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wifi
출처 :http://blog.naver.com/lcylcynv?Redirect=Log&logNo=150106557062
1.
유무선 인터넷 공유기와 노트북,스마트폰,와이파이기기와  연결법을 알아본다-유선 연결은 쉽지만, 무선 연결은 보안문제가 있기 때문에 공유기와 수신기간에 동일한 설정을 해야 연결된다,-공유기와 다양한 와이파이기기을 연결할 수 있기 때문에 모두 설명은 어렵고 xp를 사용하는 노트북과 연결법을 설명한다-기본만 이해하면 타 와이파이기기도  연결할 수 있다

2.에니게이트 rg5300n 과 노트북연결예입니다

1)에니게이트 rg5300n 설정--본인경우는 무선기본설정 에서 ssid(공유기이름)를" lcy "로 변경하였고,

        무선보안설정은 다음과같이했음 


 

 

2)노트북 설정--바탕화면/내네트워크환경/속성/무선네트워크연결/속성 에서---lcy를 더블클릭

 

----/연결정보에서

--네트워크인증,데이터 암호화를 공유기와 도일하게하고,

--네트워크키는 공유기의 공유키=abc1234 를 기입한다

--키가자동으로 공급됩에 체크해두면 연결시 암호란에 자동표시됨으로 암호기입 불요합니다 


---/인증은 설정없음

 

 

---/연결은 아래와같이한다


공유기 매립


공유기 설정
출처 -http://allwaysreview.tistory.com/193


 

안녕하세요 언제나맑음입니다 .

이번에 소개할 제품은 EFM ipTIME의 심플한디자인의 11n지원 유무선 공유기 N604A입니다.

이번에 출시한 N604A의 특징은 300Mbps 무선링크 속도와 실효 무선속도 90Mbps성능을 제공하여 100Mbps의 광랜의 완벽한지원은 물론 무선속도면에서도 최상의 품질을 제공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또한 SMA 무선 커넥터를 체택하여 기본 제공되는 4dBi의 안테나로의 사용도 가능하지만 수신감도가 더 좋은 안테나를 추가 구입하면 보다 넒은 지역으로의 무선 수신을 할 수 있도록 설계 되었습니다.


 


세로로 설치 할 수 있는 크래들 제공



위 사진과 같이 공유기의 홈에 크레들을 공유기 밑에서 부터 결합니다.



 

그후 공유기를 크래들 중앙쪽으로 밀면 딸깍 소리와 함께 크래들과 공유기 결합됩니다.



 

구성품은 각종 가이드 및 전원 어뎁터, 렌선,크래들,공유기본체, 4dBi 안테나 2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깔끔한 내부 모습

 

각포트별 연결 상태와 동작을 표시해주는  BLUE LED


MNC H7210DG 랜 모듈



SMA 무선 커넥터


 

색으로 뚜렷하게 구별되는 LAN포트





 

ipTIME N604A 연결시 이쁜 BLUE LED가 각 포트의 연결생태와 제품의 작동상태를 알려줍니다. 

 


가로형식으로의 제품 설치


 

세로형식로의 제품설치 예시

세로 형태로 설치하면 보시는것과 같이 공간 활용면에서는 이점이 있으나 제품 뒷면의 전원과 LAN 케이블의 모습이 들아나게 되어서 미관상은 좋치 않네요 그래도 좁은 책상을 보다 넒게 쓰기에는 좋겠죠?



연결 설정을 보면 기본 게이트웨이가 192.168.0.1로 설정되어있는걸 볼 수 있습니다. 어느 공유기나 기본게이트웨이 주소가 공유기 설정페이지를 나타냄으로 해당 주소를 인터넷창 주소에 입력하면 다음과 같은 화면을 볼 수 있습니다.



위 처럼 인터넷창의 주소창에 기본게이트웨이 주소인 192.168.0.1를 입력하면 공유기 설정화면이 나타납니다.



먼저 관리도구 메뉴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관리도구 버튼을 클릭하면 현재 공유기의 상태를 볼 수 있는 시스템 요약 정보 화면을 볼 수 있습니다.
해당 정보를 살펴보면 현재 인터넷 연결방식과 무선인터넷 SSID와 암호화 방식등의 정보와 현재 펌웨어 버전 정보를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제품테스트를 하기전에 펌웨어 업데이트를 진행 후 설정페이지 캡쳐를 해서 최신버전인 7.60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펌웨어 업데이트 방법은 이후 소개 하도록 하겠습니다. 처음 제품을 구입하면 펌웨어 버전은 7.46임으로 꼭 펌웨어 업데이트를 하시고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인터넷 연결설정

본 화면은 공유기 인터넷에 접속하기 위한 방법을 설정하는 화면으로 기본적으로 FTTH등의 유동아이피를 자동으로 할당받는 경우에는 별도의 설정이 필요없습니다. 하지만 ADSL등의 사용자 인증을 해야하는 PPPoE방식등은 해당 방식을 선택하고 ID와P/W를 입력하셔야 인터넷 접속이 가능합니다. 또한 기업등의 고정IP를 사용하는 환경에서는 고정 IP 사용자를 선택하여 IP설정을 따로 해주셔야 인터넷 접속이 가능합니다.



무선 설정/보안

본 화면에서는 무선인터넷 사용유/무와 SSID설정과 암호화 방식,사용 체널 설정등을 할 수 있습니다.



펌웨어 업그레이드

본 화면에서 펌웨어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습니다. 제공되는 방식은 자동 업그레이드와 수동 업그레이드 방식을 지원하고 있으며 말그대로 자동업그레이드를 선택하면 EFM의 서버에 적용되어있는 해당공유기의 최신 펌웨어를 자동으로 다운로드 받아 설치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고 수동업그레이드는 EFM 홈페이지에서 해당 모델의 펌웨어 파일을 PC로 다운로드 받아 공유기로 업로드하여 펌웨어 업그레이드를 진행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동 업그레이드를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해당기능이 사용 불가 하지않는 한은 손쉬운 자동 업그레이드를 추천드립니다.

처음 제품을 받아보면 위 처럼 7.46버전의 펌웨어 버전이 적용되어있는걸 볼 수 있습니다.
자동 업그레이드 실행하기 버튼을 클릭하여 자동 업그레이드를 진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동 업그레이드 버튼을 클릭하면 위 처럼 upgrade.exe 파일을 다운로드 할 수 있는 창이 나타납니다. 따로 저장을 하거나 해당 창에서 실행 버튼을 클릭하여 다운과 해당 프로그램을 실행 합니다.



해당 펌웨어 업그레이드 프로그램이 실행되면서 최신펌웨어 버전과 업그레이드 유무를 물어보는 대화상자가 나타납니다.
펌웨어 업그레이드를 위해서 예(Y) 버튼을 클릭하고 업그레이드 프로그램 설치를 완료하시면 됩니다.



펌웨어 업그레이드가 완료되고 나면 위 화면처럼 업그레이드 하고자 했던 버전인 7.60으로 펌웨어가 업그레이드 된걸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설정마법사를 통한 인터넷연결 설정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지원하는 방식은 자동 연결방식과 수동 연결방식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우선 자동 연결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WAN의 상태를 자동으로 감지하여 현재 WAN의 인터넷 연결에 필요한 정보를 묻는창을 자동을 선택하여 줍니다.



현재 WAN의 연결방식을 감지하여 인터넷에 연결을 시도합니다. 저는 FTTH를 사용하여 유동IP를 할당받아 사용는 방식임으로 공유기에서 유동IP를 할당 받는 중입니다.



인터넷 연결에 성공하면 현재 연결된 정보를 보여주며 해당 설정 저장과 마법사를 종료 할 수 있는 버튼이 나오고 인터넷 연결설정이 완료 됩니다.



수동으로 인터넷 연결방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자신의 인터넷 연결방식을 정확하게 알고 있으시면 수동 설정을 하셔도 되지만 번거로움도 있으니 자동설정을 추천드립니다.



첫 화면은 어떤 방식으로 인터넷에 접속할 것인가를 물어보는 화면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유동IP를 할당받아 사용하는 DHCP 방식임으로 해당 방법을 선택하고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WAN의 MAC주소를 설정 할 수 있는 화면이 나타납니다. 해당 내용을 묻는 이유는 일부 환경에서는 지정된 MAC 주소만이 인터넷에 접속 할수 있게 설정되 있는경우도 있기때문에 현재 사용하는 PC의 MAC주소를 수동으로 입력하여 인터넷에 공유기가 아닌 PC가 접속해 있는것 처럼 설정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 가정 환경에서는 자동으로 입력으로 선택되어 있는대로 다음 클릭!!



이렇게 해서 마법사를 통한 인터넷연결을 모두 알아 보있습니다.


무선 연결 마법사를 통한 무선 인터넷 설정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으로는 사용하고자 하는 국가를 선택하는 화면이 나옵니다. 사용 국가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는 화면상의 안내글에 명확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SSID 설정화면 입니다. SSID명은 무선기기에서의 해당 무선망의 ID를 의미합니다. 다똑같은 이름이면 자신의 무선망을 찾지 못하겠죠? 편하게 자신이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ID를 입력하시면 됩니다.



입력하신 SSID가 기존 운영되고 있는 무선망에 중복되진 않은지 중복검사 버튼을 눌러서 주변의 무선망의 SSID과 중복여부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주변의 무선망을 검색하여 최적의 체널을 자동으로 감지해 줍니다. 중복으로 사용하는 사용자가 많이 있지 않으면 공유기 설정에 따라서 다음버튼을 클릭!



여기까지가 무선랜의 연결에 대한 기본설정입니다. 본인이 선택한 설정을 확인하는 창이 나타납니다. 다음클릭!



이제 사용하고자 하는 무선인터넷 보안 방식을 선택하는 창이 나타납니다. 위를 잘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기본 설정되어 있는 WPA 기반의 보안방식을 선택하시는게 좋습니다. 하지만 개방형 무선망을 구축하여 아무나 사용하고자 한다면(사업장의 고객 서비스용도)를 설정하시려면 무선 보안을 사용하지 않음을 선택하셔야 합니다.



 

WPA기반의 보안에도 TKIP방식과 AES방식으로 암호화 방식이 나뉘게 되며 일반적인 사용환경이라면 요즘 출시되는 무선랜카드가 11n기반임으로 최적의 사용을 하시려면 AES를 사용하셔야 합니다.


 

해당 SSID에 암호를 설정하는 화면 입니다. 8자리 이상으로 구성되어야하며 본인이 기억하기 쉬운 암호를 설정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무선설정마법사를 통한 무선인터넷 설정에 대해 모두 알아 보았습니다.


ipTIME의 공유기 설정은 모든 사용자들이 손쉽게 사용 할 수 있도록 자세하고 손쉽게 각 모드별 마법사를 지원하여 보다 쉽게 공유기 사용기 가능합니다.



 


공유기 미설치 유선



공유기설치 유선




공유기 설치 무선


공유기 설치 전과 공유기 설치 유선의 속도차이는 거의 없으며 무선속도면에서도 제가 테스트로 사용한 무선랜카드가 ipTIME N150UA로 최대 무선링크속도 150Mbps를 제공하는 제품임을 가만하고도 약 80Mbps 인테넷 속도를 보여줬습니다.
무선링크속도 300Mbps를 제공하는 무선랜을 이용하면 제품 스펙상의 무선 유효속도 90Mpbs의 속도가 제대로 나올꺼 같습니다
.


장점

1. 인터넷 속도 100Mbps 완벽 지원
2. 무선링크속도 300Mbps지원으로 무선실효 90Mbps 제공
3. 4dBi 2EA 지원 및 SMA 무선 커넥터 제공으로 보다 넒은 무선 수신거리 제공

단점

1. 안테나 고정이 다소 약하게 고정됨
(안테나를 움직이면 풀려버리는 정도, 단단하게 조일수는 있으나 무선 커넥터의 위치상 다소 번거로움)

이번에 소개한 EFM ipTIME의 11N지원 유무선 공유기 N604A는 제품의 브랜드이미지와 함께 최상의 인터넷 네트워크를 구출 할 수 있으며 펌웨어 자동 업그레이드를 제공하고 초보 사용자들에게는 다소 어려울수 있는 공유기 세팅등을 마법사를 통해 간결하면서 안전하게 설정 할 수 있도록 한것이 좋아 보입니다. 또한 흰색의 심플한 디자인과 BLUE LED의 은은하면서 깔끔한 디자인도 마음에 드는 점입니다.

이상으로 EFM ipTIME N604A 유무선공유기의 필드테스트를 마치겠습니다.


본 리뷰는 EFM과 다나와에서 진행한 필드테스트 모집에 선정되어 작성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posted by ★언제나맑음★ http://allwaysreview.tistory.com/ [언제나 맑은 리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출처 - http://snpbox.tistory.com/


오래전부터 머리속에 구상해왔던 내용인데 드디어 오늘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했던 하드에서 설치하기 방식을 제시해드립니다. 하드에서 설치하기 방식중에 이보다 더 편리한 방법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단 주의해야할 부분이 조금 있으니 꼭 내용을 정확히 숙지하시고 실행에 옮기시기 바랍니다.



1. 준비하기

먼저 윈도우 XP 원본을 하드에 복사합니다. 이때 다른건 다 필요없고 I386 폴더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C 드라이브 하나만 존재하는 경우 이 방법을 권해드리지 않습니다. 원본을 C에 두면 설치시 C를 포맷할 수 없으니까요. 웬만하면 C가 아닌 드라이브에 원본을 복사해주세요. 저는 D 드라이브에 두겠습니다. 이때 반드시 원본은 루트에 위치해야 합니다. 폴더 안에 넣으면 안되고 드라이브에 들어갔을 때 바로 보이는 위치에 I386 폴더가 존재해야 합니다.

다음은 아래 파일을 압축 풀어서 I386 폴더와 동일한 위치에 둡니다.


아래 그림처럼 I386 폴더와 제가 첨부해드린 파일 3개가 같은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이제 준비하기 파일을 실행합니다. 윈도우 XP 사용자는 그냥 더블클릭 하시면 되고 윈도우 비스타나 세븐 사용자는 우클릭 해서 관리자 권한으로 실행해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잠시 작업을 한 후 아래 그림처럼 바뀝니다.



이대로 재부팅 하면 윈도우 XP 설치하기 메뉴가 뜨는데, 이대로 설치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아쉽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무인설치 응답파일을 구성해야만 합니다.



2. 무인설치 응답파일 구성하기

저는 순수 XP를 권장합니다. 개인이 만든 트윅 버전에 대해서는 성공적인 설치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무인설치 응답파일 때문입니다. 그리고 $OEM$ 배포폴더 문제도 있습니다. $OEM$ 배포폴더를 사용하지 않는 트윅 버전의 경우 별다른 문제가 없습니다. $OEM$ 배포폴더를 사용하는 트윅 버전에 대해서는 추후에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만약 트윅 버전을 원본으로 하셨다면 $WIN_NT$.~BT 폴더에 들어가보세요. WINNT.SIF 파일이 존재할겁니다. 그 파일을 메모장으로 열어서 편집해야 합니다.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합니다.

[Data]
    MsDosInitiated=1

위 부분은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저 부분이 No 또는 0 으로 되어있을텐데요, 무조건 1로 변경합니다. 그래야 하드에서 설치가 가능합니다.


[Unattended]
    UnattendMode=FullUnattended
    OemSkipEula=Yes
    OemPreinstall=No
    UnattendSwitch=Yes
    TargetPath=\WINDOWS
    FileSystem=*
    DriverSigningPolicy=Ignore
    NonDriverSigningPolicy=Ignore

위 부분은 절대로 들어가면 안됩니다. 반드시 [Unattended] 섹션 전체를 삭제해주세요. 그러지 않으면 설치 원본이 있는 파티션에 윈도우 XP를 강제로 설치해버립니다. 파티션 선택권이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Unattended] 섹션 전체를 삭제해주시기 바랍니다. 두번이나 강조했으니 실수하시는 분들 없기를 바랍니다.

위 2가지 사항만 주의하시면 무인설치 응답파일에선 문제가 없을겁니다.


순수 XP로 설치하시는 분들은 무인설치 응답파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메모장으로 하나 만드셔야 하는데 만약 모든 과정을 수동으로 진행하고 싶다면 위 파란색 부분만 만드시면 됩니다. 하지만 시디키 입력 정도는 자동으로 해두는게 좋겠죠? 그렇다면 최소화된 샘플은 이정도가 되겠네요.

[Data]
    MsDosInitiated=1

[UserData]
    ProductKey=XXXXX-XXXXX-XXXXX-XXXXX-XXXXX


저렇게 메모장으로 만든 다음 $WIN_NT$.~BT 폴더 안에다가 WINNT.SIF 라는 이름으로 저장합니다. 이때 반드시 저장 형식을 모든 파일로 지정하세요. 그러지 않으면 뒤에 TXT 확장자가 붙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게 끝입니다. 간단하죠? 이제 윈도우를 재시작 하면 윈도우 XP 설치하기 메뉴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3. 포맷은 어떻게 하는가?

아마 대부분 설치시 C 드라이브를 포맷하려고 하실겁니다. 그런데 C를 파티션 삭제하고 설치하는건 비추합니다. 왜냐하면 이상하게 XP에선 그렇게 하니 새로 만드는 파티션을 논리 드라이브로 잡아버리더군요. 그렇게 되면 두번째 파티션에 부팅 파일이 심어질 수 있습니다. 저는 부팅 파일은 항상 첫번째 파티션에 윈도우와 함께 존재해야 편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웬만하면 파티션 삭제 기능으로 포맷하는 방법은 피하시길 권장드립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포맷을 하는가? 걱정마세요. 이미 C에 윈도우가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C를 선택하면 포맷을 할거냐고 물어보게 됩니다. 간혹 물어보지 않는 경우도 있기는 있지만 대부분은 물어봅니다. 그런데 이게 경우에 따라 화면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납니다. 두번만에 끝나는 경우도 있고 서너번만에 끝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쨌든 한글로 나오니까 화면에서 시키는대로 따라만 가면 쉽게 포맷할 수 있습니다.







4. 트윅 버전은 어떻게 하는가?

저는 순수 XP를 권장하지만 경우에 따라 AHCI/RAID 드라이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트윅 버전을 사용하거나, 또는 직접 드라이버를 통합해서 사용하는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DriverPacks로 통합한 윈도우는 루트에 OEM 폴더가 존재하는데요,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그냥 OEM 폴더를 XP 설치원본과 같은 위치에 두시면 됩니다.



텍스트모드에 통합된 AHCI/RAID 드라이버는 어떻게 되냐구요? 걱정마세요. 제가 첨부해드렸던 파일은 알아서 텍스트모드에 통합된 드라이버 파일도 부팅폴더에 복사해주기 때문에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개인이 트윅한 윈도우의 경우 $OEM$ 배포폴더가 들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OEM 폴더랑 $OEM$ 폴더는 다릅니다. 이놈은 저렇게 루트에 두시면 안되고 $WIN_NT$.~LS 폴더 안에 넣어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추가 프로그램이나 테마같은 것들이 정상적으로 설치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부터 시작됩니다. $OEM$ 배포폴더를 사용하려면 무인설치 응답파일에

[Unattended]
    OemPreinstall=Yes

부분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배포폴더가 작동합니다. 그런데 제가 무인설치 응답파일에서 [Unattended] 섹션이 없어야만 파티션 자동설치를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위 섹션이 한줄이라도 들어가면 무조건 설치시 원본이 있는 파티션에 강제로 설치되어 버립니다.

이 문제점을 피하려면 방법이 하나 있기는 있습니다. 바로 설치 원본을 크기가 아주 작은 파티션에 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임시로 XP 설치용으로 쓸 1GB 정도 크기의 파티션을 만듭니다. 그럼 원본이 들어가고 용량이 400mb 정도 남을텐데 윈도우가 자동으로 여기에 설치하려다 공간이 부족하다면서 다른 곳에 설치하도록 유도해줍니다. 거기서 C 드라이브를 선택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해드리겠습니다. 트윅 버전의 경우 원작자의 의도대로 구성요소가 전부 설치되기 위해서는 $OEM$ 배포폴더를 사용해야 하는데, 이걸 사용하려면 무인설치 응답파일에 [Unattended] 섹션이 들어가야 하고, 이 섹션을 사용하면 설치시 파티션 선택을 못합니다. 그걸 우회하려면 1GB 정도 되는 파티션에 설치 원본을 두면 된다는 뜻이구요.

저렇게 트윅버전을 설치하실 분이라면 WINNT.SIF 파일에서 다른건 원본 그대로 다 두고 MsDosInitiated 부분만 1로 잡아주세요.

위 문제 외에도 트윅 버전의 경우 특성상 하드설치 방식 자체에서 문제점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제작자가 어떻게 만들었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그러니까 웬만하면 순수 윈도우를 사용하시고, 정 안되면 드라이버만 통합된 윈도우를 사용하세요. $OEM$ 폴더가 포함된 트윅버전은 여러모로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5. 마무리

나중에 XP 설치가 다 끝나면 설치를 위해 복사해두셨던 파일들은 지우시면 됩니다. $WIN_NT$.~LS 폴더와 $WIN_NT$.~BT 폴더, 그리고 TXTSETUP.SIF 파일은 웬만하면 자동으로 없어집니다. 나머지 6가지 파일만 수동으로 삭제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만약 C에 설치하지 않았거나 C를 포맷하지 않아서 멀티부팅 메뉴에 XP 설치하기가 계속 뜬다면 그건 boot.ini 파일을 수동으로 편집해주셔야 합니다. 이거 설명하려고 또 숨김파일, 읽기전용, 폴더옵션 이야기 꺼내려니 힘드네요. C에 파일이 있다고 가정하고, 보조 프로그램에 있는 명령 프롬프트를 띄운 다음 아래와 같이 입력해보세요.

attrib c:\boot.ini -r -h -s
notepad  c:\boot.ini

그럼 메모장으로 파일이 열릴겁니다. 하단에 있는 C:\setxp.mbr="윈도우 XP 설치하기" 부분을 삭제하고 저장해주시면 됩니다.



※ 요약정리

순정 XP의 경우
1. 하드에 I386 폴더를 복사한다.
2. 첨부파일을 실행한다
3. 메모장으로 WINNT.SIF 파일을 만들어 $WIN_NT$.~BT 폴더 안에 넣는다.

트윅 XP의 경우
1. 하드에 I386 폴더를 복사한다.
2. 첨부파일을 실행한다.
3. WINNT.SIF 파일에서 MsDosInitiated 값을 1로 수정한다.
4. OEM 폴더가 있다면 루트에 같이 복사해준다.
5. $OEM$ 폴더가 있다면 $WIN_NT$.~LS 폴더 안에 넣는다.
대신 $OEM$ 폴더가 있다면 원본이 있는 파티션 크기를 1GB 정도로 잡아줘야 설치시 파티션 선택이 가능하다. 그럴 생각이 없다면 [Unattended] 섹션을 지워야 하는데 그러면 $OEM$ 설치가 되지 않는다. 선택은 각자의 몫.
출처 - 스누피 http://snpbox.tistory.com/1350

1. 왜 하드에서 설치하나?


하드에서 설치하면 어떠한 장점이 있을까요? 우선 DVD나 USB보다 하드에서 설치하는 편이 훨씬 빠르고 편리합니다. 또한 DVD 부팅이 불가능한 노트북이나 넷북에서 사용하면 매우 편리합니다.

물론 이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일반 프로그램을 설치하듯이 윈도우 상에서 바로 설치를 시작해도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 C 드라이브를 포맷하고 깨끗한 상태로 설치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32비트 윈도우상에서 64비트 윈도우를 설치할 수 없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물론 전자의 경우 C를 포맷하지 않고 그냥 C에 설치한 다음 나중에 디스크 정리 도구를 통해 Windows.OLD 폴더를 날려버리면 됩니다. 또한 후자의 경우도 32비트 설치 원본에 64비트 Install.wim 파일만 넣어주면 설치가 가능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윈도우 설치의 묘미는 깔끔하게 포맷했을 때의 상쾌함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저는 비트에 상관없고 현재 OS 종류에 상관없이 C를 포맷하고 설치할 수 있는 이 방법을 추천합니다.



2. 윈도우 7 원본 하드에 복사하기

먼저 윈도우 7을 하드에서 설치하려면 원본을 하드에 복사해야겠지요? 원본을 하드에 복사하실 때 다 복사할 필요는 없고 다음 3가지만 복사하시면 됩니다.



BOOT, SOURCES 폴더와 bootmgr 파일입니다. 이 3가지를 하드에 복사하는데 주의하실 점은 반드시 루트에 복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루트에 복사하라는 말은 폴더 안에 넣지 말고 드라이브에 들어갔을 때 바로 보이는 위치에 두라는 것입니다. 저는 D 드라이브 루트에 복사하겠습니다.

복사를 다 하셨다면 방금 복사한 파일중에 bootmgr 파일의 이름을 snoopy로 변경합니다. 왜 변경해야 하는지는 나중에 그 이유를 설명드리겠습니다.




3. 설치를 위한 부팅 메뉴 작업

우선 아래 파일을 다운로드 받아 압축을 풉니다.


압축을 풀면 3개의 파일이 나옵니다. 사실 윈도우 비스타나 세븐 유저라면 설치하기 파일 하나만 있어도 됩니다. 나머지 2개의 파일은 GRUB를 편집한 것인데 윈도우 XP 유저들에게 필요한 파일입니다.

어쨌든 설치하기 파일을 실행하시면 되는데 XP 유저들은 그냥 더블클릭 하시면 되지만 윈도우 비스타나 세븐 유저라면 우클릭 해서 관리자 권한으로 실행해주셔야 합니다.



이게 끝입니다. 매우 간편하죠? 이제 시스템을 재부팅 하시면 본격적으로 윈도우 7 설치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XP 유저들은 멀티부팅 메뉴가 나타납니다. 그 메뉴에서 윈도우 7 설치하기 를 선택하시면 됩니다.



윈도우 비스타나 세븐 유저들은 멀티부팅 메뉴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냥 바로 설치 과정이 진행됩니다. 제가 이렇게 처리한 이유는 지난번에 멀티부팅 메뉴에 표시되도록 해놨더니 나중에 그 메뉴를 삭제하는 방법을 물으시는 분들이 너무 많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처리했습니다. 따로 멀티부팅 메뉴가 등장하지 않고 1회만 설치 메뉴로 바로 들어갑니다. 만약 본의아니게 설치 과정으로 들어가셨다면 초기 화면에서 그냥 설치를 종료시켜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원래 윈도우로 다시 부팅됩니다.



※ 주의 사항

제가 예전에 한번 이 실수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정신을 어디에 팔아먹고 그랬는지... ㅠㅠ 하드에서 설치하기 방식은 설치 원본이 하드에 있습니다. 따라서 파티션 선택 화면에서 드라이브를 포맷하신다면 주의를 해야 합니다. 드라이브를 잘 보고 포맷하세요. 만약 설치 원본이 들어있는 위치를 포맷해버리면... 당연히 설치는 거기서 끝입니다. 원본이 사라졌으니 더이상 설치를 진행할 수 없게 되겠지요.



기본 사용법 끝



여기까지는 기본 사용법이었고 이제 추가 설명을 좀 드리겠습니다.


1. 왜 bootmgr 파일 이름을 snoopy로 변경하나?

두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XP의 경우 혹시라도 하드에 bootmgr 파일이 존재할까봐 그것과 구분해주기 위해 변경합니다. 예전에 한번 비스타나 세븐을 설치했다가 다시 XP로 돌아온 경우 혹시라도 bootmgr 파일이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가 GRUB에서 일부러 snoopy 파일이 로딩되도록 설정해뒀기 때문에 반드시 변경해야 합니다.

비스타나 세븐 유저의 경우 사실 bootmgr 파일 자체가 필요없기는 한데, DVD를 넣은 상태에서 설치하기 파일을 실행한 경우 정상적으로 처리되지 않기 때문에 일부러 DVD와 구분해주기 위해 snoopy로 변경하도록 했습니다. 이건 일종의 태그 파일이라 볼 수 있는데 윈도우 XP CD를 보시면 루트에 WIN51로 시작하는 파일들이 몇개 들어있습니다. 그거 열어보시면 안에 별거 없습니다. 안에 Windows 라고 달랑 한줄 들어있죠. 하지만 그 태그파일들을 모조리 삭제하면 XP 설치를 할 수 없습니다. 설치 과정에서 해당 태그 파일을 찾음으로 인해 설치 CD임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도 snoopy 파일이 존재하는 위치가 BOOT 폴더와 SOURCES 폴더가 복사된 설치 원본 위치임을 인식하도록 처리를 했습니다.



2. 설치가 끝났다면?

윈도우 7 설치가 끝났다면 설치를 위해 하드에 복사해뒀던 BOOT, SOURCES 폴더와 snoopy 파일은 더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삭제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XP 유저들의 경우 XP 파티션을 포맷하지 않고 설치한 경우 멀티부팅 메뉴가 뜰 수 있습니다. 아래 그림처럼 메뉴가 뜰텐데 이 메뉴를 삭제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시작메뉴 보조 프로그램에 있는 명령 프롬프트에 우클릭 해서 관리자 권한으로 실행합니다.



그런 다음 아래 명령어를 넣어주시면 됩니다.

bcdedit /delete {ntldr} /f




만약 위 메뉴를 삭제하지 않고 기존 XP랑 멀티부팅을 그대로 유지하실 생각이라면 "이전 버전의 Windows" 라는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변경할 수도 있습니다. 똑같이 관리자 권한으로 명령 프롬프트를 띄우신 다음

bcdedit /set {ntldr} description "Windows XP Professional K SP3"


위와 같은 형식으로 메뉴 이름을 변경할 수 있습니다. 큰 따옴표 안에 들어갈 이름은 각자 수정해서 쓰시면 되겠죠.


그런데 이런 분들이 또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XP 멀티부팅 이용하는건 좋은데 XP 메뉴를 선택했더니 "윈도우 7 설치하기" 메뉴가 또 등장해서 불편하다고. 그런 분들은 boot.ini 파일에서 해당 부분을 삭제해줘야 하는데 과정이 조금 번거롭습니다.

일단 boot.ini 파일은 숨김, 읽기 전용, 시스템 파일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탐색기에선 기본적으로 보이지가 않습니다. 폴더 옵션에서 보이도록 체크하시거나 Attrib 명령어로 속성을 변경하시면 되는데 저는 폴더 옵션 변경으로 설명드리겠습니다.




위 그림처럼 설정하시면 boot.ini 파일이 보일 것입니다. 그 파일에 우클릭 한 다음 읽기 전용 속성을 풀어줍니다.




이제 이놈을 메모장으로 편집해야 하는데 관리자 권한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메모장에 우클릭 해서 관리자 권한으로 실행합니다.



파일 - 열기 해서 boot.ini 파일을 찾아야 하는데 그냥은 안 보이겠죠. 파일 이름 옆에 있는 텍스트 문서를 모든 파일로 변경해줘야 파일이 보이게 됩니다.




이거 일일이 설명드리기 참 힘드네요. 별거 아닌데도 초보 분들한테는 그림이 꼭 있어야 되니 ㅠㅠ
마지막으로 하단에 있는 메뉴 부분을 삭제하고 저장하시면 끝납니다.

c:\setw7.mbr="윈도우 7 설치


아마 저렇게 되어 있을 것입니다. 저 부분을 삭제하고 저장하시면 더이상 설치 메뉴가 뜨지 않습니다.



3. 기존 글에서 소개한 방법보다 나은 점은?

XP의 경우 
버추얼 FDD 방식은 시스템에 따라 에러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직접 XP 부팅 메뉴에 추가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그 글에선 C 드라이브에 boot.ini 파일이 있는 경우에만 자동으로 처리가 되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드라이브에 boot.ini 파일이 있더라도 자동으로 처리를 해줍니다. 물론 XP 유저라면 C에 있는게 일반적이겠지만요. 또한 기존에는 메뉴 파일이 포함되어 GRUB 파일이 총 3개였는데 이번엔 하나 줄여서 2개로 해결했습니다.

비스타, 세븐 유저의 경우 영문판 사용시 부팅 메뉴에 등록되지 않는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기존 PE관련 글도 거의 다 스크립트를 수정했는데 토큰 부분을 for /F "tokens=1-3" 으로 수정해서 영문판 사용시 {GUID}가 세번째에 반환되던 부분도 문제 없도록 처리했습니다. 또한 멀티부팅 메뉴에 등장하지 않고 1회성으로 바로 설치 메뉴로 들어가게 만든 것도 나름 발전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재 사용하는 OS에 상관없이 이 글 하나로 다 처리할 수 있도록 통일했다는 점도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이제 더이상 하드에서 설치하기 글은 포스팅하지 않아도 될 듯 하네요. 이 글 하나로 다 정리가 됩니다. ^^
출처  http://snoopybox.co.kr/trackback/1293

1. snoopy는 왜 VHD 부팅을 사용하는가?


VHD는 가상 하드디스크입니다. 저는 이 가상 하드디스크 안에 윈도우 7을 설치하여 사용합니다. 왜 물리 하드가 아닌 가상 하드에 윈도우를 설치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유지, 보수, 관리를 매우 효율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판 신공을 사용해보겠습니다.


왼쪽 그림은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방식입니다. 파티션을 분할하여 C 드라이브에 OS를 설치하고 나머지 공간은 자료 보관용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오른쪽 그림은 현재 제가 사용하고 있는 방식입니다. 파티션을 나누지 않고 VHD 파일을 하나 만들어 그 안에 윈도우를 설치해서 사용합니다.

이렇게 VHD라는 테두리 안에 윈도우를 설치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장점을 몇가지 적어보겠습니다.

  • 윈도우를 설치할 때 파티션을 나눌 필요 없이 있던 하드 안에 VHD 파일만 새로 하나 만들어 설치하면 된다.
  • 그렇기 때문에 윈도우를 설치할 때 포맷을 하기 전 자료를 다른 곳으로 백업할 걱정을 안 해도 된다. 그냥 가상 디스크를 하나 만들어 거기에 설치하면 끝이다. 마치 하드디스크를 추가로 구매하여 거기에 설치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 마찬가지로 멀티부팅의 경우도 파티션을 나누거나 추가 하드를 필요로 하지 않고 여러개의 VHD 파일을 만들어 각각에 윈도우를 설치하면 된다.
  • 설치된 윈도우를 삭제하는 일은 매우 쉽다. 기존 방식에선 멀티부팅을 구성한 경우 OS를 삭제하는 일이 간단하지 않다. 특히나 삭제하려는 OS가 부팅 파일이 존재하는 시스템 파티션에 설치되어 있는 경우 문제는 복잡해진다. 해당 파티션을 포맷하면 다른 OS로도 부팅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VHD 부팅에선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불필요한 OS가 있다면 VHD 파일만 삭제해버리면 끝이다. 매우 간단하다.
  • Expandable 방식의 VHD는 공간 활용 면에서 효율적이다.
  • Differencing VHD는 VHD의 꽃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에 이어서 설명하겠다.
  • Sysprep으로 일반화 봉인해두면 동일 VHD 파일을 다른 PC에 옮겨서도 부팅할 수 있다.
  • OS가 VHD 파일 하나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시스템 백업과 복구 역시 그 파일 하나만 백업해뒀다가 교체해버리면 된다. 고스트나 트루 이미지 등 사설 복구 프로그램이 필요하지 않다.
대충 생각나는 장점들을 이렇게 나열해봤습니다. 하지만 VHD의 진정한 꽃은 바로 Differencing VHD입니다. 이 방식은 활용하기에 따라 무한한 확장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을 보여줄 것입니다.



2. VHD 종류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VHD 파일에는 크게 3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 Fixed
- Expandable
- Differencing

Fixed는 고정 크기 방식입니다. VHD 파일은 처음 생성할 때 그 크기를 지정해줄 수 있습니다. Fixed 방식에서는 일단 크기가 정해지면 해당 크기만큼 실제 하드디스크 안에서 공간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영역을 미리 할당해두는 것인데 그림은 필요없겠지만 그래도 대충 그려보자면



Expandable은 동적 확장 디스크입니다. 사용된 크기만큼 점점 증가하는 형태입니다. 일반적으로 VMware나 버추얼 PC 등에서 가상 하드를 생성할 때 이 방식이 주로 사용됩니다. VMware에 XP를 설치할 때 40GB를 할당했는데 실제로 하드 용량이 40GB 줄어들지는 않죠? 그 이유는 XP가 설치된 용량만큼만 감소했기 때문입니다.



이번엔 오늘의 하이라이트 Differencing 방식입니다. 이 방식에는 부모 VHD 파일과 자식 VHD 파일이 존재합니다. 자식 VHD 파일은 부모 VHD 파일의 내용물을 그대로 전수받으면서 차이점만 기록되는 방식입니다. 일단 여기서는 매우 심플한 그림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자식 VHD는 부모 VHD의 내용물을 그대로 전수받는데 이때 모셔만 두고 읽기만 합니다. 비유하자면 부모 VHD는 거울 앞에 서 있는 실존하는 나 자신이고 자식 VHD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빨간색 테두리 안의 영역은 부모 VHD에서 그대로 읽어만 온 영역입니다. 만약 저 상태에서 자식 VHD의 한글 2010을 지운다면 실제로 그것이 부모 VHD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냥 자식 VHD의 주황색 부분에다가 한글 2010이 지워졌다는 기록이 추가되는 것 뿐입니다. 따라서 자식 VHD에선 더이상 한글 2010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모 VHD 안에는 한글 2010이 그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를 거울에 비유하자면 거울 속 내 얼굴에 빨간색 매직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비록 거울 속 내 모습은 변하지만 실제 내 얼굴에는 빨간색 매직이 칠해지지 않는 것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만약 자식 VHD에 스타크래프트를 설치하게 되면 마찬가지로 그것은 부모 VHD에는 기록되지 않고 자식 VHD 안에만 주황색 영역에 스타크래프트가 설치되는 것입니다. 이정도면 Differencing VHD가 어떤 개념인지 대충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3. 왜 Differencing VHD를 사용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왜 제가 그동안 Differencing VHD를 그토록 예찬해왔는지 그 이유를 설명드리겠습니다.

저는 컴퓨터 관련 블로거의 특성상 프로그램을 자주 설치해보는 편입니다. 새로 나온 프로그램이 있다면 일단 설치해본 다음 어떤 프로그램인지 확인합니다. 매우 유용하다 싶으면 블로그에 소개글을 올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프로그램들은 한번 설치만 해보는 것으로 끝나버립니다. 지속적으로 계속 사용하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아무래도 수년간 애용해왔던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에 비슷한 종류의 새로운 프로그램이 등장했을 때는 쉽사리 그것으로 옮겨가지 못하겠습니다. 익숙한 것에 길들여져 있다 보니 변화를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더군요.

또한 프로그램 중엔 트라이얼 버전이 많습니다. 트라이얼 버전은 그 특성상 프로그램을 삭제하더라도 나중에 다시 설치하면 그 이전에 설치했던 기록에 남아있어서 남은 사용기간이 소급 적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런 조치가 없다면 언제든지 기간 안에 지웠다 설치했다를 반복하여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요.

또한 저는 윈도우의 각종 설정을 변경하거나 레지스트리를 건드리는 일을 자주 하는 편입니다. 이처럼 윈도우에 각종 프로그램을 이것 저것 설치했다 지웠다 하거나, 각종 설정을 이것 저것 변경해보는 일은 일반 유저들 입장에서 결코 부담없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윈도우란 녀석은 언제든지 망가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 만에 하나 받은 파일이 바이러스를 포함하고 있다면 아무리 백신이 있더라도 100% 안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프로그램을 깨끗하게 지운다 하더라도 레지스트리에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그 미세한 흔적에 대한 찝찝한 기분을 결코 떨쳐버리기 힘들 것입니다.

Differencing VHD는 이 모든 걱정을 해결해줍니다. 마치 샌드박스와도 비슷한 개념이라 할 수 있으며 저는 사용해보지 않았지만 학교 전산실에서 주로 이용하는 순간 복구 프로그램들도 이와 비슷한 원리를 사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유지되어야할 원본은 그대로 모셔다 두고 마음대로 가지고 놀아도 되는 공간에서 마음껏 이것 저것을 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다 문제가 발생하거나 깨끗한 순수 상태로 복귀하고 싶어지면 변경된 공간을 초기화 시켜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위에서 그렸던 그림으로 설명드리자면 자식 VHD의 주황색 부분을 날려버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울에 비유하자면 더러워진 거울은 버리고 새 거울을 걸어두는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습니다.



4. Differencing VHD를 활용하는 다양한 시나리오

저는 집에서 혼자 컴퓨터를 사용하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 자식 VHD 1개만을 생성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 유저들은 여러개의 자식 VHD를 필요로 하더군요. 이 글을 시작하게 된 이유도 바로 이 부분에 대해 그동안 몇차례 댓글로 요구사항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이렇게 정리를 해보는 것입니다.

저는 비교적 단순한 시나리오를 한번 구상해보겠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의 부모 VHD에 여러개의 자식 VHD를 연결할 수 있으며, 자식 VHD에 또 그 자식 VHD를 (즉 손자 VHD) 생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손자 VHD의 경우 할아버지 VHD의 내용과 부모 VHD의 변경분을 더해서 새로운 원본으로 간주하고 나머지 변경분을 기록하게 됩니다. 고손자 증손자 VHD도 계속해서 생성할 수 있습니다.



위 시나리오는 결코 효율적이지 않겠지만 어디까지나 예로 든 것 뿐입니다. 각자 자식 VHD의 특성을 활용해서 다양하게 시나리오를 꾸며보시기 바랍니다.

일단 VHD를 하나 만들어 거기에 윈도우 7을 설치합니다. 딱 윈도우 7만 설치해도 되고 각종 드라이버나 업데이트 정도는 해주셔도 되겠죠. 그리고 아들, 마눌님 모두 공통으로 사용할만한 프로그램이 있다면 역시 설치해주는게 좋을 것입니다. 물론 당연히 정품인증까지는 해두셔야 합니다.

그 다음엔 자식 VHD를 3개 생성합니다. 자식 1번으로 부팅해서 나 혼자 쓰는 각종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최적화 작업을 마칩니다. 마찬가지로 자식 2번으로 부팅해서 초등학생 아들이 주로 하는 게임이나 학습용 프로그램을 설치합니다. 자식 3번은 제가 아직 결혼을 안 해서 잘 모르니 마눌님 좋아하시는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각종 카페 바로가기를 바탕화면에 만든다든지 메신저를 설치한다든지 기타 등등 마눌님 사용하시기에 최적화된 윈도우를 구성합니다.

그 다음엔 각 자식 VHD에다 다시 각각 자식 VHD를 생성합니다. 그 이유는 각각의 유저가 윈도우를 망가트렸을 때 복구해주기 위해서입니다. 일단 할아버지와 부모 세대까지는 원본으로 쓰자는 것이죠. 손자 VHD를 만들어서 마음대로 주물럭 거릴 수 있도록 해두자는 것입니다.

끝에 깨끗한 새끼 VHD라고 있는데 이건 복구용입니다. 자식 VHD를 처음 만들면 용량이 100kb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 순수 VHD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새끼 VHD를 각각의 손자를 처음 만들었을 때 따로 백업을 해둡니다. 이 100kb 짜리 깨끗한 파일 안에는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보 정도밖엔 들어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만들어둔 깨끗한 녀석은 나중에 예를 들어 초등학생 아들이 뭘 잘못해서 바이러스에 걸렸다든지 윈도우가 날아가버린 경우 (어차피 날아가도 손자 2번만 날아간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깨끗한 새끼 VHD 파일을 손자2.VHD 파일로 교체해버리면 끝입니다. 매우 간단합니다. 그래서 이 Differencing VHD 방식은 순간 복구 시스템과 비슷하다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시나리오는 프로그램을 계층별로 설치해두는 것인데 하나의 부모가 여러개의 자식을 거느릴 수는 있지만 반대로 하나의 자식이 여러명의 부모를 가질 수는 없으므로 (당연한 이치겠지요 부모가 여러명이면 어떤 부모를 참조해서 다른 점을 기록해야 할지 알 수 없으니) 이 점을 고려하여 잘 구성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비교적 간단한 모델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이렇게 구성하면 총 4가지 버전의 멀티부팅을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1-2-5-8
1-2-6
1-3
1-4-7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유지 보수 측면에서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2번에 오피스 2010이 설치되어 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오피스 2010 서비스팩 1이 나왔고 이놈을 설치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2번 파일로 부팅을 해서 설치를 해야겠지요. 이렇게 했을 때 5, 6, 8번에는 오피스 2010 서비스팩 1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부모 파일에 뭔가 추가된다면 자식 파일의 경우 교체를 해줘야 그 내용이 적용됩니다. 반대로 부모 파일에 뭔가 삭제된 경우라면 자식 파일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부모에 있던 파일이 사라져버렸다면 자식에선 더이상 그것을 찾을 수 없겠지요. 다른 점만 보관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좀 말이 헛갈릴 수도 있는데 아무튼 2번에 업데이트를 적용하면 5,6번을 교체해야 하는데 5번의 경우 또 고유한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있을테니 그것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5번에 대한 백업파일을 가지고 있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클린 파일을 5번에 교체해버리면 8번은 더이상 무용지물이 되겠지요.

말로 설명하려니 좀 어려운데 아무튼 저의 생각은 이렇게 계층화 해서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것은 유지 보수 측면에서 별로 좋아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차라리 작업을 많이 하게 되더라도 1세대 부모를 각 시나리오에 맞게 여러개 만들어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2세대 3세대 이어지게 되면 부모세대를 업데이트 해야할 때 골치아파지기 때문입니다.



5. 부모 파일 업데이트?

바로 위에서 부모 파일 업데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평소엔 자식 VHD로 부팅해서 사용을 하지만 영구적으로 적용되어야할 사안이 생긴다면 부모 VHD로 부팅해서 그것을 적용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은 경우 매번 자식 VHD를 깨끗한 녀석으로 교체해줄 때 마다 지난번에 설정해뒀던 그 내용이 날아가버려 다시 설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평소엔 거울 위에다 그림을 그리고 치장을 하겠지만 예를 들어 새로 그린 눈썹이 너무 마음에 들어 계속 유지하고 싶다면, 매번 거울을 깨끗한 것으로 교체할 때마다 눈썹을 그리는 일은 불편할테니 거울이 아닌 내 얼굴에 직접 눈썹을 그려줘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 부모 파일 업데이트의 경우 직접 부모 파일로 부팅해서 내용을 적용해주지 않고 이미 변경된 자식 파일의 내용을 부모 파일에 적용시켜주는 커맨드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방식을 싫어합니다. 제 컴퓨터에 관해서는 한번 할 때 완벽하고 깔끔하게 하려는 편이기 때문에 자식 파일에 혹시나 모를 이물질이 남아있다면 그것까지 부모 파일에 적용되는게 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꼭 적용해야하는 내용이 생기면 (주로 프로그램 업데이트 관련 이슈) 항상 부모 파일로 부팅해서 그것을 적용해준 다음 다시 자식 VHD를 깨끗한 것으로 교체해주곤 합니다.



6. VHD 부팅은 아무 윈도우나 다 지원하는가?

아쉽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정말로 환상적일텐데 말이죠. 파티션을 나누지 않고 파일만 딱 3개 만들어서 XP, 비스타, 세븐을 각각 설치하는 겁니다.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현실은 불가능합니다.

VHD 파일 안에 들어있는 윈도우가 네이티브로 부팅할 수 있는 기술은 오로지 윈도우 7에서만 가능합니다. 아 물론 당연히 서버 2008 R2도 포함입니다. 그런데 윈도우 7도 다 되는게 아닙니다. 물론 기술은 다 가지고 있지만 라이선스로 제한되어 있어서 엔터프라이즈, 얼티밋 버전에서만 VHD 부팅 기능이 지원됩니다. 이 점이 매우 아쉽죠.

예전에 어디서 흘러가는 글로 비스타도 업데이트를 통해 VHD 부팅기능을 지원할 것이라는 소문을 얼핏 본 것 같은데 제가 헛소문을 들었거나 꿈에서 본 것이 아니라면 기술적으로 VDI를 적용하는게 그리 어렵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하기야 버추얼 PC를 생각해보면 윈도우 XP도 약간만 패치를 하면 VHD 네이티브 부팅이 가능할 것 같은 느낌은 드는데 뭐 제가 기술자가 아니다보니 잘은 모르겠습니다.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이 부분을 가끔 오해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현재 XP가 설치되어 있거나 비스타가 설치되어 있다고 해서 윈도우 7을 VHD에 설치할 수 없는게 아닙니다. 현재 설치되어 있는 OS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아무런 OS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비어있는 하드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VHD를 만들고 그 안에 윈도우 7을 설치하면 알아서 부팅파일을 외부에 만들어주고 VHD 스스로 알아서 부팅되기 때문입니다.



7. VHD 부팅 활용하기

이제 VHD에 대한 개념은 다 정리되었을 듯 싶습니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그동안 포스팅했던 VHD 관련 글을 링크로 남기겠습니다. 이 글에서 설치부터 활용까지 모든 내용을 중복해서 다룰 수는 없기 때문에 링크로 대체합니다.

먼저 아래 글을 참조하여 VHD 안에 윈도우 7을 설치합니다.

2009/06/16 - [Windows 7] - 윈도우 7 VHD 만들어서 설치하기

설치를 다 하셨다면 이제 각종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완벽히 최적 상태로 만듭니다. 그런 다음 이제 자식 VHD를 생성해서 그걸로 부팅해 평소 실사용 하시면 됩니다.

2009/11/22 - [Windows 7] - 윈도우 7의 Differencing VHD 기능을 활용해보자

이렇게 실사용 하다가 자식 VHD를 깨끗한 녀석으로 교체하려면 F8 복구모드나 PE에서 해야하는데 (혹은 멀티부팅 상태라면 다른 OS상에서 바로 교체) 이를 편리하게 자동으로 해주는 글입니다.

2009/12/10 - [Windows 7] - VHD 파일 자동교체 부팅메뉴 등록하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부팅 후 이 자동 교체 메뉴를 선택해주는 것 조차 귀찮으신 분들을 위해 윈도우에서 이 부팅메뉴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주는 프로그램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부모 VHD로 부팅해서 거기에 설치해두시면 편리하겠지요.

2010/04/25 - [유용한 프로그램] - 멀티부팅 메뉴를 윈도우에서 선택 - iReboot


이렇게 Differencing VHD를 활용하여 자주 시스템을 되돌리는 경우, 단점을 하나 꼽으라 한다면 설정 파일이 C 드라이브에 누적되는 프로그램에선 불편해집니다. 예를 들어 uTorrent 프로그램을 들 수 있습니다. 대량으로 시딩하시는 분들은 시딩 리스트에 대한 정보가 C에 저장되기 때문에 이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면 자식 파일을 복구한 경우 시딩중이던 리스트의 변화분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다행히 uTorrent는 제가 다른 파티션에 옮겨두는 방식을 소개해드렸지만

2010/04/22 - [컴퓨터 관련 팁] - uTorrent 설정 파일 위치 변경하기

다른 프로그램의 경우 자주 설정을 업데이트 해야 한다면 불편할 수 있습니다. 매번 부모 VHD로 부팅을 해줘야 하니까요. 저는 그런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않아서 별 문제가 없는데 다른 분들은 혹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외에도 VHD 파일을 자유자재로 주물럭 거리려면 bcdedit, bcdboot, diskpart 등에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일일이 다 설명드릴 수는 없으니 막히면 그때그때 글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한민족 시원, 만주] 시대와 함께 한 조선의 청년(1)
대한제국 계승, 주권재민의 민주공화정 깃발
3·1운동 투옥 농민이 60%, 새 사회세력 등장 - 1917년 대동단결 선언, 민족운동 새 ‘물꼬’


 
 한일합병과 함께 일본은 경복궁 근정전에 일장기를 내걸고 주인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10년 조선의 심장부 근정전에 일장기가 꽂혀 있었다. 근정전은 어떤 곳인가? 조선의 수도는 한양이었고, 한양의 최고 중심은 경복궁이었다. 그 경복궁의 중심 공간이 근정전이다. 거기에 일장기가 꽂힌 것은 ‘이제 우리가 너희를 지배한다’는 상징적인 표시였다. 근정전 일장기 사진에는 이런 역사적 아픔이 담겨 있다.

오늘 강의에서는 근정전에 일장기가 내걸린 그 굴욕의 시대부터 1910년대 3·1운동시기, 대중운동과 독립운동이 본격화한 1920년대를 거쳐 1931년도 만주사변 이후 조선의 모습, 1940년대 아시아 태평양전쟁 뒤 민족운동의 흐름에 대해 시대별로 핵심 내용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조선의 심장’ 근정전에 내걸린 일장기의 의미





먼저, 조선이 식민지가 되었을 당시 국제 정세와 일본이 조선을 지배한 특징 등을 살펴보자. 독립운동사 하면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해 어떻게 잘 싸웠는지에만 관심이 많은데, 조선의 청년들이 상대한 일본 제국주의가 어떤 나라였는지도 중요하게 살펴야 독립운동의 성격을 더 명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국제적으로 매우 유리한 조건에 있었다. 세계 최대 강국이라는 미국과 영국이 일본의 편이었다. 심지어 1904년부터 일본과 5년 전쟁을 벌였던 러시아도 1910년에 접어들자 협상을 통해 일본과 같은 편이 되어 버린다. 국제사회에서 조선을 도와줄 적극적인 원군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4년부터 전쟁이 마무리되고 베르사유 강화조약이 체결되는 1919년까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은 공업 생산의 비중이 전체 산업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2차, 3차 산업이 급속하게 팽창한다. 인구분포로 여전히 농민이 다수이지만, 이 기간 동안 일본은 농업중심 국가에서 공업중심 국가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순간 일본은 세계 3위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지는 대국이 되어 버린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국제적 파워는 실로 막강했다.

조선총독은 일본 수상과 동급

 
 첫 조선총독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다케. 한겨레 자료사진
일본은 조선을 어떤 식으로 통치하려고 했을까? 1910년에서 1945년까지 역대 조선총독은 모두 9대에 거쳐 8명이다. 이 가운데 3명이 후에 일본 총리가 되었다. 조선총독은 대부분 군 출신인데, 1명을 빼고 모두 육군 출신이다. 지역으로 보면 1대 총독 데라우치와 2대 총독 하세가와가 모두 야마구치현 출신이다. 이토 히로부미도 야마구치 출신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통치한 독특한 특징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즉 일본의 특정 지역, 즉 야마구치현 출신 군벌의 이해관계 속에서 조선이 지배당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이 1차 대전 후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총독부를 둔 곳이 대만과 조선이다. 그런데 조선총독과 달리 대만총독은 반 이상이 민간인 출신이고, 대부분 문관이거나 해군 출신이었다. 지역으로 보면 가고시마현 출신이 많았다. 당시 조선총독은 일본의 수상과 정치적 위상으로 보면 동급이었다. 조선총독이 일본제국의회에 나가 정무보고를 한 것은 1910년과 1920년 두 번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만총독은 수상이 운영하는 내각에 소속돼 있었다. 조선총독과 대만총독은 정치적 무게가 확연히 달랐다. 이를 통해 보면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 전략상 조선은 군사력, 군대를 앞세운 지배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10년대 민족운동, 저항의 근거지 찾아 만주로

1910년대 조선의 민족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저항의 근거지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1910년 이전에 전개된 애국계몽운동 조직은 의병전쟁 과정에서 모두 와해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운동 세력들이 국내에서 조직을 재건하고 저항의 근거지를 마련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면 당연히 미국이나 일본이었겠지만, 당시엔 만주와 조선족 자치지역인 연변,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 일대가 후보지였다. 모두 조선과 인접해 있어 접근성이 좋았고, 우리 민족의 주요한 활동무대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독립운동 단체의 중요한 특징은 이름에서 드러난다. 대표적인 것이 석주 이상룡 선생 등이 주축이 돼 만든 ‘신흥학교’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한국이라는 의미의 ‘신한’, 새롭게 흥한다는 의미의 ‘신흥’ 등이 1910년대 조직의 명칭에 주요하게 등장한다. 새롭게 뭔가를 모색하고 새로운 준비를 해야 한다는 민족운동의 시대정신이 반영된 결과다. 이 시대 민족운동은 군사력을 키우고, 학교를 세우는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된다.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으로 이어져

1910년대 민족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사건이 1917년 대동단결 선언(1917년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등 14명이 발기해 작성한 선언문 -편집자)이다. 대동단결선언은 항일 민족운동의 사상적 토대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핵심 내용은 이렇다. ‘황제가 삼보를 포기한 8월29일은 우리 동지가 삼보를 계승한 8월29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삼보는 정치, 토지, 인민이다. 다시 말하자면 대한제국의 계승권은 일본 제국주의가 아니라 민족운동가인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선언한 셈이다. 조선의 계승성을 명쾌하게 언급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군주제와 공화정의 전쟁

유럽식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은 조선의 민족운동 세력들이 어떻게 민주 공화정을 그렇게 빨리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당시 국제 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11년 중국에서는 신해혁명이 일어난다. 신해혁명은 한족이, 만주족이 지배한 청나라를 무너뜨린 사건이다. 신해혁명에서 청을 무너뜨린 세력이 내걸었던 것이 민주 공화정이었다.

두 번째, 1914년 벌어진 1차 세계대전의 성격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의회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국가와 입헌군주제를 추구하는 국가 간의 싸움이었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 대항했던 영국, 미국, 프랑스는 의회민주주의 나라였다. 결과는 근데 의회민주주의 국가의 승리였다.

1917년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러시아 혁명에서 권력을 장악한다. 사회주의 이념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노동자와 농민의 힘으로 절대군주, 황제를 무너뜨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국내의 민족운동가들에게도 새로운 세상이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청사진과 같았다. 이런 나라 안팎의 흐름이 민주 공화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다.

한국 대중 민주주의 출발점

 
 제90주년 3.1절 기념행사가 열린 2009년 3월1일 경기 화성시 발안읍 제암리기념관에서 시민들이 1919년 당시 일본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펼쳤던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화성/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1910년대 민족운동사는 3·1운동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워낙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3·1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진부하다. 대신 3·1운동 투옥자 통계를 통해 이 운동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자 한다. 3·1운동으로 투옥된 사람은 모두 8500명인데, 이 가운데 농민이 약 60%이고, 지식인, 학생, 청년이 20% 정도다. 상공업자들은 14%를 차지한다. 농민과 상공업자는 조선시대에 전혀 대접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지식인, 학생들도 서구식 근대교육체계에서 공부했던 사람들이다.

3·1운동 투옥자 통계는 당시 조선사회에서 이전 사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회세력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렇게 형성된 새로운 사회세력은 1920년대 농민조합, 노동조합, 청년단체 등을 결성해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는 주요한 동력이었다. 또 이들은 자신들의 계급적인 요구를 일상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1920년대를 한국 대중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20년대 일어난 노동자들의 파업과 소작쟁의 등을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한 민족주의 운동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것이다.

교과서에 청산리 전투에 홍범도 왜 빠졌나

 
 1919년 상하이의 임시정부 수립에 고무된 만주의 항일독립군은 이듬해 사상 최대의 승전보를 울렸다. 청산리 대첩의 김좌진 장군(왼쪽)과 봉오동 전투의 홍범도 장군(오른쪽)이 그 주역들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3·1운동은 조선 청년들의 애국열에 불을 지폈다. 많은 조선 청년들이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에 가담한다. 무장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사건이 1920년 벌어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다.

두 전투의 전개 과정은 역시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 다만 일반적인 역사해석과 다른 문제를 짚어보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두 전투의 상징적인 존재를 봉오동은 홍범도, 청산리는 김좌진 이런 식으로 역사 교과서에서 배웠다. 이게 틀렸다는 것이다. 이를 바로잡으려면 봉오동은 홍범도, 청산리는 김좌진, 홍범도 이렇게 가르쳐야 한다. 청산리 전투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을 비롯한 연합부대가 일본군과 싸운 전투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의 단독 싸움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청산리 전투 전에 두 부대는 한 번도 연합 작전을 한 적이 없었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인데, 1920년대 북간도 지역 무장 독립운동단체를 통일하고자 하는 노력의 과정에서 마지막까지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 두 부대였다. 두 부대는 결국 통합을 못 하고 일본의 독립군 대토벌 작전에 밀리다가 백두산으로 숨어 들어가려다 청산리에서 함께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게 된 것이다. 엄격히 보면 계획된 연합작전이 아니었다는 것이 역사적 진실에 가깝다.

그런데도 우리의 역사 교과서는 김좌진 장군의 성과만 부각시킨다. 그 이유는 청산리 전투를 회고했던 일부 인사들의 뻥튀기 회고록과 동시에 홍범도라는 인물을 배제한 회고록 탓이라고 본다. 홍범도는 나중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고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뒤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청산리 전투 이후 홍범도의 행적이 명확하지 않은데다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사회주의 경력으로 그를 부각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상당수 독립군이 소련에서 만주로 돌아오면서 활기

만주지역에서 무장 독립군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자 일본은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작전을 벌인다. 만주 독립군의 활동은 만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의 치안불안, 통치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릴라 작전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 정규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피하려고 조직적인 퇴각을 벌인다. 청산리 전투도 그런 과정에서 벌어졌다. 애초에는 백두산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아 결국 소련 국경지대인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옮겼다.

1920년대 민족운동은 상당수 독립군이 소련에서 만주로 돌아오면서 활기를 찾는다. 그리고 이때부터 항일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나뉜다. 민족주의 계열은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라는 3부를 중심으로 한 자치운동을 벌인다. 3부는 싸움만 하려고 만든 독립운동단체가 아니고, 만주의 조선인들의 교육, 경제적 실력 양성까지 생각하는 독립운동을 하려는 취지였다. 교과서에도 소개된 이른바 ‘자치운동’인데, 당시 이주 조선인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중국 당국에 세금을 내고 무장 독립군의 운영 자금을 대는 이중의 부담에 불만이 있었다. 민족주의 계열의 무장 독립운동 노선에 비판적인 사회주의 계열이 등장한 배경이기도 하다. 사회주의자들은 ‘너희는 싸움만 하느냐, 동포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 등의 생활의 이익을 위해 도와주지 않느냐’는 식으로 민족주의자들을 비판했다.

사회주의 계열은 어떻게 독립운동사에 등장하나

그렇다면, 사회주의 계열은 어떤 식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에 등장하게 되느냐? 1919년 임시정부가 세워진 이후 민족주의자 내부에서 점차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싹트기 시작한다. 20년대 초반까지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이 유일했지만, 1922년부터 사회주의 사상이 급속히 확산하더니 1925년 조선공산당이 창당되기에 이른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조선공산당 창당 당원 가운데 3·1운동 투옥자가 상당수 포함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민족 문제를 생각하면서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민족운동이 사회주의 운동의 출발점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민족운동 내부의 사상적 분화과정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1920년 ‘김윤식 사회장’ 논란이 계기라고 할 수 있다. 김윤식은 온건개화파에 속하는데, 조선 병합 당시 작위도 받고, 천황의 은사금도 받은 사람이었다. 그가 죽은 뒤 장례식을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한쪽에서는 ‘명색이 국가의 외무대신을 지낸 높은 분인데, 당연히 사회장을 지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무슨 소리냐? 그 사람의 과거 경력을 보라. 그 사람이 사회장을 지낼 만한 자격이 있느냐’는 반발이 있었다. 조선의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너와 나는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의 차이가 있구나’라고 확인한 사건의 하나였다.

타협적 민족주의자-비타협적 민족주의자-사회주의자

 
 춘원 이광수. 한겨레 자료사진

비슷한 시기 춘원 이광수는 <개벽>에 ‘민족개조론’이라는 글을 싣는다. 춘원의 민족개조론은 우리 민족에 대한 열등감, 비하를 전제로 하는데, ‘저런 사람도 있구나. 민족을 비하하는 지식인도 있구나’라는 것이 알려진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 다음 1923년 벌어진 물산장려운동이나 민립대학설립운동의 과정에서 사상적 분화는 더욱 가속도가 붙는다. 물산장려운동은 조선인이 조선인이 만든 상품을 사고 팔자는 것인데, 애국심에 호소해 밀려오는 일본의 자본과 경쟁을 해보자는 실천운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저건 기업가들, 자본가들을 위한 운동이다. 민중을 위한 운동이 아니다’고 비판한 사람들이 있었다. 민립대학설립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화 교육정책의 뼈대는 조선인에게 고등교육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민립대학 설립은 지극히 정당한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도 또 다른 비판이 제기된다. ‘대학을 설립할 돈이 있으면 야학을 키우고, 보통학교를 더 세우는 등 조선 전체의 문맹률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교육의 방향을 놓고 생각이 달랐다. 이는 사회주의자들과 그렇지 않는 사람과의 생각의 차이이기도 했다.

춘원 이광수는 1924년 1월2일자 <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우리 민족의 경륜을 향상시키고 독립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이냐’는 것인데, 뼈대는 ‘법률이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 정치적 수양 조직과 단체를 만들자’는 주장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법률이 허락한’이라는 것은 결국 일본 제국주의의 법률을 말하는 것이고 자치론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자치란 결국 상층의 권력에 비례한 하층의 권력 구조를 만들자는 의미이고, 결국 ‘상층의 권력으로서 일본 제국주의 지배를 받아들이자’는 논리를 구성한다. 상해 임시정부의 사회주의자들이 들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20년대 4차례의 논쟁 과정에서 3·1 운동 당시 모두 같은 편인 줄 알았던 민족운동 세력 내부에서 크게 세 갈래의 큰 흐름이 형성된다. 타협적 민족주의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가 그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다시 조선공산당으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는 민흥회, 신간회로 간다. 타협적 민족주의자의 일부는 나중에 자치론이나 친일론으로 변질한다. 전문적인 연구자들이 보면 ‘아니다’라고 할 수 있지만, 거칠게 20년대 이후 민족운동을 정리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민족협동전선 운동체로서 신간회와 민족유일당 등장

 
 1928년 진주 촉석루(남장대) 앞에서 신간회 진주지회 회원들과 기념촬영한 신간회 간부들. 한겨레 자료사진
이렇게 독립운동 내부에 사상적 분화가 일어나면서 1927년 2월 국내에서 등장한 것이 신간회다. 신간회는 민족협동전선 운동체로서 민족주의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가 결합해 최대의 항일운동단체를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결성하였다. 그래서 아주 짧은 기간 100여 개의 지부를 결성할 정도로 호응이 높았던 운동이었다.

이 시기에 만주와 상해, 북경지역을 중심으로 한 해외에서도 비슷한 취지의 운동이 벌어진다. 그런데 신간회 대신 ‘민족유일당’이라는 명칭을 쓴다. 민족유일당을 결성하기 위한 준비운동이 1927년과 28년 사이에 대대적으로 벌어진다.

왜 같은 시기에 같은 취지의 운동이 국내와 해외에서 다른 이름으로 다른 방법으로 추진된 것일까? 이는 국내와 해외의 조건의 차이로 설명될 수 있다. 당시 국내에는 민족주의 단체와 사회주의 단체가 합법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고 있어서 민족유일당과 같은 비밀결사조직을 만드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신간회 같은 합법적인 조직이 탄생했다. 실제 신간회를 만들었던 사람들 중에는 ‘민족단일당’을 만들자는 구상을 하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1926년 벌어진 6·10 만세 운동을 보면 민족단일당 구성을 촉구하는 구호나 유인물이 많았다. 그러나 실제 만드는 과정에서 지하 정당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합법 조직을 만드는 것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반면 일본의 직접적인 지배를 벗어나 있는 해외에서는 비밀결사적인 성격의 민족유일당을 만들어 항일운동을 종합적으로 지도해 보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래도 국내와 해외의 두 운동이 언젠가는 서로 만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이런 식의 운동이 1920년 후반 독립운동의 큰 흐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주에 1930년대 이후 독립운동사 강의가 이어집니다.)



[한민족 시원, 만주] 시대와 함께 한 조선의 청년(2)
김구-김원봉, 엎치락 뒤치락 주도권 경쟁
아지노모토와 교복이 상징하는 일제잔재 - 독립운동가들의 또하나의 논리는 ‘정치’


 
 중국 타이항산에 주둔한 조선의용군들이 ‘한국인과 중국인이 연합해 일본을 타도하자’라는 내용이 담긴 구호를 담벼락에 쓰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지난 시간에 이어 1930년대 만주로 다시 돌아가 보자. 1930년대에 항일 무장투쟁의 대표적인 민족주의 운동단체가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이다. 흔히 사람들은 ‘조선’, ‘혁명’ 등의 단어가 들어가면 사회주의 계열로 분류하기 쉬운데, (명칭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당시 만주의 민족주의 운동은 상당히 진보적이었다. 한국독립군은 북만주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일본군과 모두 5차례 싸우는 것으로 근현대교과서는 묘사하고 있다.

반면 남만주지역에서 활동한 조선혁명군은 2차례 전투를 벌여 상대적으로 활동을 덜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역사해석이다. 조선혁명군이 조직원의 규율이나 전투력 면에서 월등했다. 활동 기간도 한국독립군은 1933년 끝나지만, 조선혁명군은 36년까지 활동을 이어간다. 따라서 1930년대 만주의 민족주의 무장투쟁은 조선혁명군을 중심으로 설명해야 한다.

조선 사회주의자들은 왜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나

사회주의자들은 1930년대에 중국 공산당 유격대 소속으로 활동했다. 민족주의자들도 중국인들과 연합해서 싸웠지만 중국인들이 지휘하는 부대에 소속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조선 사회주의자들은 철저히 중국 공산당에 입당해 게릴라 대원으로 일했다. 투쟁방식이 달랐다. 맞다, 틀리다를 떠나서 어느 것이 그 시대에 더 효율적인 운동방식이었을까? 중국 공산당에 입당해 철저하게 연합하는 방식이 더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1934년 만주지역의 인구 통계를 보면(일본 제국주의 집계) 중국인이 3천4백만 명이었는데, 조선인은 겨우 70만 명이었다. 비교가 안 된다. 만주는 한반도보다 최소 6배나 넓은 땅인데, 70만 인구라는 것은 인구분포상 점 하나에 불과하다. 그래서 민족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이 모두 중국인들과 연합한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운동방식이었다고 본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중국의 혁명을 위해 운동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느냐는 문제로 남는다. 그들은 돌아가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만주의 일본 제국주의나 조선의 일본 제국주의가 모두 같은데, 만주의 일본인을 물리치는 것이 한반도의 일본인을 물리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조선의 독립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과 활동을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돕는 것이라고 봤다.

만주사변의 발발과 중국의 반조선인 감정 녹인 윤봉길 의거

 윤봉길 의사가 거사 사흘 전 한인애국단 선서식에서 찍은 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1931년 만주사변은 만주지역과 조선은 물론 중국 내부에도 미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만주사변 뒤 독립 운동가들은 민족주의자건 사회주의자건 상관없이 먹고 자고 일어나면 총 들고 싸우는 것이 일이었다. 일상적인 무장투쟁이 운동의 주요한 방법과 수단이었다. 그러나 만주사변에 대한 중국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조선인이 만주에 왔기 때문에 일본이 우리를 침략한 것 아니냐”는 반 조선인 감정이 확산되었다. 실제로 일본은 만주에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식민보호’를 중요한 명분으로 내세웠다. 즉 조선인 보호를 위해 만주를 공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주사변 뒤 중국인 마적들이 조선인을 습격한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그런 사건은 조선의 신문에 보도가 되면서 조선인들도 역으로 중국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이렇게 중국인과 조선인 사이에 감정이 악화되면 누가 이익을 보나? 일본 제국주의다. 따라서 누군가 이 문제를 해결하고 넘어가야 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이런 측면에서 획기적인 싸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윤봉길 의거는 중국인의 반한 감정을 녹여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치안 안정 자부’한 일제 뒤통수를 친 보천보 전투

 1937년 6월 보천보 전투를 대서특필한 동아일보의 호외. 한겨레 자료사진
30년대 전개된 사회주의 항일운동의 또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는 김일성이다. 김일성이라는 존재는 만주지역 민족운동사를 이해하는 것뿐 아니라 북한을 이해하는데도 필요하다. 북한은 1929년 ‘타도 제국주의’ 정신으로부터 내려온 항일투쟁과 만주사변 이후 15년간의 무장투쟁의 과정에서 주체사상이 형성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1937년 6월 호외로 보천보 전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는 김일성이라는 인물이 국내 대중들에게 알려진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김일성은 만주의 여러 빨치산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유달리 부각이 된 것은 보천보 전투와 무관하지 않다. 1930년대 정세 속에서 보천보 전투는 어떤 의미였나? 일본은 1936년과 37년에 가면 ‘조선의 치안이 안정되었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거기에 뒤통수를 때린 사건이 보천보 전투였다. 일본은 이 사건 뒤 대대적인 검거작전을 벌여, 우리 역사상 단일 조직사건으로 가장 많은 사형자와 검거자를 기록한 이른바 ‘재만한인조국광복회’ 사건과 혜산사건 등이 터진다. 그만큼 보천보 전투는 일본 제국주의의 간담을 써늘하게 한 사건이었다.

처음 우세하던 김원봉, 결국 김구의 임시정부에 기울어

1930년대 중국의 본토인 북경과 상해 등에서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의 통합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통합운동의 핵심 지도자는 김구와 김원봉이다. 두 사람은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통합운동 과정에서 1932년~39년까지는 김원봉의 영향력이 우위에 있었다. 김구는 굉장히 위축돼 있었고, 이는 임시정부의 위축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937년 김구의 세력이 점차 만회하기 시작한다. 계기는 김원봉이 조직한 조선의용대의 북상이었다. 김원봉이 만든 민족혁명당은 무장부대로 38년 조선의용대를 조직한다. 그런데 조선의용대의 젊은 대원들 사이에 “전선에서 떨어진 곳에서 편하게 훈련만 받고, 정보수집만 할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있는 곳에 가서 싸우면서 항일운동을 하자”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래서 1939년과 40년 사이에 일부 대원들이 타이항산으로 올라가 조선의용군으로 이름을 바꿔 항일무장투쟁을 이어간다. 조선의용대의 북상은 김원봉의 영향력이 축소되는 계기였다.

 30년대 중국 본토의 통합운동의 두 지도자. 김구(왼쪽)와 김원봉(오른쪽) 한겨레 자료사진

김구와 김원봉은 결과적으로 서로 통합을 못 한다. 그러나 영향력이 축소된 김원봉이 1941년 임시정부에 합류한다. 김원봉의 선택은 자기가 지휘하는 부대가 북상한 것이 컸지만, 당시의 국제 정세와 무관하지 않았다. 1939년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반파시즘 세력들로 구성된 연합군 세력이 급속히 확대된다. 나치가 소련을 공격하자 소련도 연합군에 가담한다. 이때 미국과 영국은 영국으로 망명한 유럽 여러 나라의 임시정부를 승인하는 정책을 편다. 그래서 연합군이 승리하면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김원봉은 이런 국제 정세에 변화에 따라 임시정부가 국제적인 승인을 얻게 되면 자신이 철저하게 고립될 것을 걱정했다. 김원봉의 가세로 임시정부는 중국 안에서 실질적인 독립운동 지도기관으로 역할을 하게 된다. 정세와 관련해 운동가들의 선택과 행동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가들이 항일을 위해 그냥 싸웠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민족이라는 거대 담론에 의해 움직인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정치 논리가 있었다. 김구와 김원봉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민족주의 운동도 본격적인 분화

1928년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은 큰 전환점에 선다. 조선공산당의 해산이 그것이다. 1930년대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은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재건 운동의 중심 세력과 구호는 확연히 달랐다. 1920년대 조선공산당은 지식인 중심의 정당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노동자와 농민 중심의 조선공산당을 만들자’는 재건운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 탄압을 계속 받는 과정에서 조선노동당을 재건하지 못했다.

 이 시기 국내 민족주의 운동도 본격적인 분화가 시작된다.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소되는 것이 계기가 된다. 신간회 해소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사실상 운동의 조직적 기반을 잃었다. 이들은 이후 우리 문화와 국어 보존 등 조선학 운동으로 노선을 전환한다. 이전처럼 투쟁적인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타협적 민족주의자 다수는 친일로 간다. 이것이 30년대 국내 민족운동의 흐름이다.

김구-김두봉-여운형-김일성의 건국 연합활동 실패

1940년대 민족운동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은 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이다. 많은 민족 운동가들은 이 전쟁에서 일본이 질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서 건국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진다. 광복을 앞두고 일어난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는 크게 4개다. 김구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김두봉의 화북조선독립동맹, 여운형의 건국동맹, 김일성 김채규, 최홍근이 이끈 조선공작단위원회가 그것이다. 1940년대 조선 독립운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건국에 대비한 운동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건국을 위해 활발한 연합활동이 펼쳐진다. 임시정부의 김구가 자신의 가장 믿을 만한 조직원을 화북조선독립동맹에 보내 연결을 시도하고, 건국동맹은 김일성에게 조직원을 파견하는 식이다.

 일본이 1945년 8월15일 항복을 한다. 그러면 우리는 독립을 하게 되었나? 일본의 패전은 동시에 38선을 경계로 남에는 미군이, 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해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는 과정이었다. 우리가 광복의 기쁨을 느끼는 그 순간이 사실은 분단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1940년대 활발했던 건국 연합활동은 결국 결실을 맺지 못하고 분단의 아픔으로 이어졌다.

항일의 시기이자 근대 체험의 시기

지금까지 191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조선의 민족운동사, 항일운동사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식민지 시기는 항일을 해서 일본과 싸우는 시기인 동시에 우리가 근대를 살아가는 체험의 시기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우리가 해방 뒤 미국식 자본주의를 쉽게 받아들였는지 모른다. 우리가 싸웠던 일본이 어떤 나라였는지를 처음에 설명했던 것처럼 ‘우리가 살았던 식민지 시기가 어떤 사회인가’를 설명하는 것은 민족운동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더 정확히 살필 수 있다.

 한국인의 입맛을 길들인 화학조미료의 시초 아지노모토의 신문광고. 자료사진
일본이 발명한 화학조미료가 ‘아지노모토’다. 일본 강점기에 아지노모토를 요리에 사용할 정도면 ‘대단히 계몽된 사람, 개방적이고, 근대적이고 가족을 위하는 사람들’이었다. 아지노모토 광고에 보면 ‘이왕가명품’이라고 씌어 있다. 여기서 이왕가는 조선왕조를 뜻하고, 이왕가가 쓰는 명품이라는 의미다. 일제 강점기에 아지노모도는 그런 표상이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조미료 역사에 화학조미료의 유해성 논란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것이 불과 1980년대다. 그 전까지 화학조미료는 많이 치고, 잘 칠수록 가족의 행복을 위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해방 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화학조미료는 ‘미원’이다. 그 경쟁자는 ‘미풍’이다. 그러나 미풍은 미원을 절대 이기지 못했고, 이길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945년 8월에 가정주부였던 사람의 8할은 1955년 8월에도 가정주부였을 것이다. 그들에게 미원이라는 한자를 던져주면 뭐라고 읽었을까? 아지노모토라고 읽었을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잠재된 기억을 끌어와서 광고의 효과, 인지도의 효과를 극대화시킨 것이 미원이라는 이야기다. 미풍이 절대 이길 수 없는 역사적 한계였다. 그만큼 ‘맛의 식민지’는 뿌리 깊었다.

 또, 한 가지 의복의 예를 들자. 일본 강점기에 우리나라 여성들이 양장의 거부 반응을 줄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교복이었다. 교복은 남녀를 불문하고 교복 자율화를 하기 전인 1983년까지 보편적인 옷차림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도 명절이면 흔히 볼 수 있는 한복에 구두 신은 아버지의 모습. 이것은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한국 남성들의 근대적인 옷차림의 전형이다.

독립운동은 한편으로 민주주의 수호 운동

1920년대와 30년대에 형성된 문화와 가치체계는 오늘날 우리가 지극히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것과 뿌리가 닿아 있다. 그것은 근대적인 삶, 문명적인 삶의 가치체계다. 그리고 그 시대에 벌어진 독립운동의 가치체계 또한 지금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인 민주주의의 가치체계와 한 뿌리다. 일본 제국주의가 민주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 제국주의와 싸운 독립운동은 한편으로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운동이었다. 민주주의라는 가치는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모르다가 해방 이후 60년대 4·19를 거치면서 뼈저리게 인식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은 서구적 문명질서 속에서 삶을 배웠다. 반면 정치적 삶으로써 민주주의, 일상의 도덕적 규율로써 민주주의 삶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이것이 ‘식민잔재’다.<끝>

 ⊙ 신주백=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사단법인 역사문제연구소 운영위원·연구원. 성균관대 박사, 일본 도쿄대학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경도대학 인문과학연구소 외국인 연구원, 대만중앙연구원 대만사연구소 외국인 연구원, 교육과학기술부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 주요 연구분야는 일본 강점기 민족운동사, 일본군 역사(1872~1945), 동아시아 역사교육과 역사교과서 등이며, 한중일 3국의 공동 역사교과서인 <미래를 여는 역사>의 기획과 집필에 참가했다. 일본의 역사왜곡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등 우리 역사 바로잡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주요 저서로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 연구(1920~1945)>, <1930년대 국내 민족운동>, <1920∼30년대 중국지역 민족운동>, <한중일이 함께 만든 미래를 여는 역사>(공저) 등이 있다.  

신주백 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 정리=박종찬 기자 pj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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