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할인점 빛과 그림자] 1. 장보기 사각지대, 달동네
1996년 국내 유통시장 개방 이후 폭발적 성장을 해온 대형 할인점은 ‘시장보러 간다’는 말을 ‘이마트 간다’ ‘까르푸 간다’는 말로 대체시켰다. 수증기가 뿜어나오는 냉장진열대의 파릇한 채소와 탐스러운 과일, 시식용 흑돼지가 익어가면서 풍기는 고소한 냄새, 주말 저녁 아이를 카트에 태우고 장을 보는 가족 등 ‘욕망의 분화구’이자 ‘마르지 않는 화수분’으로 정착했다. 빛이 강하면 그늘이 깊은 법. 유통혁명으로 산동네 골목의 구멍가게와 외상장부가 하나둘 사라져 갔다. 떨이를 외치는 시장상인의 신명도 앗아갔다. 중소업체는 ‘권력자’인 할인점에 신음하고 있다. ‘바코드의 마술’에 걸린 소비자는 충동구매와 대량구매로 가계빚만 쌓여간다. 대형 할인점의 그늘은 생각 이상으로 길게 드리워져 가고 있다.
대형 할인점의 폭발적 성장은 유통시장의 지형을 완전히 바꿨다. 할인점에 사람들이 몰리면서 손님을 잃은 재래시장과 구멍가게는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골목마다 자리잡고 있던 가게들이 잇따라 폐업, 지역과 계층에 따라 장보기의 사각지대가 생겼다. 동네 구멍가게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저소득층과 노약자는 ‘더 비싸게, 더 멀리’ 생필품을 구하러 가야 한다.
지난 7일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불리는 서울 노원구 중계본동 104번지. 구멍가게에서 60대 노인이 막소주 1병을 사서 나왔다. 값은 1,100원. 대형할인점이나 할인슈퍼보다 200~300원이나 비싸다. 비싸지 않느냐는 질문에 노인은 “여기가 비싼 줄 알지만 소주 1~2병 사려고 할인점까지 갈 수도 없고 동네 입구의 슈퍼까지 오르내리기도 힘들어 그냥 산다”고 말했다. 그는 “할인점에 가서 왕창 살 물건도, 돈도 없다”면서 “조금 비싸도 외상까지 해주니 여기가 낫다”고 말했다.
중계본동 주민 중 자동차가 있거나 몸에 큰 불편이 없는 주민들은 대개 인근의 이마트나 까르푸 등 대형 할인점을 애용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주민들은 극도로 소비를 줄여야 하는 생활 속에서도 공산품이나 식음료를 산매가에 구입하고 있다.
고추를 다듬던 김순식 할머니(74)는 “없는 살림에 될 수 있으면 안 사먹고 산다. 차도 없고 관절염 때문에 잘 걷지도 못하니 비싸도 구멍가게서 꼭 필요한 것만 산다”고 말했다. 강옥녀 할머니(80)도 “배추나 과일 같은 건 트럭 행상에게 사지만 한두개 살 게 있으면 대충 여기서 산다”고 거들었다.
백성세탁소 주인 유동님씨(49·여)는 “젊고 차 있는 사람들이야 언제 어디서 물건을 싸게 파는지 정보도 있고 거기에 맞춰 대형 할인점도 골라 가지만 노인들이야 멀리 나가질 못하니 비싸도 동네서 살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동네 구멍가게들도 사정이 딱하기는 마찬가지다. 갈수록 손님이 떨어지면서 매출이 줄어드는 통에 값을 깎아 팔 엄두도 내지 못한다. 예전엔 꼬박꼬박 새벽시장에서 떼다놓던 채소나 수산물도 냉장시설을 갖추기가 어려운 데다 팔리지도 않아서 매장에서 치운 지 오래다.
한때 번성했던 동네 어귀 재래시장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손님을 할인점으로 빼앗기면서 식료품이나 잡화 가게들이 점차 사라지고 야채와 과일, 기름, 달걀, 닭고기를 파는 10여곳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가게 숫자가 줄면서 주민들이 살 수 있는 품목들도 점차 줄어가고 있다. 게다가 이웃사촌처럼 살면서 곧잘 ‘외상’을 주던 구멍가게도 문을 닫아 현금이 없으면 라면 한개도 살 수가 없다.
할인점이 가까이 있는 아파트단지도 편리한 것만은 아니다. 일이라도 있어 미처 식료품을 사놓지 못한 가정에서는 아침을 짓는 데 당황하기 일쑤다. 막상 사려고 해도 주위에 두부 한모, 계란 몇개 살 만한 곳이 종적을 감췄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24시간 편의점의 김밥이나 레토르트 식품과 같은 인스턴트류가 아침 밥상에 대신 올라가고 있다.
중계본동 ‘평화의 집’에 근무하는 장윤영 사회복지사는 “노약자나 장애인들은 원래 소비를 잘 안하지만 필요하면 산매가에 살 수밖에 없어 여유 있는 계층보다 상대적으로 손해를 입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장애인식 바로잡기 연구소’ 방귀희 책임연구원도 “소량, 소액 물품도 배달해주던 동네 가게들이 문을 닫으면서 생필품 구입에 어려움을 겪는 장애인들이 많다”고 호소했다.
이같은 사정은 공동화가 심화되고 있는 농촌 지역일수록 더하다. 전남 강진군농민회 강광석 사무국장은 “면이나 이 단위의 마을 어귀 구멍가게들이 많이 없어졌다”면서 “작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콜라 한병, 초코파이 한개, 라면 하나를 사려고 해도 지금은 읍 소재지까지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마을 구멍가게는 사랑방 역할도 겸했는데 유통의 대형화·독점화 속에 문을 닫으면서 정이 넘치던 문화도 함께 사라지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한국빈곤문제연구소 류정곤 소장은 “저소득 빈곤층이 생필품을 살 공간이 줄어들면서 ‘가난한 사람이 더 비싸게 지불(The poor pay more)’하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면서 “대형 할인점의 성장을 당연한 시대적 추세로만 여길 게 아니라 저소득층도 편리하게 싸고 좋은 물건을 살 수 있도록 유통 구조를 개선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기획취재부=김종목·조현철기자〉
[대형할인점 빛과 그림자] 2. 뒤바뀐 유통지도
유통 개방 10년은 약육강식 논리가 지배한 시기다. 서울·지방 할 것 없이 대형할인점이 들어선 곳의 재래시장과 작은 가게 등 약자들은 경쟁에서 이미 낙오했거나 그 대열로 내몰리고 있다. 지방일수록 대형할인점 입점에 따른 타격이 크다. 인구 1백45만7백50명(2004년말 기준)의 대전에는 현재 대형할인점 13개가 자리잡고 있다. 11만명당 1개꼴이다. 지정학적으로 국토 중심부이며 고속철이 지나는 교통의 이점 때문에 특히 1996년 유통 개방 이후부터 대형할인점 진출이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대형할인점의 급성장은 특히 재래시장의 고사를 불러왔다. 대덕구에 대한통운마트가 생기면서 신안시장이 없어졌다. 동구 대동 4거리에 GS마트가 들어오면서 대동시장이 사라졌다.
그나마 살아남은 재래시장들은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3일 오후 대전 동구 중앙시장. 대전지역을 대표하며 전국에서 몇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크다는 이곳 시장은 한산하기만 했다. 먼지만 쌓여가는 텅빈 가게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중앙시장 송행선 연합번영회장은 “대형할인점이 들어온 몇년 사이 4,141개 점포 가운데 200여개가 문을 닫았으며 빈 가게는 채워지지 않고 늘고만 있다”고 전했다.
빈 가게나 임대를 위해 내놓은 가게 중 많은 수는 시장 유동 인구수에 영향을 받는 식당이나 할인점과 품목이 겹치는 슈퍼·잡화가게 등이었다. 한복·이불·농수산물·완구류 등 전통 품목을 다루는 가게들은 그나마 버티고 있었으나 ‘유지’가 힘겨워 보였다. 과일을 취급하는 부산상회 주인 윤영숙씨(46·여)는 “예전에는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시장통에 사람이 많았다”며 “대형할인점이 여기저기 생기고나서 20~30대 젊은 사람들은 아예 발길을 끊었고 40~50대 이상 단골 손님 위주로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같은 날 오후 중구 유천시장은 손님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시장 입구에서 과일 노점을 하는 이복순 할머니(65)는 “예전에는 멀리 지방에서도 이곳에 물건을 사러오기도 했는데 요즘은 근처에 있는 까르푸나 세이백화점에 가지 여기로는 사람이 안와. 여기 말고 다른 시장도 다 똑같아”라고 말했다. 시장통으로 들어가자 손님과 흥정하는 상인들을 보기 힘들었다. 좌판을 멍하니 바라다보거나 상인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름을 밝히길 꺼려한 어느 점포 사장은 “할인점에서 취급 안하는 물건을 파는데도 몇년 동안 계속 적자에 간신히 연명만 하고 산다”면서 “구멍가게나 공산품 가게들은 더 어렵다”고 말했다.
둔산 등 대전 신시가지의 아파트 상가와 도청 부근의 지하상가 등 기존 상권의 타격도 크다고 한다. 대전 경실련 이광진 사무처장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 근처에 대형유통점이 들어오면서 기존 상가내 구멍가게와 할인슈퍼들은 고사했다”고 전했다. 이 와중에 대형할인점 간의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있다. 지난해 12월 홈플러스 둔산점이 24시간 영업을 선언하자, 이마트도 지난 4월부터 24시간 영업을 시작했다. 나머지 대형할인점들도 영업 연장을 고려중이다. 몇몇 대형할인점의 대전 시내 추가 입점 움직임도 계속되고 있다.
대형할인점의 급성장과 갈수록 치열해지는 할인점 간 경쟁에 생존권 위협과 고통이 더해지자 지역 영세 상인들과 시민단체의 반발도 커지고 있다. 대전 경실련, 슈퍼마켓연합회, 대전상인연합회 등은 ▲대형할인점의 지방 출점 제한 ▲영업시간 규제 입법 촉구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정부가 대형점의 각종 편법에 대해 눈감아주고 있는 데다 인·허가 간소화, 영업활동 규제완화, 교통영향평가 등 제도 간편화, 입지 규제 완화 등 대형점 지원 정책만 추가로 내놓고 있다”면서 “소상인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도 없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지역 정서에 기대 대형할인점의 입점과 영업을 제한하는 반대 운동이 이곳 소비자들에게는 큰 설득력을 못 얻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기존 상인들은 ‘변해야 산다’는 기치 아래 변화를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대전 경실련이 2003년 11월 재래시장·전통상가·슈퍼연합회 등과 함께 ‘동네경제살리기추진협의회’를 만들어 기존상가 리모델링 사업 등을 벌이고 있다. 중앙시장도 택배사업, 전자상거래, 점포 통·폐합, 공동구매 등 재래시장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현대화 사업을 추진중이다.
변화를 위한 시도가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중앙시장의 한 관계자는 “지금 시장이 눈앞에서 뻔히 죽어가고 있는데도 기존의 구태의연한 영업 방식을 고수하거나 변화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상인들이 많다”고 말했다.
[대형할인점 빛과 그림자] 3. 납품업체는 할인점의 ‘봉’
국내 유통 시장의 맹주인 대형할인점은 ‘최저가 판매제’에 힘입어 고속성장했다. 그러나 그 뒤에는 할인점에 상품을 대는 납품업체의 고통이 숨어있다. 거래에서 절대강자인 할인점은 납품업체들에 끊임없이 값 낮추기를 요구하고 있다. 값을 내리기 위한 경쟁은 언뜻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이 과정에서 모든 부담을 납품업체에 떠넘기는 불공정 거래가 벌어지고 있다. 또 값이 싸져도 그 이익은 대부분 소비자가 아닌 할인점 몫으로 돌아간다.
◇끝없는 “값 내려라”=국내 유명 할인점에 수영복을 납품하는 업체의 이모 부장(가명)은 “할인점은 한마디로 흡혈귀”라고 말했다. 업체에다 값을 내리라고 요구하고 판매 부대비용까지 떠넘기지만 자신들은 한푼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한다면서 격한 반응을 쏟아냈다.
그가 말하는 가장 골치 아픈 할인점의 횡포는 저가 납품이다. 할인점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공급가 하락 요구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2002년에 여성용 수영복 세트를 9만원 전후로 공급했지만 올해는 7만원대에 공급한다”고 말했다. 인건비와 물가는 올랐는데 납품가는 3년새 20% 정도 빠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기간에 할인점이 챙기는 판매수수료(마진율)는 20%에서 25%로 오히려 늘어났다.
할인점의 세일 경쟁이 붙으면 가격 하락 요구는 더욱 거세진다. ㄱ마트에서 20% 세일하면 ㄴ마트는 30%로 해달라고 요청한다. 겨우 ㄴ마트 요구에 맞추면 다시 ㄱ마트 구매담당자는 “우린 뭘 해줄 거냐. 미끼를 내놓든지 할인율을 더 낮추라”고 압박한다.
그는 “비치볼, 샌들, 튜브류의 미끼 상품을 사느라 5천만원을 은행에서 대출받았다”면서 “그렇다고 공장을 놀릴 수도 없어 할인점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수저통 생산업체인 ㄷ사는 최근 할인점 납품을 아예 포기했다. ㄷ사 관계자는 “3년전 2,700원 하던 게 지금은 1,400원이다”라면서 “중국의 공장을 인건비가 더 싼 베트남으로 옮길까도 생각했지만 그래도 수익이 남을 것 같지 않아 물건을 뺐다”고 말했다.
◇납품업체는 봉=최근 들어 할인점마다 자사상표(PB) 상품 판매를 늘리면서 납품업체의 목을 조이고 있다. 할인점마다 납품업체를 통해 PB상품을 위탁생산하면서 생산비와 물류비 등의 정보를 파악, 납품계약에서 가격 조정의 무기로 활용하고 있다.
일부 할인점은 PB 상품을 위탁생산해 준 업체의 매출액을 떨어뜨리는 현상도 동반한다. 화장실 용품을 생산하는 ㅂ사장은 “겉에 캐릭터를 뺀 비슷한 모양의 용품을 위탁생산해 줬더니 1만2천원 하는 우리 상품보다 5,000원이나 싼 가격으로 매장에 내 놓았다”면서 “판매대도 2배나 큰데다 손님이 많은 에스컬레이터 쪽에 설치하는 통에 우리 장사는 그날로 망쳤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다른 업체는 PB 상품의 위탁생산과정에서 할인점이 내야 할 신제품 개발비와 제품에 새기는 캐릭터 사용료까지 부담하고 있다”면서 “이는 특이한 사례가 아니라 ‘다반사’”라고 전했다.
납품업체는 할인점에 어렵사리 들어간 뒤에도 다양한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게 ‘백DC’다. 납품업체가 판매 과정에서 발생하는 매장 청소비, 광고비·판촉행사비, 매장 직원 인건비를 할인점 대신 부담하는 게 백DC다. 보통 매출액이나 납품가의 5~15% 정도 된다.
속옷 업체의 ㅇ부장은 “백DC에는 손님이 물건을 포장하고 남은 박스나 끈을 처리하는 비용과 청소비에다 할인점의 판매직도 아닌 관리직원의 사기진작비까지 들어 있다”면서 “속옷 판매와 무관한 비용인데도 선이자를 떼듯 받아간다”고 하소연했다.
수건을 납품하는 ㅈ사장은 “할인점 마진율에다 ‘백DC’까지 더하면 매출액의 40%가량이 할인점 수수료로 나간다”면서 “수수료를 내리면 소비자들도 더 싼 값에 살 수 있지만 할인점은 납품업체만 쥐어짤 뿐 자신들의 허리띠는 절대 졸라매지 않는다”고 성토했다.
재고도 납품업체에 떠넘기는 게 일반적이다. 이미 납품한 상품은 품질에 하자가 있어야 반품이 가능하지만 규정은 말뿐이다. 할인점에 청포도를 공급하고 있는 ㄴ농원의 ㄱ대표는 “1천만원어치를 납품했으나 다 팔리지 않아 버렸으니 반품한 셈치라면서 3백만원을 빼고 주더라”면서 “속상하지만 내년에도 납품하고 먹고 살아야 하니까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참는 게 약=납품업체는 횡포를 당하더라도 대개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다. 국내유통시장에서 할인점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면서 그들을 외면하고는 살아남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울며 겨자먹기’다.
“물건을 창고에 쌓아둘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매출의 98%가 할인점에서 이뤄지니 하나라도 더 팔려면 할인점에 들어가야 해요. 치사하지만 할인점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망하니까요.”(수영복 제조업체 ㅎ부장)
〈기획취재부/ 김종목·조현철기자〉
[대형할인점 빛과 그림자]4. 낭비부르는 할인점
대형 할인점이 가까이 있으면 집값까지 올라간다. 아파트 분양광고에서도 인근의 할인점은 반드시 내세우는 장점으로 손꼽힌다. 시민들은 대개 할인점을 싸고 편리한 쇼핑의 전당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꼼꼼히 따져보면 할인점이라고 마냥 싸지는 않다. 채소류를 비롯한 일부 품목은 재래시장보다 훨씬 비쌌다. 소비자들은 할인점이니 당연히 쌀 것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선호하고 있는 셈이다.
취재팀은 이달초 가정주부와 함께 늘 식탁에 오르는 신선식품의 값을 비교하기 위해 서울의 재래시장과 대형할인점을 동시에 찾았다. 동행한 박순자씨(57)는 17살때부터 가계부를 쓴 34년차 알뜰 주부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소비자물가 모니터링 요원으로 26년째 활동 중이며 서울시 식품감시요원을 13년간 지냈다.
먼저 찾은 곳은 서울 중랑구의 재래시장인 태릉시장. 그는 단골인 길가의 청과물상에서 열무와 아욱을 골랐다. 열무와 아욱 한단에 2,500원과 1,000원씩 냈다. 그가 쪽파를 조금만 달라고 하자 가게 주인은 “500원어치씩은 팔지 않지만 단골이니까…”라며 한 움큼 집어 건네줬다.
그는 이 시장에서 구이용 고등어 한 손(두 마리)을 3,000원에 샀다. 태릉시장에서 지출한 돈은 모두 7,000원. 식구가 부부 둘뿐이어서 이 정도면 이틀은 충분하다고 했다.
그는 이어 중랑구 상봉동의 E마트로 갔다. 농산물 매장을 먼저 찾은 그는 야채와 가격표를 번갈아 쳐다본 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숫자”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재래시장에서 1,000원에 구매한 아욱은 한 묶음이 1,980원으로 2배 가까이 됐다. 2,500원에 산 열무도 값이 3,250원으로 표시돼 있었다. 그는 “값이 비싸지만 양도 적다”면서 “시장에서 산 아욱이면 이틀은 먹을 수 있는데 여기 것은 하루분밖에 안된다. 열무단도 시장것의 절반 정도밖에 안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농산물 매장을 더 둘러보면서 재래시장에서 메모한 값과 일일이 비교했다. 시장에서 1,300원이면 살 수 있는 배추가 할인점에서는 2,480원으로 크기도 작았다. 대파(시장 1,200원)는 1,780원, 적상추(시장 1,500원)는 3,780원이었다. 시장에서 500원어치에 해당하는 부추는 3배가 넘는 1,650원이나 한다며 깜짝 놀랐다. 하지만 무는 1,880원으로 시장(2,000원)보다 쌌다.
생선매장도 마찬가지였다. 시장에서 3,000원에 구입한 고등어가 마트에서는 5,800원이라는 가격표가 찍혀 있었다. 그가 시장보다 너무 비싸다고 푸념하자 점원은 “들어오는 가격이 매일 다른데 요즘은 좀 비싸다. 쌀 때는 4,800원에 팔기도 한다”고 얼버무렸다.
장보기를 마친 그는 “품목별로 상세히 비교해 볼수록 가격차가 드러난다”면서 “할인점이 시원하고 깨끗해 상품이 신선해 보이지만 어차피 집에서 씻으면 재래시장 것과 큰 차가 없는데 값은 너무 차이가 난다”고 말했다. 그는 “할인점의 최저가 광고는 할인점끼리나 하는 말이지, 결국 소비자에게는 빈말”이라고 지적했다. 신선식품에 관한한 할인점이 포장과 위생, 편리함에서 우세하지만 할인점이 앞세우는 가격경쟁력은 재래시장에 비하면 턱없이 바싸다는 게 그의 총평이었다.
이에 대해 (주)신세계 홍보실 김자영 대리는 “E마트는 가격보다는 품질을 중시하기 때문에 재래시장 상품과 질적으로 큰 차이를 갖고 있다”면서 “신선한 농·수산품을 직매입한 뒤 즉시 판매를 원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재래시장 가격과 단순히 비교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박순자씨는 할인점에서는 충동구매에 따른 지출이 생각보다 많다며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놨다. 지난해 10월 남편과 20인치 TV를 구입했다.
전자제품 매장에 ‘할인판매’ 표지가 붙어 있어 물어보니 22만원짜리를 15만원에 판다고 해 “싸니까 일단 사고 보자”는 생각에 샀다는 것이다.
“식구가 2명인 데다 이미 2대가 있어 채널 싸움할 일도 없었는데 덜컥 사고 보니 지금은 집에 사람보다 TV가 많아요. 평소엔 공간만 차지하다가 어쩌다 손님들이 왔을 때나 사용합니다.”
또 할인점에서 시행하는 반짝세일의 유혹도 만만찮다. 갑자기 1,000원짜리 플라스틱 물통을 900원에 판매하기에 한개 구입했다.
집에는 물통이 여러개 있지만 100원 싸다는 말에 ‘당장 필요없는 제품’을 선뜻 사게 되더라는 설명이다. 외국산이나 제철보다 일찍 나온 과일 역시 머리보다 손이 먼저 움직이는 대표적인 품목이라고 그는 말했다.
“저도 ‘짠순이’라고 소문난 사람인데 이런 식으로 소비가 늘어나니 다른 분들이야…. 꼭 사야 할 물건을 미리 메모한 뒤 할인점에 가지만 언제나 돈을 더 쓰게 돼요. 5만원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할인점에 가면 보통 7만~8만원은 쓰는 것 같아요.”
그는 할인점을 전혀 이용하지 않던 2002년에 월 평균 50만원가량 들던 부식비가 할인점을 이용하면서 20만원가량 늘었다고 한다. “한달에 서너차례 할인점을 이용할 뿐인데 지출이 부쩍 늘었어요. 장보기가 편리해진 데 대한 대가치고는 너무 과해요.”
〈기획취재부/김종목·조현철기자〉
[대형할인점 빛과 그림자] ⑤할인점 저가상품의 비밀
대형 할인점들이 내세우는 광고 문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초특가’ ‘최저가격’ ‘가격파괴’ ‘파격할인’ 등이다. 대형 할인점이란 이름에도 ‘할인’이란 말이 들어가 있으니 할인을 몇 번씩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소비자들은 광고와 ‘할인점’이란 이름 때문에 으레 저렴한 줄 알고 ‘대형 할인점’을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할인점’일까?
경향신문 취재 결과 대형 할인점에만 납품되는 상품이 따로 있으며 기존 생필품도 규격·용량을 달리 해 ‘싸게’ 보이는 착시 효과를 일으키는 것들이 많았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대형 ‘할인점’이 아니라 대형 ‘유통점’이라고 바꿔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대형 할인점에만 납품되는 상품들에 대해서는 소비자들이 할인점용이란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표기 규정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값싼 재질로 만들어-
◇할인점용 제품=공산품 중에는 할인점용 제품들이 따로 있다. 정식 대리점에서는 취급하지 않고 오로지 할인점에서만 판매되는 것들이다. 외관은 비슷하나 품질 차이가 난다. 이 제품들은 할인된 가격이 아니라 애초부터 ‘싸게’ 만든 물건이지만 ‘초특가’ 등 문구 아래 할인된 것인 양 팔리고 있다.
한 유명 자전거 제조업체는 할인점용 제품을 따로 만들어 까르푸 등에 납품하고 있다. 올해 이 업체의 160개 모델 중 대리점에만 납품하는 것은 100개, 대리점·할인점 모두 납품하는 것은 30개, 할인점용 모델은 30개다.
그러나 이 업체의 홈페이지에서 이들 할인점용 제품에 관한 정보는 검색되지 않는다. 취재팀이 이 업체에 문의했을 때 처음 전화를 받은 직원은 “(할인점용 자전거가) 정상 제품이 아니어서 검색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 통화한 관계자는 “‘정상 제품’이지만 시중 대리점에는 납품하지 않고 할인점용으로 따로 제작한 것”이라며 “제품에 큰 차이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비싼 재질을 쓰느냐 조금 싼 걸 쓰느냐 차이가 있을 뿐”이라며 “대리점용으로 만드는 것들은 고급 재질을 쓰며 스틸 강도도 조금 세다”고 설명했다 할인점용 자전거는 결국 ‘비지떡’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이 관계자는 “할인점측에서 싼 제품을 요구하는 데다 기존 대리점 쪽에서도 불만을 제기해 할인점용을 따로 만들어 납품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자제품도 마찬가지다. LG전자 관계자도 “(할인점에서) 할인점은 저가 제품을 판매하는 곳이니까 가격대를 낮춰서 내놓을 수 있는 할인점용 제품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한다”면서 “대리점과 외관과 기능은 거의 비슷하지만 약간 차이가 나는 제품을 모델명을 달리해 공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탁기를 예로 들면 기능은 똑같지만 할인점용 세탁기의 경우 외관 재질과 도료가 정식 제품에 비해 싼 것이란 설명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도 “할인점 제품은 대리점 것과 기능상 큰 차이가 없으나 ‘조그마한 차이’가 있다”면서 “드럼세탁기는 도어의 재질, 냉장고는 냉장고·냉동고 서랍의 수, TV는 외장 재질이 대리점 것과 다르다”고 말했다.
-할인점이 원하기도-
◇착시 효과 제품들=용량·규격을 달리해 소비자들로 하여금 착시효과를 일으키게 하는 제품들도 많다. 최근 대형 할인점에 등장한 ‘1.25ℓ’ 코카콜라도 할인점용이다. 980원짜리 이 코카콜라 병 크기는 1.5ℓ병과 큰 차이가 없다.
코카콜라 관계자는 “(대형 할인점에서) 펩시와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만든 제품”이라며 “펩시가 워낙 가격을 낮춰 받다보니 일반화된 1.5ℓ로는 경쟁이 버거워 1.25ℓ짜리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할인점에서 1.25ℓ 마진이 높아 원하는 측면도 있다”면서 “소비자에게 1.5ℓ로 보이게 하려고 의도하고 만든 것은 아니지만 착시효과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백세주도 할인점에 납품되는 것은 300㎖, 일반 슈퍼 등에 나가는 것은 375㎖이다. 국순당이 최근 출시한 ‘삼겹살에 메밀한잔’도 300·330㎖로 구분돼 있다. 국순당측은 “용량을 달리해 납품하는 것은 가격 할인 착시효과를 노린 게 아니라 작은 술집들이 대형 할인점에서 술을 구입해 파는 ‘역류’ 현상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기획취재부/김종목·조현철기자〉
[대형할인점 빛과 그림자] 할인점 소비시장, 한국화·토착화로 급성장
유통시장 개방 바람은 유통산업 구조뿐 아니라 소비자의 구매 패턴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예전 동네 슈퍼마켓에서 구입하던 식료품뿐 아니라 전자·가구·의류 등도 대형 할인점에서 사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
대형 할인점이 이처럼 소비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한상공회의소 임복순 유통물류팀장은 “우선 IMF가 값싸고 질좋은 상품을 사는 합리적 소비를 지향하는 계기가 됐다”면서 “IMF와 유통 개방이 맞물리면서 대형 할인점이 급성장하게 됐다”고 말했다.
대형 할인점 급성장에는 ‘한국화·토착화’도 한몫했다. 임팀장은 “일반 공산품에서 신선식품까지 거의 모든 물품에 대해 원스톱 쇼핑을 할 수 있는 대형 할인점은 외국에서는 찾기 힘들다”면서 “점원들이 위치 안내 등을 해주는 ‘서비스’도 한국 할인점만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대형 할인점에서 장보기·쇼핑뿐 아니라 할인점 내 마련된 커피점, 패스트푸드점, 영화관 등 복합문화시설을 통해 여가시간을 즐길 수 있다는 것도 한국 할인점의 특징이다.
임팀장은 “외국 할인점들은 매장 인테리어 등 겉치레에 크게 투자를 하지 않는데 비해 한국 대형 할인점들은 백화점처럼 화려한 편”이라며 “이런 점들이 손님들을 계속 끌어들이는 요소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점원들의 서비스, 화려한 매장 등은 결국 상품 가격에 다 반영된다는 설명이다. 임팀장은 “한국 대형 할인점은 서비스나 매장 인테리어 비용 등이 가격에 포함돼 월마트 등 외국의 대형 할인점보다는 비싼 편”이라고 말했다.
〈기획취재부=김종목·조현철기자〉
[대형할인점 빛과 그림자] 산매상 도산에 도매상도 설땅 잃는다
대형 할인점의 저가 공세로 산매상들이 몰락하면서 도매상들이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대형 할인점의 판매 가격과 도매상이 산매상에 공급하는 가격 차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동네 구멍가게나 슈퍼 등 산매상이 크게 줄면서 물품을 공급해오던 도매상의 매출은 바닥을 헤매고 있다.
경남동양체인 김두태 사장은 “최근 마산·창원 등 경남 일대에 대형 할인점이 들어선 뒤 우리가 납품하던 동네 슈퍼나 구멍가게 100곳 중 20곳이 문을 닫았다”고 말했다.
김사장은 “산매상이 죽어나니까 우리같은 도매상도 죽을 지경”이라며 “최근에 경남 일대에 물건을 대던 한 도매업체도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고 전했다.
그는 “경남의 경우 대형 할인점이 생긴 곳 반경 1㎞ 안은 편의점을 제외한 산매점포들이 거의 없어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산매점에 물건을 대던 도매상들이 대형 할인점과 거래를 트지 않는 한 망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한 주류 도매업자도 “대형 할인점과 직거래를 하고 있는 주류 제조업체들은 큰 상관이 없지만 산매상과 거래하던 주류 도매상들은 산매상들이 줄면서 매출 하락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형 주류 제조사들도 납품과 관련해 대형 할인점의 요구를 들어주고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갈수록 종속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문구 및 완구를 납품하는 도매상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한 문구도매업체 ㅈ사장은 “문방구에 공책 한권을 300원에 넘기면 똑같은 공책이 할인점에서는 320원에 판매된다”면서 “문방구에서는 마진을 붙여 400원 정도에 팔기 때문에 할인점과 경쟁 자체가 성립이 안된다”고 전했다.
개학을 앞둔 2·8월은 문구업계의 대목이지만 최근에는 할인점에 특수를 완전히 빼앗겼다며 울상이다. 할인점은 이 시기에 ‘특가전’을 실시, 거의 도매가와 비슷한 가격에 물품을 내놓아 산매상과 도매상의 판로가 연쇄적으로 막힌다는 설명이다. ㅈ사장은 “IMF를 겪으면서 크게 위축된 도매상들이 이제는 할인점의 성업으로 존폐위기에 놓였다”면서 “10년전 200~300군데 문방구에 물건을 넣었는데 이제는 20~30곳만 상대하며 직원도 10명에서 5명으로 줄였다”고 말했다.
〈기획취재부=김종목·조현철기자〉
[대형할인점 빛과 그림자] 재래시장 살 길 뭔가
재래시장과 구멍가게 등 기존 상인들에 대한 지적의 목소리도 높다. 유통 환경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대형할인점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것이다. 서울 은평구청 김철옥 시장담당 주사는 “1996년 유통 개방 이전이나 대형할인점이 들어오기 전만 해도 그런 대로 괜찮았다”면서 “하지만 개방과 할인점 등장 이후 서비스나 시설면에서 전근대성을 벗어내지 못했고 젊은 소비자들의 구매 패턴을 전혀 따라가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주부 김미옥씨(33)는 “야채나 과일은 재래시장이 싸다고 하지만 진열이나 서비스를 보면 그다지 신뢰가 안간다”면서 “구멍가게도 마찬가지이며 똑같은 가격인데도 왜 편의점에 가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관련 업계에서도 전근대성과 서비스 부실, 경영능력 부족에 대해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한국슈퍼마켓협동조합연합회 임실근 전무이사는 “외환위기 이후에 중소 창업이 이어졌지만 사업 기초지식이나 운영 노하우 등이 없어 경영 애로가 심화되고 있다”면서 “이들 중소 상인들에 대한 컨설팅·교육서비스와 디자인·설비표준화·운용소프트웨어 등 인프라 개선 작업 등 경영혁신과 고객만족을 위한 종합적인 관리 지원 체계 구축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한국체인사업협동조합 최장동 이사장은 “구멍가게나 할인 슈퍼를 조직화하고 체질 개선을 하는 등의 기업이미지(CI) 작업을 실시중”이라며 “구멍가게·할인슈퍼 연합이 이루어지면 대형할인점이나 편의점처럼 공동 구매 등을 통해 더 싸게 소비자에게 물건을 공급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이사장은 “중소 상인들이 시대를 못따라갔다는 점은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다”면서도 “하지만 정부가 대형할인점이나 편의점에는 각종 혜택을 주면서 중소 상인들에게는 별 지원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기획취재부〉
[대형할인점 빛과 그림자] “담배·음료수 팔아 근근이 먹고살죠”
이순금씨(56)는 올해로 20년째 은평구 응암동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이씨의 가게는 이마트 은평점과 불과 200여m 떨어진 곳에 있다. 또 멀지 않은 곳에 까르푸(마포구 성산동)도 영업중이다.
이씨도 여느 곳의 상인과 마찬가지로 대형할인점이라는 대형 폭탄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이씨는 “서른 여덟에 여기서 장사를 시작했는데 부근 동네 구멍가게 중에 나 혼자 살아남았다”면서 “다른 구멍가게들은 편의점이나 다른 업종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매출도 절반 가량 줄었다고 한다. 이씨는 “예전에는 두부같은 식품류와 잡화도 조금 팔았는데 할인점 생기고 나서는 없앴어. 요즘 누가 신선식품을 구멍가게에서 사먹나”라고 말했다. “대형할인점에서 호빵까지 팔아 몇해 전에 호빵 기계를 치워버렸다”고 덧붙였다.
과자류도 찾는 이들이 거의 없다. 이씨는 “담배하고 음료수만 팔린다”고 전했다. 대형할인점에서는 담배를 취급하지 않고 냉장 음료수를 팔지 않아 이들 상품이 유일하게 경쟁력이 있는 것들이었다.
이씨는 그러나 찬바람이 불면 걱정이라고 했다. 그는 “그래도 여름은 음료수를 찾는 사람도 많고 담배도 많이 팔리지만 겨울엔 나다니는 사람들이 줄어 여름 매출의 절반 가량으로 떨어진다”며 “여름에 번 걸로 겨울에 다 까먹는다. 겨울엔 말도 못할 정도로 힘들다”고 말했다.
대형할인점을 원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누구도 원망 안해. 몸 건강하고 그냥 좋게좋게 편하게 생각하며 산다”면서 “오히려 이마트 총각이나 아줌마들이 쉬는 시간에 우리 가게로 일부러 와서 음료수니 담배니 팔아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이마트 직원들은 이씨 가게를 ‘작은집’이라고 부른다고 전했다. 이씨와 1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이마트 직원 여러명이 번갈아 들리며 음료수, 빙과류, 담배를 사갔다. 이씨는 “20년째 장사를 하면서도 따로 집 한채 마련 못했다”며 “요즘엔 경기 불황까지 겹쳐 막내 대학 등록금 마련하는 게 걱정”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씨는 “사람들이 나보고 ‘또순이’라고 부른다”며 상황이 더 나빠져도 어쨌든 열심히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또 “20년 장사 했더니 단골들이 음료수 한두병, 담배 한두갑은 예서 팔아줘. 희망을 갖고 살아야지”라며 눈물을 훔쳐내고 애써 웃어보였다.
〈기획취재부〉
[대형할인점 빛과 그림자] “거래 공평치 않지만 납품업체 줄섰다”
대형 할인점의 상품구매 및 마케팅담당자(MD·머천다이저)는 납품업자의 ‘왕’이다. 그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든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대형 할인점의 MD 김모씨(35·가명)는 12일 “업계의 매출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어쩔 수 없다”고 했다. 할인점에서 ‘싼값’은 절대적이면서도 유일한 조건이다. 결국 제품을 보다 싸게 공급하고 매출을 늘리려면 납품업체를 닦달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이익을 늘리는데도 납품업체를 활용한다. 판매비를 줄이기 위해 청소비, 판매직원 인건비를 떠맡긴다. 할인점끼리 경쟁이 치열해지는데도 판매 마진율은 갈수록 높아지는 속 이유다. “납품업체에게 ‘우리 덕분에 물류비가 줄고 매출이 늘었으니 이익을 나눠야 한다’는 말로 비용을 부담시켜요.” 수익은 나누되 비용은 납품업체 한 곳으로 몰아가는 논리다.
“납품업체와 거래가 공평치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를 부담하더라도 납품하겠다는 업자가 한참 줄을 서 있습니다. ‘갑’인 할인점이 손해볼 장사를 할 이유가 없어요. 이게 바로 경제잖아요.”
한마디로 할인점이 우월적 지위를 맘껏 ‘악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MD 6년차인 황씨가 겪은 ‘경제’의 실태는 놀랍다. 할인점 창고에서 5백여만원어치의 상품을 도난당했는데 그 책임을 몽땅 식품회사가 졌다는 고백이다. “우리 직원이 책임지기엔 버겁다”고 했더니 식품회사 직원이 바로 와서 카드로 처리했다는 것이다.
또 업계에는 ‘연좌제’도 있다. 그는 MD에게 한번 찍히면 다른 할인점에도 납품하기가 힘들다고 전했다. 같은 할인점에 근무하는 한 MD는 재고를 떠안으라고 했으나 끝내 버틴 농산물 생산업자에게 계약대로 계산해 준 뒤 재계약을 맺지 않았다. ‘이례적인 상황’은 금세 MD 사이에 소문이 돌고 납품업자에겐 소문이 곧 낙인이다.
그러다보니 납품을 계약하거나 유지하기 위한 로비가 치열하다. 윤리경영이 강화되면서 ‘떡값’이나 리베이트는 사라지는 추세다. 그러면서 뒷거래는 보다 교묘해지고 있다. 그는 “자동차 할부금을 납품업체에 넘기거나 납품업체의 지분을 받았다는 이들도 있다”고 털어놨다. 또 “공정위 등에서 조사가 나오면 할인점에 불리한 증언은 하지 말라”면서 입단속도 잊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획취재부〉
[대형할인점 빛과 그림자] 공정위 불공정행위 단속 ‘미흡’
할인점과 납품업체간 불공정 거래행위는 극심하지만 관계 당국의 실태파악 및 처벌수위는 미흡하다.
유통과정의 불공정 거래행위를 감시하는 정부기관은 공정거래위원회. 그러나 납품업체가 호소하는 할인점의 횡포에 비하면 공정위의 ‘조사 성적표’는 초라하다. 지난 2000년부터 2005년 8월까지 할인점을 상대로 불공정거래행위에 대한 시정조치를 내린 것은 30건뿐. 과징금 액수도 21억3천여만원(누계)에 불과했다.
납품실태 파악도 미진하다. 공정위가 2004년 9월에 발표한 ‘납품업체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납품업체의 44%가 할인점의 거래관행이 개선되지 않았다고 답했다. 시급히 개선돼야할 거래관행으로 ▲경품·할인행사를 위해 낮은 납품가격을 강요(42%) ▲광고비, 인테리어비 등 납품업체 전가(22%) 등이 지적됐다. 그러나 설문조사에 응한 업체는 6,000여 납품업체중 470개에 그쳤다. 응답률 8%인 설문결과를 바탕으로 납품업체의 실태를 분석한 것이다.
공정위 유통거래과 강신민 사무관은 “할인점이 갖고 있는 계약서와 전표 등을 근거로 조사를 하다보니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기획취재부〉
[대형할인점 빛과그림자]정말 싸기는 쌀까?
‘연중 항시 최저가’를 내세우는 대형할인점 물건이 싸기는 싼가.
경향신문 취재팀은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서울 강북 지역의 대형할인점과 그 부근 슈퍼마켓의 생필품과 식음료 가격을 직접 조사했다.
같은 제조사의 같은 상품이라도 규격과 용량이 다른 게 많아 절대 비교는 어려웠다. 이에 따라 생필품 및 식음료의 용량·규격별 가격을 뽑아 비교했다.
조사 결과 가격은 엇비슷하게 나타났다. 대상 생필품·식음료 20개 품목 중 대형할인점과 슈퍼는 각각 10개씩 가격 우위를 나타냈다.
세탁세제의 경우 대형할인점은 CJ 비트 3.5㎏짜리를 1만2천2백원에 팔았다. 부근 슈퍼는 3㎏들이를 1만1천원에 팔았다. 100g당 가격은 각각 348.6원, 366.7원으로 대형할인점이 18.1원 저렴했다.
대형할인점은 LG생활건강(이하 LG)의 수퍼타이(4.5㎏)를 1만1천원, 슈퍼는 5㎏짜리를 6,900원에 팔았다. 슈퍼가 100g당 106.4원 싸게 팔았다.
LG의 섬유유연제 샤프란은 대형할인점(4.2ℓ·4,250원)이 100㎖당 101.2원, 슈퍼(3.1ℓ·3,950원)가 100㎖당 127.4원으로 대형할인점이 가격 우위를 보였다. 옥시의 쉐리는 슈퍼가 100㎖당 14.0원으로 더 저렴했다.
슈퍼는 식기세제인 LG의 자연퐁과 퐁퐁을 대형할인점보다 싸게 팔았다. 동서식품의 커피믹스는 슈퍼가, 같은 제조사의 맥심모카골드 믹스는 대형할인점이 가격 우위를 나타냈다. 대형할인점은 해태의 갈아만든배(1.5ℓ)를, 슈퍼는 코카콜라를 싸게 팔았다.
한국체인사업협동조합이 지난 8월 강북 지역의 다른 대형할인점과 슈퍼의 생필품 14가지의 용량·규격별 가격을 비교 조사한 결과도 경향신문 조사결과와 비슷했다.
이 조합의 이명식 사무국장은 “대형유통점이 취급하는 물품 3만가지 중 슈퍼와 겹치는 품목이 3,000여가지”라며 “대형유통점들은 슈퍼·구멍가게와 경합하는 3,000품목에 대해 집중적으로 가격을 낮추고 있으나 용량·규격을 하나하나 따져 살펴보면 싸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슈퍼는 무조건 비싸고, 대형할인점은 싸다는 막연한 추측을 깨버리는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기획취재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