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프레시안 2008-08-22 오전 9:23:29

식민주의와 그 역사적 유산 ③
식민지의 경제적 착취

경제적 주권의 박탈과 경제의 기형화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처음 건설한 스페인 왕실이 계속 관심을 가졌던 것이 귀금속의 착취였던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식민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처음부터 경제적 착취이다. 정착식민지의 경우 식민자들은 원주민들로부터 토지를 아예 강탈했으니까 이야기할 것조차 없다.
 
  착취식민지는 이와는 달리 사람에 대한 착취와 물질적인 착취가 함께 목적이므로 경제적 착취는 바로 식민지의 존재 이유가 된다. 그러나 당장의 직접적인 착취만이 피해를 준 것은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것은 그것이 장기적으로 식민지의 경제구조를 왜곡시키고 기형화함으로써 경제적 자립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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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콩고식민지에 대한 벨기에 레오폴트 2세의 가혹한 착취를 상징하는 그림(1906). 콩고는 레오폴트 2세의 개인식민지로서 그 착취는 악명이 높았다.

  식민지 경제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식민지인들이 조세나 무역, 화폐 제도 등에서 주권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식민지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킬 수 없게 되고 자신들의 복리를 위한 경제정책을 취할 수 없게 된다.
 
  또 식민지의 경제관계는 주로 식민 모국과 맺어지게 마련이므로 서양국가들이나 일본 경제에 하위 파트너로 밀접하게 통합된다. 그래서 과거에 다른 나라나 주변 지역들과 맺고 있던 전통적인 경제적 관계들은 깨어진다. 그러니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역도 주로 모국과 이루어질 뿐 아니라 무역제도도 모국에게 유리하게 시행된다. 그리하여 모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수입품에 대해서는 무방비 상태가 되는 반면 높은 관세 장벽 때문에 모국으로의 수출은 불가능하게 된다.
  그 결과 싼 가격으로 밀려들어오는 공산품 때문에 식민지에서 발전하던 수공업이나 산업들은 붕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식민지가 모국의 공산품 시장으로 전락하며 스스로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식민주의자들이 식민지에 철도나 도로, 통신시설, 학교, 농지개간이나 수로 정비 사업 등 사회기반 시설들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특히 철도의 건설은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식민지로부터 원자재를 반출하고 식민지를 모국경제에 보다 밀접하게 통합하기 위한 수단이었지 진정으로 식민지인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인들이 조선에 들어와 가장 먼저 한 일인 경부철도의 건설이 러일전쟁을 위한 군사적 목적 때문이었던 것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이런 자금은 식민지에 대한 가혹한 세금 수탈로 확보된 것이다. 결코 식민당국의 시혜가 아니다.
 
  시기에 따라 식민지의 경제정책이나 제도들이 여러 형태로 변화하기는 했지만 어떤 것이건 식민지 사람들의 경제적 이익이나 자립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식민주의자들이 가져다 준 일부 혜택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요사이에 우리나라에는 일본의 비양심적인 학자들을 따라 '식민지 근대화론'을 내세우며 일제시기에 일본인들이 산업화의 기반을 만들어주었다는 등의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하는 정신 나간 학자들이 있다. 식민지시기에 한국 자본주의의 기틀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식민지 경제가 기본적으로 식민모국을 위해 봉사한다는 초보적인 사실조차 부인하는 이야기이다. 또 우리가 독립한 상태에 있었다면 그 정도도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인데 참으로 자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없는 너절한 주장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강제노동과 토지의 약탈
 
  많은 지역에서 식민주의자들은 식민지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 드물게 노예제도를 채용한 곳도 있기는 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강제노동이 행해졌다.
 
  16세기에 중남미 지역에서 노동력을 필요로 했던 스페인인 지주들은 원주민들을 엔코미엔다라는 제도에 의해 자신들에게 예속시켰다. 스페인 왕이 수여한 권리에 따라 주변 마을 사람들에게 정해진 만큼의 노동을 해 주도록 강요하는 강제노동 제도였다.
 
  아프리카 지역에서도 대가를 지불하건 안 하건 강제노동은 일반적인 노동착취 형태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아프리카 사람들이 대거 동원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아시아 지역에서도 같다. 네덜란드 사람들도 자바 지역에서 커피를 생산하며 중남미에서 비슷한 형태의 강제노동 제도를 이용했다. 일본도 2차대전 때 수많은 조선인들을 군대나 공장에 징용함으로써 노동력을 착취했다.
 
  강제노동보다 더 문제가 심각한 것은 토지의 약탈이었다. 북미지역에서와 같은 '뉴잉글랜드' 형태의 정착식민지에서는 원주민들이 살던 땅에서 모조리 쫓겨났다. 그들은 싸우다 죽던가 아니면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로 쫓겨났다. 한국인들이 이를 '인디언 보호지역'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 알고 하는 소리이다.
 
  다른 지역에서도 기름진 땅들은 거의 정착 식민자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멕시코나 알제리, 로데시아, 남아프리카, 조선 어디에서도 일어난 일이다. 식민지인들은 자신이 농사짓던 땅들을 빼앗기고 소작인, 품팔이 농사꾼이 되거나 다른 곳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일제시기에 전라도의 넓은 평야가 거의 일본인 지주의 손에 넘어간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식민자들은 수출을 목적으로 하는 대규모 농장인 플랜테이션들을 만들어 식민지 농민들의 생활을 전체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사탕수수, 커피, 차, 바나나, 면화, 고무 등 수출용 환금 작물들을 생산하는 농장들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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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 시대 북로데시아의 담배플랜테이션을 선전하는 포스터. 백인들은 플랜테이션이 원주민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강변했다.

  그리하여 일부 식민지의 경우에는 수출작물을 생산하느라고 자신들이 먹을 식량을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모자라는 식량을 높은 가격에 수입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이는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또 이런 경제구조는 그 사회의 성격도 결정지었다.
 
  수출작물의 생산을 통해 큰 돈을 벌고 식민세력의 비호를 받는 백인이나 소수의 원주민 지주세력은 그 사회의 특권적 지배계급이 된 반면 대다수의 농민들은 땅을 잃고 빈민으로 전락하며 엄청난 빈부 차이가 생긴 것이다. 오늘날 중남미 국가들이나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이런 큰 빈부 격차는 바로 식민지 경제의 유산이다.
 
  식민지의 탈산업화
 
  이런 점에서 제 3세계 학자들은 식민 착취가 식민지인들에게 경제적 궁핍을 가져다 준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식민국가의 경제에 기형적으로 예속됨으로써 자생적인 발전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그것을 통해 유럽국가들은 산업화를 이룰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 여기에서 비롯된 경제적 예속성이 독립 이후에도 제 3세계가 선진국과의 교역에서 부등가 교환을 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산업이 발전하지 못한 제 3세계는 값싼 열대작물들과 가격 변동이 매우 심한 광산물이나 팔고, 대신 자동차나 정밀기계 같이 부가가치가 높은 공산품들을 사들여야 하니 계속 부를 유출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식민지배가 식민지 산업의 싹을 잘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유럽중심주의적인 서양학자들은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착취를 부정하는 것은 물론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 해도 이들 지역에서 경제가 발전했을 가능성을 부정한다. 그래서 일부 조건이 좋은 국가들의 경우는 예외이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기술적, 정치적, 경제적 여러 조건들을 갖추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나라들이 그런 조건들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이들은 산업화를 식민주의의 결과로 보지 않고 식민주의를 산업화의 결과로 주장하기도 한다. 산업화로 인해 커진 힘이 비유럽의 식민화를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D.필드하우스가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영국과 인도와의 관계만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면직산업 성장에 있어 벵골 식민지가 한 기여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중요한 식민국가들의 경우에는 대동소이하다. 19세기 말의 후발 식민국가들을 제외하면 이들 나라의 식민주의는 다 산업화보다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게다가 보호관세 없이 식민모국의 공산품 시장이 된 상황에서 식민지들이 스스로 산업을 발전시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18세기까지 이익이 많이 나는 면직물 산업에서 세계에 군림했던 인도가 영국의 식민통치를 겪으며 완전히 탈산업화된 것을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또 서양학자들 가운데에는 착취를 인정하기는 하나 유럽국가들이 많은 것을 얻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P.베록이 그런 사람이다. 그는 식민주의는 산업화로 인해 생긴 힘의 격차 때문이라고 믿으나 그래도 착취를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서양이 식민주의로부터 많은 것을 얻지 않았다고 해서 제3세계가 많은 것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탈산업화를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착취를 통해 유럽이 잘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으니까 이런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사실은 '제3세계에게도 좋은(굿) 뉴스'라고 말한다. 유럽이 식민지를 착취하지 않고도 잘 살게 되었으니까 식민지가 없는 제3세계도 앞으로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식민주의적 착취로 깊은 나락 속에 빠져 있는 제3세계의 암담한 현실을 모르고 하는 엉터리 소리이다.
 
  유럽중심주의적 서양학자들이 얼마나 비도덕적이고 제멋대로의 주장을 하는지 이를 통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부문별하게 받아들여 '굿 뉴스'를 연발하는 국내학자들도 있으니 참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출처 - 프레시안 2008-08-20 오전 11:16:09

식민주의와 그 역사적 유산 ②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와 식민지배 체제

식민주의 이데올로기
 
  16세기 초에 중남미 지역을 정복한 스페인 사람들은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정복의 권리'에서 찾았다. 자기네들이 정복한 땅이니까 그것을 점령하고 다스리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아메리카의 땅과 주민들을 지배하고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일은 도덕적으로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17세기에 북아메리카에 자리 잡기 시작한 영국, 프랑스 사람들은 원주민들의 땅을 불법적으로 빼앗은 것이 아니라 '빈 땅'에 원주민들의 동의와 협조를 받아 정착했다고 주장했다. 자신들의 행위를 스페인 사람들과 차별화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그 자신들에게는 중요했을지 몰라도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들이 곧 울타리치기와 농업을 통해 확보했다고 하는 사유재산권을 '자연법'으로 내세우며 원주민들의 땅을 침범했기 때문이다. 자연법을 내세운 이런 주장은 자신들의 행위를 도덕적인 양 가장하고 있는 점에서 정복의 권리 주장보다 더 악랄한 태도라고 하겠다.
 
  1870년대 이후의 제국주의 시대에 오면 많은 나라들이 식민지 확보를 위해 경쟁을 했으므로 식민지에 대한 요구는 더 노골적으로 나타나고 또 대중화한다. 그래서 유럽 각국의 제국주의자들은 시장의 확보, 원료의 조달지, 자본의 투자처, 과잉인구의 유출지로 식민지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식민지가 있어야 강대국으로서의 위신이 올라간다고도 생각했다.
 
  이러한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데 매우 유용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던 것이 사회적 다윈주의이다. 적자생존을 인간사회에까지 확장함으로써 힘 있는 국가가 힘없는 국가를 지배하는 것을 자연적 질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의 대중화에 앞장 선 것은 독일의 식민협회, 독일과 영국의 해군협회 같은 수많은 제국주의적 정치, 사회단체들이다. 많게는 수백만의 회원을 가진 이들 단체는 식민지 확보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옹호하고 제국주의적 가치를 확산시키며 정부의 식민정책에 압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1908년에 영국에서 창립된 보이 스카웃 같은 소년운동조차 소년들에게 제국주의적 가치를 주입시키려고 애썼다.
 
  19세기 말에 와서 세계경제가 점차 보호무역주의로 돌아가게 되자 이제 제국은 자국경제를 지키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이런 생각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1895-1903년까지 영국의 식민장관을 지낸
조셉 체임벌린이다.
 
  그는 당시의 추세대로 가면 곧 자유무역의 시대가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게 되면 이제 주된 강국들은 제국으로부터 원료를 가져오고, 모국은 공산품을 제공할 뿐 아니라 이민을 내보내는 자족적인 경제블록을 형성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그는 영국이 산업능력이나 군사적 능력에서 점차 국제경쟁에서 패배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국내의 사회문제도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제국의 형성은 이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열쇠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영국과 영국의 백인 정착식민지들을 결합하는 제국적 경제통합을 꿈꿨다. 그러나 식민지인들의 불신 때문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런 생각은 뒤의 경제공황 시기에 상당한 정도로 현실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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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셉 체임벌린

  식민화와 유럽인의 도덕적 책임
 
  그렇다고 유럽인들이 식민 지배를 도덕적인 일로 미화하는데 소홀했던 것은 아니다. 미화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행위가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런 생각의 바탕에는 자신들이 비유럽인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며 우월하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그들이 보기에 비유럽인들은 기독교를 믿지 않으므로 이 세계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비유럽 사람들의 기술 수준은 매우 낮으므로 자연을 잘 지배할 수도 없다. 인종적인 면에서 볼 때 도 비유럽인들은 백인종인 유럽 인들에 비해 열등할 수밖에 없다. 또 열대 지역 사람들은 더운 기후 때문에 천성적으로 게으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식민지인들은 게으르고, 잔인하고, 놀기만 좋아하고, 순진하고, 결단력이 없고, 겉과 속이 다르며, 보다 복잡한 추상적인 생각을 할 수 없고, 이성이 아니라 충동에 따라 행동하는 한심한 존재로 이해되었다. 그러니 이렇게 아직 성숙하지 못한 식민지인들이 유럽인의 보호를 받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19, 20세기에 오면 유럽 사람들은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도덕적인 사명 속에서도 찾았다. 높은 문명 수준을 갖고 있는 유럽의 백인종들이 이들을 가르치고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면에서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치능력이 없고 아시아 사람들은 전제의 폭압 속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이들을 해방시키고 정치적인 훈련을 시킬 필요가 있었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이들에게 제대로 노동을 하는 습관이나, 절약이나 저축 등 여러 가지 경제관념을 넣어 줄 필요가 있었다. 또 문화적 면에서, 식민지 사람들은 나쁜 관습이나 미신, 비도덕적 행위들에서 스스로는 벗어날 수 없으므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식민통치는 유럽 사람들의 선물이자 문명을 나누어주는 은혜로운 행위로, 또 인류애의 발로로 찬양되었다.
 
  기독교 선교는 이런 맥락에서 정당화될 수 있었다. 식민지인들에게 미신이나 낮은 수준의 종교 대신 고등종교인 기독교를 믿게 함으로써 그 도덕성을 높여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서양문명의 혜택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교육이나 의료사업을 병행했으므로 이런 주장이 어느 정도 먹혀들어갈 소지도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 선교사업은 약간의 문화적 혜택을 가져다 준 것은 사실이라 해도 식민지의 토착 문화를 파괴함으로써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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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간다의 알프레드 터커 주교와 영국 교회선교회 소속 첫 여성 선교사들(1896년)

  F.D. 러가드는 나이지리아 총독을 지내기도 한 영국의 식민지 관리인데 두 가지의 도덕적 사명을 주장했다. 하나는 유럽문명의 복음을 식민지에 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방치되어 있는 식민지의 자원들을 세계경제를 위해 이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러가디즘이라고 해서 20세기 초에 유럽 각국에서 널리 받아들여진 주장이다.
 
  키플링이라는 영국 시인이 '백인의 짐'을 지자고 호소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백인의 가장 훌륭한 아들들을 보내 식민지인을 돕게 하자는 것이다. 식민지인들이 져 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은 짐을 지겠다고 엉뚱하게 나서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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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년생인 러드야드 키플링은 인도 식민지 태생으로 많은 시와 글들을 통해 이미 19세기 말에는 식민주의, 군사주의를 옹호하는 영국의 가장 유명한 문필가가 되었다. '백인의 짐'은 식민주의자들의 도덕성을 주장하는 가장 유명한 시 가운데 하나이다.

  가혹한 식민지배 체제
 
  그러나 실제의 식민지배는 인류애에 가득 찬 이런 갸륵한 주장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식민지배 체제란 식민주의자들이 식민지인들의 정치적 주권을 빼앗고 자유를 박탈함으로써 식민지인들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게 만드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식민국가의 성격이나 식민지가 위치해 있는 지역에 따라 식민체제의 성격은 조금씩 달랐다. 그러나 식민지인을 억압하고 식민지 착취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어디에서도 식민지인들은 정치, 외교, 군사적 자주권을 빼앗기게 된다. 또 식민지는 식민국가들의 요구와 이익에 봉사하는 방향으로 다시 짜여진다. 그러므로 식민지인들은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부인당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식민지배 체제는 식민지인들에게는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것이고 악일 수밖에 없다.
 
  아프리카의 경우를 보면 정치적인 면에서 식민주의가 갖고 있는 이런 부정적인 성격들을 잘 알 수 있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식민지의 많은 경계선을 자기들끼리의 타협에 의해 제멋대로 만들었다. 오늘날 아프리카 국가들의 국경선에 직선으로 된 것이 많은 것이 그 결과이다.
 
  이 경계선들은 종족이나 문화, 지리, 또 생태학적인 문제를 도외시한 것임에도 독립 이후 그대로 새 국가들의 국경선이 되었다. 그래서 한 종족이 여러 나라로 분산된 경우나 한 국가 안에 여러 종족들이 같이 사는 경우가 매우 많다.
 
  또 나라 사이에 자연자원이나 경제적인 능력 면에서 너무나 큰 차이가 존재한다. 어떤 나라는 너무 크고 어떤 나라는 너무 작으며 어떤 나라는 풍부한 지하자원을 갖고 있는 반면 어떤 나라는 사막밖에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강물을 이용하는 문제, 바다로의 출구 등 많은 문제를 두고 수많은 국제적 분쟁이 생겨나고 있다. 이 대부분이 잘못된 식민지배의 유산 때문이다.
 
  게다가 식민당국자들은 식민통치를 쉽게 하기 위해 분할통치 정책을 취했다. 일부 종족에게 특권을 주어 다른 종족과 대립하게 함으로써 여러 종족들이 함께 단합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종족 사이의 분열은 독립 후에도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서 고질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아시아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종족간의 분쟁이 가끔씩 종족학살 같은 극단적인 형태로 치닫기도 한다.
 
  서양인들은 이런 종족학살을 제3세계인의 미개성 탓으로 돌리고 자신들은 문명인인 듯이 자랑하나 이는 매우 잘못된 태도이다. 그 원인을 만들어 준 것이 서양인들이기 때문이다. 또 종족이나 민족 사이에 이해관계가 충돌하면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어느 곳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유럽도 예외가 아니다. 2차대전은 유럽인들의 영토확장욕의 산물이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또 유대인, 집시 등 많은 소수종족들이 학살을 당했다. 아프리카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또 식민국가들은 관료제도와 군사제도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현지인들을 흡수하여 만든 이 제도들은 식민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지 식민지의 근대화나 식민지인들의 복리를 위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이런 제도는 식민지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동족을 억압하던 이들 식민지 관리나 군인들이 만든 전통은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에 그대로 살아남음으로써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나라를 만드는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국가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걸핏하면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출처 - 프레시안 2008-08-15 오전 8:00:39

식민주의와 그 역사적 유산 ①
식민주의, 왜 지금까지도 문제인가

식민주의의 의미
 
  15세기 말은 세계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다. 이 시기에 유럽인들이 아시아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했을 뿐 아니라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도 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의 500년은 유럽인들의 힘이 전 세계로 팽창해 나간 시대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아메리카를 정복하여 식민지화 했으나 점차 힘이 커지며 나중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에도 식민지들을 건설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세기에 이르러 몇몇 유럽 국가들은 본국의 수십 배 크기의 광대한 식민제국을 건설하며 강대국이 되었다.
 
  식민주의는 간단히 말하면 이렇게 해외에 식민지들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한 이념이나 실천을 말한다. 즉 군대와 관리들을 파견하여 식민통치 체제를 만들고, 본국인을 옮겨 살게 하거나 토착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하여 식민지가 본국에게 쓸모 있게 만들려는 이념이나 실천이다.
 
  콜럼버스로부터 시작된 유럽의 식민주의는 1520, 30년대에 스페인인이 중남미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궤도에 올라갔다. 포르투갈인은 아시아 무역에 참여하며 곳곳에 무역거점들을 만들었으나 이는 식민지라고 하기는 어렵다. 유럽인들이 아시아의 대제국들에 범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7세기에는 영국인이나 프랑스인이 북아메리카 지역의 식민화를 시작했다.
 
  그러나 식민주의가 본격화한 것은 1757년에 영국인이 인도의 벵골 지역을 시작으로 인도 전체를 식민화하면서부터이다. 1780년대에 유럽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이에 큰 힘을 실어 주었다. 산업화로 인해 가능해진 강력한 군사력이 세계의 힘의 균형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19세기에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의 식민지화는 가속되었다. 특히 1880년대부터 시작되는 신제국주의 시대에는 아프리카의 거의 전 지역이 유럽국가들에게 경쟁적으로 분할되며 비서양지역의 95% 가량이 유럽국가들이나 미국, 일본의 식민지나 반식민지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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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는 1880년대에 시작된 아프리카 쟁탈전으로 20년 사이에 53개의 유럽식민지로 완전히 분할되었다. 20세기 초의 아프리카 지도

  식민주의는 2차대전 후에야 끝나게 되었다. 식민지인들의 끈질긴 저항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한 유럽 식민국가들의 약화, 냉전체제로 바뀌는 국제정치의 흐름이 더 이상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영국은 시대의 흐름을 알아차리고 이에 순순히 따랐다.
 
  그러나 프랑스나 네덜란드, 벨기에 같은 나라는 끝까지 식민지를 내놓지 않으려고 했으므로 장기간의 가혹한 식민지 해방전쟁이 뒤이었다. 그럼에도 식민지 해방이라는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결국 1960년대에 이르러 세계의 거의 모든 식민지가 해방되기에 이르렀다.
 
  식민주의의 유산
 
  독립을 얻은 식민지인들은 해방이 되기만 하면 모든 문제들이 한꺼번에 다 해결될 것으로 믿었다. 정치적 무질서나 억압, 경제적 빈곤, 사회적 불평등, 문화적 예속 같은 모든 문제들을 다 식민통치의 결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들의 기대는 빗나갔다. 해방 이후 반세기가 지났지만 과거의 식민지들인 대부분의 제 3세계 국가들은 아직도 과거와 비슷한 상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거의 식민국가들인 선진국에게 정치,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독립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식민통치라는 과거의 직접지배가 이제 보다 교묘한 간접지배로 모습을 바꾸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가까운 장래에 이런 상태에서 벗어날 가능성도 별로 없어 보인다. 사실 지난 수 십 년 사이에 제3세계 후진국들과 선진국들 사이에, 즉 남·북 사이의 경제적 격차는 더 커졌다.
 
  제3세계 국가들은 빈곤과 기아, 자연재해로부터 계속 고통을 받고 있고 그것이 완화될 조짐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한국 같이 식민지에서 시작해 거의 선진국에 근접한 경우는 희유한 예이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식민주의는 겉으로는 사라졌으나 아직도 제 3세계인들에게는 무거운 짐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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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아로 죽음 직전에 몰려 있는 아프리카 소말리아의 어린이(1995). 오늘날 선진국과 후진국의 경제적 격차를 상징하는 남북문제의 주된 근원은 식민주의에 있다.

  그러면 제3세계국가들이 이렇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제3세계 학자들은 모든 문제의 근원을 식민주의에게 돌린다. 식민주의가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의 자생적인 정치적, 경제적 발전을 가로막았고 사회적 불평등을 조장했을 뿐 아니라 문화적 창조성도 억눌렀다는 것이다.
 
  반면 많은 서양학자들은 그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식민지배에는 부정적인 영향도 있고 긍정적인 영향도 있으나 긍정적인 점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식민지를 근대화하고 문명의 혜택을 가져다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서양학자들 가운데 양심적인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유럽중심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온갖 엉터리 이론이나 주장을 내세우며 식민주의를 옹호하고 정당화한다.
 
  사실 식민주의 문제는 제3세계 학자들과 서양학자들 사이에 원천적으로 첨예한 의견대립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주제이다. 물론 제3세계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을 무조건 식민착취에 돌리는 것도 옳지는 않다. 그러나 서양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식민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그럼에도 일부 국내학자들 가운데에는 이런 잘못된 서양이론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식민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요사이 일부 학자가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이나 '협력이론'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일제 시대에 근대화가 이루어졌고 친일파는 근대화를 추구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근대화만 이루어지면 주권은 아무 관계도 없다는 식의 이야기이니 참으로 한심한 이야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태도에는 현실정치적 이해관계도 관련되어 있겠으나 한 편으로는 서양이나 일본학문을 선진학문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 일제의 식민시대를 경험했고 아직도 그 유산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국 같은 나라에서 이렇게 무비판적인 수준을 넘어서서 식민주의에 영합하는 태도는 참으로 몰지각한 일이다.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할 것이다.
출처 - 프레시안 2008-08-13 오후 12:00:50

산업혁명과 비유럽세계의 탈산업화 ⑦
산업혁명과 비유럽세계의 식민화

지금까지 산업혁명이 어떤 행태로 전개되었는지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석탄과 철, 증기기관 같은 것의 단순한 결합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부문인 면직산업의 경우 그것은 식민지 착취와 노예노동, 그리고 제국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 매우 복잡한 사건이다.
 
  그러나 다른 산업도 큰 차이는 없다. 철강산업도 18세기의 유럽은 기술이나 생산성면에서 특별히 나은 상태에 있지 않았다. 1790년에 영국인들이 실험한 바에 의하면 일본 산
강철이, 스웨덴 산과 마찬가지로 영국 산보다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이 시기에 인도 제철업의 단위 생산비용은 영국보다 싸고, 생산시간도 덜 걸리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같은 양을 생산하는 데 영국에서는 4시간이 걸리나 인도에서는 2시간 반이면 생산이 가능했다.
 
  철강산업도 철도건설이 본격화하여 안정된 내수기반이 마련되는 1830년대 이전까지는 주로 해외시장에 의존하여 발전했다. 따라서 식민지와 해외시장을 어떻게 확보하고 유지하느냐가 가장 중요했다. 이 점에서는 면직산업과 본질적으로 같은 성격을 가졌다.
 
  그 결과는 우리가 다 아는 것이다. 영국과 인도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한 편에서 영국을 부유하고 강하게 만들었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인도경제를 파멸시키고 인도를 의존적인 경제를 가진 빈곤한 식민지로 전락시켰다. 이는 산업혁명이 영국과 인도 사이의 제로섬 게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쪽의 이득은 다른 쪽의 손실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산업혁명은 결코 프로테스탄티즘에 의한 도덕적인 자본 축적, 위대한 발명가들, 앞선 과학, 모험적인 기업가들, 이로 인해 탄생한 거대한 생산력, 이런 것들에 의해 미화될 수 있는 평화스럽고 단순한 경제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비유럽 지역 사람들의 땀과 고통, 살육 위에 서 있는 정치적, 사회적 사건이다. 그러니 비유럽인들이 그것을 서양 사람들 마냥 찬양할 수는 없고 또 찬양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산업혁명이 풀어 놓은 거대한 생산력은 19세기 중반 이후에 오면 이제 국제질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산업화를 먼저 달성한 몇몇 나라들이 국제정치를 좌우하게 되었다.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패한 이후 강제로 개항을 당하며 점차 유럽국가들의 반식민지로 전락했다. 유럽의 전통적인 강대국의 하나였던 러시아도 1850년대의 크림 전쟁에서 산업국가인 영국, 프랑스에게 패한 후 큰 충격을 받고 개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땅의 크기나 인구의 다과가 문제가 아니라 인구는 적더라도 기계와 동력을 이용해서 만들어내는 거대한 생산력이 이미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산업혁명을 먼저 경험한 국가들과 그렇지 않은 나라들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이 그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런 대국들은 그만두더라도 비유럽 지역의 대부분의 중, 소국가들이 어떤 운명에 빠지게 될 것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거의 모든 나라가 1880년대 이후의 제국주의 시대에 몇몇 서양 국가들과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또한 탈산업화 되었다. 오늘날 제 3세계 빈곤의 많은 부분은 여기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업혁명과 식민주의의 깊은 연관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005년도에 중국의 GDP는 영국, 프랑스를 제치고 세계 4위로 올라섰다. 20년 정도면 아마 세계 1, 2위 자리를 넘볼지도 모른다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인도도 최근 급격한 성장세를 타고 있다. 한국도 10위권에 근접했고 20년 정도 지나면 10위권 안에 안착할 가능성도 있다.
 
  산업혁명이 흐트러 놓은 세계질서가 200년 만에 제자리를 찾아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산업혁명이 세계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고 비유럽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안겨 주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출처 - 프레시안 2008-08-08 오전 11:55:32

산업혁명과 비유럽세계의 탈산업화 ⑥
비유럽세계의 탈산업화

인도의 탈산업화
 
  유럽의 산업화는 비유럽의 탈산업화를 동반했다. 그 가장 현저한 예가 세계에서 가장 큰 식민지였던 인도이다. 서양학자들은 그 동안 식민지화 이전의 인도 경제를 매우 경시해왔으나 최근에 연구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인도는 18세기까지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경제를 가진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무굴제국이 붕괴했으나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경제는 한 동안 계속 발전했다. 그래서 인도는 1750년에 세계 산업 생산의 근 24.5%를 차지하던 나라이다. 중국의 32.8%에 이어 세계 2위였다( P.Bairoch의 1982년 추계).
 
  또 인도는 국제적으로도 면직물, 견직물의 주된 수출국으로서 큰 무역흑자를 보았다. 반면에 수입품은 커피, 차, 설탕, 술, 향료 같은 기호품과 보석 같은 것에 제한되었다. 금속제품은 가끔 대포를 수입한 것 외에는 거의 수입하지 않았다.
 
  또 18세기까지 인도인들은 비교적 잘 살았다. 요사이의 실증적인 비교연구에 의하면 인도 남부 지역 농업노동자나 직조업 노동자들의 임금은 잉글랜드 농업 노동자나 직조업 노동자들의 임금을 오히려 상회한다.
  예를 들어 동인도회사가 1795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마드라스 근교의 쌀 생산지역에서 인도 사회의 최하층인 불가촉천민 농업노동자의 임금은 쌀로 쳐서 주당 30파운드에 해당했다. 이는 현물급여나 부조 등 다른 많은 수입을 뺀 금액이다.
 
  이에 비해
아서 영이라는 학자가 1760년대에 조사한 것을 보면 잉글랜드 북부나 동부의 임금은 위의 잡수입을 포함해 주당 곡물로 쳐서 30-35파운드에 해당했다. 인도의 임금은 최저선으로 박하게 계산한 것이므로 실제 차이는 더 크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는 인도인들이 옛날부터 매우 빈곤하게 살았다는 서양인들의 전통적인 견해를 깨뜨리는 것이다. (Parthasarathi의 1998년 연구)
 
  이렇던 나라가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며 급격한 경제쇠퇴 과정을 밟게 된다. 그리하여 인도는 19세기 초반에 공산품 수입국으로 전락하게 되고 1860년의 산업생산은 세계 전체의 8.6%로, 1900년이면 1.7%로 떨어지며 거의 산업기반이 붕괴하다시피 된다. 그 결과 인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 최빈국에 속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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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구로 실려 나가는 인도산 원면

  이는 물론 인도를 최대한 착취하려 한 영국 식민주의 정책의 결과이다. 인도산 공산품이 영국에 들어오려면 매우 높은 관세를 물어야 했다. 1812년에 캘리코는 72%, 다른 상품은 100-600% 정도의 고율 관세를 지불해야 했다. 반면 영국산은 인도에서 관세 면제이거나 최대 2.5%를 물면 되었다. 그러니 인도 산업이 온전하게 남아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영국 산업혁명의 성공은 상당부분 이에 의존한 것이다.
 
  인도 면직산업의 붕괴
 
  서양학자들은 인도 면직산업의 붕괴가 공장에서 생산한 품질이 좋고 싼 영국 면직물의 경쟁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공장제에 대한 환상에서 나온 것이다.
 
  실제로 초기의 공장들은 수공업에 비해 그렇게 능률적인 작업장은 아니었다. 아크라이트가 1771년에 처음으로 수직기 공장을 건설했으나 편사는 쉬워도 직조는 기계화가 곤란하여 1800년 이후에야 상업적 이용이 가능했다. 그럼에도 기계를 이용한 직조보다 손으로 하는 직조 비용이 더 쌌으므로 1830년대까지도 수공업자의 고용이 증가했다. 기계화된 방직의 승리가 분명해진 것은 1830년대 말이다.
 
  증기기관의 채용도 단순한 것이 아니다. 증기기관이 공장에 채용된 것은 1786년이나 초기의 증기기관이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볼튼과 와트의 증기기관 공장에서 만든 496개 증기엔진 가운데 몇 개만이 15-16 마력 정도를 낼 수 있었다. 당시의 금속 기술로는 고압력에 견디는 부품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1835년이 되어서야 면직산업 기계의 3/4가 증기에 의해 가동되었다. 또 노동자 2교대제로 하루 종일 기계를 돌림으로써 엄청난 생산 효율성을 가져왔다. 그러니 이는 훨씬 뒤의 일인 셈이다.
 
  그럼에도 제국의 우월한 힘에 의존한 영국의 면직산업은 18세기 후반부터 해외에서 점차 인도 면직물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무방비 상태의 인도로 영국 면직물들이 밀려들어오며 이미 1820년대부터 인도 면직물 산업의 쇠퇴가 시작된다.
 
  특히 가장 먼저 식민화된 벵골 지방의 면직물산업은 1830년까지는 거의 완전히 붕괴했다. 그러나 이런 쇠퇴가 경제논리 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동인도회사는 면직물에 대한 독점 구매자로서 터무니없는 가격과 조건에 그것을 사들여서 폭리를 취했다. 또 수공업자들을 별 다른 이유 없이 채찍질하고 투옥했으며 심지어 직조기를 부수거나 직조공의 손가락을 잘라 버리는 만행까지도 저질렀다. 인도 면직물 산업을 짓밟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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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조공의 손가락을 자르는 만행을 저지르는 식민지 관리

  영국 면직물의 인도 침투가 본격화하는 것은 19세기 중반부터이다. 그전에는 인도 내부의 교통이 아직 불편했을 뿐 아니라 영국산이 인도인의 기호에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도의 전국적 개통과 인도 시장에 침투하려는 영국인의 적극적인 노력이 그 장애를 없앴다.
 
  인도에서 철도는 1853년에 처음 개설되었으나 1870년까지 7,200킬로가 부설되었고 1936년의 전체 철도망은 6만9천 킬로미터로 세계 4위일 정도로 급성장했다. 이 철도망을 타고 영국 상품들이 지방까지도 침투해 들어갈 수 있었다.
 
  또 영국 인도부는 인도 시장을 뚫고 들어가기 위해 1866년에 인도 면직물을 세세히 조사한 18권짜리의 견본책을 만들어 업계에 배포했다. 여기에는 총 700종의 인도 면직물 견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영국 면직업자들은 영국산의 경쟁력을 크게 높일 수 있었다. 1860년대 이후 쏟아져 들어온 영국 면직물은 인도산을 모방했으나 색깔이 인도산 보다 더 밝았고 조성도 더 치밀했으며 가격은 30%가 더 쌌다. 따라서 인도인의 인기를 끌어 곧 시장의 큰 부분을 장악할 수 있었다. 20세기 초에 수입직물이 인도 소비시장의 60%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러니 인도 면직산업이 몰락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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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하트마 간디가 스스로 물레를 돌려 실을 만드는 모습. 영국산 면직물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는 면직산업 만에 한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산업들이 다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한때 번영하던 인도경제는 원자재를 빼앗기고 반대로 기계로 생산한 완제품을 사서 쓰는 한심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오늘날의 제3세계 국가들이 과거 식민지 시대에 대부분 똑 같이 경험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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