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오마이뉴스 정윤수 http://blog.ohmynews.com/booking/
지난 2004년의 오늘, 12월 1일, 미국 보스턴 시는 무려 329년 동안 유지되어온 '악법'을 폐지하였다. 그 '악법'은 사실상 오래 전에 사문화 되긴 하였으나 법 조문으로는 329년이나 유지되어왔기 때문에 이를 폐지하는 것은, 작지만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다름 아닌, 인디언의 보스턴 시내 출입 제한 조치법이 바로 그 '악법'이었다. 그해 11월 25일 보스턴의 토머스 메니노 시장은 1675년 영국이 아메리카 대륙의 북동부 지역을 지배했을 무렵에 제정된 ‘인디언 수감법’에 관한 폐지 청원을 의회에 넘겼고 의회는 다음 달 1일, 즉 2004년의 오늘에 그 청원을 심의하여 통과시켰다. 이를 미트 롬니 매사추세츠 주지사가 최종적으로 서명함으로써 공식 폐지된 것이다.
비극적인 역사의 그 서막은 상당히 조화로운 나눔의 세계였다. 1620년 뉴잉글랜드 플리머스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당시 북미 인디언들의 협조를 받아 간신히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다. 이 무렵의 가을에 인디언과 백인은 추수한 음식을 서로 나눠먹었다. 오늘날 미국 사람들이 한 해의 축복으로 여겨 잠시나마 한 마음이 되어 서로를 돌아보는 추수감사절이 이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인디언들은 간신히 정착한 청교도 백인을 토지 경작법을 가르쳐주었고 야생 칠면조를 잡아서 나눠먹었다. '바닷물이 거슬러 올라오는 강의 옆'이라는 코네티컷이나 '거대한 산의 땅'이라는 뜻의 매사추세츠도 인디언이 오래 불러온 지명이었다. 참고로 오하이오(거대한 강), 일리노이(우월한 종족 또는 완전한 인간), 켄터키(내일의 땅), 미시시피(물의 아버지), 앨라배마(덤불 청소하는 사람), 미시간(거대한 호수) 미네소타(하늘빛 물), 와이오밍(산과 계곡이 만나는 곳), 애리조나(작은 봄) 등이 모두 인디언의 지명으로 유래한 것이다. 이같은 주의 명칭뿐만 아니라 도시들 이름 역시 인디언의 오랜 명명을 잇고 있다.
하지만 백인은 북미 인디언의 거점을 강제로 빼앗기 시작하였고 이에 인디언들이 강력하게 저항함에 따라 대규모 충돌이 각지에서 벌어졌다. 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등 미 대륙의 동부 해안 지역은 유혈 사태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백인들은 동부의 가장 중요한 거점 도시인 보스턴에 한하여 허가 받지 않은 인디언은 절대 들어올 수 없다는 법을 제정했다. 필요한 용무가 있더라도 이를 백인이 사전에 검사하도록 하였고 그 검사를 통과하였어도 반드시 무장 군이 2명의 감시 속에 시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한동안 이 법이 강력한 통제 기능을 발휘하였으나 영국과의 독립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고 곧 내부 정지 작업이 진행되면서 사문화되었다. 인디언이 백인이 설정해놓은 '보호구역'으로 들어가서 살게 되고 남북 전쟁도 마무리되는 19세기 중엽 이후의 일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인디언들이 비교적 '더 많은' 자유를 획득하게 되면서 사실상 효력이 상실되었으나 폐지 청원과 이에 대한 의회의 결정 그리고 주지사의 서명이라는 절차를 밟지 않아서 329년 동안이나 '유지'되어왔던 것이다. 그것이 지난 2004년의 오늘, 12월 1일에 와서야 폐지되었다.
이런 기록을 살펴볼 때마다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1850년대 시애틀 추장이다. 격월간 <녹색평론>이 오래 전에 번역 소개함으로써 이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뜨거운 호소를 기억하게 된 '시애틀 추장의 연설'의 주인공이 그 사람이다. 이 연설문은 언어 영역이나 논술 시험 교재에도 많이 실리게 되어 지난 몇 해 동안 대입 공부를 했던 학생들은 많이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앞서 지명 유래를 언급했지만, 미국 서부 지역의 맨 위에 위치한 워싱턴 주의 주도가 되는 시애틀 시가 바로 이 추장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워싱턴주 시애틀시에 있는 시애틀 추장 기념비. 1855년, 당시 이 북서부의 두아미쉬와 수쿠아미쉬 지역에 살았던 부족의 추장 시애틀은, 제 14대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피어스 행정부가 내린 인디언 보호구역으로의 강제 소개 명령에 대한 답변으로, 한 문장씩 입으로 소리 내어 읽을 만한, 감동적인 연설을 하게 된다.
그 일부를 아래에 요약하여 적거니와, 혹시 이 연설문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인터넷 클릭 한두 번으로 전문을 찾아볼 수 있으니 꼭 한번 음미해보기를 권한다. 매우 순진한 생각이지만 만약 역사가 시애틀 추장의 숭고한 뜻대로 진행되었더라면, 인류가 지금 보다는 좀 더 소박하면서도 느긋하게, 추석이나 추수감사절 같은 대지의 풍요를 진정으로 감사해하면서, 인간적 품위와 신뢰를 유지하면서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반면에 오늘날 생태의 위기를 포함하여 여러 비극적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시애틀 추장의 연설이 지나치게 감상적이어서 긴급한 사태에 대해 온정적인 인내에 머무를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도 없지 않다. 물질문명의 구조적인 진행 과정을 '선한 마음'으로 판별하기 곤란한 부분이 많다는 지적도 있다.
이 연설문의 '진위'에 관한 말도 없지 않다. 1855년, 피어스 행정부가 무참히 패배한 인디언 연맹 회의를 향해 '땅을 사겠다'는 제안을 하게 되는데, 이는 곧 그 땅을 내놓고 백인이 지정한 '보호구역'으로 강제 유배시키겠다는 명령이었다. 이에 북서부의 지도자 시애틀 추장은 자신들의 언어로 길게 답변을 했고 이를 절친한 친구였던 헨리 스미스라는 백인이 기록을 했다. 이 기록이 오랜 세월에 걸쳐 가감되는 바람에 원래의 연설 내용이 무엇이냐에 관한 논란이 없지 않았다.
시애틀 추장이 다스렸던 시애틀 시 수쿠아미쉬 지역의 오늘 모습. 국내에서는 김종철 선생이 <녹색평론>을 통하여 처음 소개하였고 이후에 W.C.밴더워스가 편집한 <인디언 추장 연설문>이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는 시애틀 추장을 포함하여 36명의 추장의 연설문 49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들의 사진, 이름, 출신 부족, 이력, 생몰년도, 연설 당시의 상황 등이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평화를
원하지만 어쩔 수 없이 창을 들어야 하는 비통한 마음을 담은 어느 추장의 회상도 기억할 만하다. 이 책 속에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도 수록되어 있는데, 잘 알려진 <녹색평론>의 글과 몇 대목에서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은 틀은 그리 다르지 않다.
아무튼 오늘의 관점에서 시애틀 추장의 연설을 음미해 보면, 그가 비록 과학기술의 발달 과정이나 도시의 팽창에 따른 환경 위기에 대해 논리적인 전망을 내놓은 것은 아니지만, 오래 전승되어온 인디언 특유의 직관과 자연으로부터 터득한 깊이 있는 성찰로 20세기의 재앙적인 사태를 선명하게 예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그의 연설은, 그의 시대보다 훨씬 더 '발달'한 듯한 오늘의 지점에서 과학기술주의의 맹점이나 인간이 자연에 대하여 어떤 견실한 태도를 가져야할 것인가 하는 인식과 실천의 한 지점을 분명하게 가르쳐준다.
위에 언급한 <인디언 추장 연설문>에 보면, 인디언 부족은 투쟁의 절실한 수단으로 연설이라는 무기를 택한다고 한다. 이를 위하여 추장은 오래 사색하고 언어를 가다듬는다. 아래에 그 연설문의 주요 대목을 옮겨 적거니와, 그 비애의 역사성과 연민의 시적 경지까지 살핀, 김종철 선생의 번역에 따른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는 신성한 것들이다."
시애틀 추장이 다스렸던 수쿠아미쉬 지역의 호수 풍경. "백인의 도시에는 조용한 곳이 없다. 봄 잎새 날리는 소리나 벌레들의 날개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곳이 없다. 홍인(인디언)이 미개하고 무지하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도시의 소음은 귀를 모욕하는 것만 같다. 쏙독새의 외로운 울음소리나 한밤중 못가에서 들리는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면 삶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나는 홍인이라서 이해할 수가 없다. 인디언은 연못 위를 쏜살같이 달려가는 부드러운 바람소리와 한낮의 비에 씻긴 바람이 머금은 소나무 내음을 사랑한다. 만물이 숨결을 나누고 있으므로 공기는 홍인에게 소중한 것이다."
수전 제퍼스 'Brother Eagle, Sister Sky'. "하느님은 인간의 하느님이며 그의 자비로움은 홍인에게나 백인에게나 꼭같은 것이다. 이 땅은 하느님에게 소중한 것이므로 땅을 해치는 것은 그 창조주에 대한 모욕이다. 백인들도 마찬가지로 사라져 갈 것이다. 어쩌면 다른 종족보다 더 빨리 사라질지 모른다. 계속해서 그대들의 잠자리를 더럽힌다면 어느 날 밤 그대들은 쓰레기더미 속에서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그가(인디언 전사) 다만 초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구름의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기억될 때라도, 기슭과 숲들은 여전히 내 백성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새로 태어난 아이가 어머니의 심장의 고동을 사랑하듯이 그들이 이 땅을 사랑해 달라.
그러므로 우리가 땅을 팔더라도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 달라. 우리가 돌본 것처럼 이 땅을 돌보아 달라. 당신들이 이 땅을 차지하게 될 때 이 땅의 기억을 지금처럼 마음속에 간직해 달라. 온 힘을 다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그대들의 아이들을 위해 이 땅을 지키고 사랑해 달라.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이."
아이들과 함께 듣는 추장의 목소리
시애틀 추장 | 수잔 제퍼스 그림 | 최권행 옮김 | 한마당
본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시애틀 추장의 연설은 <녹색평론선집 1>
이나 <인디언 추장 연설문> 같은 단행본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이를 살피면 된다. 미 대륙의 슬픈 역사에서 반드시 기억하고 또한 음미해야할 일들을 글과 그림으로 작업해 온 수잔 제퍼스의 이 책은 아이들과 함께 추장의 연설을 듣는 기회가 될 것이다. 추장의 연설에 따라 수잔 제퍼스의 그림이 흐른다. 수잔 제퍼스는 말한다. "인디언들에게는 삼라만상과 이 대지의 모든 것이 다 성스러웠습니다. 자연과 자연의 경이로움을 파괴하는 것은 그들에게 생명 그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아무도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들의 말을 어느 곳에서건 생각해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말이 사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너무 늦기 전에,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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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디언 전사의 이야기
히어와서의 노래 | 수전 제퍼스 글 그림 | 부수영 옮김 | 보림
북미 인디언 영웅 히어와서의 이야기다. 시인 롱펠로우의 서사시를 바탕으로 수전 제퍼스가 그린 것이다. 위의 '수잔'과 이 책의 '수전'은 같은 사람이다. 출판사마다 표기 방식이 다를 뿐이다. 위의 책과 달리 이 책에서는 수전 제퍼스가 맑은 채색의 펜화를 보여준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할머니 밑에서 자란 소년 히어와서. 그는 할머니로부터 들판과 호수와 하늘과 땅의 짐승들을 배우고 익히며 인디언 지도자가 된다. 그들은 무지개를 땅에서 시든 꽃이 하늘에서 다시 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책에서 읽은, 신영복 선생의 이야기. 인디언들은 한창 말을 몰고 달리다가 문득 가만히 서서 뭔가를 기다린다고 한다. 그들이 기다린 것은 그들의 영혼. 너무 빨리 달리는 바람에 혹시 영혼이 뒤처지지 않을까 하여 잠시 멈춰서서 기다린다고 한다. 이 책 역시 아이들과 함께 읽으면서, 도리어 뭔가 느끼게 되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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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얘기는 아니지만......
희망을 닮은 아이 엘리야 | 크리스토퍼 폴 커티스 지음 | 김율희 옮김 | 키즈조선
미국의 백인들이 북미 인디언과 서아프리카 흑인들에게 끔찍한 죄를 저질렀다. 그들이 저지른 죄는 저 고대 노예제 시대에 속할 만한 만행이었다. 그들은 제 땅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던 인디언들을 '자기 땅에서 유배'시켜 버리고 보호 구역 안에 몰아넣었다. 자유를 찾아 신천지로 온 백인들이 말이다. 또한 그들은 서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대거 끌고 와서 노예로 부렸다. 근대가 선물한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넌 백인들이 말이다. 이 책은 그 잔혹한 역사를 지극히 인간적인 유머로 돌아본다. 역시 아이들과 함께 읽으면서 '자유'의 가치를 되새겨보는 책이다. 아, 그리고 조금 다른 맥락에서, 참혹한 고통의 연대를 독특한 감성의 유머로 접근해 나가는 방법도 흥미로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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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추장 시애틀의 연설문
수꾸아미(Suquami)의 추장, 시애틀(Seattle)
* 미국정부가 독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공개한 이 편지는 지금의 와싱턴 주에 살던 수꾸아미 족의 추장 '시애틀'씨가 1855년 플랭클린 피어슨 대통령에게 보낸 것이다.
* 와싱턴 주의 도시 '시애틀'은 자연과 자유로운 삶을 사랑했던 그와 인디언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배경-1885년 미국의 14대 대통령인 프랭클린 피어스는 지금의 워싱턴주에 살던 북미 인디언 수와 미족의 추장 시애틀 씨에게 그의 땅을 정부에 팔아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 시애틀 추장이 피어스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답신하였고 미국정부는 독립2백주년을 기념하여 그 내용을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내용이다.
신세계에 보내는 메시지
워싱턴에 있는 위대한 지도자가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요청을 해 왔습니다. 그 위대한 지도자는 또한 우정과 친선의 말들을 우리에게 보내왔습니다. 이것은 매우 고마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답례로서 우리의 우정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우리는 당신의 제의를 고려해 보겠습니다. 그 까닭은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백인들이 총을 가지고 와서 우리의 땅을 빼앗아 갈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당신은 하늘을 땅의 체온을 사고 팔 수가 있습니까. 그러한 생각은 우리에게는 매우 생소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신선한 공기가 반짝이는 물을 소유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이 그것을 우리한테서 살 수 있겠습니까 이 땅의 구석구석은 우리 백성들에게 신성합니다. 저 빛나는 솔잎들이며 해변의 모래톱이며 어두 침침한 숲 속의 안개며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은 우리 백성들의 추억과 경험속에서 성스러운 것들입니다.
백인들이 우리들의 생활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백인들에게는 어떤 한 부분의 땅은 나머지 부분의 땅과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밤중에 그 땅에 와서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져가는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땅은 그들의 형제가 아니라 적입니다. 그들이 어떤 땅을 정복하면 그들은 곧 그곳으로 옮겨옵니다. 그들의 왕성한 식욕은 대지를 마구 먹어치운 다음에는 그것을 황무지로 만들어 놓고 맙니다. 당신네 도시의 모습은 우리 인디언들의 눈을 아프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 우리가 야만인이어서 이해하지 못하는 탓이겠지요.
내가 만일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다면 나는 하나의 조건을 내 놓겠습니다. 즉 백인들은 이 땅에 사는 짐승들을 그들의 형제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짐승들이 없다면 인간은 무엇입니까만일 모든 짐승들이 사라져 버린다면 인간은 커다란 영혼의 고독 때문에 죽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짐승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그대로 인간들에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백인들이 언젠가는 발견하게 될 한가지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즉 당신네 신과 우리의 신은 같은 신이라는 사실입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우리의 땅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신도 상신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신입니다.
그리고 신의 연민은 인디언이나 백인들에게 동등합니다. 이 대지는 신에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대지를 해치는 것은 조물주에 대한 모독입니다. 백인들도 역시 소멸할 것입니다.
이미 다른 종족들보다 더 먼저 소멸할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잠자리를 계속해서 오염시켜 나간다면 당신은 어느 날 밤 당신 자신의 오물속에서 질식하게 될 것입니다. 들소들이 모두 살육 당하고 야생마들이 모두 길들여지며 성스러운 숲속이 인간의 냄새로 꽉 찰 때 그리고 산열매가 무르익는 언덕이 수다스러운 부인네들에 의해서 더럽혀질 때 잡목 숲과 독수리는 어디서 찾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삶의 종말이요, 죽음의 시작입니다.
백인들의 도시에는 조용한 곳이라곤 없습니다. 아무데서도 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며 벌레들이 날아 다니는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마 내가 야만인이어서 이해를 못하기 때문이겠지만 소음은 내귀를 상하게 합니다. 만일 사람이 쑥독새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나 밤의 연못가에서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인생에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북미의 인디언들은 한낮의 비로 씻겨지고 소나무의 향기가 나는 부드러운 바람소리를 더 좋아합니다. 공기는 인디언들에게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짐승과 나무의 인간들의 똑같이 숨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인들은 자기들이 들어마시는 공기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오래 동안 죽을 병에 걸려 신음하는 사람들처럼 냄새를 알지 못합니다.우리가 백인들이 꾸고 있는 꿈과 그들이 긴긴 겨울밤에 그들의 자녀들에게 그려주는 희망과 그들이 마음속에 불태우고 있는 미래의 비년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이해를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야만인들입니다.
백인들의 꿈은 우리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동의한다면 우리는 당신이 약속한 인디언 보류지를 확보하게 될 것입니다.거기서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짧은 생애를 마치게 될 것입니다. 지상에서 마지막 인디언들이 사라지고 오직 광야를 가로질러 흘러가는 구름의 그림자만이 남더라도 이 해변들과 숲들은 여전히 우리 백성들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갓난 아기가 엄마의 심장에서 들려오는 고동소리를 사랑하듯 이 땅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만일 우리가 우리의 땅을 당신에게 팔려고 한다면 당신은 우리가 그 땅을 사랑하듯 사랑하고, 우리가 보살피듯 보살피며, 그 땅에 대한 기억을 지금의 모습대로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모든 힘과 모든 능력과 모든 정성을 기울여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서 그 땅을 보존하고 또 신이 우리를 사랑하듯 그 땅을 사랑하십시오, 당신의 신도 우리의 신과 같은 신이라는 한가지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신에게 있어서 대지는 소중한 것입니다.
백인들일지라도 공동의 운명으로부터 제외될 수는 없습니다.
추장 씨애틀의 연설
추장 씨애틀의 연설이라고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는 것은 1970년 제 1회 지구의 날에 애로우스미쓰Arrowsmith가 읽은 내용을 새로 고쳐 쓴 Perry(1972)의 글로 보인다. Perry의 글은 미국 ABC 방송의 Home이라는 영화의 생태학에 대한 대본으로 사용되기도 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처음 신문 컬럼의 내용과는 많이 다르다. 내놓기에는 불안한 번역이지만 그냥 아는 사람끼리 재미로 본다고 생각하고 추장 씨애틀의 연설이라고 제일 처음 소개된 내용을 다음에 붙인다.
http://www.webcom.com/duane/seattle.html#2nd 등에서 영문을 확인해볼 수 있다. 본래 이 칼럼의 앞부분에는 씨애틀과 스티븐스 지사의 만남에 관한 묘사가 있다. 지사 스티븐스가 짧은 이야기를 하고 앉자, "추장 씨애틀은 큰 나라의 책임을 두 어깨에 짊어진 원로원 의원과 같은 바로 그 위엄을 내뿜으며 일어났다. 한 손을 지사의 머리 위에 놓고, 다른 손의 검지로 천천히 하늘을 가리키며, 그는 장엄하고도 엄숙한 목소리로 잊혀지지 않는 그의 연설을 시작했다"라는 묘사 뒤에 다음과 같은 그의 연설이 따라 온다.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선조들께 온정의 눈물을 뿌려주었고 우리에게 영원할 것처럼 보이는 저 하늘이 바뀔 것 같습니다. 오늘은 맑으나 내일은 구름으로 뒤덮일지도 모릅니다. 나의 말은 변치 않는 별들과 같습니다. 핏기 없는 안색의 형제들인 당신들이 계절이 변함없이 되돌아오는 것을 믿는 것만큼, 지금 나 씨애틀이 하는 이야기를 큰 추장 워싱턴(미국 대통령을 이야기함, 실제 이 때의 대통령은 워싱턴이 아니다. 본래는 제법 긴 설명이 괄호 안에 들어 있다)은 믿어도 될 것입니다.
백인추장의 사람이 와서 그의 추장이 우리에게 우정과 선의의 인사를 전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수가 무척 많아 그가 우리의 도움이 별로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알기에, 그의 이런 인사는 매우 고맙게 느껴집니다. 우리 부족은 얼마 되지 않으며 폭우가 들이치는 벌판에 듬성듬성 서있는 나무들 같으나, 백인들은 저 넓은 평원을 덮은 풀과도 같습니다.
우리에게 호의적이라고 내가 여기고 있는 큰 백인 추장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뜻과 함께 우리가 안정되게 살아갈 수 있는데 필요한 충분한 땅을 남기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겠다는 이야기를 전해왔습니다. 우리들은 더 이상 배려를 요구할 권리가 더 이상 없는 처지이기에 이런 제안은 참으로 후해 보입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더 이상 큰 땅을 필요로 하지도 않기에 이 제안은 또한 지혜로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마치 바람부는 바다의 파도가 조개 가득한 바닥을 덮고 있듯이 우리 부족이 온 땅을 덮고 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랬던 때는 거의 잊혀져버린 우리 부족의 위대함과 더불어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나는 우리의 때아닌 쇠잔을 슬퍼하지 않으며 거기에는 우리 자신의 탓도 있기에 핏기 없는 안색의 형제들이 이를 재촉했다고 비난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당신들이 실제 저지른 잘못이나 가공의 잘못에 대해서 우리 젊은이들이 분노하며, 그들의 얼굴을 검게 칠했을 때, 그들의 가슴 또한 상하여 검게 변했고, 그들의 무자비함은 냉혹하며 끝 간 데를 모르나 우리 어른들을 그들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핏기 없는 안색의 형제들과 우리 붉은이들(red man) 사이에 다시는 적개심이 일지 않도록 희망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다 잃고 얻는 것은 하나도 없을지 모릅니다.
용감한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그들이 목숨을 잃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복수가 얻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쟁 가운데서도 집에 있는 노인들과 전쟁 중에 잃게 될 지도 모르는 아들을 가지고 있는 늙은 여인들이 더 잘 압니다.
조지(그 때 당시는 아니었지만, 영국의 왕)가 그의 영토의 경계를 북쪽으로 확장하였으므로 이제 나는 워싱턴을 당신들의 아버지인 동시에 또한 나의 아버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위대한 아버지, 아니 위대하고 훌륭한 아버지 워싱턴이 그의 백성들 가운데서 훌륭한 사람을 통해서 우리가 그의 바램대로 한다면 그가 우리를 보호할 것이라는 말을 전해 왔습니다. 그의 용감한 군대는 우리에게 튼튼하게 우뚝 선 방책이 될 것이며, 그의 훌륭한 싸움배들이 우리의 항구를 채워 먼 북쪽까지 퍼져 있는 우리의 오랜 적들인 심시암족들과 하이다족들이 우리의 여인들과 노인들을 더 이상 위협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며 우리는 그의 자녀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대체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당신들의 신은 당신 종족들만 사랑하고 나의 백성들을 미워합니다. 그는 강한 팔을 백인들의 뒤로만 사랑스럽게 두르고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이끌 듯이 인도하지만, 그의 붉은이들의 자녀들은 저버렸습니다. 그는 당신 족속들을 날마다 점점 더 강하게 만들어 이제 당신들은 곧 이 땅을 가득 채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 부족은 마치 급하게 빠져나가 다시는 흐르지 않을 썰물처럼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백인들의 신은 그의 붉은이들의 자녀들을 사랑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을 보호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고아들처럼 보이며 도움을 구할 곳이라고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형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당신들의 아버지가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 수 있으며, 우리를 번성하게 할 수 있고, 좋았던 때로 되돌아가리라는 꿈을 우리 속에서 되살아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들의 신은 우리에게는 매우 불공평해 보입니다. 그는 백인에게 왔습니다. 우리는 그를 본 적도 없으며 그의 목소리조차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백인들에게는 율법을 주었으나 하늘에 가득한 별처럼 이 광대한 대륙을 가득가득 채웠던 붉은이들의 자녀들에게는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다른 겨레이며 또한 그렇게 남아야 합니다. 우리들 사이에는 공통된 것이라곤 거의 없습니다. 당신들은 당신 조상들이 묻힌 땅을 떠나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회한도 없어 보이지만, 우리 선조들의 유골들은 신성한 것이며 그들이 영원히 안식하고 있는 곳은 신성한 땅입니다.
당신들의 종교는 당신들이 잊지 않도록 분노한 신의 쇠손가락에 의해 돌판들 위에 새겨졌습니다. 우리 붉은이들은 그것을 기억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종교는 우리 조상들의 전통들이며, 위대한 신령에 의해 어른들에게 주어지는 꿈이고, 우리 족장들의 직감들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우리 백성들의 가슴에 씌어져 있습니다.
당신들의 죽은 이는 무덤의 입구를 지나자마자 곧 그들이 태어났던 집들과 당신들을 사랑하는 것을 그만둡니다. 그들은 저 별들 너머로 벗어나고 곧 잊혀지며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죽은 이들은 그들에게 생명을 주었던 그 아름다운 세상을 잊지 않습니다. 그들은 굽이치는 강들과, 심원한 산들과 그 속에 담긴 계곡들을 여전히 사랑합니다. 또한 그들은 가장 깊은 애정을 가지고 마음이 쓸쓸한 사람들을 여전히 동정하며 가끔 그들에게 돌아와 위로해 주기도 합니다.
밤과 낮이 같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타오르는 아침 태양 앞에서 흐린 산안개가 사라져 가듯이 붉은이들은 백인들의 접근을 피해 물러서 왔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의 제안은 공정해 보이고, 또 백인 큰 추장의 말은, 밤바다에서 뭍으로 밀려오는 짙은 안개처럼 내 백성들 주위로 급히 몰려드는 깊은 어둠 속에서, 내 백성들에게 말해주는 대자연의 목소리처럼 느껴지기에, 우리 부족들이 제안을 받아들여 당신들이 제안한 보호구역으로 물러가서 서로 떨어져 평화롭게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남은 날들을 어디에서 보내게 될 것인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수는 많지 않습니다. 인디언들의 밤은 깊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어떠한 밝은 별도 지평선 위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슬픈 목소리의 바람이 멀리서 신음합니다. 우리 종족에게 복수하려는 불길한 복수의 여신이 붉은이들이 다니는 길 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상처 입은 암사슴이 다가오는 사냥꾼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듯이, 붉은이들은 어디를 가든지 잔인한 파괴자가 다가오는 분명한 발자국 소리를 들을 것이고 그들의 운명을 맞이할 준비를 할 것입니다. 어제 달이 몇 번 뜨고 지고 겨울이 몇 번 오고 가면, 한 때는 지금의 당신들만큼이나 강하고 희망찼던 우리 부족의 무덤들 앞에서 울어줄, 한 때는 이 넓은 땅을 채웠고 지금은 이 광막한 황야를 흩어진 무리처럼 돌아다니고 있는 우리의 훌륭한 용사들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푸념을 하고 있어야 합니까? 왜 내가 우리 부족의 운명 앞에서 투덜거리고 있어야 합니까? 부족은 하나 하나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저 그 사람들만큼 일 뿐입니다. 사람은 바다의 파도처럼 오고 갑니다. 눈물도, 혼령도, 비가도 바래보는 우리의 눈으로부터 영원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친구처럼 함께 걸으며 대화하는 그들의 신을 가진 백인들도 공통의 운명으로부터 비껴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어쩌면 우리는 형제일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런지 아닌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제안에 대해서 숙고할 것이고 결정을 하게 되면 여러분에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안을 받아들여야 된다면 나는 바로 지금 다음의 조건을 첫 번째로 삼을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과 친구들의 무덤을 마음대로 찾아 볼 수 있는 권리를 무조건 보장받아야 합니다. 우리 부족에게 있어서 이 땅의 모든 곳은 다 성스러운 곳입니다. 모든 산과 모든 계곡, 모든 들판과 숲들은 우리 부족의 다정했던 기억이나 슬픈 추억들로 신성해졌습니다.
태양 아래 땀흘리며 말없이 놓여 있는 것 같은 저 바위조차도, 웅장함과 장엄함 속에 묵묵한 바닷가와 더불어, 내 백성들의 운명을 수놓았던 지난 일들에 대한 기억들로 전율합니다. 당신들의 발아래 있는 바로 그 흙들도 우리 선조들의 유골들이 변한 것이기에, 당신들의 발자국보다 우리들의 것에 더 정답게 응답하며, 또한 대지는 우리 동족들의 생명으로 가득 차 있기에 우리들의 맨발은 대지의 다정한 어루만짐을 알아챕니다.
우울한 용사들과, 다정한 어머니들과, 아름다운 마음씨의 처녀들과, 여기에서 기쁘게 살던 아이들과, 지금은 이름조차 잊혀진 많은 사람들 모두는 아직도 이 외딴 곳을 사랑하며, 어둠의 정령과 함께 황혼이 어둠으로 짙어져 갈 무렵이면, 깊은 곳에 있는 그들의 동네들을 여전히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붉은이들이 이 땅에서 다 사라지고, 백인들 가운데서도 그들에 대한 기억들이 전설이 되고 말 때, 이 바닷가는 보이지 않는 우리 부족의 죽은 이들로 꽉 찰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아이들의 아이들이 들판에서, 상점이나 가게에서, 넓은 길이나 깊은 숲 속의 정적에서 홀로 있다고 생각할 때, 그들은 결코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 위의 어느 곳도 완전히 홀로 떨어져 있는 곳은 없습니다. 밤이 되어 당신들 도시와 마을의 길에 고요가 내리고, 인적이 끊어졌다고 당신들이 생각할 때, 사실 그 거리는 한 때 이 땅을 가득 채웠고, 아직 이 아름다운 곳을 사랑하고 있는 돌아온 영혼들로 북적댈 것입니다. 결코 백인들이 혼자 있게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죽은 이라고 해서 완전히 무력한 것은 아니니, 당신들은 공정하고 친절하게 우리 부족들을 대해 주십시오.
원시인은 자연에 가까웠다. 사냥을 하는 사람이나 목축을 하는 사람이나 농부나 주술사나 누구든간에, 그들은 자신의 몸과 마음, 심지어 영혼을 위해서까지 전적으로 자연에 의존해야 했다.
별이 빛나는 하늘, 쏟아지는 비와 눈, 어둠과 햇살, 천둥과 번개, 폭풍을 머금은 먹구름, 하늘을 찌를 듯한 산, 포효하는 격류, 깜깜한 밀림, 끝없이 펼쳐진 사막, 살아 있는 바람의 신 - 이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 옛날 사람들을 경외하고 숭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신석기 시대 직후부터 현대적인 인간이 출현할 때까지 전통적인 인간 사회의 구성원들이 변함 없이 그렇게 해 왔다.
인간의 생활 방식과 사고 방식이 자연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자연과의 일체화로 말미암아 각종 신화와 의식, 상상과 상징 등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영적인 의미와 중요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모든 기술과 기법, 지식과 행동 등은 각기 나름 대로의 신성한 측면을 띠고 있다. 원시인들은 하느님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드러난 것이 바로 자연이라고 믿었다.
오늘날에도 인도, 아프리카, 북아메리카 등지의 일부 부락공동체는 그러한 전통적인 생활 양식과 문화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기술 문명으로 인하여 쉴새없이 위협당하며 체계적으로 파괴당하고 있다.
현대의 과학과 기슬이 인간 행동의 모든 분야에서 눈부신 진보를 가져다 주었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대가가 무엇인가? 그 아름답던 지구의 생태계가 파괴되고 환경이 오염되었는가 하면, 현대인들은 극도로 타락한 세상에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저주를 받았다.
이것은 그 놀라운 과학과 기술의 진보를 가능하게 했던 개념들이 오로지 세속적인 차원에만 초점을 맞추어 오로지 물질적인 측면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문화 이외의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결과이다.
다음의 예에서 우리는 전통 사회의 문화와 윤리가 얼마나 심각한 위협에 처해 있는지를 똑똑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정부는 지방 의회를 통해서 어느 늙은 인디언 추장에게 접근했다. 인디언 보호 구역에 포함되어 있는 적당한 크기의 땅을 정부에 팔도록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그러한 계획을 세운 사람은 돈이나 갖가지 물질적인 것으로 그 인디언 추장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표면상의 명분은 그 지역의 원주민들에게 '문명'의 혜택이 돌아가게 하겠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그곳에 신도시를 건설하여 국민들을 위한 생활 공간을 마련하여 사업상의 이득을 챙기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인디언 추장은 그러한 요청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답변으로 거절했다.
"당신은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 대지의 달콤한 흙냄새, 서늘한 공기와 수정같은 맑은 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우리가 땅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그것들을 어떻게 사겠다는거요? 게다가 우리는 그런 것들의 주인도 아니잖소? 이곳의 땅 한뼘 한뼘은 나와 우리 인디언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신성한 것들이오. 소나무 한 그루, 바닷가의 모래 한 알, 깜깜한 숲 속에서 떨어지는 이슬 한 방울, 새 한 마리, 벌레의 노랫소리 등 이 모든 것들은 모두다 너무도 소중한 것들이라오.
우리가 땅의 일부이듯, 땅 역시 우리의 일부입니다. 그 위에 있는 모든 것 -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과 달콤한 향기를 피워올리는 꽃들, 우리를 태우고 산과 초원을 달리는 말들, 들판에서 풀을 뜯는 소들, 하늘 높이 차고 나르는 독수리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소.
절벽과 평원, 수풀과 농장에서 우리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것들이, 우리는 살아 있는 다른 모든 생명체와 함께 하나의 거대한 가족의 일원이라고 큰 소리고 들려 주고 있소.
시냇물과 수정처럼 맑은 호수의 물은 우리 선조들을 피를 비추고 있소, 산골짜기에 조잘거리며 흐르는 시냇물 소리는 우리에게 대지의 옛 영광을 상기시켜 주고 있소.
우리는 어머니 같은 부드러운 손길로 우리의 강을 대하고 있소. 강은 우리의 갈증을 해소해 주고, 자기 등은 카누를 띄워 우리를 일터로, 제단으로, 혹은 잔칫집으로 데려다 주기 때문이오. 대지가 우리의 어머니이고 하늘이 우리의 형제라면 강은 우리의 자매라 해도 좋소.
우리의 생활 방식은 백인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오. 비록 우리가 백인들과 같은 땅에서 살고 있다 하더라고 그 땅과 우리의 관계, 그 땅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절대로 백인들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라오.
백인들은 땅을 사고 팔 수 있는 아니면 빼앗아서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하나의 상품으로 생각하고 있소. 백인들은 땅이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어머니가 아니라, 오히려 정복해야 할 대상, 자신의 손아귀에 넣어야 할 물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온갖 기계와 도구로 인해 생기는 인위적인 소음과 물결치는 자동차 행렬, 상업화된 삶으로 가득 차 있는 백인들의 도시는 우리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눈과 귀와 마음을 병들게 하고 있소.
백인들이 만들어 놓은 강철과 콘크리트의 밀림 속에서,우리가 어떻게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벌레들이 윙윙거리는 소리, 소떼의 울음 소리와 새들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겠소?
우리는 백인들이 전깃줄과 철탑과 굴뚝으로 우리 시골의 아름다움을 마구 파괴하는 것을 보았소, 뿐만 아니라, 유독한 폐기물로 우리의 강을 오염시키는 것도 보았소.
백인들은 우리가 미개하다고 생각할 것이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바로 이 흙 속에 우리선조의 재가 섞여 있다고 가슴 깊이 진심으로 믿고 있소. 우리는 우리 아이들의 운명이 이 대지의 운명에 달려 있다고 믿고 있소. 대지는 우리의 어머니이며, 하느님은 세상 만물에 햇살과 비를 내리시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기 때문이오, 하느님은 산과 계곡, 비옥한 곳과 황폐한 곳,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이 백인들과 하느님과 똑같다는 것은 진실이오. 하지만 백인들은 마치 하느님이 필요 없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소.
바람에 흔드리는 소나무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흘러 가는 시냇물 소리. 깜깜한 숲 속의 살아 있는 모든 소리 속에 실려 우리에게 전해지는 하느님의 목소리는 백인들의 도시가 만들어 내는 소음과 그들의 기계가 뱉어 내는 비명 소리에 묻혀 버릴 거요.
만일 우리가 땅을 팔아야 한다면, 백인들은 우리가 수백년 동안 간직해 온 우리의 전통과 가치를 존중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할 것입니까?
우리 숲의 풍요로움과 우리의 야영 생활, 우리의 물고기들, 신화와 상상과 의식 속에 뿌리 박힌 우리의 종교적 신념과 예술과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까?
진실로 우리가 백인들이 말하는 '문명화된 삶'의 혜택을 얻기 위해 그 모든 평화와 조화, 까마득한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 온 우리의 생활 방식을 포기해야만 하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그것은 우리 종족의 생명이 끝장나는 대신 생존을 위한 투쟁이 시작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
인디언 추장 시애틀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대지의 온기를 사고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대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워싱턴의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은 보내 왔다. 대추장은 우정과 선의 의 말도 함께 보내 왔다. 그가 답례로 우리의 우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는 그로서는 친절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들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 볼 것이다. 우리가 땅을 팔지 않으면 백인이 총을 들고 와서 우리 땅을 빼앗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대지의 온기를 사고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대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대지의 모든 부분이 신성한 것이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 신성한 것들이다. 나무 속에 흐르는 수액은 우리 홍인(紅人)의 기억을 실어 나른다. 백인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거닐 적에 그들이 태어난 곳을 망각해 버리지만, 우리는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대지를 결코 잊지 못한다. 그 이유는 여기가 바로 우리 홍인의 어머니의 품속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지의 한 부분이고 대지는 우리 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이다. 사슴, 말, 큰 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산 꼭대기, 풀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가족이다. 워싱턴의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 온 것은 곧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을 달라는 것과 같다. 대추장은 우리만 따로 편히 살 수 있도록 한 장소를 마련해 주겠다고 한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안을 잘 고려해 보겠지만, 우리에게 이 땅은 신성한 것이기에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개울과 강을 흐르는 이 반짝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피다. 만약 우리가 이 땅을 팔 경우에는 이 땅이 신성한 것이라는 걸 기억해 달라. 신성할 뿐만 아니라, 호수의 맑은 물 속에 비추인 신령스러운 모습들 하나하나가 우리네 삶의 일들과 기억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음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물결의 속삭임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내는 목소리다. 강은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의 갈등을 풀어 준다. 카누를 날라 자고 자식들을 길러 준다. 만약 우리가 땅을 팔게 되면 저 강들이 우리와 그대들의 형제임을 잊지 말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형제에게 하듯 강에게도 친절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아침 햇살 앞에서 산 안개가 달아나듯이 홍인은 백인 앞에서 언제나 뒤로 물러났었지만 우리 조상들의 유골은 신성한 것이고 그들의 무덤은 거룩한 땅이다. 그러니 이 언덕, 이 나무, 이 땅덩어리는 우리에게도 신성한 것이다. 백인은 땅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꼭 같다는 우리 삶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은 한밤중에 와서는 필요한 것을 빼앗아 가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대지는 형제가 아니라 적이며, 그것을 다 정복했을 때 그들은 또 다른 곳으로 나아간다. 백인들은 거리낌없이 아버지의 무덤을 내팽개치는가 하면 아이들에게서 땅은 빼앗고도 개의치 않는다. 아버지의 무덤과 아이들의 타고난 권리는 잊혀지고 만다. 백인들의 어머니인 대지와 형제인 저 하늘을 마치 양이나 목걸이처럼 사고 빼앗고 팔 수 있는 것으로 대한다. 그들의 식욕은 대지를 삼켜 버리고 사막만을 남겨 놓을 것이다.
모를 일이다. 우리의 방식은 당신네와는 다르다. 당신네 도시의 모습은 홍인의 눈에 고통을 준다. 백인의 도시에는 조용한 곳이 없다. 봄 잎새 날리는 소리나 벌레들의 날개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곳이 없다. 홍인이 미개하고 무지하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도시의 소음은 구를 모욕하는 것만 같다. 쏙독새의 외로운 울음소리나 한밤중 못가에서 들리는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면 삶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나는 홍인이라서 이해할 수가 없다. 인디언은 연못 위를 쏜살같이 달려가는 부드러운 바람 소리와 한낮의 비에 씻긴 바람이 머금은 소나무 내음을 사랑한다. 만물이 숨결을 나누고 있으므로 대기가 홍인에게 소중한 것이다. 짐승들, 나무들, 그리고 인간은 같은 숨결을 나누고 산다. 백인들은 자기가 숨쉬는 대기를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여러 날 동안 죽어가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악취에 무감각하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당신네에게 땅을 팔게 되더라도 우리에게 공기가 소중하고, 또한 그것은 그것이 키워 주는 온갖 생명과 영혼을 나누어 갖는다는 사실을 당신들은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의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베풀어준 바람은 그의 마지막 한숨도 받아줄 것이다. 바람은 또한 우리의 아이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우리가 우리 땅을 팔게 되더라도 그것을 잘 간수해서 백인들도 들꽃들로 향기로워진 바람을 가서 맛볼 수 있는 신성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우리 땅을 사겠다는 당신들의 제의를 고려해 보겠다. 그러나 제의를 받아들일 경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즉 이 땅의 짐승들을 형제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미개인이니 달리 생각할 길이 없다. 나는 초원에서 썩어 가고 있는 수많은 물소를 본 일이 있는데 모두 달리는 기차에서 백인들이 총으로 쏘고는 그대로 내버려 둔 것들이었다. 연기를 뿜어 내는 철마가 우리가 생존을 위해서 죽이는 물소보다 어째서 더 중요한지는 모르는 것도 우리가 미개인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짐승들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모든 짐승이 사라져 버린다면 인간은 영혼의 외로움으로 죽게 될 것이다. 짐승들에게 일어난 일은 인간들에게도 일어나게 마련이다.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당신들은 아이들에게 그들이 딛고 선 땅이 우리 조상의 뼈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들이 땅을 존경할 수 있도록 그 땅이 우리 종족의 삶들로 충만해 있다고 말해 주라.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을 당신네의 아이들에게도 가르치라. 땅은 우리 어머니라고. 땅 위에 닥친 일은 그 땅의 아들들에게도 닥칠 것이니, 그들이 땅에다 침을 뱉으면 그것은 곧 자신에게 침을 뱉는 것과 같다. 땅이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에 속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생명의 거미줄을 짜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거미줄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그가 그 거미줄에 행한 일은 곧 자신에게 행한 일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종족을 위해 당신들이 마련해 준 곳으로 가리는 당신들의 제의를 고려해 보겠다. 우리는 따로이 평화를 누리며 살 것이다. 우리가 여생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아이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패배 속에 주저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의 전사들은 수치심에 사로잡혔으며 패배한 이후로 헛되이 나날을 보내면서 단 음식과 술로 그들의 육신을 더럽히고 있다. 우리가 어디서 우리의 여생을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 많지도 않은 몇 시간, 혹은 몇 번의 겨울이 더 지나가면 언젠가 이 땅에 살았거나 숲 속에서 조그맣게 무리를 지어 지금도 살고 있는 위대한 부족의 자식들 중에 그 누구도 살아 남아서 한때 당신네만큼이나 힘세고 희망에 넘쳤던 종족의 무덤을 슬퍼해 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왜 우리 부족의 멸망을 슬퍼해야 하는가? 부족이란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인간들은 바다의 파도처럼 왔다가는 간다. 자기네 하느님과 친구처럼 함께 걷고 이야기하는 백인들조차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우리가 알고 있고 백인들 또한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우리 모두의 하느님은 하나이다. 당신들은 땅을 소유하고 싶어하듯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하느님이며 그의 사랑은 홍인 에게나 백인에게나 꼭 같은 것이다. 이 땅은 하느님에게 소중한 것이므로 땅을 해치는 것은 그 창조주에 대한 모욕이다. 백인들도 마찬가지로 사라져 갈 것이다. 어쩌면 다른 종족보다 더 빨리 사라질지 모른다. 계속해서 잠자리를 더럽힌다면 어느 날 밤 당신들은 황무지에서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이 사라져 갈 때 당신들을 이 땅에 보내 주고 어떤 특별한 목적으로 당신에게 이 땅과 홍인을 다스릴 권한을 다스릴 권한을 허락해 준 하느님에 의해 불태워져 버릴 것이다. 이러한 운명은 우리에게는 불가사의한 일이다. 언제 물소들이 모두 살육되고 야생마가 길들여지고 숲의 오지가 수많은 사람들의 냄새로 가득차고 곡식이 무르익은 전화선으로 더럽혀지는지를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다. 덤불은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독수리는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날랜 조랑말과 사냥에 작별을 고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삶의 끝이자 생명의 시작이다. 우리 땅을 사겠다는 당신들의 제의를 고려해 보겠다. 우리가 거기에 동의한다면 당신네 가 약속한 보호 구역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짧은 여생을 이어 갈 것이다. 마지막 홍인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그의 기억이 다만 초원을 가로질러 구름의 그림자가 될 때도 이 기슭과 숲들은 여전히 내 종족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새로 태어난 아이가 어머니의 심장의 고동을 사랑하듯이 그들도 이 땅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땅을 팔더라도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 달라. 우리가 돌본 것처럼 이 땅을 돌보아 달라. 당신들이 이 땅을 차지하게 될 때 이 땅의 기억을 지금처럼 마음 속에 간직해 달라. 온 힘을 다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당신들의 아이를 위해 이 땅을 지키고 사랑해 달라.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이.
한가지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모두의 하느님은 하나라는 것을. 이 땅은 그에게 소중한 것이다. 백인들조차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시애틀 추장 / 미국 서부 지역에 거주하던 두아미쉬•수쿠아미쉬 족(族)의 추장이었다. 1854년, 미합중국 대통령 피어스는 백인 대표단을 파견하여 이 인디언 부족이 전통적으로 살아온 땅을 팔 것을 제안했다. 지금의 워싱턴 주(洲)에 해당하는 인디언들의 삶터를 차지하는 대신 인디언 보호 구역을 주겠다는 것이 백인 정부의 제안이었다. 여기에 대하여 몸집이 장대하고 우렁찬 목소리를 가졌다고 전해지는 시애틀 추장이 답한 것이 이 연설문이다. 그의 연설은 오늘날 환경과 자연에 대한 분별 없는 파괴의 결과로 인하여 전인류가 심각한 고통에 직면하게 된 시대에 오히려 생생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