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프레시안 2008-01-24 오전 9:52:04


<26> 인종주의와 서양문명 ③ 근대적 인종주의의 본격적 발전

3. 근대적 인종주의의 본격적 발전
 
  블루멘바흐의 퇴화이론
 
  17, 18세기는 인종주의의 이론적 기반이 점점 확고하게 된 때이다. 이 시기에 유럽인들은 인간을 유럽인, 아프리카인, 아메리카인, 아시아인 등 여러 인종으로 나누었다. 그들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인간은 결코 하나의 종일 수는 없으며 처음부터 다르게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다인종설(多人種說)이며 많은 학자들이 그것을 믿었다.
 
  이런 주장은 노예제를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에게 매우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인종이 달라야 열등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부려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인간은 아담의 자손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에는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17세기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적 설명을 더 좋아했다. 인간은 모두 아담의 자손이기는 하나 아프리카인이 흑인으로서의 열등함과 추함, 그에 따라 영원한 노예의 운명을 갖게 된 것은 햄의 아들에 내린 신의 저주 때문이라는 것이다.
 
  18세기 중반에 스웨덴 학자인 린네(C.Linnaeus)가 동식물을 종으로 나누는 새로운 분류법을 만들어냄으로써 다시 문제가 생겼다. 근대 생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종을, 생식력 있는 후손을 낳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정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다른 인종 사이의 결합에서도 생식력 있는 아이를 낳을 수 있으므로 모두 하나의 종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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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생물학의 아버지인 린네(C.Linnaeus, 1707~1778)

  이것이 학자들을 고민스럽게 했다. 그래서 그들은 퇴화이론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그 곤란함을 피하려 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18세기 후반의 독일인인 블루멘바흐 (J.F.Blumenbach)이다.
 
  그는 기독교 교리에서 말하는 대로 단 하나의 완전한 인간이 창조되었다고 믿었다. 여러 인종들의 두개골이나 신체 각 부위의 모양이나, 자세들을 면밀히 비교 검토한 결과 인간은 하나의 종일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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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인종주의를 학문적으로 확립한 블루멘바흐(J.F.Blumenbach, 1752~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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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의 괴팅겐(Gettingen)시. 아름다운 대학도시인 게팅겐시는 19세기 초의 게팅겐 대학 7교수 사건 등 자유주의운동과 관련해서 많이 알려져 있으나 한편에서는 18세기 이후 유럽 인종주의 발전에 학문적으로 크게 기여한 도시이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하나의 종으로 시작했으나 사는 곳이 달라짐에 따라 기후나 생활양식 등 환경의 차이와 혼혈에 의해 다섯 개의 인종으로 나뉘었다고 생각했다. 코카서스 인종, 몽골 인종, 에티오피아 인종, 아메리카 인종, 말레이 인종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백인종인 코카서스 인종이야말로 최초로 생겨난 가장 아름답고 재능이 있는 인종으로 다른 인종들은 모두 이것이 퇴화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블루멘바흐의 이 퇴화 이론은 19세기 중반까지 인종주의적 생각의 중심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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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루멘바흐가 분류한 다섯 개 인종의 두개골 모습.

  인종주의의 학문적 확산
 
  인종주의적 생각은 18세기의 계몽사상가들에게서도 거의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들은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인간의 보편성을 믿고 주장했는데 그것은 비유럽인에게는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비유럽인들을 같은 인간으로 생각하면 식민지배나 비유럽인의 노예화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유럽인을 열등한 존재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로크나 디드로, 달랑베르, 흄, 칸트, 헤겔 같은 유명한 인물들이 이런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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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생각해야 된다고 주장했으나 그렇다고 인종주의적 생각에서 벗어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이성과 문명은 전적으로 백인, 서유럽인과 동의어였고 유럽 외부의 비백인들은 비이성, 야만성과 동일시되었다. 결국 이런 주장은 유럽인의 문화적, 인종적 우월성을 고무시킬 수밖에 없었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인종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찾으려는 노력은 해부학, 생리학, 언어학 등 여러 분야에서 집요하게 추구되었다. 녹스(R. Knox)는 1820년대에 영국 에딘버러 대학의 해부학자였다. 그는 많은 인간의 머리 골격이나 기타 몸체 구조의 분석을 통해 여러 인종은 분명히 해부학적인 차이를 보이며 그 외부적 특질은 지난 6천 년간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종주의적 생각을 의학 분야에 광범하게 유포시키는데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언어학 분야에서 이런 일을 한 대표적인 사람은 고비노(J.-A. de Gobineau)이다. 그는 19세기 중반에 인간을 세 집단의 어족(語族)으로 구분했다. 햄어족, 셈어족, 인도-유럽어족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북인도, 이란, 거의 전체의 유럽언어를 포함하는 인도-유럽 어족이다. 그는 인도-유럽어를 쓰는 사람 중에서도 가장 순수성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북유럽의 추운 지역에 사는 게르만족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혼혈을 통해 타락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아름다움, 신체적 힘, 지적인 능력에서 다른 인종이나 종족들을 훨씬 능가하는 코카서스 인종의 게르만족(아리아족)이 다른 인종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고비노의 주장은 19세기 유럽 인종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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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비노(Joseph-Arthur Gobineau, 1816~1882)

  노예제와 19세기 미국의 인종주의 이론
 
  19세기 인종주의 이론의 중요한 발전은 미국에서도 이루어졌다. 그것은 미국이야말로 노예제의 합리화가 중요한 과제인 나라였기 때문이다. 미국은 독립선언서에서 모든 인간은 동등하게 태어났다고 선언했다. 따라서 노예제는 미국민의 자유와 평등의 정신에 위배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인간의 열등한 다른 종이 있다면 이런 원리는 적용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쪽으로 논리가 발전하였다. 그런 생각은 헌법 기초자인 토마스 제퍼슨에게서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그는 노예제가 미국인들의 도덕적 성격에 암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예제의 폐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신체적인 아름다움이나 정신적, 지적인 능력에 있어서의 흑인의 열등성을 지적하며 그들은 더위에 강하기 때문에 육체노동에 생물학적으로 적합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그뿐 아니라 미국 독립에 기여한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이런 노력은 1840년대 이후 특히 이집트 연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흑인의 문화적, 생물학적 열등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모턴(S.G.Morton)이라는 해부학자는 두개골의 크기를 인간의 도덕적, 지적 능력과 결부시킨 인물이다. 그는 이집트인들의 두개골 연구를 통해 고대 이집트의 지배계급이 코카서스인이었다고 주장을 폈다.
 
  '이집트에 니그로가 많기는 했으나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하인이나 노예였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고대 이집트를 흑인노예를 부리는 백인사회로 만들었다. 미국의 노예제 사회에 정당성을 주기 위해서였다.
 
  다윈의 진화론과 인종
 
  찰스 다윈은 1859년에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통해 진화론을 주장함으로써 생물학의 혁명을 불러왔다. 그는 동물이나 식물이 오랜 시간에 걸쳐 진화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많은 지역을 여행하며 과학적 증거를 수집했다. 특히 1835년에 그가 남미 에콰도르의 태평양상에 있는 갈라파고스 섬을 탐사하여 생물 진화의 흔적을 찾아낸 것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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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0) 진화론의 창시자.

  그의 이론의 핵심은 종이 변화해 가는 방식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는 자연도태라는 개념으로 이를 설명한다. 생존투쟁에 이로운 특질들을 가진 개체들은 살아남아 후손을 재생산하는데 성공하고 그렇지 못한 개체들은 경쟁에서 져서 그대로 사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도태를 통한 적자생존이 장기간 지속되면 이것이 유전형질을 변화시키고 이에 따라 종의 변이를 가져오는데 이것이 바로 진화 현상이라는 것이다. 다윈은 이제 이렇게 만들어진 진화론을 가지고 인종 사이에 나타나는 여러 차이를 설명할 수 있었다. 모든 인류는 하나의 조상에서 비롯되었으나 진화에 의해 여러 인종으로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1850년대까지도 단일인종설(한 쌍으로 시작한 인류가 아마 환경에 의해 여러 인종으로 분화했다)과 다인종설(인종적 차이는 인류의 처음부터 존재했다)은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다윈은 진화에 의한 변화를 가지고 단일인종설의 퇴화이론과 함께 다인종설의 불합리함을 함께 비판함으로써 두 이론의 다툼을 끝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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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물학의 보고인 갈라파고스섬(Galapagos Islands)의 이구아나.

  스펜서와 사회적 다윈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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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

  다윈주의를 인간사회에 똑 같이 적용한 이론이 사회적 다윈주의이다. 그 가장 유명한 주창자는 허버트 스펜서로 그는 다윈의 진화론이라는 생물학 원리를 받아 들여 그대로 사회에 적용했다.
 
  동식물과 같이 개인이나 가족, 인종도 진화과정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으며 결국 사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개인적인 생존투쟁, 계급적인 생존투쟁, 인종적, 문명적 수준에서의 생존투쟁도 모두 이 원리에 의해 합리화될 수 있었다.
 
  사회적 다윈주의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인종주의 이론의 기반으로 유럽에서 광범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그것이 자연과학의 껍질을 둘러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학이 맹목적으로 존중되고 있던 19세기 후반의 분위기에서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것은 유럽국가들의 제국주의 정책과도 관계가 있다. 이 시기는 유럽 국가들이 전 세계를 식민지화하던 시기였으므로 사회적 다윈주의는 이것을 정당화하기에 아주 좋은 무기가 되었다. 유전적으로 우월한 유럽인이 열등한 비유럽인을 지배하는 것은 자연법칙에 합당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다윈주의가 가장 크게 환영을 받은 곳은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의 중심인 미국이다. 그 이론이 당시 거의 무제한한 자유를 누리며 급격하게 성장하던 미국 자본주의의 요구에 잘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8-01-22 오전 12:37:49


<25> 인종주의와 서양문명 ② 전근대 유럽사회와 인종주의


인종적 편견이 없었던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사회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자신의 종족이 다른 종족보다 우월하다고 보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 이것은 자신의 문화나 생활방식이 친숙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인 반면 다른 종족의 문화나 습관은 잘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족중심주의는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어줄 수도 있으므로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건강한 사회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인종주의 같은 형태로 지나치게 발전하면 문제가 된다.
 
  고대인들은 대체로 피부, 머리칼, 눈의 색깔이나 얼굴, 신체의 생김새와 관련해 인종주의를 발전시킨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신분의 높고 낮음이 피부색이나 얼굴 모양과 별 관계없는 사회들도 있다. 이집트가 그 좋은 예 가운데 하나이다.
 
  이집트의 역사 속에서는 인종적 편견이나 차별이 있었던 것 같지 않다. 이는 이집트인이 여러 종족의 혼혈이었던 것과 관계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집트에서는 전형적인 흑인 용모를 가진 파라오도 나타나고 흰 피부를 가진 노예들도 많다. 용모나 피부색이 사회적 신분과는 별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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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인 파라오. 기원전 19세기의 Sesostri III와 기원전 18세기의 Amenemh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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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도기 가운데에는 흑인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들이 꽤 있다.

  그리스인들은 자기 종족을 매우 귀히 여기고 주위의 다른 종족들을 미개하다고 야만인으로 경멸했지만 야만인을 피부색깔로 구분해서 정하지는 않았다. 또 흑인의 지적 능력이 낮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사람은 자연적으로 자유롭고 어떤 사람은 노예인 것이 분명하다.……그리고 후자에게 노예의 조건은 이익이 되고 정당하다'고 말해서 논란거리를 남기고 있다.
 
  타고난 특질에 따라 인간이 자유인과 노예로 자연스럽게 구분된다는 것이니 이는 인종주의적 편견과 연결될 수 있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대의 서양인들은 노예제를 옹호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주장을 많이 이용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타고난 천성에 따라 노예가 되는 '자연적' 노예와, 전쟁에서 포로가 되거나 납치, 파선 등에 의해 노예가 되는 '관습적' 노예는 구분했다. 그리고 뒤의 경우와 같이 폭력이 작용하는 경우는 옹호하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그가 노예제를 정당화하고 야만인을 경멸하기는 했으나 용모나 피부색에 따른 차이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로마사회와 인간의 구분
 
  로마인들도 인종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로마는 수많은 종족들을 그 영토 안에 포함하고 있었고 이들을 제국의 법이나 정치의 틀 안에서 하나로 단결시켜야 했으므로 인종주의적 생각을 발전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공화국과 그것을 구성하는 시민이었다.
 
  따라서 공화국의 법이나 정치를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제국 안의 어떤 사람이나 집단도 배제하려고 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로마인들에게는 그 영역 안의 많은 종족 사람들이 그들과 생김새나 피부 색깔이 다르다고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단지 그들을 어떻게 질서 잡힌 시민권 안에 잘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만이 과제였을 뿐이다. 따라서 로마시대에도 노예제는 일반적인 일이었으나 그것은 인종적 차별과 관계가 없다.
 
  기독교 시대에 들어와서는 다른 문화나 종교에 대해 많은 편견과 적대감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는 보통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같은 것을 직접 만들지는 않았으나 그것을 고취한 것으로 비판받는다.
 
  그러나 성경 속의 노예제와 관련되는 어느 구절에도 인종이나 피부색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없다. 또 검은 것을 악이나 악마적인 것과 관련시켰음에도 초기 기독교인들은 일반적으로 흑인들에게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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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리게네스 (Origenes. 약 185~254). 교부인 오리게네스는 인간의 영혼은 원래 에티오피아인같이 검은데 신성한 구제에 의해서 모든 영혼은 희게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의 주된 구분은 신자와 비신자의 구분이기 때문이다. 4세기와 5세기에 걸쳐 살았던 교부 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모든 사람은 개종을 하게 되면 신의 아이가 되며 기독교 문명 속의 일원으로서 평등해질 수 있었다. 개종을 하면 인종적 문화적 모든 차이가 기독교적인 형제애 가운데에서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보면 그리스인, 로마인, 초기 기독교인들이 나중에 인종주의를 불러 올 기본적인 구분을 -자연적 노예과 관습적 노예, 문명과 야만, 구제와 저주의-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구분 자체를 인종주의로 보기는 어려우며 더욱이 피부색에 의한 편견으로 비난 할 수는 없다.
 
  중세사회와 종교적, 문화적 인종주의
 
  중세 사회는 기본적으로 기독교 사회이므로 다른 종교를 믿는 이교도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는 존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중세 시대의 유럽인들은 급속히 커지고 있는 이슬람세력과 계속 싸움을 벌여야 했으므로 이슬람교도들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십자군 전쟁 당시인 1099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한 기독교도들이 이슬람교도들과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한 사건은 그들이 이교도에 대해 얼마나 배타적이었는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슬람권의 문화수준이 월등하게 높았기 때문에 그들을 인종주의적인 면에서 열등하다고 차별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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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십자군 전쟁(1099). 제1차 십자군이 이슬람의 성을 공격하는 장면.

  유대인에 대해서는 전연 다르다. 유럽의 기독교 사회 안에서 소수집단을 형성했던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였다는 이유로 기독교 시대 초기부터 계속 비난을 받아왔다. 따라서 중세 시대 내내 빈번하게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십자군 전쟁 때에 심했는데 유대인에 대한 이런 박해는 근대의 인종주의와 비슷한 면이 있다.
 
  1492년에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가 함락된 후, 스페인에서는 그 땅에 오랜 세월 뿌리박고 살던 30만 유대인에 대한 추방령이 내렸다. 다른 곳으로 떠난 사람도 많으나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추방을 피하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하든가 또는 개종한 것처럼 가장했다.
 
  이런 가짜 개종자들은 아무리 처신을 잘한다고 해도 의심의 여지가 있었으므로 기독교인들은 종교가 아니라 혈통에 의해 유대인을 제한하고 차별하는 법령을 만들었다. 이런 과정에서 유대인의 피는 세례로도 지워질 수 없는 유전적인 더러움을 갖는 것으로 주장되었다.
 
  유대인에 대한 이런 편견은 주로 종교적 이유에 의한 것이지만 그것이 혈통과 관련되고 있으므로 인종주의적 요소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를 종교적 인종주의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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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무드 등 유대교의 서적을 불태우는 중세 시대 유럽인들.

  중세 말에 와서 지리적, 문화적으로 다른 지역 사람들과의 접촉이 늘어나며 '야만인'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이 야만인들은 나체로 생활하고, 얼굴이나 발 외에는 털이 많이 나 있고, 원숭이는 아니나 원숭이 같은 모습을 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야만인은 폭력적이고, 성적인 면에서 난잡하고, 이성이 결여 되어 있고, 예의와 문명이나 도덕성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는 유럽인과는 완전히 다른 문화적 특성으로 생각되었다.
 
  이런 가운데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로 진출하여 이들 야만인과 직접 부딪쳤을 때 인종주의적 차별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문화적 인종주의의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이것과 근대적인 생물학적 인종주의와의 차이는 사실 크지 않다.
 
  근대적, 생물학적 인종주의의 등장
 
  근대적 인종주의는 15세기에 포르투갈 사람들이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흑인들을 납치하여 포르투갈에서 노예로 팔기 시작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16세기 이후 스페인 이외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인들이 아메리카로 진출하며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처음에 그들은 비유럽인에 대한 착취, 억압, 노예화를 신체적 차이가 아니라 문화적 원시성에 돌렸다. 또 종교적 요인도 중요했다. 그러나 곧 생물학적인 인종주의가 등장했다.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아프리카인들은 천성적으로 열등하며 노예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스페인인들은 이런 논리를 갖고 중남미 지역의 원주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했다.
 
  북아메리카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처음 원주민들을 '고귀한 야만인'으로 보았던 잉글랜드의 청교도 식민자들은 기독교를 통해 이들의 영혼을 구하려 했다. 그러나 토지를 둘러싼 다툼은 결국 원주민들의 이미지를 급속히 '저열한 야만인'으로 변화시켰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주민은 악마의 앞잡이로 신에 의해 저주받아 구원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잘해봤자 열등한 인간이고 나쁘게 말하면 야만적인 야수 이상이 아니라고 믿었다. 심지어 '인디언이라고 불리는 동물은 모두 없애는 것이 가장 알맞을 것'이라는 과격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은 실제로 이런 사람들의 말대로 19세기말이면 백인에 의해 북미대륙에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생물학적 인종주의가 발전하는데 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아프리카 노예의 수입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노예화하려 하면 도망치거나 싸우다 죽는 등 노예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플랜테이션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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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메리카로 항해하는 배 위의 흑인 노예들

  노예 농장은 17세기 초부터는 북아메리카로도 확대되었다. 담배 플랜테이션들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690년대가 되면 노예제도가 북아메리카 사회에 확고히 자리 잡게 된다.
 
  이 시기에 흑인들의 인종적 열등성을 주장하고, 흑인은 생리학적, 심리학적으로 노예적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이렇게 노예제도를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생물학적 인종주의는 그런 과정에서 자라난 것이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8-01-17 오전 1:00:03

 

<24> 인종주의와 서양문명 ① 인종주의, 왜 문제인가?

 

인종주의와 서양문명
 
  1. 인종주의, 왜 문제인가?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인종주의'
 
  요사이 우리나라에 수십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와 있다. 우리의 경제력이 커진 탓이다. 그런데 이들에 대한 대접은 매우 소홀하다. 못사는 나라 사람들이라 하여 우습게 안다. 욕을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구타도 심심치 않은 것 같다. 또 불법체류하고 있는 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임금을 제대로 안 주는 경우도 많다.
 
  이런 차별과 관련해서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인종주의'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런 차별을 인종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은 인종주의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막연히 미국의 흑인을 포함한 유색인 차별 같이, 피부색에 따라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이겠거니 생각할 뿐이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인종주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고 역사적으로도 매우 깊은 뿌리를 갖고 있다.
 
  이렇게 우리가 인종주의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세계사 교육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나 대학에서 인종주의와 관련된 내용을 거의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니 인종주의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서양의 역사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종주의 문제를 다룬 전문적인 책들을 제외하면 일반적인 역사책 속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다. 서양 사람들이 인종주의 문제를 밖으로 잘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서양 사람들의 그런 태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자기네가 그 동안 인종주의를 갖고 수백 년 동안 온갖 악행을 저질러 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떳떳하지 않은 이 문제를 다루는 것 자체를 회피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서양사나 세계사에서 인종주의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는 것은 서양 사람들의 이런 태도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 사람들이 자기네 책에서 인종주의를 다루지 않으니까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의 유럽중심적인 서양사 내지 세계사 체계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서양인도 아닌 우리가 이 문제를 소홀히 다루는 것은 매우 잘못된 태도로 빨리 고쳐야 할 것이다. 그래야 세계의 역사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인종주의 문제가 왜 중요한가
 
  그러면 우리는 왜 인종주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그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지난 500년간 유럽 국가들이 전 세계로 식민지를 확대해 나가며 다른 대륙의 사람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이념이 인종주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북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원주민을 거의 멸종시키고, 중남미 · 아시아 · 아프리카의 식민지 사람들을 죽이거나 노예화하고 착취하는 일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또 2차 대전 때에는 독일 사람들이 약 60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했는데 그 바탕에 있는 것도 역시 인종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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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원주민들은 18세기에 서양인들이 그 지역으로 들어간 이후 거의 멸종되다시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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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인 학살의 모습.

  인종주의가 이렇게 사악한 성격을 갖는 것은 그것이 인간을 우월한 인종과 열등한 인종으로 나누고 전자가 후자를 다스리는 것은 물론, 노예로 부리거나 심지어 죽이는 것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인종주의는 결코 윤리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이념이다.
 
  그런데도 2차 대전이 끝난 후 비교적 약화된 것 같이 보였던 인종주의가 최근 서양에서 다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은 우려할만한 일이다. 1980-90년대에 들어와 경제 사정이 나빠지며 유럽 국민들 사이에 자기 나라에서 거주하고 일하는 이민 노동자를 비롯해 비유럽계 사람들에 대한 증오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자기네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불만이 인종주의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극우파 정당이나 단체들이 공공연히 이들에 대한 보다 엄격한 규제나 추방까지도 주장하고 있고 이에 대한 국민들의 호응도 적지 않다.
 
  인종 차별이 고질적인 문제로 남아 있는 미국에서도 냉전이 끝나고 사회가 보수화하며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것들은 인종주의가 지나간 과거의 문제가 아니며 앞으로도 우리가 계속 부딪쳐야 할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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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국민전선의 당수 장 마리 르팽 (Jean-Marie Le Pen). 극우정당인 국민전선(FN)은 10% 이상의 지지를 계속 받으며 프랑스 정치의 중요한 요소가 되어 있다. (© REUTERS)

  2. 인종과 인종주의는 무엇인가
 
  '인종'은 비과학적인 개념
 
  먼저 인종(人種:race)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근대에 들어와 서양인들은 인종이라는 단어를 혼란스럽게 사용했다. 민족을 의미한 경우도 있고 유대 인종이라는 말처럼 종교적 집단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었다. 또 인류 전체(human race)를 의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을 신체나 용모의 특징에 따라 나누는 것을 뜻한다. 19세기에 인종을 보통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의 세 형태로 나눈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신체나 골격, 용모의 특징은 인간 집단을 나누는 명확한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여기에 의해 딱 떨어지게 구분되지 않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사이에는 호르몬 활동이나 혈액 성분 등 여러 다른 기준들이 더 추가되기도 한다. 그에 따라 수십 개의 인종으로 나누기도 하나 정확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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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인종적 타입의 모양

  더 중요한 것은 학문적으로 볼 때 인종이라는 것이 별 의미 없는 구분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생물학에서 종(種)이라고 부를 때에는 그 안에 속하는 개체들이 공통의 유전적 특징을 갖고 있고 성적 교섭을 통해 후손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다른 종 사이에서는 후손이 만들어질 수 없으며 가까운 종 사이에서 그것이 혹시 가능하다 해도 그 후손이 생식능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과 당나귀 사이의 잡종인 노새가 생식력이 없는 것이 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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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말과 숫당나귀 사이의 종간 잡종인 노새. 노새는 생식능력이 거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인종으로 불리는 다른 인간 집단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그것이 가능하다. 백인과 흑인, 황인과 흑인, 황인과 백인 사이에서 얼마든지 생식 가능한 아이를 낳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인종은 종이 아니며 과학적인 면에서는 아무 쓸 데 없는 개념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사회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서양 사람들이 인종을 생물학에서의 종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여 어떤 인종에 속하는 사람은 그 정신적, 신체적 특징들을 유전에 의해 후손에게 물려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의 아름다움이라든가 지능, 또 도덕성 같은 것도 인종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이때 그들이 미리 머리 속에 가정하고 있는 것은 백인종이 황인종이나 흑인종에 비해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우월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우월성은 유전되는 것이고 생물학적인 것이므로 결코 인간이나 환경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런 뜻에서 인종은 과학적으로 보다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더 큰 의미를 갖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인종주의는 무엇인가
 
  이렇게 불분명하며 인간 집단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를 가정하는 인종 개념 위에 서 있는 이데올로기를 인종주의라고 한다. 그러니 인종주의도 많은 문제점들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종주의는 다음 몇 가지의 기본적인 가정에 기초해 있다.
 
  첫째, 인간은 공통의 신체적 특질을 가진 다른 인간집단인 인종으로 나뉘는데 그들 사이 의 차이는 동물의 다른 종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와 같다.
 
  둘째, 신체적, 정신적 특질은 서로 관련이 있으며 유전에 의해 후대에 전달된다. 교육이 그것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셋째, 집단은 개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개인의 행위는 대체로 그가 속한 인종적, 문 화적 집단에 의존한다.
 
  넷째, 인종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서로 간에 우열이 있다. 이는 신체적인 아름다움이나 지적, 도덕적 특질의 우열로 나타난다.
 
  다섯째, 위의 전제의 의해 우월한 인종이 열등한 인종을 예속화, 절멸하는 것은 정당화 된다.
 
  인종적 집단 사이에 이렇게 우열을 가정하는 것은 자원이나 부, 권력의 불평등한 분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이다. 한 인종이 이런 것의 보다 많은 부분을 차지하거나 모든 것을 독차지하려는 것이다. 심지어는 어떤 인종적 집단을 한 사회에서 고립시키거나 축출하고 심지어는 모두 죽이는 것까지도 정당화한다. 서양에서 만들어진 모든 이념 가운데 가장 악질적이고 저질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 학살과 식민지 해방으로 인해 2차 대전 후에는 UN을 중심으로 인종적 차별을 금지하는 국제적 운동이 벌어졌고 법으로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나라도 많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과거와 같은 노골적인 인종주의적 태도는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서양의 많은 사람들은 인종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겉과는 달리 속으로는 황인종이나 흑인종을 깔보고 경멸한다. 그것은 이 세계가 식민주의 시대 이래 불평등하게 만들어졌고 오늘날에도 백인종과 다른 인종 사이에 경제적, 문화적 격차가 크게 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종주의는 아직도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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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N의 인종차별금지 포스터. UN은 1966년에 인종차별금지의 날을 정하고 지구상에서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8-01-15 오전 8:37:46


<23> 근대 자연법의 형성과 식민주의 ③ 존 로크와 식민주의

 

4. 존 로크와 식민주의
 
  존 로크와 아메리카
 
  로크는 보통 1688년 영국 명예혁명의 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시민정부 2론>이 군주에 대한 잉글랜드 의회의 우월을 확인한 명예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해 씌어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서양에서 의회민주주의 확립에 큰 공헌을 한 인물로 생각된다. 서양 근대 정치사상에서 그를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로 집어넣는 이유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대체로 그렇게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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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로크 (John Locke, 1632~ 1704)

  물론 그가 사회계약설 등을 통해 자연법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자유주의 사상과 입헌군주제가 만들어지는 데 이론적으로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또 18세기 계몽사상의 중요한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양 사람들의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이다. 비서양인의 입장에서는 달리 볼 필요가 있다. 그의 자연법사상이 아메리카 식민지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발전했기 때문이다.
 
  의사의 조수로서 옥스퍼드 대학에서 일하던 로크는 1666년에 당시 잉글랜드 정계의 실력자 가운데 한 사람인 샤프츠베리 백작과 알게 되고 그 후 그의 주치의이자 비서로서 일했다. 그 인연으로 1671년에는 샤프츠베리가 북아메리카의 캐롤라이나 식민지에 갖고 있던 영지의 관리를 돌보게 되었고 1673년에는 정부의 '무역과 플랜테이션위원회'에서 비서로 일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 동안 캐롤라이나에서 거주하면서 북아메리카 상황에 대해 많은 경험과 지식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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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프츠베리 (Anthony Ashley-Cooper, 1st Earl of Shaftesbury, 1621~1683)

  이 시기는 북아메리카 동해안의 잉글랜드 식민지가 점차 확장되며 원주민과의 갈등도 점점 커져가고 있던 때이다. 식민자들이 울타리를 치고 농장을 확대하자 주로 사냥이나 채취로 생계를 이어가던 원주민들이 생존권을 잃게 되고 따라서 강력하게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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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미 원주민의 들소사냥 모습

  토지를 둘러싼 원주민들과의 분쟁들 가운데에서 로크는 잉글랜드 식민자들의 권리를 이론적으로 옹호하는 역할을 했다. 또 개인적으로도 상당한 투자를 함으로써 식민지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정치사상 속에서 아메리카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크의 자연법과 재산권 이론
 
  로크는 자연 상태나 자연인, 사유 재산권 등 그의 자연법의 중요한 개념들을 그로티우스나 푸펜도르프에게서 빌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머리 속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앞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아메리카의 현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도 아메리카에 대한 유럽인의 '정복의 권리'는 부인했다. 그것이 자연법에 어긋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자연인으로, 아메리카의 상태를 자연 상태로 보았다. 그것은 아메리카인을 원시적인 인간으로 간주하고 그들의 국가나 종족 집단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권리를 부정하기 위해서였다.
 
  그도 앞의 사람들과 같이 인간은 이 세계를 신으로부터 공유로 하사받았다고 생각했다. '어느 누구도 본래적으로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타인을 배제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이 이 세계를 공유물로 준 것은 마찬가지로 인간이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생존의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 생존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면 개인이 그것을 전유해야 한다. 그리고 이 전유는 자연에 사람의 힘을 가함으로써 가능하다. 과실을 나무에서 따든 짐승을 잡든 모두 자기 것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힘이 자연에 가해져서 얻어진 것이다. 땅의 사유화도 마찬가지이다.
 
  그로티우스는 땅의 사유를 경작과 관련시켰으나 로크는 그것을 보다 추상적인 개념인 '노동'이라는 개념과 결합시킴으로써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경작이라는 노동 행위를 통해 토지의 생산 능력을 높이고 그래서 이 세상을 더 풍요하게 만드는 사람만이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면적의 잉글랜드 토지가 아메리카 토지에 비해 10배 이상의 생산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이런 노동 행위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만으로 전유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울타리치기를 전제로 한다. 즉 개인이 울타리를 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울타리를 쳐서 땅이 전유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공동 경작은 가치를 창출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땅으로부터 원주민의 축출
 
  이렇게 전유가 재산권의 기초이므로 집단으로 공동 경작을 하는 원주민이라 할지라도 그 재산에 대한 배타적인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었다. 유럽적인 농업의 형태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토지에 대한 권리를 가질 수 없었다.
  이뿐이 아니다. 그는 더 나아가 원주민이 기존에 소유하고 있는 토지에 대한 권리 자체를 부정하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그는 아메리카의 버려지고 비어 있는 광대한 땅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버려진' 이나 '비어 있는' 이라는 표현들은 중요하다.
 
  비어 있는 땅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땅이다. 따라서 그것을 차지하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버려진' 땅은 적절히 관리가 되지 않은 땅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방치되어 결과적으로 버려진 땅'인 것이다.
 
  이렇게 어떤 사람들에 의해 방치되어 버려진 땅은 다른 사람의 노동을 통해 다시 전유가 가능했다. 그것을 경작하려고 하는 사람의 소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 문제는 '방치' 되었다는 판단을 누가 하느냐 하는 것이다. 로크의 경우 이는 당연히 잉글랜드 식민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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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로크의 저서, 인간오성론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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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로크의 시민정부2론 (Two Treatises of Government, 1689).

  로크는 시민정부제2론에서 재산권 이론을 발전시키고 있다.
 
  로크는 전유의 조건으로 두 가지를 들고 있다. 하나는 울타리를 치고 전유하고도 충분한 땅이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땅에서 생산되는 생산물이 남아서 썩을 만큼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첫 번째 것은 아메리카의 경우 인구에 비해 땅이 넓으므로 큰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두 번째 조건이다. 이 조건이 의미하는 것은 만약 원주민이 자기들이 공동 소유하고 있는 땅에서 생산물을 썩게 만들 정도로 많은 것을 얻게 된다면 이 조건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 경우 그 땅은 다른 사람에 의해 전유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땅의 풀이 그대로 시들어 썩든가 따지 않은 과일이 떨어져 썩는다면 그것은 '버려진' 땅으로 간주될 수 있고, 따라서 다른 사람이 전유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 된다. 결국 원주민에게는 당장 소비할 수 있는 만큼의 과일, 사냥감 외에 다른 것을 더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아예 차단된다.
 
  그러면 잉글랜드인은 이 제한 조건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그것은 화폐를 통해서이다. 화폐를 통해 '이 세계의 다른 부분들과 통상'을 함으로써 생산물이 썩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이용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인디언들도 물물교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크가 전유를 제한하는 조건을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것은 원주민의 토지 전유만 막을 뿐 잉글랜드 식민자에게는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잉글랜드 식민자만이 아메리카에서 대규모의 토지 전유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 또 화폐라는 장치를 통해 무한정한 자본 축적도 가능하게 된다.
 
  원주민과 잉글랜드인의 차별
 
  원주민에 대한 이런 차별적인 태도는 잉글랜드와 아메리카의 공유지에 대한 그의 다른 태도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그는 아메리카에서는 공유지는 원래 신이 인류에게 공동으로 준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조건만 맞춘다면 누구나가 전유할 수 있다.
 
  반면 잉글랜드의 공유지는 어떤 사람들의 집단 사이의 계약의 산물로 생각한다. 잉글랜드에서는 그것이 모든 인류에게 공유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역이나 교구 사람들만의 공유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아메리카에서의 경우와 달리 아무나 함부로 전유할 수 없다.
 
  그러므로 로크의 재산권 이론이 그 후 아메리카식민지에서 원주민을 토지에서 원천적으로 분리시키는 중요한 근거로 이용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원주민이 사냥을 위해 잉글랜드인이 만든 울타리를 넘거나 파괴하는 것은 잉글랜드인의 사유재산권을 침해하는 행위로서 제재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그는 북아메리카에서 19세기 말까지 지속된 원주민 배제와 학살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장본인이 되었다. 후대인들이 계속 그의 논리를 이용했던 것이다.
 
  로크는 서양인들에 의해 근대적인 사유 재산권 이론의 기초를 만들고 자유주의 사상의 기초를 놓은 선구자로 높이 평가 받으나 그것이 비유럽인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이야기로 분명해졌을 것이다.
 
  따라서 로크의 자연법을 유럽적인 문맥에서만 이해하는 것은 그의 사상을 크게 왜곡시킬 가능성을 갖는 것이다. 그의 자연법도 그로티우스의 것과 같이 유럽과 비유럽에 달리 적용되는 매우 차별적인 원리로서 보편적인 성격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의 사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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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인 식민자들의 들소사냥. 백인들은 특히 19세기에 가죽을 얻기 위해 중부평원지역에 서식하고 있는 들소들의 씨를 말려서 원주민들의 생존을 크게 위협했다. 1880년대에 올란도 본드라는 사람은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단 하루에 300마 리, 두 달 사이에 5,855마리의 들소를 사냥하기도 했다. 이 그림은 들소의 머리뼈를 산처럼 쌓아놓은 광경.

  5. 자연법은 보편적인 원리가 아니다
 
  18세기 초가 되면 자연법 사상은 대부분의 신교 국가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스칸디나비아- 에서 학문적인 도덕 철학의 가장 중요한 형태가 되었다. 또 빠르게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아메리카에서 지반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정치경제학 같은 새 학문들의 발판이 되었을 뿐 아니라 독일에서의 법 개혁 같은 개혁운동의 발판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자연법이 형식적으로는 인간의 사회적 행위에 대한 보편적 원리를 추구했으므로 이 자연법의 개념은 18세기 사람들이 자신들을 국제적이고 세계시민적이라고 믿게 했다.
 
  그러나 위에서 보듯이 근대 자연법은 식민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발전한 것이다. 그것은 유럽인과 비유럽인에게는 달리 적용되는 차별적인 원리로서 식민주의적 행위를 옹호하고 정당화 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 구체적인 실천원리까지도 만들어 주었다.
 
  물론 푸펜도르프에서와 같이 그것이 보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학문 체계로 발전할 싹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7,8세기를 주도한 것은 스페인, 네덜란드, 잉글랜드, 프랑스 같은 식민 국가들이었지 독일, 스웨덴 같이 식민 활동과 무관한 나라는 아니었다. 따라서 그로티우스나 로크의 자연법 이론이 주류를 이룬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자연법 이론의 이런 식민주의적 성격은 계몽사상에도 대체로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그래서 식민주의를 옹호하거나 상업의 자유를 주장하며 비유럽지역에 대해 통상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17-18세기에 유럽 국가들이 벌인 수많은 전쟁들은 거의가 무역을 확대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다. 그리고 당시 유럽 국가들은 모두 보호 무역의 장벽을 치고 있었으므로 어디에도 자유 무역은 없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비유럽지역에 대해서는 통상의 자유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법을 바로 이해하는 것은 역시 서양인들이 그 보편성과 세계 시민성을 강조하는 계몽사상에 내재해 있는 식민주의적 성격을 바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단초가 된다. 자연법의 성격을 바로 안다는 것이 이에 대한 유럽 중심주의적 해석을 넘어서서 서양 근대 사상의 성격을 바로 이해하게 해 주는 지름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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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디언 유보지역(Indian Reservation). 백인들은 원주민들을 쓸모없는 오지로 내몰고 그곳을 인디언 유보지라고 불렀으나 그 땅도 점차 줄어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땅을 인디언 보호지구라고 부르나 그것은 결코 보호지구가 아니고 일종의 유형지이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8-01-10 오전 3:26:59

 

<22> 근대 자연법의 형성과 식민주의 ② 그로티우스와 식민주의적 열망

3. 그로티우스와 '바다의 자유'
 
 
네덜란드 사람인 그로티우스(Hugo Grotius)는 근대 자연법의 창시자이자 국제법의 아버비지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1609년에 <자유로운 바다: Mare liberum>라는 글을 통해 바다의 자유를 주장했고 1625년의 <전쟁과 평화의 법>이라는 책을 통해 국제법의 원리를 만들었으며 그것을 자연법 위에 세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상은 보통 평화롭고 공정한 국제관계의 형성을 염두에 둔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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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고 그로티우스 (Hugo Grotius, 1583 –1645)

  그러나 그가 바다의 자유를 주장한 것은 공정한 국제법을 위해서가 아니다. 17세기 초는 네덜란드가 동인도회사를 만드는 등 아시아 무역을 위해 매우 애쓰던 시기이다. 따라서 이때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내세우며 이 수역의 독점권을 주장하고 있던 포르투갈의 논리를 분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노력은 네덜란드의 상업적 나아가 식민주의적 이해관계에서 출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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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르데시아스 조약 (Tordesillas條約, 1494) 원본

  그는 인간은 신으로부터 이성과 자유의지를 물려받았으므로 기본적으로 이성적인 존재이며 도덕적인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신들의 편익을 위해 자연법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기독교적인 고려는 상당히 약화되어 있다.
 
  그가 자연법을 구축하기 위해 인간의 사회적 본능으로부터 끌어낸 것은 다섯 개의 기본적인 원리이다. 그것은 1) 다른 사람의 재산에 대한 존중 2) 부당하게 뺏은 재산을 돌려줄 의무 3)잘한 일을 명예롭게 해 주기 4)손해에 대해 배상해줄 의무 5) 자연법을 공격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이다.
 
  이 원리들을 보면 그의 사상에서 재산권이 중심적인 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분명하다. 따라서 그가 '자유로운 바다'에 대한 주장을 기본적으로 재산권 위에 구축한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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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로운 바다 (Mare Liberum,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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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과 평화의 법 (De Jure Belli ac Pacis, 1625)

  그러나 이런 생각은 그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비토리아와 함께 역시 살라만카 학파에 속하는 바스케스(Ferdinando Vasquez)의 강한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글에서 두 사람을 수십 번씩 언급하고 있다.
 
  특히 비토리아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논리의 큰 틀이 같으며 아에네아스를 포함한 고대의 터무니없는 글들에서 자기 논리의 근거를 끌어내는 방식도 똑같다. 다만 두 사람의 논리를 더 정교하게 만들고 그것을 네덜란드의 식민주의적 이익을 위해 재구축했을 뿐이다.
 
  그는 재산을 동산과 부동산으로 구분했는데 동산은 그것을 직접 신체적으로 취함으로써 소유할 수 있다. 몸을 움직여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동산은 그렇게 할 수 없으므로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의 울타리치기가 필요하다. 울타리치기를 통한 점유와 시효(時效)에 의해서만 재산권의 주장이 가능하다. 점유만 해서는 안 되고 상당기간 그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땅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바다는 깊어서 울타리를 칠 수 없다. 당연히 바다를 개인적으로 점유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공유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누구나 바다를 자유롭게 항해하고 다른 나라와 교역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통해 그가 <자유로운 바다>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는 네 가지이다.
 
  1) 동인도에 대한 접근은 모든 나라에게 열려있다.
  2) 이교도들은 그들이 단지 이교도라는 이유만으로 공유나 사적인 재산권을 박탈당할 수는 없다.
  3) 바다 자체나 항해의 자유는 점령이나 교황의 수여, 시효나 관습 등에 의해 어느 일방의 배타적인 권리가 될 수 없다.
  4) 다른 국가와 교역을 하는 권리는 어떤 이유에서건 특정한 한 쪽의 배타적인 권리가 될 수 없다.
 
  이런 이야기는 식민지에 대한 정복자로서의 권리나, 교황의 수여에 의한 권리를 주장하는 포르투갈의 배타적 권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또 신은 자급자족이 가져오는 해로운 결과를 원하지 않으므로 상업을 통한 교환과 그것을 진작시키기 위한 수단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포르투갈이 이런 자연법적 원리를 침해할 때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일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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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르데시야스조약에 의해서 만들어진 스페인과 포르투갈 지배권의 경계선. 연두색 부분이 포르투갈 세력권, 초록색 부분이 스페인 세력권이다.

  그렇다고 그의 이러한 주장이 일관된 것은 아니다. 나중에 잉글랜드가 네덜란드의 상업적 이익에 도전했을 때에는 이와는 달리 '폐쇄된 바다'를 주장했다. 자격 없는 자들이 제멋대로 무역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의 주장은 객관적인 원리에 의존하기보다는 네덜란드의 이익과 밀착되어 있다.
 
  그로티우스와 식민주의적 열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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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냥하는 북미 인디언 (18세기)

  그는 또 아메리카에서의 식민지 확보를 위해서도 같은 원리를 내세웠다. 토지는 신이 인간에게 공유로 수여한 것인데 그것을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개인적 소유로 하려면 울타리를 칠 뿐 아니라 그것을 경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땅에 대한 재산권은 직접 경작을 하는 개인에게만 가능했다.
 
  이런 논리로 그는 경작을 하지 않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땅을 침탈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반면 유럽에도 많이 산재하고 있는 빈 땅에 대해서는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다. 유럽의 땅은 모두 누군가의 재산권 하에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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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착생활을 하는 인디언의 실내 풍경

  또 그는 어떤 땅의 재산권은 그것을 경작하는 개인에게만 속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땅을 직접 경작할 개인들에게 분배될 경우에는 국가가 어떤 토지에 대해 권리를 갖는 것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주장은 다른 유럽국가가 이미 확보한 식민지를 빼앗기 위한 논리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로티우스의 자연법사상에서 식민주의에 대한 고려는 본질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바다의 자유라는 원리로 인도양이나
신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자유를 주장함으로써 기득권을 가진 다른 나라들의 권리 주장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재산권 이론으로 식민지 토지의 침탈을 정당화한 것이다.
 
  그의 자연법 이론은 이렇게 철저하게 식민주의적 열망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귀족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네덜란드 공화국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포르투갈이나 잉글랜드와의 교섭에서 네덜란드의 상업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애쓴 외교관으로서의 경력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자연법이나 국제법에 대한 이론적 구성은 그 결과물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주장하는 평등하고 공정한 국제법은 유럽 내에서 네덜란드의 이익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아메리카 원주민을 포함한 비유럽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매우 제한된 정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푸펜도르프의 자연법
 
  그로티우스의 제자로 자연법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 자무엘 푸펜도르프(Samuel Puffendorf)이다. 그는 독일 태생으로 독일의 룬트 대학 등에서 교수를 하다가 나중에는 스웨덴에서 활동했다. 그가 1672년에 쓴 자연법(De Jure Naturae)은 로크가 '이 종류의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평가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해 푸펜도로프는 로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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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펜도르프 (Samuel Pufendorf, 1632~ 1694)

  그는 자연법을 논할 때 그로티우스나 로크와는 좀 다른 태도를 갖고 있다. 독일이나 스웨덴은 스페인, 네덜란드, 잉글랜드와 달리 당시 식민지 문제에 직접 관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과 달리 이교도와 기독교인들에게 다 같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자연법을 만들기를 바랐다. 그가 자연법을 재산권이 아니라 도덕적인 맥락에서 검토한 이유이다.
 
  그는 자연상태를 원시 시대에나 있었던 것으로 생각했으므로 아메리카나 다른 식민세계를 원시상태로 보지는 않았다. 또 아메리카 원주민을 원자화한 자연인으로 보지도 않았다. 아메리카인들도 종족이나 국가를 구성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그들도 유럽 국가들의 구성원이나 마찬가지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그는 자연상태를 전쟁상태로 본
토마스 홉스와는 달리 평화상태로 보았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보편적이고 영구적인 자연법에 의해 다른 사람들과 사교를 하며 인간의 본성과 목적에 맞추어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재산권에 있어서도 그는 신이 인간에게 공동으로 이 세계를 주었다고 믿었으나 그것을 소유권이라는 적극적인 형태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것을 소극적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그것은 모든 사람이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도, 또 어느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신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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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펜도르프의 자연법(De Jure Naturae, 1672)

  따라서 존 로크가 나중에 개인적인 점유를 뜻하는 전유(專有, appropriation)를 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과 달리, 사용(使用)이 전유에 앞선다고 주장한다. 사용권이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라는 것이다.
 
  또 그는 아메리카에서의 스페인인의 여행과 무역의 자유를 정당화하는 비토리아의 논리를 공격하는 가운데 식민주의의 침략성을 고발하고 있다. 유럽인이 원주민의 땅에서 여행할 자유를 갖는 것은 단지 폭풍에 밀려 왔을 때나 순수하게 손님으로 해안에 도착했을 때뿐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는 환대를 받아야 하나 물론 필요한 단기간만 머물러야 했다. 장기간 머물 때는 그들의 동기를 살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교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유럽인들은 아메리카에서 원하는 누구나와, 또 무엇이든지 교역할 자유를 주장하나 그때도 동기를 살필 필요가 있다. 그들이 정의와 관용을 가지고 그렇게 하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당시의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동떨어진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그도 국가로부터 특허권을 수여받은 동인도회사 같은 특허회사들의 교역 독점권을 자연법에 속하는 것으로 믿었다. 또 필요한 경우 식민지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유럽의 굶주리고 쓸모없고 반역적인 사람들을 추방하기 위해서는 식민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생각이 그로티우스나 로크와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가 식민주의적인 고려를 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대에 로크와 같은 사람의 영향력이 훨씬 더 컸으므로 그의 상대적으로 온건하고 합리적인 주장은 잊혀지고 말았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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