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시원, 만주] 동아시아 네트워크, 발해의 길(1)
말갈은 나라 아닌 동북방 주민 통틀어 부르는 말
신라인이 발해의 일본사신 통역…고구려 말 방증 - 중국 역사서 <구당서>에도 대조영은 ‘고려별종’



사극 ‘대조영’이나 서태지의 ‘발해를 꿈꾸며’ 통해 더 친숙

발해는 한국방송의 사극 ‘대조영’이나 가수 서태지의 ‘발해를 꿈꾸며’를 통해 국민에게 더 친숙하게 알려진 것이 사실이다. 나는 1996년부터 누리집(www.palhae.org)을 만들어 발해를 알리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서태지의 노래의 힘이 더 컸고, 대조영 사극의 영향이 더 컷 던 것을 인정한다.

발해사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발해사가 왜 한국사인가’라는 것을 규명하는 작업부터 출발한다. 이는 ‘고구려사가 왜 한국사인가’라는 물음과도 맥이 닿는다. 그만큼 고구려와 발해가 밀접하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맞서 우리는 ‘고구려와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 아닌 근거’를 밝혀내야 한다.

고구려를 한국사로 볼 수 있는 근거는 명확하다.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 등에 기록이 남아 있고, 이미 체계적인 연구가 진해돼 왔다. 그러나 발해는 사정이 좀 다르다. '고구려본기'와 같은 명확한 근거와 기록이 없다. 당나라 입장에서 기록한<구당서>와 <신당서>의 북쪽 오랑캐 열전의 하나인 ‘북적열전(北狄列傳)’에 실린 것이 고작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서술한 역사책을 중심으로 발해사를 복원하다 보니, 80년대부터 “발해는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는 주장이 터져나온 것이다. 소위 ‘동북공정’이라는, 중국의 소수민족 역사정책이 그것이다. 발해는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을까? 아니면 당나라와 대등한 위치에서 자주성이 있는 나라였을까? 발해사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고구려 옛 영토 대부분 차지하고 사방 5천 리 경영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사실은 영토, 문화, 종족적인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발해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대부분 차지하고, 오히려 동북쪽으로 영역을 넓혔다. 발해는 9세기 말엽 제10대 선왕과 제13대 대현석 시대에 사방 5천 리를 경영했다. 이 시대 발해는 남쪽으로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국경선으로 신라와 접하고, 서쪽은 요하 경계에 이르렀다. 북쪽은 흑룡강과 우수리강이 합류하는 지점을 거쳐 동쪽으로 연해주 남단에 뻗쳐 있었다.

 
 발해는 고구려의 2배에 이르는, 한민족사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경영했다. 발해 강역도. 한규철 교수 제공

따라서 발해의 강역은 고구려의 1.5배, 신라의 3~4배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발해는 고구려 계승을 내세웠고, 고구려인이 살던 곳에 나라를 세웠다. 고구려 인구를 370만 명 정도로 추정하는데, 멸망 뒤 당나라, 신라 등으로 이주한 유민은 20만 명을 넘지 않았다. 따라서 대부분 고구려인은 자신들의 영토에 세워진 발해로 흡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가 다종족 국가였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705년간 지속하면서 초기의 옥저나 예 등의 유민들도 모두 고구려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 멸망 시점의 고구려는 초기 고구려족이 아닌 다른 종족으로 재구성한 고구려다. 이들이 곧 발해인의 주축이 되었다.

서울 사람이 부산 출신을 ‘시골 사람’이라고 부르는 꼴

그런데 ‘동이열전’이나 ‘북적열전’에 6세기 이후 고구려인과 함께 말갈인이 등장하면서 발해의 종족 구성을 확정하기 모호하게 하였다. 발해의 종족 계통을 밝혀내는 것의 핵심에 ‘말갈’의 실체가 있다. 중국과 러시아 학자들은 발해가 고구려와 다른 계통인 말갈의 왕조였다고 하고, 한국과 일본의 학자들도 지배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층은 말갈인이라는 식으로 주장한다. 그렇다면, 발해사는 고구려 유민의 역사인가? 말갈의 역사인가?

지배층만 고구려인이었다면 발해는 만주사의 입장에서 말갈국이었다고 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말갈은 고구려의 피지배 주민들을 멸시하는 호칭이자 당나라 동북방 주민들을 통틀어 부르는 범칭이었다. 말갈이란 종족 이름은 스스로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라 당나라나 고구려인들이 고구려 피지배 주민들을 낮추어 부른 호칭이라는 것이다. 발해가 ‘진(振)’으로 건국할 때도 당나라는 ‘말갈(靺鞨)’이라 멸시해 불렀다. 말갈의 선조로 알려진 숙신(肅愼)과 읍루도 중국 왕조가 멸시해 부른 종족 이름이었다.

또 왕조시대에 나라 사람인 ‘국인(國人)’이란 수도나 도성 중심의 사람만을 의미했다. 신라 왕실이 멸망할 때 <삼국사기>가 ‘신라를 경주로 고쳤다’고 기록한 것은 그런 역사관의 산물이다. 고구려시대에는 평양 사람만 ‘고구려인’으로 불렀고, 변방인은 그들과 종족이 다른 ‘말갈인’일 뿐이었다. 오늘날 서울 사람들이 부산에 사는 사람들을 ‘시골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말갈은 고구려 시대에 변방 주민으로 도성과 차별 받던 고구려인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에 있는 상경용천부 유적지 입구. 발해의 세 번째, 다섯 번째 수도로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다. 영상화면 캡쳐

지금까지 발해를 말갈이라고 주장했던 근거는 <신당서>의 기록이다. <신당서>는 발해를 세운 대조영을 ‘속말말갈(粟末靺鞨)’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100년 정도 먼저 나온 <구당서>는 대조영을 ‘고려별종(高麗別種)’이라고 적었다. 고구려의 별종이라고 의미다. <신당서>의 ‘속말말갈 대조영’이란 ‘속말수(송화강) 지역 시골사람 대조영’이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말갈은 지역 이름이다. <구당서>가 대조영이 고구려 출신임을 강조한 기록이라면, 신당서는 대조영이 속말수 지방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한 셈이다.

결국, 고구려 말갈도 고구려인이었고, 후에 발해가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흑수말갈과 같이 고구려계의 주민으로 볼 수 없는 종족들도 있었다. 이들이 말갈의 대명사가 돼 예맥·부여계의 주민인 백두산 말갈이나 송화강 지역의 속말말갈과 혼동을 가져왔다. 그러나 발해의 주민이 된 말갈은 고구려 시대에 변방 주민으로 도성 주민과 차별을 받아오던 고구려인이었다.

독립 연호 쓰고, 당을 공격한 자주국가

발해가 융성하던 7세기로부터 10세기 전반까지 동아시아는 당 중심의 국제질서에 놓여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주변국들에 대한 책봉이나 조공 질서가 이를 반영한다. 그렇다고 당나라와 주변국 관계를 ‘당의 지방정권’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발해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당나라에 자주성이 강했다는 것은 역사 기록에도 자주 등장한다. <신당서>는 “발해가 행정기구명이나 시호와 연호를 ‘사사로이’ 사용하였다”고 기록했다. 발해는 15대 왕 가운데 초대 고왕부터 10대 선왕까지 연호를 사용한 것이 기록에 남아 있다. 주변 나라들이 당의 연호를 사용한 것과 대조적이다. 신라는 통일 전인 진덕왕 4년(650년)부터 당의 연호를 썼고, 통일 뒤 본격적으로 당의 연호를 사용했다.

발해는 당나라를 군사적으로 공격할 정도로 자주성이 있었다. 제2대 무왕의 동생 대문예는 732년 ‘발해의 허락없이 당과 가까워지려는 흑수말갈을 응징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당으로 도망을 쳤다. 이에 분개한 무왕은 동생 대문예를 비호하는 당을 공격하였다. 해로와 육로를 통해 당을 공격해 등주자사 위준을 죽인 일은 당과 대등한 관계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땅 되찾은 고려국” 자칭

 
 상경용천부의 왕궁은 오문과 5개의 궁전으로 구성되었고, 왕이 배를 타고 놀던 어화원이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상경용천부 복원도. 출처 송기호 ‘발해를 찾아서’

발해와 고구려, 말갈의 관계를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가 <구당서>의 기록이다. <구당서>는 “(발해의) 풍속은 고구려와 거란과 같다”고 전한다. 풍속이나 문화 면에서 발해와 말갈의 관계를 기록한 역사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만약 발해가 말갈족의 왕조라면 <구당서>나 <신당서>에 발해와 말갈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한다.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땅을 찾고 부여의 풍속을 가지고 있는 고려국”이라고 자칭하였다. 풍속은 대체로 관혼상제를 의미하고, 상당한 기간을 두고 형성한 생활 공동체에서 형성된다. 때문에 풍속의 범주에는 언어도 포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구당서>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와 발해의 언어가 같았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발해는 그들의 왕을 토착어인 ‘가독부(可毒夫)’라고 불렀다. 처음부터 황상이나 왕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발해가 고구려어를 사용한 것은 일본에 파견된 발해 사신들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속일본기>를 보면 740년 발해 사신 이진몽 일행이 일본에 도착하자 통역으로 신라인이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고구려와 신라의 말이 서로 통했고,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와 신라의 말이 서로 통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발해가 영토, 문화, 종족적인 측면에서 고구려를 계승한 것은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 아닌 자주적인 국가였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발해사는 당연히 한국사의 일부이며, 발해사의 주인공이 우리 민족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하다.



[한민족 시원, 만주] 동아시아 네트워크, 발해의 길 (2)
초기엔 39개 역참 갖춘 ‘신라도’ 통해 긴밀 교류
동족보다 외세와 손잡은 대가, 남북한 교훈으로 - 발해-신라, 대결·갈등 속 민족공동체 의식 ‘싹’

문화적인 측면에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증거를 더 살펴보자. 문화적인 계승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무덤이다. 장묘문화가 가장 보수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정혜공주 묘(문왕의 둘째딸)나 정효공주 묘, 삼령분 등 발해의 왕릉과 지배층의 석실묘는 발해가 고구려의 풍속을 계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묘제는 대체로 돌을 많이 이용하고, 당나라는 벽돌을 주로 쓰는 것이 특징이다. 말갈의 전형적인 묘제는 흙구덩이에 매장하는 토광묘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고구려나 발해유적에서 토광묘가 나온 것을 증거로 발해와 고구려를 말갈계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토광묘는 당시 고구려나 발해의 서민들 대부분이 사용하던 매장 방식이었고, 인류 보편의 매장문화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래서 발해의 석실분이나 석관묘 등의 돌무덤 떼 주변에서 토광묘가 함께 발굴되는 것이다. 토광묘를 근거로 발해를 말갈계로 분류할 수 없는 이유다.

 
 발해와 고구려 문화를 계승한 사실은 온돌 유적을 통해 입증된다. 함경도 신포시의 발해유적 오매리 절터의 유적(왼족-출처 조선유적유물도감)과 거란유적지인 거린친톨고이 집터유적에서 발견된 불에 그을린 구들 한규철 교수제공

무덤과 온돌, 발해의 고구려 계승 강력한 증거

발해의 고구려 계승을 설명하는 중요한 유물이 온돌이다. <구당서>에는 고구려의 주거 문화가 잘 묘사되어 있다. “산골짜기에서 산다. 집은 띠로 이엉을 엮어 이어 짓는다.(중략) 겨울철에는 구덩이를 길게 파서 밑에다 숯불을 지펴 방을 따뜻하게 하는 온돌 장치를 하였다.” <구당서>가 이렇게 쓴 것은 고구려인의 주거생활이 당나라와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한국학계에서는 온돌의 기원을 고구려로 본다. 실제 중국과 북한의 고구려 유적지에서 온돌이 발견되었고, 발해 유적지에서도 마찬가지다.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의 궁성 서쪽 ‘침전터’와 북한의 함남 신포시 오매리 발해 유적지에서 구들 흔적이 발견되었다. 온돌은 말갈 지역으로 불리는 고구려와 발해의 변방 지역에서도 발견되지만, 당나라 유적지에서는 나왔다는 보고가 없다. 온돌 유적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문화의 독자성과 계승성을 증명한다.

남북국시대, ‘신라도’의 의미

 
 발해의 대외 교통로. 이 가운데 신라로 가는 신라도는 신라 천정군(지금의 함경남도 덕원)에서 발해의 책성부(중국 길림성 훈춘)까지 연결하는 길이다. 한규철 교수 제공

이렇게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한국사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나? 이는 발해와 신라가 공존했던 시기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다. 조선시대 역사학자인 유득공(1749~1807)이 이 시대를 ‘삼국시대’에 이은 ‘남북국시대’로 규정하였고, 이것이 한국사학계의 보편적인 인식이 되었다. 삼국이 서로 협력하고 싸우면서 삼국시대를 형성했던 것처럼, 남북국도 교섭과 대결을 통해 ‘역사공동체’를 형성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남북국은 역사공동체로 부를 수 있을 만큼 적극적인 교섭과 대결을 펼쳤나? 우선 ‘신라도’라는 것이 있다. 신라도는 발해의 5가지 대외 교통로 중의 하나다. 신라 천정군(지금의 함경남도 덕원)에서 발해의 책성부(중국 길림성 훈춘)까지 연결하는 길로, 39개의 역참이 있었다고 기록된다. 두 나라가 긴밀하게 교류했다는 증거이다.

발해는 개국하자마자 신라 왕실과 접촉을 시도한다. 당의 방해 속에서 어렵게 발해를 개국한 고왕 대조영은 즉위 2년째인 700년에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려고 사신을 파견한 일이 있었다. 고구려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멸망한 사실을 교훈으로 삼아 이를 미리 차단하기 위한 외교정책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당시 신라의 최치원은 당에 보낸 편짓글에서 “(발해가) 처음 거처할 고을을 세우고 인접하기를 청하였기에 그 추장 대조영에게 비로소 신라의 제5품 대아찬의 벼슬을 주었다”고 전한다. 발해 대조영이 대아찬 벼슬을 받은 것을 명분으로 신라가 발해 건국을 묵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발해가 신라에 조공이나 다른 정치적 배려를 하였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발해 건국 초기 남북이 당으로부터 일정한 자주성을 확보하면서 평화적으로 교섭한, ‘근친원교’(近親遠交) 외교의 성공사례라고 할 수 있다. 

발해의 신라 협공 계획

그러나 두 나라의 평화적 교섭은 오래가지 못했다. 신라와 발해가 직접적으로 충돌한 것은 732년에 발해가 당나라를 공격하자 신라가 이 전쟁에 끼어들면서 발단이 되었다. 발해와 당은 발해 건국 과정에서부터 대립관계에 있었다. 당은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발해의 지배 아래 있는 흑수말갈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려 했다. 이것이 발단이 돼 발해가 수륙양면으로 당나라를 공격하였다. 이때 신라는 발해가 아니라 당나라를 돕기 위해 군대를 발해의 남쪽 국경에 파견하였다. 험한 날씨 탓에 신라군이 중간에 철수하면서 두 나라가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남북국은 본격적인 대결 국면에 돌입한다. 발해 3대 문왕은 일본과 함께 신라를 협공하려고 ‘신라협공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안사의 난’ 등 국제 정세의 변화와 일본 내부 사정으로 무산되었다.

이렇게 군사적 긴장관계에 놓였던 두 나라는 신라의 국내 정치 변화에 따라 다시 교섭 국면에 돌입한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원성왕(790년)과 현덕왕(812년)이 각각 ‘북국’(발해)에 6두품급의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원성왕과 현덕왕은 모두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정통성이 약했고, 국내의 정치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해와 교섭을 활용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발해의 대표적인 불교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인 대형석등. 이 대형석등은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의 흥륭사 절 안에 있다. 박수진 피디

우리 민족 최초의 해외 파병
남북국의 교섭은 8세기 초 발해가 영토 확장에 나서고, 신라와 당나라가 군사 협력을 맺음으로써 다시 대결 구도로 치달았다. 당나라는 819년 이사도가 반란을 일으키자 신라에 3만 명의 파병을 요청하였고, 신라는 이를 수용했다. 당시 3만 명이면 엄청나게 큰 규모였다. 한국사 최초의 해외 파병이라고 할 만 하다. 이사도는 고구려계인 이정기의 손자로 산둥반도에 진출해 독립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은 고구려계로 분류할 수 있는 이사도의 반란을 토벌하는데, 신라를 끌어들여 남북국 대결 관계를 교묘하게 이용한 셈이다. 이 사건으로 신라와 당이 가까워지는 계기는 되었지만, 남북국 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신라는 826년 1만 명을 동원해 발해와 국경에 성을 쌓는 등 발해를 상대로 한 국방력을 강화했다.

거란에 망한 발해, 거란을 도운 신라

발해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신라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발해가 멸망기에 접어든 10세기, 국력이 기운 발해 왕조는 신라에 구원을 요청한다. <거란국지>는 거란의 팽창에 두려움을 느낀 발해의 마지막 황제 대인선이 은밀히 ‘신라(후삼국)의 여러 나라’들에 구원을 요청해 약속을 받았다고 전한다. 누란의 위기 속에서 발해는 왜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였을까? 두 나라가 비록 긴장 관계에 있었지만, 삼국시대 이후 이어온 민족적 공동체 의식이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발해를 돕기로 했던 신라는 약속을 어기고 발해 대신 거란을 도왔고, 그 공으로 선물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신라가 거란을 돕는 데 군사적 지원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당시 국제정세로 보면 신라가 가만히 있기만 해도 거란을 돕는 꼴이 된다. 발해는 결국 신라의 도움을 받지 못했거나, 신라의 방관으로 거란에 망한 셈이다.

남북국시대의 교훈, 근친원교인가, 원교근공인가?

남북국시대 교섭과 대결은 오늘날 어떤 교훈을 주나? 남북 교섭에서 신라의 지배세력들은 국내 정치의 위기를 발해와의 외교를 통해 극복하려고 했다. 반면 발해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고구려가 멸망한 것에 대한 감정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늘 긴장 속에서 신라와 교섭할 수밖에 없었다. 또 남북국은 당과 일본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였고, 남북교섭은 차선책이나 보조적인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남북국시대 200여 년간 원교근공(遠交近攻) 외교가 지속되었고, 정치 군사적 대결이 굳어졌다. 또 삼국시대로부터 이어온 우리 민족의 언어·문화적 동질성이 크게 약화되었다. 두 나라의 언어와 풍속이 점점 달라지면서 신라에 흡수된 고구려 후손들은 발해는 물론 거란 속의 발해인과 여진을 다른 종족으로 보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이는 오늘날 남과 북으로 분단된 한반도를 둘러싸고, 숨가쁘게 전개되는 국제적인 외교상황과 너무도 흡사하다. 또 나라가 망한 뒤 발해 사람들의 운명은 우리 민족의 미래에 대한 예시와도 같다.

 

◈한규철 교수= 경성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사단법인 고구려발해학회 회장. 한국고대사학회 고문. 부산경남사학회 회장, 중국의 고구려사왜곡공동대책위원회 공동대표, 고구려연구회 회장, 러시아 사회과학원 극동역사고고연구소 초빙교수, 중국사회과학원 흑룡강성 역사연구소 초빙교수, 일본 국학원대 대학원 객원연구교수. ‘발해의 대외관계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한국의 대표적인 발해사 연구자다. 저서로 ‘발해의 대외관계사-남북국의 형성과 전개’가 있으며 다수의 공저, 논문을 발표했다. 학술 활동 외에도 언론 기고와 각종 강연, 누리집 활동을 통해 발해사에 대한 인식을 확산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누리집 www.palhae.org

 



한규철 교수, 정리=박종찬 기자 pjc@hani.co.kr

출처 - 한 겨 레

[한민족 시원, 만주] 고구려, 생각의 지도를 넓혀라 (1)
삼국시대 오나라와 군사동맹 맺고 맞상대
철과 무역 국력 바탕, 동아시아 최후 승자 - 광개토대왕 첫 인천상륙작전, 지중해국 우뚝

해륙사관으로 본 고구려사의 재인식


우리 역사를 보는 여러 가지 관점이 있다. 흔히 사관이라고 부른다. 우선 일본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역사적 무대를 한반도로 축소하려는 반도사관이 있었다. 이런 개념이 인식을 규정하고 인식이 실천을 낳아 반도의 숙명처럼 받아들이게 된 것이 사대주의다. 일본인들이 만든 철저히 잘못된 사관이다. 최근에는 반도사관을 뛰어 넘는 사관, 즉 대륙지향 사관이 활발하다. 우리 민족의 활동 범위를 한반도를 넘어 만주 일대까지 확장하려는 움직임이다.

그런데 삼면이 바다인 우리가 어떻게 대륙의 영향만 받았겠는가? 우리 민족의 역사에 해양 활동이 언급이 되어야 한다. 일본 하면 제국주의와 ‘왜구’가 떠오른다. 왜구는 해적이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보면 왜구보다 먼저 등장한 것이 ‘신라구’다. 신라해적인데, 나쁘게 볼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해양활동이 그만큼 활발했고, 역사가 깊다는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삼국시대에 우리 민족과 일본, 중국과의 교역과 교섭은 육지가 아니라 바다를 통해 주로 이뤄졌다. 고구려도 육지보다는 바다를 통해 중국과 거래했고, 일본과는 ‘고구려 루트’라는 것도 있었다. 한반도 주변 지역을 ‘동아시아 지중해’라고 명명할 만큼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바다의 역할이 중요했다. 동아시아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으면서 육지와 해양을 동시에 활용했다. 동아시아 지중해에서 중심의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해 번창한 나라가 고구려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대륙사관도 아니고 해양사관도 아닌, 제3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해륙사관이다.

한강 하구를 장악하면 한반도의 반을 장악하는 것

 
 중국 환인시 오녀산성. 오녀산성은 삼면이 천길 낭떠러지인 천혜의 방어진지로 주몽은 여기에 첫수도인 졸본을 세워 고구려를 일으켰다. 조현 기자 

재미있는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인천상륙작전의 원조는 누구일까? 물론 한국전쟁 시기인 1950년 맥아더 장군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인천상륙작전은 없었나?

한반도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이 경기만 일대다. 한강 하구를 장악하면 한반도의 반을 장악하는 것이다. 한반도 중심인 서울, 개성을 장악하려면 인천상륙작전이 불가피하다. 그래서 한강 하구, 특히 강화도가 중요했을 것이다. 거기를 목이라고 한다. 고구려가 신라로부터 강화도를 점령한 뒤 그 지역을 ‘혈구군’이라고 불렀다. 구멍 ‘혈(穴)’에 입 ‘구(口)’ 자를 썼다.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다시 탈취한 뒤에는 ‘해구(海口)’라고 했다. 바다의 입구라는 뜻이다. 오늘날로 보면 코어(core)이고, 허브(hub), 아이시(IC)의 구실을 하는 곳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고구려 시대 동아시아 국제관계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중국지역과 북방족, 일본 열도와 신라, 백제 등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그런 국제 질서가 완벽한 변동을 가져온 사건이 그 시대엔 무엇이었을까? 광개토태왕비의 비문에는 396년에 광개토태왕이 직접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했다’(率水軍討利殘國軍·솔수군토이잔국군)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 3개의 공격로를 이용했다. 첫 번째 공격로가 ‘한강수로직공작전’이었다. 강화도를 통해 한강 하구로 들어와 지금의 자유로, 강변북로를 타고 (백제의 근거지인) 천호동과 하남시 일대까지 공격했을 것이다.

 
광개토태왕비문에 새겨진 글자와 광개토태왕비문의 모습. 조현 기자 

두 번째 공격로가 바로 인천상륙작전이다. 광개토태왕 비문에 보면 396년 점령한 성 가운데 미추성이 나온다. 인천의 옛 이름은 미추홀이다. 미추성은 바로 지금의 문학산성이다. 인천상륙에 성공한 광개토태왕은 오늘날의 부평, 신월동, 목동단지, 영등포를 통해 지금의 천호동, 풍납토성까지 진격했다. 다른 한 공격로가 남양반도, 즉 화성을 거쳐 지금의 동탄지구, 판교지구, 분당, 광주를 넘어 풍납토성으로 가는 길이었다.

당시 백제군이 지켰던 곳에 오늘날 한강을 건너는 다리가 놓였고, 부동산이 급등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백제군 진지 가운데) 아직 다리가 놓이지 않은 곳이 있다면, 앞으로 다리가 놓이니까 그런 곳에 투자를 해야 하는 거다. (웃음) 광개토태왕이 공격하면서 거점으로 삼았던 대부분 지역도 소위 말하면 ‘뜨는 지역’이다.

 
인천에 있는 문학산성. 광개토태왕 비문에 보면 396년 점령한 성 가운데 미추성이 나온다. 인천의 옛 이름이 미추홀이고 미추성은 지금의 문학산성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부동산 투기하자는 것이 아니고, 이런 것이 역사적 실상이고 상상력이다. 역사는 추상화되면 안 되고, 구체화하고, 실제화해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 역사는 지나치게 추상화되고, 다 잘라버리고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늘 역사 이야기는 피부에 닿지 않고 관념적이었다.

위·촉·오만 있었다?…그런 엉터리 역사가 어디 있나

요즘 아이들은 삼국지를 많이 읽는다. 그래서 황춘, 하후돈 등의 장군은 다 아는데, 정작 안시성 성주가 양만춘 장군이라는 것은 모른다. 삼국지를 보면 그 당시 동아시아에는 위·촉·오 3국만 있고, 모든 영웅은 거기에 있는 것 같다. 삼국지가 배경이 되는 시대는 3세기 전반, 중반 시기인데, 그 시기에 고구려는 없었나? 고구려는 원시 상태에 있고, 위·촉·오는 제갈공명을 비롯해 엄청난 지략가가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그런 엉터리 역사가 어디에 있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랜만에 중화가 장악한 명나라 시절, 한족이 쓴 한족 중심의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을 보고 마치 중국이 자신의 모국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결코, 그렇치 않다. 그 시대 고구려가 있었다. 당시 고구려 동천왕이 오나라 손권과 군사동맹을 맺었다. 사신과 군수물자가 오고 가다가 동천왕이 손권이 보낸 사신의 목을 치고, 손권이 화가 나서 요동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 역사적 사실은 모른다.

장수왕 때인 439년, 말 800필을 실은 대규모 선단이 남포항을 출항해 상하이를 거쳐 수도인 남경으로 간 기록도 있다. 당시 말 800필은 오늘날 미사일과 전투기와 맞먹는 군수물자다. 중국은 통일된 시기보다 분열된 기간이 많았고, 비한족인 북방 유목족이 통치하는 시대가 더 길었다. 북방 유목족의 주력은 우리 민족과 가까운 선비족이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을 찬양하자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세계 역사 바꿔 온 유목세력의 동쪽 끝 큰 나라

 
고구려 강역도. 진하게 칠해진 직접 통치지역 외에도 몽궐지역까지 세력권이 넓게 분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문화방송 ‘느낌표’ 고구려 지도. 

고구려는 큰 나라였다. 고구려 땅은 특별한 땅이었다. 관념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환경으로 보면 그렇다. 문명이 전파하고, 교류한 두 가지 길이 실크로드와 초원의 길이다. 실크로드 위에 초원의 길이 있다. 실크로도는 일본인들이 상업적인 목적으로 띄우다 보니 동서양을 잇는 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더 막강하고 위력적인 길이 초원의 길이다. 그 길은 정치의 길, 문화의 길, 군사의 길이었다.

이 길에서 활동하던 세력들은 분열돼 있었지만, 특별한 계기를 만나면 통일을 하게 된다. 그러면 세계 역사가 바뀐다. 흉노족부터 돌궐족, 몽궐족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초원의 길을 평정했을 때 동서양의 역사가 바뀌었다. 칭기스칸도 마찬가지였다. 칭기즈칸이 동몽궐 출신인데, 최근에 몽골 학자를 중심으로 발해계라는 설도 제기된다. 이렇게 세계 역사를 바꿔 온 유목세력의 가장 동쪽이 어디인가? 고구려다.

고구려는 그 초원의 길, 동쪽 끝에서 700년을 영유했다. 유목종족과 중원의 한족과 경쟁하고 전쟁하며 그들의 핵우산 아래에서 조공을 바친 것이 아니라 당당히 맞서면서 700년을 버텼다. 고구려가 수나라와 전쟁 때 수 양재는 정병만 113만 3500명을 동원했다. 삼국지보다 더 큰 전쟁이 벌어졌다. 인류 역사상 1, 2차 세계대전을 빼고 가장 큰 전쟁이었다. 그 전쟁에서 고구려가 이겼다. 그 사이 수없이 많은 나라가 명멸을 했다. 그래서 동아시아 지역 최후의 승자는 고구려라고 할 수 있다.

당대 최대의 에너지원 틀어쥐고 영향력 행사

 
중국 집안시 국내성의 옛 성터 모습. 국내성은 고구려의 2번째 수도로 아파트가 지어진 도심 곳곳에 성터가 그대로 남아 있다. 조현 기자 

고구려가 막강한 힘, 즉 국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중국 사람들이 고구려를 평가하는 문장이 여럿 전해져 내려온다. ‘고구려 호전적이고 흉포하다. 고구려 사람은 교만하고 방자하다. 고구려 사람은 성질이 급하고, 평지도 산길 달리듯 한다.’ 이 모든 것이 중국인들의 기록이다. 아마도 그 반대가 고구려인들의 성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고구려 사람들은 독특한 사람들이다.

국력이 사람의 기상이 뛰어나다고 저절로 키워지는 것은 아니다. 테크놀로지(기술)와 자원이 필요하다. 그 시대 가장 중요한 자원은 철이었다. 당시 최고의 철 생산지는 요동지방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철 생산지인 안산 제철소가 만주에 있다. 고구려의 안시성도 원래 철 생산지이다. 요나라 때는 철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구려는 당대 최대의 에너지원을 틀어쥐고 있었다. 오늘날 중동 산유국이 석유 자원을 틀어쥐고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고구려는 앞선 제련기술로 산업과 군사력에서 앞설 수 있었다.

고구려는 철로 여러 제품을 만들어 무역도 활발하게 벌였다. 고구려가 약탈 경제로 성장했다고 배웠는데, 약탈 경제로 어떻게 700년간 버티면서 수많은 전쟁을 치뤄낼 수 있었겠는가? 장수왕 시절 대규모 선단을 운영한 것처럼, 북쪽에 철을 팔고 모피와 말을 사와 그것을 배에 싣고 다시 중원에 파는 중계무역을 벌였다. 이런 전통은 발해로 이어졌다. 발해도 일본에 호피, 표피, 웅피 등을 수출했다.

동아지중해론, 21세기 생존전략과 맞닿아

 
중국 등탑시 고구려 백암산성. 백암산성은 요동일대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성으로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해 고구려 산성의 독창성을 잘 보여준다. 조현 기자 

고구려 역사에서 우린 무엇을 배워야 하나? 역사학자로서 지금 시대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전환기라고 생각한다. 동아시아도 세계사적 변화의 한복판에 있다. 우리가 좋든 싫든 동아시아는 고대에 그랬던 것처럼 동아시아 공동체 연방이 탄생할 것이다. 이런 주장이 제기된 지 20년이 넘었다. 동아지중해론도 제기되었다. 동아시아 각국들은 대륙과 한반도, 일본열도와 군도에 둘러싸인 황해, 남해, 동해, 동중국해를 포함하고 있어 완전한 형태의 지중해는 아니지만 다국간 지중해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한반도는 모든 지역과 국가를 전체적으로 해양 네트워크로 연결할 수 있는 동아 지중해의 중심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고구려는 이런 지리적 위치를 잘 이용해 700년 동안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해양 활동이 활발하였고, 해양을 장악함으로써 주변국들의 외교망을 통제할 수 있었다. 국제정치에서 해양력(sea-power)을 본격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고구려의 해양 전략은 역사상 인천상륙작전을 최초로 감행한 광개토태왕 시절 본격적인 국제전략으로 채택하였고, 그 결과 고구려는 지중해적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즉 대륙과 한반도와 주변 해양을 한 틀 속에 넣고 조정할 수 있는 동아시아의 완전한 중핵자리를 확보한 것이다. 21세기도 마찬가지다.

윤명철 동국대 교수, 정리= 박종찬 기자 pjc@hani.co.kr



[한민족 시원, 만주]고구려, 생각의 지도를 넓혀라 (2)

정치-경제-문화 인터체인지로 ‘조정자’ 우뚝

동아시아 질서 재편기에 살아있는 성공 모델 - 광개토왕비·삼족오는 살아있는 ‘시대정신’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사람들이 고구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중국 정부가 추진한 동북공정(東北工程)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2002년 2월 사회과학원 산하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에서 동북공정이란 명칭의 학술 연구를 시작했다. 동북공정은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 아래 고구려는 물론, 고조선, 부여, 발해, 현재의 한국을 연구하는 작업이다.

▶중국의 동국공정이 되레 고마운 까닭

동북공정의 뼈대 가운데 하나는 고구려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다. 고구려 전체 역사를 현재와 미래의 국가발전 전략에 맞게 논리적이고 효율적으로 포장해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중국학자들은 고구려의 건국 과정과 귀속 문제 등 다양한 주장을 내놨는데, 핵심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동북공정은 고구려 역사를 중국사로 끌어들이고 있다. 만리장성이 한반도까지 뻗어나간 것으로 그린 중국사회과학원의 진·한시대 역사지도(오른쪽). 역사의 아침 제공. 

첫째, 고구려 영토는 역사적으로 중국의 영토라는 논리이다.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통일적 다민족인 중앙집권국가가 요동의 군현을 수복하려고 벌인 전쟁이다. 본국 통치계급이 영토확장을 위한 침략 전쟁은 아니다”라고 주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고구려 정권은 서한시기 변강 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고,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와 전쟁을 벌인 것은 고구려 땅이 자기 조상의 통치 지역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국학자들이 삼고 있는 역사적인 근거는 중국의 사료들과 함께 이를 수용한 삼국사기의 내용이다.

둘째, 고구려는 대대로 중국의 조공을 받치는 등 신속관계에 있었다는 논리다. “고구려가 대를 이어 중국 정권의 번국이었다”고 주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고구려가 처음부터 끝까지 중국에 예속하였고, 한나라부터 당나라까지 역대 중원왕조가 관할한 소수 지방정권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몰역사적이고, 비현실적인 동북공정의 주장은 결국 동북아 역사전쟁으로 비화하였다. 그 전쟁은 누구에게 이득을 안겨 주었을까? 동북공정으로 한국인들은 고구려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역사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중국이 얼마나 위험한 나라인지를 알게 되었다. 우리 민족에게는 천운이라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중국의 ‘동북공정’ 저지를 위한 기자회견이 국학원, 국학운동시민연합 등의 주최로 2006년 9월6일 오전 서울 종로 탑골공원 앞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중국은 동북공정을 중단하고, 모든 역사왜곡을 중단하라, 남북한 및 해외동포에게 공식 사과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신중화제국을 꿈꾸며 그 끝은 아시아 맹주

중국 정부는 고구려가 한국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몰랐을까? 중국 정부는 왜 고구려라는 아킬레스건을 건드렸을까? 중국 정부가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첫째, 동북공정은 신중화제국주의와 동아시아 질서 재편을 추진하기 위한 국가전략의 일환이다. 공산주의자로 알려진 마오저뚱은 철저한 중화주의자였다. 공산 중국에 이르러 중국은 더 제국주의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고, 주변의 국가와 소수 민족을 억압하고 독립을 빼앗았다. 대표적인 것이 몽골, 티베트, 위구르족 영토 탈취와 압박이다. 중국이 공북공정에서 고구려 영토권을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동북공정의 궁극적인 결말이 신중화제국주의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둘째, 만주지역에 대한 한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다. 중국과 한국 사이에는 간도 문제가 있다. 그리고 만주는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땅이다. 구한말 조선이 국권을 상실하자 많은 사람이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이 아닌 독립전쟁을 벌였다. 이들은 어떤 생각으로 독립전쟁을 벌였나? 고조선 이후 우리 민족이 출발한 곳, 만주에서 조선의 회복이 아니라 원조선의 회복과 옛질서를 회복하는 그런 꿈을 꾸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옛 고구려의 땅에서, 발해의 땅에서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전쟁을 벌였고, 우리 역사를 가르쳤다.

중국은 결속이 강화된 남북한 또는 통일한국이 만주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거나 영향력을 강화시킬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셋째, 앞으로 중화중심의 동아시아 혹은 아시아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전단계의 정지작업일 수 있다. 동아시아 공동체가 실현되면 정치, 군사적인 영토보다는 문화 영토, 그리고 경제 영토 개념이 적용될 가능성이 크다. 동아시아가 새로운 질서로 재편될 경우 만주와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입지를 보다 강화하려는 의도다.

넷째, 연해주 문제다. 이 문제는 아직 쟁점으로 부상하지는 않고 있다. 지금 러시아 영토인 핫산,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프스크 등 연해주는 1860년도까지 청나라의 땅이었다. 물론 옛 발해, 옛 고구려의 땅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연해주는 1860년 북경조약을 통해 빼앗긴 땅이기 때문에 수복의 대상이다. 또 중국이 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과 패권을 장악하려면 반드시 동해에 진출해야 한다. 연해주는 동해에 진출하는 관문이다. 그래서 중국은 연해주의 연고권을 주장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중국은 국제질서가 미주공동체, 유럽공동체 형태로 지역 블럭화하는 경향에 맞춰 아시아공동체가 탄생할 것으로 보고, 일본을 누르고 아시아의 맹주가 되려는 장기적인 국가전략 속에서 역사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동북공정, 서남공정, 서북공정, 몽골공정 등이 그것이다. 중국의 신제국주의적 속성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역사학자로서 이런 중국의 태도는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중국을 설득하려는 것이다.

▶고구려는 세계적 질서 재편기에 성공한 역할 모델

 
 고구려를 상징하는 상상의 새인 ‘삼족오’(세발 달린 까마귀). 한겨레 자료사진 

오늘 우리는 고구려를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하나?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배경에 동아시아의 질서 재편이 있다. 한·중·일의 신민족주의가 대두하고 있고, 새로운 갈등과 헤게모니 쟁탈전이 동아시아 한복판에서 숨가쁘게 펼쳐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패권다툼이 옛날에는 없었을까? 동아지중해에서 고구려와 수나라, 당나라의 70년 전쟁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국제대전이었다. 당시 동아시아 질서를 놓고 양대 세력인 고구려와 중국 세력이 질서 재편 전쟁을 벌인 것이다. 지금의 상황과 너무도 흡사하다. 고구려는 질서 재편기에 우리가 해야 할 방법과 성공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이 동아지중해 중핵조정론이다.

격변하는 국제질서의 재편 시기에 고구려처럼 우리를 동아지중해의 중심에 놓는 것이 필요하다. 동아지중해 중핵조정론은 센터론이나 제국주의의 개념과는 다르다. 동북아중심국가론, 한반도중심론과도 다르다. 중핵조정론은 (지리적으로) 가운데에 있으면서 역할만 조정하자는 것이다. 우리 같은 나라가, 어떻게 패권적 국수주의나 민족주의를 지향할 수 있나?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 늘 양 강대국인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어 있는 우리가 팽창적 국수주의를 추구할 수 있나? 우리는 삼족오처럼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중심과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야,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존을 이룩할 수 있다.

▶요동 대련-경기만-평택-동해시 거점 확보해 조정자로

이처럼 대륙적 질서와 해양 질서가 동시에 작용하는 동아지중해의 중심에서 조정자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구려는 바다와 육지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거점(목)을 장악함으로써 조정자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고구려 지도에서 보면 이런 전략적인 거점(목)이 여러 곳 보인다.

첫 번째 지역이 중국 요동반도의 끝 대련이다. 이곳을 장악해야 모든 물길을 장악할 수 있다. 고구려는 해양활동이 없었을까? 3면이 바다였고, 중국과 70년 전쟁을 벌이고, 일본열도와 계속해서 외교사신을 교환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수군 이야기가 나온다. 미천왕, 고국원왕 때는 배를 이용해 북방민족들과 군사동맹을 맺었다. 232년, 234년에는 손권의 오나라와 바다를 통해 군수물자를 주고받았다. 439년에 장수왕이 800필의 말을 중국에 보낸다. 수나라와 전쟁에서 이긴 612년에는 수나라 백성과 낙타 2필을 일본 열도에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런 것이 다 배를 통해, 바다를 통해 이뤄진 것이다. 고구려와 수나라와 당나라의 전쟁, 삼국통일 전쟁은 모두 해전에서 판가름이 났다. 그만큼 바다가 중요했고, 고구려가 바다를 장악하는데 대련은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두 번째 경기만이다. 한강을 장악하면 한반도 반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광개토대왕은 경기만을 장악하려고 396년에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집중 공격한다. 장수왕에 이르러 한강 일대를 완벽하게 장악한다. 이 일대를 장악해 고구려는 남북으로 분단된 중국을 대상으로 등거리 외교를 펼칠 수 있었다. 위연과 상해정권과 함께 북경정권을 압박하는 정책을 편 것이다. 또 백제와 신라, 왜가 중국과 교섭하는 것을 바다에서 차단할 수 있었다. 이런 등거리 외교를 오늘날 상황에 맞게 구상하면 러시아, 몽궐, 일본과 함께 중국을 외곽에서 포위하는 전술이 될 것이다. 당시의 외교적 주도권을 고구려가 쥐고 있었다. 이는 고구려가 해륙국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세 번째 지역이 평택, 화성을 연결하는 서해안 지역이다. 이 지역을 장악해야 중국의 해안지역과 경쟁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서해안 경제특구를 송도로 지정한 것은 잘못된 결정이다. 평택, 인천, 강화, 개성, 해주로 이어지는 범경기만 해안특별구를 지정하는 것이 맞다. 그래야, 중국의 해안지역과 경쟁할 수 있다. 반도적 스케일을 떨쳐버리고, 고구려처럼 해륙적 스케일을 회복해야 한다.

네 번째는 동해시가 중요하다. 동해는 그냥 빈 바다일까? 그럼 일본이 소외된다. 동북아 질서재편기에 일본은 가만있겠나? 일본이 동해 경제권으로 서해 경제권에 대항하는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 것이다. 또 중국 해군이나 상선이 동해에 진출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한국, 러시아, 일본이 동해 경제권을 활성화할 수밖에 없다.

고구려도 신라를 압박하고, 일본열도를 쉽게 건너려고 동해시를 거점으로 확보했다. 당시 이 지역에 고구려의 항로가 있었다. 일본과 중국을 거느리고 동아지중해의 조정자 역할을 하려면 동해 경제권을 띄워야 한다. 머지않은 미래에 동해시가 경제특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어수룩한 광개토왕비와 다리 세개인 삼족오에 시대정신이

 
 2005동북아청년캠프 대원들이 2005년 8월 중국 집안의 광개토대왕비를 살펴보고 있다. 집안/강재훈기자 khan@hani.co.kr 
나는 고구려가 문화국가라고 주장했다. 고구려의 고군벽화나 예술분야가 뛰어나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독특한 문화가 있는 나라라는 의미다. 고구려는 한반도와 만주, 몽골지역에 이르기까지 넓은 영토를 통치했다. 고구려 속에는 백제, 신라, 거란, 말갈, 선비족 등 종교와 생활양식, 풍습이 다른 다양한 종족들이 살고 있었다. 따라서 내부의 통일성이 깨지면 고구려라는 나라는 성립할 수 없었다. 중국은 정권이 바뀌면 정권을 잡은 사람을 중심으로 철저하게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정책을 폈다. 그러나 고구려는 주변의 모든 민족과 말 그대로 조화와 상생하는 방법론을 택했다.

무엇이 고구려를 결속시켰을까? 우선 고구려인들의 역할이 중요했을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스스로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자의식이 강했고, 주변 종족들에게도 이를 각인시켰다. 고구려인들은 스스로 천제지자, 화백지자, 천손지자, 황천지자, 천손, 일월지자 등으로 높여 불렀다. 이건 그 시대의 법칙이었다. 이렇게 주장을 해야 고구려인은 물론 주변 민족들이 고구려를 중심으로 모일 수 있었다. 그래서 고구려가 있는 곳(수도)은 우주의 중심이고, 그 중심에서 광개토대왕비나 장군총 같은 특별한 것이 만들어진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를 보면 고구려의 문화적 풍모가 잘 나타난다. 그 비는 중국의 그것처럼 거대하거나 위압적이지 않다. 강력한 힘이라든가, 피냄새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미완성품처럼 보이고, 어수룩해 보이고, 다분히 카오스적이다. 고구려인들은 당대에 가장 돌을 잘 다루던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이 돌을 다룰 능력이 없어서 비정형으로, 어수룩하게 광개토대왕비를 만들었을까? 거기엔 위압적이지 않으면서 더불어 살고자 하는 고구려의 시대정신이 압축적으로 담겨있다.

삼족오에도 고구려의 시대정신이 녹아 있다. 삼족오는 다리가 세 개고, 날개가 두 개고, 머리에 뿔이 달렸다. 다리가 세 개인 것은 각각의 역할을 의미하고, 조화를 상징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 중국, 일본이 평평하게 균형을 이뤄야 동북아의 평화와 공존이 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물류와 문류, 인류의 거점인 하트로

고구려은 정치, 군사적으로 조정의 역할, 경제와 물류 입장에서는 허브의 역할, 문화적으로는 인터체인지, 아이씨(IC)의 역할을 수행했다. 흔히 우리 문화를 설명할 때 브릿지론을 주장한다. 발달한 중국문화가 한반도를 통해 일본 열도로 건너갔다는 가교론이 그것이다. 이는 우리 문화의 한 부분을 설명하는 것일 뿐이다.

한반도는 문화의 인터체인지다. 지구상에서 가장 다양한 자연환경이 있고, 대륙과 해양이 만나고, 북방과 남방이 만나는 아주 독특한 곳이다. 그러니까 문화의 브릿지가 아니라 인터체인지가 되는 것이다. 나는 한발 더 나아가 4년 전부터 아예 ‘하트(heart)론’을 주장한다. 심장에서 피가 공급되는 것처럼 모든 문화가 여기에 모여 들어와 다시 힘을 얻어서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를 물류와 문류, 인류의 거점으로 만들자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고구려는 우리의 미래를 디자인할 때 중요한 모델이 된다. 고구려가 지금도 살아있고 고구려의 시대 정신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윤명철 동국대 교수, 정리=박종찬기자 pjc@hani.co.kr




 ◈윤명철 교수= 동국대 교양교육원 교수. 동국대 사학과 졸업. 성균관대 석사, 박사. 해양문화연구소장, 한민족학회 부회장, <지구문학> 편집위원, ‘좋은벗들’ 이사. 1993년 대한해협 뗏목 학술탐사를 시작으로 황해문화 뗏목 탐사를 두 차례 벌였다. 또 뗏목 장보고호를 타고 중국 절강성에서 인천을 경유, 제주도와 일본까지 43일간 학술 탐사를 벌인 탐험가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고구려사와 해양사이며, 4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광개토태왕을 통해 21세기 ‘고구리즘’(gogurism)의 실현을 꿈꾸고 있다. ‘역사는 진보하는가’, ‘바닷길은 문하의 고속도로였다’, ‘광개토태왕과 한고려의 꿈’, ‘광개토태왕, 생각의 지도를 넓혀라’ 등 25권의 저서와 120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윤명철 교수의 고구려 이야기  

 







출처 - 한 겨 레

동방 르네상스를 꿈꾸다 (1)
용 옥 토기 주거지 등 중국문화 최초 상징 뿌리
‘제5의 문명’ 요하는 ‘중화’역사엔 없었다, BC 6천년 한반도-요하 단일 문화권, 유물 증거
 

최근에 요하문명에 대해 사람들이 많이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한국방송 ‘역사스페셜’(<제5의 문명 요하를 가다> 2009년 8월29일 방영)이 방송된 뒤에 많은 사람한테 전화를 받았다. 어떤 역사 교사가 전화를 해서 “학교에서 어떻게 가르쳐야 되느냐”고 묻더라. 아직 역사 교과서에는 단군이 신화로만 나오는데, 단군의 실체에 대해 학생들이 물어보고, “요하문명이 우리 문화와 연결돼 있는데, 왜 우린 그런 것을 배우지 않느냐”고 묻는다는 것이다. 교사들도 혼란스럽다고 한다. 이제까지 아무도 모르고 어떤 기록에도 없는 새로운 문명이 발견되었으니까 혼란스러운 것도 당연하다.

500년 앞선 하모도문화 발견에 중국이 난리 나 기원론 수정

우리는 지금까지 교과서를 통해 황하문명이 세계 4대 문명의 하나라고 배웠다. 중국문명뿐만이 아니라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문명의 시발점이 황하문명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1973년에 장강하류에서 하모도문화라고 명명된 어마어마한 신석기 유적이 새롭게 발견된다. 이 하모도문화는 기원전 4500-4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앙소문화(황하문명의 중심적 신석기시대 유적)보다 최소 500년에서 1천 년이 앞선다. 중국 전체가 난리가 났다. 그래서 이를 장강문명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때부터 중국에서는 중화문명은 황하문명에서 출발했다는 단일기원론이 아니라 황하문명과 장강문명 두 곳에서 시작됐다는 다기원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두 군데에서 문명이 시작됐다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하모도문화권에서 어떤 유적들이 발굴됐을까? 그때 이미 물을 가두어 농사를 지었다. 논둑을 만들어 물을 가두고 씨를 뿌렸던 것이다. 모를 길러서 심는 이양법을 제외하면 현재 우리가 하는 논농사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유적이 대규모로 나온다. 그것이 기원전 5천 년까지 올라가는 하모도문화다. 이것은 황하문명과는 다른 문명이다.

‘오랑캐 땅’의 앞선 문명인 옥기시대에 중국 더 큰 혼란…세계도 깜짝

장강문명이 새롭게 발견되었을 때만 해도 중국학계의 혼란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어차피 중국 땅에 있으니까…. 중국 사람들은 만리장성 밖은 다 야만인의 세계로 보았다. 실제로 만주 일대에서 변변한 문화 유적이 발견된 적도 없었고, 새로운 유물이 발견되면 모두 황하문명 지역에서 전파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1980년 초 만리장성 북쪽 요서 지방 일대에서 어마어마한 신석기 유적이 무더기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그게 요하문명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기원전 7천 년까지 올라가는 소하서문화가 가장 이른 시기인데, 그보다 더 이른 시기의 유적과 유물이 나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 인식 속에 요동, 요서, 만주를 생각하면 말 달리던 선구자 생각나고, 수렵·목축하는 유목민을 떠올리는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마어마한 새로운 신석기 유물이 계속 나오니까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홍산문화(紅山文化·기원전 4,500~3,000년) 단계에 오면 이미 초기 문명단계, 초기 국가단계에 진입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문명이라는 말은 아무 데나 붙이는 것이 아니다. 문명이라고 불릴 정도라면 그 문명단계가 성립할 대표적인 유물과 유적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청동기가 나오든지, 문자가 나오든지, 권력분립이 일어났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징표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아직까지는 요하문명의 꽃이라고 불리는 홍산문화 시기에서는 청동기나 문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청동기나 문자가 없는 문명단계, 국가단계는 세계 역사에서 많다. 단적인 예로 몽골제국은 전세계를 제패한 대제국이었지만 문자가 없었다. 제국 형성 이후에 필요에 의해서 새롭게 문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학자들은 이제까지 우리가 서양의 역사를 중심으로 시대를 구분했던 타제석기, 마제석기, 청동기, 철기라는 시대 구분은 동북아시아에서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동북아시아의 경우에는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타제석기와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청동기 중간에 옥기시대를 새롭게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순에 빠진 중국이 역사 재편 작업 들어간 것이 동북공정

이렇게 신석기 문화를 발견한 것까지는 좋은데, 발굴하고 나니까 중국 입장에서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오랑캐의 땅이라고 했던 지역에서 황하문명보다 시기도 더 앞서고, 문화의 발전수준도 더 높은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지니까 기존의 역사학계에서는 난감했던 것이다. 오랑캐의 땅에서 중화문명의 중심인 황하문명보다 앞선 유적들이 나오니까….

결국 중국은 요하문명의 발견과 더불어서 상고사에 대한 전체적인 재편 작업에 들어갔다. 중화문명은 요하문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요하 일대는 원래 중화민족의 시조라는 황제의 영역”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여기가 황제가 활동하던 곳이고, 황제가 여기서 문명을 건설하고 내려오면서 또 중원에서 문명을 이뤘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유로 요하 일대에서 발원한 모든 소수 민족은 모두 황제의 후예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중국의 일부 학자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다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 수많은 논문들이 요하문명을 전설적인 인물인 황제와 연결하고 있다.

최근 고구려사가 중국사라고 한 동북공정 때문에 말이 많다. 동북공정은 고구려 공정이 아니다. 동북공정의 진짜 의도는 동북지역의 모든 소수민족의 역사를 전부 중국사로 만들려는 것이다. 신화부터 시작해서 요하 일대에서 기원한 고조선, 단군, 해모수, 주몽 전부 다 황제의 후예라는 것이다. 우리 한민족은 황제의 후예인가? 단군의 후예인가? ‘그래 너희는 단군의 후예인데, 단군이 바로 황제의 후예다.’ 이런 논리로 가고 있다. 지금, 요하문명 때문에 중국의 상고사와 고대사가 모두 재편되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요하문명 세력이 진짜 중국 황제의 후손이었나?

자 그럼 이 지역에서 무엇이 발견되었는지, 사진 자료 중심으로 보여주겠다. 그 문명의 주도세력은 누구였는지? 진짜 황제의 후손이었는지 확인해 보도록 하자.

요하문명은 요하를 끼고 형성된 문화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요하 상류는 내몽고자치구의 동북쪽에서 랴오닝성 발해만에 이르는 큰 강으로 수많은 지류를 지니고 있고, 이게 발해만으로 흐르는데 ‘ㄱ’자 모양이라고 보면 된다. 요하를 중심으로 신석기 문화인 △소하서문화(기원전 7,000~6,500년) △흥륭와문화(기원전 6,200~5,200년) △사해문화(기원전 5,600~) △부하문화(기원전 5,200~5,000년) △조보구문화(기원전 5,000~4,400년)가 형성되었다. 홍산문화는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전기는 신석기시대(기원전 4,500~3,500년)로 출발해 후기에 석기와 청동기가 혼재된 문화(동석병용시대·기원전 3,500~3,000년)로 발전하였다. 홍산문화 후기에 들어 초기국가단계로 진입한다.

 
 요하지역 중요 신석기문화 지역 분포도(출처: 우실하 ‘고조선의 강역과 요하문명’)


동석병용시대는 소하연문화(기원전 3,000~2,000년)에서도 발견되었고, 이후 초기 청동기시대인 하가점하층문화(기원전 2,000년부터)를 거쳐 고급 문명사회로 발전하게 된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유물이 최초로 발견된 지역의 지명을 따 붙인 것이고, 지금도 수없이 많은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홍산문화만 하더라도 지금까지 발견된 지역이 500곳이 넘는다. 한 예로 홍산문화의 중심지인 적봉시 인근 오한치박물관에 가면 하가점-하층문화가 발견된 지역만 2천 곳이 넘는다.

중국 본토에선 없던 고조선 상징 비파형동검, 한반도에선 무더기로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홍산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다. 홍산문화는 요하문명의 꽃이다. 요하문명이라고 하면 소하서, 흥륭와, 사해문화 등을 모두 포함하지만 문명단계로 진입하는 시기가 홍산문화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게 친다. 홍산문화가 요하문명의 꽃이라면 우하량 유적지는 홍산문화의 꽃이다. 여기서 제단터와 여신상 등 홍산문화를 상징할 유적과 유물이 쏟아졌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학자가 하가점-하층문화가 고조선과 연결된다고 보고 있다. 이 지역에서 고조선의 상징인 비파형동검이 대량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비파형 동검은 요동과 요서지역에서 폭넓게 발굴이 되었고, 산둥반도에서 1~2개가 나온다. 그 다음 한반도에서 무더기로 나온다. 중국 본토나 다른 곳에선 전혀 나오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요하지역 중요 신석기문화 지역에서 발견된 주요 유적들을 시기별로 살펴보자.

세계 최초 요하 옥기와 비슷한 유물 전남 여수에서도 발굴

 
 흥륭와문화의 ‘세계 최초의 옥 귀걸이’ 발굴 모습. 우실하 교수 제공. 그래픽 문석진
 

흥륭와문화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이 옥기다. 이 지역에서 옥결(옥 귀거리)이 인골과 함께 출토되었다. 기원전 6천 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까 세계 최초로 인간이 가공한 옥기다. 그런데 흥륭와문화와 같은 모양의 옥결이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유적에서 나왔다. 기원전 6천년까지 올라간다고 보고 있는 유적이다. 2007년에 전남 여수에서도 비슷한 옥결이 인골과 함께 발굴되었다. 모양이 흥륭와문화 옥결과 똑같다. 이들 유물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을까?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 문암리유적에서 나온 옥 귀걸이(사적 426호). 기원전 6,000년 이상으로 연대가 추정된다. 우실하 교수 제공

흥륭와에서 나온 옥결이 중국 내에서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연구한 사람이 있다. 홍콩 중문대학의 등총교수는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옥기 전문가다. 그의 논문을 요약하면 이렇다. “기원전 6000년께 요서지역 흥륭와문화에서 시작된 옥결은 기원전 5000~4000년께 장강유역에 전파되고, 기원전 2500년께 중국 광동성 광주 근처 주강유역까지 퍼졌다. 옥결은 기원전 2000년께 더 남쪽인 베트남 북부까지 전파되고 기원전 1000년께 운남성 일대와 베트남 남부까지 시간 차를 두고 확산되었다.”

한반도에도 비슷한 시기에 옥결이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흥륭와 옥의 성분을 분석했더니 직선거리로 400km 떨어진 랴오닝성의 수암이라는 지역에서 생산된 옥으로 밝혀졌다. 수암에서 조금만 더 가면 압록강이고 두만강쪽으로 동해를 타고 내려오면 문암리로 연결된다. 흥륭와 일대에서 발견되는 빗살무늬토기도 문암리 유적에서 똑같이 나온다. 이게 뭘 의미하느냐? 기원전 6천년에 흥륭와문화 단계에서는 한반도 북부지역과 요서, 요동 지역이 하나의 단일 문화권이었다는 이야기다.

 
 전남 여수시 안도패총유적에서 나온 귀걸이와 발굴 당시 사진. 안도패총의 귀걸이는 화산지역에서 나오는 흑요석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장강하류를 통해서 보다는 백두산 지역에서 백두대간 동쪽 동해안을 통해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남해안의 흑요석은 일본 화산지대의 것이라는 연구결과도 있다. 성분 분석이 필요하다. 우실하 교수 제공. 그래픽 문석진


역사적 상식을 깬 집단 거주지와 농경문화

흥륭와문화지에서 눈여겨볼 또 하나의 유적은 신석기시대 집단 주거지역인 ‘화하제일촌(중국 전체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집단 주거지)’이다. 이 주거지는 놀랍게도 해자 혹은 환호(외적이나 맹수의 접근을 막으려고 주거지 주변을 빙 둘러서 참호를 판 것)가 있는데, 폭이 4m, 깊이가 2m나 된다. 여기에서 150여 가구가 집단으로 거주했다는 것이다.

이런 집단 주거지가 흥륭와 일대에서 3곳이 발굴되었다. 해자나 환호는 적과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주거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이때부터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기초적인 정착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불에 탄 조와 기장이 무더기로 발굴되었는데, 이미 농경이 시작되었다는 명백한 증거다. 야만인의 땅이라고 믿어온 만주일대에서 기원전 6000년에 집단 거주지와 농경문화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역사적 상식을 깨는 것이다.

 
 신석기시대 집단 주거지역인 ‘화하제일촌’. 아래 부분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곳이 해자 혹은 환호이다. 우실하 교수 제공

 
흥륭와문화 유적지에서 발견된 치아 수술 흔적. 우실하 교수 제공. 그래픽 문석진

기원전 6천 년 이미 인공적인 치아 수술 흔적

위 사진은 흥륭와에서 발견된 치아 수술 흔적이다. 중국, 일본 학자들이 이것을 발굴하고 4년을 고민했다고 한다. 진짜 수술 흔적 같기는 한데, 기원전 6천년 흥륭와문화 시대에 치아 수술을 했다는 것이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학자들이 이 유골을 가져가서 4년간 집중연구를 해 2008년 2월 정식으로 기자회견을 했다. 틀림없이 인공적인 치아수술 흔적이라는 것이다. 두개골이 그대로 나왔고, 치아에 뚫린 구멍의 직경이 모두 같고 도구를 이용한 연마흔적도 발견되었다.

현미경 사진을 찍어봤더니 나선형 연마흔적을 발견했고 이것은 인공적인 도구를 사용하여 구멍을 뚫은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충치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뚫은 것이다. 그래서 정확한 수술 흔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두개골 수술은 유럽에서 기원전 7천 년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굴되었고, 중국에서도 기원전 4,500년 두개골 수술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렇게 이른 시기에 치아 수술 흔적이 발견된 것은 흥륭와 유적지가 유일하다.

 
사해문화시대 집단 주거지인 요하제일촌(사진 위)와 마을 한가운데 돌로 쌓은 용 형상물(사진 아래). 중국 학자들은 중화제일용이라고 부른다. 우실하 교수 제공

사해문화는 흥륭와문화 보다 시기는 조금 뒤지지만 연대는 거의 비슷하다. 두 문화가 비슷해서 보통 사해-흥륭와문화 또는 흥륭와-사해문화라고 함께 부르기도 한다. 사해유적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 요하제일촌이다. 이 집단 주거지가 발견돼 사해문화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여기도 해자 혹은 환호가 있고, 100여 가구가 살았다.

이 유적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을 한가운데 있는 용 모양의 조형물이다. 주먹보다 조금 큰 돌을 쌓아서 용 형상물을 만들었다. 길이가 19.7m, 폭이 넓은 곳은 2m, 좁은 곳은 1m다. 중국학자들은 ‘중화제일용’이라고 부른다. 사해유적에서는 용문 도편도 나온다. 뱀이 똬리를 튼 그림이 새겨진 토기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중국학자들은 이게 용에 대한 최초의 유물이라고 주장한다.

조보구문화 시대에는 최초의 봉황이 등장한다. 기원전 5,000년께 새 형상 그릇이 발견되었는데, 중국학자들은 이를 ‘중화제일봉’이라고 부른다.

채색 토기, 황하문명은 서역 전래설…요하문명은 독자적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보구의 채도(채색으로 장식한 토기) 존형기다. 그릇 형태가 특이하고 매우 정교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앙소문화에서 채도는 아주 넉넉하게 잡아도 기원전 4,500년인데, 조보구의 채도는 앙소문화보다 최소한 500년이 더 앞선 것이다.

앙소문화의 채도는 단순 기하문이거나 고기나 사람 얼굴을 그렸다면 조보구의 채도는 디자인이 훨씬 뛰어나고 정교하다. 채도를 평면으로 펴보면 현대적 디지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거기에 사슴, 돼지, 새 등의 머리를 한 용이 그려져 있다. 녹수룡, 저수룡, 조수룡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조보구문화 시대에 신성시 했던 주요 토템 동물들일 것이다.

 
조보구문화 소산유적 존형기의 신령도안. 우실하 교수 제공

채도 존형기가 의미하는 것은 요하문명이 독자적인 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황하문명을 대표하는 앙소문화의 채도가 서방에서 전래했을 것이라는 ‘채도서역전래설’이 세계 고고학계의 상식이다. 앙소문화 채도와 거의 똑같은 것이 서남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중앙아시아에서 기원전 6,000년경부터 발견된다. 지금까지는 채도가 서방에서 들어와 앙소문화 지역을 거처서 요서 지방 일대로 넘어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보구 채도가 그릇의 모양도 다르고 500년이나 앞서 있는 것을 보면 새로운 유입 루트를 상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오늘날 중국문화를 상징하는 최초의 옥, 최초의 용, 최초의 주거지, 최초의 토기, 최초의 치아 수술 흔적 등이 모두 요하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실하 교수, 정리=박종찬 기자pjc@hani.co.kr


동방 르네상스를 꿈꾸다 (2)
광개토대왕릉 빼닮아…백제 적석총도 같은 형태
7층짜리 거대 피라미드는 ‘판도라 상자’, ‘성소’ 여신묘에 곰 형상, 단군신화 웅녀족과 ‘끈’

중화문명 뿌리 찾다가 홍산문화 발견…요하가 원류 ‘정설’

이제 홍산문화로 들어가 보자. 홍산문화는 전기, 후기로 나눠는데 후기는 초기국가단계에 진입한다. 그래서 홍산문화는 요하문명의 꽃이라고 했다. 홍산문화의 발견은 전 세계 고고학계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줬다. 지금도 지속적으로 발굴되고 있다. 중국은 홍산문화가 발견되면서 상고사와 고대사에 대한 재편 작업에 들어갔다. 중국은 ‘동북공정’에 앞서 ‘하상주단대공정’, ‘중화문명탐원공정’이라는 역사 공정도 벌였다. 그런 공정의 시발점이 홍산문화의 발견이었다.

하상주단대공정은 중국의 고대국가인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의 존속 연대를 결정하는 것이 연구의 뼈대다. 이 세 나라가 언제 시작되어 언제 망했는지, 그 연대를 단정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을 단대(斷代·시대를 나누다)라고 한다. 그래서 하상주의 존속연대를 1년 단위까지 세밀하게 확정하는 작업을 했다. 5년 동안 동북공정처럼 수십억 돈을 쏟아부어 300명의 학자가 연구를 해 결론을 낸 것이다.

그 다음 작업을 한 것이 (하상주) 이전의 시기를 보기 위해, 즉 중화문명의 원류를 탐색하는 중화문명탐원공정이다. 중화문명탐원공정은 2000년부터 시작해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중화문명의 근원을 탐구하는 공정이라는 의미이다. 지금까지 대충 나온 결론은 중화문명은 요하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요하가 중화문명의 시발점이라는 거다. 중국학자 몇 사람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기본 입장으로 굳어지고 있다.

단군신화 다시 읽어야…그 이전의 역사는 없었나?

 
여신묘 터와 복원도 모습. 여신묘는 십자가 모양으로 중앙에 주실과 남실, 북실 등이 있었다. 우실하 교수 제공

자, 그럼 사진을 중심으로 홍산문화를 자세히 알아보자. 홍산문화의 꽃은 ‘우하량’ 유적이다. 그곳에서 거대 적석총과 여신묘가 나왔다. 우하량 지역에서는 많은 피라미드식 적석총이 나온다. 이 시대의 묘장문화가 적석총인데, 가장 큰 것은 한변이 60m가 넘는 거대 피라미드식 적석총이다. 여신묘(무덤이 아니라 여신의 사당)에서는 홍산문화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이 쏟아졌다. 이 일대(적석총과 여신묘가 발굴된 우하량 제2지점 지역)는 홍산문화 당시 성소였을 것이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터가 나왔다. 이 지역에서 반경 수십㎞ 이내에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주거지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지역을 성소로 본다.

여신묘는 십자형으로 돼 있는데, 주실에서 여신상이 나왔다. 가장 큰 여신은 인간 실물의 3배가량 된다. 명상하는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다. 눈은 둥근 청옥을 정교하게 갈아 넣었다. 그런데 여신 옆에서 진흙으로 실물 크기로 빚은 곰 형상이 발견되었다. 지금은 5천 년이 지났으니까 다 부숴져서 발 부분과 채색된 아래턱만 남아 있다. 이게 발굴이 되면서 홍산문화의 주도세력이 곰을 토템으로 숭배하는 민족이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단군신화의 웅녀족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지금은 대부분의 중국학자들이 곰 형상과 곰 토템 부족이었음을 인정한다.

 
여러 파편을 토대로 복원한 여신상 모습. 여신묘의 주실 한 가운데는 실물크기의 3배, 2배, 1배에 달하는 흙으로 만든 여신상이 출토되었다. 우실하 교수 제공

이제 단군신화는 다시 읽어야 한다. 단군신화라고 하면,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기원전 2333년에 우리들의 사고가 고정이 돼 있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역사는 없었나? 우리의 단군신화를 보면 처음에 환인이 있었고,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신시를 세웠다고 한다. (법륜 스님 역사특강 2강 참조)내려오자마자 단군이 탄생하나? 환웅족이 외부에서 유입되어(하늘에서 내려와) 한참 살다 보니까 곰족과 호랑이족이 와서 “인간을 만들어 달라” 애원하며 공존하는 시기가 있다. 그리고 한참을 공존하다가 곰이 여인이 되고 환웅과 결혼을 해서 단군을 낳는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느냐 하면 기원전 2333년 이전에도 우리 역사가 신화적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단군신화라는 신화구조로 남아 있다. 그리고 고조선 지역으로 추정하는 요서에서 (신화를 뒷받침 할) 유적이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다. 이것은 1980년 이전에 어떤 역사기록에도 없고 어느 누구도 몰랐던 것이다.

서양 틀로는 설명 못해…청동기 없이도 국가 형성 가능 보여줘

 
우하량 제2지점 제단 유적지 모습. 우실하 교수 제공

여신묘에서는 다량의 옥기가 출토되었다. 오로지 옥기로만 부장품을 넣어줬다. 이런 옥기를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을까? 중국의 옥기 전문가들이 옥을 자를 때 쓴 도구를 발견했는데, 그 시대와 동일한 조건에서 실험을 해봤다. 그랬더니 실제 발굴되는 것과 비슷한 1.5cm정도 두께의 옥에 모래나 옥가루를 뿌려가면서 나무 막대기를 돌려서 구멍을 파는데 순수한 작업시간만 31시간이 걸렸다. 홍산문화 유적에서 발견되는 정교한 옥기 하나를 완성하려면 엄청난 인력과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홍산문화 적석총에서는 옥기가 무더기로 발굴된다.

이는 홍산문화 시대에 옥기를 만드는 장인집단이 따로 존재했었고, 신분이 분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묘장 마다 크기가 다르고, 매장 방식이 다른 것도 신분 분화의 증거다. 중국 학자들은 홍산문화 시대에 최소한 7등급으로 신분이 분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씨족단계나 부족단계에서 무슨 여신묘를 짓겠나? 또 한 변이 20~30미터짜리 3층 피라미드식 적석총이나 가장 큰 60미터짜리 7층 피라미드식 적석총을 쌓으려면 엄청나게 많은 인원을 동원해야 했을 것이다. 씨족이나 부족 단위에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군중을 통솔할 수 있는 강력한 권력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는 홍산문화 당시 사회구조가 씨족이나 부족단계를 넘어서서 여신이라는 단일신을 중심으로 통합된 사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까닭에 중국학계에서는 홍산문화 후기 단계를 초기 국가단계, 초기 문명단계라고 보는 것이다.

우하량 제2지점 제단 유적지 안내문에는 ‘약 5500년 전에 이미 국가가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홍산문화유적지’라고 쓰여 있다. 기존의 역사학의 시각에서 보면 국가단계에 진입한다는 가장 유력한 증거는 문자와 청동기다. 홍산문화 시대에 문자와 청동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초기 국가단계라고 주장하는 것은 옥기가 있기 때문이다. 홍산문화의 유적이나 유물을 보면 청동기가 없어도 국가의 형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홍산문화나 요하문명이 발견되기 전까지 옥기시대라는 말이 만들어질 수 없었다.

이집트 피라미드보다 500-1000년 앞서…중원에는 없어

 
홍산문화 피라미드식 거대 적석총의 먼 거리 사진(왼쪽)과 가까운 거리 사진(오른쪽). 아직 정식 발굴이 되지 않았으나 7층 피라미드 구조의 적석총이다. 밑변이 60m×60m이고 남쪽에는 60m×40m의 제사터가 있다. 우실하 교수 제공

세계사적으로 청동기시대가 되면 여러 가지 문화사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우선 신격이 여성신 중심에서 남성신 중심으로 바뀐다. 그런데 홍산문하는 초기 국가단계로 넘어갔는데도 신이 여성신이다. 우리가 이제까지 지니고 있는 서양 역사를 기준으로 한 편년이나 틀에 하나도 안 맞는다. 문자나 청동기가 없는데도 이미 초기 국가단계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그렇다. 홍산문화 시기를 설명하려면 ‘옥기시대’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문제의 60m짜리 피라미드식 거대 적석총은 아직도 발굴이 안 된 상태다. 처음에는 그 규모가 너무 커서 무덤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주변을 파봤더니 돌이 쌓여 있었다. 이것도 혹시 적석총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시굴을 하고, 그것을 기초로 평면도를 그렸다.

 
거대 적석총 입체도와 평면도. 이형구 교수 제공

7층짜리 피라미드식 적석총인데, 한 변의 길이가 60m나 된다. 그 밑에는 가로 세로가 60미터, 40미터인 평평한 돌을 깐 제단까지 나왔다. 이 거대 적석총을 발굴하면 그 안에 뭐가 나올지, 진짜 세계적인 이슈가 될 것이다. 최소한 지금까지 나온 것보다 더 많은 게 나올 수밖에 없다. 저 큰 무덤 안에 달랑 옥기 하나 나올 리는 없지 않은가?

동북아시아 상고사와 고대사를 보는 눈을 새롭게 다 바꿔야 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가 메소포타미아 우르지역에 나오는데, 그게 기원전 2600-2500년까지로 추정한다. 그런데 홍산문화의 이 거대 적석총은 그것보다 500-1000년가량이나 앞선다. 크기도 어마어마하다. 이집트 피라미드도 기원전 2500년까지 밖에 안 본다.

이런 피라미드식 적석총은 중원에는 안 나온다. 중원 가까운 곳에서는 허베이성 위쪽과 내몽고자치구가 만나는 영하시에 있는 서하왕국의 서하왕릉에서 흙벽돌로 쌓은 피리미드식 묘를 발견할 수 있다. 거기는 전부 황토 고원이라 돌이 없으니까 흙으로 피라미드를 쌓았다. 그쪽 사람들의 조상 역시 홍산문화와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구려 수도 국내성 터 일대 적석총 수천 기 널려 있어

홍산문화의 피라미드식 적석총이 우리 민족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홍산인들이 고구려, 백제를 거쳐 한반도로 적석총 문화가 이어졌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장군총이다. 장군총은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이 있었던 중국 집안시에 있다.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장군총 앞에 서면 기가 죽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크다. 장군총의 한 변의 길이는 30미터, 31미터다. 그런데 평면도를 보면 홍산문화의 적석총과 구조가 똑같다. 물론 연대와 크기는 홍산문화 거대 적석총에 비교할 수 없지만. 장군총뿐만 아니라 광개토대왕릉, 북한이 발굴했다는 단군릉도 모두 7층, 9층의 피라미드식 적석총 구조다. 또 집안시의 환도산성 아래 ‘산성하 무덤군’에 아직도 수천 기의 크고 작은 피라미드 적석총이 널려 있다. 모두 홍산문화 적석총과 연결된다.

 
중국 집안시 산성한 고분군의 피라미드식 적석총. 우실하 교수 제공

어떤 사람들은 홍산문화 적석총과 고구려 적석총이 연결된다고 하면 ‘고구려 적석총은 빨라야 기원후 3~4세기 이고, 홍산문화 적석총은 기원전 3500년인데, 어떻게 4천 년 가까운 간격을 뛰어 넘어 두 유적을 연결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집트 사람들이 기원전 2500 년에 피라미드를 짓고 지금까지 한 번도 다시 지은 적이 없다. 또한 마야, 잉카문명을 일군 사람들이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들었지만, 그 이후로 현재까지 이들은 한 번도 그런 거대한 피라미드를 다시 지은 적이 없다. 그렇게 4천 년 동안 한 번도 안 지었다고 현재의 이집트인들이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의 경우에는 고구려, 백제 시대에 과거의 피라미드를 복원까지 하지 않았는가?”

홍산문화 시절엔 한국도, 중국도 없어…후손들 여러 갈래로

 
홍산문화의 피라미드식 적석총을 닮은 고구려 장군총(위 사진·조현 기자)과 백제의 피라미드식 적석총 조감도(왼쪽 사진)과 일본의 피라미드식 적석총(오른쪽 사진). 우실하 교수 제공

백제 적석총을 보면 고구려 장군총에 비해서 규모는 훨씬 소박하다. 그러나 형태는 홍산문화의 것과 거의 똑같다. 돌을 깎거나 다듬어 네모나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연석을 크기에 맞춰 축대 쌓는 식으로 가지런히 쌓았다. 일본에서도 3단으로 쌓은 피라미드 무덤이 발견된다. 당연히 백제를 통해 일본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이렇게 홍산문화에서 최초로 등장한 적석총이 고구려, 백제를 거쳐 일본까지 이어진다. 몽골 초원 지역에도 적석총이 많지만, 중원에는 없다. 서하왕릉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중화문화라고 할 수 없다. 서하는 요나라, 거란 시절에 독립왕국이 있었다. 그들도 어차피 홍산문화의 영역 안에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홍산문화 세력들이 전부 다 한반도로 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홍산문화 시절엔 중국도 없었고, 한국도 없었다. 일부 세력은 옥 귀걸이의 경우처럼 중원으로 남하하기도 하고, 다른 세력은 한반도로 내려오고, 또 한 세력은 몽골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 문화유형을 보면 앞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주요한 맥이 한반도로 내려왔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몽골에도 돌궐족이나 흉노족들의 무덤이 있다. 그들의 무덤도 전부 적석총이지만, 피라미드는 아니다. 그냥 돌무지무덤이다.(일부 피라미드식 적석총도 동몽골 지역에서 발견되기 시작했다. 이것을 몽골에서는 ‘돕조’라고 부른다. 몽골학자들과 연대해 연구 중이다.)

하가점-하층문화 톡톡 튀어나온 석성의 ‘치’, 고구려 성과 똑같아

 
하가점-하층문화에서 치를 갖춘 석성이 발견되기 전까지 치는 고구려 산성의 독특한 특징이었다. 하가점-하층문화 유적지인 중국 적봉시 오한치 삼좌점 석성의 치(왼쪽 사진·우실하 교수 제공)와 중국 랴오닝성 고구려 백암산성의 치. 조현 기자.

요하문명에서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문화가 하가점-하층문화다. 고조선의 대표적인 유물인 청동기 비파형 동검이 나오고, 고구려 석성의 독특한 형태인 ‘치를 갖춘 석성’의 원형이 발견된다. 치가 무엇이냐 하면 석성을 쌓을 때 일정 거리를 두고 톡톡 튀어나오게 한 부분이다. 지금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고대 군사 전략상 치는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적군이 치에 들어오면 한 방향이 아닌 삼면에서 적을 타격할 수 있어 성의 방어에 무척 용이했다. 고구려의 치를 모방해 당나라, 명나라 성에서도 치가 발견되는데, 치가 좀 더 발달한 형태가 옹성(甕城) 구조이다.

하가점-하층문화의 유적 가운데 삼좌점 석성에 아직도 치의 형태가 25개나 원형 상태 그대로 보존돼 있다. 4천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깨끗하게 남아 있다. 하가점-하층에서 치를 갖춘 석성이 나오기 전까지 치는 고구려 성에서만 발견되는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동아시아 어디에도 없는 고구려의 발명품으로 알았다. (시각차가 있을 수 있지만) 고구려와 하가점-하층문화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교과서에 나오는 비파형 동검 분포지역 지도를 바꿔야

 
현행 교과서의 비파형 동검 분포지도.

지도에서 비파형 동검(세형 동검을 포함)이 출토되는 지역을 보면 요서, 요동, 한반도 지역에 몰려 있다. 최근에는 산둥반도 주변에서도 한 두 개가 발견되기는 한다. 요서일대에서 이주한 세력이거나 유배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파형 동검은 중원에서는 하나도 안 나온다. 만리장성 바깥에, 요동, 요서, 한반도에 쫙 깔려 있다. 최근 요하지역에서 비파형 동검

이 무더기로 발굴되는 것을 감안하면 교과서에 나오는 비파형 동검 분포지역 지도를 바꿔야 한다. 현재의 교과서 지도로는 어디가 중심지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비파형 동검이 요서 지역 하가점-하층문화, 하가점-상층문화 지역과 한반도에서 무더기로 발굴되는 것은 두 지역이 동일한 문화권이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홍산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에서 발굴된 유물과 유적은 고조선, 고구려 등 우리 민족의 문화와 밀접하게 맥이 닿아 있다.

우실하 교수(한국항공대학교 인문자연학부), 정리 박종찬 기자 pjc@hani.co.kr


[한민족 시원, 만주] 동방 르네상스를 꿈꾸다 (3)
국경도 나라도 없던 시절… 동북아 시원문명 일뿐
역사란 흐름과 교류의 역사…민족주의 매도 안돼 “요하문명은 중국, 한국 누구의 것도 아니다”



▶요하문명과 역사공정의 축소판 요하문명전

 
요하문명전이 열리고 있는 중국 심양시 요녕성 박물관의 모습. 요하문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전시를 관람하려고 중국인들이 긴 줄을 서 있다. 조현 기자

중국은 하상주단대공정, 중화문명탐원공정, 동북공정 등 일련의 역사 공정을 통해 요하일대에서 중화문명이 발생했다고 보기 시작했다. 중화문명이 요하 지역에서 시작되었고, 이 일대 모든 민족들이 황제의 후예라는 것이다. 이것이 ‘요하문명론’의 실체다.
중국 심양시 요녕성 박물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전시 가운데 하나인 <요하문명전>을 보면, 요하문명의 실체와 중국의 의도를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요하문명전은 지난 2006년 6월에 처음 시작하면서 3개월만 전시를 하기로 했는데, 지금은 영구전시로 바뀌었다. 안내 도판인 ‘5제(帝) 시대의 3대 집단’이라는 큰 틀을 중심으로 시기별로 5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상고사의 주역을 3대 집단으로 재편…“모두가 황제의 후예”

 
중국은 요하문명이 발견되면서 상고사의 주역을 3대 집단으로 재편했다. 중원의 화하족을 화족과 하족으로 분리해 앙소문화 지역만을 염제 신농씨의 화족으로, 산동반도 인근의 전통적인 동이족 지역과 그 남부의 전통적인 묘만족 지역을 묶어서 하족으로, 요동과 요서를 포함한 지역을 황제족으로 명명했다. 우실하 교수 제공

‘5제 시대의 3대 집단’ 도판은 중국 상고사의 주역을 새롭게 3대 집단으로 재편하는 것으로 요하문명론의 가장 기초가 되는 시각이 담겨 있다. 기존의 모든 사서들은 중원의 화하족을 중심으로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이 있었다는 식으로 역사를 기술했었다. 화하족이 가운데 있고 나머지 동서남북에 오랑캐, 야만인들이 있었다는 것이 중국의 정통적인 역사관인 화이관(華夷觀)이다.

그런데 이런 전통적인 화이관을 깬 것이 요하문명의 발견이었다. 중원문명보다 앞서 있고, 발달된 문명이 발견되었는데 여전히 그들을 야만인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대 중국사를 이끈 집단을 다시 재편했다. 이 3대 집단이란, △중원의 화하족을 화족과 하족으로 분리해 앙소문화 지역만을 염제 신농씨의 화족으로 △산둥반도 인근의 전통적인 동이족 지역과 그 남부의 전통적인 묘만족 지역을 묶어서 하족으로 △요동과 요서를 포함한 지역을 황제족으로 재편한 것이다.

이것은 동아시아 상고사 전체를 재편하는 아주 무서운 전략이다. 기존의 동이, 서융, 남만, 북적 등을 모두 중화민족에 넣은 것이다. 신화시절부터 요하일대는 모두 황제의 땅이라는 것이고, 북방의 모든 소수 민족은 황제와 그 손자뻘인 고양씨 전욱과 고신씨 제곡의 후예라는 주장이다.(기존에는 황제는 북경 부근, 고양씨 전욱은 황하 중류의 위쪽, 고신씨 제곡은 황하 중류의 아래쪽이 세력권이라고 보았다.) 그렇게 되면 이 지역에서 발원한 단군, 웅녀, 해모수, 주몽 등은 모두 황제의 후예가 되어 버린다.
 
▶“고구려와 수·당의 싸움은 전쟁이 아니라 내전”

 
요하문명전 제1전시실 문명서광. 중화문명의 서광이 요하에서 비치기 시작했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조현 기자

제 1전시실 ‘문명서광’(文明曙光)의 핵심 내용은 중화문명의 서광이 요하에서 비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이전 중국은 최초의 원시촌락사회를 ‘앙소문화의 반파유적’으로 보았고, 문명의 서광을 장강유역의 하모도문화로 보았다.

제2전시실 ‘상주북토’(商周北土)는 요하문명 지역이 상나라, 주나라 시대부터 중원 왕조에 속해 있는 북쪽의 영토였으며, 이 시대부터 이미 북방의 모든 소수 민족은 중화민족의 일원이라는 것이 뼈대다. 제3전시실 ‘화하일통’(華夏一通)은 진나라, 한나라 시대를 기점으로 만주 일대가 중원 왕조의 판도 안에 들어왔고 이 지역의 모든 민족은 화하족(중화민족)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 핵심내용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 고구려와 수나라가 싸우고, 고구려와 당나라가 싸운 것은 전쟁이 아니라 내전이라고 주장한다. 전쟁은 독립국가끼리 하는 것이고 지방정부와 중앙정부가 싸운 것은 전쟁이 아니라 내전이라는 것이다. 최근 중국에서 고구려를 말할 때 항상 ‘동북지방정권 고구려’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4, 5전시실 주제는 각각 ‘거란왕조(契丹王朝)’와 ‘만족굴기’다. 거란과 만주족 청나라의 역사가 모두 중화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중국인들은 칭기즈칸(1162~1227)을 중국인이라고 주장한다.

중국이 벌이는 역사 공정은 기본적으로 통일적다민족국가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현재 중국 국경 안에 있는 모든 민족은 신화시절부터 중화민족이고, 그들의 역사는 중국사라는 것이다. 이런 역사관을 한국인이나 몽골인이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요하문명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요하문명전이 열리고 있는 중국 심양시 요녕성 박물관 내부의 모습. 맨 위가 제 5전시실이다. 조현 기자

그럼 진짜 요하문명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앞으로 끊임없는 연구를 하고 토론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요서와 요동을 포함한 만주지역은 중원과 전혀 다른 문명권이었다는 사실이다.

동북아시아 지형도를 보면 신석기시대 4대 문화가 왜 만주와 한반도로 전파되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새로운 문화는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통해 몽골초원을 거쳐 전파되었다. 몽골초원에서 대흥안령 남단을 거쳐 요서·요동지역으로 넓게 이어진 초원 길을 두고, 사막과 강과 산맥을 넘어서 중원지역으로 내려갈 이유가 없었다. 북방 유목 민족은 광대한 초원을 동서로 넘나들며 동·서 문화를 뒤섞었다. 그 동쪽 끝에 만주와 한반도가 있었다.

 
신석기 시대 4대 문화권 지도. 만주일대와 한반도 주역은 신석기 4대 문화권이 모두 중첩되는 세계 유일한 곳이다. 출처 정수일 ‘고대 문명 교류사’(사계절 출판사 2002. 70쪽) 그래픽 문석진

요하문명에서 발견한 유물과 유적 가운데 중원에서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 것이 있다. 빗살무늬토기, 피라미드식 적석총, 치를 갖춘 석성, 비파형동검 등이 그것이다. 이는 요하문명을 주도한 세력이 중원 세력과 다른 집단이며, 주맥이 만주와 한반도, 일본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문화권은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4대 문화인 빗살무늬토기문화, 거석문화, 채도문화, 세석기문화를 모두 수용하고 융합했다. 요하문명 세력들이 앞선 새로운 문명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문화를 흡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렇게 신석기시대 4대 문화권이 중첩되고 융합되는 곳은 전 세계적으로 이 지역이 유일하다.

▶“요하문명은 동북아의 시원문명이다”

그렇다고 요하문명 세력들이 전부 한반도로 내려왔다고 볼 수는 없다. 당연히 중원으로도 들어갔다. 요하문명을 놓고 ‘중국 것이다, 한국 것이다’라고 싸우는 것은 의미가 없다. 고대로 올라갈수록 ‘역사란 흐름과 교류의 역사다’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옛날에는 국경도 나라도 없었다. 현재 중국 땅에 있기 때문에 중국이 (요하문명을) 독자적으로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는데, 이는 ‘역사 민족주의’라고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주변국과 공유하며 공동으로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는 요하문명을 ‘동북아시아 시원문명’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지만 요하문명을 중국 것, 우리 것이라고 다투는 것은 의미가 없다. 명실상부한 동북아시아 시원문명이다. 이런 공통의 인식 위에서 새롭게 동북아문화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요하문명에서 출토된 유물과 유적.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우하량의 여신상, 빗살무늬토기, 비파형 청동검, 거대 피라미드 적석총, 우하량 제2지점 1호총의 묘와 부장된 옥기. 사진 조현 기자, 우실하 교수 제공

▶한국 상고사 연구를 위한 방향

요하문명은 중국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상고사 연구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한국 상고사 연구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하다.

우선, 단군 신화를 적극적으로 재검토하고, 동북 민족과 우리 민족을 연결하는 새로운 역사의 기틀을 짜야 한다. 우리도 중국인처럼 북방 민족을 야만인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우리부터 소중화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둘째, 만주 일대가 유목과 수렵문화라는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이 지역에서 6천 년 전 흥륭와문화부터 조와 기장을 중심으로 한 농경을 한 흔적이 발견되었고, 홍산문화 후기에 오면 대규모 농경이 이루어진 가장 앞선 선진문명을 가졌다는 것이 발굴을 통해 증명되었다.

셋째, 요하문명이 중원문명과 전혀 다른 ‘제5의 문명’으로 등극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역사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요하문명은 황하문명보다 앞섰고, 세계 어디에도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문명이기 때문이다.

넷째, 한반도 중심의 역사관을 만주, 몽골 초원,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넓혀야 한다. 마지막으로 요하문명 지역에서 출토된 신석기와 청동기, 특히 옥기를 연구할 학자를 길러야 한다.

▶‘동방 르네상스’를 위한 제안

서구문명이 한계에 이르자 서구인들은 ‘그리스·로마문명’의 전통에서 ‘고대로부터의 빛’을 발견했고, 이를 ‘르네상스’로 재구성하였다. 르네상스를 통해 새로운 문화적 피를 수혈해 승승장구하던 서구문명은 20세기를 지나면서 또다시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하였다. 이제 20세기 문명의 한계를 넘을 ‘고대로부터의 빛’은 동방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것이 ‘동방 르네상스’다. 문명의 뿌리를 함께 공유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진정한 동방 르네상스 시대를 열 수 있다. 한·중·일·몽골이 함께 열어갈 동방 르네상스를 꿈꾸며 몇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한다.

 
우실하 항공대 교수가 지난해 11월 서울 서초구 평화회관에서 열린 ‘청년 역사를 만나다’ 특강에서 요하문명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영상화면 캡쳐. 박종찬 기자

첫째, 21세기 동북아 문화공동체를 이루려면 ‘어디까지가 우리 땅’이라는 식의 역사관을 넘어, 역사를 ‘흐름과 교류의 과정으로 보는 새로운 역사관’과 ‘열린 민족주의’를 한·중·일·몽골이 공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특히 상고사에 대한 인식에서는 더욱 그렇다.

둘째, 요하문명이 탄생할 때는 중국도 한국도 일본도 없었다. 주변의 모든 국가가 요하문명을 ‘동북아 시원문명’으로 삼아 공동으로 연구해야 한다. 이를 21세기를 위한 ‘동북아 문화공동체’의 근원으로 삼아야 한다.

셋째, 한·중·일·몽골의 학자가 연계해야 한다. 그래서 동북아 고대문화에서 새로운 희망의 빛을 찾고,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문화철학을 가꾸어 가야한다. 이런 문화철학을 바탕으로 ‘동방 르네상스’를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 7천년, 8천 년 전 요하문명처럼 동북아시아에서 찬란한 문화의 꽃을 다시 피울 수 있을 것이다.

우실하 교수(한국항공대학교 인문자연학부)woosilha@kau.ac.kr 정리 박종찬 기자 pjc@hani.co.kr






출처 - 한 겨 레


<제1강> 대한민국 청년에게 고함 (1)
환인 한나라, 환웅 배달, 고조선, 고구려 터전
한민족의 광활한 뿌리, 고려에서 맥 끊겨, 신라는 정통성 없고 조선은 사대로 역사 ‘망각’



일본강점기까지 ‘만주’라고 불렸던 중국의 동북 3성인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은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 발해, 고려 등의 터전이었고, 항일독립운동이 펼쳐진 우리 민족의 주요한 활동무대였다. ‘민족의 성산’ 백두산 곳곳에는 한민족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최근 만주 일대에서는 고조선과 관련이 있는 유적과 유물이 잇따라 발굴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만주에서 펼쳐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복속하려는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자칫 웅대하게 펼쳐졌던 우리 민족의 역사가 증발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평화인권단체인 좋은벗들(이사장 법륜스님)은 해마다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아 ‘만주 역사기행’ 나서고,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역사특강을 개최한다. 지난해 11월 서울 서초구 평화재단에서 다섯 차례 열린 역사특강 ‘청년, 역사를 만나다’는 동북아 문명의 시원인 요하문명으로부터 시작해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와 항일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법륜 스님 등 다섯 분의 특강을 11 차례로 나누어 영상과 함께 싣는다. 우리 민족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다잡고 역사적 지평을 넓히는 길안내다. (편집자)

우리 민족사는 어떻게 형성되었나?

 
법륜스님이 좋은벗들이 지난해 10월16일 서울 서초구 평화재단에서 연 역사특강 ‘청년, 역사를 만나다’에서 강연하고 있다.
영상 캡쳐. 박종찬 기자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으로부터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 보자. 대한민국은 1948년 8월15일에 탄생했다. 그럼 대한민국은 어디에서 연유했을까? 대한민국은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한다. 임시정부라는 것은 본 정부가 따로 있고, 어떤 이유에서든 임시로 정부를 세웠다는 의미다.

현재 우리나라 국명은 대한민국이다. 그럼 이 국호는 어디에서 왔을까?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에서 왔다. 왕이 주인인 나라냐, 민이 주인인 나라냐에 따라 왕정과 공화정으로 나뉜다. 대한제국이라는 것은 왕이 주인인 국가다. 고종황제 때 조선왕조에서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 이유는 이렇다. 독립문, 독립협회, 독립신문은 어디로부터 독립하자고 세운 문이고, 단체이고, 신문일까? 많은 사람이 일본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럼 조선은 언제부터 청나라에 예속되었을까?

대한민국과 대한제국

일제의 식민지배는 일본이 우리를 직할로 지배한 것이다. 그 전에 조선은 청나라와 싸워서 졌다. 그 유명한 ‘삼전도의 굴욕’이다. (조선 인조는 1636년 청나라 장군 용골대가 이끄는 대규모 병력이 한양으로 쳐들어오자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항전하다 항복해 삼전도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고개를 숙이는 ‘삼배구도두’의 예를 갖추었다.<편집자>) 그래서 우리나라는 청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내치는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었지만 외교권은 없었다. 그런 면에서 조선은 완전한 독립 국가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개화파들이 독립협회 등을 만들어 청나라로부터 독립운동을 펼친 것이다. 대한제국은 이런 움직임과 맞물려 ‘우리가 청나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나라’라는 의미로 독립 연호를 썼다. 황제국가인 중국만 연호를 쓰는데,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은 독립된 연호를 쓰지 못했다. 대한제국이라는 나라 이름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부여와 고구려

대한제국의 모체는 조선왕조다. 조선왕국은 어디가 모체일까? 고려왕국이 모체다. 조선왕국이란 것은 빈 땅에 세운 것도 아니고, 원시적인 사회에 세운 것도 아니다. 나라가 원래 있었는데 주인만 바뀌었다. 왕만 바뀌었다. 왕의 성이 바뀌었다 해서 역성혁명이라고 한다. 조선과 고려는 결국 같은 나라다. 그러면 고려왕국은 어디를 계승했느냐? 고려 태조 왕건은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나라 이름도 고려로 지었다.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은 자신을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칭했다. 그게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와 있다. 해모수는 누구인가? 부여를 세운 사람이다. 고주몽이 바로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기엔 연대가 너무 멀다. 200년 가까이 차이가 난다. 고주몽은 말은 자신이 부여왕족이라고 선언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부여
를 세운 해모수는 자신을 단군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 민족사는 부여에서 단군 조선으로 이어진다.

고조선, 배달 나라, 한나라

 
 만주 일대에서 고조선 문화와 연관되는 유물이 잇따라 출토되고 있다. 중국 심양 요녕성박물관의 ‘요하문명전’에 전시된 청동검. 청동검은 빗살무늬토기와 함께 고조선 문화의 상징적 유물이다. 조현 기자

우리가 단군조선을 무슨 조선이라고 하나? 고조선이라고 한다. 나라 이름이 원래 고조선이 아니라 조선인데 후기에 조선이 또 생겼으니 구분하기 위해 옛날 조선을 고조선이라고 부른 것이다. 고조선의 통치자를 단군이라고 불렀으니 단군조선이라고도 한다. 단군은 자신을 환웅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환웅의 후예들이다. 환웅이 세운 나라가 배달 나라다. 우리 민족을 ‘배달겨레’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연유했다. 그럼 환웅은 누구의 아들인가? 환인의 아들이라고 했다. 환인이 더 근원이다. 환인이 세운 나라, 환인이 다스린 나라는 한나라라고 한다.

대한민국의 ‘한’은 한나라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있다. 그럼 환인의 한나라는 누구를 계승했을까? 그것은 없다. 그러니까 민족사가 한나라보다 더 올라갈 수 있다고 유추할 수는 있지만, 여기까지다. 구전이나 문서로 전해지는 것이거나 어떤 쪽에도 더 이상 얘기가 없다. 그래서 우리 민족사는 한나라가 시작이다.

열국, 또는 부여시대

 
 단군조선은 환웅을 계승했고, 환웅이 세운 나라가 배달 민족의 기원이 된 ‘배달나라’다. 인기 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 배우 배용준은 우리 상고사의 주인공인 ‘환웅’을 연기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다시 한번 우리의 민족사를 되풀이해본다면 제일 먼저 환인의 한나라, 환웅의 배달 나라, 단군의 조선 나라, 해모수의 부여, 고주몽의 고구려, 왕건의 고려, 이성계의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 대한민국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우리 민족사에 성립한 나라를 쭉 내려오면 빠진 나라들이 많다. 예, 맥, 신라, 백제, 가야, 옥저 등이다. 이런 나라들은 우리 민족사에서 어떻게 자리매김을 해야 할까?

고조선의 말기에 가면 여러 제후국이 세워진다. 작은 부족들이 다 독립해서 왕의 칭호를 쓰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이런 시대를 춘추전국시대라고 하고 우리 역사에서는 이 시대를 열국시대라고 한다. 열국시대의 맹주, 다시 말하면 중심은 부여였다. 부여시대가 열국시대다. 부여가 중심이지만, 주위에 작은 나라들이 거의 독립하다시피 포진했다. 옥저, 예, 동예 등이 있었고, 옥저에도 남옥저, 북옥저, 동옥저 하는 식으로 여러 개가 있다. 또 맥이라는 나라도 있었고 남쪽에는 한이 있었다. 고조선이 망하자 후손들이 이동해 한강 이남에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게 한이다. 한도 삼한(마한, 진한 변한)으로 나뉘어 있었다.

동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5국 시대

열국시대의 중심 나라인 부여 말기에 가면 부여를 계승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원부여족이 있었고, 거기서 갈라진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부여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그래서 갈라지기 전 부여를 원부여라고 하고 갈라진 뒤 부여를 동부여라고 한다. 이처럼 동부여가 있고 고구려가 있고 백제가 있었다. 그리고 한강 이남 아래 삼한 가운데 마한은 백제로 흡수되었고, 진한과 변한에서 신라가 나오고, 가야가 일어났다.

열국시대의 많은 나라는 결국 동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5국 시대로 정리가 되었다. 5국 시대에는 고조선과 부여로 이어진 역사의 주류, 정통성을 고구려가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부여와 백제는 고구려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세 나라가 심한 마찰을 빚었다. 정통성 경쟁에 아예 끼지 않았던 가야나 신라와는 마찰이 없었다. 그래서 신라가 위험에 처할 때 고구려가 도와주기도 했다.

3국 시대, 그리고 발해가 빠진 통일신라시대

5국 시대의 후기에 가면 동부여는 고구려에 합병이 되고, 가야는 신라에 합병이 돼 결국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가 열렸다. 삼국시대 말기에 신라가 강성해지고, 중국이 천하를 통일해 수나라, 당나라로 이어지면서 결국 나당연합군에 백제와 고구려가 차례로 멸망했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 가운데 대동강 이남 일부만 차지할 수 있었다. 이것을 두고 우리가 통일신라라고 부르는데, 이 시대의 신라를 통일신라라고 부르는 즉시 발해는 우리의 역사에서 제외된다. 발해가 없다고 보면 신라가 3국을 통일했다고 볼 수 있으나 발해를 놓고 삼국통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중국 요녕성 환인시 북동쪽에 있는 오녀산성.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이 첫 수도로 삼았던 곳으로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성터와 병영터, 우물터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진 조현 기자


남북국시대 또는 2국 시대

고구려의 정통성은 발해로 갔다고 봐야 한다. 신라는 처음에 독립적 연호를 썼지만, 시간이 지나고 중국에 조공을 바치면서 연호를 없앴다. 그래서 민족사 정통의 자격이 없다. 발해는 끝까지 연호를 쓰고 독립국가로서 위상을 가졌다. 발해 사람들은 고구려의 후예라고 자임했다. 인구 구성으로 보면 고구려인보다 말갈인이 많다. 그렇다고 말갈의 나라라고 말할 수 없다. 로마는 로마인들의 국가인데 구성원으로 보면 로마인보다 노예가 더 많았던 것과 같은 이치다. 옛날엔 왕만 고구려 사람이면 그 나라를 고구려라고 보았다.

발해는 명백히 고구려 후예들이 세운 나라다. 고구려를 부흥한 발해는 옛날 고구려 영토보다 2배나 더 커졌다. 말갈족이 사는 북쪽으로 영토를 2배나 넓혔으니, 인구구성상 말갈족의 비중이 높아진 것뿐이다. 정리하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을 하고, 대동강 이남에는 신라가 이북에는 발해가 들어섰기 때문에 민족사로 볼 때 이 시기를 남북국시대, 2국 시대, 양국시대라고 본다. 3국 시대에서 2국 시대로 갔다고 봐야 한다.

고려의 ‘다물사상’ 계승

신라와 발해가 멸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들어섰는데 그게 고려다. 고려는 영토나 인구 면에서 대부분 신라를 계승했다. 그러나 고려가 ‘우리는 신라를 계승한 국가’라고 말해버렸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고려 사람들이 투철한 역사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신라를 계승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신라는 누구를 계승했을까? 구전이나 문서로 신라는 누구를 계승했다는 게 없다. 고려와 고구려 사이의 나라가 신라와 발해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하면 신라와 발해를 모두 계승한 것이다. 신라만 계승해도 그렇고, 발해만 계승했다고 해도 민족사의 절름발이다. 고려를 세운 사람들이 역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민족사의 뿌리가 유지된 것이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역사가 중요하다.

고려는 건국 초기 ‘고구려의 옛 땅을 다 회복하겠다’는 큰 원을 세웠다. 고조선 말기에 중국 한 무제가 침입해 땅을 뺏겼다. 고구려는 나라를 세우자마자 고토회복을 하겠다고 했다. ‘우리 할아버지들이 살았던 조선의 옛 땅을 우리가 되찾겠다’는 선언이었다. 고구려가 대제국을 건설했는데, 남의 나라를 침공해서 대제국을 건설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 땅을 되찾은 것인가? 고구려의 전쟁은 침공이나 침략전쟁이 아니다. 남의 나라를 침공해서 땅을 뺏은 게 아니라 고조선의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것이 고구려의 ‘다물 사상’이고, 고려는 고구려의 다물사상을 계승했다.

서희의 강동 6주 담판이 의미하는 것

 
 서희와 소손녕의 ‘강동6주’ 담판. 거란이 “강동 6주는 발해의 땅이다. 우리가 발해를 멸망시켰다. 그래서 우리 땅”이라고 하니까 서희가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며 “고구려의 옛 땅이 다 고려의 땅이니까 강동 6주뿐만 아니라 만주까지, 우리 땅을 다 내놔라”고 반박해 새치 혀로 강동 6주를 얻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발해가 요나라에 망하자 고려는 북진정책을 펴서 대동강 유역에서 압록강으로 진출했다. 발해는 거란족에 의해 멸망했다. 거란은 발해의 옛 땅이 다 거란 땅이라고 생각했으니 고려의 북진은 자기 땅을 침공한 것으로 봤다. 이를 빌미로 거란이 침공해오자 서희는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새 치 혀로 강동 6주를 인정받았다. 거란이 “강동 6주는 발해의 땅이다. 우리가 발해를 멸망시켰다. 그래서 우리 땅”이라고 하니까 서희가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며 “고구려의 옛 땅이 다 고려의 땅이니까 강동 6주뿐만 아니라 만주까지, 우리 땅을 다 내놔라”고 반박했다.

거란 입장에선 혹 때려다 혹 붙인 꼴이 돼버린 것이다. 결국, 영토문제는 현상을 유지하는 것으로 하고 요와 고려가 국교를 맺었다. 그것으로 영토분쟁은 일단락됐다. 만약, 고려가 신라를 계승했다고 했으면 요나라 땅을 침공한 것이 됐을 것이다. 그럼 싸워서 이기든지 지든지, 길은 그것밖에 없었다.

고려의 역사의식과 조선의 자발적 사대주의

고려가 싸우지 않고도 외교술로 강동 6주를 차지할 수 있었던 건 올바른 역사관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라 사람들이라면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었을까? 없었다. 광활한 대륙이 우리 땅이라는 인식이 없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신라는 당나라가 대동강 이남 땅을 준 것만으로도 너무너무 감격했다. 역사의식의 부재다. 신라는 문화적으로 뛰어나고 부유했지만 역사관이 부족해 이런 문제를 초래했다.

반면 고려는 옛 땅을 회복하려 했지만, 당시 국제 정세가 너무 좋지 않았다. 거란족도 강했지만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는 더 강성했다. 요나라나 금나라만 해도 고려와 형제의 예를 맺고 화친했는데, 원나라는 너무 세서 군신의 예를 맺자고 하니까 고려 사람들이 인정을 할 수 없었다. 고구려 시절 복속된 민족이 세력이 강성해져 거꾸로 군신관계를 맺자고 하니까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배경에서 고려는 투철한 민족의식, 역사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세계 최강대국인 원나라와 당당히 맞서 싸웠다.

이렇게 강했던 민족의식이 언제부터 약소국 비슷하게 전환되었을까? 조선시대에 오면서 세력도 마음도 모두 약소국가로 전락했다. 즉 자발적 사대를 취했다. 그러면서 역사왜곡 현상이 빚어졌다. 오늘 우리가 역사를 다시 정립하자는 것은 우리 민족사를 상고사부터 다시 되돌아 보면서 웅대했던 역사의식을 되찾자는 것이다. 법륜 스님, 정리/박종찬기자 pjc@hani.co.kr  


<제2강> 대한민국 청년에게 고함 (2)
‘전설 따라 삼천리’가 아닌 역사 유물 쏟아져
북한 고립-남한 상실, 열린 민족주의로 가야


우리 민족 상고사를 위부터 다시 정리하면 환인의 한나라, 환웅의 배달나라, 단군의 고조선이다. 구전되어 오던 상고사를 기록한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인의 한나라는 약 3,300년간 지속됐다.

그럼 이 시대의 왕은 몇 명이나 됐을까? 이 기간이면 최소 70~80명은 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전해 내려오는 이름은 7명밖에 없다. 7명이 통치한 나라의 역사가 3,300년이나 되니까 1명당 약 500년씩 통치한 셈인데 그러면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그 수많은 통치자 중에 워낙 오래된 얘기라 현재까지 이름이 남아있는 사람은 7명밖에 없다고 이해해야 한다.

환인의 한나라가 어디쯤 있었겠느냐? (어디에서 왔을까?) 현재까지는 알 수 없다. 설은 여러 가지다. 바이칼 호 근방에서 남하했다는 설과 중국 서북쪽 톈산산맥 부근에서 이동해 왔다는 설이 있다. 환인 시대에 이어 환웅이 세운 배달 나라는 현재 여러 가지 고고학적인 유물과 결합시켜 보면 발해만 연안지역으로 보인다.

 
 환웅세력 이동 추정도. 바이칼호 근방에서 남하했다는 설과 중국 서북쪽 톈산산맥 부근에서 이동해 왔다는 설이 있다. 그래픽 문석진

그래서 요즘은 멀리서 이동해 온 것이 아니고, 바로 가까이(발해만 연안지역 인근)에서 기원했을 것이란 설도 제기된다. 그 당시에 수만 리를 이동해 가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객관적인 사료의 부족으로 환인의 한나라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아직 추정하기 어렵다. 그냥 옛날 기록으로만 말한다면 하늘나라, 신의 나라로만 인식되었다.

▶환인 시대, 민족의 근원이지만 시작은 아니다

황웅 무리가 이동해 온 경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환웅은 “천손이다. 하늘에서 왔다”고 주장했다. 문화수준도 토착민들에 비해 월등히 높았고, 옷도 잘 입으니까 원주민들은 저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후예들이라 믿었을 것이다. 어쨌든 문화사적으로 보면 좀 더 선진 문명을 가진 지역에서 발해만 연안지역으로 이동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미국 역사와 비교해 설명해 보자.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날로 나라의 역사를 따지면 200년밖에 안 되는 역사다. 그런데 청교도들이 영국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온 역사까지 따지면 더 올라갈 수 있다. 그렇다고 미국과 영국을 같은 나라로 보진 않는다. 뿌리는 같지만, 엄격히 다른 나라다. 영국에 뿌리를 둔 나라는 캐나다, 뉴질랜드도 있다. 그런 것처럼 한 나라에 뿌리를 둔 나라와 민족은 우리만이 아니라 여러 나라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한나라에서 시작해 12갈래로 민족과 나라가 갈라졌다거나 9갈래로 갈라졌다는 설이 있다.

 
 동아시아 인종 분포도. 한나라로 시작해 12갈래로 민족과 나라가 갈라졌다거나 9갈래로 갈라졌다는 설이 있다. 그래픽 문석진

따라서 한나라가 우리 민족사의 근원이라고 말할 순 있지만 우리 민족사의 시작을 한나라부터 잡기는 어렵다. 우리 민족사의 시작은 환웅이 이동해 와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 새로운 나라를 연, 신시를 연 때부터로 잡아야 한다. 이를 개천(開天)이라고 한다.

▶고대 동북아의 중심지, 발해만 연안의 ‘신시’

중국의 랴오닝성 서쪽, 허베이성 동쪽, 몽골자치구 남쪽이 만나는 발해만 연안지역은 동북아 문명의 중심지였다. 요하강 상류지역에 위치하고, 아래 대릉하가 흐른다. 환웅이 내려와서 처음 나라를 세우고, ‘신시’를 건설했다고 할 만한 지역이다. 신시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는 의미에서 신시(新市)라고 할 수도 있고, 신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라고 해서 ‘귀신 신’(神)자를 써서 신시라고 할 수도 있다. 신시를 세웠다는 말은 새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보통 선진 부족이 후진 부족에 와서 나라를 세울 때는 주로 정복 국가를 세운다. 토착민을 다 정복해서 노예로 부리고 영토를 뺏어서 나라를 세운다. 그런데 이 나라는 고도의 문명이 발달한 평화국가였다. 토착민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그들을 돕기 위해, 문화 수준을 높이기 위해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그게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국가를 세우면서 ‘선진문명을 가진 부족이 후진문명의 지역에 와서 그들의 이익을 위해 나라를 세웠다’고 선포한 것은 인류사에 드문 일이다. 나중에 실제로 그랬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몇 천 년 전 원시적인 문화를 가진 집단들이 그렇게 선포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이게 홍익인간 정신이다.

 
 환웅시대 신시 추정도. 중국의 랴오닝성 서쪽, 허베이성 동쪽, 몽골자치구 남쪽이 만나는 발해만 연안지역으로 추정된다. 그래픽 문석진

두 번째, 재세이화(在世理化)다. 쉽게 말하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이 땅에서도 이루어질지어다’라는 성경 구절과 과 같은 의미이다. 하늘이란 것은 선진문명이다. 그 법치, 문명, 도덕을 원시인들이 사는 미개한 나라에 와서 그대로 실현하겠다는 통치철학이다. 이는 이치를 말하는데, 이치란 곧 하늘의 법도다. 홍익인간, 재세이화는 그것 자체로 종교가 될 수 있을 정도로 굉장한 이야기다. 이렇게 신시가 탄생했다.

▶환웅시대, 청동기 문명으로의 전환

이 시대의 문명은 이미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환웅이 신시를 건설할 때 3,000명의 무리를 끌고 왔다고 했다. 당시 씨족, 부족이 고작 몇 십 명, 몇 백 명 단위였으니 엄청나게 큰 무리다. 이 사람들은 원시 채집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문명을 가졌다. 벌써 형벌을 관장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법률, 규칙이 있었다는 것이고, 곡식을 관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농경을 했다는 증거다. 원시부족이 아니고, 초기 국가의 형태를 띤 문명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시대 사람들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징표가 있었다. 그게 ‘천부인’(天符印)이다. 천부인은 청동거울, 청동검, 청동방울이다. 이들이 발달한 청동기 문화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당시는 신석기 시대로 청동기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때였다. 초기에 청동기는 제사 지내는 도구였다. 워낙 귀해서 신이 주신 선물이라 제사 지내는데 썼고, 제례를 지내는 제사장의 징표였다. (당시 제정일치 사회였다가 시대가 흘러가며 국왕과 제사장의 기능이 분화되고 제사장의 지위는 점차 약화되었다. 오늘날 무당이 굿을 하면서 방울과 칼을 흔드는 풍습은 당시 제사장이 지녔던 천부인의 징표에서 유래한다.) 청동기를 가졌다는 것은 천손이라는 징표이고 주변보다 월등한 문화를 가졌다는 상징이다.

 
 환웅시대 천손이라는 징표가 천부인이다. 천부인은 청동거울, 청동검, 청동방울이다. 그래픽 이규호

▶상고사 기록에 얽힌 비밀

환웅시대는 1대 환웅천왕으로부터 18대 거불단환웅까지 1,565년이나 지속했다. 18명의 통치자가 있었다는 것인데, 일인당 80년씩 통치했다는 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딱 18명이라기보다는 남아 있는 이름이 18명이다고 볼 수 있다. 첫 번째와 끝은 사람들이 확실히 알고, 중간에 확실히 행적 있는 사람만 기록에 남는 것이다.

먼 훗날에도 우리가 조선시대 27명의 왕을 다 기억할 수 있나? 처음의 이성계와 끝의 고종은 기억할 것이고, 태종, 세종, 영조, 정조 정도만 기억할 것 아닌가. 예컨대 사료가 다 불타고 내가 조선시대 역사를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준다고 하면 다 기록을 못 하고, 이성계가 나라 건국한 것 좀 쓰고, 태종 좀 쓰고, 세종 좀 쓰고, 세조 때 쓰고, 중간에 빼먹고, 영조·정조 좀 쓰고, 나머지는 지나간다. 이게 세월이 더 흐르면 태조와 고종만 남는다.

그런데 일연이 삼국유사를 쓸 때는 자료가 다 없어진 후니까 환인 시대에는 환인 한 사람, 환웅 시대에는 환웅 한 사람만 쓰고, 단군시대에는 단군 한 사람만 쓰고…. 그럼 환인 아들이 환웅이고, 환웅 아들이 단군이고, 그럼 환인은 3천 년 살아야 하고, 환웅은 천오백 년 살아야 하고, 단군은 2천 년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이 세 개의 나라가 3대가 된 거다. 비유하자면 고주몽 아들이 왕건이고 왕건 아들이 이성계라는 식으로 상고사가 기록되었다는 것이다.(웃음) 그러다 보니 우리의 상고사 기록이 전설 따라 삼천리처럼 신화 속 이야기로만, 후대 사람들이 지어 낸 과학적 사실이 아닌 허구로만 인식되어 왔던 것이다.

▶환웅시대의 영웅, 14대 치우천왕

환웅시대에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건 14대 자오지 환웅, 치우천왕이다. 이 치우천왕은 청동기를 가지고 제기로만 쓴 게 아니라 무기로 썼다. 청동기로 무기를 만들고 갑옷을 만들고 전쟁에 나가니까 돌 창 들고 싸우는 사람들과 상대가 안 됐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치우천왕과 싸워서 황제가 백전백패했다고 기록했다. 청동 투구를 썼으니 머리에 뿔이 났다고 한다. 싸울 때 불이 나고…. (쇠가 부딪히니까 불이 났다고 봤을 것이다.) 그 당시엔 천하무적이었다.

 
 중국 심양시 요녕성 박물관에 소장된 청동 투구와 청동기 무기. 환웅시대 14대 환웅인 치우천왕은 앞선 청동기로 중국 황제와 싸워 백전백승했다고 전해진다. 조현 기자

그리고 이때 이런 환웅이 세운 나라가 배달 나라다. 그래서 우리가 ‘배달의 자손’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개천 즉 하늘을 처음 열었다는 개천절은 누구에서 유래한 것일까? 개천절, 홍익인간·재세이화를 단군의 것이라고 기억하는 것은 역사적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단군이 아니라 환웅천왕이다.

▶ 성골에서 진골로 왕위가 바뀐 단군시대

 
 중국 심양시 요녕성 박물관에 전시된 여신상. 단군신화와 관련이 있는 곰을 섬기는 부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현 기자

환웅시대에 선진 천왕족들이 결국은 토착민들의 여자, 토착 귀족의 여자와 결혼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생긴 자손들은 아버지는 천왕족인데, 어머니를 보면 천왕족이 아니다. 같은 천왕족도 1등급 2등급이 있는 것이다. 처음엔 천왕족만 왕이 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가 천왕족이고 어머니가 토착민인 자손들도 부족장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후대의 부족장들은 순수 천왕족은 없었다. 또 배달 나라가 부패하면서 주변 부족장 중에 뛰어난 사람이 왕이 되었다. 그 사람이 단군이다. 아버지는 천왕족이지만 어머니는 곰족이라고 했다. 이는 곰을 신으로 섬기는, 여신으로 섬기는 부족의 어머니를 둔 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의 경우 왕위가 성골에서 진골로 바뀌었듯, 단군도 이런 식의 왕위 계승 과정을 거쳤다고 봐야 한다.

▶가림토 문자·어아악·조천무… 민족 문화의 원형질이 형성되다

단군왕검은 왕위를 계승하면서 부패한 것을 새롭게 일신했다. 수도를 아사달로 옮기고, 환웅천왕의 신시를 다시 복원하겠다고 말했다. 신시의 옛 법도를 다시 세웠다. 나라 이름도 조선으로 바꾸고, 임금의 칭호를 환웅에서 단군으로 바꿨다. 그렇게 단군의 조선 나라를 세우고, 배달 나라의 역사를 기록했다. 이것을 <배달유기>라 한다.

환웅시대에는 문자가 나왔다고 한다. 사슴의 발자국 무늬를 가지고 글자를 만들어 ‘녹도문’이라고 한다. 단군시대에는 녹도문을 더 발전시켜 한글의 원형인 36개의 가림토 문자를 썼다. 이 문자로 배달의 역사를 기록했다. 그리고 하늘에 제사지낼 때는 ‘어아악’을 부르고, 춤은 조천무를 추었다. 제례 음악과 제례 춤이 생겼다. 우리 민족 문화의 원형질은 단군시대에 만들어졌다.

▶문명의 쇠락과 상고사의 유실

이런 시대(상고사)의 우리 역사는 중국의 역사보다 훨씬 더 앞섰고 앞선 문명을 가졌다. 역사의 법칙이란 중심문명으로 자리 잡은 선진문명이 점점 쇠퇴하고, 변두리에서 영향을 받은 문명이 나중에 번성하는 것이다. 변방은 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중심은 몰락한다.

우리가 중국보다 앞선 상고사 문명을 가지고 있었으나 우리의 문명이 쇠락하면서 그것의 영향을 받은 중국 쪽 문명이 새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온 게 중국의 한나라다. 한나라가 등장할 땐 이미 조선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문화수준은 우리가 높았지만 문명이 쇠락할 땐 무력이 약해진다. 신흥강국은 경제력과 무력이 강하다. 결국 중국 한나라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그 이후에는 우리와 중국의 문명 수준이 비슷해지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다가 최근 1천년 동안은 우리가 거꾸로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문명이란 것은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흘러갔다가 도로 흘러오기도 한다. 중국과 우리는 가깝기 때문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최근까지 천년 이상을 우리가 중국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문명이 중국 문명의 아류처럼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인식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주장은 허황된 이야기였는데, 최근 우리의 상고사를 복원할 유적이 만주 일대에서 잇따라 발굴되고 있다. 환웅, 단군 시대 이야기가 전설 따라 삼천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할 수 있는 엄청난 유적과 유물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요하문명이다.

 
 중국 심양시 요녕성 박물관에 길게 줄을 서 있는 관람객들의 모습. 이 박물관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전시는 우리 민족 상고사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요하문명전이다. 최근 요녕성 등 만주일대에서 상고사와 관련이 있는 유물들이 잇따라 출토돼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조현 기자

▶중화문화에 대한 열등의식의 뿌리는?

우리는 왜 중국에 대해 문화적 열등의식을 가졌을까?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우리의 옛 역사, 배달시대, 단군 조선시대 역사가 다 없어졌다. 당나라는 고구려에 한이 맺혀 있어서 고구려를 멸족시키려고 했다. 역사책을 하나도 남김없이 불살랐다. 그래도 발해가 건국되면서 그 사료를 일부 복원했다. 그런데 발해도 이민족에 멸망했다. 특히 발해역사는 깡그리 유실되었다. 우리 스스로도 발해의 역사를 민족사에서 제외했을 정도였으니까. 우리가 신라의 역사를 계승했다. 그러나 신라 역사에 배달시대, 단군 조선시대, 부여시대 얘기가 없다. 신라는 고구려와 싸웠기 때문에 고구려 시대 역사도 별로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상고사가 유실될 수밖에 없었다.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의 유민들이 들어왔고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했기 때문에 전해들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옛 역사를 기록으로 많이 남겼다. 그러나 고려도 원나라의 침입을 받아 100년 가까이 싸우면서 굴복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자료가 거의 소실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자발적으로 사대를 취했다. ‘중국은 역사가 오래된 위대한 국가’라며 스스로 사대를 취했는데, 옛날 고기를 보니까 우리 역사가 더 길고 문명도 더 높았다는 것이 나오므로 이걸 중국이 알면 큰일이라 생각해서 금서가 됐다. 그러면서 우리의 역사도 민족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일본강점기에는 일본 사람들이 이 금서 목록목록에 있는 도서 등을 싹 뽑아서 갔다. 우리가 역사를 복원하려고 보니 남은 책이라곤 삼국사기와 몇 권의 역사 책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삼국사기는 삼국시대 이후를 기록한 것이다. 당연히 고구려 이전의 해모수의 부여와 단군의 조선, 환웅의 배달에 대한 기록은 남은 게 없다.

▶일본강점기 실증주의 사학의 대물림

일본강점기 때 우리나라에 대학이 생겼는데, 교수들은 다 일본 사람이었다. 그때 역사 공부했던 사람들은 일본 교수들이 서명한 합격 논문을 받아야 했다. 일본 교수들은 역사는 실증주의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 자체는 좋은 것이다. 그런데 (실증주의를 하려고) 우리 역사기록을 뒤지다 보니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라곤 거의 없고 중국의 기록에만 일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중국 책를 찾아서 그 책에 기록된 우리 역사의 편린을 찾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삼국지’란 것은 위나라, 오나라, 촉나라의 이야기다. 삼국지 가운데 ‘위지동이전’이라는 것이 있다. 위나라 동쪽 오랑캐에 대한 기록이다. 거기에 기록된 걸 보고, 우리 옛날에 이런 일도 있었다고 연구하는 식이다. 중국 책에서 뽑아서 우리 상고사를 정립하다 보니 우리 민족의 역사가 형편없는 역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역사를 우리가 배우다 보니 우리 마음속에 이미 우리 민족의 역사를 중국의 변방사로 인식하게 되어 민족적 열등의식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려면 우리는 상고사를 복원해야 한다. 그런데 왜 바뀌기 어려운가? 그 선생의 제자가 선생이 되고 그 제자가 또, 선생이 된다.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교과서를 쓰는데 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다 그 물줄기에 있다. 이것이 상고사를 다시 정립하는 데 있어 아직도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는 이유다. 그래서 상고사에 대한 새로운 정립이 필요하고, 이 상고사가 정립이 돼야 우리가 중국에 대한 열등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가 중국보다 낫다는 우월주의가 아니라 우리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민족적 열등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북한은 고립, 한국은 자기 상실…열린 민족주의로 가야

역사를 왜곡하자는 게 아니라 바로 잡자는 것이고, 과대하자는 게 아니라 잃어버린 걸 되찾자는 것이다. 우리가 잊어버린 것을 다시 새기자는 것이다.

우리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우리의 역사와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자신감이 있고 그래야 일본역사도 중국역사도 다 존중할 수 있다. 우리가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을 인정해 주기 싫은 것이다. 우리가 역사의 정체성이 있어 당당하면 상대방의 역사를 인정해줄 수 있다.

이는 세계화 시대의 시대정신과도 통한다. 세계화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두 가지 편향이 있다. 세계화하려다 와해 흡수되는 경우와 자기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다 고립되는 경우다. 지금 보면 북한은 고립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고 남한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쪽으로 가고 있다. 둘 다 문제다. 자기 정체성이 확고할 때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고 그래야 흡수되지도 고립되지도 않을 수 있다. 다시 말해 폐쇄된 민족주의가 아닌 열린 민족주의로 가야 한다.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이 민족사관의 정립이다. 그런 측면에서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는 인식 전환과 생생한 현장 중심의 학습이 병행되어야 한다. 감사합니다.

법륜 스님, 정리 박종찬 기자 pj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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