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프레시안(최서영 기자)


[저출산고령화의 덫1] 가정의 '돌봄노동 공백'을 어떻게 메워야 하나

사냥꾼과 전사로 살아야 하는 한국사회


젊은 부부들이 예전보다 아이를 덜 낳는 한편 사람들이 예전보다 오래 살게 되면서 노인들이 많아진다는 이른바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 우리 사회의 논쟁거리가 돼 있다. 그러나 '왜 그것이 문제인가'에서부터 '그렇다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이르기까지 이 현상에 대한 우리 사회의 논의는 아직 충분히 진전되지 못했다는 것이 <프레시안>의 판단이다.
 
  이에 따라 <프레시안>은 '저출산, 고령화' 문제에 대한 기획 시리즈를 준비했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한 시민은 기자에게 투덜댔다. 또 저출산ㆍ고령화냐고. '저출산'과 '고령화'를 이어 붙여 '저출산, 고령화'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노동력 부족'을 걱정하는 기업적 관점이자, 관료적 발상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굳이 기획 시리즈를 내보내려면 저출산 및 고령화 현상을 개인의 삶의 질 차원에서 다뤄달라"고 주문했다.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한국사회를 지향하는 보도태도를 지켜달라는 것이었다.
 
  흔히 저출산 대책으로 보육시설의 확충 등 '여성의 일과 가족의 양립에 대한 지원'을 꼽는다. 그러나 여성들의 편의를 좀 봐주겠다는 접근으로는 문제해결이 어렵다. 이번 기획에서는 일과 가족의 양립이 필요한 사람은 왜 여성이 아니라 오히려 남성인지를 살펴보는 데서 시작해 보육의 사회화, 아버지의 육아휴직제 등 필요한 국가정책, 저출산을 강요하는 기업문화의 현실과 개선책 등을 다룬다.
 
  고령화에 관한 후반부의 기획기사에서는 우선 부지불식간에 우리 사회가 갖게 된 하나의 잠재의식을 깨뜨리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노인은 젊은 세대의 행복을 앗아가는 사회의 짐이자 재앙'이라는 의식이다. 그 다음에 노인들 개개인의 품위 있고 활동적인 삶을 보장하는 것이 어떻게 '미래의 노인'인 젊은 세대에게도 이익인지를 살펴본다. 고령화 문제에 대해서는 노년층과 비노년층이 윈-윈하는 방향으로 국가정책이 수립되고 집행돼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준비된 이번 <프레시안>의 기획 시리즈 '저출산고령화의 덫'은 전반부에서 '저출산 문제'에 대해 몇 회에 걸쳐 기사를 내보내는 데 이어 후반부에서 '고령화 문제'에 대해 다시 몇 회에 걸쳐 기사를 내보낸 다음 종합적인 토론과 결론도출을 시도할 예정이다. 관심 있는 독자들은 적극적으로 논평을 해주시기를 바란다. <편집자>
 
  지난 10월 10일 오후 2시 국회 의원회관에서는 이른바 '임산부의 날'이 선포됐다. 국회의 '저출산고령화사회 대책특위'가 주최하고 의사협회가 주관한 행사였다.
 
  평소 부른 배로 길에 나서기를 두려워하던 임신 여성들이 이날 행사에서는 주인공으로 따뜻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임산부 권리 선언문'도 낭독됐다. "임산부는 직장의 채용, 승진, 해고에 있어 부당한 차별을 받아선 안 된다. 임산부와 그의 소속 직장은 국가 모성보호 정책의 배려대상이다. 국가는 임산부의 권리를 수호해 임신, 출산, 육아를 위한 법적ㆍ제도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이를 낳아도 안 낳아도 여자 책임"인 이유
 
  그러나 이 행사 소식에 임혜숙(40)씨는 착잡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을 지었다. 결혼 9년째에 접어든 노조 상근자인 그녀 부부는 아이가 없다. "우리 부부가 아이를 낳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둘 중 하나도 일을 그만둘 수 없는 처지였다. 아이를 낳아 기를 돈도 없었고 형편도 안 됐다." 임씨는 이렇게 말하며 웃었지만, 사실 결혼 후 3~4년 동안은 양가 부모와의 갈등에 시달렸다고 한다. "직장생활을 계속하기 위해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태도"라는 질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많은 여성들이 아이를 안 낳는다고 욕을 먹고, 아이를 낳아도 직장 일을 계속하면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듣게 된다"며 "아이를 낳아도 안 낳아도 다 '여자 책임'이라고 여성들을 옭아매는 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임씨의 이런 말은 '성차별'이나 '인습적인 성역할'에 대한 항변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그의 말 속에는 합계출산율(한 여성이 평생 동안 낳는 자녀 수)이 불과 30년 만에 4명에 가까운 수준에서 1명을 조금 웃도는 수준까지 크게 떨어지게 된 원인을 파악하게 해주는 실마리가 들어있다. 그것은 여성의 사회활동이 그동안 크게 확대돼 가정에 남아있을 수 없게 됐음에도 아이를 기르는 일상적 책임이 압도적으로 여성에게 지워진다는 점이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돌봄노동(Care Work)의 공백' 현상이다. '돌봄노동'이란 '유아기, 성장기, 노인기의 사람들을 보살피는 노동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여성학자들이 '타인을 보살피는 일'을 개념화한 용어다. 따라서 '돌봄노동의 공백'이란 가족, 특히 보살핌이 필요한 노약자나 어린아이를 돌보는 일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몫이었는데 갈수록 더 많은 여성들이 직장에 나가 일을 하게 되면서 가정에 그런 일을 할 인력이 부족해지거나 없어지게 됐다는 뜻이다.
 
  이재경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는 "최근 합계출산율이 1.16까지 떨어지자 인구의 관점에서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며 "하지만 합계출산율의 저하는 단순한 인구의 문제로만 볼 게 아니라 삶의 패러다임 변화로 인한 돌봄노동의 공백과 관련된 문제로도 봐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가 지속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생계부양 책임자로서의 남성과 가사 전담자로서의 여성'이라는 가정의 모델을 떠받치던 토대가 계속 허물어져왔다. 다시 말해 맞벌이 부부가 증가하면서 부부가 둘 다 바깥일을 하게 됐음에도 집안일은 여전히 여성이 주로 해야 하기에 여성에게 부과되는 불평등한 이중부담이 여성들로 하여금 혼인이나 출산을 기피하거나 지연시키도록 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사냥꾼과 전사의 사회에서는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가정에서 남성이 돌봄노동을 충분히 분담하면 되지 않느냐는 주장은 우리의 사회경제적 생존조건상 실효성이 없다. 이재경 교수는 "남녀 모두 '일의 책임과 가정에서의 책임'을 다 감당할 수 있도록 하는 '가정 친화형' 노동시장 및 기업문화를 정착시키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단순히 여성의 부담을 좀 덜어주겠다는 수준에서 접근하는 정책으로는 상황을 바꾸기 힘들다"고 단언한다.
 
  왜 그러냐면 한국은 '사냥꾼과 전사(戰士)들이 경쟁하는 자본주의 사회'인 게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는데, 이런 한국사회에서 표준적인 노동자 모델은 '돌봄노동의 책임'이 면제된 '남성 생계부양 책임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재경 교수는 "여성들도 이 모델에 맞춰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집에 가서 애나 봐라'라는 말이 대변하듯 돌봄노동에 대한 저평가가 만연해 있는 게 한국사회"라고 지적했다. 게다가 고등교육과 직장생활을 통해 '개인으로서 자기이익에 충실한 합리주의 문화'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남자든 여자든 돌봄노동을 매력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이런 분위기가 우리 사회에도 폭넓게 확산됐다는 게 이 교수의 진단이다.
 
  '사냥꾼과 전사의 사회'가 갖게 되는 가장 큰 특징은 '장시간 노동'이다.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의 유정미 연구원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 또는 타인에 의한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데, 오늘날의 노동은 누구든 집에 보살펴주는 이를 가진 '사냥꾼'이 하는 노동이라는 전제 아래 이뤄진다"며 "이는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한국이 갈수록 치열한 경쟁사회가 되면서 남녀를 막론하고 전사가 되어가고 있거나 되고 싶어 하거나, 그렇게 돼야 한다는 부담과 압박에서 자유로운 이가 없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러한 부담과 압박은 고스란히 가정으로 전가되며, 이 점에서는 굳이 남성과 여성을 구분해야 할 이유가 없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노동연구원의 장지연 연구위원은 "흔히 저출산 대책은 여성정책이라고 오해하는데, 남성들의 삶의 조건에 아무런 변화도 없는 상태에서 가족을 돌보는 책임은 여전히 여성에게 있다는 전제 하에 저출산 문제에 접근하면 백발백중 실패"라며 "일과 가정의 양립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건 오히려 남성들"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여성개발원의 박수미 연구위원도 "말로 아무리 모성을 찬양하고 캠페인을 벌여봤자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화폐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는 인정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전통적인 가정의 모델에 얽매어서는 오늘날의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돌봄노동의 공백을 메울 방도가 찾아질 수 없다는 의견인 셈이다. 박 연구위원은 "고용의 불안정, 만혼의 증가와 이혼율의 상승 등은 서로 상관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 결과로 남녀 모두 경제력을 가져야 하는 상황이므로 보육의 '사회화'와 '양성화'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돌봄노동의 공백이라는 문제가 저출산과 직결된다는 점은 국가 간 비교에서도 확인된다. 흔히 개발도상국 단계를 넘어선 나라들은 모두 다 저출산의 문제에 직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국가 간 비교를 해보면 나라마다 그 양상이 다소 다르다.
 
  성평등 수준이 높지도 낮지도 않은 나라들이 '출산율 세계 꼴찌'
 
  국가 간 비교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실은 노동시장과 가사분담에서 성평등의 수준이 아예 높거나 아예 낮은 나라들에서는 출산율이 비교적 높지만,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나라들(한국, 일본, 싱가포르, 이탈리아, 스페인)에서는 출산율이 낮다는 점이다. 이런 어중간한 나라들은 그 대부분이 부계혈통 중심의 보수적 가족문화 전통이 남아있는 유교문화권이나 가톨릭문화권에 속하는 나라들이다.
  
<유엔개발계획(UNDP)의 성평등 지수와 출산율 비교 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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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평등지수(GDI: Gender Related Development Index)는 매년 유엔개발계획(UNDP)이 평균수명, 문자 해독율, 초중고교 취학율등의 남녀차이를 분석해 발표하는 지표로 99년 우리나라는 163개국중 30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여성의 의회ㆍ행정관리직ㆍ전문기술직의 여성 점유율과 소득분배를 분석한 여성세력화지수(GEM: Gender Empowerment Measure)는 102개국 중 78위에 머무르고 있다. ⓒ프레시안

  
<스웨덴, 프랑스, 영국과 한국의 출산율(1960~2005) 비교 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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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도 적극적인 저출산 대책을 편 것으로 평가받는 스웨덴과 프랑스는 1965~1975년 사이에 출산율이 크게 떨어졌으나 그 이후부터는 안정돼 1.5명 이상을 유지해왔다. 이에 비해 한국은 1965년 이래로 줄곧 브레이크 없는 출산율 하락세를 이어왔다.합계출산율은 15세~49세의 가임여성이 평생 낳은 자녀 수로 국가별 출산력 수준의 비교 지표로 이용된다. ⓒ프레시안

  
<이탈리아, 스페인, 일본, 독일과 한국의 출산율(") 비교 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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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국가중에서도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등 남부가톨릭 국가들은 중ㆍ북유럽권과는 달리 1975년 이래로 지속적인 출산율 하락을 겪고 있다. 특히 스페인과 일본은 1970~1985년 사이에 한국과 기울기가 상당히 유사하다. ⓒ프레시안

  
<여성의 경제참가율 비교 그래프>
- 출산율이 안정된 나라들의 경우는 역U자형, 한국은 아직도 경력단절을 나타내는 M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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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만한 역U형의 '여성고용율'을 보이는 선진국들과 달리 한국은 여성들의 고용 추이가 30대에 가서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는 이른바 M자형을 보이고 있다. ⓒ프레시안


  한국보다 일찍 '저출산 대책'을 실행한 유럽에서도 '남녀 간의 성별분업 유지'를 전제로 대책을 마련한 독일과 스페인의 출산율이 가장 낮다. 이들 국가의 저출산 대책은 부모휴가, 육아수당, 보육시설의 확충보다는 '여성에 대한 육아휴가 보장'을 중시해 여성들에게 육아의 책임을 맡겼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재경 교수는 "한국 여성들의 경우 이제 '결혼퇴직'은 거의 사라졌지만 IMF사태 때 여성이 해고 1순위였던 데서 보듯 여전히 여성의 취업은 선택일 뿐이라는 인식이 존재한다"며 "그러나 이제 여성에게 일은 점점 더 선택이 아닌 생존수단이 되고 있는 게 현실이고 남녀 모두에게 '일과 가정'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게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스스로의 희망에 의해서건 사회경제적 압력에 떠밀려서건, 이제 한국사회도 남성이든 여성이든 '일과 가정'을 둘 다 감당해야 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 그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 '돌봄노동의 공백'이고 '맞벌이 부부의 가사일 신경전'인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려가며 일하고 사는 일이 남자에게든 여자에게든 점점 더 힘겨운 일이 되어가고 있다. 저출산 문제가 심각해진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저출산고령화의 덫 2] 사회서비스 없는 성장모델의 파산

"이런 나라에서 아이 낳기 싫다" 왜? 



 "솔직히 이런 나라에서 아이를 낳기 싫고 키울 자신도 없다. 경제적 여건도 그렇지만 한국은 교육, 의료, 환경등 모든 면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혼 2년차인 신석호(34) 씨는 딱 잘라 말했다. 이른바 '결혼퇴직'의 풍조가 사라지기 시작한 1980년대 말부터 당연히 맞벌이 부부가 크게 늘기 시작했다. 나아가 아이를 돌봐줄 할아버지, 할머니가 집에 없으면 선뜻 아이를 낳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이는 한국경제가 그만큼 성장한 데서 연유한 현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하나가 아니라 둘이 벌어도 아이를 낳기가 두렵다면서 출산을 아예 포기하거나 무한정 미루는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면서 출산율을 더욱 떨어뜨리고 있고, 출산율 하락은 다시 경제성장에 장애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경제성장이 고용을 늘리고 부분적이나마 복지를 개선했던 '한국형 경제모델'의 유효기간이 끝났다고 말하는 경제전문가들이 많다. 이제는 성장이 고용을 보장하지 못하고 고용이 빈곤을 해결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빚어지고 있으며, 그런 가운데 경제의 성장잠재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장-고용-복지의 순환고리가 단절된 지점에 저출산의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일자리가 불안한데 아이를 낳고 싶겠나
 
  한국형 경제모델의 가장 큰 특징은 '불균형'이고 이는 '양극화' 현상으로 이어진다. 금재호 한국노동연구원 노동보험연구센터 소장은 "제한된 자원을 소수 대기업에 집중시켜 수출을 통해 성장동력을 얻는 한국형 경제모델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산업과 내수산업, 제조업과 서비스업 간의 불균형을 심화시켰다"고 말한다. 그 결과 한국경제에는 다음과 같은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 한국의 기업구성에는 허리가 없다. 다시 말해 임금노동자의 절반이 조금 넘는 51%가 30인 미만의 소기업에 취업하고 있고 23%는 300인 이상 대기업에 근무하고 있는 데 비해 30~299인의 중간규모 기업에 종사하는 임금노동자의 비율은 26%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고용기회가 전반적으로 부족해 전체 취업인구 중 27%가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래프 2>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같은 우리나라의 자영업 종사 비중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셋째, 서비스업이 도소매업과 음식숙박업에 집중돼 있는 반면 보건의료업과 보육서비스업 등은 아예 시장형성에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이에는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가 특히 40~50대 여성의 경우 도소매업과 음식숙박업에 몰려있다는 점도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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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 소장은 "외환위기 이후 새로 늘어난 일자리의 대부분은 임시 일용직이고 노동시장의 양극화와 함께 고용의 안정성이 전반적으로 매우 취약해졌다"며 "자영업 부문도 도소매업과 음식숙박업의 대형화와 전문화 추세로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50대 이상 영세상인들의 빈민화가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사회서비스의 부족으로 가정과 개인에 과부하
 
  특히 도소매업과 음식숙박업에 집중된 서비스업 부문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전병유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공공행정, 보육, 보건의료, 복지 등의 '사회서비스'는 국민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그 규모가 확대되는 우등재인데도 한국에서는 시장형성이 실패해 결과적으로 턱없이 과소공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회서비스의 발달이 부진함에 따른 부담이 고스란히 각 가정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보육, 간병, 교육 등의 부담이 각 개인에게 과부하로 걸리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런 과부하가 출산의 포기 내지 무한정 유보로 이어지고 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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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흡한 사회서비스가 각 가정과 개인에게 과부하를 초래하는 중간 메커니즘을 장경섭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계에 봉착한 가족중심주의'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장 교수는 "지금의 세계화 시대에 가정의 경제위기는 가족의 희생으로 직결된다"며 "그럼에도 사회적 성공전략은 더욱 더 가족동원을 핵심으로 하게 되는 등 지금의 한국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가족중심주의의 성격을 분명히 하면서 오히려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인들은 서구에서는 2~3세기에 걸쳐 전개된 사회변동을 불과 몇십 년만에 압축적으로 겪으면서 식민통치, 전쟁, 군부쿠데타, 산업화의 격랑을 헤쳐올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한국인들은 자신을 물질적, 신체적, 정신적으로 보호하는 일을 국가나 사회공동체에 믿고 맡길 수가 없었고, 그 대신 '가족'을 중심으로 뭉치는 태도를 익혔다는 것이다.
 
  각종의 위기에 대처하고 새로운 기회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흔히 드러나곤 하는 한국인들의 가족의존적, 가족중심적 생존방식은 재벌, 가족관계, 가족영농 등에서 가장 뚜렷하게 보인다. 개별 가족이 각각 하나의 단위주체가 되어 전 사회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학력투쟁'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 학력투쟁은 세계 최대의 사교육비 지출로 이어지면서 국가의 부족한 공교육 투자를 메꾸고 있다. 게다가 노인, 아동, 장애인에 대한 사회서비스의 책임도 국가가 아닌 각 가정이 대부분의 책임을 지다 보니, 가정과 각 개인에 누적된 과부하가 걸리게 됐다.
 
  장 교수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한국의 급격한 출산율 하락과 동시에 진행된 이혼율의 증가는 국가가 사회복지 책임을 방기함으로써 초래된 '가족 피로감'과 '누적된 개인 과부하'가 폭발한 결과"라며 "이는 이제 더 이상 국가가 사회복지의 책임을 각 가정에 떠맡길 수 없게 됐다는 신호"라고 진단했다.
 
  저성장-양극화-저출산, 동시에 해결해야 할 문제
 
  장 교수의 진단을 받아들인다면 사회복지, 다시 말해 사회서비스의 확충이야말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된다. 게다가 사회서비스의 확충은 한국사회에서 고용창출을 할 수 있는 미개척의 돌파구라고 지적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한국노동연구원 전병유 연구위원은 "저성장, 저출산, 양극화 시대에 새로운 양질의 고용기회는 그간 개발되지 않았던 사회서비스 부문에서 창출되야 한다"며 "이는 정부의 재정적자를 유발하지 않는 지속가능한 전략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우선 공공부문에서 질 좋은 사회서비스를 개발하고 그런 사회서비스 공급을 위한 인프라를 확충해나가기 시작하면 머지 않아 '공급의 수요 창출' 기능이 작동하게 되면서 사회서비스 부문의 선순환적 성장이 가능할 것이라는 얘기다. 펌프로 지하의 물을 끌어올릴 때 먼저 '마중물'을 들이붓고 나서 펌프질을 하는 데 비유하자면, 사회서비스의 경우에도 정부를 비롯한 공공부문이 마중물을 들이붓는 역할을 먼저 적극적으로 해야만 민간부문의 사업자들도 이 부문에 점점 더 많이 참여하게 될 것이란 얘기다.
 
  보육을 예로 들자면, 지금까지는 수요자가 민간 보육서비스의 질을 믿지 못하는 가운데 좀처럼 커지지 않는 좁은 시장 안에서 사업자들이 경쟁을 벌여 왔지만, 정부 등 공공부문이 질 좋은 보육 인프라를 적극 구축해 신뢰를 얻는다면 시장의 저변이 넓어질 것이라고 전 연구위원은 주장했다. 그렇게 된다면 민간 보육사업자들이 그 시장 안에서 활동할 공간이 넓어질 것이고, 결국은 고용창출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설명이다.
 
  전 연구위원은 "공공부문의 고용창출은 기존의 공공근로처럼 또 다른 '저임금의 온상'인 소득보전형 사업 시행이나 일시적 일자리 제공이 아닌 '질 좋은 일자리(Decent Job) 공급'이어야 한다"며 "특히 '가사노동의 사회화 및 시장화 전략'과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고용창출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한 '가사노동의 사회화'란 '사회서비스의 확충'과 크게 다른 게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적어도 초기 단계에서는 정부의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지금 정부는 과연 그런 역할을 할 자세를 갖추고 있는가?




[저출산고령화의 덫3] 시대변화 못따라가는 직장현실

"그럼에도 아이를 낳아 길러보려니…"


"임신자 해고는 불법이니 실적 미달에 의한 권고사직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하죠. 실업급여는 받을 수 있게 해줄게요."
 
  파견노동자 김다은(28, 가명) 씨는 소속 파견업체 관리자로부터 이런 말을 듣고 나니 기가 막혔다. 그것도 마치 선심 쓰듯 말하는 것이었다. 속으로 치솟는 화를 겉으로 표현하자니 후환이 두려웠고, 관리자의 말을 그냥 받아들이자니 한없이 억울했다. '임신한 게 죄인가?'하고 속으로만 되뇌었다. 관리자의 표정에는 일말의 미안함도 비치지 않았다.
 
  출산휴가를 떳떳하게 요구할 수 없는 직장현실
 
  금융회사에서 5년째 일하고 있는 김 씨는 맡은 일을 잘 해 왔고, 퇴사를 종용받을만한 행위를 한 적도 없다. 김 씨는 7개월 전에 파견업체 A사와 6개월 간의 계약을 맺고 B사로 파견됐다. B사에서는 김 씨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 따로 1년 간의 계약을 맺자고 요청한 적도 있다. 그만큼 김 씨는 업무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김 씨가 임신하자마자 두 업체의 태도가 달라졌다. 두 업체는 서로 책임 미루기에 급급했다. 파견업체 A사는 "다른 회사에서 파견직에게 출산휴가를 준 사례가 있긴 하지만 B사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출산휴가 기간 중의 급여 문제와 관련해 B사에서 협조해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출산휴가를 절대로 줄 수 없다"고 했고, B사는 먼산만 바라보며 모른 체했다.
 
  어쨋든 불안감을 안고 하루하루 지내던 중 김씨는 A사 관리자로부터 "당신이 임신을 하니 불편하다"는 말까지 들었다. 김 씨의 남편인 심기현(31, 가명) 씨는 임신을 했다고 온갖 모욕을 당해야 하는 아내를 바라보며 무척 안타깝지만, 그로서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대신 나서서 출산휴가를 요구해봐야 듣게 될 대답이 달라질 것 같지 않고, 아내로부터 직장에서 당하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자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남편 심 씨는 "나라에서 저출산이 문제니 뭐니 하고 출산휴가의 권리를 옹호해주는 듯한 말도 하지만, 개인이 회사에 출산휴가를 떳떳하게 요구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지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말한다. 아내의 문제를 계기로 출산휴가에 관심을 갖게 되어 주위를 살펴보니, 출산휴가로 회사와 갈등이 생기면 권리를 계속 주장하기보다는 나중을 생각해 그냥 회사의 방침을 순종하며 묵묵히 참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출산 예정일을 두 달 앞두고 있는 김다은 씨는 그러나 '물러설 수 없다'고 결심했다. 김 씨는 한 달 뒤에 출산휴가를 다시 요구해볼 생각이다. 임신을 이유로 퇴사를 종용하는 불법적인 행위가 번연히 벌어지는 것을 그냥 놔둘 수 없다는 오기도 생겼다. 주위에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대신 나서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김 씨는 혼자서라도 싸우겠다고 작정하고 노무사와 상담해보기도 하고 여기저기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김 씨의 사례를 들은 사람 중에는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아이도 낳아야 하는데 권고사직을 하면 되지 왜 그렇게까지 악착같이 출산휴가를 요구하고 일을 계속 하려고 하는가? 계약직이라면 일자리가 계속 보장되는 것도 아닌데…"라고.
 
  그러나 김 씨에게 일을 한다는 것은 '밥벌이' 이상의 의미가 있다. 김 씨는 "내가 당장 벌지 않게 된다고 해서 경제적으로 큰 고통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그러나 임신했다고 해서 일을 하기가 힘든 것도 아니고, 비록 계약직이지만 1년의 계약기간 중 일부라도 부당하게 빼앗기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평등의 전화 "모성보호 관련 상담 급증 추세"
 
  김 씨의 사례는 한국사회에서 결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다. 이는 여성노동자회에서 운영하는 '평등의 전화'의 상담 추이를 봐도 분명히 알 수 있다. 1995년부터 시작된 '평등의 전화'는 첫 해에 397건의 상담을 하는 데 그쳤지만 지난해에는 무려 3000여 건의 상담 실적을 기록했다. 최근 '평등의 전화'가 지난 10년 간의 상담 내용을 분석해 내놓은 자료는 '저출산 시대' 여성들의 삶의 현실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10년 전과 지금을 비교해볼 때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모성보호'와 관련된 상담이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10년 전에는 대부분의 상담이 '임금체불' 및 '고용불안'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데 산전산후 휴가기간을 90일로 늘리는 등의 방향으로 '모성보호 3법(근로기준법, 남녀고용평등법, 고용보험법)'이 개정된 2002년부터는 모성보호 관련 상담이 크게 늘었다. 전체 상담건수 중 관련 상담건수의 비중이 1995~2001년엔 평균 6~8%였으나 2002년 이후 12~14%로 확대된 것이다.
 
  이런 통계는 일터에서 여성들이 출산과 관련된 갈등을 갈수록 더 많이 겪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출산이 갈등의 원인이 될 경우, 직장 여성들은 출산을 포기하거나 무작정 연기하는 일이 많다. 반대로 출산을 선택하는 여성이라면 아예 출산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두겠다는 결심을 하는 일도 왕왕 일어난다. 요컨대 어떤 경우든 직장과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을 만들려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황현숙 평등의 전화 소장은 "사실 1980년대만 해도 '보험아줌마'를 빼고는 결혼하고 나서도 일하는 여성이 별로 없었다. '결혼퇴직'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있을 정도였고, 아이를 낳은 뒤에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갈등이 적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결혼퇴직'이라는 말은 점차 사어(死語)가 되어가는 반면 '육아퇴직'은 여전히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이런 변화는 지난 10여 년 사이에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고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가 확대돼 온 결과이기도 하다. 1990년대 이후 여성발전기본법(1995년)과 남녀차별금지법(1999년)이 제정됐고,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크게 상승했으며, 서비스업이 확대되면서 여성의 고용기회가 늘어난 것이다. 그런데 직장의 현실은 여성 노동자들의 모성을 보호해주는 것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
 
  그나마 모성보호와 관련해 회사와 갈등이라도 빚는 일은 근로조건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사무직과 전문기술직 등 정규직 쪽의 사정이다. 전체 여성노동자 중 70% 가까운 비중을 차지하는 비정규직의 모성보호는 더더욱 먼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정규직이라도 100명이 안 되는 사업장에서는 대체로 출산휴가를 당당하게 요구하기가 어렵다. 휴가급여 지불능력이 더 모자라는 영세사업장의 경우는 말할 나위도 없다.
 
  황현숙 소장은 "아직은 공무원, 300인 이상 사업장, 노조가 힘이 있는 사업장 등의 소수 여성노동자들만이 '모성보호'를 요구할 수 있는 게 현실"이라고 말한다.
 
  황 소장은 그러나 "그래도 여성들이 많이 변했다. 예전 같으면 '출산은 곧 퇴사'라는 고정관념을 수용하던 여성들이 이제는 노조 등을 통해 나름대로 싸워보고 출산과 직장을 동시에 지키기 위한 방법을 강구한다. 최근 3~4년동안에 '제가 우리 회사 출산휴가 1호예요'라고 말하는 상담자들이 늘었다"고 전한다.
 
  '출산퇴직'에서 '육아퇴직'으로 바뀌었을 뿐
 
  물론 여성노동자가 출산 때문에 일자리 상실의 위협을 받는 경우는 여전히 비일비재하다. 평등의 전화의 상담 사례를 들여다보면, 여성들의 '출산휴가 투쟁'이 아직도 매우 치열하게 진행 중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출산휴가 투쟁이라는 것이 비용의 문제를 넘어서 노사 간에 감정적 대립의 골까지 만드는 것도 큰 문제다. 이는 고용주들의 의식이 아직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생겨나는 마찰이기도 하다.
 
  사측에서는 여성노동자의 출산휴가가 다른 직원들에게 일의 부담을 늘린다는 점을 공공연히 부각시키기도 하고, 임신한 여성노동자를 엉뚱한 다른 부서로 배치하는 인사조처를 통해 간접적인 퇴사 압력을 가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여성노동자들은 노동부에 진정을 넣는 등 다양한 투쟁방법을 동원한다.
   
  황현숙 소장은 "그런 갈등은 결국 '합의'라는 미명 아래 '자진사직'과 '위로금'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자진사직'의 형식이 동원되는 것은 출산휴가를 이유로 한 해고는 불법이기 때문이고, '위로금'은 통상 실업급여의 성격으로 제시된다.
 
  출산휴가 3개월을 쉰다고 해서 오랜 경력으로 일이 손에 익은 여성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은 고용주의 입장에서도 손해인 것은 아닌가? 이런 의문과 관련해 황 소장은 "우선 회사에서는 여성노동자가 임신하면 그 여성노동자의 일상생활이 일이 아닌 가정을 중심으로 이뤄진다고 생각한다"며 "여성이 육아의 책임을 다 지는 현실에서는 그런 생각이 틀리다고만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처럼 직장에서 빈발하는 '출산퇴직' 또는 '육아퇴직'의 문제, 또는 '출산휴가'를 둘러싼 노동현장의 갈등을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관련 법과 제도가 개선될 필요도 있고, 고용과 기업경영의 문화가 지금보다 훨씬 더 선진화될 필요도 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그 실현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현실에서 급한대로 당장 추진해볼 수 있는 대책은 없을까?
 
  영아 보육시설이 기피되는 이유
 
  한국사회의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황현숙 소장은 '태어난 지 90일이 지난 영아를 받아주는 24시간 보육시설'과 '초등학생을 위한 방과 후 교실'을 꼽았다. 특히 보육과 교육의 경계선에 있는 초등학생들은 요즘 학교 수업이 끝나면 갈 데가 없어서 부모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초등학교 자녀를 학원으로 보내고 있다.
 
  청와대 근처에 있는 '정부청사 직장보육시설'의 서원경 원장도 '0세 영아반'이라는 말로 황현숙 소장과 비슷한 의견을 밝혔다. 여성의 경력단절에 핵심적인 원인이 되는 영아보육 문제를 해결하는 게 시급한데, 현재 영유아보육법상 교사 1명이 3명 이상 돌볼 수 없게 돼 있어 대부분의 보육시설에서 영아반 운영을 기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법정 영아 보육비 상한이 영아 1인 당 29만9000원이니 3명의 영아를 교사 한 명이 맡는다고 할 때 기껏해야 89만7000원의 수입밖에 거둘 수 없기에 보육교사 인건비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아들은 질병에 대한 면역력이 약해 집단시설에 있다 보면 아픈 경우가 종종 있는데, 현재 법적으론 보육시설에서는 '방문진료'를 받을 수 없게 돼 있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지방자치단체들이 적극적으로 보육시설에 대한 '촉탁의(직접 보육시설을 방문하거나 보육시설에 고용된 의사)' 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이것이 불법인 것이다.
 
  아울러 '초등학생을 위한 방과 후 시설 확충' 주장은 초등학생들이 보육 단계를 갓 지나 아직 '돌봄'이 필요한 게 현실인데 적절한 제도가 없다면 이 부담이 또 고스란히 '엄마'들에게 전가된다는 지적이다. 이런 부담이 적어야 여성들이 안심하고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처럼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현실성 있는 대책의 아이디어는 얼마든지 낼 수 있다.



[저출산고령화의 덫 4] '고출산'보다 '인간다운 삶' 지향해야

'엄마인 게 행복한 대한민국'은 불가능한가

조주은/여성학자

나는 내년이면 마흔이다. 같은 연배의 남성들은 하나둘 안정된 연구자로서의 지위를 보장받았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러나 나는 아침에 초등학교 저학년인 아이 둘을 등교시키는 과업을 완수하고서야 집을 나설 수 있는 '아줌마 학생'이다.
 
  원래 새벽형 인간인 내가 보살펴야 할 아이들이 없다면 늙은 학생 신분을 하루빨리 벗어나기 위해 새벽의 첫 지하철을 타는 신선한 느낌을 맛보며 하루를 시작하고, 밤하늘의 별을 보며 도서관을 나설 수도 있으리라.
 
  "아줌마들은 행복할까?"
 
  그러나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어지러운 집안을 대충 정리하고 집을 나서서 학교에 도착하면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다. 작년엔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가 근처에 방과 후 교실이 없는 탓에 늘 빈 집에 열쇠로 열고 들어와서 지루함을 달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또 한 달에 두 번씩 돌아오는 급식당번은 얼마나 당황스러웠던가. 오후면 수시로 걸려오는 아이들의 전화에 도서관에서 몇 번씩 뛰어나가다 보면 어느덧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된다.
 
  나이 마흔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던가? 이 말은 참으로 과학적인 것 같다. 지하철을 갈아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다가 부딪힌 대형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초라하기 짝이 없다. 늘 종종걸음 치며 초초하게 살아야 는 나…. 내 딴에는 꽃단장 한다며 신경 좀 쓰고 나와도 사람들로부터 늘 '피곤해 보인다'는 말을 듣는다. '나는 행복한가? 내 주변의 아줌마들은 행복할까?' 최근 나는 나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자주 해본다.
 
  왜 나는 선뜻 '나는 행복해'라고 말하지 못할까? 내 여자친구들 가운데 절반 정도는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울트라 슈퍼우먼 같은 나의 결혼생활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주은아, 내가 결혼 안 한 데는 네 책임도 있어. 너처럼 아둥바둥 힘들게 사는 걸 보면 결혼할 생각이 싹 가신다. 여자들은 왜 다들 결혼해서 행복하기는커녕 힘들게 살아야 하는 걸까. 차라리 나는 너같이 되지 않기 위해 솔로로 살련다."
 
  "보육정책, 관점을 바꾸지 않고는 헛일"
 
  결혼생활이 여성들에게 행복하지 못한 현실은 한국사회의 낮은 출산율과 높은 이혼율의 근본 원인이다. 1.17이라는 우리나라의 낮은 합계출산율은 결혼한 여성들이 자녀를 적게 낳아서 생긴 문제라기보다는 불행한 결혼 자체를 거부하거나 기피하는 비혼여성의 증가가 낳은 문제일지 모른다.
 
  불행한 결혼생활을 이혼으로 끝내는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이혼율도 높아졌다. 한국사회에서는 낮은 출산율과 높은 이혼율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그리고 여성들에게 결혼이 불행한 여러가지 이유들 가운데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한국사회에서 어머니가 되는 것이 주는 부담'이다.
 
  한국사회는 자녀양육의 1차적인 책임을 아버지나 사회가 아닌 어머니에게 돌린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족친화적인 저출산 대책으로 논의되고 있는 육아휴직의 활성화 등 대부분의 보육정책 방안들은 여전히 '아내가 가사노동을 전담해주는 남편'으로서의 남성의 삶을 전제로 한 것들이다. 이런 정책으로는 여성들의, 아니 어머니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어렵다.
 
  미혼여성의 입에서 '무자식 상팔자' 얘기가 나와서야
 
  여성노동자의 임금이 남성노동자의 60%도 안 되는 현실에서 육아휴직 급여 40만 원을 받고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사람의 성은 여성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육아휴직의 전제 자체가 생후 1년 미만의 영아는 가정에서 개별 부모가 양육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이기에 공보육 활성화 논의와 모순된다. 그나마 국공립 보육시설의 비중은 5%라는 미미한 수준에 머물고 있고, 경제부처는 끊임없이 보육을 자유경쟁의 시장논리에 맡기려고만 한다.
 
  정부의 보육정책은 기혼여성들의 취업을 보조하는,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미래의 일꾼이 될 사회 구성원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정책이라는 '도구적 성격'에서 하루빨리 탈피해야 한다. 보육정책은 가사노동자인 전업주부, 미래의 일꾼일 가능성이 없는 장애아동까지도 대상으로 하여 인간이 인간 그 자체로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정책이어야 한다.
 
  보육 인프라의 미비와 보육정책의 빈약함은 여성들로 하여금 패배감과 좌절감을 맛보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자식을 가진 부모의 입에서가 아니라 미혼여성의 입에서 나오는 현실은 뭔가 문제가 있다. 공보육의 활성화를 언제까지 공허하게 외치기만 할 것이며,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은 '셋째 아이 출산 장려금', '셋째 아이 보육료 지원', '다산왕 선발대회' 류의 저출산 대책으로 세월을 보낼 것인가.
 
  "대한민국 엄마들은 미치기 일보 직전"
 
  이 땅의 어머니들은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어머니들이 짊어지고 있는 가사노동과 육아의 과중한 부담을 덜어주지 못해 여성들을 정신분열 상황으로 몰아간다. 24시간 보육시설에 일주일 동안 자녀를 맡기는 엄마는 '이기적인 엄마'로 매도당할 정도로 보육시설의 질이 의심받고 있는 데 대해 정부는 신경을 쓰고는 있는 걸까?
 
  영아 보육시설과 초등학생을 위한 방과 후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일하는 엄마들은 늘 노심초사해야 하고, 자녀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급식당번이나 청소 등의 학교부역 노동에 시달리며 자괴감에 빠진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엄마들은 미치기 일보 직전이다.
 
  정부는 기혼 여성들로 하여금 임신, 출산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만 하며 여성의 몸을 통제하려는 태도를 당장 버려야 한다. 그동안 일방적으로 여성의 몫으로 돌려져 온 돌봄노동의 책임도 여성과 더불어 남성, 기업, 사회, 국가가 함께 나누어 져야 한다. 그래야 이 땅의 어머니들이 행복해질 것이다.
 
  평등의식과 인권의식이 확산되어 미혼모의 자녀, 장애아동, 여성도 사회의 구성원으로 정당하게 인정받고 사회적 보살핌을 받을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만 낙태와 영아수출(국제입양)이 사라질 것이다. 저출산에 대한 국가적인 걱정을 해소하려면 무엇보다 여성들이 어머니가 되는 것을 행복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중앙청사 어린이집'을 들여다 보니
   

  "아무래도 직장 옆에 어린이집이 있으니 아버지들이 점심시간에 잠깐이라도 보고 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직 등하원은 거의 어머니들 몫이죠. 부모 모임에도 아버지의 참가는 가뭄에 콩 나듯 합니다."
 
  지난 3월 194명 수용 규모로 청와대 가는 길목에 개소한 '정부청사 직장보육시설'의 서원경 원장은 "어머니나 아버지나 다 똑같이 직장에서 바쁘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인데, 그럼에도 시간을 쪼개 어린이집으로 달려오는 것은 늘 어머니"라며 "아버지들의 무책임'을 꼬집었다.
 
  이 시설은 과천, 대전, 반포에 이어 네번째로 지어진 공무원의 직장보육시설로 세종로 정부청사, 청와대, 서울경찰청 직원들이 자녀를 맡기는 곳이다.
 
  22명의 보육교사 중 청일점인 이상우(26) 씨도 "교사는 어디까지나 제2의 부모이고, 아이에게는 엄마, 아빠의 역할이 똑같이 종합적으로 중요한데 아버지들은 부모상담에 거의 안 오고 가끔 가족잔치에 참가하더라도 멀찍이서 사진만 찍고 가만히 있는 등 너무 소극적"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대통령 직속으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이라는 이름의 민관합동기구까지 만들어진 마당이지만, 정부청사 직장보육시설을 들여다 보면 '저출산 대책'을 수립하느라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공무원들이 사는 모습이나 '저출산을 이야기하는' 일반 국민들이 사는 모습이나 오십보 백보인 것 같다.



[저출산고령화의 덫 5] 중고령자의 구직난 '비명'

"50대 이하 노동력만 갖고 뭘 하겠다는 겁니까" 


 "내가 이래 봬도 은행 지점장까지 했던 사람이라 그러네! 월급 100만 원 주는 데가 진짜 그렇게 없소?"
 
  고령자취업알선센터에서 일하는 이들은 이럴 때 정말 난감하다. '어르신, 이제 사무실에 정기적으로 출퇴근하면서 그것도 100만 원씩 버는 직장 찾기는 정말 힘들어요'라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다. 나날이 열악해지는 노인 일자리 시장 앞에서 노인들이 자괴감과 실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수없이 보아 왔기 때문이다.
 
  "세상에, 실버취업박람회라는 데를 몇 바퀴 돌아도 할 만한 게 없어. 할 만한 게"라며 한숨을 푹푹 쉬던 금융권 출신 박진석(가명, 56) 씨는 결국 시급 3000원에 주유원 생활을 시작했지만 얼마 못 가 그만뒀다.
 
  "가르치는 일을 아무리 잘 해도 늙어서 싫대. 애들도, 애들 엄마들도." EBS방송에서 강의했던 경험까지 있는 영어강사 강정길(가명, 61) 씨는 사업이 망해 당장 돈이 급했다. 화려한 경력이었지만 나이가 '원죄'였다. 주차관리원 자리밖에 없다는 말에 입술을 깨물던 강 씨는 그 일 역시 결국 체력이 달려 그만뒀다.
   

  "요즘 노인 일자리 시장에도 중간층이 없어요. 번역같은 극소수의 전문직과 대다수의 저임금 단순노무직으로 갈리죠. 그나마 노무직도 최근에 직장을 그만두고 쏟아져나온 40~50대가 60대 분들이 하던 직종에 대신 들어차고 있어 노인 일자리 수가 전체적으로 크게 부족합니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취업알선센터 관계자는 "거기다 60~70대 여성들이 대거 노동시장에 나오는 것도 특별한 현상"이라며 "평생 가정주부만 하다가 남편이 실직하는 바람에 갑자기 나오신 분들은 대개 가사도우미나 보모를 하는데, 그것도 최근 바다를 건너온 값싼 중국인력과 경쟁해야 하는 처지"라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래저래 65세 이상 구직자가 크게 늘었는데 이들이 갈 데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업체들은 60세가 넘었다고 하면 손사래부터 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중고령자의 "일하고 싶다"는 비명은 '현재 젊은 이들의 미래'
 
  <프레시안>의 이번 '저출산고령화' 기획을 보고 "저출산이 뭐가 문제냐"고 되묻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 우리나라도 인구가 좀 줄어야지, 좁은 땅덩이에 계속 사람이 넘치면 부모는 교육비에 허리 휘고, 태어난 자녀는 피 터지게 경쟁하며 고생할 텐데 누구 좋으라고 애를 낳느냐는 냉소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저출산, 고령화 현상을 두고 인구의 '절대 규모'보다는 '연령구성의 변화'가 끼칠 사회경제적 파장이 더 큰 문제라고 말한다. 자녀를 부양하느라 딱히 모아둔 돈도 없지, 사회보장 체계가 미약하니 연금소득도 없지, 거기에 일자리마저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오늘날 노인들의 고단한 풍경을 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앞으로 특단의 대책을 마련한다면 모르겠지만 이대로 간다면 그런 노인들의 모습은 현재 젊은 세대 대다수의 미래를 보여주는 거울이라는 얘기다.
 
  사실 이러한 '고령자의 구직난'은 우리 사회가 처음 겪는 현상이다. 그간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인구는 주로 농촌에 거주했고, 노인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기에는 노인집단의 규모가 작았다. 한국은 2000년도에 고령화 사회의 문턱을 넘기 전까지는 상당히 '젊은' 개발도상국이었고, 고령층은 누가 고용해주지 않아도 농촌에서, 자영업 현장에서 알아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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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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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활동인구조사』2001 ⓒ통계청

  장지연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 50대 후반 이상 임금노동자의 직종분포를 보면 고위관리자(17.4%)와 단순생산직(59%)으로의 집중현상이 뚜렷하다"며 "향후 대거 쏟아질 도시의 중간관리 사무직 퇴직자들이 갈 곳이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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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활동인구조사』2001 ⓒ통계청

  게다가 고령층 인구의 절대 수는 늘어나는데, 그동안 고령 근로자들을 흡수해 온 농업과 자영업 부분은 계속 위축되고 있다. 앞으로 '도시 임금노동자'들에 대한 일자리 창출이 적극적으로 이뤄지지 않는 이상 이들은 그대로 복지의존도가 심한 고령 실업자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고령층이 이렇게 절박하게 일자리에 목을 매는 것은 '생존'을 위해서다. 김수완 국민연금연구원 연구위원은 "공적 연금 등 다층적 소득보장 체계가 미흡한 한국에서 근로소득의 상실은 그 자체가 곧 생존의 위협"이라며 "선진국과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의 노후 소득구성은 근로소득의 비율이 높고 국민연금 등 공적 이전소득의 비율이 낮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65~69세 가구의 빈곤율이 현저히 높다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노인들은 생계를 위해 고단한 몸을 계속 부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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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경우는 OECD소득분배데이터와 룩셈부르크임금연구소(Luxembourg Income Study, 83년 아시아, 유럽, 오세아니아, 북미의 25개국의 참여하에 설립된 비영리 협동연구소로)에서 인용했으며, 한국은 2000년 통계청 가구소비실태조사에서 산출했다. 여기서 근로소득에는 근로소득, 사업소득, 농립축어업소득이, 공적이전에는 국민연금, 기초생활급여, 실업급여 및 각종 보조금, 사적이전에는 증여, 양도, 사적연금등이 해당된다. ⓒ김수완 국민연금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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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의 근로소득, 공적이전과 65~69세 가구 빈곤율을 비교해본 결과. (r은 두 변량 x와 y 사이의 상관관계를 표현한 계수. 두 변량이 정비례 관계일 때는 r>0, 반비례 관계일 때는 r<0, 그리고 아무 상관이 없을 때는 r=0으로 나타난다.). ⓒ김수완 국민연금연구원 연구위원

  "베이비붐 세대, '산업일꾼'에서 '인구부채'로
 
  지금까지 정부의 노인복지 정책 대상은 기초생활수급자에 그쳤다. 그러나 이제는 인구구조의 큰 변화로 인해 정부가 계속해서 '일부 자립능력이 없는 계층만 국가가 챙길 테니 나머지는 각자가 알아서 하라'는 태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전광희 충남대 교수(사회학)는 "6.25전쟁이 휴전된 1953년부터 정부가 가족계획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직전인 1965년까지 태어난 1000만~1200만 명의 베이비붐 세대는 1970~80년대에 '젊고 값싼 노동력'으로 한국경제를 일으켰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그대로 '인구부채'로 전환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산업일꾼'으로 추켜세워지던 베이비붐 세대는 현재 중년을 넘어서면서 이미 사회로부터 여기저기서 '출입금지 명령'을 받고 좌절하고 있다.
 
  그는 "그래도 한국은 개발도상국형에서 선진국형 인구체제로 가기까지 아직 10~15년의 유예기간이 있다"며 "거대한 베이비붐 세대가 노동시장에서 완전히 은퇴하는 시점이자 1980년대에 태어난 그들의 자식 세대가 노동력의 중추를 이루는 2020년까지 우리는 노동시장과 사회 전반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지 못할 경우 늘어나는 공공지출을 뒷받침하기 위한 조세와 사회보장 기여금의 부담을 둘러싸고 '세대간 갈등'이 빚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고, 1인1표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지속되는 한 현역 노동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위축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임금피크제의 현실 적용에는 여러가지 어려움
 
  방하남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신규진입 부진과 조기퇴직을 특징으로 하는 현 노동시장의 상황이 계속돼 30~50대에 한정된 짧은 근로생애만 허용된다면 한국의 장기적인 경제발전은 힘들다"고 우려했다.
 
  그는 "노후까지 안정된 근로생애를 보장받는 문제는 사실 고령층뿐 아니라 전 세대에 해당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는 특수 직역(공무원, 교사, 군인)만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나 개인적으로 과도한 짐을 지우고 있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고령화에 따른 노동력 공급 감소에 대응하고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보장하기 위한 해법으로 '정년 연장'과 '사회적 일자리 창출'이 거론되고 있다. 지난달 26일 노동부는 '고령자 고용 연장을 위한 임금피크제 도입 지원방안'에 관한 공청회를 열고, 고용보험법 시행령을 연내에 개정해 내년 1월부터 시행할 방침임을 밝혔다.
 
  고용보험기금을 재원으로 연공급이 아닌 성과주의 임금제가 정착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해 운영한다는 것이다. 이는 최저 57세 이상까지 고용을 보장하는 것을 전제로 임금삭감에 노사가 합의하는 사업장에 대해서는 정부가 그 근로자에게 최장 6년간 노사합의로 삭감된 차액의 일부를 지원하는 제도다.
 
  임금피크제는 2003년 7월 신용보증기금을 시작으로 민간 제조업체와 금융회사, 공사 등을 중심으로 이미 13개 기업이 자발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한국생산성본부 경영컨설팅사업부 관계자는 "현재 임금피크제를 도입했거나 도입할 예정인 곳들은 IMF 위기 때 구조조정이 안 됐거나 구조조정의 필요성이 없었던 회사들"이라며 "이런 회사들이 조직 안에서 고령화가 진행되자 이에 대응하는 방법의 하나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근로자의 입장에서는 임금피크제가 일자리 유지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회사에서 임금을 삭감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보고 반발하는 경우가 많고, 사용자들도 임금피크제가 인건비 절감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거나 임금피크제의 적용 대상과 관련 직무의 개발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제도의 좋은 취지와 달리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시행하는 데에는 해결해야 할 어려움이 많은 것이다.
 
  "정부가 창출하는 사회적 일자리가 민간에 정착하려면 장기적 투자 필요"
 
  그렇다면 사회적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은 어떨까. 지난해 초에 개소한 국민연금공단의 노인인력운영센터를 통해 사회적 일자리를 갖게 된 인원은 지난해에 3만5000명이었다. 올해는 이미 상반기에 3만5000명이 넘어섰다고 하니, 사회적 일자리에 대한 폭발적인 수요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올해 이 센터를 통해 일자리를 구한 사람들 가운데 공익형(자연환경 정비, 거리환경 개선, 행정기관 보조 등)은 2만4000여 명, 교육강사형(숲생태 및 문화재 해설사, 종이접기 지도사, 예절 지도사 등)은 8000여 명, 자립지원형(주유원, 주례, 간병인, 가사도우미, 지하철택배 등)은 3100명 등이다.
 
  그러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일자리를 요구하는 노인 구직자가 급증하고 있는 데 비해 정부는 '생계 보조수단 혹은 어르신 역할 찾아주기' 정도로만 노인 일자리 공급사업을 유지하고 있을 뿐 그 이상의 적극적인 대책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노인인력운영센터에서 공급하는 것과 같은 노인 일자리는 실제로 1번 이상 참여하기가 어렵고, 임금의 액수도 월 20만 원(시급 3000~4000원) 정도에 불과해 그야말로 생계보조의 수준이다. 이런 식이라면 2009년까지 노인 일자리 30만 개를 창출하겠다고 한 노무현 대통령의 최근 공언도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국민연금공단 산하 노인인력운영센터 우제광 기획홍보팀장은 "내년 예산을 올해 400억 원에서 100억 더 늘리고 취업기간도 6개월에서 7개월로 늘리기로 했지만 여전히 대기인원에 비하면 부족하다"며 "민간 업계에서 노인들을 활용하도록 정부와 공공기관이 가교의 역할을 해야 하지만, 아직 사회적 인식이나 노인들 본인의 태도 등에서 개선할 점이 많다"고 설명했다.
 
  공공기관의 보조금이 끊겨도 민간에서 일자리가 이어지려면 노인 구직자 본인도 적극적으로 재교육을 받고, 공공기관도 노인 구직자에 대한 재교육을 적극 뒷받침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 팀장은 "재교육에 대한 요구가 실제로 점점 더 커지고 있다"며 "고령층의 학력과 경력이 점점 더 다양해지는만큼 그들이 민간의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려면 재교육 등에서 장기적인 투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지연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고령화 시대의 노동시장 정책 방향으로 ▲유ㆍ무급 자원봉사의 확대와 사회적 일자리 창출 ▲보상ㆍ인사관리 체계의 개선과 연령차별 금지, 평생학습권 보장 ▲취업알선 인프라 구축 등을 제시했다. 그는 "전문ㆍ관리직과 단순노무직으로 크게 양분된 우리나라 고령자 취업시장 상황을 볼 때 자원봉사 조직의 성격과 종류를 다양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문지식을 가진 은퇴노인에게는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에 은퇴했으나 재취업하기에는 기능이 부족하거나 없는 이들에게는 훈련의 기회를 제공하고, 생계를 염려하는 그 다음 계층에게는 공공근로 같은 직접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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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근로생애의 유형은 4가지로 분류된다. ①유형은 예외적 소수로 50대 후반~60대까지 경력을 유지하며 근로소득의 증가를 누리며 ②유형은 평범한 대다수로 중년에 이른 어느 시점에서 근로생애를 정리하고 은퇴 후 근로소득이 완전히 단절된다. ③유형은 일부는 창업이나 비정규 단순직에 재취업에 이전에 비해 현저히 낮은 근로소득으로 생활한다. ④유형은 자신의 능력과 생산성이 절정에 다다른 이후라도 근로시간과 강도를 줄여 낮은 임금으로 근로생애를 연장하는 것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제시된다. ⓒ장지연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이제 12~16년의 정규교육으로 40여 년의 근로생애 유지 불가"
 
  또 연령이 아닌 직무 중심의 보상ㆍ인사관리 시스템의 정착, 연령차별 금지, 평생학습권 보장은 동시에 이뤄져야 효과가 있다. 우리보다 일찍 고령화 사회를 맞은 유럽연합(EU)은 2000년에 회원국의 의무사항으로 성별뿐 아니라 종교, 장애, 연령에 근거한 차별을 금지하는 입법을 하라는 지침을 정했다. 미국은 이미 1967년에 연령차별금지법(Age Discrimination in Employment Act)을 제정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1세기에는 평생학습이 필수적이며 모든 사람이 평생학습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내용의 '만인을 위한 평생학습(Lifelong Learning For All)' 선언을 하기도 했다.
 
  지식과 정보의 양이 폭증하고 그 생성과 소멸의 주기가 빨라지는 사회에서 12~16년의 정규교육 과정만으로는 40여 년에 걸친 근로생애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 게다가 기업은 자체적으로 인적자원을 개발하기보다는 외부에서 필요한 인력을 조달하는 경향을 점점 더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근로자 개개인으로서도 스스로 이직에 대비한 능력과 기술을 배양하기를 게을리할 수 없다.
 
  장지연 연구위원은 "이를테면 자율적 재교육을 위한 '학습휴가제'를 도입하는 방안도 검토해볼 만하다"며 "이와 더불어 노동부의 고령자인재은행, 복지부의 노인취업지원센터, 지자체의 고령자취업알선센터 등 기관별로 분리된 채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는 취업알선 체계를 일원화하고 노인취업 컨설턴트를 육성하기 위한 투자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저출산고령화의 덫 6] 개인재무상담사가 본 '노후준비 풍경'

'오래 살 위험'에 대비하고 계십니까?

이광구/포도에셋 홍보팀장



고령화 문제가 거론될 때면 전문가든 일반 시민이든 공통으로 말하는 게 있다. 돈만 있다고 해서 노후가 행복한 건 절대 아니지만,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이 없는 노후도 절대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후는 누구에게나 생산보다 소비에 치중하는 시기이다. 이런 점에서도 '노후'와 '돈'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일 수밖에 없다. 돈은 행복한 노후에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은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노후와 돈'의 문제는 현실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며 개인적, 사회적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에 대해 (주)포도에셋에서 글을 보내왔다. 1999년부터 급여생활자와 서민을 대상으로 개인재무 컨설팅을 해 온 (주)포도에셋은 이 글에서 서민들의 노후준비 풍경과 노후준비와 관련된 세태의 변화, 국민들의 편안한 노후 보장을 위해 요구되는 국가정책, 개인적으로 필요한 노력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편집자>
 
  편안한 노후, 이제 국가-사회-개인이 함께 설계하자!
 
  톨스토이는 자신이 쓴 어느 단편소설에서 자식은 세 가지 즐거움을 준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어려서는 재롱을 떨고, 커서는 부모를 부양해주고, 부모가 죽고난 뒤에는 제사를 지내준다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말한대로 아이의 재롱은 그 어떤 훌륭한 장난감이나 오락보다 더 큰 즐거움을 준다. 그러나 그런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출산을 감행하기엔 현실이 너무 두렵다. 아니, 출산은 둘째 치고 결혼 그 자체도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시대가 됐다. 늦은 결혼과 저출산은 생활의 기본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젊은이들의 태업'이라고 이해해야 할지 모른다.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아 절에서 기숙하는 생활보호대상자 노인을 상담한 적이 있다. 이 노인은 1000만 원이 넘는 카드사 부채를 안고 있다면서 개인파산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노인의 아들이 카드사에서 대환대출을 받으면서 노모를 보증인으로 세운 탓에 생긴 빚이었다. 이 노부부는 아들의 보살핌을 받기는커녕 아들의 빚을 대신 떠맡아 해결해야 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이런 지경까지는 아닐지라도, 노후에 자식이 자신을 부양해주기를 바랄 수 있는 것은 이제 옛이야기가 됐다.
 
  그나마 현재의 노인들은 다행이다. 아직은 자녀들이 노부모에게 적은 금액이나마 용돈을 드리는 경우가 많다. 사회생활을 하는 자녀의 숫자도 보통 셋 이상이어서 노부모 부양의 부담이 어느 정도 분산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현재의 40대가 은퇴하게 될 20여 년 뒤에도 그럴까? 20여 년 뒤의 노인들에게는 자녀가 대개 하나나 둘뿐인 경우가 많을 것이다. 게다가 그 자녀들은 늘어난 세금과 경제성장의 정체로 인해 자기 앞가림 하기도 바쁠 것이다.
 
  더구나 지금 장년층인 사람이 자식이 주는 세 번째 즐거움이라고 톨스토이가 말한 '죽은 뒤의 제사'를 진실로 기대한다면, 그는 너무 낙관적이거나 환상 속에서 사는 사람일 것이다. 현재의 40~50대는 아직 제사 지내는 일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아서 실감하지 못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죽은 뒤에 제사 상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리라.
 
  이렇게 본다면, 이제 우리의 전통적 가족체계는 노후를 보장해줄 적절한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게 분명해진다.
 
  이것이 반드시 생활형편이 어려운 사람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100억 원 가까운 재산을 가진 노신사를 상담한 적이 있다. 이 노신사는 인생을 즐겨야 할 연세였고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재산도 갖고 있는데 계속 부동산 투자를 하려고 했다. "투자를 하는 고생을 왜 계속하죠?" 노인은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인생을, 특히 노후를 즐기면서 편안하게 보내야 한다는 생각은 살아오면서 전혀 해본 적도 없었을 터였다. 쉬지 않고 죽을 때까지 계속 벌지 않으면 불안한 것일 게다.
 
  이 노신사만 그런 것이 아니다. 40대 후반의 치과의사도 역시 비슷했다. 이 치과의사는 한 달에 벌고 쓰는 돈이 1000만 원이 훨씬 넘는데도 계속 더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쫓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번 잘못 투자해 손해를 보고, 그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무리하게 투자를 하다가 완전히 망가지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돈이 많건 적건 돈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갖지 못하고 돈에 끌려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노후 문제의 해결전망을 어둡게 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오래 살 위험'에 대비해야 하는 시대
 
  보험용어에 '갑자기 죽을 위험'과 '너무 오래 살 위험'이라는 게 있다. 예전에 어른들이 농담처럼 "에고,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면 안 되는데…"하곤 했는데, 바로 그렇게 될 위험이 이제는 현실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요즘 언론에서도 노후대비 문제를 기사로 다루는 일이 잦아졌다. 대기업이나 공기업들도 은퇴예정자들에게 노후에 대비한 개인 재무설계에 대해 교육을 이미 실시하고 있거나 준비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수자원공사의 은퇴예정자들을 상대로 교육을 하다가 물어보았다. "퇴직 후 생활비가 얼마나 필요할까요?" 부부를 합쳐서 보통 삼사백만 원이라는 대답이 많았고, 오백만 원 이상이라고 대답하는 이들도 있었다. 노후에 해외여행 다니고 골프도 즐기려면 그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국민연금 수령액은 많아야 100만 원 안팎이다. 그렇다면 부족한 돈을 어디에서 마련해야 하나? 수자원공사 은퇴예정자들이 가장 크게 기대하는 추가수입원은 부동산 임대수익이었다. 그러나 부동산 투자와 같은 직접투자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포스코의 은퇴예정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기업들의 은퇴예정자들도 예전보다 길어져 대개 20년 이상 계속될 노후에 대해 불안해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 돼버렸다. 우리 사회와 각 개인은 미처 준비하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노후의 기간이 부쩍 늘어나 버렸다. 전통사회에서 가장 듬직한 버팀목이었던 가족제도는 이제 더 이상 믿을 만한 의지처가 아니게 됐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나마 간간히 모아놓은 목돈을 축내는 위험요소로 작용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퇴직금을 축내는 가장 위험한 적은 바로 자식"
 
  "수십 년 고생해서 모은 퇴직금을 축내는 가장 위험한 적은 바로 자식입니다." 노후준비에 관한 교육 현장에서 이런 '불순한 표현'을 과감하게 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사실 퇴직금만이 아니다. 토지보상금이나 재해보상금 등을 손에 쥐게 되더라도 마찬가지다. 댐 공사로 몇억 원의 보상금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2~3년 안에 그 돈을 거의 다 날리는 경우가 많다. 자식이나 친지들이 손을 벌리는 것을 도외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저런 이유로 가진 돈이 별로 없는 부모세대를 자식과 사회가 끝까지 책임져주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데 있다. 그러니 이제는 과거와 달라진 부모자식 관계의 현실을 부모세대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은 물론이고 과거보다 길어진 노후를 대비해 스스로 해결책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해나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를 둘러싼 금융환경이 지난 10년 사이에 크게 달라져 버렸다. 퇴직금이나 보상금을 은행에 묻어두고 또박또박 이자를 받을 수 있었던 시절은 이제 잊혀진 지 오래다. 그래서 선진국 방식의 생애에 걸친 재무설계가 필요한 시대가 됐다. 이런 맥락에서 재산을 자녀에게 상속하거나 증여하는 방식도 재고돼야 한다.
 
  그나마 퇴직금이나 모아놓은 재산이 있는 경우는 다행이다. 대부분의 서민들은 아직 노후설계에 대한 개념조차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 이미 노인복지가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데, 현재의 40~50대가 앞으로 본격적으로 은퇴하게 되면 노인복지는 더욱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것이다. 이는 기대수명이 늘어나 노후가 길어진 탓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IMF 외환위기 이후에 고용불안이 심화된 탓도 크다.
 
  외환위기 이후에 정리해고 요건을 완화하고 비정규직 등 불완전 고용을 확대해 온 정부의 노동시장 정책이 옳았느냐 틀렸느냐는 여기서 논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런 방향으로 노동시장 정책을 실시해 왔다면 그에 따른 부작용을 흡수하고 완화할 제도적 뒷받침도 함께 해야 했다는 말은 여기서 해둬야겠다. 미국의 노동시장이 유연하다고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노동시장에서 탈락한 사람들이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인 파산신청이 한 해에 수십만 건에 달하는 게 미국 사회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겨우 지난해 하반기부터야 파산신청의 유용성이 조금씩 인식되고 있는 정도이며, 아직도 수백만 명이 신용불량자로 남아 있다.
 
  개인의 노후는 단지 개인만이 책임져야 할 것이 아니다. 사회와 국가 차원에서 국민의 노후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
 
  노후보장의 기본토대는 국가와 사회가 보장해야
 
  필자가 일하는 회사는 5년 넘게 중산층과 봉급생활자들을 주 대상으로 생애재무설계 컨설팅을 해 왔다.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것 중 하나는 지방 고객에 비해 서울 고객에 대한 재무설계가 훨씬 어렵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서울에서는 주거비 지출비중이 지나치게 크다는 데 있다. 이런 주거비 부담 때문에 가계재정에서 노후설계를 위한 재원을 마련하는 데는 많은 한계가 있다.
 
  서울에 사는 30대 후반이며 대기업 사원인 한 고객은 경제적인 여유가 충분히 있는데도 주택구입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이 사람은 전세금으로 1억400만 원을 갖고 있었고, 금융자산도 1억6000만 원 정도 있었다. 이 금융자산은 자신과 부인 명의로 여러 저축은행에 5000만 원에서 조금 모자라는 액수만큼씩 예금돼 있었다. 5000만 원까지는 예금보호가 된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었다. 그리고 예금해놓은 금융자산에서 나오는 이자는 가장 이자율이 높은 신협 적금에 불입하고 있었다.
 
  이 부부는 금융기관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는 점을 잘 알고 있었고, 각 금융기관의 이점을 충분히 다 활용하고 있었다. 비과세, 세금우대, 소득공제는 기본이었다. 그런데 이 부부는 남들은 다 고민하는 주택구입 계획은 갖고 있지 않았을까? 노후에 자기 집 없이 전세 등 임대로 살려면 그만큼 주거비가 많이 들텐데.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주택구입 자금 설계는 왜 안 하시죠?" 대답은 너무도 간단했다. 부친이 갖고 있는 부동산이 많았다. 그러나 이 부부의 사례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고 대부분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같은 월소득(350만 원)을 갖고 서울과 지방에서 각각 사는 두 가정의 재무상황을 비교해보자. A가정은 서울에서 4억 원짜리 주택을 구입하고, 구입대금 중 절반인 2억 원을 20년 동안의 원리금 균등상환 조건으로 대출받았다고 하자. 이 가정은 매달 132만 원을 갚아야 한다. 여기에 매달 18만 원의 보험료까지 납입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가정은 단기, 중기, 장기 재정대책을 전혀 세울 수가 없다.
 
  B가정은 지방에서 비슷한 평수의 아파트를 1억 원에 구입하고, 구입대금의 절반인 5000만 원을 20년 동안의 원리금 균등상환 조건으로 대출받았다고 하자. 이 가정은 A가정에 비해 주거비가 적게 들기 때문에 단기, 중기, 장기 재정계획을 충분히 세울 수 있다. 여기서 장기계획은 물론 20~30년 후를 내다보는 노후준비일 것이다.
  
<주택구입에 따른 비소비성 지출 비교>
(단위 : 만원)
수입
소비성지출
비소비성지출
A(2억원 대출)
B(5천만원 대출)
350
200
150
대출상환
132
33
보험
18
18
단기저축
0
29
중기저축
0
40
장기저축
0
30

  "결혼 안 하는 게 최상의 재테크...능력 있는 배우자 만나든지"
 
  노후준비를 할 때 고려해야 할 것 중에 공적 부조의 대표격인 국민연금이 있다.
 
  한 벤처기업 사장이 이런 농담을 했다. "가장 훌륭한 재테크가 뭔지 압니까?" 그가 말한 '정답'은 "결혼하지 않는 것'이었다. 결혼비용과 자녀양육비 등이 엄청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기도 했고, 40대 초반에 결혼하지 않은 자신의 처지를 빗댄 우스개소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웃고 넘어가기엔 서글픈 우리의 현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반대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30대 중반인 한 회사원은 교육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재테크 할 능력이 없어서 능력 있는 배우자를 찾았습니다." 현직 여교사와 결혼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공무원이나 교원연금이 일반 국민연금보다 수익률이 훨씬 높다는 점을 고려한 결심이었다. 정부 관리들이 자신들의 노후를 보장할 공무원연금 등에 대해서는 국고지원을 충분히 하는 반면 국민연금에 대해서는 차별적으로 지원하면서 국민연금을 개선하겠다고 하는 말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위에 언급한 주거비 부담 완화와 국민연금 개선과 더불어 교육비와 의료비에 대한 사회적 최저선 보장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편안한 노후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기본조건이다. 민주노동당에서 주장하는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때라고 본다.
 
  반면, 의료시장과 교육시장의 개방과 경쟁체제를 골간으로 하는 정부의 방침이 과연 서비스의 질 개선과 대중적 생활보장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달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중산층의 몰락과 양극화를 초래해 사회 재생산구조 자체를 심각하게 훼손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제는 우리도 '금융교육' 시작할 때
 
  이런 기본적인 사회기반을 갖추는 일과 더불어 간과할 수 없는 게 금융교육이다. 학교의 경제교육이 부족하기도 하지만, 그나마 있는 경제교육은 거시경제를 다룰 뿐이다. 거시경제는 사실 일반 개인보다는 전문가에게만 중요한 문제다. 거시경제가 아니라 실생활에 필요한 돈 문제를 배워야 한다. 그런데 학교에서 돈 문제를 배웠다 해도 그것은 돈을 버는 문제일 뿐 돈을 쓴다거나 장기설계에 관한 관점과는 먼 얘기다.
 
  미국의 통계를 보면, 금융교육을 받은 성인의 저축률이 8.5%인 데 비해 금융교육을 받지 않은 성인의 저축률은 7.0%다. 파산율이 높은 주의 학생들이 받은 평균 금융점수는 53.6점인 데 비해 파산율이 낮은 주의 학생들이 받은 평균 금융점수는 70.3점이다. 이런 통계를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면, 학교와 사회에서 금융교육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낄 것이다.
 
  미국과 영국 등 선진국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국민들에게 투자교육을 비롯한 금융교육을 실시해 왔다. 이웃 일본에서는 5년 전부터 투자교육이 중요한 과제로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2002년부터 기업연금이 도입되면서 그 필요성에 대한 자각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내년부터 기업연금이 시행(유예기간이 있기는 하지만)될 예정인데다 금융환경이 복잡해지고 있다. 게다가 길어진 노후에 비해 사회복지나 소득(고용)은 불안정하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우리나라에서도 개인에 대한 투자교육과 금융교육을 강화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본다.
 
  젊어서부터 생애재무설계 시작해야
 
  포도에셋에서 백화점 문화센터에 나가 강좌를 하는데, 우리 강좌도 재테크 코너에 분류되었다. 재테크가 아니라 재무설계라고 말해줘도 막무가내였다. 재테크는 상품의 이점을 쫓아가는 것이고, 재무설계는 인생의 재무목표를 미리 설계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보기도 했지만 설득이 쉽지 않았다.
  
<재무설계와 재테크의 차이>
재무설계
재테크
선택동기
장기 목표 달성
(주택, 학자금, 노후자금 등)
상품의 이점
(저축 이자율, 펀드 수익률 등)
심리상태
안정감(일관된 목표 관리)
불안감(고수익 시류 쫓아가기)
결과
가정경제 안정
중도포기 또는 부채증가
미래의
사회
성숙한 사회
갈등과 반목의 사회

  그런데 문화센터 관계자의 반응이 흥미로웠다. "재테크 강의를 들은 주부들의 반응은 보통 뭔가에 쫓기는 심정이 되는 것이죠." 남들이 다 앞서 나가고 있는데 자신만 뒤처지는 것 같다는 얘기다. 그런 불안감과 욕심이 자칫 실수를 불러 가정에 화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대다수 중산층과 봉급생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남보다 앞서기 위한 재테크가 아니라 차분한 생애재무설계다.
 
  요즘 정부에서 부동산투기를 잡겠다고 한다. 그러나 전 국민이 남보다 앞서 투기나 재테크를 하려는 마음이 앞선다면, 아무리 세금정책을 앞세워 단속한다 한들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단속에 앞서 올바른 재무설계 문화를 강조하는 사회적 캠페인이 필요하지 않을까?
 
  개인재무설계에 대한 관점이 일찍부터 자리잡은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사회에 진출한 뒤 첫 직장에서 번 소득의 12%를 노후설계 자금으로 할당한다고 한다. 다른 문제도 마찬가지이지만, 노후설계도 일찍 할수록 유리하다. 한 예로 보험상품의 경우 복리효과가 있기 때문에 다른 금융상품보다 장기설계가 더욱 유리한 측면이 있다. 또 미리미리 설계하면 적은 돈으로도 노후를 준비할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노후설계를 하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재무설계를 단지 금융적인 문제로만 본다면 미혼일수록 쉽다. 그러나 재무설계가 가장 어려운 층은 미혼들이다. 그들은 장기적인 재무문제에 대한 인식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재무설계가 왜 필요한지, 노후를 왜 미리 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없다.
 
  개인이 부정하려고 해도 이미 현실은 달라졌다. 길어진 노후와 복잡해진 금융환경, 그리고 미흡한 공적부조 하에서 어차피 우리는 이제 각자가 스스로 알아서 자신의 노후를 설계해야 한다. 최선의 방책은 미리미리 하는 것이다. 각 개인이 노후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국민 전체의 노후 문제와 관련해 사회와 국가에 제기되는 다음과 같은 요구의 목소리도 한층 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내가 혼자서 아무리 애써도 잘 되지 않는다. 집 문제, 의료 문제, 교육 문제는 국가가 나서서 해결하라!"




[저출산고령화의 덫 7] 노년복지 전문가가 말하는 '행복한 노후'

"노년, 돈 있다고 행복할 줄 아세요?"


상상: 노인들, 세상에서 모두 사라지다
 
  이제 세상에는 노인들이 단 한 명도 남지 않았다. 65세 이상 노인들이 한꺼번에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자식들과 같이 살던 노인도, 쪽방에서 힘겹게 연명하던 노인도, 사이좋게 살던 노부부도, 최고급 실버타운의 부유한 노인도, 무료양로원의 가난한 노인도, 치매요양원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던 노인도, 한끼 점심을 위해 이른 아침부터 무료급식소 앞에 줄서 있던 노인도, 모두 동시에 그리고 완전하게 사라져버렸다.
 
  넘치는 실종신고에 경찰 업무는 마비됐고, 신문과 방송은 연일 특보를 내보내며 수선을 떨었다. 갑작스레 효자 효녀가 된 사람들은 눈물 콧물 섞어가며 부모님을 그리워하고 자신들의 불효를 고백했다. 온 나라가 눈물바다로 변했고 엄청난 충격에 휩싸여 휘청거렸다. 그러나 슬픔은 얼마 못 가 사라지고 대신 노인들이 남기고 간 집과 땅과 재산을 놓고 자녀들 간에 싸움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여기저기서 칼부림하는 사태도 이어졌다.
 
  그러나 곧 세월은 흐르고 어느덧 노인이 사라진 세상에 적응이 된 사람들은 이제 모두 편안해 보였다. 솔직히 너나 할 것 없이 홀가분하고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노부모 부양의 고민도, 허리가 휘는 수발 걱정도 깨끗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노인복지 예산은 젊은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수정 배분됐고, 노인복지관과 양로원, 요양원은 모두 어린아이들과 청소년, 중장년층을 위한 여가시설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무 문제 없이 편안히 잘 살아가던 사람들이 갑자기 알 수 없는 불안에 휩싸인 것이다. 내 부모님도 어느 때가 되면 말 한마디 없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눈앞에서 자취를 감춰버리는 것 아닐까? 그럼 나도 노인이 되고 나서 어느 날 가진 것 모두 내려놓고 갑자기 사라져 버린단 말인가?
 
  사람들의 불안은 걷잡을 수 없는 공포로 이어졌고, 너도 나도 노인이 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찾아 헤매는 지옥 같은 나날이 시작됐다. 그제야 사람들은 지난 시절의 노인들을 기억해냈다. 젊음이 주인인 세상에서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짐이었던 그들을 찾아내야, 그들이 간 곳을 알아내야, 앞으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될지를 알아낼 텐데….
   

  "모두들 노년이 된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어 해"
 
  1990년대 초반에 7여 년간 일하던 CBS 아나운서직을 그만두고 15년째 노인복지 분야에서 활동해 온 유경(45) 씨가 최근에 펴낸 <마흔에서 아흔까지>라는 책에서 풀어놓은 상상이다. 유 씨는 "노인이 하늘에서 떨어진 거 아니다. 너희들도 안 죽으면 여기에 와. 지금 노년의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면 나중에 젊은 세대가 그 영화를 누리는 거야"라는 70대 어르신의 읊조림을 전한다. 그러면서 그는 "많은 젊은이들이 나이듦과 노년을 외면하고 싶어 한다"고 안타까워했다.
 
  "40~50대들은 보통 '내 아이 기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노인 부양에 내 노후 문제까지 신경 써? 어휴, 관둬라 관둬'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냥 지금 사는대로 살아가면서 저축이나 좀 하면 되겠지'하죠. 노년을 내 삶의 문제로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거죠. 노후엔 최소 4억이 필요하다느니, 해외여행까지 하려면 10억은 필요하다느니 하는 언론보도를 보는 건 스트레스죠."
 
  유경 씨는 특히 돈이면 행복한 노년이 저절로 보장되는 것처럼 이야기되는 사회풍조에 대해 우려했다. 노인복지의 현장에서 수많은 노인들을 지켜본 그가 느끼기에는 "돈이 행복한 노후를 위한 충분조건도 아닐 뿐더러 그렇게 많은 돈을 준비할 수 있는 사람도 얼마 안 된다"는 것이다.
 
  "이제는 젊은 세대가 노년의 문제를 내 삶의 문제로 느끼고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합니다. 노년이 공포가 되지 않도록 말이죠. 노인들이 일을 하고 자원봉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인프라도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노년에 취미생활을 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젊었을 때부터 그렇게 할 수 있는 훈련을 시작해야 가능한 일이죠."
 
  1990년대부터 노인복지 분야에 종사해 온 유경 씨는 노년을 둘러싼 세태변화를 확실히 느낀다.
 
  "우선 각종 노인복지시설의 수가 부쩍 늘었어요. 노후준비에 대한 중장년층의 관심도도 크게 높아졌지요. 예전에는 강의 요청도 주로 노인대학에서 왔지만 이제는 중장년층에서도 점점 더 많이 와요. 재취업과 노후준비에 대한 강의 요청이죠. 피부로 느껴져요."
 
  "말 붙이니 이렇게 좋아하시는 어르신 모습에 짠해…"
 
  10월 26일 오전 9시. 유경 씨가 성동종합복지관에 모여든 20여 명의 케어복지사 과정 수강생들에게 자신이 느끼는 우리나라 노년의 문제와 노년과 관련된 세태를 이야기하자 수강생들 대부분이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케어복지사는 노인을 돌보는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개발된 민간자격이다. 케어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은 낮 시간대에 치매노인을 돌보는 시설이나 노인들을 위한 요양원 등에 취업할 수 있다.
 
  케어복지사 과정 수강생들은 '주위 노인 관찰하고 말 붙여보기'라는 숙제를 실습으로 한 뒤 그 과정에서 자신이 느낀 바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발표를 하는 수강생이나 듣는 수강생이나 눈빛이 진지하긴 마찬가지였다. 수강생 중에는 40~50대 여성이 가장 많았지만 간간이 20~30대 여성도 보였고, 남성도 두어 명 눈에 띄었다.
 

  "숙제 때문에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았어요. 솔직히 냄새가 좀 나데요. 용기를 내어, 옆에 앉아 계신 할머니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어디 가세요?'하고 물었죠. 당황스러울 정도로 너무 좋아하시더라구요. 그때부터 쉴새없이 말씀을 하시더군요. 건너편 자리에 앉아 계시던 할아버지도 말을 걸어주길 바라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시는 거예요. 마음속으로는 그 할아버지에게도 '건강은 어떠세요'하고 여쭙고 싶었지만, 그러다가는 집에도 못 가겠다 싶어 인사만 드리고 지하철에서 내렸어요."
 
  "버스 안에서 80대로 보이는 한 할아버지가 우체국을 찾으시더라고요. 운전사를 포함해 버스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정류장을 가르쳐드렸는데도 믿지 못하고 자꾸 다시 물어보는 거예요. 나중엔 운전사도 짜증을 내더군요. 그 할아버지는 왜 그리 다른 사람 말을 믿지 못하시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수강생들 가운데 대다수는 사소한 말 걸기 하나에도 너무나 기뻐하는 노인들의 모습에 뿌듯하고 짠한 기분을 느꼈다고 토로했지만, 일부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노인의 행동을 이야기했고, 어떤 이는 노인이 사과를 먹다가 기도가 막히는 바람에 순식간에 죽는 모습을 목격했던 과거의 경험담을 털어놨다.
 
  이어 유경 씨가 '노년의 특성'에 대해 강의하기 시작했다.
 
  "노년의 가장 큰 고통은 빈곤, 즉 경제적 문제이고, 두 번째가 건강, 즉 몸이 아프다는 문제이고, 세 번째는 역할이 없다는 것, 즉 할 일이 없다는 문제이고, 네 번째는 고독과 소외입니다. 자식이 보험이 아닌 세상이 되어 이제는 생존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어르신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점점 노인을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대하지 않고 그저 짐으로만 여기고 있어요. 경제활동인구가 자꾸 줄어드는 상황이기도 하니 노인들을 뒷방에서 끌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은퇴 시기를 늦추고, 일에 대한 우리의 인식 또한 바뀌어야 합니다."
 
  여기저기서 '맞아, 맞아'하는 속삭임이 들린다. 강의를 듣던 김인자(47) 씨는 "성당에서 자원봉사를 하다가 흥미가 느껴져서 이곳에 왔는데, 듣다 보니 만만찮은 일인 것 같아 좀 두렵다"며 멋적게 웃었다. 권순옥(50) 씨는 "케어복지사가 되지 못하더라도 강의를 들으며 내 노년을 준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허은영(41) 씨는 "얘기를 들어보면 케어복지사는 간병인과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간병인이라면 병원에서도 무시받는 일이 많은데, 직업으로 갖기엔 약간 망설여진다"고 털어놨다.
 
  "이제 세대별 '노년 이해 교육' 필요하다"
   

  유경 씨는 "지난 15년 간 노인복지시설 등 양적인 면에선 노인복지가 확대됐다고 하지만, 노인복지 정책이 여전히 '빈곤노인' 중심이다. 게다가 사회복지사에 대한 처우 또한 열악해 노인복지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양질의 인력이 길러질 기회가 제한돼 있다"며 "아직도 복지사라고 하면 전문가가 아닌 '무급 봉사자'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한국이 급격하게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지만 노인은 더불어 살아가야 할 사람이기보다는 부양과 지원의 대상이자 사회적 짐이라고 보는 시각이 여전히 지배적이라는 것이다.
 
  유경 씨는 또한 "한국처럼 속도가 빠르고 젊은이들 중심의 사회에서는 세대별로 노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유치원 아이들한테는 왜 할아버지 이마에 주름이 많은지, 초등학교 아이들에게는 왜 할머니가 의치를 끼는지, 중고교생들에게는 사람의 노화는 어떻게 이뤄지는지에 대해 체계적으로 이해시킬 필요가 있어요. 그러나 단순한 커리큘럼만으로는 안 되죠. 만나고 소통해야 합니다."
 
  유경 씨는 실제로 초등학교의 방과 후 교실, 중학교 특기적성 교실의 포크댄스반 등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와 손자, 손녀 세대와의 만남을 시도해보고 있다고 말했다. 처음엔 서로 어색한 분위기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서로를 배워가며 가까워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서로 같이 살아가는 존재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면 우리 사회에서 노인들은 딴 나라 사람들이 될 겁니다. 나는 평생 안 늙을 것 같죠? 그러나 나이듦과 싸워 이기는 장사 있습니까?"
  
"멋있는 노년은 스스로 만들어야지"
 
  "나이 들면 물론 돈이 중요하죠. 그런데 늙어가면서 마음가짐을 바로 가져야 가진 돈도 잘 쓸 수 있지. 돈은 두 번째야. 돈 없이 잘 사는 노인도 있지만 돈이 있어도 못 사는 노인도 많거든."
 
  대한민국 노인들의 사정과 속내를 적나라하게 그려낸 <아름다운 노년을 위하여 (2000)> <실버들을 위한 유쾌한 수다(2003)>을 연달아 펴내고 현재 KBS 라디오의 <출발! 멋진 인생>에서 노년상담 코너에 출연 중인 고광애 씨를 만났다.
   

  60대 중반을 넘어선 자신을 노년이 아닌 '신중년'이라 부르는 그는 영화 <바람난 가족>을 만든 임상수 감독의 어머니이자 90대 노모를 모시는 '노노(老老)부양'의 실례이기도 하다. 출산과 육아를 위해 1년 남짓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경험이 있는 그는 품안의 자식들이 다 제 갈길을 찾아나선 50대 어느날 문득 "자식들만 바라보고 살아온 나 자신이 두려웠다"고 했다.
 
  "50대 이후에 집중적으로 노년에 관한 공부를 했지. 연구라고까지 이름 붙이긴 뭐해도 독서 수준을 넘어서는 공부였지. 그때 친구들이 코웃음쳤어요. 어차피 늙는 거 공부하나 안 하나 늙는데 뭣하러 공부하냐고. 근데 내 생각은 어차피 늙는 거라면 준비하고 즐겁게 맞이하자는 거지. 일, 취미생활, 건강도 그렇고. 혼자서 잘 지내는 연습도 그렇고."
 
  "돈 없이도 행복한 노년을 보낼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부자 노인들이 보통 교만한 경우가 많아요. 돈이면 다 된다는 거야. 손자들한테도 몇 백만 원짜리 장난감도 사주고.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손자손녀하고 진정한 교류가 없으면 그것도 사줄 때뿐이야. 그리고 돈 많은 노인이 있는 집 치고 분쟁이 안 일어나는 경우가 별로 없어요. 자식들이 어지간히 똑똑치 않으면 다 유산을 바라거든."
 
  고 씨는 '회심(回心, 마음을 돌려먹음)'을 강조했다. "한마디로 나이 먹어서는 젊었을 때처럼 아둥바둥하지 말고 좀 고상하고 초연하게 마음을 돌리라는 거죠. 이건 남자들이 특히 필요한데, 우리 시대는 남자들이 바깥 일만 해야 잘난 남자잖아. 늙어서 집에 들어오면 자기 자리가 없는거야. 엄마와 자식들은 똘똘 뭉쳐 있고. 고독하고 슬프지. 잔소리만 늘어나. 내 친구들만 해도 영감 잔소리 때문에 다 죽으려고 해(웃음). 퇴직하고 시간은 많은데 할일은 없으니 짜증이 나고 우울증에 걸리는 노인들이 많아요. 늙기 전에 공부도 많이 하고 자기는 늙어서 뭐를 할지 고민을 많이 해야 해."
 
  고 씨는 '젊은 세대'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젊은이들이 "노년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거였다.
 
  "노인들이 자기 늙는 것을 모르기도 하지만, 젊은 애들이 노인 모르는 건 말도 못 해요. 홀로 된 부모는 배우자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게 대표적인 사례지. 이성들 찾고 생각하는 거 노인들도 여전하더라구. 재혼은 아니지만 천하 없어도 애인은 있어야 된대, 아니 갖고 싶대! 하다못해 나이 들어도 돈 많은 할아버지가 인기있고, 젊고 예쁜 할머니가 인기 있다니깐. 너무 똑같아요."
 
  "늙으면 호기심이 없어진다지만 호기심도 개발할수록 길러지는 것 같다"는 고씨는 "지금도 신문 4개 보랴, 영화보러 다니랴,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많아 바쁘다"고 했다. 요즘 그의 화두는 '죽음'이다. 어차피 맞이하는 늙음이라면 기꺼이 맞자는 생각의 연장선상이다.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한 달에 한번 있는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죽음회' 모임에 가야 한다며 잰걸음을 옮기는 그에게 "활기찬 모습이 멋져요. 해주신 말씀에 공감이 가네요"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나 화성에서 온 사람 아니야!"

유경 씨가 말하는 '노년의 유형'과 '일 잘하고 잘 놀기 위해 배워야 할 10가지
 
  노년이 되면 달라지는 것을 중심으로 보면 노년의 특징을 10가지로 간추려볼 수 있다.
 
  1. 몸이 변한다.
  2. 시각ㆍ청각ㆍ미각ㆍ후각이 전체적으로 둔해진다.
  3. 기억력이 많이 떨어진다.
  4. 노년에도 사랑과 성이 존재한다.
  5. 우울증 경향이 늘어난다.
  6. 융통성이 없어지고 경직성이 증가한다.
  7. 자꾸만 과거를 돌아본다.
  8. 친숙한 물건에 대한 애착이 심해진다.
  9. 자기중심적이 되기도 한다.
  10. 그러나 노인이라고 다 같지는 않다.
 
  유경 씨는 "마지막 열 번째가 중요하다. 우리는 흔히 어르신들을 '노인'이라는 하나의 범주에 가두려고 하지만, 아이들이나 청소년이 각기 다 다른 것처럼 어르신들도 다 같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가 말하는 대표적인 노년의 유형 10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열혈 청년형: 나는 늙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에게나 다른 이에게나 계속 강조하며, 하던 일에서 절대 물러나려 하지 않는 유형.
  2. 무감각형: 살아 온 날들이 워낙 신산스러워 아무런 희망도 의욕도 없는 유형.
  3. 산타클로스형: 자신의 돈, 시간, 정성, 재능, 마음을 주위에 골고루 나눠주는 유형. 자원봉사를 많이 한다.
  4. 조로(早老)형: 어차피 늙어갈 인생, 별 거 있겠냐며 지레짐작으로 노년을 앞당겨 맞아들이는 유형. 남은 인생에 대한 계획도 청사진도 있을 리 없다.
  5. 응석형: 자녀, 친구, 주위사람에게 끊임없이 어리광을 피우며 자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유형.
  6. 밑빠진 독형: 돈 욕심, 자식 욕심이 너무 강해 '고생해서 키웠으면 이 정도는 받아야지' 하며 욕심을 못 버리는 유형.
  7. 겨울나무형: 군살도 욕심도 없이 마음을 비우며 누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묵묵히 깨끗하게 인생을 마무리하는 유형.
  8. 내 마음대로 형: '나를 따르라'형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돈 있고 힘 있는 노인들 가운데서 흔히 발견된다. 스스로가 대화의 기회를 차단해 외로움만 남는 경우가 많다.
  9. 답답형: 무슨 일이든 자기 방식밖에 모르며 늙음이 자격증이라고 생각하는 유형. 노년의 외로움은 따놓은 당상이다.
  10. 잘 익은 열매형: 자신의 노화를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유형. 잘 익은 열매를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남에게 나눠주기도 하지만 안으로 파고드는 성찰로 자기 내면을 성숙하게 만들어 주위 사람들의 귀감이 되기도 한다.
 
  독자들은 어떤 유형의 노년을 맞이하고 싶으신지? '일하는 노년을 위해 기억해야 할 10가지'와 '노년에 잘 놀기 위해 배워야 할 10가지'가 소개한다.
 
  일하는 노년을 위해 기억해야 할 10가지
 
  1. 노년기의 일은 생존의 문제와 직결돼 있다.
  2. 일을 통해 쓸모 있는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다.
  3. 일은 노년의 신체적ㆍ정신적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
  4. 노년에 일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현재를 살게 하기 때문이다.
  5. 일을 통해 우리는 사람을 만난다.
  6. 노년에도 일을 하려면 철저한 자기평가가 필요하다.
  7. 일에서 은퇴할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
  8. 남은 인생동안 무엇을 하며 살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9. 평생 하고 싶은 일을 찾으면 인생이 행복하다.
  10. 자원봉사는 멋지고 아름다운 노년생활을 책임진다.
 
  노년에 잘 놀기 위해 배워야 할 10가지
 
  1. 내게 맞는 취미와 여가활동을 찾자.
  2. 어떤 활동이든 꾸준히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3. 여가활동도 일찍부터 배우고 훈련한 사람이 잘한다.
  4. 혼자 하면서도 여럿이 함께 할 수 있는 활동이 좋다.
  5. 배우자와는 따로 하다가 같이 하다가 하는 것이 좋다.
  6. 혼자 놀기를 즐겨라.
  7. 다른 세대와 어울리자.
  8. 내 식대로 즐긴다.
  9. 사회적 여가에 눈을 돌리자.
  10. 취미나 여가활동을 배우는 데 너무 늦은 때란 없다.
 
  유경 씨는 "역시 죽을 때까지 사람을 지탱해주는 것은 사랑과 일"이라며 "그 누구도 나를 위해 일거리를 찾아주지 않으므로 스스로가 팔을 걷고 나서서 할 일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노는 것도 배워야 잘 놀 수 있다"며 "노년기에 불가피하게 부여받게 되는 여가를 어떻게 즐길 것인지에 대한 그림을 미리 그려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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