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이코노미스트

 

강북편(상)

기운 사그라져가던 강북은 청계천 복원으로 發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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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남쪽에 위치한 한화그룹 빌딩 옥상에서 내려다 본 전경. 조망으로 따져 이만한 자리를 시내에서 발견하기 어렵다. 남산이 뒤를 받쳐줘 손색이 없다. 전체적인 모양을 보면 마치 한 마리 새가 북쪽을 향해 목을 길게 빼고 날아가는 모습이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집에 살기를 원하고 좋은 건물에서 일하기를 바란다. 특히 한국처럼 부동산이 재산증식의 주요한 수단으로 작용하는 경우에는 더욱더 건물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그래서 경제적 여유만 있다면 개인이나 기업이나 좋은 땅에, 좋은 집을 짓기를 바란다.

여기서 ‘좋은 땅, 좋은 집’이란 어떤 기준을 두고 말하는가. 건물이 들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대지가 있어야 한다. 대지가 어디에 위치하는가는 중요하다. 대지의 위치에 따라 기를 받는 역량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음은 가상(家相)이다.

문자 그대로 가상은 사람의 관상을 보듯이 건물의 모양새를 살핀다. 외양에 특이한 점이 있는가, 또는 건물 전체가 균형을 취하고 있는가 등을 살핀다. 그 다음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면 건물의 출입문과 사무실의 방향 등을 따지는 이른바 팔택가상법(八宅家相法)을 적용해 길흉을 판단한다.

이 지면에서는 이런 기준을 내부 준거로 해 해당 건물의 종합적인 인상 비평을 가하고자 한다.

대지가 지닌 특성에 따라 서울의 건축물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강북과 강남, 그리고 여의도 일대가 그것이다. 강북은 다시 청계천과 남산을 축으로 북촌과 남촌, 용산 지구로 나눌 수 있다.

강남과 강북은 당연히 한강을 기준으로 구분된다. 강북과 강남을 비교하면 강북은 ‘서울을 옮겨야 한다’는 현정부의 정책이 일부 실현되고 있듯이 한 나라의 수도로서 지닌 기능이 쇠퇴기에 들어간 곳이다.

이에 비해 강남은 서울의 주변으로 과거에는 그 힘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한반도 전체의 강한 기운이 남으로 이동하면서 상업적 기능과 국제성이 강하게 발휘되는 곳이다. 그런 점에서 대부분 기업이 지기의 부름(?)을 받고 강남으로 기업의 본부 건물을 옮기고 있다.

여의도는 한강의 물이 빠져나가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한강을 통해 흐르는 서울(강남·강북)의 지기를 조절해 주는 역할을 맡은 곳이다. 섬이란 말은 풍수용어로 수중용(水中龍)이다. 물은 재물을 뜻한다. 재물 속에 노는 땅이 여의도다. 이런 사전 이해를 가지고 지역별 건물들을 살펴보자.

현대 계동 사옥 터는 인재 키우는 곳

청계천을 경계로 북쪽에 있는 마을이 북촌이다. 청와대를 비롯해 각종 정부기관과 역사가 오래된 기업들의 본사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북촌의 지리적 특성은 대지가 청계천과 남산을 향해 남쪽으로 열려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상업보다는 공공기관과 사대부, 곧 관료들의 집단거주지와 이들을 양성하던 학교 등이 어울리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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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2가 SK그룹 사옥. 그룹의 첫 글자를 상징하는 S형 건물을 지어 화제를 낳았다. 1급 명당이지만 건물 자체가 지기의 흐름과는 반대로 앉았고, 정면에서 보면 앞으로 고개를 숙여 길 건너편 건물을 품에 안는 듯한 모습이다. 우리나라는 물론 외국에서도 보기 드문 외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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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의 국제센터 빌딩. 미묘한 스카이라인으로 인해 그 모양이 마치 실타래처럼 보인다. 이 빌딩에서 남산을 보면 누에로 보인다. 그 결과 이 빌딩은 한 마리 누에가 실을 뽑기 위해 만들어 놓은 꼬치에 해당한다. 그런 점에서 한때 한일합섬과 인연을 맺은 것도 우연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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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남쪽에 위치한 예금보험공사 빌딩. 원래 동아그룹 소유 사옥이었다. 이 빌딩은 건축 당시 존재했던 복개된 청계천의 도로에 건물을 내붙임으로써 마당의 앞뒤가 바뀌었다. 뒷마당이 앞마당 구실을 맡게 됐다. 이런 경우는 거래의 투명성이 줄어들고 음성적인 담합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동아그룹에서 예금보험공사로 소유가 넘어간 것도 이런 연유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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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과 을지로 사이에 위치한 두산타워. 동대문 운동장이나 동대문인 흥인지문의 옹성은 서울 사대문 안의 지기를 지키기 위해 마련한 비보책의 일환이다. 그런 자리에 유통업의 대가가 둥지를 튼 것은 서울의 지기를 위해 매우 다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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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문 밖 남산 아래 위치한 대우빌딩. 이 빌딩의 터는 물의 흐름이나 주위를 감싸고 있는 산들로 인해 초기에는 좋은 결과를 얻지만, 세월이 지나면 터로 내려오는 지맥의 살성(殺性)과 백호 쪽 서울역 고가도로 등이 관재·구설·불화 등 험한 일을 불러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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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청에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태평로 2가에 자리하고 있는 삼성그룹 본관. 대지는 기업체나 상가의 위치로는 합법한 곳이고, 모양은 전체적으로 사각형을 유지하고 있어 보기 좋다. 그런데 삼성은 자동차사업에 진출할 즈음 본관 건물 기단 정면(태평로 쪽 앞면)을 현재의 모습으로 개조했다. 기존 건물의 기단에 변화를 주었다는 점은 두고두고 생각할 숙제를 안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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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풍빌딩. 청계천 부활과 함께 그 가치가 더 올라갔다.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건물 앞에 모여들고 있어 맞은편 구 조흥은행 본점 건물보다는 터가 뛰어난 곳이다. 여기에다 물가에 위치해 혹 있을지 모르는 지기의 누설을 막기 위해 지하에 서점을 두어 많은 사람을 불러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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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 계동 사옥. 고 정주영 회장이 욱일승천하던 현대그룹 시절에 백년대계를 가지고 건설한 건물이다. 그러나 그룹본부가 광화문에서 이곳으로 온 후 현대는 적지 않은 시련을 겪었고 인패까지 당했다. 현재 현대그룹 본부는 종로구 적선동 현대상선 사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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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에서 주목을 끄는 종로구 연지동에 위치한 삼양사 건물. 서울 사대문 안에서 가장 완벽한 건축물이다. 3층에서 달아낸 앞 부분은 삼재구족(三才具足, 천·지·인 삼재를 갖춤), 발전의 의미를 담고 있다.

현재 북촌에서 가장 관심을 모은 건물이 현대그룹의 계동 사옥이다. ‘불세출’의 기업인인 고 정주영 회장이 욱일승천하던 현대그룹 시절에 백년대계를 가지고 건설한 건물이다. 그러나 그룹본부가 광화문에서 이곳으로 온 후 현대는 적지 않은 시련을 겪었고 인패까지 당했다.

한마디로 계동은 사업보다는 휘문학교 터가 말해 주듯이 인재를 키우는 곳이다. 정주영 회장이 대통령 후보까지 출마한 것은 계동과 인접한 창덕궁의 지기를 혼동한 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창덕궁이 지닌 조선왕조 건국의 지기와는 시냇물 하나 건너에 있는 곳이 바로 계동이다. 계동 사옥은 전체 대지가 남향을 취하고 있는 데 반해 기가 들고 나는 출입구의 방향이 대지의 기와 달라 문제가 되고 있다.

본관과 별관을 각각 별개의 건물로 보면, 대지의 남쪽에 위치한 본관의 주 출입문은 남쪽으로 나야 하고 별관은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주 출입문 역시 동쪽으로 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현재 전체 대지에서 볼 때 주 출입문은 남서쪽에 있다. 이는 음양의 조화 면에서나 기의 출입 면에서 상당한 어려움이 있어 혼란을 가져다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현대 빌딩에서 또 하나 문제는 본관이나 별관 모두, 쉽게 말해 나침반의 남북과 동서를 가리키는 선상에 건물의 중심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고대 왕궁 건물(경복궁 등)의 경우 남향을 취하면서도 그 방위가 정남에서 15도 정도 좌우로 피하고 있는 점은 이 경우에 좋은 교훈이 된다.

정남·북과 정동·서의 방위선은 기의 유동이 가장 심한 곳이다. 기의 요동을 정주영 회장의 생전에는 누를 수 있었지만 2세에 오면서 그만한 힘을 지닌 인물이 있는가는 매우 회의적이다.

북촌에서 역시 주목을 끄는 건물이 삼양사 본사 건물이다. 종로구 연지동 삼양사 건물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서울 사대문 안에서 가장 완벽한 건축물이다. 빌딩을 갖고 싶은 사업가는 꼭 한번 이 건물을 구경하고 자신의 건물을 지으라고 권하고 싶다.

대지는 서울의 중심 기가 흐르는 사대문 안에 있다. 가상은 매우 재미있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본채에서 남쪽으로 3층의 건물을 달아내 건물 전체 모습이 한자 정자(丁字)를 구현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흥미롭다는 것이다. 천간(天干) 정(丁)은 풍수에서 자손의 창성을 상징한다. 기업의 측면에서 보면 이는 사원들의 안녕과 발전을 뜻한다. 이런 점을 고려한 설계라고 해석된다.

건물의 높이에서 이 사옥은 교과서의 전형이다. 11층은 사대문 안에서 올라갈 수 있는 최적의 높이다. 광화문에 있는 문화관광부 건물과 미 대사관 건물이 8층임을 고려하면 이보다 동쪽에 있는 연지동은 11층까지 올릴 수 있다.

층수에서 11은 그 자체로 음양(陰陽)의 배합(配合)이 이뤄지고 있다. 11(10+1)에서 10은 완성을 의미하고 1은 출발을 상징한다. 여기에다 3층에서 달아낸 앞부분은 삼재구족(三才具足: 천·지·인 삼재를 갖춤), 발전의 의미를 역시 담고 있다.

본관과 대문의 방위를 살펴 보면, 본관이 남향이므로 본채는 북쪽에 둥지를 튼 것이고 문은 동쪽으로 나 있다. 이런 구조를 두고 천을택(天乙宅)이라고 부른다. 사람과 재물을 우선하는 구조다.

SK·영풍빌딩 등 청계천복원 수혜주

강북을 남촌과 북촌으로 나누는 청계천은 이제 과거의 틀을 벗고 우리 앞에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다. 사그라지던 강북의 상권을 부활시킨 것은 순전히 청계천의 공로라고 보아야 한다. 풍수에서도 좋은 기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물의 청탁을 분별한다. 썩은 물보다 맑은 물이 뛰어나게 좋다. 조선왕조가 그토록 청계천을 맑게 하기 위해 준설에 정성을 들인 것도 환경 차원보다는 풍수적 기를 북돋우기 위한 것이었다.

청계천 양쪽에 자리한 건물로 SK빌딩과 예금보험공사, 한화빌딩, 두산타워, 영풍빌딩 등을 들 수 있다.

SK빌딩은 종로구 서린동에 위치해 엄밀하게 보면 북촌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종로 쪽 대로와 마주하고 있어 마치 북향 건물처럼 보이지만 청계천 쪽에 주 출입문이 있어 남향 건물이다.

터는 북악산의 기운이 청계천과 만나고 있어 혹자는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물을 먹는 명당’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를 반영하듯 건물의 네 귀퉁이에 거북이 발과 건물 중심에 머리, 뒤쪽에 꼬리 형상의 석물을 각각 배치해 마치 건물 전체를 거북이가 받치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SK빌딩과 함께 비슷한 위치에서 주목받는 것이 영풍빌딩이다. 영풍문고로 더 잘 알려진 이 빌딩 역시 청계천의 부활과 함께 그 가치가 더욱 올라갔다. 서울의 종로 중심 상가에 자리한 것을 알리듯이 건물의 외벽은 화려한 자주색을 취하고 있어 영풍그룹의 모기업 업종과도 인연을 맺고 있다.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건물 앞에 모여들고 있어 맞은편 구 조흥은행 본점 건물보다는 터가 뛰어난 곳이다. 여기에다 물가에 위치해 혹 있을지 모르는 지기의 누설을 막기 위해 지하에 서점을 두어 많은 사람을 불러들이고 있다.

청계천 남쪽 중구 다동에 위치한 예금보험공사 빌딩은 동아그룹의 사옥이었다. 나는 지금도 서울 강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빌딩을 꼽으라면 서슴없이 이 빌딩을 추천한다. 동양과 서양의 건축미를 한 몸에 지닌 이 빌딩은 외관상 흠잡을 곳 하나 없는 서울의 명물이다.

1993년 4월 준공된 이 건물은 마치 빌딩 경연대회에 나가기 위해 이제 막 단장을 한 깨끗하고 날렵한 맵시를 항상 뽐내고 있다.

다동 일대의 물의 흐름과 지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북의 모양을 이룬다. 그래서 예부터 전쟁 중에도 재해를 입거나 파괴, 화재 등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해 온다.

예금보험공사 빌딩은 바로 이런 터에 북향으로 앉아 있다. 건물의 향이 북향이니 북악산 줄기에서 나오는 크고 작은 물들이 모두 조래수(朝來水: 앞에서 흘러 들어오는 물)가 되어 재물과의 인연을 더욱 깊게 해 준다.

이 빌딩은 건축 당시 존재했던 복개된 청계천의 도로에 건물을 내붙임으로써 마당의 앞뒤가 바뀌었다. 뒷마당이 앞마당 구실을 맡게 됐다. 이런 경우는 거래의 투명성이 줄어들고 음성적인 담합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동아그룹에서 예금보험공사로 소유가 넘어간 것도 이런 지기와 인연이 깊다.

가상(家相)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매우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이 건물이 위로 올라갈수록 첨탑의 모양을 하고 있는 점에서도 두드러진다. 이런 모양을 팔괘의 태괘(兌卦)라 한다. 태(兌)는 여성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이 건물은 ‘물가(청계천)에 앉아 있는 미인’에 비유된다.

한화그룹의 본부 건물이 청계천 남쪽 장교동 1번지에 있다. 지하 4층, 지상 28층의 한화빌딩은 이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장교(長橋)빌딩(쁘렝땅백화점), 중소기업은행 본점과 어울려 하나의 벨트를 형성한다. 이 빌딩 28층에 올라가면 서울 사대문 안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망으로 따져 이만한 자리를 시내에서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을 첫눈에 느낄 수 있다.

이 터에서 보면 주산인 남산은 뒤를 받쳐 주는 산으로서 손색이 없다. 또 전체적인 모양을 보면 마치 한 마리 새가 북쪽을 향해 목을 길게 빼고 날아가는 모습이다. 터는 이 새의 목 부분에 해당한다. 안산(案山)은 북악산과 매봉(성균관대 뒷산) 사이의 능선이 맡고 있다. 안산이 이 터를 향해 정을 주고 있어 매우 좋다.

한화빌딩은 북향 건물이다. 이는 북향한 대지의 성격과 같다. 건물의 전면과 폭의 비율은 3대2로 가장 이상적인 비율이다. 그러나 서북쪽과 동남쪽에 모서리 5개씩을 접어 넣은 것은 오행의 기가 서로 충돌함을 보여 주는 것이어서 문제가 있다. 이는 회사 임원 간에 분란이 있을 수 있음을 뜻한다.

아무튼 외형으로 나타난 한화빌딩은 정문 왼편에 서 있는 ‘약용비붕(躍龍飛鵬)’이란 전각 비문의 의지를 상당 부분 수용한 셈이라 하겠다.

동대문 운동장 앞에 있는 두산그룹의 본부 두산타워는 청계천과 을지로 사이에 위치해 남촌에 가깝지만 편의상 청계천으로 분류했다. 알려진 대로 동대문 운동장이나 동대문인 흥인지문의 옹성은 서울 사대문 안의 지기를 지키기 위해 마련한 비보책의 일환이다.

그런 자리에 유통업의 대가가 둥지를 튼 것은 서울의 지기를 위해 매우 다행한 일이다. 역동적인 건물의 모습과 자연친화적인 내부 공간 구성은 두산그룹의 미래를 보장하고 있다. 동대문의 ‘랜드마크’로서의 기능은 물론 동대문 상가를 리드하는 파일럿 역할도 건물의 외형에서 강하게 읽을 수 있다.

‘이상하다’ 느낌들면 실패한 건물

‘남산골 샌님’이란 말이 있다. 이들은 곧 죽어도 큰소리치고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비굴한 삶은 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남산 밑에 사는 선비들을 두고 이런 말이 생긴 까닭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이를 풍수적으로 풀면 이렇다. 남산은 경복궁 터나 북촌마을에서 보면 안산이다. 북촌이 주인이라면 남산은 손님이다. 같은 논리로 남산 쪽에서 보면 북쪽 마을이 안산이 되어 주객이 바뀐다. 비록 임금이 살고 높은 벼슬아치들이 북촌에 있을망정 땅으로 보면 ‘나의 손님’에 해당하는 셈이다. 바로 여기서 올곧은 기개가 나온다. 그런 연유로 예부터 남산 밑에서는 유능한 인재와 성깔 있는 상인이 많이 나왔다.

SK그룹은 최근 을지로 2가 남촌마을에 그룹의 첫 글자를 상징하는 S형 건물을 지어 화제를 낳았다. 먼저 이 건물의 대지는 남촌 일대가 그러하듯 1급 명당에 속한다. 이런 터와는 달리 건물은 결론적으로 말해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건물 자체가 지기의 흐름과는 반대로 앉았고 정면에서 보면 앞으로 고개를 숙여 길 건너편 건물을 품에 안는 듯한 모습이다. 우리나라는 물론 외국에서도 보기 드문 외형이다. 지나는 사람들에게 “저 건물에 대한 인상이 어떠냐?”고 물으면 십중팔구는 “이상하다”고 답한다. 아무리 개성시대라고 하지만 사람들에게 ‘이상하다’는 인상을 주면 그 건물은 성공한 작품이라고 보기 어렵다.

건물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주변의 건물과 하나의 숲, 하나의 스카이라인을 형성한다. 허리를 굽히고 있는 이 건물은 자신보다는 앞에 있는 건물에 도움을 준다. 그런가 하면 뒤에서 이 건물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남의 등을 보고 있어 경계심을 갖게 한다.

다른 한편 이 빌딩은 왼쪽에 자신을 향해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대는 건물(중소기업은행 본점)을 두고 있다. 옆 건물의 칼날처럼 생긴 예각이 살풍을 일으켜 이 빌딩의 중심에 닿게 된다. 이를 어찌 막을 것인가.
삼성그룹 본관 건물은 서울시청에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태평로 2가에 자리하고 있다. 지하 4층, 지상 26층인 삼성본관 건물은 74년 8월 착공, 76년 4월 준공됐다. 대지는 기업체나 상가의 위치로는 합법한 곳이고 모양은 전체적으로 사각형을 유지하고 있어 매우 좋다.

건물은 원래 지상 1, 2층이 석탑의 기단처럼 되어 있었고 그 위에 24층이 올라가 있었다. 기단 부분이 오행의 토(土)라면 윗부분은 목(木)에 해당한다. 흙에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 거목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삼성그룹이 자동차사업에 진출할 즈음 본관 건물 기단 정면(태평로 쪽 앞면)을 현재의 모습으로 개조했다. 새로 만들어진 정면 유리커튼은 첨단 디지털시대의 정신을 구현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기존 건물의 기단에 변화를 주었다는 점은 두고두고 생각할 숙제를 안겨 주고 있다.

한진그룹 건물은 한진빌딩 본관(명동 쪽 대로변)과 신관(소공동 쪽)으로 구성돼 있다. 두 건물이 각각 별개의 위치에 앉아 있지만 기능적으로 연결돼 있어 안에 들어가면 하나의 건물로 느끼게 된다. 이는 현대그룹의 계동 사옥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터를 살펴보면 남쪽의 남산이 높은 데 반해 북쪽 을지로 쪽이 낮아 흠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본관 건물이 위치한 대지의 뒤 북쪽, 조선호텔 쪽이 높고 또 그 능선이 동쪽으로 안고 돌아가고 있어 흠을 반감시키고 있다. 기업의 오피스 터로는 1급지다. 대지의 모양도 요철이 없고 기울어진 곳이 없어 합법하다.

건물에 대한 평가도 좋은 대지에 좋은 건물이라고 미리 말할 수 있다. 우선 외양 부분을 보아도 전체적으로 2대 1의 비율을 보여 준다. 다소 약한 듯한 인상을 지니고 있지만 건물의 방정함이 이를 커버하고 있다. 도로와의 관계도 남대문로와 소공로가 주위를 감싸 전체적으로 별문제가 없지만 구 상업은행 본점 사이의 작은 길이 균형을 깨고 있다. 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다소 떨어진다.

건물 앞뒤 혼동되면 애사심 흐릿

용산 일대의 미군기지 반환을 앞두고 용산의 풍수적(?) 성격이 최근 들어 재조명받았다. 왜 서울의 다른 지역이 아닌 용산 일대에 외국군이 주둔하게 되었을까. 이는 용산이 서울의 안산인 남산 밖에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안산인 남산은 서울의 사대문 안에서 보면 손님에 해당한다. 당연히 손님은 문 밖에 모시는(?) 것이 예의다. 더구나 외국 군대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런 점에서 용산 일대 땅의 성격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러나 서울의 외연이 넓어지고 기의 중심이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사대문 안 중심론은 이제 한물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사대문 밖, 남산 아래 첫째 꼽히는 빌딩이 대우센터다. 76년 건립된 이 건물은 지하 2층, 지상 23층, 총건평 4만여 평으로 서울 시내에서는 거대 건물에 속한다.

이 빌딩의 터는 물의 흐름이나 주위를 감싸고 있는 산들로 인해 초기에는 좋은 결과를 얻지만, 세월이 지나면 터로 내려오는 지맥의 살성(殺性)과 백호 쪽 서울역 고가도로 등이 관재·구설· 불화 등 험한 일을 불러오게 된다.

가상(家相)은 전면과 폭의 비율이 3대1로 약간 빈상(貧相)에 가깝지만 3층까지 본체를 받쳐 주는 기단을 두고 있어 이를 충분히 커버하는 셈이다.

또 하나 이 빌딩에서 재미있는(?) 모습은 뒷산과 연결한 6층까지의 보조대다. 이는 뒷산 바위 절벽이 지닌 험한 기를 감소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용의 기운이 들어오는 남산 쪽으로 주차장과 자동차용 회랑을 만든 것 역시 살기를 제압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보다 자세히 보면 이 회랑이 자칫 건물의 목을 조르는 역할을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건물 외양에서 또 하나 지적할 것은 앞면의 유리창이 50개의 공간으로 분할돼 있는 점이다. 특별한 의미를 처음부터 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수는 주역에서 태연수(太衍數)라고 하는 ‘완성, 완료’의 의미를 띤 숫자다. 따라서 모험과 새로운 사업을 항상 창출해야 하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이미 ‘일이 끝났다’는 의미의 이 숫자보다는 한 칸 적은 49를 택하는 것이 좋았다.

결론적으로 대우센터 빌딩은 ‘고객 또는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으로 현상유지가 가능한 건물이다.

대우센터빌딩에서 국제센터 빌딩으로 가다 보면 전쟁박물관 못 미쳐 발사를 기다리는 우주선처럼 생긴 빌딩이 있다. 해태그룹이 짓고 그룹본부 빌딩으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대지는 사대문 밖에서는 보기 드문 1급지다. 이곳에서 남산을 보면 그 모양이 누에 머리인 잠두가 아니라 궁궐의 용마루처럼 보인다. 재물과 인연이 있음을 보여 준다. 터 안에 흐르는 물을 보면 오른쪽 물들은 남영동 우체국 앞을 지나 서대문에서 내려오는 만초천과 만나고 이 물은 다시 왼쪽 전쟁기념관에서 나오는 물과 삼각지 근처에서 만나 한강으로 들어간다. 기의 누설이 거의 없다.

건물의 외양은 앞서 말한 것처럼 동쪽과 서쪽 2개의 발사대에서 우주로 날아가는 우주선의 모습이다. 우주선의 중심축은 원형이고 그 양쪽으로 삼각형의 날개를 달고 있다. 주 출입문이 있는 남쪽에서 보면 건물은 크고 작은 3개의 상자를 차례로 쌓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동양철학에서 직육면체는 방(方)으로 대지를 상징하고 원은 하늘, 삼각형은 사람이다. 외형의 원·방·각은 곧 천·지·인 삼재를 구현한 것이다. 창조성이 뛰어난 건물이다. 이처럼 좋은 건물과 터를 너무 늦게 마련한 것이 해태그룹으로서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용산 일대에서 눈에 가장 잘 띄는 건물이 국제빌딩이다. 이 일대에서 ‘랜드마크’ 역할을 맡고 있다. 남산에서 한강에 이르는 용산 일대가 낮은 구릉으로 평야를 이루고 있는 점도 이 빌딩의 존재를 부각시키지만, 다른 한편 그 독특한 모양새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 빌딩은 5공 초기 권력에 의해 국제그룹이 해체되면서 주인을 바꿔 더욱 유명세를 얻기도 했었다.

이 빌딩은 국제그룹이 82년 1월 새 사옥으로 착공, 84년 10월 준공과 함께 그룹의 관계사들이 입주했다. 85년 3월 국제그룹이 해체되면서 종합무역상사인 국제상사와 함께 빌딩은 한일그룹으로 넘어갔다가 최근 다시 국제그룹이 운영권을 회복해 관리하고 있다.

국제센터는 건축공법상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에너지 절약을 위해 대형 건물임에도 태양열 집열판과 특수보온 유리를 사용했고 다른 하나는 외형을 흔한 박스형에서 탈피하기 위해 건물의 스카이라인을 각 면에 따라 달리한 것이다. 건물의 독특한 모양은 이 의도적인 스카이라인의 변화에서 온 것이다.

빌딩의 터는 물건을 모으는 집산지의 기능은 있지만 재물을 오래 모아두는 곳은 아니다.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국제센터 빌딩은 대지의 흐름과는 달리 건물의 정면을 바꿔놓았다. 대지의 모양은 삼각형을 낀 마름모형이다. 삼각형 부분에 반원형 부속건물을 지어 터가 지닌 살기를 제거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안정감이 부족하다.

가상(家相)은 다면형(多面形)이다. 건물의 정면에서 보면 하체가 넓고 위로 올라가면서 체감 비율이 면마다 각각 달라 매우 둔중하면서 뒤뚱거리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동쪽과 서쪽은 건물 중앙이 삼각형 내각을 이뤄 기하학적 안정감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곳으로 강한 바람을 맞이하게 된다. 인체에 비유하자면 늑골 부분을 압박하는 형세다.

또 정면의 동쪽 부분은 일자형을 이루지만 서쪽이 앞으로 튀어나와 전체적으로 한쪽이 짧은 V자를 이루고 있다. 그런가 하면 건물의 뒤쪽은 정면과는 달리 전체가 일자형을 이뤄 앞과는 다른 모습이다. 자칫 앞과 뒤를 혼동, 어느 쪽이 앞인가를 가늠하기 어렵다.

이런 건물에 상주하게 되면 애사심이 떨어진다. 또 누가 충복이고 누가 아첨자인가를 가리기도 어렵다. 내부 단속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위계질서도 당연히 문제가 된다. 나아가 보다 심하게 지적하자면 누가 건물의 주인인가도 가리기 어려워진다.

국제센터 빌딩은 미묘한 스카이라인으로 인해 그 모양이 마치 실타래처럼 보인다. 이 빌딩에서 남산을 보면 누에로 보인다. 그 결과 이 빌딩은 한 마리 누에가 실을 뽑기 위해 만들어 놓은 꼬치에 해당한다. 그런 점에서 한때 한일합섬과 인연을 맺은 것도 우연이 아니라고 하겠다. <다음 호에 여의도·강남편 계속>
 
강남·여의도편(하)
대치, 삼성동은 금가락지 지형
여의도는 돈, 정보 모이는 형상
 
▶물이 우측에서 좌측으로 나가면 재물 얻는 데 유리
▶건물의 예각은 ‘살기’ 상징해 피해야
▶사무실 북쪽, 대문 남쪽이면 부와 명예 얻어
▶지기와 역으로 앉은 건물은 하극상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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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센터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 모양으로 대명당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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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력공사
네 모서리 각을 죽여 ‘살기’를 없앴다.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 모양으로 대명당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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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파크
기가 들고나는 주출입문을 발견하기 어렵다. 풍수적으로 과제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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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센터
빌딩 앞에 물이 모여 탄천으로 나가는 명당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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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타워
입주 기업들 홍역 치른 건 화기(火氣)가 강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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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금융센터
지기 흐름과 반대로 앉은 방향은 하극상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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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련
한강을 내려가는 황포돛대 형국으로 터 흐름과 반대로 향을 정해 재정적 어려움을 봉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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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신한증권
건물 외양이 천원지방(天圓地方)으로 우주적 질서에 합당하다는 평이다.

서울에서 ‘강남’이라고 부르는 곳은 197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개발된 한강 이남의 강남구와 서초구를 말한다. 한강을 기준으로 남쪽이라면 영등포나 목동 혹은 강동구와 송파구도 포함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강남 사람’은 물론 그 외 지역의 사람들도 강남구나 서초구를 제외한 한강 이남을 ‘강남’이라고 부르는 데 동의하지 않는 묘한 정서가 흐르고 있다. 이는 강남이 지닌 사회·문화적 특수성과 경제, 특히 부동산 가치가 타지역과는 다르다는 수월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들 두 지역은 지리적으로도 타지역과 구분된다. 관악산에서 동쪽으로 내려온 지맥이 남태령을 지나 우면산을 일으키고 이 산을 중심으로 서쪽에 이수, 남쪽에 양재천, 동쪽에 탄천, 그리고 북쪽에 한강이 둘러싸고 있다. 우면산을 중심으로 보면 서쪽 관악산과 맥이 이어지는 남태령을 제외하고는 전 지역이 물속에 들어가 있는 셈이다.

거듭 말하지만 풍수에서 물은 경제와 인물을 주관하는 기운을 지니고 있다. 강남이 새로 ‘한국 부’의 중심에 떠오른 것은 이런 지기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한강처럼 큰 강이 오른쪽에서 들어와 왼쪽으로 나가는 지역은 인물보다는 재물을 얻는 데 매우 유리하다. 여기서 한강이 강남에서 보아 오른쪽에서 들어온다는 것은 강남이 한강을 향해 북쪽으로 열린 대지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강북은 한강이 왼쪽에서 들어와 오른쪽으로 흘러간다. 조선조가 서울을 강북에 정한 것은 돈보다는 인물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이런 특성을 염두에 두고 강남의 주요 빌딩들을 살펴보자.

강남구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지역이 대치동과 삼성동 일대다. 대치동(大峙洞)은 우리말 ‘한티(큰 재) 밑에 있는 동네’를 한자로 표기한 이름이다. 한티는 삼성로의 쪽박산(신해청 아파트 단지 자리)을 두고 한 말로 해석된다. 지형이 변하고 주위의 사정이 바뀌어 옛 모습을 찾기 힘들지만 이곳은 지금도 큰 언덕이다.

이 언덕의 근원은 멀리 우면산에서 내려온 맥이 도곡동의 매봉산을 지나 이곳까지 연결됐음을 보여 준다. 다른 한편 이 고개에서 보면 서쪽으로 역시 높은 고개(테헤란로 중간)가 있고 그 고개의 한쪽 능선은 삼릉공원과 봉은사 뒤 수도산(修道山)으로 연결돼 있다.

택지로 개발되기 전, 이 일대는 쪽박산과 수도산, 삼릉공원으로 둘러싸인 분지였다. 홍수가 나면 탄천이 삼릉공원 앞까지 밀려와 선릉 옆의 정릉(靖陵) 상석까지 물에 차기도 했다. 그런 지역이 지금은 상전벽해란 말처럼 완전히 달라졌다. 이 일대 전체 지형은 마치 금가락지와 같다. 이를 두고 금환낙지(金環落地) 형국이라고 한다.

음택이나 양택의 경우 그 주변에 마치 하늘로 오르는 계단 모양의 산이 있으면 1급지, 대명당으로 본다. 이는 천제(天梯)라고 불리는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이기 때문이다. 천제는 황제만이 이용하는 것인데, 이런 산이 주변에서 보인다는 것은 바로 그런 지위의 기운이 명당에 강하게 작용함을 의미한다.

드물게도 국내 건축물 중에서 천제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 작품이 있다. 삼성동에 있는 무역센터 빌딩이다. 최근 들어 강남 일대에 초고층 주거공간들이 들어서면서 무역센터 빌딩이 다소 가려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강남의 랜드 마크’로서 지위를 잃지 않고 있다.

국내 경기가 바닥까지 내려가고 있다고 걱정들 하면서도 아직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은 무역 분야가 경제를 지탱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수출품의 내용이 무엇이든 혹은 어느 대기업이 이를 주도하든 한국 수출의 저력은 바로 무역센터가 지닌 외형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무역센터는 그 외모가 앞서 말한 천제(하늘로 오르는 사다리)의 모습 그대로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가는 진취적인 기상은 다른 건물의 추종을 불허한다. 외국인이 설계했지만 동양적 수리관념에도 정통한 것 같다. 상수역학에서 5는 완전수다. 센터가 5개 부분으로 나뉜 것은 바로 이런 완전성과 성취감을 뜻한다. 그런가 하면 5는 새로운 세계로의 출발을 기약한다. 이를 확인하듯 빌딩의 앞면도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동북방을 향하고 있다. 사업은 이런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기상을 지닌 건물에서 시작해야 한다.

무역센터 건너편에 한국전력공사 본사가 있다. 이 빌딩은 ‘에너지 한국’의 중추 기업답게 나무랄 데 없는 외형을 갖추고 있다. 전형적인 박스형 건물임에도 네 모서리의 각을 죽여 8면체,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주변 건물에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고 살기(殺氣) 또한 배제한 것으로 회사의 이미지를 잘 구현한 셈이다. 삼성동 일대의 비싼 대지에 비하면 건물 주위의 조경 공간이 매우 넓고 또 친환경적으로 조성됐다.

그런가 하면 이웃한 현대산업개발의 아이파크(I-PARK)타워 빌딩은 건축학적으로나 풍수적으로도 많은 과제를 던지고 있다. 삼성동 일대의 대지가 기업의 터로서는 상품에 속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특히 아이파크타워나 한국전력 본사의 터는 논현로 일대의 언덕에서 내려오는 물을 그대로 받고 있어 최상급에 속한다. 대지가 좋으면 그 위에 건립되는 건물 역시 우수한 작품(?)이 된다.

아이파크타워의 준공에 맞춰 현대산업개발은 이 빌딩이 ‘자연을 상징하는 원과 첨단기술을 상징하는 직선을 모티프로 해 친환경적, 인간 중심의 건축 문화를 추구한 작품’이라고 널리 홍보했다.

자연을 상징하는 원은 타워 정면에 그린 대형 원을 통해 금방 알 수 있다. 첨단기술을 상징하는 직선은 타워의 옥상 왼쪽에서부터 사선으로 건물 내부를 통과해 밖으로 나오게 했다. 문제는 이 직선 부분이다. 심하게 표현하면 칼을 건물의 한편에 꼽아 놓은 모습이다. 상상하기 힘든 광경이다.

건물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구현하다 보니 기가 들고나는 대문(주출입문)을 여간해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또 건물에서 맞은편 아셈타워를 바라보면 움푹 꺼진 지하아케이드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치 동굴이 건물 앞에 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이다.

이 건물을 설계한 세계적 건축가는 평소 그가 꿈꾸던 작품을 ‘한국에서의 실험’을 통해 성취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세계의 어떤 풍수사도 이런 건물을 ‘인간중심의 건물’로, ‘자연친화적 건물’로 추천하지는 않을 것이다.

방향을 돌려 테헤란로의 몇 빌딩을 살펴보자.

포항제철이 이곳 테헤란로와 삼성로가 만나는 로터리, 대치동 892번지에 지상 30층의 사옥을 건립했다. 1995년 8월 완공된 포스코센터는 포항제철이 직접 생산한 특수 강철을 골조로 사용한 인텔리전트 빌딩이다. 특히 설계에서부터 완공에 이르기까지 순수 국내 기술진에 의해 진행됐다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고 95년 한국건축문화대상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포스코센터에서 보면 테헤란로의 언덕에서 내려오는 물이 대지 앞을 감싸고 흘러가 탄천을 만나고 탄천은 북으로 나아가 한강과 만나 서쪽으로 흘러간다. 삼릉공원과 봉은사 쪽에서 흘러오는 조래수(朝來水·혈을 향해 쏟아져 들어오는 물)와 뒤쪽 쪽박산 물이 모두 대지 앞에서 만나 역시 탄천으로 들어간다. 기업의 대지로서는 상품(上品)에 속한다.

포스코센터의 경우 동관과 서관을 각각 별개의 건물로 볼 것인가가 문제다. 별개로 볼 경우 각각의 건물 비율은 다소 빈약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지상 2층에서 두 건물을 연결하고 있어 대지 내 하나의 건물로 판단하는 것이 옳다.

동관을 테헤란로 쪽으로 끌어내고 서관을 뒤로 물려 두 건물의 선후관계 혹은 주종관계(主從關係)를 분명히 한 점은 설계자의 의식 속에 ‘풍수’라는 문화 유전인자가 각인돼 있었다고 하겠다. 동관 30층 높이와 서관 20층 높이가 다소 균형을 깨는 것이 아닐까 싶지만, 이는 같은 대지 안에 여러 건물을 짓는 경우에는 매우 적절한 조치다.

포스코센터는 동·서 두 개의 빌딩을 내부에서 연결시켰을 뿐 아니라 외부로도 상호 연결, 하나의 빌딩으로 만들었다. 빌딩은 대지의 흐름대로 북향을 정면으로 취했다. 출입문은 동서남북에 각각 하나씩 있다. 북쪽 문과 동관의 동쪽에 있는 문은 주로 방문객이 이용한다. 주출입문은 서관의 남쪽에 있다. 종합해 보면 사무실은 북쪽, 대문은 남쪽이다. 이런 건물을 두고 부와 명예를 안겨 주는 연년택(延年宅)이라 부른다.

녹지와 조경은 상당한 정성을 기울였다. 다만 조형물(대개 조각 등 예술품을 말함)의 경우 건물의 형태나 규모에 비해 썩 잘 어울리는 편은 아니다. 조형물은 그 자체의 예술성보다는 건물의 기를 보호하거나 허한 곳을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포스코센터와 이웃한 동부금융센터는 근래에 준공한 빌딩이다. 지하 7층,지상 35층의 이 빌딩 역시 테헤란로의 빌딩 무리에서는 독보적 위치를 확보한 경우에 속한다. 고층 빌딩의 단조로운 ‘커튼 벽’의 형태를 벗어나기 위해 직선과 사선, 수평선 등을 빌딩의 내외에 구현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전위적이고 역동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외형에 몇 가지 문제가 없지 않다. 사선과 직선의 교차는 건물 외벽에 역삼각형을 만들어 놓았고 하체의 안정감을 취하기 위해 마련된 완만한 곡선은 자칫 ‘거만한 인상’을 풍기기 쉽다. 대인관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또 지기의 흐름과는 반대로 앉은 빌딩 방향(정면)은 금융업과는 조화를 이루지만 내부로부터의 하극상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건물 규모에 비해 대지가 협소한 것도 흠으로 꼽을 수 있다.

테헤란로 서쪽 역삼역에 이집트 피라미드 옆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처럼 생긴 오피스텔 빌딩이 스타타워다. 스타타워는 9월 1일자로 GFC(강남파이낸스센터)타워로 이름을 바꿨지만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 글에서는 스타타워로 부르고자 한다.

이 빌딩은 그 특이한 모습과 45층의 높이로 인해 강북의 웬만한 산에서는 한눈에 들어오는 ‘강남의 랜드마크’다. 테헤란로가 정보기술(IT) 산업으로 각광받을 때 이 빌딩에 입주하는 것만으로도 대박을 기약하는 징표로 인식됐다. 그러나 지금은 이른바 ‘스타타워 풍수 괴담’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초기의 인기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떠도는 풍수설에 따르면 이 빌딩의 터는 화기(火氣)가 강해 여간한 힘을 지닌 사람이 아니면 그 기운을 누르기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이 빌딩을 건설한 현대산업개발은 빌딩의 모양을 피라미드형으로 건설해 지기를 누르려고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 빌딩에 입주한 유명 벤처기업들이 홍역을 치르고 건물의 주인도 자주 바뀌고 있음은 역시 미스터리라고 하겠다.

건물 자체의 외형은 나무랄 데가 없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와는 달리 빌딩 하단 네 귀퉁이에 ‘물의 신’인 거북이의 발을 석조로 형상화해 건물 전체를 거북이가 받들고 있는 형상으로 만들어 화기를 철저하게 막고 있다. 높이 45층은 9(4+5)가 의미하는 최고 또는 성공을 담보하는 상징과 더불어 더 큰 성취를 향해 나아가는 변화의 수이기도 하다. 벤처기업들이 다투어 입주한 것도 이런 수의 의미와 관련 있다.

건물 외형과는 달리 이 빌딩의 문제는 터에 있다. 역삼역 주변은 테헤란로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해당한다. 이 언덕의 서편 기슭, 경사면 한 블록을 터로 잡고 있다. 당연히 동쪽은 높고 다른 삼면은 낮다. 이런 터의 경우에는 동쪽을 뒤로 두고 서쪽으로 향을 정하는 것이 터의 기질을 살리는 것이다. 이 터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건물의 외형에 신경을 썼지만 지기를 누르기에는 부족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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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연구동이 본관보다 큰 것은 동생이 형을 능멸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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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트윈타워
등 돌린 형상인 상층부를 연결 통로가 보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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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거래소
여의도라는 섬에 섬을 만들어 재물이 이중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현대자동차 빌딩이 자리한 서초구 양재동은 엄밀히 말해 강남과는 터의 성격이 다르다. 강남이 양재천 북쪽에 위치한 것과는 달리 이곳은 양재천 남쪽이다. 당연히 지맥도 우면산 줄기가 아니라 청계산 줄기다. 청계산은 수원 광교산에서 관악산으로 올라가는 지맥 중에 한 가지가 관악산을 보필하기 위해 만든 산이다. 청계산 줄기는 양재천으로 인해 서울을 눈앞에 두고 건너가지 못하는 곳이다.

강북 계동에서 이곳으로 본사를 옮긴 뒤 현대자동차는 세계화의 목표를 추진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일설에는 정몽구 회장이 양재동 사옥이 명당이어서 사업이 욱일승천한다며 본사 옆에 새로 연구센터 동을 건립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러나 묘하게도 연구동 건물을 세우면서 현대는 수난(?)을 겪었다.

양재동 터는 앞서 말한 것처럼 청계산 줄기가 동북쪽으로 내려와 양재천과 만나는 곳이다. 터는 동북쪽으로 열려 있다. 건물의 주출입구와 향을 정한다면 북쪽이나 동북방이 순리다. 양재천이 이 일대에서 활처럼 감고 돌아가 대지로서는 일품이다.

그런데 본관이나 연구동은 향을 지기가 내려오는 반대,곧 남향을 취하고 있다. 이 경우에도 청계산과 달래내 고개에서 내려오는 물을 그대로 받게 돼 부를 축적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다만 경계할 것은 지기와 역으로 앉은 건물은 하극상의 소지가 매우 높다. 안으로부터 회사를 배신하는 사건(?)들이 종종 발생하게 된다.

이와 아울러 새로 지은 연구동을 본관과 비슷한 쌍둥이 건물로 지었지만 본관보다는 규모가 훨씬 크다. 이는 동생이 형을 능멸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장차 이런 단점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지 현대자동차로서는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여의도의 지세는 크게 보아 서울의 수구처(水口處·물 빠져나가는 곳)에 위치, 강남·북의 기를 보호하는 위병의 역할을 맡고 있다. 그래서 예부터 사실은 별 쓸모없는 땅이라는 뜻에서 ‘너나 가져라’고 해 ‘여의(汝矣)’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세월의 변화와 더불어 땅은 각각 제 쓰임새를 만나게 마련이다. 여의도도 한국의 근대화와 더불어 경제성장의 한 상징으로 떠올랐다. 증권거래소를 비롯해 한국노총·전경련 등 경제 중추기관들이 이곳으로 옮겨왔는가 하면 뉴스의 첨병이라고 할 수 있는 방송국들이 모두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풍수에서 물은 돈이나 정보로 해석된다. 물 가운데 있는 여의도는 자연스럽게 경제활동의 중심이 되고 서울의 위병 초소이므로 뉴스센터들이 자리 잡는 것 또한 당연한 귀결이다. 다시 여의도 전체 지형을 한강이란 물과 연결해 보면 마치 동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배, 혹은 거북이와 같다. 63빌딩 쪽이 앞이고 국회의사당 쪽이 뒤다.

여의도에는 3개의 ‘랜드마크’가 있다. 63빌딩, 국회의사당, 그리고 LG그룹의 트윈타워가 그것이다. 이 중 가장 늦게 세워진 트윈타워는 여의도 동서를 관통하는 중심에 위치, 세인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특히 건물 윗부분이 삼각형으로 잘려나가 그 형상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비춰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한다. 어찌 보면 쌍둥이 형제가 서로 등을 돌리고 있어 건물이 주는 이미지의 통합성을 저해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과연 그런가?

먼저 대지 조건부터 검토해 보자. 이곳은 여의도의 주산인 국회 쪽에서 청룡 쪽으로 뻗어온 맥이 한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고개를 낮추면서 서향으로 판을 형성한 곳이다. 다소 한강 쪽으로 치우친 감이 있지만 대지 자체는 건물을 수용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했다. 동쪽이 높고 서쪽으로 서서히 낮아지고 있어 이곳에 지을 건물의 방향까지 설정해 주고 있다. 대지의 모양은 구획정리로 사각형을 이뤄 크게 흠잡을 곳이 없다. 약간 높은 언덕과 평지가 조화를 이뤄 음양의 교감(交感)에도 별문제가 없다. 주변을 살펴보면 동쪽인 뒤가 허한 듯한 인상을 주지만 산보다 힘이 세다는 한강이 막아주고 있어 괜찮은 편이다.

가상(家相)은 상당한 논란을 불러오고 있다. 우선 동관과 서관이 같은 33층이면서 상층부가 마치 등을 돌린 상배(相背)의 형상을 띠고 있다. 이는 자칫 서로 등을 돌리고 제 갈 길로 가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상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마치 이런 형상을 우려한 듯 기단 부분에 3층 높이의 회랑을 두어 두 건물을 연결해 놓고 있다.

동관과 서관의 연결 고리를 보면 상당히 역학적(易學的) 의미를 담고 있다. 동관의 북측에서 서관의 남측으로 연결된 통로로 인해 두 건물의 평면도는 마치 만자(卍字), 혹은 번개를 상징하는 Z형태를 이룬다. 이는 상부의 경사면이 가져오는 ‘등 돌림’의 인상을 완전히 바꿔놓고 있다. 만자는 우주생성의 원리인 태극 모양으로 진취성과 생산성을 상징한다. 번개 모습 또한 발전·변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에다 일반적으로 쌍둥이 건물이 지닐 수 있는 경쟁의식을 피하기 위해 형과 아우의 위계질서를 분명히 밝혀 놓고 있다. 이는 동관에서 서관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의해 증명된다.

두 건물의 외양이 지닌 가로 세로의 비율은 거의 1대 1에 가깝다. 약간 후덕한 맛은 없지만 그렇다고 빈상(貧相)은 아니다. 다만 경사면과 연결된 외부의 벽이 아코디언 형으로 주름이 잡힌 것은 부드러운 곡선에 비하면 훨씬 못하다. 예각은 살기를 지니고 있다. 당연히 건물 종사자들의 정신적 안정을 저해하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트윈타워는 동관과 서관을 연결해 하나의 건물 형태를 취했지만 대지 남쪽의 주차장에 동관을 중심으로 담을 쌓아 각각 별개의 건물로 만들어 놓았다. 한 울타리 안에 살림을 따로 차리고 있는 모습이다. 결국 LG그룹이 GS, LS, LG로 분할하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하나 더 언급한다면 주변 남쪽의 공작아파트와 서울아파트가 마치 전차 군단의 모습을 하고 트윈타워를 향해 공격해 오는 모습이다. 이를 참작해 항상 내부보다는 외부로부터 오는 공격에 대응할 태세를 갖춰야 한다.

KBS 건너편에 자리한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 건물은 외형이 여의도를 그대로 빼닮았다. 앞뒤로 3층의 현관을 달고 중앙에 19층의 본 건물을 세워 마치 한강을 내려가는 황포돛대와 같기 때문이다.

터는 LG트윈타워와 반대편에 자리해 샛강 쪽에 치우쳐 있지만 이는 일반적으로 협의체 건물이 지닌 성격을 그대로 구현한 셈이다. 터 자체로 보아 청룡 쪽의 한강에 비해 재물을 담당한 백호 쪽 샛강이 작다는 것은 재정상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샛강이 넘치는 때가 있듯이 대기업 총수들의 관심이 고조되면 이 또한 능히 해결하게 된다. 그럼에도 전경련 빌딩은 건물을 지으면서 터의 흐름과는 반대로 향을 정해 지기의 청룡 백호를 반대로 돌려놓아 재정적 어려움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처음 건립되었을 때와는 달리 근래에는 좌우에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 건물의 기를 보완해 주고 있다.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졌다는 생각을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해 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은 같았다.

여의도의 많은 빌딩 가운데 드물게도 천원지방의 사상을 의도적으로 도입한 건축물이 있어 시선을 끈다. 여의도공원 중앙에서 증권거래소 쪽을 보면 첫눈에 띄는 굿모닝신한증권빌딩이 그것이다.

이곳의 터는 여의도 중심에 자리해 흠잡을 곳이 없는 완벽함을 갖추고 있다. 주위를 감싸고 있는 다른 터와의 균형도 매우 좋다. 건물 외양은 위에서 지적한 천원지방의 원리를 보여주고 있다. 내부의 원을 중심으로 그 밖은 방형(方形: 사각형)이 감싼다. ‘7’이란 숫자를 기준으로 위로 점점 올라가는 원과 사각형의 모습에서 진취적인 기상을 읽을 수 있다. 건축주는 이를 촛불 형상으로 보았지만 오히려 등대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증권회사 건물로는 ‘시장의 등대’로 자임할 수 있다.

주변 도로와의 관계도 나무랄 데 없다. 뒤에는 능선 역할을 하는 대로가 동서로 시원하게 뻗어 있고 좌우로는 작은 도로들이 감싸고 있다. 이들 도로 자체가 보호막인 청룡·백호 역할을 한다.

건물의 외양과 더불어 내부도 음양 조화의 원리를 구현하고 있다. 밖을 감싸고 있는 사각형은 음이요, 그 안은 양을 상징하는 원이 중심을 이룬다. 이는 한마디로 세포 구성의 원리와 같다. 또 건물 밖 네 귀퉁이에 원통형을 세워 대지와 건물의 균형 감각을 보여주는 것도 탁월한 배치다.

그러나 이 건물은 한 가지 미완의 장을 남겨두고 있다. 이는 바로 동편에 남아 있는 옛 안보 전시장의 대지다. 여기에 어떤 건물이 들어서는가에 따라 향후 길흉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게 된다. 가능한 한 이 빌딩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건물이 들어서야 한다.

79년 명동에서 여의도로 증권거래소가 옮겨 왔을 때, 많은 투자자는 우려를 금치 못했다. 허허벌판에 외롭게 서 있는 거래소 건물은 당시 허약한 한국 증권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권거래소는 이제 증권선물거래소로서 아시아는 물론 세계의 주목을 받는 시장으로 성장했다. 명동에서 여의도로 시장을 옮긴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하겠다.

터는 여의도의 노른자위에 해당한다. 한 블록을 통째로 사용하므로 주변의 도로 사정 역시 매우 좋다. 사방의 도로는 이 터를 여의도라는 섬 안에 섬으로 만들어 재물이 이중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장을 상징하는 4층의 부속 건물과 본관 21층이 터의 왼쪽 청룡에 자리해 오른쪽 백호가 빈약했다. 사람 위주의 건물 배치였다. 그런데 근래 백호 쪽에 14층 높이의 새 건물을 지었다. 동일한 대지 안에 나중에 지은 동생 건물이 형보다 작은 것은 풍수적 법도에 지극히 합당한 것이다. 이로 인해 좌우의 균형이 잡혔다.

독립된 3개의 건물을 회랑으로 연결해 하나의 건물로 만든 것도 비슷한 경우의 다른 건물에 비하면 모범 사례에 해당한다. 한국증권선물시장의 미래가 어둡지 않다는 것을 이 빌딩이 증언한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출처 - http://www.3b.co.kr












▲ 기본 상의 사이즈 조견표 ▲



 신장

 가슴둘레



86cm(82~90)

90cm(86~94)

94cm(90~98)

98cm(94~102)

102cm(98~106)

106cm(102~110)



160cm(155~165)

 S








165cm(160~170)


 M







170cm(165~175)



 L






175cm(170~180)




XL





180cm(175~185)





XXL




185cm(178~188)






 XXXL


















▲ 기본 바지 사이즈▲



호칭

허리둘레

제품지장



28"

71

99.5



30"

76

102.5



32"

81

105.5



34"

86

108.5



36"

91

111.5



38"

96

114.5



40"

101

117.5


















▲ 남성의류 ▲



미국

S(small)

 M(medium)

 L(large)

 XL(xlarge)

XXL



한국

 90~95

 95~100

 100~105

 105~110

110 이상



일본

 84~92 이하

 94~102

 108

 117~122

127 이상



가슴둘레

(cm)

 89~94

 97~102

 104~109

 112~120

120 이상



목둘레

(cm)

 35~37

 38~39

 40~42

 43~44

45~47



허리(바지)

(cm)

 71~76

 81~86

 91~96

 101~106

111 이상



팔길이

(cm)

 78~81

 81~84

 84~86

 86~89

89~91





















▲ 여성의류 ▲



미국 사이즈

XS

S(small)

 M(medium)

 L(large)



2~4

4~6

(6)8~10

(10)12~14



한국 사이즈

85~90 이하

90

95

 100



유럽사이즈

36

38

40~44

46~48



일본 사이즈

 -

7

9~13

15~19



가슴둘레
(브러,수용복,티)

(cm)
(inches)

81~84
32~33

 86~89
34~35

 91~97
36~37

 99~104
38~39



팔길이
(정장풍셔츠)

(cm)
(inches)

 75~76

 77~79

 80~81

83~84



허리
(스커트,바지)

(cm)
(inches)

 61~64
24~25

 66~69
26~27

 71~76
28~30

 79~84
31~33




(스커트,바지)

(cm)
(inches)

88~90
34~

 93~95
35~36

98~102
37~38

105~109
39~41























▲ 여성신발 ▲



한국(mm)

225

230

235

 240

245

250

255

260



미국

5.5

6

6.5

 7

7.5

8

8.5

9



유럽

36

36.5

 37

 37.5

38

38.5

39

39.5



일본

22.5

23

23.5

24

24.5

25

25.5

26


























▲ 남성신발 ▲



한국(mm)

250

255

260

 265

270

275

280

285



미국

7.5

 68

8.5

 9

9.5

10

10.5

11



유럽

38.5

39

 39.5

 40

40.5

41

41.5

41



일본

25

25.5

 26

26.5

27

27.5

28

28.5














위의 사이즈표는 개인의 체중/신장/가슴둘레에 따라 차이가 발생될 수 있습니다.

평소 입으시는 사이즈와 크게 다를때는 상담시 문의하기 바랍니다.

제품의 치수는 제조사별로 차이가 발생될 수 있습니다. 

출처 - 다음카페

                                                      한민족 10대위인 1 

                                연 개 소 문

644년 11월, 중국왕(당나라) 이세민은, 중국역대의 숙원사업이었던 고구려 정벌을 선언하고 직접 50만 대군을 이끌고 대대적으로 장안을 출발하였다.아들, 강하왕(도종)을 앞세워 탁군을 출발한 중국군50만은 물밀듯이 요택(요하일대의 늪지대로써 약80km에 달함)을 넘어 이듬해 4월까지 고구려의 서쪽 성들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진군해 나갔다.

 특히, 이전의 수나라 60만 대군의 공격을 묶어놓아 을지문덕 장군이 대승을 거둘 수 있도록 만들었던 난공불락의 요동성을 단 12일만에 함락하면서 이번에는 고구려를 반드시 점령할수 있을것으로 확신하였다.

 645년 6월,당군 50만은 안시성으로 밀려왔고 성안에는 2만5천의 병력과 5만의 주민이 있었다. 이 성의 왕은 연개소문의 측근으로써 새로 임명된 양만춘이었다. 당시를 잘 표현한 글이있는데 다음과 같다."당군이 구름처럼 밀려와 성을 포위했는데 성을 포위한 사람들의 끝이 보이질않았다." -청연사(안시)-

 

당군은 성을 포위한 뒤 염초탄(지금의 폭탄)운제(구름사다리, 수레위에망루를 세워 성벽높이에서 성을 공격하며 이동하여 성벽에 이르면 사다리를 놓아 군사를 침투시키는 무기),당차(아름드리 통나무를 수레에 장착하여 성문에 충돌 파괴하는 공성무기),충차(발석거라고도 함, 큰 돌을 쏘아대서 성벽을 무너뜨리거나 파괴하는 무기)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14일동안 밤낮없이 공격했지만 요동성과는 달리 왕과 성민들은 조금도 흔들림없이 완강하게 방어해냈다.

 

이에 지친 이세민은 부복애장군의 작전계획을 받아들여 아들 강하왕에게 안시성보다 높게 흙산을 쌓게 하여 고려군을 공격한 후,흙산의 왼쪽을 무너뜨려 안시성성벽을 파괴하고 성으로 진입,점령토록 하였다.

 

20만명에게 작은 포대 두개씩을 주어 흙을 담게한후 번갈아가면서 쌓도록 하였다.순식간에 안시성에 버금가는 높은 흙산이 완성되었고 당군이 흙산위에서 안시성을 향하여 돌과 화살등으로 공격하자 안시성으로부터 불화살,돌등이 소나기처럼 날아와 도리어 수많은 사상자만 발생하여 도저히 작전을 수행할수 없다고 판단한 부복애는 원래의 계획대로 흙산의 왼쪽을 무너뜨려 안시성벽을 덮쳐 무너트려 버렸다.

 

그러나 이를 미리 간파하고 있던 양만춘은 흙산에 의해 성벽이 무너지자 미리 대기중인 강력한 철기군을 선제투입하여 도리어 흙산을 점령하고 맹렬하게 공격하여 이로인해 죽은 당군의 수가 1만에 이르렀다. 결국, 양만춘에게 성하나를 더 지어준꼴이 되고만 흙산작전의 결과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이세민은 흙산전투작전을 제안한 부복애의 책임을 물어 직접 목을 베고, 다음날, 자신이 직접 지휘하여 6일동안 낮과 밤을 안시성과 흙산을 동시에 공격하였으나 변함없이 강력한 고려군의 방어력에 도리어 기진맥진한 상태로 7일째 아침을 맞게 되었는데, 이때 갑자기 성밖으로 돌격나온 양만춘의 전차대와 철기군의 공격을 정면에서 받게되었다.

 

(철기군이란 고구려의 최첨단 기병으로써 말과 사람을 뱀의 비늘과같이 쇠비늘로 둘러싸 적의 창이나 검, 화살이 튕겨져 나가도록함으로서 당시 무기체제로써는 제압할 수 없던 중무장 기병인데  5기를 1조로하여, 8조 40기가 1대로 편성되어 보통 8대씩 작전에 선제(선봉,돌격)투입되었는데 종횡무진이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전차대란 2~4마리의 말이 끄는 2~4인용 특수수레로써 역시 철기군제로 편성되어 작전을 수행한 지금의 탱크와같은 신병기였다- 이것이 후일 청나라의 8기군으로 재편됨)

 

마치, 악마의 군대와 같이 돌격해오는 양만춘군에게 놀란 당군은 혼란에 빠져 지리멸렬하여 도망가기 바쁜상황에서 양만춘의 표적이되어 도망치던 이세민은 양만춘의 부름에 뒤돌아 보다가 활이 명수인 양만춘으로부터 오른쪽 눈을 정통으로 맞아 말에서 굴러 떨어지면서 다리마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간신히 아들의 필사적인 도움을 받아 사지를 벗어날수 있었으나 당군은 뿔뿔히 흩어져 도망치기 바빴고 이세민은 중상을 입어 쉽게 움직이 못하게되자 강하왕 도종은 아버지(이세민)를 대신하여 전군에게 안시성20리 밖으로 멀찌감치 후퇴하도록 명령을 내리는 한편, 본국에 파발말을 띄워 급히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세민을 사로 잡아라 !"

 

 

안시성의 양만춘으로부터 이러한 전황을 즉시 보고받은 연개소문은 대기중인 고선나군(기병 2만:하북지역)에게 양만춘군과 함께 후퇴하는 당군을 섬멸토록 명함과 동시에 묘도(발해만 묘오타이 제도)에 대기시켜놓고 있던 거하산무 지휘하의 고려수군 3만에게 진황도의 당 수군을 격파한후 어양(지금의 북경지역)으로 상륙하여 이세민군의 퇴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신역시 본군 3만을 이끌고 후퇴하는 당군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을 가하였다. 후퇴하는 당의 군사력을 최대한  섬멸하여 주력군을 괴멸시킨후, 중국의 서울인 장안을 점령함으로써 당을 정복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개소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거하산무 지휘하의 3만수군은 약 200척의 화전선(폭1미터 길이3미터 정도의 카누크기에 세계최초의 반 잠수정형태로서 덮고 열수있는 지붕을 가진 돌격선으로써 배전체에 염초,화약등을 싣고 적선에 처박힌후 불타게 하거나 정예요원들을 침투시키는 특수한 배로써 거북선의 전신)을 이용,심야에 진황도의 중국수군 기지(10만 규모)를 전격적으로 급습하여 화공으로 완전히 궤멸시켰는데 이때 진황도에 중국군선 5500여척이 모두 불태워져 불길을 평양성에서도 볼수있었다.(연사)  

 

일단, 대세가 크게 기울어졌슴을 판단한 이세민의 아들 도종은 전의를 잃고 두려움에 허둥대는 패잔병들에게  "전군 요택으로 후퇴하라" 고 명령을 내렸다. 요택에서 본국의 구원군과 재결합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때는 어느덧 일년이 지나고 10월이 되어 요서의 날씨는 추웠다.

 

계속되는 당군의 후퇴속에서도 고려군의 무자비한 공격은 계속되어 엄청난 피해를 당하게 되었는데 이 와중에서도 이세민은 간신히 요택의 늪지대에 도착하였는바, 이곳에서 연개소문의 명령으로 진황도의 중국수군을 격파하고 미리 도착해있던 거하산무의 고구려수군 3만과 맞닥트렸다. 앞으로는 고구려 수군, 뒤로는 추격군의 양면 공격에 놓인 당의 주력군은 이곳에서 완전히 섬멸되었는데 이때 죽은 당군의 수가 5만을 넘었다.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전하는 기록이 몇가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요택으로 도망온 이세민이 "세상에 어찌 이런일이 있을수 있단 말이냐? 출발할때 50만 군대는 다 어디로 가버리고 지금 내눈앞에 군대가 하나도 보이지 않느냐" 고 통탄하였다. 이세민의 아들 도종은 중상을 입은 아버지 이세민과 10여명의 호종병만을 데리고 밤중을 기다려 밤이되면 쉴틈없이 계속 도망쳐가야만 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치료도 못받아 지칠대로 지친 이세민 일행은 어렵게 요택에 도착하였으나 이곳은 이미 고구려군 천지가 되어 온통 당 패잔군의 비명소리와 시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이 절망적인 비참한상황에서  요택의 늪지대 한쪽 갈대밭속에 숨어서  밤을기다리던 이세민일행, 한쪽 눈을 잃은 머리에 붕대를 감고, 부러진 다리에는 임시로 각목을대어 묶은  다리에 고름이 차올라도 변변히 치료할수 없었던 이세민을 위해 아들 도종은 입으로 고름을 빨아주고 있었는데, 마침내 이 부근을 수색하던 거하산무의 부장인 朴采壽의 부대에 발견되었는바,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도종은 "즉시,모두 무기를 늪에 버리고 엎드려서 살려달라고  빌라"고 명 하였다. 이들 10여명과 머리 한쪽눈에 핏물이 베인붕대를 감고 엎드려 빌고있는 노환자등의 모습을 본 박채수는 패잔병으로 오인하여 살려보내주었다" 이 부분은, 후일 이세민의 고백으로 알려져 연사(요택전투)에 기록된 내용인데 논란이 있는 부분이라 좀더 언급한다.

 

이세민은 후일 고백하기를 " 박채수가 당태종임을 알고서도 모른척하고 살려보내주었다" 며 " 박채수가 이세민일행이 눈에 보이지 않을때까지 그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 이에 아들 도종이 멀리서 손을 흔들어 고마움을 표했을때 박채수도 손을 흔든 후 어디론가 가벼렷다" , " 이세민이 이때의 은혜를 갚고저  이듬해에 비밀리에 박채수에게 사람을 보냈으나 그 3번중 한번도 만나지 못하였다" 연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에 대해, 구려의 장교로써 적장을 임의로 살려줄수있느냐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때로는 비상식적인 일들이 흔하게발생하는 전쟁터에서 알고서도 보냈다기보다는 몰라서 보냈다고 보는편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다.

 

여하튼, 이후 이세민을 사로잡으려는 고구려군의 횃불이 요택늪지대를  대낮처럼 밝히고 있어 다리를 쓰지 못하는 이세민은 아들과 함께 늪 가의 갈대를 양손으로 움켜지고 낮은자세로 살며시 살며시 헤치며  간신히 늪지대를  빠져나와 정말, 기적처럼 구사일생으로 포위망을 벗어났다" - 연사(요택전투) -

 

종은 이과정에서 변변한 치료를 받을수없었던 아버지 이세민을 살리기 위해 상처에 난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며 만리장성 입구인 우북평으로 멀리 달아나는데 성공했다."            - 당서(이세민)-

 

한편, 거하산무군(고려수군)에 막혀 요택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어양에 묶여있던 이정軍(구원군)과 패주하던 이세민의 보병부대(기병은 전멸)가 어양북동쪽에서 극적으로 합류하였다. 이 상황을 보고받은 양만춘, 고선나,거하산무의  전차대와 기병, 수군은  어양 일대를 온통 먼지로 뒤덮으며 북동지역으로 집결하기 시작했으나 이세민은 이미 합류한 당군의 호위를 받으면서 급히 장안쪽으로 후퇴하면서 고구려군과 맞서 싸우지 않고 (이세민 구원이 목적), 질서정연하게 고구려군을 향해 북과 함성만 요란하게 올리면서 이세민과 도종의 퇴로를 확보하는 작전에만 주력하였다. 이틈에 이세민이 장안으로 무사히 도착하였고, 이러한 연락을 받자 이정은 즉시 전군을 어양으로부터 완전 철수시켰다. 이후에 도착한 연개소문은 " 하늘이 당을 돕는구나.." 라고 말했다.

 

연개소문은 이때 접수한 북경과 어양 일대에 24개의 고려성과 진지를 쌓아 공격전선을 구축하는 한편,요동에서 어양까지 병참수송로를 닦아 군량미를 확충하는등 장안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연개소문 저격 당하다.

 

 

647년 겨울이오자, 연개소문은 장안성에 대하여 최후의 공격을 시작하였다.(고구려군은 전통적으로 전원이 기병으로써 기동성을 중시하여 보통 겨울에 공격함: 돌궐의 몽고군은 후일, 영하40도의 한겨울에 모스크바를 정복하여 500년동안 통치함:러시아도 고조선영역이었슴)

 

2일 밤낮을 가리지않고 맹렬하게 장안성을 공격하던 3일째의 밤, 진두지휘하던 연개소문이 근접한 저격병의 독화살에 피격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갑옷을 입었으나 근접사격한 때문에 맹독화살이 왼쪽 어깨를 관통하였다. 저격수는 현장에서 경호대에 의해  주살되었으나 연개소문은 곧 의식을 잃고 쓰러졌고,고구려군의 장안성 공격은 일시중지되었다.

 

이후에 연개소문의 병세는 더욱 위중해지자 칸은 연개소문을 평양성으로 후송하라고 명하였고 북경 어양에 주둔하고 있구려군 15만은 수비병력만 제외하고 6개월째 모두 철수하였다.

 

이때 철군하는 고구려군을 보며 세민은 "추격하지 마라! 이제, 두다리를 뻗고 한숨 푹 자도록 하자!"라고 하였다.-연사-

이세민은 안시성에서 다친 후유증으로 4년 뒤인 649년 52살에 숨을 거두었는데 이세민은 숨을 거두기전 넷째아들 治(당 고종)를 불러 다음과 같이 유언했다. "고구려와 절대로 싸우지 말아라! 네가 아비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우리 당나라는 멸망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세민은 644 맏아들 승건태자를 반란죄로 죽였다.)

 

 

               사수대첩 불멸  연개소문

                 (제2살수대첩:사수 死水 = 살수 殺水 :별명)

 

649년, 고구려 원정에서 대패한 당의 내정은 여러움이 많았다. 한편 고구려도 영류칸의 실정으로 국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비록 이기기는 하였으나 당을 정복하지 못했고 많은 재정을 소진했다. 게다가 장안의 공격과정에서 연개소문은 중병을 입어 철군함으로써 불안한 상태가 유지되었다.

 

그로부터 5년후인 654년,백제의 공격을 받던 신라는 김춘추와 아들 법민을 당에 파견하여 향후, 양국이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 정복을 하기로 합의하였고. 그로부터 1년후 655년 신라의 새로운 왕이 된 김춘추는 당의 새로운 권력자가 된 측천무후와 백제를 먼저 공격하기로 전술을 바꾸었다. 고구려를 직접 공격하는 방법보다는 많은 뇌물을 써 고구려 내분을 유도하고 주변국과 협공하여 고구려를 정복한다는 소위 '우회협공' 전략이었다.

 

6년 후인 660년 7월, 측천무후는 소정방, 유인궤, 설인귀 등에게 20만의 병력을 주어 신라군과 연합하여 기습적으로 백제를 공격토록 하였는바, 불시에 대군의 공격을 받은 백제의 의자왕은 사로잡힘으로써 멸망했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와 저번(왜=저팬)에게 구원군을 요청하였으나 고구려는 당시 연개소문이 병중에 있어 보고하지 않았는데, 이때 연개소문은 장안성 공격때 독화살에 저격된 원인으로 중병상태에 있었다. 오늘날 일본인 저번군은 백제성이 함락된 뒤에 도착하여 3일간 전투를 치르다가 돌아갔다고 일본서에 전해진다.

 

660년 10월, 당군 20만은 백제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패수를 거슬러 올라가 기습적으로 평양성을 포위하여 공격했다. 그러나 고구려군과 백제군은 달랐다. 일주일을 밤낮을가리지않고 공격했으나 성은 도저히 함락될것같지 않았고 660년 12월부터는 큰 눈이 내려 소정방군은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지게되었다, 기진맥진한 당군 소정방의20만군은 살수대첩때 전멸했던 악몽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다급해진 소정방은 이러한 처지를 본국과 동맹국인 신라에 파발말을 보내 급히 지원군을 보내줄것을 요청하였다.

661.2월2일, 당나라 왕 대신 실권을 잡고있던 측천무후는, "이번에야 말로 고구려를 반드시 잡고 말겠다"는 결심으로
별동대 20만을 새로 편성하여 자신의 오른팔인 좌효위대장군 방효태에게 주고 "반드시 고구려를 정복토록 하라"고 명 하였는바, 방효태는 "고구려를 정복하지 못한다면 모두 자결하겠다"고 선언하고, 자신의 아들 13명 모두를 데리고 고구려를
향해 대대적으로 출발하였다.

신라역시 백전노장의 김유신에게 5만의 대병력을 주어 평양성으로 진격토록 명 하였다.

                  [고구려]  멸망의 그림자 !

당과 신라에 파견되어있던 밀정으로부터 이러한 소식은 속속 평양성으로 전해졌다. 고구려의 조야에는 멸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보장칸은 곧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했으나 참여한 30여명의 대신들중 말하는사람은 아무도없이 침묵만 계속 흘렀다. 암울한 영양황제로 인해 이미 국력이 기울어질대로 기울어버린 고구려는 이미 당나라에 비해 양국간 국력차이나 병력차이가 너무 심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이때...병석에있어야 할 연개소문이 무장을 하고 어전회의에 들어왔다. 병색이 완연한 연개소문은 칸에게 절한후,천
천히 말했다....연개소문은 이 새로운 위기상황에 대하여 작전의 핵심은 지원군인 방효태의 별동대20만에게 있다고 말 하였다. "지금 평양성에 와있는 소정방군은 이미 사기를 잃어 이빨빠진 호랑이 상태이고, 노련한 김유신의 5만지원군은 전선의 상황을 보아 전투에 임할것이므로, 문제는 새로 편성되어 투입되는 방효태의 별동대 20만이다.. 욕망 높은 방효태는 소정방군과 연합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평양성을 점령하기위해 얼어있는 패수의 상류인 사수로  진로잡고 통과하여 가급적
빨리 평양성 동쪽에 도달하려 할 것이다..."   연개소문의 판단은 정확했다.

 

  신라군은 서라벌을 서둘러출발하기는 했으나 도성을 벗어나자 곧 천천히 행군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사실을 확인한 연개소문은 아들 남생과 남산에게  기병 각 5천기씩을 주어 한밤중에 소정방의 좌우군을 동시에 공격토록 하였다.(이 전투에서 우군장수 설인귀는 연개소문 아들중에  무예가 가장 뛰어난 남생에게 한쪽팔이 잘림.연사)

 

한밤중,불시에 고구려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소정방군은 지리멸렬하여 많은 군수물품을 내버린채 평양성 서북쪽 20리밖으로 멀찌감치 후퇴한후, 지원군인 방효태군 및 신라군을 기다리며, 혹시 또 있을지 모를 고구려군의 기습공격을 경계하는데에 여념이 없게 되었다.

 

연개소문은 한편, 구련성(지금의 북중국 러시아지방)의 고선나와 대진성(지금의 만주,연해주지방)의 연정토에게 파발말을 보내 각1만을 인솔하여 사수로 오도록 명하고,  중병중임에도 자신역시 3만의 정예군을 인솔하여 눈보라를 뚫고, 4일 동안 주야겸행으로 강행군하여 전략지인 패수 상류인 사수에 도착하여 고선나,연정토군과 합류하였다.

 

그리고 대형석거(바위나 큰돌을 쏘아 올리는 기계)를 대규모로 제작하여 사수강 양쪽 10여리에 거쳐 병사들과 함께 위장 배치시켜놓고 방효태의 대군이 오기를 기다렸다.(사수는 강폭이 비교적 좁고, 때는 겨울이라 얼어 있었다)

 

"설마......"

 

설마..,소정방군에게 포위되어있는 평양성의 고구려군이.. 그것도 이렇게 빨리 사수에 도착해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상상조차 하지 못한 방효태와 아들13명이 이끄는 별동대20만은 사수에 다다르자 얼어있는 강을 확인한후, 12열횡대 (약10리에거쳐 12열의 횡대편제로 구보하는 군의 이동형태)를 갖추어 신속하게 도하하기 시작했다. 방효태군의 상당부분이 강위에 올라서자 연개소문의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한놈도 살려두지 말라!"

 

 강 양쪽에서 고구려군의 대형 발석거로부터 커다란 돌들이 비오듯 강을 향해 퍼부어졌다. 바위돌들이 떨어지자 얼어붙은 강의 얼음이 굉음을 내면서 갈라졌고, 방효태군은 강속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말그대로 생지옥이요, 아비규환이었다. 요행히 얼음물을 헤엄쳐 나온 당군은 대기해있던 고구려군에게 모조리 죽임을 당하였다.

 

" 급보!" 본국에서 보낸 20만지원군이 안보입니다 !

 

 

공격개시 반나절 후...,지휘관인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과 2400명의 장수들, 그리고 지원군 20만대군 전원은 한명도 없이 모두 죽었다. 20만 지원군이 중간에서 사라지고 만 것이다. 연사에 당시의 현장 기록이 있다. " 당군의 시체가 얼음에 싸여 패수50여리를 뒤덮었다"

 

 

 

이 전투를 역사에서는 사수대첩 이라고 한다.

                                         

                                                                (첨부도면 패수)

   

 살수(殺水)나 사수(死水)란 이름은 패수 상류인 사수nickname 이지청천강 아니다)   

 

 병법전문가들은 고건무의 패수대첩(해전)이나 을지문덕의 제1사수대첩(살수대첩)보다 이 연개소제2사수대첩을 더 높이 평가하는데, 이유는 제1사수대첩 당시는 수양제가 113만 군을 동원할 정고구려는 대등한관계로 국력이나 민이 안정되어 있었으나 사수대첩당시 고구려는 국력이 절반정도로 줄어있었다. 당시 당이 고구려를 정복코저 동원한 군대는 처음 소정방의 20만이었다가 다시 지원군 방효태의 20만과 김유신의 신라군 5만까지 합해 20+20+5 = 45만 이었다. 이와같이 당시 고구려의국력은 전성기에 비해 50%정도 상당히 약화된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떤 상태로써 당과 1:1로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점은 규모로는 작지만 이조시대 이순신의 경우도 비슷하다고 봄이 타당할것이다)

 

 

꺼지는 동방의 등불, 구려의 운명

 

 

사수전투를 완승으로 끝낸 연개소문은 여기서 죽는데. 당시 연개소문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비밀로할것을 명하며, 당시 사수전투에 참여했던 구련성(거련=거란지역)의 왕(자사)인 아우 연정토와 대진성의 왕(자사) 고선나와 아들들을 불러 "내 아들들이 부족하다면 그대들이 대막리지를 맡아서라도 대업을 이루기 바란다" 고 말하고 아들들에게는 아버지로 모시는 예절을 올리게 한 후, 아들들에게 엄중히 말했다.

 

 "내가 죽은 후,  너희들은 서로 화합하여 나라와 황실에 충성을 다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너희대에 반드시 중국을 정복하도록 하라! 내가 죽은 후 너희들이 이 말을 잊고 화하족(쥐나)들의 이간질에 놀아나 서로 불신하게 된다면 너희들은 물론, 백두제국 고구려의 천년역사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내 말을 명심하라" 하고 말하고는 홀연히 숨을 거두었다.  661.

2월 6일, 연개소문의 나이 아직 젊은 51세였다.

 

한편, 이러한 사실들을 모르고 있던 소정방은 예정된 시간이 훨씬 지났슴에도 보이지도 않고 연락도 없는 방효태군의 행방을 수소문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 사수에서 연개소문이 지휘하는 군대에 의해 방효태군 20만 전원이 한명도 없이 모두 죽었다"는, 도저히 믿을수없는 보고를 받았는 바, "앉아있는 상태에서 지휘봉을 떨어트리고 한동안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연사-

 

충격을 받은 소정방은 뒤늦게 도착한 신라군의 김유신으로부터 철군을 제의받자 흔퀘이 수락하고 퇴각에 필요한 최소한의 군수품을 요청하였고 이를 조달받자 나당군은 즉시 철군하기 시작했다. (이과정에서 김유신으로부터 연개소문에게 한통의 편지가 고려황실에 전달되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귀국과 우리는 본래형제지간으로써 어찌 당나라군대에 귀국이 정복되기를 바라겠소. 이제 철군하기로 했으니 퇴로를 막지 말아주시기를 바라오(연사)"  소정방군 신라군은 동시에 고려땅에서 황급히 떠나갔다.

 

 

金海 , 연개소문의 죽음

 

자신의 병세가 위중했으나 풍전등화같은 조국의 운명을 눈앞에두고 그대로 죽을수는 없었던  연개소문은 몸소 3만의 대병을 편성하여 사수작전을 직접지휘하는 무리를 범하였다. 대막리지는 유언의 순간에도 전군의 행군을 계속 명하였는바, 이는 연개소문 자신의 죽음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연사)

 

당시, 황급히 당으로  철수한 소정방은 후일, 연개소문이 당시 사수전투를 마치고 돌아오는길에 죽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서는 탁자를 치며 크게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아 아.. 연개소문이 죽었단 말이 사실인가 다시 확인해 보라! 그가 죽은것이 사실이라면 하늘은 우리 당나라를 돕는것이다." 라고 말했다.연개소문의 자식은 현재까지 3명으로 알려져있으나 사실은 4명이었다. - 연사 -

 

이 연개소문이 좀더 살아있었다면 중국은 정복당했을것이라는데 한중사학자들 간에 별 이견이 없는데, 그의 죽음은 류황으로 인해 이미 국운이 기울어있던 고구려를 지탱하고 있던 마지막 끈이 끊어졌다고 보는것이 학자들의 공통적인 시각이다. 연개소문은 이미 이점을  알고 자식들에게 저런 각별한 유언을 했는지도 모른다.

 

중국인들의 역사에 있어서 중국인(사학자)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외국장군이 연개소문이다. 특히 중국인사학자들은 자신들을 정복했던 돌궐의 태무진이나 려진의 김누얼 보다 연개소문을 더 영웅으로 친다. 이러한 이유를 한 중국사학자필자에게 이렇게 설명했다."한쪽 팔과 다리가 없는 사람과 싸웠는데 흠씬 두들겨 맞아 죽을뻔한 경험을 겪은 사람수 있는 일" 그는 또  "중국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연개소문이었다.", "연개소문의 병서(금해병서)는 후원나라 금나라에 온전히 전수되어 실전에서 재현되었는데 이것이 중원을 정복하게 된 근본이었다" 이 말을 들은 필자는 당시 이런질문을 했다.

 

돌궐 말갈 흑수말갈등은 한민족이 아닌가? 하자 한참후에 그는 이런대답을 했다. "周恩來,周恩來!" (주은래의 비밀: 주은래는 원래 한국인 조상 周씨를 둔 중국 조선족으로써 모택동정권의 구심점이었던 유명한 중국의 재상이었는데 중국사학계가 북중국의 피라밋을 발굴하면서 동북공정을 건의하자 피는 못속인다고 무척화를내며 "고구려는 명백한 한민족사인데 그런식으로 역사왜곡을 하면 후대에 지탄을 받게될일이다!"하면서 당시 몹시화를내며 불허했던 인물이다. 중국인 학자인 그는 필자의  어려운 이 질문에 대해 학자이전에 중국인으로써  또 사학자로써의 양심상 렇게 우회적으로 대답할수밖에 없었던 의미있는 대답으로 기억되어 적어 보았다.

 

 어떻든, 연개소문이 우리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써 중국인들의 후손들에게 존경받았슴을 뜻하는 동시에 고구려,돌궐(몽고),려진(만주)이 우리와 같은 민족임을 설명,입증하는 증거라 하겠다.

 

연개소문의 사생 활을 기록한 부분도 있는데 다음과 같다.

 

" 연개소문의 집에서 밥 잘먹을 생각을 하지 말라" "연개소문의 집에 선물을 가져가지 말라 " 이말은 연개소문이 평소 검소하고 청렴하여 집안에 재물을 두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공무에 있어서는 공사를 엄격히하여 감히 재물을 바치는 사람이 없었다고 풀이해도 좋을것이다. -102-11-

 

또 연개소문에 대한 성장기 기록도 있는데 "연개소문은 어려서부터 발음이 또렷하고 노래부르기를 좋아했다. 그는 또 기억력이 좋아 한번들은 말은 잊는법이 없어 부모도 말조심을 했다", 연개소문이 18세되던때 스승인 을지문덕장군이 '더이상 가르칠것이 없다' 고 했다" , "연개소문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여기서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은 그의 집안이나 그가 인재들을 좋아하고 사람들 또한 그 집안이나 그를 존경하여 주변에 항상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로 해석함이 적절할것이다.

 

연개소문시대 그 대표적 인물로는 양만춘, 추정국, 걸걸중상(대조영의 아버지:후일 발해건국) 걸사비우,고선나(섭나=야율아보기 8대조: 후일 거란건국)등이다.

 

 

보장칸연개소문에 대한 신뢰

                                                           

 연개소문에 의해 칸에 오른 장(보장)은 평소 연개소문을 신뢰해온 황손으로써 그에 대한 신뢰가 깊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기록이 있어 여기에 몇가지 소개코저 한다.  "장은 연개소문을 대막리지에 임명하면서 칸을 내렸는데(여기서 칸이란 황제의 상징인 칼이란 뜻으로 칼이란 이런뜻으로 유래된 우리말임= 황제의 상징인 칼=칸=황제=단군왕검) 칸을 연개소문에게 주었다는 것은 연개소문을 전적으로 신임했다란 뜻과 같이라고 할것이다.)

 

장은 개소문에게 황궁에 들때, 칸을 풀지 말고 들어오도록 명했다. 그래서 개소문은 칸의 앞에 와서야 칸을 풀고 절 한후에 앉았는데 개소문이 죽음을 앞두고 사수전투를 나가기전까지, 이를 어긴적이 없다.(당시 황궁내에서 모든 신하는 일체의 무기를 소지할수 없슴),

 

사수대첩직후, 칸은 연개소문으로부터 사수전투의 완승보고서를 받는데,  이때 연개소문의 다른 편지를 같이 받았다.

 

이 편지에 " 신이 부덕하여 폐하를 더 보필치 못하고 이제 죽게되어 글을 쓰려니 눈물이 앞을가려 면필(붓과종이)이 잘 보이지않습니다. 쪼록 심기를 굳건히 하시어 당대에 구려제국의 대업을 꼭 이루시기를 저승에서나마 빌겠사옵니다"

 -불충자 대막리지 연개소문 올림 -", "칸은 이 편지를 읽고 절규하듯 연개소문을 세번외쳐 불렀는데 황실밖 100보까지 크게 들렸다" , "칸은 즉시 사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어영대장 윤정하와 휘하 호위병력 단 20기만 데리고 50리를 마중나가 죽은 연개소문을 맞이 하였는데, 가는동안 눈물이 마르질 아니하였다"

 

칸이 사복을 입고 죽은 연개소문군을 마중나간 이 과정에서 해프닝(?)도 기록되어있는데 다음과 같다.

 

 "갑작스럽게 일대의 군마(칸과 호위대)를 만난 강군(고구려군)의 전위대(선발대 : 대장 마추상 :연정토휘하의 장수)가 사복 입은 칸과 경호대장 윤정하를 몰라보아 칸의 군마를 포위하고 일제히 화살을 겨누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에 칸의 경호대장 윤정하가 "칸이시다. 무엄하다. 모두 엎드리라" 고 고함쳤으나 전위대 누구도 겨눈활을 내리지 않았으며 마추상은 도리어 무장해제명령하였는바, 윤정하가 당황하여 칼을 빼들고 칸임을 다시 큰소리로 말하였슴에도 마추상은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때 칸이 '따르라!' 고 명하여 호위대가 모두 무기를  버리자, 마추상의 군대가 비로서 활을내린채 대기하였다. 뒤어어 이를보고 받고 달려온 정토와 개소문의 아들들이 칸을 보고 모두 말에서내려 엎드리자 칸이 말에서 내려 그들의 손을 잡으며 "내 부덕하여 개소문을 잃었도다" "내 부덕으로 개소문이 나를 떠났도다" 며 통곡하자 좌중이 울움바다가 되었다. 전위대장 마추상은 그때서야 포위를 풀고 칸을 호위토록 하였다. 칸은 후일 자신을 몰라보고 무례를 저지른 마추상을 불러 "마추상은 강군의 대장으로써 충분하다. 군인으로써의 엄정한 군기를 높이 산다" 며 "금화 30냥을 내려 치하했다"  은 아무나 하는게 아닌 모양이다. 보통사람같으면 화라도 냈을법한 일인데...

 

이러한 기록들은 장과 연개소문이 아버지와 아들처럼 크게 믿고 서로 신뢰하였다는 증명임과 동시에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대신으로써 그의 황실과 조국 고구려에 대한 깊은 충정심을 잘 엿보게 해주는 기록이라 하겠다. - 청 연사110-2 -, - 청연사 109-1,2  123-8,10,12,24, 124-4.6

 

 

연개소문에 대한 후대의 모략

 

"연개소문이 말에서 내릴때는 휘하장수를 엎드리게 하여 밟고 말에서 내렸다" 는 등의 속설들이 전해져 오는데 이러한 속설들은 모두 후대에 조직적으로 조작된것으로써 훌륭한 인물을 비하하기 위해 누군가 에 의해 고의적으로 지어내 유포된 말이다. 역사에 기록으로 볼때 최소한, 연개소문은 그런 사람은 아니었슴이 확실하다.

 

연개소문집안의 본적은 강화도로써 이곳에는 아직도 연씨 집안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강화도에 여행가는 분들은 에 꼭 들러보기 바란다(단, 연개소문이 무술을쌓고 훈련을 했다고 전해지는 고려산은 강화도에 있는것이 아니라 과거 고려의 영지로써 지금 중국령 산서성 태원의 카오리(고려)산으로 봄)

 

대대로 고구려의 고위관료로 대막리지(총리)를 지낸 고구려의 명문가문으로써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태조는 할아버지 연자유의 고구려 관직(대막리지)을 물려받았으며 연태조 대막리지가 을지문덕을 발탁하였고 을지문덕을 발탁한 이유로 을지문덕으로부터 연개소문이 병법을 전수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필자가 인용하는 고서인 이 "청연사" 麗振族으로써 과거 청나라 황실의 사학자였던 x문태의 3손, 현 중국인 x승식씨(5x歲,중국 xx소재)의 소장사료로써 려진이 중국 황실을 접수한후 황실서고등에 있던 중요역사기록 약2백여권 중, 한민족관련 내용을 따로 정리한 것(필사본 포함) 268쪽이다. 본인은 이중 상당부분을 사진으로 찍어 숨겨가지고 들여왔다 - 삼우 -}

 

    

삼국사기의 연개소문에 대한 왜곡

 

 

삼국사기는 史記가 아니라, 私見記 또는 사기(詐技)라고 봄이 적절하다고 볼수있는데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현재, 유일하게 전해지는 고서는 삼국사기외에 삼국유사,고려사등만이 있는데 모두 이조 이방원에 의해 재편집되었다. 우리측의 독립된 고증자료는 거의없고 있다하더라도 현재 사학계에서는 모두 야사나 위서로 취급하고 오직 삼국사기기준으로하고, 다음으로 중국사료를 근본으로 하고, 이렇게만을 인정하는 것이 관습헌법화 되어있은지 오래다.

 

대표적인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극명하게 입증되는데 대체로 중국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둔 고려의 명장들은 명성이 높아 할 수 없이 기록한 경우가 많은데 이경우도 반드시,성격이 포악하고 무능했다는식으로 묘사한다. 물론, 반대로 중국에 패배하였거나 항복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인간성도 좋고 성격도 자질도 인물도 다 좋고, 다른 내용도 잘 기록되어 있는 특징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것은 한국역사의 문제인데, 이조시대 이조정권에 의해 스스로 자국사를 왜곡, 축소한 사실로써 대표적으로 연개소문에 대한 내용을 간추려 보자면 아래와 같다 (70%가 허위임을 유념)

 

중국사가들에 의해서는, 연개소문은 난폭한성격으로써 임금을 시해한 역적,김부식에 의해서는 천민출신으로써 왕을 참살한 불충무도한 파렴치한 인간...

최근의 함석헌에 의해서는 '군사쿠데타의 원조'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왜 이랬을까? 답은 간단하다.

이성계는, 명나라와 긴밀한 관계에 있던 사람이었는 바, 위화도 회군에서부터 한민족 정통인 고려의 황실과 충신 현자 및 일족들을 세계역사에 유례없이 철저하게 대살륙한 후, 자신이 스스로 중국조선인 기자조선(이씨조선)의 왕에 오른 인물이다.

 

때문에 자신의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중국보다 한술 더 떠, 고려를 철저하게 말살시킬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이러한 정책은 이조시대 500년 동안 명석한 세종도 있었지만 거의 일관된 정책으로써, 이 오랜관습의 영향으로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강단사학자들은 오직 중국인들의 동북공정 논리에 충실한 조작된 이들의 중국사료와 그중에 하나인 삼국사기만을 근거로 한민족역사를 설명하려 한다. 

 

여기에다가 일제 36년의 식민사관이 샌드위치식으로 덧붙여져 오늘날 죽은 국사를 먹고,배우고 있는바, 한 일본사학자는 나에게 이러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당신들은 우리가 일제때, 무슨근거로 몽고와 만주에 이르는 만주제국을 건국했는지 모른다.무슨뜻인지 아는가?"  "당신들의 국사교육방식을 보면 한심하기 그지 없는데 왜,한가지 책만으로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는가? 우리처럼 여러책을 만들어 학교마다 선택하게 해서 가르치는것이 차라리 바람직 하지 않겠는가? " 하면서 딱하다는듯 날 쳐다보아 민망한적이 있었다. 이 일본사학자의 말은 의미심장한 또다른 의미의 말이 아닐수 없다.

 

  

연개소문 경극 

 

원나라(돌궐=몽고제국=구려후손시대)때 위인존중의 정책으로 시작되어 청나라 때 절정기를 맞은 중국의 대표적인 전통극을 이르는 말이다.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영화로 보았던 '패왕별희'같은 것들이 바로 경극인데 대만에서는 아직도 연개소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극이 있어 본적이 있다. 아직도 경극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연개소문은 과연, 중국인들에게 어떤인물이었을까?

 

고려의 후손인 려진이 중국을 정복하고 최근까지 통치하던 중국이름, 청나라…청나라때 수도였던 북경을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경극공연이 이루어졌는데,중국문화를 대표하는 이 경극에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이유는 무슨 이유에 의해서일까? 그가 중국정권의 지배자들에게강한 기억으로 존재되었다는 반증이 아닐수없다.

 

수양제의 110만 대군의 고구려(고려=구려)) 원정때 살수(사수)에서 별동대30만을 전멸시킨 을지문덕이나 당시, 세강이었던 중국수군 30만을 패수의 대해전에서 반달진(학익진)으로 단 한번방에 전멸시킨 고건무(후일영류황제), 당태종의 60만군 공격때 이를 당태종의 눈을 쏘아 섬멸한 양만춘이 아닌, 연개소문이 경극에 등장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모르는 사실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유일하게 1985년 중앙일보에서 대만에공연하있는 이 경극에 대하여 보도한 바 있다.

 

 

연개소문 가문

 

많은 조작으로 사실을 왜곡, 축소시킨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역사조작책인데, 삼국사기가 완성되고 이전의 수만권의 고서들은 모두 왕명으로 강제수거되어 모두 폐기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우리측에 자료가 전무하다보니 오늘날 강단사학계는 이것을 유일한 역사기록으로 삼고 있는 바.여기에 보면 연개소문은 (천민출신으로 아비가 없으며)연못에서 나왔다하여 연씨라고 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 김부식의 삼국사기 기록들이 얼마나 날조된 조작인가를 단적으로 입증하는 증거가 아닐수 없다. 필자가 확보한 청연사를 제외하더라도 그 증거가 최근에 하나더 발굴되었다.

 

1923년,낙양에서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과 남산의 묘가 발굴되었는데, 그 안에서 발굴된 묘지석 기록에 "남생의 아버지가 연개소문,할아버지가 연태조, 증조부가 연자유, 작은 할아버지가 연휘만..."이라고 기록되어있고 모두 대막리지(총리,주석)등 고급관리를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는 이성계처럼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인물이 아니라,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전통적인 귀족집안 출신으로써 고구려시대 지도층 집안이었다는 증거다. 즉, 연사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증거다. 필자의 연개소문은 내용은 "청연사(고려연사)"의 기록을 기준으로 연개소문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것임을 밝혀둔다. 다음은 왜곡된 고구려 말기 상황을 바로잡기위해 몇가지를 좀더 전하고저 한다.

 

 

영류칸의 환락과 실정 그리고 강퇴사건

 

우리 한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큰 승전을 꼽으라면 단연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일 것이다. 을지문덕의 살수전투는 아군의 병력 손실은 거의없이 수나라의 30만 5천 대군을 단 한방에 몰살시킨 세계 전쟁역사에서 유래없는 전투였다. 고구려는 당시, 이 육전패수대첩(살수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패수중류지역에 당시 중국군의 시체를 한 곳에 모아 놓았는데 그 높이가 웬만한 산보다 높았다고 연사에 기록되어있다. 바로 그 지역에서 약 500미터지역에 승전 기념탑을 세웠는데 높이가 성인10배에 달하고, 크기가 어른 40명이 손을잡아 둘러설정도의 규모였던 경관대탑(京觀大塔)이었다.(연사:경관큰탑=패수승전기념탑 )

 

중국인들게는 말할수없는 수치였다.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구축하려 했던 중국 진족(한족)들에게 고구려는 무적의 강력한 존재였다."하늘에 두개의 태양이 떠 있을 수는 없는 법" 연개소문이 당 정벌을 천명하면서 한 말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중국역대왕조는 항상 한민족에 의해 멸망될것을 두려워 해 왔는데, 당시에도 그랬다.  612년부터 618년까지 당은 왕조 교체기와 정권교체기에 수양제의 살수 대패 이후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태원의 군사령관이던 이연을 20살이던 아들 이세이 부추겨 수왕조를 무너뜨리고 당왕조를 세웠다.

 

이때 돌궐(몽고) 비롯하여 고구려의 제후국들은 칸(고구려황제)에게 상서를 올려 신흥 정권을 정벌할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늙어 병세에 있던 영양왕이 이를 미루자, 돌궐등(설연타,고창,고막해,아사나 등)고려 제후국들은 독단적으로 연합군을 편성하여 당을 공격하였으나 주력군인 고구려군이 없는 상태에서 당군에 패하여 제압되고 말았다. 당시 고구려내에서도 중원을 공격해야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영양왕의 병세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것이다. 마침내 영양왕이 죽고 뒤를이어 태자 영류가 칸으로 즉위하였다.

 

 

한민족의 전통 병술

 

수리진(반달진=학익진)세계 최대해전

 

 

세계전투사를 연구하는 독일의 한 학자(쉴러)는 인류 역사의 최대해전으로 구려와 수의 패수해전 즉 고건무의 패수대첩을  꼽는다. 현재의 이조사관의 한국국사에서는 곧잘 이순신만 말하는데 사실은 고구려시대의 패수대첩이다.

 

 영류황! 그는 태자시절, 양제의 110만 침입때 수군사령관(육군은 을지문덕)으로써, 패수에서 내호아 주법상거느린 수나라 수군 30만군을 맞아 학익진 전술로써 5만수군으로 단 한방에 30만 수군을 전멸시킨 우리민족 최대의 해전 승리이룬 명장, 태자 건무였다. 을지문덕이 지휘하는 구려육군의 살수대첩은, 패수에서 건무태자가 지휘하는 구려수군에 의해  중국수군 30만이 완전히 전멸된 후, 작전상 후퇴하다가 궤멸된 전투사였다.(영류는 영리

했으나 셈이 많고,영화와 주색을 즐겨 칸에 오르자 곧, 환락에 빠져들었는데, 특히 매년 당에서 보낸 10명의 미녀들과 하루도 빠짐없이 주연을 베풀어 죽기전까지 황실궁안에서 풍악소리가 그칠날이 없었다. 영류는 을지문덕장을 파직하여 귀양보내고,막리지회의 제도의 폐지하는 명령도 잔치중에 내렸는바, 이지경에 이르러 뜻있는 현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백두제국은 망했다." "칸이 제정신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 靑연사 97-2,4 -

 

 

영류왕이 칸에 즉위하면서 쇠망의 길로...

 

 

새 칸이 즉위하자, 고구려의 제후국이었던 돌궐등(설연타,아사나등)은 다시 상서를 올려 당에 대한 정벌을 주청했고 을지문덕을 비롯한 우국충신들은 막리지회의 의결을 통해 영류에게 중원정벌을 공식적으로 상소했으나 영류는 "제후국들의 상서에 칸이 움직인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당의 왕이 두나라가 앞으로 전쟁없이 평화롭게 만세를 지내기를 바랍니다"라고 요청하는 친서를 전해왔슴을 귀공들도 잘 알면서 내가 먼저 공격한다면 천하에 비난을 받을 일이고 이는 선조의 지도이념인 홍익인간의 뜻에도 맞지 않는다" 고 말하고는 묵살할 뿐이었다.

 

이때 당은 내정을 다지기 위해(전쟁준비) 주변국에 대하여 많은 선물과 친서를 보내 화친전술을 썼는데 고구려의 충신, 현자, 젊은 조의선인들은 이러한 영류의 우유부단한 정치에 하나같이 나라의 미래를 우려하기 시작했고,동시에 칸에 대한 불신은 높아만 갔다.

 

626년, 왕위를 탐내던 이세민이 정변을 일으켜 태자인 형 건성을 죽이고 이의 부당함에 대항하던 동생 원길도 죽이면서 두려움에 떠는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강제로 물려받아 왕위에 올랐다. 당태종은 이렇듯 유교적 관점으로 보더라도 패륜아였던 것이다. (이런 중국을 유교관점에서는 그래도 어버이처럼 섬겨야 도리에 맞는건지?)

 

이때 돌궐,설연타,아사나 등 제후국들은 칸에게 중국 정벌을 요청하는 상서를 세번째로 또 올렸다. (중국정권이 안정되면 반드시 침략을 받았기에 선제공격을 하자는 것) 이때 을지문덕을 위시하여 조의선인들은 다시 한번 중원을 공격할것을 막리지결의를 통해 공식요청하였으나 영류는 조의선인 15명을 잡아 하옥시키고 을지문덕은 파직,귀양보내고 막리지제도는 폐지시켜버렸다.

 

"중원이 안정되면 고구려는 침략을 받을것이고, 통일된 중국은 고구려를 위협하므로 때가오면 반드시 중국을 정복해야 한다." 이는 광개토칸(호태왕=황제)을 비롯하여 선대 칸의 공통된 유지였고 또, 고려의 대신들 다수의 의견이며 상식이기도 했으나 영류는 이를 무시하였는데 이는 "신흥 당정권이 많은 미녀등의 선물과 함께 화친의 친서를 수시로 보내 귀국과 우리나라가 평화롭게 만백년을 함께누기기를 바랍니다" 라는 외교전략 때문이었다.(연사97-6, 97-11)

 

당은 고구려에 대해 앞으로는 이러한 전술을 펴 안심시키는 동시에 고구려의 제후국이었던 북중국지역의 제후국(돌궐, 창, 고막해, 설연타, 거란등)들을 노략질을 해서 정벌한다는 이유로 차례로 정복해 나갔는데 영류의 안일한 정치의식은 결국, 중대한 과실을 저지른 결과가 되고 말았는바, 마침내 당은 주변 서역을 모두 평정하고 고구려만 남겨둔 상태가 되고 만 것이다.

 

주변상황이 점점 이렇게 악화되어가는데도 영류는 당과의 화친을 믿고, 624년에는 당과 정기적인 무역을 시작했고 도교도 수입하였다.

 

 

경관대첩탑 화재사건 과 양국포로 교환

 

경관대첩탑 : 살수대첩 기념비

목조 피라밋탑으로써 규모가 당시 세계최고 (청연사)

 

 

당과의 교류를 이유로 고구려에 온 당의 사신들이 한밤중에 경관대탑을 불사르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로인해 고려백성의 민심이 흉흉해졌는바, 이에 영류가 항의하자 당은 평화공존정책의 확인뜻으로 양국포로의 교환을 제안하였는바,

 

이에 고구려는 당시 수나라 포로 대부분인 1만여명을 잘 예우하여 보내주었으나 당은 생존 고구려포로의 극히 일부인 800여명만 보내 주었는바 그것도 식량등 지원도없이 알아서 가라는식으로 보냈다. 이는 향후 당이 전쟁을 대비한 때문이었으나 영류는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고구려의 젊은 조의선인들의 우려와 분노는 극에 달했다. 영류는 그동안의  자신의 실정으로 인한 실각이 두려웠다. 그래서 이 세력을 제거하기위한 전초단계로 이른바 대중국 방어장성구축방안이 모색되었다. (천리장성)

 

631년, 그는 "앞으로 당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천혜의 방어선인 요하를 그대로 둔 채 요동반도의 비사성에서 장춘(부여 농안)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촉조 사업을 실시한다" 고 발표하고 책임자에 연개소문을 명하여 서대부인으로 봉하고 조의선인을 징발하라는 칙서를 내린다.

 

이에, 고구려의 조의선인들은 "당장 원정군을 편성해 출진을 시켜도 시원찮은 마당에 무슨 장성을 쌓는다는 말인가? 장성을 쌓은들 돌이 나라를 지켜주는가 도데체 뭐하는 짖인가? 싸울 의사가 없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 ?" 하면서 공공연히 성토하기 시작했다.

 

사실, 세계 전투사에 있어서 천리장성이건, 만리장성이건, 마지노선이건간에 장성이 국방에 도움이된 예는 하나도 없다. 그것은 겁만은 자들 스스로의 자위행위에 지나지 않는 정체의 상징물일 뿐이었다.

 

영류칸과 기득권 대신들은, 연개소문이 아버지 연태조의 뒤를 이어 대막리지의 자리에 오르는것 조차도 거부했다. 을지문덕 파직이후, 연개소문이 조의선인의 우두머리였다.

 

그러나 당시 조야로 덕망이 높고 국가에 공헌도가 큰 연개소문가문의 힘을 무시할수없던 영류는 연개소문을 서부대인의 자리에 임명하는 동시에 천리장성을 쌓는 임무를 명하여 변방으로 보냄으로써 세력제거를 도모하였다.

 

640년 겨울, 연개소문은 마침내 아무와도 상의없이 스스로 사직하고 강화도로 내려가버린 일이 발생되었다. 일이 이지경에 이르자 조의선인들은 집단상서를 올렸는데 그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당과 교역에있어서 첩자들이 사신으로 위장하여 고구려를 각지를 정탐하는 행위중지

2.  631년 사신들에 의해 파손된 경관대탑의 복원

3.  귀양중인 을지문덕대장군과 귀향중인 연개소문의 복권

4.  국력낭비인 장성의 축조 중단과 당나라 공격을 위한 군비 확충.

 

이른바, 4대 유치(4有治上書)론이다. (후일 이성계는 이것을 모방하여 4불가론을 주창했는데 내용적으로나 상황적으로나 정반대인 억지주장에 지나지 않음)

 

이에, 영류황은"4대유치론" 중, 연개소문의 재등용만을 윤허하고 칙사를 강화도로 보내 연개소문을 도성으로 불러 천리장성 감독관으로 강제 발령했다. 이때, 조의선인들은 민족의 정치관습을 따르기로 결의했다.

 

주신(단군조선)때부터 칸(단)은 스스로 물러났으며 그렇지 않을경우, 즉 정치를 잘못하거나,패전하거나,가뭄이나 홍수가 들어 민심이 흉흉해지면 그 책임을 물어 칸을 죽이거나 추방해온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고구려시대 때만해도 실제로 여러 칸들이 이런 이유로  물러거나 죽임을 당했다. 이것은 실사구시의 철학을 가지고 있던 한민족 고유의 생활문화 였다. 이문

화는 고려시대로 단절되었으며 이조시대는 유교(양반병역면제등),사대 문화하고는 정 반대인 것이다.

 

642년, 연개소문등은 천리장성 감독관으로 떠나기전 관례적인 열병식 중에 이를 참관하던 영류왕과 대신 128명을 잡아 하옥시켰고, 이중 영류를 포함하여 41명을 법에 따라 극형에 처했는데 이들이 당나라로부터 받은 뇌물내역을 보면 대표적으로 내관장(내관의 총책임자) 언태손정이 황금 140냥을 비롯, 좌장군 금정환 황금280냥,좌유위표대장(인사담당)황금110냥, 가도위사(보안) 유민이 황금180냥등... 그 액수가 상당하였다고 기록되어있슴. (연개소문은 영류를 처형한 후, 황제의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고 그 일족은 황실의 예에따라 예우 함)- 연사 97-42,45-2. 2/3.2/5 5-8/5

 

 

영류황과 관련 비리관료들을 처리한후, 연개소문은 황실의 법통을 이어 영류왕의 조카 장을 칸(보장왕)으로 추대하여 황실을 혈통을 보전하고 고구려의 역사를 이었다. (이점이 고려와 이조와 차이)

 

  

당시 동아시아 정세


고구려 조의선인들의 영류왕 제거는 때가 많이 늦어있었다.

 

대대로 충신의 집안이었던 연개소문의 가문에서 칸을 처형한다는 일이 쉽진 않았을 것이다. 여하튼, 이때는 이미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던 주변7개의 강력한 제후국이 당에 모두 정복되어 고구려는 이미 국력이 기울어 있던 상황이었는데 특히, 돌궐의 당편입은 큰 손실이였다. 고구려는 이때부터 사실상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것이다.

 

626년 당의 이세민은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빼앗다시피 하여 즉위한 뒤, 16년 동안 고구려의 제후국인 돌궐등 북방국가들을 정벌하여 편입하고 이정, 위징, 방현령, 장손무기 등을 등용하여 내정을 다졌다. 소위정관지치(貞觀之治)라 불리는 황금시대의 기초를 닦았던 것이다. 그러나 영류는 이기간동안 주연이나 베풀고 환락에 젖어 태평세월을 보낸것이다.

 

안일한 영류로 인해 고구려로써는 멸망을 준비하며, 당의 시대를 열어준 꼴이 되고 만것이다. 광개토칸(호태왕) 이래 200 여년간 고구려와 형제국이면서 제후국으로써 강력한 동맹세력이었던 제후국 돌궐을 비롯 설연타, 유연, 고창, 거란등(모두 같은 북방족)이 차례로 이세민에게 제압되는것이 방치되는 동안 이들나라의 약 오천여명에 이르는 친고구려계 대신들이

죽거나 잡혀가게 되었다. 이렇게 당의 지배하에 철저하게 편입되었는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부분이 있는데 돌궐부분이다.

 

당태종이,돌궐의 정벌과정에서 돌궐의 고구려계대신 일가친척 2.240명을 참살하거나 끌고왔는데 이 사실은 돌궐과 고려의 혈맹관계가 얼마나 깊었는지 알수있게 하는 대목이다. 고구려와 돌궐과는 군사적으로뿐만 아니라 같은 민족이었던 것이다.

 

동돌궐은 전략적으로 중원국가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측면을 견제하는 세력이었으며,서돌궐은 장안과 낙양을 견제해주는 세력이었다. 안일한 군주 영류 로 인해 고구려를 받쳐주던 강력한 제후국들이 이와같이 모두 당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중대한 과오를 저질렀다.(당시 이세민은 돌궐등을 정복하기위해 원정하면서 “이들이 자주침략하여 선량한 양민을 죽이고 노략질을 일삼아 부득이 원정하게 되었으니 양해바란다”는 친서를 영류에게 사전에 전하여 영류를 안심시켰다)

이러한 제후국들의 당의지배권 편입으로 당의 세력은 더 강해지는 반면 고구려는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손실을 입게 되었는데 이것은 후일, 고구려를 멸망시킨 선봉장들이 이세적을 비롯 설필하력,아사나두이,설인귀등 북방민족출신 장수들이란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영류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이제 고구려는 전보다 절반정도로 상당히 약화된 상태에서 당의 공격을 기다릴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수문제가 80만 대군, 수양제가 113만 대군으로 공격해야 할 대상이었던 고구려가 불과 30년만에 겨우 50만의 병력으로 공격 가능한 약한 세력이 된 것이다.

 


대막리지
 연개소문리더쉽
 

 

 

연개소문은 청렴결백한 공직자였다. 요즘같이 공직자들이 부정부패한 난세에서 더욱 빛나는 역사적 위인들은 바로 연개소문이나 최영이라 아니할수없는데, 이들이 집권했던 국가는 막강했다. 연개소문은 대막리지가 되자 황실의 개혁을 실시하여 황실내의 부패하고 안일,무능한 관리들을 철저히 가려, 사정없이 모두 관직박탈하고 과다한 세금을 감면하는등 강력한 개혁을 실시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내실을 기하는 한편, 외교적으로는 당에 교역 및 도교사신을 두배로 증가시켜 안심시킴과 동시에 당의 전략과 군세등의 정보를 취득케 하였다. (조작된 국사등에는 연개소문이 도교를 수입하고 불교를 억압한 것으로 쓰고 있으나 도교를 수입한 사람은 영류칸으로써 영류 본기 7년 영류황은 당고조에게 도사파견을 요청하여 도교강의를 듣도록 한 기록이 있다)

 

외교적으로도 정치적수완이 뛰어난 연개소문은 이점을 이용하여 도교를 수입한다는 명분으로 당의 긴장을 풀어놓으면서 관련 사신들을 대거 파견하여 당의 군세,경제등을 정탐하는 한편, 신속한 국내 안정을 도모했다. 한편 국력 낭비인 천리장성축조를 중지하고, 조의선인들을 요하전선에 전진배치하여, 당의 공격에 철저히 대비하였다.(양만춘등을 발탁하여 요충지의 제후(왕=자사)로 임명 함, 양만춘이 연개소문에 반대하여 전투를 벌였다는 야사는 허구. 양만춘은 연개소문가문의 측근으로써, 그의나이 64세에 안시왕으로 봉해졌고 안시성전투 후, 647년 봄에 노환으로 별세 했는데 칸은 그를 죽음을 애석해하여 상장우서왕으로 봉하고 려장(국장)으로 개소문을 려장위로 성대히 하였으며 아들 양운서에게 왕위을 물려주었다. -연사- 

 

이세민의 패배북경 점령 & 장안 공격

 

이세민 역시 능력있는 일국의 지도자의 답게 연개소문의 집권 3년도 채 안된 시점에 전격적으로 고구려 공격을 감행했다. 그는 이미 고구려 주변의 강력한 제후세력인 돌궐등을 모두 제압한 뒤였으므로 50만의 병력으로 고구려정복을 확신하고 직접 인솔하여 원정길에 나서면서 조칙을 발표하였는데 다음과 같다."중국 역대왕조의 원수를 갚고, 패륜의 연개소문을 징벌한다".여기서, 제하의 원수를 갚겠다는 말은 이해할수 있으나, 임금시해부분인 패륜이라 언급한 부분은 경우가 전다른 부분으로써 이세민 자기는 권력욕심으로 자기 친아버지와 친형제를 살륙한 바, 연개소문과는 비교할수가 없는 순 억지사항이다. 이방원이 가장존경했다는 이세민은 연개소문에게 패한 후 죽었고, 당시 장안공격을 위해 북경지역에 파견되었던 15만 고구려군은 연개소문이 중국의 서울인 장안을 공격하는과정에서 독화살에 저격되어 본국으로 후송되며 전략상 모두 철수되었슴은 위에 기술한 바와 같다.(당시 북경은 지금처럼 큰 도시가 아니라 중소도시였고,후일 청조가 북경을 수도로 삼았던 이유는 북경이 주신-구려에 이르기까지 오래전부터 우리민족의 영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연개소문의 죽음 = 구려 천년역사의 멸망 

 

[남생, 남산, 남건,남주 4형제]

 

 

연개소문이 죽자 칸(보장황제)은 연개소문의 장례를 주석장으로 성대히 치르고, 군공을 많이 세운 맏아들 남생을 막리지로, 남산을 어영대장군, 남건과 남주 역시 각 좌우장군으로 임명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3형제가 아니다)

 

그러나 당은 연개소문에게 숙청되어 앙심을 품고 있던 대신들의 족당들에게 많은 돈을 들여 접근, 고구려의 내분공작을 꾀해왔는바, 이 족당들은 남건과 남주쪽에 붙어 왔다. 665년, 남생이 요동방면을 시찰 나간사이 남건과 남주는 남생의 아들 현충을 살해한 후, 남산에게 말하기를  남생이 시찰에서 돌아오는 즉시 우리 모든 형제를 죽이려는 비밀계획을 입수하였다며 이대로 있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것이라면서 보장칸을 협박하여 남산을 대막리지에 임명토록한수 금하고 칙서를 위작하여 큰형 남생을 소환토록 하였다.

 

남생은 소환에 응하고자 하였으나, 아들 헌성은 칸이 이미 죽어있을지도 모르는상황이므로 작은아버지(연정토)와 상의할것을 건의했다. 남생은 구련성의 연정토(거란지역의 왕)를 찾아가 상의하였는바, 연정토는 직접 평양성으로 들어가 남산을 만나 이 역모의 주동자가 남건,남주임을 파악하게된다. 남산은 칸과 연정토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잘못을 참회, 사죄하고 형 남생을 복권시킨후 초야로 물러갈뜻을 밝힌다.

 

그러나 이를 알게된 남건과 남주는 당일 심야에 사병을 동원하여 남산과 연정토의 숙소를 습격하는데, 남건은 남산을 사로잡았으나 연정토의 숙소를 습격한 남주는 연정토의 경호대장 마추상에게 도리어 죽음을 당하고 연정토는 평양성을 탈출했다.

 

 그러나 곧 추적에 나선 남건의 대부대의 공격을 받아 이를 막던 마추상이 목숨을 잃고, 연정토만이 간신히 목숨을 건져 자신의 지배지인 구련성으로 돌아왔는바,남생과 합의하에 당나라와 협상하여 평양성을 점령,인계하기로 하고 자신의 지배지 68개성의 군대 10만군을 편성해 667년 평양성을 공격하여 점령한 후,남건과 도당일파들을 모두 극형에 처하고 평양성을 당에게 넘긴후, 자신은 신라로 귀화하였다.(오늘날 국내 연씨는 이 연정토의 후손들임, 야사에 연정토가 자신의 지배지를 당군에 넘겼다는 내용과 평양성내부에서 어떤 중이 문을열어주었다는 내용은 모두 조작임)

 

결국, 이러한 내분작전의 성공으로 고구려의 평양성에 입성한 당은 남생과 남산을 비롯, 황족 대신들을 모두 끌고 당으로 돌아가는데 당으로 끌려온 이후 이 두형제는 줄곳  함께 살았는바, 고구려부흥운동을 경계하는 당으로부터 철저한 감시를 받으며 낙양땅에서만 살다가 얼마후 남생이 병으로 죽자, 남산도 곧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자식들과 고구려 유민들은 남생과 남산의 묘비를 세워 장사지냈는데 이 묘비가 1923년에 낙양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삼국사기등에 조작되어있는것과는 달리, 연개소문의 가문은 대대로 고구려의 명문가문이었슴은 전자에 밝힌바와 같다.

 

결국, 고구려는 당의 분열책과 연합전술로 668년 멸망하고 말았으나 연개소문 아들들의 내분 이후에도 1년이 넘게 전를 계속할수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고구려의 국력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수있게 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신라의 고구려 계승 

 

우리가 잘못알고있는 것과는 달리 고구려의  평양성을 최초로 점령한 군대는 당나라 군대가 아니라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의 군대였다는 사실은 앞에 기술한바와 같다. 연정토는 평양성을 함락하여 남건을 처벌한 후 성을 당군에 넘기고 자신은 휘하의 일대를 이끌고 신라로 귀의하였는데, 당군은 이렇게 고구려를 멸망시키자 여세를 몰아 고구려와 같은 민족인 신라를 마저 멸망시킴으로써 화근을 없애고 직접통치하고저 신라를 공격한다.

 

이때 신라군을 도와 당군과 전투를 벌인군대가 바로 신라로 귀화한 연정토의 기병과 백제의 유민군이다  신라군과 합세하여 당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3회의 대전투 모두를 신라군이 대승을 거둔다. 결국, 당은 신라정복(한민족 정복)을 포기한채 평양성에 있던 고구려 황실과 대신일족등만 끌고 당나라로 돌아가게 된다. 신라는 고구려와 같은 한민족이기 때문에 후일 후고구려(고려)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연개소문의 부활 과  중국 정복 

 

앞에서 당군이 평양성을 직접 통치하지 못하고 고구려 황실일족만을 당으로 끌고갔다고 했는데 그럴수밖에 없던 이유는 아래로 신라가 있고 북으로는 고구려의 다른 지배지들이 아직 온전한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불가피 한 선택이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연개소문이 죽음으로써 고구려 황실은 멸망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구려영토의 지배지역 전체가 당에 복속되거나 멸망한 것은 아니라는 중대한 사실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때문에 당나라는 고구려 황실만을 끊으려 했을 뿐이었다.  이후 이지역은 연개소문에 의해 이지역의 왕으로 임명되었던 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에 의해  진국 즉 발해가 세워졌고, 안율복의 후손 야율아보기에 의해서는 구련(거란)이 세워졌으며 김누얼에 의해서는 금나라가 세워질수 있었으므로 결국 중국을 정복하여 근대까지 다스리게 된 발원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으로 연사(戀史)'에 “연개소문은 위대한 지도자로써 후일 돌궐의 태무진, 고선나의 구련(거란) 고려의 최영, 려진의 김누얼(누얼=누루하치)이 본받았는데 특히 자식들의 분열과 멸망, 비참한 종말은 자식세대들의 귀감이 되어 후대에 길이길이 교훈이 되어 이후에 이러한일이 다시 없었다(본토회복=중국정복)"고 기록되어 있다. (靑 구려연사 1-2)

 

 (고구려의 이러한 멸망후, 이 지역의 이러한 유기적관계에 대해 중국정권과 기자조선으로 개국이 허락된 이조정권은 편협한 동북공정사만을 정사로 선택해 가르치고 배워왔고 이러한 국사는 지금까지 초중고대학에 이르기까지 마치 사실인양 국사로 자리하게 되었는바. 국내 강단사학자들은 지금의 죽은 국사를 가르쳐 온 사실을 인정, 크게 반성하고 이제부터라도 객관적이고  상식적인 안목으로 국사를 재검토하여 재구성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필자는 이 기회를 통해 다시 한번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호소하는 바이다)

 

연개소문에 이러한 역사는 후손대에 귀감으로 전해져 돌궐(태무진:칭기스 칸)이 후손대에서 세계정복을 가능하게 했으며, 려진역시도 후손대에서 본토회복(중국정복)의 대업을 이루게 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고구려역사의 교훈적 의미가 역사적으로 큰의미있슴을 다시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할것이다.

 

우리나라 강화도에는 연개소문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는데, 이것은 연개소문가문의 고향이 강화도라는 증거가 될 것이다. 훗날, 북송 때 개혁의 주도자로써 연개소문을 존경했던 왕안석은 "당태종이 고구려에게 패하고 멸망에 직면했던 것은 오직 연개소문의 지도력 때문이었다'라는 평가를 했는데 이런 평가에 걸맞지 않게 정작, 우리나라에는 자료가 하나도 남아있지않을 뿐아니라 우리나라 강단사학계 그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한 평가를 바르게 내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 높은 이름, 백두산의 제국이란 뜻의 "구려"란 순 우리 높임말을 비하하여 정반대의 뜻인 싸구려~(불량하고 조잡한 물품)로 쓰고 있고, 심지어는 똥냄새나 방귀냄새를 뜻하는 "에이 구려~" 라고 쓰고있다는 현실은 우리 한민족이 얼마나 잘못된 국사를 가지고 있고, 배우고 있는지를 입증하는 산 증거요,바로미터라고 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 글을 읽은 후손들은 앞으로, 절대로 저런 말을 쓰지 말라 !

 

 

 

 

연개소문  

 

그의 조국, (백두제국) 고구려!

그의 가문의 성씨인 백두산의 천지 

 

 한민족의 후손인 그는, 한민족을 위해 대대로 충성스럽게 살다간 훌륭한 인재였다. 그러나 그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는그에 관한 전설만 있을뿐, 구 평양 서쪽에 묻혔다(연사)는 무덤마저 흔적없이 사라지고 지금까지 하나의 자료도 남아있지 않은바, 얼마나 철저하고 조직적으로 우리의 참역사가 훼손되었는지를 알수있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이는, 이조시대 때와 일제시대 때, 고조선  고구려(고려)시대의 자료들이 철저히 수집되어 소각, 조작, 반출 처분되었기 때문이라는 증언들이 상당히 많다는 점을 전하면서 백두제국,고구려의 지도자 "연개소문 편"을 여기서 줄이고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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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동아일보 2006.4.14

 

 

미국 코미디언 크리스 록은 세 가지 문장만 반복하면 어떤 여자와도 잘 지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바로 “그래?” “음.” “내가 그 사람 미쳤다고 그랬지?”다. 여자가 무슨 말을 하건 따지지 않고 맞장구를 쳐 주라는 것이다. 여자들은 감정 표현을 위해 말을 하기 때문이다.

대화전문가 이정숙(53·SMG대표) 씨는 이에 대해 남자와 여자가 서로 반대되는 뇌 모드를 가지고 있다는 사고체계 이론으로 설명한다. “남자는 인류 탄생 이래 사냥꾼이었고 여자는 집과 자식을 돌보는 파수꾼 역할을 맡아 왔다. 역할에 따라 사고체계도 달라졌다.”

○ 아내는 파수꾼의 뇌 모드

파수꾼 뇌모드의 여자들은 말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기보다 감정을 해소하려고 한다. “내가 왜 당신이랑 결혼했는지 몰라.” “동서는 어떻게 사람이 그래?” “있잖아, 내 친구 아무개…걔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라는 아내의 불평은 스트레스 해소용이다.

남편이 정색을 하고 대응할 필요는 없다. “맞아.” “당신이 서운했겠다.” “그래?” 정도가 적절한 반응이다.

또한 파수꾼의 뇌 모드는 상대편이 하고 싶은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골라 듣는다.

따라서 동창모임에 다녀온 아내가 “걔는 아주 명품으로 휘감았더라. 키가 작아서 하나도 안 어울리면서” “돈 좀 있다고 어찌나 잘난 척하는지 정말 아니꼬워서 못 보겠더라”고 툴툴거린다면 남편의 대답은 “당신도 부잣집에 시집갈 수 있었는데 나 만나서 고생만 하네. 그런데 그 친구는 좀 심했다. 당신이 기분 나쁠 만하네”여야 한다.

○ 남편은 사냥꾼의 뇌 모드

반면 사냥꾼의 뇌 모드는 직설적인 표현을 선호하며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지 못한다.

따라서 남편이 가사 분담을 하지 않아 결혼생활이 고달프다면 논리적으로 가사 분담을 요청해야 한다. 남편이 언젠가는 고생하는 것을 알아주리라 기대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또 남자들은 한 가지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 다른 것을 보지 못한다.

남편이 스포츠 중계를 본다거나 컴퓨터게임을 할 때 아내가 친정 동생의 결혼식 날짜를 가르쳐 주었다면? 남편은 “그래, 알았어”라고 대답하지만 전혀 아내의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남편이 몰두하던 일이 끝난 다음에 “중요한 말이 있어”라고 주의를 환기시킨 뒤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 고부 갈등, 파수꾼 뇌 모드의 충돌

두 명의 강력한 파수꾼인 아내와 어머니가 갈등한다면? 당연히 파수꾼 뇌 모드의 언어로 풀어야 한다.

아내가 시어머니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면서 불평할 때 남편이 “우리 어머니는 그런 분이 아니야. 당신이 오해한 거야”라고 한다면 불난 데 부채질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머니가 며느리의 흉을 늘어놓을 때 아들이 “그 사람 잘못이 아닌 것 같은데요. 어머니가 이해해 주셔야죠”라고 했다가는 어머니의 노여움만 산다.

아내와 어머니가 남편과 아들에게 듣고 싶은 말은 각각 “그건 어머니가 좀 심하셨네” “제가 그 사람한테 한마디 할게요”뿐이다.

“편을 들어서도 안 되며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골라서 해줘야 한다”는 이 씨의 조언이 너무 단선적인 것은 아닐까.

이 씨는 최근 발간한 ‘한 가지만 알아도 쉽게 풀리는 남녀대화법’(나무생각)에서 “그래도 남녀 간의 갈등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진경 기자 kjk9@donga.com

출처 - 조선일보 2006-02-28 03:25

퇴사요령 “어딜 가도 지금보다 낫겠지” 생각만으론 낭패

[조선일보 박순욱기자]

평생직장에 대한 개념이 무너지면서 이직이 일반화되고 있다. 감정적으로 ‘욱’하는 마음에 퇴사를 결정하는 것은 금물.

글로벌 헤드헌팅업체 ㈜아인스파트너 신경수 대표는 “목표 없이 퇴사하는 것은 경력관리에 문제가 되며, 옮기는 회사에서 전 직장에 평판조회를 하게 될 경우, 가고자 하는 회사의 최종 통지서가 불합격 통지서로 바뀔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퇴사 시 지켜야 할 행동 요령들이다.

①희망 퇴사일을 기준으로 최소 2~3주전에 퇴직 의사 밝혀야=갑작스런 퇴사 통보는 업무의 공백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업무 인수인계는 깔끔히 마무리해야, 전 직장 동료들과 마찰이 없다.

②직장 상사와 퇴사로 인해 문제가 불거지더라도 절대 싸워서는 안된다=흥분하거나 감정이 격해서 서로 원수처럼 헤어지는 것은 금물. 나중에 누군가 그들에게 나의 레퍼런스(평판조회)를 요청할 경우, 좋은 말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③전 직장 동료들과 관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행동한다=우리나라 인간 관계는 두세 명만 건너면 다 아는 사이다. 돈독한 사이로 남아있는 전 직장 동료는 나의 자산이다.

④확실한 마음의 결정이 있은 후 퇴사 의사를 밝혀야=불만 토로나 투정 정도의 수단으로 내리는 퇴사 결정은 바보 짓. 퇴사 의사를 밝혔을 때 경영진이나 상사가 만류하더라도 뿌리칠 수 있을 만큼의 확실한 이유가 있을 때 퇴사를 단행하라.

⑤좋은 회사, 좋은 환경을 동경하며 퇴사하지 마라=‘어디를 가도 지금보단 낫겠지’ 하는 생각으로 퇴사한다면, 잘못된 행보의 시작이다. 이미 만들어 놓은 좋은 회사를 동경하기보다는 지금 현재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를 좋은 회사로 만들어 보겠다는 포부를 가져라.

(박순욱기자 [ swpar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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