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매경 2005.11.23


퇴직연금 재테크

‘순간의 선택이 노후를 좌우한다’.

동일한 월급을 받고, 같은 기간 동안 근무했다 해도 어떤 퇴직연금을 선택하느 냐에 따라 퇴직연금 수령액이 달라진다.

올 12월부터 도입될 퇴직연금은 현행 퇴직제도와 여러 면에서 다르다. 무엇보 다도 근로자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실정에 맞는 퇴직연금 상품을 선택해야 한 다. 사업주도 여러 가지를 감안해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노사간에 불협화음이 생길 수 있다. 노사합의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 다.

과연 내 몸에 맞는 퇴직연금은 어떤 유형일까. 근로자와 사업주 입장으로 나눠 고려 사항이 무엇인지 진단했다. 또한 퇴직연금을 관리하고 운영할 금융회사들 은 어떤 점을 내세워 고객을 유인하고 있는지도 짚어봤다.

퇴직연금제도가 뿌리를 내리려면 보완해야 할 점도 많다. 과연 퇴직연금 제도 를 운영하는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어떤 차이가 있으며 보완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 전문가 시각을 들어봤다.

■내 몸에 맞는 퇴직연금은 : 근로자■

Q> 퇴직연금으로 언제 전환하는 게 좋을까.

A> 현행 법정퇴직금은 퇴직 해당년도 연봉의 월평균 급여를 근무연수에 곱해 지급하는 형식이다.

만약 퇴직금 누진제가 적용되는 회사에 다닌다면 서둘러서 퇴직연금으로 전환 할 이유가 없다. 수익률 개념으로 따졌을 때 퇴직금 누진제가 훨씬 유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퇴직금 누진제가 적용되지 않는 회사라면 재무건전성과 임금상승률이 퇴직연금 전환의 중요한 잣대다. 재무건전성이 열악한 회사라면 서둘러서 전환하는 게 좋다. 또한 사양산업에 속해 임금상승률이 낮거나, 앞으로 연봉이 줄어들 가능 성이 있다면 가능한 빨리 퇴직연금으로 전환하는 게 유리하다.

현재 퇴직보험이나 퇴직신탁에 가입한 회사라도 2010년까지 무조건 퇴직연금으 로 전환해야 한다.

 

Q> 퇴직연금으로 전환할 때 확정급여(DB)형과 확정기여(DC)형 가운데 어떤 것 을 선택하는 게 좋을까.

A> 수익률과 본인 취향에 따라 선택 기준이 달라진다. DB형은 확정된 퇴직금이 지급되는 퇴직연금으로 최소 현행 법정퇴직금 이상을 받을 수 있다. 설사 회사 가 운용실패로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했다고 해도 근로자에게 법정퇴직금을 지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DC형을 선택했다면 무조건 본인 책임이다. 마이너스 수익률을 올렸다면 퇴직 원금이 줄어들 수 있다. DB형 수익률은 임금상승률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임금상승률이 높다면 DB형을 선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류건식 보험개발원 팀장은 “임금상승률이 평균 4% 미만이라면 DC형을 선택하 는 게 좋다”는 입장이다.

 

Q> DB형과 DC형 퇴직연금은 누가 선택하는가.

A> 회사와 근로자 합의에 따라 결정된다. 근로자 의견을 무시하고 회사가 임의 로 선택할 수 없다. 회사는 50% 이상의 근로자가 소속된 노동조합의 뜻을 물어 야 한다. 노조는 DB형과 DC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지 아니면, 조합원 뜻에 따 라 각자 알아서 선택할지를 투표로 결정할 가능성이 높다.

만약 조합원 80%가 DB형을 선택했다면, 나머지 20%도 DB형을 선택하게 할지, 아니면 80%만 DB형을 선택하고 나머지 20%는 DC형을 선택하게 할지도 결정해야 한다.

근로자들의 불만이 발생하지 않게 하려면 근로자 마음대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할 가능성이 높다. 같은 부서원이라도 어떤 사람은 DB형을 또 다른 부 서원은 DC형을 선택할 수 있다.

 

Q> DC형을 선택했을 경우 장단점은 무엇인가.

A> DC형을 선택하면 기존 근무 기간에 대해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받을 수 있는 게 특징이다.

일시금을 다시 DC형에 넣을 수도 있고,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다. 근로자 들이 DC형을 선택했으나, 회사가 일시에 기존 퇴직금을 지급할 수 있는 재정적 인 여유가 없다면 노사 협의에 따라 일정 기간 동안 분할 형식으로 지급할 수 있다. 반면 DB형을 선택하면 기존 퇴직금을 일시금 형태로 받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무엇보다도 근로자 자신의 책임으로 자유롭게 투자 상품을 선택할 수 있는 게 최대 장점이다. 그러나 손실을 입었을 때 자신의 책임이란 점을 명심해야 한다 .

 

Q> 회사가 과거 퇴직금을 지급할 여력이 없을 경우 어떻게 되나.

A> DC형 퇴직연금을 선택하면 과거 퇴직금을 중간 정산할 수 있다. 퇴직금을 받아 개인적으로 쓰거나, DC형 퇴직연금에 불입할 수도 있다.

만약 회사가 과거 퇴직금을 지급할 여력이 없는 경우엔 5년 이내에 분할상환하 거나, 과거 퇴직금에 한해 현행 퇴직금 제도를 운영해도 된다.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노사합의가 뒤따라야 한다.

만약 향후 퇴직금이 줄어들 가능성이 있는 회사에 속한 근로자라면 퇴직금 중 간 정산이 유리하다.

 

Q>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금융회사는 누가 선택하는가.

A> 퇴직연금제도를 보면 퇴직금 관리회사와 운용회사가 존재한다. 퇴직연금 수 익률에 영향을 미치는 곳은 운용회사이나, 관리회사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퇴 직연금 관리회사와 운용회사는 회사와 근로자가 합의해서 선택한다. 한 금융회 사에 관리회사와 운용회사를 통합해 맡길 수 있고, 분리할 수도 있다. 회사 입 장에선 주거래 은행이 퇴직연금 관리회사로 지정되는 게 유리하겠지만 최종 결 정은 노사합의가 있어야 한다.

DB형이라 해도 노사합의를 통해 선택해야 한다. 운영회사나 관리회사 모두 한 군데만 선택할 수 있다. 대상 금융회사는 은행, 생명보험, 손해보험, 증권사다 .

 

Q> 퇴직연금 운영 회사를 선택할 때 고려해야 할 점은.

A> 자산건전성이 좋은 금융회사를 선택하는 게 좋다. 예금보험공사는 금융회사 가 망하더라도 퇴직연금을 떼이지 않도록 하겠다고 하지만 DC형 퇴직연금을 예 금자보험에 포함시킬 수 없는 현실을 감안할 때 자산건전성이 높은 금융회사를 고르는 것은 필수다.

은행을 선택할 때엔 BIS(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 보험사는 지급여력비율, 증권사는 영업용 순자본비율이 중요한 판단 기준이다.

 

Q> 퇴직연금은 언제 받을 수 있을까.

A> 한 직장에서 계속해서 다닐 경우 기본적으로 55세가 됐을 때 일시금 또는 분할해서 연금형태로 받는다. 그러나 예외 조항이 있다. 무주택자가 집을 장만 할 때나 부양가족이 6개월 이상 요양이 필요할 때는 중도 인출이 가능하다.

 

Q> 퇴직연금 가입자가 중도에 회사를 옮기게 되면 어떻게 되나.

A> 회사를 옮기면 퇴직연금을 일시금 형태로 받을 수 있다. 만약 DC형 가입자 가 곧바로 다른 회사로 옮긴다면 기존 퇴직연금을 그대로 승계해서 적립할 수 도 있다. 퇴직연금을 찾아 개인퇴직계좌에 넣어둘 수도 있다.

 

Q> 개인퇴직계좌 가입 요령은.

A> 퇴직연금에 가입했던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 퇴직연금이 일시금 형태로 지급 되는 데 이 경우 개인퇴직계좌(IRA)를 활용할 수 있다.

개인퇴직계좌에 가입하면 55세까지 기다려서 일시금이나 연금을 받거나, 중도 해지도 가능하다. 개인퇴직계좌에 추가 불입은 불가능하다. 개인퇴직계좌 가입 중에 새로운 직장을 잡게 되면 별도로 퇴직연금에 가입해야 한다.

 

Q> 비정규직이나 5인 미만 사업장 종사자들도 퇴직연금에 가입할 수 있나.

A> 2008년 이후에나 시행여부가 결정된다. 2008년 이후 노동부장관이 시행시기 를 결정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1년 미만 근로자들은 퇴직연금 대상에 포함되 지 않는다.

▷잠깐 용어

·DB형 퇴직연금 : 확정급여(Defined Benefit) 형태로 퇴직금 급여 책임이 사 용주에 있다. 현행 퇴직금제도와 달리 수급권이 보장되나 퇴직금 지급액은 동 일하다.

·DC형 퇴직연금 : 확정기여(Defined Contribution) 형태로 퇴직금은 본인 책 임이며 운용 실적에 따라 퇴직금이 달라진다. 퇴직연금은 ‘근로자 퇴직급여 보장법’에 따라 시행된다.

[특별 취재팀 : 이제경 차장(팀장) / 김병수 / 명순영 / 김경민 기자]



내 몸에 맞는 퇴직연금은 : 사업주

Q> 확정급여형(DB)과 확정기여형(DC) 중 무얼 고를까.

A> 퇴직연금제도 핵심 이슈는 어떤 방식의 연금을 고르느냐다. 전문가들은 조 심스럽게 “기업 입장에서는 확정기여형이 낫다”고 얘기한다. 사용자는 정기 적인 기금 적립을 빼면 아무런 의무가 없어서다. 쉽게 말해 일정 액수만 꾸준 히 내면 사용자로서 역할은 다한 셈이다.

확정기여형의 기금 운용 위험부담은 전적으로 근로자에 있다. 이런 이유로 일 반적으로 사용자는 DC, 근로자는 DB를 선호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미국 기업도 확정급여형에서 확정기여형으로 옮기는 추세라고 한다. 강현철 우 리증권 차장은 “확정급여형은 기업이 내야 할 부담이 유동적이라 위험부담이 크다”고 말한다. 그는 “근로자도 능동적으로 안정자산에 설계할 수 있다는 장점이 부각되면서 DC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덧붙였다.

 

Q> 사용자에게는 확정기여형이 낫다는 얘기인가.

A> 그렇다고 사업주 입장에서 확정기여형이 낫다고 딱 잘라 말하기도 어렵다. 반대로 확정급여형을 살펴보자. 금융상황이 좋아 투자수익률이 임금인상률보다 높다면 확정급여형을 선택했을 때 기업 부담이 준다. 운용사를 잘 고르는 게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또 확정급여형은 60% 이상 사외에 적립하도록 했다. 최대 40%까지는 사내에 유 보할 수 있다는 뜻이다. 확정기여형의 경우 원칙적으로 새로운 퇴직연금을 100 % 사외에 적립시켜야 한다. 따라서 현금부담을 줄이는 제도는 확정급여형인 셈 이다. 현실적으로 기업으로서는 곧장 100% 사외 적립시키거나 중간정산하기가 힘들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노사합의로 퇴직금 처리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새로운 퇴직연금제도 도입 전의 퇴직금은 기존 제도대로 유지해 법정퇴직금으로 지급할 수 있다.

 

Q> 퇴직금제도를 꼭 없애야 하나.

A> 근로자뿐 아니라 사용자 입장에서 볼 때도 현행 퇴직금제는 문제가 많았다. 불규칙한 퇴직금으로 재무상황 예측이 힘든 게 가장 큰 애로사항이었다. 그렇 다면 올 12월 시행과 동시에 꼭 바꿔야 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현행 법정퇴직금제도에서 퇴직연금제도로의 전환은 어떤 법률적 요구사항도 없는 임의적인 형태다. 2010년까지는 현재의 법정퇴직금제도를 그 냥 운영해도 된다.

일정시점부터 확정급여형이나 확정기여형으로 바꾸면서 이전 퇴직금 제도는 그 대로 유보시킬 수도 있다. 이 퇴직금은 근로자가 회사를 떠날 때 법정퇴직금제 도에 따라 지급하면 된다.

그러나 법정퇴직금제도를 남겨두고, 정산도 하지 않은 채 퇴직연금제도로 바꾸 면 노조의 반발이 예상된다.

경영상황이 안 좋은 회사의 경우 부도가 났을 때 근로자가 유보된 퇴직금을 받 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첫 번째다. 또 법정퇴직금에 대한 이자 문제도 불거질 소지가 크다.

Q> 인사시스템, 기업문화 등이 어떤 영향을 끼치나.

A> 예를 들어 지난해 현대중공업과 현대차의 평균근속연수는 각각 17.4년과 13 .6년으로 길었다. 반면 LG전자와 삼성전자는 각각 7.4년과 6.8년에 불과했다. 근속연수가 길면 기업 근로자들이 확정급여형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회사가 안정적이라 근로자들이 위험을 안고 확정기여형으로 옮겨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

이는 기업문화와도 관련이 깊다. 확정급여형은 기존 퇴직금 제도와 비슷한 면 이 있다. 남상길 교보증권 과장은 “회사가 변화를 싫어하는 보수적인 성향을 가졌다면 편하게(?) 확정급여형으로 옮겨갈 가능성이 많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성주 한국투자증권 자산전략부장은 “자동차와 조선 등 업체는 근로 자의 고령화로 퇴직금 부담이 크다”며 “이들 업종의 퇴직급여 충당금 부채가 자기 자본 30%에 달한다”고 말했다. 확정급여형을 선택하면 할인율과 임금상 승률에 영향을 받아 기업에 부담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연봉제를 사용하는 사업장도 확정기여형이 적당하다. 남상길 과장은 “연봉제 는 퇴직금을 중간정산하기 때문에 사내에 40% 적립하는 DB형과는 맞지 않는다 ”고 밝혔다.

성과주의를 도입하는 회사는 어떨까. 이 경우도 확정기여형이 대세다. 확정급 여형은 개인 차등을 둔 퇴직금 산정이 쉽지 않아서다. 하지만 확정급여형도 누 진제 설계로 충분히 보완할 수 있다.서창환 팍스넷 컨설턴트는 “일반적으로 기업 수명이 짧은 사업장, 근로자수가 적은 중소기업은 DC형이 맞고, 기업 수 명이 긴 업종이나 공기업은 DB형이 적당하다”며 “근로자가 근무하는 기업이 안정적이며 임금인상률이 퇴직연금 운용수익보다 높을 경우는 DB형이 바람직하 다”고 말했다.

가입 시점은 언제가 좋을까. 강현철 차장은 가능한 빨리 선택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모든 상품은 발매 초기에 혜택이 많다”며 “손실이 났을 경우 상 품 혜택이 줄어들 수 있어 가능한 빨리 전환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다른 제도의 전환은 노사합의만 있으면 가능하다.

 

Q> 사업주 혜택은 없나.

A> 이번 제도가 사업주들에게는 부담만 주는 게 아닌지도 궁금하다. 일면 그런 면이 없지는 않다. 퇴직연금제도 아래서는 꾸준한 납입을 요구해 강제성이 적 은 퇴직보험제도보다 엄격하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근로자 퇴직 시 일시에 큰돈이 빠져나가지 않아 훨씬 안정적인 재무구조를 끌고 갈 수 있어서다.

세제 혜택도 낫다. 기존 퇴직금제도는 불이익을 받는다. 기존 퇴직금제도는 사 내에 40% 유보하고, 사외에 60%를 유치해도 100% 손비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내년부터는 사내 30%, 사외 70%를 예치해야 100% 손비를 인정받도록 했다. 사 외적립에 따른 세제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Q> 노사가 합의해 할 사항이 뭔가. 

A> 조종철 대신증권 퇴직연금 팀장은 “퇴직연금제 시행이 만만치 않을 것”이 라 전제한 뒤 그 이유로 노사협의의 어려움을 들었다. 실제로 이번 퇴직연금제 도의 성공적인 안착은 노사협의에 달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합의해야 할 사항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확정급여형으로 가느냐 확정기여형으로 가느냐부터 합의사항이다. 기존 퇴직금제도의 처리 방안 선택도 마찬가지다. 퇴직연금 관리회사와 운용회사를 고르는 작업도 노사 합의사항이다.

확정급여형으로 한다면 잠재적인 수익률을 몇%로 산정할 것이냐도 큰 관심사다 . 잠재적인 수익률을 높여 합의하면 회사가 부담할 금액이 줄어든다. 서창환 컨설턴트는 “지금은 화두에 오르지 않았지만 실무적으로는 큰 이슈로 작용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과거 근무기간을 새로운 제도에 포함시키느냐 마느냐도 중요하다.

적립금을 얼마나 쌓을 것인지도 정해야 한다. 확정기여형의 경우 적어도 연봉 의 12분의 1을 넣어야 한다. 사업주의 경우 법정 최저치를 고집할 수도 있다.

또 연금액을 얼마로 정할지, 연금지급대상은 누구로 한정할 지도 이슈다.

노조에게 상당한 인센티브를 줘야 할 상황도 생길 수 있다. 한 예로 확정기여 형 제도 도입을 추진한 한 건설사는 퇴직금 누진제로 전환해 100% 정산하기로 했다. 임금을 대폭 올려 근로자 반발을 무마한 것이다.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연봉제와 DC를 같이 추진할 수 있었다.

서창환 컨설턴트는 “합의를 중시하는 일본의 경우 1년 이상 걸린 기업이 허다 하다”며 “한국도 상당한 진통을 거칠 것”이라고 말했다.

한 대기업 인사담당자는 “너무 복잡하다”며 “회사 측에서 안을 만들어 노조 에 제시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근로자의 관점에서 노후를 보장하자는 퇴직연금제도 취지에 어긋난다. 근로자 에게 충분히 교육시켜 합의를 이끌어 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퇴직연금 어디에 가입할까

퇴직연금 제도 실시가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각 금융회사들의 시장 선점을 위한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일단 내년 시장 규모만 12조원으로 예상되는 데다, 퇴직연금 고객은 평생 고객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 이미 퇴직보험 시장을 독차지하는 보험사들에 ‘주거래 은행’ 카드를 쥐고 있는 은행권이 도전장을 내미는 모양새다. 여기에 증권사들은 DC(확정기여)형 퇴직보험 시장을 노리고 있다. 지주회사 체제를 갖추고 있는 대형 금융회사들은 각 자회사들의 연합 전 선을 구축하기 위한 계획도 마련 중에 있다. 한 금융회사 관계자는 “퇴직연금 시장에서 보험 40~50%, 은행 30~40%, 증권 10~20% 점유율을 보일 것”으로 내 다본다. 일단 각 금융사들은 TFT(태스크포스팀)를 만들어 시스템 개발과 인력 유치, 퇴직연금 설명회 등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1차적으로 기업 경영층 을 상대로 퇴직연금 컨설팅을 벌이기도 한다.

금융회사들은 퇴직연금 운용회사 또는 관리회사로 선택될 수 있는 논리 개발에 열심이다. 근로자들을 상대로 퇴직연금 상품 소개에 집중하는 모습도 눈에 띈 다. 또한 퇴직연금을 운용할 회사를 상대로 하는 간접 마케팅에도 열심이다. 퇴직연금 운용회사와 관리회사가 될 수 없을 때엔 금융회사를 상대로 상품이라 도 팔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은행 - 대출금리 인하에 수수료 혜택까지■

금융권의 퇴직연금 선점 경쟁에서 은행권의 대응이 단연 돋보인다. 지금까지 사실상 보험권이 퇴직보험 시장 대부분을 점유한 상황. 지난해 말 기준으로 은 행권의 퇴직신탁 시장 점유율은 보험 83.3%에 비해 한참 뒤진 16.7%에 머물렀 다. 결국 은행권은 수익성 확보를 위해 단순한 자금관리에 그친 자산관리 시장 보다는 시장이 크고 수익이 높은 운용관리 시장을 파고들 계획이다. 폭넓은 지 점망을 기본으로 전국 지점과 거래관계가 있는 중소기업 고객을 주로 노린다. 또 DB형보다는 고수익을 내기 쉬운 DC형을 취급하려는 은행들이 많다.

국민은행은 기업을 위한 각종 부가서비스 제공에 주력한다. 기업들이 일정 퇴 직금을 예치할 경우 나중에 얼마를 받을 수 있는지 예측하는 ‘시산진단프로그 램’을 통해 신뢰도를 높인다는 계산이다. 타 금융권보다 한발 앞서 자체 전산 시스템을 갖췄다. 아직까지 다른 은행들은 퇴직연금 관리, 운용을 위해 금융결 제원에서 제공하는 기록관리 시스템인 ‘RK(Record Keeper)’를 공동으로 사용 하고 있다. 홍운 국민은행 신탁팀 과장은 “국민은행은 퇴직연금 관리, 운용비 용을 줄이기 위해 자체 시스템을 구축하는 한편 별도 TF팀까지 구성해 마케팅, 컨설팅에 관한 전방위 영업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은행권 중 퇴직신탁 실적이 1위인 산업은행은 DB와 DC 시장을 모두 공략한다는 계획이다. 이미 올 3월부터 4개월 간 국내 최초로 머서인적자원컨설팅(Mercer Human Resource Consulting)사로부터 퇴직연금 컨설팅을 받아 사업 전략과 모 델을 직접 수립했다. 올 9월부터는 연금전문가로 불리는 경희대 성주호 교수를 초청해 직접 연금컨설팅 연수과정을 진행한 것도 특징. 이 컨설팅에는 대우증 권, KDB에셋이 공동으로 참여해 목표고객을 세분화하고 퇴직연금시스템과 콜센 터를 공유하는 등 시너지 효과를 내는 데 주력했다.

올 10월부터는 미국 피델리티와 일본 JIS&T 등 해외 퇴직연금 사업자를 직접 벤치마킹하는 기회도 마련했다. 최근엔 연금계리 주요 인력을 외부에서 채용했 다. 이상욱 산업은행 신탁본부 연금운용팀장은 “올해 12월부터 퇴직연금제를 당장 시행하지는 않지만 시스템, 인력 등 각종 준비과정을 진행 중”이라며 “ 내년 초 연금관련 팀 인력을 대폭 확충하는 한편 10월까지 선진형 퇴직연금시 스템을 구축해 본격적인 상품 공급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여기에 올 11 월 미래에셋생명과 포괄적 업무제휴를 체결해 사업정보 상품개발, 컨설팅 등 각종 분야에서 상호협력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개인 서비스 면에선 우리은행과 하나은행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우선 우리은행 고객이라면 의료보험, 대출금리와 함께 자기앞수표 발행 등 각종 수수료 혜택 을 받게 된다. 또 근로자마다 개별적으로 컨설팅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특히 예금과 같은 확정금리형 상품에서부터 각종 투자형 상품을 제공함으로써 고객 들 선택 폭을 넓힐 수 있다는 것이 장점. 또 대출 상품과의 연계를 통한 마케 팅을 적극적으로 펼칠 계획이다.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전산시스템 마련에도 착수했다. 퇴직연금상품 개발과 운 용 모두에 도입할 수 있는 전산시스템을 독자적으로 개발한다는 입장이다. 세 계적 컨설팅 회사인 휴잇과 전략적 업무협약을 맺고 광주은행, 경남은행, 우리 투자증권 등 그룹 계열사와 공동으로 시스템을 마련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기 업 대상 설명회 준비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최근 조선호텔에서 250여개 기 업을 초청해 퇴직연금제 특징을 설명하는 한편 하남공단 등 각종 산업단지를 직접 찾아가 현장 교육을 실시한다는 계획. 김홍중 우리은행 신탁사업단 부부 장은 “은행 고객 층을 대상으로 퇴직연금제에 가입할 때 의료보험 대출금리를 낮춰주거나 각종 수수료를 면제하는 혜택을 줄 것”이라며 “아무래도 은행이 접근성이나 안정성 면에서 유리해 장기적으로 개인, 기업고객을 유치하는 데 유리하다”는 입장이다.

【근로자 컨설팅 능력 강조】

하나은행도 ‘근로자 컨설팅 능력’을 우선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기업연금이 개인종합관리계좌(IRA)로 이동할수록 근로자 개개인 종합 노후설계가 중요해지 기 때문. 결국 금융상품을 직접 취급하고 설계할 수 있는 은행만의 특징을 강 조해 점유율을 높인다는 전략이다. 또 기업 고객을 위해 지난 9월부터 고객과 지점장 등을 100명씩 초청해 정기적인 퇴직연금 관련 설명회를 개최하고 있다.

■보험 - 퇴직보험 시장 그대로 이어간다■

퇴직연금시장 쟁탈전서 겉보기에 가장 여유로운 곳이 보험업계. 회사별로 1~2 년 전부터 시스템 정비와 전문 인력 확보 등 준비를 해 둔데다, 퇴직보험 노하 우를 갖고 있기 때문. 생보와 손보사들은 기존 퇴직보험 시장 84%를 점유하고 있다. 따라서 퇴직보험 계약을 맺고 있는 기업들을 고스란히 퇴직연금 계약으 로 연결시키는 게 보험회사들 목표다. 대형보험사들은 대기업 계열사들을 갖고 있어 이를 활용한 퇴직연금 유치에서도 유리하다. 중소형 보험사들은 퇴직연금 시장을 성장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보고 있다.

생명보험협회 관계자는 “퇴직연금은 속성상 장기로 운용되는 장기상품이기 때 문에 안정성을 중시하는 보험권에 적합한 상품이다”며 “보험사들의 각종 조 사에서도 금융회사 선호도에 있어 보험사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 자신한다.

실제 보험사들은 안정적인 자산운용을 원하는 기업이나 근로자들의 관심을 유 도하기 위해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만들어놓고 있다. 투자형 상품의 경우에도 안정적으로 기대 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한다는 게 보험업계의 구상이다. 보험 개발원을 중심으로 시스템도 공동 개발한 상태. 보험개발원 시스템 컨소시엄에 는 대한, 미래에셋, 신한, 금호 등 12개사가 참여하고 있다.

생보업계 선두주자인 삼성생명은 지난해부터 TF팀을 만들어 전문가를 영입하는 등 치밀한 준비를 하고 있다. 지난 7월부터 퇴직연금 홈페이지를 개설한 데 이 어, 퇴직연금 시스템의 자체개발도 마무리 한 상태. 삼성생명은 기존 퇴직보험 시장에서도 30%가 넘는 시장점유율을 자랑한다. 삼성생명 관계자는 “퇴직연금 관련조사와 세미나 등 행사를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다”면서 “퇴직보험 컨 설턴트들이 기업 담당자들을 방문, 직접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 했다.

교보생명은 지난해 10월 전담팀을 구성, 올 11월부터 본격적인 컨설팅을 수행 하고 있다. 지난 9월에는 한국인으로는 유일한 미국퇴직연금계리사인 박진호 상무를 영입, 기업 고객들에게 퇴직연금 설계와 자산운용, 회계서비스 등을 종 합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현재 10명의 컨설턴트들을 확보한 상태. 15명이 TF팀 을 구성한 대한생명은 주요 기업을 방문하며 본격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팀원 전원이 2회씩 일본과 미국 등 퇴직연금 선진국으로 연수를 다녀오는 등 노하우를 축적했다.

삼성화재는 원리금 보존형에 대해 다양한 펀드 상품을 구성, 고객 요구에 대응 한다는 전략이다. 전문컨설팅 조직인 연금솔루션 TF를 구성하고, 각 사업부별 로도 전담인력을 배치했다. 퇴직연금 판매를 통해 향후 단체상해보험과 건강보 험 등 다른 상품에 대한 연계 판매도 기대하고 있다. LG화재는 판매 인프라 구 축에 주력하는 동시에 LG그룹 계열사와 주요 기업을 대상으로 기업 설명회를 개최하고 있다.

■증권 - 확정기여형 상품에 올인■

증권업계는 아직까지 퇴직연금제에 관련해 은행, 보험사보단 노하우가 미흡한 여건이다. 이 때문에 향후 시장점유율 목표를 10~20% 정도로 잡고 있다. 증권 사들은 결국 한국증권업협회와의 ‘공동마케팅’이라는 카드를 꺼냈다. 이를 통해 은행과 보험사 간 틈새를 뚫는다는 전략이다.

증권사는 다른 금융권과 차별화된 상품판매, 운용 노하우를 살려 퇴직연금제에 대비한다는 입장. 이들은 주로 수익증권 같은 금융상품을 제시하면서 주가연계 증권(ELS), 환매조건부채권(RP), 특정금전신탁 등을 주로 판매할 예정이다. 이 때문에 아무래도 증권사 서비스는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들이 이용하기에 적합 하다는 분석이 많다.

증권업협회에 따르면 현재 38개 국내 증권사 중 삼성, 교보 등 13개사가 퇴직 연금 시장에 참여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 중 10개사는 올 12월 바로 시장에 뛰어들 계획이고 대한투자, 신영, 대우증권 등 3개사는 기반을 다진 뒤 내년 상반기 시장에 진출할 방침이다.

증권사들은 퇴직연금제도 중 확정기여형(DC)에 올인하는 분위기다. 확정급여형 에 비해 수익률 면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특히 증권사들은 다른 금융권과 달 리 고위험·고수익 상품 운용을 통해 높은 수익률 제고가 가능하다는 게 장점 이다. 게다가 퇴직연금에서 한발 앞선 미국, 일본은 이미 확정급여형(DB)에서 확정기여형(DC)으로 흐름이 바뀌고 있다는 것도 중요한 변수다.

【그룹 공동설명회 개최】

당장은 기업들이 안전 위주로 DB형을 주로 선택할 게 분명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DC형이 DB형을 앞지를 수 있다는 분석이다. 또 퇴직연금 시장이 10년 뒤인 2015년엔 최대 188조원까지 커진다는 장밋빛 전망이 많다. 결국 증권시장 에 적잖은 규모의 돈이 유입될 가능성이 높다.

삼성증권은 최근 퇴직연금파트에 10명을 보강하는 등 먼저 칼을 빼들었다. 인 력 보강을 기반으로 고객 특성에 따른 퇴직연금 표준제도를 개발하고 차별화된 영업활동으로 선점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다른 증권사와 달리 대기업과 공기 업을 주 타깃으로 하고 있다.

대우증권은 구체적인 실행전략을 펴기에 앞서 2010년까지 퇴직연금 추정 시장 규모를 65조원으로 보고 전체시장 점유율 3%를 달성한다는 목표를 삼았다. 현 재 산업은행과 공동으로 일본과 미국 퇴직연금 시장을 직접 점검해 특징을 벤 치마킹한다는 전략이다. 김희주 대우증권 상품개발마케팅부 팀장은 “각종 전 산개발이나 영업전략을 산업은행과 공동으로 추진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우리투자증권은 아직 시장점유율 목표치는 정하지 못했지만 증권인구 저변을 확대한다는 장기적인 목표를 세웠다. 성필규 우리투자증권 연금신탁부 과장은 “퇴직연금이 기업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직접적으로 활용하는 계층은 근로 자”라며 “고령화 추세가 심화되는 만큼 이번 제도를 통해 근로자들이 증권사 를 통해 직접 자산관리에 나서도록 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밝혔다.

굿모닝신한증권은 직접 고객을 방문해 대면 영업을 실시하고 그룹 공동설명회 를 통해 시너지 효과를 높인다는 방침이다. 기온창 굿모닝신한증권 퇴직연금파 트 부장은 “같은 그룹 계열사인 신한은행, 조흥은행, 신한생명과 달성 목표는 다르지만 상품개발, 설명회 등을 개최해 공동 마케팅을 펼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국내 퇴직연금 보완점

현대 복지국가의 노후소득보장체계는 공적, 사적 연금제도 역할분담에 따른 다 층보장체계가 가장 바람직한 형태로 여겨지고 있다. 우리나라도 근로자퇴직급 여보장법의 제정·시행(2005.12)과 함께 퇴직연금제도가 도입됨에 따라 국민연 금(1988년), 개인연금과 함께 제도적으로는 선진국형 다층 노후소득보장체계의 형식적 요건을 갖추게 됐다. 하지만 제도 자체의 발전적 정착과 실질적인 다층 보장체계 구축을 위해서 해결돼야 할 다음의 몇 가지 주요한 정책과제를 남겨 두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첫째, 제도전환의 미완결성 문제다. 퇴직연금제도는 기존의 퇴직일시금제도를 존치한 상태에서 연금제도로의 전환을 노·사간 합의에 따라 임의적으로 이뤄 지도록 하고 있어서 강력한 정책적인 개입이 없는 한 제도 전환이 장기간에 걸 쳐 점진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일본의 사례를 참조할 경우 퇴직일 시금제도가 끝까지 존속할 수 있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현재의 법·제도 아래에서는 제도전환을 위한 유일한 개입수단은 퇴직일시금과 퇴직연 금제도를 차별하는 세제정책 밖에 없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새로운 퇴직연금제 도가 갖고 있는 고령화 사회에서 의의와 개인차원의 유익에 대한 교육과 홍보 뿐만 아니라 적정한 세제 유인정책을 통해 제도전환을 촉진시킬 필요성이 있다 .

둘째, 퇴직연금제도의 운영형태는 확정급여형과 확정기여형 가운데 기업사정과 근로자 선호에 따라 최선의 제도를 선택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그러나 향후 금 융시장 환경과 기업환경에 따라서 고용주와 근로자간 이해가 갈리게 될 가능성 이 높은 게 사실이다. 따라서 각 운영형태가 갖고 있는 역인센티브를 어떻게 완화하거나 해소하느냐가 향후 제도발전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셋째, 퇴직연금의 지급보장과 관련된 문제로 확정기여형 퇴직연금제도의 경우 보험료 기여가 적시에 정기적으로 이뤄진다면 지급보장에 대한 필요가 약하나 확정급여형의 경우 지급보장에 대한 필요성이 상존하게 된다. 따라서 지급불능 위험성이 상존하는 제도가 확정급여형 제도다.

한편 확정기여형의 경우도 기여금을 성실하게 적립했을 경우 리스크는 없을지 라도 운영리스크가 존재하기 때문에 운영 리스크가 아주 크게 될 경우(즉 수익 률이 아주 낮을 경우) 지급불능에 못지 않은 위험성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사 실이다. 따라서 제도 도입 이후 확정기여형 퇴직연금 수익률이 어떻게 경험적 으로 나타나느냐, 그리고 확정급여형의 경우 기금의 적립과 연금급여 약속이 어떻게 성실하게 이행되느냐에 따라서 제도의 활성화가 크게 좌우될 것으로 전 망된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각 형태가 갖고 있는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방향 으로 제도운영과정에서 적정한 정책개입과 지원체제를 확립해 나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장기적인 과제로서 국민연금과 퇴직연금제도의 연계발전 과제가 있 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퇴직연금제도가 국민연금제도와 함께 다층 노후소득 보장체계의 한 축을 견고하게 형성할 수 있기 위해서는 두 제도간 연계 발전이 필수적이다.

노후소득보장제도의 국제적인 추세와 현재 우리 국민연금이 당면하고 있는 장 기적인 지속가능성 문제를 고려해 볼 때 퇴직연금제도가 어떤 형태로는 노후소 득보장제도로서 국민연금 역할을 부분적으로 분담해야 한다는 것이 자명한 과 제일 것이다. 퇴직금제도는 사용주의 100% 기여에 의해 운영되는 법정 강제제 도인 만큼 국가적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본격적인 노후소득보장 장치로의 전환 을 촉진시킬 의무와 권리가 있다고 본다. 단, 과제는 두 공·사연금 제도간 역 할분담 모형을 어떤 형태로 설정할 것인가 인데 이와 관련해서는 기존 국내외 논의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 향후 국민연금제도에 필요한 개혁 방향 등을 고 려해 설정할 필요가 있다.

[방하남 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외국 퇴직연금 사례

퇴직연금제도 도입으로 금융시장에 퇴직연금과 관련한 여러 새로운 시장과 기 회가 창출되고 있다. 이전 퇴직금 제도에서는 단순히 퇴직금 운용수단으로서의 퇴직보험 및 퇴직신탁 상품 시장만 존재했으나 퇴직연금제 도입은 퇴직연금플 랜 설계와 컨설팅, 연금자산관리, 연금자산운용, 기록보관, 상품제공 등 퇴직 연금과 관련된 다양한 시장의 탄생을 의미한다.

미국, 일본, 홍콩 등 주요국의 퇴직연금 관련 시장 공통점들을 분석해 몇 가지 시사점을 제시한다.

외국 퇴직연금 설계 업무의 경우 도입 절차와 서비스를 단순화해 도입 비용을 절감할 수 있도록 미리 만들어져 있다. 모든 기업에 적용 가능한 신탁 또는 퇴 직연금 규약 제공도 늘어나는 추세다. 향후 금융기관들은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일본식 종합형 퇴직연금 규약의 제공에 노력을 기울이고 정책당국은 장기적으 로 홍콩 MPF와 같은 마스터인증(Master Trust)제도 도입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 대기업의 경우 개별 기업 특성에 맞는 맞춤형 퇴직연금규약이 적합하지만 중 소기업은 퇴직연금에 대한 관리비용 축소 측면에서 종합형 퇴직연금규약을 제 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관리·운용사 분리 추세■

외국 퇴직연금 자산관리 업무의 경우 기업 파산 시 근로자의 적립금을 보호하 고 가입자가 운용지시를 하는 해당상품을 제공할 수 있는 운용상품 확보 능력 을 갖춰야 한다. 이 때문에 자산관리기관 자격을 제한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은행과 보험사가 이를 주로 담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도 퇴직연금 자 산관리를 위한 보험사와 증권회사의 신탁업 겸영은 허용하되 높은 수준의 공신 력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고도의 공신력과 안정성을 요구하는 신탁업 특성상 현행 신탁업법 시행령과 감독 규정은 은행법에 준해 주요 출자자 요건을 설정 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출자자 요건은 보험회사와 증권회사의 신탁업 겸영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돼야 한다.

외국 퇴직연금 자산운용 시장에선 업무 자체에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된다. 자 산운용과 관리업무 간 이해상충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내부 겸영보다 는 자회사나 외부 위탁 위주로 운영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퇴직연금제도는 미국 퇴직연금 지배구조에서 보이는 수탁자와 자산운용자 그리고 외부감사인과 연금계리인 등 역할 분담에 따른 상호견제 및 준법감시(Compliance) 기능이 취약하다. 이 때문에 한 금융기관이 퇴직연금 운 용과 자산관리 업무를 내부겸영으로 동시에 수행할 경우 이러한 상호견제 및 준법감시 기능 취약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금융기관은 퇴직연금 운용과 관리업무를 동시에 제공하는 경우 내부겸영보다는 자회사나 외부 위탁을 이용함으로써 이해상충 문제와 관한 소비자 신뢰를 얻을 필요가 있다.

외국 기록보관 업무의 경우, 업무 특성상 대규모 시스템 투자가 필요하고 전문 성을 요하므로 외부 위탁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우리나라도 이미 금융결제원, 한국증권전산, 보험개발원 등을 중심으로 퇴직연금 기록관리시스템 구축을 준 비하고 있으며 다수의 개별 금융기관들이 이러한 전문 업체를 활용할 예정이다 .

외국 퇴직연금 관련 서비스 제공 방식에선 분업형(Unbundled)이나 완전겸업형( Fully Bundled)보다 기록보관업무, 자산관리업무, 자산운용업무 중 일부를 외 부에 위탁하는 부분겸업형(Semi bundled)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도 결국 부분 겸업형이 주류를 이룰 것으로 예상되나 이러한 서비스 제공 방식은 대상 기업 의 규모 및 선호 등 특성에 따라 달리 접근돼야 한다. 즉, 대기업의 경우 분업 형을 통한 비용 절감을 도모할 가능성이 큰 반면, 중소기업의 경우 겸업형 방 식을 통한 편리성을 추구할 것으로 보인다. 각 금융기관은 목표로 하고 있는 고객 특성에 맞는 서비스 제공 방식을 특화해 준비할 필요가 있다.

[남재현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

출처 - 주간조선 2005.11.22

은퇴의 역사는 노령연금에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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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늦을수록 고통도 크다
19세기 말 비스마르크가 첫 도입 후 고령자 은퇴시킬 목적으로 선진국서 앞다퉈 시행

은퇴의 역사는 산업화 이후에 나타난 연금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직장을 퇴직해서 일을 하지 않으면서 노후를 보내는 ‘은퇴(retirement)’라는 개념이 나타난 것은 19세기 후반 연금 제도가 탄생하면서부터이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일선에서 물러나는 일은 없었다. 일을 하지 않고서는 먹고살 수가 없었을 뿐더러 노인이 일하는 데 대한 경시 풍조도 없었다. 18세기 중반 영국을 시작으로 산업혁명이 시작됐지만 기본적으론 서구 선진국도 농업이 주류여서 대부분의 인구가 농촌에 거주했다. 노인은 가족과 같이 살면서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일을 못하게 됐을 때도 가족의 보호를 받았다.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나이 들어 일을 못하게 된 사람은 국가에 보호를 요구할 근거가 있다”는 빌헬름 1세의 주장을 받들어 1889년 세계 최초로 노령연금 제도를 도입했다(제도 시행은 1891년). 노령연금은 일정 나이가 되면 연금을 주는 보험의 한 종류다. 생산직 근로자들은 연금에 강제 가입됐고, 70세가 되면 현직에서 물러나 연금을 받았다. 때문에 연금을 받을 수 있는 나이가 바로 은퇴연령이 됐다. 70세였던 은퇴연령은 1916년 65세로 낮춰졌다.

19세기 후반 선진국들은 경쟁적으로 산업화를 진행하면서 나이 많은 근로자를 경쟁의 걸림돌로 여겼다. 이 과정에서 고령 노동자를 산업현장에서 몰아내기 위해 독일의 사례를 좇아 연금제도를 잇따라 도입한다. 당시 가장 선진 공업국이었던 영국은 1908년 70세 이상의 저소득층 노인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노령연금 제도를 실시한다.

하지만 1929년 대공황이 세계 경제를 덮치기 전까지는 나이 든 사람의 은퇴가 대중화되지는 않았다. 미국의 역사학자 윌리엄 그래브너에 따르면, 1903년 미국 재무부 공무원 중 2%인 114명이 70~79세였다. 12명은 80세 이상이었다. 또 1920년대 시카고에서는 2명의 83세 교장과 70세 이상의 교원 6명이 채용됐다. 심지어 필라델피아에서는 나이 많은 교사들의 경우 낮잠을 자기 위해 하루에 2번씩 학생 자율학습을 시키는 게 허용됐다.

은퇴가 대중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대공황을 거치면서부터다. 그래브너에 따르면, 1932년에 미국 근로자 중 20% 미만이 연금 제도의 적용을 받았다. 대공황이 닥치자 미국의 실업률은 25%로 치솟았고,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노동자들은 거리로 몰려나왔다. 이 때 루스벨트 대통령 등 뉴딜 정책 입안자들은 젊은이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해 사회보장연금을 지급해서 고령자들을 은퇴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우선 1934년 상원의원 로버트 와그너가 제출한 철도노동자 퇴직연금을 설립하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대신 5만명의 노동자를 즉시 퇴직시킨다는 계획이었다. 1935년에는 현재 미국의 사회보장연금(OASDI·Old Age, Survivors, and Disability Insurance)의 기초가 마련되는 사회보장법이 제정됐다.

루스벨트는 독일의 모델을 좇아 1935년 사회보장법에서 연금 지급 연령(곧 은퇴연령)을 65세로 정했다. 때문에 65세는 ‘비스마르크 연령’이라고도 불린다. 반면 당시 미국인의 평균수명은 63세였다. 은퇴 연령이 평균수명보다 높게 설정돼 많은 사람이 사회보장혜택을 받지 못했다. 결국 루스벨트는 은퇴 연령을 62세로 낮췄다.

당시 은퇴자가 받은 연금은 겨우 먹고살 정도였다고 한다. 미국의 은퇴설계 전문가 미치 앤서니는 ‘은퇴혁명’이란 책에서 “1930년대 은퇴자의 이미지는 겨울철에 난방도 되지 않는 낡은 원룸 아파트에서 두꺼운 옷을 몇 겹씩 껴입고, 고양이 사료를 먹으며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과부의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고 적었다. 경제사학자 조안나 쇼트에 따르면 연금이 확산되면서 65세 이상 노인 중 노동에 참가하는 비율은 1940년에 43.5%로 1920년(60.1%)에 비해 16.6%포인트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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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연금 제도는 전세계로 확대됐다. 미국에선 노인 빈곤이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연금기금에서 지급하는 연간 생계비에 인플레이션율을 반영해서 상향조정했다. ‘황금시대’라고 불렸던 1950~1970년대의 세계 대호황기를 거치면서 정부와 기업에서 지급하는 연금액은 늘어난다.

연금 액수가 늘어나자 은퇴의 개념도 바뀌었다. 은퇴의 개념은 과거에 가난이었으나 1950년대 이후엔 풍요로움의 상징의 됐다. 당시 미국의 금융회사들은 은퇴자의 개념으로 은퇴 후에 호수에서 낚시나 골프로 소일하는 이상형을 만들고, 은퇴대비용 상품 판매에 박차를 가했다. 1952년 생명보험사인 뮤추얼라이프의 케내지 부사장은 “(은퇴를 앞당겨) 50세 은퇴를 준비하라”고까지 주장했다. 평균 은퇴연령도 1930년대의 70세에서 62세로 떨어졌다.

한편 최근 들어 미국 베이비붐 세대(1946~1964년생)의 은퇴가 가까워지면서 은퇴의 개념이 다시 바뀌고 있다. 메릴린치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미국 베이비붐 세대는 영원한 휴가를 꿈꿨던 그들의 아버지 세대와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다. 베이비붐 세대 4명 중 3명은 “은퇴 후에 돈보다는 정신적인 자극과 도전을 위해서 계속 일을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최근 미국인이 추구하는 은퇴의 이상형은 ‘빈민에게 집 지어주기 운동’인 해비타트 운동에 뛰어든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다.

한국에서도 은퇴의 개념은 최근의 것이다. 1960년대에 들어 농업이 주류인 사회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산업화를 경험한 지 30여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진국에서 은퇴 연령의 기준이 됐던 사회보장제도인 국민연금은 1973년 법안이 최초로 마련됐지만 1974년의 오일쇼크,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도입이 미뤄져오다 1988년에야 출범했다. 출범 당시엔 근로자 10인 이상의 사업장에서 일하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한 불완전한 국민연금이었다. 1995년 7월에는 농어촌지역 주민까지 적용범위가 확대되고, 1999년 4월에는 도시지역 자영업자로까지 가입범위가 확대되면서 전국민 연금시대가 왔다.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은 60세로 정해졌지만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명예퇴직, 조기퇴직이 일상화되면서 ‘50대에 1차 퇴직과 창업·재취업, 60대에 은퇴’라는 새로운 공식이 생겼다.

한편 연금제도와는 별도로 1991년 제정된 고령자 고용촉진법 19조는 ‘정년’이란 항목을 두고, ‘사업주가 근로자의 정년을 정하는 경우에는 그 정년이 60세 이상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이 사규(社規)와 노사협약 등을 통해 정한 정년은 평균 57세다. 공무원의 5급 이상 정년은 60세, 6급 이하는 57세, 교원은 62세다.

방현철 주간조선 기자(banghc@chosun.com)




퇴직과 은퇴를 혼동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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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인생이 기다린다
50세 퇴직자, 남은 인생 30년 이상... 준비 여부에 따라 `제2인생` 크게 달라져

의학의 발전과 식생활 개선에 힘입어 1960년 53세에 불과했던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1975년 64세, 1985년 68세, 2004년에 76세로 계속 늘어나고 있다. 통계청 전망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나 2010년 79세, 2020년 81세, 2030년 82세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평균수명의 증가는 삶에 대한 종전의 생각에 큰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교를 졸업한 후 취직을 하면 정년퇴직 때까지 한 직장에서 일하는 것이 보통의 한국인이 사는 삶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2~3년 전부터 이런 일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기업들이 상시(常時) 구조조정과 조기퇴직 제도를 실시하면서 50세 전후의 젊은 나이에 직장에서 물러나는 사람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80세까지 산다고 가정할 경우 50세에 퇴직을 하면 앞으로 30년이라는 세월이 더 남는다. 30년이라는 세월은 ‘여생(餘生)’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길다. 이는 여생이 아니라 ‘제2의 인생’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인생을 두 번 산다’고 하여 어떤 학자들은 이를 ‘이모작 인생’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사람들이 제1의 인생을 사는 방식은 대체로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제2의 인생은 준비를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생긴다. 한편에는 가난과 고독 속에서 인생의 후반을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경제적 안정과 정신적 풍요로움 속에서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나가는 사람이 있다. 당신은 어느 쪽에 줄서고 싶은가.

사람들은 직장을 그만두면 자연스럽게 ‘은퇴(retirement)’를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은퇴란 생산활동을 중지하고 지속적으로 소비하는 삶의 형태를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은퇴는 단순히 직장을 그만두는 것을 의미하는 ‘퇴직’과 다르다. 50세 전후에 직장을 그만두는 사람이 명심해야 할 것은 퇴직과 은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직장에서 밀려났다고 해서 곧바로 사회에서 은퇴한다는 것은 본인의 능력을 사장시키는 것이고 국가적으로도 손실이다.

앞으로 제2의 인생을 사는 것이 일반화되면 직업관도 크게 바뀔 수밖에 없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직업을 1개가 아니라 2~4개씩 얼마든지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미래에는 직장을 자주 옮기는 것이 오히려 능력의 증표가 될 수 있다. 첫 번째 직장생활이 순조롭지 않았다고 해서 두 번째, 세 번째 직장에서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 경제적으로 은퇴할 준비가 안된 사람이라면 당연히 은퇴 시기를 늦추어야 한다.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은퇴를 해버리면 가족이 경제적 어려움에 빠짐은 물론, 본인도 아무 할 일 없이 보내는 노후생활로 인해 고통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제2의 인생의 궤적은 본인 스스로 선택해 나가는 것이며, 본인의 결정에 따라 매우 다양한 삶을 살 수 있다. 본인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원망하고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은 자기부정 행위일 뿐이다. 은퇴 시기는 당사자들이 알아서 선택해야 할 문제이지만, 중요한 것은 은퇴 시기를 결정하기 전에 사전계획을 철저히 세워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제2의 인생을 맞이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준비해 두어야 할 것은 넉넉한 노후생활 자금이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의 조사에 따르면 현재 만60세인 부부가 평균 기대수명(남 77.5세, 여 82.2세)까지 살 경우 필수 생계비와 최소한의 용돈만 쓴다 해도 약 2억6000만원이 필요하며 월 100만~200만원의 여윳돈을 갖고 살려면 약 5억~7억원의 노후자금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돈이 넉넉하게 있어야 친구들을 불러내 점심을 살 수 있고, 부부가 함께 해외여행을 가거나 보고 싶은 음악회도 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아직 은퇴시점이 상당히 남아있는 사람은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저축을 하거나 투자를 하여 목표한 노후생활자금을 마련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두 번째로 챙겨야 할 것이 건강이다. 돈이 많다고 하여 노후생활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20년쯤 직장생활을 하다가 문득 거울 앞에 서보면 깜짝 놀랄 때가 있다. 툭 불거진 배, 가늘어진 다리, 듬성듬성한 머리숱. “이 몸으로 한국인 평균수명이라는 남자 73세, 여자 80세까지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의학과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의 수명은 계속 늘어만 간다. 앞으로 중요한 것은 그냥 오래 사는 게 아니라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다. 일본은 세계 최장수국으로 꼽히지만 병원에서 지내는 장수 인구가 많기로도 유명하다. 2000만명을 넘어선 65세 이상 노인 가운데 5%인 100만여명이 치매와 여러 노인병 때문에 침대에 누워서 꼼짝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노인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이 같은 상황에 부닥칠 가능성이 높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 한번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인생의 방식을 바꾸어라

셋째는 제2의 인생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노인들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가장 행복한 은퇴자는 직장에서 퇴직한 후 마음껏 휴식을 취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가장 행복한 은퇴자들은 일을 계속하거나 자원봉사를 통해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에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실 노후생활이란 그동안 바쁘게만 살아왔던 인생을 조금 더 느리게 살고, 물질 만능주의에서 벗어나 돈을 조금 덜 버는 대신 조금 덜 쓰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자기만을 위해 살아왔던 사람은 하늘나라로 올라가기 전에 남을 위해 사는 삶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노후를 사회에 봉사하는 NGO(비정부단체) 활동으로 보내는 것도 한번 고려해볼 만하다. NGO 활동에는 환경보호 운동, 불우이웃돕기 운동, 장애자돕기 운동, 기부문화확산 운동, 중고품재활용 운동, 프라이버시지키기 운동, 후진국돕기 운동, 의료봉사 활동, 쓰레기줄이기 운동 등 여러 테마가 있다. 이 가운데 자신의 스타일에 잘 맞는 테마를 골라 봉사활동을 해보면 어떨까.

넷째는 꾸준한 자기계발 노력이다. 행복한 노후를 맞이하기 위해선 젊었을 때에 노후를 대비한 재교육에 투자를 해두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사회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일을 계속 갖는 사람이 많다. 돈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가져다주는 의미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노후의 일거리를 마련하기 위한 자기계발 노력은 반드시 필요한 노후 설계에 속한다.

사람이 늙어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데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고독에 대한 불안감이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안감은 스스로 극복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방법은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다. 노후생활에 대한 목표,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돈과 건강, 마지막으로 스스로의 노력이 더해질 때 노후생활은 풍성하고 보람찬 시간으로 메워질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미리 준비를 하는 사람만이 성공적인 은퇴생활의 열매를 딸 수 있다.

송양민 조선일보 논설위원 (ymsong@chosun.com)



은퇴 준비를 위한 리스트를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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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를 준비하는 사람들
아내와 친구되기·자격증 따기 등 은퇴 때까지 해야 할 일 정한 뒤 당장 실천에 옮겨야

지난 9월 13일자 조선일보 경제면에 필자가 만든 10가지 은퇴준비 리스트를 소개한 뒤 많은 전화와 이메일을 받았다. 필자는 2001년 6월 4년간의 미국 주재원 생활을 마친 뒤 뉴욕발 서울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외환위기 때 명퇴당한 선배들처럼 비참한 은퇴를 맞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은퇴까지 남은 10년 동안 준비할 일의 리스트를 아래와 같이 만들었고 실천하고 있다.

필자의 준비 리스트를 보고 가장 많았던 질문은 “30대부터 은퇴준비를 해야 하느냐?”였다. 대부분의 직장인이 30대에 직장생활을 시작하는데 그러면 은퇴하기 위해 직장생활을 하느냐고도 질문한다.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은퇴를 염두에 둔 생활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고 본다. 어쩌면 평상시 우리의 삶 자체가 은퇴 준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흔히 직장생활을 하면서 평생직장을 꿈꿔왔지만 언제까지나 현장에서 일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많은 질문은 ‘평생친구 만들기’였다. 특히 아내와 친구되는 법에 대해 많이 물어왔다. 그게 쉽지 않다. 나의 소위 ‘아내와 친구되기 프로그램’이란 이렇다.

우선 아내와 친구되기 프로그램은 등산부터 시작됐다. 15도 경사만 있어도 산이라고 여기는 아내를 갖은 감언이설(?)로 설득해 수락산에 올랐다. 평소 넉넉잡고 3시간이면 충분한 수락산을 그날은 여섯시간 반이나 걸렸다. 등산이 좋은 이유를 온몸으로 보여줬다. 한 걸음 가다 멈춰서서는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보고 두 걸음 가다가는 내가 먼저 “힘들다”고도 했다. 정상에 거의 다다랐을 때 비탈진 바위를 올라서면서 아내의 손을 잡아끌어주었다.

그런데 그렇게 뒤따라올 줄 알았던 아내가 저만치 서서 울고 있었다. 처녀 시절에 손을 잡아준 이래 오늘이 처음이란다. 다른 등산객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와락 껴안아주었다. 결혼 이후 숱하게 많이 아내의 손을 잡아주었을 것도 같은데,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나이쯤 되면 그래서 노랫말처럼 ‘아내의 젖은 손’도 느껴지는가 보다. 그렇게 시작한 등산을 이제는 언제나 아내가 앞장선다.

다음으로 아내와의 대화다. 대화란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주제는 언제나 빈곤하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같은 책을 읽는 일이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다보면 나보다 한 뼘은 더 깊이 있는 얘기를 할 때도 많다. 나는 주로 듣는 편이다. 잘 들어주는 일도 대화의 주요 기법인 모양이다.

인간의 추측은 90%가 틀린다고 한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틀린다고 한다. 특히 아내는 이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하면서 물어보면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난다. 대화만이 그 간극을 줄일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일을 함께 하는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함께 고민하면 해답을 오히려 쉽게 찾을 수도 있다. 손을 잡고 때로는 어려움을 털어놓으면 아내는 자신을 인정해주는 남편에 대해 무한한 존경심을 가진다.

아내의 소녀취향을 때로 자극시켜 주는 일도 중요하다. 여자는 ‘남편’과 결혼하는 게 아니라 ‘남자’와 결혼한다. 그리고 표현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따라서 보약 같은 사랑을 위해서는 아내의 소녀 같은 취향을 자극해주어야 한다. 늦게 들어가게 되면 알려주고 꽃도 사들고 가기도 하고 때론 혼자만 읽고 지나가기는 아까운 시를 암송해서 들려주기도 한다.

그리고 아내를 소중하게 여긴다. 내가 소중한 만큼 그도 소중하다. 내가 하는 일이 소중한 만큼 아내가 하는 일 또한 사소한 것이라도 소중하고 의미가 있다.

나만의 프로그램이 필요

진심을 기울이는 자세도 필요하다. 진심이야말로 부부를 부부이게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단단한 끈이다. 진심을 담아 ‘오늘 반찬이 유난히 맛있다’고 말해보라. 생각 이상으로 많은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한편 부부도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한다.

얼마 전 금혼식을 마친 금실 좋은 일본인 부부가 우리나라를 찾았다. 50년을 한결같이 사는 비결이 뭐냐고 물었더니 할아버지의 대답이 뜻밖이다. 할멈에게 평생동안 자신의 알몸을 한번도 보여준 일이 없었다고 했다. 남편이 샤워 중인 화장실에 불쑥 들어와서 변기에 앉아 볼 일을 보는 아내를 상상해보라.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아내는 나의 거울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같은 음식을 먹는 사람끼리는 서로 닮는다고 했던가. 한솥밥을 먹으니 더욱 그런가보다. 어느 때부터인가 만나는 사람들이 우리 부부가 서로 닮았다고들 한다. 나를 닮은 아내를 통해 나를 보게 된다. 내가 무심결에 하는 행동들을 아내도 같이 하는 것을 보면 때로 역겹기까지 한다.

세 번째로 많이 하는 질문은 “10가지만 하면 은퇴준비가 다 되느냐”고 묻는다. 은퇴준비에 모범답안은 없다. 그 열 가지는 어찌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정도에 불과하다. 사람마다 사는 법이 다르듯 자신만의 은퇴 준비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물론 사회봉사활동도 그 하나에 들어갈 수 있겠다.

네 번째 많은 질문은 “자격증을 몇 개나 따야 하느냐”였다. 내 대답은 항상 “사람마다, 그리고 자격증마다 다르지요”이다. 가능하면 자신이 반평생을 몸담은 직업과 관련한 자격증이면 취득하기도 쉬울 것이다. 같은 직종에서 근무하는 이직보다 완전히 다른 직업을 가지는 전직이 어려운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자신이 오랫동안 일해온 그 익숙함에서 탈피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뿐더러 사회적으로도 숙련된 사람을 하나 잃게 되는 셈이다.

다섯 번째로 많은 질문은 “모임을 10개로 정리하면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내가 모임을 정리한 것은 만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회비를 걷어서 적립해두는 모임이 부담이 간다는 얘기다. 한 달에 1만원씩 내는 모임이 한두 개가 아니라 30~40여개가 될 경우 수입이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달에 모임 비용으로 40만원씩을 지출한다면 정상적이라 하기 어렵다.

여섯 번째 많은 질문은 “집안일까지 남편이 하면 아내는 뭘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내 혼자만 사는 게 가정이 아니다. 가사도 분담한다고 생각하는 게 옳다. 작은 일도 함께 하면 힘이 덜 들게 되고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삶의 재미도 있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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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중요한 건 한 가지라도 실천에 옮기는 일이다. 시작하지 않는 일은 계획에 불과하다. 계획만으로는 노후준비랄 수 없다. 그리고 그것도 내일로 미룰 일이 아니라 오늘부터라도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이 지나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10가지 은퇴 준비 리스트

1. 월 10만원씩 붓는 통장 매년 만들기

2. 자격증 10개 따기

3. 박사학위 도전

4. 평생친구 10명 만들기

5. 살림과 가전제품 조작 익히기

6. 못했던 일 10가지 하기(색소폰 등)

7. 국내산 100곳 오르기

8. 못 읽은 책 100권 보기

9. 책 10권 쓰기

10. 건강 챙기기(국선도 등)

조성권 우리은행 공보팀장(seongkcho@wooribank.com)




2010년, 퇴직대란(退職大亂) 시작된다

준비 늦을수록 고통도 크다
베이비붐 세대 816만명, 5년 후부터 정년 시작… 대량 퇴직사태 국가적인 문제로
정년은 빨라지고 수명은 길어지고, 40~50대 절반이 “은퇴준비 전혀 못했다”

현재 우리 경제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가 은퇴에 대한 준비 없이 회사 정년(停年)을 맞을 위기에 처해 있다. 베이비붐 세대는 한국전쟁 직후부터 1960년대 초 가족계획이 시작되기 전까지 출산율이 높았던 시기에 태어난 세대를 가리킨다. 현재 42~50세에 해당하는 816만명으로, 총인구의 16.8%를 차지하는 거대 인구집단이다.

국내 기업이 사규(社規)상으로 가장 많이 채택하고 있는 정년인 55세에 회사를 그만둔다고 가정하면 베이비붐 세대의 퇴직은 5년 후인 2010년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올 7월의 통계청 조사에서 나타난, 실제로 직장을 그만둔 평균 나이가 53세라는 걸 고려하면 이르면 2008년부터 퇴직대란의 파도는 일렁이기 시작한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현재 45~46세(1959~1960년생)인 171만1000여명이 퇴직정년을 맞는 9~10년 뒤가 퇴직대란의 1차 파고가 될 가능성이 높다. 45세 이후 세대는 1980년대 중반 삼저(저달러, 저금리, 저유가) 호황기에 국내 기업이 인력을 대규모로 채용하던 시기에 입사했고, 각 기업에서 두터운 인력층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이비붐 세대는 이전 세대인 ‘전쟁세대’보다 생활수준도 나아졌고, 콩나물 교실이긴 했지만 교육도 제대로 받았다. 1980년대 본격적으로 사회에 진출하면서 이전 세대에 비해 늘어난 소득을 바탕으로 아파트·자동차·해외여행 등의 소비주체가 됐었다. 박덕배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베이비붐 세대가 본격적으로 집을 구입하던 1980년대 후반 부동산 거품이 생겼고, 1990년대엔 자녀 교육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강남 아파트 붐도 일으켰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후에 대한 대비는 부족해 이들의 대량퇴직이 개인과 사회의 고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많다.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의 퇴직연령은 선진국에 비해 상당히 낮은 데 비해 퇴직 전의 소득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은 적기 때문이다. 미국의 베이비붐 세대(1946~1964년생) 7600만명과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인 단카이(團塊) 세대(1947~1949년생) 806만명도 각각 2006년, 2007년부터 60세를 맞아 은퇴를 시작하지만 그들은 은퇴하면서부터 공적 연금을 받는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의 퇴직 연령은 50대 초·중반이다. 국민연금을 받을 수 있는 60세까지 5~7년을 퇴직금을 가지고 생활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나마 퇴직금도 연봉제와 1997년 도입된 퇴직금 중간정산 제도에 따라 미리 받아 생활비로 써버린 경우가 많다. 한상언 신한은행 재테크팀장은 “은퇴 설계 상담을 위해서 퇴직금 수령 여부를 조사해보면 월급의 일부로 생각하고 이미 써버린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노동부 조사에 따르면 작년 6월 현재 연봉제를 도입한 기업은 전체의 42%에 달했다.

정부는 55세부터 5년 이상 연금을 받을 수 있는 퇴직연금 제도를 올 12월 도입하지만 제도 정착까지는 시간이 걸려 베이비붐 세대가 당장 혜택을 받을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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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국민연금만으론 풍족한 노후생활이 불가능하다. 국민연금관리공단에 따르면 30년간 가입한 직장인이 평균 월 100만원 내외의 연금을 받게 되는데, 이는 60세 이상 도시근로자의 월 평균 지출액(올 3분기 기준) 182만여원의 55%에 불과하다. 국민연금이 전국민을 대상으로 확산된 것이 1999년이므로 베이비붐 세대의 짧은 가입기간을 고려한다면 그나마 월 평균 수령액은 100만원에도 못미친다. 더구나 연금기금의 조기고갈을 막기 위해 1953~1956년생은 61세부터, 1957~1960년생은 62세부터 연금을 받게 되는 등 국민연금을 받을 수 있는 나이는 늦춰진다.

개별적인 노후대비를 위한 개인연금 상품은 1994년에 도입됐지만 노후대비용으로 인식되기보다는 절세 혜택을 이용한 고수익 상품이라는 이미지가 강해 급전이 필요하면 중도에 해지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처럼 퇴직금·국민연금·개인연금 등으로도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으므로 50대 중반 직장에서 퇴직한 후엔 일거리를 찾아야 한다. 노동연구원에 따르면 한국에서 돈벌이를 위해 일을 완전히 그만두는 실질 은퇴연령은 67~68세이다. 일반인이 꿈꾸듯 퇴직 후에 전원에서 여가를 즐기는 여유로운 은퇴 생활은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임춘식 한남대 교수(노인복지학회 회장)는 ▲한창 일할 나이에 정년 때문에 사회활동에서 물러난다 ▲ 퇴직연령이 자녀가 대학에 들어가고 결혼을 할 시기여서 퇴직하자마자 돈을 더 쓴다 ▲ 평균수명이 길어져 좀처럼 죽지 않는다 등 세 가지 현상을 현대판 ‘인생의 3대 비극’이라고 부른다. 임 교수는 “퇴직자들이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한 교육도 못받고 준비없이 내팽개쳐지고 있다”며 “평균 수명은 늘어나는 데 비해 퇴직은 빨라지고 있어 개인이 은퇴를 준비할 시간도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은퇴에 대한 준비는 미흡하다. 올 8월 조선일보와 미래에셋증권이 공동으로 실시한 ‘은퇴에 관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지난 1년간 은퇴 이후에 대비한 준비를 한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세계 10개국의 국민에게 던져본 결과 한국인은 44.1%만 ‘그렇다’고 응답했다. 이는 캐나다(96.5%)·중국(87%)·미국(82.5%) 등의 은퇴 준비율의 절반이었다. 한국은 일본(32%)·브라질(43.5%)과 함께 은퇴 준비를 가장 안 하는 국가 그룹에 속했다.

한국의 40~50대는 평균 3억9000만원의 노후비용(주택 제외)이 필요하다고 답했지만 ‘노후 준비를 전혀 못했다’는 대답이 39.8%, ‘뒤늦게 40대에 들어 노후준비를 시작했다’는 대답이 39.6%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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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급격한 산업화로 바뀐 현실 속에서 괴리감을 가장 많이 느끼고 있었다. ‘부모가 은퇴하면 자녀가 부모의 생활을 책임져야 한다’는 질문에 47.4%가 ‘그렇다’고 답했지만 정작 ‘내가 은퇴하면 자녀가 내 생활을 책임지려 할 것이다’는 질문에 대해서는 26.9%만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런 ‘의무 부양’과 ‘실제 부양’에 대한 태도 차이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 높은 것이다. 조사를 담당한 한국리서치는 “40~50대가 자신은 부모를 모시지만 자식에겐 기대를 하지 못하는 이중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임춘식 교수는 “과거 주요한 노후 재원은 자녀가 주는 용돈이었지만 이제는 연금 등 선진국형으로 바뀌는 등 변화의 추세 속에 있다”며 “퇴직자들은 은퇴 이후의 삶을 미리 계획하는 한편, 사회는 고연령층이 계속 일할 수 있는 다양한 일거리를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방현철 주간조선 기자(banghc@chosun.com)



돈도 없고 갈데도 없고… 절망의 한숨

준비 늦을수록 고통도 크다
모아둔 돈도 없이 퇴직금만 야금야금, 자존심 내세우다 재취업은 멀어지고

‘업무:예식장 주례, 근무지:결혼식 장소에 따라, 대상:남, 55~65세’. 지난해 말 직장에서 퇴직한 뒤 눈높이만 낮추면 그리 어렵지 않게 다시 일을 시작할 줄 알았던 김모(55)씨. 시간이 흐를수록 취업은 점점 멀게만 느껴지고 퇴직 1년이 다 돼가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지난 9월 실버취업박람회장의 ‘예식장 주례 알선’ 부스 앞에서 이와 같은 광고 문안을 보니 “이 일이라면 할 수도 있겠다”는 은근한 희망이 일었다. 그러나 구인 광고판의 다음 줄에서 그만 눈길이 멎고 말았다. ‘자격조건:대머리 아닌, 키 167㎝ 이상’.

160㎝를 가까스로 넘긴 키에 훌쩍 벗겨진 이마. 김씨는 월급만으로 두 아이 키우랴 부모님 생활비 챙겨드리랴 퇴직 후를 생각해 돈을 모아둘 여력이라곤 없었다. 20대 후반인 두 자녀는 아직 결혼은커녕 취업도 하지 못해 네 식구가 많지 않은 퇴직금을 야금야금 꺼내 쓰고 있는 처지. 참다못한 아내도 일자리를 알아보는 중이다. 김씨는 “은퇴나 퇴직을 남의 이야기로만 알고 살아온 젊은 날의 내가 한심하다”며 “아무 일도 찾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이 이렇게 못나 보일 수 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은행지점장까지 지냈던 신모(56)씨. 정말 끝까지 버티고 버티다가 퇴직했다. 남들은 은행에 있었으니 알뜰살뜰 모아놨을 거라 말하지만 주식투자로 손해를 많이 봤고, 친구 보증을 선 것이 잘못돼 속이 텅텅 비어있다. 고령자취업알선센터에 등록하고 교육을 받으며 상담해 보니 은행지점장 경험이 실제 일자리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신씨는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지난 시절의 경력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체면이 문제다. 주유소의 주유원도 “드나드는 차량이 너무 많다”며 거절했고, 경비원 역시 사람이 붐비는 역세권이나 공공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출입이 드문 개인 소유 건물만을 고집하고 있다. 옆에서는 조금 더 절박하고 조급해지면 달라질 거라며 기다리는 중이다.

52세에 언론사 사무직에서 퇴직한 권모(59)씨는 현재 아파트 경비원이다. 그는 “퇴직 후 7년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당시 두 딸은 대학생이었고 모아놓은 돈 한푼 없이 달랑 집 한 채뿐이었다. 친지의 소개로 잠깐 학원강사도 해봤고, 작은 인쇄소에 나가 업무를 봐주기도 했다. ‘일은 곧 먹고살 돈’이었기에 조급해진 것은 권씨만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벌어보겠다며 친구 가게에 돈을 투자하고 일을 거들던 아내는 결국 투자한 돈도 건지지 못한 채 오히려 빚을 떠안았다. 집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두 딸의 결혼으로 빚은 오히려 늘어 이번에는 집을 팔고 전세로 옮겨앉았다. 24시간 근무하고 24시간 쉬는 아파트 경비원 권씨는 “그래도 시집간 딸들에게 손 내밀지 않고 부부가 굶지 않고 사는 것이 다행”이라며 “언론사에 다닌다고 어깨에 힘깨나 주었던 시절이 꿈만 같다”고 쓸쓸하게 웃었다.

도서관 사서로 일했던 조모(여·63)씨. 고령자 적합 직종에는 ‘사서 보조원’이 엄연히 들어있지만 뽑는 곳이 없어 작은 개인회사에 취직을 했다. 포토샵까지 포함해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루는 조씨지만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하루종일 근무하는데도 점심을 주지 않는 것은 물론 수당이나 보너스 없이 월급은 70만원. 업무능력과 업무량에 비하면 턱도 없는 금액이지만 ‘나이든 여자’가 일자리 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아는 조씨는 “젊은 사람도 이런 일자리 구하려고 혈안이 되어있다”며 큰소리 치는 사장 앞에서 오늘도 마지못해 억지로 웃으며 일하고 있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준비 없는 퇴직자들의 공통점. 퇴직 후 ‘좀 쉬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어영부영 지내다보면 보통 3~4개월이 훌쩍 지나가버린다. 한 6개월쯤 지나 현실을 파악하고 취업전선에 나서는데 50대 후반에 퇴직한 사람은 이렇게 쉬는 때에 60대로 넘어가기도 한다. 자신에게는 꿀맛 같은 6개월의 휴식이었겠지만 취업상담이나 새 직장의 면접과정에서는 그 6개월이 빈칸으로 남아있다. 나이든 사람의 6개월은 젊은 사람의 3년과 맞먹는다고 한다. 그만큼 주위상황이 빨리 변한다는 뜻이다. 취업경력에서의 공백은 손해이므로 재취업을 할 생각이라면 그 기간 동안 컴퓨터를 배우는 등 철저하게 관리해야 한다.

또 한 가지는 자기 경력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 함께 일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비치는 경우다. 직장에서는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업무지시를 하게 되는데, 나이 많은 부하 직원에게 지시가 아닌 부탁을 해야 한다면 어느 누가 선뜻 고용하려고 나서겠는가. 직장에서는 일을 하는 것이지 대접받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준비없는 퇴직자들은 정보 수집에 게으르다. 부족한 기회에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어느 세월에 일자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 꾸준한 정보 수집이 취업으로 연결되는 수가 많다. 여기저기 문을 두드려보는 노력이 가장 먼저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내 인생에도 은퇴가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차리는 일이다.

유경 사회복지사·‘마흔에서 아흔까지’ 저자(treeappl@hanmail.net)



준비 없으면 오래살수록 고통

준비 늦을수록 고통도 크다
평균수명 77세로 11년 만에 5년 늘어... 수명 5년 연장 때 추가자금 1억2000만원 필요

최근 들어 ‘바이오 혁명을 한국의 과학자들이 주도하고 있다’는 뉴스를 자주 접한다. 바이오 혁명과 의학의 발전은 조만간 불치병을 치유하고 생명연장의 꿈을 실현시켜줄 가능성을 높게 할 것이다. 일찍이 천하의 절대권력을 가진 진시황도 구하지 못했던 불로장생의 약이 머지않아 대중적으로 판매될지도 모른다.

실제 통계청에서 발표하는 생명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평균수명(0세가 앞으로 더 살 수 있는 나이)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04년 12월에 발표된 2002년 생명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수명은 전체 77.0세, 남자 73.4세, 여자 80.4세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2001년과 비교하면 남자는 0.54년, 여자는 0.43년, 11년 전인 1991년과 비하면 남자는 5.64년, 여자는 4.52년 증가한 수치이다. 또한 남녀간의 평균수명 차이는 2002년은 7.1년으로 2001년에 비해 0.1년, 1997년에 비해 0.5년 감소했고, 1985년의 8.4년 이후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평균수명과 함께 중요한 지표인 연령별 기대여명(앞으로 더 살 수 있는 나이)을 보면 2002년 현재 45세인 경우를 기준으로 할 때 남자 30.8년, 여자 36.9년으로 2001년의 남자 30.3년, 여자 36.6년에 비해 불과 1년 만에 남자 0.5년, 여자 0.3년이 늘어났다. 또한 특정사인을 제거할 경우 기대여명은 2002년 출생아를 기준으로 1~5년씩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각종 암의 영향을 제거하면 남자 5.0년, 여자 2.5년, 순환기계통 질환의 영향을 제거하면 남자 3.4년, 여자 2.9년, 각종 사고사의 영향을 제거하면 남자 2.6년, 여자 1.0년씩 수명이 연장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듯 우리는 수명연장이 빠르게 진행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를 환호해야 하는 뒤에는 ‘과연 생명연장으로 길어진 노후가 행복할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도 커지고 있다. 이제는 오히려 ‘오래 산다는 것이 고통일 수 있다’는 점을 많은 사람이 자각하고 있다. 예전에는 사망의 위험이 문제였지만 이제는 오래 사는 위험, 즉 ‘장수(長壽) 리스크’가 문제가 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노후를 건강하게 지내지 못한다면 생명의 연장은 고통의 연속일 것이며, 충분한 노후소득이 준비되지 못한 채 은퇴를 한다면 생활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노후준비를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은퇴 후 행복의 크기가 달라질 것이다.

노후준비는 크게 소득을 마련하는 과정, 건강을 유지·관리하는 과정, 인간적 유대를 유지하는 과정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바이오 혁명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결과된 수명연장은 노후소득을 부족하게 할 것이므로 본래 예상하는 수준보다 다소 넉넉하게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노후설계의 원리상 노후 필요자금은 매월의 생활비, 기대여명, 물가상승률 등을 고려하여 계산된다. 생활비와 물가상승률의 변동이 없다고 가정할 경우 기대여명이 길어지면 그만큼 노후 필요자금은 추가로 커지게 된다. 이는 앞서 보았듯이 매년 0.3~0.5년씩 기대여명이 높아지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월 생활비가 200만원이라고 가정할 때 수명이 5년만 연장되어도 1억2000만원의 추가자금이 필요하게 된다.

이렇듯 수명연장에 따라 노후자금에 대한 갭이 발생하는데 이에 대응하는 방법은 소득을 마련하는 과정을 일찍부터 시작하거나 수익률을 높이는 게 재무설계의 원리상 대안이다. 그런데 수익률을 높이는 것은 그만큼 리스크가 수반된다. 따라서 평균수익률을 얻는다고 가정할 경우 조금이라도 젊어서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다.

그러나 조기퇴직과 명예퇴직이 일상화된 현실에서는 중도에 노후준비가 방해받고 있으며, 심지어는 당장의 생활을 꾸릴 수 있는 근거조차 위협받고 있어 이조차도 쉽지는 않다. 따라서 수명연장으로 인해 발생하는 장수 리스크를 극복할 수 있는 추가적 대안이 필요하게 된다.

이와 관련해 먼저 상속에 대한 생각을 바꿀 것을 권하고 싶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가능한 한 많은 재산을 축적하고 이를 자녀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자녀 세대가 현실적으로 부모를 공양하지 않는 상황에서 부족한 자금을 보충하는 방법으로는 자신이 축적한 자산을 활용하는 것이 최적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향후 다양한 정부 지원이 예상되는 역모기지 제도를 활용하여 부족한 노후소득을 보충하는 것도 현실적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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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단계적 은퇴를 활용하는 것도 장수 리스크를 극복하는 적절한 방법으로 권장될 수 있다. 단계적 은퇴란 은퇴연령이 되어 경제활동과 갑자기 단절되지 않고 경제활동을 일정기간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제도적으로 단계적 은퇴가 장려되어야 한다. 사회적으로 고령자의 지식과 경험을 활용할 수 있도록 획일적으로 은퇴를 강제하지 말아야 한다. 실제로 건강상태가 양호하고 일할 의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연령을 기준으로 은퇴시키는 것은 훌륭한 인적 자원을 낭비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활동에 참여하여 소득을 얻고 있다고 하여 연금을 지급하지 않거나 지나치게 축소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일정연령에 도달하여 연금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과거에 기여해온 것에 대한 보상인 측면이 있으므로 지나치게 박탈할 경우 대부분은 경제활동에 참여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단계적 은퇴의 방법은 자신이 종사하던 업무를 파트타임 형태로 전환, 다른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여 재취업, 창업 등으로 나뉠 수 있다. 그런데 재취업과 창업에는 일정한 교육을 이수하는 것이 필요하므로 이를 은퇴 프로그램의 일부로 제도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쨌든 스스로 변화하는 미래환경에 대비하여 준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개인에게 은퇴 연령 이후 원하는 경제활동을 적절히 할 수 있도록 자문하고 교육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 우리는 죽는 것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걱정하는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어떻게 사고하는가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므로 은퇴를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은퇴 후의 삶에 대해 긍정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할 때 생명공학 혁명을 통해 얻어진 제2의 인생은 장수 리스크를 극복하고 다시 빛나기 시작할 것이며 행복해질 것이다.

오영수 보험개발원 보험연구소장(ysoh@kidi.or.kr)


 
선진국에선 조기은퇴 막느라 고민

준비 늦을수록 고통도 크다
연금 타기 위해 정년도 되기 전 자발적 은퇴... 일하는 사람 줄어 공적자금 재정악화

은퇴는 우리나라나 서구 선진국이나 똑같이 고민하는 주제다. 하지만 연금 제도가 잘 갖춰진 선진국과 연금 제도가 미비한 한국은 고민의 내용이 다르다. 선진국들이 인구의 고령화만큼이나 심각하게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근로자들이 자발적으로 조기은퇴하는 것이다. 조기은퇴란 근로자들이 공식적인 정년 이전에 퇴직하고 경제활동을 중단하는 것을 말한다.

서구사회의 조기은퇴 경향은 지난 4반세기 동안 겪어온 어떤 구조적인 변화보다 더 뚜렷하고 일관된 추이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추세가 가지고 있는 현상적인 아이러니는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80세에 근접하고 있는 가운데 평균수명이 더 짧았던 과거보다 더 일찍 경제활동을 접고 은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노후에 ‘일’보다는 ‘여가’를 더 선호할 만큼 삶의 질이 높아진 이유도 있겠지만, 보다 더 직접적인 요인은 노후소득보장 장치인 연금제도가 잘 정비가 되어 있고 정년보다 몇 년 일찍 은퇴를 할 경우에도 연금의 급여수준에 있어서 크게 손해를 보지 않도록 제도를 설정해놓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65세가 연금의 정년인데 62세에 은퇴를 하기로 결정하면 조기은퇴하는 햇수에 비례하여 연금수급액이 일정비율(약 5% 이내)로 줄어들게 되지만 수급할 수 있는 기간이 그만큼 길어지게 되어 총수급액 자체는 변함이 없다.

서구에서의 공식적인 정년은 주로 공적연금 제도에서 규정하는 정식 연금수급 개시연령과 일치한다. 은퇴는 소득활동의 중단을 의미하고 따라서 은퇴 이후에는 공적·사적 연금제도에서 노후소득을 보장받게 된다. 역사적으로 20세기 후반의 거의 전기간 동안 대부분의 국가에서 공적연금의 수급개시연령은 65세였으며, 따라서 노동시장에서의 은퇴 연령 또한 65세가 오랜 관행이었다. 반면 조기은퇴 경향에 따라 최근 실질 은퇴연령은 62~63세 정도다.

선진국의 조기은퇴 현상은 중·고령 근로자들이 50대 초반부터 비자발적으로 퇴직을 해야 하는 우리의 고용현실과는 정반대의 현상이다. 서구는 대부분 자발적인 것이고, 우리의 경우는 반대로 대부분 비자발적인 조기퇴직이어서 문제의 성격과 본질이 전혀 다르다. 우리의 경우 조기퇴직을 하더라도 국민연금제도나 기업연금제도가 아직 성숙하지 못해 강제퇴직 이후에도 재취업이나 자영업 등을 통하여 남은 생애기간 동안 스스로 노후소득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은퇴(소득활동의 중단) 연령은 서구보다 더 높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서구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실질 은퇴연령이 62~63세 전후인 데 비해 우리나라는 남성이 68세, 여성이 67세로 조사되어 멕시코(75세), 일본(70세), 아이슬란드(69세)에 이어 OECD 국가 중에서 네 번째로 근로 생애가 긴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선진국의 경우 고령 근로자의 조기퇴직 경향은 이미 진행된 인구의 고령화로 인하여 가뜩이나 어려운 노인부양비 부담과 공적연금의 재정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고령자들이 정년까지 계속 소득활동을 해서 연금보험료를 부담해줘야 하지만 이들이 오히려 일찍 은퇴해서 거꾸로 연금의 수급자가 되기 때문에 연금의 재정수지가 더욱 악화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 문제로 인해 서구 국가들은 최근에는 조기퇴직의 인센티브를 없애거나 약화시킴으로써 근로자들이 적어도 정년까지는 남아서 일을 하도록 유인하는 방향으로 연금제도를 개혁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경우엔 OECD 국가 가운데서도 근로자들이 아주 늙은 나이까지 일을 계속하는 대표적인 나라로 분류돼 인구고령화 시대에 서구 선진국이 부러워할 조건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근로자의 실질 은퇴연령이 높은 것은, 우리나라의 경우 고령 취업자 가운데 기업의 퇴직연령과는 상관없는 자영업자의 비율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 높고 노후소득보장 장치가 미흡하여 어쩔 수 없이 고연령까지 소득활동을 해야 하는 측면이 강하다. 참고로 비농업 부문만 보더라도 전체 취업자 중 자영업자의 비율이 OECD 평균이 14%, 일본이 12%인 데 비해 한국은 30%로 멕시코(31%)와 함께 두 배가 넘는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고령취업자 가운데 자영업자의 비율이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고령자만을 대상으로 할 경우 이 비율은 더 커지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우리나라도 미래에 자영업의 비율이 선진국 수준으로 줄고 노후소득보장 체계가 성숙하게 될 경우 고령자들의 실질 은퇴연령이 선진국에 수렴하게 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

선진국 정년후 취업률 10% 그쳐

그러나 어쨌든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는 기업에서의 실질 퇴직연령이 평균 55세, 국민연금의 수급개시 연령이 60세, 노동시장에서의 실질 은퇴연령이 평균 68세로 직장에서의 퇴직과 연금수급 그리고 은퇴연령 간에 간격이 커서 그만큼 각 단계별로 고령자에 대한 고용안정과 노후소득보장 장치의 강화가 중대한 사회적 숙제로 자리잡고 있다. 대부분 임금 근로자의 경우 평균 55세에 퇴직을 하여 68세에 최종적으로 소득활동을 중단할 때까지 약 13년의 긴 기간을 제2의 근로생애를 살아야 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대부분의 고령자들은 불안정한 일자리에서 저소득으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통계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 55~64세 사이의 고령 근로자 중에 남성의 경우 약 22%만이, 그리고 여성은 약 4%만이 정규직 임금근로자이고 나머지는 남성의 경우 대부분이 자영업자, 여성은 대부분이 무급 가족종사자다. 서구 선진국의 경우 60~65세 공식 정년 연령을 전후로 하여 대부분이 은퇴를 하고 정년 이후의 계속 취업 비율은 10% 미만으로 아주 낮다. 이렇게 볼 때 서구 선진국의 경우 근로생애에서 은퇴생애로의 전환이 사회제도적으로 명확하게 설정되어 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은퇴과정과 결과가 개별화되어 있어서 각 개인의 경제적 사정에 따라서 노후복지의 차이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서구 선진국과 우리나라는 조기퇴직과 인구 고령화라는 공통의 문제에 당면하고 있지만 속사정을 살펴보면 문제의 양상과 본질이 서로 다르다. 우리나라의 경우 직장퇴직-연금수급-은퇴시점 간에 간극을 줄이고 대부분의 고령자들이 짧게는 60세에서 65세의 정년까지는 활동적으로 소득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이후에는 근로생애 동안의 소득활동에 힘입어 적정 수준의 연금소득을 통해 평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는 은퇴과정의 선진 제도화를 위해 정책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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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하남 노동연구원 연구위원(phang@kli.re.kr)



남편·자식에 밀려 아내의 노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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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인생이 기다린다 | 여성
한국 여성, 남성보다 평균수명 7년 길어... 남편 사후 생계대책 미리 준비해야

서울 방배동 판자촌에 사는 오모(78) 할머니는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오는 자원봉사자와 이야기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여느 때는 방 안에 앉아 문 밖만 내다보다 때되면 혼자 밥 먹고 어두워지면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 잠드는 것이 일과의 전부다. “남편 죽고나서 있던 집 팔아 장남의 사업 밑천을 대줬더니, 글쎄 돈 다 까먹고 어디로 숨어버렸어. 아들 둘 더 있는데 다들 사는 형편이 어려워서 나타나지도 않고…, 늘그막에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자원봉사자들에게 늘어놓는 할머니의 넋두리는 끝이 없다. 자식이 있단 이유로 기초생활수급자 대상에도 오르지 못해 매달 10만원씩 지원해주는 복지단체의 도움으로 근근이 생활하는 할머니는 “젊었을 때 미리 미리 준비해 놓아라” “자식이고 남편이고 떠나면 그만이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산다.

여성 노인의 무방비한 노후대책을 두고 위험경고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남편과 자식 건사에 정작 자신의 노후 문제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들 앞에 닥친 현실은 이미 위기 상태다.

충청남도 온양에 사는 최모(67) 할머니는 얼마 전 다리 골절로 병원에 입원했다. 인근 지역 공사장에서 일당 2만원씩을 받고 잡역을 하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다. 할머니의 남편은 3년 전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 죽은 뒤에 혼자 농사지을 여력이 안되서 땅을 팔았어요. 땅 판 돈이 제법 돼서 나 혼자 살기 걱정 없겠다 생각했는데, 아들 딸들이 ‘저희들 사는 형편 어려우니 도와달라’며 몇 번 손 벌려 조금씩 떼어주다 보니까 남는 게 없더라고요. 통장에 몇 푼 남은 거는 내가 더 늙어 일할 기력마저 없으면 쓰려고 자식에게 말 안했어요. 그래서 당장 먹고 살 돈 벌려고 공사장 나갔다가 사고를 당했어요.” 최씨는 “동네에 집이 네 채 있는데 그 중 세 집에 할머니 혼자만 산다”며 “다들 공사장이나 가까운 공장에 나가 허드렛일 해서 생활비를 번다”고 말했다.

일할 기운도 없는 노인은 자식이 매달 보내주는 용돈에 생계를 맡겨야 한다. 실례로 대전시 노인 생활 실태 조사에 따르면 여성노인의 70.1%가 노후계획에 대한 준비가 전무한 상태이며 이들 중 한 달 용돈 10만원 이상인 노인은 45% 수준이고 나머지는 5만원 미만인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한 달 용돈 1만원 이하 노인도 전체의 6.1%를 차지한 것으로 조사됐다.

자녀교육비에 노후대책은 뒷전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남자가 73세, 여자가 80세로 여자가 남자보다 7세나 더 오래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남편 사후의 노후 대책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어 문제로 지적된다.

서울 동작구에 사는 전업주부 이원미(36)씨는 자신의 노후대책에 대한 질문에 “남편이 개인연금도 들고 보험도 들어놨다. 집 있으니까 급하면 그거라도 팔아서 살면 된다”고 답했다. 만약 남편 사후에는 어떻게 할지를 물었을 때는 “아들 있으니까 같이 살겠다”며 역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잘 키운 아들 하나가 보험보다 낫다는 것이 이씨의 생각이다.

서울 강동구에 사는 주부 김진선(48)씨는 “아들 있는 엄마들은 노후 걱정은 안해도 아들 장가보낼 때 집 사줄 걱정은 하는 것이 요즘 세태”라고 말했다. “저는 딸만 둘인데 ‘대학졸업한 다음에는 너희들 힘으로 살라’고 자주 말하고 있어요. 딸 덕 볼 생각은 아예 꿈도 안꾸니까 노후에 대한 걱정이 아무래도 아들 있는 엄마들보다는 큰 것 같아요.”

그렇다고 김씨의 사정이 더 나은 것은 아니다. 30대 중반에 현재 강동구에 있는 40평짜리 아파트를 장만한 뒤 5년 동안 대출금 갚느라 돈 모을 새가 없었고 40대 들어서는 두 딸 교육비로 버는 돈이 모두 들어갔다. 현재 두 딸은 대학교 4학년과 2학년. 한 해에 두 딸 등록금으로 들어가는 돈만 2000만원 가까이 돼 여전히 수중에 쥔 목돈은 없다. 대학졸업 시키고 나면 그때부터 차근차근 모을 것이라고 하지만 남편이 무사히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소규모 무역 회사의 과장으로 일하는 여성 이모(43)씨는 혼자서 중학교 1학년인 딸을 키우고 있다. 그런데 전 남편이 매달 보내오는 얼마간의 자녀교육비까지 합쳐 한 달 수입은 두 사람이 살기 부족한 액수가 아니지만 통장은 늘 마이너스다. “사교육비 부담이 커요. 돈 없다고 안 가르칠 수도 없고 남들 하는 만큼은 해주려고 하는데 그게 만만치 않더군요. 거기다 대출금도 월급에서 조금씩 떼어 갚고 있어 남는 게 없죠. 노후대책 시급한 건 알아도 당장 형편이 안 되는데 뭘 어떻게 하겠어요.”

이씨는 매달 10만원씩 나가는 개인연금과 건강보험 두 개가 자신의 노후보장책 전부라고 털어놨다. 나이 들어 국민연금 받을 것을 계산해보니 한 달 수입이 60만원 조금 넘게 나왔다. 20년 후 물가를 고려해 봤을 때 60만원의 가치는 지금의 절반 수준이라 살길이 막막하다. 그래도 딸자식 하나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키우겠다는 것이 그의 현재 목표다.

아직도 남편 이름으로 보험 드는 사람들

노후를 위해 황혼 재혼을 하는 이들도 있다. 남편과 사별하거나 이혼한 뒤 혼자 살다가 생계 때문에 재혼을 하는 경우다.

분당에 사는 최모(62)씨는 2년 전 오랜 지병으로 병원 신세를 지던 남편과 사별했다. 그러나 떠나간 남편에 대한 애도의 심정보다 당장 눈앞에 닥친 생계가 최씨에겐 더 큰 문제였다. 살고 있던 조그만 단독주택을 팔아 전세로 집을 옮기고 병원비를 대던 터라 수입원이 전혀 없었다. 남편 사후에 월세로 거처를 옮겼지만 생활비는 금새 바닥났다. 결혼해서 살고 있는 딸이 있어도 사위 눈치가 보여 딸네 집에 들어갈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단다. 그러던 최씨는 얼마 전 작은 공장을 운영하는 김모(69)씨와 재혼을 했다. “이 양반이 아들 장가보내야 하는데 홀아비 모시기 싫다고 여자 쪽에서 반대를 했다나봐요. 자식 때문에 재혼을 생각하던 중에 아는 사람 소개로 저를 만난 거죠. 그런데 제가 호적에 올라가면 이 사람 죽은 뒤에 유산이 저에게 상속된다고 아들이 반대해서 혼인신고도 못했어요. 이렇게 살아야만 하나 싶은 생각도 들지만, 어떻게 하겠어요. 산 목숨 끊을 수도 없고….” 최씨는 젊었을 때 남편만 믿고 의지한 것이 죄라고 자신만 원망할 뿐이다.

요즘 젊은 부부들은 재산을 부부 공동명의로 하거나 20대 후반부터 철저하게 노후대책을 위한 재테크에 열을 올리지만 이미 중년에 접어든 부부들은 재산을 남편 명의로만 해놓기 일쑤다.

ING생명 홍익지점의 최용욱 지점장은 “요즘 노후 대비 상품으로 변액보험 가입률이 높아지고 있는데 아직도 상당수가 남편 이름으로 보험을 신청한다”며 “부부 중 더 오래 사는 쪽의 명의를 쓰는 것이 유리하다고 설명해도 중년 이상 연령층에서는 무조건 남편 이름으로 신청하는 경우가 50% 이상”이라고 했다.

“40대 중반 넘어선 분이 노후를 위해 상담을 하러 많이 오십니다. 그러나 이미 시기적으로도 늦은 데다 대개 남자분 혼자 오거나 부부가 같이 오지 여자 혼자 오는 경우는 드뭅니다. 아내의 노후만 따로 떼어 걱정하는 것은 더욱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최 지점장은 철저한 생애 계획을 세워놓지 않으면 노후의 문제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며 하루라도 젊었을 때 노후대책을 세우는 것이 최선이라고 했다.

이선정 자유기고가(sjlgh01@empal.com)



한창 돈 들어갈 나이에 나가라니…

제2의 인생이 기다린다 | 조기퇴직
일을 잃는 것은 삶의 버팀목을 읽는 것… 퇴직인력 활용 위한 정책 필요

“남자는 직업이 없으면 안되는 거고, 지금에 와서 생각을 해도 직업은 자기가 능력이 갖추어질 때까지는 해야 해요. 또 나이 먹은 사람은 나이 먹은 대로 가졌으면 좋겠고. 그 다음에 진짜 직업에도 손을 댈 수 없을 때는 그냥 인생은 황혼이지 종점이지.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남자 입장에서는 직업이지…. 지난 날보다 더 시간에 쫓기면서 더 몰두하면서 그렇게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직업에 더 투철하고…. 직장 일이 머릿속에 박혀있기 때문에 쉽게 변하지 않아요. 지금도 할 수만 있다면 일을 하고 싶죠.”(남성 퇴직자 N씨)

“지금 나는 직장에 대한 애착이 굉장히 강하거든요. 가정적으로는 무남독녀예요. 그러니까 가장은 아니더라도 어떤 책임감이 강해가지고 끝까지 해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완전히 교육계에서 제도화시켜 버렸잖아, 62세로. 더 하고 싶지. 인간은 일하는 동물인 것 같아. 일을 안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 거야. 여자인 나도 그래요. 그리고 평생 일할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정말로 무력해져요, 안하니까.”(여성 퇴직자 K씨)

퇴직자의 퇴직 후 생활과 직업의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다양한 직종에서 퇴직한 사람을 인터뷰한 내용이다. 퇴직으로 인한 직업 상실은 남녀를 떠나 심리적 차원에서 무력감이나 상실감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 조기퇴직자들의 모습이 어떤지 그려보면 왜 이들이 심리적으로, 경제적으로 충격을 받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직업지향적인 사회에서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퇴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개인에도, 가정에도 위기를 초래한다. 특히 현재 조기퇴직자에 해당되는 40~50대는 1950~1960년대에 태어나 우리 사회의 산업화 과정을 보면서 자란 세대로, 일·직업·성장·생산·승진 등 성장일변도의 근대화를 태어나면서 경험하고 내면화해왔다. 따라서 삶의 질, 인생의 의미 등 탈근대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사회가 변화되었어도 이들에게는 여전히 개인보다는 조직, 그리고 삶의 질보다는 성장이 더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생애 궤적을 살아온 집단이기 때문에 남녀를 불문하고 일터가 되는 직장은 단순히 일의 공간이 아니라 삶의 버팀목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 조직으로부터 비자발적이고 반강제적으로 퇴직해야 하는 경험은 수용하기 힘든 ‘생활 사건’이 된다.

더욱이 오늘날처럼 평균수명이 연장되는 상황에서는 비자발적인 조기퇴직자로 생활해야 하는 기간이 너무 길다는 것도 큰 문제가 된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자료에 따르면 한국 근로자는 주된 일자리에서 기업의 평균 정년인 56세보다 젊은 평균 54.1세 때 퇴직하여 이후 14년간 제2의 근로생애기간(주로 자영업이나 임시직, 일용직 등 불안정한 일자리임)을 거쳐 68.1세 때 노동시장에서 은퇴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남성이 평균 54.4세 때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한 후 평균 12.9년간 다른 일자리를 구해 제2의 근로생애기간을 보내고 평균 67.3세 때 노동활동을 그만둔다. 여성은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하는 시기가 평균 53.8세로 남성보다 빠르지만 제2의 근로생애기간이 평균 14.5년에 달해 노동시간 은퇴시기는 평균 68.3세로 남성보다 늦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분석에 입각해서 통계청의 생명표(2002년)에 나타난 남성의 평균수명인 73.38세와 여성의 평균수명인 80.44세를 토대로 조기퇴직자의 중·장년기 이후의 삶의 기간을 그려보면 남성 조기퇴직자는 인생의 4분의 1을, 여성 조기퇴직자는 3분의 1에 해당되는 시기를 불안정한 제2의 일자리를 전전하면서 퇴직자로 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기퇴직자와 그의 가정 : 위기의 순간

조기퇴직하는 시기는 인간발달의 관점에서 보면 중·장년기로, 모든 면에서 정착과 안정을 얻고 인생의 성취를 완성하는 시기다. 따라서 조기퇴직은 성취감을 경험해야 하는 시기에 그러한 장(場)에서 배제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위기의 생활사건이 되며 당사자는 상실감이나 무력감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가족생활주기의 관점에서 보면 조기퇴직하는 시기는 가족확대기와 가족축소기의 과도기 상태로, 자녀교육비 자녀혼인준비 노후대책 등으로 지출이 가장 많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지출은 많으나 조기퇴직으로 인해 소득이 없어지고 여러가지 부가 혜택이 사라진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큰 위기가 된다. 특히 1998년 하반기부터 금리가 큰 폭으로 하락하면서 이들의 생활기반이 상실되고 있는데 이는 곧 노인 빈곤 문제로도 연결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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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직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조기퇴직자의 생활이 가정으로 이동하면서 가족구성원의 적응 문제가 생긴다. 일반적으로 자녀들은 청소년기와 성인기에 있게 되는데 이 시기의 특성이 가족에 소속되기보다는 가족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하는 시기이다. 따라서 퇴직자의 바람과는 달리 자녀들은 가정생활보다는 사회생활에 더 많은 가치와 의미를 두면서 바깥으로 나돌게 된다. 그리고 생애발달적 관점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 변화를 보면 남성은 좀더 여성적, 여성은 좀더 남성적 성향을 보이면서 다른 어떤 때보다 부부간 역할을 둘러싼 갈등이 충분히 많을 수 있는 시기이다. 그러므로 배우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조기퇴직자들이 가정으로 돌아왔을 때도 적응이 절대 쉬운 시기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조기퇴직에 대한 재인식

원래 조기퇴직은 일정 연령에 도달한 조직 구성원이 조기에 능력을 재개발하여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조직의 인사정체 현상 및 인건비 절감을 꾀하는 제도다. 따라서 미국과 유럽의 근로자는 퇴직의 시기를 자발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퇴직권리를 가지면서 퇴직을 인생의 재출발과 경력 확장의 기회로 인식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조기퇴직은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진행된 강도 높은 경영혁신과 구조조정 등에 영향을 받아 대규모로 이뤄졌다. 또한 우리나라 기업의 정년 연령은 55세 전후로 서구에 비해 매우 낮아 정년이 곧 조기퇴직을 의미한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조기퇴직은 대부분의 퇴직자가 경험해야 하는 생활사건일 뿐만 아니라 비자발적·반강제적 외압이 전제되는 실직의 의미가 크다. 그 시기도 이른 편이다. 따라서 조기퇴직이 새로운 인생을 여는 전이 사건이 되기보다는 고통의 시간이 되는 측면이 많다.

또한 조기퇴직에 해당하는 시기는 지출이 가장 많아지는 시기다. 따라서 이 시기에 경험하게 되는 조기퇴직은 개인적으로 자아 정체감에 큰 상처를 주는 사건일 뿐만 아니라 가정의 입장에서 볼 때는 경제적인 위기를 가져오는 생활사건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위기는 노후 부양에 대한 가치가 변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노인 빈곤 문제로 연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출산, 고령화’가 국가적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시점에서 노동력 수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정책은 퇴직 인력의 활용이다. 이제는 조기퇴직의 문제를 퇴직자 개인의 적응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사회 문제로 접근하면서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노동력 활용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성미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가정학과 교수 (eliza_s@knou.ac.kr

출처 - 중앙일보

[준비 안 된 '퇴직 혁명']

상. 직장인 83% "잘 모르겠다"


9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노동부 주최
퇴직연금 설명회장.

노동부 담당자의 설명이 시작됐지만 설명회장 밖에선 자료를 받지 못한 참석자들과 행사 관계자들의 실랑이가 계속되고 있었다. 설명회장에는 임시 좌석이 황급히 마련됐지만 100여 명은 선 채로 설명을 들어야 했다. 주최 측이 예상한 참석자(300명)의 세 배가 넘는 1000여 명이 몰렸기 때문이다. 일부는 분통을 터뜨리며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한 중소기업 인사 담당자는 "경기도 광주에서 두 시간 걸려 왔는데 자료집도 못 받았다. 정부에서 실무에 도움이 될 만한 안내 책자 한번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다른 참석자는 "퇴직 연금제로 바꾸려 해도 뭘 알아야 할 것 아니냐"며 답답해 했다. 이날 행사는 민간기업을 대상으로는 서울에서 열린 처음이자 마지막 설명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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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모른다=다음달 1일에 퇴직연금 제도가 시작된다. 40년간 지켜온 퇴직금 제도를 완전히 뜯어고치는 '퇴직 혁명'이 코앞에 닥친 것이다. 하지만 직장인들은 여전히 퇴직연금이 뭔지 아예 모르거나 시큰둥하다.

기업들도 대책 없이 정부의 지침만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웬만한 기업은 다 안다"며 홍보나 교육에 소극적이다. '근로자 퇴직급여 보장법'이 입법예고 기간(2003년 9월 24일~10월 14일)을 거쳐 올 1월 27일 공포됐으나 지금껏 민간기업 대상 설명회는 대도시 7곳에서 한 차례씩만 열고 있을 뿐이다.

중앙일보가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피델리티와 공동으로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최근 실시한 조사에서 퇴직연금 제도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응답자는 17.3%에 불과했다. 열 명 중 네 명(43.9%)은 다음달부터 제도가 시행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정부 부처의 홍보를 통해 정보를 얻었다는 답은 5%에 불과했고, 퇴직연금 관련 사내교육을 받은 직장인은 열 명 중 한 명도 안 됐다.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인 왓슨와이어트의 밥 찰스 퇴직연금 컨설턴트는 "기존 퇴직금제와는 전혀 다른 제도여서 어느 나라에서나 초기엔 거부감과 혼란이 있다"며 "시행착오를 줄이려면 홍보와 교육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특히 우리나라에선
국민연금에 대한 불신과 불안이 매우 높기 때문에 이를 보완할 퇴직연금제가 초기에 자리를 잡지 못하면 앞으로 막대한 추가 비용과 시간을 들여야 할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자칫하면 근로자들은 매우 유용한 노후 대책 하나를 놓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그러나 벌써 새 제도의 안착은 물 건너갔다는 지적도 많다. 본지 조사에서 직장인 다섯 명 중 세 명(61.5%)은 새 제도가 도입돼도 기존 퇴직금제를 유지하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근로자 평균 근속 연수는 5.8년에 불과하기 때문에 통념처럼 뭉칫돈을 퇴직금으로 받는 것은 일부 장기 근속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다.

◆ 노사 갈등 가능성도=앞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더 만만치 않다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퇴직연금제의 구체적인 방안은 기업별 노사 합의를 통해 정해야 하기 때문에 노사 갈등의 새 불씨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기업 퇴직연금 담당자 및 노조 간부 각각 70명을 대상으로 한 별도 설문조사에서 노조 간부 두 명 중 한 명, 기업 담당자 세 명 중 한 명이 퇴직연금제가 노사 갈등의 원인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제도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노사 간 힘겨루기로 흐르게 되면 미국의 GM처럼 막대한 '퇴직연금 부채'가 쌓여 기업 경쟁력을 갉아먹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창환 퇴직연금 컨설턴트는 "일본도 연금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금 재생'이란 목표를 내걸고 정.재계가 뭉쳐 3년여간 대대적인 홍보와 교육을 실시해 사회적 난제를 해소했다"고 설명했다.

김진수(사회복지학) 연세대 교수는 "근로자들이 퇴직연금제도를 믿고 선택할 수 있도록 확실한 안전장치와 청사진을 제시하고, 기업이 능동적으로 제도를 바꿀 수 있도록 실질적인 유인책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 특별취재팀 : 표재용.이승녕.김영훈 기자<
pjygl@joongang.co.kr>

◆ 퇴직연금제란=다음달부터 직장인들은 노사 합의를 거쳐 기존 퇴직금이나 퇴직연금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 연금제는 근로자가 퇴직할 때 받을 돈을 미리 정해놓고 기업이 알아서 돈을 굴린 뒤 정액을 지급하는 형태와 기업이 매달 돈을 내되 근로자가 알아서 돈을 굴리는 방식이 있다. 연금은 55세 이상, 가입 기간이 10년 이상인 경우에 받을 수 있다.


상. 기업담당자 "정보 없어 헷갈린다"


경기도 안양시에서 중소기업을 상대로 보험 영업을 하는 김모씨는 이달 초 처음으로 퇴직연금 교육을 받았다. 나름대로 틈틈이 공부했지만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다. 김씨는 "퇴직연금을 유치해야 하는데 기업 담당자의 질문에 자신있게 답해줄 수 없어 고민"이라며 답답해 했다.

정부가 야심작으로 내놓은 퇴직연금제는 '21세기형' 노후 보장 제도다. 40여 년간 유지돼 왔지만 연간 체불액이 5000억원이 넘는 등 '불안한' 퇴직금 제도를 대체.보완하자는 게 가장 큰 목적이다. 그러나 아직 세제 지원 여부 등 세부 시행 지침이 마련되지 않은 데다 상품도 확정된 게 없어 시행 초기부터 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기업이든 근로자든 막상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막막해 하는 분위기다.

당장 퇴직 원금을 투자하고 운용하는 책임을 회사가 지느냐(확정급여형), 아니면 근로자가 지느냐(확정기여형)를 놓고 노사 간 또는 노노 간 갈등이 생길 수 있다. '퇴직용 원금'을 주식 투자 등을 통해 불리는 것을 두고 반대하는 직장인도 많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풀어 가려면 무엇보다 홍보와 교육이 시급하지만 정부는 "알 만한 사람은 웬만큼 안다"면서 이를 소홀히 하고 있다.

퇴직연금 전문가인 김성일씨는 "제대로 정착되면 불안한 국민연금을 보완할 최고의 노후 대책이 될 것"이라며 "정부는 물론 기업과 근로자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퇴직연금이 뭡니까"=대다수 직장인은 기초 정보에도 어두웠다. 본지 설문 응답자의 절반가량이 '(퇴직연금제도를) 들어는 봤지만 뭔지 모르겠다'(50.5%)고 응답했다. '전혀 모른다'도 세 명 중 한 명(32.2%)꼴이었다.

▶근무 연수가 낮을수록▶다니는 회사의 규모가 작을수록 퇴직연금에 대해 몰랐다. 좀 안다는 근로자도 대부분 '수박 겉핥기 수준'이었다. '퇴직연금을 안다'고 답한 이들 중 70% 이상이 자금운용의 기본 개념인 확정급여형과 확정기여형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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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회사 퇴직연금 담당자도 정보에 목말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룹사 차원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A기업 담당자는 "여러 금융회사에서 와 교육을 했는데 별 도움이 안 됐다"며 "구체적인 내용을 물으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대답뿐이었다"고 말했다.

◆ "제도 도입이 겁난다"=퇴직연금제의 문제점으로 '투자에 따른 위험성'을 꼽은 이가 31.7%로 가장 많았다. 퇴직연금 재원을 (주식 등에) 투자했다가 혹여 원금을 까먹을까 걱정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직장인들은 노후 대책으로 주식투자(13.6%)보다 부동산(39.6%)이나 은행 예.적금(39.4%)을 선호했다. '기존 퇴직금제도를 바꾸는 게 귀찮다'(23.7%)거나 '정보나 교육이 부족하다'(22.5%)는 것을 문제점으로 꼽은 근로자도 많았다. 중소기업인 H기계 인사 담당자는 "골치 아프게 바꿀 필요 없이 기존 퇴직금제도를 유지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런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퇴직연금의 조기 정착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퇴직연금이 증시의 자금줄 역할을 해 주가가 오르고, 오른 주가가 퇴직연금의 고수익을 뒷받침하는 선순환 시나리오가 작동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기협중앙회 조유현 실장은 "막상 시행에 들어가면 문제나 불만이 봇물처럼 터져나올 것"이라며 "그때 가서 땜질식 처방을 하다가는 국민연금의 실패를 되풀이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정부와 기업이 팔 걷고 나서야=건설자재 업체인 D사의 경리과장은 "실무적인 절차나 구체적 내용을 알아야 퇴직금과 퇴직연금을 비교해 볼 텐데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어떤 게 좋은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직장인의 71%는 신문.방송.인터넷을 통해 퇴직연금과 관련된 정보를 얻고 있었다. 정부 홍보를 통해 정보를 얻는 비율은 크게 낮았다.

그나마 어느 정도 퇴직연금 관련 정보를 들어본 적이 있다는 응답은 대기업 근로자(74.8%)가 중소기업 종사자(55.7%)보다 많았다. ▶여성(7.6%)보다는 남성(22.7%)이▶판매나 기능직(8.3%)보다는 경영 관리직(30.8%)이▶소득이 높을수록 관련 정보를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인재 (법학)상지대 교수는 "제도 도입 초기에는 정부가 나서 적극적으로 교육과 홍보를 하는 것이 근로자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도 할 말은 많다. 문제점도 알고 개선 노력도 하지만 쉽지 않다는 것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제도 정착을 위해 내년부터 300인 이하 영세기업을 대상으로 퇴직연금 컨설팅 비용의 일부를 보조해 주는 예산을 국회에 상정해 놨지만 이마저 통과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사진=강정현 기자 <
cogito@joongang.co.kr>

어떻게 조사했나
직장인 1000명, 인사.노조담당 140명 설문


이번 설문조사는 11월 3~9일 5일간(공휴일 제외) 진행됐다. 직장인 1000명 외에 기업 인사 담당자와 노조 담당자 70명씩을 별도 설문조사하는 등 모두 1140명을 대상으로 했다. 본지와 세계적 금융회사인 피델리티가 공동 기획하고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유니온조사연구소가 조사를 맡았다.

유의할당추출법(Purposive Quota Sampling)에 따라 조사 대상을 선정해 전화와 팩스로 조사했다. 설문 내용은 국내외 퇴직연금 전문가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했다.

일반 직장인에 대한 설문조사는 서울을 포함한 6개 지역(인천.경기.부산.광주.울산.포항)에 거주하는 성인 남녀(만 20~59세) 1000명을 대상으로 했다. 기업 인사 담당자와 노조 간부는 각각 대기업.중견기업.소기업으로 분류한 뒤 전화와 팩스 조사를 병행했다.

노조 간부들을 상대로 한 설문 조사에선 전체 응답자 네 명 중 한 명꼴(27.1%.19명)로 노조위원장이 직접 응답했다.

표준오차는 ±3.1%, 신뢰 수준은 95%다.

◆ 유의할당추출법=모집단이 한정돼 있으면서 지역별.성별.연령별 분포를 정확히 알 수 없을 때 대상자를 선별하는 방법.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구분한 이번 설문조사처럼 모집단 내에서 따로 대상자를 분류하는 조사에 많이 쓰인다.

퇴직 연금, 이것이 궁금
Q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나
A 노사 합의로 선택 가능


퇴직연금은 어떤 방식, 어떤 상품을 택하느냐에 따라 나중에 챙길 은퇴자금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얼마만큼 제도를 잘 이해하고 있느냐가 20, 30년 뒤 노후 대비의 성패를 가르는 셈이다.

①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나

-아니다. 노사 합의(노조 결정 또는 근로자 과반수 찬성)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근로자끼리 의견이 갈리면 한 회사에서 기존 퇴직금과 퇴직연금 제도를 동시에 실시할 수도 있다. 다만 근로자는 그중에서 한 가지만 선택해야 한다. 12월부터는 5인 이상 회사만 도입 가능하지만 2008년 이후는 전 사업장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②어떤 방식이 유리한가

-확정급여형(DB)과 확정기여형(DC) 두 종류가 있는데 DB형은 근로자가 나중에 받을 연금 총액이 미리 정해져 있다. 자금 운용도 회사가 책임진다. 직장인에겐 사실상 기존 퇴직금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자금 여력이 풍부하거나 퇴직 원금을 잘 굴릴 자신이 있는 회사에 좀 더 유리하다.

반면 DC형은 기업이 부어야 할 부담금(연간 임금총액의 12분의 1 이상)은 미리 정해져 있고 근로자 개개인이 자금 운용을 책임진다. 나중에 챙기는 적립금도 개개인마다 달라진다. DC형은 돈이 모두 회사 밖에 적립되기 때문에 회사가 망해도 지급엔 문제가 없다. 따라서 연봉제를 도입했거나 기업 경영이 어려워 퇴직금을 떼일 우려가 있는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에겐 DC형이 더 유리하다.

경제단체와 재계는 DC형을, 노조단체 등 근로자 측은 DB형 도입을 더 선호하고 있다.

③퇴직금 중간정산을 해야 하나

-안해도 된다. 기존 퇴직금을 퇴직연금 계좌(DB형.DC형 모두 해당)로 넘겨 연금화할 수 있다.

④일시불로도 받을 수 있나

-기존 퇴직금처럼 원하면 일시금으로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다달이 연금 형태로 받는 게 세제혜택 등에서 더 유리하다.

⑤퇴직연금 재원은 누가 부담하나

-원칙적으로 기업이 부담한다. 다만 DC는 근로자가 원하면 추가로 자기 돈을 낼 수 있게 했다. 이 돈은 소득공제를 받을 수 있다. 한도에 대한 규정은 아직 없다. 정부는 개인연금저축과 합산해 300만원까지만 소득공제 해준다는 방침이다.

⑥개인퇴직계좌(IRA)란

-퇴직용으로 붓는 자금을 따로 관리할 수 있게 한 금융 계좌다. DC에 가입한 근로자의 경우 IRA가 있으면 직장을 옮겨도 퇴직급여를 계속 부을 수 있다. 퇴직금을 받은 사람이나 퇴직연금 대상자만 가입 가능하다.

특별취재팀 : 표재용.이승녕.김영훈 기자<
pjygl@joongang.co.kr>


중. 노사갈등 불씨 되나

2001년 10월. 일본은 퇴직연금 제도를 전면 수술했다. 회사가 퇴직금 운영을 책임지는 확정급여(DB.Defined Benefit)형만 허용하던 것을 근로자 스스로 책임지는 확정기여(DC.Defined Contribution)형 연금을 추가한 것이다. 이듬해 3월 일본 6위의 종합상사 닛쇼이와이(日商岩井)는 DB형을 DC형으로 바꿨다. 재계 스스로도 놀란 초스피드였다. 당시 인사부장 나가쿠보 사토시(長久保敏)는 "경영진의 전폭적인 지원과 의견차를 좁히기 위해 수없이 함께 밤을 새운 노동조합의 협조로 일궈낸 성과"라고 말했다. 출범 전 적지 않은 논란을 불렀지만 일본의 새 연금제도는 시행에 들어간 뒤엔 예상보다 짧은 시간에 뿌리를 내렸다.

대기업의 '솔선수범'이 한몫했다. 도요타자동차가 2002년 7월 새 제도를 부분 도입했다. 히타치(日立)는 도입 전 직원 대상 설명회만 700여 회 열었다. 새 제도 시행 6개월 만에 40여 개의 대기업이 참여하더니 올 8월 말 DC형 가입 회사는 4800여 개, 156만 명으로 급속히 불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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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1월 한국. 퇴직연금 시행을 불과 보름 남짓 남겨놓았지만 노사 양측의 간극은 좀체 좁혀지지 않고 있다. 퇴직 연금 도입은 '노사 합의'란 관문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러나 재계-노동계 모두 어느 쪽이 자신들에게 유리한지 주판알만 튕길 뿐,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노조는 DB형을 밀어붙일 게 틀림없다. 하지만 기업들은 미국 제너럴모터스(GM)의 몰락을 불러온 DB형의 폐해를 걱정한다."(황인철 경영자총협회 사회정책팀장)

"퇴직연금제도는 근로자의 유일한 노후대책인 퇴직금제의 대안이다. 그런데 노동자 개개인에 책임을 떠안기는 DC형이 정답이 될 수 있겠는가."(한국노동자총연맹 강익구 정책국장)

◆ 노사가 나쁜 점만 본다=재계와 노동계가 DB형.DC형 중 어떤 것을 도입할지를 놓고 치열한 '신경전'을 펼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한 산별노조 관계자는 "DC형 도입 이후 몇 년만 지나면 근로자마다 투자 행태에 따라 수익률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며 "그렇게 되면 노조 조직을 뿌리부터 와해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는 재계대로 걱정이다. 한 대기업 인사 담당자는 "DB형을 도입하면 임금피크제.연봉제 등 새 인사제도를 도입하거나 분사.사업조정을 할 때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노사 양쪽 모두 눈치만 보며 미루거나 아예 도입 자체를 포기하려는 움직임도 나온다. 경총은 회원 기업들에 'DB형을 시행하느니 차라리 현행 퇴직금 제도를 유지하라'고 권하고 있다.

한국노총도 산하 노조에 '퇴직금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퇴직연금으로의 전환은 신중을 기하라'는 지침을 전달할 계획이다.

◆ 정보 부족에 의욕도 실종=노사가 퇴직연금 도입에 소극적인 것은 본지-피델리티 설문조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퇴직연금 실무를 다룰 전담 인원이나 조직을 둔 곳은 기업의 58%(겸직 37% 포함), 노조는 27%에 불과했다. 노사 모두 현행 퇴직금 제도를 유지하겠다는 응답이 절반을 넘은 반면 퇴직연금 방식에 대한 선호는 극히 낮았다.

이는 정보와 교육 부족 탓이 크다. '퇴직연금이 언제 어떻게 도입되는지 제대로 안다'는 기업은 두 곳 중 한 곳(50%), 노조는 세 명 중 한 명(32%)꼴이었다. DB형.DC형의 차이를 모르겠다는 응답도 노사 모두 절반을 넘었다.

기협중앙회 관계자는 "중소기업은 퇴직충당금을 운영 자금으로 꺼내 쓰는 경우가 많다"며 "이에 대한 대책 없이 어떤 중소기업이 선뜻 나서겠나"고 말했다.

◆ 타협으로 상생의 길 찾아야=연세대 김진수(사회복지학) 교수는 "처음부터 'DB는 노동자에게 유리하고 DC는 불리하다'는 식의 대립 구도가 형성됐다"며 "실제 두 방식은 도입하는 기업의 업종.규모는 물론 급여.근무 형태 등에 따라 장단점이 갈리기 때문에 우열을 따지기 쉽지 않다"며 아쉬워했다. 전문가들은 노총이나 경총 등 재계.노동계 대표단체가 퇴직연금 공동 기구를 설립, 운용하는 것을 해법의 하나로 제시했다. 상지대 김인재(법학) 교수는 "재계와 노동계가 퇴직연금 공동기구를 만들어 노총은 기금 안정성 문제를 감독하고 경총은 사용자 부담 문제를 따지는 역할을 맡는 등 종합적인 컨설팅과 감시 임무를 맡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퇴직연금을 둘러싼 노사 갈등 조정기구를 지원하고 중소기업 등 정보와 교육에서 소외된 근로자들을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정보통신노조연맹 정무길 조직쟁의실장은 "가장 취약한 계층은 제대로 된 퇴직금 제도도 없고 고용은 불안한 데다 노조도 없는 중소기업 근로자들"이라며 "정부가 이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 표재용.이승녕.김영훈 기자<
pjygl@joongang.co.kr>



중. 직원 1명이 2.4명 돌보는 셈

20만 명 대 48만 명. 20만 명은 최근 경영난을 겪는 제너럴 모터스(GM)의 미국 내 직원 숫자다. 48만 명은 GM에서 퇴직한 뒤 퇴직연금과 의료보험 혜택을 받는 이들의 숫자다. 직원 한 사람이 2.4명을 먹여 살리는 셈이다.

GM이 퇴직자들을 위해 매년 써야 하는 돈은 50억~60억 달러, 미래 금액을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1700억 달러에 이른다는 게 월가의 분석이다.

물론 확정급여(DB)형인 퇴직연금은 GM이 한꺼번에 내야 할 돈은 아니다. 퇴직자와 직원 몫으로 적립해 온 기금 중 부족분만 회사가 채우면 된다. GM은 2004년 말 현재 910억 달러의 퇴직연금 기금을 운용 중이며 부족액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미국 연금지급보증공사(PBGC)는 GM의 적립금 부족금이 최대 310억 달러에 달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GM이 앞으로 회사가 져야 할 부담을 너무 적게 잡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GM은 1999년 분사한 뒤 최근 파산보호를 신청한 부품업체 델파이 노동자를 위해서만 110억 달러를 더 써야한다.

과거 미국 대기업들은 노조의 힘에 밀려 또는 자발적으로 과도한 연금.복지 혜택을 약속했다. 그러나 성장이 둔화되고 평균 수명은 길어져 챙겨야 할 퇴직자가 늘면서 이런 약속은 굴레가 되고 말았다. GM 외에 포드.IBM.노스웨스트.유나이티드항공 등이 비슷한 문제로 곤욕을 치렀다.

그렇다고 확정기여(DC)형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미국의 DC형 연금인 401k는 자사 주식에 대한 투자도 허용하는데 월드컴.엔론.K마트 등은 회사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401k에 가입했던 직원들이 큰 손해를 봤다.

서창환 퇴직연금 컨설턴트는 "퇴직연금의 안정성과 장래는 DB.DC라는 방식에 있는 게 아니다"며 "기업과 노조가 합의를 통해 얼마나 더 합리적이고 지속 가능한 체계를 갖추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 표재용.이승녕.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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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일본, 연금개혁 연착륙


"경기가 다시 살아나고 있는 지금이 퇴직연금제도를 개혁할 수 있는 호기입니다."

일본 상공회의소가 운영하는 '연금교육센터(
www.cci-nenkin.jp)'사이트에는 이런 글귀가 떠 있다. 1962년 이후 확정급여(DB)형만 고집했던 일본의 퇴직 연금제도는 2001년 확정기여(DC)형으로의 전환 이후 거센 변화를 맞고 있다. DB형은 그간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면 기업은 퇴직 후 여생을 보장해 준다는 일본의 '종신고용제'와 잘 맞아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10년이 넘는 장기 불황은 DB형에 대한 믿음도 금이 가게 했다. 자산가치가 떨어지고, 고령화가 빨라지면서 회사가 책임지는 DB형 연금제도가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도요타.히타치 같은 초일류 기업들도 90년대 중반부터 연금준비금이 적자로 돌아섰다. 연평균 수익률을 5.5% 정도로 예상했지만 경기가 나빠져 턱없이 못 미쳤다. 2000년 일본 퇴직연금기금의 운용 수익률은 마이너스 10%를 기록했다.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당시 늘어난 일본 기업들의 부담액을 10조 엔으로 추산했다.

DC형 연금의 출범은 이런 배경에서 이뤄졌다. 재계는 물론 노동계도 적극 협력했다. 일본상의.경단련은 도요타.히타치.닛쇼이와이 같은 대기업들이 새 제도를 도입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제도를 널리 알릴 간판 기업으로 삼기 위해서다.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렌고)는 '금융.연금문제 교육보급 네트워크'라는 비영리법인을 설립해 노조와 노동자를 상대로 교육에 나섰다. DC형 제도의 보급은 보수적인 일본 직장인들이 투자에 대해 눈을 뜨는 계기도 됐다.

특별취재팀 : 표재용.이승녕.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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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28일 퇴직연금제 추가 설명회


노동부는 28일 오후 2시 서울 은행회관 2층 국제회의실에서 퇴직연금제도 설명회를 추가로 개최한다고 15일 밝혔다.

이번 설명회는 금융감독위원회.전국경제인연합회.자산운용협회 등 11개 기관이 공동 개최한다. 추가 설명회는 다음 달부터 퇴직연금제도가 시행되는데도 충분한 홍보와 교육이 되지 않았다는 지적(본지 15일자 1, 8면)에 따른 것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지난 9일 열린 설명회에서 기업 및 노조 담당자들이 높은 관심을 보여 추가 설명회를 개최하기로 했다"며 "필요하다면 지속적으로 설명회를 열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 표재용.이승녕.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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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알아야 굴릴 수 있다

스스로 고를 수 있게 '교육 또 교육'


홍콩은 5년 전 퇴직연금 의무 가입 제도를 도입했다. 도입 직전 서민층의 반발이 컸다. 당장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매달 월급의 5%씩을 적립해야 한다는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투자에 대한 이해도 형편없었다. 2000년 슈로더자산운용이 홍콩인 5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조사에서 83%는 주식투자를 어떻게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이들을 변화시킨 것은 거듭된 교육이었다. 정부와 금융사들은 노후 대책의 중요성과 투자 필요성.효과 등을 집중 교육했다. 피델리티자산운용의 니컬러스 로저스 이사는 "꾸준한 교육으로 이제는 장기 적립식 투자의 효과를 이해하는 근로자가 많아졌고 하루 주가 등락에도 덜 민감해졌다"며 "퇴직연금은 고령화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제도기 때문에 제대로 정착시키려면 교육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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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하고 또 교육하라=선진국일수록 근로자가 알아서 적립금을 굴리는 확정기여형(DC) 연금제도의 비중이 늘어나는 추세여서 투자자 교육의 중요성은 더 커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퇴직연금에 가입하면서 처음으로 간접투자를 하게 됐다는 사람이 전체 가입자의 58%에 이른다. 신입 사원들에게 연금교육은 필수 과정이 된 지 오래다.

2001년 DC형 퇴직연금제도 도입에 맞춰 일본은 상공회의소가 연금 전문 교육센터를 만들었다. 중소기업청은 연금의 A부터 Z까지 상세하게 기술한 안내 책자 78만 부를 만들어 보급했다. 강창희 미래에셋 투자교육연구소장은 "예금과 저축에만 익숙한 우리 직장인들에게 투자와 저축의 차이점을 알리고 스스로 상품을 고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교육의 첫 단계는 다양한 정보의 제공이다. 홍콩의 HSBC는 어디서든 현금자동인출기(ATM)를 통해 자신이 가입한 펀드의 수익률 등을 알 수 있도록 했다. 퇴직 이후 자산운용 계획을 짜주기도 한다. 적립금을 굴리는 방법뿐만 아니라 수령한 퇴직연금을 어떻게 재투자할지에 대한 안내까지 해주는 것이다.

더욱이 교육은 일회성으로 그치는 게 아니다. 홍콩 정부는 연금제 도입 5년째인 올해에도 대규모 순회설명회를 계속하고 있다. 교과서에 관련 내용을 담는 방안도 논의 중이다. 퇴직연금 컨설턴트인 김성일씨는 "계속 새로워지는 시장과 상품에 맞춰 재교육이 이뤄지지 않으면 근로자든 회사든 수익률만 좇거나 부화뇌동 투자에 휩쓸릴 수 있다"며 "상품을 파는 금융사도 양질의 교육.상담 능력을 갖춰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쉽고 안전한 상품 개발 서둘러야=근로자들이 제도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선 구체적인 상품이 빨리 만들어져야 한다. 남재현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선진국들은 자체 연금 설계가 어려운 중소기업을 위해 모든 기업에 적용 가능한 공통 규약을 만들어 보급하는 추세"라며 "절차와 서비스를 단순화해 도입 비용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홍콩은 기업과 금융사가 큰 틀의 상품 구조를 선택한 뒤 근로자들은 하위 펀드만 고르면 되도록 했다. 근로자들이 잘 몰라 실수할 가능성을 줄여 놓은 것이다.

특히 기업이나 금융사가 파산해도 퇴직금을 떼이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스위스에선 기업이나 금융사가 보험에 드는 방식으로 연금 지급 보증기구를 만들었다. 정부 재정 부담을 늘리지 않으면서 근로자를 안심시키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홍콩에선 펀드 운용.관리 보수의 0.03%를 손해보상기금으로 적립한다. 미국에서는 450만 명의 근로자가 참여한 시민단체 '이익배분위원회(PSCA)'가 노동절 다음날을 '401K(미국의 대표적 퇴직연금)의 날'로 정해 기업이 월 적립금을 미납하지 않도록 캠페인을 벌인다.

자영업자나 5인 미만 사업장 근로자를 위한 대책도 시급하다. 이들 중 상당수는 소득은 적지만 국민기초생활보장법 대상자도 아니어서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데 퇴직연금 제도에서도 소외당할 가능성이 크다.

서창환 퇴직연금 컨설턴트는 "중견기업에 다녔던 사람은 직장을 옮길 때 개인퇴직계좌(IRA)를 이용해 퇴직연금을 유지할 수 있지만 자영업자에 대해선 명확한 규정이 없다"며 "퇴직연금제는 세제혜택과 연관돼 있기 때문에 납세자 간 불평등을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에선 자영업자 등 소득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IRA를 이용할 수 있고 소득공제를 받을 수 있다.


5년 전 퇴직연금 도입한 홍콩 전문가 조언

한국보다 5년 먼저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한 홍콩은 지금도 더 나은 제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은퇴자의 삶을 담
보로 돈을 굴리는 셈이기 때문에 금융사들도 다른 금융상품에 비해 훨씬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아시아 금융 중심지인 홍콩의 전
문가들에게 중장기적으로 풀어가야 할 퇴직연금제도의 과제와 시사점을 들어봤다.

새롭고 전문적인 상품 계속 개발해야

◆ 마크 코닌 알리안츠 대표이사=
처음에는 판매망을 잘 갖춘 회사가 퇴직연금 시장을 장악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수익률 좋은 회사가 인정받게 될 것이다. 점점 다양해지는 투자자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선 새롭고 전문적인 상품을 계속 개발해야 한다. 또 운용 현황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공개하라는 목소리가 점점 커질 것이다. 퇴직연금은 한국 증시
가 안정적으로 성장하는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안정적 수익 위해 해외투자도 적극 허용을

◆ 니컬러스 로저스 피델리티 투자
담당이사=한국이나 홍콩 같은 소규모 국가에서 국내 투자만으로 퇴직연금이 안정적 수익을 낼 수 있겠는가. 해외투자 허용폭을 정하고, 환율 변동에 따른 위험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 또 홍콩처럼 최소한의 노후대비를 위한 수단에 초점을 맞출지, 미국처럼 적극적인 노후대비를 위한 장기투자 상품쪽에 비중
을 두고 발전시킬지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


너무 비싼 관리수수료 낮추는 것이 과제

◆ 마이클 하 HSBC 기관투자본부
이사=퇴직연금 자체가 일종의 투자교육 역할을 해 자발적인 추가투자가 늘고 금융산업의 규모가 커질 것이다. 최고 5%에 이르는 너무 비싼 관리 수수료를 낮추는 것이 과제다. 초기제도 정착을 위해 안정성을 강조하는것이 불가피하겠지만 수익성이 떨어지고 금융사 부담이 커지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안정성과 수익성을 모두 충족하기 위한 해법을 찾는 노력이 계속돼야 한다.


가입자 가족도 연금제 이해할 수 있어야

◆ 헤슬러 리 홍콩연금관리청 국장=
끊임없는 공개토론이 중요하다. 가입자는 물론이고 그 가족도 퇴직연금 제도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왜 필요한지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연금제도를 지탱하는 주춧돌이다. 다른 나라 제도를 무조건 베끼지 말고 역사·문화적 배경을 고려해 제도를 고쳐가야 한다. 홍콩은 수수료 상·하한선을 없앴더니 투자자의 선택 폭이 더 넓어졌다.



<도움말 주신 분>

강창희 미래에셋투자교육연구소장, 김성일 퇴직연금 컨설턴트, 김인재 상지대 법학과 교수, 김진수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남재현 금융연구원 연구위원, 니컬러스 로저스 홍콩 피델리티 투자담당이사, 마이클 하 홍콩HSBC 기관투자본부 이사, 마크 코닌 홍콩 알리안츠 대표이사, 밥 찰스 왓슨와이어트 퇴직연금 컨설턴트, 브리지트 믹사 독일 알리안츠 부사장, 서창환 퇴직연금 컨설턴트, 오에 히데키 일본 노무라SAS 부장, 헤슬러 리 홍콩연금관리청 국장

특별취재팀 : 도쿄=이승녕 기자, 홍콩=김영훈 기자, 표재용 기자 <
pjygl@joongang.co.kr>
출처 - 프레시안(최서영 기자)


[저출산고령화의 덫1] 가정의 '돌봄노동 공백'을 어떻게 메워야 하나

사냥꾼과 전사로 살아야 하는 한국사회


젊은 부부들이 예전보다 아이를 덜 낳는 한편 사람들이 예전보다 오래 살게 되면서 노인들이 많아진다는 이른바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 우리 사회의 논쟁거리가 돼 있다. 그러나 '왜 그것이 문제인가'에서부터 '그렇다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이르기까지 이 현상에 대한 우리 사회의 논의는 아직 충분히 진전되지 못했다는 것이 <프레시안>의 판단이다.
 
  이에 따라 <프레시안>은 '저출산, 고령화' 문제에 대한 기획 시리즈를 준비했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한 시민은 기자에게 투덜댔다. 또 저출산ㆍ고령화냐고. '저출산'과 '고령화'를 이어 붙여 '저출산, 고령화'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노동력 부족'을 걱정하는 기업적 관점이자, 관료적 발상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굳이 기획 시리즈를 내보내려면 저출산 및 고령화 현상을 개인의 삶의 질 차원에서 다뤄달라"고 주문했다.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한국사회를 지향하는 보도태도를 지켜달라는 것이었다.
 
  흔히 저출산 대책으로 보육시설의 확충 등 '여성의 일과 가족의 양립에 대한 지원'을 꼽는다. 그러나 여성들의 편의를 좀 봐주겠다는 접근으로는 문제해결이 어렵다. 이번 기획에서는 일과 가족의 양립이 필요한 사람은 왜 여성이 아니라 오히려 남성인지를 살펴보는 데서 시작해 보육의 사회화, 아버지의 육아휴직제 등 필요한 국가정책, 저출산을 강요하는 기업문화의 현실과 개선책 등을 다룬다.
 
  고령화에 관한 후반부의 기획기사에서는 우선 부지불식간에 우리 사회가 갖게 된 하나의 잠재의식을 깨뜨리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노인은 젊은 세대의 행복을 앗아가는 사회의 짐이자 재앙'이라는 의식이다. 그 다음에 노인들 개개인의 품위 있고 활동적인 삶을 보장하는 것이 어떻게 '미래의 노인'인 젊은 세대에게도 이익인지를 살펴본다. 고령화 문제에 대해서는 노년층과 비노년층이 윈-윈하는 방향으로 국가정책이 수립되고 집행돼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준비된 이번 <프레시안>의 기획 시리즈 '저출산고령화의 덫'은 전반부에서 '저출산 문제'에 대해 몇 회에 걸쳐 기사를 내보내는 데 이어 후반부에서 '고령화 문제'에 대해 다시 몇 회에 걸쳐 기사를 내보낸 다음 종합적인 토론과 결론도출을 시도할 예정이다. 관심 있는 독자들은 적극적으로 논평을 해주시기를 바란다. <편집자>
 
  지난 10월 10일 오후 2시 국회 의원회관에서는 이른바 '임산부의 날'이 선포됐다. 국회의 '저출산고령화사회 대책특위'가 주최하고 의사협회가 주관한 행사였다.
 
  평소 부른 배로 길에 나서기를 두려워하던 임신 여성들이 이날 행사에서는 주인공으로 따뜻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임산부 권리 선언문'도 낭독됐다. "임산부는 직장의 채용, 승진, 해고에 있어 부당한 차별을 받아선 안 된다. 임산부와 그의 소속 직장은 국가 모성보호 정책의 배려대상이다. 국가는 임산부의 권리를 수호해 임신, 출산, 육아를 위한 법적ㆍ제도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이를 낳아도 안 낳아도 여자 책임"인 이유
 
  그러나 이 행사 소식에 임혜숙(40)씨는 착잡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을 지었다. 결혼 9년째에 접어든 노조 상근자인 그녀 부부는 아이가 없다. "우리 부부가 아이를 낳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둘 중 하나도 일을 그만둘 수 없는 처지였다. 아이를 낳아 기를 돈도 없었고 형편도 안 됐다." 임씨는 이렇게 말하며 웃었지만, 사실 결혼 후 3~4년 동안은 양가 부모와의 갈등에 시달렸다고 한다. "직장생활을 계속하기 위해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태도"라는 질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많은 여성들이 아이를 안 낳는다고 욕을 먹고, 아이를 낳아도 직장 일을 계속하면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듣게 된다"며 "아이를 낳아도 안 낳아도 다 '여자 책임'이라고 여성들을 옭아매는 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임씨의 이런 말은 '성차별'이나 '인습적인 성역할'에 대한 항변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그의 말 속에는 합계출산율(한 여성이 평생 동안 낳는 자녀 수)이 불과 30년 만에 4명에 가까운 수준에서 1명을 조금 웃도는 수준까지 크게 떨어지게 된 원인을 파악하게 해주는 실마리가 들어있다. 그것은 여성의 사회활동이 그동안 크게 확대돼 가정에 남아있을 수 없게 됐음에도 아이를 기르는 일상적 책임이 압도적으로 여성에게 지워진다는 점이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돌봄노동(Care Work)의 공백' 현상이다. '돌봄노동'이란 '유아기, 성장기, 노인기의 사람들을 보살피는 노동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여성학자들이 '타인을 보살피는 일'을 개념화한 용어다. 따라서 '돌봄노동의 공백'이란 가족, 특히 보살핌이 필요한 노약자나 어린아이를 돌보는 일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몫이었는데 갈수록 더 많은 여성들이 직장에 나가 일을 하게 되면서 가정에 그런 일을 할 인력이 부족해지거나 없어지게 됐다는 뜻이다.
 
  이재경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는 "최근 합계출산율이 1.16까지 떨어지자 인구의 관점에서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며 "하지만 합계출산율의 저하는 단순한 인구의 문제로만 볼 게 아니라 삶의 패러다임 변화로 인한 돌봄노동의 공백과 관련된 문제로도 봐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가 지속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생계부양 책임자로서의 남성과 가사 전담자로서의 여성'이라는 가정의 모델을 떠받치던 토대가 계속 허물어져왔다. 다시 말해 맞벌이 부부가 증가하면서 부부가 둘 다 바깥일을 하게 됐음에도 집안일은 여전히 여성이 주로 해야 하기에 여성에게 부과되는 불평등한 이중부담이 여성들로 하여금 혼인이나 출산을 기피하거나 지연시키도록 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사냥꾼과 전사의 사회에서는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가정에서 남성이 돌봄노동을 충분히 분담하면 되지 않느냐는 주장은 우리의 사회경제적 생존조건상 실효성이 없다. 이재경 교수는 "남녀 모두 '일의 책임과 가정에서의 책임'을 다 감당할 수 있도록 하는 '가정 친화형' 노동시장 및 기업문화를 정착시키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단순히 여성의 부담을 좀 덜어주겠다는 수준에서 접근하는 정책으로는 상황을 바꾸기 힘들다"고 단언한다.
 
  왜 그러냐면 한국은 '사냥꾼과 전사(戰士)들이 경쟁하는 자본주의 사회'인 게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는데, 이런 한국사회에서 표준적인 노동자 모델은 '돌봄노동의 책임'이 면제된 '남성 생계부양 책임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재경 교수는 "여성들도 이 모델에 맞춰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집에 가서 애나 봐라'라는 말이 대변하듯 돌봄노동에 대한 저평가가 만연해 있는 게 한국사회"라고 지적했다. 게다가 고등교육과 직장생활을 통해 '개인으로서 자기이익에 충실한 합리주의 문화'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남자든 여자든 돌봄노동을 매력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이런 분위기가 우리 사회에도 폭넓게 확산됐다는 게 이 교수의 진단이다.
 
  '사냥꾼과 전사의 사회'가 갖게 되는 가장 큰 특징은 '장시간 노동'이다.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의 유정미 연구원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 또는 타인에 의한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데, 오늘날의 노동은 누구든 집에 보살펴주는 이를 가진 '사냥꾼'이 하는 노동이라는 전제 아래 이뤄진다"며 "이는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한국이 갈수록 치열한 경쟁사회가 되면서 남녀를 막론하고 전사가 되어가고 있거나 되고 싶어 하거나, 그렇게 돼야 한다는 부담과 압박에서 자유로운 이가 없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러한 부담과 압박은 고스란히 가정으로 전가되며, 이 점에서는 굳이 남성과 여성을 구분해야 할 이유가 없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노동연구원의 장지연 연구위원은 "흔히 저출산 대책은 여성정책이라고 오해하는데, 남성들의 삶의 조건에 아무런 변화도 없는 상태에서 가족을 돌보는 책임은 여전히 여성에게 있다는 전제 하에 저출산 문제에 접근하면 백발백중 실패"라며 "일과 가정의 양립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건 오히려 남성들"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여성개발원의 박수미 연구위원도 "말로 아무리 모성을 찬양하고 캠페인을 벌여봤자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화폐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는 인정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전통적인 가정의 모델에 얽매어서는 오늘날의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돌봄노동의 공백을 메울 방도가 찾아질 수 없다는 의견인 셈이다. 박 연구위원은 "고용의 불안정, 만혼의 증가와 이혼율의 상승 등은 서로 상관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 결과로 남녀 모두 경제력을 가져야 하는 상황이므로 보육의 '사회화'와 '양성화'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돌봄노동의 공백이라는 문제가 저출산과 직결된다는 점은 국가 간 비교에서도 확인된다. 흔히 개발도상국 단계를 넘어선 나라들은 모두 다 저출산의 문제에 직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국가 간 비교를 해보면 나라마다 그 양상이 다소 다르다.
 
  성평등 수준이 높지도 낮지도 않은 나라들이 '출산율 세계 꼴찌'
 
  국가 간 비교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실은 노동시장과 가사분담에서 성평등의 수준이 아예 높거나 아예 낮은 나라들에서는 출산율이 비교적 높지만,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나라들(한국, 일본, 싱가포르, 이탈리아, 스페인)에서는 출산율이 낮다는 점이다. 이런 어중간한 나라들은 그 대부분이 부계혈통 중심의 보수적 가족문화 전통이 남아있는 유교문화권이나 가톨릭문화권에 속하는 나라들이다.
  
<유엔개발계획(UNDP)의 성평등 지수와 출산율 비교 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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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평등지수(GDI: Gender Related Development Index)는 매년 유엔개발계획(UNDP)이 평균수명, 문자 해독율, 초중고교 취학율등의 남녀차이를 분석해 발표하는 지표로 99년 우리나라는 163개국중 30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여성의 의회ㆍ행정관리직ㆍ전문기술직의 여성 점유율과 소득분배를 분석한 여성세력화지수(GEM: Gender Empowerment Measure)는 102개국 중 78위에 머무르고 있다. ⓒ프레시안

  
<스웨덴, 프랑스, 영국과 한국의 출산율(1960~2005) 비교 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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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도 적극적인 저출산 대책을 편 것으로 평가받는 스웨덴과 프랑스는 1965~1975년 사이에 출산율이 크게 떨어졌으나 그 이후부터는 안정돼 1.5명 이상을 유지해왔다. 이에 비해 한국은 1965년 이래로 줄곧 브레이크 없는 출산율 하락세를 이어왔다.합계출산율은 15세~49세의 가임여성이 평생 낳은 자녀 수로 국가별 출산력 수준의 비교 지표로 이용된다. ⓒ프레시안

  
<이탈리아, 스페인, 일본, 독일과 한국의 출산율(") 비교 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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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국가중에서도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등 남부가톨릭 국가들은 중ㆍ북유럽권과는 달리 1975년 이래로 지속적인 출산율 하락을 겪고 있다. 특히 스페인과 일본은 1970~1985년 사이에 한국과 기울기가 상당히 유사하다. ⓒ프레시안

  
<여성의 경제참가율 비교 그래프>
- 출산율이 안정된 나라들의 경우는 역U자형, 한국은 아직도 경력단절을 나타내는 M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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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만한 역U형의 '여성고용율'을 보이는 선진국들과 달리 한국은 여성들의 고용 추이가 30대에 가서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는 이른바 M자형을 보이고 있다. ⓒ프레시안


  한국보다 일찍 '저출산 대책'을 실행한 유럽에서도 '남녀 간의 성별분업 유지'를 전제로 대책을 마련한 독일과 스페인의 출산율이 가장 낮다. 이들 국가의 저출산 대책은 부모휴가, 육아수당, 보육시설의 확충보다는 '여성에 대한 육아휴가 보장'을 중시해 여성들에게 육아의 책임을 맡겼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재경 교수는 "한국 여성들의 경우 이제 '결혼퇴직'은 거의 사라졌지만 IMF사태 때 여성이 해고 1순위였던 데서 보듯 여전히 여성의 취업은 선택일 뿐이라는 인식이 존재한다"며 "그러나 이제 여성에게 일은 점점 더 선택이 아닌 생존수단이 되고 있는 게 현실이고 남녀 모두에게 '일과 가정'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게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스스로의 희망에 의해서건 사회경제적 압력에 떠밀려서건, 이제 한국사회도 남성이든 여성이든 '일과 가정'을 둘 다 감당해야 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 그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 '돌봄노동의 공백'이고 '맞벌이 부부의 가사일 신경전'인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려가며 일하고 사는 일이 남자에게든 여자에게든 점점 더 힘겨운 일이 되어가고 있다. 저출산 문제가 심각해진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저출산고령화의 덫 2] 사회서비스 없는 성장모델의 파산

"이런 나라에서 아이 낳기 싫다" 왜? 



 "솔직히 이런 나라에서 아이를 낳기 싫고 키울 자신도 없다. 경제적 여건도 그렇지만 한국은 교육, 의료, 환경등 모든 면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혼 2년차인 신석호(34) 씨는 딱 잘라 말했다. 이른바 '결혼퇴직'의 풍조가 사라지기 시작한 1980년대 말부터 당연히 맞벌이 부부가 크게 늘기 시작했다. 나아가 아이를 돌봐줄 할아버지, 할머니가 집에 없으면 선뜻 아이를 낳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이는 한국경제가 그만큼 성장한 데서 연유한 현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하나가 아니라 둘이 벌어도 아이를 낳기가 두렵다면서 출산을 아예 포기하거나 무한정 미루는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면서 출산율을 더욱 떨어뜨리고 있고, 출산율 하락은 다시 경제성장에 장애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경제성장이 고용을 늘리고 부분적이나마 복지를 개선했던 '한국형 경제모델'의 유효기간이 끝났다고 말하는 경제전문가들이 많다. 이제는 성장이 고용을 보장하지 못하고 고용이 빈곤을 해결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빚어지고 있으며, 그런 가운데 경제의 성장잠재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장-고용-복지의 순환고리가 단절된 지점에 저출산의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일자리가 불안한데 아이를 낳고 싶겠나
 
  한국형 경제모델의 가장 큰 특징은 '불균형'이고 이는 '양극화' 현상으로 이어진다. 금재호 한국노동연구원 노동보험연구센터 소장은 "제한된 자원을 소수 대기업에 집중시켜 수출을 통해 성장동력을 얻는 한국형 경제모델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산업과 내수산업, 제조업과 서비스업 간의 불균형을 심화시켰다"고 말한다. 그 결과 한국경제에는 다음과 같은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 한국의 기업구성에는 허리가 없다. 다시 말해 임금노동자의 절반이 조금 넘는 51%가 30인 미만의 소기업에 취업하고 있고 23%는 300인 이상 대기업에 근무하고 있는 데 비해 30~299인의 중간규모 기업에 종사하는 임금노동자의 비율은 26%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고용기회가 전반적으로 부족해 전체 취업인구 중 27%가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래프 2>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같은 우리나라의 자영업 종사 비중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셋째, 서비스업이 도소매업과 음식숙박업에 집중돼 있는 반면 보건의료업과 보육서비스업 등은 아예 시장형성에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이에는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가 특히 40~50대 여성의 경우 도소매업과 음식숙박업에 몰려있다는 점도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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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 소장은 "외환위기 이후 새로 늘어난 일자리의 대부분은 임시 일용직이고 노동시장의 양극화와 함께 고용의 안정성이 전반적으로 매우 취약해졌다"며 "자영업 부문도 도소매업과 음식숙박업의 대형화와 전문화 추세로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50대 이상 영세상인들의 빈민화가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사회서비스의 부족으로 가정과 개인에 과부하
 
  특히 도소매업과 음식숙박업에 집중된 서비스업 부문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전병유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공공행정, 보육, 보건의료, 복지 등의 '사회서비스'는 국민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그 규모가 확대되는 우등재인데도 한국에서는 시장형성이 실패해 결과적으로 턱없이 과소공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회서비스의 발달이 부진함에 따른 부담이 고스란히 각 가정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보육, 간병, 교육 등의 부담이 각 개인에게 과부하로 걸리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런 과부하가 출산의 포기 내지 무한정 유보로 이어지고 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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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흡한 사회서비스가 각 가정과 개인에게 과부하를 초래하는 중간 메커니즘을 장경섭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계에 봉착한 가족중심주의'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장 교수는 "지금의 세계화 시대에 가정의 경제위기는 가족의 희생으로 직결된다"며 "그럼에도 사회적 성공전략은 더욱 더 가족동원을 핵심으로 하게 되는 등 지금의 한국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가족중심주의의 성격을 분명히 하면서 오히려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인들은 서구에서는 2~3세기에 걸쳐 전개된 사회변동을 불과 몇십 년만에 압축적으로 겪으면서 식민통치, 전쟁, 군부쿠데타, 산업화의 격랑을 헤쳐올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한국인들은 자신을 물질적, 신체적, 정신적으로 보호하는 일을 국가나 사회공동체에 믿고 맡길 수가 없었고, 그 대신 '가족'을 중심으로 뭉치는 태도를 익혔다는 것이다.
 
  각종의 위기에 대처하고 새로운 기회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흔히 드러나곤 하는 한국인들의 가족의존적, 가족중심적 생존방식은 재벌, 가족관계, 가족영농 등에서 가장 뚜렷하게 보인다. 개별 가족이 각각 하나의 단위주체가 되어 전 사회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학력투쟁'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 학력투쟁은 세계 최대의 사교육비 지출로 이어지면서 국가의 부족한 공교육 투자를 메꾸고 있다. 게다가 노인, 아동, 장애인에 대한 사회서비스의 책임도 국가가 아닌 각 가정이 대부분의 책임을 지다 보니, 가정과 각 개인에 누적된 과부하가 걸리게 됐다.
 
  장 교수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한국의 급격한 출산율 하락과 동시에 진행된 이혼율의 증가는 국가가 사회복지 책임을 방기함으로써 초래된 '가족 피로감'과 '누적된 개인 과부하'가 폭발한 결과"라며 "이는 이제 더 이상 국가가 사회복지의 책임을 각 가정에 떠맡길 수 없게 됐다는 신호"라고 진단했다.
 
  저성장-양극화-저출산, 동시에 해결해야 할 문제
 
  장 교수의 진단을 받아들인다면 사회복지, 다시 말해 사회서비스의 확충이야말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된다. 게다가 사회서비스의 확충은 한국사회에서 고용창출을 할 수 있는 미개척의 돌파구라고 지적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한국노동연구원 전병유 연구위원은 "저성장, 저출산, 양극화 시대에 새로운 양질의 고용기회는 그간 개발되지 않았던 사회서비스 부문에서 창출되야 한다"며 "이는 정부의 재정적자를 유발하지 않는 지속가능한 전략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우선 공공부문에서 질 좋은 사회서비스를 개발하고 그런 사회서비스 공급을 위한 인프라를 확충해나가기 시작하면 머지 않아 '공급의 수요 창출' 기능이 작동하게 되면서 사회서비스 부문의 선순환적 성장이 가능할 것이라는 얘기다. 펌프로 지하의 물을 끌어올릴 때 먼저 '마중물'을 들이붓고 나서 펌프질을 하는 데 비유하자면, 사회서비스의 경우에도 정부를 비롯한 공공부문이 마중물을 들이붓는 역할을 먼저 적극적으로 해야만 민간부문의 사업자들도 이 부문에 점점 더 많이 참여하게 될 것이란 얘기다.
 
  보육을 예로 들자면, 지금까지는 수요자가 민간 보육서비스의 질을 믿지 못하는 가운데 좀처럼 커지지 않는 좁은 시장 안에서 사업자들이 경쟁을 벌여 왔지만, 정부 등 공공부문이 질 좋은 보육 인프라를 적극 구축해 신뢰를 얻는다면 시장의 저변이 넓어질 것이라고 전 연구위원은 주장했다. 그렇게 된다면 민간 보육사업자들이 그 시장 안에서 활동할 공간이 넓어질 것이고, 결국은 고용창출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설명이다.
 
  전 연구위원은 "공공부문의 고용창출은 기존의 공공근로처럼 또 다른 '저임금의 온상'인 소득보전형 사업 시행이나 일시적 일자리 제공이 아닌 '질 좋은 일자리(Decent Job) 공급'이어야 한다"며 "특히 '가사노동의 사회화 및 시장화 전략'과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고용창출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한 '가사노동의 사회화'란 '사회서비스의 확충'과 크게 다른 게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적어도 초기 단계에서는 정부의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지금 정부는 과연 그런 역할을 할 자세를 갖추고 있는가?




[저출산고령화의 덫3] 시대변화 못따라가는 직장현실

"그럼에도 아이를 낳아 길러보려니…"


"임신자 해고는 불법이니 실적 미달에 의한 권고사직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하죠. 실업급여는 받을 수 있게 해줄게요."
 
  파견노동자 김다은(28, 가명) 씨는 소속 파견업체 관리자로부터 이런 말을 듣고 나니 기가 막혔다. 그것도 마치 선심 쓰듯 말하는 것이었다. 속으로 치솟는 화를 겉으로 표현하자니 후환이 두려웠고, 관리자의 말을 그냥 받아들이자니 한없이 억울했다. '임신한 게 죄인가?'하고 속으로만 되뇌었다. 관리자의 표정에는 일말의 미안함도 비치지 않았다.
 
  출산휴가를 떳떳하게 요구할 수 없는 직장현실
 
  금융회사에서 5년째 일하고 있는 김 씨는 맡은 일을 잘 해 왔고, 퇴사를 종용받을만한 행위를 한 적도 없다. 김 씨는 7개월 전에 파견업체 A사와 6개월 간의 계약을 맺고 B사로 파견됐다. B사에서는 김 씨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 따로 1년 간의 계약을 맺자고 요청한 적도 있다. 그만큼 김 씨는 업무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김 씨가 임신하자마자 두 업체의 태도가 달라졌다. 두 업체는 서로 책임 미루기에 급급했다. 파견업체 A사는 "다른 회사에서 파견직에게 출산휴가를 준 사례가 있긴 하지만 B사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출산휴가 기간 중의 급여 문제와 관련해 B사에서 협조해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출산휴가를 절대로 줄 수 없다"고 했고, B사는 먼산만 바라보며 모른 체했다.
 
  어쨋든 불안감을 안고 하루하루 지내던 중 김씨는 A사 관리자로부터 "당신이 임신을 하니 불편하다"는 말까지 들었다. 김 씨의 남편인 심기현(31, 가명) 씨는 임신을 했다고 온갖 모욕을 당해야 하는 아내를 바라보며 무척 안타깝지만, 그로서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대신 나서서 출산휴가를 요구해봐야 듣게 될 대답이 달라질 것 같지 않고, 아내로부터 직장에서 당하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자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남편 심 씨는 "나라에서 저출산이 문제니 뭐니 하고 출산휴가의 권리를 옹호해주는 듯한 말도 하지만, 개인이 회사에 출산휴가를 떳떳하게 요구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지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말한다. 아내의 문제를 계기로 출산휴가에 관심을 갖게 되어 주위를 살펴보니, 출산휴가로 회사와 갈등이 생기면 권리를 계속 주장하기보다는 나중을 생각해 그냥 회사의 방침을 순종하며 묵묵히 참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출산 예정일을 두 달 앞두고 있는 김다은 씨는 그러나 '물러설 수 없다'고 결심했다. 김 씨는 한 달 뒤에 출산휴가를 다시 요구해볼 생각이다. 임신을 이유로 퇴사를 종용하는 불법적인 행위가 번연히 벌어지는 것을 그냥 놔둘 수 없다는 오기도 생겼다. 주위에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대신 나서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김 씨는 혼자서라도 싸우겠다고 작정하고 노무사와 상담해보기도 하고 여기저기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김 씨의 사례를 들은 사람 중에는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아이도 낳아야 하는데 권고사직을 하면 되지 왜 그렇게까지 악착같이 출산휴가를 요구하고 일을 계속 하려고 하는가? 계약직이라면 일자리가 계속 보장되는 것도 아닌데…"라고.
 
  그러나 김 씨에게 일을 한다는 것은 '밥벌이' 이상의 의미가 있다. 김 씨는 "내가 당장 벌지 않게 된다고 해서 경제적으로 큰 고통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그러나 임신했다고 해서 일을 하기가 힘든 것도 아니고, 비록 계약직이지만 1년의 계약기간 중 일부라도 부당하게 빼앗기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평등의 전화 "모성보호 관련 상담 급증 추세"
 
  김 씨의 사례는 한국사회에서 결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다. 이는 여성노동자회에서 운영하는 '평등의 전화'의 상담 추이를 봐도 분명히 알 수 있다. 1995년부터 시작된 '평등의 전화'는 첫 해에 397건의 상담을 하는 데 그쳤지만 지난해에는 무려 3000여 건의 상담 실적을 기록했다. 최근 '평등의 전화'가 지난 10년 간의 상담 내용을 분석해 내놓은 자료는 '저출산 시대' 여성들의 삶의 현실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10년 전과 지금을 비교해볼 때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모성보호'와 관련된 상담이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10년 전에는 대부분의 상담이 '임금체불' 및 '고용불안'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데 산전산후 휴가기간을 90일로 늘리는 등의 방향으로 '모성보호 3법(근로기준법, 남녀고용평등법, 고용보험법)'이 개정된 2002년부터는 모성보호 관련 상담이 크게 늘었다. 전체 상담건수 중 관련 상담건수의 비중이 1995~2001년엔 평균 6~8%였으나 2002년 이후 12~14%로 확대된 것이다.
 
  이런 통계는 일터에서 여성들이 출산과 관련된 갈등을 갈수록 더 많이 겪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출산이 갈등의 원인이 될 경우, 직장 여성들은 출산을 포기하거나 무작정 연기하는 일이 많다. 반대로 출산을 선택하는 여성이라면 아예 출산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두겠다는 결심을 하는 일도 왕왕 일어난다. 요컨대 어떤 경우든 직장과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을 만들려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황현숙 평등의 전화 소장은 "사실 1980년대만 해도 '보험아줌마'를 빼고는 결혼하고 나서도 일하는 여성이 별로 없었다. '결혼퇴직'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있을 정도였고, 아이를 낳은 뒤에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갈등이 적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결혼퇴직'이라는 말은 점차 사어(死語)가 되어가는 반면 '육아퇴직'은 여전히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이런 변화는 지난 10여 년 사이에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고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가 확대돼 온 결과이기도 하다. 1990년대 이후 여성발전기본법(1995년)과 남녀차별금지법(1999년)이 제정됐고,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크게 상승했으며, 서비스업이 확대되면서 여성의 고용기회가 늘어난 것이다. 그런데 직장의 현실은 여성 노동자들의 모성을 보호해주는 것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
 
  그나마 모성보호와 관련해 회사와 갈등이라도 빚는 일은 근로조건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사무직과 전문기술직 등 정규직 쪽의 사정이다. 전체 여성노동자 중 70% 가까운 비중을 차지하는 비정규직의 모성보호는 더더욱 먼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정규직이라도 100명이 안 되는 사업장에서는 대체로 출산휴가를 당당하게 요구하기가 어렵다. 휴가급여 지불능력이 더 모자라는 영세사업장의 경우는 말할 나위도 없다.
 
  황현숙 소장은 "아직은 공무원, 300인 이상 사업장, 노조가 힘이 있는 사업장 등의 소수 여성노동자들만이 '모성보호'를 요구할 수 있는 게 현실"이라고 말한다.
 
  황 소장은 그러나 "그래도 여성들이 많이 변했다. 예전 같으면 '출산은 곧 퇴사'라는 고정관념을 수용하던 여성들이 이제는 노조 등을 통해 나름대로 싸워보고 출산과 직장을 동시에 지키기 위한 방법을 강구한다. 최근 3~4년동안에 '제가 우리 회사 출산휴가 1호예요'라고 말하는 상담자들이 늘었다"고 전한다.
 
  '출산퇴직'에서 '육아퇴직'으로 바뀌었을 뿐
 
  물론 여성노동자가 출산 때문에 일자리 상실의 위협을 받는 경우는 여전히 비일비재하다. 평등의 전화의 상담 사례를 들여다보면, 여성들의 '출산휴가 투쟁'이 아직도 매우 치열하게 진행 중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출산휴가 투쟁이라는 것이 비용의 문제를 넘어서 노사 간에 감정적 대립의 골까지 만드는 것도 큰 문제다. 이는 고용주들의 의식이 아직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생겨나는 마찰이기도 하다.
 
  사측에서는 여성노동자의 출산휴가가 다른 직원들에게 일의 부담을 늘린다는 점을 공공연히 부각시키기도 하고, 임신한 여성노동자를 엉뚱한 다른 부서로 배치하는 인사조처를 통해 간접적인 퇴사 압력을 가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여성노동자들은 노동부에 진정을 넣는 등 다양한 투쟁방법을 동원한다.
   
  황현숙 소장은 "그런 갈등은 결국 '합의'라는 미명 아래 '자진사직'과 '위로금'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자진사직'의 형식이 동원되는 것은 출산휴가를 이유로 한 해고는 불법이기 때문이고, '위로금'은 통상 실업급여의 성격으로 제시된다.
 
  출산휴가 3개월을 쉰다고 해서 오랜 경력으로 일이 손에 익은 여성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은 고용주의 입장에서도 손해인 것은 아닌가? 이런 의문과 관련해 황 소장은 "우선 회사에서는 여성노동자가 임신하면 그 여성노동자의 일상생활이 일이 아닌 가정을 중심으로 이뤄진다고 생각한다"며 "여성이 육아의 책임을 다 지는 현실에서는 그런 생각이 틀리다고만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처럼 직장에서 빈발하는 '출산퇴직' 또는 '육아퇴직'의 문제, 또는 '출산휴가'를 둘러싼 노동현장의 갈등을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관련 법과 제도가 개선될 필요도 있고, 고용과 기업경영의 문화가 지금보다 훨씬 더 선진화될 필요도 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그 실현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현실에서 급한대로 당장 추진해볼 수 있는 대책은 없을까?
 
  영아 보육시설이 기피되는 이유
 
  한국사회의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황현숙 소장은 '태어난 지 90일이 지난 영아를 받아주는 24시간 보육시설'과 '초등학생을 위한 방과 후 교실'을 꼽았다. 특히 보육과 교육의 경계선에 있는 초등학생들은 요즘 학교 수업이 끝나면 갈 데가 없어서 부모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초등학교 자녀를 학원으로 보내고 있다.
 
  청와대 근처에 있는 '정부청사 직장보육시설'의 서원경 원장도 '0세 영아반'이라는 말로 황현숙 소장과 비슷한 의견을 밝혔다. 여성의 경력단절에 핵심적인 원인이 되는 영아보육 문제를 해결하는 게 시급한데, 현재 영유아보육법상 교사 1명이 3명 이상 돌볼 수 없게 돼 있어 대부분의 보육시설에서 영아반 운영을 기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법정 영아 보육비 상한이 영아 1인 당 29만9000원이니 3명의 영아를 교사 한 명이 맡는다고 할 때 기껏해야 89만7000원의 수입밖에 거둘 수 없기에 보육교사 인건비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아들은 질병에 대한 면역력이 약해 집단시설에 있다 보면 아픈 경우가 종종 있는데, 현재 법적으론 보육시설에서는 '방문진료'를 받을 수 없게 돼 있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지방자치단체들이 적극적으로 보육시설에 대한 '촉탁의(직접 보육시설을 방문하거나 보육시설에 고용된 의사)' 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이것이 불법인 것이다.
 
  아울러 '초등학생을 위한 방과 후 시설 확충' 주장은 초등학생들이 보육 단계를 갓 지나 아직 '돌봄'이 필요한 게 현실인데 적절한 제도가 없다면 이 부담이 또 고스란히 '엄마'들에게 전가된다는 지적이다. 이런 부담이 적어야 여성들이 안심하고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처럼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현실성 있는 대책의 아이디어는 얼마든지 낼 수 있다.



[저출산고령화의 덫 4] '고출산'보다 '인간다운 삶' 지향해야

'엄마인 게 행복한 대한민국'은 불가능한가

조주은/여성학자

나는 내년이면 마흔이다. 같은 연배의 남성들은 하나둘 안정된 연구자로서의 지위를 보장받았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러나 나는 아침에 초등학교 저학년인 아이 둘을 등교시키는 과업을 완수하고서야 집을 나설 수 있는 '아줌마 학생'이다.
 
  원래 새벽형 인간인 내가 보살펴야 할 아이들이 없다면 늙은 학생 신분을 하루빨리 벗어나기 위해 새벽의 첫 지하철을 타는 신선한 느낌을 맛보며 하루를 시작하고, 밤하늘의 별을 보며 도서관을 나설 수도 있으리라.
 
  "아줌마들은 행복할까?"
 
  그러나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어지러운 집안을 대충 정리하고 집을 나서서 학교에 도착하면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다. 작년엔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가 근처에 방과 후 교실이 없는 탓에 늘 빈 집에 열쇠로 열고 들어와서 지루함을 달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또 한 달에 두 번씩 돌아오는 급식당번은 얼마나 당황스러웠던가. 오후면 수시로 걸려오는 아이들의 전화에 도서관에서 몇 번씩 뛰어나가다 보면 어느덧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된다.
 
  나이 마흔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던가? 이 말은 참으로 과학적인 것 같다. 지하철을 갈아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다가 부딪힌 대형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초라하기 짝이 없다. 늘 종종걸음 치며 초초하게 살아야 는 나…. 내 딴에는 꽃단장 한다며 신경 좀 쓰고 나와도 사람들로부터 늘 '피곤해 보인다'는 말을 듣는다. '나는 행복한가? 내 주변의 아줌마들은 행복할까?' 최근 나는 나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자주 해본다.
 
  왜 나는 선뜻 '나는 행복해'라고 말하지 못할까? 내 여자친구들 가운데 절반 정도는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울트라 슈퍼우먼 같은 나의 결혼생활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주은아, 내가 결혼 안 한 데는 네 책임도 있어. 너처럼 아둥바둥 힘들게 사는 걸 보면 결혼할 생각이 싹 가신다. 여자들은 왜 다들 결혼해서 행복하기는커녕 힘들게 살아야 하는 걸까. 차라리 나는 너같이 되지 않기 위해 솔로로 살련다."
 
  "보육정책, 관점을 바꾸지 않고는 헛일"
 
  결혼생활이 여성들에게 행복하지 못한 현실은 한국사회의 낮은 출산율과 높은 이혼율의 근본 원인이다. 1.17이라는 우리나라의 낮은 합계출산율은 결혼한 여성들이 자녀를 적게 낳아서 생긴 문제라기보다는 불행한 결혼 자체를 거부하거나 기피하는 비혼여성의 증가가 낳은 문제일지 모른다.
 
  불행한 결혼생활을 이혼으로 끝내는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이혼율도 높아졌다. 한국사회에서는 낮은 출산율과 높은 이혼율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그리고 여성들에게 결혼이 불행한 여러가지 이유들 가운데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한국사회에서 어머니가 되는 것이 주는 부담'이다.
 
  한국사회는 자녀양육의 1차적인 책임을 아버지나 사회가 아닌 어머니에게 돌린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족친화적인 저출산 대책으로 논의되고 있는 육아휴직의 활성화 등 대부분의 보육정책 방안들은 여전히 '아내가 가사노동을 전담해주는 남편'으로서의 남성의 삶을 전제로 한 것들이다. 이런 정책으로는 여성들의, 아니 어머니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어렵다.
 
  미혼여성의 입에서 '무자식 상팔자' 얘기가 나와서야
 
  여성노동자의 임금이 남성노동자의 60%도 안 되는 현실에서 육아휴직 급여 40만 원을 받고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사람의 성은 여성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육아휴직의 전제 자체가 생후 1년 미만의 영아는 가정에서 개별 부모가 양육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이기에 공보육 활성화 논의와 모순된다. 그나마 국공립 보육시설의 비중은 5%라는 미미한 수준에 머물고 있고, 경제부처는 끊임없이 보육을 자유경쟁의 시장논리에 맡기려고만 한다.
 
  정부의 보육정책은 기혼여성들의 취업을 보조하는,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미래의 일꾼이 될 사회 구성원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정책이라는 '도구적 성격'에서 하루빨리 탈피해야 한다. 보육정책은 가사노동자인 전업주부, 미래의 일꾼일 가능성이 없는 장애아동까지도 대상으로 하여 인간이 인간 그 자체로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정책이어야 한다.
 
  보육 인프라의 미비와 보육정책의 빈약함은 여성들로 하여금 패배감과 좌절감을 맛보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자식을 가진 부모의 입에서가 아니라 미혼여성의 입에서 나오는 현실은 뭔가 문제가 있다. 공보육의 활성화를 언제까지 공허하게 외치기만 할 것이며,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은 '셋째 아이 출산 장려금', '셋째 아이 보육료 지원', '다산왕 선발대회' 류의 저출산 대책으로 세월을 보낼 것인가.
 
  "대한민국 엄마들은 미치기 일보 직전"
 
  이 땅의 어머니들은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어머니들이 짊어지고 있는 가사노동과 육아의 과중한 부담을 덜어주지 못해 여성들을 정신분열 상황으로 몰아간다. 24시간 보육시설에 일주일 동안 자녀를 맡기는 엄마는 '이기적인 엄마'로 매도당할 정도로 보육시설의 질이 의심받고 있는 데 대해 정부는 신경을 쓰고는 있는 걸까?
 
  영아 보육시설과 초등학생을 위한 방과 후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일하는 엄마들은 늘 노심초사해야 하고, 자녀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급식당번이나 청소 등의 학교부역 노동에 시달리며 자괴감에 빠진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엄마들은 미치기 일보 직전이다.
 
  정부는 기혼 여성들로 하여금 임신, 출산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만 하며 여성의 몸을 통제하려는 태도를 당장 버려야 한다. 그동안 일방적으로 여성의 몫으로 돌려져 온 돌봄노동의 책임도 여성과 더불어 남성, 기업, 사회, 국가가 함께 나누어 져야 한다. 그래야 이 땅의 어머니들이 행복해질 것이다.
 
  평등의식과 인권의식이 확산되어 미혼모의 자녀, 장애아동, 여성도 사회의 구성원으로 정당하게 인정받고 사회적 보살핌을 받을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만 낙태와 영아수출(국제입양)이 사라질 것이다. 저출산에 대한 국가적인 걱정을 해소하려면 무엇보다 여성들이 어머니가 되는 것을 행복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중앙청사 어린이집'을 들여다 보니
   

  "아무래도 직장 옆에 어린이집이 있으니 아버지들이 점심시간에 잠깐이라도 보고 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직 등하원은 거의 어머니들 몫이죠. 부모 모임에도 아버지의 참가는 가뭄에 콩 나듯 합니다."
 
  지난 3월 194명 수용 규모로 청와대 가는 길목에 개소한 '정부청사 직장보육시설'의 서원경 원장은 "어머니나 아버지나 다 똑같이 직장에서 바쁘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인데, 그럼에도 시간을 쪼개 어린이집으로 달려오는 것은 늘 어머니"라며 "아버지들의 무책임'을 꼬집었다.
 
  이 시설은 과천, 대전, 반포에 이어 네번째로 지어진 공무원의 직장보육시설로 세종로 정부청사, 청와대, 서울경찰청 직원들이 자녀를 맡기는 곳이다.
 
  22명의 보육교사 중 청일점인 이상우(26) 씨도 "교사는 어디까지나 제2의 부모이고, 아이에게는 엄마, 아빠의 역할이 똑같이 종합적으로 중요한데 아버지들은 부모상담에 거의 안 오고 가끔 가족잔치에 참가하더라도 멀찍이서 사진만 찍고 가만히 있는 등 너무 소극적"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대통령 직속으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이라는 이름의 민관합동기구까지 만들어진 마당이지만, 정부청사 직장보육시설을 들여다 보면 '저출산 대책'을 수립하느라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공무원들이 사는 모습이나 '저출산을 이야기하는' 일반 국민들이 사는 모습이나 오십보 백보인 것 같다.



[저출산고령화의 덫 5] 중고령자의 구직난 '비명'

"50대 이하 노동력만 갖고 뭘 하겠다는 겁니까" 


 "내가 이래 봬도 은행 지점장까지 했던 사람이라 그러네! 월급 100만 원 주는 데가 진짜 그렇게 없소?"
 
  고령자취업알선센터에서 일하는 이들은 이럴 때 정말 난감하다. '어르신, 이제 사무실에 정기적으로 출퇴근하면서 그것도 100만 원씩 버는 직장 찾기는 정말 힘들어요'라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다. 나날이 열악해지는 노인 일자리 시장 앞에서 노인들이 자괴감과 실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수없이 보아 왔기 때문이다.
 
  "세상에, 실버취업박람회라는 데를 몇 바퀴 돌아도 할 만한 게 없어. 할 만한 게"라며 한숨을 푹푹 쉬던 금융권 출신 박진석(가명, 56) 씨는 결국 시급 3000원에 주유원 생활을 시작했지만 얼마 못 가 그만뒀다.
 
  "가르치는 일을 아무리 잘 해도 늙어서 싫대. 애들도, 애들 엄마들도." EBS방송에서 강의했던 경험까지 있는 영어강사 강정길(가명, 61) 씨는 사업이 망해 당장 돈이 급했다. 화려한 경력이었지만 나이가 '원죄'였다. 주차관리원 자리밖에 없다는 말에 입술을 깨물던 강 씨는 그 일 역시 결국 체력이 달려 그만뒀다.
   

  "요즘 노인 일자리 시장에도 중간층이 없어요. 번역같은 극소수의 전문직과 대다수의 저임금 단순노무직으로 갈리죠. 그나마 노무직도 최근에 직장을 그만두고 쏟아져나온 40~50대가 60대 분들이 하던 직종에 대신 들어차고 있어 노인 일자리 수가 전체적으로 크게 부족합니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취업알선센터 관계자는 "거기다 60~70대 여성들이 대거 노동시장에 나오는 것도 특별한 현상"이라며 "평생 가정주부만 하다가 남편이 실직하는 바람에 갑자기 나오신 분들은 대개 가사도우미나 보모를 하는데, 그것도 최근 바다를 건너온 값싼 중국인력과 경쟁해야 하는 처지"라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래저래 65세 이상 구직자가 크게 늘었는데 이들이 갈 데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업체들은 60세가 넘었다고 하면 손사래부터 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중고령자의 "일하고 싶다"는 비명은 '현재 젊은 이들의 미래'
 
  <프레시안>의 이번 '저출산고령화' 기획을 보고 "저출산이 뭐가 문제냐"고 되묻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 우리나라도 인구가 좀 줄어야지, 좁은 땅덩이에 계속 사람이 넘치면 부모는 교육비에 허리 휘고, 태어난 자녀는 피 터지게 경쟁하며 고생할 텐데 누구 좋으라고 애를 낳느냐는 냉소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저출산, 고령화 현상을 두고 인구의 '절대 규모'보다는 '연령구성의 변화'가 끼칠 사회경제적 파장이 더 큰 문제라고 말한다. 자녀를 부양하느라 딱히 모아둔 돈도 없지, 사회보장 체계가 미약하니 연금소득도 없지, 거기에 일자리마저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오늘날 노인들의 고단한 풍경을 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앞으로 특단의 대책을 마련한다면 모르겠지만 이대로 간다면 그런 노인들의 모습은 현재 젊은 세대 대다수의 미래를 보여주는 거울이라는 얘기다.
 
  사실 이러한 '고령자의 구직난'은 우리 사회가 처음 겪는 현상이다. 그간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인구는 주로 농촌에 거주했고, 노인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기에는 노인집단의 규모가 작았다. 한국은 2000년도에 고령화 사회의 문턱을 넘기 전까지는 상당히 '젊은' 개발도상국이었고, 고령층은 누가 고용해주지 않아도 농촌에서, 자영업 현장에서 알아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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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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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활동인구조사』2001 ⓒ통계청

  장지연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 50대 후반 이상 임금노동자의 직종분포를 보면 고위관리자(17.4%)와 단순생산직(59%)으로의 집중현상이 뚜렷하다"며 "향후 대거 쏟아질 도시의 중간관리 사무직 퇴직자들이 갈 곳이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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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활동인구조사』2001 ⓒ통계청

  게다가 고령층 인구의 절대 수는 늘어나는데, 그동안 고령 근로자들을 흡수해 온 농업과 자영업 부분은 계속 위축되고 있다. 앞으로 '도시 임금노동자'들에 대한 일자리 창출이 적극적으로 이뤄지지 않는 이상 이들은 그대로 복지의존도가 심한 고령 실업자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고령층이 이렇게 절박하게 일자리에 목을 매는 것은 '생존'을 위해서다. 김수완 국민연금연구원 연구위원은 "공적 연금 등 다층적 소득보장 체계가 미흡한 한국에서 근로소득의 상실은 그 자체가 곧 생존의 위협"이라며 "선진국과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의 노후 소득구성은 근로소득의 비율이 높고 국민연금 등 공적 이전소득의 비율이 낮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65~69세 가구의 빈곤율이 현저히 높다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노인들은 생계를 위해 고단한 몸을 계속 부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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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경우는 OECD소득분배데이터와 룩셈부르크임금연구소(Luxembourg Income Study, 83년 아시아, 유럽, 오세아니아, 북미의 25개국의 참여하에 설립된 비영리 협동연구소로)에서 인용했으며, 한국은 2000년 통계청 가구소비실태조사에서 산출했다. 여기서 근로소득에는 근로소득, 사업소득, 농립축어업소득이, 공적이전에는 국민연금, 기초생활급여, 실업급여 및 각종 보조금, 사적이전에는 증여, 양도, 사적연금등이 해당된다. ⓒ김수완 국민연금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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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의 근로소득, 공적이전과 65~69세 가구 빈곤율을 비교해본 결과. (r은 두 변량 x와 y 사이의 상관관계를 표현한 계수. 두 변량이 정비례 관계일 때는 r>0, 반비례 관계일 때는 r<0, 그리고 아무 상관이 없을 때는 r=0으로 나타난다.). ⓒ김수완 국민연금연구원 연구위원

  "베이비붐 세대, '산업일꾼'에서 '인구부채'로
 
  지금까지 정부의 노인복지 정책 대상은 기초생활수급자에 그쳤다. 그러나 이제는 인구구조의 큰 변화로 인해 정부가 계속해서 '일부 자립능력이 없는 계층만 국가가 챙길 테니 나머지는 각자가 알아서 하라'는 태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전광희 충남대 교수(사회학)는 "6.25전쟁이 휴전된 1953년부터 정부가 가족계획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직전인 1965년까지 태어난 1000만~1200만 명의 베이비붐 세대는 1970~80년대에 '젊고 값싼 노동력'으로 한국경제를 일으켰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그대로 '인구부채'로 전환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산업일꾼'으로 추켜세워지던 베이비붐 세대는 현재 중년을 넘어서면서 이미 사회로부터 여기저기서 '출입금지 명령'을 받고 좌절하고 있다.
 
  그는 "그래도 한국은 개발도상국형에서 선진국형 인구체제로 가기까지 아직 10~15년의 유예기간이 있다"며 "거대한 베이비붐 세대가 노동시장에서 완전히 은퇴하는 시점이자 1980년대에 태어난 그들의 자식 세대가 노동력의 중추를 이루는 2020년까지 우리는 노동시장과 사회 전반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지 못할 경우 늘어나는 공공지출을 뒷받침하기 위한 조세와 사회보장 기여금의 부담을 둘러싸고 '세대간 갈등'이 빚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고, 1인1표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지속되는 한 현역 노동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위축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임금피크제의 현실 적용에는 여러가지 어려움
 
  방하남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신규진입 부진과 조기퇴직을 특징으로 하는 현 노동시장의 상황이 계속돼 30~50대에 한정된 짧은 근로생애만 허용된다면 한국의 장기적인 경제발전은 힘들다"고 우려했다.
 
  그는 "노후까지 안정된 근로생애를 보장받는 문제는 사실 고령층뿐 아니라 전 세대에 해당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는 특수 직역(공무원, 교사, 군인)만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나 개인적으로 과도한 짐을 지우고 있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고령화에 따른 노동력 공급 감소에 대응하고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보장하기 위한 해법으로 '정년 연장'과 '사회적 일자리 창출'이 거론되고 있다. 지난달 26일 노동부는 '고령자 고용 연장을 위한 임금피크제 도입 지원방안'에 관한 공청회를 열고, 고용보험법 시행령을 연내에 개정해 내년 1월부터 시행할 방침임을 밝혔다.
 
  고용보험기금을 재원으로 연공급이 아닌 성과주의 임금제가 정착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해 운영한다는 것이다. 이는 최저 57세 이상까지 고용을 보장하는 것을 전제로 임금삭감에 노사가 합의하는 사업장에 대해서는 정부가 그 근로자에게 최장 6년간 노사합의로 삭감된 차액의 일부를 지원하는 제도다.
 
  임금피크제는 2003년 7월 신용보증기금을 시작으로 민간 제조업체와 금융회사, 공사 등을 중심으로 이미 13개 기업이 자발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한국생산성본부 경영컨설팅사업부 관계자는 "현재 임금피크제를 도입했거나 도입할 예정인 곳들은 IMF 위기 때 구조조정이 안 됐거나 구조조정의 필요성이 없었던 회사들"이라며 "이런 회사들이 조직 안에서 고령화가 진행되자 이에 대응하는 방법의 하나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근로자의 입장에서는 임금피크제가 일자리 유지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회사에서 임금을 삭감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보고 반발하는 경우가 많고, 사용자들도 임금피크제가 인건비 절감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거나 임금피크제의 적용 대상과 관련 직무의 개발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제도의 좋은 취지와 달리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시행하는 데에는 해결해야 할 어려움이 많은 것이다.
 
  "정부가 창출하는 사회적 일자리가 민간에 정착하려면 장기적 투자 필요"
 
  그렇다면 사회적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은 어떨까. 지난해 초에 개소한 국민연금공단의 노인인력운영센터를 통해 사회적 일자리를 갖게 된 인원은 지난해에 3만5000명이었다. 올해는 이미 상반기에 3만5000명이 넘어섰다고 하니, 사회적 일자리에 대한 폭발적인 수요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올해 이 센터를 통해 일자리를 구한 사람들 가운데 공익형(자연환경 정비, 거리환경 개선, 행정기관 보조 등)은 2만4000여 명, 교육강사형(숲생태 및 문화재 해설사, 종이접기 지도사, 예절 지도사 등)은 8000여 명, 자립지원형(주유원, 주례, 간병인, 가사도우미, 지하철택배 등)은 3100명 등이다.
 
  그러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일자리를 요구하는 노인 구직자가 급증하고 있는 데 비해 정부는 '생계 보조수단 혹은 어르신 역할 찾아주기' 정도로만 노인 일자리 공급사업을 유지하고 있을 뿐 그 이상의 적극적인 대책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노인인력운영센터에서 공급하는 것과 같은 노인 일자리는 실제로 1번 이상 참여하기가 어렵고, 임금의 액수도 월 20만 원(시급 3000~4000원) 정도에 불과해 그야말로 생계보조의 수준이다. 이런 식이라면 2009년까지 노인 일자리 30만 개를 창출하겠다고 한 노무현 대통령의 최근 공언도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국민연금공단 산하 노인인력운영센터 우제광 기획홍보팀장은 "내년 예산을 올해 400억 원에서 100억 더 늘리고 취업기간도 6개월에서 7개월로 늘리기로 했지만 여전히 대기인원에 비하면 부족하다"며 "민간 업계에서 노인들을 활용하도록 정부와 공공기관이 가교의 역할을 해야 하지만, 아직 사회적 인식이나 노인들 본인의 태도 등에서 개선할 점이 많다"고 설명했다.
 
  공공기관의 보조금이 끊겨도 민간에서 일자리가 이어지려면 노인 구직자 본인도 적극적으로 재교육을 받고, 공공기관도 노인 구직자에 대한 재교육을 적극 뒷받침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 팀장은 "재교육에 대한 요구가 실제로 점점 더 커지고 있다"며 "고령층의 학력과 경력이 점점 더 다양해지는만큼 그들이 민간의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려면 재교육 등에서 장기적인 투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지연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고령화 시대의 노동시장 정책 방향으로 ▲유ㆍ무급 자원봉사의 확대와 사회적 일자리 창출 ▲보상ㆍ인사관리 체계의 개선과 연령차별 금지, 평생학습권 보장 ▲취업알선 인프라 구축 등을 제시했다. 그는 "전문ㆍ관리직과 단순노무직으로 크게 양분된 우리나라 고령자 취업시장 상황을 볼 때 자원봉사 조직의 성격과 종류를 다양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문지식을 가진 은퇴노인에게는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에 은퇴했으나 재취업하기에는 기능이 부족하거나 없는 이들에게는 훈련의 기회를 제공하고, 생계를 염려하는 그 다음 계층에게는 공공근로 같은 직접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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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근로생애의 유형은 4가지로 분류된다. ①유형은 예외적 소수로 50대 후반~60대까지 경력을 유지하며 근로소득의 증가를 누리며 ②유형은 평범한 대다수로 중년에 이른 어느 시점에서 근로생애를 정리하고 은퇴 후 근로소득이 완전히 단절된다. ③유형은 일부는 창업이나 비정규 단순직에 재취업에 이전에 비해 현저히 낮은 근로소득으로 생활한다. ④유형은 자신의 능력과 생산성이 절정에 다다른 이후라도 근로시간과 강도를 줄여 낮은 임금으로 근로생애를 연장하는 것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제시된다. ⓒ장지연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이제 12~16년의 정규교육으로 40여 년의 근로생애 유지 불가"
 
  또 연령이 아닌 직무 중심의 보상ㆍ인사관리 시스템의 정착, 연령차별 금지, 평생학습권 보장은 동시에 이뤄져야 효과가 있다. 우리보다 일찍 고령화 사회를 맞은 유럽연합(EU)은 2000년에 회원국의 의무사항으로 성별뿐 아니라 종교, 장애, 연령에 근거한 차별을 금지하는 입법을 하라는 지침을 정했다. 미국은 이미 1967년에 연령차별금지법(Age Discrimination in Employment Act)을 제정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1세기에는 평생학습이 필수적이며 모든 사람이 평생학습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내용의 '만인을 위한 평생학습(Lifelong Learning For All)' 선언을 하기도 했다.
 
  지식과 정보의 양이 폭증하고 그 생성과 소멸의 주기가 빨라지는 사회에서 12~16년의 정규교육 과정만으로는 40여 년에 걸친 근로생애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 게다가 기업은 자체적으로 인적자원을 개발하기보다는 외부에서 필요한 인력을 조달하는 경향을 점점 더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근로자 개개인으로서도 스스로 이직에 대비한 능력과 기술을 배양하기를 게을리할 수 없다.
 
  장지연 연구위원은 "이를테면 자율적 재교육을 위한 '학습휴가제'를 도입하는 방안도 검토해볼 만하다"며 "이와 더불어 노동부의 고령자인재은행, 복지부의 노인취업지원센터, 지자체의 고령자취업알선센터 등 기관별로 분리된 채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는 취업알선 체계를 일원화하고 노인취업 컨설턴트를 육성하기 위한 투자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저출산고령화의 덫 6] 개인재무상담사가 본 '노후준비 풍경'

'오래 살 위험'에 대비하고 계십니까?

이광구/포도에셋 홍보팀장



고령화 문제가 거론될 때면 전문가든 일반 시민이든 공통으로 말하는 게 있다. 돈만 있다고 해서 노후가 행복한 건 절대 아니지만,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이 없는 노후도 절대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후는 누구에게나 생산보다 소비에 치중하는 시기이다. 이런 점에서도 '노후'와 '돈'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일 수밖에 없다. 돈은 행복한 노후에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은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노후와 돈'의 문제는 현실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며 개인적, 사회적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에 대해 (주)포도에셋에서 글을 보내왔다. 1999년부터 급여생활자와 서민을 대상으로 개인재무 컨설팅을 해 온 (주)포도에셋은 이 글에서 서민들의 노후준비 풍경과 노후준비와 관련된 세태의 변화, 국민들의 편안한 노후 보장을 위해 요구되는 국가정책, 개인적으로 필요한 노력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편집자>
 
  편안한 노후, 이제 국가-사회-개인이 함께 설계하자!
 
  톨스토이는 자신이 쓴 어느 단편소설에서 자식은 세 가지 즐거움을 준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어려서는 재롱을 떨고, 커서는 부모를 부양해주고, 부모가 죽고난 뒤에는 제사를 지내준다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말한대로 아이의 재롱은 그 어떤 훌륭한 장난감이나 오락보다 더 큰 즐거움을 준다. 그러나 그런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출산을 감행하기엔 현실이 너무 두렵다. 아니, 출산은 둘째 치고 결혼 그 자체도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시대가 됐다. 늦은 결혼과 저출산은 생활의 기본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젊은이들의 태업'이라고 이해해야 할지 모른다.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아 절에서 기숙하는 생활보호대상자 노인을 상담한 적이 있다. 이 노인은 1000만 원이 넘는 카드사 부채를 안고 있다면서 개인파산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노인의 아들이 카드사에서 대환대출을 받으면서 노모를 보증인으로 세운 탓에 생긴 빚이었다. 이 노부부는 아들의 보살핌을 받기는커녕 아들의 빚을 대신 떠맡아 해결해야 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이런 지경까지는 아닐지라도, 노후에 자식이 자신을 부양해주기를 바랄 수 있는 것은 이제 옛이야기가 됐다.
 
  그나마 현재의 노인들은 다행이다. 아직은 자녀들이 노부모에게 적은 금액이나마 용돈을 드리는 경우가 많다. 사회생활을 하는 자녀의 숫자도 보통 셋 이상이어서 노부모 부양의 부담이 어느 정도 분산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현재의 40대가 은퇴하게 될 20여 년 뒤에도 그럴까? 20여 년 뒤의 노인들에게는 자녀가 대개 하나나 둘뿐인 경우가 많을 것이다. 게다가 그 자녀들은 늘어난 세금과 경제성장의 정체로 인해 자기 앞가림 하기도 바쁠 것이다.
 
  더구나 지금 장년층인 사람이 자식이 주는 세 번째 즐거움이라고 톨스토이가 말한 '죽은 뒤의 제사'를 진실로 기대한다면, 그는 너무 낙관적이거나 환상 속에서 사는 사람일 것이다. 현재의 40~50대는 아직 제사 지내는 일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아서 실감하지 못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죽은 뒤에 제사 상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리라.
 
  이렇게 본다면, 이제 우리의 전통적 가족체계는 노후를 보장해줄 적절한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게 분명해진다.
 
  이것이 반드시 생활형편이 어려운 사람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100억 원 가까운 재산을 가진 노신사를 상담한 적이 있다. 이 노신사는 인생을 즐겨야 할 연세였고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재산도 갖고 있는데 계속 부동산 투자를 하려고 했다. "투자를 하는 고생을 왜 계속하죠?" 노인은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인생을, 특히 노후를 즐기면서 편안하게 보내야 한다는 생각은 살아오면서 전혀 해본 적도 없었을 터였다. 쉬지 않고 죽을 때까지 계속 벌지 않으면 불안한 것일 게다.
 
  이 노신사만 그런 것이 아니다. 40대 후반의 치과의사도 역시 비슷했다. 이 치과의사는 한 달에 벌고 쓰는 돈이 1000만 원이 훨씬 넘는데도 계속 더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쫓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번 잘못 투자해 손해를 보고, 그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무리하게 투자를 하다가 완전히 망가지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돈이 많건 적건 돈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갖지 못하고 돈에 끌려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노후 문제의 해결전망을 어둡게 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오래 살 위험'에 대비해야 하는 시대
 
  보험용어에 '갑자기 죽을 위험'과 '너무 오래 살 위험'이라는 게 있다. 예전에 어른들이 농담처럼 "에고,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면 안 되는데…"하곤 했는데, 바로 그렇게 될 위험이 이제는 현실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요즘 언론에서도 노후대비 문제를 기사로 다루는 일이 잦아졌다. 대기업이나 공기업들도 은퇴예정자들에게 노후에 대비한 개인 재무설계에 대해 교육을 이미 실시하고 있거나 준비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수자원공사의 은퇴예정자들을 상대로 교육을 하다가 물어보았다. "퇴직 후 생활비가 얼마나 필요할까요?" 부부를 합쳐서 보통 삼사백만 원이라는 대답이 많았고, 오백만 원 이상이라고 대답하는 이들도 있었다. 노후에 해외여행 다니고 골프도 즐기려면 그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국민연금 수령액은 많아야 100만 원 안팎이다. 그렇다면 부족한 돈을 어디에서 마련해야 하나? 수자원공사 은퇴예정자들이 가장 크게 기대하는 추가수입원은 부동산 임대수익이었다. 그러나 부동산 투자와 같은 직접투자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포스코의 은퇴예정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기업들의 은퇴예정자들도 예전보다 길어져 대개 20년 이상 계속될 노후에 대해 불안해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 돼버렸다. 우리 사회와 각 개인은 미처 준비하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노후의 기간이 부쩍 늘어나 버렸다. 전통사회에서 가장 듬직한 버팀목이었던 가족제도는 이제 더 이상 믿을 만한 의지처가 아니게 됐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나마 간간히 모아놓은 목돈을 축내는 위험요소로 작용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퇴직금을 축내는 가장 위험한 적은 바로 자식"
 
  "수십 년 고생해서 모은 퇴직금을 축내는 가장 위험한 적은 바로 자식입니다." 노후준비에 관한 교육 현장에서 이런 '불순한 표현'을 과감하게 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사실 퇴직금만이 아니다. 토지보상금이나 재해보상금 등을 손에 쥐게 되더라도 마찬가지다. 댐 공사로 몇억 원의 보상금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2~3년 안에 그 돈을 거의 다 날리는 경우가 많다. 자식이나 친지들이 손을 벌리는 것을 도외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저런 이유로 가진 돈이 별로 없는 부모세대를 자식과 사회가 끝까지 책임져주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데 있다. 그러니 이제는 과거와 달라진 부모자식 관계의 현실을 부모세대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은 물론이고 과거보다 길어진 노후를 대비해 스스로 해결책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해나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를 둘러싼 금융환경이 지난 10년 사이에 크게 달라져 버렸다. 퇴직금이나 보상금을 은행에 묻어두고 또박또박 이자를 받을 수 있었던 시절은 이제 잊혀진 지 오래다. 그래서 선진국 방식의 생애에 걸친 재무설계가 필요한 시대가 됐다. 이런 맥락에서 재산을 자녀에게 상속하거나 증여하는 방식도 재고돼야 한다.
 
  그나마 퇴직금이나 모아놓은 재산이 있는 경우는 다행이다. 대부분의 서민들은 아직 노후설계에 대한 개념조차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 이미 노인복지가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데, 현재의 40~50대가 앞으로 본격적으로 은퇴하게 되면 노인복지는 더욱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것이다. 이는 기대수명이 늘어나 노후가 길어진 탓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IMF 외환위기 이후에 고용불안이 심화된 탓도 크다.
 
  외환위기 이후에 정리해고 요건을 완화하고 비정규직 등 불완전 고용을 확대해 온 정부의 노동시장 정책이 옳았느냐 틀렸느냐는 여기서 논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런 방향으로 노동시장 정책을 실시해 왔다면 그에 따른 부작용을 흡수하고 완화할 제도적 뒷받침도 함께 해야 했다는 말은 여기서 해둬야겠다. 미국의 노동시장이 유연하다고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노동시장에서 탈락한 사람들이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인 파산신청이 한 해에 수십만 건에 달하는 게 미국 사회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겨우 지난해 하반기부터야 파산신청의 유용성이 조금씩 인식되고 있는 정도이며, 아직도 수백만 명이 신용불량자로 남아 있다.
 
  개인의 노후는 단지 개인만이 책임져야 할 것이 아니다. 사회와 국가 차원에서 국민의 노후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
 
  노후보장의 기본토대는 국가와 사회가 보장해야
 
  필자가 일하는 회사는 5년 넘게 중산층과 봉급생활자들을 주 대상으로 생애재무설계 컨설팅을 해 왔다.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것 중 하나는 지방 고객에 비해 서울 고객에 대한 재무설계가 훨씬 어렵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서울에서는 주거비 지출비중이 지나치게 크다는 데 있다. 이런 주거비 부담 때문에 가계재정에서 노후설계를 위한 재원을 마련하는 데는 많은 한계가 있다.
 
  서울에 사는 30대 후반이며 대기업 사원인 한 고객은 경제적인 여유가 충분히 있는데도 주택구입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이 사람은 전세금으로 1억400만 원을 갖고 있었고, 금융자산도 1억6000만 원 정도 있었다. 이 금융자산은 자신과 부인 명의로 여러 저축은행에 5000만 원에서 조금 모자라는 액수만큼씩 예금돼 있었다. 5000만 원까지는 예금보호가 된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었다. 그리고 예금해놓은 금융자산에서 나오는 이자는 가장 이자율이 높은 신협 적금에 불입하고 있었다.
 
  이 부부는 금융기관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는 점을 잘 알고 있었고, 각 금융기관의 이점을 충분히 다 활용하고 있었다. 비과세, 세금우대, 소득공제는 기본이었다. 그런데 이 부부는 남들은 다 고민하는 주택구입 계획은 갖고 있지 않았을까? 노후에 자기 집 없이 전세 등 임대로 살려면 그만큼 주거비가 많이 들텐데.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주택구입 자금 설계는 왜 안 하시죠?" 대답은 너무도 간단했다. 부친이 갖고 있는 부동산이 많았다. 그러나 이 부부의 사례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고 대부분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같은 월소득(350만 원)을 갖고 서울과 지방에서 각각 사는 두 가정의 재무상황을 비교해보자. A가정은 서울에서 4억 원짜리 주택을 구입하고, 구입대금 중 절반인 2억 원을 20년 동안의 원리금 균등상환 조건으로 대출받았다고 하자. 이 가정은 매달 132만 원을 갚아야 한다. 여기에 매달 18만 원의 보험료까지 납입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가정은 단기, 중기, 장기 재정대책을 전혀 세울 수가 없다.
 
  B가정은 지방에서 비슷한 평수의 아파트를 1억 원에 구입하고, 구입대금의 절반인 5000만 원을 20년 동안의 원리금 균등상환 조건으로 대출받았다고 하자. 이 가정은 A가정에 비해 주거비가 적게 들기 때문에 단기, 중기, 장기 재정계획을 충분히 세울 수 있다. 여기서 장기계획은 물론 20~30년 후를 내다보는 노후준비일 것이다.
  
<주택구입에 따른 비소비성 지출 비교>
(단위 : 만원)
수입
소비성지출
비소비성지출
A(2억원 대출)
B(5천만원 대출)
350
200
150
대출상환
132
33
보험
18
18
단기저축
0
29
중기저축
0
40
장기저축
0
30

  "결혼 안 하는 게 최상의 재테크...능력 있는 배우자 만나든지"
 
  노후준비를 할 때 고려해야 할 것 중에 공적 부조의 대표격인 국민연금이 있다.
 
  한 벤처기업 사장이 이런 농담을 했다. "가장 훌륭한 재테크가 뭔지 압니까?" 그가 말한 '정답'은 "결혼하지 않는 것'이었다. 결혼비용과 자녀양육비 등이 엄청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기도 했고, 40대 초반에 결혼하지 않은 자신의 처지를 빗댄 우스개소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웃고 넘어가기엔 서글픈 우리의 현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반대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30대 중반인 한 회사원은 교육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재테크 할 능력이 없어서 능력 있는 배우자를 찾았습니다." 현직 여교사와 결혼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공무원이나 교원연금이 일반 국민연금보다 수익률이 훨씬 높다는 점을 고려한 결심이었다. 정부 관리들이 자신들의 노후를 보장할 공무원연금 등에 대해서는 국고지원을 충분히 하는 반면 국민연금에 대해서는 차별적으로 지원하면서 국민연금을 개선하겠다고 하는 말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위에 언급한 주거비 부담 완화와 국민연금 개선과 더불어 교육비와 의료비에 대한 사회적 최저선 보장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편안한 노후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기본조건이다. 민주노동당에서 주장하는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때라고 본다.
 
  반면, 의료시장과 교육시장의 개방과 경쟁체제를 골간으로 하는 정부의 방침이 과연 서비스의 질 개선과 대중적 생활보장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달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중산층의 몰락과 양극화를 초래해 사회 재생산구조 자체를 심각하게 훼손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제는 우리도 '금융교육' 시작할 때
 
  이런 기본적인 사회기반을 갖추는 일과 더불어 간과할 수 없는 게 금융교육이다. 학교의 경제교육이 부족하기도 하지만, 그나마 있는 경제교육은 거시경제를 다룰 뿐이다. 거시경제는 사실 일반 개인보다는 전문가에게만 중요한 문제다. 거시경제가 아니라 실생활에 필요한 돈 문제를 배워야 한다. 그런데 학교에서 돈 문제를 배웠다 해도 그것은 돈을 버는 문제일 뿐 돈을 쓴다거나 장기설계에 관한 관점과는 먼 얘기다.
 
  미국의 통계를 보면, 금융교육을 받은 성인의 저축률이 8.5%인 데 비해 금융교육을 받지 않은 성인의 저축률은 7.0%다. 파산율이 높은 주의 학생들이 받은 평균 금융점수는 53.6점인 데 비해 파산율이 낮은 주의 학생들이 받은 평균 금융점수는 70.3점이다. 이런 통계를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면, 학교와 사회에서 금융교육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낄 것이다.
 
  미국과 영국 등 선진국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국민들에게 투자교육을 비롯한 금융교육을 실시해 왔다. 이웃 일본에서는 5년 전부터 투자교육이 중요한 과제로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2002년부터 기업연금이 도입되면서 그 필요성에 대한 자각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내년부터 기업연금이 시행(유예기간이 있기는 하지만)될 예정인데다 금융환경이 복잡해지고 있다. 게다가 길어진 노후에 비해 사회복지나 소득(고용)은 불안정하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우리나라에서도 개인에 대한 투자교육과 금융교육을 강화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본다.
 
  젊어서부터 생애재무설계 시작해야
 
  포도에셋에서 백화점 문화센터에 나가 강좌를 하는데, 우리 강좌도 재테크 코너에 분류되었다. 재테크가 아니라 재무설계라고 말해줘도 막무가내였다. 재테크는 상품의 이점을 쫓아가는 것이고, 재무설계는 인생의 재무목표를 미리 설계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보기도 했지만 설득이 쉽지 않았다.
  
<재무설계와 재테크의 차이>
재무설계
재테크
선택동기
장기 목표 달성
(주택, 학자금, 노후자금 등)
상품의 이점
(저축 이자율, 펀드 수익률 등)
심리상태
안정감(일관된 목표 관리)
불안감(고수익 시류 쫓아가기)
결과
가정경제 안정
중도포기 또는 부채증가
미래의
사회
성숙한 사회
갈등과 반목의 사회

  그런데 문화센터 관계자의 반응이 흥미로웠다. "재테크 강의를 들은 주부들의 반응은 보통 뭔가에 쫓기는 심정이 되는 것이죠." 남들이 다 앞서 나가고 있는데 자신만 뒤처지는 것 같다는 얘기다. 그런 불안감과 욕심이 자칫 실수를 불러 가정에 화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대다수 중산층과 봉급생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남보다 앞서기 위한 재테크가 아니라 차분한 생애재무설계다.
 
  요즘 정부에서 부동산투기를 잡겠다고 한다. 그러나 전 국민이 남보다 앞서 투기나 재테크를 하려는 마음이 앞선다면, 아무리 세금정책을 앞세워 단속한다 한들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단속에 앞서 올바른 재무설계 문화를 강조하는 사회적 캠페인이 필요하지 않을까?
 
  개인재무설계에 대한 관점이 일찍부터 자리잡은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사회에 진출한 뒤 첫 직장에서 번 소득의 12%를 노후설계 자금으로 할당한다고 한다. 다른 문제도 마찬가지이지만, 노후설계도 일찍 할수록 유리하다. 한 예로 보험상품의 경우 복리효과가 있기 때문에 다른 금융상품보다 장기설계가 더욱 유리한 측면이 있다. 또 미리미리 설계하면 적은 돈으로도 노후를 준비할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노후설계를 하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재무설계를 단지 금융적인 문제로만 본다면 미혼일수록 쉽다. 그러나 재무설계가 가장 어려운 층은 미혼들이다. 그들은 장기적인 재무문제에 대한 인식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재무설계가 왜 필요한지, 노후를 왜 미리 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없다.
 
  개인이 부정하려고 해도 이미 현실은 달라졌다. 길어진 노후와 복잡해진 금융환경, 그리고 미흡한 공적부조 하에서 어차피 우리는 이제 각자가 스스로 알아서 자신의 노후를 설계해야 한다. 최선의 방책은 미리미리 하는 것이다. 각 개인이 노후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국민 전체의 노후 문제와 관련해 사회와 국가에 제기되는 다음과 같은 요구의 목소리도 한층 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내가 혼자서 아무리 애써도 잘 되지 않는다. 집 문제, 의료 문제, 교육 문제는 국가가 나서서 해결하라!"




[저출산고령화의 덫 7] 노년복지 전문가가 말하는 '행복한 노후'

"노년, 돈 있다고 행복할 줄 아세요?"


상상: 노인들, 세상에서 모두 사라지다
 
  이제 세상에는 노인들이 단 한 명도 남지 않았다. 65세 이상 노인들이 한꺼번에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자식들과 같이 살던 노인도, 쪽방에서 힘겹게 연명하던 노인도, 사이좋게 살던 노부부도, 최고급 실버타운의 부유한 노인도, 무료양로원의 가난한 노인도, 치매요양원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던 노인도, 한끼 점심을 위해 이른 아침부터 무료급식소 앞에 줄서 있던 노인도, 모두 동시에 그리고 완전하게 사라져버렸다.
 
  넘치는 실종신고에 경찰 업무는 마비됐고, 신문과 방송은 연일 특보를 내보내며 수선을 떨었다. 갑작스레 효자 효녀가 된 사람들은 눈물 콧물 섞어가며 부모님을 그리워하고 자신들의 불효를 고백했다. 온 나라가 눈물바다로 변했고 엄청난 충격에 휩싸여 휘청거렸다. 그러나 슬픔은 얼마 못 가 사라지고 대신 노인들이 남기고 간 집과 땅과 재산을 놓고 자녀들 간에 싸움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여기저기서 칼부림하는 사태도 이어졌다.
 
  그러나 곧 세월은 흐르고 어느덧 노인이 사라진 세상에 적응이 된 사람들은 이제 모두 편안해 보였다. 솔직히 너나 할 것 없이 홀가분하고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노부모 부양의 고민도, 허리가 휘는 수발 걱정도 깨끗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노인복지 예산은 젊은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수정 배분됐고, 노인복지관과 양로원, 요양원은 모두 어린아이들과 청소년, 중장년층을 위한 여가시설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무 문제 없이 편안히 잘 살아가던 사람들이 갑자기 알 수 없는 불안에 휩싸인 것이다. 내 부모님도 어느 때가 되면 말 한마디 없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눈앞에서 자취를 감춰버리는 것 아닐까? 그럼 나도 노인이 되고 나서 어느 날 가진 것 모두 내려놓고 갑자기 사라져 버린단 말인가?
 
  사람들의 불안은 걷잡을 수 없는 공포로 이어졌고, 너도 나도 노인이 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찾아 헤매는 지옥 같은 나날이 시작됐다. 그제야 사람들은 지난 시절의 노인들을 기억해냈다. 젊음이 주인인 세상에서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짐이었던 그들을 찾아내야, 그들이 간 곳을 알아내야, 앞으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될지를 알아낼 텐데….
   

  "모두들 노년이 된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어 해"
 
  1990년대 초반에 7여 년간 일하던 CBS 아나운서직을 그만두고 15년째 노인복지 분야에서 활동해 온 유경(45) 씨가 최근에 펴낸 <마흔에서 아흔까지>라는 책에서 풀어놓은 상상이다. 유 씨는 "노인이 하늘에서 떨어진 거 아니다. 너희들도 안 죽으면 여기에 와. 지금 노년의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면 나중에 젊은 세대가 그 영화를 누리는 거야"라는 70대 어르신의 읊조림을 전한다. 그러면서 그는 "많은 젊은이들이 나이듦과 노년을 외면하고 싶어 한다"고 안타까워했다.
 
  "40~50대들은 보통 '내 아이 기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노인 부양에 내 노후 문제까지 신경 써? 어휴, 관둬라 관둬'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냥 지금 사는대로 살아가면서 저축이나 좀 하면 되겠지'하죠. 노년을 내 삶의 문제로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거죠. 노후엔 최소 4억이 필요하다느니, 해외여행까지 하려면 10억은 필요하다느니 하는 언론보도를 보는 건 스트레스죠."
 
  유경 씨는 특히 돈이면 행복한 노년이 저절로 보장되는 것처럼 이야기되는 사회풍조에 대해 우려했다. 노인복지의 현장에서 수많은 노인들을 지켜본 그가 느끼기에는 "돈이 행복한 노후를 위한 충분조건도 아닐 뿐더러 그렇게 많은 돈을 준비할 수 있는 사람도 얼마 안 된다"는 것이다.
 
  "이제는 젊은 세대가 노년의 문제를 내 삶의 문제로 느끼고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합니다. 노년이 공포가 되지 않도록 말이죠. 노인들이 일을 하고 자원봉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인프라도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노년에 취미생활을 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젊었을 때부터 그렇게 할 수 있는 훈련을 시작해야 가능한 일이죠."
 
  1990년대부터 노인복지 분야에 종사해 온 유경 씨는 노년을 둘러싼 세태변화를 확실히 느낀다.
 
  "우선 각종 노인복지시설의 수가 부쩍 늘었어요. 노후준비에 대한 중장년층의 관심도도 크게 높아졌지요. 예전에는 강의 요청도 주로 노인대학에서 왔지만 이제는 중장년층에서도 점점 더 많이 와요. 재취업과 노후준비에 대한 강의 요청이죠. 피부로 느껴져요."
 
  "말 붙이니 이렇게 좋아하시는 어르신 모습에 짠해…"
 
  10월 26일 오전 9시. 유경 씨가 성동종합복지관에 모여든 20여 명의 케어복지사 과정 수강생들에게 자신이 느끼는 우리나라 노년의 문제와 노년과 관련된 세태를 이야기하자 수강생들 대부분이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케어복지사는 노인을 돌보는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개발된 민간자격이다. 케어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은 낮 시간대에 치매노인을 돌보는 시설이나 노인들을 위한 요양원 등에 취업할 수 있다.
 
  케어복지사 과정 수강생들은 '주위 노인 관찰하고 말 붙여보기'라는 숙제를 실습으로 한 뒤 그 과정에서 자신이 느낀 바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발표를 하는 수강생이나 듣는 수강생이나 눈빛이 진지하긴 마찬가지였다. 수강생 중에는 40~50대 여성이 가장 많았지만 간간이 20~30대 여성도 보였고, 남성도 두어 명 눈에 띄었다.
 

  "숙제 때문에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았어요. 솔직히 냄새가 좀 나데요. 용기를 내어, 옆에 앉아 계신 할머니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어디 가세요?'하고 물었죠. 당황스러울 정도로 너무 좋아하시더라구요. 그때부터 쉴새없이 말씀을 하시더군요. 건너편 자리에 앉아 계시던 할아버지도 말을 걸어주길 바라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시는 거예요. 마음속으로는 그 할아버지에게도 '건강은 어떠세요'하고 여쭙고 싶었지만, 그러다가는 집에도 못 가겠다 싶어 인사만 드리고 지하철에서 내렸어요."
 
  "버스 안에서 80대로 보이는 한 할아버지가 우체국을 찾으시더라고요. 운전사를 포함해 버스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정류장을 가르쳐드렸는데도 믿지 못하고 자꾸 다시 물어보는 거예요. 나중엔 운전사도 짜증을 내더군요. 그 할아버지는 왜 그리 다른 사람 말을 믿지 못하시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수강생들 가운데 대다수는 사소한 말 걸기 하나에도 너무나 기뻐하는 노인들의 모습에 뿌듯하고 짠한 기분을 느꼈다고 토로했지만, 일부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노인의 행동을 이야기했고, 어떤 이는 노인이 사과를 먹다가 기도가 막히는 바람에 순식간에 죽는 모습을 목격했던 과거의 경험담을 털어놨다.
 
  이어 유경 씨가 '노년의 특성'에 대해 강의하기 시작했다.
 
  "노년의 가장 큰 고통은 빈곤, 즉 경제적 문제이고, 두 번째가 건강, 즉 몸이 아프다는 문제이고, 세 번째는 역할이 없다는 것, 즉 할 일이 없다는 문제이고, 네 번째는 고독과 소외입니다. 자식이 보험이 아닌 세상이 되어 이제는 생존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어르신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점점 노인을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대하지 않고 그저 짐으로만 여기고 있어요. 경제활동인구가 자꾸 줄어드는 상황이기도 하니 노인들을 뒷방에서 끌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은퇴 시기를 늦추고, 일에 대한 우리의 인식 또한 바뀌어야 합니다."
 
  여기저기서 '맞아, 맞아'하는 속삭임이 들린다. 강의를 듣던 김인자(47) 씨는 "성당에서 자원봉사를 하다가 흥미가 느껴져서 이곳에 왔는데, 듣다 보니 만만찮은 일인 것 같아 좀 두렵다"며 멋적게 웃었다. 권순옥(50) 씨는 "케어복지사가 되지 못하더라도 강의를 들으며 내 노년을 준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허은영(41) 씨는 "얘기를 들어보면 케어복지사는 간병인과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간병인이라면 병원에서도 무시받는 일이 많은데, 직업으로 갖기엔 약간 망설여진다"고 털어놨다.
 
  "이제 세대별 '노년 이해 교육' 필요하다"
   

  유경 씨는 "지난 15년 간 노인복지시설 등 양적인 면에선 노인복지가 확대됐다고 하지만, 노인복지 정책이 여전히 '빈곤노인' 중심이다. 게다가 사회복지사에 대한 처우 또한 열악해 노인복지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양질의 인력이 길러질 기회가 제한돼 있다"며 "아직도 복지사라고 하면 전문가가 아닌 '무급 봉사자'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한국이 급격하게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지만 노인은 더불어 살아가야 할 사람이기보다는 부양과 지원의 대상이자 사회적 짐이라고 보는 시각이 여전히 지배적이라는 것이다.
 
  유경 씨는 또한 "한국처럼 속도가 빠르고 젊은이들 중심의 사회에서는 세대별로 노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유치원 아이들한테는 왜 할아버지 이마에 주름이 많은지, 초등학교 아이들에게는 왜 할머니가 의치를 끼는지, 중고교생들에게는 사람의 노화는 어떻게 이뤄지는지에 대해 체계적으로 이해시킬 필요가 있어요. 그러나 단순한 커리큘럼만으로는 안 되죠. 만나고 소통해야 합니다."
 
  유경 씨는 실제로 초등학교의 방과 후 교실, 중학교 특기적성 교실의 포크댄스반 등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와 손자, 손녀 세대와의 만남을 시도해보고 있다고 말했다. 처음엔 서로 어색한 분위기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서로를 배워가며 가까워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서로 같이 살아가는 존재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면 우리 사회에서 노인들은 딴 나라 사람들이 될 겁니다. 나는 평생 안 늙을 것 같죠? 그러나 나이듦과 싸워 이기는 장사 있습니까?"
  
"멋있는 노년은 스스로 만들어야지"
 
  "나이 들면 물론 돈이 중요하죠. 그런데 늙어가면서 마음가짐을 바로 가져야 가진 돈도 잘 쓸 수 있지. 돈은 두 번째야. 돈 없이 잘 사는 노인도 있지만 돈이 있어도 못 사는 노인도 많거든."
 
  대한민국 노인들의 사정과 속내를 적나라하게 그려낸 <아름다운 노년을 위하여 (2000)> <실버들을 위한 유쾌한 수다(2003)>을 연달아 펴내고 현재 KBS 라디오의 <출발! 멋진 인생>에서 노년상담 코너에 출연 중인 고광애 씨를 만났다.
   

  60대 중반을 넘어선 자신을 노년이 아닌 '신중년'이라 부르는 그는 영화 <바람난 가족>을 만든 임상수 감독의 어머니이자 90대 노모를 모시는 '노노(老老)부양'의 실례이기도 하다. 출산과 육아를 위해 1년 남짓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경험이 있는 그는 품안의 자식들이 다 제 갈길을 찾아나선 50대 어느날 문득 "자식들만 바라보고 살아온 나 자신이 두려웠다"고 했다.
 
  "50대 이후에 집중적으로 노년에 관한 공부를 했지. 연구라고까지 이름 붙이긴 뭐해도 독서 수준을 넘어서는 공부였지. 그때 친구들이 코웃음쳤어요. 어차피 늙는 거 공부하나 안 하나 늙는데 뭣하러 공부하냐고. 근데 내 생각은 어차피 늙는 거라면 준비하고 즐겁게 맞이하자는 거지. 일, 취미생활, 건강도 그렇고. 혼자서 잘 지내는 연습도 그렇고."
 
  "돈 없이도 행복한 노년을 보낼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부자 노인들이 보통 교만한 경우가 많아요. 돈이면 다 된다는 거야. 손자들한테도 몇 백만 원짜리 장난감도 사주고.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손자손녀하고 진정한 교류가 없으면 그것도 사줄 때뿐이야. 그리고 돈 많은 노인이 있는 집 치고 분쟁이 안 일어나는 경우가 별로 없어요. 자식들이 어지간히 똑똑치 않으면 다 유산을 바라거든."
 
  고 씨는 '회심(回心, 마음을 돌려먹음)'을 강조했다. "한마디로 나이 먹어서는 젊었을 때처럼 아둥바둥하지 말고 좀 고상하고 초연하게 마음을 돌리라는 거죠. 이건 남자들이 특히 필요한데, 우리 시대는 남자들이 바깥 일만 해야 잘난 남자잖아. 늙어서 집에 들어오면 자기 자리가 없는거야. 엄마와 자식들은 똘똘 뭉쳐 있고. 고독하고 슬프지. 잔소리만 늘어나. 내 친구들만 해도 영감 잔소리 때문에 다 죽으려고 해(웃음). 퇴직하고 시간은 많은데 할일은 없으니 짜증이 나고 우울증에 걸리는 노인들이 많아요. 늙기 전에 공부도 많이 하고 자기는 늙어서 뭐를 할지 고민을 많이 해야 해."
 
  고 씨는 '젊은 세대'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젊은이들이 "노년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거였다.
 
  "노인들이 자기 늙는 것을 모르기도 하지만, 젊은 애들이 노인 모르는 건 말도 못 해요. 홀로 된 부모는 배우자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게 대표적인 사례지. 이성들 찾고 생각하는 거 노인들도 여전하더라구. 재혼은 아니지만 천하 없어도 애인은 있어야 된대, 아니 갖고 싶대! 하다못해 나이 들어도 돈 많은 할아버지가 인기있고, 젊고 예쁜 할머니가 인기 있다니깐. 너무 똑같아요."
 
  "늙으면 호기심이 없어진다지만 호기심도 개발할수록 길러지는 것 같다"는 고씨는 "지금도 신문 4개 보랴, 영화보러 다니랴,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많아 바쁘다"고 했다. 요즘 그의 화두는 '죽음'이다. 어차피 맞이하는 늙음이라면 기꺼이 맞자는 생각의 연장선상이다.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한 달에 한번 있는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죽음회' 모임에 가야 한다며 잰걸음을 옮기는 그에게 "활기찬 모습이 멋져요. 해주신 말씀에 공감이 가네요"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나 화성에서 온 사람 아니야!"

유경 씨가 말하는 '노년의 유형'과 '일 잘하고 잘 놀기 위해 배워야 할 10가지
 
  노년이 되면 달라지는 것을 중심으로 보면 노년의 특징을 10가지로 간추려볼 수 있다.
 
  1. 몸이 변한다.
  2. 시각ㆍ청각ㆍ미각ㆍ후각이 전체적으로 둔해진다.
  3. 기억력이 많이 떨어진다.
  4. 노년에도 사랑과 성이 존재한다.
  5. 우울증 경향이 늘어난다.
  6. 융통성이 없어지고 경직성이 증가한다.
  7. 자꾸만 과거를 돌아본다.
  8. 친숙한 물건에 대한 애착이 심해진다.
  9. 자기중심적이 되기도 한다.
  10. 그러나 노인이라고 다 같지는 않다.
 
  유경 씨는 "마지막 열 번째가 중요하다. 우리는 흔히 어르신들을 '노인'이라는 하나의 범주에 가두려고 하지만, 아이들이나 청소년이 각기 다 다른 것처럼 어르신들도 다 같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가 말하는 대표적인 노년의 유형 10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열혈 청년형: 나는 늙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에게나 다른 이에게나 계속 강조하며, 하던 일에서 절대 물러나려 하지 않는 유형.
  2. 무감각형: 살아 온 날들이 워낙 신산스러워 아무런 희망도 의욕도 없는 유형.
  3. 산타클로스형: 자신의 돈, 시간, 정성, 재능, 마음을 주위에 골고루 나눠주는 유형. 자원봉사를 많이 한다.
  4. 조로(早老)형: 어차피 늙어갈 인생, 별 거 있겠냐며 지레짐작으로 노년을 앞당겨 맞아들이는 유형. 남은 인생에 대한 계획도 청사진도 있을 리 없다.
  5. 응석형: 자녀, 친구, 주위사람에게 끊임없이 어리광을 피우며 자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유형.
  6. 밑빠진 독형: 돈 욕심, 자식 욕심이 너무 강해 '고생해서 키웠으면 이 정도는 받아야지' 하며 욕심을 못 버리는 유형.
  7. 겨울나무형: 군살도 욕심도 없이 마음을 비우며 누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묵묵히 깨끗하게 인생을 마무리하는 유형.
  8. 내 마음대로 형: '나를 따르라'형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돈 있고 힘 있는 노인들 가운데서 흔히 발견된다. 스스로가 대화의 기회를 차단해 외로움만 남는 경우가 많다.
  9. 답답형: 무슨 일이든 자기 방식밖에 모르며 늙음이 자격증이라고 생각하는 유형. 노년의 외로움은 따놓은 당상이다.
  10. 잘 익은 열매형: 자신의 노화를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유형. 잘 익은 열매를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남에게 나눠주기도 하지만 안으로 파고드는 성찰로 자기 내면을 성숙하게 만들어 주위 사람들의 귀감이 되기도 한다.
 
  독자들은 어떤 유형의 노년을 맞이하고 싶으신지? '일하는 노년을 위해 기억해야 할 10가지'와 '노년에 잘 놀기 위해 배워야 할 10가지'가 소개한다.
 
  일하는 노년을 위해 기억해야 할 10가지
 
  1. 노년기의 일은 생존의 문제와 직결돼 있다.
  2. 일을 통해 쓸모 있는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다.
  3. 일은 노년의 신체적ㆍ정신적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
  4. 노년에 일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현재를 살게 하기 때문이다.
  5. 일을 통해 우리는 사람을 만난다.
  6. 노년에도 일을 하려면 철저한 자기평가가 필요하다.
  7. 일에서 은퇴할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
  8. 남은 인생동안 무엇을 하며 살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9. 평생 하고 싶은 일을 찾으면 인생이 행복하다.
  10. 자원봉사는 멋지고 아름다운 노년생활을 책임진다.
 
  노년에 잘 놀기 위해 배워야 할 10가지
 
  1. 내게 맞는 취미와 여가활동을 찾자.
  2. 어떤 활동이든 꾸준히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3. 여가활동도 일찍부터 배우고 훈련한 사람이 잘한다.
  4. 혼자 하면서도 여럿이 함께 할 수 있는 활동이 좋다.
  5. 배우자와는 따로 하다가 같이 하다가 하는 것이 좋다.
  6. 혼자 놀기를 즐겨라.
  7. 다른 세대와 어울리자.
  8. 내 식대로 즐긴다.
  9. 사회적 여가에 눈을 돌리자.
  10. 취미나 여가활동을 배우는 데 너무 늦은 때란 없다.
 
  유경 씨는 "역시 죽을 때까지 사람을 지탱해주는 것은 사랑과 일"이라며 "그 누구도 나를 위해 일거리를 찾아주지 않으므로 스스로가 팔을 걷고 나서서 할 일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노는 것도 배워야 잘 놀 수 있다"며 "노년기에 불가피하게 부여받게 되는 여가를 어떻게 즐길 것인지에 대한 그림을 미리 그려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출처 - 중앙일보

한국 남자들은 이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한다'. 2004년 기준 11쌍 중 1쌍 꼴로 빈번히 일어나는 이혼율은 부부의 위기가 아니라 남편의 위기다. 일본의 황혼 이혼도 이웃 나라 얘기가 아니다. 참고 살던 나이 든 여성들도 이제는 달라졌다. 30세 미만 이혼율은 1.25%, 하지만 60세 이상은 8.39%나 된다. 부부 애정 갈등의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최근 열린 한국성과학연구소(소장 이윤수) 주최의 '아담과 이브' 심포지엄에서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한국 남성들, 아내에 대해 공부해야 합니다!"

글=고종관 건강팀장<
kojokw@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
shotgun@joongang.co.kr>



*** 동상이몽 부부 많다

아내가 결혼 생활에 만족하는 줄 착각하고 있는 남편이 많다. 한국 남성의 81%가 '자신의 부부는 만족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여성은 61%만이 만족한다고 답변했다. 매우 만족한다는 여성은 10%에 불과했지만 남성은 32%나 됐다. 한국성과학연구소가 5월 전국 5대 도시 1000명의 기혼 여성을 조사해 기혼 남성 1613명의 자료(2003년 조사)와 비교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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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성에 대한 인식은 극명하게 차이가 났다. 남성의 98%가 결혼 생활에 성생활이 '매우', 또는 '어느 정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성은 74.8%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응답을 했다.

섹스 후 '돌아누워 잔다'거나 '아내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남성은 28%였고, 이들의 전희 없는 섹스는 57%나 됐다. 이런 남편을 둔 아내의 결혼 만족도는 18.5%로 낮았다.

이 소장(이윤수 비뇨기과 원장)은 "남성과 여성은 성을 바라보는 태도가 확연히 다르다"며 "남자는 크고 강한 육감적 섹스를 중시하지만 여성의 성은 관심.애정.존중 등 매우 복잡한 면이 있다"고 말했다.

*** 남성이 착각하는 여성의 성 심리

부부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는 김병후 원장은 "남편은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아내는 사랑 받지 못해 불행하다"고 단언한다.

남성들이 "섹스를 잘해주면 반찬이 달라진다"고 말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성기 섹스가 전부라고 단정한다는 것. 부부 트러블도 잠자리에서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동물적 성 능력을 높이기 위해 몬도가네식 정력제도 마다 않는다. 하지만 여성에게 성기 결합은 사랑의 행위 중 하나일 뿐이다.

김 원장은 "여성에게 성은 애정의 연속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눈을 마주보고 접촉하고 얘기를 나누며 사랑에 몰두하라는 것. 과묵한 남성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이혼감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아이를 키우는 여성의 심리도 남성들이 이해해야 할 대목. 아내는 남편을 곁에 두고 싶어하면서도 남편이 요구하는 섹스는 피한다. 남편은 이런 아내의 이중적 태도가 야속하다. 김 원장은 "출산 후 호르몬의 변화로 성욕은 떨어지면서 불안 심리는 극대화된다"며 "이런 여성의 태도는 아이와 자신의 안전을 위한 자연스러운 진화의 산물"이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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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40대 중반으로 접어들면 남녀의 성 역할은 완전히 바뀐다. 남성은 사회적 관계가 무너지는 은퇴 시기가 되면 가정으로 돌아오고, 거꾸로 여성은 친구.모임을 찾아 밖으로 나돈다. 이는 관계를 형성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 남성은 일 중심, 해결 중심으로 관계를 맺지만 여성은 만나는 그 자체만으로 즐거운 정서적 교류이기 때문에 친구 관계가 나이 들수록 많아진다는 것.

김 원장은 "과거 권위를 내세워 아내를 무시했던 서구 남성들이 여성 지향적이된 데는 아내가 요구한 이혼이 급증했기 때문"이라며 "나이 들어 홀로서기가 불가능하다면 지금부터 남성중심 사고를 바꾸라"고 권했다.

*** 부부 관계의 연금술은 대화

결혼 생활이 자동차라면 부부의 성은 자동차 바퀴다. 아무리 좋은 차라도 바퀴 없이 움직일 수 없다는 것. 고려제일정신과 김진세 원장은 "부부 관계의 연금술은 아내를 '홍콩 보내는 것'이 아니라 '대화'"라고 강조했다. 대화는 친밀감을 유도하고, 정서적 친밀감이 성적 만족으로 이어진다는 것. 아내를 존중하는 태도 역시 남편이 갖추어야 할 덕목. 김 원장은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행하고 싫어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 존중"이라며 "아내의 감정.의사.육체를 존중하지 않는 부부 관계는 폭력이나 변태일 뿐"이라고 말했다. 아내가 불안장애나 우울증이 있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성 의욕을 떨어뜨려 성 기능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여성의 성 생리에 대한 오해도 남성들이 극복해야 할 과제라는 지적도 나왔다. 김원회(전 부산의대 교수) 박사는 "지금까지 여성의 성 반응과 오르가슴에 대한 이론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예컨대 마스터스 등이 발표한 여성의 성반응 주기는 욕구→흥분→고원기→절정기 순으로
마치 계단처럼 진행된다. 하지만 최근 이론은 손 잡기.키스.피부 접촉.페팅.오럴섹스.성교 등 일련의 모든
단계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르가슴은 뇌가 인지하는 것이므로 성적 즐거움이 반드시 성교만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김 박사는 "여성은 '타이타닉'을 보려고 줄을 서지만 남성은 비아그라를 사기 위해 줄을 선다"며 "남성의 왜곡된 여성 성에 대한 잣대를 바꾸라"고 주문했다.

2005.11.03 15:42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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