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한 겨 레

[한민족 시원, 만주] 고구려, 생각의 지도를 넓혀라 (1)
삼국시대 오나라와 군사동맹 맺고 맞상대
철과 무역 국력 바탕, 동아시아 최후 승자 - 광개토대왕 첫 인천상륙작전, 지중해국 우뚝

해륙사관으로 본 고구려사의 재인식


우리 역사를 보는 여러 가지 관점이 있다. 흔히 사관이라고 부른다. 우선 일본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역사적 무대를 한반도로 축소하려는 반도사관이 있었다. 이런 개념이 인식을 규정하고 인식이 실천을 낳아 반도의 숙명처럼 받아들이게 된 것이 사대주의다. 일본인들이 만든 철저히 잘못된 사관이다. 최근에는 반도사관을 뛰어 넘는 사관, 즉 대륙지향 사관이 활발하다. 우리 민족의 활동 범위를 한반도를 넘어 만주 일대까지 확장하려는 움직임이다.

그런데 삼면이 바다인 우리가 어떻게 대륙의 영향만 받았겠는가? 우리 민족의 역사에 해양 활동이 언급이 되어야 한다. 일본 하면 제국주의와 ‘왜구’가 떠오른다. 왜구는 해적이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보면 왜구보다 먼저 등장한 것이 ‘신라구’다. 신라해적인데, 나쁘게 볼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해양활동이 그만큼 활발했고, 역사가 깊다는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삼국시대에 우리 민족과 일본, 중국과의 교역과 교섭은 육지가 아니라 바다를 통해 주로 이뤄졌다. 고구려도 육지보다는 바다를 통해 중국과 거래했고, 일본과는 ‘고구려 루트’라는 것도 있었다. 한반도 주변 지역을 ‘동아시아 지중해’라고 명명할 만큼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바다의 역할이 중요했다. 동아시아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으면서 육지와 해양을 동시에 활용했다. 동아시아 지중해에서 중심의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해 번창한 나라가 고구려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대륙사관도 아니고 해양사관도 아닌, 제3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해륙사관이다.

한강 하구를 장악하면 한반도의 반을 장악하는 것

 
 중국 환인시 오녀산성. 오녀산성은 삼면이 천길 낭떠러지인 천혜의 방어진지로 주몽은 여기에 첫수도인 졸본을 세워 고구려를 일으켰다. 조현 기자 

재미있는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인천상륙작전의 원조는 누구일까? 물론 한국전쟁 시기인 1950년 맥아더 장군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인천상륙작전은 없었나?

한반도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이 경기만 일대다. 한강 하구를 장악하면 한반도의 반을 장악하는 것이다. 한반도 중심인 서울, 개성을 장악하려면 인천상륙작전이 불가피하다. 그래서 한강 하구, 특히 강화도가 중요했을 것이다. 거기를 목이라고 한다. 고구려가 신라로부터 강화도를 점령한 뒤 그 지역을 ‘혈구군’이라고 불렀다. 구멍 ‘혈(穴)’에 입 ‘구(口)’ 자를 썼다.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다시 탈취한 뒤에는 ‘해구(海口)’라고 했다. 바다의 입구라는 뜻이다. 오늘날로 보면 코어(core)이고, 허브(hub), 아이시(IC)의 구실을 하는 곳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고구려 시대 동아시아 국제관계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중국지역과 북방족, 일본 열도와 신라, 백제 등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그런 국제 질서가 완벽한 변동을 가져온 사건이 그 시대엔 무엇이었을까? 광개토태왕비의 비문에는 396년에 광개토태왕이 직접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했다’(率水軍討利殘國軍·솔수군토이잔국군)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 3개의 공격로를 이용했다. 첫 번째 공격로가 ‘한강수로직공작전’이었다. 강화도를 통해 한강 하구로 들어와 지금의 자유로, 강변북로를 타고 (백제의 근거지인) 천호동과 하남시 일대까지 공격했을 것이다.

 
광개토태왕비문에 새겨진 글자와 광개토태왕비문의 모습. 조현 기자 

두 번째 공격로가 바로 인천상륙작전이다. 광개토태왕 비문에 보면 396년 점령한 성 가운데 미추성이 나온다. 인천의 옛 이름은 미추홀이다. 미추성은 바로 지금의 문학산성이다. 인천상륙에 성공한 광개토태왕은 오늘날의 부평, 신월동, 목동단지, 영등포를 통해 지금의 천호동, 풍납토성까지 진격했다. 다른 한 공격로가 남양반도, 즉 화성을 거쳐 지금의 동탄지구, 판교지구, 분당, 광주를 넘어 풍납토성으로 가는 길이었다.

당시 백제군이 지켰던 곳에 오늘날 한강을 건너는 다리가 놓였고, 부동산이 급등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백제군 진지 가운데) 아직 다리가 놓이지 않은 곳이 있다면, 앞으로 다리가 놓이니까 그런 곳에 투자를 해야 하는 거다. (웃음) 광개토태왕이 공격하면서 거점으로 삼았던 대부분 지역도 소위 말하면 ‘뜨는 지역’이다.

 
인천에 있는 문학산성. 광개토태왕 비문에 보면 396년 점령한 성 가운데 미추성이 나온다. 인천의 옛 이름이 미추홀이고 미추성은 지금의 문학산성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부동산 투기하자는 것이 아니고, 이런 것이 역사적 실상이고 상상력이다. 역사는 추상화되면 안 되고, 구체화하고, 실제화해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 역사는 지나치게 추상화되고, 다 잘라버리고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늘 역사 이야기는 피부에 닿지 않고 관념적이었다.

위·촉·오만 있었다?…그런 엉터리 역사가 어디 있나

요즘 아이들은 삼국지를 많이 읽는다. 그래서 황춘, 하후돈 등의 장군은 다 아는데, 정작 안시성 성주가 양만춘 장군이라는 것은 모른다. 삼국지를 보면 그 당시 동아시아에는 위·촉·오 3국만 있고, 모든 영웅은 거기에 있는 것 같다. 삼국지가 배경이 되는 시대는 3세기 전반, 중반 시기인데, 그 시기에 고구려는 없었나? 고구려는 원시 상태에 있고, 위·촉·오는 제갈공명을 비롯해 엄청난 지략가가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그런 엉터리 역사가 어디에 있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랜만에 중화가 장악한 명나라 시절, 한족이 쓴 한족 중심의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을 보고 마치 중국이 자신의 모국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결코, 그렇치 않다. 그 시대 고구려가 있었다. 당시 고구려 동천왕이 오나라 손권과 군사동맹을 맺었다. 사신과 군수물자가 오고 가다가 동천왕이 손권이 보낸 사신의 목을 치고, 손권이 화가 나서 요동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 역사적 사실은 모른다.

장수왕 때인 439년, 말 800필을 실은 대규모 선단이 남포항을 출항해 상하이를 거쳐 수도인 남경으로 간 기록도 있다. 당시 말 800필은 오늘날 미사일과 전투기와 맞먹는 군수물자다. 중국은 통일된 시기보다 분열된 기간이 많았고, 비한족인 북방 유목족이 통치하는 시대가 더 길었다. 북방 유목족의 주력은 우리 민족과 가까운 선비족이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을 찬양하자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세계 역사 바꿔 온 유목세력의 동쪽 끝 큰 나라

 
고구려 강역도. 진하게 칠해진 직접 통치지역 외에도 몽궐지역까지 세력권이 넓게 분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문화방송 ‘느낌표’ 고구려 지도. 

고구려는 큰 나라였다. 고구려 땅은 특별한 땅이었다. 관념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환경으로 보면 그렇다. 문명이 전파하고, 교류한 두 가지 길이 실크로드와 초원의 길이다. 실크로드 위에 초원의 길이 있다. 실크로도는 일본인들이 상업적인 목적으로 띄우다 보니 동서양을 잇는 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더 막강하고 위력적인 길이 초원의 길이다. 그 길은 정치의 길, 문화의 길, 군사의 길이었다.

이 길에서 활동하던 세력들은 분열돼 있었지만, 특별한 계기를 만나면 통일을 하게 된다. 그러면 세계 역사가 바뀐다. 흉노족부터 돌궐족, 몽궐족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초원의 길을 평정했을 때 동서양의 역사가 바뀌었다. 칭기스칸도 마찬가지였다. 칭기즈칸이 동몽궐 출신인데, 최근에 몽골 학자를 중심으로 발해계라는 설도 제기된다. 이렇게 세계 역사를 바꿔 온 유목세력의 가장 동쪽이 어디인가? 고구려다.

고구려는 그 초원의 길, 동쪽 끝에서 700년을 영유했다. 유목종족과 중원의 한족과 경쟁하고 전쟁하며 그들의 핵우산 아래에서 조공을 바친 것이 아니라 당당히 맞서면서 700년을 버텼다. 고구려가 수나라와 전쟁 때 수 양재는 정병만 113만 3500명을 동원했다. 삼국지보다 더 큰 전쟁이 벌어졌다. 인류 역사상 1, 2차 세계대전을 빼고 가장 큰 전쟁이었다. 그 전쟁에서 고구려가 이겼다. 그 사이 수없이 많은 나라가 명멸을 했다. 그래서 동아시아 지역 최후의 승자는 고구려라고 할 수 있다.

당대 최대의 에너지원 틀어쥐고 영향력 행사

 
중국 집안시 국내성의 옛 성터 모습. 국내성은 고구려의 2번째 수도로 아파트가 지어진 도심 곳곳에 성터가 그대로 남아 있다. 조현 기자 

고구려가 막강한 힘, 즉 국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중국 사람들이 고구려를 평가하는 문장이 여럿 전해져 내려온다. ‘고구려 호전적이고 흉포하다. 고구려 사람은 교만하고 방자하다. 고구려 사람은 성질이 급하고, 평지도 산길 달리듯 한다.’ 이 모든 것이 중국인들의 기록이다. 아마도 그 반대가 고구려인들의 성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고구려 사람들은 독특한 사람들이다.

국력이 사람의 기상이 뛰어나다고 저절로 키워지는 것은 아니다. 테크놀로지(기술)와 자원이 필요하다. 그 시대 가장 중요한 자원은 철이었다. 당시 최고의 철 생산지는 요동지방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철 생산지인 안산 제철소가 만주에 있다. 고구려의 안시성도 원래 철 생산지이다. 요나라 때는 철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구려는 당대 최대의 에너지원을 틀어쥐고 있었다. 오늘날 중동 산유국이 석유 자원을 틀어쥐고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고구려는 앞선 제련기술로 산업과 군사력에서 앞설 수 있었다.

고구려는 철로 여러 제품을 만들어 무역도 활발하게 벌였다. 고구려가 약탈 경제로 성장했다고 배웠는데, 약탈 경제로 어떻게 700년간 버티면서 수많은 전쟁을 치뤄낼 수 있었겠는가? 장수왕 시절 대규모 선단을 운영한 것처럼, 북쪽에 철을 팔고 모피와 말을 사와 그것을 배에 싣고 다시 중원에 파는 중계무역을 벌였다. 이런 전통은 발해로 이어졌다. 발해도 일본에 호피, 표피, 웅피 등을 수출했다.

동아지중해론, 21세기 생존전략과 맞닿아

 
중국 등탑시 고구려 백암산성. 백암산성은 요동일대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성으로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해 고구려 산성의 독창성을 잘 보여준다. 조현 기자 

고구려 역사에서 우린 무엇을 배워야 하나? 역사학자로서 지금 시대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전환기라고 생각한다. 동아시아도 세계사적 변화의 한복판에 있다. 우리가 좋든 싫든 동아시아는 고대에 그랬던 것처럼 동아시아 공동체 연방이 탄생할 것이다. 이런 주장이 제기된 지 20년이 넘었다. 동아지중해론도 제기되었다. 동아시아 각국들은 대륙과 한반도, 일본열도와 군도에 둘러싸인 황해, 남해, 동해, 동중국해를 포함하고 있어 완전한 형태의 지중해는 아니지만 다국간 지중해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한반도는 모든 지역과 국가를 전체적으로 해양 네트워크로 연결할 수 있는 동아 지중해의 중심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고구려는 이런 지리적 위치를 잘 이용해 700년 동안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해양 활동이 활발하였고, 해양을 장악함으로써 주변국들의 외교망을 통제할 수 있었다. 국제정치에서 해양력(sea-power)을 본격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고구려의 해양 전략은 역사상 인천상륙작전을 최초로 감행한 광개토태왕 시절 본격적인 국제전략으로 채택하였고, 그 결과 고구려는 지중해적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즉 대륙과 한반도와 주변 해양을 한 틀 속에 넣고 조정할 수 있는 동아시아의 완전한 중핵자리를 확보한 것이다. 21세기도 마찬가지다.

윤명철 동국대 교수, 정리= 박종찬 기자 pjc@hani.co.kr



[한민족 시원, 만주]고구려, 생각의 지도를 넓혀라 (2)

정치-경제-문화 인터체인지로 ‘조정자’ 우뚝

동아시아 질서 재편기에 살아있는 성공 모델 - 광개토왕비·삼족오는 살아있는 ‘시대정신’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사람들이 고구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중국 정부가 추진한 동북공정(東北工程)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2002년 2월 사회과학원 산하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에서 동북공정이란 명칭의 학술 연구를 시작했다. 동북공정은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 아래 고구려는 물론, 고조선, 부여, 발해, 현재의 한국을 연구하는 작업이다.

▶중국의 동국공정이 되레 고마운 까닭

동북공정의 뼈대 가운데 하나는 고구려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다. 고구려 전체 역사를 현재와 미래의 국가발전 전략에 맞게 논리적이고 효율적으로 포장해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중국학자들은 고구려의 건국 과정과 귀속 문제 등 다양한 주장을 내놨는데, 핵심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동북공정은 고구려 역사를 중국사로 끌어들이고 있다. 만리장성이 한반도까지 뻗어나간 것으로 그린 중국사회과학원의 진·한시대 역사지도(오른쪽). 역사의 아침 제공. 

첫째, 고구려 영토는 역사적으로 중국의 영토라는 논리이다.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통일적 다민족인 중앙집권국가가 요동의 군현을 수복하려고 벌인 전쟁이다. 본국 통치계급이 영토확장을 위한 침략 전쟁은 아니다”라고 주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고구려 정권은 서한시기 변강 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고,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와 전쟁을 벌인 것은 고구려 땅이 자기 조상의 통치 지역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국학자들이 삼고 있는 역사적인 근거는 중국의 사료들과 함께 이를 수용한 삼국사기의 내용이다.

둘째, 고구려는 대대로 중국의 조공을 받치는 등 신속관계에 있었다는 논리다. “고구려가 대를 이어 중국 정권의 번국이었다”고 주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고구려가 처음부터 끝까지 중국에 예속하였고, 한나라부터 당나라까지 역대 중원왕조가 관할한 소수 지방정권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몰역사적이고, 비현실적인 동북공정의 주장은 결국 동북아 역사전쟁으로 비화하였다. 그 전쟁은 누구에게 이득을 안겨 주었을까? 동북공정으로 한국인들은 고구려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역사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중국이 얼마나 위험한 나라인지를 알게 되었다. 우리 민족에게는 천운이라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중국의 ‘동북공정’ 저지를 위한 기자회견이 국학원, 국학운동시민연합 등의 주최로 2006년 9월6일 오전 서울 종로 탑골공원 앞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중국은 동북공정을 중단하고, 모든 역사왜곡을 중단하라, 남북한 및 해외동포에게 공식 사과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신중화제국을 꿈꾸며 그 끝은 아시아 맹주

중국 정부는 고구려가 한국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몰랐을까? 중국 정부는 왜 고구려라는 아킬레스건을 건드렸을까? 중국 정부가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첫째, 동북공정은 신중화제국주의와 동아시아 질서 재편을 추진하기 위한 국가전략의 일환이다. 공산주의자로 알려진 마오저뚱은 철저한 중화주의자였다. 공산 중국에 이르러 중국은 더 제국주의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고, 주변의 국가와 소수 민족을 억압하고 독립을 빼앗았다. 대표적인 것이 몽골, 티베트, 위구르족 영토 탈취와 압박이다. 중국이 공북공정에서 고구려 영토권을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동북공정의 궁극적인 결말이 신중화제국주의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둘째, 만주지역에 대한 한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다. 중국과 한국 사이에는 간도 문제가 있다. 그리고 만주는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땅이다. 구한말 조선이 국권을 상실하자 많은 사람이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이 아닌 독립전쟁을 벌였다. 이들은 어떤 생각으로 독립전쟁을 벌였나? 고조선 이후 우리 민족이 출발한 곳, 만주에서 조선의 회복이 아니라 원조선의 회복과 옛질서를 회복하는 그런 꿈을 꾸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옛 고구려의 땅에서, 발해의 땅에서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전쟁을 벌였고, 우리 역사를 가르쳤다.

중국은 결속이 강화된 남북한 또는 통일한국이 만주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거나 영향력을 강화시킬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셋째, 앞으로 중화중심의 동아시아 혹은 아시아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전단계의 정지작업일 수 있다. 동아시아 공동체가 실현되면 정치, 군사적인 영토보다는 문화 영토, 그리고 경제 영토 개념이 적용될 가능성이 크다. 동아시아가 새로운 질서로 재편될 경우 만주와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입지를 보다 강화하려는 의도다.

넷째, 연해주 문제다. 이 문제는 아직 쟁점으로 부상하지는 않고 있다. 지금 러시아 영토인 핫산,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프스크 등 연해주는 1860년도까지 청나라의 땅이었다. 물론 옛 발해, 옛 고구려의 땅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연해주는 1860년 북경조약을 통해 빼앗긴 땅이기 때문에 수복의 대상이다. 또 중국이 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과 패권을 장악하려면 반드시 동해에 진출해야 한다. 연해주는 동해에 진출하는 관문이다. 그래서 중국은 연해주의 연고권을 주장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중국은 국제질서가 미주공동체, 유럽공동체 형태로 지역 블럭화하는 경향에 맞춰 아시아공동체가 탄생할 것으로 보고, 일본을 누르고 아시아의 맹주가 되려는 장기적인 국가전략 속에서 역사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동북공정, 서남공정, 서북공정, 몽골공정 등이 그것이다. 중국의 신제국주의적 속성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역사학자로서 이런 중국의 태도는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중국을 설득하려는 것이다.

▶고구려는 세계적 질서 재편기에 성공한 역할 모델

 
 고구려를 상징하는 상상의 새인 ‘삼족오’(세발 달린 까마귀). 한겨레 자료사진 

오늘 우리는 고구려를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하나?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배경에 동아시아의 질서 재편이 있다. 한·중·일의 신민족주의가 대두하고 있고, 새로운 갈등과 헤게모니 쟁탈전이 동아시아 한복판에서 숨가쁘게 펼쳐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패권다툼이 옛날에는 없었을까? 동아지중해에서 고구려와 수나라, 당나라의 70년 전쟁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국제대전이었다. 당시 동아시아 질서를 놓고 양대 세력인 고구려와 중국 세력이 질서 재편 전쟁을 벌인 것이다. 지금의 상황과 너무도 흡사하다. 고구려는 질서 재편기에 우리가 해야 할 방법과 성공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이 동아지중해 중핵조정론이다.

격변하는 국제질서의 재편 시기에 고구려처럼 우리를 동아지중해의 중심에 놓는 것이 필요하다. 동아지중해 중핵조정론은 센터론이나 제국주의의 개념과는 다르다. 동북아중심국가론, 한반도중심론과도 다르다. 중핵조정론은 (지리적으로) 가운데에 있으면서 역할만 조정하자는 것이다. 우리 같은 나라가, 어떻게 패권적 국수주의나 민족주의를 지향할 수 있나?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 늘 양 강대국인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어 있는 우리가 팽창적 국수주의를 추구할 수 있나? 우리는 삼족오처럼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중심과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야,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존을 이룩할 수 있다.

▶요동 대련-경기만-평택-동해시 거점 확보해 조정자로

이처럼 대륙적 질서와 해양 질서가 동시에 작용하는 동아지중해의 중심에서 조정자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구려는 바다와 육지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거점(목)을 장악함으로써 조정자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고구려 지도에서 보면 이런 전략적인 거점(목)이 여러 곳 보인다.

첫 번째 지역이 중국 요동반도의 끝 대련이다. 이곳을 장악해야 모든 물길을 장악할 수 있다. 고구려는 해양활동이 없었을까? 3면이 바다였고, 중국과 70년 전쟁을 벌이고, 일본열도와 계속해서 외교사신을 교환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수군 이야기가 나온다. 미천왕, 고국원왕 때는 배를 이용해 북방민족들과 군사동맹을 맺었다. 232년, 234년에는 손권의 오나라와 바다를 통해 군수물자를 주고받았다. 439년에 장수왕이 800필의 말을 중국에 보낸다. 수나라와 전쟁에서 이긴 612년에는 수나라 백성과 낙타 2필을 일본 열도에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런 것이 다 배를 통해, 바다를 통해 이뤄진 것이다. 고구려와 수나라와 당나라의 전쟁, 삼국통일 전쟁은 모두 해전에서 판가름이 났다. 그만큼 바다가 중요했고, 고구려가 바다를 장악하는데 대련은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두 번째 경기만이다. 한강을 장악하면 한반도 반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광개토대왕은 경기만을 장악하려고 396년에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집중 공격한다. 장수왕에 이르러 한강 일대를 완벽하게 장악한다. 이 일대를 장악해 고구려는 남북으로 분단된 중국을 대상으로 등거리 외교를 펼칠 수 있었다. 위연과 상해정권과 함께 북경정권을 압박하는 정책을 편 것이다. 또 백제와 신라, 왜가 중국과 교섭하는 것을 바다에서 차단할 수 있었다. 이런 등거리 외교를 오늘날 상황에 맞게 구상하면 러시아, 몽궐, 일본과 함께 중국을 외곽에서 포위하는 전술이 될 것이다. 당시의 외교적 주도권을 고구려가 쥐고 있었다. 이는 고구려가 해륙국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세 번째 지역이 평택, 화성을 연결하는 서해안 지역이다. 이 지역을 장악해야 중국의 해안지역과 경쟁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서해안 경제특구를 송도로 지정한 것은 잘못된 결정이다. 평택, 인천, 강화, 개성, 해주로 이어지는 범경기만 해안특별구를 지정하는 것이 맞다. 그래야, 중국의 해안지역과 경쟁할 수 있다. 반도적 스케일을 떨쳐버리고, 고구려처럼 해륙적 스케일을 회복해야 한다.

네 번째는 동해시가 중요하다. 동해는 그냥 빈 바다일까? 그럼 일본이 소외된다. 동북아 질서재편기에 일본은 가만있겠나? 일본이 동해 경제권으로 서해 경제권에 대항하는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 것이다. 또 중국 해군이나 상선이 동해에 진출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한국, 러시아, 일본이 동해 경제권을 활성화할 수밖에 없다.

고구려도 신라를 압박하고, 일본열도를 쉽게 건너려고 동해시를 거점으로 확보했다. 당시 이 지역에 고구려의 항로가 있었다. 일본과 중국을 거느리고 동아지중해의 조정자 역할을 하려면 동해 경제권을 띄워야 한다. 머지않은 미래에 동해시가 경제특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어수룩한 광개토왕비와 다리 세개인 삼족오에 시대정신이

 
 2005동북아청년캠프 대원들이 2005년 8월 중국 집안의 광개토대왕비를 살펴보고 있다. 집안/강재훈기자 khan@hani.co.kr 
나는 고구려가 문화국가라고 주장했다. 고구려의 고군벽화나 예술분야가 뛰어나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독특한 문화가 있는 나라라는 의미다. 고구려는 한반도와 만주, 몽골지역에 이르기까지 넓은 영토를 통치했다. 고구려 속에는 백제, 신라, 거란, 말갈, 선비족 등 종교와 생활양식, 풍습이 다른 다양한 종족들이 살고 있었다. 따라서 내부의 통일성이 깨지면 고구려라는 나라는 성립할 수 없었다. 중국은 정권이 바뀌면 정권을 잡은 사람을 중심으로 철저하게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정책을 폈다. 그러나 고구려는 주변의 모든 민족과 말 그대로 조화와 상생하는 방법론을 택했다.

무엇이 고구려를 결속시켰을까? 우선 고구려인들의 역할이 중요했을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스스로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자의식이 강했고, 주변 종족들에게도 이를 각인시켰다. 고구려인들은 스스로 천제지자, 화백지자, 천손지자, 황천지자, 천손, 일월지자 등으로 높여 불렀다. 이건 그 시대의 법칙이었다. 이렇게 주장을 해야 고구려인은 물론 주변 민족들이 고구려를 중심으로 모일 수 있었다. 그래서 고구려가 있는 곳(수도)은 우주의 중심이고, 그 중심에서 광개토대왕비나 장군총 같은 특별한 것이 만들어진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를 보면 고구려의 문화적 풍모가 잘 나타난다. 그 비는 중국의 그것처럼 거대하거나 위압적이지 않다. 강력한 힘이라든가, 피냄새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미완성품처럼 보이고, 어수룩해 보이고, 다분히 카오스적이다. 고구려인들은 당대에 가장 돌을 잘 다루던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이 돌을 다룰 능력이 없어서 비정형으로, 어수룩하게 광개토대왕비를 만들었을까? 거기엔 위압적이지 않으면서 더불어 살고자 하는 고구려의 시대정신이 압축적으로 담겨있다.

삼족오에도 고구려의 시대정신이 녹아 있다. 삼족오는 다리가 세 개고, 날개가 두 개고, 머리에 뿔이 달렸다. 다리가 세 개인 것은 각각의 역할을 의미하고, 조화를 상징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 중국, 일본이 평평하게 균형을 이뤄야 동북아의 평화와 공존이 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물류와 문류, 인류의 거점인 하트로

고구려은 정치, 군사적으로 조정의 역할, 경제와 물류 입장에서는 허브의 역할, 문화적으로는 인터체인지, 아이씨(IC)의 역할을 수행했다. 흔히 우리 문화를 설명할 때 브릿지론을 주장한다. 발달한 중국문화가 한반도를 통해 일본 열도로 건너갔다는 가교론이 그것이다. 이는 우리 문화의 한 부분을 설명하는 것일 뿐이다.

한반도는 문화의 인터체인지다. 지구상에서 가장 다양한 자연환경이 있고, 대륙과 해양이 만나고, 북방과 남방이 만나는 아주 독특한 곳이다. 그러니까 문화의 브릿지가 아니라 인터체인지가 되는 것이다. 나는 한발 더 나아가 4년 전부터 아예 ‘하트(heart)론’을 주장한다. 심장에서 피가 공급되는 것처럼 모든 문화가 여기에 모여 들어와 다시 힘을 얻어서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를 물류와 문류, 인류의 거점으로 만들자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고구려는 우리의 미래를 디자인할 때 중요한 모델이 된다. 고구려가 지금도 살아있고 고구려의 시대 정신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윤명철 동국대 교수, 정리=박종찬기자 pjc@hani.co.kr




 ◈윤명철 교수= 동국대 교양교육원 교수. 동국대 사학과 졸업. 성균관대 석사, 박사. 해양문화연구소장, 한민족학회 부회장, <지구문학> 편집위원, ‘좋은벗들’ 이사. 1993년 대한해협 뗏목 학술탐사를 시작으로 황해문화 뗏목 탐사를 두 차례 벌였다. 또 뗏목 장보고호를 타고 중국 절강성에서 인천을 경유, 제주도와 일본까지 43일간 학술 탐사를 벌인 탐험가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고구려사와 해양사이며, 4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광개토태왕을 통해 21세기 ‘고구리즘’(gogurism)의 실현을 꿈꾸고 있다. ‘역사는 진보하는가’, ‘바닷길은 문하의 고속도로였다’, ‘광개토태왕과 한고려의 꿈’, ‘광개토태왕, 생각의 지도를 넓혀라’ 등 25권의 저서와 120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윤명철 교수의 고구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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