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프레시안


프랑스 혁명과 세계사 ③
수정주의 해석의 발전

맑스주의 해석에 대해 처음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영국의 알프레드 코반(1901-1968)이다. 그는 1954년의 런던 대학 프랑스혁명사 교수 취임 강연에서 <프랑스혁명의 신화>라는 제목으로 맑스주의적 해석을 처음으로 비판했다.
  그는 우선 혁명이 파괴했다고 하는 봉건제의 개념에 의문을 제기했다. 토지소유에 기초한 통치체제로서의 봉건제는 프랑스에서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고 18세기에 남아 있던 것은 단지 그 의미 없는 흔적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봉건제 폐지의 의미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혁명적인 부르주아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삼부회의 제3신분 대표들의 출신을 분석하여 그 가운데 13%만이 상인, 제조업자, 금융업자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 외 대부분의 대표들은 지방의 낮은 직위의 관리들, 검찰관, 판사 같은 직을 역임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맑스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이렇게 보면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용어가 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코반의 주장은 별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건드릴 수 없는 금기를 깨뜨리는 중요한 일을 한 셈이다. 1964년에 그는 자신의 논지를 더 보강하여 <프랑스혁명의 사회적 해석>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때쯤이면 다른 사람들이 이 일에 가담하게 된다.
 
  미국 학자인 조지 테일러는 1967년에 <비자본주의적 부와 프랑스혁명의 기원>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가 한 일은 혁명 이전의 부르주아계급과 귀족계급의 투자 행태를 검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결과는 비슷했다. 두 계급의 이해관계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1973년의 콜린 루카스의 <귀족, 부르주아, 프랑스혁명의 기원>이라는 글에 의해 다시 뒷받침 되었다. 많은 경험적 증거를 제시하며 루카스는 구체제 말의 부르주아와 귀족이 동질적인 지배 엘리트 집단의 구성원이었음을 밝혔다. 귀족이 특권을 독점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은 아직 소수파이기는 하나 학계에 확고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혁명 연구의 본산은 프랑스였으므로 이런 주장들이 프랑스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큰 의미가 없었다. 1978년에 전기가 왔다. 그 해에 프랑소아 퓌레(1927-1997)가 <프랑스혁명을 생각한다>라는 책을 내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는 이미 1971년에 <혁명의 교리문답>이라는 글을 통해 맑스주의자들의 천편일률적인 계급투쟁론이, 논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카톨릭의 '교리문답'적 성격을 가졌고 민족적 영광과 레닌주의적 이론에 사로잡혀 있다고 통렬하게 비판한 바 있다.
 
  영미의 수정주의 학자들이 사회경제적인 측면에 중점을 둔 데 비해 그는 정치와 이데올로기 면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혁명 해석의 전반적인 전복을 꾀했다.
 
  맑스주의자들은 자코뱅파에 의해 혁명이 과격해진 1792년 8월-1794년 7월의 시기를 높이 평가하나 1789-1792년의 온건한 시기에 이루어진 성취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는 본다. 특히 봉건제 폐지 선언 같은 것은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중요한 단계로 높이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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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2년 1월 쟈코뱅파의 집회모습

  또 전통적으로 크레인 브린튼을 비롯한 영국과 미국의 자유주의 역사가들은 1789-92년의 온건했던 시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왔다. 다만 93-94년의 공포정치 시기는 혁명이 국내의 물가고나 정치적 혼란, 대외 전쟁 등으로 과격해졌고 그래서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난 시기로 보았다.
 
  그러나 퓌레는 혁명이 1789년의 처음부터 문제가 많았다고 생각한다. 국민의회가 처음부터 신중한 토의 끝에 루소의 인민주권설과 일반의지론을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이론에 의해 만들어진 민주주의는 동의에 의한 통치나 개인적 인권을 존중하는 형태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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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혁명이 인민주권이라는 과격한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임으로써 어떤 권력남용도 인민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한 변명될 수 있었으므로 혁명은 처음부터 독재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공포정치시기에 공공연하게 표출되었을 뿐이다. 또 그는 나폴레옹의 제국도 그 독재적 본질에서는 혁명기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단지 그 종막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혁명 시기의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프랑스인이 자유롭게 된 것뿐이며 개인은 국가에 예속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반대도 혁명의 통일성을 해치는 분파투쟁으로 거부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매우 급진적인 것으로 코반까지도 사실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80년대로 들어서며 퓌레의 주장은 점점 많은 지지자들을 얻게 되었고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은 점점 더 많은 주제로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혁명 200주년이 된 1989년 즈음에는 퓌레가 혁명사 연구에 있어 프랑스 내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최근 2, 30년 사이의 프랑스혁명사 연구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맑스주의적 해석이 삽시간에 거의 붕괴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 연구가 지나치게 맑스주의 도식에 의존함으로써 역사현실과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그렇게 오랫동안 주류해석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1930년대, 2차대전의 혼란기와 그 이후에 혁명사 연구가 대체로 부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르페브르 같은 사람의 주장이 과도하게 오랫동안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실증적인 연구들이 쏟아져 나오면 더 이상 정통적인 지위를 유지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지금도 물론 맑스주의적 해석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일부 남아 있다. 그러나 숫자도 작고 영향력도 미미하다. 맑스주의자들 가운데에도 계급투쟁설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으니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최근의 연구들을 통해 프랑스혁명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한 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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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에 참여한 여성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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