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한겨레 2009-05-08 18:08



[한겨레21] [표지이야기] 빈곤·차상위계층 지연·병주·수민·영희네 집에서 살펴본 ‘어린이 불평등’…

아이들에게 절대적 평등을


한국은 1991년 유엔 아동권리협약에 가입했다. 아동권리협약은 소득·국적·성별 등을 떠나 18살 이하 아동·청소년은 생존·발달·보호·참여권을 평등하게 제공받아야 함을 천명하고 있다. 현실은 그런가? 이명박 정부 들어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계층 의료지원 대상자를 되레 큰 폭으로 줄였다. 그들을 부모로 둔 아이들의 들리지 않는 비명이 무섭다.

1922년 처음으로 ‘어린이날’이 시작된 이래, 어린이에 대한 모든 주목은 차별 철폐에 있었다. 다만 말로만 그랬다. 이제 ‘어린이 시민’에 대한 ‘예외 없는 평등’을 제대로 보장할 때가 왔다. 5살까지는 생명권의 평등을, 12살까지는 교육권의 평등을 무조건 보장해야 한다. 한국 사회의 미래에 대한 최소한의 투자이기도 하다.

87회 어린이날을 맞아 <한겨레21>은 빈곤층 아이들의 실태를 직접 취재하고 정책적 대안을 모색했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어린이 절대평등 선언’도 내놓는다. 때마침 보건복지가족부와 서울대 산학협력단이 역대 최대 규모인 6900여 가정을 전화·심층면접 조사한 ‘한국 아동·청소년 종합실태조사’ 보고서를 내놨다. 가난한 아이들이 신음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편집자

영희(가명)는 초등학교 5학년이다. 학교 가기 전 아침은 6학년인 언니 선희(가명)와 직접 챙겨 먹는다. 반찬은 아버지(57) 솜씨다. 엄마(51)는 필리핀에서 왔다. 14년 전이다. 대부분은 결혼이민자 가정이라고 부르는데, 꼭 속을 뒤집으며 ‘잡종’이라 부르는 이도 있다. 영희도, 선희도 그런 일로 울진 않는다.

영희 아빠는 페인트공인데, 결혼 초기엔 벌이가 나쁘지 않았다. 아빠가 오토바이에 언니와 자신을 태우고 교외를 달리던 때를, 영희는 아스라이 기억한다. 언니는 사립 유치원에 다녔다. 매달 30만원을 냈다. 이듬해 영희는 초등학교 병설유치원으로 갔다. 10만원짜리다. 일감이 줄고 수입이 가벼워지면서 아빠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됐다. 처음 받았던 수급비 4만원이 이젠 36만원이 됐으니, 영희 나이 어느새 11살이다.

부모의 보호·양육

영희는 언니의 어렸을 적 얘기를 들으면 살짝 질투도 인다. 아빠는 4살 때까지 언니에게 책을 읽어줬다. 아빠는 “웅변으로 도의원 상을 받은 적도 있”어 언니도 영희도 곧잘 책을 읽어달라 졸랐단다. 하지만 그 기억, 언니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되면서 끊긴다. 집에 있는 책도 그 시절 산 게 유일하다. 닳고 닳았지만 아빠의 손때가 묻은 70만원짜리 동화책 한 질.

영희는 언니보다 ‘부모 참여형 양육’의 경험이 적다. 예를 들면, 함께 취미와 여가를 즐기는 경험이다. 한 가정 안에서 발생한 ‘소득 시차’가 자매의 유아기를 갈랐다. 거기다 엄마의 ‘부재’가 큰 영향을 미친 듯하다. 몸이 약해 이틀에 한 번꼴로 병원에 다니는 영희 엄마는 거의 종일 누워 있다.

1~2학년 때까지 자매는 한국말도 서툴러 좀 겉돌았고, 학습도 뒤처졌다. 성적은 비슷하다. 둘 다 35등 안팎(한 반 40여 명)이다. 뭇 아이들과의 한 줌 격차가 자매의 앞날을 어떻게 노정할진 알 수 없다. 명백한 건 시간이 갈수록 격차가 커지기 쉽고, 격차가 커질수록 전복은 어렵다는 점이다.

기자: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신 적 있습니까? 국가든, 민간이든 보조금을 받으신 적은요?

영희 아빠: 학원을 보내봤어야지, 보조금이 있는지 없는지 알죠.

영희는 언니와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한다. 음악학원을 가고 싶다 했지만, 자매는 아직 사설학원 경험이 없다. 집에 있는 악기도 리코더(피리)와 아빠가 다루던 북·장구뿐이다. 학교가 파하면 지역아동센터(공부방)로 향한다. 아빠·엄마는 영희가 무엇을 배우는지 잘 알지 못한다. 해질 녘 귀가하면 저녁밥을 차려먹고, 학교에서 지원해준 컴퓨터로 게임을 하거나 컴퓨터 음악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밤 11시가 훌쩍 넘는다. 자매가 집에서 책을 펴는 날은 많지 않다. 엄마는 누워 있고, 일거리가 없는 아빠는 무심히 소주 한잔 하러 나간다. 지난해 영희네 한 달 벌이는 40만~50만원이었다.

유소년기에 부모가 아이들과 체온을 나누는 일의 중요성을 새삼 재론할 까닭은 없다. 막상 부모가 아이들과 운동·바깥놀이 등을 얼마나 함께 하느냐 조사해봤더니, 0~2살 때 ‘빈곤층’(최저생계비 미만 소득·기초생활수급자)은 일주일 2회 이하(51.4%), ‘차상위계층’(최저생계비의 100~120% 소득)도 2회 이하(54.2%), ‘차상위 이상’(최저생계비의 120% 초과 소득)은 거의 매일(49.4%)이라고 답한 이들이 가장 많았다. 9~11살이 되면, 빈곤층은 1년에 2회 이하가 45.5%가 되는 반면, 차상위 이상은 21.8%밖에 되지 않았다. 아이들에겐 자신을 위해 부모의 건강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0~2살 자녀를 키우며 선천성 장애·만성 질병을 가진 빈곤층 부모는 18.5%, 차상위 이상 부모는 4.1%였다. 9~11살이 되면 빈곤층 31.5%, 차상위 11.1%, 차상위 이상은 6%로, 소득 격차에 기하급수적으로 비례하는 경향을 보였다(‘한국 아동청소년 종합실태조사’ 발췌·분석).

심신 건강·섭생

정부는 올 초 차상위계층 가운데 23만 명이 의료비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올 초 밝혔다. 예산 2622억원이 줄어든다. 기초생활수급자도 지난해보다 1만여 명 준다. 할머니와 살고 있는 지연(11·가명)이 그 사실을 알 리 없다. 차상위계층이다. 엄마가 집을 나간 뒤 한 달 남짓 아빠와 살다, 결국 할머니 집으로 옮겨왔다. 지연이 손에는 책가방과 옷가지 몇 개가 들려 있었을 뿐이다. 80대 할머니와 함께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반항적이 되기도 하고, 귀가가 늦어져 찾아보면 엄마가 일했던 식당 주변을 배회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아버지 집을 찾아간 적도 있다.

기자: 아버지가 알코올중독 상태여서 지연이가 많이 무서워했다는데도 아버지를 찾았나요?

사회복지사: 엄마와 헤어진 상태에서, 아빠랑도 분절되는 게 정말 힘들어서 찾아간 모양이에요.

고통이 시간을 재촉할 수는 없지만, 시간이 고통을 떠밀 수는 있다. 잊게는 한다. 하지만 그보다 지연이는 “4학년 되고 봄이 되면 데리러 올게”라는 엄마의 말을 믿고, “네가 건강하게 잘 지내야 엄마가 온다”는 주변의 말을 믿는 것이다. 지연이는 배가 자주 아프다. 매번 찾아가 치료하면서 지연이의 형편을 잘 알게 된 의사는 “원래 장이 약한 체질에다, 집안 문제로 받은 스트레스가 1순위 원인”이라고 말한다. 지연이 어떤 예방접종을 맞고, 어떤 접종을 더 필요로 하는지 아는 이가 없어질 것이다. 지난해부터 전국적으로 실시된 발달 건강검진은 15살까지만 할 수 있는데, 그 사실을 아는 이도 없다.

11살 병주(가명)네도 기초생활수급자다. 여느 가정과 닮았다. 아빠는 술을 좋아했고, 엄마는 식당일을 했다. 매달 70만원이 넘는 수급비가 병주의 ‘최저 생계’를 돌봤다. 10년이 넘었다. 그러니까 11살 병주의 고향은 서울이 아니라 ‘기초생활수급’이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특기적성으로 축구(화·목요일)를 즐긴다. 무료 점심으로 돌아서면 달려드는 허기를 달래고, 학교가 파한 뒤 가는 공부방에서 저녁도 공짜로 해결한다. 동갑내기 지연이도 하루 두 끼를 학교와 공부방 급식으로 해결한다. 상당수 빈곤 어린이가 그렇다. 급식 위생과 질이 곧 아이들의 건강, 국가의 미래가 된 것이다.

기자: 과일을 가족들과 마지막으로 먹은 때가 언젠가요?

병주 엄마: (힘들어하며) 1월에 딸기 3천원어치를 사다 먹었던 것 같아요. 전에도 한 달에 한 번씩은 먹었는데….

병주는 병원에서 태어났다. 어린이집을 6~7살에 다녔다. 다달이 10만원가량을 냈다. 기초생활수급자는 차상위계층에 견줘 지원이 일괄적이고 촘촘한 편이다. 정작 당사자들은 그런 복지 전달 제도를 깊이 알지 못한다. 지원을 받든 받지 않든 병주 엄마에겐 그 10만원조차 버겁다는 사실만 남기 때문이다. 병주를 임신한 채, 어린이날 유원지에 장사하러 나간 기억만 남기 때문이다. 병주를 낳고 병원에서 이틀 동안 몸조리를 했는데, 터무니없는 병원비가 나와 항의했고, 겨우 10만원을 돌려받은 기억만 남기 때문이다.

9~11살 때 10명 중 1명꼴로 “아침을 거의 먹지 않는다”고 답한 빈곤층 자녀들은 12~18살이 되면 10명 중 4명꼴로 는다. 식사 때 단백질을 매일 섭취한다고 응답한 경우 역시, 0~2살에서 빈곤층 가정 66%, 차상위 63.4%, 차상위 이상 75.4%였던 격차가 6~8살로 가면 빈곤층 62.5%, 차상위 79.9%, 차상위 이상 91%로 벌어졌다. 과일을 매일 섭취한다는 답변 비율도 빈곤층 65.3%, 차상위 58.4%, 차상위 이상 70.2%(0~2살)의 격차가 빈곤층 44.4%, 차상위 68.9%, 차상위 이상 74.6%(6~8살)로 벌어졌다. 0~2살 때 빈곤층과 차상위 이상 사이 5% 격차가 6~8년뒤엔 30%로 커진다는 말이다(‘한국 아동·청소년 종합실태조사’ 발췌·분석).

인지 발달

11살 해맑던 지연이의 표정이 바뀐 건 지난해 추석 즈음이다. 비극은 상투적이어서 더 비극이다. 아빠는 지연이 태어났을 때 음주운전 사고를 내 수감 생활을 했다. 엄마가 일을 했다. 가내공장에 다녔는데 임금이 연체된 채 문을 닫았다. 식당일을 구했는데 장사가 안 돼 또 월급이 밀렸다. 한 달 100만원가량을 애면글면 벌어왔다. 꼬막처럼 작은 지연이의 귀에 “내가 힘든데 너 때문에 (집을) 못 나가”라는 엄마의 넋두리가 결결이 박혔다. 무서웠다. 슬픈 예감은 그리고 빗나가지 않는다.

기자: 지연이 어머님이 언제 가출을 하신 건가요?

사회복지사: 지난해 추석 전이죠. 지연이가 일요일 낮에 울면서 제게 전화를 했어요. 엄마가 나갈 거라 해서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대요. 울면서 자기도 데려가라면서요. 그런 줄로 알았는데, 잠깐 안 보는 새 떠나버리셨다더군요.

수민(가명)이도 11살이다. 자신에겐 무료 급식이 있는데, 두 살배기 남동생에게 무료 분유는 왜 없는지 알 수 없으나, 동생 앞에선 이제 제법 의젓해진다. 엄마는 이제 30대 중반이다. 서울 강남이었다면 엄마는 꼭 ‘미시족’이 됐을 거다. 수민 엄마는 대신 차상위계층이란 이름을 얻는다. 공공근로로 생활비를 벌고 있다. 할머니, 삼촌 둘과 함께 수민이네는 한 지붕 6명이다. 엄마는 기초생활수급을 신청했었다. 관청에선 삼촌들의 수익을 따졌다. 기초생활수급 기준을 아슬하게 넘어선다. 엄마는 아이큐가 80~90대로, 정신지체장애 판정기준(아이큐 70)도 아슬하게 넘어선다.

경계를 포착하는 손길의 부재는, 복잡하고 요란한 한국 복지제도가 허망하게 내보이는 사각지대다. 수민이네 집에서 볼 수 있는 책은 10권이 안 된다. 얼마 전 동사무소에서 제공한 프로그램 덕에 수민이는 처음으로 가족나들이를 ‘경험’했다. 사례 관리를 해온 사회복지사는 “수민이 어머님은 보육·교육 의지는 많은데, 방법을 잘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지난해 아동방임 혐의로 어이없이 이웃들로부터 신고당하기도 했다. 아동보호 전문기관에서 지도교육을 받았다.

종종 성질을 누르지 못해 물의를 빚었던 병주도 올 초부터 지역아동센터와 병원에서 발달장애 상담·치료를 받고 있다. 손길만 있으면 효과는 빠르다. 그를 돌봐온 사회복지사는 “눈에 띌 정도로 온화해지고 사회성도 좋아졌다”고 말한다.

사회성 또는 인지 발달은 부모와의 밀착, 또래 교제, 탈스트레스, 예술활동을 통한 감각 자극 등으로 제고될 수 있다. 수민이의 두 살배기 동생이 11살 병주가 겪은 ‘시행착오’를 되풀이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여러 연구조사는 그 가능성을 주목한다. 이봉주 서울대 교수(사회복지학)는 “경제적 결핍으로 아동 발달에서 상당한 격차가 만들어지고, 나이를 먹을수록 증폭될 수 있는 씨앗이 된다는 점에서, 양육 단계에서부터 인지가 발달할 수 있는, 정신적 자극이 가능한 환경을 공정하게 제공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부모의 양육 능력·의지와 직결되는 양육 정보 원천 조사는 흥미롭다. 빈곤층이 양육 정보를 얻는 통로로는 0~2살의 경우 TV·책·인터넷이 33.4%로 가장 높다가, 9~18살에서는 ‘없음’이 1위였다. 반면 차상위 이상 계층은 6~18살에서 자녀 친구의 부모에 대한 의존율이 40% 안팎으로 가장 높다. 학부모회·학교 행사 등을 통해 아이들 또래 집단이 어른의 또래 집단과 동일화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어머니가 더 비싼 학원을 선택하면 정보를 공유하는 같은 무리의 어머니들도 뒤따르게 되고, 빈곤층과의 ‘수준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비행의 한 요소로 꼽는 결석(12~18살)의 경우, 빈곤층 아이는 1회 이상(8.2%)으로 차상위 이상(2.3%) 아이의 3.5배에 달했다. 아동의 정서적 안정과 결부되는 폭력 피해 경험(9~11살)은 빈곤층 68.9%, 차상위 63.2%, 차상위 이상이 60.5%로 소득에 반비례했다(‘한국 아동·청소년 종합실태조사’ 발췌·분석).

교육 그리고 꿈

지난 4월 말 병주는 엄마에게 리코더를 사달라고 조른다. “애들은 이제 이런 플라스틱은 안 써. 다 나무로 된 피리를 갖고 다닌단 말이야. 나만 얼마나 없어 보이는지 알아?” 엄마는 가슴이 조인다. 자꾸만 출시되는 신제품이 밉다. 듣자하니 나무 리코더는 수입품이다. 아, 그래서 그렇게 소리가 곱나 보다. 하지만 가격이 1만5천원. 그 돈이면 병주네 가정이 기초생활수급비로 받는 70만원의 2%에 해당한다.

기자: 뭐라고 달래면서 말리셨어요?

병주엄마: (울먹이며)….

수급 층위에 따라, 국가는 기초생활수급자에게 의료 혜택을 제공하고, 급식·보육료도 전액 지원한다. 전기료도 감면해준다. 지역 차가 있으나 중학생이 되면 교복도 제공한다. 영희네처럼 학교에서 컴퓨터도 받을 수 있다. 이 과정에는 보건복지가족부, 교육과학기술부, 지자체, 민간 후원단체 등이 저마다 관여한다. 하지만 무엇도 병주가 부모와 책을 읽거나, 깊이 대화할 환경을 주진 않는다. 수급비는 교육비가 아니라 철저히 생계비로 머문다. 병주는 엄마와 가족 여행도, 전시관도 가본 적 없다. 엄마는 숙제를 했냐고 자주 묻지만, 병주가 “내가 알아서 해” 하면 쭈뼛 돌아설 수밖에 없다. 병주 엄마는 만성 근육통 등을 앓고 있다. 생존·발달·보호·참여권을 평등하게 제공해야 한다는, 한국도 1991년 가입은 했다는, 유엔 아동권리협약은 병주에게 ‘나무 피리’나 마찬가지다. 소유할 수 없는 고운 소리다.

지연이는 4학년이 되면 학원을 다니고 싶다고 말해왔다. 주변에서 그런 또래를 점점 더 많이 보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 수업이 끝난 뒤 특기적성으로 컴퓨터 수업을 1시간 듣는다. 그리고 동네 공부방에 간다. 기초학습·독서 선생님들이 보건복지가족부에서 파견되어 아이들을 돕는다. 지연이가 영어를 경험한 곳도 여기다. 차상위계층은 대개 의료·보육비 지원에 국한된다. 공부방만 해도 기초생활수급자는 무료지만, 지연이는 1만원가량을 낸다. 집에 오면 학교에서 무료로 받은 컴퓨터를 하거나 TV를 보다 늦게 잔다. 예전에 엄마가 식당일을 마치고 밤늦게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던 습관이 남아 있다. 초저녁부터 잠드는 할머니는 이것도 힘들어한다. 지연이는 지난해부턴 학교에서 종종 나머지 공부를 한다.

기자: 지연이 꿈은 뭐라던가요?

사회복지사: 처음엔 아빠가 술 안 먹고, 엄마는 일 안 하고 자기를 돌봐주는 거라고 해요. 그래서 네가 되고 싶은 건 뭐냐 물으면 그냥 웃어요. 잘 모르겠다면서요.

영희의 꿈은 가수다. 병주는 축구 선수가 되고 싶다. 서울 강남권 등 상류층 아이들에게 꿈을 물으면 의사 대신 성형외과 의사를 말하고, 사장님 대신 벤처회사 최고경영자(CEO)를 꼽는다. 그만큼 구체적이고, 주변 환경의 영향이 지대하다는 말이다.

11살 동갑내기인 지연·병주·수민의 학교 성적은 그리 좋지 않다. 12살 영희도 30위권이다. 환경결정론은 허점이 많고 위험하다. 다만 아이들이 스스로 자라지 않는다는 사실도 명백하다. 이순형 서울대 교수(아동가족학)는 “초등학교 들어오면서 이미 아이들의 격차가 심화되고 있다”며 “인지적 발달 차가 학력 차로 나타나고 그 격차가 다음 세대 아이들의 계층을 결정할 가능성이 크므로, 보상 교육의 책임이 바로 국가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빈곤층에서 3~5살 자녀에게 들이는 사교육비(월평균)는 학원비(21만2천원), 보육비(10만4천원), 학습지(5만7천원), 기타(6만4천원) 순으로 높았다. 차상위계층은 개인과외(20만원), 보육비(15만4천원), 학원비(14만1천원), 학습지(4만8천원), 기타(17만원) 순이다. 차상위는 외부로부터 다른 경제적 도움이 없어 사교육 지출 여력이 많지 않음을 뜻한다. 6~8살이 되면 빈곤층은 과외비(16만3천원), 학원비(12만2천원) 비중이 높았고, 차상위는 학원비(19만원), 과외비(12만5천원), 기타 사교육(11만원)이 많았다. 차상위 이상은 기타 사교육(26만2천원), 학원비(24만6천원), 과외비(14만5천원) 비중이 높았다. 소득 격차에 따라 사교육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비용도 단위당 10만원 이상이 벌어진다(‘한국 아동·청소년 종합실태조사’ 발췌·분석).

엄마가 가출할 때 매달리며 울었던 지연이는 학교나 집보다 공부방에서 더 활발하다(이 공부방은 예외적으로 중산층 가정 아이들도 많다). 지연이네는 기초생활수급자보다 형편이 어렵지만, 그만큼의 지원은 받지 못한다. 할머니도 아이를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다. 최근 인천 남동구의 김아무개(10)양이 엄마가 생계용 승합차를 소유한 탓에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냈다. 이후 소녀는 엄마와 새 보금자리를 얻었다. 어린이날에 지연이, 병주, 수민이, 영희도 울고 매달리며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야 할지 모른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한겨레21] [표지이야기] 6923가구 대상 ‘어린이 불평등’ 실태 최초 보고서 요약…

인지 발달 지수도 빈곤층이 높다가 2~3살에 역전


때로는 숫자가 말을 건다. 보건복지가족부와 서울대 산학협력단이 최근 내놓은 ‘2009 한국 아동·청소년 종합실태조사’는 어린이의 계층·지역별 격차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 조사보고서다. 2007년 12월31일 주민등록인구 통계를 기준으로 전국 6923가구를 소득계층별·지역별로 표본추출해 조사했다. 그 결과를 담은 300여 통계표의 수치들은 가난한 어린이들을 대신해 묻는다. “우리 이렇게 자라도 되는 건가요?”

절대빈곤에 몰렸어요 빈곤층은 가구 소득이 최저생계비 이하인 경우다. 이런 가정에서 자라는 어린이의 비율을 ‘아동·청소년 절대빈곤율’이라 부른다. 한국 어린이들의 절대빈곤율은 7.8%다. 이들 빈곤층의 월평균 총소득은 약 92만원이다. 조금 사정이 나은 경우를 ‘차상위’ 계층으로 분류한다. 최저생계비의 100~120% 정도의 가구소득을 올리는 경우다. 그래봐야 월평균 총소득이 144만원인데, 이런 가정에서 자라는 어린이는 4.2%다. 둘을 더하면 12.0%다. 한국 어린이 가운데 열에 하나 이상은 140여만원 미만의 월수입을 올리는 가정에서 자라고 있다는 얘기다. 두 빈곤층을 제외한 나머지가 ‘차상위 이상’ 계층이다. 월평균 357만원을 번다.

가난에는 국적도 있다. 최근 2년 사이에 태어난 빈곤층 아기들의 10.9%(0~2살 기준)는 부모 가운데 한 명이 다른 나라에서 왔다. 같은 연령대의 차상위 이상 계층에서는 그 비율이 2.6%에 불과하다.

한부모와 살아요 빈곤층에 해당하는 12~18살 어린이의 58%는 ‘한부모’ 가정에서 지낸다. 나이를 먹을수록 한부모 가정의 비율은 점차 늘어난다. 18.8%(0~2살), 36%(3~5살), 38.2%(6~8살), 50.8%(9~11살)의 순이다. 부모와 이별하는 일도 알고 보면 가난한 집 이야기다. 차상위 이상층 아이들 가운데 6.5% 정도(12~18살 기준)만 한부모 슬하에서 자란다.

대신 가난한 아이들은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가 키운다. 주 양육 담당자를 조사했더니, 빈곤층 3~5살 어린이의 20.8%를 조부모나 친척이 주로 기르고 있었다. 차상위 이상층 아이들 가운데는 4.6%만 이에 해당한다.

혼자 놀고 공부해요 부모가 일하러 나가면, 가난한 집 아이들은 혼자 지낸다. 부모건 조부모건 친척이건 아이를 주로 맡아 기르는 이를 ‘주 양육자’라 한다. 이들 주 양육자가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시간을 조사했다. 6~8살 아이를 둔 빈곤층 양육자의 13.1%만 ‘거의 매일’ 책을 읽어준다. 차상위 이상층은 44.1%가 그렇게 한다. 책 읽어주는 시기가 끝나면 학교 숙제가 시작된다. 12~18살 자녀를 둔 빈곤층 부모의 5.7%만 매일 아이의 숙제나 학업을 돕는다. 차상위 이상층 부모(15.5%)의 3분의 1 수준이다.

부모와 함께하는 일에 돈이 든다면, 자녀-부모 사이의 거리는 더 벌어진다. 차상위 이상층 부모의 66.5%가 한 달에 1회 이상 아이와 함께 외식한다. 빈곤층은 28.3%만 그렇다. 아이와 함께 한 달에 1회 이상 쇼핑하는 차상위 이상층 부모는 49.8%다. 빈곤층 부모는 23.5%만 그렇게 한다. 차상위 이상 부모의 23.4%가 한 달에 1회 이상 아이를 데리고 나들이를 한다. 빈곤층 부모는 15.1%만 그렇다. 영화나 공연 관람(빈곤층 7.1%, 차상위 이상층 14.1%), 여행(빈곤층 1.2%, 차상위 이상층 3.4%) 등도 마찬가지다(이상 12~18살 기준). 이번 조사는 외식과 나들이의 ‘질’에 대해선 따로 묻지 않았다. 그 대목에 이르면 격차는 더욱 커질 것이다.

원래부터 둔한 건 아니었어요 가난이 부모와 자녀를 떼어놓으면, 아이는 또래의 부잣집 아이들보다 뒤처지기 시작한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한갓 옛이야기임을 이번 조사는 생생히 입증한다. 8살을 기준으로 사회적 사고력 지수(빈곤층 11.84 < 차상위 이상층 12.32), 수리적 사고력 지수(빈곤층 22.73 < 차상위 이상층 22.90), 과학적 사고력 지수(빈곤층 6.75 < 차상위 이상층 6.86) 등에서 가난한 집 아이와 부잣집 아이의 격차가 벌어진다. 이를 포함해 24개 분야의 인지·언어 발달 영역 모두에서 빈곤층과 차상위 이상층 아이의 차이가 발생했다.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모두 24개 인지·언어 발달 영역 가운데 14개 영역에서 0~2살 빈곤층 어린이의 발달지수가 차상위 이상층보다 높았다. 1살 아기들의 언어 발달 능력을 보면, 듣기(빈곤층 5.35 > 차상위 이상 5.13), 말하기(빈곤층 6.42 > 차상위 이상 6.33), 쓰기(빈곤층 0.74 > 차상위 이상 0.66) 등에서 모두 빈곤층 아이들이 조금씩 앞선다. 그러나 2~3살 이후부터 이런 수치가 역전된다. 4살을 기준으로 보면, 듣기(빈곤층 8.47 < 차상위 이상 8.70), 말하기(빈곤층 16.36 < 차상위 이상 18.28), 쓰기(빈곤층 5.00 < 차상위 이상 6.32) 등에 걸쳐 모두 부잣집 아이들의 발달지수가 훨씬 높다.

아이들의 타고난 능력조차 가난이 짓누른다는 의미일까? 조사연구팀은 일단 ‘과잉 해석’을 경계했다. 이순형 서울대 아동복지학과 교수는 “조사관들이 빈곤층 아이들을 면접하면서 좀더 친근하고 상세하게 임하는 등의 ‘바이어스’(편향성)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실은 더 똑똑하다’는 가설은 이번과 같은 조사를 몇 해에 걸쳐 반복한 뒤에야 확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이 아파요 이런 일은 신체 발달 상태에서도 드러난다. 역시 과잉 해석할 일은 아니겠지만, 이번 조사를 보면 0~2살 아이들 가운데 빈곤층 영유아의 체중과 신장은 각각 11.8kg, 85.6cm로 나타났다. 차상위 이상층 영유아는 11.4kg, 82.3cm다. 그러나 12살이 지나면 차상위 이상층 어린이들의 덩치가 조금 더 커진다.

대신 빈곤층 아이들은 병원을 자주 간다. 1년간 외래 진료를 받은 횟수를 봤더니 빈곤층의 영유아(0~2살)는 15.1회, 차상위 이상층의 영유아는 그 절반인 8.6회로 나왔다. 나이가 들면 아예 입원하는 경우가 늘어난다. 12~18살 기준으로 빈곤층 어린이의 14.5%가 지난 1년간 병원에 입원한 경험이 있었다. 반면 차상위 이상층 어린이는 3.5%만 입원했다.

아픈 데는 이유가 있다. 가난한 아이들은 밥을 못 먹는다. 12~18살 빈곤층 어린이 가운데 아침(38.8%), 점심(1.2%), 저녁(3.6%)을 거르는 비중이 여전히 높다. 특히 빈곤층 부모들을 상대로 식생활에 대한 주관적 인식을 조사한 결과가 놀랍다. 0~2살 아이를 둔 빈곤층 부모 가운데 ‘먹을 게 떨어져도 살 돈이 없다’고 답한 경우가 32%에 이르렀다. 객관적으로 식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가난하다는 건 아니지만, 주관적으로 ‘먹을 것을 충분히 사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차상위 이상층에선 3.9%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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