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한 겨 레


<제1강> 대한민국 청년에게 고함 (1)
환인 한나라, 환웅 배달, 고조선, 고구려 터전
한민족의 광활한 뿌리, 고려에서 맥 끊겨, 신라는 정통성 없고 조선은 사대로 역사 ‘망각’



일본강점기까지 ‘만주’라고 불렸던 중국의 동북 3성인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은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 발해, 고려 등의 터전이었고, 항일독립운동이 펼쳐진 우리 민족의 주요한 활동무대였다. ‘민족의 성산’ 백두산 곳곳에는 한민족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최근 만주 일대에서는 고조선과 관련이 있는 유적과 유물이 잇따라 발굴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만주에서 펼쳐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복속하려는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자칫 웅대하게 펼쳐졌던 우리 민족의 역사가 증발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평화인권단체인 좋은벗들(이사장 법륜스님)은 해마다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아 ‘만주 역사기행’ 나서고,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역사특강을 개최한다. 지난해 11월 서울 서초구 평화재단에서 다섯 차례 열린 역사특강 ‘청년, 역사를 만나다’는 동북아 문명의 시원인 요하문명으로부터 시작해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와 항일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법륜 스님 등 다섯 분의 특강을 11 차례로 나누어 영상과 함께 싣는다. 우리 민족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다잡고 역사적 지평을 넓히는 길안내다. (편집자)

우리 민족사는 어떻게 형성되었나?

 
법륜스님이 좋은벗들이 지난해 10월16일 서울 서초구 평화재단에서 연 역사특강 ‘청년, 역사를 만나다’에서 강연하고 있다.
영상 캡쳐. 박종찬 기자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으로부터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 보자. 대한민국은 1948년 8월15일에 탄생했다. 그럼 대한민국은 어디에서 연유했을까? 대한민국은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한다. 임시정부라는 것은 본 정부가 따로 있고, 어떤 이유에서든 임시로 정부를 세웠다는 의미다.

현재 우리나라 국명은 대한민국이다. 그럼 이 국호는 어디에서 왔을까?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에서 왔다. 왕이 주인인 나라냐, 민이 주인인 나라냐에 따라 왕정과 공화정으로 나뉜다. 대한제국이라는 것은 왕이 주인인 국가다. 고종황제 때 조선왕조에서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 이유는 이렇다. 독립문, 독립협회, 독립신문은 어디로부터 독립하자고 세운 문이고, 단체이고, 신문일까? 많은 사람이 일본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럼 조선은 언제부터 청나라에 예속되었을까?

대한민국과 대한제국

일제의 식민지배는 일본이 우리를 직할로 지배한 것이다. 그 전에 조선은 청나라와 싸워서 졌다. 그 유명한 ‘삼전도의 굴욕’이다. (조선 인조는 1636년 청나라 장군 용골대가 이끄는 대규모 병력이 한양으로 쳐들어오자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항전하다 항복해 삼전도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고개를 숙이는 ‘삼배구도두’의 예를 갖추었다.<편집자>) 그래서 우리나라는 청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내치는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었지만 외교권은 없었다. 그런 면에서 조선은 완전한 독립 국가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개화파들이 독립협회 등을 만들어 청나라로부터 독립운동을 펼친 것이다. 대한제국은 이런 움직임과 맞물려 ‘우리가 청나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나라’라는 의미로 독립 연호를 썼다. 황제국가인 중국만 연호를 쓰는데,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은 독립된 연호를 쓰지 못했다. 대한제국이라는 나라 이름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부여와 고구려

대한제국의 모체는 조선왕조다. 조선왕국은 어디가 모체일까? 고려왕국이 모체다. 조선왕국이란 것은 빈 땅에 세운 것도 아니고, 원시적인 사회에 세운 것도 아니다. 나라가 원래 있었는데 주인만 바뀌었다. 왕만 바뀌었다. 왕의 성이 바뀌었다 해서 역성혁명이라고 한다. 조선과 고려는 결국 같은 나라다. 그러면 고려왕국은 어디를 계승했느냐? 고려 태조 왕건은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나라 이름도 고려로 지었다.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은 자신을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칭했다. 그게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와 있다. 해모수는 누구인가? 부여를 세운 사람이다. 고주몽이 바로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기엔 연대가 너무 멀다. 200년 가까이 차이가 난다. 고주몽은 말은 자신이 부여왕족이라고 선언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부여
를 세운 해모수는 자신을 단군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 민족사는 부여에서 단군 조선으로 이어진다.

고조선, 배달 나라, 한나라

 
 만주 일대에서 고조선 문화와 연관되는 유물이 잇따라 출토되고 있다. 중국 심양 요녕성박물관의 ‘요하문명전’에 전시된 청동검. 청동검은 빗살무늬토기와 함께 고조선 문화의 상징적 유물이다. 조현 기자

우리가 단군조선을 무슨 조선이라고 하나? 고조선이라고 한다. 나라 이름이 원래 고조선이 아니라 조선인데 후기에 조선이 또 생겼으니 구분하기 위해 옛날 조선을 고조선이라고 부른 것이다. 고조선의 통치자를 단군이라고 불렀으니 단군조선이라고도 한다. 단군은 자신을 환웅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환웅의 후예들이다. 환웅이 세운 나라가 배달 나라다. 우리 민족을 ‘배달겨레’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연유했다. 그럼 환웅은 누구의 아들인가? 환인의 아들이라고 했다. 환인이 더 근원이다. 환인이 세운 나라, 환인이 다스린 나라는 한나라라고 한다.

대한민국의 ‘한’은 한나라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있다. 그럼 환인의 한나라는 누구를 계승했을까? 그것은 없다. 그러니까 민족사가 한나라보다 더 올라갈 수 있다고 유추할 수는 있지만, 여기까지다. 구전이나 문서로 전해지는 것이거나 어떤 쪽에도 더 이상 얘기가 없다. 그래서 우리 민족사는 한나라가 시작이다.

열국, 또는 부여시대

 
 단군조선은 환웅을 계승했고, 환웅이 세운 나라가 배달 민족의 기원이 된 ‘배달나라’다. 인기 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 배우 배용준은 우리 상고사의 주인공인 ‘환웅’을 연기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다시 한번 우리의 민족사를 되풀이해본다면 제일 먼저 환인의 한나라, 환웅의 배달 나라, 단군의 조선 나라, 해모수의 부여, 고주몽의 고구려, 왕건의 고려, 이성계의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 대한민국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우리 민족사에 성립한 나라를 쭉 내려오면 빠진 나라들이 많다. 예, 맥, 신라, 백제, 가야, 옥저 등이다. 이런 나라들은 우리 민족사에서 어떻게 자리매김을 해야 할까?

고조선의 말기에 가면 여러 제후국이 세워진다. 작은 부족들이 다 독립해서 왕의 칭호를 쓰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이런 시대를 춘추전국시대라고 하고 우리 역사에서는 이 시대를 열국시대라고 한다. 열국시대의 맹주, 다시 말하면 중심은 부여였다. 부여시대가 열국시대다. 부여가 중심이지만, 주위에 작은 나라들이 거의 독립하다시피 포진했다. 옥저, 예, 동예 등이 있었고, 옥저에도 남옥저, 북옥저, 동옥저 하는 식으로 여러 개가 있다. 또 맥이라는 나라도 있었고 남쪽에는 한이 있었다. 고조선이 망하자 후손들이 이동해 한강 이남에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게 한이다. 한도 삼한(마한, 진한 변한)으로 나뉘어 있었다.

동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5국 시대

열국시대의 중심 나라인 부여 말기에 가면 부여를 계승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원부여족이 있었고, 거기서 갈라진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부여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그래서 갈라지기 전 부여를 원부여라고 하고 갈라진 뒤 부여를 동부여라고 한다. 이처럼 동부여가 있고 고구려가 있고 백제가 있었다. 그리고 한강 이남 아래 삼한 가운데 마한은 백제로 흡수되었고, 진한과 변한에서 신라가 나오고, 가야가 일어났다.

열국시대의 많은 나라는 결국 동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5국 시대로 정리가 되었다. 5국 시대에는 고조선과 부여로 이어진 역사의 주류, 정통성을 고구려가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부여와 백제는 고구려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세 나라가 심한 마찰을 빚었다. 정통성 경쟁에 아예 끼지 않았던 가야나 신라와는 마찰이 없었다. 그래서 신라가 위험에 처할 때 고구려가 도와주기도 했다.

3국 시대, 그리고 발해가 빠진 통일신라시대

5국 시대의 후기에 가면 동부여는 고구려에 합병이 되고, 가야는 신라에 합병이 돼 결국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가 열렸다. 삼국시대 말기에 신라가 강성해지고, 중국이 천하를 통일해 수나라, 당나라로 이어지면서 결국 나당연합군에 백제와 고구려가 차례로 멸망했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 가운데 대동강 이남 일부만 차지할 수 있었다. 이것을 두고 우리가 통일신라라고 부르는데, 이 시대의 신라를 통일신라라고 부르는 즉시 발해는 우리의 역사에서 제외된다. 발해가 없다고 보면 신라가 3국을 통일했다고 볼 수 있으나 발해를 놓고 삼국통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중국 요녕성 환인시 북동쪽에 있는 오녀산성.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이 첫 수도로 삼았던 곳으로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성터와 병영터, 우물터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진 조현 기자


남북국시대 또는 2국 시대

고구려의 정통성은 발해로 갔다고 봐야 한다. 신라는 처음에 독립적 연호를 썼지만, 시간이 지나고 중국에 조공을 바치면서 연호를 없앴다. 그래서 민족사 정통의 자격이 없다. 발해는 끝까지 연호를 쓰고 독립국가로서 위상을 가졌다. 발해 사람들은 고구려의 후예라고 자임했다. 인구 구성으로 보면 고구려인보다 말갈인이 많다. 그렇다고 말갈의 나라라고 말할 수 없다. 로마는 로마인들의 국가인데 구성원으로 보면 로마인보다 노예가 더 많았던 것과 같은 이치다. 옛날엔 왕만 고구려 사람이면 그 나라를 고구려라고 보았다.

발해는 명백히 고구려 후예들이 세운 나라다. 고구려를 부흥한 발해는 옛날 고구려 영토보다 2배나 더 커졌다. 말갈족이 사는 북쪽으로 영토를 2배나 넓혔으니, 인구구성상 말갈족의 비중이 높아진 것뿐이다. 정리하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을 하고, 대동강 이남에는 신라가 이북에는 발해가 들어섰기 때문에 민족사로 볼 때 이 시기를 남북국시대, 2국 시대, 양국시대라고 본다. 3국 시대에서 2국 시대로 갔다고 봐야 한다.

고려의 ‘다물사상’ 계승

신라와 발해가 멸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들어섰는데 그게 고려다. 고려는 영토나 인구 면에서 대부분 신라를 계승했다. 그러나 고려가 ‘우리는 신라를 계승한 국가’라고 말해버렸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고려 사람들이 투철한 역사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신라를 계승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신라는 누구를 계승했을까? 구전이나 문서로 신라는 누구를 계승했다는 게 없다. 고려와 고구려 사이의 나라가 신라와 발해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하면 신라와 발해를 모두 계승한 것이다. 신라만 계승해도 그렇고, 발해만 계승했다고 해도 민족사의 절름발이다. 고려를 세운 사람들이 역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민족사의 뿌리가 유지된 것이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역사가 중요하다.

고려는 건국 초기 ‘고구려의 옛 땅을 다 회복하겠다’는 큰 원을 세웠다. 고조선 말기에 중국 한 무제가 침입해 땅을 뺏겼다. 고구려는 나라를 세우자마자 고토회복을 하겠다고 했다. ‘우리 할아버지들이 살았던 조선의 옛 땅을 우리가 되찾겠다’는 선언이었다. 고구려가 대제국을 건설했는데, 남의 나라를 침공해서 대제국을 건설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 땅을 되찾은 것인가? 고구려의 전쟁은 침공이나 침략전쟁이 아니다. 남의 나라를 침공해서 땅을 뺏은 게 아니라 고조선의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것이 고구려의 ‘다물 사상’이고, 고려는 고구려의 다물사상을 계승했다.

서희의 강동 6주 담판이 의미하는 것

 
 서희와 소손녕의 ‘강동6주’ 담판. 거란이 “강동 6주는 발해의 땅이다. 우리가 발해를 멸망시켰다. 그래서 우리 땅”이라고 하니까 서희가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며 “고구려의 옛 땅이 다 고려의 땅이니까 강동 6주뿐만 아니라 만주까지, 우리 땅을 다 내놔라”고 반박해 새치 혀로 강동 6주를 얻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발해가 요나라에 망하자 고려는 북진정책을 펴서 대동강 유역에서 압록강으로 진출했다. 발해는 거란족에 의해 멸망했다. 거란은 발해의 옛 땅이 다 거란 땅이라고 생각했으니 고려의 북진은 자기 땅을 침공한 것으로 봤다. 이를 빌미로 거란이 침공해오자 서희는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새 치 혀로 강동 6주를 인정받았다. 거란이 “강동 6주는 발해의 땅이다. 우리가 발해를 멸망시켰다. 그래서 우리 땅”이라고 하니까 서희가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며 “고구려의 옛 땅이 다 고려의 땅이니까 강동 6주뿐만 아니라 만주까지, 우리 땅을 다 내놔라”고 반박했다.

거란 입장에선 혹 때려다 혹 붙인 꼴이 돼버린 것이다. 결국, 영토문제는 현상을 유지하는 것으로 하고 요와 고려가 국교를 맺었다. 그것으로 영토분쟁은 일단락됐다. 만약, 고려가 신라를 계승했다고 했으면 요나라 땅을 침공한 것이 됐을 것이다. 그럼 싸워서 이기든지 지든지, 길은 그것밖에 없었다.

고려의 역사의식과 조선의 자발적 사대주의

고려가 싸우지 않고도 외교술로 강동 6주를 차지할 수 있었던 건 올바른 역사관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라 사람들이라면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었을까? 없었다. 광활한 대륙이 우리 땅이라는 인식이 없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신라는 당나라가 대동강 이남 땅을 준 것만으로도 너무너무 감격했다. 역사의식의 부재다. 신라는 문화적으로 뛰어나고 부유했지만 역사관이 부족해 이런 문제를 초래했다.

반면 고려는 옛 땅을 회복하려 했지만, 당시 국제 정세가 너무 좋지 않았다. 거란족도 강했지만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는 더 강성했다. 요나라나 금나라만 해도 고려와 형제의 예를 맺고 화친했는데, 원나라는 너무 세서 군신의 예를 맺자고 하니까 고려 사람들이 인정을 할 수 없었다. 고구려 시절 복속된 민족이 세력이 강성해져 거꾸로 군신관계를 맺자고 하니까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배경에서 고려는 투철한 민족의식, 역사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세계 최강대국인 원나라와 당당히 맞서 싸웠다.

이렇게 강했던 민족의식이 언제부터 약소국 비슷하게 전환되었을까? 조선시대에 오면서 세력도 마음도 모두 약소국가로 전락했다. 즉 자발적 사대를 취했다. 그러면서 역사왜곡 현상이 빚어졌다. 오늘 우리가 역사를 다시 정립하자는 것은 우리 민족사를 상고사부터 다시 되돌아 보면서 웅대했던 역사의식을 되찾자는 것이다. 법륜 스님, 정리/박종찬기자 pjc@hani.co.kr  


<제2강> 대한민국 청년에게 고함 (2)
‘전설 따라 삼천리’가 아닌 역사 유물 쏟아져
북한 고립-남한 상실, 열린 민족주의로 가야


우리 민족 상고사를 위부터 다시 정리하면 환인의 한나라, 환웅의 배달나라, 단군의 고조선이다. 구전되어 오던 상고사를 기록한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인의 한나라는 약 3,300년간 지속됐다.

그럼 이 시대의 왕은 몇 명이나 됐을까? 이 기간이면 최소 70~80명은 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전해 내려오는 이름은 7명밖에 없다. 7명이 통치한 나라의 역사가 3,300년이나 되니까 1명당 약 500년씩 통치한 셈인데 그러면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그 수많은 통치자 중에 워낙 오래된 얘기라 현재까지 이름이 남아있는 사람은 7명밖에 없다고 이해해야 한다.

환인의 한나라가 어디쯤 있었겠느냐? (어디에서 왔을까?) 현재까지는 알 수 없다. 설은 여러 가지다. 바이칼 호 근방에서 남하했다는 설과 중국 서북쪽 톈산산맥 부근에서 이동해 왔다는 설이 있다. 환인 시대에 이어 환웅이 세운 배달 나라는 현재 여러 가지 고고학적인 유물과 결합시켜 보면 발해만 연안지역으로 보인다.

 
 환웅세력 이동 추정도. 바이칼호 근방에서 남하했다는 설과 중국 서북쪽 톈산산맥 부근에서 이동해 왔다는 설이 있다. 그래픽 문석진

그래서 요즘은 멀리서 이동해 온 것이 아니고, 바로 가까이(발해만 연안지역 인근)에서 기원했을 것이란 설도 제기된다. 그 당시에 수만 리를 이동해 가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객관적인 사료의 부족으로 환인의 한나라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아직 추정하기 어렵다. 그냥 옛날 기록으로만 말한다면 하늘나라, 신의 나라로만 인식되었다.

▶환인 시대, 민족의 근원이지만 시작은 아니다

황웅 무리가 이동해 온 경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환웅은 “천손이다. 하늘에서 왔다”고 주장했다. 문화수준도 토착민들에 비해 월등히 높았고, 옷도 잘 입으니까 원주민들은 저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후예들이라 믿었을 것이다. 어쨌든 문화사적으로 보면 좀 더 선진 문명을 가진 지역에서 발해만 연안지역으로 이동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미국 역사와 비교해 설명해 보자.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날로 나라의 역사를 따지면 200년밖에 안 되는 역사다. 그런데 청교도들이 영국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온 역사까지 따지면 더 올라갈 수 있다. 그렇다고 미국과 영국을 같은 나라로 보진 않는다. 뿌리는 같지만, 엄격히 다른 나라다. 영국에 뿌리를 둔 나라는 캐나다, 뉴질랜드도 있다. 그런 것처럼 한 나라에 뿌리를 둔 나라와 민족은 우리만이 아니라 여러 나라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한나라에서 시작해 12갈래로 민족과 나라가 갈라졌다거나 9갈래로 갈라졌다는 설이 있다.

 
 동아시아 인종 분포도. 한나라로 시작해 12갈래로 민족과 나라가 갈라졌다거나 9갈래로 갈라졌다는 설이 있다. 그래픽 문석진

따라서 한나라가 우리 민족사의 근원이라고 말할 순 있지만 우리 민족사의 시작을 한나라부터 잡기는 어렵다. 우리 민족사의 시작은 환웅이 이동해 와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 새로운 나라를 연, 신시를 연 때부터로 잡아야 한다. 이를 개천(開天)이라고 한다.

▶고대 동북아의 중심지, 발해만 연안의 ‘신시’

중국의 랴오닝성 서쪽, 허베이성 동쪽, 몽골자치구 남쪽이 만나는 발해만 연안지역은 동북아 문명의 중심지였다. 요하강 상류지역에 위치하고, 아래 대릉하가 흐른다. 환웅이 내려와서 처음 나라를 세우고, ‘신시’를 건설했다고 할 만한 지역이다. 신시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는 의미에서 신시(新市)라고 할 수도 있고, 신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라고 해서 ‘귀신 신’(神)자를 써서 신시라고 할 수도 있다. 신시를 세웠다는 말은 새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보통 선진 부족이 후진 부족에 와서 나라를 세울 때는 주로 정복 국가를 세운다. 토착민을 다 정복해서 노예로 부리고 영토를 뺏어서 나라를 세운다. 그런데 이 나라는 고도의 문명이 발달한 평화국가였다. 토착민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그들을 돕기 위해, 문화 수준을 높이기 위해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그게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국가를 세우면서 ‘선진문명을 가진 부족이 후진문명의 지역에 와서 그들의 이익을 위해 나라를 세웠다’고 선포한 것은 인류사에 드문 일이다. 나중에 실제로 그랬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몇 천 년 전 원시적인 문화를 가진 집단들이 그렇게 선포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이게 홍익인간 정신이다.

 
 환웅시대 신시 추정도. 중국의 랴오닝성 서쪽, 허베이성 동쪽, 몽골자치구 남쪽이 만나는 발해만 연안지역으로 추정된다. 그래픽 문석진

두 번째, 재세이화(在世理化)다. 쉽게 말하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이 땅에서도 이루어질지어다’라는 성경 구절과 과 같은 의미이다. 하늘이란 것은 선진문명이다. 그 법치, 문명, 도덕을 원시인들이 사는 미개한 나라에 와서 그대로 실현하겠다는 통치철학이다. 이는 이치를 말하는데, 이치란 곧 하늘의 법도다. 홍익인간, 재세이화는 그것 자체로 종교가 될 수 있을 정도로 굉장한 이야기다. 이렇게 신시가 탄생했다.

▶환웅시대, 청동기 문명으로의 전환

이 시대의 문명은 이미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환웅이 신시를 건설할 때 3,000명의 무리를 끌고 왔다고 했다. 당시 씨족, 부족이 고작 몇 십 명, 몇 백 명 단위였으니 엄청나게 큰 무리다. 이 사람들은 원시 채집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문명을 가졌다. 벌써 형벌을 관장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법률, 규칙이 있었다는 것이고, 곡식을 관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농경을 했다는 증거다. 원시부족이 아니고, 초기 국가의 형태를 띤 문명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시대 사람들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징표가 있었다. 그게 ‘천부인’(天符印)이다. 천부인은 청동거울, 청동검, 청동방울이다. 이들이 발달한 청동기 문화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당시는 신석기 시대로 청동기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때였다. 초기에 청동기는 제사 지내는 도구였다. 워낙 귀해서 신이 주신 선물이라 제사 지내는데 썼고, 제례를 지내는 제사장의 징표였다. (당시 제정일치 사회였다가 시대가 흘러가며 국왕과 제사장의 기능이 분화되고 제사장의 지위는 점차 약화되었다. 오늘날 무당이 굿을 하면서 방울과 칼을 흔드는 풍습은 당시 제사장이 지녔던 천부인의 징표에서 유래한다.) 청동기를 가졌다는 것은 천손이라는 징표이고 주변보다 월등한 문화를 가졌다는 상징이다.

 
 환웅시대 천손이라는 징표가 천부인이다. 천부인은 청동거울, 청동검, 청동방울이다. 그래픽 이규호

▶상고사 기록에 얽힌 비밀

환웅시대는 1대 환웅천왕으로부터 18대 거불단환웅까지 1,565년이나 지속했다. 18명의 통치자가 있었다는 것인데, 일인당 80년씩 통치했다는 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딱 18명이라기보다는 남아 있는 이름이 18명이다고 볼 수 있다. 첫 번째와 끝은 사람들이 확실히 알고, 중간에 확실히 행적 있는 사람만 기록에 남는 것이다.

먼 훗날에도 우리가 조선시대 27명의 왕을 다 기억할 수 있나? 처음의 이성계와 끝의 고종은 기억할 것이고, 태종, 세종, 영조, 정조 정도만 기억할 것 아닌가. 예컨대 사료가 다 불타고 내가 조선시대 역사를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준다고 하면 다 기록을 못 하고, 이성계가 나라 건국한 것 좀 쓰고, 태종 좀 쓰고, 세종 좀 쓰고, 세조 때 쓰고, 중간에 빼먹고, 영조·정조 좀 쓰고, 나머지는 지나간다. 이게 세월이 더 흐르면 태조와 고종만 남는다.

그런데 일연이 삼국유사를 쓸 때는 자료가 다 없어진 후니까 환인 시대에는 환인 한 사람, 환웅 시대에는 환웅 한 사람만 쓰고, 단군시대에는 단군 한 사람만 쓰고…. 그럼 환인 아들이 환웅이고, 환웅 아들이 단군이고, 그럼 환인은 3천 년 살아야 하고, 환웅은 천오백 년 살아야 하고, 단군은 2천 년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이 세 개의 나라가 3대가 된 거다. 비유하자면 고주몽 아들이 왕건이고 왕건 아들이 이성계라는 식으로 상고사가 기록되었다는 것이다.(웃음) 그러다 보니 우리의 상고사 기록이 전설 따라 삼천리처럼 신화 속 이야기로만, 후대 사람들이 지어 낸 과학적 사실이 아닌 허구로만 인식되어 왔던 것이다.

▶환웅시대의 영웅, 14대 치우천왕

환웅시대에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건 14대 자오지 환웅, 치우천왕이다. 이 치우천왕은 청동기를 가지고 제기로만 쓴 게 아니라 무기로 썼다. 청동기로 무기를 만들고 갑옷을 만들고 전쟁에 나가니까 돌 창 들고 싸우는 사람들과 상대가 안 됐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치우천왕과 싸워서 황제가 백전백패했다고 기록했다. 청동 투구를 썼으니 머리에 뿔이 났다고 한다. 싸울 때 불이 나고…. (쇠가 부딪히니까 불이 났다고 봤을 것이다.) 그 당시엔 천하무적이었다.

 
 중국 심양시 요녕성 박물관에 소장된 청동 투구와 청동기 무기. 환웅시대 14대 환웅인 치우천왕은 앞선 청동기로 중국 황제와 싸워 백전백승했다고 전해진다. 조현 기자

그리고 이때 이런 환웅이 세운 나라가 배달 나라다. 그래서 우리가 ‘배달의 자손’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개천 즉 하늘을 처음 열었다는 개천절은 누구에서 유래한 것일까? 개천절, 홍익인간·재세이화를 단군의 것이라고 기억하는 것은 역사적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단군이 아니라 환웅천왕이다.

▶ 성골에서 진골로 왕위가 바뀐 단군시대

 
 중국 심양시 요녕성 박물관에 전시된 여신상. 단군신화와 관련이 있는 곰을 섬기는 부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현 기자

환웅시대에 선진 천왕족들이 결국은 토착민들의 여자, 토착 귀족의 여자와 결혼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생긴 자손들은 아버지는 천왕족인데, 어머니를 보면 천왕족이 아니다. 같은 천왕족도 1등급 2등급이 있는 것이다. 처음엔 천왕족만 왕이 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가 천왕족이고 어머니가 토착민인 자손들도 부족장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후대의 부족장들은 순수 천왕족은 없었다. 또 배달 나라가 부패하면서 주변 부족장 중에 뛰어난 사람이 왕이 되었다. 그 사람이 단군이다. 아버지는 천왕족이지만 어머니는 곰족이라고 했다. 이는 곰을 신으로 섬기는, 여신으로 섬기는 부족의 어머니를 둔 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의 경우 왕위가 성골에서 진골로 바뀌었듯, 단군도 이런 식의 왕위 계승 과정을 거쳤다고 봐야 한다.

▶가림토 문자·어아악·조천무… 민족 문화의 원형질이 형성되다

단군왕검은 왕위를 계승하면서 부패한 것을 새롭게 일신했다. 수도를 아사달로 옮기고, 환웅천왕의 신시를 다시 복원하겠다고 말했다. 신시의 옛 법도를 다시 세웠다. 나라 이름도 조선으로 바꾸고, 임금의 칭호를 환웅에서 단군으로 바꿨다. 그렇게 단군의 조선 나라를 세우고, 배달 나라의 역사를 기록했다. 이것을 <배달유기>라 한다.

환웅시대에는 문자가 나왔다고 한다. 사슴의 발자국 무늬를 가지고 글자를 만들어 ‘녹도문’이라고 한다. 단군시대에는 녹도문을 더 발전시켜 한글의 원형인 36개의 가림토 문자를 썼다. 이 문자로 배달의 역사를 기록했다. 그리고 하늘에 제사지낼 때는 ‘어아악’을 부르고, 춤은 조천무를 추었다. 제례 음악과 제례 춤이 생겼다. 우리 민족 문화의 원형질은 단군시대에 만들어졌다.

▶문명의 쇠락과 상고사의 유실

이런 시대(상고사)의 우리 역사는 중국의 역사보다 훨씬 더 앞섰고 앞선 문명을 가졌다. 역사의 법칙이란 중심문명으로 자리 잡은 선진문명이 점점 쇠퇴하고, 변두리에서 영향을 받은 문명이 나중에 번성하는 것이다. 변방은 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중심은 몰락한다.

우리가 중국보다 앞선 상고사 문명을 가지고 있었으나 우리의 문명이 쇠락하면서 그것의 영향을 받은 중국 쪽 문명이 새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온 게 중국의 한나라다. 한나라가 등장할 땐 이미 조선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문화수준은 우리가 높았지만 문명이 쇠락할 땐 무력이 약해진다. 신흥강국은 경제력과 무력이 강하다. 결국 중국 한나라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그 이후에는 우리와 중국의 문명 수준이 비슷해지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다가 최근 1천년 동안은 우리가 거꾸로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문명이란 것은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흘러갔다가 도로 흘러오기도 한다. 중국과 우리는 가깝기 때문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최근까지 천년 이상을 우리가 중국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문명이 중국 문명의 아류처럼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인식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주장은 허황된 이야기였는데, 최근 우리의 상고사를 복원할 유적이 만주 일대에서 잇따라 발굴되고 있다. 환웅, 단군 시대 이야기가 전설 따라 삼천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할 수 있는 엄청난 유적과 유물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요하문명이다.

 
 중국 심양시 요녕성 박물관에 길게 줄을 서 있는 관람객들의 모습. 이 박물관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전시는 우리 민족 상고사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요하문명전이다. 최근 요녕성 등 만주일대에서 상고사와 관련이 있는 유물들이 잇따라 출토돼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조현 기자

▶중화문화에 대한 열등의식의 뿌리는?

우리는 왜 중국에 대해 문화적 열등의식을 가졌을까?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우리의 옛 역사, 배달시대, 단군 조선시대 역사가 다 없어졌다. 당나라는 고구려에 한이 맺혀 있어서 고구려를 멸족시키려고 했다. 역사책을 하나도 남김없이 불살랐다. 그래도 발해가 건국되면서 그 사료를 일부 복원했다. 그런데 발해도 이민족에 멸망했다. 특히 발해역사는 깡그리 유실되었다. 우리 스스로도 발해의 역사를 민족사에서 제외했을 정도였으니까. 우리가 신라의 역사를 계승했다. 그러나 신라 역사에 배달시대, 단군 조선시대, 부여시대 얘기가 없다. 신라는 고구려와 싸웠기 때문에 고구려 시대 역사도 별로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상고사가 유실될 수밖에 없었다.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의 유민들이 들어왔고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했기 때문에 전해들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옛 역사를 기록으로 많이 남겼다. 그러나 고려도 원나라의 침입을 받아 100년 가까이 싸우면서 굴복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자료가 거의 소실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자발적으로 사대를 취했다. ‘중국은 역사가 오래된 위대한 국가’라며 스스로 사대를 취했는데, 옛날 고기를 보니까 우리 역사가 더 길고 문명도 더 높았다는 것이 나오므로 이걸 중국이 알면 큰일이라 생각해서 금서가 됐다. 그러면서 우리의 역사도 민족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일본강점기에는 일본 사람들이 이 금서 목록목록에 있는 도서 등을 싹 뽑아서 갔다. 우리가 역사를 복원하려고 보니 남은 책이라곤 삼국사기와 몇 권의 역사 책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삼국사기는 삼국시대 이후를 기록한 것이다. 당연히 고구려 이전의 해모수의 부여와 단군의 조선, 환웅의 배달에 대한 기록은 남은 게 없다.

▶일본강점기 실증주의 사학의 대물림

일본강점기 때 우리나라에 대학이 생겼는데, 교수들은 다 일본 사람이었다. 그때 역사 공부했던 사람들은 일본 교수들이 서명한 합격 논문을 받아야 했다. 일본 교수들은 역사는 실증주의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 자체는 좋은 것이다. 그런데 (실증주의를 하려고) 우리 역사기록을 뒤지다 보니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라곤 거의 없고 중국의 기록에만 일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중국 책를 찾아서 그 책에 기록된 우리 역사의 편린을 찾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삼국지’란 것은 위나라, 오나라, 촉나라의 이야기다. 삼국지 가운데 ‘위지동이전’이라는 것이 있다. 위나라 동쪽 오랑캐에 대한 기록이다. 거기에 기록된 걸 보고, 우리 옛날에 이런 일도 있었다고 연구하는 식이다. 중국 책에서 뽑아서 우리 상고사를 정립하다 보니 우리 민족의 역사가 형편없는 역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역사를 우리가 배우다 보니 우리 마음속에 이미 우리 민족의 역사를 중국의 변방사로 인식하게 되어 민족적 열등의식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려면 우리는 상고사를 복원해야 한다. 그런데 왜 바뀌기 어려운가? 그 선생의 제자가 선생이 되고 그 제자가 또, 선생이 된다.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교과서를 쓰는데 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다 그 물줄기에 있다. 이것이 상고사를 다시 정립하는 데 있어 아직도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는 이유다. 그래서 상고사에 대한 새로운 정립이 필요하고, 이 상고사가 정립이 돼야 우리가 중국에 대한 열등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가 중국보다 낫다는 우월주의가 아니라 우리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민족적 열등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북한은 고립, 한국은 자기 상실…열린 민족주의로 가야

역사를 왜곡하자는 게 아니라 바로 잡자는 것이고, 과대하자는 게 아니라 잃어버린 걸 되찾자는 것이다. 우리가 잊어버린 것을 다시 새기자는 것이다.

우리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우리의 역사와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자신감이 있고 그래야 일본역사도 중국역사도 다 존중할 수 있다. 우리가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을 인정해 주기 싫은 것이다. 우리가 역사의 정체성이 있어 당당하면 상대방의 역사를 인정해줄 수 있다.

이는 세계화 시대의 시대정신과도 통한다. 세계화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두 가지 편향이 있다. 세계화하려다 와해 흡수되는 경우와 자기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다 고립되는 경우다. 지금 보면 북한은 고립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고 남한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쪽으로 가고 있다. 둘 다 문제다. 자기 정체성이 확고할 때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고 그래야 흡수되지도 고립되지도 않을 수 있다. 다시 말해 폐쇄된 민족주의가 아닌 열린 민족주의로 가야 한다.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이 민족사관의 정립이다. 그런 측면에서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는 인식 전환과 생생한 현장 중심의 학습이 병행되어야 한다. 감사합니다.

법륜 스님, 정리 박종찬 기자 pj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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