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프레시안

프랑스 혁명과 세계사 ⑥
프랑스혁명과 봉건제 폐지

18세기말 봉건제의 의미
 
  맑스주의 역사가들에게 봉건제 내지 영주제의 폐지는 매우 중요하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봉건적 생산양식의 청산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랑스혁명에서도 봉건제 폐지를 통해 구체제를 파괴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도래를 위해 필수적인 일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18세기 프랑스 사회를 봉건적 사회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혁명 전 수십 년 동안에 귀족들의 봉건적 반동으로 인해 농민에 대한 봉건적 착취가 강화되었다고 주장한다. 혁명은 바로 이 시기에 봉건체제가 강화된 것에서 비롯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은 코반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중세사학자인 강쇼프의 견해를 받아 들여 봉건제(feodalite)는 서유럽에서는 13세기 말부터 정치체계나 사회구조로서 역사적인 면에서 본질적인 성격은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1735년에 다르강송이라는 사람이 쓴 글을 인용하며 당시에 남아 있던 것은 '단지 영주제의 그림자뿐'이었다고 주장했다. 당시에 영주들이 누리던 영주권은 과거의 흔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물론 맑스주의 역사학자들이 18세기 말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봉건제라는 말을 발명한 것은 아니다. 당시대인들과 혁명가들은 그 말을 일반적으로 사용했다. 실제로 다양한 모습의 영주권들이 남아 있었고 그것이 농민들에게 불만의 대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그 남아 있던 영주권의 내용과 그 의미를 바로 아는 일이다.
 
  영주권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땅에서 농사짓는 농민들로부터 여러 종류의 세금을 현물이나 화폐로 받았다. 영지에서 초급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방앗간이나 빵 굽는 화덕을 만들어 놓고 사용료를 받은 시설독점권도 갖고 있었다.
 
  주변에서 열리는 시장에 대해 세금을 물리고 통행세도 받았다. 영지내의 수렵권과 어로권도 독차지했다. 교회에서 좋은 좌석이나 좋은 묘지를 차지할 특권을 갖고 있었고 칼을 차는 권리를 갖고 있었다. 직접 노동으로 때워주어야 하는 부역도 일부 남아 있었고 일부 지역에는 농노제도 존재했다.
 
  영주권들이 매우 잡다하여 수십 가지 이상이었으므로 그것을 잘 관리하기는 어려웠다. 이를 위해 변호사나 공증인들이 필요했다. 영주가 관리인을 두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중세 말 이후 왕의 권력이 강화되며 통치체제, 또는 농노제에 기초한 생산양식으로서의 봉건제가 무너진 후 영지들의 성격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지들이 재산으로서 사고 팔렸다.
 
  실제로 많은 영지들의 소유권이 돈 많은 평민에게 넘어갔고 그들은 이를 통해 영주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것은 17, 18세기에는 영주권이 상당한 정도로 재산권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 전야에 많은 농민들이 영주권의 폐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모든 곳에서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지역에 따라 다르다. 영주권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은 지역들도 있다. 또 영주권을 없애야 한다고 하면서도 그 때 영주가 희생이 되어서는 안 되고 구입가격만큼 돌려주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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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3년 공안위원회의 중앙위원회

  국민의회의 봉건제 폐지선언
 
  1789년 8월 4일 밤에 국민의회는 봉건제의 폐지를 선언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7월 14일까지도 부르주아 계급은 봉건제 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고 영주권을 공격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체로 농민들만의 문제였다. 그러면 부르주아들은 왜 갑자기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그것은 전국적으로 번진 농민소요 때문이었다. 인구가 늘어나며 토지가 부족한 데다 몇 년째 계속된 흉년으로 먹고 살기 힘들어진 농촌에서는 봄부터 소요가 일었다. 그리고 도시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그것이 곧 농촌지역으로 본격적으로 파급되었다. 이것을 '대공포'라고 부른다.
 
  특히 7월 하순부터 8월 초까지가 심했는데 이는 혁명을 막기 위해 군대가 동원된다든가 비적이 쳐들어온다는 등의 소문으로 농민들의 신경이 과민해진 탓이다. 그래서 농민들이 스스로 무장을 하고 나섰고 그런 가운데 귀족의 성을 공격하고 봉건문서를 불태우는 등 폭력행위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국민의회 의원들은 이런 사태의 발전 속에서 혁명을 유지하기 위해 농민들의 지지를 얻기를 바랐다. 그래서 부랴부랴 이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고 별 준비도 없는 상황에서 봉건제 폐지를 선언한 것이다. 8월 4일 회의가 밤에 열린 것은 되도록 반대자가 많이 불참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8월 11일까지의 복잡한 논의과정을 거쳐 최종 법안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은 폐지라는 원칙은 지키되 그 내용은 가능한 한 축소시키는 형태를 취했다.
 
  그 법안은 영주권을 봉건적 재산과 비봉건적 재산의 둘로 구분했다. 그리고 중세의 농노제에서 비롯했다고 판단되는 '인신적 예속과 관련되는' 전자는 즉시 보상 없이 폐지하도록 했다. 농노제나 부역, 수렵권, 초급재판권 같은 것은 봉건재산으로 분류되었다. 교회에 내는 십일조는 영주권과 관련되지는 않으나 봉건적 재산이 되었다.
 
  반면 재산권의 성격을 갖는 후자는 농민이 그것을 되사야 폐지할 수 있도록 했다. 화폐납(cens)이나 수확에 따라 내는 현물세(champart) 같은 지대 성격의 공납이 그런 것이다(이는 1790년 3월의 입법을 통해 투자액의 년 이익률을 4-5%로 쳐서 그 20-25배를 주고 사야 폐지할 수 있게 되었다). 매매관직도 비봉건재산으로 분류되었다. 이는 현 소유자의 소유권을 인정해 주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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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의회의 본회의 (1791. 9. 14)

  말하자면 이 법안의 목적은 적법한 영지의 소유자에게서 그 재산권을 빼앗는 것이 아니었다. 영지를 법적인 면에서 자유보유지로 전환시킴으로써 순수한 재산권으로 인정해주려는 취지였다.
 
  이론적으로는 그럴듯하나 문제는 어떻게 실천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봉건적 재산과 비봉건적 재산이 뒤얽혀 있어 그것을 구분하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국민의회의 이런 태도에 대해 매우 분개했다.
 
  영주권을 해체하는 시늉만 하고 마는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789년에 이루어졌던 부르주아와 농민의 동맹이 깨어졌다. 농촌 지역에서 1793년까지 소요가 이어진 이유이다. 봉건제의 해체가 부르주아계급의 본래의 목표가 아니었다는 것은 이런 사실을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문제가 최종 결말을 본 것은 대외전쟁과 파리의 정치적 혼란 때문이다. 급박한 상황에서 혁명가들이 농민들의 지지를 절실하게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농민들을 전쟁에 동원하려면 하는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국민공회는 최종적으로는 1793년 7월의 입법을 통해 영주권의 완전한 무상폐지를 결정했다. 이리하여 프랑스에서 봉건제는 완전히 사라졌고 농민들은 해방을 얻게 되었다.
 
  봉건제의 해체가 혁명의 큰 성과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때의 그 봉건제는 생산양식으로서의 봉건제는 아니다. 코반이 주장하듯 그 유제(遺制)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르페브르도 사실은 그 점을 인정하고 있고 자신의 책들의 곳곳에서 '봉건제의 찌꺼기'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럼에도 다른 한 편에서는 그것이 마치 생산양식인 듯이 '봉건제'라는 표현도 함께 사용함으로써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봉건제에서 부르주아 혁명을 통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라는 맑스주의 도식에 맞추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농촌에서의 '봉건제 해체'는 자본주의 발전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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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과 세계사 ⑤
민주주의인가, 독재정치인가

혁명기의 정치와 자유
 
  프랑스 혁명은 보통 근대적 민주주의 제도를 처음 확립한 혁명으로 높이 평가되어 왔다. 처음으로 헌법이 만들어지고 대중적 선거에 의해 의회가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또 '프랑스 인권선언'을 통해서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 등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 자연권이 선언되었다.
 
  그래서 혁명은 장기적으로 볼 때 근대 민주주의로의 발전에서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추상적인 이념으로서의 자유와 평등이 당시 상황에서 실제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 또 선거가 당시의 정치과정에서 어떤 성격을 갖고 있었는지 살펴보지 않으면 그 의미를 잘 알 수 없다.
 
  맑스주의자들은 혁명의 절정기를 공포정치시기로 보고 본다. 폭력적이기는 하나 완고한 구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이 시기를 정상적인 과정에서 이탈한 시기로 부정적으로 본다. 그럼에도 혁명 전체에는 우호적이다.
 
  그러나 수정주의자들은 혁명이 처음부터 독재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와는 관계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자유주의자들이 높이 평가하는 초기의 온건한 시기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이 문제는 미국학자 케이트 베이커에 의해 매우 진지하게 다루어졌다. 그는 퓌레의 견해를 받아들여 루소의 일반의지론이 혁명적인 자코뱅주의로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가를 면밀하게 추적했다.
 
  루소는 1762년의 사회계약론에서 일반의지론을 주장하고 있는데 일반의지란 국민의 전체적인 복지를 가장 잘 아는 의지이다. 그런데 만약 소수파의 사람이 국민 전체의 의지에 반대되는 생각을 할 때는 어떻게 할까.
 
  루소는 이 경우 소수파가 자신의 의견을 버리고 다수 시민들의 의견에 굴복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 원리는 민주주의적으로 보이기는 하나 소수 집단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는 심각한 문제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일반의지론을 국민의회의 토론에 끌어들이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은 엠마누엘-조셉 씨이에스이다. 그는 1788년에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라는 팜프렛을 통해 혁명 이데올로기의 틀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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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베 시에스 (Emmanuel Joseph Sieyes, 1748 –1836)는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통해 혁명의 이데올로기를 구체화한 사람이다.

  그리고 국민의회는 진지한 토론 끝에 그것을 받아 들였다. 그래서 프랑스인권선언 가운데 에는 인민주권설과 일반의지가 들어가 있다. 특히 제 6조의 '법은 일반의지의 표현이다. 모든 시민들은 개인적이건 그 대표들을 통해서건 그 형성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선언은 혁명에서의 일반의지론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초기의 국민의회 내부에서도 의견의 분열이나 차이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치적인 반대 목소리를 원천 봉쇄하려 했고 그런 사람들을 반혁명분자로 모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 따라서 형식적으로는 다수결로 결정이 이루어졌다 해도 실제로는 민주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베이커는 공포정치는 혁명기의 이런 이데올로기에서 비롯한 것이지 단순한 정세 변화 때문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자유는 처음부터 차단당할 운명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혁명가들의 정치이념에 내재해 있던 독재적 성향이 공포정치에 미친 영향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등의 원리와 재산의 신성성
 
  혁명은 시민의 평등을 선언했다. 인권선언은 제 1조에서 '인간은 권리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 사회적 구분은 공동의
유용성의 기반 하에서만 가능하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모든 인간의 평등을 말한 것은 선언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8월11일에 공포된 법 11조에서는 '모든 시민은 출생의 구분 없이 모든 관직에 취임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인권선언 제 6조도 시민들은 그들의 능력에 따라, 다른 구분이 아니라 그들의 덕이나 재능에 의해 관직에 취임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혁명가들에게 이런 표현이 모든 인간이 실질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8월의 여러 법령에 이미 재산의 불가침성이 천명되고 있고 인권선언 제 17조도 사유재산은 침해할 수 없는 신성한 권리이며 공공의 필요를 위해서만 박탈될 수 있고 이때는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렇게 강조된 재산의 신성성은 평등에 대한 어떤 선언에 대해서도 실질적으로는 제한을 가할 수 있었다. 그 점에서는 사유재산이 1789년 이전에 특권이 했던 일을 대치했다고 할 수 있다. 출생의 특권은 사라졌으나 대신 능력과 재산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특권은 모양만 바꾸었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혁명에 의해 새로운 사회의 기준이 된 것은 무엇일까. 그 가장 중요한 것이 재산이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사회적 특권이 사라진 데 대해서는 불만을 느꼈으나 크게 잃을 것이 없었다. 소수의 정치적인 성향이 강한 귀족들이 망명을 했을 뿐 대부분의 귀족이 뒤에 남은 것은 그 때문이다. 박해를 받지 않은 귀족도 많았다.
 
  1789년 8월 11일 법에 의해 관직매매는 금지되었으나 그 후의 의회선거나 공직 선출에서 가장 필요한 요건은 재산이었다. 일정한 재산 소유와 교육이 공직자로서의 필요요건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교구를 포괄하는 지역구를 단위로 하는 기초의회 선거에는 3일 임금 분 이상의 직접세를 내는 능동적 시민만이 참여할 수 있었고 국민의회 의원이나 중요한 공직자를 선출할 수 있는 2차의회 의원이 되려면 10일분의 세금을 내야했다. 공화국 시기에 잠깐 이런 재산 자격 제한이 없어졌으나 뒤에 다시 복구되었다.
 
  그 결과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형성된 것이 명사(名士)층으로 불리는 명망가 집단이다. 이것은 귀족 출신과, 귀족 출신은 아니나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집단으로 나폴레옹 시기에 그 모습을 분명히 드러낸다. 이들은 정치와 공직을 통해 19세기 내내 강력한 힘을 행사했다.
 
  이런 점에서 평등의 원리는 결코 재산소유자 계급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혁명이 신분제를 해체하여 전통적인 특권을 없애기는 했으나 프랑스의 사회적 평등 확대에 큰 기여를 하지 는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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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의 여신이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들고 있는 그림

  혁명기 선거와 독재
 
  선거에 의한 의회의 구성은 민주정치의 기본 요건의 하나이다. 혁명기 동안 20회의 전국 규모 선거나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으므로 이는 혁명의 민주주의적 성격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선거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연구된 것은 90년대에 들어와서이고 그 결과 새로운 사실들이 많이 밝혀졌다.
 
  혁명기의 선거들이 획기적인 것은 사실이다. 유권자 수가 매우 많다. 1791년의 경우에는 전체 인구 2,750만 명 가운데 15%가 투표권을 가졌던 것으로 추산된다. 따라서 공정하게만 치러졌다면 상당한 정도의 민주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혁명가들이 선거를 통제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 선거마다 투표자들에게 충성서약이 요구되었고 명백히 반대 의견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투표가 금지되었다. 또 국민방위군에 참여했던 사람에게만 투표가 허용되는 등 정치적 제한을 가했다.
 
  또 선거와 관련해 정치토론이 금지되었고 후보자간의 대중적 경쟁을 막기 위해 후보자의 이름을 등록하는 절차가 없었다. 따라서 표가 대단히 많이 분산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167명의 유권자를 갖고 있는 선거구에서 한 표 이상의 투표를 받은 사람이 103명인 경우도 있다.
 
  그래서 지방의 유력한 인물이나 자코뱅파 같은 유력한 정치집단이 적은 표를 갖고도 자기 사람을 의원으로 뽑는 것이 가능했다. 이러니 민의가 제대로 반영이 될 리가 없었다. 각 선거구에서의 혁명에 대한 지지도는 지역 자코뱅파의 활동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이는 그들의 선전, 선동활동이 지역정치에 큰 영향을 주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선거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도 크지 않았다. 1790년의 선거에서는 유권자의 48%라는 높은 투표율을 보여준다. 이것은 농촌문제와 관련해 국민의회에게 큰 기대를 갖고 있었던 농민들이 많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대가 깨진 후 투표율은 크게 하락하여 1791년에는 23%, 1792년에는 15%로 떨어지고 그 상태로 90년대 말까지 유지된다. 자코뱅파가 투표율을 올리려고 갖가지 방책을 써도 그 정도 밖에 안 되었다. 그러니 혁명기의 선거라는 것이 대중의 의사를 제대로 전달하는 민주적인 기구로서 제대로 작동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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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과 세계사 ④
프랑스 혁명은 계급투쟁인가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사회적 동질성
 
  프랑스혁명을 귀족계급을 타도한 부르주아 혁명으로 보는 것은 맑스주의자에게는 아주 기본적인 일이다. 그것을 통해 프랑스가 봉건적 생산양식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르주아 혁명으로서의 프랑스혁명은 프랑스사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적 사건이 된다.
 
  고전적 해석에서 프랑스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었으므로 여기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앞에서 말했듯이 코반이다.
 
  그는 1789년 국민의회 의원들의 출신을 분석했는데 상인, 제조업자, 금융업자의 범주에 놓을 수 있는 사람을 모두 합쳐봐야 85명이었다. 전체 의원 648명 가운데 13%에 불과했다. 반면 변호사나 공증인 같은 법률가는 166명으로 약 1/4 정도, 또 지방관리, 판사, 검찰관 등 행정, 사법관리 출신이 278명으로 약 43%를 차지했다.
 
  1792년의 국민공회에 가면 상인, 제조업자, 금융업자 출신의 비율은 더 떨어져 891명 가운데 83명으로 약 9%이다. 법률가들은 비슷하며, 관리출신들은 25% 수준으로 떨어졌다. 반면 전문직업인이라고 할 수 있는 교수나 교사, 의사, 군대의 장교, 작가, 배우 등이 5%에서 17% 정도로 늘어났다.
 
  이것을 보면 혁명을 주도한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이는 상공업 부르주아라기보다는 대체로 법률가, 관리 출신, 전문직업인 집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혁명이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로막는 봉건적 구체제를 분쇄하기 위해 일어났다는 주장은 의문시될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에는 부르주아와 귀족이 어떤 집단이었는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다. 구체제 하에서 귀족과 부르주아가 하나의 상층계급을 구성했었다는 주장은 50년대부터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었다. 무시를 당했을 뿐이다.
 
  테일러의 1967년 연구에 의하면 혁명전 프랑스의 모든 사회집단의 부는 압도적으로 비자본주의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주로 토지재산에 근거한 소유자적(proprietary) 부였다. 귀족이 그럴 것은 당연하나 제3신분의 경우도 이것은 마찬가지였다.
 
  부유한 제3신분의 경우에도 소유자적 부가 상업이나 산업적 부를 훨씬 능가했다. 구체제 하에서 자본주의가 제3신분의 지배적인 생산양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또 귀족과 부르주아는 그 투자 행태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르주아들도 돈이 생기면 토지를 사서 사회적 위신을 높이려했다. 이것은 그들이 비슷한 사회경제적 가치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했다.
 
  옥스퍼드 대학 교수인 루카스의 1973년 연구는 구체제 말에 부르주아와 귀족이 하나의 동질적인 지배 엘리트에 속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과거 귀족이 독점했던 특권들을 이때에 와서 두 집단이 나누어 가졌다는 것이다.
  그는 면세특권을 부여받거나, 영주로서 행동하고, 또 이름에 귀족 칭호를 붙이는 많은 부르주아 평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귀족과 맞먹는 사회적 권위를 누리거나 귀족의 생활양식을 모방하는 부르주아들도 많았다. 그리하여 이제 부르주아를 더 이상 사회경제적인 면에서 귀족과 뚜렷이 분리시키는 태도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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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신분이 사슬을 끊고 무장하는 것을 보고 놀라는 제1신분과 제2신분 (당시의 프린트화)

  혁명은 왜 일어났는가
 
  그 후의 많은 연구들을 통해 오늘날에는 귀족과 부르주아의 동질성과 차이에 대해 더 상세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부르주아의 재산은 귀족의 것과 같이 압도적으로 소유자적인 것이다.
 
  또 부르주아들은 끊임없이 귀족화했다. 그것은 재산을 모은 사람들이 귀족 칭호가 붙은 매매관직이나 영지를 사들임으로써 가능했다. 한 연구에 의하면 1725-1789년 사이에 3만5천 명에서 4만5천 명 정도의 부르주아가 귀족이 되었다. 그리하여 1789년 현재로 모든 귀족 가문의 최소 사분의 일이 18세기에 들어와 귀족화된 가문으로 추산된다.
 
  부르주아만이 아니라 귀족도 상업이나 산업에 투자했다. 실제로 공격적이고 혁신적인 자본주의를 추구한 사람들은 귀족이라고까지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얼마 전까지 주로 부르주아들이 했다고 믿어진 징세청부업은 18세기에 대체로 귀족들의 일거리였다. 이렇게 귀족과 부르주아는 18세기에 들어와 사회경제적으로 거의 하나의 동질적인 집단을 형성해 가고 있었다.
 
  정치의식에서도 현격한 차이는 없다. 삼부회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귀족들의 까이에(청원서)들을 보면 귀족들은 시민적 평등과 공평한 조세부담, 재능과 덕에 따른 관직취임에 대체로 찬성했다.
 
  또 귀족 가운데 많은 사람이 과거에는 부르주아의 독점물로 생각한 정치적 자유주의를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니 18세기에 귀족이 점점 더 반동적이 됨으로써 제3신분의 계급의식을 강화시키고 그 결과 혁명을 발발시켰다는 주장은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면 삼부회의 의사결정 방식에 대한 논쟁이 왜 갑자기 혁명으로 비화했을까. 루카스는 그 원인을 귀족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파리고등법원이, 삼부회가 1614년 형태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1788년 9월에 선언한 데서 찾고 있다.
 
  그는 고등법원의 선언은 귀족이 부르주아와 권력을 나누기를 싫어했다는 것이 아니라 수세대 동안 구분이 희미해진 귀족과 부르주아의 구분을 자의적으로 되살렸다는 점에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과거에 르페브르도 지적했던 일이다. 그도 이 사건으로 부르주아 계급이 귀족과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것을 의식하게 만들어 삼부회를 장악하려는 부르주아의 운동에 불을 붙였다고 주장한 바 있다. 오늘날 많은 수정주의자들이 이 견해를 수용하고 있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은 깊은 사회경제적인 원인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정치적 성격의 혁명으로 바뀌고 있다. 혁명에 우연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하고 있고 혁명에서 나타나는 급진적 요소들은 정치적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라는 것이다.
 
  즉 1789년의 원리는 어느 특수한 사회집단의 바람과 동일시할 수 없으며 그 원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질지는 1789년 봄에는 전연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귀족계급은 왜 그렇게 쉽사리 붕괴했을까. 수정주의자들은 그 원인을 귀족 계급 내부의 분열에서 찾고 있다. 구체제 하에서 가난한 귀족과 부유한 귀족 사이에는 깊은 적대감이 있었고 지방거주 귀족과 베르사유에 거주하는 고위 귀족 사이에도 깊은 적대감이 있었다는 것이다.
 
  반동적이었던 것은 이 소수의 고위 귀족들이며 이 분열이 많은 귀족들의 이반현상으로 나타남으로써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설명이 아직 과거의 맑스주의적 설명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불만족스러울 수 있다. 또 새로운 해석에도 불투명한 점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논리의 발전을 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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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니스코트의 선서. 삼부회의 제3신분 대표들은 헌법을 제정하기 전에는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790년 다비드의 그림)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프랑스 혁명과 세계사 ③
수정주의 해석의 발전

맑스주의 해석에 대해 처음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영국의 알프레드 코반(1901-1968)이다. 그는 1954년의 런던 대학 프랑스혁명사 교수 취임 강연에서 <프랑스혁명의 신화>라는 제목으로 맑스주의적 해석을 처음으로 비판했다.
  그는 우선 혁명이 파괴했다고 하는 봉건제의 개념에 의문을 제기했다. 토지소유에 기초한 통치체제로서의 봉건제는 프랑스에서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고 18세기에 남아 있던 것은 단지 그 의미 없는 흔적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봉건제 폐지의 의미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혁명적인 부르주아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삼부회의 제3신분 대표들의 출신을 분석하여 그 가운데 13%만이 상인, 제조업자, 금융업자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 외 대부분의 대표들은 지방의 낮은 직위의 관리들, 검찰관, 판사 같은 직을 역임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맑스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이렇게 보면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용어가 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코반의 주장은 별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건드릴 수 없는 금기를 깨뜨리는 중요한 일을 한 셈이다. 1964년에 그는 자신의 논지를 더 보강하여 <프랑스혁명의 사회적 해석>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때쯤이면 다른 사람들이 이 일에 가담하게 된다.
 
  미국 학자인 조지 테일러는 1967년에 <비자본주의적 부와 프랑스혁명의 기원>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가 한 일은 혁명 이전의 부르주아계급과 귀족계급의 투자 행태를 검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결과는 비슷했다. 두 계급의 이해관계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1973년의 콜린 루카스의 <귀족, 부르주아, 프랑스혁명의 기원>이라는 글에 의해 다시 뒷받침 되었다. 많은 경험적 증거를 제시하며 루카스는 구체제 말의 부르주아와 귀족이 동질적인 지배 엘리트 집단의 구성원이었음을 밝혔다. 귀족이 특권을 독점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은 아직 소수파이기는 하나 학계에 확고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혁명 연구의 본산은 프랑스였으므로 이런 주장들이 프랑스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큰 의미가 없었다. 1978년에 전기가 왔다. 그 해에 프랑소아 퓌레(1927-1997)가 <프랑스혁명을 생각한다>라는 책을 내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는 이미 1971년에 <혁명의 교리문답>이라는 글을 통해 맑스주의자들의 천편일률적인 계급투쟁론이, 논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카톨릭의 '교리문답'적 성격을 가졌고 민족적 영광과 레닌주의적 이론에 사로잡혀 있다고 통렬하게 비판한 바 있다.
 
  영미의 수정주의 학자들이 사회경제적인 측면에 중점을 둔 데 비해 그는 정치와 이데올로기 면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혁명 해석의 전반적인 전복을 꾀했다.
 
  맑스주의자들은 자코뱅파에 의해 혁명이 과격해진 1792년 8월-1794년 7월의 시기를 높이 평가하나 1789-1792년의 온건한 시기에 이루어진 성취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는 본다. 특히 봉건제 폐지 선언 같은 것은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중요한 단계로 높이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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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2년 1월 쟈코뱅파의 집회모습

  또 전통적으로 크레인 브린튼을 비롯한 영국과 미국의 자유주의 역사가들은 1789-92년의 온건했던 시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왔다. 다만 93-94년의 공포정치 시기는 혁명이 국내의 물가고나 정치적 혼란, 대외 전쟁 등으로 과격해졌고 그래서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난 시기로 보았다.
 
  그러나 퓌레는 혁명이 1789년의 처음부터 문제가 많았다고 생각한다. 국민의회가 처음부터 신중한 토의 끝에 루소의 인민주권설과 일반의지론을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이론에 의해 만들어진 민주주의는 동의에 의한 통치나 개인적 인권을 존중하는 형태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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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혁명이 인민주권이라는 과격한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임으로써 어떤 권력남용도 인민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한 변명될 수 있었으므로 혁명은 처음부터 독재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공포정치시기에 공공연하게 표출되었을 뿐이다. 또 그는 나폴레옹의 제국도 그 독재적 본질에서는 혁명기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단지 그 종막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혁명 시기의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프랑스인이 자유롭게 된 것뿐이며 개인은 국가에 예속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반대도 혁명의 통일성을 해치는 분파투쟁으로 거부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매우 급진적인 것으로 코반까지도 사실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80년대로 들어서며 퓌레의 주장은 점점 많은 지지자들을 얻게 되었고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은 점점 더 많은 주제로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혁명 200주년이 된 1989년 즈음에는 퓌레가 혁명사 연구에 있어 프랑스 내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최근 2, 30년 사이의 프랑스혁명사 연구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맑스주의적 해석이 삽시간에 거의 붕괴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 연구가 지나치게 맑스주의 도식에 의존함으로써 역사현실과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그렇게 오랫동안 주류해석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1930년대, 2차대전의 혼란기와 그 이후에 혁명사 연구가 대체로 부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르페브르 같은 사람의 주장이 과도하게 오랫동안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실증적인 연구들이 쏟아져 나오면 더 이상 정통적인 지위를 유지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지금도 물론 맑스주의적 해석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일부 남아 있다. 그러나 숫자도 작고 영향력도 미미하다. 맑스주의자들 가운데에도 계급투쟁설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으니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최근의 연구들을 통해 프랑스혁명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한 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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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에 참여한 여성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나의 고향은 경남 산청이다.
지금도 비교적 가난한 곳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정형편도 안되고 머리도 안되는 나를

대구로 유학을 보냈다.

 

대구중학을 다녔는데 공부가 하기 싫었다.

1학년 8, 석차는 68/68, 꼴찌를 했다.

부끄러운 성적표를 가지고 고향에 가는 어린 마음에도

그 성적을 내밀 자신이 없었다.

 

당신이 교육을 받지 못한 한을 자식을 통해 풀고자 했는데,

꼴찌라니...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소작농을 하면서도

아들을 중학교에 보낼 생각을 한 아버지를 떠올리면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잉크로 기록된 성적표를 1/68로 고쳐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보통학교도 다니지 않았으므로

내가 1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대구로 유학한 아들이 집으로 왔으니 친지들이 몰려와

"찬석이는 공부를 잘 했더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앞으로 봐야제.. 이번에는 어쩌다 1등을 했는가 배.."했다.

 

"명순(아버지)이는 자식 하나는 잘 뒀어.

 1등을 했으면 책거리를 해야제" 했다.

 

당시 우리집은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살림이었다.

이튿날 강에서 멱을 감고 돌아오니,

 

아버지는 한 마리뿐인 돼지를 잡아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하고 있었다.

 

그 돼지는 우리집 재산목록 1호였다.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부지..." 하고 불렀지만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달려 나갔다.

그 뒤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겁이 난 나는 강으로 가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에서

물속에서 숨을 안 쉬고 버티기도 했고,

주먹으로 내 머리를 내리치기도 했다.

 

충격적인 그 사건 이후 나는 달라졌다.

항상 그 일이 머리에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7년 후 나는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나의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러니까 내 나이 45세가 되던 어느 날,

부모님 앞에 33년 전의 일을 사과하기 위해

"어무이.., 저 중학교 1학년 때 1등은 요..." 하고 말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께서

"알고 있었다. 그만 해라. 민우(손자)가 듣는다."고 하셨다.

 

자식의 위조한 성적을 알고도

재산목록 1호인 돼지를 잡아 잔치를 하신 부모님 마음을,

박사이고 교수이고 대학 총장인 나는

아직도 감히 알 수가 없다.

      - 어느 일간지에 기고 된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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