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프레시안 2008-01-08 오전 12:58:09


<21> 근대 자연법의 형성과 식민주의


1. 근대 자연법, 어떻게 볼 것인가
 
  근대 자연법의 형성
 
  고대 그리스 철학과 로마의 스토아학파에서 발원한 자연법은 중세 시대에는 신학적 원리에 의해 지배되었다. 중세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자연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모든 법의 원천이 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중세적 자연법은 16, 17세기의 변화된 상황에 맞추어 스스로를 변화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16세기의 종교개혁과 그 후 1세기 넘어 계속된 종교전쟁, 또 유럽인이 아메리카나 아시아로 진출하며 부딪치게 된 많은 문제들이 자연법의 변화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7세기의 자연법 학자들은 신적인 원리보다 스토아 학파가 설파하고 있는 인간 이성의 자율성을 강조했다. 인간 이성이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원리가 근대 자연법 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그들은 자연법을 성경에서 나타나는 신의 절대적인 의지와 같은 초월적인 원리가 아니라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인간의 '이성'에 근거시켰다. 자연법의 존재를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꼭 필요한 것으로 보이는 사회성이나 편익과 관련시켜 설명한 것이다. 그런 것을 위해 자연법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비토리아에서 불완전한 형태로 시작되어 그로티우스, 푸펜도르프, 로크에게로 이어지고 나중에 계몽사상가들에 의해 받아들여지며 17, 18세기 유럽 사회, 정치사상의 근본 모티브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나타나는 국제법, 사유재산권, 자연상태, 자연권, 사회계약론, 인민주권설 등의 이론들은 모두 자연법에서 비롯되었다. 자연법이 계몽사상의 핵심일 뿐 아니라 근대 서양 사상의 본질적인 부분이 된 것이다.
 
  그것은 또 당대 미국의 독립전쟁이나 프랑스 혁명에도 큰 영향을 미침으로써 근대사의 진행과정에도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자연법의 바른 이해는 유럽 근대사상의 성격을 바로 이해하기 위한 선결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법의 이해와 유럽중심주의
 
  서양학자들은 지금까지 자연법을 대체로 인간의 보편적인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인 사상체계로 이해해 왔다. 근대인들을 맹목적이고 기독교적인 중세적 도덕률에서 해방시켜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인 도덕철학 위에 서게 했다고 믿은 것이다. 따라서 그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이고 찬미하는 태도를 보인다.
 
  물론 서양 사람들의 이런 태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자연법을 유럽의 사상사적 전통과 근대 초 유럽 내부의 정치, 사회, 경제와의 관련에만 중점을 두고 접근하기 때문이다. 즉 유럽적 관련에서만 자연법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자연법은 유럽인들의 탁월한 문화적 성취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대 자연법의 형성과정에는 그렇게 볼 수 없는 다른 중요한 측면이 있다. 자연법의 발전이 근대 초 유럽인들의 식민주의적 열망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자연법의 발전이 애초에 식민주의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으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서양학자들은 이런 면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것이 자연법 형성에서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고 단지 사소하고 부수적인 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근대 자연법에 미친 식민주의의 막중한 영향을 생각한다면 이런 태도는 상당 부분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서양학자들의 유럽중심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식민주의와의 관련성을 차단함으로써 그들이 찬양하는 자연법의 보편적인 의미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자연법을 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장에서는 근대 자연법의 형성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비토리아, 그로티우스, 푸펜도르프, 로크의 자연법사상과 식민주의와의 관련을 검토함으로써 근대 자연법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넘어서서 보다 객관적인 이해에 접근하려 한다.
 
  2.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과 비토리아
 
  아메리카 정복의 정당성 문제
 
  15세기 말에 시작된 스페인인의 아메리카 정복과 식민화는 매우 쉬운 과정이었다. 토착 제국들과 정치체들이 급속히 붕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메리카의 정복과 지배는 당시 스페인 사람들에게 큰 지적인 문제를 만들어냈다. 즉 아메리카에 대한 스페인왕의 지배권(imperium)과 재산권(dominium)을 어떻게 정당화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16세기 초에는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칙서가 그 근거가 되었다. 1493년에 교황이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드 공동왕에게 대서양에서 새로 발견되는 땅에 대해(그것이 어느 기독교 군주에 의해 점유되어 있지 않은 한) 지배권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황의 이런 행위는 교황이 기독교인과 이교도들 모두에 대해 세속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는 가정 위에 서 있었다. 그러나 이런 가정은 중세 자연법에 기초를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신학자들이나 법률가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교황알렉산더 6세 (Pope Alexander VI, 1431~1503)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504년에 페르디난드왕이 한 회의를 소집했다. 여기에 모인 법학자, 신학자, 교회법학자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오가 왕에게 속하며 그것은 인간의 법이나 신의 법에 합치된다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왕의 지배권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스페인의 공동왕 페르디난드(Fedinand Ⅱ)와 이사벨라(Isabella Ⅰ)

  1511년에 새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서인도의 이스파뇰라 섬에서 선교를 하던 도미니쿠스 파의 몬테시노 신부가 원주민에 대한 스페인 식민자들의 잔인하고 부당한 행위들을 설교를 통해 공격했기 때문이다. 그는 식민자들이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그들은 무어인이나 튀르크인과 마찬가지로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강경하게 성토했다.
  이 사건이 서인도제도 뿐 아니라 본국에까지 파장을 일으키며 국왕의 지배권 문제에 대한 논의를 다시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그 해에 부르고스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다시 한 번 스페인왕이 아메리카에 대한 지배권과 재산권을 갖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 결론을 내린 논거는 무엇일까.
 
  이 회의는 로마법에 근거하여 원주민들의 재산권을 부정했다. 원주민들이 적법한 사회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로마 법학자들에 의하면 사회란 재산에 기초해 있는 것이고 재산관계가 진정한 시민 사이의 모든 교환의 기초였다. 따라서 그런 관계를 갖고 있지 않은 사회는, 즉 시민공동체를 갖고 있지 않은 사회는, 그들의 땅을 빼앗으려는 침략자에 대해 재산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땅은 그들의 땅이 아니라 그들이 우연히 살게 된 열린 공간이라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아메리카 원주민과 그 사회, 국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은 16세기 스페인인들에게 매우 큰 과제였다.

  이런 주장은 서인도 제도 같이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곳에는 적용할 수 있었으나 아스텍이나 잉카 지역에는 불가능했다. 이들 나라가 정치 공동체를 갖고 있고 그 땅을 지배하고 잘 관리하고 있다는 것은 유럽인들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530년대에 정복의 정당성 문제가 다시 대학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가장 유명하고 강력한 논리를 제공한 사람이 살라만카 대학의 신학부 교수인 프란시스코 드 비토리아(Francisco de Vitoria)이다.
 
  정복의 정당성과 신법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비토리아 (Francisco de Vitoria, 1483~1546)

  비토리아는 도미니쿠스파 신부로서 1511-23년 사이에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인물이다. 학문적으로 매우 유능한 인물로 파리 대학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편집하는 일에 참여했고 귀국해서도 제자들에게 주로 신학대전을 교과서로 하여 가르쳤다. 말하자면 전형적인 스콜라 철학자로서 16세기 스페인의 유명한 살라만카 학파의 창시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파리 대학의 강의 모습.

  스콜라철학자들은 재산권이란 그것이 사회를 구성하건 아니건 모든 사람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재산의 권리가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주어진다고 하는 부르고스 회의의 결론은 비토리아에게는 불충분해 보였다. 아메리카의 정복은 원주민들이 이 자연권을 그 자신들의 행위에 의해 상실했다는 것을 증명해야 정당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살라만카 대학은 16세기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적 중심지의 하나였다.

  따라서 그는 스페인인들이 아메리카의 토지를 원주민들로부터 빼앗는 근거를 파고 들어갔다. 그런데 이 야만인들은 인간적인 법(유럽적인 법)이나 그 지배자 밑에 있지 않았다. 따라서 유럽의 실정법에 의해 판단할 수는 없었고 신법(神法)에 의해 판단되어야 했다.
 
  그들은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많은 죄를 짓고 있고 이단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주권이나 재산권을 부인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기독교적 사회만이 아니라 자연상태에 사는 사람들도 이에 대한 자연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또 이들이 이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복되어도 좋다는 생각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들도 교육을 잘 받지 못해서 그렇지 그 나름으로 이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시의 건설이나 결혼, 관리(官吏), 통치자, 법, 수공업, 상업 등 '이성의 사용'을 필요로 하는 행위들을 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비토리아에게 문제가 된 것은 토착민들이 기독교 선교를 거부할 때 그것이 정복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는 이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어떤 유럽의 군주나 교황도 지구 전체에 대한 세속적인 지배권을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원주민들이 그들이 싫어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해서 공격을 받을 수는 없었다.
 
  또 그들이 온갖 종류의 성적인 일탈이나 인육을 먹는 카니발리즘을 통해 중세 자연법을 위반했다 해서 그들을 강제할 근거도 없었다. 따라서 비토리아는 유감스럽지만 스페인인은 그들이 아메리카에서 하는 일에 대한 도덕적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신법의 입장에서 볼 때 스페인인들은 식민지 정복의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만민법과 교통의 자유
 
  이렇게 신법으로는 아메리카 정복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었으므로 비토리아는 다른 방법을 취했다. 로마 시대의 만민법(ius gentium)을 끌어 들인 것이다. 만민법은 로마 시대에 그 영토 안에 있는 수많은 종족들 사이의 관계를 규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그는 모든 국가 사이에는 만민법이 작용한다고 믿은 것이다. 그는 만민법을 자연법이거나 또는 자연법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만민법의 개념을 바탕으로 신화와 허구를 포함해 고대의 많은 글들을 인용하며 '사회와 자연적 교통의 권리'라는 원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것이 유럽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을 포괄할 수 있는 기독교보다 더 보편적인 원리라고 주장했다.
 
  이에 의하면 바다, 해안, 항구는 시민으로서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공동으로 속하는 것으로 사유 재산에서는 벗어나 있다. 따라서 그는 어떤 해안이 누구에게 속하든 상관없이 거기에 들어가는 것은 법의 객관적 권리라고 주장했다. 그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의 전설적 시조인 아에네아스가 자신의 정박을 거부한 라티움 왕을 야만인이라고 부른 이유라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고사(故事)로부터 선례를 만들어 가며 여행과 방문, 정착, 교역, 광산 채굴의 보편적인 권리를 끌어냈다. 그리고 이런 권리가 정중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부인될 때는 전쟁을 할 수도 있었다. 어떤 사람의 권리를 지키는 것은 전쟁의 정당한 사유가 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교역을 막아서는 안 되었다. 그것이 유무상통을 통해 서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원주민들이 내지 여행을 막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금한다면(그들이 그것을 믿건 말건) 스페인인들은 그들을 정복할 권리를 갖는다. 또 인간을 희생시키는 제사나 카니발리즘을 강제로 막는 것도 합법적이다. 또 원주민들의 전쟁에도 요청을 받을 경우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인디언의 낮은 지성을 고려하면 폭력은 최소화해야 했다.
 
  이렇게 비토리아는 기독교가 정당화할 수 없는 정복행위를 자연법이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로마법에 근원을 갖고, 선례를 신화에서 찾고, 비토리아에 의해 주의 깊게 제한된 상황에서이기는 하나 후대에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보편적인 원리가 원주민들에 대한 정복과 착취를 정당화한 것이다.
 
  1539년부터 본격화된 이 논리는 곧 지배적인 이론으로 받아들여지며 이후 스페인 식민주의의 중요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는 다른 식민국가들에게도 유용한 이론이었다. 네덜란드나 잉글랜드를 포함하여 많은 나라 사람들이 이 이론을 열렬히 환영한 이유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연적 사회성과 동료애라는 가정 위에 선 이 원리가 아메리카에 적용된 상황은 참 역설적이다. 그 명목 하에 아스텍 여인들이 개의 먹이로 던져졌고 아메리카의 전체 문화가 파괴되었던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도미니쿠스파 선교사인 라스 카사스(Las Casas)는 아메리카에서 벌어지는 스페인 식민자들의 악행을 고발한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이다. 이 그림은 그의 책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1667) 가운데 한 페이지이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8-01-03 오전 12:43:55


<20> 16-18세기 유럽경제의 발전 ④ 월러스틴 세계체제론과 유럽중심주의

 

5. 세계체제론의 확대
 
  무엇이 자본주의인가
 
  세계체제론에 대한 비판은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세계체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월러스틴의 이론 체계가 전체적으로 비판을 받으며 그것이 시간, 공간적으로 크게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의 세계체제론은 이미 월러스틴이 만들어 놓은 틀을 훨씬 넘어 서고 있다. 세계체제론이 더 이상 월러스틴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월러스틴은 16세기 이전에는 오직 세계-제국만 있었고 세계-체제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세계 경제가 1500년경에 날카로운 변화를 보이며 그 이전 시기와 구분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전 시대와 후의 시대를 나누는 기준이다. 월러스틴은 두 개의 기준을 이야기한다. 하나는 교환을 위한 생산이 존재했고 그것을 통해 자본축적이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역간의 노동 분업과 경쟁적인 축적이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들을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는 역할을 할 수 있었느냐의 여부이다.
 
  월러스틴은 무역에 의해서만은, 즉 교환을 위한 생산만으로는, 이런 것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생산관계의 변화가 있어야, 즉 임금노동이 만들어져야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맑스주의자로서 당연한 태도이다. 그러므로 자본축적에서도 경제원리보다는 정치원리가 지배적이었던 근대 이전에 세계-체제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무역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의 스승이라고 할 브로델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유럽에서의 자본주의 흥기를 16세기가 아니라 11세기 이후의 상업화 과정과 경제 팽창에서 찾고 있다. 중세 도시들도 이익을 내기 위해 노력했고 자본주의는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지 16세기에 와서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고대의 이집트에서 전근대의 일본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진정한 자본가, 도매상, 무역 대금업자, 그리고 그들을 돕는 수많은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도 근대 서양의 자본주의적 상인들과 얼마든지 비교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기원전 2세기의 상거래모습을 보여주는 이집트 벽화.

  프랭크도 이와 비슷하게 상당한 규모로 이루어지는 정규적인 무역이 국제적인 노동 분업을 통해 세계-경제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무역과 생산이 분리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역망과 노동 분업이 얼마나 광범하게 퍼져 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18세기 말 이후 산업화로 인해 자본축적이 양적인 면에서 엄청나게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질적인 문제는 아니다. 이에 대해 월러스틴 자신도 그 변화가 그렇게 극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다.
 
  사실 지속적인 재투자와 그에 따른 자본축적은 모든 상업이나 수공업에서 자연스런 일이다. 그것은 최소한 수천 년의 역사를 갖고 있고 아시아 사회라고 다를 바 없다. 따라서 그것을 16세기 이후의 유럽으로 한정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최근의 세계체제론자들은 '근대 역사가들이 자본주의의 기원과 뿌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은 연금술사의 노력과 마찬가지'라고 혹평하고 있다. 찾을 수 없는 것을 찾으려는 무익한 일이라는 것이다. 프랭크도 이에 대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는 괴물과, 그것이 서유럽에 기원을 갖고 있다는 주장은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점잖게 충고하고 있다.
 
  세계체제론의 확대
 
  이렇게 유럽중심적 세계-체제가 거부되며 체르닉(E.Chernykh) 같은 사람은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의존하여 세계체제를 청동기 시대까지 소급시키고 있다. 이미 5천년 전에 광범하고 지속적인 국제무역과 주민들의 이주, 외적의 침입, 문화와 기술의 확산 등에 의해 사람들 사이에 광범한 접촉이 이루어졌고 금속, 목재, 곡물, 가축, 기타 원자재, 식료품, 직물, 도기 같은 부피가 큰 생필품들의 대량 무역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반도, 레반트, 아나톨리아 반도, 이란, 이라크, 인더스 계곡, 트랜스 코카시아, 중앙아시아의 일부를 하나의 세계체제에 포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아랍상인들이 주로 이용한 도우(Dhow)라는 배. 작지만 조종하기가 매우 편리한 배로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연결했다.

  이들은 근대에서와 같이 고대에도 무역이 생산의 성격에 영향을 미쳤고, 노동의 지역간 분업과 잉여의 정규적인 이전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고대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또 중세 후기의 세계체제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유럽 헤게모니 이전에>라는 책을 쓴 자넷 아부-루고드(J.Abu-Lughod)는 1250년이 세계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이라고 생각한다. 1250-1350년 사이에 중국에서 프랑스에 이르는 아프리카-유라시아의 핵심지역이 하나의 광대한 교역망으로 연결된 세계체제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몽골제국이 아시아와 유럽을 직접 잇는 교역망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세계체제에는 아시아와 이슬람권, 유럽의 세 개의 광역체제가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세계체제가 무너진 것은 14세기의 흑사병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아부-루고드의 <유럽 헤게모니 이전에>의 번역본 표지.

  또 질스(B.Gills)나 프랭크는 아프로-유라시아의 핵심지역에서 지난 5천년 동안 단일한 세계체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다고 주장한다. 세계체제가 만들어진 것은 월러스틴이 주장하듯 5백년이 아니라 5천년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그 중심에 있는 것은 장거리 무역이라는 것이다.
 
  이를 경기 순환 사이클로 푸는 사람들도 있다. 세계경제가 이렇게 상호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 세계적인 경기순환의 연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유라시아의 여러 지점에서 경기의 호황과 쇠퇴가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모델스키(G.Modelski)와 톰슨(W.Thomson)은 A.D. 930년 이후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영향을 미친 콘트라티에프 경기순환(50년을 주기로 하는 경기순환)을 19개 발견했다. 예를 들면 1760년대 초부터 1780년대까지 나타난 불경기는 콘트라티에프 경기순환의 하강 국면으로서 전 세계에 걸쳐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도, 러시아, 서유럽, 아메리카 등지에 동시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아메리카와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경기순환이 전지구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세계경제가 하나로 묶여 있는 반증이라는 것이다. 그럴듯한 이야기이다.
 
  이렇게 새로운 세계체제론은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크게 확대되고 있다. 16세기 이후의 유럽에만 한정되었던 시각을 5천년에 걸쳐 아프리카를 포함하는 전 유라시아 대륙으로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주장들은 아직은 가설적인 단계에 있으므로 설득력이 크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매우 편파적인 유럽중심주의적인 체계에 균형을 잡으려는 시도로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월러스틴의 시각은 그야말로 좁은 유럽 지역에만 제한된 시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연구를 기대해 볼만하다고 생각한다.
 
  6. 월러스틴 세계체제론의 유럽중심주의
 
  지금까지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과 그 문제점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새로운 연구를 통해 그것이 더 이상 그대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많은 한계들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시아 경제에 대한 새로운 연구, 특히 중국경제에 대한 연구 성과들에 대해서 논쟁이 지속되고는 있으나 여하튼 새로운 연구들이 근대 세계경제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열어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 그것은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요구하고 있다. 서양인들이 자신들의 유럽중심적 세계사를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생각하는 '자본주의'라는 근대성의 기원을 유럽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그것을 유럽 안에만 한정된 발전과 차단시킴으로써 근대성의 의미 자체에 의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월러스틴이 세계체제론을 구성하기 위해 많은 정열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사의 객관적 이해에 실패한 것은 이러한 유럽중심주의적 태도 때문이다. 서양인들이 자본주의를 본격적으로 발전시키며 전 세계를 하나로 포섭하기 이전에도 이미 전 세계의 주요 지역들이 하나의 경제체제의 본질적인 부분들로 묶여 있었음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브로델의 한계를 되풀이한 데 불과하다. 사실 월러스틴의 근대 경제에 대한 역사적 설명의 많은 부분은 브로델의 것을 빌리거나 변형, 발전시킨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월러스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브로델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 먼저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은 월러스틴이나 브로델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다. 블로트가 말했듯이 '유럽식민자는 세계를 식민화했을 뿐 아니라 역사도 비슷하게 식민화'함으로써 아직까지도 우리의 역사인식에 매우 큰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바른 세계사의 인식을 위해 어떤 인식의 틀을 가져야 할 것인가는 자명하다고 하겠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8-01-02 오전 2:18:23


<19> 16-18세기 유럽경제의 발전 ③  근대 초 아시아경제의 재평가


4. 근대 초 아시아 경제의 재평가
 
  아시아 경제에 대한 전통적 견해와 문제점
 
  월러스틴은 아시아로 간 귀금속은 대체로 가치를 저장하는 수단으로 금고 속에 보관되거나 사치품으로 사용되었으며 무역 수지는 언제나 아시아에 불리했다고 주장한다. 아시아의 경제가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시아 경제는 유럽 세계-경제의 바깥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사실 해묵은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19세기부터 아시아 경제를 보통 '강제'에 의해 움직이는 통제경제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경제 논리가 아니라 통치자의 정치적 뜻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에 바치는 세금까지도 '공납 모드'라는 묘한 이름으로 부른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에 따르면 아시아의 전근대국가들에도 사기업가가 이끄는 상당한 규모의 활력 있는 상업부문이나 금융업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그 규모도 유럽의 기업들보다 훨씬 더 컸다. 따라서 같은 은이 유럽에서는 투자로 이어져 자본주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고 아시아에서는 금고 속에 쳐박히거나 귀족들의 사치로 낭비되었다는 주장은 별로 근거가 없어 보인다.
 
  위에서 말했지만 1500-1800년 사이에 유럽에서 아시아로 유입된 금, 은은 엄청난 양이다. 그 가운데 중국의 경우만을 보자. 중국이 이 사이에 무역을 통해 얻은 은은 유럽과 서아시아, 인도로부터 들어온 양에다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8천-9천 톤, 멕시코와의 직접 교역에 의한 1천 톤을 합쳐 약 6만8천 톤에 달한다. 유럽이 아메리카에서 얻은 은의 절반 이상에 해당한다.
 
  그러면 왜 이 엄청난 양의 귀금속이 300년 동안이나 계속 아시아로 흘러 들어갔을까. 이것은 아시아에서 은의 가치가 유럽보다 높기도 했으나 주로 무역흑자의 결과이다. 번영하는 아시아에 대해 유럽인들이 갖다 팔 물건이 별로 없었으므로 거의 유일한 수출품이 은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1660-1720년 사이에 아시아에 판 상품의 87%가 은이었고 나머지만이 유럽산 상품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영국의 동인도회사도 아시아로 수출하는 상품의 10%를 영국제품으로 채우도록 규정했었다. 그러나 그 적은 양도 잘 지킬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은이 아시아 상품의 수입을 위한 결제 수단으로 결정적인 비중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17세기 초, 동방물산을 싣고 암스테르담항구로 들어오는 동인도회사 무역선.
 

  중국이 세계경제의 중심이었나
 
  일부 서양 역사가들은 중국경제가 유럽에서와 같이 발전하지 못한 것은 생태계에 대한 인구 압력이 컸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인구의 증가로 목재나 연료 등 자연자원이 부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개간할 땅도 부족하고 지력도 소모되었으므로 중국인들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단위 경작에 더 많은 노동력을 쏟아 부음으로써 생산량을 늘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에도 한계가 있으므로 노동력을 계속 더 늘려도 생산량의 증가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으며 결국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그들은 '안으로 말려들어간다'는 의미의 인벌루션(involuton)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설명한다.
 
  그래서 중국 경제는 겉으로 보기에는 약간 성장하는 것 같아도 내실이 없었다. 즉 '발전 없는 성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중국경제는 어느 시점에 가면 정체되고 결과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중국경제는 산업화의 문턱에서 좌절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근대에 들어와 중국 경제와 유럽경제 사이에 결정적 차이가 생겨난 이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루어지고 있는 아시아 경제에 대한 재평가는 이런 과거의 주장을 불식시키고 있다. 특히 캘리포니아 학파로 불리는 미국의 연구자들 가운데에는 <변화된 중국>을 쓴 중국계 학자인 웡(R.Bin Wong), <거대한 분기점>을 쓴 포머란츠(K.Pomeranz), <리오리엔트>를 쓴 프랭크(A.G.Frank) 등 많은 사람들이 포함된다. 이 가운데 특히 웡이나 포머란츠 같은 사람들은 기존의 일본이나 중국 연구자들의 연구와 원사료를 통해 중국경제를 재평가하고 있고 그 점에서 강한 설득력을 보여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포머런츠의 거대한 분기점.

  이들에 의하면 18세기의 중국은 엄청나게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생태학적 압력은 유럽의 선진 지역보다 덜 받고 있었다. 삼림의 황폐화나 연료의 고갈, 건축재의 부족이라는 점에서 중국이 유럽보다 심각하지 않았다. 또 유럽인들이 인구를 조절한 데 비해 중국인은 그렇지 못했다는 전통적인 주장은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중국인도 산아제한을 통해 과도한 인구 증가를 막았다는 것이다.
 
  또 18세기 중국에서 경제가 발전한 양자강 하류 지역의 생활수준이나 소비수준은 지금까지 서양학자들이 주장해온 것과는 다르다. 많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칼로리 섭취, 설탕, 직물, 가구 등의 소비에서 잉글랜드 남부와 같은 유럽의 발전된 지역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1800년경까지의 중국 양자강 하류 지역, 일본과 인도의 선진 지역을 영국과 비교해 보면 인구, 임금, 기술, 법적 제도, 신용 등 모든 면에서 유럽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19세기에 와서 유럽이 산업화를 통해 큰 차이를 만들어냈지만 그것은 똑 같이 생태학적 위기에 직면한 유럽이 석탄 같은 새로운 에너지원을 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식민착취를 통해 아메리카 등 해외의 막대한 자원을 독점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19세기에 나타난 차이는 중국경제의 쇠퇴 때문이 아니라 유럽 경제성장의 가속화 때문이고 그것은 특히 영국에서 철과 석탄자원을 결합하고 아메리카의 자원을 이용함으로써 산업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적으로 우연의 결과라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영국 썬더랜드(Sunderland) 근처의 탄광. 19세기 초의 모습.

  실제로 18세기 이전의 상황을 보면, 1500-1750년 사이에 중국의 인구는 1억2천5백만 명에서 2억5천만 명으로 약 100% 정도 증가한 것으로 추산된다. 같은 시기 잉글랜드 인구가 230만 명에서 370만명으로 증가한 것보다 증가율이 더 높다. 이는 대량의 은이 들어와 경제가 크게 활성화되며 경작지가 증가하고 2모작의 도입으로 식량증산이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중국경제는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그 뒤를 잇는 정치적 혼란 때문에 17세기에 잠시 침체했으나 17세기 말에 다시 회복되었다. 양자강 유역에서는 면직물, 견직물 산업이 크게 성장했고 그 밖에 자기, 담배, 염료인 인디고, 종이 등의 산업도 발전했다. 특히 광동성 등 남부지역의 산업은 해외무역의 증가로 크게 자극을 받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근대 초에 유럽으로 대량으로 수출된 청화백자.

  이에 따라 농업이 점차 상업화되고 도시화도 가속화되었다. 그리하여 프랭크 같은 사람은 당시에 세계경제가 여러 중심을 가지고 있었을 수는 있으나 어느 하나가 가장 중요했다면 그것은 유럽이 아니라 중국경제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유럽이 아니라 중국이 당시 세계경제의 '중심'이었다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17세기 중국 황하의 풍경.

  아시아 경제에 편승한 유럽
 
  일본경제도 16-17세기에 막대한 은의 생산과 수출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국제무역이 크게 증대하여 말라카까지 진출했고 중국과는 직접 무역이 불가능했으므로 필리핀의 마닐라와 베트남의 호이안을 거점으로 중개무역을 했다. 국내산업이 급격히 발전하며 1658년에는 중국으로부터 자기 수입을 중단했을 뿐 아니라 일본산의 유명한 이마리 자기를 유럽에까지 수출할 정도가 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일본의 무역확대에 많은 기여를 한 포르투갈 상인들.

  경제발전으로 인구도 급증하여 1500년의 1,600만에서 1750년의 3,200만으로 증가했다. 경제가 급속히 상업화하고 도시화하며 18세기의 도시 인구비율은 중국이나 유럽보다 높다. 이것은 결코 정체되고 폐쇄되어 있는 사회라고는 할 수 없다.
 
  인도도 마찬가지이다. 인도는 무굴 제국 성립 이전에도 세계 직물산업을 지배했었는데 제국의 성립으로 인도가 하나로 통합되며 도시화와 상업화가 크게 진척되었다. 인도의 전체 인구는 1500년의 약 5,400만-7,900만에서 1750년에는 약 1억 3천만 명에서 2억 정도로 크게 증가한 것으로 추산된다. 아그라, 델리, 라호르 같은 도시는 17세기에 인구 50만의 대도시로 번성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인도의 중요한 무역항 가운데 하나인 캘리컷(Calicut)

  17세기는 인도 해양무역의 황금기로서 인도는 유럽에 대해 큰 무역 흑자를 냈고 서아시아에 대해서도 약간의 흑자를 냈다. 이는 주로 보다 효율적인 생산으로 가격 경쟁력을 가진 직물과 특산품인 후추 등의 향신료 때문이다.
  그래서 프랭크는 1750년 세계전체의 총생산량은 1,480억 달러인데 그 가운데 세계인구의 2/3인 아시아 인구가 4/5를 생산했고 세계인구의 1/5인 유럽인이 아프리카, 아메리카인과 함께 나머지 1/5을 생산했다고 추산하고 있을 정도이다.
 
  또 16-18세기 동안 유럽은 아시아에 대해 300년간 무역역조를 냈는데 이렇게 막대한 무역 역조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산업경쟁력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따라서 아메리카에서 막대한 양의 은이 유입되지 않았다면 유럽인들은 아시아로부터 아무 것도 수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메리카의 은이야말로 유럽 경제를 아시아 경제에 연결시키는 중요한 끈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프랭크는 근대 초 유럽에 가장 영향을 준 것은 아메리카의 귀금속이 공급된 것으로 이것 때문에 유럽인들은 이미 잘 확립된 유라시아 경제에 '올라 탈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유럽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세계경제체제나 자본주의를 직접 창조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월러스틴이 주장하는 유럽 세계-경제가 탄생하기 오래 전에, 그리고 그것이 나타난 한참 후에도, 실제의 세계경제는 광범한 노동 분업과 정교한 무역체계를 갖고 있는 아시아적인 것이었으며, 그 한 가운데 중국이 있었다는 것이다. 프랭크가 중국중심적인 경향을 강하게 보이는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아시아의 이런 상황과 당시 아시아에 대한 유럽의 의존을 고려하면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이 갖는 한계는 분명하다고 하겠다.
 
  당시의 아시아 경제 상황에 대해서는 18세기 사람으로 <국부론>을 쓴 영국의 뛰어난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의 관찰이 적절해 보인다. '중국과 이집트, 인도는 세계의 어떤 나라들보다 부유하다. 중국은 유럽의 어느 곳보다도 훨씬 부유한 나라'라는 것이다.
 
  사실 18세기까지, 아시아 경제에 대한 유럽인들의 평가는 매우 높았다. 그것이 달라지는 것은 유럽인들이 산업혁명에 성공한 이후이다. 그러니까 19세기에 와서 아시아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스미스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여 보자.
 
  '아메리카 발견 후에 유럽의 대부분이 잘 살게 되었다. 이는 잉글랜드, 홀랜드, 프랑스 , 독일뿐이 아니다. 스웨덴, 덴마크, 러시아까지도 농업과 제조업을 발전시켰다. ‥‥아메리카의 발견이 가장 중요하다. 새로운 광대한 시장이 생김으로써 새로운 노동 분업, 기술의 발전이 가능했는데 이는 과거의 좁은 시장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노동생산성이 높아지고 유럽 모든 나라에서 생산량이 증가했다. 이와 함께 유럽인들은 부유해졌다. 동인도는 아메리카 은의 새로운 시장이었다. 금 · 은은 항상, 지금도 그렇지만, 유럽으로부터 인도로 가져갈 매우 이익이 많이 나는 상품이다. 은이야말로 두 극단의 대륙을 하나로 잇는 주된 상품이다. 이것으로 이 먼 지역이 서로 연결되었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7-12-27 오전 10:17:46


<18> 16-18세기 유럽경제의 발전 ② 유럽 자본주의는 어떻게 발전했나


3. 유럽의 자본주의는 어떻게 발전했는가
 
  유럽과 중국의 차이
 
  그러면 유럽에서 자본주의는 어떻게 발전할 수 있었을까? 월러스틴은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했고 중국에서 그것이 불가능했던 이유를 두 지역을 대비시키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3-16세기에 유럽과 중국은 비슷한 인구수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하기가 좋다. 15세기에 인구, 면적, 기술 수준(농업이나 항해술)에서 큰 차이는 없으며 가치 체계의 차이도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
 
  유럽에서는 로마의 세계제국이 해체되어 혼란이 계속되었으나 중국에서는 제국이 그럭저럭 유지되었다. 지방분권적인 봉건제와 중앙집권적인 관료제의 차이 때문이다. 그래서 보다 안정되어 있던 중국에서는 천여 년에 걸쳐 유럽에서보다 농민착취가 적었고 유럽보다 더 발전된 경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농업경영면에서 유럽인들은 목축과 밀의 경작으로 나아갔고 중국인들은 노동집약적인 쌀 경작으로 나아갔다. 중국은 땅보다 인력이 더 필요했던 반면 유럽에게는 더 많은 땅이 필요했다. 그것이 유럽인들에게 외부로 팽창하려는 욕구가 더 컸던 이유이다.
 
  중국은 거대한 관료기구를 가지고 있었고, 화폐경제와 기술면에서도 좀 더 앞서 있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경제로 발전하는 데 더 유리했다. 그러나 거대한 제국을 유지해야 하는 부담이 매우 커서 그것이 발전을 막았다. 즉 정치적 요소가 자본주의의 발전에는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1450년에 유럽에는 자본주의적 세계경제를 위한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중국은 물론 다른 어느 곳에서도 그런 가능성은 없었다.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한 반면 중국이 정체상태에 빠진 것은 이 이유 때문이다.
 
  위에서 복잡한 이야기를 피하느라고 빼 놓았지만 월러스틴은 세계-체제를 세계-경제와 세계-제국으로 구분한다. 광역 경제 안에 여러 국가들이 포섭되어 있는 경우가 세계-경제이고 광역 경제를 하나의 정치체가 지배하고 있을 때 그것을 세계-제국이라고 부른다. 세계-경제는 보통 1세기도 연명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많으나 한 국가가 그 전체를 지배할 수 있게 되면 세계-제국으로 바뀌게 된다.
 
  근대 이전에 나타난 모든 세계-체제는 세계-제국의 형태였고 따라서 정치가 경제에 통제와 간섭을 하므로 어느 한계 이상으로 발전할 수 없었다. 로마나 중국이 대표적인 예이다. 반면 근대 초에 만들어진 유럽 세계-경제(이것이 자본주의적 세계-경제 또는 자본주의적 세계-체제이다)는 수백 년을 존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하나의 세계-경제 안에서 여러 국가들이 경쟁했으므로 상대적으로 경제에 대한 정치적 통제가 대제국의 경우보다는 약했고 그래서 자본주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월러스틴이 보는 유럽 자본주의 발전의 요인들
 
  그러면 월러스틴은 16세기에 유럽이 어떻게 자본주의로 향해 나아갔다고 생각할까. 그는 다음 네 가지 요소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첫째, 유럽의 아메리카로의 팽창은 그 자체로서 결정적인 것이 아니었을지 모르나 중요한 사건이었다. 신세계의 금과 은이 유럽으로 하여금 수입 이상의 생활을 하게 했고 저축 이상으로 투자하도록 해 주었다. 생산 확대의 원인이 금, 은의 양이 늘어난 때문인지 인구 증가의 결과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금, 은은 그 자체가 상품이었다. 그리고 무역의 전반적인 팽창은 16세기의 번영을 뒷받침했다.
 
  둘째, 유럽에서 대규모 자본 축적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물가혁명과 임금지체 때문이다. 물가가 오른 만큼 임금이 바로 따라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공업자들이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셋째, 중심부에서는 자영농이 발전했고 주변부에서는 환금작물 재배를 위해 강제노동이 등장하는 농촌 노동양식의 큰 변화가 나타났다. 요먼(yeoman, 자영농) 농장주 없이 자본주의 체제가 등장할 수 있었을지는 의심스럽다.
 
  넷째, 자본주의 체제는 주변부의 환금 작물을 위한 강제노동 없이는 등장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보듯 그는 아메리카 식민지의 착취나 비유럽 지역과의 무역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나 그와 함께 유럽에서의 내재적인 발전도 중시한다. 아메리카로의 팽창이 결정적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귀금속 유입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유럽에서의 생산 확대가 인구증가 때문인지 귀금속 유입 때문인지 잘 알 수 없다고 한 발을 빼고 있다.
 
  유럽에서의 대규모 자본축적도 임금지체에 그 원인을 돌린다. 또 서유럽에서의 자영농의 등장이 없었다면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매우 미묘한 태도이다. 이것은 그가 자본주의를 기본적으로는 유럽 경제의 내재적 발전의 결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16세기에 유럽의 인구가 늘어나고 또 경제도 되살아나고 있었으므로 유럽 내부적인 요인과 외부적 요인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중요했는지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사료 부족으로 단편적인 증거만을 이용해야 하는 것도 제약 요인이다. 그럼에도 내, 외부적인 요인의 관계를 보다 설득력 있게 제시할 필요는 있다. 그의 주장 가운데 문제가 있는 몇 가지를 검토해 보자.
 
  귀금속 유입과 물가혁명
 
  우선 귀금속 유입의 문제이다. 아메리카로부터 스페인으로 금, 은이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1503년부터이다. 1800년경까지 유럽에 들어온 은의 양은 모두 약 10만 톤에 달한다. 어마어마한 숫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16세기 중반에 개발된 페루 포토시 광산의 갱내 모습. 원시적인 채굴방식을 사용해서 많은 인명피해를 냈다.

  그 가운데 약 40% 가량이 계속 적자를 보인 무역 대금의 결제를 위해 아시아로 유출되었는데 그 최종 도착지는 중국이다. 나머지는 유럽에 남았는데 1500년경 유럽의 은 보유량이 약 3만7천톤으로 추정되니 300년 동안에 처음 보유량보다 약 1.6배의 은이 유입된 것이다.
 
  유럽은 중세 시대에 주로 은본위 제도를 택하고 있었는데 은이 부족하여 만성적인 화폐 부족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풍부한 귀금속의 유입이 화폐량을 증가시키고 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었을 것은 분명하다. 아시아 무역이나 발트해 무역의 활성화는 이것과 관련이 깊다.
 
  16세기 유럽에는 물가가 크게 오르는 가격혁명이 나타났다. 지역에 따라 다르나 대략 3-4배 정도 올랐다. 곡물가가 가장 많이 올랐다. 화폐수량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화폐의 증가와 관련시킨다. 귀금속 유입이 화폐를 증가시켰고 이것이 물가를 올렸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만큼 화폐 유통량을 늘려 경제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반면 속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화폐량 증가가 아니라 유럽 경제가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경제 활동의 증가에 따라 화폐의 유통속도가 빨라져서 물가가 올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가혁명을 검토하려면 인구 증가, 국내교역과 국제무역의 증가, 도시화, 공산품 생산증가, 명목임금 상승, 국가 조세 증가라는 변수들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타당한 이야기이나 사실 어떤 요소가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는지 판단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 문제는 아직 논쟁 중에 있고 당장 어떤 결론을 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뒤의 시기는 또 다르다고 하더라도 1525-1585년 사이의 스페인에서는 귀금속 유입량과 물가상승 사이에 분명한 상관관계가 나타난다. 또 16세기 유럽의 경제 활성화 자체에 화폐 증가가 미친 영향도 매우 크다는 사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월러스틴의 유보적인 태도보다는 귀금속 유입의 긍정적 영향을 더 강조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임금지체와 자본의 본원적 축적
 
  월러스틴은 유럽의 대규모 자본 축적이 물가혁명 당시의 임금지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물가는 급격히 오르나 고용계약은 대개 1년 단위로 되어 임금이 오르는 것은 한참 뒤의 일이며 그래서 그 차액을 고용주가 차지하며 자본을 축적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론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면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렇게 돈을 모은 사람들이 대자본가가 되었다는 분명한 증거는 별로 없다. 그보다는 아메리카인의 직접적 착취와 노예무역을 포함한 대서양 무역이 유럽에게 준 이익이 훨씬 더 크다.
 
  노예무역은 16세기에 본격화하여 19세기 전반까지 유지되었다. 그 동안에 약 1,300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아프리카 서부 지역에서 붙잡혀 아메리카로 팔려갔다. 영국이 가장 적극적이어서 어떤 연구자는 17세기 영국 자본형성의 1/3을 노예무역에 의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을 정도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1601-1701년의 대서양 노예무역. 흑인노예들은 대체로 서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팔려나갔다. 노예무역은 19세기 전반까지도 계속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영국의 리버풀 항구. 17세기에 노예무역으로 크게 번성했다.

 
이것은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같은 다른 나라의 경우도 정도는 덜하나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 시기 번영했던 유럽의 대서양 연안 항구 가운데 노예무역과 관련을 맺지 않은 곳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대서양 무역을 대표하는 것이 특히 영국인들이 주도한 삼각 무역이다. 직물이나 무기, 철제품 등 공산품을 싣고 아프리카에 가서 팔고, 그 돈으로 노예를 사서 다시 아메리카에 팔고, 아메리카 플랜테이션 산물을 싣고 유럽으로 되돌아와 파는 것이다. 한 번 항차에 여러 번 거래를 할 수 있었으므로 수입이 짭짤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17세기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조선소 풍경. 17세기는 네덜란드 무역의 황금기이다.

  17세기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은 설탕산업이었다. 이는 아메리카 플랜테이션에서 생산한 원당을 들여와 유럽 각 지역에서 정제하여 설탕을 만들어 파는 산업이다. 시설에 많은 자본이 투입되어야 하나 높은 수익을 올려주는 유럽 최초의 자본주의적 산업으로 18세기 후반에 면직산업이 발전하기까지는 자본축적에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17세기 이후 유럽에 많이 건설된 설탕(정당)공장의 모형. 서인도제도나 브라질에서 수입한 원당을 유럽에서 정제하여 설탕을 생산한다.

 
해적질까지도 중요했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유명한 해적인 드레이크가 세계를 일주하며 약탈행위를 하여 1573년에 영국에 반입한 약탈물들의 가치는 60만 파운드에 해당했다. 당시만 해도 영국의 가장 큰 수입원이 양털을 유럽 대륙으로 수출하는 양모산업이었는데 1600년의 수출액은 100만 파운드에 불과했다. 이렇게 근대 초 유럽 경제에 외부적 요인은 매우 중요했다. 월러스틴이 임금 지체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내재적인 발전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자영농의 성장과 농업자본주의
 
  월러스틴은 유럽의 자본주의 발전과 관련해 주변부 강제노동과 함께 중심부의 요먼 성장을 불가결한 것으로 주장한다. 요먼은 대지주(영주)에게서 땅을 빌려 대규모로 영농을 하는 차지농이나 자기 땅을 늘려 농사를 짓는 자영농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서양 학자들은 근대 유럽경제의 확립에서 요먼의 성장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 왔다. 특히 자본주의의 중심국가가 된 영국의 경제를 말할 때 그렇다.
 
  이들이 자본주의적 경영을 통해 토지를 보다 효율적으로 이용했고, 농업생산성을 지속적으로 향상시켰으며 이에 따른 농산물가의 하락과 실질임금의 증가가 다시 농산물에 대한 대중적인 수요를 확대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에 의한 농업의 발전이 근대 자본주의의 밑바탕을 이루었고 나중에는 산업혁명의 기틀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19세기부터 있어왔지만 특히 각광을 받은 것은 1950년대 이후이고 70년대에 절정에 달했다. 그것은 식민지에서 독립한 제3세계 학자들이 서양 자본주의 발전을 식민지 착취와 연결시켜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내부적 요인과 연관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월러스틴도 사실 이런 주장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16-17세기에 영국농업에 특별하게 발전했다고 할 만한 것은 없다. 관개 기술 등 여러 가지 기술이나 영농업의 개선을 이야기하나 그것은 영국만의 것은 아니고 네덜란드 등 유럽 대륙에서도 일어나고 있던 일이다. 과거에는 18세기의 농업혁명을 이야기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그런 이야기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또 요먼의 일반적인 성장을 이야기하기도 어렵다. 실제로 토지는 15세기 이후에 인클로저를 통해 계속 소수의 대지주나 하층 귀족 계급인 젠트리 층에게 집중되었다. 주로 양모생산을 위해서였다. 1861년의 조사에 의하면 잉글랜드 전체 면적의 4/5가 7000명의 대지주 손에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중세 말부터 영국은 플랑드르지방의 양모를 수출했다. 15-16세기에 인클로저는 양모를 생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많은 농민들이 땅을 잃고 농업노동자로 전락했다.

  이렇게 농업의 성장을 이야기할 수 없게 되자 1980년대 이후의 연구는 17, 18세기 영국 경제발전의 원인을 해외부문에다 돌리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즉 과거에 무역으로 얻은 이익을 과소평가했음을 반성하고 수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비농업노동력의 40-50%가 수출산업에 고용되어 있었고 국내 제조업 증가의 많은 부분이 해외수출의 팽창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비하면 농업생산성 증가에 따른 산업생산품의 수요는 매우 낮은 비율이다.
 
  이렇게 유럽 자본주의의 성장과 관련한 월러스틴의 주장은 아메리카와의 관련을 무시하지는 않으나 상당부분 1970년대까지 유럽중심주의적 학자들이 주장한 내재적 성장론을 수용한 것이다.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설득력이 별로 없다.
 
  그러나 정작 더 큰 문제는 아시아와의 관련에서 나온다. 월러스틴은 아시아의 경제를 형편없는 것으로 취급하고 도외시했으나 이는 서양 학자들이 아시아의 상황을 잘 모르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면 이제 근대 초 아시아 경제에 대해 한번 살펴보자.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출처 - 프레시안 2007-12-18 오전 1:50:31


17> 16-18세기 유럽경제의 발전 ①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


16-18세기 유럽경제의 발전과 세계체제
 
  1. 16-18세기의 유럽경제와 자본주의
 
  유럽 경제발전의 흐름
 
  16세기는 유럽 경제가 오랜 침체를 겪고 나서 다시 활기를 되찾은 시기이다. 1340년대에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유럽사회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남유럽에서 시작되어 이탈리아, 스페인, 잉글랜드, 프랑스, 독일, 스캔디나비아, 러시아로 번져 나가며 유럽 인구의 약 1/3 정도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흑사병이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낳은 것은 당시로서는 병을 치료할 적절한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인들의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도 하나의 이유이다.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식량이 부족해졌고 따라서 병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졌던 것이다.
 
  유럽경제는 중세의 오랜 침체 끝에 11세기부터 되살아난다. 그래서 인구가 증가하고 광범한 개간 사업이 이루어지며 농업도 발전한다. 또 원거리를 잇는 상업이나 수공업도 발달한다.
 
  그래서 13세기까지 중세 후기의 번영을 이루나 14세기에 들어서며 사정이 달라졌다. 1000년경에 약 3000만이었던 유럽 인구가 1340년경에 약 7,400만이 될 정도로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당시의 농업 생산성이라는 것이 밀 한 알을 심으면 겨우 3-4알을 수확할 정도로 낮았으니 급격히 늘어난 인구를 충분히 먹여 살리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페스트가 퍼지자 막대한 피해를 낸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흑사병의 확산

  
사용자 삽입 이미지
▲ 11세기 이전에는 밀 한 알을 심으면 2알 밖에 수확하지 못할 정도로 농업생산력이 낮았다. 11세기 이후에야 3-4알 정도로 늘어났다.

  인구가 줄어들자 많은 농경지가 버려져 다시 숲으로 되돌아갔고 상업이나 수공업도 쇠퇴했으며 도시도 위축되었다. 결과적으로 유럽경제는 거의 파멸적 상태에 빠졌다.
 
  큰 전쟁이나 전염병이 돌아 인구가 많이 줄어든 다음 그것이 다시 원상태로 회복되는 데는 보통 약 200년의 기간이 소요된다. 그러니 16세기에 들어서서야 유럽경제가 겨우 다시 회복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인구가 늘어나며 식량 증산을 위해 다시 숲이나 늪지의 개간이 널리 이루어졌다. 또 수공업이나 상업도 점차 활기를 띠게 되었다.
 
  나라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유럽경제는 대체로 17세기에 잠시 침체기를 겪었다가 18세기에 와서 다시 성장을 계속하게 된다. 특히 18세기 말 이후의 산업혁명을 겪으며 경제발전의 속도가 더 빨라졌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다.
 
  유럽 문명의 산물인 근대 자본주의
 
  서양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서양 근대문명의 본질적인 하나의 구성요소로 생각한다. 자본주의를 유럽문명이 만들어낸 독특한 산물로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기초가 마련된 16세기 이후의 유럽경제 발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맑스나 베버 같은 19세기 대학자들의 전 생애에 걸친 지적 노력은 자본주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토인비(A.Toynbee)나 폴라니(K.Polani), 브로델(F.Braudel) 같은 20세기 서양의 유명한 역사가들의 경우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자본주의가 정신적이건 물질적이건 여러 이유로 오직 근대 유럽에서만 발전할 수 있었고 그것이 전 세계로 확산되며 오늘날 전 지구가 하나의 경제체제 안에 포섭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지구상의 모든 지역이 하나의 경제적 틀(체제)에 묶여 있다는 생각은 19세기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보다 정교한 이론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1970년대 이후이다. 미국학자인 이매뉴얼 월러스틴(I.Wallerstein)이 16세기 이후 세계 경제의 발전을 '세계체제' 라는 개념을 가지고 설명한 데서 비롯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이매뉴얼 월러스틴 (Immanuel Maurice Wallerstein, 1930~ )

  이 개념은 만들어진 지 오래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역사학이나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많은 연구자들이 사용할 정도로 일반화되었다. 월러스틴이 그것을 갖고 오늘날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에서 나타나는 경제적인 지배-예속 관계를 역사 과정 속에서 잘 설명하고 있으며 또 그것이 상당한 설득력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을 통해 16-18세기의 유럽과 비유럽 경제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2.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
 
  세계체제론이란 무엇인가
 
  월러스틴이 유명해진 것은 1974년에 제1권이 나왔고 그 후 80년대까지 모두 3권이 출간된 <근대 세계-체제 (Modern World-System)>라는 책 때문이다. 이 책은 16-18세기 사이 세계 경제의 발전을 다루고 있는데 나오자마자 근대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새로운 틀을 제공했다는 높은 평가와 함께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월러스틴이 쓴 근대 세계-체제 제 2권 (1980)

  그는 원래 아프리카를 연구한 사회학자로 종속이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종속이론이란 50, 60년대에 맑시즘의 영향을 받아 라틴아메리카에서 발전한 이론으로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의 구조적인 지배-예속 관계를 밝히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길을 모색하려 한 이론이다.
 
  그러므로 그가 아프리카를 연구한 것도 아프리카를 통해 20세기 후반에 있어 선진국과 제3세계 사이의 불평등하고 부정의한 관계를 폭로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이 점에서 그는 매우 진보적인 성향을 갖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연구를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세계의 역사로 확대했다. 오늘날 제3세계의 종속이 16세기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450-1640년 시기(그는 이 시기를 '긴 16세기'라고 부른다)에 서유럽은 자본주의의 기초를 처음 확립했고 그러면서 짧은 기간 내에 전 세계의 많은 지역들을 예속시켰다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가 하나의 경제의 틀로 묶인 것을 그는 세계-체제라고 부른다. 물론 그 중심부에 있는 것은 당연히 서유럽이다. 그 주위에 반주변부, 또 그 바깥으로는 주변부가 둘러싸고 있으며 중심부와 반주변부 · 주변부 사이에는 착취와 예속관계가 만들어진다. 오늘날 제 3세계의 빈곤은 이 지역이 바로 수백 년 동안 중심부의 착취를 받아온 주변부이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서유럽은 500년 전부터 지구상의 다른 어느 곳보다 경제적으로 우월한 상태에 있었고 지금도 그런 상태에 있다. 따라서 제3세계가 이런 강고한 예속관계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을 접하는 제3세계 사람들이 신선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무엇인가 답답한 심정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이는 그의 이론이 해방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 편에서 서양의 우월을 역사적인 면에서 고정된 구조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월러스틴의 이론은 상당한 정도로 유럽중심주의적인 시각 위에 서 있는 것으로 근대 세계경제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는 없다. 유럽 경제에 대한 설명도 그렇고 아시아 경제에 대한 평가에도 문제가 많다. 따라서 요즈음 특히 근대 초 아시아 경제가 재평가되며 반박을 받고 있다. 그러면 월러스틴의 이론을 간단히 살펴보자.
 
  세계-체제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가 사용하는 세계-체제라는 용어는 약간 설명이 필요하다. 그것에 세계라는 표현이 들어가기는 하나 전 세계를 모두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한 국가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광역 경제를 의미한다. 즉 일정 지역에서 독립적인 여러 국가들이 무역으로 긴밀하게 연결되는 경제체제를 말한다.
 
  그래서 이 경우 그는 꼭 중간에 하이픈을 넣어 '세계-체제'라고 쓰고 그렇지 않고 전 세계를 포괄하는 체제를 하이픈 없는 '세계체제'로 구분해서 쓴다. 16-18세기는 전 세계가 하나의 경제체제로 묶이기 이전이니 당연히 세계-체제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
 
  그는 '긴 16세기'에 유럽에서 최초로 자본주의적 세계-체제가 발전했다고 주장하는데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15세기 말에 봉건경제의 위기로 어려움에 처한 유럽이 문제의 해결을 외부로의 팽창과 상업팽창에서 찾았고 거기에서 성공했기 때문이다. 즉 아메리카로의 진출, 아시아 무역, 유럽 내부 무역의 증대가 그 결과이다.
  그리하여 지역적인 노동 분업과 국가 사이의 힘의 차이에 의해 부등가 교환(부등가 교환이란 여러 조건에 의해 다른 노동량이 투입되는 상품이 같은 가격으로 교환됨에 따라 나타나는 불평등한 교환을 말한다. 기술이나 자본의 차이, 국가의 힘의 차이가 그것을 가져온다. 바나나 한 트럭분과 대형 디지털 TV 한 대가 같은 가격에 팔릴 때 바나나 생산에 훨씬 많은 인간의 노동력이 들어 갈 것은 뻔하다. 이 경우 기술과 자본의 차이에 따라 노동력의 부등가교환이 나타나고 그에 따라 부가가치가 낮은 상품을 생산하는 지역이 착취를 당하게 된다. 또 힘이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에 대해 보호관세를 물리지 못하게 할 때에도 마찬가지 일이 나타난다)이 이루어지는 체제가 한 세기라는 짧은 동안에 만들어졌다. 그 결과 중심부, 주변부, 반주변부의 삼중적 시스템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오늘날의 중심부, 주변부, 반주변부를 나타내는 지도 (황토색이 중심부, 살구색이 반주변부, 연노랑색이 주변부이다)

  즉 네덜란드와 잉글랜드, 북 프랑스에서는 강력한 국가와 가장 이익이 남는 경제활동과 가장 효과적인 노동방식이 자리 잡았다. 따라서 다른 지역들로부터 계속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거두어들임으로써 우월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 라틴 아메리카, 동유럽, 지중해 주변의 많은 지역으로 구성되는 주변부에서는 노예제나 농노제에 의해 비효율적이지만 싸게 생산되는 곡물, 귀금속, 원자재를 공급함으로써 중심부가 이익이 나는 활동에 특화하고 주변부를 가차 없이 수탈하도록 허용한다.
 
  반주변부는 서, 남유럽의 남은 지역과 중유럽, 영국령 북아메리카로 정치구조나 경제활동, 노동지배 양식에서 그 중간적인 형태이다.
 
  따라서 세 지역에서는 경제활동이나 노동 형태가 다 다르게 나타난다. 중심부에서는 공업과 특화된 농업이 이루어지나 주변부에서는 특용작물의 단일 경작이 나타난다. 이것은 면화나 설탕, 커피, 고무 등 원자재로 중심부에 팔기 위한 작물들이다. 또 여러 광산물들도 이에 포함된다. 또 중심부에서는 숙련공의 임금노동과 자본주의적 차지농(借地農)이 나타나나 주변부에서는 노예제도나 강제노동이 나타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서인도 제도의 플랜테이션에서 커피 생산을 위해 혹사당하는 아프리카 노예들

  이 세 지역이 세계-체제로부터 받는 혜택도 각각 다르다. 주변부나 반주변부로부터 중심부로 이익이 흘러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도와주는 것이 중심부 국가들의 강력한 힘이다. 군사력을 포함한 이 중심부 국가의 권력을 월러스틴은 헤게모니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서유럽을 중심부로 16-18세기에 확립된 자본주의적 세계-체제는 1750년 이후의 산업혁명과 19세기의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며 확대되어 19세기 말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전 세계를 포괄하는 말 그대로의 '세계체제'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는 기본적으로 수요와 공급을 일치시킬 수 없으므로 약 50년을 주기로 팽창과 정체를 되풀이하는 경기변동을 맞게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경제가 재정비되며 더 효율적인 자원 분배를 가능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체제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노동력이 프롤레타리아화하여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는 데까지 착취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자본가들이 더 이상 이윤을 낼 수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는 붕괴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사회주의 세계질서로 이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좀 어렵긴 하나 이것이 그의 이론의 대체적인 틀이다.
   
 
  강철구/이화여대 교수

+ Recent posts