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문화일보 : 언제 달려가도… 어디서 바라보아도… 충만한 한 폭의 그림을 간직한 바다 |
# 눈 내리는 해질녘에 거진항의 방파제 끝에 서다 강원 고성군 거진포구의 아름다운 풍광은 방파제 끝에서 만날 수 있다. 난바다 쪽으로 불쑥 나온 방파제 끝에서 바다를 등 뒤에 두고 돌아서면 거진의 포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쪽에서 바라본 거진 포구는 이른바 16대9 비율의 파노라마 대화면이다. 저 멀리 시선이 닿는 왼쪽 끝부터 오른쪽 끝까지 태백준령의 능선들이 주르륵 펼쳐진다. 눈 덮인 산들은 마치 고성 일대의 해안 마을을 호위하듯이 내달린다. 거진 포구 안쪽의 물은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진한 청색이다. 그 청색 바다를 끼고 활처럼 휘어진 포구에는 야트막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가슴 아래까지 오는 장화를 신은 어부들이 홍게잡이 그물을 손질하다가 피워놓은 장작불 앞에 모여들어 곱은 손을 편다. 갈매기 몇마리 한가롭게 나는 겨울날의 오후, 어느 어선에서 틀어놓았는지 라디오에서 나오는 흘러간 팝송이 느슨하고 또 나른하다. 이른 새벽의 펄펄 뛰는 생명력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거진항의 최고의 시간은 해질 무렵이다. 밤 바다의 색조가 푸른 것은 제주뿐만이 아니다. 거진의 바다도 해질 무렵이면 신비로운 푸른 색조로 가득하다. 산 능선쪽으로 해가 설핏 넘어가면 푸른 밤바다를 끼고 있는 포구와 언덕 비탈면에 들어선 집들에 하나둘씩 노란 등불이 켜진다. 잔잔한 포구의 바다 위에 어른거리는 불빛은 따스하다. 이윽고 포구 마을 뒤쪽의 소나무 숲 위로 흰 등대에 불이 켜졌다. 등대의 빛은 밤바다의 고깃배를 향한 것이긴 하지만, 방파제 끝에 선 여행자에게도 안온함을 안겨준다. 하루 종일 내린 눈이 저녁이 돼도 그칠 기색이 없다. 포구에 매여있는 목선 위에도 눈이 한뼘쯤 쌓였다. 이런 날에는 김이 뿌옇게 서리는 미닫이문을 가진 선술집의 목제 의자에 앉아 따끈하게 데운 술잔을 앞에 놓아보면 어떨까. 눈 내리는 푸른 밤바다를 내다보면서…. # 송지호에서 황홀한 설경에 마음을 빼앗기다 거진항에 닿기 전에 흩날리는 거세진 눈발 속에서 송지호(사진)에 먼저 들렀다. 동해안에는 오랜 세월 바람과 파도에 쓸려온 모래가 만을 막아 만들어진 석호가 있다. 동해안을 끼고 만들어진 석호는 화진포, 영랑호, 경포호 등 8개에 달한다. 이중 속초에서 고성쪽으로 14㎞쯤 올라가다 보면 만나는 송지호는 다른 석호에 비해 잘 알려지지는 않았으되,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아름다운 풍광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철마다 송지호에 들러봤지만, 아무래도 겨울 무렵의 정취가 가장 빼어나다. |
송지호는 호수가 아니라 해수욕장을 일컫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호수가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동안 7번 국도가 송지호를 무심히 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2006년 송지호를 끼고 철새탐조대가 들어서면서, 이 건축물의 위용에 이끌린 관광객들이 하나 둘 송지호를 찾고 있다. 경포호나 화진포처럼 호수를 도는 도로는 없지만, 자연 그대로의 호수 모습이 더 마음을 끌어당긴다.
조형적인 건축미를 뽐내는 탐조대는 철새들의 생태를 소개하는 전시물로 가득 차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정작 겨울이면 찾아온다는 청둥오리며 쇠기러기, 고니들의 자취는 찾아보기 힘들다. 철새를 보여주는 탐조대의 역할로는 낙제점인 셈이다. 하지만 탐조대에서 호수로 이르는 길의 정취와 아름다운 겨울 호수, 그리고 호수 뒤편으로 태백준령이 첩첩이 겹쳐진 풍광은 그것만으로도 탄성을 자아낸다.
송지호에 눈이 내리면 모두 흑백의 세상이 된다. 호수로 이르는 길의 소나무숲에는 온통 눈이 얹혔다. 그 길을 걸어서 호수 앞에 서면 살짝 얼어붙은 수면에 건너편 언덕 위 송호정의 물그림자가 비춰 보인다. 물이 그렇게 맑을 수 없다. 멀리 눈을 이고 있는 태백의 능선과 흰 눈이 덮인 소나무숲, 그리고 투명하고 맑은 물. 이 겨울에 7번 국도를 따라 여행을 나선다면, 그리고 마침 그 길에 눈발이 날린다면, 송지호를 목적지에서 빼놓을 수 없다. 철새가 다 떠나고 없더라도….
# 해안을 따라 늘어선 정자에 눈 내리다
겨울 동해안을 따라가는 행로는 그저 해안선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황홀하다. 7번 국도와 해안도로를 번갈아 타고 가는 길은 지도가 없어도 좋다. 길은 겨울바다와 해안선이 안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안선만 따라가자면 지루하다. 바다를 바라보는 눈높이를 바꾸는 것이 이런 지루함을 덜어버리는 요령이다.
양양에서 북쪽으로 속초와 거진, 고성쪽으로 향하는 해안도로는 오르내림이 없이 거의 평지를 달린다. 그래서 이 길에서 다채로운 바다의 표정을 제대로 만나자면 경관 좋은 바다 언덕에 세워진 정자에 올라야 한다.
동해고속도로 현남나들목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머리를 돌리면 처음 만나는 정자가 하조대(사진)다. 조선시대 개국공신인 하륜과 조준이 이곳에서 만년을 보내며 교우했다고 해서 성을 따서 하조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조대는 내려다보는 해안 경치가 으뜸이다. 바다보다는 우뚝 솟은 기암절벽에 힘차게 솟아있는 노송이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전형적인 ‘관념 산수화’의 구도. 실제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임에도, 그 풍경이 한폭의 산수화도 같아, 진경이 아닌 이상향을 그려낸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간성의 청간정은 설악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청간천과 동해가 만나는 야트막한 벼랑에 자리잡고 있다. 청간정에 올라서면 겹겹이 밀려오는 동해의 파도를 볼 수 있다. 청간정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현판이 누각 안쪽에 달려있고, 최규하 전 대통령의 휘호도 걸려 있다. 비록 관동팔경에는 이름을 얹지 못했지만, 청간정에서 아야진 고개를 넘어가서 만나는 천학정은 고성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장엄한 동해의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신년 첫날도 아니고, 동해 해돋이를 꼭 신새벽 칼바람이 몰아치는 천학정에 올라서 봐야 할 이유는 없겠다. 숨가쁜 무박일정의 여행이 아니라면 차라리 바다가 내다보이는 숙소를 잡아놓고 편안하게 일출을 감상하는 편이 더 나을 듯하다.
# 왕곡마을에서 포근한 눈을 덮고 있는 초가집을 만나다
해안도로를 달리는 여행이 단조로워진다면, 날이 선 겨울바다의 바람이 매섭게 느껴진다면 송지호 인근의 왕곡마을(사진)을 찾아가는 것은 어떨까.
거친 겨울바다가 쿵쾅거리는 심장의 고동을 높여준다면, 전통마을의 소박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왕곡마을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준다. 이틀째 내린 눈으로 왕곡마을의 돌담을 따라 눈이 소복하게 쌓였다. 지난 가을 이엉을 얹은 초가집 지붕 위에도 둥근 지붕모양 그대로 소복하게 눈이 덮였다.
눈 덮인 왕곡마을의 풍경 앞에 서면 시간의 태엽을 30~40년전쯤으로 되감은 듯한 느낌이다. 옛 풍경이되, 남루하지 않고 지나치게 깔끔한 것이 좀 생소하긴 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진짜 옛것’의 풍경을 기대하는 것은 욕심일 터. 그곳에 깃들여 사는 사람들의 편리함과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지자체의 의욕까지 나무랄 일은 아닐 듯싶다.
그래도 백두대간 동쪽에 이런 전통마을은 경북 영덕의 괴시리마을과 이곳 단 두 곳뿐이다. 영덕의 괴시리가 너른 영해뜰을 끼고 있는 대가집들이 모여있다면, 이곳은 그야말로 소박한 한옥과 초가집들이 옹송옹송 처마를 맞대고 있다. 위용을 자랑하는 솟을대문과 운치 있는 누정 따위는 찾아볼 수 없지만, 소박해서 더 정감이 넘치는 곳이다. 마을 어귀에 차를 대놓고 돌담길을 따라 이곳저곳을 기웃거려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깨끗하게 헹궈지는 기분이다.
아무 준비 없이 떠날 수 있는 여정. 비유하자면 한국사람들에게 동해의 해안도로는 마치 ‘좋은 여행’이 예치된 예금통장 같은 것이다. 늘 꺼내서 써도 곧 채워지는 곳. 계절을 바꿔서 달려가도 늘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곳. 그곳을 겨울이 다 가기 전에 가보면 어떨까. 대설주의보가 내린 날을 겨눠서 찾아가 눈부신 설경을 만나는 행운을 누린다면 아마도 ‘목돈의 적금을 타는 기분’이지 않을까.
속초·양양·고성 =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