들은 끝까지 해방 유색인을 동료 시민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1793년 1월에 영국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자 이웃한 마르티니크 섬의 백인들은 영국에게 주권을 양도함으로써 영국군이 1794년 3월에는 마르티니크와 과달루페 섬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카리브 지역의 프랑스군이 영국군에 비해 극히 열세였으므로 생 도밍그의 행정관은 본국 허락 없이 1793년 8월에 흑인 노예의 해방을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노예들의 도움을 얻어 위기를 벗어나려 한 것이다. 이 조치의 효력으로 유능하고 노예들의 지지를 받는 흑인 장군인 투생 루베르튀르를 프랑스 편에 끌어들일 수 있었고 그래서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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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생 루베르튀르

  이에 국민공회는 1794년 2월에 식민지 노예제 폐지를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다시 군대를 파견하여 카리브 지역 다른 섬들의 노예도 해방시키도록 했다. 영국이 1795년에 병력 3만 명을 파견하여 생 도밍그를 점령하려 했으나 투생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그 후 투생은 생 도밍그의 행정관이 되어 본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군사독재를 실시했다.
 
  1802년에 나폴레옹은 카리브 섬들을 다시 통제하고 노예제와 노예무역을 복구하려고 군대를 파견했으나 1804년 11월에 패퇴하고 말았다. 뒤에 남은 많은 백인들은 학살을 당했다. 그 결과 생 도밍그는 아이티라는 이름을 가진 독립국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카리브 식민지와 관련해 혁명가들은 식민지 해방이나 노예제, 노예무역의 폐지에 전혀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 노예해방은 카리브 식민지들이 영국의 손에 넘어갈까봐 취한 궁여지책에 불과한 것이다.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운 것은 흑인 노예들이었지 혁명가들은 아니었다.
 
  그러니 프랑스 혁명의 세계사적 보편성을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구에 찬 것인지 이것을 통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는 프랑스 국내의 유대인 해방에 대한 혁명가들의 태도에서도 비슷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혁명과 유대인 해방
 
  1791년 9월 27일에 제헌의회는 알사스-로렌의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주기로 의결했다. 이것은 유대인에게 법적 평등을 보장해준다는 것을 의미했다. 혁명가들은 당연히 이를 혁명의 보편성을 보여준 쾌거로 환영했다. 많은 유대인들도 이것이 수 세기에 걸친 굴욕과 법적 차별, 주류사회로부터의 배제를 끝내 주리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했다.
 
  그래서 겉으로만 보면 이것은 인간 해방이라는 점에서 시대사적인 의미를 갖는 전환점으로 기록될 수 있었다. 사실 당시 프랑스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수는 많지 않았다. 보르도 주위에 3,500명 정도, 알사스-로렌에 3만 명, 파리에 500명 정도였다. 그럼에도 제헌의회가 다른 많은 중요한 사안에도 불구하고 이 사안을 경시하지 않은 것은 이것이 혁명의 보편성과 관련해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잘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방적인 해방이 아니라 큰 희생을 요구하는 거래였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시민권을 부여받기 위해 유대인 공동체의 자율성을 허용하는 특권을 포기해야 했고 민사적인 일에 대해 유대교 성직자인 랍비가 가지고 있던 관할권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유대인이 프랑스인이 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 자격으로서였다.
 
  혁명가들이 유대인들에게 이런 요구를 한 것은 그들의 종교적 공동체를 제거함으로써 프랑스 문화로의 동화를 촉진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일부 유대인들이 개인적으로 프랑스 사회에 편입되는 대신 유대인의 종교공동체는 공식적으로 부인되었다.
 
  유대인의 해방은 유대인 사회에 큰 파급효과를 가져다 줄 것 같이 보였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유대인 대부분의 직업구조나 주거형태, 종교생활의 형태가 19세기 후반까지도 그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또 랍비의 권위는 공동체의 자율성이 포기됨으로써 많이 줄어들기는 했으나 19세기 상당 부분 동안 종교적, 시민적 일과 관련해 권위를 유지했다. 그뿐 아니라 프랑스 사회 내의 반유대주의적 감정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결국 공화국은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명분으로 유대인에게 형식적인 법적 평등을 주는 대신 그들의 공동체를 부인함으로써 그 종교생활을 파괴하려 한 것이다. 동화를 하지 않는 한 그들이 진정한 프랑스의 국민이 될 수는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 공동체의 본질이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부인한다는 것은 유대인에게 자기 부정을 요구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혁명기의 유대인 해방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혁명이 자랑하는 보편주의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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