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프레시안

프랑스 혁명과 세계사 ①
프랑스 혁명의 두 얼굴

7월 14일의 의미
 
  매년 7월이면 프랑스는 한 차례씩 들썩거린다. 프랑스 최대의 국경일인 프랑스혁명 기념일 때문이다. 그래서 혁명을 기리는 갖가지 기념행사들이 전국 각지에서 성대하게 열린다. 7월 14일에는 파리의 가장 큰 거리인 샹젤리제에서 군사 퍼레이드가 화려하게 펼쳐지고 모여든 관중들은 혁명을 상징하는 삼색기를 흔들며 열렬히 환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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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4 상젤리제 기념 행사

  프랑스공화국 대통령은 이 날을 맞아 프랑스가 혁명의 이상과 전통을 이어 받았음을 당당하게 선언한다. 프랑스인들은 다시 한번 조국이 200여 년 전에 혁명을 통해 전제적인 왕정을 무너뜨리고 민주적인 공화정을 세웠으며 전세계에 자유, 평등, 우애의 이념을 전한 것을 확인하며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프랑스를 근대 세계사의 최고봉에 세우는 이런 역사적 사건을 가진 나라에 태어난 것은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프랑스인들이 이런 영광스러운 과거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 이상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렇게 프랑스인들이 매년 7월마다 감동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은 프랑스 혁명이 세계사에서 차지하는 막중한 위치 때문이다. 그 혁명이 바로 세계사에서 전근대와 근대를 나누는 커다란 전환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후의 시대사를 보통 근대사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1789년 늦봄부터 프랑스는 혁명의 폭풍 속으로 빠져 들었다. 당시 루이 16세의 정부는 만성적인 국가재정의 고갈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는 프랑스가 식민지를 둘러싸고 영국과 7년전쟁(1756-63)을 벌이고 미국독립전쟁에도 간여함으로써 국고를 지나치게 낭비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왕은 그 동안 면세 특권을 부여받던 귀족 계급에게 토지에 대한 재산세를 내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안 내던 세금을 요구받은 귀족계급은 그 결정을 삼부회에게 미뤘다. 삼부회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중세의회인 삼부회는 프랑스의 왕권이 강화되면서 1614년 뒤에는 한번도 열리지 못했었다. 1789년 5월 초에 왕이 마지못해 삼부회를 소집하며 일이 시작되었다.
 
  삼부회는 원래 성직자, 귀족, 평민의 대표로 구성되었고 각 신분별로 회의체를 만들어 의사결정을 해 왔었다. 세 회의체로 구성되었다고 해서 삼부회(��이다. 고위 성직자들은 대체로 귀족 계급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제3신분인 평민들과는 이해관계가 달랐다. 그래서 삼부회는 대개 2:1로 특권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해 왔다.
 
  이번에도 왕이 삼부회의 전통적인 의사결정 방식을 고수하려 하자 평민 대표들이 이에 격렬히 반발했다. 18세기를 통해 부유해지고 교육을 받았고 계몽사상에 의해 정치의식이 높아진 제3신분 대표들이 더 이상 특권세력의 독단적인 지배를 허용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제3신분 대표들은 스스로를 국민의회라고 부르며 헌법을 제정하겠다고 선언했다. 처음 왕은 이를 억누르려 했으나 사세가 불리해지자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왕이 군사력을 동원하리라는 소문이 퍼지며 7월 12일에 파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수년 동안 흉년이 계속되고 경제사정도 나빠 민심이 흉흉한 상황이었으므로 이는 곧 대중적인 혁명으로 발전했다. 7월14일에는 악명 높은 바스티유 감옥이 점령되었고 혁명은 곧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혁명이 발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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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

  혁명의 두 얼굴
 
  프랑스 혁명은 보통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했으며, 귀족과 평민의 신분적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었고, 모든 봉건적 족쇄를 없애고 자본주의의 기틀을 만들었으며, 전시대의 낡은 이념이나 가치관을 파괴하고 합리적인 근대문화를 만들어냈다고 생각된다.
 
  또 그 이념을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체로, 나중에는 전 세계로 파급시켰다고 주장된다. 그러니 그것은 매우 중요한 세계사적 사건이 될 수밖에 없었고 또 긍정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처음부터 그렇게 환영 받은 것은 아니었다.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과정에서 프랑스 정치와 사회에 엄청난 소용돌이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왕이 처단되고 귀족들이 쫓겨났으며 카톨릭 교회는 핍박을 받고 공포정치 시기에는 수만 명의 프랑스인이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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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 16세의 처단

  프랑스 사회는 계속 무질서와 혼란에 시달렸다. 또 1792년부터 4월부터 시작된 혁명전쟁은 그 후 20여 년간 프랑스뿐 아니라 전 유럽을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었다. 그러니 혁명의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들이 그것을 찬양하는 반면, 구체제에 가까이 있었거나 혁명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이 적대감과 증오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그 후 한 세기 내내 혁명은 프랑스 내 정치적 논의의 중심 주제였다. 혁명에 대한 태도가 바로 그 사람의 정치적 입장을 보여주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상의 정치논쟁에서 혁명은 끊임없이 논쟁의 시발점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정을 거부하는 공화주의자, 자유주의자, 민주주의자, 사회주의자, 반교회주의자들은 혁명을 옹호했다. 이들 사이에도 물론 견해의 차이는 있으나 혁명을 진보적인 것, 바람직한 것, 인류의 이상과 합치시키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래서 이들은 혁명이 보여준 자유와 평등, 봉건제 폐지, 인권선언, 헌법 제정, 입헌군주제와 공화제의 수립을 높이 평가했다. 공포정치를 불가피한 것으로 옹호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반면 군주주의자, 귀족주의자, 교회주의자, 보수주의자들은 혁명의 원리를 폭도의 원리라고 끊임없이 비난했다. 믿을 수 없는 추상적인 원리에 의존하여 오랜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기존 사회질서를 파괴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역사가는 '이 무서운, 파괴적이고 형상이 없는 야수가 민주주의라는 형태로 프랑스 정치를 위협한다'고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정도는 다르나 기본적으로는 마찬가지이다. 혁명의 해석이 시대의 정치상황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전반에서 3/4분세기까지 그것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사회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세력을 확장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 온 것이 대체로 맑스주의적 해석이다.
 
  반면 80년대 이후에는 수정주의적 해석이 점점 세력을 확대하며 지금은 오히려 맑스주의적 해석을 압도하고 있다. 이는 전 세계적인 사회주의의 퇴조 및 보수주의 흐름의 확대와 어느 정도 관계를 갖고 있다.
 
  이런 정치적 흐름과도 관계가 있으나 오늘날 맑스주의 해석에 대한 많은 비판은 기본적으로 그것이 갖고 있는 많은 문제점과 한계 때문이다. 맑스주의의 계급투쟁 도식에 맞추어 전형적인 부르주아혁명으로 규정하려 하니 역사현실과 잘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 세계사적 의미를 강조하다보니 혁명을 지나치게 이상화하고 의미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을 서양사에서 가장 유럽중심주의적인 해석의 하나로 만들고 있다. 이는 비유럽인의 역사인식에게는 상당히 큰 문제를 야기한다. 당연히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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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유럽 과학의 발전 ⑦
근대 유럽과학의 절대화는 피해야

중국과학과 <니덤 퍼즐>
 
  19세기 이후 서양인들은 중국과학을 매우 무시해 왔다. 이는 아편전쟁에서 중국을 굴복시킨 서양인들이 중국문화에 대해 보인 일반적인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지금도 본질적으로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이런 태도에 큰 변화를 가져온 사람이 케임브리지 대학의 생화학교수였던
조셉 니덤(1900-1995)이다. 그는 1930년대 말부터 중국어를 직접 배워 중국과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그것을 생애의 과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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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셉 니덤 ((Joseph needham, 1900-1995)

  1954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방대한 저술이 그 업적이다. 이 책은 처음에는 그가 직접 썼으나 나중에는 제자들이 참여하여 중국과학의 모든 부면을 조명했고 2004년에 결론 부분인 제 16권이 출간되었다.
 
  니덤은 그때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중국과학을 서양에 상세하게 소개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근대 이전에 있어서 다른 지역에 대한 중국과학의 우월성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과학이 기원전 2세기에서 16세기까지는 유럽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럽의 과학발전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자기학과 연금술, 관찰 천문학, 무한한 우주를 가정하는 우주론, 정확한 시간 측정을 위한 시간 측정장치(물시계)의 발전이라는 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유럽의 과학이 중국을 앞서기 시작하는 시점은 1450년이며 이는 유럽의 르네상스기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중국과 유럽 사이의 교류가 있었으므로 명이 망하고 청나라가 선 1644년에 수학, 물리학, 천문학 수준에서 두 지역 사이에 별 차이가 없었다고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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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과학과 문명(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1954)

  이미 17세기 초부터 중국에는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 등이 기독교 선교의 방편으로 수학, 천문학, 물리학 등 유럽의 최신 과학지식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가운데에는 천문대인 관상감의 책임자로 임명된 사람도 있다.
 
  그러면 중국은 그 후 왜 근대과학을 발전시키는 데 실패하여 결과적으로 유럽에게 뒤떨어졌을까? 이 문제를 그는 평생의 화두로 삼아 끊임없이 해결하려 노력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니덤 퍼즐>이라고 부른다.
 
  그는 우선 두 지역 과학의 성격 차이를 제기한다. 중국 수학이 산술학과 대수학의 전통은 강해도 기하학의 전통이 약하다는 것이다. 이슬람 수학으로부터 많이 배울 수 있는 처지에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상의 차이 때문이다.
 
  이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그 전에도 부분적으로는 번역되었지만 1857년에야 완역된 사정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중국과학은 기하학적 증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연역적 추론 면에서 많이 뒤떨어지고, 또 유럽에서 천문학과, 나아가 근대과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기하학적 천문학을 발전시킬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근대과학에 실패한 보다 중요한 이유를 그는 사회, 경제적인 요인에서 찾는다. 그가 원래 맑시스트였으므로 그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래서 그는 르네상스, 종교개혁, 과학혁명이 분리될 수 없는 전체라고 생각한다. 이것들이 15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봉건체제를 파괴하고 자본주의를 만들어낸 주된 사건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근대과학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당연히 이런 요소들의 결여 때문이다.
 
  이리하여 과학의 문제는 보다 넓은 사회, 경제, 정치적 문제의 논의로까지 확대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의 약점이 노출되기 시작한다. 그가 유럽에서의 도시의 발전이나 부르주아지의 흥기를 자본주의의 발전의 전제로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이런 것이 불가능했던 이유는 유럽의 군사적 봉건제와는 다른 관료제적 봉건제 때문이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제가 그것을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주장은 도시와 자본주의의 흥기에 대한 베버의 주장이나 '아시아적 전제론'을 주장한 칼 비트포겔 같은 사람의 주장과 근접하게 된다. 그가 한 동안 비트포겔의 이론에 관심을 가졌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으나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식의 주장은 전통적인 유럽중심주의자들의 것으로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중국과학의 성취를 강조하면서도 한 편에서는 매우 강한 유럽중심주의를 표출하는 그의 진의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니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니덤 퍼즐>은 아직도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 있다. 실증적인 연구의 진전과 함께 관점의 문제도 점차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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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와 서광계(徐光啓, 1562~1633)

  결어 : 근대 유럽과학의 절대화는 피해야
 
  지금까지의 이야기로 17세기의 '과학혁명'이라는 개념에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또 과학혁명을 하나의 역사적 전기로 뚜렷하게 부각시키는 것이 서양 근대에 대한, 그리고 세계과학사에 대한 잘못된 상을 가져다 줄 수 있으리라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런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과학적, 합리적인 유럽과 비과학적, 비합리적인 비유럽세계의 잘못된 이분법에 의해 지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과학지식은 어느 한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부터 계속 자극을 받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한 것이다. 1605년에
프랜시스 베이컨은 화약과 나침반, 인쇄술이 유럽 근대 질서의 기초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사람은 그것들이 유럽에서 자체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중국에서 들어 온 것이다.
 
  그리스 과학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과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그것은 다시 이슬람 문화권에서 보존되고 발전되었다. 유럽은 12세기 이후에야 그것을 아랍문헌의 번역을 통해 뒤늦게 받아 들여 17세기 이후 새롭게 발전시킨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서양 근대과학은 오리엔트과학 - 그리스과학 - 아랍 · 이슬람과학 - 17세기 이후의 유럽과학이 융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전적으로 유럽인들의 창의성의 결과라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서양과학과 비서양과학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서양의 우월을 이야기하는 데는 그럴듯해 보이나 실제로는 별 의미가 없다. 그것이 서양인이 지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17세기 이후 유럽과학의 발전을 유럽인의 창의성 탓으로 돌린다면 중세 천년 동안의 불모 시기는 유럽인들의 비창의성에 돌릴 수밖에 없다.
 
  또 18세기까지만 해도 과학은 사회 발전에 본질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일부 사람들의 취미활동에 가까웠다. 산업혁명만 해도 기술이 이끈 것이지 과학이 이끈 것은 아니다. 과학과 기술이 결합한 것은 1830년대 이후이다. 그러니까 과학혁명 때문에 서양이 우월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럽 근대과학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17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발전하며 자연과 세계에 대한 이해의 폭을 크게 넓혀주었고 그리하여 현대 과학문명의 기초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아시아인들은 17세기 이후 유럽과학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유럽 근대과학이 인류의 소중한 유산의 하나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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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유럽 과학의 발전 ⑥
비유럽의 과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


고대 이집트 과학과 그리스 과학
 
  서양학자들은 유럽과학이 그리스의 전통을 이었으며 따라서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과학과는 별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오리엔트 지역의 과학은 실용적인 수준에 머물렀으므로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면에서 그리스 과학보다 한참 뒤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이 자연을 발견한 최초의 과학자이며 탈레스가 최초의 철학자-과학자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오리엔트 과학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그리스와 오리엔트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근대 헬레니즘적 사고의 영향이 아직도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과학도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은 독자적인 성취로 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시대에 와서 과학이 더 정교하게 발전한 것은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은 오리엔트의 영향, 특히 이집트의 영향을 배제하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또 오리엔트 과학은 서양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 있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인들이 이집트에 가서 과학을 배워왔다. 기원전 6세기의 자연철학자인 탈레스는 이집트에 가서 그 사제에게 철학을 배웠고 기하학을 들여왔다. 또 그는 피타고라스에게 이집트에 가서 멤피스와 테베의 사제에게 수학을 배우라고 강력하게 권고한 사람이다.
 
  기원전 5세기 천문학자인 오에노피데스나, 천체 운동을 최초로 수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으로 알려진 기원전 4세기의 에우도수스는 모두 이집트 사제들에게서 천문학을 배워 온 사람들이다. 히포크라테스의 의학도 아스클레피우스와 그 뱀에 대한 종교적 신앙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분명히 이집트적 기원이다.
 
  고전 그리스 시대의 과학의 중심지는 그리스 본토가 아니라 이집트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오니아 지역이다. 또 헬레니즘적 시대의 과학 중심지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였는데 그것은 이 시기의 과학에 이집트적 전통이 매우 강하게 작용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리스 본토의 과학수준이 높았더라면 멀리 떨어져 있는 알렉산드리아까지 그 중심지가 옮겨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집트 과학의 수준도 매우 높다. 수학만을 살펴보자. 수학에서는 산술학, 대수학, 기하학, 삼각법이 다 발전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산술학이었다. 서기(書記)는 호수를 파고, 경사면을 만들고, 오벨리스크를 옮기고, 거상을 세우고, 군대를 보급하는데 필요한 계산법을 배워야 했다.
 
  기원전 16세기의 린드 파피루스에 의하면 이집트인은 10진법 위에서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과 함께 분수를 사용했으며 원주율을 3.16으로 계산했다. 그리고 원통형 곡물저장고의 밑부분 반지름과 높이를 알 때 그 부피를 구하는 방법이나, 사각형안에 내접하는 원의 면적 구하기 같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 또 다른 파피루스에 의하면 윗부분을 잘라낸 피라미드의 부피를 계산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건축을 할 때의 길이 측정단위는 1밀리미터 수준의 정확성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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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린드 파피루스

  지금 남아 있는 수학 파피루스들은 실용적인 목적에 사용하는 교본과 같은 것이므로 그것을 통해 이집트 수학의 이론적인 측면을 잘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상당히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수준에 올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것을 단순히 실용적인 것만으로 폄하하는 것은 편견의 산물로 생각된다.
 
  이슬람 과학
 
  이슬람 과학은 과학사에서 매우 독자적이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이슬람 사회가 안정된 8세기 중반부터 그리스와 헬레니즘적 철학과 과학의 성과를 받아들이며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많은 그리스어 책들이 아랍어로 번역되었고 그 바탕 위에 인도의 천문학과 수학을 받아들이며 독창적인 수준으로 발전했다.
 
  스페인에서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지역에 따라 다르기는 하나 15, 16세기까지 활력을 유지한 곳도 있다. 기하학을 개선했고 대수학을 한층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관측에 큰 비중을 둔 천문학은 프톨레마이오스의 행성 이론 안에서 더 정교해졌다. 광학도 발전했고 아르키메데스의 전통을 이은 수학적 물리학도 발전했다. 연금술의 발전도 물질의 성질을 이해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약학, 의학도 마찬가지이다.
 
  이슬람 세계는 제도 면에서도 과학발전에 기여했다. 병원과 공공도서관, 마드라사라는 종교교육기관, 천문대가 그것이다. 도서관 가운데에는 수십만 권의 장서를 보유한 곳도 있었다. 유럽의 중세대학은 마드라사를 본 따서 만들어진 것이다.
 
  유럽 과학은 12, 13세기에 라틴어 번역을 통해 아랍어로 된 그리스, 헬레니즘적 과학과 이슬람 과학을 받아들이며 그 기초를 마련했다. 이는 15세기의 르네상스 인문주의 운동을 통해 더 확장되었다. 실제로 16, 17세기 유럽과학의 발전은 이슬람 과학 없이는 잘 설명하기 힘들다.
 
  뉴턴도 열심히 한 광학 연구는 이슬람 광학 연구의 전통을 잇는 것이고 연금술도 마찬가지이다. 11세기의 이슬람 약학자인 이븐 시나(라틴 이름은 아비켄나)는 16세기까지도 유럽의 의학이나 약학에서 권위를 유지하고 추앙을 받았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이탈리아의 해부학자 베살리우스도 '그리스인과 마찬가지로 아랍인도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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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학자 아비켄나

  천문학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코페르니쿠스와 이슬람 천문학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서양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유럽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주장하나 이는 미심쩍다. 14세기 다마스커스의 천문학자인 이븐 알-샤티르라는 사람의 책에서 나온 달의 운행 모델이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 나오는 그림과 똑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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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븐 알 샤티르와 코페르니쿠스의 달 운행 모델

  또 13세기의 알-투시가 행성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한 소위 '투시 커플' 그림과, 같은 문제를 다룬 코페르니쿠스의 그림도 거의 비슷하다. 코페르니쿠스는 이에 대해 이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있으나 표절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런 사실은 이미 1950년대에 밝혀졌는데 서양학자들은 아직도 이를 잘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유럽과학의 독자성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이슬람 과학은 16세기는 물론 17세기 초까지도 유럽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 시기에 오면 고대 그리스 고전들은 이미 낡았고 중세 유럽 지식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과거에 라틴어 번역에 의존하던 것과는 달리 아랍어를 배워 아랍어 원전을 직접 연구했다.
 
  16세기 말에 시리아의 한 고위 성직자가 이탈리아로 정치적 망명을 했는데 그는 많은 아랍책을 갖고 왔고 과학책도 꽤 섞여 있었다. 그가 가져온 책들 가운데 이슬람권에서 연구된 <유클리드 기하학> 등 상당한 숫자가 아랍어 판본 그대로 출판되었다. 많게는 3천부까지 찍어냈는데 사업이 수지를 맞출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에 그만큼 아랍 책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는 이야기이다.
 
  이슬람과학에 대한 연구는 아직 매우 부족하여 그 전모를 잘 알기 어렵다. 또 17세기 이후 이슬람 과학이 왜 쇠퇴하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종교와 과학의 마찰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그러면 그 전에는 왜 종교와 과학의 마찰이 없었는지 설명하기가 어렵다.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8-04-30 오후 4:04:56

근대 유럽 과학의 발전 ⑤
하비, 보일, 파라켈수스주의


베살리우스와 하비의 의학
 
  그러면 이제 이 시기에 근대적 과학을 처음 시작한 것으로 생각되는 몇 사람과 파라켈수스주의를 통해 이 시기의 과학이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한번 살펴보자.
 
  의학에서 과학적 기초를 놓은 사람은 이탈리아 파도바 대학의 해부학 교수였던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1514-64)이다. 그의 해부학 지식을 통해 고대 이후 지배적이었던 갈레노스의 생리학을 넘어설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밀한 인체 해부에 기초하여 1543년에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라는 책을 펴냈다. 화가의 도움을 빌린 이 해부도에는 골격, 근육, 핏줄들이 세밀하고 아름답게 그려져 있어 오늘날의 해부도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또 방대한 분량 속에 몸의 각 기관에 대해 상세하고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래서 그를 근대 해부학의 창시자라고 부른다. 더구나 이 책이 코페르니쿠스의 책과 같은 해에 나왔으므로 근대 과학으로의 발전에서 큰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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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살리우스의 해부도

  그러나 그는 갈레노스를 해부학과 생리학에 관한 한 고대의 가장 뛰어난 인물로 존중한 사람이다. 따라서 갈레노스의 체제와 이론을 여러 면에서 비판하고 오류를 수정했다고는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그것을 본받았다. 해부에서도 갈레노스의 논의를 따라 뼈에서 시작하여 근육, 혈관계, 신경계, 각종 장기로 나아가는 순서를 받아 들였다. 또 인체 각 기관에 대한 목적론적인 설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갈레노스는 몸의 각 기관은 자연이나 조물주에 의해 의도를 갖고, 즉 영혼이 명령하는 기능을 수행할 가장 좋은 도구로 설계되었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손에 동물의 발톱 같은 것이 없는 것은 조물주가 예술, 기예, 과학 같은 인간행위를 할 수 있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손가락이 5개이고 엄지손가락의 뼈가 다른 손가락과 달리 두개인 것도 다 손의 훌륭한 쓰임새를 위한 것이었다.
 
  베살리우스는 갈렌의 이런 주장을 좀 축약된 형태이기는 하나 그대로 받아 들였다. 이것은 몸의 다른 기관들의 설명에서도 대체로 마찬가지이다. 가슴에 있는 갈비뼈가 배에는 없는 이유는 만약 갈비뼈가 있으면 배가 늘어나지 못하므로 음식물을 많이 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계속 먹어야 하니 철학을 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럴듯하고 재미있는 발상이기는 하나 근대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영국 사람인
윌리엄 하비(1578-1657)는 파도바 대학에 유학하여 의학을 배웠다. 그 후 많은 해부를 통해 심장의 작동 원리를 알려고 애썼고 결국 심장을 펌프와 같은 것으로 이해했다. 또 팔을 끈으로 동여매면 핏줄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관찰하여 피의 흐름을 인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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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비의 혈액순환도

  그런데 심장은 계속 피를 분출시키므로 일정한 시간 안의 그 분출량은 사람 몸에 있는 전체 피의 양보다 훨씬 많아진다. 따라서 그는 피의 순환을 가정하지 않으면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고 믿었다. 1628년에 출판한 <심장의 운동에 대하여>가 그것을 논리화한 결과물이다.
 
  이렇게 그가 양적인 면에서 접근했고, 실험적 증거에 기초한 과학적 추리로 피의 순환 원리를 발견했으므로 근대 의학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된다. 또 심장을 기계로 보아 기계론적인 사고를 했다고 믿어지므로 과학혁명에 중요한 기여를 한 인물로 칭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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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

  그러나 그는 기계론적 사고를 한 인물은 아니다. 피의 순환이라는 개념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인 그가 그 우주론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원운동은 천상의 질서와 조화의 원리이다. 그는 사람 몸도 근본적으로 우주의 원리를 따른다고 생각했으므로 피의 순환을 우주의 순환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 순환이 동물의 몸에서 영원한 재생(再生)의 원리가 된다고 믿었다.
 
  하비가 도구((instrument)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그를 기계론적 인물로 오해하기도 하나 그의 도구 개념은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 나온 것이지 기계론적 철학에서 나온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실제로 우주가 수학적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고 믿는 기계 론적 철학자들과는 정반대 입장에 섰던 인물이다. 그에게 심장과 피까지 포함한 자연은 목적론적으로 작동하는 것이지 수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힘이나 기계적인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보일과 기계 철학
 
  뉴턴보다 연배는 많으나 동시대인인
로버트 보일(1627-1691)은 당시 잉글랜드의 가장 존경받는 자연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미립자(corpuscular)철학이라는 것을 구상해 냈다.
 
  물질은 더 이상 거의 나눌 수 없는 미립자(corpuscule)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들이 합쳐진 군집의 모양, 크기, 운동이 물질 대상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질과 변화를 만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을 밝히기 위해 그는 실험실에서 많은 화학적 실험을 했다.
 
  또 1658년에 공기 펌프를 발명했고 이 장치를 이용하여 공기의 탄성을 연구했다. 그리하여 같은 온도에서 기체의 부피는 거기에 가해지는 압력에 반비례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보일의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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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일의 공기 펌프

  이리하여 그는 활성이 없는 물질 입자의 운동에 의해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기계론적 철학으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대치하려 한 주된 인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데카르트나 삐에르 가상디, 베이컨과 함께 17세기 후반에 기계론적 철학을 발전시키는데 큰 영향을 준 인물로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그는 매우 근대적인 과학자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일은 이렇게 산뜻하게 정리될 수 있는 간단한 인물은 아니다. 그는 약 1만4천 페이지를 헤아리는 방대한 유고를 남겼는데 아직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이 유고들을 보면 그가 진지한 신학자이자 수사학자이고 도덕가이며 또 연금술사였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최근의 연구는 그의 자연철학이 신학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고 있다는 것에 대체로 합의를 보고 있다. 그가 자연을 완전히 신의 신성한 의지에 예속시키는 중세 이래 기독교의 자발주의 신학의 전통 속에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물질 이론은 신이 어떻게 세계를 디자인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미립자에게 운동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신이기 때문이다. 신이 특별히 만든 미립자에게 각각 부여한 특수한 운동에 의해 그가 계획한 식물이나 동물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를 기계론적 철학자로 판단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연금술과의 관계도 간단하지 않다. 그와 연금술과의 관계는 지금까지 대체로 무시되어 왔으나 그것은 청년기의 일시적인 관심사가 아니라 평생 동안의 작업이었고 말년에 가서는 더 강화되었다. 실제로 금을 만드는데 관심이 많았고 그것을 위해 1650년대에 많은 실험을 거듭했다. 그래서 요사이에는 그의 미립자 철학마저도 연금술적 전통에서 온 것이거나 그것과 가까운 것으로 판단한다.
 
  파라켈수스주의와 의화학의 발전
 
  파라켈수스주의는 16세기 전반 사람인 파라켈수스(c.1493-1541)가 강한 영적, 신비적 요소를 가진 연금술에 기초하여 만든 영향력 있는 물질 이론이다. 점성술과도 결합한 이 연금술적 원리는 병의 치료를 위한 것으로 16, 17세기에 많은 추종자를 얻었고 의화학(醫化學) 의 기초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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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라켈수스(Philippus Aureolus Paracelsus, 1493~1541).

  그러나 보통 파라켈수스주의는 18세기 말에 원소설에 기초한 근대화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까지의 막간극 정도로 취급된다. 그것이 연금술에 많이 의존하고 있으므로 전근대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치가 평가 절하되고 있다.
 
  대부분이 의사들인 파라켈수스주의자들은 당대의 다른 철학자들과 달리 우주와 인간의 이해를 위해 의학, 연금술, 화학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대학의 아리스토텔레스-갈레노스적 전통에 저항했다. 또 진리의 인도자로 논리학이나 수학적 추상을 거부했다. 스콜라적 전통도 거부했으나 지식 추구의 종교적 성격은 강조했으며 헤르메스주의, 신플라톤주의 문헌들에 숨겨진 진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전통적인 4원소설을 거부했다. 성경 속에 불의 창조 이야기가 없으므로 그것이 원소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신 염, 황, 수은의 세 원리를 제시했다. 이는 화학자들에게 삼위일체와도 들어맞고 증류 과정에서 보이는 기체, 액체, 고체의 모습과도 맞는 것으로 보였다.
 
  이들은 소우주와 대우주에 대해 유추 접근했다. 대우주의 관찰을 통해 얻은 것을 인간에게 적용할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천둥과 번개는 공기 중에서 초석과 황이 반응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따라서 그 증기를 마시면 사람 몸을 태우는 질병이 생긴다고 믿었다.
 
  이들은 몸의 체액의 불균형으로 병이 생긴다는 갈레노스주의자들과 달리 이렇게 공기, 음식물을 통해 질병을 만드는 요소가 몸속에 들어와 기관을 손상시킨다고 생각했다. 몸에서 이 불순물들을 제거하지 못하면 질병이 생긴다고 믿었으므로 이들은 화학 요법에 많이 의존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의학에서 화학의 중요성이 점차 커졌고 그리하여 1618년에 나온 런던의 약전(藥典)에는 화학요법이 처음 수록되었다. 또 대학에서도 약학이나 생리학 부분에서 화학의 가치가 점점 커졌으므로 유럽 각 대학 의학부에는 16세기 말, 17세기 초부터 화학교수 자리가 생겼다. 발렌시아, 마부르크, 예나 대학이 그 시초이다.
  파라켈주의는 탄압을 받기도 했고 많은 반대에도 부딪쳤으나 그 지반을 넓혀갔고 17세기 말, 18세기 전반에 나온 많은 논문이나 책에서 그 영향을 볼 수 있다. 그 바탕 위에서 프리스틀리나 라부아지에 의해 화학혁명이 나타나는 것이다.
 
  파라켈주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히 고대적인 이론도, 근대적인 이론도 아니다. 그럼에도 파라켈주의자와 화학철학자들은 새 실험기구들, 새 화학물질들, 새 개념의 도입을 통해 화학의 발전에 나름으로 기여했다. 따라서 그 독자적 가치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근대 초 유럽 과학에서 과학적 요소와 비과학적 요소들을 함께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 시기의 과학자들은 단순하게 근대과학자로 처리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점성술, 연금술, 자연마법, 신학의 영향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기계론적 철학자들을 보통 무신론자로 보는 경향이 있으나 실제로 그런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이 신의 의지와 섭리를 부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들에게서 과학적 사고와 비과학적 사고는 단순한 병치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한데 얽혀서 유기적인 전체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서 근대과학적 측면만을 따로 떼어내 평가한다는 것은 얼마나 작위적이며 이 시기의 역사상을 왜곡시키는 일인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조선일보 입력시간 : 2008.05.15 09:23


지리산 언저리 新 걷기 코스 마을 지나고 산길 걸으며 만나는 지리산 풍경


 

야심 차게 '지리산 종주'에 도전했던 이들 중 절반 이상은 '다시는 안 간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덤볐다가 너무 고되고 배고프고 추웠던 경험을 안고 돌아온 탓이다. 힘겹게 산을 넘지 않고도 이 근사한 산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사단법인 '숲길'이 산림청의 후원을 받아 지리산 둘레 300㎞를 잇는 지리산 도보 트레킹 코스 만들었다. '지리산길'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이 길은 지리산을 감싸고 있는 3개도, 5개시 100여 개 마을을 이어 걷도록 한 장거리 도보 코스다. 길 전체는 2011년 완성될 예정이며, 현재 탐방 가능한 구간은 전체 300㎞ 중 전북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매동마을에서 경남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세동마을까지 이어지는 22㎞의 '시범 구간'이다.

신록이 가장 예쁜 색을 띈다는 5월 초, 천천히 걸으면 1박 2일 정도 걸리는 '지리산길'의 시범구간을 느릿느릿 둘러보고 왔다. 이 구간은 다시 매동마을~금계마을(12㎞)의 1구간과 금계마을~세동마을(10㎞)의 2구간으로 나눠진다. 2구간 중간쯤 있는 벽송사를 지난 지점부터는 아직 길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안내자가 없다면 매동마을에서 벽송사까지만 가는 게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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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길이 지나는 마을들은 나무, 산, 길 그리고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이루어졌다. 경남 창원마을을 지나는 구불구불한 길은 고개 하나를 넘어 경남으로 연결된다. / 조선영상미디어 유창우 기자 canyou@chosun.com


■첫째 날|매동마을~창원마을

'22㎞면 고속도로에서 시속 100㎞로 달릴 경우 15분 정도밖에 안 걸리는 가뿐한 거리지.' 쓸데없는 계산을 뚝딱 해치우고 가뿐한 마음으로 출발점인 매동 마을회관 앞에 오후 2시쯤 섰다.

매동(梅洞)이란 이름은 마을의 생긴 모양이 매화를 닮아 붙여졌다. '지리산길'의 코스를 뜻하는 솔방울 무늬를 따라 작은 고을을 둘러싼 소나무 숲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길이 점점 좁아지고 파란 하늘을 나무들이 가리고 서면서 시원한 그늘이 이어졌다. 숲길 군데군데 부부가 누운 듯한 나란하고 단정한 무덤이 쌍으로 나타났다 물러섰다. 할 줄만 안다면 휘파람을 불고만 싶은, 5월의 신록을 얇게 바른 부드러운 산길이다.

15분쯤 걸었을까. 300살은 족히 먹었다는 매동마을의 자랑 개서어나무가 껄껄 웃는 맘씨 좋은 할머니처럼 숲 속 깊이 기다리고 있었다. '근육나무'라는 별명에 걸맞게 울퉁불퉁한 가지와 줄기를 뻗어대고 있지만 올해 새로 돋은 잎사귀만큼은 아기 살결같이 보드라운 연초록을 하늘하늘 흔들어댔다.

'껙껙껙껙' '뽀로로로로로' '쪼쪼쪼'…. 연분홍 진달래꽃 사이로 새들이 온갖 기이한 소리로 수다를 떨었다. 출발 전 지리산길 안내소에서 얻은 '지리산길 동식물 이야기' 팸플릿엔 지리산의 새들을 지저귀는 소리로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쓰여 있다. '쯔-비 쯔-비, 쯔쯔비-쯔쯔비-' 하면 박새, '힛, 힛, 힛, 삐쭈삐찌이히찌' 하면 딱새, '히요, 호호, 호이호' 하면 꾀꼬리…이런 식이다. 글로만 봤을 땐 '이걸로 어떻게 찾나'라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는데 산에서 녀석들의 목소리를 들으니 궁금한 마음에 자꾸 팸플릿을 펼쳐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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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어그 돼지우리까지는 이런 길(포장 도로)이고 그 넘어서는 또 흙 길이여. 이 논은 노인네들이 힘들어서 한해 묵힌다 카던디, 아들 일곱이 다 도시 나가 사니께…."

매동마을에서 작은 언덕 하나를 넘으면 상황마을의 다랑이논이 위로 층층, 아래로 층층이다. 그 사이로 난 가느다란 길을 뒤뚱뒤뚱 걷다 만난 50대 아주머니가 나물을 뜯다 말을 건네왔다. 5월 초 막 물을 대기 시작한 다랑이논은 여행 사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지런한 황금 물결이 아닌, 다소 거친 흙덩이의 모양을 띄고 있었다. '농부가 집에 가려는데 (다랑이)논이 하나 없어져 살펴봤더니 삿갓 밑에 논 한 배미가 숨어 있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 전해 내려온다는 다소 황당한 이야기는 작은 땅도 놓치지 않고 농사를 지어온 산사람들의 바지런함을 그려낸다.

마을마다 작은 길이 많이 나있지만 솔방울 모양으로 된 표지가 갈림길마다 설치돼 있어 길 찾기는 수월하다. 길보단 뻐근해오는 근육들이 더 문제다. 전북 상황마을과 경남 창원마을 사이를 잇는 등구(登龜)재를 넘을 때쯤이면 숨이 상당히 가빠지게 된다. 전라도·경상도 사람들이 나무 하고 장에 가느라 하도 넘어다녀서 길이 자연스럽게 생겼다는데 꼭대기 높이가 청계산(해발 618m)보다 높은 해발 700m에 달해 뚝딱 넘기는 쉽지 않다.

고개를 지나 옹기종기 모습을 드러낸 창원마을엔 그 흔한 매점 하나 눈에 띄지 않는다. 산에는 잘 정비된 약수터가, 산 아래엔 음식점과 구멍가게가 꽉 차 있는 도시의 등산로를 생각하고 물 한 병 안 사간 게 크게 후회됐다. "해 넘어가는 데 오데 가요"라고 말을 거는 아주머니에게 물 한 잔을 얻어 먹고 첫날 일정을 마무리했다. 마을에서 나가려면 콜택시를 불러야 한다. 마천 콜택시 (055)962-5110, 창원마을에서 출발지인 매동마을까지 돌아가려면 1만1000원 정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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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황마을 앞을 버티고 있는 커다란 돌계단을 오를 땐 '저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진다. 시선이 계단 끝을 넘어서자마자 물 댄 다랑이논 뒤로 겹겹이 지리산의 풍경이 펼쳐진다. /조선영상미디어 유창우 기자 canyou@chosun.com



■둘째 날|창원마을~백송사

마을 사람들이 창원마을 떠나기 전 '윗당산'에 꼭 들렀다 가라고 권했다. '마을의 수호신 나무'라는 뜻의 당산나무는 새 길이 나면서 많이 사라졌다는데, 창원 마을엔 커다란 당산나무가 다섯 그루나 있으니 얼마나 뿌듯할까. 이 중에서 가장 크고 늠름한 600년 된 느티나무를 마을 사람들은 '윗당산'이라고 부르는데 나무 앞에 서면 고요한 마을 전체가 내려다 보인다.

길의 성격과 분위기를 첫날 대충 익혀서 출발하는 마음은 훨씬 가벼웠다. 창원마을에서 금계마을로 넘어가는 출발점은 바닥이 솔방울 천지인 소나무 숲이다. 송진 향기가 빼곡하다. 금계마을부터 둘째 날의 목적지인 벽송사까지는 계속 오르막이다. 두시간 정도는 등산한다고 생각하고 인내심 있게 산을 올라야 한다.

너무 지쳐 다리가 흐늘흐늘해질 때쯤 대나무의 일종인 시누대 숲이 나타난다. '시누대는 키가 작지만 빽빽하게 자라 동물이 몸을 숨기기에 좋은 곳이다. 낮에는 동물이 몸을 숨긴 채 있다가 밤이 되면 활동한다.' 시누대 숲에 대한 안내 표지판을 읽으며 숨을 한 차례 고른 다음 오르막을 꾸역꾸역 더 걸었다. 첫날 코스처럼 표지판이 친절하지 않은 것이 아쉬워진다. 절은 산 위에 있으니 오르막을 따라 걷다가 기와지붕이 눈에 들어오면 이를 따라 가면 된다.

벽송사는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야전병원으로 쓰였다. 절 바로 옆에 세워진 안내판의 '이제 우리의 기억에서조차 사라져가는 빨치산 사건의 비극을 천혜의 자연환경과 함께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라는 문구가 어쩐지 어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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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송사 바로 옆에 있는 서암정사는 바위 더미 위에, 바위의 모양새를 그대로 살려 만든 웅장한 사찰로 벽송사보다는 훨씬 크고 볼 거리가 많다. 사찰 입구에 붙어있는 '눈밭을 걸어가는 사람아, 발걸음을 함부로 옮기지 마라. 오늘 나의 행적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네'같은 '좋은 말씀'을 읽다 보니 길었던 오르막의 고달픈 기억이 잠시나마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숲길'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시범구간'은 벽송사에서 8㎞가량 더 이어지지만, 일반인들은 이쯤에서 지리산 도보 순례를 마무리하는 게 좋다. 벽송사에서 시작되는 이른바 '빨치산길'의 등산로가 몇 해 전 산사태로 군데군데 끊겼기 때문이다. 그것도 모르고 산길에 들어섰다가 조난되기 직전, 더듬더듬 나뭇가지를 부여 잡고 간신히 가던 길을 찾아 되돌아와야 했다. '이어지지도 않는데, 이게 무슨 길이야'라고 툴툴거리며 다시 벽송사로 돌아오는 길, '세상과 나의 대화는 산길이 끝나는 자리에서 다시 이어진다'는 이성복 시인의 문구 하나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가는 길

자가용으로
: 중부고속도로→함양 분기점→지리산 나들목→일성콘도 방향→매동마을

대중교통으로: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지리산 백무동'행 버스를 타고 인월 터미널에서 내린다. 인월 터미널에서 매동마을 가는 버스는 오전 6시50분~오후 8시, 20~30분 간격으로 다닌다.


◆산행 안내


지리산길에는 매점이나 약수터, 화장실이 거의 없다. 물을 챙겨가야 한다. 매동 마을회관, 창원마을 마을회관, 벽송사, 서암정사 외에는 공중 화장실을 찾기 어렵다. 벽송사 지나 '빨치산 길'을 넘어 시범구간 끝까지 가보고 싶다면 '숲길'에 안내자 동행 신청을 미리 해야 한다. 매주 수·토요일 오전 10시 남원시 인월면에 있는 지리산길 안내 센터에서 출발하는 '길동무 프로그램'에 신청하면 마을 주민으로 구성된 동행자가 함께 걸어준다. 매회 선착순 20명.


◆숙소


숙박은 매동마을 민박(011-524-5325·방 하나 약 3만원)이나 금계마을 내 가온누리 펜션(016-9667-1726, www.지리산팬션.kr ·4인 가족 기준 주말 10만원, 평일 8만원)에서 가능하다.


◆여행 문의

지리산길 안내센터 (063)635-0850
www.trail.or.kr. 걷기전에 들리면 지도와 안내책자를 받을 수 있다.


남원·함양=김신영 기자 sky@chosun.com
사진= 조선영상미디어 유창우 기자 canyou@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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