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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과 세계사 ⑩ 
세계사 속의 프랑스 혁명

맑스주의적 해석의 한계
 
  프랑스 혁명이 세계사적 사건이 된 것은 맑스주의적 해석 때문이다. 봉건적 생산양식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이 프랑스혁명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이 근대사를 여는 시발점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오늘날 맑스주의 해석의 많은 문제점은 사실 맑스 자신에게 귀착된다. 맑스 자신이 프랑스 혁명을 제대로 연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귀조 같은 19세기 초 프랑스 역사가로부터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개념을 빌려 왔는데 그 생각의 근원은 사실 시이에스와 바르나브 같은 혁명가들이다.
 
  그러므로 맑스가 부르주아 혁명에 대해 여기저기에서 단편적으로 말한 것을 마치 불변의 진리처럼 받아들이는 데서 근본적인 문제점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봉건제, 자본주의 같은 중요한 개념에서 다 마찬가지이다.
 
  맑스주의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부르주아지의 개념에 대한 의견차이는 크다. P.빌라르 같은 사람은 부르주아지를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프롤레타리아의 노동력을 사용하고 그 잉여가치를 수취하는 사람들로 본다. 가장 맑스주의 이론에 충실한 주장으로 소불도 대체로 이에 동조한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를 이렇게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자본가와 비슷하게 규정하면 혁명을 부르주아혁명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르페브르는 이에 귀족과 도시의 임금 노동자를 제외하고, 자본가는 물론 중산층, 소시민층까지 포함시킨다. 심지어 농촌 부르주아지라는 개념까지도 사용한다. E.라부르스나 R.로뱅의 개념도 차이는 있으나 크게는 비슷하다. 그러나 이렇게 부르주아지를 폭 넓게 규정할 때 이들 사이에 공동의 이해관계나 동질적인 계급의식이 있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또 앞에서 보았듯이 맑스주의 역사가들은 18세기 말의 봉건제를 크게 과장했다. 그래야 그것을 타파한 부르주아 혁명이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일부는 그렇지 않으나 대부분의 맑스주의 역사가들은 혁명기에 산업 자본주의가 매우 미성숙한 단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맑스주의 도식에서 자본주의가 차지하는 위치 때문에 그 개념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래서 R.로뱅은 그 관계를 '전국적인 규모의 시장형성과 자유계약의 성립에 대한 경제적, 법적, 정치적 장애물들을 제거함으로써 장기적으로 볼 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일반화를 가능하게 했다'고 설정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영국에서는 산업자본주의가 이미 상당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니 프랑스에서 이렇게 제도적 장애물을 일부 제거한 것을 갖고 혁명이 자본주의를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요사이 새로이 맑스주의적 해석을 복권하려는 시도를 하여 신맑스주의자로 불리는 조지 콤니넬 같은 사람의 견해는 매우 유연하다. 그는 1789년 이전에 근대적 자본주의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존재하지도 않는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착취가 있을 수도 없었고, 농민에 대한 봉건적 착취도 없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봉건제는 속류 맑스주의 역사가들이 만든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 구체제하에서의 계급투쟁은 국가로부터 얻어 낼 수 있는 전리품을 둘러싼 부르주아와 귀족 사이의 투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의 주장에서 맑스주의적 수사를 제거하면 앞에서 말한 루카스의 주장과 별로 다를 바 없다.
 
  이렇게 전통적인 맑스주의적 해석이 많은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도외시한 교조적 해석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맑스주의적 해석이 거의 다 무너진 상황에서 그것이 강조해왔던 프랑스혁명의 세계사적 위치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것
 
  그러면 프랑스 혁명의 성취는 무엇이고 그 한계는 무엇일까? 프랑스 혁명은 정치적인 면에서 가장 큰 성과를 이뤘다. 헌법과 대의제도, 공화주의를 실현시킴으로써 이제 더 이상 왕이 제멋대로 하는 전제정치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19세기의 유럽이 헌법과 의회를 요구하는 자유주의시대가 된 이유이다.
 
  프랑스의 정치 문화도 일대 변화를 겪었다. 수많은 대중들이 직접 정치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투표를 하고 정치조직에 가담하고 정치적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해 싸웠다. 언론의 자유와 공공여론은 나폴레옹의 독재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질식하지는 않았다. 그 결과 프랑스에서 혁명은 전통이 되었고 혁명기에 만들어진 공화파와 보수파 사이의 간극은 19세기 내내 정치적 불안정을 가져오는 주된 요인이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자본주의를 확립하거나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물론이지만 오히려 그것을 지연시켰다. 정치적 혼란이 경제적 후퇴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농촌에서는 영주제의 해체를 통해 많은 농민들의 법적 신분이 변화했고 일부 운 좋은 사람들은 토지를 얻게 되었으나 농민들 대부분의 생활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들의 생활양식이나 사고방식이 변화하지는 않았다.
 
  사회적 차원에서도 급진성을 찾기는 힘들다. 귀족제ㆍ영주제의 폐지, 관직매매 금지, 법 앞의 평등, 능력에 따른 관직 임명의 확립이 표면적으로는 지배 엘리트의 변화를 가져왔을 것 같이 생각되나 혁명의 소란이 가라앉고 나자 별 변화가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혁명기를 살아남았고 나폴레옹 시대에 다시 힘을 되찾았다. 이들은 나폴레옹 시대에 발전한 관료제를 통해 일부 부르주아 계급과 결합하여 새로운 지배 엘리트인 명사층을 형성했다.
 
  물론 19세기의 프랑스가 과거보다 더 개방적이고 유동적인 사회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부와 교육, 가족관계, 지역에서의 영향력, 정치적 힘으로 얽혀진 이들이 19세기 내내 프랑스를 지배했다.
 
  문화적으로도 일부 변화는 있었으나 본질적인 변화는 없다. 카톨릭교회는 다시 프랑스인 다수의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구체제에서와 같이 더 이상 부나 특권, 존경을 누릴 수는 없게 되었고 다른 소수종파들을 인정해야 했고 교육이나 호적 사무 같은 세속적인 업무에서는 손을 떼야 했다.
 
  행정개혁과 중앙집권화는 혁명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고 그것이 궤도에 오르는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그럼에도 혁명기와 나폴레옹기를 통해 보다 합리적이고 집권적인 근대국가를 만드는 데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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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가 된 나폴레옹(1804)

  프랑스어의 통일도 구체제시기에 시작되었으나 혁명기에 본격화했다. 혁명기에 법의 통일작업이 이루어졌고 그것은 나폴레옹 법전 속에서 구체화했다. 화폐도 하나로 통일되었고 미터법은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그 후 다른 많은 나라로 확산되었다. 이런 것들은 근대적인 문화를 만드는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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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레옹 법전(1804)

  여기에서 하나 더 언급해야 할 것은 혁명이 후대에 미친 영향만이 아니라 당시대인에게 미친 고통이다. 1792-1815년 사이의 폭동과 전쟁으로 약 2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혁명가들은 인권선언을 발포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 반혁명 혐의자를 제멋대로 체포하고 구금하기 시작했다. 공포정치 시기에는 약 3만 명이 공개 처형되었고 1794년에 공화국이 수감한 죄수의 숫자는 40만 명 이상에 달했다.
 
  흉년, 정치적 혼란, 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 아시냐 지폐의 가치는 1789년에서 1796년 사이에 1/3,000로 하락했다. 가난한 대중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물가와 임금의 통제로 식량과 생필품이 시장에서 동이 나자 국민공회는 농촌에서 강제로 식량을 공출하여 농민들의 불만을 샀다.
 
  게다가 많은 농민들이 강제적인 징병에 반대했으므로 이는 자연스럽게 서부 방데 지방에서의 반란을 비롯한 각지에서의 반혁명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최근의 지방사 연구에 의존하여 혁명기의 가장 대중적인 운동이 있었다면 그것은 호전적인 도시의 상큘로트 운동이 아니라 반혁명운동이라고까지 주장한다. 모든 프랑스인들이 열렬히 혁명을 지지하고 이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프랑스 혁명의 보편성
 
  프랑스혁명이 세계사적 보편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서양학자들의 일반적인 이야기이다. 이미 1856년에 알렉시스 토크빌이 '프랑스혁명은 --- 모든 특정 국민을 뛰어 넘어 온갖 국가의 사람들이 그 시민이 될 수 있는, 그러한 공통의 지적 조국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데서 그 전형적인 표현을 볼 수 있다.
 
  르페브르나 소불도 그 보편성을 주장하는 데에서 거의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래서 1688년의 영국혁명에서 얻어진 영국인의 자유는 영국인만의 것으로 보편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미국혁명(미국 독립)은 자연법에 의존하여 아메리카인의 권리만이 아니라 인간의 권리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나 유색인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명백한 한계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반면 프랑스혁명은 자연법에 호소함으로써 보편성을 갖고 있고 백인만 해방한 것이 아니라 노예제를 폐지했고 종교적 관용뿐 아니라 양심의 자유를 인정했고 신교도와 유대인들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앞의 두 혁명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또 하나 두 혁명과 크게 다른 점은 그것이 평등의 혁명이라는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권리의 평등을 주장한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에서 자유와 평등은 분리될 수 없었는데 평등이 없으면 자유는 소수의 특권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인들도 대체로 이런 견해를 가르치고 배운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의 보편성을 보통 프랑스혁명의 구호인 자유, 평등, 우애(박애)와 관련해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에 큰 오해가 존재한다.
 
  자유라는 개념은 큰 문제가 없다. 자유는 18세기에 어떤 목적을 추구하는데 방해받지 않는 것,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소극적인 자유이다. 그래서 혁명기에 그것이 인간이 양도할 수 없는 자연권, 양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런 개념들은 보편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평등은 아마 많이 오해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보통 사용하는 개념으로서의 경제적인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권리의 평등, 즉 형식적인 법적인 평등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따라서 혁명기에 가난한 사람에 대한 배려는 별로 없다. 또 이런 법적 평등은 선거에서의 재산자격 조항에 의해 크게 제약되었다. 그래서 자유와 평등의 결합은 르페브르의 주장과 달리 19세기에 들어와서도 자유주의라는 형태로, 재산 있는 소수의 특권으로 머물렀다. 이것은 보편적인 개념은 아니다.
 
  박애는 '우애'의 엉뚱한 오역이다. 우애는 '형제애'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인데 휴머니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분열과 사회적 분해를 막음으로써 결속을 강화하려는 혁명가들의 의도가 잘 담겨 있는 구호이다. 이는 공포정치시기에 가장 많이 사용된 말로 극단주의적 냄새를 풍기기 때문에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계사적 보편성의 주장을 위해 더 중요한 것은 프랑스 내 소수종족이나 종파, 또 비유럽인에 대한 태도일 것이다. 혁명가들은 정복지의 병합 과정에서 주민투표를 통해 그 지역이 프랑스공화국에 합쳐지는 방식을 취했다. 인민주권설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르페브르는 인민의 동의에 의한 국가라는 의미에서 '보편공화국의 이념은 혁명의 고귀한 유산'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정복지에서의 주민투표가 주민들의 자유의사를 반영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국내투표에서도 그랬지만 거의 공개되다시피하는 투표에서 감히 반대할 사람이 있겠는가.
 
  노예제의 폐지나 유대인 해방이 어떤 한계를 갖고 있는지는 앞에서 언급했다. 더 큰 문제는 식민주의이다. 혁명가들은 식민주의를 용인하는 태도를 취했는데 그것은 프랑스혁명의 보편주의를 가장 크게 위협하는 요소이다. 그럼에도 르페브르나 소불은 이를 애써 무시하고 있다.
 
  오늘날도 프랑스인들은 프랑스의 세계사적 보편성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자부심을 보인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프랑스혁명이다. 프랑스혁명이 프랑스인의 정체성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영국 다음으로 식민지를 많이 갖고 있던 식민국가이다. 그런데도 식민주의적 악행은 쏙 빼놓고 프랑스혁명만 내세워(그것도 문제가 많지만) 보편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균형 잡힌 사고라고 하기는 어렵다.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주는 대신 그 종교공동체를 파괴하려 한 혁명기의 태도는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다. 몇 년 전 히잡사건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아랍계 여고생들이 머릿수건인 히잡을 쓰고 등교하는 것을 정교분리를 내세워 법으로 막은 것이다. 그렇다고 프랑스 여학생들이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등교하는 것을 금지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다. 분명한 종교탄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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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잡 금지에 항의하는 시위

  작년에는 흑인계 청년들이 파리를 비롯한 대도시에서 폭동을 일으켜 도시들을 화염에 물들게 했다. 가난과 차별에 저항하는 몸부림인 것이다. 이것은 모두 인종주의와 식민주의가 가져온 불행한 결과들이다.
 
  우리사회에서는 유별나게 프랑스에 대해 관대한 태도가 발견된다. 그래서 프랑스인이 말하는 똘레랑스라는 말이 마치 대단한 가치를 갖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프랑스혁명을 신조로 하는 사람들도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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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인청년들의 폭동

  프랑스혁명의 맑스주의적 해석은 프랑스의 문화적 민족주의와 맑시즘의 기묘한 결합이다. 잘못된 교육은 사람들의 정신을 썩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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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과 세계사 ⑨
프랑스혁명과 식민주의, 노예제, 유대인 해방

카리브 식민지와 노예제, 노예무역
 
  식민주의와 노예제 문제는 프랑스혁명의 보편성을 검증할 수 있는 좋은 대상이다. 그것이 내세우는 자유와 평등이 과연 비프랑스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원리인지 알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혁명의 중요한 연구자들은 이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 마티에즈나 소불은 노예제 폐지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을 정도이다. 이는 이 문제들이 자기들 논리의 취약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18세기에 식민지는 프랑스 경제에 사활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이는 특히 카리브 해의 식민지들이 그렇다. 생 도밍그, 마르티니크, 과달루페가 중심이 되는 이 식민지들은 1780년대까지 유럽이 소비하는 설탕과 커피의 1/2을 생산했고 그 3/4은 프랑스에 들어왔다가 재수출되며 프랑스 해외무역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18세기 프랑스의 해외무역이 영국보다도 빨리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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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리브해의 식민지들 : 붉은 색은 산 도밍고, 남색은 과달루페, 초록색은 마르티니크 식민지

  프랑스 경제의 가장 활력 있고 선진적인 이 식민지 상업 부문에 종사한 사람은 1백만 이상이었고 여기에 생계를 의탁하고 있는 사람이 프랑스 전체 인구의 약 1/8이 될 정도였다. 그러니 식민지 문제가 많은 프랑스인들의 관심사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카리브 식민지 가운데서도 '왕관의 보석'으로 불린 생 도밍그가 가장 중요했다. 인구와 산출량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다. 생 도밍그에서는 커피,
인디고, 면화, 사탕수수를 재배했는데 그 중 사탕수수가 가장 중요했다. 전체 플랜테이션의 절반 이상이 그 농장이었다.
 
  또 생 도밍그 플랜테이션의 년 이익률은 8-12%로 영국 식민지들의 4%보다 훨씬 높았다. 그것은 더 많은 투자가 이루어져 가공기술, 관개, 생산성에서 더 높은 수준에 있었기 때문이다.
 
  카리브 지역 플랜테이션은 노예제에 의해 유지되었다. 생 도밍그의 인구는 1750년의 16만6천 명에서 1789년에는 56만 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그 가운데 50만 명이 흑인 노예였고 백인이 3만2천 명, 해방된 유색인이 2만8천 명이었다. 해방 유색인 가운데에는 농장주도 많았다.
 
  이렇게 흑인 노예가 많았던 것은 사탕수수라는 작물의 특성 때문이다. 사탕수수는 키우는 데 1-2년 걸리나 수확하고 나면 48시간 안에 분쇄하고 그 액을 짜내서 끓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상품 가치가 사라진다. 그래서 수확기에 노예들을 매우 혹사시켰다.
 
  그 결과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이는 과로와 영양부족, 질병 때문인데 카리브 지역에 도착한 아프리카인 노예는 8년 안에 그 절반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카리브 식민지의 발전은 노예 노동력의 원활한 공급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프랑스 노예상인들은 17세기 말에는 매년 1천 명에서 2천 명 정도를 카리브 지역에 공급했으나 1780년대에는 그 숫자가 최고조에 달해 매년 평균 3만7천명으로 늘어났다. 1820년까지 대서양을 건넌 아프리카 노예의 1/4이 프랑스령 카리브로 향했다. 프랑스는 18세기에 영국과 함께 가장 중요한 노예무역국가였다.
 
  혁명과 카리브 식민지의 투쟁
 
  카리브 지역에 혁명의 소식이 전해진 것은 1789년 9월 말이다. 그러면서 분위기가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당시에 식민지와 관련해 제기된 문제는 식민지 자치문제, 해방유색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문제, 노예해방 문제였다.
  그러나 이 문제들은 모두 매우 민감한 것으로 식민지와 노예제, 노예무역이 프랑스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하면 함부로 다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국민의회는 가능하면 문제를 회피하는 전략을 취했다. 식민지위원회를 따로 만들어 문제를 연구하도록 조치를 취한 것은 시간도 지연시키고 국민의회가 직접 관련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식민지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백인 식민자들은 진작에 식민지 관리들을 쫓아낸 후 자치의회를 만들 계획을 추진했다. 해방 유색인들은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다. 고통에 시달리는 흑인 노예들은 즉각적인 노예제 폐지를 요구했다.
 
  1790년 3월에 식민지위원회 위원장인 앙트완느-삐에르 바르나브는 백인 농장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새 헌법을 식민지에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과 노예제에 반대하는 폭동을 선동하는 자를 엄격히 단속하겠다고 선언했다. '식민지 체제가 억압적이기는 하나 그것이 수백 만 프랑스인에게 생계를 주므로' 식민지를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현실의 개선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이자 결국 1791년 8월 22일에 생 도밍그에서 대규모 노예반란이 터졌다. 여기에는 몇 주 내에 십만 명의 노예가 참여하여 수많은 플랜테이션들을 불 지르고 황폐화시켰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백인 농장주들은 이웃섬인 영국령 자메이카 행정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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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55년의 생 도밍그 시

  그러자 금방 개원한 입법의회는 1792년 3월에 해방 유색인에 대해 시민권과 정치적 권리를 허용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것을 통해 해방유색인의 마음을 돌려 노예반란을 진정시키고 또 한 편에서 식민지 백인들이 영국의 도움으로 프랑스에서 분리해 나가는 것을 막으려 한 것이다.
 
  입법의회는 6천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백인들은 끝까지 해방 유색인을 동료 시민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1793년 1월에 영국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자 이웃한 마르티니크 섬의 백인들은 영국에게 주권을 양도함으로써 영국군이 1794년 3월에는 마르티니크와 과달루페 섬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카리브 지역의 프랑스군이 영국군에 비해 극히 열세였으므로 생 도밍그의 행정관은 본국 허락 없이 1793년 8월에 흑인 노예의 해방을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노예들의 도움을 얻어 위기를 벗어나려 한 것이다. 이 조치의 효력으로 유능하고 노예들의 지지를 받는 흑인 장군인 투생 루베르튀르를 프랑스 편에 끌어들일 수 있었고 그래서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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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생 루베르튀르

  이에 국민공회는 1794년 2월에 식민지 노예제 폐지를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다시 군대를 파견하여 카리브 지역 다른 섬들의 노예도 해방시키도록 했다. 영국이 1795년에 병력 3만 명을 파견하여 생 도밍그를 점령하려 했으나 투생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그 후 투생은 생 도밍그의 행정관이 되어 본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군사독재를 실시했다.
 
  1802년에 나폴레옹은 카리브 섬들을 다시 통제하고 노예제와 노예무역을 복구하려고 군대를 파견했으나 1804년 11월에 패퇴하고 말았다. 뒤에 남은 많은 백인들은 학살을 당했다. 그 결과 생 도밍그는 아이티라는 이름을 가진 독립국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카리브 식민지와 관련해 혁명가들은 식민지 해방이나 노예제, 노예무역의 폐지에 전혀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 노예해방은 카리브 식민지들이 영국의 손에 넘어갈까봐 취한 궁여지책에 불과한 것이다.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운 것은 흑인 노예들이었지 혁명가들은 아니었다.
 
  그러니 프랑스 혁명의 세계사적 보편성을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구에 찬 것인지 이것을 통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는 프랑스 국내의 유대인 해방에 대한 혁명가들의 태도에서도 비슷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혁명과 유대인 해방
 
  1791년 9월 27일에 제헌의회는 알사스-로렌의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주기로 의결했다. 이것은 유대인에게 법적 평등을 보장해준다는 것을 의미했다. 혁명가들은 당연히 이를 혁명의 보편성을 보여준 쾌거로 환영했다. 많은 유대인들도 이것이 수 세기에 걸친 굴욕과 법적 차별, 주류사회로부터의 배제를 끝내 주리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했다.
 
  그래서 겉으로만 보면 이것은 인간 해방이라는 점에서 시대사적인 의미를 갖는 전환점으로 기록될 수 있었다. 사실 당시 프랑스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수는 많지 않았다. 보르도 주위에 3,500명 정도, 알사스-로렌에 3만 명, 파리에 500명 정도였다. 그럼에도 제헌의회가 다른 많은 중요한 사안에도 불구하고 이 사안을 경시하지 않은 것은 이것이 혁명의 보편성과 관련해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잘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방적인 해방이 아니라 큰 희생을 요구하는 거래였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시민권을 부여받기 위해 유대인 공동체의 자율성을 허용하는 특권을 포기해야 했고 민사적인 일에 대해 유대교 성직자인 랍비가 가지고 있던 관할권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유대인이 프랑스인이 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 자격으로서였다.
 
  혁명가들이 유대인들에게 이런 요구를 한 것은 그들의 종교적 공동체를 제거함으로써 프랑스 문화로의 동화를 촉진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일부 유대인들이 개인적으로 프랑스 사회에 편입되는 대신 유대인의 종교공동체는 공식적으로 부인되었다.
 
  유대인의 해방은 유대인 사회에 큰 파급효과를 가져다 줄 것 같이 보였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유대인 대부분의 직업구조나 주거형태, 종교생활의 형태가 19세기 후반까지도 그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또 랍비의 권위는 공동체의 자율성이 포기됨으로써 많이 줄어들기는 했으나 19세기 상당 부분 동안 종교적, 시민적 일과 관련해 권위를 유지했다. 그뿐 아니라 프랑스 사회 내의 반유대주의적 감정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결국 공화국은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명분으로 유대인에게 형식적인 법적 평등을 주는 대신 그들의 공동체를 부인함으로써 그 종교생활을 파괴하려 한 것이다. 동화를 하지 않는 한 그들이 진정한 프랑스의 국민이 될 수는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 공동체의 본질이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부인한다는 것은 유대인에게 자기 부정을 요구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혁명기의 유대인 해방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혁명이 자랑하는 보편주의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닭 : 영계가 아닌 연계(軟鷄 알을 낳기 전의 닭), 45일을 키운 닭을 사용.
      백세미(육질이 부드럽지만 풀어지는 육계와 쫄깃하지만 성장이 느린 산란계 교배)
기  : 땀이 많이 흐르는 것을 억제, 종기의 고름을 제거해 새살을 빨리 돋게 함.
          기 보충및 소화기 강화.
          3년근 이상(뿌리쪽 뇌두가 세가닥 이상)을 사용하고 뇌두를 제거한 후 껍질 유지
인삼 : 수삼 보다는 뿌리채 말린 건삼을 사용. 잔뿌리에 더 약효가 있고 4년근 이상 사용.
          뇌두(알러지 발생) 제거하고 쇠칼 쇠그릇을 사용 안함(성분 변화)
천문동 : 열을 내리고 폐를 맑게 함
산약 : 비장, 폐, 공팥, 위, 간
연밥(연꽃의 씨) : 소화기능 약화에 따른 설사 및 가슴 두근거림을 치료
녹각 : 간, 신장, 혈액순환, 뼈 강화
마늘 :
구기자 : 간,신장, 정력
하오수 : 자양강장제, 신진대사, 빈혈, 신경쇠약

1. 황기와 녹각은 먼저 2시간  끓인다. 끓기 시작하면 10분간은 센불 이후는 중불로 달인다.
2. 닭은 꽁지와 내부 기름기 제거한 후 찹쌀, 마늘, 은행을 넣고 실로 꿰맨다.
3. 식은 국물에 닭과 한약재를 보자기에 넣어서 끓이는데 끓기 시작하면 다시 약한 불로 푹 끓인다.
    약한 불에서 육즙이 나오기 때문
4.
출처 - 프레시안

프랑스 혁명과 세계사 ⑧
프랑스 혁명기의 문화

계몽사상과 프랑스혁명
 
  프랑스 혁명은 보통 계몽사상을 구현한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실제로 국민의회는 1791년 7월에 볼테르의 무덤을 프랑스의 위인들을 모신 묘지인 판테옹으로 옮기며 성대한 의식을 치렀다. 1794년 10월에는 루소의 유골도 역시 이곳에 봉안되었다.
 
  이런 행동은 혁명가들이 계몽사상가들을 그 선구자로 생각한다는 공식적인 의사 표명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로베스삐에르 같은 혁명가들은 계몽사상이 혁명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위기상황과 혁명의 세기로 접근하고 있다'고 말한 루소가 그런 생각을 만들었을 수 있다.
 
  당시에 이미 음모설을 펴는 사람도 있었다. 반혁명 세력에 속했던 아베 바뤼렐이라는 사람은 혁명은 볼테르, 루소, 디드로 같은 혁명사상가들과 프리메이슨 조직이 18세기 중반부터 음모를 꾸민 결과라고 주장했다.
 
  계몽사상이 혁명의 지적 배경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혁명가들은 계몽사상가들이 만든 가치와 개념,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통해 당시 프랑스 사회가 당면하고 있던 문제점들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었다. 법의 지배 대 자의적 지배, 자유 대 전제, 정의 대 특권 같은 대립적인 개념들이 그것이다.
 
  맑스주의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계몽사상이 혁명 이전과 혁명 과정에서 정치적인 힘으로 작용했다고 주장한다. 계몽사상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본다. 그래서 르페브르는 '18세기 저술가들의 생각이 부르주아에게 파고들어서 그들에게 역사적 사명에 대한 완전한 사명을 주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또 혁명적인 정신이 사회 경제적 운동에서 기원하기는 했지만 (계몽사상의)
이상주의 없이 진정한 혁명정신은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계몽사상가들은 과연 혁명가들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이들은 실제의 정치적 경험이 없는 공론가들이었다. 루소가 공화국을 칭송했으나 그가 머리에 그리고 있는 것은 스파르타나 초기의 로마 같은 작은 도시국가였다. 18세기 중반의 유럽과는 별 직접적 관계가 없었다. 루이 15세는 볼테르를 1745년에 왕실 역사가로 임명했으나 비실제적인 그를 대신으로 임명할 생각은 결코 없었다.
 
  또 이들은 정치적으로도 일관성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볼테르와 디드로는 국내에서는 여러 가지 비판의 목소리도 냈으나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과 러시아의 캐더린 여제에게 는 아부했다. 그들의 후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들 군주의 억압적인 국내정책이나 호전적인 외교정책에 대해서 일체 침묵했다.
 
  어떤 계몽사상가도 구체제의 악에 과감하게 도전하지는 않았다. 또 정치적 반대를 조직하지도 무기를 들라고 호소한 적도 없다. 그들은 기껏해야 개혁가들이었고 현상에 어느 정도 만족하는 사람들이었지 결코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러면 혁명을 가능하게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것은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확대되며 혼란기에 등장한 수많은 대중저술가들, 새로운 정치 엘리트들이었다. 무명의 신부였던 아베 시에스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지만 이들의 생각이 혁명에게 명확한 목표를 제시했다. 그리하여 혁명은 통제 불능한 상태에서 급진화하게 되었다.
 
  이들은 계몽사상의 지적, 이데올로기적 유산 가운데에서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만을 취사선택했다. 그리하여 계몽사상의 가치들은 변질되었다. 코스모폴리타니즘이 민족주의로, 평화주의가 군사주의로, 관용이 광신주의로, 자유가 테러로 바뀌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계몽사상이 필연적으로 혁명을 가져와야 할 필연성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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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혁명을 주제로 한 영화 '라 마르세이유' 포스터

  재생과 '덕의 공화국' 건설
 
  혁명기에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의 하나가 재생(再生)이다. 이는 삼부회 시기부터 많은 팜플렛, 벽보, 까이에에 넘쳐 나던 단어이다. '삼부회에 의해 재생된 프랑스
왕정의 영원한 생명' 같은 제목의 팜플렛에서 그 표현을 볼 수 있다. 심지어 루이 16세도 '삼부회는 왕국의 재생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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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을 상징하는 여러 혁명 포스터의 하나. 왼쪽에 있는 것이 나중에 파시즘 운동의 상징물이 된 파스케스(fasces : 로마시대의 단결을 의미하는 의장물)이고, 오른쪽 돌기둥 가장 위에 있는 단어가 재생(régénération)이다.

  단순하게 '재생'을 말하는 경우도 있으나 시간이 가며 그것은 행정의 재생, 공공질서의 재생, 국가의 재생, 프랑스의 재생 같은 표현으로 확대되었다. 혁명 세력이 프랑스 사회의 어떤 근본적 변화를 모색한 것을 알 수 있다.
 
  재생을 위해서는 먼저 사람이 바뀌어야 했다. 그래서 혁명가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과제의 하나가 신인간(l'homme nouveau)의 창조였다. 이는 새로운 아담을 세속화되고 합리화된 에덴동산에 다시 받아들이는 문제였다. 따라서 교육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를 위해 1793년 12월에 국가가 통제하는 의무적인 초등교육안이 국민공회에서 통과되었다. 교과과정에서는 기독교의 영향을 가능한 한 배제하고 시민적, 공화적
덕성을 가르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안으로 재정도 부족하고 교사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실현은 불가능했다.
 
  결과적으로 교육도 대중적이라기보다는 엘리트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혁명정부의 교육정책이 가져온 당장의 폐해는 더 컸다. 카톨릭 교회의 교육기관들이 폐지됨으로써 1799년에 중등학교 재학생수는 1789년의 1/5로 줄었기 때문이다.
 
  초기부터 그런 경향이 있었으나 특히 공포정치 시기의 프로그램은 정치, 사회적인 것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공화국화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도덕적인 혁명적 유토피아를 만드는 꿈을 새로운 혁명적 문화를 만드는 노력 속에 구체화한 것이다. 그래서 일상생활의 모든 면을 정치화하고 공화주의적 예술을 조장하고 시민적 축제를 개최하고 탈기독교 운동을 벌였다.
 
  사람들은 기독교적인 이름을 로마시대의 영웅이나 당시 혁명가의 이름으로 바꾸도록 권장되었다. 거리 이름들도 새롭게 고쳐졌다. 1793년 8월에는 미터법을 도입하여 혼란스런 척관법 체계를 통일했다. 사회의 합리화 계획의 일부인 이것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고 많은 나라로 확산되었다.
 
  1793년 10월에 국민공회는 인류사의 새 시대를 연다는 의미에서 기존의 책력을 혁명력으로 바꿨다. 공화국을 선언한 1792년 9월 22일이 그 원년 제 1일이 되었다. 이것은 12년 동안이나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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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력

  혁명가들은 선전전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혁명을 찬양하고 그 적을 공격하기 위해 노래, 포스터, 팜플렛, 신문, 책, 삽화, 미술, 조각 등 온갖 수단을 동원했고 심지어 놀음하는 카드에까지 혁명 구호와 상징을 그려 넣었다. 가장 유명한 상징물은 '자유의 여신'으로 알려진 마리안느이다. 이 여인상은 모든 동전이나 법률의 표지, 편지지, 봉인 등의 문양으로, 또 축제를 장식하는 조각상으로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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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의 여신 마리안느 상

  수백 개의 연극이 새로 만들어졌고 옛날 음악도 고쳐졌고 혁명정부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예술가들을 경쟁시켰다. 이 정교한 문화적 운동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혁명축제이다. 이 축제는 1789년에 혁명을 기념하여 시골이나 도시 사람들이 자유의 나무를 심은 데서 비롯했다.
 
  정부는 1790년 7월 14일에 '바스티유의 날' 1주년을 기념하여 연맹축제를 거행했다. 이는 동시다발적으로 전국에서 개최되었고 여기에서 지방관리와 국민방위군은 새 정부를 지키겠다는 충성서약을 해야 했다.
 
  문화와 그것을 통해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려는 혁명기의 노력은 일부 살아남은 것도 있으나 테르미도르의 반동과 함께 대부분 자취 없이 사라졌다. 너무 이상주의적이고 급진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종교문제가 특히 그렇다.
 
  탈기독교화와 그 실패
 
  교회에 대한 비판은 계몽사상에서 일반적이나 그것은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혁명기에 오면 이것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공격만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를 다른 것으로 대치하려는 시도까지 나타났기 때문이다.
 
  1789년 8월의 봉건제 폐지로 십일조 수취가 금지되었다. 그 해 11월에는 전국의 교회 토지가 몰수되었다. 성직자들에게는 국가에서 봉급이 지불되었고 성직자의 선출에도 선거제가 도입되었다. 1790년 7월에는 성직자들에게 성직자시민헌장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했다. 그해 11월에는 모든 성직자가 헌법에 대한 충성서약을 하도록 강제했다.
 
  뒤의 두 가지 요구는 본격적으로 반혁명의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되었다. 많은 성직자들이 그런 서약을 거부하고 투옥되거나 외국으로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혁명이 끝날 때까지 수천 명의 성직자가 처형당했고 3만 이상이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 농민들은 전통적인 종교생활을 부인하는 이런 정책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1793년 말부터 탈기독교화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혁명적 인간을 만드는 마지막 단계로 생각되었다. 11월에 일부 극단주의적 혁명가들이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을 이성을 숭배하는 새로운 '이성의 전당'으로 바꾸고 오페라 여배우를 자유의 여신으로 분장시켜 대규모 축제행사를 벌였다.
 
  로베스삐에르와 국민공회 지도자들을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고 얼마 안 가 이를 금지시켰다. 그것이 가져올 종교적 갈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로베스삐에르는 다른 대안을 찾아냈다. 무신론 대신 이신론적 종교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신론이 무신론 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1794년 6월에 '최고존재'를 숭배하는 새로운 종교가 그의 주도하에 탄생했다.
 
  두 종교 모두 별 지지자를 얻지 못했다. 그리하여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럼에도 이 탈기독교화 운동은 카톨릭 대중과 공화주의자들 사이에 깊은 심연을 만들어냈고 그것은 19세기 내내 지속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진정한 급진주의는 정신생활에 대한 도전에서 나오나 그 실패는 정치, 사회적 영역에서보다 더 분명하다. 결국 나폴레옹은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교황과의 협정을 통해 카톨릭을 다시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프랑스 혁명과 세계사 ⑦
프랑스 혁명과 자본주의

농촌사회와 반자본주의적 경향
 
  1793년의 봉건제 해체를 포함한 혁명기 농촌사회의 변화는 자본주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봉건제 해체는 농촌사회의 토지소유 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농민들이 당시까지 영주들에게 내던 여러 공납이나 부담을 면제 받음으로써 자신들이 경작하던 땅을 이제 직접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귀족들은 1815년이 되면 1789년에 소유하던 토지의 근 절반을 잃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국유지 매각이다. 혁명정부는 교회토지와 망명귀족의 토지를 몰수하여 그것을 일반에게 매각했다. 그 대부분은 교회토지였으나 그것이 전 국토의 10% 정도를 차지했으므로 엄청난 규모의 토지 매각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리고 이런 대규모 토지매각이 1790년대 프랑스의 중요한 사회적 경제적 발전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국유지 매각은 경매 방식을 취했다. 따라서 가난한 농민들의 경우도 일부 토지를 구입하기는 했으나 큰 부분은 대금을 조달할 능력이 있던 부르주아와 부농의 차지가 되었다. 이리하여 농촌 사회에서 과거 영주가 차지하던 자리를 이제 대농들(laboureurs)이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중간에 있는 소농들(petits-propriétaires)과 하층에 있는 수백만의 분익농들(métayers: 이들은 토지를 지주로부터 임대 받아 농사짓고 수확물을 지주와 반분했다), 또 농업노동자들(journaliers)은 별로 얻은 것이 없었다. 사르트르 지역의 경우 대다수 농민의 토지는 5ha에 미치지 못했다. 이에 따라 가난한 농민들의 불만이 적지 않았다.
  대농의 경우 토지가 많이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영농 방식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대농이건 소농이건 전통적인 방식으로 농사짓고 남는 일부 토지는 분익농에게 임대를 주었다. 또 나폴레옹 시대에 분할상속이 허용됨으로써 농민의 토지보유 규모는 더 작아졌다. 이렇게 프랑스 특유의 소농체제가 확립됨으로써 영국에서와 같은 대규모의 자본주의적 영농은 불가능했다.
 
  농민들의 보수적인 태도는 공유지 분할 문제에서도 잘 나타난다. 1793년 6월에 국민공회는 소농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마을마다 있는 공유지를 분할해 주기로 입법을 했다. 개인들이 더 많은 땅을 소유하도록 만들어 주려 한 것이다.
 
  그러나 농민들은 땅이 늘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부했다. 공유지에 가축을 놓아먹이는 등 여러 가지 용익권을 행사하는 전통적인 영농방식이 자신들에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이 법은 나중에 폐기되었고 자코뱅파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자코뱅파는 빈농에 대해 적극적으로 토지를 분배해 주려는 의지는 없었다.
 
  농민들의 이런 보수성은 맑스주의 역사학자들에게도 고민거리였다. 르페브르도 '혁명기의 경제에 관한 입법의 많은 것이 농업자본주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나 농업적 개인주의에 대한 농민의 저항이 그 실행을 막았다'고 이를 인정하고 있다. 이런 보수성이 혁명기 내내 지속된 농촌에서의 반혁명 운동의 근원인 셈이다.
 
  1971년에 소련 역사학자인 아나톨리 아도라는 사람은 소농체제가 대농체제보다 생산성이 더 높고 혁명기 농민들이 자본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는 주장을 통해 기존의 견해를 깨뜨리려 시도했다. 농민혁명이 부르주아혁명과 엇나간 것이 아니라 보조를 맞추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불을 비롯해 지금도 그 견해를 환영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는 기존의 해석을 대치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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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공회시대의 회고 물가제를 상징하는 풍자화

  혁명기의 경제와 자본주의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의 산업과 자본주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프랑스 경제는 18세기에 비약적인 발전을 했는데 그것은 주로 해외무역과 식민지 무역의 급팽창 때문이었다. 한 세기 동안에 외국무역 전체는 4배, 유럽국가들과의 무역은 3배, 식민지와의 무역은 무려 10배가 증가했다. 이것이 경제 각 부문에 큰 파급효과를 미쳤다.
  그럼에도 전반적으로 농업적, 영주제적 사회에 적합한 전근대적 생산수단에 의존하고 있었다. 수백 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철강공장도 있었으나 그것은 예외적인 일로 대부분의 산업은 길드내의 수공업이나 농촌지역의 소규모 가내수공업 형태로 유지되었다.
 
  프랑스에서 가장 발전했던 직조산업은 도시에서 길드들이 과하는 제약을 피해 생산장소를 농촌지역으로 옮긴 대표적인 부문이다. 이곳에서 농민들은 농한기에 대상인들이 공급해주는 원료를 이용해 직물을 생산했다. 반면에 왕으로부터 특권을 받아내어 도시에서 길드의 간섭에서 벗어나서 생산을 하는 대상인들도 있었다.
 
  또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의식도 아직은 근대적이라고 하기 힘들다. 18세기 후반 프링스의 대표적인 기업가 가운데 한 명인 삐에르-프랑소아 투베프는 프랑스 남동 지역의 작은 석탄광들을 근대화하여 생산성을 높이려 했다.
 
  그러나 그 지역 영주의 비협조와 옛날 방식으로 채굴하는 수백 명의 구광산업자, 목탄 생산업자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포기해야 했다. 이들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지키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혁명은 자본주의 발전에 도움을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했다. 80년대의 경기침체는 혁명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으로 더 악화되었다. 또 방대한 국유지의 매각은 투자재원을 토지에 묶어 두는 역할을 함으로써 경기의 회생을 막았다.
 
  전쟁으로 인한 인력, 식량, 가축의 지나친 소모, 1794년의 혹독한 겨울, 또 아씨냐 지폐의 남발로 인한 과도한 인플레이션으로 1795-6년의 산업생산고는 1789년의 1/3 수준으로 감소했다. 프랑스 실크 산업의 중심지인 리용의 실크 생산은 반혁명 폭동으로 인해 1793년 이후에 50% 수준으로 떨어졌다.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으로 가장 큰 고통을 받은 것은 노동계급이었다.
 
  그러나 의미 있는 발전을 한 부문도 있다. 나중에 근대 산업자본주의의 핵으로 떠오른 면직산업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고 신규투자도 이어졌다. 이에 따라 원면수입도 1789년의 4,800톤에서 1803년에는 7,000톤으로 증가했다.
 
  금속산업은 전쟁의 혜택을 많이 보았다.
주철 생산량이 1789년의 5만 톤에서 1800년에는 12만 톤으로 배가 넘게 증가했다. 철강산업에서는 면직과 마찬가지로 상당한 기술혁신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런 부문은 전체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다.
 
  나폴레옹이 1796년에 이탈리아 원정을 시작한 후부터 프랑스 경제는 제국주의적 약탈경제로 성격을 바꿨다. 그가 당시 이탈리아에서 반입한 화폐량은 5천 만 리브르에 달했다. 1799년에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즈음에는 장군들이 만들어내는 돈이 국가예산의 1/4이 될 정도로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그런 가운데 장군들, 군납업자, 은행가들이 유착하며 빈부의 차이가 엄청나게 커졌다. 빈민들은 군대에 들어감으로써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수정주의자들은 혁명 시기의 산업생산이나 농업생산의 통계, 또 소농의 증가를 보면 혁명은 결코 자본주의 혁명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1789-1815년의 잉글랜드와 비교하면 분명하다.
 
  소불은 면직산업에서 뚜렷한 기술적 변화와 구조변화가 나타났으며 이런 산업활동을 통해 부르주아는 귀족과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맑시스트들은 핵심 산업이나 농업 부문에서 거의 큰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의 자본주의적 경제변화보다는 법적, 제도적인 변화에 더 강조점을 둔다. 봉건제의 폐지나 1791년의 길드제 페지와 르 샤플리에 법의 제정, 새로운 도량형으로서 미터법 채용, 지주-소작인과 고용인-수공업노동자 사이의 전통적인 공동체적 관계가 근대적인 계약적 관계로 점차 이행한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프랑스가 산업자본주의를 본격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1830년대에 들어가서이다. 그러므로 혁명이 당장 프랑스 자본주의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할 수는 없다. 19세기 프랑스의 산업화는 영국이나 독일과 달리 서서히 이루어졌는데 이 '지연된 산업화'를 혁명의 결과로 보는 사람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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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2년에 발행된 50리브르짜리 지폐인 아시냐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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