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프레시안 2008-08-01 오후 12:03:26

산업혁명과 비유럽세계의 탈산업화 ⑤
면직산업과 원료ㆍ시장ㆍ통상로 보호의 문제


원료 조달과 시장의 확보
 
  처음부터 면직산업의 발전에서 중요한 애로의 하나는 원료 조달의 문제였다. 원면이 영국에서는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면직산업이 처음 네덜란드 이민자들에 의해 시작된 16세기 말에는 주로 레반트 지역에서 수입했다.
  그러나 그 양은 제한되어 있었다. 그래서 18세기에 들어와서는 영국령 카리브 지역이나 브라질 등 여러 곳으로 수입처가 확대되었다. 인도산 원면을 수입하면 가장 좋으나 부가가치 가 훨씬 높은 면직물 수출에도 바쁜 인도가 원면을 수출할 리는 만무했다. 그러므로 원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면직산업은 큰 한계를 안고 있었던 셈이다.
 
  돌파구가 열린 것은 1757년의 플라시 전투이다. 이 전투의 승리를 통해 동인도회사가 인도 내 원면의 주된 생산지 가운데 하나인 벵골지방을 장악한 것이다. 식민체제를 수립한 동인도회사는 벵골인에게서 받아들인 세금으로 다량의 원면을 사서 영국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원면이 싼 가격에 대량으로, 안정적으로 반입되며 랭카셔를 중심으로 면직산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760년대부터 나타나는 기계의 개량이나 그 뒤 증기기관 같은 동력의 발전은 모두 그 결과이다.
 
  산업의 급성장으로 인도산 원면만으로도 부족하자 1790년대에는 이집트에서 원면을 생산하여 들여왔다. 또 19세기에 들어가서는 미국 남부지역에 영국자본의 투입으로 흑인 노예를 이용하는 대규모의 면화 플랜테이션들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830년이 되면 랭카셔 원면 수요량의 3/4을 미국이 공급할 수 있었다.
 
  이렇게 미국의 생산량이 늘며 미국은 1820년부터 인도를 제치고 세계 최대의 면화 생산국이 되었고, 그 자리를 1971년까지 유지했다. 이런 점에서 영국 면직산업의 기초는 식민주의와 노예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식민지인과 흑인 노예들의 착취 없이는 결코 발전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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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남부의 면화플랜테이션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들. 19세기 중반.

  원료 조달에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이 시장의 확보였다. 그리고 영국 면직산업이 주로 해외시장에 의존하여 성장했으므로 이 해외시장을 어떻게 지키느냐가 매우 중요했다.
 
  초기에 수출 면직품의 30-60%는 서아프리카로 갔고 이 시장에서 영국산과 인도산은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런데 미국 독립전쟁 시기에 해군이 이 지역에 별로 신경을 쓸 수 없게 되자 수출이 급감했다. 전쟁이 끝나자 다시 급속히 회복되었는데 이는 해외시장 확보에서 국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영국은 19세기 전반까지는 대서양 시장을 중심으로 면직산업을 발전시켰으나 19세기 후반에는 인도 시장이 중요하게 되었다. 철도망 건설을 통해 인도 내수 시장으로 침투해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원료 조달과 시장 확보라는 면에서 안정성을 갖게 되자 18세기말과 19세기 초 사이에 랭카셔의 경제는 전례 없는 변화를 겪었다. 면직산업이 대규모의 기계화된 산업이 되며 영국 면직물의 수출고는 1784-6년의 년 80만 파운드에서, 1814-6년에는 년 1,870만 파운드로 뛰었고, 1854-6년에는 년 3,490만 파운드까지 늘어났다. 그리고 이 급성장하는 산업의 원료와 시장 확보를 위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영국의 제국과 해군력이었다.
 
  제국과 해군력의 역할
 
  어떤 산업이 국내시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경쟁력과 함께, 해외시장에 어떻게 접근하느냐 하는 것에 의존한다. 해외시장을 여는 하나의 결정적 요소는 제국의 힘이다. 강력한 제국의 산업들은 경쟁력이 있건 없건 도움을 받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친 면직산업의 급격한 성장은 영국의 식민제국과 해군력의 우월이 가져다 준 우호적인 교역환경에 크게 의존한 것이었다. 랭카셔의 수출 전망은 제국 내의 대규모 시장의 존재 여부, 그리고 그 안전성 여부에 달려 있었다. 랭카셔가 1차 대전 이후에 경쟁력을 잃게 된 것은 영국의 제국 및 해군력의 퇴조와 같이 일어난 일이다.
 
  영국 해군은 이미 17세기 중반에 블루 워터(blue water) 전략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는 국가의 중상주의 정책에 대응하는 해군 전략이다. 이것은 잉글랜드의 안전이 유럽 외부에서의 공격적인 전쟁 행위에 의해 강화될 수 있다는 믿음 위에 서 있었다.
 
  또 통상력과 해군력을 상호보완적으로 인식했다. 국제무역과 투자가 대 해군을 유지할 수 있는 비용을 충당할 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실제로 활발한 해외무역은 조선산업의 기반을 튼튼하게 만들었고 대규모의 상선대는 전시에 수병으로 전환할 선원들을 훈련시켰다. 반대로 해군력은 잉글랜드의 무역과 해외자산을 보호했다.
 
  해군력이 초창기의 면직산업을 도우려는 특별한 노력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원면이나 수출 면직물을 실은 선박이 통행하는 해로를 보호하는 것은 해군의 정상적인 의무였다. 또 랭카셔가 수출 시장으로 처음 진출하는 것을 용이하게 해 줌으로써 다른 나라의 면직물과 경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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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 캘커타의 영국 전용항구의 상선대. 영국 화물선이 하역작업을 하고 있다.

  해군이 면직산업 발전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해 준 것은 1753-63년의 7년 전쟁에서 프랑스에게 승리한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 함대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함으로써 영국이 인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영국이 패배했다면 인도나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내놓도록 요구 당했을 것이므로 면직산업에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나폴레옹과의 전쟁도 마찬가지이다. 넬슨 제독이 해상권을 장악한 덕분에 랭카셔의 수출은 1793-1815년 사이에도 급속하게 증가했다. 반대 상황이었다면 면직산업의 미래도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게 식민제국과 해군력이 원료 공급지와 시장을 하나로 묶는 것을 도와줌으로써만 영국 면직산업은 유지될 수 있었다.
출처 - 프레시안 2008-07-30 오전 11:50:27

산업혁명과 비유럽세계의 탈산업화 ④ 영국 면직산업의 성장과 국가의 역할 

  산업혁명은 시작되고 나서도 한 세기 이상 몇 개의 선도적 부분에 제한되어 있었다. 면직산업, 철강산업, 철도와 운하를 포함한 운송산업이 그것이다. 그러나 면직산업은 1780-1860년 사이에 총 생산액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부문이었다.
 
  또 가장 먼저 기계화되고 공장화된 선진적인 산업이었다. 그러므로 영국 면직산업이 어떤 방식으로 그 기초를 마련했고 세계시장을 지배하게 되었는가를 아는 것은 영국 산업혁명의 성격 이해에 필수적이다.
 
  면직산업의 이런 운명은 면직물이 갖고 있는 특성 때문이다. 그것이 당시의 다른 어떤 직물보다 우월한 면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면사는 모사보다 더 강하고 모, 아마, 실크 같은 다른 실보다 가공하기에 편리하므로 나중의 기계제 생산에도 적합했다. 또 면직물은 다른 직물보다 표백이나 염색이 잘 되었고 오래 갔다. 게다가 가볍고 세탁하기도 편했으니 어떤 직물보다 잠재적으로 큰 시장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면직물은 원래 인도의 주종 수출품으로 일찍부터 유럽에서의 수요가 많았다. 영국인들은 17세기 이전부터 인도에서 면직물을 수입하여 본국에서 사용하는 이외에 다른 유럽지역과 나아가 아프리카, 아메리카로도 수출했다. 이는 매우 수지 맞는 사업이었다.
 
  그럼에도 17세기 중반까지는 수입되는 주종품목인 캘리코(20수짜리 면사로 짠 거친 면직물)의 양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17세기 말에 가서야 전체 수입 직물의 1/4을 차지할 정도가 되었다. 1700년에 영국의 직물 총생산액은 850만 파운드였고 수출량은 450만 파운드(주로 모직물), 수입량은 150만 파운드(4/3은 아마포)정도였다.
 
  당시에 면직물을 독점적으로 수입한 것은 영국 동인도회사였는데 수입량이 너무 많아지자 정부는 이에 제한을 가했다. 전통적인 모직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모직과의 혼방제품만 수입하도록 규제하기도 했고 또 1680년부터는 국내에서 혼방 제품 이외에 순면제품 사용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수입 면직물에 대한 규제는 이렇게 1770년대까지 여러 형태로 유지되었는데 그것은 중상주의 원리에 따른 것이었다. 국가의 전략 목표나 정치적 안정, 조세 수입 등을 다각도로 고려한 결과이다.
 
  그럼에도 면직물이 이익이 많이 남는 상품임이 분명했으므로 영국 상인들은 여러 제약에도 불구하고 17세기에 들어와 수입 원면을 이용하여 국내에서의 면직물 생산을 늘리기 시작했다. 대체로 전대제도를 통해 농촌 마을에서 생산했는데 이는 도시에는 길드의 규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면직산업이 1760년대 이후 급성장하게 된 것은 인도의 벵골지역 식민지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인도로부터 원면이 쉽게 조달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기계의 개량이나 공장제도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면직산업의 공장화에 가장 기여한 인물은 리차드 아크라이트이다. 그가 1771년에 자신이 개량한 직기들을 물레방아와 결합한 공장을 더비셔의 크롬포드에 설립한 것이다. 이는 최초의 근대적 면직공장이다. 1773년부터는 인도 직물을 본뜬 최초의 순면 캘리코를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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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크라이트 직기(1771)

  정부는 국내 면직산업이 가져올 희망찬 미래를 금방 알아보았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꿔 그 발전을 위한 모든 조치를 다했다. 1774년에 원면 수입에 대한 관세 면제 혜택을 베풀었다.
 
  같은 해에 영국 내에서 생산한 면직물은 혼방이 아니더라도 의복뿐 아니라 커튼이나 식탁보 등의 집안 살림살이용이나 가구에 사용하는 것을 허용해 주었다. 이는 국내의 면직물 수요를 증가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다른 한 편에서는 인도 면직물은 재수출을 조건으로 런던에서만 수입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잉글랜드 면직업자들을 인도로부터의 경쟁에서 지켜주기 위해서였다. 정부가 철저하게 자국 면직산업을 보호육성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그리하여 영국은 1784년부터 유럽 최대의 면직물 생산국이 될 수 있었고 1787년부터는 세계최대의 무역국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영국의 산업혁명이 유럽 다른 나라의 산업혁명과 달리 사기업가들이 주도한 것이라는 주장은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사기업가들이 주도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국가의 철저한 비호 하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 프레시안 2008-07-23 오후 12:03:44

산업혁명과 비유럽세계의 탈산업화 ③ 영국 산업혁명의 요인들 (2)

대서양 경제와 식민제국, 군사력의 중요성
 
  그러나 내부적 요인들을 강조하는 해석들은 1980년대에 오면 저항에 부딪치기 시작한다. 그것들이 역사적 실제와 잘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특히 핵심이라고 할 농업혁명은 문제거리이다. 연구를 하면 할수록 실체가 불분명해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토니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1500-1650년 사이에 농업혁명이 일어났다고 주장해 왔다. 그리고 그것을 농업자본주의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본다. 소농을 희생으로 한 상업적 대농의 성장, 그에 따른 토지 사용의 효율성 증가, 인클로저를 통한 목양지의 증가가 그 결과이다.
 
  인구가 증가하고 농산물가가 상승하자 토지가도 상승했고 그에 따라 경작지도 확대되고 토지이용의 효율성도 높아졌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많은 생계형의 소농들이 상업적인 영농을 하는 젠트리나 요맨 층의 대농들에게 토지를 잃었다는 것이다.
 
  많은 맑시스트들이 이 견해를 따른다. 그래서 저명한 맑스주의 경제사가인 로버트 브렌너도 1976년에 '잉글랜드에서의 주된 경향은 보다 큰 단위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을 차지농에게 주어 임금 노동의 도움으로 경작하게 하기 위해 보유지를 확고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생산조직의 변화에 동반한 것은 농업생산성의 주된 증가로 이는 진정으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들은 대농의 성장은 물론이나 농업생산성의 증가를 가져온 영농방식의 개선을 높이 평가한다. 교대농법(여러 해의 간격을 두고 경작과 목초재배를 교대시키는 것), 새로운 작물의 도입, 클로버 같은 질소 식물의 도입, 습지의 배수, 목초지에 물을 대는 새로운 기술 같은 것들이다.
 
  대농의 성장은 사실이나 이 시기 동안의 그 폭은 작다. 16세기에 인클로즈된 면적은 잉글랜드 전체의 2%에 불과했다. 17세기에 와서 20% 이상으로 증가하나 대부분은 1650년 이후의 일이다. 또 1520-1650년 사이에 농촌인구는 255만에서 392만 명으로 증가했는데 증가분의 모두가 토지 없는 농업노동자가 아니었다. 소농도 크게 증가했고 따라서 농민들의 토지 보유규모는 더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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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에 인클로우즈된 농토. 그 이전의 고랑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새로운 작물들은 1650년 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기에는 너무 늦게 도입되었다. 당근은 16세기 말, 순무는 빠른 곳이 1646-56년, 캐비지는 1660년 이후에야 도입되었고 감자는 17세기 후반에야 밭에 심기 시작했다.
 
  또 클로버 같은 질소 식물들은 토양 내 질소분을 증가시킴으로써 이론적으로는 농업생산성을 크게 향상시킬 것 같으나 실제로 농민들은 이를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교대농법도 가축의 분뇨를 통해 지력을 향상시키기는 하나 실제로 인구가 조밀한 지역에서는 곡물생산이 더 급했으므로 이 방법을 잘 사용하지 않았다.
 
  이렇게 전통적인 주장이 문제가 많자 농업혁명이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로버트 알렌 같은 사람은 농업혁명이 1740년 이전과 19세기 전반에 두 차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농업혁명의 실체가 혼란스러운 것은 직접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믿을 만한 사료도 부족하고, 있어도 지역에 따른 편차가 너무 커서 생산성 증대를 확실하게 일반적인 추세로 말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인구 증가, 소득증가, 도시화 같은 결과로부터 거꾸로 추론을 하니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이다.
 
  영국의 인구는 1500년의 250만에서 1700년에 650만으로, 또 1851년에 2,100만으로 크게 증가했다. 국내농업이 인구의 4/5를 먹여 살렸으므로 농업이 먹이는 인구는 1700-1851년 사이에만 220%가 증가한 셈이다.
 
  식량소비가 대체로 일정하다고 해도 식량 생산은 틀림없이 증가했을 것이나 1800년 이후는 실질임금이 상승했으므로 소비도 더 증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농업에 종사하는 성인남자의 수는 90만에서 110만 명으로 증가했을 뿐이다. 따라서 1인당 생산고는 그 사이에 약 180% 정도 증가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렇다고 해도 19세기 초 영국 농민의 1인당 생산성은 프랑스 농민보다 1/3 정도 높았고 러시아보다는 두 배 정도였다. 그러니 생산성이 올라간 것은 사실이겠으나 모든 유럽국가들이 다소간은 다 그러므로 그것을 농업혁명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잘 알 수 없다.
 
  또 이런 주장은 기껏해야 영국농업이 영국민들을 먹여 살렸다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농업에서 축적된 자본이 산업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 19세기 중반에 철도망이 완성되기까지 농촌은 공산품 시장으로서도 큰 역할을 못했다. 그러니 산업혁명의 선행조건으로서의 농업혁명에 대한 주장이 큰 신뢰성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대서양 경제의 중요성
 
  이렇게 내부적 요인들이 한계를 갖고 있으므로 다시 외부적 요인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1980년대에 시작된 이른바 '대서양 경제'의 재해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대서양 경제란 대서양을 사이에 둔 양쪽 해안 지역을 무역을 통해 맺어진 하나의 단일한 상호의존적인 경제지역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북아메리카 식민지와 카리브 식민지뿐 아니라 비영국령 카리브 식민지와 브라질 등의 남아메리카를 포함하는 아메리카 지역과 아프리카 지역, 그리고 영국과의 경제적 상호의존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다시 무역이, 특히 수출이 한 지도적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새로운 견해에 의하면 수출은 투자와 독립적이 아니고 국내 소비도 수출과 독립적이 아니다. 또 농업생산성 증대에 따르는 공산품 수요의 증가는 수출에 비하면 매우 낮은 비율이다.
 
  실제로 대서양 무역은 영국 산업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직물이나 농기구, 염료, 총기·화약류, 각종 금속제품, 담배, 술 같은 많은 공산품들이 아프리카와 북미식민지, 또는 중남미 지역으로 수출되었다.
 
  이것은 당시의 첨단산업이었던 면직산업이나 금속산업도 마찬가지이다. 면직산업은 기본적으로 수출산업으로 그것이 처음 탄생한 1760년대부터 아프리카와 카리브지역으로 수출되었다. 그 수출액은 1760년에는 전체 생산량의 50%에 달했다.
 
  철강 등 금속산업에서도 국내에서 소비된 것은 저급품인 반면 기술이 필요한 고부가가치 상품들은 대체로 수출되었다. 그러니까 많은 이익을 가져오는 기술의 발전은 주로 수출에 의존한 것이다. 이는 철도가 발전하기 이전에 국내수요가 소규모적이고 제한되었던 데 비해 대서양 지역의 주문단위가 훨씬 컸으므로 영국의 제조업자들이 국내시장보다 해외시장에 더 주력했기 때문이다.
 
  1776년의 식민지 무역을 통한 이익은 전체 식민지 무역고 950만 파운드의 28%인 264만 파운드였다. 노예무역 하나만의 이익이 영국의 모든 상업, 산업 투자액의 40%에 달할 정도였다. 그러니 대서양 무역이라는 것이 산업혁명을 위한 본원적 축적에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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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던의 서인도 부두

  식민제국과 군사력
 
  이 대서양 경제를 가능하게 한 것이 영국의 식민제국과 군사력이다. 식민제국은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을 통해 산업혁명의 기초를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다. 여러 통상법이나 항해법들을 통해 영국이 다른 어떤 유렵국가들보다 더 철저하게 그 팽창하는 제국으로부터 이익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특허회사들을 통해 해외무역을 고무했고 무역 흑자를 내기 위해 또 국내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경제에 철저한 통제를 가했다. 17, 18세기에 행해진 수입 면직물에 대한 철저한 규제는 바로 국내의 모직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1651년 이후 여러 번 제정된 항해법은 네델란드로부터 영국 해운업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법에 의하면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에서 들어오는 상품들은 반드시 영국 국적선에 실려야 했다.
 
  1689년에서 1846년까지 유지된 곡물법은 곡물수입을 줄임으로써 화폐의 유출을 줄이고 국내 농업을 진흥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또 외국곡물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목적도 갖고 있었다. 이것이 전시에는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또 국가는 식민지를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1689년에서 1815년 사이에 8번의 전쟁을 치렀는데 전체 127년 가운데 65년 동안 전시상태에 있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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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중반의 영국 해군 함대

  이런 식민제국의 건설을 통해 영국은 식민지나 다른 지역으로부터 핵심 산업들의 원료를 안정적으로 조달하고
 
  시장을 유지할 수 있었고 북미지역에서와 같이 경쟁이 되는 식민지 산업을 파괴할 수 있었다. 식민지 산업은 철저하게 본국을 위해 봉사하도록 개편되었다.
 
  영국을 외침에서 지키고 해상에서의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해군력이 매우 중요했으므로 많을 때는 국가예산의 거의 70-80%가 이에 투입되었다. 이렇게 건설된 세계 최강의 해군함대는 전략적인 위치에 포진하여 무역과 식민지를 지켰고 적의 식민지나 해안을 위협했다.
 
  막대한 군사비 소요를 충당하기 위해 정부는 17세기에 국민소득의 2-4%를 세금으로 걷어 들였는데 이는 전시에는 6%까지 올라갔다. 프랑스와의 긴장이 고조된 1689년에서 1815년까지 사이에는 12%까지 뛰어 올랐다. 다른 나라들도 이를 뒤따르기는 했으나 영국만큼 많은 세금을 거두는 나라는 없었다.
 
  세금으로 모자라는 경우에는 국채를 발행했는데 이것이 1694년에 잉글랜드은행을 창설한 주된 이유이다. 이는 주로 전시에 발행되었는데 1814년에 나폴레옹 전쟁이 끝났을 때는 국채의 이자 지급액이 국가 세입의 56%를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
 
  그러니까 식민지를 확보하여 착취하고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영국의 식민제국이 수 세기 동안 쏟은 정력이라는 것은 말도 못할 만큼 큰 것이다. 산업화는 그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산업혁명이 기업가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기술의 발전 같은 것은 이에 비하면 사실 부수적인 요인에 불과하다. 면직산업의 예를 통해 구체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보자.

출처 - 프레시안 2008-07-16 오후 5:18:52

산업혁명과 비유럽세계의 탈산업화 ②
영국 산업혁명의 요인들 (1)

외부적, 내부적 요인
 
  산업혁명이 이렇게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므로 사람들이 그 원인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특히 그것이 가장 먼저 시작된 영국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한 원인에 대해 온갖 주장들이 제기된다.
 
  섬나라라서 외침을 받지 않은 영국의 지리적 이점, 석탄이나 철 등 풍부한 부존자원, 기술적 창조성이나 교육 같은 사회제도, 또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민주적인 정치질서, 풍부한 노동력과 자본 조달의 용이성, 해외무역 등 수없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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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0년경 영국의 산업지도. 검은 회색 부분이 노천탄광 지역으로 공업지역이 대체로 이 부분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석탄이 지표에서 얕게 묻혀 있다는 것이 산업혁명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철광산과 탄광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도 중요했다.

  물론 이런 여러 요소들이 조금씩은 다 관련이 있겠으나 문제는 결정적인 요소이다. 이 문제에서는 내부적인 요인과 외부적인 요인에 어떤 비중을 두느냐가 가장 중요한 논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과거의 학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영국의 아놀드 토인비이다. 그는 <역사의 연구>라는 책을 써서 대중적으로 매우 유명한 역사가인 아놀드 토인비의 삼촌으로 1884년부터 '산업혁명강의'를 시작했다. 그도 19세기 말에는 영국에서 꽤 유명한 경제사학자였다.
 
  그는 산업혁명의 내, 외부적 요인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지는 않았으나 외부적인 요인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듯이 보인다. 농업혁명을 이야기하고는 있으나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그것이 과연 산업혁명이 기초가 되었을지는 의심스럽다.
 
  반면 해외무역의 급증에는 큰 관심을 보인다. 그 가운데서도 1760년에 수출의 1/3을 차지한 식민지 무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 1770년에 맨체스터에서 생산한 공산품의 3/4이 아메리카로 갔다고 말하는 데에서도 새로운 산업이 해외시장을 기반으로 성장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거의 같은 시기의
윌리엄 커닝햄도 산업혁명의 주된 원인은 해외무역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산업발전에 있어 발명과 기술 혁신의 중요성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해외시장의 성장과, 자본을 원활하게 공급한 금융의 발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20세기에 들어온 이후 산업혁명에 관한 최초의 권위 있는 연구자인 뽈 망뚜도 해외무역을 중심에 놓았다. 그는 산업과 무역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며 무역이 없었으면 산업의 주된 변화도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의 미국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경향은 1940년대까지 유지되었다. 18세기말에 아담 스미스도 무역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해외부문의 중요성은 18세기부터 영국인이 계속 인식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 해방과 내부적 요인의 강조
 
  그런데 1950년대에 들어와 사정이 달라졌다. 외부적인 요인보다 내부적인 요인이 더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50년대 이후 식민지 해방운동이 본격화되며 제3세계로부터 비난의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이다. 제3세계의 학자들이 유럽의 부는 유럽인들이 특별히 뛰어나서가 아니라 식민지를 착취한 결과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사실 경제발전을 일찍 이룬 유럽의 중요한 국가들이 거의 식민지들을 갖고 있었으니 그 개연성을 아주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제 서양 역사가들은 산업혁명이 식민지 착취의 결과가 아니라 유럽 내부적인 여러 요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국내요인에 의한 자본의 축적, 낮은 이자율, 농업생산성의 증가, 인구의 급증, 산업발전에 유리한 사회경제적ㆍ정치적 구조 변화, 교육과 과학지식의 발전, 기술혁신, 풍부한 지하자원 등의 온갖 요인들을 열거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국내 수요의 증가이다. 국내의 경제발전이 수요를 팽창시키지 않았다면 산업혁명으로 인해 급격히 늘어나는 공급을 해소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국도 산업혁명 이전에는 기본적으로 농업국가였으므로 농업부문의 변화에 중점이 두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1680-1750년 사이 잉글랜드에서의 농업생산성 증대가 논의의 초점이 되었다. 농업이 발전하고 생산성이 높아지며 국내 시장을 팽창시킴으로써 산업화의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들은 농업사를 진보의 관점에서 보았다. 영국 농업은 근대에 들어와 지속적으로 성장했고 그것이 산업화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기초를 놓은 사람은 1912년에 <16세기의 농업문제>라는 유명한 책을 쓴 R.H.토니이나 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하여 토지의 보다 집약적인 이용, 농업생산성의 지속적인 증가, 이에 따른 농산물가의 하락, 실질임금의 증가가 대중적인 수요를 확대했고 특히 중산층 소득의 일반적인 증가가 소비재 수요를 확대시켰다고 주장되었다.
 
  농업의 중요성을 가장 대중적으로 설파한 사람들은 필리스 딘과 W.A.콜이다. 이들은 1962년의 <영국경제성장 1688-1959>에서 이런 논의를 일반화했다. 해외무역도 18세기에 국내시장보다 더 빠르게 성장하기는 했으나 국내 수요가 결정적이라고 주장하며 논리를 더 정교하게 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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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커먼의 증기기관(1717). 광산에서 물을 퍼내는데 사용한 이 증기기관은 중요한 기술혁신을 보여주나 에너지 효율은 1%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석탄이 많은 탄광지역에서만 사용되었다.

  과학과 기술의 자율적인 발전도 내적 요인에 초점을 맞춘 설명에서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한다. 데이비드 랜디스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로 이들은 기술적 혁신이 산업혁명을 만든 모든 기회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즉 잉글랜드의 산업혁명은 18세기 말의 우연적인 기술발전의 산물로 나타난다. 기술발전으로 생산비용이 절감되며 해외시장을 하나하나 장악하게 되었고 이것은 마침내 영국이 세계의 공장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해외 수출의 확대는 기술혁신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가 된다.

출처 - 프레시안

산업혁명과 비유럽세계의 탈산업화 ① 
산업혁명이란 무엇인가


산업혁명이란
 
  산업혁명은 보통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 영국에서 처음 시작된 급격한 산업생산력의 증대를 의미한다. 증기기관이라는 새로운 동력과 기계가 결합하며 그 전에는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온 것이다.
 
  18세기까지도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양은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사람이나 가축의 힘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그것은 식량이나 사료를 제대로 조달하지 못하면 유지될 수 없었다. 무한정한 확대는 불가능했다.
 
  풍력이나 수력도 이용할 수는 있었으나 그것은 장소의 제한을 받았다. 풍력은 바람이 많이 부는 지역에서나 가능했고 수력은 수량도 많고 개울물의 낙차가 커야 이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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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력을 이용하는 물레방아 (18세기 프랑스)

  또 연료로 사용하는 나무도 쉽게 고갈되었으므로 함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유럽의 많은 대장간들은 근대 이전에 일년 중 몇 개월밖에 가동을 못했는데 그것은 쇠를 녹이려고 해도 숯을 생산할 나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업활동에 원천적인 제약이 가해졌다.
 
  그런 점에서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는 증기기관의 발전과 새로운 기계의 결합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석탄만 있으면 필요한 곳 어디서든지 동력을 만들어내어 공장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초기의 공장들은 오늘날 같지 않아서 여러 대의 기계들이 굴대와 벨트를 통해 증기기관과 복잡하게 연결되어 돌아가는 소음과 먼지가 가득한 곳이었지만 새로운 형태의 공장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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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말 면직공장의 모습. 여러 대의 방직기들이 증기기관과 연결된 굴대(천정에 붙어 있는)와 벨트로 연결되어 구동된다.

  1851년에 영국 런던의 하이드파크에서는 만국박람회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철골로 뼈대를 만들고 유리로 지붕을 씌워 오늘날의 대형 온실과 같은 모양을 한 전시실들에는 처음으로 산업혁명을 완수한 영국이 그 동안 발명한 대규모의 기계들을 포함하여 온갖 공산품들이 자랑스럽게 전시되었다.
 
  영국인들은 이것을 구경하기 위해 막 개통된 철도를 이용하여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동안에 영국이 이룩한 성과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많은 외국인들도 이를 구경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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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의 크리스탈 팰리스.

  1780년대에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1830년대에는 인접한 벨기에와 프랑스로 퍼지고, 1850년대에는 독일, 1860년대에는 남북전쟁을 끝낸 미국으로도 확산되었다. 일본과 러시아는 뒤늦게 1890년대에 이에 합세하며 점차 전 세계가 그 물결에 휩싸이게 되었다.
 
  산업혁명에 의해 가능해진 거대한 생산력은 국가들의 힘까지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유럽의 변두리에 있는 조그만 섬나라인 영국은 이제 산업혁명을 통해 세계 최강대국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러시아 같은 전통적인 유럽 강대국도 자기혁신을 하지 못하면 낙후하게 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1860년대에 농노해방을 비롯한 대대적인 정치, 사회개혁에 나섰다. 반면 제대로 산업화의 길로 들어서지 못한 인도, 중국, 튀르크 같은 아시아의 대국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산업혁명은 세계사적으로 큰 변화를 만들어냈고 이것이 서양이 중심이 되는 오늘날의 세계를 만든 근본적인 힘이다. 19세기 말에 등장한 제국주의는 바로 그 현격한 힘의 차이를 국제정치에 투사한 결과물인 것이다.
 
  산업혁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
 
  산업혁명이 서양 중심의 세계를 만들어 냈으니 서양인들이 이에 대해 갖는 시각은 우호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것이 인류의 물질적 생산능력을 크게 확장함으로써 현대 자본주의 문명의 기초를 만들었다고 믿는다.
 
  좌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비판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 맑스는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공장제도가 가져오는 노동착취 등 비인간화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그것이 생산력을 크게 확대하여 인간의 삶을 풍요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대체로 이런 태도를
  따르고 있다.
 
  서양학자들은 산업혁명의 원인을 위대한 발명가들, 앞선 과학기술, 선행 운동으로서의 농업혁명, 축적된 자본 등에서 찾는다. 그들은 또 산업혁명을 통한 이 시기의 자본주의적 경제발전과 그에 따른 유럽의 흥기를 서유럽의 효율적인 경제조직, 제도적 변화, 재산권의 발전, 자본주의에 우호적인 독특한 정신문화 속에서도 찾는다.
 
  산업혁명을 위해서는 물질적인 조건 만이 아니라 정신적, 문화적 조건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업혁명은 유럽에서만 발전할 수 있었고 그 원인도 유럽 내부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고 믿는다.
 
  '지난 2세기 동안 기술적 변화와 산업발전을 위한 문화적 조건은 서유럽에만 있었다'라는 주장이나 '산업혁명은 기본적으로 사회-문화적 현상으로 단순히 기술혁명은 아니다. 그것은 산업화한 최초의 나라들이 영국과 문화적, 사회적으로 매우 닮은 나라라는 것을 보면 확실하다'라는 말은 이런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도 여기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는다. 가장 대표적인 서양사 개설책의 하나를 보면 그것을 프랑스혁명과 함께 유럽 근대사회 확립의 가장 중요한 계기로 보고 있고 그것이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과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유럽에서 일어난 이러한 생산력의 비약적인 증대가 인류의 삶에 긍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또 산업혁명의 원인으로는 18세기에 서유럽은 지구상의 어느 지역보다 부유했고, 초기 형태이지만 자본주의가 발전했으며, 상공업자와 금융업자 등 기업가 계층이 전례 없는 사회적, 정치적 활력을 갖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며, 르네상스 이래 싹튼 사물에 대한 합리적 태도와 사회 및 자연환경에 대한 무한한 통제 및 지배 욕구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또 17세기 후반 이후 영국에서의 농업혁명도 중요하다. 그러니까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은 위에서 말한 온갖 좋은 조건이 다 갖추어져 자연스럽게 가능했던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에는 오류도 포함되어 있으나 문제는 부분적인 오류가 아니라 이런 주장의 배후에 있는 잘못된 인식체계이다. 그런 주장이 유럽에는 여러 좋은 조건들이 있어서 산업혁명이 가능했고 비유럽지역에는 그런 것이 결여되어 있어 불가능했다는 이분법적, 결정론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인식은 당연히 유럽을 우러러 보고 비유럽세계를 폄하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산업혁명이 그런 시각으로는 절대로 잘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럽인의 과학적 사고, 기계의 발명, 경제조직이나 제도의 변화, 농업혁명 등 유럽 내부적인 요인만으로 결코 설명할 수 없다.
 
  여기에서 빠진 것은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한 정치·군사적인 요인들, 원료 조달의 문제, 물건을 내다 팔 시장 같은 것의 문제이다. 이런 것들이 오히려 더 본질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당연히 비유럽세계와의 관련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산업혁명은 영국과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해도 눈을 세계사적인 차원으로 돌리지 않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의 약탈과 노동착취, 그리고 비유럽세계의 탈산업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산업혁명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면직산업이 기초를 마련하고 성장해 가는 과정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먼저 영국 산업혁명의 요인에 대한 논쟁부터 간단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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