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한겨레21 기사입력 2009-01-16 18:07


[한겨레21]
선진국에 비해 2배에 이르는 종사자 수, ‘과잉’을 흡수할 수 있는 일자리 마련 대책을…

21세기 한국 사회에는 이전 세대에 없던 계급 구분법이 존재한다. 전체 노동인구의 3분의 1씩을 대표하는 ‘정규직’ ‘비정규직’ ‘자영업자’라는 3가지 계급이 그것이다. 상대적 약자인 자영업자와 비정규직은 혹시나 미국발 금융위기의 파도에 휩쓸릴까 눈을 부릅떠야 할 처지다. 허술한 복지 체계와 극심한 고용불안은 한국 경제의 고질병이 된 지 오래다. 한국인에게 일터와 쉼터를 박탈당한 ‘잡리스’(Jobless)와 ‘홈리스’(Homeless)는 먼 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이다. ‘자영업 3차 대란’을 경계하는 노란 신호등 앞에서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21세기 한국, 새로운 계급구분법

통계청 자료를 보면, 2006년 한국의 전체 취업자 중 자영업자 비중은 33.6%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으뜸이다. 자영업 초과잉 사회는 어떻게 형성됐을까? 김병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연구센터장은 비밀을 푸는 열쇳말로 ‘농민’을 지목한다. 선진국의 농업인구가 통상 경제활동인구의 4% 수준인 데 비해, 1980년 한국은 국민의 4분의 1이 농촌에 살면서 농업을 주 생계 수단으로 삼고 있었다. 60~70년대 진행된 산업화로 이미 대규모 이농이 이뤄진 상태였지만, 농업 종사자 수는 여전히 자영업자의 갑절이었다. 쌀값은 중요한 경제 이슈였고, 농민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지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였다. 민주화 세력이 노동자와 함께 농민을 사회 변혁의 주체로 인정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90년대 들어 상황은 극적으로 변한다. 제조업의 성장 및 ‘세계화’와 맞물려, 농산물 수입개방으로 표현되는 일종의 ‘농업 포기 정책’이 농민들의 도시 유입을 추동했기 때문이다. 94년 국내 자영업 인구는 500만 명에 이르고, 농업 인구는 250만 명 밑으로 떨어진다. 97년에 닥친 외환위기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정규직화와 자영업자화를 불러 ‘초과잉 자영업 사회’를 만들어낸 주범이었다. 김 센터장은 한국 자영업자 수가 선진국 자영업 인구의 2배를 넘으면서도, 비전문적 분야에만 집중 분포된 원인을 기형적 산업·노동 구조에서 찾는다. 그리고 5년여 뒤인 2003년 닥친 신용카드 사태는 자영업 위기를 심화시켰다. LG카드를 비롯한 신용카드사들의 회사채가 부실로 이어져 거래가 중단되면서 자본시장이 혼란에 빠졌다. 2002년 말 101조원에 이르렀던 신용카드사의 현금서비스 이용한도는 2003년 9월 58조원대로 축소됐다. 같은 기간 263만 명이던 신용불량자 수는 350만 명으로 급증했다.


그리고 2008년. 한 해 동안 자영업 인구는 7만여 명 감소했다. 2007년 말부터 원자재 가격과 소비자물가가 동시에 오르면서 마진 압박을 받게 된 게 일차적 요인이었다. 무슨 뜻일까? KB국민은행연구소의 강경훈 연구원은 “경쟁이 심한 산업구조와 소비 감소 상황에서, 매출원가에 영향을 미치는 생산자물가의 증가분만큼 가격에 반영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고 분석한다. 예컨대 세탁소가 한 골목에 몇 곳씩 있다 보니 전기요금·수도세가 오른 만큼 세탁비를 올리기가 힘들다는 말이다.

결국 ‘자영업 대란’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열쇳말은 ‘과잉’이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10월 발표한 자료를 보면, 국내 서비스업 생산지수(2005년을 100으로 해서 서비스업체의 영업수익 성장세를 보여주는 지표) 증가율은 2007년 3분기(7.2%) 이후 지속적으로 낮아지는 추세를 보인다. 2008년 8월의 1.6% 증가율은 2005년 4월(0.4%)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국세청의 ‘국세통계연보’ 자료에 따르면, 2007년 폐업한 개인사업자는 모두 84만8062명에 이른다. 개인사업자 폐업 건수는 2003년 81만5738건에서 2004년 69만9292건으로 줄었다가 2005년(75만3994건), 2006년(75만7744건)엔 반등하는 양상이다. 다행히 지난해 9월부터 원자재 가격 하락과 환율 안정으로 물가상승률은 둔화됐다. 그러나 곧장 미국발 금융위기가 실물위기로 번지면서 자영업자들은 더 큰 시련을 만나게 됐다. 내수가 꽁꽁 막힌 터에, 기업들의 구조조정에 따른 신규 자영업자들의 유입까지 코앞에 닥쳤다. 그래서 문제의 핵심은 자영업 감축이 아니라 적절한 일자리 창출일 수도 있다.

‘현재 사업을 유지하겠다’ 84.6%

자영업자들 스스로 바라보는 현재의 경제 상황은 엄중하다. 소상공인진흥원이 지난해 11월 소상공인사업체 440곳을 조사한 결과, 응답 업체의 58.9%가 ‘최근 6개월간 매출이 감소했다’고 밝혔다. ‘거의 변동이 없다’와 ‘매출이 늘었다’는 응답 비율은 각각 31.9%와 9.3%였다. 업종별로는 특히 욕탕업(86.2%), 노래방(68.8%), PC방(60.0%), 세탁소(60.0%) 등 종사자들의 응답에서 매출이 줄었다는 비율이 높았다. 중식당, 의류 판매, 부동산중개소 업종만 불황의 그늘에 놓여 있는 게 아니다. 매출 감소 이유로는 ‘물가 상승으로 고객의 씀씀이 감소’를 꼽은 응답이 26.9%로 가장 높았다. 다음으로 ‘내수 경기 위축’(21.4%), ‘소형 업체와의 경쟁 심화’(19.7%), ‘판매 부진’(16.4%) 등의 차례였다.

이들 소상공인에게 지난 6개월간의 사업운영 실태를 물었더니, ‘현상 유지’라는 응답이 60.5%로 가장 높았다. ‘흑자’와 ‘적자’라는 응답은 각각 22.9%와 16.6%였다. ‘적자 상태’라는 응답이 많았던 업종은 욕탕업(31.0%), 이용업(24.2%), 제과점(23.7%) 등이었고, ‘흑자’라는 비율이 높은 업종은 제과점(34.2%), 숙박업(28.6%), PC방(26.7%) 등의 차례였다.


조사대상 업체들은 향후 사업 전망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전체 응답자의 55.4%가 ‘나빠질 것’이라고 응답했으며, ‘변동 없을 것’과 ‘좋아질 것’이라는 응답은 각각 32.0%와 12.6%였다. 부정적 시각은 노래방(75.0%), 이용업(70.6%), 슈퍼마켓(66.1%) 등에서 두드러졌다. 흥미로운 것은 소상공인 사업체들이 미래를 비관하면서도 ‘현재 사업을 유지하겠다’는 응답(84.6%)이 사업을 접거나 새로운 길을 찾겠다는 의견을 압도했다는 점이다. 이는 자영업에서 퇴출되면 갈 곳이 없는 현실이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경제’라는 기계를 작동시키는 에너지는 돈의 흐름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개인사업자들의 ‘돈줄’이 말라가는 상황에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낸다. 2008년 6월 말 현재 예금은행 개인사업자 대출은 135조원으로 전체 기업대출 478조6천억원의 28.2%를 차지하고 있다. 은행권의 개인사업자 대출은 2005년 2분기부터 증가하기 시작해 2007년 말까지 매년 증가세가 확대됐다. 이는 주택담보대출 규제가 강화되면서 은행들이 개인사업자들을 상대로 한 대출 실적 쌓기에 열을 올렸기 때문이다. 2004~2005년 개인사업자 대출 순증가액은 5조8천억원인 데 비해, 2006~2007년엔 32조8천억원이나 됐다. 그러나 2008년 상반기 들어 상황은 다시 반전됐다. 중소 건설사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부실과 환율 급등 등으로 대출 공급이 크게 줄어들었다. 개인사업자 대출의 연체율이 2008년 상승세로 돌아선 것도 심상치 않다. 예금은행의 1개월 이상 연체율은 2007년 4분기 0.6%를 기록했지만, 2008년 1·2분기엔 0.7%로 상승했다.

자영업자여, 조직하라

그렇다면 자영업 파국을 막기 위해 지금 급한 조처는 무엇일까? 일단 금융시장의 유동성 경색에 따라 좁아진 돈의 수도관을 뚫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LG경제연구원의 오문석 상무는 “자영업은 규모가 작고 경기에 워낙 민감하기 때문에 특별한 처방을 내리기 힘들다. 그렇다고 방치하면 소비 침체와 신용불량자 양산 같은 사회문제로 이어질 수도 있다. 내수를 살리는 게 핵심이겠지만, 일단은 소상공인과 신규 창업자에 대한 대출 길을 열어주는 금융 지원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진보적 싱크탱크들은 지금이 도시 자영업 문제의 근본적 대안을 마련해야 할 때라고 제안한다. 시민경제사회연구소의 홍헌호 연구위원은 “600만 자영업자가 과잉이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이들을 다른 일자리로 흡수시킬 것인지가 중요하다”며 “정부가 감세정책을 포기한다면 매년 20조원이 확보되는데, 그 돈으로 북유럽에서처럼 복지 분야의 사회적 일자리 100만 개를 만들 수 있다”고 밝혔다.

김병권 새사연 센터장은 “자영업 문제를 풀기 위한 선차적 과제는 결사”라고 말한다. 자영업 계층이 집단화를 통해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동안 카드 수수료 인하 운동이나 대형마트 건립반대 운동 등이 있긴 했지만, 600만명이라는 규모에 걸맞게 자영업 계층이 집단화·주체화되지 못했다고 그는 설명한다. 김 센터장은 자영업의 결사가 생겨야 정부에 적극적인 정책을 요구할 수 있고, 자영업 계층의 집합적 요구를 수렴할 수 있으며, 정부 정책이 효율적으로 시행될 통로와 매개가 마련된다고 강조한다.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한겨레21] 35년 자장면집을 내놓은 사장, 수금을 못하는 재료상,

파는 사람은 쏟아지지만 사는 사람은 없는 중고 주방용품상



1970~80년대 산업화 시절 고향을 떠난 농민들은 임노동자로 흡수되지 못하고 영세 자영업 계층을 형성했다. 한국 자영업의 태동기다. 1997년 외환위기에 뒤이은 기업 구조조정은 임노동자들을 중소 자영업자로 내몰았다. 자영업 시장이 포화 상태가 되면서 ‘1차 대란’이 전개됐다. 2003년께 몰아닥친 신용카드 사태는 ‘2차 대란’이었다. 자영업자들의 도산이 일상사였다. 그리고 지금 ‘3차 대란’이 온다는 흉흉한 관측이 업계에 나돌고 있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이미 실물위기로 번졌다. 내수경기 침체는 중소 자영업자에게 직격탄을 쏘았다. 2008년 11월 국내 자영업자 수는 600만3천 명으로 2007년 같은 달보다 8만3천 명 줄었다. 그런데 또 다른 자영업자들이 등장하려 한다. 기업 구조조정으로 쏟아질 ‘자영업 예비군’까지 겹치면 그나마 버텨온 자영업자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새로 등장할 신규 자영업자들은 또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자영업 붕괴 조짐은 서민들이 가장 먼저 알아차린다. 서민들이 먹고 자고 입는 문제를 자영업자들이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영업의 위기는 곧 서민경제 몰락의 신호음이기도 하다. <한겨레21>은 서민들의 의식주 문제를 대변하는 자장면, 청바지, 부동산중개소를 통해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는 서민경제의 오늘을 들여다봤다. 편집자

밀가루 음식인 자장면은 물기를 빨아들인다. 눈물과 땀방울도 가리지 않는다. 면발에 감자를 섞어 넣은 ‘옛날 짜장’ 시절에는 지금보다 훨씬 걸쭉하게 춘장을 볶아내야 했다. 1973년 3월13일. 전주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소년을 태운 완행열차가 서울 용산역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갈 곳은 없었고, 누군가 “자장면이나 한 그릇 먹고 가라”며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중년 사내의 손에 이끌려간 중국집 주방은 ‘탕탕∼ 휘익∼’ 수타면(手打麵) 만드는 소리로 가득했다. 자장면 한 그릇에 110원 하던 시절. 주머니에는 360원이 들어 있었다. 소년은 자장면이 통통하게 붇기 시작하고서야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20세기 초 인천 부두로 흘러들어온 수많은 중국인 노동자들에게 그랬듯, 한 그릇의 자장면은 소년의 추위와 허기를 달래주었다. 서울 은평구 증산동 ‘ㅎ반점’의 진광옥(48) 사장은 자신의 중식업계 입문기가 “뻔한 스토리”라고 했다.

“프라이팬을 놓을 때가 됐다”

첫 직장은 남대문 경찰서 코앞이었다. 식당 일용직 구직자들이 모이는 새벽 북창동 골목이 ‘인간시장’이라고 불릴 때였다. 진 사장은 같은 이름의 소설로 유명해진 김홍신씨를 만난 적이 있다. 녹음기를 들고 온 소설가는 그를 붙잡고도 애로사항이 뭐냐고 한참을 물었다. 왜 없겠는가. 중국집 막내 시절, 주방은 ‘실장’이라고 불리는 조리장 밑으로 요리 칼을 잡는 ‘칼판’, 면을 뽑아내는 ‘라면’, 설거지를 하는 막내 ‘사완’까지 위계질서가 엄했다. 3분 안에 자장면을 배달하기 위해 그는 열심히 달렸다. 그 시절 별명이 ‘다람쥐’였다. 스무 살 때에는 종로 쪽 수표다리 길에 있던 ‘서호장’으로 옮겨 ‘라면’을 맡았고, 이태 뒤 군대를 다녀와서는 ‘보신각’이란 중국집에서 ‘실장’으로 데뷔했다. 사완 시절 300원이던 월급은 25만원으로 뛰었다. 지금의 아내도 그 무렵 만났다. “평생에 제일 행복한 시절”이었다. 1990년에는 서대문구 홍은동에서 자신의 가게를 처음 열었고, 이후 연신내와 마포 등지로 옮겨다녔다. 10여 년 전부터는 골목마다 피자·치킨집이 들어서며 중식업은 내리막에 접어들었다. 그래도 땀을 흘리면 다섯 식구 살림은 거뜬했다.

“프라이팬을 놓을 때가 됐다.” 지난해 여름, 그는 중국집을 접겠다고 아내에게 말했다. 증산동으로 옮겨온 뒤 장사는 전보다 더 팍팍해졌다. 먼 동네까지 전단지를 돌리며 ‘장타’를 뛰어보기도 했지만, 불어버린 자장면을 배달받은 고객은 다시는 주문전화를 넣지 않았다. 지난해 초부터는 상황이 더 심각해졌다. 기름값이 고공행진을 거듭하더니, 여름부터는 식자재 비용까지 덩달아 올랐다. 3500원짜리 자장면을 팔아도 임대료와 전기세를 제하면 남는 이문은 500원 안팎. 부부가 하루종일 한달 내내 가게일에 매달려도 300만원 수입을 올리기 어렵다. 차라리 채소장사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점포를 맡고, 자신은 트럭을 끌고 ‘떨이 물건’을 팔면 될 터였다. 부부는 지난해 성탄절 전날 음식점을 복덕방에 내놓았다. “자장면 뽑는 건 아마 우리 세대가 마지막일 겁니다. 고되고 돈벌이도 시원찮으니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요. 35년을 몸담았으니 서운하기야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는 없잖아요.”

자장면은 골목길 상권의 대명사다. 처음으로 자장면이라는 이름의 음식을 팔았다는 인천 차이나타운의 ‘공화춘’은 개업 시기가 190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가난한 시절, 자장면은 생일, 입학과 졸업, 결혼을 기념하는 축제의 음식이었다. 패밀리레스토랑과 다양한 배달 음식들의 등장으로 권세가 예전만 못하다지만, 한국인들은 하루에도 600~700만 그릇의 자장면을 착착 비벼서 깨끗하게 비워낸다. 알싸한 ‘옛 추억’과 다급한 ‘허기’를 메워주는 힘이 여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술 있는데 배달 일에 나서는 후배들

그러나 진 사장의 눈에는 자장면의 마술이 유통기한을 다해가는 게 보인다.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위치한 ‘금정’의 노팔삭(43) 사장은 “진 사장의 처지에 공감이 간다”고 말한다. 동업자들 모임에 나가보면 한결같이 지난 연말 매출이 2007년보다 20~30% 이상 떨어졌다고 호소하기 때문이다. 마포구 아현동에 위치한 ‘연경’의 김태현(49) 사장은 “아버지가 아들을 사주려고 ‘탕수육 대자 큰 걸로’를 외치는 TV 광고는 명백한 과장광고”라고 말한다. 요즘은 아무도 중국집에서 그렇게 외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 가을부터는 몇몇 후배들이 기술이 있는데도 배달 일에 나섰다는 소식이 들린다. 중국집 운영 대신, 한 달 200만원 벌이를 선택한 경우들이다.

서울 마포구 일대 100여 개 중식당들에 식재료를 공급하는 ‘평양상사’의 윤석기(66) 사장은 “지난해 10월 이후엔 우리 같은 유통대리점들에 가게 인수자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하는 중식당 사장들이 부쩍 늘었다”고 돌아봤다. 올 초부터 각종 재료값 인상으로 애를 먹어온 중식당들은 요즘 같은 소비 침체를 견뎌낼 힘이 없다. 전국 식당의 80% 정도가 가입한 음식업중앙회 회원 현황을 보면, 2008년 11월 현재 전국의 중식당은 2만299개로 2005년의 2만2029개에 비해 8.2% 감소했다.

자장면은 검은 춘장과 각종 재료를 볶아 국수 위에 얹은 음식이다. 성분 분석은 어렵지 않다. 춘장은 밀가루와 콩을 섞어 발효시킨 것이다. 화교 기업인 영화식품의 ‘사자표 춘장’이 가장 유명하다. 국수에 쓰이는 밀가루는 중력분인데, 오스트레일리아산의 질을 높게 친다. 채소 중에서는 양파가 가장 많이 쓰이고, 요리사의 취향에 따라 오이나 양배추가 섞인다. 메추리알이나 계란을 올려주는 자장면은 부산처럼 남쪽 지방에만 남아 있다고 알려져 있다. 중식당 금정이 아침 9시께 문을 열면 재료상, 채소상, 정육점, 해물상 등이 오토바이 가득 물건들을 실어 보내오는 식이다. 자장면에 드리운 불황의 먹구름은 재료 공급상들의 생계에도 심각한 타격을 안기게 된다.

금정에서 만리동 고개를 넘은 뒤 환일고등학교 골목을 10분쯤 타고 내려가면 평양상사가 나온다. 블록으로 지은 10평 남짓한 창고 건물엔 ‘중찬명가 양송이’ ‘백설 식용유’ ‘럭키랩’ ‘곰표 밀가루’ 등이 단정하게 쌓여 있다. 30여 년 전 대전에서 농업진흥공사를 다녔다는 윤석기 사장은 중동에 나가 돈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사표를 냈지만, 엉뚱하게 중식당 재료상을 인수했다. 돌아보면 예전에 중식당 배달원들은 지방 출신들이 참 많았다. 농사짓다가 흉년이 들어 상경한 뒤에 눈물밥을 먹어가며 기술을 익혀 나가는 사람들이었다. 세월이 오래 흘렀지만, 그가 보기에 중식당 사장들은 세상에서 제일 ‘욕보는’ 사람들이다. 사장이 돼서도 배달을 직접 하는 이들이 많다. 배달은 시간 싸움이다. ‘죽을 둥 살 둥’ 오토바이를 몰아대니, 한 달에 1명쯤은 꼭 문병 가야 할 고객이 생긴다.

안 오른 춘장이 1만9천원→ 2만2천원

“요즘은 수금이 안 된다”고 윤 사장은 말했다. 10만원어치 물건을 주면 5만원만 받아가란 식이다. 올해 재료 가격이 너무 뛰어서 중간 도매상인 그도 마음이 불편하다. 밀가루는 20kg 한 포에 1만4천~1만5천원 하던 게 지금은 2만5천원이다. 한창 오를 땐 3만원을 넘었던 게 그나마 좀 내린 가격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밀농사가 흉작이 든 틈을 타, 미국 자본이 장난을 친 결과”라고 그는 생각한다. 2007년 초까지 t당 180달러를 유지했던 밀 선물가격은 2008년 3월 424달러까지 치솟았다가 10월 들어서는 225달러로 안정됐다. 그러나 정부의 잘못된 외환시장 개입과 금융위기에 따른 원-달러 환율 급락으로 국제 시세의 하락 효과가 반감됐다.

곡물값 파동에 더해 중국 위안화의 강세도 식재료 가격 상승에 한몫했다. 춘장은 국내에서 제조하지만 죽순, 동구버섯(말린 표고버섯), 송화단(삭힌 오리알) 등 식재료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해오기 때문이다. 1만3천원대였던 식용유 14kg은 이제 3만6천원에 이른다. 그나마 상승폭이 덜한 게 춘장이다. 춘장 14kg은 2만2천원대로 3천원 남짓 오르는 데 그쳤다.

채소상과 정육점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마포구 북아현동에 위치한 ‘정진상회’의 최정기(46) 사장은 중식당 20여 군데와 거래를 한다. 새벽 3시 가락동 시장에서 물건을 떼오는데, 3개월 전과 지금은 사입 물량이 천지 차이다. 하루에 1t을 사들이던 양파는 600kg으로 줄었다. 하루에 23망(1망은 3개들이)이던 양배추 구입량은 15망으로 줄었다. 거래를 하던 중식당이 폐업하면 미수금을 떼이는 경우가 많은데, 올해에만 3곳이 문을 닫았다. 금정을 비롯한 중식당과 분식점 100여 곳과 거래하는 서부축산도매시장의 김동화(33) 사장도 지난 연말엔 하루 매출이 평소 3분의 2 수준으로 떨어졌다. 돼지고기만 놓고 보면 하루 600kg 팔리던 게 480kg으로 줄었다.

마포구 아현동 ㅇ반점 정아무개(50) 사장은 “원래 우리집은 자장면에 콩을 듬뿍 얹었는데, 요즘은 원가를 맞추느라 양을 반으로 줄였다”며 “중식이 간단해 보여도 요리하는 사람들이 고집이 있는데, 비용을 맞추느라 재료를 안쓴다는 건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당장 폐업하는 중식당 비율보다 일자리 감소폭은 훨씬 크다. 바닥 일부터 배워 창업한 중식당 주인들은 경기가 좋을 땐 조리장을 고용하지만, 나쁠 땐 자신들이 직접 요리와 배달에 나선다. 당연히 일당 10만원대 일자리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북창동 ‘인간시장’에는 지금도 술집 주방이나 24시간 문을 여는 중식당의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이 넘친다. 새벽 5시부터 3시간 동안 줄을 서는데, 400~500명 정도인 구직자 중 상당수는 재중동포들이다. 중식당 폐업으로 일자리를 잃은 토박이 조리장과 배달원들은 재료상을 통해 새 일터를 잡는 경우가 많다. 북창동에서 문병기직업소개소를 40년째 운영 중인 문진복(43)씨는 “평소엔 50명쯤 일자리를 얻어갔는데, 올겨울엔 20~30명 수준에 그친다”며 “일손이 밀리면 일당을 쓰겠지만, 지금은 있는 사람들도 자르지 않느냐”고 말했다.

‘ㅎ반점’ 진광옥 사장이 내놓은 점포는 어떻게 될까. 새로운 중식당 업자를 만난다면 그는 1천~2천만원의 권리금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새 입주자가 다른 업종을 가졌다면 한 푼도 건질 수 없다. 주방기구들을 서울 중구 황학동의 중앙시장 쪽으로 팔아넘겨야 한다. 성동공고 앞 중앙시장 마장로에는 주방기구, 만물상, 천막가게 등 100여 개 점포가 밀집해 있다. 중고 냉동·냉장고와 식기 등 스테인리스 제품을 취급하는 세진주방의 유종철 사장은 “외환위기 때 황학동은 대목이었다”고 기억한다. 대기업과 공기업에서 쏟아져나온 명예·조기 퇴직자들이 너나없이 음식 장사에 나섰기 때문이다. “우린 물건 고르는 품을 보면 초심자인지 아닌지 딱 알아. 식당도 초보자가 하면 망하기 마련이야. 말리지는 못하지만, 물건을 팔면서도 좀 안타까웠지.”

가게는 망하는데 창업은 없다

국내 자영업자들은 지난해 혹독한 시련기를 거쳤다. 연초부터 시작된 국내외 경제의 악재들, 곧 곡물 파동과 조류인플루엔자 등에 더해 금융위기에 따른 신용경색까지 닥쳤다. 지난해 상반기 기준 자영업자 수는 5년 내 최저 수준인 594만5천여 명이었는데, 올 상반기에는 이보다 더 줄어들 전망이다. 자영업 구조조정의 조짐은 황학동에서도 뚜렷이 목격된다. 유 사장은 “요즘은 창업한 지 3개월도 안 된 가게에서 중고품 철수를 해올 때가 많다”고 했다. 재작년엔 한달에 10군데였다면, 지난해엔 50군데꼴이다. 폐업이 쏟아지는 것은 11년 전과 닮은꼴이다. 그런데 창업을 하려고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이 없다. 지난해 이맘때 하루 2~3개씩 나가던 분식점용 스테인리스 조리대도 요즘은 통 팔리지 않는다. “가게들은 망하는데 창업은 없는 거지. 다들 집에선 놀 수는 없을 텐데.” 외환위기 당시의 학습효과 때문일까. 장사를 열어야 할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눈치만 보고 있는 형국이다. 재고가 쌓여가는 황학동 상인들의 한숨도 조금씩 깊어지고 있다.



(면) “밀가루는 2007년엔 20kg 한 포에 1만4천~1만5천원 하던 게 지금은 2만5천원이다. 1만3천원대였던 식용유 14kg은 이제 3만6천원에 이른다. 요즘은 하도 장사가 안 돼 밀가루나 식용류를 받아가는 양이 확 줄어들었다.” -서울 마포구 아현동 평양상사 윤석기(66) 대표

(단무지·양파) “중식당 경기가 죽어버리니 우리 같은 도매상들은 수금이 안 된다. 당장 나부터 애들한테 자장면, 탕수육 외식을 시켜주기 빠듯하다. 중식당에서 가장 많이 쓰는 양파의 경우, 3달 전까지만 해도 가락동에서 매일 1t씩 사들이다가 지금은 600kg 정도로 줄었다.” -서울 마포구 북아현동 정진상회 최정기(49) 사장

(자장) “원래 우리집은 자장면에 콩을 듬뿍 얹었는데, 요즘은 원가를 맞추느라 양을 반으로 줄였다. 중식이 간단해 보여도 요리하는 사람들이 고집이 있는데, 비용을 맞추느라 재료를 안쓴다는 건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서울 마포구 아현동 ㅇ반점 정아무개(50) 사장

(그릇) “요즘은 신품이든 중고품이든 주방기구와 그릇류를 찾는 발길이 뚝 끊겼다. 포장마차용 스테인리스 조리대나 군고구마 깡통을 만드는 분들까지 일감이 없다고 아우성이다. 사먹는 사람도 없고 창업하는 사람도 없는 형국이다.” -서울 중구 황학동 ㅊ종합주방 허아무개(42) 차장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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