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가 사라진다] [어떻게 조사했나] 전문가 20여명이 20년치 자료 분석

2만8000여명 실태조사도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사라지는 한국 사회의 구조 변화를 추적하기 위해, 취재팀은 국민연금연구원·사회통합위원회·삼성경제연구소·중소기업연구원·토지주택연구원·
한국개발연구원·한국노동연구원·고려대·중앙대 소속 자문단 20여명과 함께 각종 기초 통계를 새롭게 분석하는 방대한 작업을 석달간 진행했습니다.

자문단은
통계청 도시가계조사 20년치를 토대로 조사 참여 가구의 소득 분포가 연도별로 어떻게 달라졌는지 분석하고, 한국노동패널조사 10년치를 활용해 도시 지역 5000가구의 삶이 외환위기 이후 10년간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를 정밀 추적했습니다. 팀스(TIMSS·국가 간 학력비교시험) 결과 8년치를 토대로 계층별로 성적이 어떻게 오르고 떨어졌는지도 살펴봤습니다.

취재팀은 또
한국고용정보원·잡코리아·한국여성재단·한국한부모사랑회와 공동으로 무주택 서민, 청년 실업자, 한부모 가정 등 우리 사회의 약자 2만8000여명의 삶을 실태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일자리·교육·주택 등의 각 경로에 존재하는 신분 상승의 사다리가 하나둘씩 무너져가고 있음을 객관적 데이터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시리즈는 디지털조선 영상취재팀 프로듀서들과 공동 작업을 통해 3~5분 분량의 미니 다큐멘터리 동영상으로 제작돼 조선닷컴(
www.chosun.com) 사이트에서 서비스됩니다.


당신의 사다리지수는 얼마일까요?

열심히 일하면 잘 살게 된다고 누구나 믿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집 아이가 노력과 능력으로 우뚝 섰다는 성공담이 국민들 가슴을 뜨겁게 했습니다.

고속성장이 주춤해지면서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사다리 신화'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사다리를 올라가는 사람보다 멈춰 서거나 내려서는 사람이 더 많아졌습니다.

누구나 청년 취업난, 조기은퇴 열풍 등에 불안한 지금, 나의 소득은 전체 국민 중 어느 정도 수준일지, 또 내가 국민 평균 소득 미만의 소득 수준으로 떨어질 가능성은 얼마인지 궁금하실 겁니다.

사다리지수란?

국민연금연구원 석상훈 박사의 도움을 받아 2009년 통계청 가구동향조사를 원자료로 해서 사다리 지수를 만들어봤습니다. 학문적으로 토론하자고 만든 지수는 아닙니다. 우리들 각자가 자기가 어디 서 있는지 돌아보고 앞날을 계획할 수 있도록 마련한 지수입니다.



※추론 방법
변수 : 가구주 특성(성별, 연령, 학력, 직업)과 가구 특성(가구원수, 취업자수) 등 6가지 방법 - CHIAD(Chi-Square Automatic Interaction Detection) 알고리즘 활용
빈곤 확률이란 : 중위소득의 50% 이하로 떨어질 가능성. 다시말해 15%로 나온다면, 나의 소득 순위가 15%라는 뜻이 아니라 입력한 변수로 볼때 2009년 기준으로 중위소득 50% 미만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15%란 의미입니다. 이번 분석에서 빈곤결정요인에 있어 중요도는 취업자수학력연령직업가구원수성별(가구주) 순이었습니다.




[사다리가 사라진다] '희망의 사다리'가 사라진다

"아무리 일해도 못 올라가"… 10년새 중산층 5가구중 1가구는 빈곤층 추락

박성민(가명·35)씨. 경기도 평택에서 자라 전문대 중퇴 후 해병대 복무를 마치고 곧장 운송회사에 입사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63)가 2.5t 용달차를 몰아 식구들 먹여 살리고 아파트도 한 채 마련하는 것을 보고 '대학 안 나와도 먹고살겠다'고 자신했다.

그 믿음에 금이 간 것은 작년 3월이었다. 12년 근속한 운송회사에서 구조조정 당했고, 9개월 만에 취직한 급식 납품업체에서도 넉 달 만에 실직했다. 1년 새 두 번 실직한 것이다.

그는 주 1~2회 이삿짐 아르바이트로 버텼다. 일당 7만원을 쥐고 파김치가 돼 귀가하면 초등학교 2학년부터 세 살배기까지 딸 셋이 박씨 다리에 매달려왔다. 제지공장과 택배회사를 돌며 숱하게 면접을 본 끝에 지난 5월 간신히 동네 마트 배달사원이 됐지만 가게 형편이 나빠지면 언제라도 실직할 수 있는 임시직이다. 박씨는 "당장 먹고살기도 힘들지만 전망이 안 보이는 게 더 괴롭다"고 했다.


한국 사회를 떠받쳐온 '상승의 사다리'가 작동을 멈추고 있다. '하면 된다'는 계층 상승의 메커니즘에 균열이 생기고, '노력해도 가난에서 탈출할 수 없다'는 좌절감이 확산되고 있다.

취재팀이 지난 석 달간 각 부문 전문가들로 자문단을 꾸려 한국노동패널조사 10년치(1998~2007년)와 통계청 도시가계조사 20년치(1989~2009년)를 정밀 분석한 결과, 지난 20년 사이 '위로 올라가는 사람이 많은 사회'에서 '멈춰 서거나 아래로 떨어지는 사람이 더 많은 사회'로 변화했음이 수치로 확인됐다.

외환위기 전(1989~1995년)까지 우리 사회에선 중산층이 꾸준하게 늘어났다(1989년 72.5%→1995년 75.0%). 외환위기를 전후(1996~2001년)해 중산층이 5년 만에 4.5%포인트 줄어들고 빈곤층과 상위층으로 양극화됐다.



외환위기 후폭풍이 가라앉은 뒤(2002~2009년) 이런 급격한 변화는 사라졌지만 중산층은 야금야금 줄어들고 빈곤층은 지속적으로 두꺼워지고 있다(중산층 2002년 69.4%→2009년 68.1%, 빈곤층 2002년 9.3%→11.3%).

외환위기 직후 중·상위층이던 가구 다섯 집 중 한 집(18.8%)이 10년 사이 빈곤층으로 떨어졌다는 사실도 처음 수치로 확인됐다. '아차' 하는 순간 아래로 추락하는 경험이 그만큼 광범위하다는 뜻이다.

외환위기 직후 빈곤층이던 가구는 다섯 집 중 세 집(55.7%)이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빈곤층에 머물러 있었다. 분석을 총괄한 노대명 사회통합위원회 전문위원은 "나머지도 대부분 아슬아슬하게 빈곤선을 넘어선 정도에 불과해 언제든 다시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 같은 분석은 신분상승 가능성이 폭넓게 열려 있던 우리 사회가 이젠 '계층 고착' 상태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공부 잘하거나(교육), 좋은 회사에 취직하거나(고용), 사업이 성공하거나(창업), 내 집을 마련하는(주택) 등의 각종 경로를 통한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박찬욱
서울대 교수(정치학)는 "이제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는 좌절감이 우리 사회에 폭넓게 퍼져 있다"고 했다.


정부는 지난 10년간 수많은 복지제도를 도입하거나 정비했다. 그러나 복지 시스템은 극빈층에게 최소한의 생계비를 대주는 데만 집중해, 중산층이 빈곤층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예방하거나 빈곤층이 능력을 키워 가난에서 탈출하도록 받쳐주지는 못하고 있다. 노대명 위원은 "지금의 복지 시스템은 깁스를 한 사람에게만 목발을 주고, 깁스를 풀면 재활치료도 없이 당장 목발부터 빼앗아 그 사람이 다시 주저앉거나 아니면 아예 깁스를 풀 엄두를 못 내게 하는 식"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복지 만능주의'가 해답은 아니라고 본지 자문단은 지적했다. 일본의 경우, 복지 혜택 확대에 나섰지만 사다리는 복원되지 않고 정부 빚만 거대하게 늘어나 더 이상 지탱이 힘든 한계점 근방까지 왔다. 우리 사회에 '상승의 사다리'를 복원하려면 '복지 안전망'으로 계층 하락을 막는 동시에, '성장 뜀틀'로 상승의 기회를 제공하는 양 갈래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자문단은 제언했다.

 


[사다리가 사라진다] 한국의 '교육 양극화' 美보다 심하다

개천에서 용나던 '한국神話' 무너져…
美는 최상층·최하층모두 성적 올랐지만 한국은 학력差 더 벌어져

지적(知的) 재산권 분야에서 톱클래스로 꼽히는 오관석(48·'김앤장'소속) 변호사는 1981년 서울대 법대에 진학할 때 예비고사 전국 수석을 했다. 당시 그가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1등의 비결은 "학교 수업을 꾸준히 예·복습했다"였다. 제주도 출신인 그는 8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어머니와 삼형제는 친척들 도움으로 살았다. 과외는커녕 학비조차 막막해 중·고교를 학생잡지사(社)가 주는 장학금으로 다녔다. 이후 오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를 수석 졸업했고 대한민국 최상위층이 됐다. 기자가 30년 전 얘기를 꺼내자 그는 "그때는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이 악물고 노력하면 반드시 성공한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가난해도 본인만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일자리를 구해 중·상위층이 될 수 있는 '교육의 계층 상승 사다리'는 아직 살아있을까. 취재팀 의뢰로 자문단의 김경근 고려대 교수(교육학)가 한국과
미국의 '교육 사다리' 현주소를 심층 분석했다.

46개국 만 13세(중2) 학생들을 똑같은 시험지로 평가하는 팀스(TIMSS) 시험의 수학과목 성적(1999~2007년)을 토대로, 부모의 학력·소득 등 사회·경제 배경이 두 나라 학생의 점수 격차에 각각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따져봤다. 분석은 부모 학력과 소득 등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최상층(상위 2.3%), 중류층(상위 50%), 최하층(하위 2.3%)의 3개 계층으로 나눠서 진행했다.

그 결과 지난 8년 사이 미국은 부자든 가난하든 모든 계층에서 팀스 수학 성적이 26.0~28.7점씩 올랐다. 반면 한국은 최상층이 22점 올랐지만 최하층은 2.6점 떨어졌다. 교육 양극화 측면에서 미국은 '현상 유지'를 했지만, 우리는 가정 형편에 따른 아이의 성적 격차가 8년간 24.6점이나 늘어나는 '양극화 심화'를 보인 것이다.

2007년 결과를 놓고 보면, 우리 최상층-최하층(사회·경제지위 상·하위 2.3%) 간 점수 격차는 128.0점으로, 미국의 두 계층 간 점수차(71.5점)보다 1.8배나 컸다. 가정 형편에 따라 자녀 성적이 좌우되는 효과가 미국보다 훨씬 더 크고, '교육의 사다리'가 미국보다 더 크게 망가졌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김경근 교수는 "우리의 2000년대 이후 경제적 양극화의 속도가 미국보다 빨랐던 측면도 작용했을 것"이라며 "하지만 무엇보다 '3불'(본고사·고교등급·기여입학 금지)이나 무상급식 등 경직된 정책 논쟁에 빠져 정작 소외계층에 필요한 실효성 있는 대책 논의가 부족했던 탓이 크다"고 말했다.

교육 사다리의 붕괴는 결국 저소득층의 무기력감을 키워 사회 갈등요소로 작용한다. 서울 노원구의 임대아파트에 사는 최일형(가명·20)씨는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많은 저소득층 젊은이 중 한 사람이다. 최씨는 초등학교 입학 전에 아버지를 여의고, 중졸 학력의 어머니와 월 40만원의 기초생활수급비를 지원받으며 함께 살고 있다.

초등학교 때만 해도 반에서 5등 정도 하면서 '교육 사다리'를 올라탈 희망이 보였다. 하지만 "중학교 이후엔 하루하루가 내리막길이었다"고 최씨는 말했다. 중1 첫 영어시간에 선생님이 "read(읽다) 단어 모르는 사람, 손들어"라고 말했다. 교실에 앉아 있던 33명 중 손을 든 것은 최씨를 포함,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하지 않은 3명뿐이었다. 그는 "커다란 '벽'을 느꼈다"면서 "학교에선 대부분 선생님들이 학원 다니는 아이들 기준으로 수업을 해 따라잡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수능시험을 치른 뒤 대학 2곳과 전문대 1곳에 떨어진 최씨는 요즘 백화점 구내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밤 8시까지 해도 한 달에 손에 쥐는 돈은 80여만원(시급 4110원) 수준인 '88만원 인생'이다. 최씨에게 "왜 학원에서 가서 재수 공부 안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한 달에 50만원이나 하는 학원비도 없고, 지금 와서 1년 더 공부한다고 몇 년씩 학원에서 공부해온 아이들과 경쟁이 될 것 같지도 않다"고 했다.

가톨릭대 성기선 교수(교육사회학)는 "계층을 순환시켜 상위층엔 긴장감을, 하류층엔 희망을 주는 교육의 순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며 "교육제도가 계층이동 기능을 제대로 해주지 못하면 사회 불안과 갈등 증폭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장 목소리를 듣기 위해 취재팀은 15~27세 저소득층 가정의 중고교생·청년 24명과 전화·대면 인터뷰를 했다. 이들 중 "중·고교 시절 주변에 역할 모델이 있었다"고 응답한 이는 4명(16.6%)에 불과했고, 24명 전원이 "학교 수업만으론 사교육 받는 아이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고 응답했다. "내년에 무엇을 할 것이냐"고 질문하자 23명은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나머지 한 명의 대답은 "군 입대"였다. 교육 사다리에서 탈락한 이들에겐 꿈과 목표가 없었다.




[사다리가 사라진다] "우리 땐 능력 우선… 대졸 안부러웠는데"

전문계高의 어제와 오늘
"지금은 공고 나오면 입사조차 안된다니…"

서울 한양공고 42회 동문인 이모(39)씨는 중소기업 CEO다. 국세청에 신고된 이씨 연봉은 1억6000만원. 1990년 한양공고를 졸업한 뒤 전문대 전자과를 나와 'H공작'이라는 중소업체에서 연봉 2500만원으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씨는 "어설프게 대학 나온 사람들보다 초봉이 높았고 회사에서도 금세 인정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씨가 졸업한 20년 전만 하더라도 전문계고는 가정 형편이 어렵지만 똑똑한 학생들을 위한 '성공 사다리'였다. 당시 이씨와 함께 졸업한 동창생 대부분이 번듯한 직장에 취직했다.

 
한양공고 41회(1989년) 졸업생인 전용상 ‘바텍’제조부 차장은“전문계고에서 기술을 일찍 배운 게 사회에서 자리 잡는데 큰 도움 됐다”고 말했다. /조인원 기자 join1@chosun.com  

1989년 2월 한양공고 전자과를 졸업한 전용상(40)씨는 현재 의료장비회사 '바텍'의 제조부 차장이다. 대기업 직원 못지않은 연봉(5000만원)을 받는 그는 "전문계고는 기술로 세상에서 경쟁하려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사다리 역할을 해줬다"고 말했다.

방사선 의료기기 전문업체 '세영엔디씨' 기술팀장인 1990년 졸업생 노근택(40)씨 역시 "우리 땐 대부분 가정 형편상 공고에 진학했지만, 오히려 인문계고·대학 나온 친구들보다 생활이 빨리 안정됐다"고 말했다.



요즘도 괜찮은 일자리를 구하는 졸업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한양공고를 졸업한 김모(19)씨는 4년제 대졸자도 가기 힘들다는 유수 대기업에 취직했다. 하지만 김씨 동창생 300여명 중 안정된 일자리를 구한 사람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취재팀이 한양공고에 의뢰해 1989년 전자과 졸업생 56명과 2009년 전자과 졸업생 29명에게 전화 설문조사를 통해 졸업 후 진로를 물어보았다. 42명이 응답한 1989년 졸업생들은 대부분 현재 버젓한 직업이 있었다. 이들 중 23명(54.8%)은 졸업하자마자 전공 분야에 취직했고, 졸업 직후 비전공 분야에 취직한 학생들은 13명(14.3%)이었다. 나머진 자기가 원해서 대학이나 전문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2009년 졸업생은 응답자 28명 중 취업한 사람이 1명에 불과했다. 2009년 졸업생 김모(20)씨는 "전문대 등으로 진학하더라도 취업은 워낙 힘들기 때문에 친구들끼리 장래 얘기는 잘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연구원 김세종 선임연구위원은 "전문계고 출신을 우리 사회가 믿지 않고 있어 '교육 사다리'의 일정 역할을 해주던 전문계의 고유 기능마저 무너지고 있다"고 말했다.
 

[사다리가 사라진다] 대졸 부모와 고졸 부모, 자녀 수능점수 20점 차이

[사다리가 사라진다] [2] 교육―개천에서 용 나기 힘들다

부모 소득 따라 점수차… 月소득 100만원 늘면 자녀 토익 21점 높아져
무늬만 ‘양극화 해소’… ‘저소득층 입학’ 생색 ‘돈드는 건 알아서’式
평준화의 역설… 빈부차·학력차 눈감고 맞춤형 처방도 외면

교육을 통해 신분 상승의 기회를 주겠다는 '교육 사다리 정책'은 보수·진보 가릴 것 없는 공통의 핵심 정책이다. '자율과 경쟁'의 이명박 정부나 '평등과 참여'라는 노무현 정부나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구호만큼은 빼닮았다.

하지만 "교육 사다리를 복원하자"는 요란한 구호에 비하면 결과는 신통치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부모의 학력은 자녀의 수능시험 성적은 물론 토익 점수와 첫 월급 규모까지 영향을 크게 미쳤다. '사다리 정책'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교육 양극화는 오히려 확대된 것으로 본지 자문단 분석결과 확인됐다.

부모 따라 수능·토익 점수 결정돼

취재팀은 부모 배경에 따라 자녀의 토익 점수, 첫 임금이 얼마나 차이 나는지 자문단 소속
한국개발연구원(KDI) 김희삼 연구위원에게 분석을 의뢰했다. 김 위원은 비(非)농촌지역에 거주하는 5000가구의 노동패널 자료를 토대로 부모의 학력·경제력에 따른 자녀들의 대학·토익·임금 수준을 산출해보았다.

분석결과 대학을 가기 위한 수능시험부터 부모에 따라 성적이 달라졌다. 부모가 모두 대졸인 학생들은 평균 256.2점으로 부모 모두 고졸 이하인 학생들(236.4점)보다 19.8점 높았다.

 
 
똑같은 시간에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서울 W중학교 교문을 걸어나오고 있다. 각종 교육복지정책은 펼쳐졌지만, 교육 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부모 계층과 자녀의 성적이 가장 격렬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지점은 취업에 필요한 토익(TOEIC) 성적이었다. 가구의 월평균 소득이 100만원 늘어날 때마다 자녀의 토익 점수는 21점씩 높아졌다. 부모 모두 대졸자인 학생의 평균 토익 점수는 741.9점으로 부모 모두 고졸 이하인 학생들(667.6점)보다 74.3점이나 높았다.

이 같은 영어 격차는 결국 자녀 세대 임금과 직결됐다. 부모 모두 대졸인 경우엔 첫 월급이 평균 202만9009원이었지만 부모 둘 다 대학을 못 나온 자녀들의 평균 월급은 77%(156만4458원)에 그쳤다.

김 위원은 "수능 점수가 같은 학생들로 비교해봐도 대졸 부모를 둔 자녀와 고졸 이하 부모의 자녀 사이엔 시간당 임금 격차가 24.4% 차이 났다"며 "부모의 계층적 지위가 자녀에게 그대로 대물림되는 현상이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정부가 "개천에서 용 나게 만들겠다"며 도입한 '교육 사다리' 복원정책은 상당수가 구멍투성이였다.

'생색내기 사다리' 정책

상민(가명·13)이네 집은 기초생활수급자이지만 상민이는 워낙 공부를 잘해 남들이 부러워하는 엘리트학교인 국제중에 당당하게 합격했다. 지난 3월 입학 때만 해도 "하늘을 날 것 같다"던 어머니 양경미(가명·45)씨는 그러나 요즘 하루하루가 고통이다. 입학설명회 때 학교측은 "학비가 면제되는 '사배자(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으로 합격했으니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입학하고 보니 ▲영어집중교육강습비 20만원 ▲스쿨버스비 87만원 ▲체육프로그램 비용 37만원 ▲여름해외봉사활동비 100여만원 등 4개월간 250만원을 내라는 통지가 왔다. 수업료는 공짜지만 기타 프로그램에 드는 추가비용은 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4년 전 남편과 헤어진 양씨의 수입은 기초생활수급비를 합쳐도 월 95만원 정도다. 양씨는 "지금은 아는 사람에게 빌리고 신용회복위원회에서 소액 대출도 받아 겨우 버티는데 결국 국제중을 포기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저소득층을 '배려'하는 정책이 저소득층의 '악몽'이 된 것은 부실한 정책 설계 탓이다. 선심 쓰듯 입학의 문은 열어줬지만, 그 학생들이 제대로 학교에 다닐 수 있는 실질적인 지원은 없었던 것이다.

2005년 전문계고 특별전형으로 서울 A대에 입학한 유모(24)씨 역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전문계고 학생만 따로 뽑는 전형 덕분에 수능 3~5등급 성적으로도 명문 사립대에 입학했지만 '입학 허가'로 끝이었다. 유씨는 "수능 성적이 낮은 전문계 출신을 별도로 뽑았다면 어려운 공업수학 정도는 따로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이 있을 줄 알았다"며 "입학만 시켜놓고 방치해놓으니 소외감만 느끼다가 몇달 만에 학교를 떠난 친구들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가짜 평준화'의 역설

전문가들은 "현실적으로 학생들은 빈부 격차도 심하고 학력 격차도 심한데, 공교육은 그저 '학생들을 똑같이 가르쳐야 한다'는 '평준화 허상'에 갇혀 있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문제 진단이 없는 정책이었으니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2003년 도입한 수능등급제는 대표적인 '부실 사다리' 정책이다. 당시 정부는 수능을 사실상 자격 시험화하고 내신 비중을 높이면 사교육을 못 받는 학생들도 좋은 대학에 가게 된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결과는 딴판이었다. 수능 변별력이 없으니 내신·논술·수능을 모두 잘해야 살아남는다며 학원들이 대성황을 이뤘다. 저소득층이 직격탄을 맞은 것은 당연했다.

교육에서 계층 격차는 커지는데도 평준화정책 유지를 위해 교육 격차 자료를 꼭꼭 숨겨온 것도 문제였다. 최근 공개된 수능 고교별 성적을 분석하면 같은 평준화지역인 서울시에서도 저소득층이 많은 금천구·구로구의 학력 저하가 두드러졌다.

중앙대 이성호 교수(교육학)는 "당장의 실력차를 인정하고 '맞춤형 처방'을 해야 교육 격차가 줄어드는데, 모든 학교와 학생은 동일하다는 허망한 이상론(理想論)이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사다리가 사라진다] 악착같이 벌어 좀 살만해졌다 하면 다시 추락… 항상 그자리

[사다리가 사라진다] [1] '반복 빈곤'에 갇힌 사람들
떨어지긴 쉽고… 불황 때마다 허약한 중산층 우르르 외환위기 후 年6~10% 빈곤층으로
올라가긴 어렵다… 일해도 가난한 '워킹푸어' 300만명 빈곤층 벗어나는 비율은 年6%대

골목길 철 대문이 왈칵 열렸다. 2일 오전 8시. 서울 영등포 주택가 2층 살림집(66㎡·20평)에서 여고생 3명과 초등학생 막내가 우르르 뛰어나왔다. 박공순(가명·71) 할머니가 혼이 쏙 빠진 얼굴로 집안을 치웠다.

"전쟁이여, 전쟁. 말(馬)만한 손녀딸들이 한꺼번에 머리 감겠다고 아우성쳐서 아침마다 수챗구멍이 꽉 막혀요."

박 할머니는 해물탕집 주방장을 해서 5남매를 고등학교까지 가르쳤다. 그만큼 배웠으면 무학(無學)인 자신보다 낫게 살 줄 알았다. 하지만 외환위기를 전후해 가족사가 꼬이기 시작했다. 조그만 가게를 하던 자식들이 차례차례 주저앉은 것이다.

큰딸(46)이 가출한 뒤 두 아이를 할머니가 떠맡았다. 이어 둘째딸(44·식당 종업원)이 식당 하다 망해 남매를 데리고 친정에 돌아왔다. 할머니가 노총각 장남(47·백화점 청소원)과 단둘이 살던 방 두 칸짜리 전셋집에 어른 셋, 아이 넷이 북적거리게 됐다. 장남은 집 대신 찜질방에서 잘 때가 많다.

다섯집 중 세 집이 추락 경험

박 할머니처럼 외환위기를 전후해 가난에 빠진 사람은 얼마나 될까. 본지가 사회통합위원회와 함께 '한국노동패널조사' 10년치(1998~2007년)를 정밀 분석한 결과 도시 가구 다섯 집 중 세 곳(57%)이 10년 사이 한 번 이상 빈곤층에 추락해본 것으로 나타났다. 다섯 집 중 한 곳(23.7%)은 5년 이상 빈곤에 허덕였다.〈그래픽〉 노동패널은 정부가 매년 전국 도시지역 5000가구의 살림살이를 추적한 자료다.



 
분석을 총괄한 노대명 사통위 전문위원은 "아직은 중산층이지만 빈곤선 언저리를 맴돌고 있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사람도 늘고 있다"고 했다. 이처럼 겨우 살 만해졌다 싶으면 도로 주저앉는 현상을 전문가들은 '반복 빈곤'이라고 부른다. 반복 빈곤은 말 그대로 파도처럼 반복해서 '워킹푸어'(working poor·근로 빈곤층)를 덮친다.

이번 분석에서 5년 이상 가난에 허덕인 사람 중 장애가 있거나 나이가 많아 사회에 기댈 수밖에 없는 사람은 소수(19%)에 불과했다. 나머지 대다수는 일할 능력이 있고 실제로 일하고 있는 워킹푸어들이었다. 전문가들은 워킹푸어 숫자가 300만명을 넘어섰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현숙(가명·61)씨도 그중 하나였다.

'또순이' 이씨의 좌절

이씨는 무역회사에 근무하다 중소기업 경리사원인 남편과 만났다. 결혼 6년 만에 서울 강북에 단독주택을 마련해 '또순이' 소리를 들었지만 외환위기는 이씨가 쌓아올린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남편이 다니던 회사가 망한 뒤 남편이 회사 빚을 보증선 것 때문에 살던 집도 경매로 넘어갔다.

남편은 신용불량자, 이씨는 기초생활 수급자가 됐다. 이씨는 전화 상담원으로 취직했다. 교육만이 살 길이라 생각해 임대아파트에서 월세방으로 옮기고 남는 보증금으로 남매 학원비를 댔다.

아등바등 애쓴 끝에 큰딸(28)이 공기업에 취직해 월 150만원씩 받아왔다. 아들(25)도 명문대에 진학해 각종 아르바이트로 월 100만원씩 벌었다. 온 가족 수입을 모아 7000만원에 전셋집을 마련하고 기초수급에서도 벗어났다.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씨는 정년 규정에 걸려 지난달 상담원을 그만뒀다. 남편은 아파서 일을 못하고 아들은 군대에 있다. 다시 기초수급자가 되려고 주민센터에 찾아갔지만 '돈 버는 딸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딸은 시집가서 친정까지 부양할 능력이 없다"고 설명했지만 소용없었다. 이씨는 "당장 먹고 살 걱정에 미칠 것 같다"며 "악착같이 가난에서 벗어났는데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 느낌"이라고 했다.

 
 
오종인씨는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직원 8명을 데리고 공장을 운영했지만 외환위기 직후 망해 부인과도 헤어지고 지금은 빈곤층 바로 위인 차상위 계층 신세다. 등교 거부 아들(고1)을 돌보느라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한다는 오씨는“보육시스템만 제대로 갖춰져도 나같은 사람이 빈곤층으로 몰락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정체 상태의 빈곤 탈출률

1990년대 전반(1989~1995년)까지는 고속 성장이 모두를 끌어올렸다. '몇 칸 올라가느냐'가 차이 날 뿐 대다수의 경제적 지위가 상승했다. 박 할머니는 젊은 시절 전기 안 들어오는 초가집에 살다 중년 이후 온수가 나오는 주택에 살게 됐다. 자신은 무학이지만 자식들은 고등학교까지 가르쳤다. 이씨도 맨손으로 출발해 30대 중반에 자기 집을 마련했다.

그러나 2010년 대한민국은 '하강이 많은 사회'다. 자문단 분석결과 도시 가구 중 중산층 이상으로 살다 빈곤층으로 떨어지는 가정(빈곤 진입률)은 외환위기 직후 정점(1999년 10.4%)을 찍은 뒤 2003년 8.1%, 2005년 6.1%로 점차 줄어들다가 2007년 다시 7.1%로 늘어났다.

반면 빈곤에서 벗어나는 가정(빈곤 탈출률)은 2001년 정점(7.8%)을 찍은 뒤 6%대 후반에 정체되어 있다(2003년6.6%→2005년 6.7%→2007년 6.8%). 그 결과 빈곤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계속 가난에 시달리는 가정(빈곤 잔존율)은 1999년 14.3%에서 2007년 20.3%로 급증했다.

요컨대 ①불황이 올 때마다 허약한 중산층이 우르르 사다리 맨 밑칸으로 떨어지고→②맨 밑칸에서 위로 올라가는 사람은 줄어들어→③사다리 맨 밑칸이 갈수록 붐비는 악순환 구조가 생긴 것이다. 2009년에는 아직 통계 뒷받침이 되지 못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로 이 같은 현상이 더 뚜렷해졌을 것으로 자문단들은 보았다. 4




"여유 생기면 바로 돈 쓸 일 터진다"

요양보호사 김덕자(가명·52)씨는 "올라가긴 어렵고 떨어지긴 쉽다"고 했다. 김씨의 남편(54)은 도시가스 설비업체를 차렸다가 외환위기 때 망했다. 부부가 악착같이 맞벌이해 빚 1억5000만원은 갚았지만 한푼 모으질 못했다.

김씨는 "젊었을 때는 이 나이쯤 되면 부자는 못돼도 허덕이진 않을 줄 알았다"고 했다. 남편의 일용직 벌이(월 150만~200만원)에 김씨 벌이(월 80만~90만원)를 합쳐도 다섯 식구 식비·공과금·교통비·병원비를 내고 나면 남는 게 없다. 김씨는 "마지막으로 저축한 게 언제인지 기억에 없다"고 했다. 대학생 아들(24)과 큰딸(23)은 휴학 중이다.

김씨는 "애써 여유를 만들면 바로 돈 쓸 일이 생긴다"며 "우리 같은 가정은 일이 줄거나 병이 들면 언제든 추락할 수 있다"고 했다.




[사다리가 사라진다] 북유럽은 개인별 맞춤 교육… 학교가 학생 책임져

유럽은 이렇게 푼다
영국·프랑스, 등록금·생활비 지원
핀란드, 학생별 학업성취도 파악


헝가리
농촌 무바이네(Murvaine)에 사는 헤르첵 에리카(Herczeg·50)씨. 공장 생산직으로 일하다 19살 때 농사짓는 남편과 결혼했다. 새벽에 일어나 밭일하는 틈틈이 소·돼지를 돌보며 평생 우직하게 일했다.

헤르첵씨가 결혼할 때만 해도 헝가리는 사회주의 체제라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전면 무상교육이었다. 사립학교도, 사교육도 없던 시절이다. 계획경제 특성상 임금이 낮고 삶의 질이 떨어져서 그렇지 학교를 졸업하면 취업은 100% 보장됐다.

1989년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세상이 달라졌다. 헤르첵씨는 "먹고 살기 바빠 자식들 공부를 찬찬히 봐주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세 딸을 모두 상업고교에 보냈다. 그 결정에 대해 헤르첵씨는 지금 후회와 걱정이 많다. 딸들이 안정된 직업을 구하지 못한 채 임시직과 일용직을 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은 우리보다 앞서 '교육 사다리' 붕괴를 경험했다. 유럽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가닥 잡은 해법은 세 가지다. ①장학제도를 발달시킨 서유럽 모델 ②공교육을 살려 사교육이 필요 없게 만든 북유럽 모델 ③전면 무상교육을 택한
독일·동유럽 모델이다.

서유럽의 장학제도 모델

영국은 전통적으로 사립학교가 많고 사립과 공립 사이에 학력 격차가 크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저소득층을 집중 지원하는 다양한 장학제도를 개발했다. '소득 연계형 등록금 후불제'는 대학 등록금을 부담하기 어려운 학생들이 일단 학업을 마친 뒤 졸업해서 취직하면 임금 수준에 따라 등록금을 나눠서 갚는 제도다. 중간에 실직하면 다시 취업할 때까지 상환 의무가 면제된다. 실질 가계소득이 연간 1만7500파운드(약 3400만원)에 못 미치는 가정도 무료로 자녀를 대학에 보낼 수 있다.

 
헝가리 마자르세트 인근 시골 마을. 공산주의 붕괴 이후 대다수 시골 마을은 실업과 교육 기회 차단, 교육격차에 따른 빈곤의 악순환을 겪기 시작했다. /인덱스폰트후(Index.hu) 제공


프랑스에서는 국립대학 등록금이 연간 300유로(40만원) 안팎이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대학에 다니는 저소득층 학생은 부모의 소득, 형제 숫자 등을 고려해 방학을 제외한 9개월 동안 매달 최대 1800유로(약 200만원)까지 생활비를 지원한다.

북유럽의 맞춤형 공교육 모델

이들과 달리
핀란드는 과외비 경쟁으로 학력격차가 벌어지지 않도록 탄탄한 공교육 시스템을 구축해 사교육이 발붙일 여지를 없애는 길을 택했다. 그 비결은 철저한 '수준별 학습'이었다.

핀란드의 초·중학교 과정인 9년제 종합학교(comprehensive school)는 기본적으로 평준화 모델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모든 학생에게 똑같은 교육을 제공하고 학교 선택권을 제한하는 '기계적 평등'이 아니다. 교사가 학생들의 학업 성취를 개인별로 세세하게 파악해 개별 학생 수준에 따라 맞춤식 교육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종합학교 7~9학년 교사는 반드시 석사 학위 소지자로 채용하고, 현직 교사는 매년 의무적으로 꾸준히 연수를 받도록 한다. 종합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학생 누구나 학년에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과목을 선택해서 들을 수 있다.

동유럽의 무상교육 모델

독일은 전체 16개 주(州) 가운데 14개 주에서 전면 무상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체코·헝가리처럼 과거 사회주의 체제 아래 있던 동유럽 국가도 마찬가지다.

동유럽은 1989년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주의가 들어서고 나서도 초등학교부터 대학교(사립대·특수학교·직업학교 등은 예외)까지 국·공립 학교는 학비 없이 다닐 수 있다. 취약계층 자녀도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지만, 계속 지탱하기엔 정부의 부담이 크다는 게 단점이다.

데브레첸(Debrecen) 대학 페네쉬 하이날카(Fenyes) 교수(사회학)는 "사회주의 시절에는 우리 학교 학생 절반 정도가 농민·근로자 자녀였지만, 지금은 재학생 대부분이 중산층 이상 출신이고 아버지가 농민·일용직인 학생은 거의 없다"고 했다.

쿤(Kunn) 야노쉬
부다페스트 공대 교수는 "사회주의 시절처럼 국가가 국민 전체를 똑같이 먹여 살릴 수 없어 갈림길에 서 있다"고 했다. 무리한 재정 부담을 지지 않으면서 교육 사다리를 살릴 해법을 찾는 것이 국가적 과제라는 얘기다.

<해외공동취재팀>


[사다리가 사라진다] 헝가리에선 저소득층 가르치면 성과급

헝가리의 경험과 해법

#1 아그네스(22). 런던 A호텔 객실 청소원.

헝가리 서부 외딴 도시 마자르세트(Magyarszet)에서 자랐다. 용달차 모는 아버지, 기계공인 어머니, 책가방 던져놓기 무섭게 아르바이트 가는 15살 남동생. 온 가족이 벌어도 한 달에 16만 포린트(90만원 안팎)다. 고교 졸업 후 3년을 허송세월했다. 학비가 공짜인 국립대학은 대도시에 있어 너무 멀고, 사립대학은 학비 부담에 언감생심. 변변한 공장도 없는 고향에서 일자리 구하기는 불가능했다. 작년에 고향을 떴다. 목표를 세웠다. 대학에 갈 것, 호텔 경영학을 전공해 호텔 정규직이 될 것. "그런데 현실이 예상보다 빡빡해요. 일주일 내내 쉬는 날 없이 일해도 생활비 제하면 남는 게 없어요. 과연 목표를 이룰 수 있을지…."

#2 발린트(26). 부다페스트 B컨설팅 회사 국제협력팀 직원.

런던으로 조기 유학 가 8살 때부터 1년간 영어 교육을 받았다. 병원 3개를 소유한 정형외과 의사 아버지 덕분에 대학 입시를 앞두고 2년간 월 9만 포린트(50만원 안팎)짜리 수학·경제학 과외를 받았다. 명문(名門) 코르비누스(Corvinus) 대학 경제학과에 합격한 뒤 2년 반 동안 캐나다에 유학, 귀국 후 유명 컨설팅회사에 취직했다. 최근 시내에 새 아파트를 샀다.

두 사람의 사례는 빈부격차에 따른 교육 불평등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헝가리의 한 단면이다. 공산정권 통치 시절엔 교육이 무상이었다. 하지만 1989년 공산주의 붕괴 이후 사립대학부터 무상교육이 무너지면서 교육격차가 나타나고 있다. 헝가리 교육문화부 조사에 따르면, 대졸 학력과 고졸 학력의 부모를 둔 자녀들의 대학 진학률은 1980년 60% 대(對) 7%에서, 2008년엔 80% 대 3%로 격차가 커졌다.

코르비누스 대학 가조 페렌츠(Gazso) 교수(사회학)는 "가난한 집 아이일수록 열악한 학교에 들어가 부실한 교육을 받고 그 결과 어른이 돼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헝가리 정부도 '교육 사다리' 복원에 본격 나서고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사회주의 관습이 남아 있는 헝가리가 '평등'을 넘어 '경쟁'과 '효율'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저소득 학생들을 돕기 위해 방과 후 수업을 하는 교사들에게는 '성과급'을 줌으로써 유인(誘引)하고 있다. 자녀를 학교에 안 보내고 집안에 방치하던 부모에게도 아이를 유치원이나 학교로 데려오면 2만 포린트(10만원 안팎)씩 지원금을 준다. 학자금 대출을 위한 재원 마련에도 '투자'의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중앙 정부는 물론 기업이나 일반인들이 자본을 투자해서 향후 이자를 받을 수 있도록 해 정부 부담을 줄였다.

해외 언론과 공동기획·취재… '우리집 사다리 지수' 서비스도

‘사다리가 사라진다’ 헝가리 르포는 헝가리 최대의 인터넷 뉴스 매체 ‘인덱스폰트후’(Index.hu)와 유력 일간지 ‘마자르넴젯’과 공동 르포로 작성됐습니다. 본지 특파원과 현지 유력 언론의 베테랑 기자가 공동으로 기획·취재하고 함께 기사를 작성하는 새로운 시도입니다.

현재 조선닷컴(chosun.com)에선 국민연금연구원 석상훈 박사의 도움을 받아 개발한 ‘우리집 사다리 지수’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습니다. 통계청 가계 동향 조사 자료를 토대로 빈곤층으로 떨어질 위험이 얼마나 있는지의 확률을 계산해 위험성에 대비토록 하자는 프로그램입니다.

<해외공동취재팀>


[사다리가 사라진다] 일본은 나랏돈 쏟아붓고도 가난 구제 못해… '복지의 역설'

경제 개혁 대신 재정지출 늘린 日의 경우
복지예산 20년새 배 늘었지만 빈곤층 확산 막기엔 역부족
재정적자 882조엔으로 증가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흔들리는 것은 세계적 현상이나, 아직 어느 나라도 완벽한 사다리 복원의 해법을 찾지 못했다. 일본에선 1990년대 들어 저성장·고령화·장기불황이 맞물리면서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중산층의 빈곤층 추락이 본격화됐다. 일본 정부는 저성장의 틀을 부수는 과감한 경제 개혁 대신 재정지출을 늘려 사회보장을 강화하는 길을 택했고, 일본의 나랏빚은 눈덩이처럼 부풀어 미래 세대에 부담을 떠넘기는 결과가 됐다. 그럼에도 빈곤 탈출의 사다리는 여전히 복원되지 않는 '복지의 역설'을 겪고 있다.

일본 지바(千葉)의 한 고교가 입학금을 못 냈다는 이유로 신입생 2명의 입학식장 진입을 막았다.
오사카(大阪)의 한 구청은 보험료 미납을 이유로 초등학생 1명의 건강보험증을 박탈했다. 이런 냉정한 사례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2008년. "아이들한테 그럴 수 있느냐"는 동정론이 일면서 사회 문제로 확대됐다.

직업을 잃은 부모가 자녀 입학금과 건강보험료를 안 낸 것이 직접적인 이유였다. 일본에선 직업을 잃으면 실업수당이 나오고, 그마저 끊기면 최저생계비가 나온다. 그렇게 받은 돈을 자녀에게 돌렸으면 됐을 텐데, 부모들은 먼저 학비와 보험료를 끊었다.

이 아이들의 불행은 누구 탓인가? 직업을 잃었다고 자녀를 방치한 부모 탓인가? 불황을 이유로 일자리를 뺏은 기업 탓인가? 대책 없이 20년 장기불황을 만든 정부 탓인가?

2010년 해법이 나왔다. 일본 정부는 부모 탓에 보험 혜택을 못 받는 전국 어린이 3만명을 찾아내 전원에게 건강보험증을 발급했다. 고교도 전면 무상화(無償化)했다. 예산은 재원이 없어 국가 빚으로 충당할 방침이다.

언뜻 정부가 책임진 듯 보이지만 실상은 정부·기업·부모 누구도 책임진 것이 아니다. 정부는 '성장' 책임, 기업은 '고용' 책임, 부모는 '양육' 책임을 각각 회피했다. 대신 미래에 갚아야 할 나랏빚에 책임을 돌렸다. 복지가 통 크고 후할수록 일본 정부·기업·부모의 책임과 부담은 줄었다. 하지만 빚을 갚아야 할 미래 세대의 책임과 부담은 천문학적으로 늘었다. 일본식 '복지의 역설(逆說)'이다.

 
갈 곳 잃은 日비정규직 근로자들… 글로벌 경제위기가 시작된 2008년 말, 대량 해고로 직장과 거처를 잃은 일본의 비정규직 해고자들이 일본 정부가 마련해준 강당에 모여 잠을 청하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의 고용 사정은 회복되지 않아 이들 상당수는 노숙자로 전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이니치신문 제공  


일본의 빈부격차는 저성장과 고령화가 맞물린 1990년대 중반 이후 급속도로 확대됐다. 일본 정부는 분배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했다. 1990년 11조엔에서 작년 24조엔으로 증가한 사회보장 예산이 일본 정부의 적극성을 증명한다. 양적(量的) 측면에선 그렇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 '희망 없는 분배'의 참모습이 드러난다. 24조엔의 사회보장 예산 중 19조엔이 고령자의 빈곤화를 막기 위한 제도인 연금·의료·개호(介護·간호)보험에 투입됐다. 생계 곤란 가정을 지원하는 생활보호비는 2조엔. 미래 세대를 위한 복지예산인 보육원·아동수당·아동부양 수당은 모두 합쳐 8000억엔에 불과했다. 빚을 내서 충당한 분배의 과실이 대부분 노인 복지에 집중됐다는 뜻이다. 이런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해 2000년대 중반 고이즈미 정부가 추진한 후기고령자 의료제도 등 복지 개혁은 사회적 반발로 백지화됐다.

물론 일본의 후한 복지 정책은 극단적 계층 분화를 완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재정 동원만으론 빈부격차가 확대되는 흐름을 돌리지 못했다.

빈곤층이 받는 생활보호(1946년 실시) 혜택을 4대째 대물림하는 세대도 다수 발생하고 있다. 한 번 가난이 증손자까지 대물림하는, 계층 고착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OECD는 일본의 빈곤율을 발표하면서 "비정규직이 급증한 것이 격차 확대의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기업이 종신고용을 통해 평생 소득을 보장함으로써 '1억 중류' 신화를 자랑하던 나라다. 그런 일본에서 비정규직은 이미 전체 근로자의 3분의 1을 넘어섰다.


제도적으론 고이즈미 정부가 노동법 개정을 통해 제조업 파견 근로(비정규직)를 사실상 전면 허용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하지만 경쟁력이 약화된 일본 제조업을 살리기 위한 고육책이었다는 측면이 있었다.

노무라증권 니시자와 다카시(西澤隆) 수석이코노미스트는 "당시 정부가 비정규직을 통해 제조업의 숨통을 터주지 않았다면 제조업 약화로 실업자가 늘어나 격차는 더 벌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정을 통한 일본식 가난 구제는 드디어 한계를 맞았다. 20년 만이다. 저성장으로 인해 정부 세금 수입은 1990년 60조엔에서 작년 46조엔으로 줄었다. 재원이 없으니 정부가 새로 발행하는 국채 신규발행액이 올해 세금 수입을 넘어설 전망이다. 들어오는 월급보다 새로 꾸는 빚이 더 많은 전대미문의 기형적 가계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중앙정부의 빚은 882조엔(2010년 3월 말)으로 늘었다. GDP(국내총생산) 대비 200%를 넘나든다. 세계 최악이다. 그럼에도
그리스처럼 파산 지경에 이르지 않는 것은 지금까지 1400조엔을 넘는 국민 저축이 국채를 흡수해 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축을 깨서 사는 고령 세대가 늘어나면서 국민 저축 역시 조만간 절대액이 줄어들 전망이다.

코너에 몰린 일본 정부는 급기야 세금 인상 카드를 들고 나왔다. 5%인 소비세를 국제 수준인 10% 정도로 인상해 매년 세금 2조5000억엔을 더 걷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증세가 실현된다고 해도 지금 일본 정부가 새로 추진하는 노인을 위한 복지정책(최저연금보장제)에 사용하면 바로 고갈된다. 그 이후의 시나리오는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지금 자라나는 미래 세대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다리가 사라진다’ 자문단

김경근 고려대 교수
김선빈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김세종 중소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김희삼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노대명 사회통합위원회 전문위원
박명수 고용정보원 연구개발본부장
박신영 토지주택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방하남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서병수 영등포노인종합복지관장
석상훈 국민연금연구원 부연구위원
이민규 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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