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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유럽 과학의 발전 ⑦
근대 유럽과학의 절대화는 피해야

중국과학과 <니덤 퍼즐>
 
  19세기 이후 서양인들은 중국과학을 매우 무시해 왔다. 이는 아편전쟁에서 중국을 굴복시킨 서양인들이 중국문화에 대해 보인 일반적인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지금도 본질적으로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이런 태도에 큰 변화를 가져온 사람이 케임브리지 대학의 생화학교수였던
조셉 니덤(1900-1995)이다. 그는 1930년대 말부터 중국어를 직접 배워 중국과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그것을 생애의 과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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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셉 니덤 ((Joseph needham, 1900-1995)

  1954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방대한 저술이 그 업적이다. 이 책은 처음에는 그가 직접 썼으나 나중에는 제자들이 참여하여 중국과학의 모든 부면을 조명했고 2004년에 결론 부분인 제 16권이 출간되었다.
 
  니덤은 그때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중국과학을 서양에 상세하게 소개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근대 이전에 있어서 다른 지역에 대한 중국과학의 우월성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과학이 기원전 2세기에서 16세기까지는 유럽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럽의 과학발전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자기학과 연금술, 관찰 천문학, 무한한 우주를 가정하는 우주론, 정확한 시간 측정을 위한 시간 측정장치(물시계)의 발전이라는 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유럽의 과학이 중국을 앞서기 시작하는 시점은 1450년이며 이는 유럽의 르네상스기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중국과 유럽 사이의 교류가 있었으므로 명이 망하고 청나라가 선 1644년에 수학, 물리학, 천문학 수준에서 두 지역 사이에 별 차이가 없었다고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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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과학과 문명(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1954)

  이미 17세기 초부터 중국에는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 등이 기독교 선교의 방편으로 수학, 천문학, 물리학 등 유럽의 최신 과학지식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가운데에는 천문대인 관상감의 책임자로 임명된 사람도 있다.
 
  그러면 중국은 그 후 왜 근대과학을 발전시키는 데 실패하여 결과적으로 유럽에게 뒤떨어졌을까? 이 문제를 그는 평생의 화두로 삼아 끊임없이 해결하려 노력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니덤 퍼즐>이라고 부른다.
 
  그는 우선 두 지역 과학의 성격 차이를 제기한다. 중국 수학이 산술학과 대수학의 전통은 강해도 기하학의 전통이 약하다는 것이다. 이슬람 수학으로부터 많이 배울 수 있는 처지에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상의 차이 때문이다.
 
  이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그 전에도 부분적으로는 번역되었지만 1857년에야 완역된 사정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중국과학은 기하학적 증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연역적 추론 면에서 많이 뒤떨어지고, 또 유럽에서 천문학과, 나아가 근대과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기하학적 천문학을 발전시킬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근대과학에 실패한 보다 중요한 이유를 그는 사회, 경제적인 요인에서 찾는다. 그가 원래 맑시스트였으므로 그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래서 그는 르네상스, 종교개혁, 과학혁명이 분리될 수 없는 전체라고 생각한다. 이것들이 15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봉건체제를 파괴하고 자본주의를 만들어낸 주된 사건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근대과학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당연히 이런 요소들의 결여 때문이다.
 
  이리하여 과학의 문제는 보다 넓은 사회, 경제, 정치적 문제의 논의로까지 확대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의 약점이 노출되기 시작한다. 그가 유럽에서의 도시의 발전이나 부르주아지의 흥기를 자본주의의 발전의 전제로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이런 것이 불가능했던 이유는 유럽의 군사적 봉건제와는 다른 관료제적 봉건제 때문이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제가 그것을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주장은 도시와 자본주의의 흥기에 대한 베버의 주장이나 '아시아적 전제론'을 주장한 칼 비트포겔 같은 사람의 주장과 근접하게 된다. 그가 한 동안 비트포겔의 이론에 관심을 가졌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으나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식의 주장은 전통적인 유럽중심주의자들의 것으로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중국과학의 성취를 강조하면서도 한 편에서는 매우 강한 유럽중심주의를 표출하는 그의 진의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니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니덤 퍼즐>은 아직도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 있다. 실증적인 연구의 진전과 함께 관점의 문제도 점차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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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와 서광계(徐光啓, 1562~1633)

  결어 : 근대 유럽과학의 절대화는 피해야
 
  지금까지의 이야기로 17세기의 '과학혁명'이라는 개념에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또 과학혁명을 하나의 역사적 전기로 뚜렷하게 부각시키는 것이 서양 근대에 대한, 그리고 세계과학사에 대한 잘못된 상을 가져다 줄 수 있으리라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런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과학적, 합리적인 유럽과 비과학적, 비합리적인 비유럽세계의 잘못된 이분법에 의해 지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과학지식은 어느 한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부터 계속 자극을 받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한 것이다. 1605년에
프랜시스 베이컨은 화약과 나침반, 인쇄술이 유럽 근대 질서의 기초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사람은 그것들이 유럽에서 자체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중국에서 들어 온 것이다.
 
  그리스 과학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과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그것은 다시 이슬람 문화권에서 보존되고 발전되었다. 유럽은 12세기 이후에야 그것을 아랍문헌의 번역을 통해 뒤늦게 받아 들여 17세기 이후 새롭게 발전시킨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서양 근대과학은 오리엔트과학 - 그리스과학 - 아랍 · 이슬람과학 - 17세기 이후의 유럽과학이 융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전적으로 유럽인들의 창의성의 결과라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서양과학과 비서양과학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서양의 우월을 이야기하는 데는 그럴듯해 보이나 실제로는 별 의미가 없다. 그것이 서양인이 지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17세기 이후 유럽과학의 발전을 유럽인의 창의성 탓으로 돌린다면 중세 천년 동안의 불모 시기는 유럽인들의 비창의성에 돌릴 수밖에 없다.
 
  또 18세기까지만 해도 과학은 사회 발전에 본질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일부 사람들의 취미활동에 가까웠다. 산업혁명만 해도 기술이 이끈 것이지 과학이 이끈 것은 아니다. 과학과 기술이 결합한 것은 1830년대 이후이다. 그러니까 과학혁명 때문에 서양이 우월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럽 근대과학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17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발전하며 자연과 세계에 대한 이해의 폭을 크게 넓혀주었고 그리하여 현대 과학문명의 기초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아시아인들은 17세기 이후 유럽과학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유럽 근대과학이 인류의 소중한 유산의 하나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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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유럽 과학의 발전 ⑥
비유럽의 과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


고대 이집트 과학과 그리스 과학
 
  서양학자들은 유럽과학이 그리스의 전통을 이었으며 따라서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과학과는 별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오리엔트 지역의 과학은 실용적인 수준에 머물렀으므로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면에서 그리스 과학보다 한참 뒤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이 자연을 발견한 최초의 과학자이며 탈레스가 최초의 철학자-과학자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오리엔트 과학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그리스와 오리엔트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근대 헬레니즘적 사고의 영향이 아직도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과학도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은 독자적인 성취로 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시대에 와서 과학이 더 정교하게 발전한 것은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은 오리엔트의 영향, 특히 이집트의 영향을 배제하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또 오리엔트 과학은 서양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 있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인들이 이집트에 가서 과학을 배워왔다. 기원전 6세기의 자연철학자인 탈레스는 이집트에 가서 그 사제에게 철학을 배웠고 기하학을 들여왔다. 또 그는 피타고라스에게 이집트에 가서 멤피스와 테베의 사제에게 수학을 배우라고 강력하게 권고한 사람이다.
 
  기원전 5세기 천문학자인 오에노피데스나, 천체 운동을 최초로 수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으로 알려진 기원전 4세기의 에우도수스는 모두 이집트 사제들에게서 천문학을 배워 온 사람들이다. 히포크라테스의 의학도 아스클레피우스와 그 뱀에 대한 종교적 신앙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분명히 이집트적 기원이다.
 
  고전 그리스 시대의 과학의 중심지는 그리스 본토가 아니라 이집트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오니아 지역이다. 또 헬레니즘적 시대의 과학 중심지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였는데 그것은 이 시기의 과학에 이집트적 전통이 매우 강하게 작용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리스 본토의 과학수준이 높았더라면 멀리 떨어져 있는 알렉산드리아까지 그 중심지가 옮겨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집트 과학의 수준도 매우 높다. 수학만을 살펴보자. 수학에서는 산술학, 대수학, 기하학, 삼각법이 다 발전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산술학이었다. 서기(書記)는 호수를 파고, 경사면을 만들고, 오벨리스크를 옮기고, 거상을 세우고, 군대를 보급하는데 필요한 계산법을 배워야 했다.
 
  기원전 16세기의 린드 파피루스에 의하면 이집트인은 10진법 위에서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과 함께 분수를 사용했으며 원주율을 3.16으로 계산했다. 그리고 원통형 곡물저장고의 밑부분 반지름과 높이를 알 때 그 부피를 구하는 방법이나, 사각형안에 내접하는 원의 면적 구하기 같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 또 다른 파피루스에 의하면 윗부분을 잘라낸 피라미드의 부피를 계산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건축을 할 때의 길이 측정단위는 1밀리미터 수준의 정확성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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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린드 파피루스

  지금 남아 있는 수학 파피루스들은 실용적인 목적에 사용하는 교본과 같은 것이므로 그것을 통해 이집트 수학의 이론적인 측면을 잘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상당히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수준에 올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것을 단순히 실용적인 것만으로 폄하하는 것은 편견의 산물로 생각된다.
 
  이슬람 과학
 
  이슬람 과학은 과학사에서 매우 독자적이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이슬람 사회가 안정된 8세기 중반부터 그리스와 헬레니즘적 철학과 과학의 성과를 받아들이며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많은 그리스어 책들이 아랍어로 번역되었고 그 바탕 위에 인도의 천문학과 수학을 받아들이며 독창적인 수준으로 발전했다.
 
  스페인에서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지역에 따라 다르기는 하나 15, 16세기까지 활력을 유지한 곳도 있다. 기하학을 개선했고 대수학을 한층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관측에 큰 비중을 둔 천문학은 프톨레마이오스의 행성 이론 안에서 더 정교해졌다. 광학도 발전했고 아르키메데스의 전통을 이은 수학적 물리학도 발전했다. 연금술의 발전도 물질의 성질을 이해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약학, 의학도 마찬가지이다.
 
  이슬람 세계는 제도 면에서도 과학발전에 기여했다. 병원과 공공도서관, 마드라사라는 종교교육기관, 천문대가 그것이다. 도서관 가운데에는 수십만 권의 장서를 보유한 곳도 있었다. 유럽의 중세대학은 마드라사를 본 따서 만들어진 것이다.
 
  유럽 과학은 12, 13세기에 라틴어 번역을 통해 아랍어로 된 그리스, 헬레니즘적 과학과 이슬람 과학을 받아들이며 그 기초를 마련했다. 이는 15세기의 르네상스 인문주의 운동을 통해 더 확장되었다. 실제로 16, 17세기 유럽과학의 발전은 이슬람 과학 없이는 잘 설명하기 힘들다.
 
  뉴턴도 열심히 한 광학 연구는 이슬람 광학 연구의 전통을 잇는 것이고 연금술도 마찬가지이다. 11세기의 이슬람 약학자인 이븐 시나(라틴 이름은 아비켄나)는 16세기까지도 유럽의 의학이나 약학에서 권위를 유지하고 추앙을 받았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이탈리아의 해부학자 베살리우스도 '그리스인과 마찬가지로 아랍인도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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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학자 아비켄나

  천문학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코페르니쿠스와 이슬람 천문학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서양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유럽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주장하나 이는 미심쩍다. 14세기 다마스커스의 천문학자인 이븐 알-샤티르라는 사람의 책에서 나온 달의 운행 모델이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 나오는 그림과 똑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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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븐 알 샤티르와 코페르니쿠스의 달 운행 모델

  또 13세기의 알-투시가 행성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한 소위 '투시 커플' 그림과, 같은 문제를 다룬 코페르니쿠스의 그림도 거의 비슷하다. 코페르니쿠스는 이에 대해 이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있으나 표절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런 사실은 이미 1950년대에 밝혀졌는데 서양학자들은 아직도 이를 잘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유럽과학의 독자성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이슬람 과학은 16세기는 물론 17세기 초까지도 유럽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 시기에 오면 고대 그리스 고전들은 이미 낡았고 중세 유럽 지식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과거에 라틴어 번역에 의존하던 것과는 달리 아랍어를 배워 아랍어 원전을 직접 연구했다.
 
  16세기 말에 시리아의 한 고위 성직자가 이탈리아로 정치적 망명을 했는데 그는 많은 아랍책을 갖고 왔고 과학책도 꽤 섞여 있었다. 그가 가져온 책들 가운데 이슬람권에서 연구된 <유클리드 기하학> 등 상당한 숫자가 아랍어 판본 그대로 출판되었다. 많게는 3천부까지 찍어냈는데 사업이 수지를 맞출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에 그만큼 아랍 책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는 이야기이다.
 
  이슬람과학에 대한 연구는 아직 매우 부족하여 그 전모를 잘 알기 어렵다. 또 17세기 이후 이슬람 과학이 왜 쇠퇴하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종교와 과학의 마찰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그러면 그 전에는 왜 종교와 과학의 마찰이 없었는지 설명하기가 어렵다.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8-04-30 오후 4:04:56

근대 유럽 과학의 발전 ⑤
하비, 보일, 파라켈수스주의


베살리우스와 하비의 의학
 
  그러면 이제 이 시기에 근대적 과학을 처음 시작한 것으로 생각되는 몇 사람과 파라켈수스주의를 통해 이 시기의 과학이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한번 살펴보자.
 
  의학에서 과학적 기초를 놓은 사람은 이탈리아 파도바 대학의 해부학 교수였던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1514-64)이다. 그의 해부학 지식을 통해 고대 이후 지배적이었던 갈레노스의 생리학을 넘어설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밀한 인체 해부에 기초하여 1543년에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라는 책을 펴냈다. 화가의 도움을 빌린 이 해부도에는 골격, 근육, 핏줄들이 세밀하고 아름답게 그려져 있어 오늘날의 해부도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또 방대한 분량 속에 몸의 각 기관에 대해 상세하고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래서 그를 근대 해부학의 창시자라고 부른다. 더구나 이 책이 코페르니쿠스의 책과 같은 해에 나왔으므로 근대 과학으로의 발전에서 큰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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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살리우스의 해부도

  그러나 그는 갈레노스를 해부학과 생리학에 관한 한 고대의 가장 뛰어난 인물로 존중한 사람이다. 따라서 갈레노스의 체제와 이론을 여러 면에서 비판하고 오류를 수정했다고는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그것을 본받았다. 해부에서도 갈레노스의 논의를 따라 뼈에서 시작하여 근육, 혈관계, 신경계, 각종 장기로 나아가는 순서를 받아 들였다. 또 인체 각 기관에 대한 목적론적인 설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갈레노스는 몸의 각 기관은 자연이나 조물주에 의해 의도를 갖고, 즉 영혼이 명령하는 기능을 수행할 가장 좋은 도구로 설계되었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손에 동물의 발톱 같은 것이 없는 것은 조물주가 예술, 기예, 과학 같은 인간행위를 할 수 있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손가락이 5개이고 엄지손가락의 뼈가 다른 손가락과 달리 두개인 것도 다 손의 훌륭한 쓰임새를 위한 것이었다.
 
  베살리우스는 갈렌의 이런 주장을 좀 축약된 형태이기는 하나 그대로 받아 들였다. 이것은 몸의 다른 기관들의 설명에서도 대체로 마찬가지이다. 가슴에 있는 갈비뼈가 배에는 없는 이유는 만약 갈비뼈가 있으면 배가 늘어나지 못하므로 음식물을 많이 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계속 먹어야 하니 철학을 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럴듯하고 재미있는 발상이기는 하나 근대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영국 사람인
윌리엄 하비(1578-1657)는 파도바 대학에 유학하여 의학을 배웠다. 그 후 많은 해부를 통해 심장의 작동 원리를 알려고 애썼고 결국 심장을 펌프와 같은 것으로 이해했다. 또 팔을 끈으로 동여매면 핏줄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관찰하여 피의 흐름을 인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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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비의 혈액순환도

  그런데 심장은 계속 피를 분출시키므로 일정한 시간 안의 그 분출량은 사람 몸에 있는 전체 피의 양보다 훨씬 많아진다. 따라서 그는 피의 순환을 가정하지 않으면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고 믿었다. 1628년에 출판한 <심장의 운동에 대하여>가 그것을 논리화한 결과물이다.
 
  이렇게 그가 양적인 면에서 접근했고, 실험적 증거에 기초한 과학적 추리로 피의 순환 원리를 발견했으므로 근대 의학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된다. 또 심장을 기계로 보아 기계론적인 사고를 했다고 믿어지므로 과학혁명에 중요한 기여를 한 인물로 칭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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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

  그러나 그는 기계론적 사고를 한 인물은 아니다. 피의 순환이라는 개념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인 그가 그 우주론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원운동은 천상의 질서와 조화의 원리이다. 그는 사람 몸도 근본적으로 우주의 원리를 따른다고 생각했으므로 피의 순환을 우주의 순환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 순환이 동물의 몸에서 영원한 재생(再生)의 원리가 된다고 믿었다.
 
  하비가 도구((instrument)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그를 기계론적 인물로 오해하기도 하나 그의 도구 개념은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 나온 것이지 기계론적 철학에서 나온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실제로 우주가 수학적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고 믿는 기계 론적 철학자들과는 정반대 입장에 섰던 인물이다. 그에게 심장과 피까지 포함한 자연은 목적론적으로 작동하는 것이지 수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힘이나 기계적인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보일과 기계 철학
 
  뉴턴보다 연배는 많으나 동시대인인
로버트 보일(1627-1691)은 당시 잉글랜드의 가장 존경받는 자연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미립자(corpuscular)철학이라는 것을 구상해 냈다.
 
  물질은 더 이상 거의 나눌 수 없는 미립자(corpuscule)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들이 합쳐진 군집의 모양, 크기, 운동이 물질 대상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질과 변화를 만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을 밝히기 위해 그는 실험실에서 많은 화학적 실험을 했다.
 
  또 1658년에 공기 펌프를 발명했고 이 장치를 이용하여 공기의 탄성을 연구했다. 그리하여 같은 온도에서 기체의 부피는 거기에 가해지는 압력에 반비례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보일의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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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일의 공기 펌프

  이리하여 그는 활성이 없는 물질 입자의 운동에 의해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기계론적 철학으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대치하려 한 주된 인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데카르트나 삐에르 가상디, 베이컨과 함께 17세기 후반에 기계론적 철학을 발전시키는데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그는 매우 근대적인 과학자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일은 이렇게 산뜻하게 정리될 수 있는 간단한 인물은 아니다. 그는 약 1만4천 페이지를 헤아리는 방대한 유고를 남겼는데 아직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이 유고들을 보면 그가 진지한 신학자이자 수사학자이고 도덕가이며 또 연금술사였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최근의 연구는 그의 자연철학이 신학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고 있다는 것에 대체로 합의를 보고 있다. 그가 자연을 완전히 신의 신성한 의지에 예속시키는 중세 이래 기독교의 자발주의 신학의 전통 속에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물질 이론은 신이 어떻게 세계를 디자인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미립자에게 운동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신이기 때문이다. 신이 특별히 만든 미립자에게 각각 부여한 특수한 운동에 의해 그가 계획한 식물이나 동물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를 기계론적 철학자로 판단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연금술과의 관계도 간단하지 않다. 그와 연금술과의 관계는 지금까지 대체로 무시되어 왔으나 그것은 청년기의 일시적인 관심사가 아니라 평생 동안의 작업이었고 말년에 가서는 더 강화되었다. 실제로 금을 만드는데 관심이 많았고 그것을 위해 1650년대에 많은 실험을 거듭했다. 그래서 요사이에는 그의 미립자 철학마저도 연금술적 전통에서 온 것이거나 그것과 가까운 것으로 판단한다.
 
  파라켈수스주의와 의화학의 발전
 
  파라켈수스주의는 16세기 전반 사람인 파라켈수스(c.1493-1541)가 강한 영적, 신비적 요소를 가진 연금술에 기초하여 만든 영향력 있는 물질 이론이다. 점성술과도 결합한 이 연금술적 원리는 병의 치료를 위한 것으로 16, 17세기에 많은 추종자를 얻었고 의화학(醫化學) 의 기초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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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라켈수스(Philippus Aureolus Paracelsus, 1493~1541).

  그러나 보통 파라켈수스주의는 18세기 말에 원소설에 기초한 근대화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까지의 막간극 정도로 취급된다. 그것이 연금술에 많이 의존하고 있으므로 전근대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치가 평가 절하되고 있다.
 
  대부분이 의사들인 파라켈수스주의자들은 당대의 다른 철학자들과 달리 우주와 인간의 이해를 위해 의학, 연금술, 화학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대학의 아리스토텔레스-갈레노스적 전통에 저항했다. 또 진리의 인도자로 논리학이나 수학적 추상을 거부했다. 스콜라적 전통도 거부했으나 지식 추구의 종교적 성격은 강조했으며 헤르메스주의, 신플라톤주의 문헌들에 숨겨진 진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전통적인 4원소설을 거부했다. 성경 속에 불의 창조 이야기가 없으므로 그것이 원소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신 염, 황, 수은의 세 원리를 제시했다. 이는 화학자들에게 삼위일체와도 들어맞고 증류 과정에서 보이는 기체, 액체, 고체의 모습과도 맞는 것으로 보였다.
 
  이들은 소우주와 대우주에 대해 유추 접근했다. 대우주의 관찰을 통해 얻은 것을 인간에게 적용할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천둥과 번개는 공기 중에서 초석과 황이 반응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따라서 그 증기를 마시면 사람 몸을 태우는 질병이 생긴다고 믿었다.
 
  이들은 몸의 체액의 불균형으로 병이 생긴다는 갈레노스주의자들과 달리 이렇게 공기, 음식물을 통해 질병을 만드는 요소가 몸속에 들어와 기관을 손상시킨다고 생각했다. 몸에서 이 불순물들을 제거하지 못하면 질병이 생긴다고 믿었으므로 이들은 화학 요법에 많이 의존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의학에서 화학의 중요성이 점차 커졌고 그리하여 1618년에 나온 런던의 약전(藥典)에는 화학요법이 처음 수록되었다. 또 대학에서도 약학이나 생리학 부분에서 화학의 가치가 점점 커졌으므로 유럽 각 대학 의학부에는 16세기 말, 17세기 초부터 화학교수 자리가 생겼다. 발렌시아, 마부르크, 예나 대학이 그 시초이다.
  파라켈주의는 탄압을 받기도 했고 많은 반대에도 부딪쳤으나 그 지반을 넓혀갔고 17세기 말, 18세기 전반에 나온 많은 논문이나 책에서 그 영향을 볼 수 있다. 그 바탕 위에서 프리스틀리나 라부아지에 의해 화학혁명이 나타나는 것이다.
 
  파라켈주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히 고대적인 이론도, 근대적인 이론도 아니다. 그럼에도 파라켈주의자와 화학철학자들은 새 실험기구들, 새 화학물질들, 새 개념의 도입을 통해 화학의 발전에 나름으로 기여했다. 따라서 그 독자적 가치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근대 초 유럽 과학에서 과학적 요소와 비과학적 요소들을 함께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 시기의 과학자들은 단순하게 근대과학자로 처리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점성술, 연금술, 자연마법, 신학의 영향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기계론적 철학자들을 보통 무신론자로 보는 경향이 있으나 실제로 그런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이 신의 의지와 섭리를 부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들에게서 과학적 사고와 비과학적 사고는 단순한 병치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한데 얽혀서 유기적인 전체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서 근대과학적 측면만을 따로 떼어내 평가한다는 것은 얼마나 작위적이며 이 시기의 역사상을 왜곡시키는 일인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  Thinstall

Thinstall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비교적 손쉬운 방법으로 단일화된 포터블 프로그램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사용된 Thinstall 버전은 v3.104 입니다.
포터블 가이드에 사용되는 프로그램은 Ashampoo_Magicalsnap v2.10_kor 입니다.
가상의 컴퓨터 환경에서 작업 하기위해 PowerShadow Master 란 프로그램을 사용하였습니다.
전에는 Sandboxie 를 자주 사용 해왔는데 요즘은 귀차니즘 때문에 비교적 사용이 간단한 PowerShadow Master 를 자주 이용 한답니다.
Thinstall 프로그램으로 시스템 환경을 캡쳐 하기전에 모든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재워 둡니다.
또한 시스템 트레이의 상주 프로그램 또한 전부 재워 두어야겠죠.
가능한  시스템 환경이 비교적 깨끗한 상태에서 작업을 해야 에러율을 줄일수 있습니다.
레지스트리가 꼬여있고..시스템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작업을 하게되면 성공 확률이 지극히 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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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stall.v3.104 의 "Setup Capture" 를 클릭하여 프로그램을 시작 합니다.
Start 버튼을 클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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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환경을 스캔후 스냅샷 으로 저장하게될 드라이버 선택 창입니다. 
기본값 C:\드라이버에 체크가 되어있습니다.
효율적인 스캔을 위해 윈도우 시스템 파일이 있는 드라이버인 c:\에만 체크 합니다.
또한.. 레지스트리 스캔의 네모상자에 체크가 되어있습니다. 
눈도장만 찍고  "Pre-Install Scan" 버튼을 클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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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환경을 스냅샷으로 기록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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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을 스캔후 레지스트리에 문제가 있다며 경고창이 뜨는군요..-_-
아마도 고스트로 복원 하면서 제 계정에 문제가 좀 있는거 같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아닌거 같아서 무시하고 "Continue" 를 클릭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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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차적인 시스템의 스냅샷 작업이 완료 되었습니다.
위의 창을 그대로 둔채 포터블로 만들고자 하는 프로그램(Ashampoo Magical Snap 2.10)을 인스톨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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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hampoo Magical Snap 2.10.exe <- 설치 파일을 더블 클릭하여 설치를 진행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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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Ashampoo Magical Snap 2.10)의 설치가 진행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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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를 무사히 완료 합니다.
설치가 완료된후 프로그램의 키젠 또는 크랙을 이용하여 등록 등 필요한 절차를 진행해 줍니다.
등록 절차가 완료된후 프로그램을 실행하여 여러가지 설정을 해줍니다.
예를들어.. 프로그램을 시작할때 불 필요한 팝업창이 안뜨게 설정을 해준다던지..
프로그램의 옵션에서 필요한 세팅을 마무리 해준뒤 프로그램의 실행과 종료를 몇번 반복 해보면서 이상유무 를 체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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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팅 작업 완료후 프로그램이 설치된 디렉터리를 찾아갑니다.
설치된 디렉터리에서 불 필요한 파일을 찾아 삭제를 해줍니다.
위의 그림은 Ashampoo Magical Snap 2.. 가 설치 폴더의 readme 파일 입니다.
readme 파일이 많은것은 각 나라의 언어별로 readme 파일이 있어서 입니다.
여하튼 readme 파일을 전부( unins000.exe, unins000.dat 포함) 삭제를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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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license 파일도 삭제를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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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파일이 들어있는 "lang" 폴더를 연뒤 영문 언어 파일과 한글 언어 파일을 제외한 나머지 파일은 전부 삭제를 해줍니다.
필요할 경우 영문 파일도 삭제를 해줘도 무방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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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영문 파일과 한글 파일만 위의 그림처럼 남겨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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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p(도움말) 폴더도 삭제를 해주면 됩니다.
영어와 독어로 된 도움말 파일 이어서 필요 없을거 같아서 삭제를 했습니다.
이제 디렉터리 정리 작업은 어느정도 마무리 된거 같네요.
지금까지 작업 내용은 Thinstall 의 Captures 디렉터리의 Ashampoo Magical Snap 2 에 그대로 반영이 됩니다.
앞에서.. 종료 되지않고 외롭게 기다리고 있을 Setup Capture 에게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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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그램이 설치된후의 시스템 환경을 캡쳐하기 위해 Setup Capture 창의  "Post-Install Scan" 버튼을 클릭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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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된 시스템의 환경을 스캔 하기 시작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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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와 같이 경고를 뱉어 내는군요..
무시하고 Continue 버튼을 클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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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작업이 완료 되었으며.. 작업 결과물을 저장할 디렉터리의 경로를 보여 줍니다.
Save Results 를 클릭하여 저장을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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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이 완료 되었군요.
Quit 버튼을 클릭하여 Setup Capture 창을 종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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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앞에서 저장한 작업 결과물이 있는 디렉터리를 찾아갑니다.
Thinstall 이 설치된 경로->Captures의 하위 디렉터리에 프로젝트 제목 으로 생성 되어 있습니다.
위의 그림처럼 Ashampoo Magical Snap 2.10 디렉터리 내의 불필요한 폴더는 삭제를 해줍니다.
위에서 체크한 빨간색 네모상자의 폴더 내용물은 거의 바로가기 아이콘 파일들이기 때문에 삭제를 해줘도 됩니다.
경우에 따라서 %Personal%  디렉터리를 삭제하면 안되는경우가 있습니다.
삭제하기전에 각 폴더를 열어서 중요한 파일이 없는지 확인을 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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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은 %Common Programs% 디렉터리를 열어본 모습 입니다.
별 중요한 파일이 보지않죠..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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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스트리 정보가 담겨있는 "HKEY_LOCAL_MACHINE.txt" 파일을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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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정보와 Uninstall 정보가 담겨있는 부분은 삭제를 해줍니다.
또한 시스템 트레이에서 종료시킨 프로그램이 제대로 종료가  되지않고 프로세스에 남아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 프로세스의 정보가 레지스트리에 기록되는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바이러스 프로그램의 업데이트 정보가 있는경우도 있으므로 자세하게 훓어보시고 삭제를 해주면 됩니다.HKEY_CURRENT_USER.txt 파일 또한 열어본뒤 살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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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ckage.ini 파일을 실행 합니다.
본 글의 앞 부분에서 unins000.exe 파일을 삭제를 했습니다만.
이해를 돕기위해 unins000.exe 파일을 삭제하지 않은채 Ashampoo 의 스냅샷을 한번더 찍은 그림 입니다.
앞에서 설명한대로 unins000.exe 파일을 삭제를 하였다면 위의 그림처럼 Package.ini 파일에 Unins000.exe 의 정보가 나타나지 않겠죠..
여하튼 Package.ini 파일의 실행파일 소스 부분을 수정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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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같이 수정, 삭제를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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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같이 수정 해줍니다.
이미지 설명이 잘못되었네요.
위 그림의 두번째 Merged 로 수정 부분 에서  writeCopy 를 Merged 로 수정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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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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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완료된 모습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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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stall 로 컴파일된 실행 파일을 실행 하였을때 설정 파일의 생성 경로는 아래와 같습니다.
C:\Documents and Settings\USERNAME\Application Data\Thinstall\Sandbox\Ashampoo Magical Snap 2
 위의 경로에 생성 되는 디렉터리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을경우
Thinstall 설치된 디렉터리->Captures->Ashampoo Magical Snap 2 를 사용자가 원하는대로 바꿔준 뒤
Package.ini 파일에서 수정 해주면 됩니다.
example=>Ashampoo Magical Snap 2 HongDol DpongDol 로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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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렉터리명을 바꿔준뒤 Package.ini 에서 그림처럼 수정 해주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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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작업이 완료 되었으면 포터블 파일로의 출력을 위하여 build.bat 파일을 실행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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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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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작업이 완료 되었네요..

생성된 Bin 폴더의 단일 파일에 마지막으로 패치를 적용 해주면 포터블이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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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에서 설명한대로 Ashampoo Magical Snap 2 의 폴더명을 HongDol DpongDol 로 바꿨습니다.
C:\Documents and Settings\USERNAME\Application Data\Thinstall\Sandbox\HongDol DpongDol
폴더와 설정 파일이 생성이 됩니다.
위의 경로에 설정 파일이 생성이 되는게 싫으신 분들은 Thinstall 로 컴파일된 실행 파일옆에
위의 그림처럼 HongDol DpongDol 이라는 폴더를 만들어 놓으면 설정 파일이 이곳(HongDol DpongDol)에 담겨지게 되겠죠.
이미지가 많이 사용된 관계로 페이지의 로딩이 늦어지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보아 주셨으면 합니다.
참고로 ..
개인적으로는 Thinstall 3.049 (설치버전) , Thinstall 3.104(포터블) 두개의 프로그램을 병행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Thinstall 3.104 버전 으로 컴파일된 프로그램은 실행,종료후 종료가 제대로 되지않고 프로세스에 남아있는 경우가
종종 있더군요..그래서 두개의 버전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습니다(참고하시길)
 Thinstall 은 비교적 사용법이 간단합니다.
허나 시스템 환경에 따른 에러율 또한 높은 편이기도 합니다.
단일 파일로 생성이 되기때문에 업데이트가 어려운 단점도 있고요.
업데이트된 파일로 다시 작업을 해줘도 다른 방법으로 포터블화 하는것 보다는 쉬워 보입니다.

■  VMware ThinApp - 포터블 프로그램 만들기

 

우선 이 프로그램에서 권장하는 환경은 클린 상태의 PC입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클린 PC란 OS 외에는 아무것도 설치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야 다른 PC에서 실행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줄일 수 있겠지요.
기본적인 개념은 프로그램을 설치하기 전의 환경을 캡쳐한 다음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변경된 사항을 추적해서 포터블 파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윈도우 레지스트리에 등록하는건 아니고 따로 설정파일을 만들어서 보관하기 때문에 윈도우 레지스트리는 깔끔하게 남는 것 같습니다. 혹시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면 댓글로 지적해주세요. 오늘 처음 써보는 프로그램인지라 ;;;
여기서는 네이버폰 설치를 예로 들어 그냥 Next 신공으로 진행해보겠습니다.

 첫번째 화면은 그냥 가볍게 Next

 여기서는 클린 PC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냥 제가 위에서 설명드린 그 내용입니다. Next 누르시면 현재의 레지스트리 설정을 캡쳐하기 시작합니다.

 앞선 과정에서 레지스트리 캡쳐가 끝났다면 이 화면이 나올텐데요, 이 창을 잠시 내려놓고 만들기 원하는 포터블 프로그램을 설치합니다. 설치를 마치시면 다시 이 화면으로 돌아와서 Next를 누릅니다. 그러면 설치후 상태를 설치전 상태와 비교하는 작업에 들어갑니다. 

 저는 네이버폰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이렇게 나오는데 솔직히 이 부분은 뭔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냥 만들고자 하는 메인 프로그램 한개만 선택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언인스톨이나 다른건 전부 무시하시고... 메인 프로그램만 선택해서 Next 눌러주세요.  

 사용권한 같은건 그냥 기본값 그대로 모든 유저들에게 허용하면 될 것 같고
 아래쪽 샌드박스 위치는 아까 말씀드린대로 설정을 저장하는 곳인데 저는 그냥 기본 상태로 했습니다. 혹시 나중에 설정을 초기화 시키고 싶으시면 저 샌드박스 부분에 찾아가서 해당 프로그램의 설정파일을 지워주시면 됩니다.
예를 들어 저는 현재 XP에서 포터블 네이버폰을 실행했는데
C:\Documents and Settings\Administrator\Application Data\Thinstall\네이버폰
위 폴더에 설정 파일이 생성됩니다.
만약에 두번째 USB flash / portable media 선택하시면 포터블 프로그램이 실행되는 위치에 임시폴더도 같이 생성됩니다.  

  여기는 검천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MS 오피스 같은건 첫번째 방식으로 하시면 될 것 같고 나머지는 웬만하면 두번째 방식으로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작업을 저장할 폴더를 지정해주는 것인데 저는 그냥 기본값으로 넘겼습니다. 바탕화면에 하시는게 편하시면 바탕화면에 폴더 만들어서 지정하셔도 되구요.
아래쪽은 웬지 압축하면 용량이 줄어들 것 같아서 Fast compression 선택하고 Next 

 여기서 Build Now 누르시면 바로 컴파일 들어갑니다. 그런데 빌딩하기 전에 Browse Project 누르시면 아까 지정하신 작업폴더가 나오는데요 거기 보시면 Package.ini 파일이 있습니다. 이 파일을 수정하시면 좀 더 고급 옵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RemoveSandboxOnExit=1
부분에서 앞에 세미콜론을 삭제해서 저 옵션을 활성화시켜 주신다면 매번 포터블 프로그램을 실행할 때 마다 설정이 초기화 되는 방식으로 만들어 지게 됩니다. 설정이 저장되지 않고 매번 초기화된다면 오히려 불편할 수도 있으니 잘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Build Now 를 누르시면 최종 목표인 exe 파일이 만들어집니다. 잘 만들어졌는지 확인해보려면 우선 네이버폰을 제거하신 다음에 만들어진 포터블 프로그램을 실행해봐야겠지요. 실행파일은 작업 폴더 안에 BIN 폴더에 있습니다. 

 (추가1)
으뜸회오리님의 한글패치 & 노 팝업 버전 올려드립니다.
사용자 계정이 한글 이름이거나 이 프로그램 경로에 한글이 있으면 안 된답니다. (예를 들어 바탕 화면)

 

 
(추가2)

포터블 프로그램에 대해서 보다 많은 정보는 이 곳을 참조하시라네요.

http://usboffice.kr/zbxe/

출처 -


동영상을 녹화할 수 있는 캠타시아의 사용 방법에 대해서는 “동영상 녹화 방법 : 캠타시아 레코더” 글에서 다룬 바 있다. 다만 해당 글은 당시의 버전이었던 4.0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새로 출시된 5.0 이후의 버전에서는 사용 방법이 좀 더 쉽게 변경되었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참고적으로 저작권법(법률 제8101호) 제30조에 의하면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아니하고 개인적으로 이용”할 경우 복제를 허용하고 있다. (최종 수정 : 2007.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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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타시아의 경우 유료 제품이기는 하지만 30일 간 무료로 체험판을 사용할 수 있다. 제작사 사이트에서는 영문 버전을 비롯하여 한글판도 제공하고 있다. 영문판의 판매 가격은 현재 299$이다. 최신 버전의 경우 윈도우 비스타를 지원한다.

http://www.techsmith.com/camtasia.asp (캠타시아)
http://www.techsmith.com/download/camtasiatrial.asp (다운로드)
http://download.techsmith.com/camtasiastudio/kor/500/camtasiako.msi (한국어 버전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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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설치를 완료한 후에는 캠타시아 스튜디오(Camtasia Studio)를 실행하여 화면 녹화를 선택하거나 또는 바로 캠타시아 레코더(Camtasia Recoder)를 실행해도 된다. 캠타시아 레코더를 처음 실행하게 되면 안내창이 팝업되는데, 사용방법을 비디오(영어)로 제공한다고 안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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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캠타시아 레코더 옵션 설정 방법 :


1. 캠타시아 레코더를 실행한 후에는 바로 녹화를 해도 될 정도이다. 그러나 좀 더 자신에 맞는 녹화를 하기 위해서는 설정을 해 줄 필요가 있다. 즉 “[도구] → [옵션]” 메뉴에서 조정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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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옵션 메뉴의 [캡쳐] 탭에서는 "avi로 저장하기"를 선택한다. “파일이름 옵션 설정”은 그냥 두어도 무방하지만 파일 이름이 자동으로 지정되도록 하고 저장 폴더를 원하는 곳으로 선택하면 편리하다. 미지정시 기본 저장 폴더는 “C:\Documents and Settings\자신의 계정\My Documents\Camtasia Studio\”이고 녹화시마다 저장할 파일 이름을 묻게 된다. 그리고 “녹화 중 디스플레이 가속 사용하지 않음”은 체크할 것이 권장된다. 다만 일부 컴퓨터에서는 체크하여 녹화할 경우 검은 화면이 나오는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이는 컴퓨터 사양 문제이므로 체크 해제 혹은 하드웨어 가속 항목을 조정할 필요가 생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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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비디오] 탭에서는 자동이 아닌 “직접”을 반드시 선택하고 화면 녹화 코덱(비디오 코덱)을 원하는 것으로 선택하도록 한다. 이는 기본 설정인 TechSmith Screen Capture Codec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다른 코덱(별도 설치 필요)인 XviD MPEG-4 Codec이나 Microsoft Windows Media Video 9 코덱 등을 사용할 경우에는 활용 가능성이 높아진다. 즉 인터넷에 업로드하거나 버추얼덥(VirtualDub) 등의 편집 프로그램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다. 프레임의 경우 높게 설정할수록 화질이 좋아진다. 고화질을 원한다면 30 프레임으로 설정하기 바란다. 그러나 녹화대상이 이미 저화질인 경우에 프레임을 높여도 무용지물이므로 기본인 5 혹은 15 프레임(보통) 정도로 낮추는 것이 현명하다.
참고적으로 코덱의 경우 캠타시아만 설치한 상태에서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아래 그림의 예제는 통합코덱팩을 설치한 상태이기 때문에 다양한 코덱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코덱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직접 필요한 코덱만 설치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잘 모를 경우에는 통합코덱팩의 설치를 고려해 보기 바란다.

* 통합코덱(K-Lite) 완벽 설치 방법 : http://blog.naver.com/hahaj1/20042942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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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오디오] 탭에서는 사용하는 오디오 장치에 따라 설정을 해주면 된다. 오디오 유형은 오디오 코덱과 오디오 품질을 선택하는 것인데 기본적으로 내장된 캠타시아 코덱(MPEG Layer-3 TechSmith LAME)을 사용하거나 또는 다른 “MPEG Layer-3” 코덱을 선택하면 무난하다. 오디오 설정 마법사는 볼륨의 크기를 조정(녹화 대상을 재생토록 할 것)하거나 또는 다른 문제 해결 등의 경우에 필요하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그림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런데 아래 (3)의 오디오 설정 마법사는 캠타시아 레코더의 메인 화면에 있는 "오디오 옵션을 클릭해서 설정해도 된다. 물론 이 설정을 할 때에는 실제로 녹화 대상을 재생하면서 설정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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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나머지 [카메라], [단축키], [프로그램] 등은 자신의 상황에 맞게 설정하면 된다. 예를들면 [프로그램] 탭에서는 녹화 후의 옵션을 선택할 수 있는데, 녹화 후 안내 창이 귀찮을 경우 이 부분에서 체크를 해제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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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캠타시아 레코더의 효과 메뉴 [커서]에서는 커서를 숨기거나 강조하는 등의 여러 효과를 선택할 수 있다. 또한 [사운드] 설정도 가능하다. 강좌 등을 직접 제작할 경우에 유용한 옵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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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캠타시아 레코더 녹화 방법 :

캠타시아의 옵션 설정을 완료했다면 “녹화 영역 선택” 버튼을 클릭하여 시작하면 된다. 즉 녹화는 영역 선택 후 녹화를 진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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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예제에서는 캠타시아 제작사 사이트에 있는 비디오를 녹화해 보기로 하겠다. 영역 선택 방법은 마우스로 활성화된 창을 선택하거나 또는 마우스로 끌어서 크기 조절 및 이동(가운데 부분 클릭 후 끌어놓기)을 하면 된다. 이미 설정된 기본 크기는 녹화 창의 “크기 조정”을 선택하면 된다. “프로그램 크기로 조정” 옵션은 특정 창 전체 혹은 컴퓨터 화면 전체를 녹화하고자 할 때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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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화할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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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화 영역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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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화중


이와 같이 영역 선택 후 녹화 버튼을 누르면 바로 진행이 된다. 녹화 영역 문제나 오디오 설정 등의 문제는 여러차례 연습을 해보면 익숙해질 것이다. 그리고 아래의 그림은 도구 메뉴의 옵션 설정 중 [프로그램] 항목에서 체크가 되어 있을 경우 기본적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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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화 후 편집하기를 선택할 경우 “캠타시아 스튜디오”에서 편집이 가능하다. 물론 다른 편집 프로그램을 사용해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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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옵션 설정의 [캡쳐] 탭에서 “파일이름 옵션 설정”을 별도의 폴더 및 파일 이름을 자동으로 지정했을 경우에는 녹화 완료 후에도 위와 같은 별도의 알림 사항이 없으므로 직접 찾아보면 된다.

 

▣ 캠타시아 오디오 비활성화 문제 해결 방법 :

캠타시아 사용시 오디오 문제는 다양한 원인이 있다. 만약 캠타시아의 볼륨 설정 과정 중에서 해당 항목이 비활성화되는 문제(음소거가 자동으로 선택되는 문제)가 발생한다면 다음과 같이 해결할 수 있다. 즉 볼륨 설정의 녹음 컨트롤 창을 열어둔 상태에서 캠타시아에서 설정을 진행하고, 이후 비활성화되는 부분을 타이밍을 잘 맞추어 음소거가 체크된 부분을 해제해 주면 된다. 아래 그림은 예제에 불과하며 사용자마다 환경이 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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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캠타시아 녹화 예제 :


본문에서 언급한 캠타시아 제작사 사이트의 안내 비디오(원본 보기)를 녹화한 예제이다. 녹화한 원본을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네이버 비디오로 업로드한 결과이다.

 

* 비디오 코덱 : Microsoft Windows Media Video 9
* 오디오 코덱 : 캠타시아 기본 설정 사용 (MPEG Layer-3 TechSmith LAME)

* 녹화된 영역 : 900x496 픽셀 (원본)

* 네이버 영상 : 아래처럼 네이버 비디오에 업로드한 내용은 원본보다 축소.

 

 

이상과 같이 캠타시아 레코더 사용 방법에 대해 알아보았다. 추가적인 사항은 기존의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끝으로 이 글은 오류가 있을 수도 있으며 본 작성자는 책임지지 않으므로 착오없기 바란다.(끝)

 

※ 관련글 : 캠타시아 프로세스를 강제 종료시키는 사이트에서 동영상 녹화하는 방법

※ 관련글 : 동영상 녹화 방법 : 캠타시아 레코더(4.0 기준)


 

(작성 : http://blog.naver.com/hahaj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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