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한 겨 레

동방 르네상스를 꿈꾸다 (1)
용 옥 토기 주거지 등 중국문화 최초 상징 뿌리
‘제5의 문명’ 요하는 ‘중화’역사엔 없었다, BC 6천년 한반도-요하 단일 문화권, 유물 증거
 

최근에 요하문명에 대해 사람들이 많이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한국방송 ‘역사스페셜’(<제5의 문명 요하를 가다> 2009년 8월29일 방영)이 방송된 뒤에 많은 사람한테 전화를 받았다. 어떤 역사 교사가 전화를 해서 “학교에서 어떻게 가르쳐야 되느냐”고 묻더라. 아직 역사 교과서에는 단군이 신화로만 나오는데, 단군의 실체에 대해 학생들이 물어보고, “요하문명이 우리 문화와 연결돼 있는데, 왜 우린 그런 것을 배우지 않느냐”고 묻는다는 것이다. 교사들도 혼란스럽다고 한다. 이제까지 아무도 모르고 어떤 기록에도 없는 새로운 문명이 발견되었으니까 혼란스러운 것도 당연하다.

500년 앞선 하모도문화 발견에 중국이 난리 나 기원론 수정

우리는 지금까지 교과서를 통해 황하문명이 세계 4대 문명의 하나라고 배웠다. 중국문명뿐만이 아니라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문명의 시발점이 황하문명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1973년에 장강하류에서 하모도문화라고 명명된 어마어마한 신석기 유적이 새롭게 발견된다. 이 하모도문화는 기원전 4500-4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앙소문화(황하문명의 중심적 신석기시대 유적)보다 최소 500년에서 1천 년이 앞선다. 중국 전체가 난리가 났다. 그래서 이를 장강문명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때부터 중국에서는 중화문명은 황하문명에서 출발했다는 단일기원론이 아니라 황하문명과 장강문명 두 곳에서 시작됐다는 다기원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두 군데에서 문명이 시작됐다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하모도문화권에서 어떤 유적들이 발굴됐을까? 그때 이미 물을 가두어 농사를 지었다. 논둑을 만들어 물을 가두고 씨를 뿌렸던 것이다. 모를 길러서 심는 이양법을 제외하면 현재 우리가 하는 논농사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유적이 대규모로 나온다. 그것이 기원전 5천 년까지 올라가는 하모도문화다. 이것은 황하문명과는 다른 문명이다.

‘오랑캐 땅’의 앞선 문명인 옥기시대에 중국 더 큰 혼란…세계도 깜짝

장강문명이 새롭게 발견되었을 때만 해도 중국학계의 혼란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어차피 중국 땅에 있으니까…. 중국 사람들은 만리장성 밖은 다 야만인의 세계로 보았다. 실제로 만주 일대에서 변변한 문화 유적이 발견된 적도 없었고, 새로운 유물이 발견되면 모두 황하문명 지역에서 전파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1980년 초 만리장성 북쪽 요서 지방 일대에서 어마어마한 신석기 유적이 무더기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그게 요하문명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기원전 7천 년까지 올라가는 소하서문화가 가장 이른 시기인데, 그보다 더 이른 시기의 유적과 유물이 나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 인식 속에 요동, 요서, 만주를 생각하면 말 달리던 선구자 생각나고, 수렵·목축하는 유목민을 떠올리는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마어마한 새로운 신석기 유물이 계속 나오니까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홍산문화(紅山文化·기원전 4,500~3,000년) 단계에 오면 이미 초기 문명단계, 초기 국가단계에 진입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문명이라는 말은 아무 데나 붙이는 것이 아니다. 문명이라고 불릴 정도라면 그 문명단계가 성립할 대표적인 유물과 유적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청동기가 나오든지, 문자가 나오든지, 권력분립이 일어났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징표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아직까지는 요하문명의 꽃이라고 불리는 홍산문화 시기에서는 청동기나 문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청동기나 문자가 없는 문명단계, 국가단계는 세계 역사에서 많다. 단적인 예로 몽골제국은 전세계를 제패한 대제국이었지만 문자가 없었다. 제국 형성 이후에 필요에 의해서 새롭게 문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학자들은 이제까지 우리가 서양의 역사를 중심으로 시대를 구분했던 타제석기, 마제석기, 청동기, 철기라는 시대 구분은 동북아시아에서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동북아시아의 경우에는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타제석기와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청동기 중간에 옥기시대를 새롭게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순에 빠진 중국이 역사 재편 작업 들어간 것이 동북공정

이렇게 신석기 문화를 발견한 것까지는 좋은데, 발굴하고 나니까 중국 입장에서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오랑캐의 땅이라고 했던 지역에서 황하문명보다 시기도 더 앞서고, 문화의 발전수준도 더 높은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지니까 기존의 역사학계에서는 난감했던 것이다. 오랑캐의 땅에서 중화문명의 중심인 황하문명보다 앞선 유적들이 나오니까….

결국 중국은 요하문명의 발견과 더불어서 상고사에 대한 전체적인 재편 작업에 들어갔다. 중화문명은 요하문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요하 일대는 원래 중화민족의 시조라는 황제의 영역”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여기가 황제가 활동하던 곳이고, 황제가 여기서 문명을 건설하고 내려오면서 또 중원에서 문명을 이뤘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유로 요하 일대에서 발원한 모든 소수 민족은 모두 황제의 후예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중국의 일부 학자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다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 수많은 논문들이 요하문명을 전설적인 인물인 황제와 연결하고 있다.

최근 고구려사가 중국사라고 한 동북공정 때문에 말이 많다. 동북공정은 고구려 공정이 아니다. 동북공정의 진짜 의도는 동북지역의 모든 소수민족의 역사를 전부 중국사로 만들려는 것이다. 신화부터 시작해서 요하 일대에서 기원한 고조선, 단군, 해모수, 주몽 전부 다 황제의 후예라는 것이다. 우리 한민족은 황제의 후예인가? 단군의 후예인가? ‘그래 너희는 단군의 후예인데, 단군이 바로 황제의 후예다.’ 이런 논리로 가고 있다. 지금, 요하문명 때문에 중국의 상고사와 고대사가 모두 재편되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요하문명 세력이 진짜 중국 황제의 후손이었나?

자 그럼 이 지역에서 무엇이 발견되었는지, 사진 자료 중심으로 보여주겠다. 그 문명의 주도세력은 누구였는지? 진짜 황제의 후손이었는지 확인해 보도록 하자.

요하문명은 요하를 끼고 형성된 문화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요하 상류는 내몽고자치구의 동북쪽에서 랴오닝성 발해만에 이르는 큰 강으로 수많은 지류를 지니고 있고, 이게 발해만으로 흐르는데 ‘ㄱ’자 모양이라고 보면 된다. 요하를 중심으로 신석기 문화인 △소하서문화(기원전 7,000~6,500년) △흥륭와문화(기원전 6,200~5,200년) △사해문화(기원전 5,600~) △부하문화(기원전 5,200~5,000년) △조보구문화(기원전 5,000~4,400년)가 형성되었다. 홍산문화는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전기는 신석기시대(기원전 4,500~3,500년)로 출발해 후기에 석기와 청동기가 혼재된 문화(동석병용시대·기원전 3,500~3,000년)로 발전하였다. 홍산문화 후기에 들어 초기국가단계로 진입한다.

 
 요하지역 중요 신석기문화 지역 분포도(출처: 우실하 ‘고조선의 강역과 요하문명’)


동석병용시대는 소하연문화(기원전 3,000~2,000년)에서도 발견되었고, 이후 초기 청동기시대인 하가점하층문화(기원전 2,000년부터)를 거쳐 고급 문명사회로 발전하게 된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유물이 최초로 발견된 지역의 지명을 따 붙인 것이고, 지금도 수없이 많은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홍산문화만 하더라도 지금까지 발견된 지역이 500곳이 넘는다. 한 예로 홍산문화의 중심지인 적봉시 인근 오한치박물관에 가면 하가점-하층문화가 발견된 지역만 2천 곳이 넘는다.

중국 본토에선 없던 고조선 상징 비파형동검, 한반도에선 무더기로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홍산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다. 홍산문화는 요하문명의 꽃이다. 요하문명이라고 하면 소하서, 흥륭와, 사해문화 등을 모두 포함하지만 문명단계로 진입하는 시기가 홍산문화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게 친다. 홍산문화가 요하문명의 꽃이라면 우하량 유적지는 홍산문화의 꽃이다. 여기서 제단터와 여신상 등 홍산문화를 상징할 유적과 유물이 쏟아졌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학자가 하가점-하층문화가 고조선과 연결된다고 보고 있다. 이 지역에서 고조선의 상징인 비파형동검이 대량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비파형 동검은 요동과 요서지역에서 폭넓게 발굴이 되었고, 산둥반도에서 1~2개가 나온다. 그 다음 한반도에서 무더기로 나온다. 중국 본토나 다른 곳에선 전혀 나오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요하지역 중요 신석기문화 지역에서 발견된 주요 유적들을 시기별로 살펴보자.

세계 최초 요하 옥기와 비슷한 유물 전남 여수에서도 발굴

 
 흥륭와문화의 ‘세계 최초의 옥 귀걸이’ 발굴 모습. 우실하 교수 제공. 그래픽 문석진
 

흥륭와문화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이 옥기다. 이 지역에서 옥결(옥 귀거리)이 인골과 함께 출토되었다. 기원전 6천 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까 세계 최초로 인간이 가공한 옥기다. 그런데 흥륭와문화와 같은 모양의 옥결이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유적에서 나왔다. 기원전 6천년까지 올라간다고 보고 있는 유적이다. 2007년에 전남 여수에서도 비슷한 옥결이 인골과 함께 발굴되었다. 모양이 흥륭와문화 옥결과 똑같다. 이들 유물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을까?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 문암리유적에서 나온 옥 귀걸이(사적 426호). 기원전 6,000년 이상으로 연대가 추정된다. 우실하 교수 제공

흥륭와에서 나온 옥결이 중국 내에서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연구한 사람이 있다. 홍콩 중문대학의 등총교수는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옥기 전문가다. 그의 논문을 요약하면 이렇다. “기원전 6000년께 요서지역 흥륭와문화에서 시작된 옥결은 기원전 5000~4000년께 장강유역에 전파되고, 기원전 2500년께 중국 광동성 광주 근처 주강유역까지 퍼졌다. 옥결은 기원전 2000년께 더 남쪽인 베트남 북부까지 전파되고 기원전 1000년께 운남성 일대와 베트남 남부까지 시간 차를 두고 확산되었다.”

한반도에도 비슷한 시기에 옥결이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흥륭와 옥의 성분을 분석했더니 직선거리로 400km 떨어진 랴오닝성의 수암이라는 지역에서 생산된 옥으로 밝혀졌다. 수암에서 조금만 더 가면 압록강이고 두만강쪽으로 동해를 타고 내려오면 문암리로 연결된다. 흥륭와 일대에서 발견되는 빗살무늬토기도 문암리 유적에서 똑같이 나온다. 이게 뭘 의미하느냐? 기원전 6천년에 흥륭와문화 단계에서는 한반도 북부지역과 요서, 요동 지역이 하나의 단일 문화권이었다는 이야기다.

 
 전남 여수시 안도패총유적에서 나온 귀걸이와 발굴 당시 사진. 안도패총의 귀걸이는 화산지역에서 나오는 흑요석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장강하류를 통해서 보다는 백두산 지역에서 백두대간 동쪽 동해안을 통해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남해안의 흑요석은 일본 화산지대의 것이라는 연구결과도 있다. 성분 분석이 필요하다. 우실하 교수 제공. 그래픽 문석진


역사적 상식을 깬 집단 거주지와 농경문화

흥륭와문화지에서 눈여겨볼 또 하나의 유적은 신석기시대 집단 주거지역인 ‘화하제일촌(중국 전체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집단 주거지)’이다. 이 주거지는 놀랍게도 해자 혹은 환호(외적이나 맹수의 접근을 막으려고 주거지 주변을 빙 둘러서 참호를 판 것)가 있는데, 폭이 4m, 깊이가 2m나 된다. 여기에서 150여 가구가 집단으로 거주했다는 것이다.

이런 집단 주거지가 흥륭와 일대에서 3곳이 발굴되었다. 해자나 환호는 적과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주거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이때부터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기초적인 정착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불에 탄 조와 기장이 무더기로 발굴되었는데, 이미 농경이 시작되었다는 명백한 증거다. 야만인의 땅이라고 믿어온 만주일대에서 기원전 6000년에 집단 거주지와 농경문화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역사적 상식을 깨는 것이다.

 
 신석기시대 집단 주거지역인 ‘화하제일촌’. 아래 부분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곳이 해자 혹은 환호이다. 우실하 교수 제공

 
흥륭와문화 유적지에서 발견된 치아 수술 흔적. 우실하 교수 제공. 그래픽 문석진

기원전 6천 년 이미 인공적인 치아 수술 흔적

위 사진은 흥륭와에서 발견된 치아 수술 흔적이다. 중국, 일본 학자들이 이것을 발굴하고 4년을 고민했다고 한다. 진짜 수술 흔적 같기는 한데, 기원전 6천년 흥륭와문화 시대에 치아 수술을 했다는 것이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학자들이 이 유골을 가져가서 4년간 집중연구를 해 2008년 2월 정식으로 기자회견을 했다. 틀림없이 인공적인 치아수술 흔적이라는 것이다. 두개골이 그대로 나왔고, 치아에 뚫린 구멍의 직경이 모두 같고 도구를 이용한 연마흔적도 발견되었다.

현미경 사진을 찍어봤더니 나선형 연마흔적을 발견했고 이것은 인공적인 도구를 사용하여 구멍을 뚫은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충치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뚫은 것이다. 그래서 정확한 수술 흔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두개골 수술은 유럽에서 기원전 7천 년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굴되었고, 중국에서도 기원전 4,500년 두개골 수술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렇게 이른 시기에 치아 수술 흔적이 발견된 것은 흥륭와 유적지가 유일하다.

 
사해문화시대 집단 주거지인 요하제일촌(사진 위)와 마을 한가운데 돌로 쌓은 용 형상물(사진 아래). 중국 학자들은 중화제일용이라고 부른다. 우실하 교수 제공

사해문화는 흥륭와문화 보다 시기는 조금 뒤지지만 연대는 거의 비슷하다. 두 문화가 비슷해서 보통 사해-흥륭와문화 또는 흥륭와-사해문화라고 함께 부르기도 한다. 사해유적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 요하제일촌이다. 이 집단 주거지가 발견돼 사해문화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여기도 해자 혹은 환호가 있고, 100여 가구가 살았다.

이 유적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을 한가운데 있는 용 모양의 조형물이다. 주먹보다 조금 큰 돌을 쌓아서 용 형상물을 만들었다. 길이가 19.7m, 폭이 넓은 곳은 2m, 좁은 곳은 1m다. 중국학자들은 ‘중화제일용’이라고 부른다. 사해유적에서는 용문 도편도 나온다. 뱀이 똬리를 튼 그림이 새겨진 토기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중국학자들은 이게 용에 대한 최초의 유물이라고 주장한다.

조보구문화 시대에는 최초의 봉황이 등장한다. 기원전 5,000년께 새 형상 그릇이 발견되었는데, 중국학자들은 이를 ‘중화제일봉’이라고 부른다.

채색 토기, 황하문명은 서역 전래설…요하문명은 독자적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보구의 채도(채색으로 장식한 토기) 존형기다. 그릇 형태가 특이하고 매우 정교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앙소문화에서 채도는 아주 넉넉하게 잡아도 기원전 4,500년인데, 조보구의 채도는 앙소문화보다 최소한 500년이 더 앞선 것이다.

앙소문화의 채도는 단순 기하문이거나 고기나 사람 얼굴을 그렸다면 조보구의 채도는 디자인이 훨씬 뛰어나고 정교하다. 채도를 평면으로 펴보면 현대적 디지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거기에 사슴, 돼지, 새 등의 머리를 한 용이 그려져 있다. 녹수룡, 저수룡, 조수룡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조보구문화 시대에 신성시 했던 주요 토템 동물들일 것이다.

 
조보구문화 소산유적 존형기의 신령도안. 우실하 교수 제공

채도 존형기가 의미하는 것은 요하문명이 독자적인 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황하문명을 대표하는 앙소문화의 채도가 서방에서 전래했을 것이라는 ‘채도서역전래설’이 세계 고고학계의 상식이다. 앙소문화 채도와 거의 똑같은 것이 서남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중앙아시아에서 기원전 6,000년경부터 발견된다. 지금까지는 채도가 서방에서 들어와 앙소문화 지역을 거처서 요서 지방 일대로 넘어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보구 채도가 그릇의 모양도 다르고 500년이나 앞서 있는 것을 보면 새로운 유입 루트를 상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오늘날 중국문화를 상징하는 최초의 옥, 최초의 용, 최초의 주거지, 최초의 토기, 최초의 치아 수술 흔적 등이 모두 요하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실하 교수, 정리=박종찬 기자pjc@hani.co.kr


동방 르네상스를 꿈꾸다 (2)
광개토대왕릉 빼닮아…백제 적석총도 같은 형태
7층짜리 거대 피라미드는 ‘판도라 상자’, ‘성소’ 여신묘에 곰 형상, 단군신화 웅녀족과 ‘끈’

중화문명 뿌리 찾다가 홍산문화 발견…요하가 원류 ‘정설’

이제 홍산문화로 들어가 보자. 홍산문화는 전기, 후기로 나눠는데 후기는 초기국가단계에 진입한다. 그래서 홍산문화는 요하문명의 꽃이라고 했다. 홍산문화의 발견은 전 세계 고고학계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줬다. 지금도 지속적으로 발굴되고 있다. 중국은 홍산문화가 발견되면서 상고사와 고대사에 대한 재편 작업에 들어갔다. 중국은 ‘동북공정’에 앞서 ‘하상주단대공정’, ‘중화문명탐원공정’이라는 역사 공정도 벌였다. 그런 공정의 시발점이 홍산문화의 발견이었다.

하상주단대공정은 중국의 고대국가인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의 존속 연대를 결정하는 것이 연구의 뼈대다. 이 세 나라가 언제 시작되어 언제 망했는지, 그 연대를 단정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을 단대(斷代·시대를 나누다)라고 한다. 그래서 하상주의 존속연대를 1년 단위까지 세밀하게 확정하는 작업을 했다. 5년 동안 동북공정처럼 수십억 돈을 쏟아부어 300명의 학자가 연구를 해 결론을 낸 것이다.

그 다음 작업을 한 것이 (하상주) 이전의 시기를 보기 위해, 즉 중화문명의 원류를 탐색하는 중화문명탐원공정이다. 중화문명탐원공정은 2000년부터 시작해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중화문명의 근원을 탐구하는 공정이라는 의미이다. 지금까지 대충 나온 결론은 중화문명은 요하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요하가 중화문명의 시발점이라는 거다. 중국학자 몇 사람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기본 입장으로 굳어지고 있다.

단군신화 다시 읽어야…그 이전의 역사는 없었나?

 
여신묘 터와 복원도 모습. 여신묘는 십자가 모양으로 중앙에 주실과 남실, 북실 등이 있었다. 우실하 교수 제공

자, 그럼 사진을 중심으로 홍산문화를 자세히 알아보자. 홍산문화의 꽃은 ‘우하량’ 유적이다. 그곳에서 거대 적석총과 여신묘가 나왔다. 우하량 지역에서는 많은 피라미드식 적석총이 나온다. 이 시대의 묘장문화가 적석총인데, 가장 큰 것은 한변이 60m가 넘는 거대 피라미드식 적석총이다. 여신묘(무덤이 아니라 여신의 사당)에서는 홍산문화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이 쏟아졌다. 이 일대(적석총과 여신묘가 발굴된 우하량 제2지점 지역)는 홍산문화 당시 성소였을 것이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터가 나왔다. 이 지역에서 반경 수십㎞ 이내에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주거지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지역을 성소로 본다.

여신묘는 십자형으로 돼 있는데, 주실에서 여신상이 나왔다. 가장 큰 여신은 인간 실물의 3배가량 된다. 명상하는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다. 눈은 둥근 청옥을 정교하게 갈아 넣었다. 그런데 여신 옆에서 진흙으로 실물 크기로 빚은 곰 형상이 발견되었다. 지금은 5천 년이 지났으니까 다 부숴져서 발 부분과 채색된 아래턱만 남아 있다. 이게 발굴이 되면서 홍산문화의 주도세력이 곰을 토템으로 숭배하는 민족이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단군신화의 웅녀족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지금은 대부분의 중국학자들이 곰 형상과 곰 토템 부족이었음을 인정한다.

 
여러 파편을 토대로 복원한 여신상 모습. 여신묘의 주실 한 가운데는 실물크기의 3배, 2배, 1배에 달하는 흙으로 만든 여신상이 출토되었다. 우실하 교수 제공

이제 단군신화는 다시 읽어야 한다. 단군신화라고 하면,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기원전 2333년에 우리들의 사고가 고정이 돼 있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역사는 없었나? 우리의 단군신화를 보면 처음에 환인이 있었고,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신시를 세웠다고 한다. (법륜 스님 역사특강 2강 참조)내려오자마자 단군이 탄생하나? 환웅족이 외부에서 유입되어(하늘에서 내려와) 한참 살다 보니까 곰족과 호랑이족이 와서 “인간을 만들어 달라” 애원하며 공존하는 시기가 있다. 그리고 한참을 공존하다가 곰이 여인이 되고 환웅과 결혼을 해서 단군을 낳는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느냐 하면 기원전 2333년 이전에도 우리 역사가 신화적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단군신화라는 신화구조로 남아 있다. 그리고 고조선 지역으로 추정하는 요서에서 (신화를 뒷받침 할) 유적이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다. 이것은 1980년 이전에 어떤 역사기록에도 없고 어느 누구도 몰랐던 것이다.

서양 틀로는 설명 못해…청동기 없이도 국가 형성 가능 보여줘

 
우하량 제2지점 제단 유적지 모습. 우실하 교수 제공

여신묘에서는 다량의 옥기가 출토되었다. 오로지 옥기로만 부장품을 넣어줬다. 이런 옥기를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을까? 중국의 옥기 전문가들이 옥을 자를 때 쓴 도구를 발견했는데, 그 시대와 동일한 조건에서 실험을 해봤다. 그랬더니 실제 발굴되는 것과 비슷한 1.5cm정도 두께의 옥에 모래나 옥가루를 뿌려가면서 나무 막대기를 돌려서 구멍을 파는데 순수한 작업시간만 31시간이 걸렸다. 홍산문화 유적에서 발견되는 정교한 옥기 하나를 완성하려면 엄청난 인력과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홍산문화 적석총에서는 옥기가 무더기로 발굴된다.

이는 홍산문화 시대에 옥기를 만드는 장인집단이 따로 존재했었고, 신분이 분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묘장 마다 크기가 다르고, 매장 방식이 다른 것도 신분 분화의 증거다. 중국 학자들은 홍산문화 시대에 최소한 7등급으로 신분이 분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씨족단계나 부족단계에서 무슨 여신묘를 짓겠나? 또 한 변이 20~30미터짜리 3층 피라미드식 적석총이나 가장 큰 60미터짜리 7층 피라미드식 적석총을 쌓으려면 엄청나게 많은 인원을 동원해야 했을 것이다. 씨족이나 부족 단위에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군중을 통솔할 수 있는 강력한 권력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는 홍산문화 당시 사회구조가 씨족이나 부족단계를 넘어서서 여신이라는 단일신을 중심으로 통합된 사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까닭에 중국학계에서는 홍산문화 후기 단계를 초기 국가단계, 초기 문명단계라고 보는 것이다.

우하량 제2지점 제단 유적지 안내문에는 ‘약 5500년 전에 이미 국가가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홍산문화유적지’라고 쓰여 있다. 기존의 역사학의 시각에서 보면 국가단계에 진입한다는 가장 유력한 증거는 문자와 청동기다. 홍산문화 시대에 문자와 청동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초기 국가단계라고 주장하는 것은 옥기가 있기 때문이다. 홍산문화의 유적이나 유물을 보면 청동기가 없어도 국가의 형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홍산문화나 요하문명이 발견되기 전까지 옥기시대라는 말이 만들어질 수 없었다.

이집트 피라미드보다 500-1000년 앞서…중원에는 없어

 
홍산문화 피라미드식 거대 적석총의 먼 거리 사진(왼쪽)과 가까운 거리 사진(오른쪽). 아직 정식 발굴이 되지 않았으나 7층 피라미드 구조의 적석총이다. 밑변이 60m×60m이고 남쪽에는 60m×40m의 제사터가 있다. 우실하 교수 제공

세계사적으로 청동기시대가 되면 여러 가지 문화사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우선 신격이 여성신 중심에서 남성신 중심으로 바뀐다. 그런데 홍산문하는 초기 국가단계로 넘어갔는데도 신이 여성신이다. 우리가 이제까지 지니고 있는 서양 역사를 기준으로 한 편년이나 틀에 하나도 안 맞는다. 문자나 청동기가 없는데도 이미 초기 국가단계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그렇다. 홍산문화 시기를 설명하려면 ‘옥기시대’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문제의 60m짜리 피라미드식 거대 적석총은 아직도 발굴이 안 된 상태다. 처음에는 그 규모가 너무 커서 무덤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주변을 파봤더니 돌이 쌓여 있었다. 이것도 혹시 적석총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시굴을 하고, 그것을 기초로 평면도를 그렸다.

 
거대 적석총 입체도와 평면도. 이형구 교수 제공

7층짜리 피라미드식 적석총인데, 한 변의 길이가 60m나 된다. 그 밑에는 가로 세로가 60미터, 40미터인 평평한 돌을 깐 제단까지 나왔다. 이 거대 적석총을 발굴하면 그 안에 뭐가 나올지, 진짜 세계적인 이슈가 될 것이다. 최소한 지금까지 나온 것보다 더 많은 게 나올 수밖에 없다. 저 큰 무덤 안에 달랑 옥기 하나 나올 리는 없지 않은가?

동북아시아 상고사와 고대사를 보는 눈을 새롭게 다 바꿔야 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가 메소포타미아 우르지역에 나오는데, 그게 기원전 2600-2500년까지로 추정한다. 그런데 홍산문화의 이 거대 적석총은 그것보다 500-1000년가량이나 앞선다. 크기도 어마어마하다. 이집트 피라미드도 기원전 2500년까지 밖에 안 본다.

이런 피라미드식 적석총은 중원에는 안 나온다. 중원 가까운 곳에서는 허베이성 위쪽과 내몽고자치구가 만나는 영하시에 있는 서하왕국의 서하왕릉에서 흙벽돌로 쌓은 피리미드식 묘를 발견할 수 있다. 거기는 전부 황토 고원이라 돌이 없으니까 흙으로 피라미드를 쌓았다. 그쪽 사람들의 조상 역시 홍산문화와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구려 수도 국내성 터 일대 적석총 수천 기 널려 있어

홍산문화의 피라미드식 적석총이 우리 민족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홍산인들이 고구려, 백제를 거쳐 한반도로 적석총 문화가 이어졌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장군총이다. 장군총은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이 있었던 중국 집안시에 있다.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장군총 앞에 서면 기가 죽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크다. 장군총의 한 변의 길이는 30미터, 31미터다. 그런데 평면도를 보면 홍산문화의 적석총과 구조가 똑같다. 물론 연대와 크기는 홍산문화 거대 적석총에 비교할 수 없지만. 장군총뿐만 아니라 광개토대왕릉, 북한이 발굴했다는 단군릉도 모두 7층, 9층의 피라미드식 적석총 구조다. 또 집안시의 환도산성 아래 ‘산성하 무덤군’에 아직도 수천 기의 크고 작은 피라미드 적석총이 널려 있다. 모두 홍산문화 적석총과 연결된다.

 
중국 집안시 산성한 고분군의 피라미드식 적석총. 우실하 교수 제공

어떤 사람들은 홍산문화 적석총과 고구려 적석총이 연결된다고 하면 ‘고구려 적석총은 빨라야 기원후 3~4세기 이고, 홍산문화 적석총은 기원전 3500년인데, 어떻게 4천 년 가까운 간격을 뛰어 넘어 두 유적을 연결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집트 사람들이 기원전 2500 년에 피라미드를 짓고 지금까지 한 번도 다시 지은 적이 없다. 또한 마야, 잉카문명을 일군 사람들이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들었지만, 그 이후로 현재까지 이들은 한 번도 그런 거대한 피라미드를 다시 지은 적이 없다. 그렇게 4천 년 동안 한 번도 안 지었다고 현재의 이집트인들이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의 경우에는 고구려, 백제 시대에 과거의 피라미드를 복원까지 하지 않았는가?”

홍산문화 시절엔 한국도, 중국도 없어…후손들 여러 갈래로

 
홍산문화의 피라미드식 적석총을 닮은 고구려 장군총(위 사진·조현 기자)과 백제의 피라미드식 적석총 조감도(왼쪽 사진)과 일본의 피라미드식 적석총(오른쪽 사진). 우실하 교수 제공

백제 적석총을 보면 고구려 장군총에 비해서 규모는 훨씬 소박하다. 그러나 형태는 홍산문화의 것과 거의 똑같다. 돌을 깎거나 다듬어 네모나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연석을 크기에 맞춰 축대 쌓는 식으로 가지런히 쌓았다. 일본에서도 3단으로 쌓은 피라미드 무덤이 발견된다. 당연히 백제를 통해 일본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이렇게 홍산문화에서 최초로 등장한 적석총이 고구려, 백제를 거쳐 일본까지 이어진다. 몽골 초원 지역에도 적석총이 많지만, 중원에는 없다. 서하왕릉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중화문화라고 할 수 없다. 서하는 요나라, 거란 시절에 독립왕국이 있었다. 그들도 어차피 홍산문화의 영역 안에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홍산문화 세력들이 전부 다 한반도로 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홍산문화 시절엔 중국도 없었고, 한국도 없었다. 일부 세력은 옥 귀걸이의 경우처럼 중원으로 남하하기도 하고, 다른 세력은 한반도로 내려오고, 또 한 세력은 몽골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 문화유형을 보면 앞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주요한 맥이 한반도로 내려왔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몽골에도 돌궐족이나 흉노족들의 무덤이 있다. 그들의 무덤도 전부 적석총이지만, 피라미드는 아니다. 그냥 돌무지무덤이다.(일부 피라미드식 적석총도 동몽골 지역에서 발견되기 시작했다. 이것을 몽골에서는 ‘돕조’라고 부른다. 몽골학자들과 연대해 연구 중이다.)

하가점-하층문화 톡톡 튀어나온 석성의 ‘치’, 고구려 성과 똑같아

 
하가점-하층문화에서 치를 갖춘 석성이 발견되기 전까지 치는 고구려 산성의 독특한 특징이었다. 하가점-하층문화 유적지인 중국 적봉시 오한치 삼좌점 석성의 치(왼쪽 사진·우실하 교수 제공)와 중국 랴오닝성 고구려 백암산성의 치. 조현 기자.

요하문명에서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문화가 하가점-하층문화다. 고조선의 대표적인 유물인 청동기 비파형 동검이 나오고, 고구려 석성의 독특한 형태인 ‘치를 갖춘 석성’의 원형이 발견된다. 치가 무엇이냐 하면 석성을 쌓을 때 일정 거리를 두고 톡톡 튀어나오게 한 부분이다. 지금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고대 군사 전략상 치는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적군이 치에 들어오면 한 방향이 아닌 삼면에서 적을 타격할 수 있어 성의 방어에 무척 용이했다. 고구려의 치를 모방해 당나라, 명나라 성에서도 치가 발견되는데, 치가 좀 더 발달한 형태가 옹성(甕城) 구조이다.

하가점-하층문화의 유적 가운데 삼좌점 석성에 아직도 치의 형태가 25개나 원형 상태 그대로 보존돼 있다. 4천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깨끗하게 남아 있다. 하가점-하층에서 치를 갖춘 석성이 나오기 전까지 치는 고구려 성에서만 발견되는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동아시아 어디에도 없는 고구려의 발명품으로 알았다. (시각차가 있을 수 있지만) 고구려와 하가점-하층문화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교과서에 나오는 비파형 동검 분포지역 지도를 바꿔야

 
현행 교과서의 비파형 동검 분포지도.

지도에서 비파형 동검(세형 동검을 포함)이 출토되는 지역을 보면 요서, 요동, 한반도 지역에 몰려 있다. 최근에는 산둥반도 주변에서도 한 두 개가 발견되기는 한다. 요서일대에서 이주한 세력이거나 유배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파형 동검은 중원에서는 하나도 안 나온다. 만리장성 바깥에, 요동, 요서, 한반도에 쫙 깔려 있다. 최근 요하지역에서 비파형 동검

이 무더기로 발굴되는 것을 감안하면 교과서에 나오는 비파형 동검 분포지역 지도를 바꿔야 한다. 현재의 교과서 지도로는 어디가 중심지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비파형 동검이 요서 지역 하가점-하층문화, 하가점-상층문화 지역과 한반도에서 무더기로 발굴되는 것은 두 지역이 동일한 문화권이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홍산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에서 발굴된 유물과 유적은 고조선, 고구려 등 우리 민족의 문화와 밀접하게 맥이 닿아 있다.

우실하 교수(한국항공대학교 인문자연학부), 정리 박종찬 기자 pjc@hani.co.kr


[한민족 시원, 만주] 동방 르네상스를 꿈꾸다 (3)
국경도 나라도 없던 시절… 동북아 시원문명 일뿐
역사란 흐름과 교류의 역사…민족주의 매도 안돼 “요하문명은 중국, 한국 누구의 것도 아니다”



▶요하문명과 역사공정의 축소판 요하문명전

 
요하문명전이 열리고 있는 중국 심양시 요녕성 박물관의 모습. 요하문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전시를 관람하려고 중국인들이 긴 줄을 서 있다. 조현 기자

중국은 하상주단대공정, 중화문명탐원공정, 동북공정 등 일련의 역사 공정을 통해 요하일대에서 중화문명이 발생했다고 보기 시작했다. 중화문명이 요하 지역에서 시작되었고, 이 일대 모든 민족들이 황제의 후예라는 것이다. 이것이 ‘요하문명론’의 실체다.
중국 심양시 요녕성 박물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전시 가운데 하나인 <요하문명전>을 보면, 요하문명의 실체와 중국의 의도를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요하문명전은 지난 2006년 6월에 처음 시작하면서 3개월만 전시를 하기로 했는데, 지금은 영구전시로 바뀌었다. 안내 도판인 ‘5제(帝) 시대의 3대 집단’이라는 큰 틀을 중심으로 시기별로 5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상고사의 주역을 3대 집단으로 재편…“모두가 황제의 후예”

 
중국은 요하문명이 발견되면서 상고사의 주역을 3대 집단으로 재편했다. 중원의 화하족을 화족과 하족으로 분리해 앙소문화 지역만을 염제 신농씨의 화족으로, 산동반도 인근의 전통적인 동이족 지역과 그 남부의 전통적인 묘만족 지역을 묶어서 하족으로, 요동과 요서를 포함한 지역을 황제족으로 명명했다. 우실하 교수 제공

‘5제 시대의 3대 집단’ 도판은 중국 상고사의 주역을 새롭게 3대 집단으로 재편하는 것으로 요하문명론의 가장 기초가 되는 시각이 담겨 있다. 기존의 모든 사서들은 중원의 화하족을 중심으로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이 있었다는 식으로 역사를 기술했었다. 화하족이 가운데 있고 나머지 동서남북에 오랑캐, 야만인들이 있었다는 것이 중국의 정통적인 역사관인 화이관(華夷觀)이다.

그런데 이런 전통적인 화이관을 깬 것이 요하문명의 발견이었다. 중원문명보다 앞서 있고, 발달된 문명이 발견되었는데 여전히 그들을 야만인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대 중국사를 이끈 집단을 다시 재편했다. 이 3대 집단이란, △중원의 화하족을 화족과 하족으로 분리해 앙소문화 지역만을 염제 신농씨의 화족으로 △산둥반도 인근의 전통적인 동이족 지역과 그 남부의 전통적인 묘만족 지역을 묶어서 하족으로 △요동과 요서를 포함한 지역을 황제족으로 재편한 것이다.

이것은 동아시아 상고사 전체를 재편하는 아주 무서운 전략이다. 기존의 동이, 서융, 남만, 북적 등을 모두 중화민족에 넣은 것이다. 신화시절부터 요하일대는 모두 황제의 땅이라는 것이고, 북방의 모든 소수 민족은 황제와 그 손자뻘인 고양씨 전욱과 고신씨 제곡의 후예라는 주장이다.(기존에는 황제는 북경 부근, 고양씨 전욱은 황하 중류의 위쪽, 고신씨 제곡은 황하 중류의 아래쪽이 세력권이라고 보았다.) 그렇게 되면 이 지역에서 발원한 단군, 웅녀, 해모수, 주몽 등은 모두 황제의 후예가 되어 버린다.
 
▶“고구려와 수·당의 싸움은 전쟁이 아니라 내전”

 
요하문명전 제1전시실 문명서광. 중화문명의 서광이 요하에서 비치기 시작했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조현 기자

제 1전시실 ‘문명서광’(文明曙光)의 핵심 내용은 중화문명의 서광이 요하에서 비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이전 중국은 최초의 원시촌락사회를 ‘앙소문화의 반파유적’으로 보았고, 문명의 서광을 장강유역의 하모도문화로 보았다.

제2전시실 ‘상주북토’(商周北土)는 요하문명 지역이 상나라, 주나라 시대부터 중원 왕조에 속해 있는 북쪽의 영토였으며, 이 시대부터 이미 북방의 모든 소수 민족은 중화민족의 일원이라는 것이 뼈대다. 제3전시실 ‘화하일통’(華夏一通)은 진나라, 한나라 시대를 기점으로 만주 일대가 중원 왕조의 판도 안에 들어왔고 이 지역의 모든 민족은 화하족(중화민족)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 핵심내용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 고구려와 수나라가 싸우고, 고구려와 당나라가 싸운 것은 전쟁이 아니라 내전이라고 주장한다. 전쟁은 독립국가끼리 하는 것이고 지방정부와 중앙정부가 싸운 것은 전쟁이 아니라 내전이라는 것이다. 최근 중국에서 고구려를 말할 때 항상 ‘동북지방정권 고구려’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4, 5전시실 주제는 각각 ‘거란왕조(契丹王朝)’와 ‘만족굴기’다. 거란과 만주족 청나라의 역사가 모두 중화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중국인들은 칭기즈칸(1162~1227)을 중국인이라고 주장한다.

중국이 벌이는 역사 공정은 기본적으로 통일적다민족국가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현재 중국 국경 안에 있는 모든 민족은 신화시절부터 중화민족이고, 그들의 역사는 중국사라는 것이다. 이런 역사관을 한국인이나 몽골인이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요하문명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요하문명전이 열리고 있는 중국 심양시 요녕성 박물관 내부의 모습. 맨 위가 제 5전시실이다. 조현 기자

그럼 진짜 요하문명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앞으로 끊임없는 연구를 하고 토론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요서와 요동을 포함한 만주지역은 중원과 전혀 다른 문명권이었다는 사실이다.

동북아시아 지형도를 보면 신석기시대 4대 문화가 왜 만주와 한반도로 전파되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새로운 문화는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통해 몽골초원을 거쳐 전파되었다. 몽골초원에서 대흥안령 남단을 거쳐 요서·요동지역으로 넓게 이어진 초원 길을 두고, 사막과 강과 산맥을 넘어서 중원지역으로 내려갈 이유가 없었다. 북방 유목 민족은 광대한 초원을 동서로 넘나들며 동·서 문화를 뒤섞었다. 그 동쪽 끝에 만주와 한반도가 있었다.

 
신석기 시대 4대 문화권 지도. 만주일대와 한반도 주역은 신석기 4대 문화권이 모두 중첩되는 세계 유일한 곳이다. 출처 정수일 ‘고대 문명 교류사’(사계절 출판사 2002. 70쪽) 그래픽 문석진

요하문명에서 발견한 유물과 유적 가운데 중원에서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 것이 있다. 빗살무늬토기, 피라미드식 적석총, 치를 갖춘 석성, 비파형동검 등이 그것이다. 이는 요하문명을 주도한 세력이 중원 세력과 다른 집단이며, 주맥이 만주와 한반도, 일본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문화권은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4대 문화인 빗살무늬토기문화, 거석문화, 채도문화, 세석기문화를 모두 수용하고 융합했다. 요하문명 세력들이 앞선 새로운 문명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문화를 흡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렇게 신석기시대 4대 문화권이 중첩되고 융합되는 곳은 전 세계적으로 이 지역이 유일하다.

▶“요하문명은 동북아의 시원문명이다”

그렇다고 요하문명 세력들이 전부 한반도로 내려왔다고 볼 수는 없다. 당연히 중원으로도 들어갔다. 요하문명을 놓고 ‘중국 것이다, 한국 것이다’라고 싸우는 것은 의미가 없다. 고대로 올라갈수록 ‘역사란 흐름과 교류의 역사다’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옛날에는 국경도 나라도 없었다. 현재 중국 땅에 있기 때문에 중국이 (요하문명을) 독자적으로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는데, 이는 ‘역사 민족주의’라고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주변국과 공유하며 공동으로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는 요하문명을 ‘동북아시아 시원문명’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지만 요하문명을 중국 것, 우리 것이라고 다투는 것은 의미가 없다. 명실상부한 동북아시아 시원문명이다. 이런 공통의 인식 위에서 새롭게 동북아문화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요하문명에서 출토된 유물과 유적.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우하량의 여신상, 빗살무늬토기, 비파형 청동검, 거대 피라미드 적석총, 우하량 제2지점 1호총의 묘와 부장된 옥기. 사진 조현 기자, 우실하 교수 제공

▶한국 상고사 연구를 위한 방향

요하문명은 중국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상고사 연구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한국 상고사 연구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하다.

우선, 단군 신화를 적극적으로 재검토하고, 동북 민족과 우리 민족을 연결하는 새로운 역사의 기틀을 짜야 한다. 우리도 중국인처럼 북방 민족을 야만인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우리부터 소중화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둘째, 만주 일대가 유목과 수렵문화라는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이 지역에서 6천 년 전 흥륭와문화부터 조와 기장을 중심으로 한 농경을 한 흔적이 발견되었고, 홍산문화 후기에 오면 대규모 농경이 이루어진 가장 앞선 선진문명을 가졌다는 것이 발굴을 통해 증명되었다.

셋째, 요하문명이 중원문명과 전혀 다른 ‘제5의 문명’으로 등극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역사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요하문명은 황하문명보다 앞섰고, 세계 어디에도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문명이기 때문이다.

넷째, 한반도 중심의 역사관을 만주, 몽골 초원,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넓혀야 한다. 마지막으로 요하문명 지역에서 출토된 신석기와 청동기, 특히 옥기를 연구할 학자를 길러야 한다.

▶‘동방 르네상스’를 위한 제안

서구문명이 한계에 이르자 서구인들은 ‘그리스·로마문명’의 전통에서 ‘고대로부터의 빛’을 발견했고, 이를 ‘르네상스’로 재구성하였다. 르네상스를 통해 새로운 문화적 피를 수혈해 승승장구하던 서구문명은 20세기를 지나면서 또다시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하였다. 이제 20세기 문명의 한계를 넘을 ‘고대로부터의 빛’은 동방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것이 ‘동방 르네상스’다. 문명의 뿌리를 함께 공유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진정한 동방 르네상스 시대를 열 수 있다. 한·중·일·몽골이 함께 열어갈 동방 르네상스를 꿈꾸며 몇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한다.

 
우실하 항공대 교수가 지난해 11월 서울 서초구 평화회관에서 열린 ‘청년 역사를 만나다’ 특강에서 요하문명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영상화면 캡쳐. 박종찬 기자

첫째, 21세기 동북아 문화공동체를 이루려면 ‘어디까지가 우리 땅’이라는 식의 역사관을 넘어, 역사를 ‘흐름과 교류의 과정으로 보는 새로운 역사관’과 ‘열린 민족주의’를 한·중·일·몽골이 공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특히 상고사에 대한 인식에서는 더욱 그렇다.

둘째, 요하문명이 탄생할 때는 중국도 한국도 일본도 없었다. 주변의 모든 국가가 요하문명을 ‘동북아 시원문명’으로 삼아 공동으로 연구해야 한다. 이를 21세기를 위한 ‘동북아 문화공동체’의 근원으로 삼아야 한다.

셋째, 한·중·일·몽골의 학자가 연계해야 한다. 그래서 동북아 고대문화에서 새로운 희망의 빛을 찾고,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문화철학을 가꾸어 가야한다. 이런 문화철학을 바탕으로 ‘동방 르네상스’를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 7천년, 8천 년 전 요하문명처럼 동북아시아에서 찬란한 문화의 꽃을 다시 피울 수 있을 것이다.

우실하 교수(한국항공대학교 인문자연학부)woosilha@kau.ac.kr 정리 박종찬 기자 pj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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