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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Hope
2008. 6. 7. 12:39
2008. 6. 7. 12:39
출처 - 프레시안
프랑스 혁명과 세계사 ⑤ 민주주의인가, 독재정치인가
혁명기의 정치와 자유
프랑스 혁명은 보통 근대적 민주주의 제도를 처음 확립한 혁명으로 높이 평가되어 왔다. 처음으로 헌법이 만들어지고 대중적 선거에 의해 의회가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또 '프랑스 인권선언'을 통해서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 등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 자연권이 선언되었다.
그래서 혁명은 장기적으로 볼 때 근대 민주주의로의 발전에서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추상적인 이념으로서의 자유와 평등이 당시 상황에서 실제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 또 선거가 당시의 정치과정에서 어떤 성격을 갖고 있었는지 살펴보지 않으면 그 의미를 잘 알 수 없다.
맑스주의자들은 혁명의 절정기를 공포정치시기로 보고 본다. 폭력적이기는 하나 완고한 구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이 시기를 정상적인 과정에서 이탈한 시기로 부정적으로 본다. 그럼에도 혁명 전체에는 우호적이다.
그러나 수정주의자들은 혁명이 처음부터 독재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와는 관계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자유주의자들이 높이 평가하는 초기의 온건한 시기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이 문제는 미국학자 케이트 베이커에 의해 매우 진지하게 다루어졌다. 그는 퓌레의 견해를 받아들여 루소의 일반의지론이 혁명적인 자코뱅주의로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가를 면밀하게 추적했다.
루소는 1762년의 사회계약론에서 일반의지론을 주장하고 있는데 일반의지란 국민의 전체적인 복지를 가장 잘 아는 의지이다. 그런데 만약 소수파의 사람이 국민 전체의 의지에 반대되는 생각을 할 때는 어떻게 할까.
루소는 이 경우 소수파가 자신의 의견을 버리고 다수 시민들의 의견에 굴복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 원리는 민주주의적으로 보이기는 하나 소수 집단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는 심각한 문제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일반의지론을 국민의회의 토론에 끌어들이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은 엠마누엘-조셉 씨이에스이다. 그는 1788년에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라는 팜프렛을 통해 혁명 이데올로기의 틀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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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베 시에스 (Emmanuel Joseph Sieyes, 1748 –1836)는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통해 혁명의 이데올로기를 구체화한 사람이다. |
그리고 국민의회는 진지한 토론 끝에 그것을 받아 들였다. 그래서 프랑스인권선언 가운데 에는 인민주권설과 일반의지가 들어가 있다. 특히 제 6조의 '법은 일반의지의 표현이다. 모든 시민들은 개인적이건 그 대표들을 통해서건 그 형성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선언은 혁명에서의 일반의지론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초기의 국민의회 내부에서도 의견의 분열이나 차이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치적인 반대 목소리를 원천 봉쇄하려 했고 그런 사람들을 반혁명분자로 모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 따라서 형식적으로는 다수결로 결정이 이루어졌다 해도 실제로는 민주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베이커는 공포정치는 혁명기의 이런 이데올로기에서 비롯한 것이지 단순한 정세 변화 때문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자유는 처음부터 차단당할 운명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혁명가들의 정치이념에 내재해 있던 독재적 성향이 공포정치에 미친 영향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등의 원리와 재산의 신성성
혁명은 시민의 평등을 선언했다. 인권선언은 제 1조에서 '인간은 권리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 사회적 구분은 공동의 유용성의 기반 하에서만 가능하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모든 인간의 평등을 말한 것은 선언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8월11일에 공포된 법 11조에서는 '모든 시민은 출생의 구분 없이 모든 관직에 취임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인권선언 제 6조도 시민들은 그들의 능력에 따라, 다른 구분이 아니라 그들의 덕이나 재능에 의해 관직에 취임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혁명가들에게 이런 표현이 모든 인간이 실질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8월의 여러 법령에 이미 재산의 불가침성이 천명되고 있고 인권선언 제 17조도 사유재산은 침해할 수 없는 신성한 권리이며 공공의 필요를 위해서만 박탈될 수 있고 이때는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렇게 강조된 재산의 신성성은 평등에 대한 어떤 선언에 대해서도 실질적으로는 제한을 가할 수 있었다. 그 점에서는 사유재산이 1789년 이전에 특권이 했던 일을 대치했다고 할 수 있다. 출생의 특권은 사라졌으나 대신 능력과 재산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특권은 모양만 바꾸었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혁명에 의해 새로운 사회의 기준이 된 것은 무엇일까. 그 가장 중요한 것이 재산이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사회적 특권이 사라진 데 대해서는 불만을 느꼈으나 크게 잃을 것이 없었다. 소수의 정치적인 성향이 강한 귀족들이 망명을 했을 뿐 대부분의 귀족이 뒤에 남은 것은 그 때문이다. 박해를 받지 않은 귀족도 많았다.
1789년 8월 11일 법에 의해 관직매매는 금지되었으나 그 후의 의회선거나 공직 선출에서 가장 필요한 요건은 재산이었다. 일정한 재산 소유와 교육이 공직자로서의 필요요건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교구를 포괄하는 지역구를 단위로 하는 기초의회 선거에는 3일 임금 분 이상의 직접세를 내는 능동적 시민만이 참여할 수 있었고 국민의회 의원이나 중요한 공직자를 선출할 수 있는 2차의회 의원이 되려면 10일분의 세금을 내야했다. 공화국 시기에 잠깐 이런 재산 자격 제한이 없어졌으나 뒤에 다시 복구되었다.
그 결과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형성된 것이 명사(名士)층으로 불리는 명망가 집단이다. 이것은 귀족 출신과, 귀족 출신은 아니나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집단으로 나폴레옹 시기에 그 모습을 분명히 드러낸다. 이들은 정치와 공직을 통해 19세기 내내 강력한 힘을 행사했다.
이런 점에서 평등의 원리는 결코 재산소유자 계급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혁명이 신분제를 해체하여 전통적인 특권을 없애기는 했으나 프랑스의 사회적 평등 확대에 큰 기여를 하지 는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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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의 여신이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들고 있는 그림 |
혁명기 선거와 독재
선거에 의한 의회의 구성은 민주정치의 기본 요건의 하나이다. 혁명기 동안 20회의 전국 규모 선거나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으므로 이는 혁명의 민주주의적 성격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선거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연구된 것은 90년대에 들어와서이고 그 결과 새로운 사실들이 많이 밝혀졌다.
혁명기의 선거들이 획기적인 것은 사실이다. 유권자 수가 매우 많다. 1791년의 경우에는 전체 인구 2,750만 명 가운데 15%가 투표권을 가졌던 것으로 추산된다. 따라서 공정하게만 치러졌다면 상당한 정도의 민주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혁명가들이 선거를 통제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 선거마다 투표자들에게 충성서약이 요구되었고 명백히 반대 의견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투표가 금지되었다. 또 국민방위군에 참여했던 사람에게만 투표가 허용되는 등 정치적 제한을 가했다.
또 선거와 관련해 정치토론이 금지되었고 후보자간의 대중적 경쟁을 막기 위해 후보자의 이름을 등록하는 절차가 없었다. 따라서 표가 대단히 많이 분산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167명의 유권자를 갖고 있는 선거구에서 한 표 이상의 투표를 받은 사람이 103명인 경우도 있다.
그래서 지방의 유력한 인물이나 자코뱅파 같은 유력한 정치집단이 적은 표를 갖고도 자기 사람을 의원으로 뽑는 것이 가능했다. 이러니 민의가 제대로 반영이 될 리가 없었다. 각 선거구에서의 혁명에 대한 지지도는 지역 자코뱅파의 활동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이는 그들의 선전, 선동활동이 지역정치에 큰 영향을 주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선거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도 크지 않았다. 1790년의 선거에서는 유권자의 48%라는 높은 투표율을 보여준다. 이것은 농촌문제와 관련해 국민의회에게 큰 기대를 갖고 있었던 농민들이 많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대가 깨진 후 투표율은 크게 하락하여 1791년에는 23%, 1792년에는 15%로 떨어지고 그 상태로 90년대 말까지 유지된다. 자코뱅파가 투표율을 올리려고 갖가지 방책을 써도 그 정도 밖에 안 되었다. 그러니 혁명기의 선거라는 것이 대중의 의사를 제대로 전달하는 민주적인 기구로서 제대로 작동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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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6. 7. 12:37
2008. 6. 7. 12:37
출처 - 프레시안
프랑스 혁명과 세계사 ④ 프랑스 혁명은 계급투쟁인가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사회적 동질성
프랑스혁명을 귀족계급을 타도한 부르주아 혁명으로 보는 것은 맑스주의자에게는 아주 기본적인 일이다. 그것을 통해 프랑스가 봉건적 생산양식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르주아 혁명으로서의 프랑스혁명은 프랑스사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적 사건이 된다.
고전적 해석에서 프랑스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었으므로 여기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앞에서 말했듯이 코반이다.
그는 1789년 국민의회 의원들의 출신을 분석했는데 상인, 제조업자, 금융업자의 범주에 놓을 수 있는 사람을 모두 합쳐봐야 85명이었다. 전체 의원 648명 가운데 13%에 불과했다. 반면 변호사나 공증인 같은 법률가는 166명으로 약 1/4 정도, 또 지방관리, 판사, 검찰관 등 행정, 사법관리 출신이 278명으로 약 43%를 차지했다.
1792년의 국민공회에 가면 상인, 제조업자, 금융업자 출신의 비율은 더 떨어져 891명 가운데 83명으로 약 9%이다. 법률가들은 비슷하며, 관리출신들은 25% 수준으로 떨어졌다. 반면 전문직업인이라고 할 수 있는 교수나 교사, 의사, 군대의 장교, 작가, 배우 등이 5%에서 17% 정도로 늘어났다.
이것을 보면 혁명을 주도한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이는 상공업 부르주아라기보다는 대체로 법률가, 관리 출신, 전문직업인 집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혁명이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로막는 봉건적 구체제를 분쇄하기 위해 일어났다는 주장은 의문시될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에는 부르주아와 귀족이 어떤 집단이었는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다. 구체제 하에서 귀족과 부르주아가 하나의 상층계급을 구성했었다는 주장은 50년대부터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었다. 무시를 당했을 뿐이다.
테일러의 1967년 연구에 의하면 혁명전 프랑스의 모든 사회집단의 부는 압도적으로 비자본주의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주로 토지재산에 근거한 소유자적(proprietary) 부였다. 귀족이 그럴 것은 당연하나 제3신분의 경우도 이것은 마찬가지였다.
부유한 제3신분의 경우에도 소유자적 부가 상업이나 산업적 부를 훨씬 능가했다. 구체제 하에서 자본주의가 제3신분의 지배적인 생산양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또 귀족과 부르주아는 그 투자 행태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르주아들도 돈이 생기면 토지를 사서 사회적 위신을 높이려했다. 이것은 그들이 비슷한 사회경제적 가치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했다.
옥스퍼드 대학 교수인 루카스의 1973년 연구는 구체제 말에 부르주아와 귀족이 하나의 동질적인 지배 엘리트에 속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과거 귀족이 독점했던 특권들을 이때에 와서 두 집단이 나누어 가졌다는 것이다.
그는 면세특권을 부여받거나, 영주로서 행동하고, 또 이름에 귀족 칭호를 붙이는 많은 부르주아 평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귀족과 맞먹는 사회적 권위를 누리거나 귀족의 생활양식을 모방하는 부르주아들도 많았다. 그리하여 이제 부르주아를 더 이상 사회경제적인 면에서 귀족과 뚜렷이 분리시키는 태도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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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신분이 사슬을 끊고 무장하는 것을 보고 놀라는 제1신분과 제2신분 (당시의 프린트화) |
혁명은 왜 일어났는가
그 후의 많은 연구들을 통해 오늘날에는 귀족과 부르주아의 동질성과 차이에 대해 더 상세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부르주아의 재산은 귀족의 것과 같이 압도적으로 소유자적인 것이다.
또 부르주아들은 끊임없이 귀족화했다. 그것은 재산을 모은 사람들이 귀족 칭호가 붙은 매매관직이나 영지를 사들임으로써 가능했다. 한 연구에 의하면 1725-1789년 사이에 3만5천 명에서 4만5천 명 정도의 부르주아가 귀족이 되었다. 그리하여 1789년 현재로 모든 귀족 가문의 최소 사분의 일이 18세기에 들어와 귀족화된 가문으로 추산된다.
부르주아만이 아니라 귀족도 상업이나 산업에 투자했다. 실제로 공격적이고 혁신적인 자본주의를 추구한 사람들은 귀족이라고까지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얼마 전까지 주로 부르주아들이 했다고 믿어진 징세청부업은 18세기에 대체로 귀족들의 일거리였다. 이렇게 귀족과 부르주아는 18세기에 들어와 사회경제적으로 거의 하나의 동질적인 집단을 형성해 가고 있었다.
정치의식에서도 현격한 차이는 없다. 삼부회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귀족들의 까이에(청원서)들을 보면 귀족들은 시민적 평등과 공평한 조세부담, 재능과 덕에 따른 관직취임에 대체로 찬성했다.
또 귀족 가운데 많은 사람이 과거에는 부르주아의 독점물로 생각한 정치적 자유주의를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니 18세기에 귀족이 점점 더 반동적이 됨으로써 제3신분의 계급의식을 강화시키고 그 결과 혁명을 발발시켰다는 주장은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면 삼부회의 의사결정 방식에 대한 논쟁이 왜 갑자기 혁명으로 비화했을까. 루카스는 그 원인을 귀족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파리고등법원이, 삼부회가 1614년 형태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1788년 9월에 선언한 데서 찾고 있다.
그는 고등법원의 선언은 귀족이 부르주아와 권력을 나누기를 싫어했다는 것이 아니라 수세대 동안 구분이 희미해진 귀족과 부르주아의 구분을 자의적으로 되살렸다는 점에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과거에 르페브르도 지적했던 일이다. 그도 이 사건으로 부르주아 계급이 귀족과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것을 의식하게 만들어 삼부회를 장악하려는 부르주아의 운동에 불을 붙였다고 주장한 바 있다. 오늘날 많은 수정주의자들이 이 견해를 수용하고 있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은 깊은 사회경제적인 원인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정치적 성격의 혁명으로 바뀌고 있다. 혁명에 우연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하고 있고 혁명에서 나타나는 급진적 요소들은 정치적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라는 것이다.
즉 1789년의 원리는 어느 특수한 사회집단의 바람과 동일시할 수 없으며 그 원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질지는 1789년 봄에는 전연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귀족계급은 왜 그렇게 쉽사리 붕괴했을까. 수정주의자들은 그 원인을 귀족 계급 내부의 분열에서 찾고 있다. 구체제 하에서 가난한 귀족과 부유한 귀족 사이에는 깊은 적대감이 있었고 지방거주 귀족과 베르사유에 거주하는 고위 귀족 사이에도 깊은 적대감이 있었다는 것이다.
반동적이었던 것은 이 소수의 고위 귀족들이며 이 분열이 많은 귀족들의 이반현상으로 나타남으로써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설명이 아직 과거의 맑스주의적 설명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불만족스러울 수 있다. 또 새로운 해석에도 불투명한 점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논리의 발전을 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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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니스코트의 선서. 삼부회의 제3신분 대표들은 헌법을 제정하기 전에는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790년 다비드의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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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6. 7. 12:35
2008. 6. 7. 12:35
출처 - 프레시안
프랑스 혁명과 세계사 ③ 수정주의 해석의 발전
맑스주의 해석에 대해 처음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영국의 알프레드 코반(1901-1968)이다. 그는 1954년의 런던 대학 프랑스혁명사 교수 취임 강연에서 <프랑스혁명의 신화>라는 제목으로 맑스주의적 해석을 처음으로 비판했다.
그는 우선 혁명이 파괴했다고 하는 봉건제의 개념에 의문을 제기했다. 토지소유에 기초한 통치체제로서의 봉건제는 프랑스에서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고 18세기에 남아 있던 것은 단지 그 의미 없는 흔적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봉건제 폐지의 의미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혁명적인 부르주아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삼부회의 제3신분 대표들의 출신을 분석하여 그 가운데 13%만이 상인, 제조업자, 금융업자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 외 대부분의 대표들은 지방의 낮은 직위의 관리들, 검찰관, 판사 같은 직을 역임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맑스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이렇게 보면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용어가 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코반의 주장은 별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건드릴 수 없는 금기를 깨뜨리는 중요한 일을 한 셈이다. 1964년에 그는 자신의 논지를 더 보강하여 <프랑스혁명의 사회적 해석>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때쯤이면 다른 사람들이 이 일에 가담하게 된다.
미국 학자인 조지 테일러는 1967년에 <비자본주의적 부와 프랑스혁명의 기원>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가 한 일은 혁명 이전의 부르주아계급과 귀족계급의 투자 행태를 검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결과는 비슷했다. 두 계급의 이해관계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1973년의 콜린 루카스의 <귀족, 부르주아, 프랑스혁명의 기원>이라는 글에 의해 다시 뒷받침 되었다. 많은 경험적 증거를 제시하며 루카스는 구체제 말의 부르주아와 귀족이 동질적인 지배 엘리트 집단의 구성원이었음을 밝혔다. 귀족이 특권을 독점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은 아직 소수파이기는 하나 학계에 확고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혁명 연구의 본산은 프랑스였으므로 이런 주장들이 프랑스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큰 의미가 없었다. 1978년에 전기가 왔다. 그 해에 프랑소아 퓌레(1927-1997)가 <프랑스혁명을 생각한다>라는 책을 내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는 이미 1971년에 <혁명의 교리문답>이라는 글을 통해 맑스주의자들의 천편일률적인 계급투쟁론이, 논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카톨릭의 '교리문답'적 성격을 가졌고 민족적 영광과 레닌주의적 이론에 사로잡혀 있다고 통렬하게 비판한 바 있다.
영미의 수정주의 학자들이 사회경제적인 측면에 중점을 둔 데 비해 그는 정치와 이데올로기 면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혁명 해석의 전반적인 전복을 꾀했다.
맑스주의자들은 자코뱅파에 의해 혁명이 과격해진 1792년 8월-1794년 7월의 시기를 높이 평가하나 1789-1792년의 온건한 시기에 이루어진 성취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는 본다. 특히 봉건제 폐지 선언 같은 것은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중요한 단계로 높이 평가한다.
또 전통적으로 크레인 브린튼을 비롯한 영국과 미국의 자유주의 역사가들은 1789-92년의 온건했던 시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왔다. 다만 93-94년의 공포정치 시기는 혁명이 국내의 물가고나 정치적 혼란, 대외 전쟁 등으로 과격해졌고 그래서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난 시기로 보았다.
그러나 퓌레는 혁명이 1789년의 처음부터 문제가 많았다고 생각한다. 국민의회가 처음부터 신중한 토의 끝에 루소의 인민주권설과 일반의지론을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이론에 의해 만들어진 민주주의는 동의에 의한 통치나 개인적 인권을 존중하는 형태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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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
혁명이 인민주권이라는 과격한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임으로써 어떤 권력남용도 인민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한 변명될 수 있었으므로 혁명은 처음부터 독재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공포정치시기에 공공연하게 표출되었을 뿐이다. 또 그는 나폴레옹의 제국도 그 독재적 본질에서는 혁명기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단지 그 종막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혁명 시기의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프랑스인이 자유롭게 된 것뿐이며 개인은 국가에 예속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반대도 혁명의 통일성을 해치는 분파투쟁으로 거부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매우 급진적인 것으로 코반까지도 사실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80년대로 들어서며 퓌레의 주장은 점점 많은 지지자들을 얻게 되었고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은 점점 더 많은 주제로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혁명 200주년이 된 1989년 즈음에는 퓌레가 혁명사 연구에 있어 프랑스 내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최근 2, 30년 사이의 프랑스혁명사 연구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맑스주의적 해석이 삽시간에 거의 붕괴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 연구가 지나치게 맑스주의 도식에 의존함으로써 역사현실과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그렇게 오랫동안 주류해석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1930년대, 2차대전의 혼란기와 그 이후에 혁명사 연구가 대체로 부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르페브르 같은 사람의 주장이 과도하게 오랫동안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실증적인 연구들이 쏟아져 나오면 더 이상 정통적인 지위를 유지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지금도 물론 맑스주의적 해석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일부 남아 있다. 그러나 숫자도 작고 영향력도 미미하다. 맑스주의자들 가운데에도 계급투쟁설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으니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최근의 연구들을 통해 프랑스혁명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한 번 살펴보자.
New Hope
2008. 5. 19. 20:20
2008. 5. 19. 20:20
출처 - 프레시안
프랑스 혁명과 세계사 ② 맑스주의적 해석이란
고전적 해석이 된 맑스주의적 해석
프랑스혁명이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혁명 100주년이 되는 1889년부터이다. 이 해에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 프랑스혁명사 강좌가 개설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1875년에 수립되었으나 보수세력의 저항으로 힘든 시절을 겪어온 프랑스 제3공화정이 이때 와서 자신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프랑스 혁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혁명시기의 공화주의적 전통을 제3공화국과 연결시키려 한 것이다.
이 강좌의 책임을 맡은 인물이 알퐁스 올라르(1849-1928)이다. 그는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역사가로서 그가 맡은 일은 혁명 해석을 통해 민주적 공화주의를 고취함으로써 제3공화정을 지지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혁명 이전 구체제의 전제를 비난하고 1789년의 폭력혁명을 정당화했다. 또 1791년의 입헌군주제 헌법은 과소평가한 대신, 1792년에 국민공회가 공화정을 수립한 것은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는 그것을 혁명의 절정으로 보았으며 그 독재적 성격은 문제시하지 않았다. 그의 자리는 그가 물러난 후에도 프랑스 혁명사 연구와 관련해 가장 큰 권위를 누리게 되었다.
1차대전이 끝난 후 알베르 마티에즈(1874-1932)가 올라르의 뒤를 이었는데 그는 아예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여 맑스주의에 헌신했으며 그의 후계자들도 모두 이를 본받았다. 그는 특히 1917년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에 고무되어 공포정치를 주도한 로베스삐에르를 권력에 굶주린 독재자가 아니라 독재를 통해 프랑스를 구하려 한 애국적인 인물로 전력을 다해 옹호했다. 그가 파리 노동자들이 대중적으로 원하는 바를 실현시키려 한 민주적인 정치가라는 것이다.
마티에즈를 이은 사람이 조르주 르페브르(1874-1959)로 그는 폭 넓은 연구로 맑스주의적 해석을 완성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의 시대의 탁월한 연구자로서만이 아니라 혁명사를 연구한 모든 세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탁월한 연구자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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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르주 르페브르(Georges Lefébvre) |
그러나 그는 혁명가들이 추구하려 한 것을 자신의 생각과 동일시했고 따라서 혁명에 반대하거나 그에 비판적인 해석들은 싫어했다. 그래서 그의 글은 상당히 실증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르페브르의 뒤를 이은 사람들이 알베르 소불(1914-1982)과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미셀 보벨(1933-)이다. 이렇게 70년대까지 약 80년 동안 혁명사 해석을 주도한 사람들은 다 맑스주의자들이다. 프랑스 혁명이 주로 귀족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의 계급투쟁으로 해석되어 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리하여 맑스주의적 해석은 1970년대까지도 프랑스혁명사에 대한 표준적인, 그래서 '고전적' 해석의 위치를 차지했다. 이것을 자코뱅-맑스주의적 해석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이 해석이 과격파인 자코뱅파의 입장을 많이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맑스주의가 이렇게 정통적 지위를 차지하자 그 권위에 도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그에 대한 도전이 프랑스가 아니라 영국과 미국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맑스주의 해석은 과연 무엇일까?
맑스주의적 해석이란
맑스주의적 해석은 프랑스 혁명을 앞에서 말한 대로 새로 흥기한 부르주아 계급과 전통적인 질서를 유지하려는 귀족계급 사이의 계급투쟁으로 본다. 따라서 부르주아 계급의 흥기가 혁명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물론 르페브르는 혁명에서 농민의 역할을 중시했고, 나중에 소불은 도시 소시민들의 민중혁명을 강조하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부르주아 혁명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생각했다.
부르주아 계급은 수 세기 동안 성장하여 18세기에 오면 경제력이나 개인적 능력, 미래에 대한 전망에서 귀족계급보다 우월한 상태에 도달해 있었다. 이들은 토지가 아니라 동산적(動産的)이며 상업적인 새로운 형태의 재산에 기초해 있었고 또 계몽사상가들이나 경제학자들이 만든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의해 지지되고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의 목적은 시민적 평등이다. 제1신분인 성직자와 제2신분인 귀족의 특권을 없애고, 모든 사람이 같은 법의 지배를 받고, 같은 기준에 따른 세금을 내고, 같은 공직 취임의 기회를 갖고, 같은 조건으로 재산을 소유하는 체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1788년 군주제의 약화는 부르주아계급에게 그들의 꿈을 실현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세력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농민과, 도시의 소시민 대중들이 그것이다. 1788-9년의 경제위기로 고통을 받은 농민들은 혁명 초기에 광범한 농촌지역에서 소요를 일으키며 봉건적인 영주권에 강력히 저항함으로써 혁명을 진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 상큘로트라고 불린 도시의 소시민들은 혁명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들고 일어나 혁명을 급진화시켰고 마침내 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들은 때로는 반자본주의적 태도를 보이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봉건제의 파괴라는 혁명의 목표를 달성하게 만들었다.
이리하여 1789년의 혁명은 새로운 시대를 대표하는 부르주아 계급이 과거의 특권을 대표하는 귀족계급을 전복하고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것은 봉건제의 폐지(1789년 8월 4일)를 통해 과거의 특권적인 질서를 전복하고, 프랑스인권선언(1789년 8월 26일)을 통해 시민의 자유와 평등, 인민주권,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자연권, 법 앞에서의 시민의 평등, 언론과 출판의 자유, 사유재산의 신성성 등을 선언했다. 또 헌법(1791년 9월)을 만들었고, 입헌군주제를 넘어 민주적인 공화제(1792년 9월)까지 달성했다. 국민공회가 집권했던 공화국 시기가 혁명의 절정기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계급은 모든 인류의 이름으로 혁명을 주장하고 선전했으나 실제로 그들의 목표는 좁게 제한되어 있었다. 재산 있는 자의 지배라는 자유주의적 태도가 그것이다. 따라서 구질서와 항상 타협하려 했고 대중의 진정하게 평등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열망을 좌절시키려 했다(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아주 간단히 구분하면 자유주의는 일정한 수준 이상의 재산을 소유한 성인남자에게만 참정권을 주는 것이고, 민주주의는 재산에 관계없이 모든 성인남자에게 참정권을 주는 것이다).
그들의 계급이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건이 로베스삐에르를 실각시킨 1794년 7월의 테르미도르 반동이다. 1799년에 나폴레옹이 저지른 군사쿠데타도 같은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프랑스혁명은 세계사를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또 근대세계로 넘어가게 만든 결정적인 단계이다. 그리고 혁명이 만들어낸 자유와 평등은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인 이념이 되어 전 세계를 일주하게 되었다. 이렇게 프랑스혁명을 세계사에서 가장 위대한 혁명으로 만든 것은 맑스에 의하면 그 속도와 폭력성, 완전성이다. 가장 성공한 혁명이라는 말이다.
맑스주의 역사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점은 혁명을 자신과 일체화하는 경향이다. 특히 르페브르가 그런데 그의 논조는 마치 자신이 혁명을 대변하는 듯한 웅변조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역사적 객관성을 잃게 될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New Hope
2008. 5. 19. 20:19
2008. 5. 19. 20:19
출처 - 프레시안
프랑스 혁명과 세계사 ① 프랑스 혁명의 두 얼굴
7월 14일의 의미
매년 7월이면 프랑스는 한 차례씩 들썩거린다. 프랑스 최대의 국경일인 프랑스혁명 기념일 때문이다. 그래서 혁명을 기리는 갖가지 기념행사들이 전국 각지에서 성대하게 열린다. 7월 14일에는 파리의 가장 큰 거리인 샹젤리제에서 군사 퍼레이드가 화려하게 펼쳐지고 모여든 관중들은 혁명을 상징하는 삼색기를 흔들며 열렬히 환호한다.
프랑스공화국 대통령은 이 날을 맞아 프랑스가 혁명의 이상과 전통을 이어 받았음을 당당하게 선언한다. 프랑스인들은 다시 한번 조국이 200여 년 전에 혁명을 통해 전제적인 왕정을 무너뜨리고 민주적인 공화정을 세웠으며 전세계에 자유, 평등, 우애의 이념을 전한 것을 확인하며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프랑스를 근대 세계사의 최고봉에 세우는 이런 역사적 사건을 가진 나라에 태어난 것은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프랑스인들이 이런 영광스러운 과거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 이상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렇게 프랑스인들이 매년 7월마다 감동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은 프랑스 혁명이 세계사에서 차지하는 막중한 위치 때문이다. 그 혁명이 바로 세계사에서 전근대와 근대를 나누는 커다란 전환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후의 시대사를 보통 근대사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1789년 늦봄부터 프랑스는 혁명의 폭풍 속으로 빠져 들었다. 당시 루이 16세의 정부는 만성적인 국가재정의 고갈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는 프랑스가 식민지를 둘러싸고 영국과 7년전쟁(1756-63)을 벌이고 미국독립전쟁에도 간여함으로써 국고를 지나치게 낭비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왕은 그 동안 면세 특권을 부여받던 귀족 계급에게 토지에 대한 재산세를 내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안 내던 세금을 요구받은 귀족계급은 그 결정을 삼부회에게 미뤘다. 삼부회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중세의회인 삼부회는 프랑스의 왕권이 강화되면서 1614년 뒤에는 한번도 열리지 못했었다. 1789년 5월 초에 왕이 마지못해 삼부회를 소집하며 일이 시작되었다.
삼부회는 원래 성직자, 귀족, 평민의 대표로 구성되었고 각 신분별로 회의체를 만들어 의사결정을 해 왔었다. 세 회의체로 구성되었다고 해서 삼부회(��이다. 고위 성직자들은 대체로 귀족 계급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제3신분인 평민들과는 이해관계가 달랐다. 그래서 삼부회는 대개 2:1로 특권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해 왔다.
이번에도 왕이 삼부회의 전통적인 의사결정 방식을 고수하려 하자 평민 대표들이 이에 격렬히 반발했다. 18세기를 통해 부유해지고 교육을 받았고 계몽사상에 의해 정치의식이 높아진 제3신분 대표들이 더 이상 특권세력의 독단적인 지배를 허용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제3신분 대표들은 스스로를 국민의회라고 부르며 헌법을 제정하겠다고 선언했다. 처음 왕은 이를 억누르려 했으나 사세가 불리해지자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왕이 군사력을 동원하리라는 소문이 퍼지며 7월 12일에 파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수년 동안 흉년이 계속되고 경제사정도 나빠 민심이 흉흉한 상황이었으므로 이는 곧 대중적인 혁명으로 발전했다. 7월14일에는 악명 높은 바스티유 감옥이 점령되었고 혁명은 곧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혁명이 발발한 것이다.
혁명의 두 얼굴
프랑스 혁명은 보통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했으며, 귀족과 평민의 신분적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었고, 모든 봉건적 족쇄를 없애고 자본주의의 기틀을 만들었으며, 전시대의 낡은 이념이나 가치관을 파괴하고 합리적인 근대문화를 만들어냈다고 생각된다.
또 그 이념을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체로, 나중에는 전 세계로 파급시켰다고 주장된다. 그러니 그것은 매우 중요한 세계사적 사건이 될 수밖에 없었고 또 긍정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처음부터 그렇게 환영 받은 것은 아니었다.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과정에서 프랑스 정치와 사회에 엄청난 소용돌이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왕이 처단되고 귀족들이 쫓겨났으며 카톨릭 교회는 핍박을 받고 공포정치 시기에는 수만 명의 프랑스인이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 사회는 계속 무질서와 혼란에 시달렸다. 또 1792년부터 4월부터 시작된 혁명전쟁은 그 후 20여 년간 프랑스뿐 아니라 전 유럽을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었다. 그러니 혁명의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들이 그것을 찬양하는 반면, 구체제에 가까이 있었거나 혁명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이 적대감과 증오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그 후 한 세기 내내 혁명은 프랑스 내 정치적 논의의 중심 주제였다. 혁명에 대한 태도가 바로 그 사람의 정치적 입장을 보여주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상의 정치논쟁에서 혁명은 끊임없이 논쟁의 시발점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정을 거부하는 공화주의자, 자유주의자, 민주주의자, 사회주의자, 반교회주의자들은 혁명을 옹호했다. 이들 사이에도 물론 견해의 차이는 있으나 혁명을 진보적인 것, 바람직한 것, 인류의 이상과 합치시키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래서 이들은 혁명이 보여준 자유와 평등, 봉건제 폐지, 인권선언, 헌법 제정, 입헌군주제와 공화제의 수립을 높이 평가했다. 공포정치를 불가피한 것으로 옹호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반면 군주주의자, 귀족주의자, 교회주의자, 보수주의자들은 혁명의 원리를 폭도의 원리라고 끊임없이 비난했다. 믿을 수 없는 추상적인 원리에 의존하여 오랜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기존 사회질서를 파괴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역사가는 '이 무서운, 파괴적이고 형상이 없는 야수가 민주주의라는 형태로 프랑스 정치를 위협한다'고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정도는 다르나 기본적으로는 마찬가지이다. 혁명의 해석이 시대의 정치상황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전반에서 3/4분세기까지 그것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사회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세력을 확장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 온 것이 대체로 맑스주의적 해석이다.
반면 80년대 이후에는 수정주의적 해석이 점점 세력을 확대하며 지금은 오히려 맑스주의적 해석을 압도하고 있다. 이는 전 세계적인 사회주의의 퇴조 및 보수주의 흐름의 확대와 어느 정도 관계를 갖고 있다.
이런 정치적 흐름과도 관계가 있으나 오늘날 맑스주의 해석에 대한 많은 비판은 기본적으로 그것이 갖고 있는 많은 문제점과 한계 때문이다. 맑스주의의 계급투쟁 도식에 맞추어 전형적인 부르주아혁명으로 규정하려 하니 역사현실과 잘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 세계사적 의미를 강조하다보니 혁명을 지나치게 이상화하고 의미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을 서양사에서 가장 유럽중심주의적인 해석의 하나로 만들고 있다. 이는 비유럽인의 역사인식에게는 상당히 큰 문제를 야기한다. 당연히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