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무한지대큐
푸짐해서 좋다! 백반이 이 정도는 돼야지~
- 생선구이 백반 (대풍) 02-518-7357 / 서울시 서초구 잠원동 36-1번지
- 돼지 불고기 백반 (수인관) 061-432-1027 / 전남 강진군 병영면 삼인리 33-1번지
- 7천원 해산물 백반 (어촌밥상) 051-722-5338 / 부산시 기장군 기장읍 연화리 222-2번지
- 전주 백반 (한국식당) 063-284-6932 /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 4가 34번지
처 - 오마이뉴스



▲ 어디서든지 만날 수 있는 자작나무 스튜디오 가는 길에서도, 야외정원에서도, 산책로에서도 자작나무가 항상 함께 합니다

횡성에는 나무이름을 가진 미술관이 하나 있습니다. '자작나무 숲 미술관' 입니다. 자작나무 숲 미술관은 사진작가이신 원종호 선생이 지난 1991년 만 여평의 부지에 자작나무 1년생 묘목 1만2000주를 심으면서 탄생한 공간입니다.

오래 전 백두산에 갔다가 끝없이 이어진 자작나무 숲을 보고, 자작나무를 심은 지 18년 째…. 이제 자작나무는 숲을 이뤄 근사한 풍경을 선사하고,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공간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곳의 자작나무 숲은 지난해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어울림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 자작나무 숲에서 바라본 하늘 1만2000주가 넘는 자작나무 묘목이 10년이 훨씬 넘은 지금 숲으로 변했습니다

자작나무 숲 미술관을 찾아가기는 그리 수월하지 않습니다. 영동고속도로 새말IC에서 나와 좌회전 한 뒤 442지방도를 타고 가다 둑실마을 인근에서 작은 표지판을 하나 만날 수 있고, 북쪽인 6번 국도에서 내려와 442번 지방도를 타면 그나마 작은 표지판도 하나 없어 유턴을 해 해매기 일쑤입니다.

 

둑실마을 표지판을 보고 찾아들어간 둑실마을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자작나무 숲 미술관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둑실마을 입구부터 시작되는 비포장 길과 차에서 내린 주차장에서 야외정원에 이르는 동안 '거칠다'라는 느낌을 적잖이 받았습니다. 아마도 꾸밈 없이 자연에 자연을 더하고, 인위적인 풍경과 시설을 빼다보니 느껴지는 투박함 때문이 아닐는지….



▲ 자작나무 숲 미술관의 야외정원 자작나무가 어우러진 야외정원엔 잔디가 깔려 있고, 의자와 탁자가 놓여 있습니다

자작나무 숲 미술관은 두개의 전시관과 야외공연장, 카페정원, 두 채의 펜션 등으로 이뤄져 있고, 야외정원 건너편으로는 자작나무가 식재된 산책로가 있습니다. 숲 속에 자리잡은 원종호 선생의 스튜디오와 전시관, 자연 그대로를 만끽 할 수 있는 펜션, 푸른 잔디 위에 조성되어 있는 야외정원은 여유롭게 흐르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배려의 공간들입니다. 자작나무가 전시관 건물의 일부분이 되어 지붕을 뚫고 자라기도 하고, 몇 그루씩 무리지어 자라는 자작나무 아래 시원한 그늘에는 의자와 탁자가 놓여 있기도 합니다.


▲ 자작나무 숲을 따라 나 있는 산책로 야외정원 건너편으로는 자작나무 숲을 따라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자작나무는 하얀 껍질이 인상적인 나무입니다. 이른 봄 연녹색의 잎이 나기 시작하거나 가을 단풍으로 잎이 모두 떨어진 뒤 추위가 찾아오기 시작하면 자작나무는 그 빛을 발합니다. 더구나 숲을 이룬다면 더없는 아름다움을 선사합니다. 그래서인지 서양에서는 자작나무를 숲속의 여왕이라 부르기도 하고, 귀족들의 정원에는 이 자작나무를 꼭 심었다고 합니다.

 

자작나무는 불에 잘 타고, 습기에도 강한 데다 껍질에 부패를 막는 성분이 들어있어 오래 전부터 우리 민족과 함께한 나무입니다. '화촉'을 밝힐 때 쓰이던 나무도 자작나무였고, 경주 천마총의 장니에 그려진 천마도에도 자작나무의 껍질이 쓰였습니다. 합천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에도 산벚나무, 돌배나무와 함께 자작나무가 섞여있다고 합니다.


▲ 야외정원에서 마셔보는 자작나무 수액 자작나무 숲 미술관 야외정원은 음료를 마시며 편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일요일(17일) 오후인데도 찾는 이들은 드문드문 한적하기 그지 없습니다. 야외정원의 자작나무 아래에 마련된 의자와 탁자에서는 커피나 음료 등을 마시며 한껏 여유를 부릴 수 있습니다. 야외카페에선 커피 등 여러 음료 외에도 자작나무 수액을 마실 수도 있습니다.

 

자작나무에서도 수액이 난다는 것은 처음 들었는데, 고로쇠처럼 맑은 수액입니다. 마시면 수박향처럼 단내음이 살짝 나고, 상쾌함이 느껴집니다. 그리 많이 추출되는 수액이 아닌데다 고로쇠 수액처럼 장기 보존이 어려워 다소 비싸긴 하지만 한 번쯤 마셔볼 법도 합니다. 백화점 등지에서 핀란드산 자작나무 수액이 비싸게 팔리고 있다고 하는데, 국산 자작나무 수액을 마실 수 있는 것도 어쩌면 하나의 행복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자작나무 숲 미술관의 매표소이자 카페 자작나무 숲 미술관 야외정원에서는 매표를 한 뒤 음료를 마실 수 있습니다. 음료를 마시면 입장료는 받지 않습니다.

 

자작나무 숲 미술관을 운영하시는 원종호 관장님도 잠시 뵈었습니다. 만 주가 넘는 자작나무를 심었는데 그동안 많이 고사했다고 합니다. 알락하늘소가 자작나무에 알을 낳고, 유충이 자작나무에 기생하면서 나무껍질과 목질를 파먹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럼 살충제를 써보시는게…"라고 말을 하고나서 그만 실수했음을 느꼈습니다. 이곳 자작나무 숲 미술관의 모든 나무, 풀, 숲 등이 바로 전시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연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고, 화학비료나 살충제 등을 쓰지 않고 직접 사람의 힘으로 가꾼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작나무 숲 주변에서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를 간혹 들을 수 있는데 딱따구리가 알락하늘소의 천적이라 합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청아한 딱따구리 소리도 자주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자연과의 조화를 꿈꾸는 곳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 자작나무 숲 미술관의 제1전시관 제 1전시관에는 사진작가이자 원장이신

원종호 선생의 자작나무 사진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제 1전시관에는 원종호 선생의 자작나무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변화무쌍한 사계 속에서 만나는 자작나무 숲은 묘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특히 가을과 겨울 자작나무 숲 사진은 계절이 찾아오면 다시금 찾고 싶게 만들기도 합니다. 적막하면서도 쓸쓸한 느낌이 절로 드는 자작나무 숲의 표정이 가슴에 파묻힙니다.

▲ 조망언덕에서 바라본 미술관 전경 산책로를 따라 철쭉 동산, 조망 언덕, 야생화 언덕이 펼쳐져 있습니다.

산책로에 들어서면 자작나무 숲을 오롯이 지나며 철쭉동산, 조망언덕, 야생화동산 등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산책로를 오르는 길은 일일이 제초작업을 해서 만든 길입니다. 인위적인 로프나 계단을 설치하지 않아 마치 등산로를 따라 걷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정상인 야생화 동산까지 올라가는 동안 수십 년을 자란 자작나무가 하늘을 메우고, 다소 어두운 배경 속에 자작나무가 하얗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야생화 동산에 올라서면 저 아래로 소소한 미술관 풍경이 펼쳐지고, 자작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가녀린 소리와 떨림을 전합니다. 의자나 하나 있으면 잠시 주저 앉아 자작나무가 전하는 바람의 소리를 엿들을 텐데….

 

산책로를 한 바퀴 돌고 터덜터덜 비포장도로를 달려 나가는 길…, 들어설 때의 거친 느낌은 이내 사라지고 사람이 만들어가는 자연의 투박함이 만드는 길, 자연에 자연을 더한 길이기에 기쁘게 달립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바실리카 열린공론장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자작나무 숲 미술관 여행정보
★ 가는 방법 :
① 6번 국도 추동교차로에서 새말IC방면 442지방도 이용, 횡성테마랜드(토지세트장) 지나 둑실마을 표지판 보고 좌회전해서 둑실마을 끝까지 가시면 됩니다.
② 영동고속도로 새말IC에서 내려 횡성읍 6번국도 방향으로 직진 후 둑실마을 입구에서 우회전해서 둑실마을 끝까지 가시면 됩니다.
★ 입장료 : 입장료는 2,000원이며, 음료를 마실 경우 입장료는 면제됩니다.
★ 입장기간 : 매년 5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오전 10시∼오후 8시(연중무휴)

출처 - tfh.or.kr 카리스마님

출처 - 프레시안 2008-08-27 오전 9:26:47

식민주의와 그 역사적 유산 ④
식민사회와 '정치적 협력자'의 문제

식민사회의 사회적 구성
 
  식민세력이 들어오며 식민지의 전통적인 사회 구조도 무너지게 되었다. 새로 유럽인들이 지배계급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새로이 복잡한 사회구조가 만들어졌다. 이것은 중남미의 경우 특히 더 그렇다.
 
  유럽인, 원주민, 아프리카에서 들어온 흑인 노예들이 뒤섞이며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아주 복잡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지역에 들어온 스페인 사람들이 원주민 여자들과 섞여 살며 혼혈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후손인 메스티조를 우대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래서 피부 색깔에 따라 맨 위에 있는 순수 혈통의 백인으로부터 여러 형태로 피가 뒤섞인 혼혈인, 그리고 인디오로 불린 원주민, 아프리카인의 복잡한 사회적 계층 질서가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백인이고 어머니가 흑인인 경우에는 그 자식이 물라토, 아버지가 백인이고 어머니가 인디오인 경우에는 메스티조, 아버지가 백인이고 어머니가 메스티조일 경우에는 크레올레 등으로 각각 달리 불렸다. 그 계층이 무려 23개나 되며 그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달랐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인종에 따른 이런 사회적 구분은 식민시대에는 물론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순수 백인 혈통을 잇는 사람들이 아직도 지배계급으로서 사회의 최상층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2001년에 페루 대통령으로 인디오 출신인 똘레도가 뽑힌 것은 큰 변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식민주의로 인해 사회가 새롭게 구성되지는 않았다. 대신 식민당국의 지배 아래 두 개로 나뉜 별도의 사회들이 만들어졌다. 하나는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사회이고 다른 하나는 식민통치자들의 소수파 사회였다.
 
  아프리카 식민지의 경우 백인들은 혼혈을 꺼려했다. 열등한 흑인들과 피를 섞으면 백인이 가지고 있는 인종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잃게 된다고 믿었고 또 자신들을 아프리카 사회와는 완전히 단절된 지배자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혼혈인들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적었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차별을 받았다. 이런 흑백분리가 가장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얼마 전까지도 유지되었던 남아프리카연방의 흑백분리정책이다. 울타리를 쳐서 거주지역까지도 분리시켰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여성들에 대한 성적인 착취는 일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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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의 거리 풍경 (1906년). 골드러쉬로 많은 인종의 사람들이 이 도시로 몰려 들었다. 그림에서 보듯이 유럽인은 왼쪽의 포장된 길을 사용하고 아프리카인들은 흙길을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아시아의 전통적 사회구조는 매우 강인했고 또 높은 문화수준을 갖고 있었으므로 유럽인들이 그 사회를 깨뜨리고 새로운 사회구조를 만들 수는 없었다. 처음에 일부 지역에서 혼혈정책이 취해지지 않은 것은 아니나 얼마가지는 못했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와 마찬가지로 식민자들의 사회와 식민지인의 사회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두 사회를 연결하는 집단이 존재한다. 선교사나, 통역자, 중개인, 또는 식민세력에 대한 '정치적 협력자'들이다. 우리로 치면 친일파와 같은 사람들이다.
 
  '협력 이론'과 그 반동성
 
  이 중간집단 가운데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적 협력자'들이다. 이들은 식민세력에 협력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이익을 얻거나 아니면 그들이 이미 누려오던 기득권을 보호받은 집단을 말한다. 반면 식민세력은 이들을 이용하여 적은 비용으로 식민지를 통치할 수 있다.
 
  '협력(collaboration)'이라는 개념을 식민주의 연구에 본격적으로 도입한 사람은 존 갤러거와 로날드 로빈슨이다. 이들은 1950년대부터 협력이라는 개념을 식민주의의 전체 과정을 설명하는 데 사용했다.
 
  그래서 1880년대에 신제국주의가 등장한 것은 그때까지 유지되던 식민지인들의 협력체제가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신제국주의는 그것을 무력에 의해 다시 복구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또 2차 대전 후에 식민주의가 끝나게 된 것은 더 이상 협력체제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식민세력이 협력자들을 완전히 잃은 결과라는 것이다.
  그들의 '협력이론'이 식민지인들의 협력에 초점을 맞춘 점에서 식민지 통치를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식민통치가 언제 어디서나 일방적인 억압이나 강제에 의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이론이 일부 지역 식민지의 통치방식이나 식민주의가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도록 자극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이론을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그 이론이 잘 적용될 수 있는 나라는 인도 외에 별로 없기 때문이다. 영국의 인도 식민지화는 무굴 제국이 망한 후 20여 개로 분열된 인도의 정치세력들과의 동맹이나 제휴, 협력에 의존했다.
 
  따라서 식민지로 만든 뒤에도 인도인 토후들에게 어느 정도 권력을 나누어 준 간접통치 방식을 취했다. 그러나 다른 식민지역에서의 정치적 협력은 자발적이라기보다 대개 억압의 산물이다.
 
  신제국주의나 2차 대전 이후 식민지해체 국면에서 주로 작용한 힘도 협력이 아니라 식민국가들과 식민지 사이의 힘의 관계이다. 협력이 있느냐 없느냐, 또 있다면 그것이 어느 정도냐 하는 것이 대체로 둘 사이의 힘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협력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은 식민국가들이 힘의 관계에서 식민지인에게 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사람은 그 인과관계를 거꾸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이론의 문제점은 다른 곳에도 있다. 식민지배가 식민지인의 협력에 의해서만 가능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식민주의의 책임이 식민국가들보다 식민지인에게 있는 것처럼 전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민통치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협력이 아니라 강제력에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장은 식민주의를 옹호하는 얄팍한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
 
  또 다른 문제점은 19, 20세기에 서양을 본받아 근대화하려던 모든 비서양 세계 사람들을 협력집단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서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제를 복구한 사무라이들까지도 협력 집단에 집어넣고 있다. 협력이라는 개념을 지나치게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명치유신을 단행한 사무라이들의 근본적인 목적은 자국을 근대화함으로써 서양의 제국주의에 대항하려는 것이었지 서양 국가들과의 협력이 아니었다. 물론 그 가운데 일부 협력이 나타날 수는 있으나 그것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이렇게 이 이론은 비양심적이기도 하지만 이론으로서 정밀하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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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8년의 메이지 유신을 준비한 사이고 다카모리, 사카모토 료마를 포함한 일본의 급진적 사무라이들. 이들은 일본을 천황제로 바꾸어 근대 국가로 만들면서 서양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였지만 그렇다고 이들을 서양국가의 정치적 협력자로 볼 수는 없다.

  그런데 이런 엉터리 이론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소비되는 방식을 보면 참 기가 차지도 않다. 최근에 일부 반동적인 학자들이 친일파를 옹호하며 그들을 근대화론자로 찬미하고 있는데 그 이론적 바탕이 바로 이 협력이론이기 때문이다.
 
  이미 반세기가 지난 낡은 이론이고 타당성이 거의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최신 이론인 양 포장해 내 놓는 학자들의 뻔뻔스러움은 이야기할 가치조차 없다. 어떤 식으로든 이해관계가 걸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명색이 한 나라의 집권 여당이라는 정당이 그런 천박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근대화'니 '선진화'니 하고 떠들어 대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근대화만 되면 친일도, 독재도, '무조건 친미'도 좋다는 말인가. 그렇게 해서 어떻게 나라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겠는가.
출처 - 프레시안 2008-08-22 오전 9:23:29

식민주의와 그 역사적 유산 ③
식민지의 경제적 착취

경제적 주권의 박탈과 경제의 기형화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처음 건설한 스페인 왕실이 계속 관심을 가졌던 것이 귀금속의 착취였던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식민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처음부터 경제적 착취이다. 정착식민지의 경우 식민자들은 원주민들로부터 토지를 아예 강탈했으니까 이야기할 것조차 없다.
 
  착취식민지는 이와는 달리 사람에 대한 착취와 물질적인 착취가 함께 목적이므로 경제적 착취는 바로 식민지의 존재 이유가 된다. 그러나 당장의 직접적인 착취만이 피해를 준 것은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것은 그것이 장기적으로 식민지의 경제구조를 왜곡시키고 기형화함으로써 경제적 자립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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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콩고식민지에 대한 벨기에 레오폴트 2세의 가혹한 착취를 상징하는 그림(1906). 콩고는 레오폴트 2세의 개인식민지로서 그 착취는 악명이 높았다.

  식민지 경제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식민지인들이 조세나 무역, 화폐 제도 등에서 주권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식민지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킬 수 없게 되고 자신들의 복리를 위한 경제정책을 취할 수 없게 된다.
 
  또 식민지의 경제관계는 주로 식민 모국과 맺어지게 마련이므로 서양국가들이나 일본 경제에 하위 파트너로 밀접하게 통합된다. 그래서 과거에 다른 나라나 주변 지역들과 맺고 있던 전통적인 경제적 관계들은 깨어진다. 그러니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역도 주로 모국과 이루어질 뿐 아니라 무역제도도 모국에게 유리하게 시행된다. 그리하여 모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수입품에 대해서는 무방비 상태가 되는 반면 높은 관세 장벽 때문에 모국으로의 수출은 불가능하게 된다.
  그 결과 싼 가격으로 밀려들어오는 공산품 때문에 식민지에서 발전하던 수공업이나 산업들은 붕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식민지가 모국의 공산품 시장으로 전락하며 스스로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식민주의자들이 식민지에 철도나 도로, 통신시설, 학교, 농지개간이나 수로 정비 사업 등 사회기반 시설들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특히 철도의 건설은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식민지로부터 원자재를 반출하고 식민지를 모국경제에 보다 밀접하게 통합하기 위한 수단이었지 진정으로 식민지인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인들이 조선에 들어와 가장 먼저 한 일인 경부철도의 건설이 러일전쟁을 위한 군사적 목적 때문이었던 것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이런 자금은 식민지에 대한 가혹한 세금 수탈로 확보된 것이다. 결코 식민당국의 시혜가 아니다.
 
  시기에 따라 식민지의 경제정책이나 제도들이 여러 형태로 변화하기는 했지만 어떤 것이건 식민지 사람들의 경제적 이익이나 자립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식민주의자들이 가져다 준 일부 혜택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요사이에 우리나라에는 일본의 비양심적인 학자들을 따라 '식민지 근대화론'을 내세우며 일제시기에 일본인들이 산업화의 기반을 만들어주었다는 등의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하는 정신 나간 학자들이 있다. 식민지시기에 한국 자본주의의 기틀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식민지 경제가 기본적으로 식민모국을 위해 봉사한다는 초보적인 사실조차 부인하는 이야기이다. 또 우리가 독립한 상태에 있었다면 그 정도도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인데 참으로 자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없는 너절한 주장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강제노동과 토지의 약탈
 
  많은 지역에서 식민주의자들은 식민지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 드물게 노예제도를 채용한 곳도 있기는 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강제노동이 행해졌다.
 
  16세기에 중남미 지역에서 노동력을 필요로 했던 스페인인 지주들은 원주민들을 엔코미엔다라는 제도에 의해 자신들에게 예속시켰다. 스페인 왕이 수여한 권리에 따라 주변 마을 사람들에게 정해진 만큼의 노동을 해 주도록 강요하는 강제노동 제도였다.
 
  아프리카 지역에서도 대가를 지불하건 안 하건 강제노동은 일반적인 노동착취 형태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아프리카 사람들이 대거 동원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아시아 지역에서도 같다. 네덜란드 사람들도 자바 지역에서 커피를 생산하며 중남미에서 비슷한 형태의 강제노동 제도를 이용했다. 일본도 2차대전 때 수많은 조선인들을 군대나 공장에 징용함으로써 노동력을 착취했다.
 
  강제노동보다 더 문제가 심각한 것은 토지의 약탈이었다. 북미지역에서와 같은 '뉴잉글랜드' 형태의 정착식민지에서는 원주민들이 살던 땅에서 모조리 쫓겨났다. 그들은 싸우다 죽던가 아니면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로 쫓겨났다. 한국인들이 이를 '인디언 보호지역'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 알고 하는 소리이다.
 
  다른 지역에서도 기름진 땅들은 거의 정착 식민자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멕시코나 알제리, 로데시아, 남아프리카, 조선 어디에서도 일어난 일이다. 식민지인들은 자신이 농사짓던 땅들을 빼앗기고 소작인, 품팔이 농사꾼이 되거나 다른 곳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일제시기에 전라도의 넓은 평야가 거의 일본인 지주의 손에 넘어간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식민자들은 수출을 목적으로 하는 대규모 농장인 플랜테이션들을 만들어 식민지 농민들의 생활을 전체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사탕수수, 커피, 차, 바나나, 면화, 고무 등 수출용 환금 작물들을 생산하는 농장들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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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 시대 북로데시아의 담배플랜테이션을 선전하는 포스터. 백인들은 플랜테이션이 원주민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강변했다.

  그리하여 일부 식민지의 경우에는 수출작물을 생산하느라고 자신들이 먹을 식량을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모자라는 식량을 높은 가격에 수입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이는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또 이런 경제구조는 그 사회의 성격도 결정지었다.
 
  수출작물의 생산을 통해 큰 돈을 벌고 식민세력의 비호를 받는 백인이나 소수의 원주민 지주세력은 그 사회의 특권적 지배계급이 된 반면 대다수의 농민들은 땅을 잃고 빈민으로 전락하며 엄청난 빈부 차이가 생긴 것이다. 오늘날 중남미 국가들이나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이런 큰 빈부 격차는 바로 식민지 경제의 유산이다.
 
  식민지의 탈산업화
 
  이런 점에서 제 3세계 학자들은 식민 착취가 식민지인들에게 경제적 궁핍을 가져다 준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식민국가의 경제에 기형적으로 예속됨으로써 자생적인 발전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그것을 통해 유럽국가들은 산업화를 이룰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 여기에서 비롯된 경제적 예속성이 독립 이후에도 제 3세계가 선진국과의 교역에서 부등가 교환을 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산업이 발전하지 못한 제 3세계는 값싼 열대작물들과 가격 변동이 매우 심한 광산물이나 팔고, 대신 자동차나 정밀기계 같이 부가가치가 높은 공산품들을 사들여야 하니 계속 부를 유출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식민지배가 식민지 산업의 싹을 잘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유럽중심주의적인 서양학자들은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착취를 부정하는 것은 물론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 해도 이들 지역에서 경제가 발전했을 가능성을 부정한다. 그래서 일부 조건이 좋은 국가들의 경우는 예외이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기술적, 정치적, 경제적 여러 조건들을 갖추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나라들이 그런 조건들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이들은 산업화를 식민주의의 결과로 보지 않고 식민주의를 산업화의 결과로 주장하기도 한다. 산업화로 인해 커진 힘이 비유럽의 식민화를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D.필드하우스가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영국과 인도와의 관계만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면직산업 성장에 있어 벵골 식민지가 한 기여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중요한 식민국가들의 경우에는 대동소이하다. 19세기 말의 후발 식민국가들을 제외하면 이들 나라의 식민주의는 다 산업화보다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게다가 보호관세 없이 식민모국의 공산품 시장이 된 상황에서 식민지들이 스스로 산업을 발전시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18세기까지 이익이 많이 나는 면직물 산업에서 세계에 군림했던 인도가 영국의 식민통치를 겪으며 완전히 탈산업화된 것을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또 서양학자들 가운데에는 착취를 인정하기는 하나 유럽국가들이 많은 것을 얻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P.베록이 그런 사람이다. 그는 식민주의는 산업화로 인해 생긴 힘의 격차 때문이라고 믿으나 그래도 착취를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서양이 식민주의로부터 많은 것을 얻지 않았다고 해서 제3세계가 많은 것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탈산업화를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착취를 통해 유럽이 잘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으니까 이런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사실은 '제3세계에게도 좋은(굿) 뉴스'라고 말한다. 유럽이 식민지를 착취하지 않고도 잘 살게 되었으니까 식민지가 없는 제3세계도 앞으로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식민주의적 착취로 깊은 나락 속에 빠져 있는 제3세계의 암담한 현실을 모르고 하는 엉터리 소리이다.
 
  유럽중심주의적 서양학자들이 얼마나 비도덕적이고 제멋대로의 주장을 하는지 이를 통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부문별하게 받아들여 '굿 뉴스'를 연발하는 국내학자들도 있으니 참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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