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프레시안

프랑스 혁명과 세계사 ⑩ 
세계사 속의 프랑스 혁명

맑스주의적 해석의 한계
 
  프랑스 혁명이 세계사적 사건이 된 것은 맑스주의적 해석 때문이다. 봉건적 생산양식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이 프랑스혁명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이 근대사를 여는 시발점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오늘날 맑스주의 해석의 많은 문제점은 사실 맑스 자신에게 귀착된다. 맑스 자신이 프랑스 혁명을 제대로 연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귀조 같은 19세기 초 프랑스 역사가로부터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개념을 빌려 왔는데 그 생각의 근원은 사실 시이에스와 바르나브 같은 혁명가들이다.
 
  그러므로 맑스가 부르주아 혁명에 대해 여기저기에서 단편적으로 말한 것을 마치 불변의 진리처럼 받아들이는 데서 근본적인 문제점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봉건제, 자본주의 같은 중요한 개념에서 다 마찬가지이다.
 
  맑스주의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부르주아지의 개념에 대한 의견차이는 크다. P.빌라르 같은 사람은 부르주아지를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프롤레타리아의 노동력을 사용하고 그 잉여가치를 수취하는 사람들로 본다. 가장 맑스주의 이론에 충실한 주장으로 소불도 대체로 이에 동조한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를 이렇게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자본가와 비슷하게 규정하면 혁명을 부르주아혁명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르페브르는 이에 귀족과 도시의 임금 노동자를 제외하고, 자본가는 물론 중산층, 소시민층까지 포함시킨다. 심지어 농촌 부르주아지라는 개념까지도 사용한다. E.라부르스나 R.로뱅의 개념도 차이는 있으나 크게는 비슷하다. 그러나 이렇게 부르주아지를 폭 넓게 규정할 때 이들 사이에 공동의 이해관계나 동질적인 계급의식이 있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또 앞에서 보았듯이 맑스주의 역사가들은 18세기 말의 봉건제를 크게 과장했다. 그래야 그것을 타파한 부르주아 혁명이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일부는 그렇지 않으나 대부분의 맑스주의 역사가들은 혁명기에 산업 자본주의가 매우 미성숙한 단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맑스주의 도식에서 자본주의가 차지하는 위치 때문에 그 개념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래서 R.로뱅은 그 관계를 '전국적인 규모의 시장형성과 자유계약의 성립에 대한 경제적, 법적, 정치적 장애물들을 제거함으로써 장기적으로 볼 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일반화를 가능하게 했다'고 설정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영국에서는 산업자본주의가 이미 상당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니 프랑스에서 이렇게 제도적 장애물을 일부 제거한 것을 갖고 혁명이 자본주의를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요사이 새로이 맑스주의적 해석을 복권하려는 시도를 하여 신맑스주의자로 불리는 조지 콤니넬 같은 사람의 견해는 매우 유연하다. 그는 1789년 이전에 근대적 자본주의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존재하지도 않는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착취가 있을 수도 없었고, 농민에 대한 봉건적 착취도 없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봉건제는 속류 맑스주의 역사가들이 만든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 구체제하에서의 계급투쟁은 국가로부터 얻어 낼 수 있는 전리품을 둘러싼 부르주아와 귀족 사이의 투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의 주장에서 맑스주의적 수사를 제거하면 앞에서 말한 루카스의 주장과 별로 다를 바 없다.
 
  이렇게 전통적인 맑스주의적 해석이 많은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도외시한 교조적 해석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맑스주의적 해석이 거의 다 무너진 상황에서 그것이 강조해왔던 프랑스혁명의 세계사적 위치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것
 
  그러면 프랑스 혁명의 성취는 무엇이고 그 한계는 무엇일까? 프랑스 혁명은 정치적인 면에서 가장 큰 성과를 이뤘다. 헌법과 대의제도, 공화주의를 실현시킴으로써 이제 더 이상 왕이 제멋대로 하는 전제정치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19세기의 유럽이 헌법과 의회를 요구하는 자유주의시대가 된 이유이다.
 
  프랑스의 정치 문화도 일대 변화를 겪었다. 수많은 대중들이 직접 정치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투표를 하고 정치조직에 가담하고 정치적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해 싸웠다. 언론의 자유와 공공여론은 나폴레옹의 독재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질식하지는 않았다. 그 결과 프랑스에서 혁명은 전통이 되었고 혁명기에 만들어진 공화파와 보수파 사이의 간극은 19세기 내내 정치적 불안정을 가져오는 주된 요인이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자본주의를 확립하거나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물론이지만 오히려 그것을 지연시켰다. 정치적 혼란이 경제적 후퇴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농촌에서는 영주제의 해체를 통해 많은 농민들의 법적 신분이 변화했고 일부 운 좋은 사람들은 토지를 얻게 되었으나 농민들 대부분의 생활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들의 생활양식이나 사고방식이 변화하지는 않았다.
 
  사회적 차원에서도 급진성을 찾기는 힘들다. 귀족제ㆍ영주제의 폐지, 관직매매 금지, 법 앞의 평등, 능력에 따른 관직 임명의 확립이 표면적으로는 지배 엘리트의 변화를 가져왔을 것 같이 생각되나 혁명의 소란이 가라앉고 나자 별 변화가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혁명기를 살아남았고 나폴레옹 시대에 다시 힘을 되찾았다. 이들은 나폴레옹 시대에 발전한 관료제를 통해 일부 부르주아 계급과 결합하여 새로운 지배 엘리트인 명사층을 형성했다.
 
  물론 19세기의 프랑스가 과거보다 더 개방적이고 유동적인 사회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부와 교육, 가족관계, 지역에서의 영향력, 정치적 힘으로 얽혀진 이들이 19세기 내내 프랑스를 지배했다.
 
  문화적으로도 일부 변화는 있었으나 본질적인 변화는 없다. 카톨릭교회는 다시 프랑스인 다수의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구체제에서와 같이 더 이상 부나 특권, 존경을 누릴 수는 없게 되었고 다른 소수종파들을 인정해야 했고 교육이나 호적 사무 같은 세속적인 업무에서는 손을 떼야 했다.
 
  행정개혁과 중앙집권화는 혁명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고 그것이 궤도에 오르는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그럼에도 혁명기와 나폴레옹기를 통해 보다 합리적이고 집권적인 근대국가를 만드는 데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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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가 된 나폴레옹(1804)

  프랑스어의 통일도 구체제시기에 시작되었으나 혁명기에 본격화했다. 혁명기에 법의 통일작업이 이루어졌고 그것은 나폴레옹 법전 속에서 구체화했다. 화폐도 하나로 통일되었고 미터법은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그 후 다른 많은 나라로 확산되었다. 이런 것들은 근대적인 문화를 만드는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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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레옹 법전(1804)

  여기에서 하나 더 언급해야 할 것은 혁명이 후대에 미친 영향만이 아니라 당시대인에게 미친 고통이다. 1792-1815년 사이의 폭동과 전쟁으로 약 2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혁명가들은 인권선언을 발포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 반혁명 혐의자를 제멋대로 체포하고 구금하기 시작했다. 공포정치 시기에는 약 3만 명이 공개 처형되었고 1794년에 공화국이 수감한 죄수의 숫자는 40만 명 이상에 달했다.
 
  흉년, 정치적 혼란, 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 아시냐 지폐의 가치는 1789년에서 1796년 사이에 1/3,000로 하락했다. 가난한 대중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물가와 임금의 통제로 식량과 생필품이 시장에서 동이 나자 국민공회는 농촌에서 강제로 식량을 공출하여 농민들의 불만을 샀다.
 
  게다가 많은 농민들이 강제적인 징병에 반대했으므로 이는 자연스럽게 서부 방데 지방에서의 반란을 비롯한 각지에서의 반혁명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최근의 지방사 연구에 의존하여 혁명기의 가장 대중적인 운동이 있었다면 그것은 호전적인 도시의 상큘로트 운동이 아니라 반혁명운동이라고까지 주장한다. 모든 프랑스인들이 열렬히 혁명을 지지하고 이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프랑스 혁명의 보편성
 
  프랑스혁명이 세계사적 보편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서양학자들의 일반적인 이야기이다. 이미 1856년에 알렉시스 토크빌이 '프랑스혁명은 --- 모든 특정 국민을 뛰어 넘어 온갖 국가의 사람들이 그 시민이 될 수 있는, 그러한 공통의 지적 조국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데서 그 전형적인 표현을 볼 수 있다.
 
  르페브르나 소불도 그 보편성을 주장하는 데에서 거의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래서 1688년의 영국혁명에서 얻어진 영국인의 자유는 영국인만의 것으로 보편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미국혁명(미국 독립)은 자연법에 의존하여 아메리카인의 권리만이 아니라 인간의 권리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나 유색인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명백한 한계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반면 프랑스혁명은 자연법에 호소함으로써 보편성을 갖고 있고 백인만 해방한 것이 아니라 노예제를 폐지했고 종교적 관용뿐 아니라 양심의 자유를 인정했고 신교도와 유대인들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앞의 두 혁명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또 하나 두 혁명과 크게 다른 점은 그것이 평등의 혁명이라는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권리의 평등을 주장한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에서 자유와 평등은 분리될 수 없었는데 평등이 없으면 자유는 소수의 특권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인들도 대체로 이런 견해를 가르치고 배운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의 보편성을 보통 프랑스혁명의 구호인 자유, 평등, 우애(박애)와 관련해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에 큰 오해가 존재한다.
 
  자유라는 개념은 큰 문제가 없다. 자유는 18세기에 어떤 목적을 추구하는데 방해받지 않는 것,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소극적인 자유이다. 그래서 혁명기에 그것이 인간이 양도할 수 없는 자연권, 양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런 개념들은 보편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평등은 아마 많이 오해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보통 사용하는 개념으로서의 경제적인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권리의 평등, 즉 형식적인 법적인 평등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따라서 혁명기에 가난한 사람에 대한 배려는 별로 없다. 또 이런 법적 평등은 선거에서의 재산자격 조항에 의해 크게 제약되었다. 그래서 자유와 평등의 결합은 르페브르의 주장과 달리 19세기에 들어와서도 자유주의라는 형태로, 재산 있는 소수의 특권으로 머물렀다. 이것은 보편적인 개념은 아니다.
 
  박애는 '우애'의 엉뚱한 오역이다. 우애는 '형제애'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인데 휴머니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분열과 사회적 분해를 막음으로써 결속을 강화하려는 혁명가들의 의도가 잘 담겨 있는 구호이다. 이는 공포정치시기에 가장 많이 사용된 말로 극단주의적 냄새를 풍기기 때문에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계사적 보편성의 주장을 위해 더 중요한 것은 프랑스 내 소수종족이나 종파, 또 비유럽인에 대한 태도일 것이다. 혁명가들은 정복지의 병합 과정에서 주민투표를 통해 그 지역이 프랑스공화국에 합쳐지는 방식을 취했다. 인민주권설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르페브르는 인민의 동의에 의한 국가라는 의미에서 '보편공화국의 이념은 혁명의 고귀한 유산'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정복지에서의 주민투표가 주민들의 자유의사를 반영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국내투표에서도 그랬지만 거의 공개되다시피하는 투표에서 감히 반대할 사람이 있겠는가.
 
  노예제의 폐지나 유대인 해방이 어떤 한계를 갖고 있는지는 앞에서 언급했다. 더 큰 문제는 식민주의이다. 혁명가들은 식민주의를 용인하는 태도를 취했는데 그것은 프랑스혁명의 보편주의를 가장 크게 위협하는 요소이다. 그럼에도 르페브르나 소불은 이를 애써 무시하고 있다.
 
  오늘날도 프랑스인들은 프랑스의 세계사적 보편성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자부심을 보인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프랑스혁명이다. 프랑스혁명이 프랑스인의 정체성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영국 다음으로 식민지를 많이 갖고 있던 식민국가이다. 그런데도 식민주의적 악행은 쏙 빼놓고 프랑스혁명만 내세워(그것도 문제가 많지만) 보편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균형 잡힌 사고라고 하기는 어렵다.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주는 대신 그 종교공동체를 파괴하려 한 혁명기의 태도는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다. 몇 년 전 히잡사건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아랍계 여고생들이 머릿수건인 히잡을 쓰고 등교하는 것을 정교분리를 내세워 법으로 막은 것이다. 그렇다고 프랑스 여학생들이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등교하는 것을 금지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다. 분명한 종교탄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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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잡 금지에 항의하는 시위

  작년에는 흑인계 청년들이 파리를 비롯한 대도시에서 폭동을 일으켜 도시들을 화염에 물들게 했다. 가난과 차별에 저항하는 몸부림인 것이다. 이것은 모두 인종주의와 식민주의가 가져온 불행한 결과들이다.
 
  우리사회에서는 유별나게 프랑스에 대해 관대한 태도가 발견된다. 그래서 프랑스인이 말하는 똘레랑스라는 말이 마치 대단한 가치를 갖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프랑스혁명을 신조로 하는 사람들도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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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인청년들의 폭동

  프랑스혁명의 맑스주의적 해석은 프랑스의 문화적 민족주의와 맑시즘의 기묘한 결합이다. 잘못된 교육은 사람들의 정신을 썩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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