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과 세계사 ① 프랑스 혁명의 두 얼굴
7월 14일의 의미
매년 7월이면 프랑스는 한 차례씩 들썩거린다. 프랑스 최대의 국경일인 프랑스혁명 기념일 때문이다. 그래서 혁명을 기리는 갖가지 기념행사들이 전국 각지에서 성대하게 열린다. 7월 14일에는 파리의 가장 큰 거리인 샹젤리제에서 군사 퍼레이드가 화려하게 펼쳐지고 모여든 관중들은 혁명을 상징하는 삼색기를 흔들며 열렬히 환호한다.
프랑스공화국 대통령은 이 날을 맞아 프랑스가 혁명의 이상과 전통을 이어 받았음을 당당하게 선언한다. 프랑스인들은 다시 한번 조국이 200여 년 전에 혁명을 통해 전제적인 왕정을 무너뜨리고 민주적인 공화정을 세웠으며 전세계에 자유, 평등, 우애의 이념을 전한 것을 확인하며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프랑스를 근대 세계사의 최고봉에 세우는 이런 역사적 사건을 가진 나라에 태어난 것은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프랑스인들이 이런 영광스러운 과거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 이상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렇게 프랑스인들이 매년 7월마다 감동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은 프랑스 혁명이 세계사에서 차지하는 막중한 위치 때문이다. 그 혁명이 바로 세계사에서 전근대와 근대를 나누는 커다란 전환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후의 시대사를 보통 근대사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1789년 늦봄부터 프랑스는 혁명의 폭풍 속으로 빠져 들었다. 당시 루이 16세의 정부는 만성적인 국가재정의 고갈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는 프랑스가 식민지를 둘러싸고 영국과 7년전쟁(1756-63)을 벌이고 미국독립전쟁에도 간여함으로써 국고를 지나치게 낭비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왕은 그 동안 면세 특권을 부여받던 귀족 계급에게 토지에 대한 재산세를 내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안 내던 세금을 요구받은 귀족계급은 그 결정을 삼부회에게 미뤘다. 삼부회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중세의회인 삼부회는 프랑스의 왕권이 강화되면서 1614년 뒤에는 한번도 열리지 못했었다. 1789년 5월 초에 왕이 마지못해 삼부회를 소집하며 일이 시작되었다.
삼부회는 원래 성직자, 귀족, 평민의 대표로 구성되었고 각 신분별로 회의체를 만들어 의사결정을 해 왔었다. 세 회의체로 구성되었다고 해서 삼부회(��이다. 고위 성직자들은 대체로 귀족 계급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제3신분인 평민들과는 이해관계가 달랐다. 그래서 삼부회는 대개 2:1로 특권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해 왔다.
이번에도 왕이 삼부회의 전통적인 의사결정 방식을 고수하려 하자 평민 대표들이 이에 격렬히 반발했다. 18세기를 통해 부유해지고 교육을 받았고 계몽사상에 의해 정치의식이 높아진 제3신분 대표들이 더 이상 특권세력의 독단적인 지배를 허용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제3신분 대표들은 스스로를 국민의회라고 부르며 헌법을 제정하겠다고 선언했다. 처음 왕은 이를 억누르려 했으나 사세가 불리해지자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왕이 군사력을 동원하리라는 소문이 퍼지며 7월 12일에 파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수년 동안 흉년이 계속되고 경제사정도 나빠 민심이 흉흉한 상황이었으므로 이는 곧 대중적인 혁명으로 발전했다. 7월14일에는 악명 높은 바스티유 감옥이 점령되었고 혁명은 곧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혁명이 발발한 것이다.
혁명의 두 얼굴
프랑스 혁명은 보통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했으며, 귀족과 평민의 신분적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었고, 모든 봉건적 족쇄를 없애고 자본주의의 기틀을 만들었으며, 전시대의 낡은 이념이나 가치관을 파괴하고 합리적인 근대문화를 만들어냈다고 생각된다.
또 그 이념을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체로, 나중에는 전 세계로 파급시켰다고 주장된다. 그러니 그것은 매우 중요한 세계사적 사건이 될 수밖에 없었고 또 긍정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처음부터 그렇게 환영 받은 것은 아니었다.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과정에서 프랑스 정치와 사회에 엄청난 소용돌이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왕이 처단되고 귀족들이 쫓겨났으며 카톨릭 교회는 핍박을 받고 공포정치 시기에는 수만 명의 프랑스인이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 사회는 계속 무질서와 혼란에 시달렸다. 또 1792년부터 4월부터 시작된 혁명전쟁은 그 후 20여 년간 프랑스뿐 아니라 전 유럽을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었다. 그러니 혁명의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들이 그것을 찬양하는 반면, 구체제에 가까이 있었거나 혁명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이 적대감과 증오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그 후 한 세기 내내 혁명은 프랑스 내 정치적 논의의 중심 주제였다. 혁명에 대한 태도가 바로 그 사람의 정치적 입장을 보여주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상의 정치논쟁에서 혁명은 끊임없이 논쟁의 시발점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정을 거부하는 공화주의자, 자유주의자, 민주주의자, 사회주의자, 반교회주의자들은 혁명을 옹호했다. 이들 사이에도 물론 견해의 차이는 있으나 혁명을 진보적인 것, 바람직한 것, 인류의 이상과 합치시키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래서 이들은 혁명이 보여준 자유와 평등, 봉건제 폐지, 인권선언, 헌법 제정, 입헌군주제와 공화제의 수립을 높이 평가했다. 공포정치를 불가피한 것으로 옹호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반면 군주주의자, 귀족주의자, 교회주의자, 보수주의자들은 혁명의 원리를 폭도의 원리라고 끊임없이 비난했다. 믿을 수 없는 추상적인 원리에 의존하여 오랜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기존 사회질서를 파괴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역사가는 '이 무서운, 파괴적이고 형상이 없는 야수가 민주주의라는 형태로 프랑스 정치를 위협한다'고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정도는 다르나 기본적으로는 마찬가지이다. 혁명의 해석이 시대의 정치상황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전반에서 3/4분세기까지 그것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사회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세력을 확장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 온 것이 대체로 맑스주의적 해석이다.
반면 80년대 이후에는 수정주의적 해석이 점점 세력을 확대하며 지금은 오히려 맑스주의적 해석을 압도하고 있다. 이는 전 세계적인 사회주의의 퇴조 및 보수주의 흐름의 확대와 어느 정도 관계를 갖고 있다.
이런 정치적 흐름과도 관계가 있으나 오늘날 맑스주의 해석에 대한 많은 비판은 기본적으로 그것이 갖고 있는 많은 문제점과 한계 때문이다. 맑스주의의 계급투쟁 도식에 맞추어 전형적인 부르주아혁명으로 규정하려 하니 역사현실과 잘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 세계사적 의미를 강조하다보니 혁명을 지나치게 이상화하고 의미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을 서양사에서 가장 유럽중심주의적인 해석의 하나로 만들고 있다. 이는 비유럽인의 역사인식에게는 상당히 큰 문제를 야기한다. 당연히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