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 덕양구 원신동 201-57번지  서삼능보리밥집 031-968-5694

외곽순환도로 통일로 IC → 벽제지하도 → 장재삼거리 좌회전 → 원신동사무소 → GS칼텍스 →
낙타고개삼거리 → S-OIL충전소 지나서 좌회전→ 남양유업 → 한양CC → 보리밥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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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겨레]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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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봉피양·우래옥·평양면옥에 대만족

미식가 4인이 실명비평 별점 매긴 8곳… 휠체어 접근성 대부분 낮아


‘○○방송 △△ 프로그램 전격 방영!’·‘블로거 ◇◇의 맛집 폴더’….

길거리는 방송사 맛집 프로그램에 소개됐다는 문구의 간판으로 넘친다. 인터넷은 블로거의 맛집 소개 정보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들의 평가는 맛과 서비스라는 식당의 본질보다, 신기한 인테리어나 낯선 ‘메뉴 실험’ 등에 주목하기 일쑤다. 수많은 이른바 ‘맛집 블로거’들도 마찬가지다. 이들 가운데도 음식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분석적인 식당 비평을 펼쳐 보이는 블로거도 있지만, 대부분 “어디가 맛있다더라”는 인상비평에 그친다. 심지어 글보다 사진이 더 많고 식당 연락처 등 최소한의 정보조차 담지 않은 ‘식당 비평’도 많다. 평가라기보다 ‘소개’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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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통이나 이름값에 비해 맛이 떨어지지는 않는가?”, “허름한 간판에 가려져 있지만 맛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곳이 있는가?”와 같이 소비자들이 정작 궁금해하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소개’가 의미 있을까?

〈Esc〉가 계절보다 조금 일찍 냉면특집 기사를 선보이면서, 처음으로 ‘객관적인 실명비평’을 도입한 이유가 여기 있다. 서울시내의 평양냉면집 가운데 냉면을 특별히 즐기는 미식가 네 사람으로부터 맛과 전통에서 회자되는 8곳의 평양냉면집을 추천받아 평가했다. 맛에 대한 평가가 주관적이기 쉬운 점을 경계해 4명의 평가위원들이 8곳 두루 육수·휠체어 접근성 등 여섯 항목을 조목조목 따졌다. 가격의 경우 단순히 높고 낮음이 아니라 품질대비 적절성을 평가했다. 장애인 배려를 식당 평가의 기준으로 삼을 만큼 한국사회가 이미 성숙했다고 판단해, ‘휠체어 접근성’을 한 항목으로 삼았다. 이는 미국 <뉴욕 타임스>의 레스토랑 비평 항목을 본받은 것이다. 음식 칼럼니스트인 예종석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 이경태 이탈리아 레스토랑 주방장, 강영구 제약회사 이사, 김한석 싸이월드 식도락클럽장 등이 평가를 맡았다.

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봉피양·우래옥·평양면옥에 대만족

미식가 4인이 실명비평 별점 매긴 8곳… 휠체어 접근성에선 대부분 낮은 평가


절대적으로 뛰어난 맛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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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만화가 허영만은 <식객>에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숫자와 동일하다”고 말했을 게다. 이 때문에 〈Esc〉도 1등부터 8등까지 순위를 매기는 방식은 채택하지 않았다. 대신 최소한의 객관성을 얻고자 부득이하게 평가위원들에게 별점을 매겨달라고 부탁했다.

평가위원들의 총별점을 합산한 결과 봉피양·우래옥·평양면옥이 차례대로 1∼3위를 기록했으나 차이는 매우 작았다. 강서면옥에 대해서는 수십 년 전통의 본래의 맛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러나 이런 지적은 수십 년 이상 된 냉면집들이 공통적으로 받았다. 선대에서 2∼3대로 넘어오면서 맛이 변했다는 것이다.

휠체어 접근성 항목에서는 우래옥을 제외하고 모든 냉면집이 낮은 평가를 받았다. 우래옥은 유일하게 휠체어 경사로는 물론 입구에 휠체어도 구비해 놓았다. 지하철? 버스 등 대중교통이나 공공시설에서도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많지 않은 마당에, “일개 식당에 장애인 배려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장애인 배려가 구호나 리프트 몇 개 설치해 놓고 “할 만큼 하지 않았냐”고 되묻는 형식적 제스처에 그치지 않으려면, 일상에서 공기처럼 접할 수 있어야 한다. 굳이 이를 평가 항목에 넣은 이유다. 한국이 미국 사회보다 덜 성숙한 사회라고 판단할 특별한 근거도 없었다. (※냉면집 순서는 가나다순)

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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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면 평가위원

출처 - 중앙일보  최종수정2008-05-23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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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중소기업 마케팅팀에서 근무하는 김정수(34) 과장은 일명 ‘술 상무’다. 중요한 업체사람을 만나 술을 접대하는 게 김 과장의 주된 업무다. 새벽까지 과음을 하는 생활을 몇 년째 반복하다 보니 김 과장은 몸이 성치 않다. 간이 안 좋고 뱃살이 나오고 치질이라는 지병이 있다. 얼마 전에는 배변 후 변기에 고인 핏물을 발견했다. 깜짝 놀라 병원을 찾은 김 과장은 수술을 해야 한다는 의사의 소견을 들었다. 술을 많이 마셔서 치질이 악화됐다는 것이다.

과음으로 인해 ‘지병’이 악화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간질환, 심장 및 혈관질환, 비만, 치질 등 술이 증상을 악화시키는 질환은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손꼽히는 질환이 치질이다.

실제로 건강보험공단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건강보험통계연보’ 조사결과를 보면 2006년 입원환자가 가장 많은 질환이 치질(21만3859건)이었다.

그렇다면 왜 과음이 치질을 악화시킬까?

술을 마시면 항문혈관이 팽창해 항문의 피부, 점막이 부풀어올라 치질이 더 악화된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르다가 병원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신촌연세병원 대장항문센터 채윤석 소장은 “치질환자가 과음을 반복하다가 출혈이 심해져 병원을 찾는 경우가 많은데, 치질뿐 아니라 직장암일 수도 있어 꼭 제때 검진을 받아야 한다”며 “치질환자가 술을 자제하는 게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증상초기에 병원을 찾아 치질 자체를 뿌리뽑는 게 선행돼야 한다”고 말한다.

치질은 증상초기에 병원을 찾으면 치료가 비교적 쉬운 질환이다.

치질은 증상에 따라 1-4도로 진단하는데 1도는 배변 후 피가 조금 나오는 상태다. 2도는 배변 시 항문 밖으로 치핵이 빠져 나왔다가 바로 들어간다. 3도는 빠져 나온 치핵이 바로 들어가지 않아 손으로 밀어 넣어야 들어가고, 4도는 손으로 집어넣는 것마저도 힘들다.

진단결과 1-2도라면 좌욕, 섬유질 섭취, 변비완화제를 사용한다. 통증이 동반되면 치핵부위를 고무줄로 묶어 떨어져나가게 하는 밴드결찰술과 치핵부위를 주사로 굳히는 경화요법을 한다.

그러나 3-4도는 수술 외에는 방도가 없다. 흔히 수술이라 하면 큰 수술로 여기지만 치질수술은 레이저나 초음파를 이용해 치핵을 절제하는 방법으로, 비교적 간단하고 재발률이 1% 이하에 달해 환자의 부담이 적다.

강남서울외과 정희원 원장은 “최근의 치질수술은 심하지 않을 경우, 당일퇴원 및 하루 입원을 하며 회복기간이 빠르고 안전해 환자들이 부담 없이 받을 수 있다”며 “치질수술에 대한 두려움으로 무작정 병을 방치하기보다는 병원을 찾아 전문적 치료를 받아야 치질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한편 배변 후 출혈이 있으면 치질뿐 아니라 대장암도 의심할 수 있어 더욱 초기검진이 중요하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2005년 신규 암환자 추이’ 조사결과를 보면 대장암은 위암(2만3125명) 다음으로 2번째(1만5233명)로 많이 발생한다. 의사들은 대장암은 초기에 수술하면 생존율이 95%에 달하지만, 방치하면 5% 이하대로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조인스닷컴(joins)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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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로또를 하지 않습니다. 해본적도 없습니다. 일단 사놓으면 되던 안되던 마음만은 풍요롭다 하지만 선뜻 살 엄두를 내지 못하겠네요. 내가 일단 로또가 되면 "너 차하나 사주고, 너 전세방 하나 마련해주고, 좋은 옷 한벌씩 다 사주고 크게 한턱도 쏜다" 사람들을 로또를 사고나서 이렇게 기분을 냅니다. 그것이 당첨이 되었건 안되었건 그들에게 있어서 그만한 상상도 행복 그 자체이기 때문일 것 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로또를 하십니다. 매주는 아니시지만 한달에 한 두번은 하십니다. 눈이 나쁘신 아버지께서는 매번 오천원어치 로또를 자동으로 뽑아오시고선 "내가 눈이 나쁘니까 니가 한번 당첨날 되면 확인해 보아라" 하십니다.
저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아버지 안될꺼 뻔한데 뭐하러 자꾸 이런걸 하세요~, 낭비에요 낭비~!"

짐짓 그냥 웃으시면서 회피하시지만 어제 그 만한 이유를 알았습니다. 아니 조금만 노력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다른 부모들 처럼 저에게 큰 재산을 물려주실 수 없으십니다. 그렇다고 어렸을때부터 성인이 되어 자기 밥벌이를 하고 있는 지금까지 다른 부모들처럼 많은 걸 누리게 하면서 키우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다. 물론 저도
한때 이런 아버지를 원망하던 철없는 어린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난은 절 똑바로 살아야 한다는 크나큰 버팀목이 되었으며, 없이 살수록 정직하고 정도있게 살아야 한다는 그 말씀을 오늘날 까지도 가슴깊이 새기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께서도 편법을 바라십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지막으로 한번만 한번만 하시는 마음으로 로또를 사십니다. 그리고 그날 하루는 꿈을 꾸십니다. 이게 되면 우리아들 남부럽지 않게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거라고 내가 죽어서도 우리아들 없이 살진 않을거라고..물론 이러한 즐거운 상상이 다음날 아침이면 "아버지 꽝이에요"라는 말에 허허 하시면서 웃어넘기실 테지만, 이런 마음을 알게된 저는 그날 그날의 로또 당첨 확인은 아버지께 죄를 짓는 것 처럼 무안하고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지난 어린시절 그리고 지금까지 바라기만 했지 무엇하나 해드린게 없는 아들은 아버지께서 주신 꾸깃꾸깃한 로또 한장을 죄스럽게 펼처보며 오늘도 눈시울을 적시고 있습니다.

집안에서는 어린시절부터 무뚝뚝하게 자라 사랑한다는 말씀 한번 드리지 못했습니다. 오늘 블로깅을 통해 그 말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출처 - 프레시안

프랑스 혁명과 세계사 ②
맑스주의적 해석이란

고전적 해석이 된 맑스주의적 해석
 
  프랑스혁명이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혁명 100주년이 되는 1889년부터이다. 이 해에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 프랑스혁명사 강좌가 개설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1875년에 수립되었으나 보수세력의 저항으로 힘든 시절을 겪어온 프랑스 제3공화정이 이때 와서 자신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프랑스 혁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혁명시기의 공화주의적 전통을 제3공화국과 연결시키려 한 것이다.
 
  이 강좌의 책임을 맡은 인물이 알퐁스 올라르(1849-1928)이다. 그는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역사가로서 그가 맡은 일은 혁명 해석을 통해 민주적 공화주의를 고취함으로써 제3공화정을 지지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혁명 이전 구체제의 전제를 비난하고 1789년의 폭력혁명을 정당화했다. 또 1791년의 입헌군주제 헌법은 과소평가한 대신, 1792년에 국민공회가 공화정을 수립한 것은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는 그것을 혁명의 절정으로 보았으며 그 독재적 성격은 문제시하지 않았다. 그의 자리는 그가 물러난 후에도 프랑스 혁명사 연구와 관련해 가장 큰 권위를 누리게 되었다.
 
  1차대전이 끝난 후
알베르 마티에즈(1874-1932)가 올라르의 뒤를 이었는데 그는 아예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여 맑스주의에 헌신했으며 그의 후계자들도 모두 이를 본받았다. 그는 특히 1917년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에 고무되어 공포정치를 주도한 로베스삐에르를 권력에 굶주린 독재자가 아니라 독재를 통해 프랑스를 구하려 한 애국적인 인물로 전력을 다해 옹호했다. 그가 파리 노동자들이 대중적으로 원하는 바를 실현시키려 한 민주적인 정치가라는 것이다.
 
  마티에즈를 이은 사람이 조르주 르페브르(1874-1959)로 그는 폭 넓은 연구로 맑스주의적 해석을 완성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의 시대의 탁월한 연구자로서만이 아니라 혁명사를 연구한 모든 세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탁월한 연구자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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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르주 르페브르(Georges Lefébvre)

  그러나 그는 혁명가들이 추구하려 한 것을 자신의 생각과 동일시했고 따라서 혁명에 반대하거나 그에 비판적인 해석들은 싫어했다. 그래서 그의 글은 상당히 실증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르페브르의 뒤를 이은 사람들이 알베르 소불(1914-1982)과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미셀 보벨(1933-)이다. 이렇게 70년대까지 약 80년 동안 혁명사 해석을 주도한 사람들은 다 맑스주의자들이다. 프랑스 혁명이 주로 귀족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의 계급투쟁으로 해석되어 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리하여 맑스주의적 해석은 1970년대까지도 프랑스혁명사에 대한 표준적인, 그래서 '고전적' 해석의 위치를 차지했다. 이것을 자코뱅-맑스주의적 해석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이 해석이 과격파인 자코뱅파의 입장을 많이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맑스주의가 이렇게 정통적 지위를 차지하자 그 권위에 도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그에 대한 도전이 프랑스가 아니라 영국과 미국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맑스주의 해석은 과연 무엇일까?
 
  맑스주의적 해석이란
 
  맑스주의적 해석은 프랑스 혁명을 앞에서 말한 대로 새로 흥기한 부르주아 계급과 전통적인 질서를 유지하려는 귀족계급 사이의 계급투쟁으로 본다. 따라서 부르주아 계급의 흥기가 혁명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물론 르페브르는 혁명에서 농민의 역할을 중시했고, 나중에 소불은 도시 소시민들의 민중혁명을 강조하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부르주아 혁명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생각했다.
 
  부르주아 계급은 수 세기 동안 성장하여 18세기에 오면 경제력이나 개인적 능력, 미래에 대한 전망에서 귀족계급보다 우월한 상태에 도달해 있었다. 이들은 토지가 아니라 동산적(動産的)이며 상업적인 새로운 형태의 재산에 기초해 있었고 또 계몽사상가들이나 경제학자들이 만든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의해 지지되고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의 목적은 시민적 평등이다. 제1신분인 성직자와 제2신분인 귀족의 특권을 없애고, 모든 사람이 같은 법의 지배를 받고, 같은 기준에 따른 세금을 내고, 같은 공직 취임의 기회를 갖고, 같은 조건으로 재산을 소유하는 체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1788년 군주제의 약화는 부르주아계급에게 그들의 꿈을 실현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세력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농민과, 도시의 소시민 대중들이 그것이다. 1788-9년의 경제위기로 고통을 받은 농민들은 혁명 초기에 광범한 농촌지역에서 소요를 일으키며 봉건적인 영주권에 강력히 저항함으로써 혁명을 진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 상큘로트라고 불린 도시의 소시민들은 혁명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들고 일어나 혁명을 급진화시켰고 마침내 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들은 때로는 반자본주의적 태도를 보이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봉건제의 파괴라는 혁명의 목표를 달성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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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큘로트(Sans-culotte)

  이리하여 1789년의 혁명은 새로운 시대를 대표하는 부르주아 계급이 과거의 특권을 대표하는 귀족계급을 전복하고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것은 봉건제의 폐지(1789년 8월 4일)를 통해 과거의 특권적인 질서를 전복하고, 프랑스인권선언(1789년 8월 26일)을 통해 시민의 자유와 평등, 인민주권,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자연권, 법 앞에서의 시민의 평등, 언론과 출판의 자유, 사유재산의 신성성 등을 선언했다. 또 헌법(1791년 9월)을 만들었고, 입헌군주제를 넘어 민주적인 공화제(1792년 9월)까지 달성했다. 국민공회가 집권했던 공화국 시기가 혁명의 절정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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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인권선언문

  그러나 부르주아 계급은 모든 인류의 이름으로 혁명을 주장하고 선전했으나 실제로 그들의 목표는 좁게 제한되어 있었다. 재산 있는 자의 지배라는 자유주의적 태도가 그것이다. 따라서 구질서와 항상 타협하려 했고 대중의 진정하게 평등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열망을 좌절시키려 했다(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아주 간단히 구분하면 자유주의는 일정한 수준 이상의 재산을 소유한 성인남자에게만 참정권을 주는 것이고, 민주주의는 재산에 관계없이 모든 성인남자에게 참정권을 주는 것이다).
 
  그들의 계급이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건이 로베스삐에르를 실각시킨 1794년 7월의 테르미도르 반동이다. 1799년에 나폴레옹이 저지른 군사쿠데타도 같은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프랑스혁명은 세계사를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또 근대세계로 넘어가게 만든 결정적인 단계이다. 그리고 혁명이 만들어낸 자유와 평등은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인 이념이 되어 전 세계를 일주하게 되었다. 이렇게 프랑스혁명을 세계사에서 가장 위대한 혁명으로 만든 것은 맑스에 의하면 그 속도와 폭력성, 완전성이다. 가장 성공한 혁명이라는 말이다.
 
  맑스주의 역사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점은 혁명을 자신과 일체화하는 경향이다. 특히 르페브르가 그런데 그의 논조는 마치 자신이 혁명을 대변하는 듯한 웅변조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역사적 객관성을 잃게 될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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