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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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종 면접 본 것은 단 한번

서류 통과 바늘구멍… 면접 대비 스터디도
"내년은 더 어렵다는데… 내 젊음이 비참해"
건설업 노리는 여성들은 "내가 남자였으면"
IMF세대는 "그래도 10년 전보다는 희망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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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 시험장에 들어가 인사를 해야 하는데 갑자기 허리가 굳어지더니 몸이 꼼짝도 하지 않는 겁니다. 아무리 버둥거려도 몸은 움직이지 않고…. 면접관이 '자네 도대체 뭐 하나'라며 버럭 고함을 치고…."서울 소재 대학의 행정학과를 졸업한 류모(25)씨는 최근 이런 악몽(惡夢)을 꿨다.


서울 서대문구 신촌의 한 12층 건물. 지난 7일 오후 이 건물 4·5·9층에 자리 잡은 스터디룸 전문 대여업체 '토즈'의 복도에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담은 배낭을 멘 20대 청년들이 분주히 오갔다.

류씨는 이곳에서 A건설사 면접 시험 준비를 위해 취업 준비생 5명과 함께 면접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날 모인 취업 준비생 5명이 지금까지 각종 회사에 낸 입사원서는 모두 290여 장. 이 중 1차 서류 심사에 통과한 경우는 25번, 최종 면접까지 올라간 경우는 6번에 불과했다.

류씨는 한때 취업의 '보증수표'였던 ROTC(학생군사교육단) 출신으로 지난 6월 제대했다. 이후 입사 원서를 30군데 냈지만, 모두 서류 전형에서 떨어지고 면접시험은 단 한 번 봤다. 류씨는 "내 젊음이 너무 비참하고 서글프다"라고 말했다.

◆습관처럼 원서 쓰고, 여지없이 불합격

류씨의 얘기를 듣고 있던 서모(30)씨는 "그래도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는 사람은 형편이 좀 낫지 않으냐"고 받았다.

경기도 소재 대학을 졸업한 서씨는 지난해 금융회사를 중심으로 30여 곳, 올해는 업종을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120여 곳 등 총 150여 회사에 원서를 냈다. 서류 전형이 통과된 곳은 10곳, 최종 면접까지는 단 한 번 올라가 봤다.

그는 "매일 밤 컴퓨터를 켜고 습관처럼 원서를 쓰고, 며칠 지나면 여지없이 불합격 통보를 받고 소주 한잔으로 마음을 달래는 생활이 벌써 2년째"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여성 취업 준비생 이모(25)씨는 "남자들이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했다. 서울 모 대학의 전기공학과를 내년 2월 졸업할 예정인 이씨는
캐나다 어학연수를 다녀왔고, 산업기사 자격증과 한자능력시험 2급 자격증을 갖고 있지만 40곳에 원서를 내 서류 전형은 두 번밖에 통과하지 못했다.

그는 "아직까지 건설업계에서 여자는 이방인"이라며 "요즘은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것이 원망스럽다"고 했다. 오후 6시쯤, 이씨의 휴대전화로 '동양제철화학 서류 심사 결과 발표'라는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 보니 역시 '불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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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융위기 여파로 최악의 취업한파가 엄습하면서 각 대학들은 잇따라 취업 캠프를 열고 있다. 사진은 최근 경북 경주시 교육문화회관에서 부산가톨릭대가 개최한 취업캠프 참가자들이 기업체 인사담당자들 앞에서 모의면접을 치르고 있는 모습. /이재우기자 jw-lee@chosun.com

◆내년 고용 시장은 더 절망적

올해 취업 시장이
미국발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다. 대졸자들 사이에 가장 인기가 있는 직장인 한국전력, 한국수력원자력, 한국가스공사 등 30여 개 공기업은 이미 예정돼 있던 채용계획 인원 중 1752명을 축소해 버렸다.

고임금 직종인 금융권 역시 채용을 줄이고 있다. 외국계 은행인 SC제일은행과 한국씨티은행은 기존 직원에 대한 희망퇴직을 실시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다. 중소기업도 마찬가지다.

취업포털 '커리어'가 근로자 수 300인 미만인 중소기업 254개사를 조사한 결과, 금융위기의 여파로 31.1%가 채용을 보류, 축소, 취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9~10월 사이 구직 사이트에 하루 20~30개씩 올라오던 대기업들의 채용 공고는 요즘 들어 10개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한국노동연구원 남재량 박사는 "이번 경제위기 상황에서 고용시장의 첫 희생자는 대학과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이 될 수밖에 없고, 금융위기가 실물경기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될 내년은 올해보다 더 불확실하다"고 말했다.

◆IMF 세대 "우리 이렇게 살아남았다"

'청년 실업'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IMF 경제위기 직후인 1998년, 1999년 즈음이다. 당시 기업들은 명예퇴직, 정리해고의 수단을 동원해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20대 실업자만 57만 명에 이르렀다. 대학을 갓 졸업한 취업 준비생들은 합격 발표가 난 뒤에도 채용 취소 통보를 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당시 취업 빙하기에서 살아남은 IMF세대들은 "그래도 지금은 10년 전보다는 훨씬 더 희망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신한카드 마케팅팀의 이현영(35) 과장은 1999년 2월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4학년 2학기 마지막 한 학기 동안 이력서 50여 장을 쓰고 힘들게 '금융 회사'에 취업했지만, 입사하고서야 사채업체인 줄 알았다. 6개월 만에 퇴사했고, 회사도 곧 망했다.

이후 친척이 운영하는 폐기물 재생회사에서 월급도 받지 않고 일하며 미국공인선물거래사(AP), 투자상담사 1, 2종 자격증을 땄고, 영어 공부에 열을 올렸다. 2000년 초 경기가 풀리면서 채용이 동결됐던 금융권도 채용이 시작되면서 이씨는 입사에 성공했다.

이씨는 "지금 당장 취업이 안 된다고 두 손 놓고 있으면 경기가 회복된 뒤에도 기회가 없다"며 "일단 업종을 정하고 작은 회사라도 무조건 취업해 경력을 쌓으며 앞날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직종 정하고 전문지식 쌓아야"

삼성네트웍스 텔레포니사업팀 편성범(38) 과장은 1998년 2월 동국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3월 곧바로 삼성SDS 입사에 성공했지만, 문제는 입사 이후였다. 입사 동기 300명을 상대로 시험이 실시돼 90여 명이 회사에서 밀려 나갔다. 신규채용을 진행했지만, 경제 위기가 심각해져 신입사원에 대한 구조조정이 단행된 것이다.

편씨는 "취업이 힘들다고 마구잡이로 원서를 내기보다는 직종을 정하고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을 꾸준히 쌓아 지원을 해야 취업 성공확률이 높아지고, 입사 이후에도 경쟁력이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대기업 입사에 매달리기보다는 일단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고 충고한다. 취업 전문 사이트 '인크루트' 이광석 대표는 "요즘 같은 상황에선 대기업, 공기업만 고집하기보다는 안정성이 있고, 발전 가능성이 있는 중소기업으로 눈을 돌려 적극적으로 취업난을 돌파해야 한다"고 말했다.


[2] 토익 900점에 비정규직… "무능한 정규직 보면 화나"

대기업은 취업문 좁아 결국 비정규직 선택 많아
"취업 공부에 들인 돈 아까워… 그래도 中企는 싫어"
금융 위기로 더 악화… 세대 간 일자리 경쟁 양상

화창했던 지난 6일 오전 11시쯤 서울 강동도서관 앞 공터. 체육복 차림의 20대 여성 한 명이 쌀쌀한 날씨 속에서 벤치에 홀로 앉아 삼각김밥 두 개와 빵 한 개로 점심을 때우고 있었다. 취업 준비생 강모(25)씨다.

"취업요? 정말 힘들죠. 남들은 취업 안 되면 중소기업 가면 된다지만 맘대로 안 되네요. 지금까지 취업 준비하느라 가져다 쓴 돈이 얼만데…."

능력도 없는 강씨가 눈높이만 높은 것일까. 서울 소재 중위권 대학을 졸업한 그의 학점은 3.3, 토익 점수는 955점이다. 지난해 3000만원을 들여 영국으로 7개월간 어학 연수를 다녀 왔고, 한 유럽 국가의 관광청에서 인턴 직원으로 일하며 경험도 쌓았다. 취업을 위한 완벽한 조건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청년 백수'로 동네 도서관을 전전해야 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올해 대기업에 25번 입사 원서를 냈지만 면접은 고사하고 서류 전형도 통과해본 적이 없다. 강씨는 "가끔은 내가 사회에 쓸모없는 무능한 인간으로 낙인찍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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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일 오후 서울 서초동‘강남 파고다어학원’에서 취업준비생들이 영어 강의를 듣고 있다. 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학원에서 면접 기술까지 배우기도

올 하반기 극심한 취업난을 겪고 있는 20대 구직자들은 이전의 어느 세대보다 치열하게 취업 준비를 한 세대다. 한 해 300만~1000만원에 이르는 비싼 대학 등록금을 내며 학교를 다녔고 어학 연수, 자격증, 공모전, 학점에 이르기까지 취업에 필요한 '스펙'에 목숨을 걸었다.

한국고용정보원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대학생들은 하루 평균 4시간20분을 전공·외국어·자격증 준비 등 취업 공부에 투자한다. 대학 등록금이나 어학 연수 비용, 생활비를 제외하고 월 평균 약 17만원을 학원비와 독서실비 등 취업 준비 비용으로 쓴다.

술집과 당구장, 데모로 대학 시절을 보내다 졸업장 하나만 달랑 들고서 기업의 문을 두드리던 예전과는 전혀 다르다. 최근에는 취업 시험에서 면접 비중이 높아지면서 돈 주고 면접 기술을 배우는 학생까지 생겨났다.

지난 4일 오후 7시쯤 서울 안암동의 면접 전문 학원인 혜안문제해결스쿨.

"현대그룹 정몽구 회장이 요즘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있어요. 왜일까요?" (강사)

"요즘 경기가 안 좋아서요. 글로벌 경제위기 때문에…." (학생)

"그렇게 대답하면 면접관들은 '역시나'라고 생각하지. 자,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북경에 현대차 현지 공장이 있죠…." (강사)

강의실에 앉은 6명의 학생들은 강사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강의 내용을 받아 적었다. 이 학원 송영상 원장은 "취업난이 심화되고 대기업 면접의 난이도가 높아지면서 학원을 찾는 취업 준비생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월 고려대를 졸업한 수강생 이모(여·26)씨는 "상반기에만 면접에서 두 번이나 떨어져 기술적으로 문제가 있나 싶어서 등록했다"며 "면접 스터디만으로는 면접 준비에 한계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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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부림치지만 취업문은 좁다

20대 청년들은 취업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일자리는 예전과 비교하면 실망스럽다. 임금 수준이 과거에 비해 낮아졌다. 전체 근로자의 임금 수준을 100으로 봤을 때 지금 25~29세 청년들이 받는 월급 수준은 1993년 89.3% 수준에서 2000년 82%, 2005년 81.1%로 하락했고, 지난해에는 76.7%까지 떨어졌다.

2007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전체 실업률은 3.2%, 청년 실업률(15~29세)은 그 두 배가 넘는 7.2%다. 전체 실업자 78만3000명의 41.9%가 청년층이다. 이미 노동시장에 진입한 기성세대들은 경력직으로 직장을 옮겨 다니며 일자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대학과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청년 구직자들은 아예 진입을 못하고 겉돌고 있는 것이다.



◆기성세대들도 마음 편치 않아
정규직을 포기하고 비정규직 일자리라도 구해 들어가지만 불만이 가득 찰 수밖에 없다. 지난해부터 경기도의 한 공기업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는 박모(여·28)씨의 토익 점수는 905점, 학점은 3.4점이다. 그는 졸업 후 정규직 일자리를 2년 가까이 찾아다니다 실패하고 일단 비정규직으로 취업했다.

박씨는 "비정규직이지만 정규직과 다름없는 일을 하고 있고 솔직히 능력으로 볼 땐 정규직 직원보다 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월급은 정규직의 60% 정도에 언제 잘릴지 모르는 신세다. 그는 "별다른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는 40·50대 정규직 아저씨들을 보면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성질만 난다"고 말했다.

인터넷 유통업체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고 있는 지방 국립대 무역학과 출신인 한모(30)씨. 이 회사 경력 3년차인 그의 월급은 200만원이 채 되지 않지만 그는 이미 비정규직 인생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한씨는 "주변에서 '너 정도면 더 좋은 곳에 취직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하는데, 요즘 같은 상황에서 그런 소리에 귀 기울여 봤자 나만 괴롭다"고 말했다.

비정규직 청년세대를 바라보는 기성세대들의 마음도 편치는 않다. 경기도 수원의 이동통신회사 대리점 관리 업무를 하고 있는 한모(41)씨는 전문대를 졸업한 여직원 2명을 용역회사에서 파견받아 고용하고 있다. 인건비 절감 차원에서 용역직을 뽑은 덕에 인건비는 월 100만~120만원만 주면 된다.

한씨는 "정규직들이 하는 일이 그다지 전문적인 일은 아니어서 용역 직원을 가르치면 되지만 다른 정규직 직원들이 싫어한다"며 "사실 우리 세대(40대)들은 억세게 운이 좋아서 그렇지 능력으로만 보자면 요즘 같은 시절이면 비정규직 일자리 구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대 간 일자리 경쟁 더 치열해질 것

청년층이 극심한 취업난을 겪고 있는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경기 침체 상황에서 '보이지 않는 세대 간 일자리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서울산업대 기초교양학부 정이환 교수는 "이미 일자리를 잡은 기성세대들은 임금과 근로조건을 향상시키면서 자리를 지키려 들고, 기업은 이 때문에 쉽게 신규 채용에 나서지 못하게 된다"며 "이런 현상은 기성세대와 청년세대 간의 일자리 경쟁을 가져 오고 앞으로 이런 현상은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국노동연구원 금재호 박사는 "무직(無職) 기간이 길어질수록 구직 가능성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며 "청년 구직자들은 일단 저임금 직장이라도 진입해 좀더 나은 직장으로 차근차근 옮겨가는 전략을 펼쳐야 한다"고 말했다.
 

▲ 외국어학원인 '파고다어학원 강남'에 취업준비생들이 모여 영어강의를 듣고있다. 일부학생들은 공강시간을 이용 간이 도서실에서 공부를 하고있다. /정경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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