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동아일보 2005년 9월 10일 (토)
"[학력과잉 덫에 빠진 한국]너무 배워서 슬픈 사람들"
《서울의 유명 사립대 석사 출신인 김영민(가명·34) 씨는 몸담았던 보습학원이 잇따라 부도가 나자 지난해 말 학원 강사를 그만두고 서울 중구 남대문로 및 무교동 일대에서 ‘퀵서비스’ 일을 했다. 그러나 몇 번 오토바이 사고를 낸 뒤 지금은 서초구 잠원동의 한 자전거대리점에서 수리공으로 일하고 있다. 수입은 부정기적으로 받고 있는 월 45만 원 선이 전부. 수차례 초등학교 기능직 직원 자리에 응모했으나 ‘너무 배웠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다.》
한국 사회의 ‘학력 과잉(overedu-cation)’이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
지난해 말 현재 석사학위를 가진 취업자 10명 중 9명은 하향 취업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4년제 대졸 취업자 가운데 절반(49.5%)은 고졸 학력만으로도 충분한 업무를 맡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박사 출신 역시 절반에 가까운 44.8%가 하향 취업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본보가 최근 입수한 노동부 산하 한국노동연구원의 ‘청년층 고학력화에 따른 학력 과잉 실태 분석 보고서’에 따른 것이다. 이 보고서는 중앙고용정보원 측이 2002년과 2004년 통계청 자료 등을 이용해 작성한 ‘직종별 요구 학력’과 ‘산업 직업별 고용구조 조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프랑스 파리 1대학에서 8년 만에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박모(37) 씨는 한국 내에서 자리를 잡지 못해 지방 수능학원 강사를 지내다 현재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한 학사주점의 경리 겸 웨이터로 일하고 있다.
이 같은 학력 과잉 및 하향 취업 실태는 올해 직업훈련학교 입학생 추이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직업훈련학교는 고졸 이하 학력자들의 취업을 돕기 위해 마련된 1년 과정의 기능 훈련 프로그램.
올해 전국 21개 직업훈련학교에 입학한 6461명 가운데 4년제 대학 졸업자가 876명, 2년제 전문대 졸업자가 1334명이었다. 전문대졸 이상 고학력자가 전체의 31%를 차지한 것.
올해 충주 직업훈련학교에 입학한 L(29) 씨는 3년 전 지방 유수 국립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했다. L 씨는 “대학 4년 동안 시간과 돈만 낭비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2002년을 기준으로 국내 15∼19세 인구 가운데 학생 비율은 79.9%로 선진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79.4%)과 비슷했다. 하지만 대학생에 해당하는 20∼29세 인구의 학생 비율은 한국이 26.5%로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OECD 평균은 22.7%에 불과했다.
올해 2월 졸업한 전문대 이상 고학력자도 49만 명(2년제 전문대 22만 명, 4년제 대학 27만 명)으로 10년 전의 32만 명에 비해 17만 명(53%)이나 늘었다. 반면 대졸자들이 갈 만한 이른바 ‘괜찮은 일자리’는 오히려 줄고 있다. 30대 대기업 그룹, 공기업, 금융업 취업자는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에 158만 명이었다. 지난해에는 130만 명으로 28만 명이나 감소했다.
학력 과잉은 당연히 국력의 낭비와 사회 전반의 비효율을 초래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지난해 추산한 2년제 및 4년제 대학 졸업 비용은 6700만∼1억2000만 원. 이에 따라 대졸 출신 미취업자를 기준으로 산출한 사회적 비용만도 20조 원이 넘는다는 설명이다.
중앙고용정보원 박천수(朴天洙) 동향분석팀장은 “막무가내식 대학 진학으로 중소기업은 인력난, 대졸자들은 취업난을 겪고 있다”면서 “한국의 인적자원관리 시스템은 ‘학력 과잉의 덫’에 걸려 있다”고 진단했다.
김광현 기자 kkh@donga.com
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
"[학력과잉 덫에 빠진 한국]<上>학사 석사 박사가 넘친다"
서울시 한 구청 환경청소과의 H(37) 씨는 요즘 공인회계사 시험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성균관대 대학원을 졸업한 뒤 1996년 9급 공무원시험에 합격해 동사무소 등에서 일해 왔지만 가족을 비롯한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전직을 결심한 것. “말단 공무원이 되려고 대학원까지 다녔느냐”는 투의 눈총도 부담스러웠지만 앞으로도 단순 업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에 회의가 들어서다. 그러나 전직에 성공할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
올해 들어 서울시가 실시한 9급 공무원시험 합격자는 573명. 이 가운데 417명이 4년제 대학 졸업생이었다. 대학원 졸업생도 24명이나 됐다. 나머지는 전문대 졸업생 55명, 대학 중퇴자 76명, 전문대 중퇴자 1명이었다. 고졸자는 단 1명도 없었다.
▽터무니없이 낮은 하향 취업=요즘 공무원시험 대비 전문학원이 몰려 있는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학원가는 대졸 수강생들로 넘쳐난다. 문제는 9급 공무원의 업무가 굳이 비싼 학비를 들여가며 대학까지 졸업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것.
서울시 인사 담당자는 “9급으로 합격하면 동사무소나 구청에서 주민등록 등·초본, 호적초본 등을 떼어 주는 지극히 단순한 업무부터 시작한다”면서 “고졸 학력만으로도 충분한데 고학력자들이 합격하니 고졸 출신들이 설자리가 없어지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고학력자들의 하향 취업으로 저학력 노동시장의 왜곡이 심화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올해 초 인천지방해양수산청이 10급 기능직 등대원 1명을 모집하는 데 45명이 몰렸다. 이 가운데 전문대 이상 졸업자가 전체 응시자의 62%(28명).
국내 대형 증권사인 H투자증권은 단순 업무인 창구 여직원 선발기준을 그동안 고졸, 전문대졸에서 올해부터 4년제 대학 졸업자 이상으로 바꾸었다. 4년제 대학 졸업자만 해도 신청자가 넘쳐나기 때문.
중견 조선·중공업 그룹인 STX그룹이 올해 4월 실시한 상반기 신입 및 경력사원 채용에는 150명 모집에 6500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렸다. 신입사원 지원자 중에는 변호사, 공인회계사, 관세사와 해외 경영학석사(MBA)를 포함한 석·박사 학위 소지자만 채용 정원의 5배가 넘는 800명 정도였다.
대졸자가 고졸자에게 적합한 일자리를 얻기 위해 직업훈련학교에 대거 입학해 추가 교육을 받는 웃지 못할 사태도 벌어지고 있다.
채용 포털 사이트인 커리어의 김기태(金起兌) 대표는 “극심한 취업난 속에 고학력자와 전문 자격증 소지자의 하향 지원이 계속되고 있다”며 “하지만 하향 취업자는 직무에 대한 만족도가 낮아 입사 후에도 정착을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국가 인적자원 관리에 큰 장애=취업상담 전문가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한 대졸자에게 “일단 눈높이를 낮춰 취업해 경력을 쌓은 뒤 원하는 직장으로 가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학력 과잉과 하향 취업은 인재가 최대의 자원인 한국에서 장기적인 국가 경쟁력 강화에 큰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대졸자가 워낙 많다 보니 일부가 하향 취업을 해도 청년층(15∼29세) 실업률은 여전히 높다. 올 상반기 청년층 실업률은 전체 실업률 3.9%보다 2배가 넘는 8.4%였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하향 취업을 해도 문제다.
지방 국립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K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T(30) 씨는 지난 3년간 무려 11곳의 일터를 옮겨 다녔다. 그가 다녔던 직장은 월 급여 90만 원의 금형제작 공장에서 전자부품 조립라인에 이르기까지 전공과는 거리가 먼 생산현장의 보조역이었다. T 씨는 “지금도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직장을 찾고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절망적”이라고 털어놓았다.
중앙고용정보원이 2003년 기준으로 청년층 취업자 180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 학력 과잉인 취업자 가운데 현재 직장이 자신의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한다는 응답자는 10.2%에 불과했다.
▽대졸자가 너무 많다=학력 과잉은 수요 측면에서 보면 일자리 문제지만 공급 측면에서 보면 대학의 문제다. 일자리에 비해 너무 많은 대학생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셈이다.
1975년만 해도 대학생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 고교 졸업생 가운데 2년제와 4년제를 통틀어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 비율은 25.8%에 불과했다.
꼭 30년 후인 2005년에는 고교 졸업생 56만9272명 가운데 82.1%인 46만7508명이 전문대 또는 4년제 대학에 진학했다.
국내 학제가 외국과 달라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이는 선진국에 비해서도 월등히 높은 수준이다.
2002년을 기준으로 20∼29세 인구의 학생 비율은 한국이 26.5%로 선진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22.7%보다 높다.
한국개발연구원 우천식(禹天植) 산업·기업경제연구부장은 “대학 교육의 질적인 내용은 별도로 하더라도 우선 정원도 채우지 못하는 사립대는 자율적인 인수합병(M&A)이 이뤄지도록 유도해야 한다”면서 “국립대 정원은 정부가 먼저 나서 줄이는 것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광현 기자 kkh@donga.com
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
홍성철 기자 sungchul@donga.com
"[학력과잉 덫에 빠진 한국]대졸자 손익 따져보니…"
4년제 대학 졸업은 남는 장사일까.
한국노동연구원이 최근 내놓은 ‘고학력화와 임금소득 불평등’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사회적 지위, 체면, 결혼조건 등을 빼고 월급 측면만 한정해서 봤을 때 4년제 대학 입학은 그리 훌륭한 투자가 아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노동부의 ‘임금구조 기본통계조사(1983∼2003)’를 바탕으로 4년제 대학생이 졸업할 때까지 들어가는 비용을 산출한 결과, 1인당 총 1억1190만∼1억3071만 원이 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등록금을 비롯해 대학생활에 들어가는 비용이 9308만 원이고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사교육비가 2700만 원 안팎이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고등학교 때 드는 학원비, 과외비 등 사교육비는 한 달에 30만∼60만 원 선. 중학교 때는 그 절반으로 계산했다.
대학졸업자가 평균 만 21세부터 60세까지 근무한다고 했을 때 평생 받을 월급을 현재의 가치로 계산하면 2억5853만 원. 고졸 취업자는 1억6157만 원, 2년제 전문대학 졸업자는 2억2562만 원으로 추산됐다.
대졸자는 고졸자보다 9696만 원, 전문대 졸업자는 고졸자보다 6405만 원을 더 번다는 계산. 결국 대학교육에 들어가는 비용 대비 수익률은 ‘마이너스’인 셈이다.
더구나 고교 졸업자와 대졸자 간의 임금격차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4년제 대학졸업자는 1993년에 고졸자에 비해 2.2배를 받았으나 2003년에는 1.5배 수준으로 좁혀졌다. 미국은 정반대다. 미연방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80년 대졸 남자의 연봉은 1980년 5만2492달러로 고졸 남자의 3만6430달러에 비해 44% 많았다. 하지만 2000년에는 대졸 남자의 연봉이 6만9421달러로 고졸 남자의 3만6770달러에 비해 89%나 많았다.
노동연구원 안주엽 연구위원은 “미국에서 학력 간 임금격차가 벌어진 것은 중국산 저가 상품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값싼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줄었지만 기술 진보가 이어지면서 고학력 노동자에 대한 수요는 꾸준히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
"[학력과잉 덫에 빠진 한국]너무 배워서 슬픈 사람들"
《서울의 유명 사립대 석사 출신인 김영민(가명·34) 씨는 몸담았던 보습학원이 잇따라 부도가 나자 지난해 말 학원 강사를 그만두고 서울 중구 남대문로 및 무교동 일대에서 ‘퀵서비스’ 일을 했다. 그러나 몇 번 오토바이 사고를 낸 뒤 지금은 서초구 잠원동의 한 자전거대리점에서 수리공으로 일하고 있다. 수입은 부정기적으로 받고 있는 월 45만 원 선이 전부. 수차례 초등학교 기능직 직원 자리에 응모했으나 ‘너무 배웠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다.》
한국 사회의 ‘학력 과잉(overedu-cation)’이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
지난해 말 현재 석사학위를 가진 취업자 10명 중 9명은 하향 취업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4년제 대졸 취업자 가운데 절반(49.5%)은 고졸 학력만으로도 충분한 업무를 맡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박사 출신 역시 절반에 가까운 44.8%가 하향 취업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본보가 최근 입수한 노동부 산하 한국노동연구원의 ‘청년층 고학력화에 따른 학력 과잉 실태 분석 보고서’에 따른 것이다. 이 보고서는 중앙고용정보원 측이 2002년과 2004년 통계청 자료 등을 이용해 작성한 ‘직종별 요구 학력’과 ‘산업 직업별 고용구조 조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프랑스 파리 1대학에서 8년 만에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박모(37) 씨는 한국 내에서 자리를 잡지 못해 지방 수능학원 강사를 지내다 현재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한 학사주점의 경리 겸 웨이터로 일하고 있다.
이 같은 학력 과잉 및 하향 취업 실태는 올해 직업훈련학교 입학생 추이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직업훈련학교는 고졸 이하 학력자들의 취업을 돕기 위해 마련된 1년 과정의 기능 훈련 프로그램.
올해 전국 21개 직업훈련학교에 입학한 6461명 가운데 4년제 대학 졸업자가 876명, 2년제 전문대 졸업자가 1334명이었다. 전문대졸 이상 고학력자가 전체의 31%를 차지한 것.
올해 충주 직업훈련학교에 입학한 L(29) 씨는 3년 전 지방 유수 국립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했다. L 씨는 “대학 4년 동안 시간과 돈만 낭비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2002년을 기준으로 국내 15∼19세 인구 가운데 학생 비율은 79.9%로 선진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79.4%)과 비슷했다. 하지만 대학생에 해당하는 20∼29세 인구의 학생 비율은 한국이 26.5%로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OECD 평균은 22.7%에 불과했다.
올해 2월 졸업한 전문대 이상 고학력자도 49만 명(2년제 전문대 22만 명, 4년제 대학 27만 명)으로 10년 전의 32만 명에 비해 17만 명(53%)이나 늘었다. 반면 대졸자들이 갈 만한 이른바 ‘괜찮은 일자리’는 오히려 줄고 있다. 30대 대기업 그룹, 공기업, 금융업 취업자는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에 158만 명이었다. 지난해에는 130만 명으로 28만 명이나 감소했다.
학력 과잉은 당연히 국력의 낭비와 사회 전반의 비효율을 초래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지난해 추산한 2년제 및 4년제 대학 졸업 비용은 6700만∼1억2000만 원. 이에 따라 대졸 출신 미취업자를 기준으로 산출한 사회적 비용만도 20조 원이 넘는다는 설명이다.
중앙고용정보원 박천수(朴天洙) 동향분석팀장은 “막무가내식 대학 진학으로 중소기업은 인력난, 대졸자들은 취업난을 겪고 있다”면서 “한국의 인적자원관리 시스템은 ‘학력 과잉의 덫’에 걸려 있다”고 진단했다.
김광현 기자 kkh@donga.com
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
"[학력과잉 덫에 빠진 한국]<上>학사 석사 박사가 넘친다"
서울시 한 구청 환경청소과의 H(37) 씨는 요즘 공인회계사 시험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성균관대 대학원을 졸업한 뒤 1996년 9급 공무원시험에 합격해 동사무소 등에서 일해 왔지만 가족을 비롯한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전직을 결심한 것. “말단 공무원이 되려고 대학원까지 다녔느냐”는 투의 눈총도 부담스러웠지만 앞으로도 단순 업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에 회의가 들어서다. 그러나 전직에 성공할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
올해 들어 서울시가 실시한 9급 공무원시험 합격자는 573명. 이 가운데 417명이 4년제 대학 졸업생이었다. 대학원 졸업생도 24명이나 됐다. 나머지는 전문대 졸업생 55명, 대학 중퇴자 76명, 전문대 중퇴자 1명이었다. 고졸자는 단 1명도 없었다.
▽터무니없이 낮은 하향 취업=요즘 공무원시험 대비 전문학원이 몰려 있는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학원가는 대졸 수강생들로 넘쳐난다. 문제는 9급 공무원의 업무가 굳이 비싼 학비를 들여가며 대학까지 졸업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것.
서울시 인사 담당자는 “9급으로 합격하면 동사무소나 구청에서 주민등록 등·초본, 호적초본 등을 떼어 주는 지극히 단순한 업무부터 시작한다”면서 “고졸 학력만으로도 충분한데 고학력자들이 합격하니 고졸 출신들이 설자리가 없어지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고학력자들의 하향 취업으로 저학력 노동시장의 왜곡이 심화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올해 초 인천지방해양수산청이 10급 기능직 등대원 1명을 모집하는 데 45명이 몰렸다. 이 가운데 전문대 이상 졸업자가 전체 응시자의 62%(28명).
국내 대형 증권사인 H투자증권은 단순 업무인 창구 여직원 선발기준을 그동안 고졸, 전문대졸에서 올해부터 4년제 대학 졸업자 이상으로 바꾸었다. 4년제 대학 졸업자만 해도 신청자가 넘쳐나기 때문.
중견 조선·중공업 그룹인 STX그룹이 올해 4월 실시한 상반기 신입 및 경력사원 채용에는 150명 모집에 6500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렸다. 신입사원 지원자 중에는 변호사, 공인회계사, 관세사와 해외 경영학석사(MBA)를 포함한 석·박사 학위 소지자만 채용 정원의 5배가 넘는 800명 정도였다.
대졸자가 고졸자에게 적합한 일자리를 얻기 위해 직업훈련학교에 대거 입학해 추가 교육을 받는 웃지 못할 사태도 벌어지고 있다.
채용 포털 사이트인 커리어의 김기태(金起兌) 대표는 “극심한 취업난 속에 고학력자와 전문 자격증 소지자의 하향 지원이 계속되고 있다”며 “하지만 하향 취업자는 직무에 대한 만족도가 낮아 입사 후에도 정착을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국가 인적자원 관리에 큰 장애=취업상담 전문가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한 대졸자에게 “일단 눈높이를 낮춰 취업해 경력을 쌓은 뒤 원하는 직장으로 가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학력 과잉과 하향 취업은 인재가 최대의 자원인 한국에서 장기적인 국가 경쟁력 강화에 큰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대졸자가 워낙 많다 보니 일부가 하향 취업을 해도 청년층(15∼29세) 실업률은 여전히 높다. 올 상반기 청년층 실업률은 전체 실업률 3.9%보다 2배가 넘는 8.4%였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하향 취업을 해도 문제다.
지방 국립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K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T(30) 씨는 지난 3년간 무려 11곳의 일터를 옮겨 다녔다. 그가 다녔던 직장은 월 급여 90만 원의 금형제작 공장에서 전자부품 조립라인에 이르기까지 전공과는 거리가 먼 생산현장의 보조역이었다. T 씨는 “지금도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직장을 찾고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절망적”이라고 털어놓았다.
중앙고용정보원이 2003년 기준으로 청년층 취업자 180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 학력 과잉인 취업자 가운데 현재 직장이 자신의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한다는 응답자는 10.2%에 불과했다.
▽대졸자가 너무 많다=학력 과잉은 수요 측면에서 보면 일자리 문제지만 공급 측면에서 보면 대학의 문제다. 일자리에 비해 너무 많은 대학생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셈이다.
1975년만 해도 대학생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 고교 졸업생 가운데 2년제와 4년제를 통틀어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 비율은 25.8%에 불과했다.
꼭 30년 후인 2005년에는 고교 졸업생 56만9272명 가운데 82.1%인 46만7508명이 전문대 또는 4년제 대학에 진학했다.
국내 학제가 외국과 달라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이는 선진국에 비해서도 월등히 높은 수준이다.
2002년을 기준으로 20∼29세 인구의 학생 비율은 한국이 26.5%로 선진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22.7%보다 높다.
한국개발연구원 우천식(禹天植) 산업·기업경제연구부장은 “대학 교육의 질적인 내용은 별도로 하더라도 우선 정원도 채우지 못하는 사립대는 자율적인 인수합병(M&A)이 이뤄지도록 유도해야 한다”면서 “국립대 정원은 정부가 먼저 나서 줄이는 것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광현 기자 kkh@donga.com
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
홍성철 기자 sungchul@donga.com
"[학력과잉 덫에 빠진 한국]대졸자 손익 따져보니…"
4년제 대학 졸업은 남는 장사일까.
한국노동연구원이 최근 내놓은 ‘고학력화와 임금소득 불평등’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사회적 지위, 체면, 결혼조건 등을 빼고 월급 측면만 한정해서 봤을 때 4년제 대학 입학은 그리 훌륭한 투자가 아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노동부의 ‘임금구조 기본통계조사(1983∼2003)’를 바탕으로 4년제 대학생이 졸업할 때까지 들어가는 비용을 산출한 결과, 1인당 총 1억1190만∼1억3071만 원이 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등록금을 비롯해 대학생활에 들어가는 비용이 9308만 원이고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사교육비가 2700만 원 안팎이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고등학교 때 드는 학원비, 과외비 등 사교육비는 한 달에 30만∼60만 원 선. 중학교 때는 그 절반으로 계산했다.
대학졸업자가 평균 만 21세부터 60세까지 근무한다고 했을 때 평생 받을 월급을 현재의 가치로 계산하면 2억5853만 원. 고졸 취업자는 1억6157만 원, 2년제 전문대학 졸업자는 2억2562만 원으로 추산됐다.
대졸자는 고졸자보다 9696만 원, 전문대 졸업자는 고졸자보다 6405만 원을 더 번다는 계산. 결국 대학교육에 들어가는 비용 대비 수익률은 ‘마이너스’인 셈이다.
더구나 고교 졸업자와 대졸자 간의 임금격차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4년제 대학졸업자는 1993년에 고졸자에 비해 2.2배를 받았으나 2003년에는 1.5배 수준으로 좁혀졌다. 미국은 정반대다. 미연방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80년 대졸 남자의 연봉은 1980년 5만2492달러로 고졸 남자의 3만6430달러에 비해 44% 많았다. 하지만 2000년에는 대졸 남자의 연봉이 6만9421달러로 고졸 남자의 3만6770달러에 비해 89%나 많았다.
노동연구원 안주엽 연구위원은 “미국에서 학력 간 임금격차가 벌어진 것은 중국산 저가 상품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값싼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줄었지만 기술 진보가 이어지면서 고학력 노동자에 대한 수요는 꾸준히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