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프레시안 2007-12-11 오전 3:30:04


<15> 유럽의 해외팽창 ③ 유럽은 어떻게 아메리카를 착취했나?

3) 유럽인들에 의해 아시아와 아메리카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나
 
  유럽인, 아시아의 역내 무역에 참여
 
  15세기 말 당시 유럽인들은 아시아 상황에 대해서 거의 몰랐다. 몽골제국이 망하고 또 오스만 튀르크가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며 동 · 서의 교통이 전보다 불편해진 것이 주된 이유이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마르코 폴로가 살았던 13세기보다 아시아에 대해 더 무지했다. 콜럼버스가 항해를 할 때 가지고 떠난 중국황제에 대한 신임장은 몽골족의 칸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명나라가 생긴 것이나 인도에 무굴 제국이 성립한 것도 몰랐다.
 
  당시 아시아에는 명이나 무굴제국, 페르시아라는 대제국들이 건재하고 있어서 유럽인들은 이에 범접할 수 없었다. 유럽에는 이에 비견할 만한 나라조차 없었다. 또 경제적인 면에서도 유럽은 아시아에 훨씬 뒤떨어져 있었다.
  바스코 다가마는 캘리컷에 도착하여 가지고 간 유럽 상품들을 팔려고 했으나 아무 것도 팔 것이 없었다. 인도의 상점들에 가득 차 있는 상품들과는 질에서 비교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그곳에서 스페인어를 하는 튜니지아인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이미 인도에서는 국제적인 상업망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유럽인들이 그제야 이에 뒤늦게 참여하게 된 것이다.
 
  물론 바스코 다가마가 인도에서 싣고 돌아온 동방물산은 큰 이익을 냈다. 세 척 가운데 한 척 밖에 돌아오지 못했지만 무려 60배의 이익을 냈다고 한다. 중간에서 이익을 붙이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후 지중해 대신 아프리카를 도는 항로가 점차 동방무역에서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인도로 가는 항로가 워낙 멀고 위험이 많아 그 후에도 생각만큼 많은 무역선이 취항하지는 못했다.
 
  이와 함께 포르투갈 상인들이나 나중의 네덜란드, 영국 상인들은 인도양 안의 중개무역에도 종사했다. 당시 인도양의 물동량이 매우 많았으므로 그 편이 유럽과의 무역보다 더 유리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요소요소에 그 지역 왕이나 권력자의 허락을 얻어 무역거점을 만들었다. 아덴이나 말라카해협, 쟈카르타, 마카오 같은 곳들이 그곳이다. 아메리카에서와 같이 식민지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식민주의자의 전형 콜럼버스
 
  그러면 콜럼버스는 서인도제도에서 어떤 일을 했을까? 그는 말년에 자신을 기독교적 사명을 가진 인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서인도제도에 저지른 일들은 영웅다움이나 도덕성, 창조성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오직 이익만을 탐하는 투기가, 모험가, 착취자의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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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

  그는 항해를 위해 스페인 왕실의 후원을 얻었으나 그것은 말 그대로의 후원은 아니고 일종의 동업계약이다. 항해에 드는 전체 비용의 1/8을 그가 대기로 하고 나머지를 스페인 왕실에서 대기로 했다. 항해를 통해 얻는 수익의 1/8은 역시 콜럼버스의 차지였다. 또 새로이 얻는 영토에 대해서 그는 종신총독 직과 그 직위를 자식에게 세습시킬 권리를 보장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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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의 페르디난도와 이사벨라 공동왕에게 항해계획을 설명하는 콜럼버스

  그러므로 그가 서인도제도에 도착해서 한 가장 중요한 일은 동방물산 같이 이익이 될 만한 산물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 섬을 돌아 다녀 보아도 어디에도 후추 같은 돈이 될 만한 것들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어느 섬에서 사금이 나는 것을 발견하자 그는 두 번째 원정부터는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섬사람들에게 사금을 바치도록 강요했다.
 
  또 이들 원주민들을 노예화하여 강제노동을 시켰다. 1495년에는 550명의 원주민을 노예로 팔기 위해 스페인으로 데리고 귀환했다. 그 가운데 살아남아 스페인에서 노예생활을 한 사람은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또 사탕수수를 쿠바 섬에 이식함으로써 노예노동에 의존하는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의 기초를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착취적인 식민주의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나중에 아메리카에 들어간 유럽인들은 모두 그의 모범을 충실히 따랐다. 이렇게 보면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원주민, 나아가 비유럽인에게는 영웅도 위대한 인물도 아니다. 아메리카에 재난을 가져온 사악한 인간일 뿐이다.
 
  아메리카의 정복과 식민화
 
  코르테스와 피사로의 뒤를 이어 콩퀴스타도르라고 불린 수많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중남미 지역에서 정복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투기적인 모험가들로 그 가운데에는 귀족 뿐 아니라 평민, 흑인 노예 출신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군대를 모아 각지의 원주민 부족들을 정복함으로써 스페인의 식민지를 점차 확대했다. 이런 활동은 오지에서는 19세기까지도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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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정복자(conquistador)의 모습

  중남미의 거의 모든 지역을 스페인이 차지했으나 브라질만은 예외로 포르투갈에 속했다. 이는 로마 교황이 중재한 1494년의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해 두 나라의 세력권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의 모습이 제대로 밝혀지기도 전인 이때 벌써 두 나라가 세력권을 나누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거의 대부분의 중남미 지역에는 스페인 식민자들을 지배자로 하는 새로운 사회체제가 만들어졌다. 사실 원주민들의 기존 사회, 정치체제가 거의 무너지다시피 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아메리카의 정복사업은 국가와 교회의 공동사업으로 생각되었으므로 원주민들의 기독교화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원주민들의 신전을 무너뜨리고 많은 카톨릭 교회가 건설되었으며 토착민들을 강제 개종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반항하는 경우 학살 등 온갖 강압수단을 동원했다.
 
  초기의 식민자들 사이에는 여자의 수가 매우 모자랐으므로 스페인 정부는 원주민과의 혼혈을 적극 권장했다. 그래서 중남미 특유의 혼혈인인 메스티조 계급이 생겨났다. 메스티조는 스페인 정부로부터 원주민보다 우대를 받았다.
 
  나중에는 노예로서 아프리카 인이 많이 수입되며 이들과도 여러 형태의 혼혈도 이루어졌으므로 중남미 사회는 인종적으로 매우 복잡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 물론 백인이 가장 위의 서열에서 군림하게 되었다.
 
  스페인인 정복자들이나 그 후손, 또 새로 스페인에서 들어온 유력한 식민자들은 왕의 허락을 얻어 광대한 토지를 차지하여 대농장인 플랜테이션들을 건설했다. 그리고 원주민에 대한 강제노동을 이용하여 목축을 하거나 사탕수수, 담배 등을 경작했다.
 
  16세기 중반에는 큰 매장량을 가진 은광산들을 개발했다. 여기에도 대량의 노동력이 필요했으므로 많은 원주민 남자들이 징발되어 노예와 같은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그 결과 16, 17세기 내내 스페인의 세비야 항으로는 엄청난 양의 금, 은이 아메리카로부터 쏟아져 들어오게 된다.
 
  아메리카의 이런 엄청난 착취가 스페인을 16, 17세기에 유럽 최대의 부국으로 만든 바탕이다. 영국인과 프랑스인들은 중남미 지역에서도 활동했으나 북아메리카에 대한 침탈은 17세기 이후에야 본격화 했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7-12-11 오전 3:30:04


<15> 유럽의 해외팽창 ③ 유럽은 어떻게 아메리카를 착취했나?

3) 유럽인들에 의해 아시아와 아메리카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나
 
  유럽인, 아시아의 역내 무역에 참여
 
  15세기 말 당시 유럽인들은 아시아 상황에 대해서 거의 몰랐다. 몽골제국이 망하고 또 오스만 튀르크가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며 동 · 서의 교통이 전보다 불편해진 것이 주된 이유이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마르코 폴로가 살았던 13세기보다 아시아에 대해 더 무지했다. 콜럼버스가 항해를 할 때 가지고 떠난 중국황제에 대한 신임장은 몽골족의 칸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명나라가 생긴 것이나 인도에 무굴 제국이 성립한 것도 몰랐다.
 
  당시 아시아에는 명이나 무굴제국, 페르시아라는 대제국들이 건재하고 있어서 유럽인들은 이에 범접할 수 없었다. 유럽에는 이에 비견할 만한 나라조차 없었다. 또 경제적인 면에서도 유럽은 아시아에 훨씬 뒤떨어져 있었다.
  바스코 다가마는 캘리컷에 도착하여 가지고 간 유럽 상품들을 팔려고 했으나 아무 것도 팔 것이 없었다. 인도의 상점들에 가득 차 있는 상품들과는 질에서 비교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그곳에서 스페인어를 하는 튜니지아인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이미 인도에서는 국제적인 상업망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유럽인들이 그제야 이에 뒤늦게 참여하게 된 것이다.
 
  물론 바스코 다가마가 인도에서 싣고 돌아온 동방물산은 큰 이익을 냈다. 세 척 가운데 한 척 밖에 돌아오지 못했지만 무려 60배의 이익을 냈다고 한다. 중간에서 이익을 붙이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후 지중해 대신 아프리카를 도는 항로가 점차 동방무역에서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인도로 가는 항로가 워낙 멀고 위험이 많아 그 후에도 생각만큼 많은 무역선이 취항하지는 못했다.
 
  이와 함께 포르투갈 상인들이나 나중의 네덜란드, 영국 상인들은 인도양 안의 중개무역에도 종사했다. 당시 인도양의 물동량이 매우 많았으므로 그 편이 유럽과의 무역보다 더 유리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요소요소에 그 지역 왕이나 권력자의 허락을 얻어 무역거점을 만들었다. 아덴이나 말라카해협, 쟈카르타, 마카오 같은 곳들이 그곳이다. 아메리카에서와 같이 식민지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식민주의자의 전형 콜럼버스
 
  그러면 콜럼버스는 서인도제도에서 어떤 일을 했을까? 그는 말년에 자신을 기독교적 사명을 가진 인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서인도제도에 저지른 일들은 영웅다움이나 도덕성, 창조성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오직 이익만을 탐하는 투기가, 모험가, 착취자의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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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

  그는 항해를 위해 스페인 왕실의 후원을 얻었으나 그것은 말 그대로의 후원은 아니고 일종의 동업계약이다. 항해에 드는 전체 비용의 1/8을 그가 대기로 하고 나머지를 스페인 왕실에서 대기로 했다. 항해를 통해 얻는 수익의 1/8은 역시 콜럼버스의 차지였다. 또 새로이 얻는 영토에 대해서 그는 종신총독 직과 그 직위를 자식에게 세습시킬 권리를 보장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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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의 페르디난도와 이사벨라 공동왕에게 항해계획을 설명하는 콜럼버스

  그러므로 그가 서인도제도에 도착해서 한 가장 중요한 일은 동방물산 같이 이익이 될 만한 산물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 섬을 돌아 다녀 보아도 어디에도 후추 같은 돈이 될 만한 것들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어느 섬에서 사금이 나는 것을 발견하자 그는 두 번째 원정부터는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섬사람들에게 사금을 바치도록 강요했다.
 
  또 이들 원주민들을 노예화하여 강제노동을 시켰다. 1495년에는 550명의 원주민을 노예로 팔기 위해 스페인으로 데리고 귀환했다. 그 가운데 살아남아 스페인에서 노예생활을 한 사람은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또 사탕수수를 쿠바 섬에 이식함으로써 노예노동에 의존하는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의 기초를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착취적인 식민주의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나중에 아메리카에 들어간 유럽인들은 모두 그의 모범을 충실히 따랐다. 이렇게 보면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원주민, 나아가 비유럽인에게는 영웅도 위대한 인물도 아니다. 아메리카에 재난을 가져온 사악한 인간일 뿐이다.
 
  아메리카의 정복과 식민화
 
  코르테스와 피사로의 뒤를 이어 콩퀴스타도르라고 불린 수많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중남미 지역에서 정복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투기적인 모험가들로 그 가운데에는 귀족 뿐 아니라 평민, 흑인 노예 출신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군대를 모아 각지의 원주민 부족들을 정복함으로써 스페인의 식민지를 점차 확대했다. 이런 활동은 오지에서는 19세기까지도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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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정복자(conquistador)의 모습

  중남미의 거의 모든 지역을 스페인이 차지했으나 브라질만은 예외로 포르투갈에 속했다. 이는 로마 교황이 중재한 1494년의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해 두 나라의 세력권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의 모습이 제대로 밝혀지기도 전인 이때 벌써 두 나라가 세력권을 나누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거의 대부분의 중남미 지역에는 스페인 식민자들을 지배자로 하는 새로운 사회체제가 만들어졌다. 사실 원주민들의 기존 사회, 정치체제가 거의 무너지다시피 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아메리카의 정복사업은 국가와 교회의 공동사업으로 생각되었으므로 원주민들의 기독교화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원주민들의 신전을 무너뜨리고 많은 카톨릭 교회가 건설되었으며 토착민들을 강제 개종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반항하는 경우 학살 등 온갖 강압수단을 동원했다.
 
  초기의 식민자들 사이에는 여자의 수가 매우 모자랐으므로 스페인 정부는 원주민과의 혼혈을 적극 권장했다. 그래서 중남미 특유의 혼혈인인 메스티조 계급이 생겨났다. 메스티조는 스페인 정부로부터 원주민보다 우대를 받았다.
 
  나중에는 노예로서 아프리카 인이 많이 수입되며 이들과도 여러 형태의 혼혈도 이루어졌으므로 중남미 사회는 인종적으로 매우 복잡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 물론 백인이 가장 위의 서열에서 군림하게 되었다.
 
  스페인인 정복자들이나 그 후손, 또 새로 스페인에서 들어온 유력한 식민자들은 왕의 허락을 얻어 광대한 토지를 차지하여 대농장인 플랜테이션들을 건설했다. 그리고 원주민에 대한 강제노동을 이용하여 목축을 하거나 사탕수수, 담배 등을 경작했다.
 
  16세기 중반에는 큰 매장량을 가진 은광산들을 개발했다. 여기에도 대량의 노동력이 필요했으므로 많은 원주민 남자들이 징발되어 노예와 같은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그 결과 16, 17세기 내내 스페인의 세비야 항으로는 엄청난 양의 금, 은이 아메리카로부터 쏟아져 들어오게 된다.
 
  아메리카의 이런 엄청난 착취가 스페인을 16, 17세기에 유럽 최대의 부국으로 만든 바탕이다. 영국인과 프랑스인들은 중남미 지역에서도 활동했으나 북아메리카에 대한 침탈은 17세기 이후에야 본격화 했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7-12-06 오전 1:57:06


<14> 유럽의 해외팽창 ② 유럽은 어떻게 아메리카를 정복했나?


3) 15세기 말 유럽인의 해외진출은 무엇 때문에 가능했나
 
  창조적인 인물로서의 콜럼버스 신화
 
  콜럼버스가 탁월한 항해자라는 사실은 그 당대의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구할 수 있던 모든 지식과 정보를 수집하고, 자신의 오랜 항해경험에 바탕을 두어 면밀하게 항해계획을 세웠고 그것을 집요하게 실천으로 옮겼다. 결코 평범한 인물은 아니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콜럼버스를 상식을 넘어선 매우 창조적인 인물로, 또 비전과 영감을 지닌 철학적인 풍모의 인물로까지 그려왔다. '콜럼버스의 달걀'에 대한 일화가 그 한 예이다. 모든 사람이 그대로는 세우지 못한 달걀을 그가 한쪽 모서리를 깨뜨려서 테이블 위에 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신화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지구구체설과 관련된 것이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는데 그만이 지구가 둥글다고 믿었고 그래서 목숨을 걸고 대서양 횡단에 나섰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신념의 인간이자 그야말로 위대한 모험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날조된 이야기에 불과하다. 1828년에 워싱턴 어빙이라는 사람이 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생애와 항해>라는 콜럼버스의 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빙은 이 책에서 콜럼버스가 항해에 나서기 이전인 1486년에, 스페인 살라망카 대학에서 콜럼버스와 학자들, 성직자들 사이에 지구가 둥근지 평평한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던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른 이들이 모두 고대의 책들을 인용하며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한 데 비해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그 후 100년 이상 역사가들에 의해 여러 형태로 계속 되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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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인들은 지구가 평평해서 먼 바다로 나아가면 절벽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픽션이다. 당시의 교육 받은 유럽인들은 모두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당시의 스페인 어부들은 이미 대서양 한 복판까지 고기를 잡으러 다녔었다. 그러니 배가 먼 바다로 나아가면 절벽에서 떨어져 우주 깊은 곳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비상식적인 이야기이다.
 
  또 살라망카 회합에서 실제로 논의된 것은 대서양의 넓이에 관한 것이다. 이때 콜럼버스는 카나리아 제도에서 중국의 항주까지의 거리를 약 5,600km로 주장했다. 이는 당시 널리 받아들여진 견해인 토스카넬리의 8,000km보다 훨씬 짧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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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스카넬리 (Paolo Toscanelli dal Pozzo, 1397~1482)가 그린 세계지도
 
  피렌체의 의사이자 지리학자인 토스카넬리는 이미 1474년에 로마의 포루투갈 대사에게 서쪽 방향으로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는일을 후원하도록 포루투갈 왕에게 요청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토스카넬리는 이 편지의 사본을 콜롬버스에게도 보냈다.새로운 인도항로의 발견이라는 콜럼버스의 원래 생각이 이 편지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알수 없으나, 그는 아시아가 포루투갈에서 충분히 항해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토스카넬리의 견해로부터 많은 고무를 받았다.

 
 

  이런 사실은 이미 1940년대에 자세히 밝혀진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엉터리 신화를 믿고 있는 것은 콜럼버스의 창조성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이 허구에 의해 가려지고 있다.
 
  유럽의 배나 항해기술이 특별히 우월했나?
 
  15세기 말에 유럽인들이 아시아나 아메리카에 도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많은 서양 역사가들은 유럽 문화와 유럽인들의 우월성을 들고 있다. 이 시기에 항해술, 천문관측술, 조선술, 제도술(製圖術) 등의 여러 기술들이 발전했고 나침반, 태양의 고도를 재서 위도를 알게 해주는 사분의(四分儀) 등의 항해 기구들이 사용된 것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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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중세시대의 사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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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한나라 때의 나침반

  물론 이런 주장의 일부는 맞는 말이다. 15세기에 와서 유럽의 조선술이나 제도술, 항해술 같은 것이 많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침반이나 사분의, 또 화포의 사용도 일반화되었다. 그런 것들이 발전하지 못 했다면 장거리의 대양항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장도 많다. 우선 15세기 후반 유럽의 조선술이 전보다 많이 나아져 캬라벨이라는 원양 항해가 가능한 배들이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유럽의 배는 아직 규모도 작고 설비도 시원치 않았다. 15세기 말의 상황에서 유럽의 선박 건조술이나 항해술이 다른 지역과 비교해 특별히 뛰어난 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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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의 캬라벨 선

  사실 조선술이나 항해 기구, 항해술의 많은 부분은 비유럽지역으로부터 들어 온 것이다. 캬라벨 선의 앞, 뒤에 설치하여 배의 방향을 쉽게 바꾸게 하는 삼각돛은 이슬람 배를 모방한 것이며 나침반은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것이다.
 
  또 선박의 규모도 매우 작다. 콜럼버스가 기함으로 사용한 산타 마리아 호는 배수량이 기껏 80톤 정도의 작은 배로 선원 30-40명 정도 만을 태울 수 있었다. 다른 배들은 더 작아서 세 척의 배에 다 합쳐 104명의 선원이 탑승했을 뿐이다. 물론 나중에 더 커지기는 하나 그래도 당시 중국의 배와는 규모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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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럼버스는 산타마리아, 니나, 핀타 세 척의 작은 배를 이끌고 아시아를 찾아 나섰다.

  중국의 명나라 초기인 1405년과 1433년 사이에 환관인 정화가 이끄는 대함대가 7차례나 인도양으로 항해를 했다. 수백척으로 구성된 이 함대는 가장 멀리는 아프리카의 케냐 해안까지 도달했는데 그 가운데 정화가 탄 기함인 보선(寶船)은 길이가 약 120m이고 폭이 약 50m에 달했다. 이는 돛대가 9개에 배수량이 약 3천 톤으로 추산되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하게 큰 배였다. 유럽인들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크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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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화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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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화함대의 기함인 보선(寶船)과 산타마리아호의 비교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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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화의 항해로

  또 장거리 항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화 함대의 대원정은 말할 것도 없지만 아프리카 남단을 도는 항로는 바스코 다가마 이전에도 이슬람 상인들이 잘 알고 있는 길이었다. 방향만 다를 뿐이었다.
 
  또 헤로도토스의 <역사>에는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명을 받은 일단의 페니키아인들이 아라비아 만에서 출발하여 리비아(아프리카)의 남단을 돌아서 3년째 되는 해에 지금의 지브롤터 해협인 '헤라클레스의 기둥'을 지나 이집트로 귀환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미 수천 년 전에 고대인들이 아프리카 해안을 일주한 것이다. 그러니 15세기 말 유럽인들의 항해를 특별히 뛰어난 기술이나 문화능력의 산물로 볼 수는 없다.
 
  유럽인은 어떻게 아메리카에 도달했나
 
  그러면 아시아 국가들, 특히 태평양에 면해 있는 중국은 유럽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는데 왜 아메리카에 갈 수 없었을까. 그것은 중국의 해양정책이나 지리적인 이유와 관련이 있다.
 
  명나라는 건국 초기인 1421년에 도읍을 양자강 하구에 있는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겼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수도는 북쪽에 있었을 뿐 아니라 수도를 북으로 옮겨 아직도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몽골족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해금(海禁)정책을 취했다. 함부로 바다로 나아가는 것을 억제하려 한 것이다. 그것은 나라가 넓어 중앙집권을 중시한 중앙정부가 아마도 해안 지역에 강력한 상업 중심지가 생기는 것을 막으려고 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이후 중국은 해외무역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 1415년에는 남경에서 북경을 잇는 대운하가 다시 개통 되었다. 위험한 해로 대신 남북 간을 잇는 보다 안전한 수로가 확보된 것이다. 그러므로 해로의 효용성은 그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태평양은 너무나 큰 바다로서 쉽게 건널 수가 없었다. 풍향이나 조류가 복잡하고 중간에 쉴 수 있는 곳도 남태평양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작은 섬들뿐이다. 이 섬들을 중간 기착지로 이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반면 유럽인들은 아메리카로 나아가는 데 매우 유리한 입지적 조건을 갖고 있었다. 북아프리카 해안의 카나리아 제도에서 서인도 제도까지의 거리는 중국에서 멕시코의 아카풀코까지거리의 1/3에 불과하다. 또 대서양의 바람은 풍향이 비교적 일정하고 안정적이다.
 
  적도와 그 부근의 저위도 지역에는 무역풍이라는 동풍이 불고, 고위도에서는 편서풍이라는 바람이 연중 서쪽으로부터 불어온다. 이는 대서양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어부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바람이었다. 따라서 항해자들은 스페인에서 카나리아나 아조레스 군도 부근까지 내려간 다음에 무역풍을 타고 서인도까지 갔다가 편서풍을 타고 돌아 올 수 있었다.
 
  이 바람의 흐름을 더 멀리까지 확대하고 중간에 아메리카가 없다고 생각하면 아시아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해도 별 무리가 아니다. 콜럼버스가 이용한 것도 바로 이 바람이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에 먼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지리적 이점 때문이다. 콜럼버스의 '발견'은 이런 우연적인 요소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이다.
 
  아메리카는 왜 고작 수백 명씩의 스페인 군대에게 정복되었나
 
  당시의 아메리카에는 멕시코 지역에 아스텍 제국이 있었고 남미의 페루 지역에는 잉카제국이 있었다. 모두 상당히 많은 인구를 갖고 수준 높은 문화를 가진 대국가들이었다. 그 외에 중남미나 북미 지역에도 수많은 원주민 부족국가들이 산재해 있었다.
 
  그런데 이 대제국들은 스페인 군대의 공격을 받고 순식간에 멸망했다. 1521년에 에르난도 코르테스가 이끄는 고작 500명 정도의 군대가 아스텍 제국을 멸망시켰다. 그로부터 11년 후인 1532년에는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180명의 군대가 역시 잉카 제국을 붕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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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르테스의 초상 (Hernándo Cortés, 1485~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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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즈텍 왕 몬테주마를 만나는 코르테스

  그러면 인구 수천만을 가진 아메리카의 대제국들이 왜 고작 수백 명씩의 스페인 군에 의해 그렇게 쉽게 정복될 수 있었는가. 유럽의 무기가 발달했기 때문일까.
 
  당시 스페인군은 말이나 대포, 총을 갖고 들어가서 원주민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실제 전쟁에서 화포는 별로 유용하지 못했다. 습한 열대지역이라 화약이 눅눅해져 사용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보다 유용했던 것은 칼이나 창 같은 철제 무기이다. 원주민들은 흑요석 날을 박은 나무칼이나 곤봉, 끝에 구리 날을 박은 도끼 등을 무기로 사용했으므로 스페인인이 상대적으로 유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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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인들이 칼과 창으로 아스텍인들을 공격하는 모습 (Codex Du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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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요석날을 박은 나무칼로 무장한 아스텍 전사들

  그러나 스페인인들이 승리한 근본적 원인은 그들이 함께 갖고 들어온 천연두, 홍역, 티푸스 등 유럽의 병원균에 있다. 이에 대해 아무 면역력도 갖고 있지 않은 원주민들은 무력이 아니라 병균에 의해 정복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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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연두를 앓고 있는 원주민들

  코르테스의 군대가 멕시코 해안에 상륙하며 전염병이 각 지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전염병이 퍼지는 속도는 군대가 진군하는 속도보다 빨랐으므로 스페인 군대는 병을 뒤따라 진격한 셈이 되었다. 따라서 극심한 혼란 속에 빠진 멕시카(아스텍) 제국은 공격에 대해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없었다. 스페인군이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의 성벽을 넘었을 때 그들은 이미 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시체나,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피해가며 진군해야 할 정도였다.
 
  또 스페인군이 들어가자 다른 원주민 종족들의 반란군이 이에 가세했다. 이 원주민 종족들과의 동맹은 수도를 포위할 때 20만 명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20만 명의 대병력은 당시 유럽에서는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숫자였다. 이런 동맹세력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코르테스가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아스텍 제국이 이웃 종족들을 무력으로 복속시켜서 반감이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피사로가 잉카제국을 공격하러 갔을 때는 잉카제국도 이미 전염병으로 거덜이 난 뒤였다. 당시 인구 3천5백만 가운데 아마 2/3가 이미 죽은 것 같다. 그러니 사회, 정치체제가 거의 붕괴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왕까지 병으로 죽자 후계다툼이 일어났고 따라서 적을 막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중남미의 토착문명은 1550년경이면 모두 붕괴하고 만다.
 
  1492년의 아메리카 인구는 적게는 5천만에서 많게는 2억 정도까지도 본다. 그러나 1억 정도로 보는 사람이 많다. 이는 당시 유럽의 인구와 맞먹는 것이다. 그 가운데 3/4이 16세기 한 세기 동안에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또 17세기 중반이면 90%까지 줄어든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니 유럽인이 아메리카로 들어간 것이 아메리카인에게 얼마나 큰 참화를 가져다 준 것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7-12-04 오전 4:47:45


<13> 유럽의 해외팽창 ① 아메리카의 발견?


아메리카의 정복과 유럽의 해외팽창
 
  1) 아메리카와 아시아 항로의 개척
 
  동방무역과 인도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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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럼버스의 상륙

  15세기말은 서양인에게 매우 뜻 깊은 역사의 전환점이다. 이 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인도로 가려다가 우연히 아메리카로 가는 항로를, 바스코 다 가마는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유럽인들은 유럽을 벗어나 넓은 외부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렇게 두 사람이 모두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아 나선 것은 물론 아시아의 특산품 때문이다. 중국의 비단이나 자기, 인도의 면직물, 또 인도나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나는 후추, 정향, 육두구 등의 여러 향신료, 보석 등 유럽에서 비싼 값에 팔리는 동방물산을 직접 수입함으로써 큰 이익을 내기 위해서였다.
 
  1453년에 오스만 튀르크가 비잔틴제국을 무너뜨리고 중동 지역 전체와 동부 지중해를 장악함으로써 동방무역이 전보다 어려워졌다. 이 뿐 아니라 지중해에서 동방무역을 독점했던 것은 베네치아나 제노바 같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로서 다른 나라들은 여기에 끼어 들 수 없었다.
 
  이 당시에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 귀퉁이에 있는 포르투갈은 작지만 매우 독특한 나라였다. 이미 중세 말부터 제노바와 어울려 지중해 무역에 종사했을 뿐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다 파는 일에도 종사한 해양 국가로서 동방무역이 가져다주는 이익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으려 했고 1450년 대에는 엔리케 왕자의 주도하에 아프리카 중부의 카메룬 지역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프리카가 그들의 생각보다는 너무 큰 대륙이었고 당시에는 항해기술도 아직 부족했으므로 이 작업은 일시 중단되었다. 콜럼버스나 바스코 다 가마의 새로운 항로 개척은 포르투갈의 이런 해양 전통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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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르투갈 리스본(Lisbon)항구에 세워진 발견의 탑(Parao dos Descobrimentos). 앞에서 이끄는 사람이 항해왕자 엔리케

  아시아와 아메리카 항로의 개척
 
  다 가마는 포르투갈 사람이지만, 콜럼버스도 제노바 출신으로 일찍부터 포르투갈에서 활동했다. 포르투갈 귀족의 딸과 결혼했고 스페인 왕실의 후원을 얻기 전에는 포르투갈 왕실로부터 후원을 얻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다.
 
  스페인도 1492년에는 이베리아 반도의 남쪽 끝에 있는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 그라나다 왕국을 정복하여 이른바 '재정복사업'을 끝냈다. 그래서 사기가 충천해 있던 스페인 왕실은 콜럼버스의 모험적인 계획을 통해 해외진출을 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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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92년 그라나다 왕국의 함락
 

  그리하여 1487년에 바톨로뮤 디아즈가 아프리카 남쪽 끝인 희망봉에, 뒤를 이어 다 가마가 1498년에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캘리컷에 도달할 수 있었다. 또 콜럼버스는 1492년에 대서양을 서쪽으로 횡단하여 아메리카 땅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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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톨로뮤 디아즈와 그의 항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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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스코 다가마와 그의 항해로
 

  아시아와 아메리카로 가는 새로운 항로의 개척은 그 후 유럽 및 세계 역사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유럽의 경제적 번영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아메리카의 식민지화로 식민주의 시대의 문을 열었다. 길게 보면 18세기 후반 이후 확립되는 아시아나 아프리카에 대한 유럽의 지배권은 모두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아메리카와 인도 항로 가운데 서양 사람들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아메리카 항로의 발견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아메리카의 '발견'이라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면 아메리카의 '발견'은 왜 중요할까?
 
  2) 아메리카의 '발견' - '만남' - '정복'
 
  아메리카 '발견'은 창세기 이후 가장 중요한 일
 
  1992년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한 500주년이 된 해이다. 미국인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기념했다. 인디언들을 비롯한 반대 세력의 시위가 예상 되었으나 큰 일 없이 그대로 지나갔다. 반면 서기 2,000년의 브라질 '발견' 500 주년은 브라질 내 반대 여론 때문에 기념행사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그럼에도 미국에서의 1992년 행사는 100년 전인 1892년의 행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규모가 작은 것이다. 콜럼버스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가 과거보다 훨씬 커졌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도대체 왜 일어난 것일까. 왜 콜럼버스라는 인물의 업적을 다 같이 찬양하고 그의 아메리카 '발견'을 기념하지 않을까. 그가 한 일이 위대한 업적이 아니라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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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럼버스의 날'에 반대하는 포스터들
 

  사실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것은 콜럼버스 당시부터 유럽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그때까지 그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다고 믿었으므로 그렇게 생각했을 법도 하다. 그래서 자신들이 발견한 새로운 땅을 '신세계'라고 불렀다.
 
  또 유럽인들은 이 발견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것이 말할 수 없이 큰 혜택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멕시코 지역에 있던 아스텍 제국을 멸망시킨 정복자 에르난도 코르테스의 비서인 프란시스코 고마라라는 사람이 이런 생각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아메리카의 '발견'은 창세기 이후 일어난 가장 좋은 두 가지 일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하나가 예수의 탄생이라면 다른 하나는 '아메리카의 발견'이다.
 
  아베 레이날이라는 프랑스인은 1770년에 '신세계의 발견과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간 것만큼 인류에게 관심거리는 없다'고 말했다. 유명한 영국의 경제학자로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도 '아메리카의 발견은, 또 동인도로 가는 길을 발견한 것은 인류사에 기록된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18세기까지는 '발견'이 유럽인이 이룬 가장 중요한 업적이었다.
 
  이런 태도는 20세기에 와서도 기본적으로는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발견'은 지금까지도 많은 서양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발견'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미국의 경우 특히 그렇다. 그것은 미국 사람들이 자신의 역사를 쓸 때 그 단어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역사와 아메리카 '발견'의 의미
 
  17세기 초부터 북아메리카의 동해안에 정착하기 시작한 잉글랜드 식민자들은 콜럼버스의 '발견'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18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특별히 콜럼버스를 칭송하지는 않았다. 이런 태도는 1770년대의 독립전쟁 이후 갑자기 바뀐다. 새로 건국한 미국이라는 나라가 나름의 독특한 역사적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유럽이라는 구대륙의 낡은 전통이나 악습에서 벗어나 '신세계'에 새롭고 민주적인 공화국을 창설했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땅에 유럽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나라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땅 아메리카를 '발견'한 콜럼버스의 의미가 크게 중요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발견'이 갖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아메리카 땅의 소유권과 관련된 것이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주인 없는 땅'을 발견했고 그래서 그것을 먼저 선점한 유럽인에게 소유권이 있다고 주장해 왔다. 이렇게 주장해야 원주민들의 땅을 강탈한 것이 아니라 정당한 수단에 의해 취득한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아메리카가 반드시 '발견'되어야 했던 이유이다.
 
  이렇게 '발견'은 콜럼버스의 업적과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그 후 아메리카 역사의 해석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래서 특히 미국의 경우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은 미국사를 미화하는 여러 역사적 신화 가운데 하나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발견인가, 만남인가, 정복인가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발견'이 적합하지 않은 용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그것은 '발견'이라는 말이 아메리카에 이미 살고 있던 원주민들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이 침입하기 전인 15세기 말 당시 아메리카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런 땅덩어리를 '발견'했다고 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인도에 도착한 바스코 다 가마에 대해 유럽인들은 그가 인도를 발견했다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다.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갖고 있던 인도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아메리카를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메리카인의 존재와 그 문화를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래서 최근에는 '발견' 대신 '만남'(encounter)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도 있다. 유럽인과 아메리카인이 '만났다'는 것이다. 이런 표현은 '발견'보다는 낫지만 적절치 않은 것은 마찬가지이다. '만난다'는 것은 중립적인 표현이다. 우리가 모르던 사람을 만났다가 별 일 없이 헤어질 때는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다. 또 그 만남이 좋은 것이었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유럽인과 아메리카인의 만남은 그렇게 오가다가 우연히 만나고 그것으로 끝난 사건이 아니다. 이 사건으로 한 세기 반 동안에 아메리카 인구의 약 90%가 줄어들었다. 또 요행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유럽국가들의 식민지인이 되어 강제노동과 노예생활에 시달려야 했다.
 
  그 결과 아메리카의 전통적인 사회들은 거의 완전히 무너졌고 그 파괴적 영향은 50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도 이 사건을 '만남'으로 정의하는 것은 그것에서 도덕적 판단을 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서양 사람들이 요즈음 '발견'에서 조금 나아가 '만남'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 자체도 자신들의 죄과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는 뻔뻔스런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 이에는 더 적절한 표현이 있다.
 
  그것은 스페인인들이 멕시코나 페루에서 저지른 일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그들은 아스텍 제국과 잉카 제국을 비롯해 중남미에서 수많은 토착 정치체들을 정복하고 파괴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명백히 침략과 정복과 학살이지 발견이나 만남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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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스텍 제국의 신전 의식 (상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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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정복 전야의 아스텍 제국 (살구색 지역이 예속국가, 벽돌색은 동맹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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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복 직전의 잉카제국

  그러니 식민주의로부터 피해를 받은 비서양지역 사람들이 서양 사람들의 표현을 그대로 받아 들여 '발견'이나 '만남'으로 사용하는 것이 적절치 않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분명히 침략이나 정복 행위로서 다른 어떤 말로도 대치할 수 없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7-11-29 오전 12:34:18

 

<12> 부르크하르트와 르네상스 ③ 르네상스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

 

4. 인간의 존엄성과 르네상스 미술의 근대성
 
  인간의 존엄성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 시대에 인간의 존엄성이 강조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문주의를 인간중심적인 철학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을 찬미하는 태도는 르네상스의 새로운 발견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이미 예술의 창조자로서의 인간을 찬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정신을 육체적 세계와, 순수한 형태의 초월적 세계의 중간에 놓았다. 이런 생각은 나중의 신플라톤주의자나 많은 중세 사상가들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헬레니즘적 시대의 초기 스토아 학파도 우주를 신과 인간의 공동체로 보았으며 이런 생각은 로마 시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다른 피조물에 대해 인간이 우월하다는 생각은 구약성서의 창세기 등 여러 곳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초기 기독교 사상에서도 분명히 말하지는 않으나 역시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중세 기독교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받아들여진 것은 인간이 신의 이미지를 본 따서 만들어졌으며 또 구원될 수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이지 자연적 존재로서 인간이 가치를 가졌다고 믿었기 때문은 아니다.
 
  르네상스 시기에 와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주장은 지속적으로 보다 체계적으로 나타난다. 페트라르카(F. Petrarca)나 브루니(L. Bruni), 알베르티(L. Alberti), 마네티(G. Manetti) 같은 많은 사람들이 인간과 그 존엄성에 대한 관심을 표시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체로 인간이 현세에서 이룬 뛰어난 업적들을 그 존엄성의 증거로 내세웠다. 철학적 깊이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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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니 (Leonardo Bruni, 1370~1444)

  반면 피치노(M. Ficino), 피코(G. Pico)의 두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우주에 대한 철학적 체계 속에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피치노는 15세기에 플라톤의 모든 책들을 번역한 피렌체 사람이다. 그는 플라톤의 생각을 받아들여 이 우주의 가장 높은 곳에는 순수한 정신적인 존재인 신이 위치해 있고, 그 밑에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정신적인 것으로부터 물질적인 것까지 차례로 배열되어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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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치노 (Marsilio Ficino, 1433~1499)

  인간은 정신과 육체를 다 갖고 있으므로 이 계층 질서에서 정신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를 연결하는 접점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두 세계 모두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노력 여하에 따라 어느 쪽에도 다다를 수가 있다. 그래서 그는 이 질서 안에서의 인간의 이런 중심성과 보편성이 바로 인간 존엄성의 주된 근거가 된다고 믿었다.
 
  피코는 1496년의 <인간 존엄성에 대한 연설>이라는 글에서 피치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신이 완전한 우주를 만들기 위해 모든 정신적, 물질적 존재를 창조했으나 인간은 맨 마지막에 창조되었으므로 인간은 이미 완성된 질서 안에 어떤 정해진 자리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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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코 델라 미란돌라 (Giovanni Pico della Mirandola, 1463~1494)

  따라서 인간은 다른 어떤 피조물의 성질도 가질 수 있는 자유를 가졌으므로 그가 무엇을 발전시키느냐에 따라 식물, 동물, 천체, 천사, 나아가 신과도 일체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정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도, 본능을 추구하여 짐승 같은 존재가 되는 것도 마음먹기에 따른다는 것이다.
 
  피코의 이 주장은 신이 인간에게 무제한한 자유를 준 것으로, 따라서 신의 은총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기독교적 원리를 부정하는 예로 자주 인용된다. 부르크하르트도 이 점에서 피코를 매우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피코는 결코 기독교적 원리를 부정한 적은 없다.
 
  이들은 다른 르네상스인들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이 우주에는 초월적 힘이 존재하고 천상계와 지상계의 존재 사이에는 신비한 감응관계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점성술이나 다른 비학(秘學)을 믿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현대인들과 같이 인간을 그야말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또 피치노나 피코의 영향력은 별로 크지 않았다. 피치노의 영향은 그가 속한 좁은 집단에만 한한 것이었다. 피코의 글은 다른 사람들이 보았는지 조차 의심스러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러니 서양철학사에서 논리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만 보아 이들을 크게 부각시키는 것은 이런 역사적인 현실을 도외시하는 것이다.
 
  르네상스 미술과 진보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문화적 성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미술인 것은 틀림없다. 이 시기에 수많은 화가, 조각가, 건축가가 등장하여 풍요한 결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에서는 미술을 다루지 않았으나 다른 많은 글에서 르네상스 미술을 다루고 있으므로 그의 견해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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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가 열전』을 쓴 조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1511~1574)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미술이 뛰어나다는 주장을 처음 한 것은 16세기에 <미술가 열전>을 쓴 바사리이다. 이 책은 르네상스 시대 많은 미술가들의 전기인데 이 책에서 그는 미술에 있어서의 3단계 진보론을 주장했다. 그는 이전의 미술인 비잔틴 미술과 중세 고딕 미술을 비잔틴 양식, 게르만 양식이라는 말로 경멸했다. 또 르네상스 미술에서도 16세기에 비해 14, 15세기 미술은 낮추어 보았다. 미술사를 진보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뒤의 사람들이 바사리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서양미술사에서도 진보라는 관점이 정착되었다. 이는 19세기에 들어와 더욱 강화되었는데 부르크하르트도 기본적으로 그런 관점을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이 진보는 르네상스 미술이 '과학적'이라고 보는 주장과 결부되어 있는데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원근법이 발전되었고 그것이 기하학적 원리를 채용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명암법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곰브리치 등 많은 현대 서양 미술사가들은 원근법에 기초한 사실주의와, 세속주의 · 개인주의가 르네상스 미술을 중세와 단절시키고 근대의 문을 열었다고 생각한다. 즉 르네상스 미술의 근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원근법이 사용되고 명암법이 널리 사용되어 3차원적인 묘사가 어느 정도 가능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에 대한 세세한 묘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근대적인 자연적 사실주의가 발전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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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근법을 처음으로 사용해서 그린 마사치오(Masaccio)의 삼위일체 (Trinity, 1428).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 원근법은 완벽하게 사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상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다고 근대적이라는 할 수는 없다. 자연 사물에 대한 세세한 묘사는 어느 시대에도 존재했고 그것이 미술을 더 완전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 르네상스인들은 상상력을 사용하는 종교화나 역사화에 비해 대상을 직접 모사하는데 의존하는 정물화, 풍경화, 초상화는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사실적으로 그렸다고 근대적이라는 주장은 근대인의 편견일 수도 있다.
 
  르네상스 미술가나 미술 이론가들이 그림을 그릴 때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오르나토(ornato)와 릴리에보(rilievo)라는 두 가지 요소이다. 오르나토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아름답게 꾸며 그리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미술가들은 이를 계속 강조했다.
 
  릴리에보는 그림의 주된 대상을 부조와 같이 도드라지게,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효과를 말한다. 선 원근법이나 대기 원근법, 명암법은 릴리에보를 나타내기 위한 수단들이다. 앞에 있는 대상을 크고 뚜렷하게, 뒤에 멀리 있는 대상을 작고 흐릿하게 그림으로써 앞에 있는 대상을 부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빛이나 색깔의 명암도 대상을 뚜렷하게 표현하는데 동원된다.
 
  그러니까 원근법이나 명암법은 그것이 주된 표현수단인 것이 아니라 오르나토와 릴리에보를 나타내는 보조수단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르네상스 시대에 불완전하게 사용되었다. 17세기 화가들이 공간 자체에 관심을 가졌던 것과는 태도가 다르다.
 
  세속주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세속적 주제를 가진 그림은 1420년대에는 전체 그림의 약 5%정도였으나 1520년대에 가면 20% 정도로 증가할 뿐이다. 따라서 후기에 가서 세속주의가 보다 강해지는 것은 사실이나 그 비율은 그렇게 높은 것이 아니다.
 
  개인주의도 마찬가지이다. 미술사가들은 르네상스의 예술작품이 중세와 달리 개인적 스타일에 따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또 그림에 화가가 서명하기 시작했으므로 그것을 개인의 예술 작품으로 보려고 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중세 그림들에도 개인적 스타일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 르네상스 시대 미술가들의 그림은 거의 권력자나 부자들의 주문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지 개인의 예술작품으로 그린 것이 아니다. 게다가 중국 회화에서는 이미 당(唐)나라나 육조(六朝)시대부터 이미 낙관이 일부 사용되었고, 14세기인 원(元)대에 와서 일반화되었다. 따라서 이런 것을 갖고 르네상스 미술의 근대성, 개인주의적인 특성을 너무 강조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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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찬(倪瓚, 1301~1374)의 우산림학도(虞山林壑圖)의 일부. 원말 사대가의 한사람인 예찬은 제관(題款)이나 화찬(畵讚)을 쓴 다음 자신의 인장을 찍었는데 그 후 낙관이 일반화 되었다.

  5) 르네상스의 새로운 인식
 
  르네상스 문화의 절충성

 
  르네상스 문화는 전체적으로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미술 부분의 업적은 뛰어나다. 회화, 조각, 건축에서 모두 대단한 성과를 이루었다. 새 양식, 새 기술, 새 장르가 등장했다. 그러나 그리스, 로마적인 것을 모방하려는 경향도 강하게 나타났다.
 
  이탈리아어 문학의 경우는 단테나 페트라르카 이후 시(詩)없는 한 세기가 왔고 그 후 폴리치아노, 아리오스토 등이 등장한다. 이탈리아 산문도 14, 16세기는 뛰어나나 15세기는 비어 있다. 여기에서도 로마의 테렌스, 플라우투스, 세네카, 베르길리우스가 모범이 되었다.
 
  사상의 영역에는 브루노, 피치노, 마키아벨리 같은 유명한 인물들과 인문주의라는 주된 운동이 있다. 그러나 인문주의의 등장이 중세 스콜라 철학을 밀어낸 것은 아니다.
 
  또 당대인들은 자신들이 고대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고대와 중세 양쪽 전통에서 불완전하게 빌려왔다. 새로운 진보적 변화가 있었다 해도 그것은 반동적 요소와도 결합했다. 그런 의미에서 르네상스 문화는 절충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것으로 근대적인 문화라고 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부르크하르트가 주장하는 여러 근대적 변화들은 모두 몇 세기 후의 일들이다. 개인의 발견이나 신분제의 해체는 모두 18세기 말 이후 19세기의 일이다. 자연과학의 근대적인 발전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인문주의는 중요하나 그것이 새로운 형태로 서양 근대문화 속에 녹아드는 것도 19세기 이후이다. 근대국가도 18세기에 절대주의 국가들이 만들어지며 본격화한다. 세속문화의 발전도 18세기 계몽사상 시대 이후의 일이다.
 
  이렇게 근세의 명백한 특징들이 17, 18세기 이후에야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이런 변화들을 몇 세기나 앞당겨 르네상스의 시대적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정당화되기 힘들다.
 
  게다가 르네상스 문화는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도 아니다. 13세기 후반부터 비잔틴 제국에서 나타난 사실주의적인 그림 양식이나 고대 그리스 문학, 철학, 과학에 대한 집약적 연구가 큰 영향을 주었다. 이것이 이미 14세기 후반부터 비잔틴 학자들의 초빙을 통해, 또 비잔틴 제국이 망한 1476년 이후에는 많은 망명 학자들에 의해 전달되는 것이다.
 
  따라서 르네상스 문화의 독창성을 너무 강조하는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
 
  르네상스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
 
  사실 부르크하르트의 여러 주장들은 그가 처음 생각해낸 것도 아니다. 계몽사상 이후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종합하여 하나의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주장으로 묶어 낸 것이다. 말하자면 그가 완성시킨 르네상스의 모습은 18, 19세기의 세속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유럽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역사적 신화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는 이렇게 서양 학자들의 이데올로기적 태도에 의해 오랫동안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아 왔다. 또 그 과정에서 역사가 끊임없이 일직선적으로 발전한다고 믿는, 18세기 이후 서양인들이 만들어낸 진보사관과 굳게 결합하였다. 그리하여 르네상스가 서양 역사의 발전에서 뺄 수 없는, 본질적으로 중요한 한 단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았듯이 부르크하르트를 포함해 서양인들의 이런 주장은 이제 더 이상 그대로 받아들여지기가 어렵다. 그런 주장들의 많은 부분이 사실의 검증을 이겨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사이 서양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전체 서양 전통 안에서 르네상스의 위치에 대한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역사적 가정들이 고쳐질 때가 되었으며 점점 많은 역사가들이 이를 의식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더 극단적인 역사가들은 아예 르네상스의 존재 가치까지도 부정한다.
 
  더욱이 다른 문화권과의 비교작업은 부르크하르트적 해석의 타당성을 더욱 의심하게 한다. 서양인들은 세속주의나 인간중심주의를 르네상스 이후 서양문화의 산물로 이야기하나 실제로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은 일찍부터 세속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우주관, 인간관을 발전시킨 곳이다.
 
  종교적인 요소가 크지 않으며 이는 서양의 기독교 사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다. 서양인들의 전통적인 견해를 받아들인 우리는 무심코 오늘날 동아시아의 세속주의나 인간중심주의마저도 서양의 산물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근본적으로 다시 검토해 보아야 할 일이다.
 
  이렇게 '서양 근대문명의 흥기'라는 큰 논의 틀의 일부로 연구되어온 르네상스 연구는 이제 심각한 저항에 직면해 있다. 따라서 시대를 규정하는 이름만으로는 당분간 르네상스를 받아들인다 해도 부르크하르트가 강조하는 '근대성'이나 '진보'라는 관점에서 르네상스를 규정하는 일은 더 이상 받아들이기 어렵다. 르네상스에 대한 전적으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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