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프레시안 2008-08-29 오전 8:41:37

식민주의와 그 역사적 유산 ⑤
고유문화의 해체와 식민지 문화의 형성

야만인의 교화와 문화적 동화
 
  식민주의가 보여주는 가장 뚜렷한 특징 중의 하나는 문화적인 면에서 나타난다. 식민주의자들이 식민지인의 고유문화를 파괴하고 서양문화에 동화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민지 시대에는 서양문화의 광범한 이식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문화적 침략을 주도한 것은 식민지 정부들이다. 이들 정부는 그 강도는 다르지만 토착문화에 개입했다. 스페인 인들은 이미 16세기부터 유럽화 정책을 시작했다. 물론 그것이 식민지 이전의 사고방식이나 생활양식을 완전히 붕괴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조각조각 해체시키거나 기존의 문화적 가치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데는 성공했다.
 
  이렇게 된 것은 서양 사람들이 식민화를 단순히 식민지인의 지배나 착취만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사명과 관련시켰기 때문이다.
 
  16세기 이래 스페인이나 영국의 식민이론가들은 식민화를 이교도들을 구원할 신성한 계획이라는 관점에서 보았다. 종교적인 면에서 이는 물론 기독교로의 개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복음을 통해 원주민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속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야만인들의 교화'를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유럽 문화가 우월하다는 전제 위에서 식민지인들에 대한 문화적 동화전략은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이를 가장 강력하게 추구한 것이 프랑스이다. 프랑스인들은 유럽 문화 가운데에서도 특히 프랑스 문화가 우월하고 보편적이라고 생각했으므로 프랑스 식민지 어디에서도 강력한 동화 전략을 추구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또 이는 부르주아 이론가들의 경우만이 아니다. 전 세계 노동자의 해방을 추구하는 맑시스트들도 기본적으로 같다. 그들도 '낮은' 사회조직의 단계로부터 '보다 높은' 단계로의 일직선적인 진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므로 어느 지역의 문화나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는 문화적 상대주의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어와 교육의 식민화
 
  문화적인 면에서 가장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언어이다. 서양인들이 식민지인들에게 자국의 언어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제 3세계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용하는 공용어는 식민주의자들이 강요한 유럽 언어들이다. 인도 같은 아시아의 큰 나라나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서 이는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독립 후에도 자신의 말을 공용어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식민주의의 유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경우 제멋대로 그어진 식민지 경계선 안에 여러 종족들이 거주하고 있으므로 독립 후에도 일부 종족의 언어로는 국가전체의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서양언어가 장기간 사용되는 경우 그것 자체가 하나의 기득권을 만들므로 거기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인도가 1947년 독립 후 힌디어를 국어로 하기로 하고서도 그것을 아직 실현시키지 못하는 것은 다른 지방언어들의 견제도 있지만 200년 이상에 걸쳐 영어가 쌓아 놓은 기득권 때문이다.
 
  언어는 단순히 의사전달의 수단만이 아니라 생각의 수단이기도 하다. 사람은 말을 갖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양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자신의 언어가 아니라 서양 언어로 생각하는 방식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서양의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게 되면 그것을 통해 자연스럽게 서양문화를 받아들이고 그에 동화되며 서양적인 가치관을 갖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식민지인들은 학교에서 주로 서양의 언어와 문화, 학문을 배우게 된다. 셰익스스피어와 프랑스혁명, 사회적 진화론 같은 것들을 통해 자연히 서양문화의 우월성을 배우고 그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교과서도 모국의 것을 그대로 가르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와 베트남에서 현지 어린이들이 '우리의
조상인 갈리아인'에 대해 배우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일제 치하의 조선 어린이들이 단군 대신 일본의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을 우리의 조상으로 배운 것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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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영국령 가이아나의 초등학교 식민지 교육. 식민국가의 언어와 교육과정을 가지고 식민지 교육이 이루어지므로 그렇게 자라난 아이들이 식민국가의 문화에 동화되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식민지인들이 이에 저항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사교육이나 신문, 잡지 같은 대중매체들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민족적 정체성을 심어주려 노력했다. 그러는 가운데 민족적 신화가 만들어지고 역사가 미화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식민지 현실에서 공교육을 통한 식민교육의 막강한 힘을 이겨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기독교 선교와 토착 종교의 억압
 
  기독교 선교는 식민주의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 아메리카의 스페인 제국은 교황의 권위를 내세우며 시작되었으므로 식민사업은 교회와 국가의 공동 사업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단기간만 제외하고 16, 17세기 동안 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에서 국가와 교회는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갖고 식민활동을 벌였다.
 
  이는 스페인 사람들만은 아니었다. 신교파를 믿은 영국인들도 마찬가지로 선교를 식민지의 중요한 사업으로 생각했다. 1609년에 영국 왕이 북아메리카에 버지니아 회사를 설립하도록 수여한 특허장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 목적 가운데 '아직까지 어둠 속에서, 진정한 지식과 신의 숭배를 모르는 비참함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많은 기독교 선교사들이 식민주의자들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으로 파고 들어간 것은 그 때문이다. 그들은 물론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기독교를 전파하려는 강한 사명감과 열정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 선교는 원주민의 입장에서는 긍정적으로 보기가 어렵다.
 
  기독교가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그 땅에 본래 있던 종교들을 부인하고 원주민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고 하는 독선적인 태도 때문이다. 기독교는, 예를 들어, 선민과 이교도, 선과 악, 구제되는 사람과 저주받은 사람 등 이분법적인 개념에 익숙한 종교이므로 어떤 면에서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에 특히 적합한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또 기독교 선교사들은 세속인들과 마찬가지로 유럽인들의 문화적 우월감을 함께 갖고 있었다. 기독교와 문명은 같은 뜻이고 기독교적인 가르침은 반드시 식민지의 생활을 개선시킬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선교사들이,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간에, 식민지배 체제를 정당화한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식민지 팽창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식민지배 체제를 기본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선교활동과 억압적인 식민정책 사이에는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그래서 선교사들을 '서양 제국주의의 사냥개'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식민주의의 문화적 침략은 식민지인들의 전통적인 가치체계를 뒤흔들어 놓고 파괴했을 뿐 아니라 유럽문화에 종속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일부 서양학자들은 이런 행위가 식민지를 근대적인 세계로 나아가도록 도와준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직도 문화제국주의라는 서양적 야만주의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인들의 정체성 상실과 자기소외
 
  식민지배로 인해 고유문화가 침탈됨에 따라 이는 자연히 식민지인들의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기존의 가치체계를 무너뜨리고 혼란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식민지들은 식민지인이면서도 유럽인이나 일본인처럼 말하고 생각하는 가운데 정신적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사실 식민주의가 식민지에 끼친 가장 부정적인 영향 가운데 하나가 이런 정신적, 심리적 측면이다.
 
  식민지배가 오래 계속되며 식민지 사람들에게는 그들에게 특유한 심리상태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구조화된다. 그것은 먼저 교육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지나 서서히 대중들에게도 전파되며 식민지 전체에 걸쳐 하나의 기본적인 심리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그 심리상태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이다. 즉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것은 식민 통치 아래에서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펼 수 없다는 기본적인 무력감과 좌절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의 자기부정을 가져온다.
 
  결과적으로 식민지인들은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의 인간적인 존엄성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심리상태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죽음이나 형벌을 의미하게 된다. 그것은 식민체제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식민지인들의 심리상태의 또 하나 중요한 요소는 깊은 열등감이다. 식민지인들은 식민통치자들로부터 장기간 멸시, 박해를 받으며 깊은 열등감을 갖게 되고 그것이 심리적으로 내면화된다. 그들은 식민자들을 우월한 인간으로, 자신들을 열등한 인간으로 구분 짓고 그 심리적인 틀 안에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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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츠 파농(1925-1861). 정신과 의사로 알제리 독립투쟁에 참여한 파농은 알제리인의 정신병을 식민주의 하의 병적 상태와 연결시켰다. 그리고 이에서 벗어나기 위한 폭력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이에는 위에서 말한 식민주의자들의 문화적인 공격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식민주의자들이 식민지의 모든 전통적인 문화적 요소들을 부정하고 그것을 낡은 것, 미개한 것, 문화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몰아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식민주의자들의 힘에 의해 증명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식민지인들은 자신의 문화에 대한 모든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식민지배자의 문화에 굴종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다. 이리하여 식민지인들은 자연스럽게 거꾸로 된 가치체계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많은 인도 사람들은 인도인들은 천성적으로 허약하다는 영국 사람들의 주장을 부인하기 위해 스포츠나 남성적으로 보이는 행위에 지나친 열정을 쏟았다. 또 알제리의 처녀들은 알제리 청년들과 결혼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백인인 프랑스 청년과 결혼하여 서양식의 아름다운 주택에서 살려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꿈을 꾸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식민지 사람들의 기본적인 심리 속에는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는 생각, 무언가 충족되지 않고 있다는 깊은 감정이 숨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병적 정신상태는 오랜 치유과정이 없이는 극복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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